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수대와 깨어라! 잡지들이 세뇌, 대중 설득, 세뇌에 대해 언급한 내용과 이에 대응하는 수단에 대해 간략히 생각해 보자. 1956년 6월 15일자 파수대는 다음과 같은 흥미롭고 유효한 요점들을 언급했다(358, 359면):
"스스로 증명하라"[롬12:2 신세계역]는 훈계에 유의하십시오. 성서로부터 자신이 채택한 하나님의 생각들을 스스로 증명한다면 어떤 세뇌의 기법이라 하더라도 여러분의 정신에서 그것을 쓸어버리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믿는 바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으로 충분치 않습니다:그것을 믿는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1954년 5월 9일 뉴욕 타임즈 매거진에서의 한 기사는 공산주의자들의 세뇌 기법에 대해 논의하면서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인간의 신념을 공격하는 전체주의에 대한 면역 접종은 오직 한 가지 형태뿐이다." 그 한 가지 방법이란 자신의 신념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깊은 확신을 가지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숲속의 울부짖는 늑대들의 쉬운 먹이감이 당연히 될 뿐이다."
1978년 8월 22일자 <깨어라!>에는 "당신은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대로 생각을 하는가?"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고, 다음과 같은 선전자들의 방법을 밝히고 있다(3, 4면) 이어서 이 깨어라! 기사의 독자는 정보가 ´현명하고, 옳고 도덕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을 따라간다면 당신에게 중요성과 소속감을 준다"고 해도, 압도당하지 않도록 촉구하고 있다. 그 내용은 열린 토론에 대해 강력하게 찬성하며, "권위의 계략"이 진실성에 대해 모든 것을 시험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을 허용 하지 않는다. 이것은 지혜의 과정이라고 쓰여 있다. 얼마 후, "대중 설득이 당신에게 영향을 미쳤는가?"라는 기사에서 대중적 사고에 휘말리지 않도록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요점을 제공했다:
1. 확고한 신념을 가지라. 상술한 바와 같이, 가장 쉽게 세뇌당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 의해 속히 동요되는 사람이다. 동료가 어떤 견해를 받아들인다고 해서 무조건 따르지 않도록 하라. 당신이 받아들이는 견해가 올바른지를 확인하라. 가장 좋은 방법은 그것을 근본적으로 “진리”인 영감받은 하나님의 말씀과 비교 검토해 보는 것이다.—요한 17:17; 디모데 후 3:16.
2. 이유를 밝혀 내라. 우리는 흔히 무심결에 배후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면서 어떤 태도를 받아들인다. 예를 들어, 당신이 살고 있는 사회에서는 특정 민족이나 인종 집단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 그 이유는? 만일 이유를 납득할 수 없다면, 왜 그러한 견해를 채택하는가?
3. 부적당한 생각을 저항하라. 건조한 ‘스폰지’를 물에 적실 때 흡수력이 대단하다. 여러 번 짜도 물기가 남는다. 정신에 있어서도, 부적당한 일을 보고, 듣고, 경험하는 것을 피하기란 어렵다. 그러한 것 모두가 우리의 정신을 적시게 해야 하는가? 그렇게 한다면 우리의 판단과 행동은 불리한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부적당한 생각을 저항하고 세워 주는 것들을 마음에 간직하는 것이 얼마나 더 좋은가!—에베소 5:3-5.
4. 당신이 옳다고 인정하는 것을 거리낌없이 말하라. 이것은 당신이 무엇을 믿는지를 시험하는 기회를 줄 것이며, 당신의 생활을 더욱 견고히 진리로 보호해 줄 것이다. 만일 철저한 조사를 통해 진리를 확신하게 되었다면, 다른 사람들이 조롱하더라도 당황하지 말라.
5. 진리에 따라 생활하라. ?당신이 옳다고 인정하는 것을 타협하기 위한 핑계를 찾지 않도록 하라. 어떤 것이 옳고 적당하다면 그것은 당신에게 유익한 결과를 가져다 준다는 것을 기억하라. 어떤 것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나 옳은 것을 고수하기 때문에 부당한 제한을 받고 있다는 생각으로 속아 넘어가지 않도록 하라.
