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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보다 못한 인생
전도서 3장 16~25절 “내가 해 아래서 또 보건대 재판하는 곳에 악이 있고 공의를 행하는 곳에도 악이 있도다.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의인과 악인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니 이는 모든 목적과 모든 일이 이룰 때가 있음이라 하였으며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인생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저희를 시험하시리니 저희로 자기가 짐승보다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이 둘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이의 죽음 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 이로다.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그러므로 내 소견에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이는 그의 분복이라 그 신후사를 보게 하려고 저를 도로 데리고 올 자가 누구이랴.”
인생이 무엇인가?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삶이 가지는 의미가 과연 무엇인가? 그냥 넋 놓고 보내기에는 인생이 참으로 짧다는 생각, 아웅다웅하며 보내기에는 아깝다는 생각들을 합니다. 지난 주간에는 더더욱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죽음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도 함께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런 기회에 우리 성도들에게 ‘인생의 의미’ 특별히 ‘죽음의 의미’에 대해 함께 나누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인생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졌을 때, 거기에 가장 잘 대답해주는 성경이 아마 전도서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교회 안에서 ‘전도서’는 잘 읽혀지지 않는 책입니다. 특히 전도서가 가지는 음침하고 우울해 보이는 분위기는 어쩌면 다른 성경들과는 잘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인생이 늘 밝고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기에 전도서가 우리의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는 분위기가 어두울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전도서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오해하듯이 염세적이거나 어둡기만 한 내용을 보여주고 있지도 않습니다. 얼핏 그렇게 보일 수도 있지만, 전도서는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우리의 삶과 죽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 적절하게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전도서 기자는 죽음이라는 문제에 있어서 인간은 짐승과 별다름 없다고 말합니다. 적어도 본문을 그냥 읽어보면 짐승도 죽고 인간도 죽고, 인간이라 해도 짐승과 별다름 없이 죽고 마는 것 아니냐고 이야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설교의 주제를 과연 인생이 짐승보다 못 하다는 것으로 잡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생이 갖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사실 오늘 다루고 싶은 구절은 두 번째 단락인 18-21절입니다. 하지만 어떤 본문만을 따로 떼어서 살펴보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닌데, 그것은 본문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최소한의 단위로 줄여서 오늘 읽은 16-22절까지의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말하자면 오늘 설교의 첫 번째 부분은 서론에 해당되고, 두 번째 부분은 본론, 그리고 세 번째 부분은 결론에 해당한다고 보셔도 될 것 같습니다.
1. 의인과 악인을 심판하시는 하나님(16-17)
전도서 기자는... 일반적으로 전도서의 기록자로 알려진 ‘솔로몬’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전도서 기자’라고 하는 것은 신학적인 부분에 해당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조금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전도서는 솔로몬의 가르침을 기본으로 삼고 있지만 실제로 전도서를 기록한 것은 솔로몬은 아니라는 것이 신학의 공통적인 결론입니다. 사실 ‘전도서’라는 책의 이름도 우리에게는 정확하게 이해되지 않고 있습니다.
‘전도서’란 ‘전도자가 기록한 책’이라는 뜻이라고 풀이할 수 있는데, 여기서 ‘전도자’란 집회로 모였을 때에 회중을 가르치고 설교하는 ‘설교자’를 가리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도서’와 ‘전도’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이 정도만 말씀드리고 다시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전도서 기자는 자신이 이 세상에서의 삶을 여러 가지로 관찰하고 실험한 것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본문 16절에서 전도서 기자가 소개하고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내가 해 아래서 또 보건대 재판하는 곳에 악이 있고 공의를 행하는 곳에도 악이 있도다.” 전도서 기자가 재판하는 곳에 갔습니다.
그런데 재판하는 곳은 공의를 행하는 곳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곳에도 악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말합니다. 재판에 있어서 부정과 불의가 있는 것은 인간 역사의 어느 곳, 어느 시대에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성경은 재판권을 가진 이들을 향해서 매우 강하고 엄중하게 ‘공정할 것’을 요구합니다. 재판장은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대신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바른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다시 이야기가 빗나가는 것 같지만 잠깐 말씀드리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꽤 오래 전부터 ‘사형제도 폐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이 운동은 1961년 5월 영국인 변호사 피터 베넨슨이 옵저버紙에 양심수의 사형과 관련하여 기고한 탄원기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지금은 10년에 평균 4나라 꼴로 사형제도가 폐지되고 있고, 2003년 현재 세계적으로 사형 폐지국은 112국이고 존치국은 83국이라고 합니다. 사형제도가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세 가지 정도인데, 첫째 생명은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그 침해가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 둘째 형사소송법에 있어서의 오판의 가능성, 셋째 사형제도가 범죄에 대한 특별예방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한다는 것 등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사형제도가 폐지를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창세기 9장 6절에 있는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는 원칙 때문입니다.