나는 이 모든 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증인으로서의 나 자신의 경험으로 볼 때, 대다수의 여호와의 증인들이 인기 없는 신앙에 집착하기 때문에 외부 사람들로부터 받을지도 모르는 불유쾌한 감정이나 경멸을 기꺼이 감수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거의 의심하지 않는다. 나는 일반적으로, 그들은 겉으로 보이는 사람들에 대한 이러한 부적응자 역할에 성실하며, 그들은 인기가 없더라도 이것이 옳은 일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이라고 자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나 자신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면, 이러한 의문점이 남게 된다: 만약 사람들이 그들의 특정 종교 공동체 밖에서 정보와 영향력의 원천과 관련하여, 이 기사들에 제시된 이러한 건전하고 견고한 원칙을 고수하면서도 그 경계 내에서는 이 같은 원칙들을 포기할 경우, 그것들이 일관될 수 있는가? 구성원들에게 정보의 외부 출처에 대해 그러한 원칙을 부단히 적용하도록 촉구하고 있지만, 워치타워 조직 자체가 제공하는 정보에 관해서 이 원칙을 적용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낙담시키고, 폄하하고, 심지어 비난하는 것은 어떠한가? ´특별 파이오니아´로 활동해 왔으며 여러 해가 흐른 뒤 이 조직의 특정 가르침에 대해 의문점을 가지기 시작한 브라질의 전 증인은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조직의 간행물에서 옹호되는 외부인을 겨냥한 고귀한 원칙들에 의해 지금까지 영향을 받아 왔으며 지금도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나는 그 원칙들에 전적으로 의존했고 어떤 일이든 조직에 의해 정당하게 고려될 것이라고 믿었다. 결국 그것들이 다른 종류의 선전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대답이 없는 자체의 메아리와 같은 독백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을 마지막에서야 알게 되어 뼈아픈 타격을 받았다.
어떤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한 직업은 허용되고 다른 한 직업은 제명처분 조치가 요구된다. 증인들은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에 따라야 하며, 이것이 모든 증인의 마음 속에 간직해야 할 순종적 태도이다. 관련된 증인은 "그녀(=조직)가 하고 싶은 일이라면 무엇이든 브룩클린의 형제들이 결정한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인용된다. 이는 하나님의 조직에 대한 올바른 태도 중 하나인 충성심, 즉 ´신권적´인 태도로 간주된다. 그러나 이것은 권위주의적인 세뇌를 허용하고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대신하여 생각을 하도록 허락"하는 것에 대한 조직의 훈계와 이전에 인용된 협회의 잡지에 게재된 원칙들과 비교할 때, 정확히 반대된다. 이곳의 장로들이 ´여호와의 조직을 깨끗하게 유지하겠다´고 할 때, 이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그 사람들이 현재의 방침이 무엇이든 계속해서 힘차게 조직을 지원할 것이며, 그 방침에 고착하지 않는 사람(예를 들어, 전에는 "회색 지대"로 분류되었지만 지금은 조직 지침에 의해 "어둠의 지대"로 옮겨진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제명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장로들은 그들이 친히 말하는대로 "혼란"을 느낄 수도 있지만, 그 사람을 제명시키고 비그리스도인이라고 내쫓는 것을 막도록 허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의 주된 관심은 협회 방침을 지키는 것이다. ´조직이 우리에게 하라고 했을 때, 그것이 혹 잘못된 것이라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책임을 돌리지 않을 것이다´라는 입장이다. "상관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는 주장으로 불의에 심각한 죄책감을 면제받는다는 사고방식이 여러 나라의 증인들 가운데 팽배해 왔다. 세상의 법정조차 그런 변명은 기각되어 왔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나 더 심각한 것으로 거부해야 할 일이 아닌가! <양심의 위기>에서도 언급되었듯이, 1981년 9월 15일 내가 통치체에서 사임한 다음 해 워치타워는 제명 상태에 있는 사람에 대해 1974년 이전 입장과 매우 유사한 방침으로 되돌아갔다. 어떤 면에서는 그것은 그때보다 훨씬 더 경직되어 있었다. 일부 장로들과 여행하는 감독자들은 유감스럽게도 조직 방침의 "철저한 시행"이라고 보고서 만족감을 표시했다. 그리고, 11장에서 보았듯이, 오늘날 증인 남녀들은 다른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 그 방침에 의해 엄격하게 지배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양심이 사람들에 의해 무시되고, 그들의 동정심이 조직의 신조에 의해 마음대로 켜지거나 차단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만약 조직이 내일 방침을 바꾸고자 한다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바뀐 방침과 더불어 바뀔 것이다. 이것은 최악의 형태의 주입의 결과인 것이다.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조직이 자신의 관점의 양심을 대신하도록 하게 하는가, 아니면 적어도 그들 스스로 집단적인 "양심"을 중첩시키게 하는가? 장로들 스스로가 조직의 지위가 반드시 올바른 지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자신의 마음과 정신에, 조직의 입장이 반드시 옳다거나 진실로 성경적이라는 것을 온전히 납득하지 못하면서, 무엇이 장로들로 하여금 사람들을 제명시키게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가? 나는 나의 과거 행로에 대해 그러한 질문들을 자문하여 보았다. 비록 사법 위원회의 일원으로서 개인적인 개입이 있었던 모든 증인들의 제명 사례들이 부도덕과 관련되었음은 명백했지만, 증인으로서 나의 대부분의 삶은, 모든 조직의 방침과 가르침을 진보시키기 위해 일관성 있게 노력했다. 나는 나 자신을 보통의 지성인이라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수십년 동안 나는 조직이 발표한 모든 방침을 지원하는데 전적으로 몰두했다. 그리고 나는 사도 바울처럼, 나의 시절에 다른 많은 통치체 성원들이 조직의 전통적인 관점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 것보다 더 큰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리고 그것이 다른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가? 여러 가지 요인이 존재한다.
워치타워 조직의 집필진은 "외부인"에게 개방적인 마음가짐을 가지라고 제시하는 것과 조직 내 사람들에게 주어진 가르침 사이에서 정확히 반대되는명백한 모순을 전혀 보지 못하는 것 같다. 파수대 1984년 5월 1일자 ´독자의 질문´ 31면은 ´여호와의 증인´이 호별방문하여 사람들에게 워치타워 간행물을 제공하면서 집 주인들이 역으로 제공하는 종교문헌의 수용을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밖의 다른 사항들 중에서 특히 다음과 같이 명시되어 있다:
증인들이, 진리나 계몽을 받으려고, 사람들의 집을 방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여러 시간을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를 배우는데 이미 바쳐왔습니다. . . 여호와의 증인들은 다른 사람의 신앙에 대하여 무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사는 지역의 흔한 종교의 교리적 신조에 대한 기본 지식을 꽤 알고 있습니다. . . 그래서 여호와의 증인들이 자신을 속이기 위해 고안된 거짓된 종교문헌을 받아들이고 그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일 뿐만 아니라 가치 있는데 바쳐야 할 시간의 낭비일 것입니다…. 충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표준을 지키고 진실하고 정의로운 것을 우리의 마음에 주입시킴으로써, 우리가 처음으로 성경의 진리를 배운 그 통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충성스럽게 고착할 것입니다.
그들의 종교적 신념에 반하는 견해를 제시하는 문헌을 조사하게 하는 것은, 비증인 독자들에게는 열린 마음으로 강조하면서 증인들에게는 역설적으로 격하시켜버린다. 파수대와 깨어라! 기사들은 닫힌 마음의 태도와 "은둔주의적 태도"를 폄하하지만, 그러한 태도는 여호와의 증인들 자신들 사이에서 보다 더 명백하다. 증인들은 그들이 ´다른 종교와 그들의 신조에 대해 알고 있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증인들이 가지고 있는 정보란 단지 조직이 그들에게 제공하기에 적합하다고 본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미리 포장되어 있고, 세심하게 편집된 정보로, 일반적으로 그들을 위해 이미 결정된 결론들을 다루고 있다.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서 그 자체를 읽고 이해함에 있어서, 워치타워 출판물들이 전달하는 극단적인 해석으로 세상의 일부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뜻으로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배타적 견해가 성서에 발견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리새파 사람들이 취한 관점이지 예수 그리스도나 그의 사도들이 가르친 관점이 아니다. 