생명이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그것에 대한 침해가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은 살인자에게만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살해당한 자에게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살인자에 대한 성경의 원칙은 적용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형제도는 물론 ‘예방적’ 차원의 의미도 있지만 더 정확하게는 ‘형벌’로서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예방에 대해서만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주의해서 보아야할 부분은 오판의 가능성에 대한 두 번째 부분뿐인데, 사형제도는 벌금형이나 금고형과는 달리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오판의 여지를 최소한으로 줄여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재판관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재판관도 사람이기에 실수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이 가장 문제가 되고 고민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형을 구형하는 부분에 대한 권세까지도 사람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권세를 받은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엄격하게 책임을 다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것이 본문 17절에서 말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의인과 악인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니 이는 모든 목적과 모든 일이 이룰 때가 있음이라 하였으며.” 심지어 재판정에서까지 행해지는 악을 보면서 전도서 기자는 이렇게 생각했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재판정에서는 공의가 행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최종적인 재판정인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모든 의와 악이 심판을 받을 것이다. 사람들의 삶과 그들에게 주어진 모든 목적과 해야하는 일들이 끝날 때가 올 것이고, 그러면 결국 하나님 앞에서 심판 받게 될 것이다. 재판정에서 악을 행한 재판장들도 결국 하나님 앞에서는 그들이 행한 악에 대해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곧바로 본문의 다음 부분으로 연결됩니다.
2. 인생의 일에 대하여 시험하시는 하나님(18-21)
본문 18절을 먼저 봅니다.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인생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저희를 시험하시리니 저희로 자기가 짐승보다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 전도서 기자의 생각은 계속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살아야 하는 목적과 해야 하는 일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끝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끝날 때가 되면 하나님은 그들의 ‘인생의 일’에 대하여 ‘시험’하실 것입니다. 여기서 ‘시험’이라고 번역된 히브리 단어(rr'B;, 바라르)는 ‘맑게 하다, 조사하다, 고르다’라는 기본적인 의미에서 시작하여 ‘정화시키다, 고르다, 닦다, 선택하다, 제거하다, 깨끗하게 하거나 빛나게 하다, 시험하거나 증명하다’라는 의미로 발전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test’로서의 시험을 의미하기보다는 ‘prove’, 즉 재판 과정을 통해서 입증한다는 뜻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인생이 끝났을 때에 사람들에게 입증해 보이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이 바로 “저희로 자기가 짐승보다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입니다. 오후 모임 시간에도 제가 종종 강조해서 말씀드렸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너무 낮추어서 우리 수준과 비슷하게 보려고 하거나, 우리 자신을 지나치게 높여서 역시 하나님과 비슷한 수준으로 보려고 하는데 그것은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전도서 기자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분명하게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짐승보다 다름이 없다’는 것이 그의 결론입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살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생명과 지식, 능력, 재물, 권력, 인기... 그와 같은 것들 때문에 자신을 대단한 존재로 여깁니다.
그러느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세상에 보내시며 주신 ‘목적’과 ‘일’을 소홀히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다른 짐승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사람을 짐승과 다름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사람을 너무 지나치게 비하하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 우리의 모습을 정확하고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귀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정해주시는 한에서 그런 것이지 객관적으로도 그런 것은 아닙니다. 구약의 몇 곳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시편 22편 6절입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역시 시편 49편 20절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시편 73편 22절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하니 주의 앞에 짐승이오나.” 잠언 30장 2절 “나는 다른 사람에게 비하면 짐승이라 내게는 사람의 총명이 있지 아니하니라.” 이사야 41장 14절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저는 지금 우리가 짐승이고 지렁이이기 때문에 살 가치가 없다고, 다 죽어야 한다고 말씀드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한편으로는 우리가 짐승보다 낫지 않음을 깨닫기 원하십니다. 겸손해지기를 원하십니다.
자신을 낮춰 보는 방식의 겸손이 아니라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바라보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짐승과 같고 지렁이 같은 존재에 불과함을 인정하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와 사랑에 감사할 줄 아는, 그래서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목적과 일에 합당한 삶을 살기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 모든 인간에게 자신이 짐승보다 다름이 없음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공통적인 ‘한계 상황’을 허락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19절입니다.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이 둘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이의 죽음 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모든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짐승에게도 동일하게 임합니다. 인간과 짐승 모두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숨 쉬고 살다가 그리고 호흡이 끊어지면 죽습니다. 죽음이라는 부분에 있어서 사람이라고 해서 짐승보다 뛰어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기에 짐승과 다르다고 자랑하던 모든 것이 다 헛되다는 것입니다.