이미 살펴 본 바와 같이 바로 그 이름인 "바리새"는 "분리된" 또는 "배타적인"을 의미한다. 그들의 극단적인 견해에서처럼, 이 워치타워 종교 집단은 그들의 특정한 전통적 가르침과 거룩함의 기준을 지키지 않는 모든 사람들과 분리되기를 추구하고 그들과의 교제에서 제외되기를 원했으며 그들 모두를 "부정한" 것으로 간주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러한 극단주의자들과는 매우 다른 본보기를 보여 주었고, 이것이 그들을 격분시켰고,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방식을 비난하게 만들었다. 그분의 말씀을 읽으면서, 산 위에서의 설교뿐만 아니라 모든 가르침에서 예수의 주된 초점은 교리학적 해석의 정교한 집합이 아니라, 성경에 제시된 실질적 목표는 참된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지향하며 그를 위해 추진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의 말은 이 사랑을 나타내는 행동과 행위를 강조하는데, 그의 사도들도 모든 편지에서 같은 것을 촉구하고 있다. 그들이 연합에 대해 차별적일 필요를 다룰 때, 그것은 사소한 차이점이 아니라 본질에 관한 것이지 종파적 사고의 산물인 성경 외적의 방침, 규정, 추리 및 해석 때문이 아님은 분명하다.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가르침의 문제를 제기한다:
그리스도의 과분한 친절로 여러분을 부르신 분에게서 여러분이 그토록 빨리 돌아서서 다른 좋은 소식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니 놀랍습니다. 사실 다른 좋은 소식은 없습니다. 단지 어떤 사람들이 여러분을 혼란스럽게 하고 그리스도에 관한 좋은 소식을 왜곡하려는 것일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든지 하늘에서 온 천사든지, 우리가 여러분에게 전한 것과 다른 좋은 소식을 전한다면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 우리가 전에도 말했지만, 내가 지금 다시 말합니다. 누구든지 여러분이 받은 것과 다른 좋은 소식을 여러분에게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갈라디아 1:6-9, 신세계역)
믿기 힘들 수도 있겠지만, 인용된 본문은 오늘날 협회에 의해 바울이 설교한 1세기의 사도의 메시지가 아니라, 조직의 현재 가르침에 동의하지 않고 조직과의 의견 차이를 표현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적용시키고 있다. 따라서 1986년 4월 1일 "독자로부터의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바울의 바로 이 말을 인용한 후, 파수대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31면):
‘여호와의 증인’과의 연합을 승인받기 위하여는, ‘여호와의 증인’만 받아들이는 독특한 성경적 교리들을 포함하여, 성서에 관한 참된 가르침 전체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기사는 추방 당해야 할 이유가 없는 사람들을 추방하고서 그들이 정당하게 추방당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바울의 말의 뜻을 문맥에서 벗어나 해석하는 것을 의미하며, 실제로는 파수대가 말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좋은 소식이 하나뿐이고 그것은 1세기에 이미 전파된 좋은 소식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지, 20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어떤 종교 간행물이나 잡지에 처음 등장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종의 현대 출판물에 의존하지 않고 성경 자체에서 찾을 수 있는 좋은 소식이지, 그런 출판물이 없으면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좋은 소식이 아니다. 사도의 말에 따르면 전해야 할 메시지는 하나뿐이며, 이미 그 당시 그와 다른 사람들에 의해 전파되었으며 영감 받은 필자에 의해 기록된 것이며, 바울이 "그리스도에 관한 좋은 소식"이라고 부른, 이미 주어진 이 메시지 외에 천사나 인간이 어떤 다른 메시지를 가져올 권한은 없다는 것이다.( 고후 2:12; 4:4; 9:13) 그것은 "영원한 좋은 소식"이며, "거룩한 사람들에게 영원토록 전해진 것"이어서, 그 좋은 소식은 우리 시대에 조정할 필요나, 현대화하거나, 업데이트 할 필요가 없다.(계시록 14:6; 유다 3)