왜요? 죽음이 우리를 어떻게 만들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20절입니다.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창세기 2장 7절은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라고 기록합니다. 우리는 사람만 흙으로 지으셨다고 생각하지만 창세기 2장 19절은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인간이 범죄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3장 19절에서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시편 104편 29절에서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라고 고백했고 146편 4절에서도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라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사람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동일하게 흙으로 지음받은 짐승도 흙으로 돌아갑니다. 둘 다 숨 쉬며 살다가 하나님께서 그 호흡을 취하시면 흙으로 돌아갑니다. 뭐가 다르냐는 것입니다.
‘아, 그 다음 절을 보면 다르다고 하지 않느냐?’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예! 21절을 보겠습니다.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여기 사람과 짐승 모두 죽으면 그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지만 인간의 영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간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말씀하시고 싶으실 겁니다.
그런데 이 구절은 해석하는 데 문제가 좀 있는 구절입니다. 대부분의 주석들이 우리가 지금 읽고 이해하는 것처럼 그렇게 이 부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을 자세히 보시면 그렇게 해석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발견하실 수 있습니다. 지금 전도서 기자는 ‘죽음’을 앞에 두고 사람은 짐승과 다름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둘 다 숨 쉬며 살다가 동일하게 죽고, 죽으면 그 몸은 흙으로 돌아간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지만’(우리가 이해한대로 본문을 보려면 여기에 꼭 이 단어를 넣어야 합니다! ^^;) 사람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로 내려간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이 부분에서만큼은 사람과 짐승이 다른 것 아닙니까? 그러면 전도서 기자가 스스로 모순된 주장을 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전도서 기자가 21절에서 정말로 말하고 싶어하는 것, 실제로 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제가 다시 한 번 21절을 천천히 읽어드리겠습니다. 눈으로 읽으시고 귀로 들으시면서 무슨 말인지 다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이 구절을 해석하는 열쇠가 되는 것은 “누가 알랴”입니다. “누가 알랴?” 이게 무슨 말입니까? “누가 알고 있느냐?”일까요 “누가 알 수 있느냐?”일까요? 이해를 돕기 위해서 다른 번역본을 읽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한글 킹제임스] 성경입니다.
“사람의 영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영은 땅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누가 알리요?” 이건 개역 성경과 거의 비슷합니다. 다음은 [공동번역] 성경입니다. “사람의 숨은 위로 올라 각 짐승의 숨은 땅 속으로 내려 간다고 누가 장담하랴!” 조금 뉘앙스가 다르지요? 이번에는 [표준새번역] 성경입니다. “사람의 영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영은 아래로 내려간다고 하지만, 누가 그것을 알겠는가?” 마지막으로 [현대인의 성경]입니다.
“사람의 영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영은 땅 속으로 내려간다고 누가 입증할 수 있겠는가?” 대부분의 주석들은 표준새번역 성경이 “사람의 영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영은 아래로 내려간다고 하지만”이라고 말한 것처럼 그렇게 가르칩니다. 하지만 누가 그것을 알겠느냐? 누가 그것을 입증할 수 있겠느냐? 누가 그렇다고 장담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전도서 기자가 살던 당시의 생각이 그랬고, 지금도 대부분이 그렇게 생각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사람만이 아니라 짐승도 흙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앞에서 읽어드린 창세기 2장 7절에서처럼 사람의 경우에는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는 점에서 짐승과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체를 이루는 기본적인 재료는 동일하게 흙이지만, 사람에게만 ‘영혼’이 있고 짐승에게는 ‘영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인생의 혼’과 ‘짐승의 혼’을 둘 다 말하고 있습니다. 짐승에게도 영혼이 있습니까? 아뇨! 짐승에게는 영혼이 없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좋아하던 개나 고양이가 죽으면 천국에서 볼 수 있느냐고 묻지만 사실 우리는 우리가 좋아했던 짐승을 천국에서 볼 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영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전도서 기자는 여기서 사람과 짐승 모두에게 영혼을 가리키는 동일한 단어인 ‘루아흐(j'Wr)’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루아흐는 ‘영혼’을 의미할뿐 아니라 ‘바람, 숨, 마음, 영, 생기, 공기, 기분, 경향’ 등의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짐승이 혼’을 꼭 영혼으로 이해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하지만 둘 다 동일한 단어를 쓰고 있고 또 그 둘이 서로 비교되고 있기 때문에 사람의 경우에만 영혼이라고 보고 짐승의 경우에는 숨이나 생명이라고 보기가 어렵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구절이 하나 있습니다. 같은 전도서 12장 7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흙은 땅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신’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신’은 뭘까요? 원어를 보면 ‘신’이라고 번역된 히브리 단어도 3장 21절과 동일하게‘루아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굳이 차이점을 든다면 3장 21절에서는 둘 다 그냥 ‘루아흐’로만 나오고 여기 12장 7절에서는 정관사인 ‘하’라는 단어가 앞에 붙어서 ‘하루아흐’라고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2장에서는 ‘(영)혼’이라고 했다면 12장에서는 ‘그 (영)혼’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그 영혼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좀 복잡해졌지만 이 정도 재료가 있으니 내용을 정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아 보입니다. 죽음이라는 문제에 있어서 사람은 짐승과 다름이 없습니다. 물론 사람도 짐승도 죽으면 그 육체는 땅의 흙으로 돌아갑니다. 비록 전도서 3장 21절에서 사람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땅 아래로 내려간다고들 하지만 그걸 어떻게 알겠느냐고 비꼬듯이 말하고 있기는 하지만(그래서 3장 21절은 그런 의미로 해석해야 옳습니다),
사실 사람의 영혼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올라갑니다(12장 7절은 그런 사실을 그대로 말한 것입니다). 짐승의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영혼을 주지 않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올라갈 것이 없지요. 그러면 사람의 영혼이 하나님께로 올라간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왜 전도서 기자가 그 사실을 12장에서는 분명하게 말하고 있으면서도... 그러니까 모르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3장에서는 ‘그걸 누가 알겠느냐?’는 식으로 비꼬듯이 말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질문에 답이 들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로 전도서 기자는 비꼬고 있는 겁니다. 어쩌면 이런 말을 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사람은 특별한 존재다. 짐승과는 달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혼을 주셨기 때문에 비록 짐승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피할 수 없고, 죽으면 우리의 육체가 흙으로 돌아가게 되지만, 우리의 영혼만큼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죽음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이 뭐라고 생각하느냐? 죽음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짐승과 다름이 없음을 깨닫기 원하시는 중요한 도구다. 죽음 앞에서, 죽음 이후에 하나님 앞에 올라가서 받게 될 심판을 생각하면서 너에게 주어진 이 세상에서 이루어야 할 목적과 수행해야 할 일들을 성실하고 바르게 행할 것을 재촉하는 또 다른 하나님의 음성이다.
그런데 자신이 짐승과는 다르다는 자만심에 푹 빠져서 정작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서 잘난 체만 하는구나! 사람이 사람답게, 하나님이 주신 목적과 일을 행하면서 살지 않을 바에야 짐승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사람이기에 짐승과는 다르다고 뻐길 것이 무엇이냐? 혼이 올라가느니 내려가느니 하는 소리들은 다 쓸데 없는 소리 아니냐! 그 혼이 하나님께 올라가서 받을 심판을 생각하지 않고서 산다면 그 올라간다는 사실만 알고 있는 것이 뭐 그리 자랑스러운 일이겠느냐!’
3.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을 원하시는 하나님(22)
그래서 전도서 기자는 22절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사실 전도서의 곳곳에 이런 결론이 보석처럼 박혀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소견에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이는 그의 분복이라 그 신후사를 보게 하려고 저를 도로 데리고 올 자가 누구이랴.” 이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목적와 일을 즐거워하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죽음은 우리가 그것을 두려워하든 피하려 하든 결국은 피할 수 없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고, 어떻게 하든 그것을 늦출 수 없다면 그것 때문에 전전긍긍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죽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교훈하고자 하시는 것! 우리는 짐승에 비해 나을 것이 없는 존재라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혼을 주시고, 목적을 주시고, 일을 주셨는데... 죽음을 통과하면 그것에 대하여 심판 받을 것인데... 그것을 인식하지 않고서 엉뚱한 즐거움에 빠져 있거나, 죽지 못해서 살고 어쩔 수 없이 그 목적과 일을 지지부진하며 행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냐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목적과 일을 즐거움으로 감당하는 것이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복입니다.
우리가 죽은 다음의 일은 우리가 관여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죽은 후에 그것이 어떻게 되었는지 보기 위해 다시 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우리에게 주어진 지금이라는 시간, 여기라는 장소에 맞추어져야 하고, 그 시간 그 장소에서 최선을 다하여 사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느냐 하는 문제와 어떻게 죽을 것이냐 하는 문제를 썼습니다. 어떻게 죽으실 겁니까? 죽음 앞에서 어떻게 삶을 사실 겁니까? 정말로 짐승과 다름이 없는 삶을 살다 죽고자 하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십시오! 그것도 즐겁게 사십시오! 주신 목적과 일을 행하며 마지막 심판을 잊지 마시고 즐겁게 성실하게 사십시오!
할렐루야~! 주님께 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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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 시간 그 장소에서 최선 다해 살아라 감사합니다 오 주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이은혜장미님 반갑습니다
고운 발걸음과 고운흔적 남기셔서 감사합니다 두루두루 둘러 보시고 은혜의 시간들로 채우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