조직은, 세상의 일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성경의 권고를 받아들인다. 따라서 여호와의 증인들은 이 성경의 권고를 믿음으로 연합하지 않는 사람들과는 최소한의 접촉으로 제한시켜야 한다는 의미로 적용시키고 있다ㅡ결과적으로 분석해 볼 때, 그 의미는 조직이 제공하는 현재의 가르침을 포용하지 않는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 그러한 사람들은 "진리 안에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모든 비증인들은, 아무리 그들의 개인적 자질이 훌륭해도, 그들의 수준이 아무리 높더라도, 하나님, 그리스도와 성경에 대한 믿음이 아무리 깊어도, ´세상´의 일부로 본다. 사회적 접촉이 "세상적인 사람들"에게 "증인"이 될 수 있는 전도의 기회를 가질려는 목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사회적 접촉은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외의 사회적 접촉은 다른 어떤 근거로도 허용되지 않는다. 증인은 "세속적인" 이웃 또는 동료 직원이나 사업 친구와 대화할 때, 종교적인 화제로 토론이 있을 수 있지만, 내가 경험으로 알고 있듯이, 그의 생각은 항상"그 사람에게 어떻게 증거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대화의 방향은 오직 일방적이며, 관심은 조직의 가르침을 전달하려는 것 뿐이다. 증인은 상대방으로부터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는지, 아니면 생각과 개념의 순수한 교류를 상호간에 시도해 보려는 것이 아니다. 결국 상대방은 "진리 안에 있지 않다는 생각" 때문에,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 1914년의 의미와 같은 가르침이든 다른 주제이든 간에, 제시된 "증거"에 동의할 마음이 없다는 것을 나타낼 때, 대다수 증인들은 대화가 비생산적이라고 느끼고, 중단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직의 현재 가르침에 부합하지 않는 어떤 발언도 영적인 장벽이 가로막는다. 그러한 가르침들 중 잘못된 것임이 밝혀질 수 있는 증거는 주입된 프로그램으로 반응하게 된다. 즉, 증인은 그 증거에 대해 마음의 문을 재빨리 닫아버린다. 독서할 자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워치타워 협회의 출판물은 사회학, 심리학, 종교학 등 ´세속적´인 각종 출판물에서 자주 인용되지만, 조직만이 안전하게 이런 선별을 할 수 있다는 주장은, 특히 성경 해설서를 비롯한 종교 출판물에 대해 자주 인용된다. 일반 증인이 그러한 정보의 출처를 읽는 것은 위험하다는 생각을 주입시킨다. 단순히 조심해야 한다고 할 뿐만 아니라 불신과 혐오를 부추긴다. 이 사실은 조직이 가르치는 믿음이 그러한 독서의 영향에 저항할 만큼 충분히 강하다고 보지 않는다는 증거임에 분명하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점에 있어서 워치타워 출판물에 제공되는 두 개의 분리된 메시지를 찾아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조직 외부의 메시지를 대상으로 하고, 다른 하나는 조직 내부의 메시지를 대상으로 한다:
호의적이든 아니든, 사전에 또는 정해진 심사 없이 형성된 판단이나 의견, 합리적이거나 정의로움이 아닌 다른 근거에 기초한 정신적 결정, 특히 성급하거나 부정적으로 편향된 의견.
워치타워 조직의 집필진은 "외부인"에게 개방적인 마음가짐을 가지라고 제시하는 것과 조직 내 사람들에게 주어진 가르침 사이에서 정확히 반대되는명백한 모순을 전혀 보지 못하는 것 같다. 파수대 1984년 5월 1일자 ´독자의 질문´ 31면은 ´여호와의 증인´이 호별방문하여 사람들에게 워치타워 간행물을 제공하면서 집 주인들이 역으로 제공하는 종교문헌의 수용을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반 사람들에게는 워치타워 간행물에 대해 열린 마음을 촉구하면서 그가 가진 현재의 종교를 비판하지만, 증인들에게는 그들에게 위험하다고 판단되는 종교적 간행물은 바로 쓰레기통으로 보낼 것을 촉구한다(한 증인 여성이 받은 자료를 쳐다보지도 않고 버리는 장면에 주목) 일반적으로 한 증인이 조직과 더 오랜 기간 동안 연합하였을수록, 그 증인의 사회적 접촉이 조직내에 더 집중되어 있을수록, 친구 관계는 그 조직 내의 사람들에게로 더욱 제한된다. 심지어 비증인 친척이라는 뜻의 "세상적인" 친척들도 종종 다소 냉정하고 먼 관계로 점차 소원해진다. 그러므로 조직 외부의 사람과는 누구와도 제한적이고 "필요한" 접촉만 하는 배타적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은 조직에 의해 제정된 제명처분에 이처럼 엄청난 힘을 부여하는 요인이다. 한 사람의 사회생활 전체가 조직 내에 있다. 여러 해 동안 연합하여 왔다면, 친분을 끊는 것은 사실상 모든 우정에서 단절되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노년기의 사람들에게 이것은 끔찍할 정도로 우울한 전망을 제시할 수 있다.
여호와의 증인들의 경우, 초기 지식수준이 상승한 후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고원과 같은 정체기로 들어간다. 그들이 더 오래 연합할수록 성서 자체에 대한 실제의 가르침에 있어서 개인연구와 명상보다 조직의 가르침이 훨씬 더 뛰어나다는 것을 의무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 결과, 아마도 20년, 30년, 40년 간의 연합한 후라 하더라도, 대부분의 증인들은 첫해나 그후 몇해 동안 얻은 성경 지식보다 성경에 대해 비교적 거의 더 알지 못한다. 그들은 ´어머니´에 비유되는 조직에 크게 의존할 뿐이며, 그들 자신의 사고와 삶의 방향이 없는 불안감을 느끼면서, 어린이와 같은 의존 상태로 머물게 된다. 그들의 영적 성장은 침체된다ㅡ그들 스스로 협회의 "프로그램"을 넘어서 개인적인 노력으로 성경에 대한 더 큰 지식과 이해를 얻지 못한다면ㅡ조직이 그들을 위한 양심의 역할을 대신하게 한 결과, 그들의 영적 힘은 어떤 면에서는 연합의 초기 시절보다 약화된다. 그들은 조직에 충성하기 위해 고난, 심지어 희생도 견뎌낼 수 있고, 따라서 영적인 강인함의 모습을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순수한 양심의 개인적 결정을 내리지 못하며 그 결정의 결과를 받아들일 만한 힘을 확신할 수 없게 된다. 처음에 나도 워치타워 출판물들이 만든 많은 추리에 매력을 느꼈다. 이러한 출판물들은 종종 다른 종교의 사람들에게 그들의 종교의 가르침의 타당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 위해 재점검하고 재평가하도록 고안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출판물들은 반드시 스스로 생각하고 독립적인 사고를 할 필요성을 강조해야 했다. 성서 연구 초기의 사람들은 성경에 따라 먼저 철저히 시험하지 않고서는 가르침을 믿지 말도록 반복적으로 권함을 받는다. 그러나 시험의 대상은 거의 전적으로 연구생 개인의 이전에 가지고 있던 믿음에 제한되며, 이것들 중 오직 특정한 것만이 시험의 대상이 된다. 인간의 영혼에 내재된 불멸성, 문자 그대로의 지옥에 대한 믿음, 육체적 고통 또는 이와 유사한 점들과 같은 가르침은 많은 ´시험´의 초점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논증이 꽤 잘 발달되어 있다. 이 시험을 거친 때문에 그 사람은 다른 특수 가르침을 제시하더라도, 증거를 요구하지 않고 다소의 신뢰로 이것을 받아들이도록 충분히 감명을 받는다. 그러나 그런 주제에 대하여 토론이 일어나는 내용을 성경에서 한 장도 찾아볼 수 없다. 성서시대 사람들이 영혼의 불멸, 즉 악인을 위한 고통의 장소에 대한 믿음이 없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대부분의 인종과 종교는 그러한 것을 믿었다. 그러나 성서 필자들은 이런 두드러지고 근본적인 주제들에 대한 토론이나 반박을 기술하는 곳은 성서 어디에도 없다. 그점과 관련된 성서 본문과 내용은 다른 주제에 대해 논의하면서 일어나는 부수적인 점일 뿐이다. 그렇다면 증인들은 보통 영혼이나 지옥불에 대해 토론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느낄 수도 있는 한편, 예를 들어 바울이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행위가 아니라 믿음에 의한 구원에 관한 강력한 주장을 토론하도록 요청받으면 상당히 헤멘다는 감을 받는다. 증인의 주요 가르침을 지지하는 데 사용되는 특정한 일련의 "골자 성구"를 제외하면, 대다수의 증인들은 사도의 편지 내용을 지적으로 토론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협회의 출판물에 포함된 정보는 매우 긍정적이라 믿으며, 그 타당성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주장을 검증하기 위한 지적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따라서 질문은 허용되지만 질문자는 항상 조직의 출판물에서 제공되는 답변에 대해 모두 수용해야 한다. 개인은 출판물이 알려주는 방식에 의해 "읽혀"지도록 해야 한다. 출판사의 대답이 솔직히 만족스럽지 못하며, 주장이 건전해 보이지 않는다거나, 인간의 추리와 해석이 성경에 덧붙여진 것으로 보인다는 견해를 피력하는 것은, ´고집이 세고´, ´겸손이 부족하며´, ´건방지다´라고 자신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이게 된다. 출판물의 내용을 의심하는 것은 믿음의 결여, 영적 나약함의 증거, 자만심, 배교 쪽으로 기울어진 것으로 간주된다. 출판물에서 필자들도 결국 ´불완전한 사람들´이라는 것과, 조직이 "완전무결하다고 주장한 적이 없다"는 인정을 주기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실제 상황에서는 그것은 꽤 다르게 이루어진다. 그러한 불완전함과 완전무결치 못함은 현재가 아니고 과거에만 적용시키는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조직은 과거의 가르침 중 상당 부분을 변경시켰다는 것을 인식한다면ㅡ이는 그들이 잘못했다는 것이 명백한 것으로서ㅡ그러한 오류를 겸손하게 인정해야 하며 지금 주장하는 것 또한 그와 같은 동일한 불완전함 때문에 잘못될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야 한다. 그럼에도 조직은 반대로 여호와의 증인들은 현재 조직이 가르치고 있는 모든 것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도록 요구한다. 실제로 그들은 "우리가 여러분에게 변경한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그 때가 될 때까지, 여러분은 출판된 모든 것을 절대적인 진리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완벽히 마인드 컨트롤이다. 이 마인드 콘트롤이라는 면에서, 워치타워 조직은 세상의 방식과 전혀 새롭거나 독특한 것으로 구별되어 있지 않다. 조직은 과거와 현재에 공통적인 패턴을 단순히 따르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사고 과정에 굴복시키기 위해 회중 성원들은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에 대한 신성한 지지와 권위에 대한 조직의 주장을 받아들이도록 끊임없이 요구받는다. 하나의 예를 든다면, 파수대 1964년 6월 15일 365면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여호와께서 1세기 그리스도인 회중을 통해 진리를 밝히셨듯이 오늘날 그분은 현재의 그리스도인 회중을 통해 진리를 밝히신다. 이 대리기구를 통해 그분은 더욱 강화되고 비할 데 없는 규모로 예언을 하고 계신다. 이 모든 활동은 우연이 아니다. 여호와께서 이 모든 것을 위하여 일하신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1세기 회중들의 시대에 신성한 영감에 의해, 사도들과 제자들에 대한 신성한 소통과 지시로써, 1900년 전과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같은 영감을 받은 참된 말씀과 기록의 결과로 "그분의 진리를 밝히셨다"고 이해한다. "그래서 그분께서 오늘날 그리스도인 회중들을 통해 진리를 밝히신다"는 말은, 실제적으로 모든 의미에서, 하나님의 영감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그 모든 것´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는데, 하나님의 어떤 종이 감히 하나님을 거역하겠는가? 전 여행하는 감독자인 론 프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협회는 영감을 받았다고 주장하지는 않지만, 마치 영감을 받은 것과 같은 정도의 권위를 가지고 말하고, 사람들에게 질문을 하거나, 그들이 가르치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의심하거나 유보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그들이 영감을 받은 것처럼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질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어떤 것이 바뀌거나 수정되어야 하거나 어떤 예언이 달성되지 못할 때 책임을 회피한다.
출판물에서 "영감받은" 소식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대신, 워치타워 조직이 "밝혀진" 진리를 유일무이하게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언급한다. 이에 대해 프리에는 이렇게 말한다:
영감받았다라는 주장과는 다르게 "밝혀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의미론적인 문제일 뿐ㅡ차이점을 나타내지 않는 구별이다ㅡ변경, 모순, 실망감을 없애기 위해 사용되었을 뿐이다. 그들이 단순히 종교적인 사람들의 집단일 뿐이어서, 성실하지만 특별히 신적 인도를 받지는 않는다는 관점을 받아들인다면, 그들의 경험이 의미를 발생신킨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적인 요소 ㅡ 틀린 연대 계산과 컬트적 요소 등ㅡ을 잘 덮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 여호와께서 이 모든 일의 배후에 있다고, 말이 되지 않는 주장을 하고 있다.
´밝혀진 진리´라는 개념은 출판물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된다. 밝혀진다면 누가 밝혔는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영감을 받았다는 것 외에, 어떤 다른 주장이 될 수 있는가? 그러나 현대의 워치타워 조직의 변화하고 요동치는 가르침의 역사와 비교했을 때 1세기 사도들과 제자들에게 진리가 계시된 것은 엄청난 대조를 이룬다. 또한 같은 방식으로 사도적 능력과 권위가 자체에게 부여된다. 한편, 조직은 "사도적 계승"에 대한 카톨릭의 입장을 거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치타워 조직은 그 성원들에게 카톨릭과 비슷한 입장에 있는 것처럼 봐 달라고 요구한다. 파수대 1982년 6월 1일, 17면에서 "신권 질서에 충성스럽게 순종하라"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오늘날, 이 ‘충성된 종’의 남은 자가 아직도 지상에 생존해 있습니다. 그들의 임무 가운데는 영적 양식을 적시에 받아서 지상에 있는 모든 여호와의 종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포함됩니다. 그들의 입장은 ‘바울’이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에게 주시는 놀라운 진리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을 때의, 그 사도 및 그의 동료 일군들의 입장과 흡사합니다.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느니라.]” (고린도 전 2:9, 10)
위의 성명서에서 이 조직은 사도 바울이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듯이 조직이 현재 발행하는 ´영적 양식´은 하나님께서 그 영을 통해 우리에게 밝히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하여 밝히신 정보를 거절함으로써 어떤 유죄감을 가질 그리스도인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누가 바울과 병행기능을 수행한다고 주장하는 이 조직의 제공하는 정보를 거부함으로써 죄를 짓고 싶어하겠는가? 이런 식의 추리가 가능한데, 구태여 무오성이나 거룩한 영감성을 주장할 어떤 필요가 있겠는가? 조직은 친히 "예레미야 반열", " 에스겔 반열" 또는 "엘리야와 엘리사 반열"로 묘사하면서 예언자의 직분을 부여시키는데 무슨 다른 권위를 필요로 하겠는가? 조직의 1988년 출판물인 <계시록ㅡ 그 웅대한 절정은 다가왔다!>에서는 조직을 주기적으로 "요한 반열"로 언급하면서 사도직의 직분을 스스로 부여시킨다. 그 직분이란 신적 근원으로부터 어떠한임명도 받지 않은 스스로 임명한 직분이다. 같은 호 파수대 23, 24면에서, 마지막으로 인용된 부분은 이러한 방식으로 조직의 위치를 더욱 격상시킨다:
10 현재 그리스도 예수는 진리와 의를 위한 모든 투사들의 즉위하신 인도자이시며 사령관이시므로 300명이 ‘기드온’을 보고 배웠던 것처럼 우리도 일치 연합하여 ‘그분을 보고 배울’ 수 있읍니다. (사사 7:17) 하지만, 그분은 눈에 보이지 않는데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를 ‘볼’ 수 있읍니까? 지상에 있는 그분의 모든 왕국 관심사를 돌보도록 임명된 눈에 보이는 그분의 “종”을 통해 주어지는 그분의 신호를 식별한다는 의미에서 그를 ‘보’고 있읍니다. (마태 24:45-47) 이 영으로 임명받은 통로를 통하여 그분의 인도와 전략이 그분의 “군사” 모두에게 전달됩니다. 이 후자들은 자기 스스로 전진하거나 어느 정도 지연되는 것 같이 보이는 일에 조급해져서는 안됩니다. 일의 시기는 우리의 보이지 않는 사령관이 알려 주십니다. 고려해야 할 중요한 것은 그분의 견해이지 우리 자신의 사견이 아닙니다.
이미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최종 분석은 통치체가 실제 "조직"이며 "채널"이다.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 반열"에 관한 모든 것과 그에 부여되는 권위는 주로 통치체를 구성하는 약 십여 명의 소그룹과 관련이 있다. 그들이 이 모든 지위를 결정하는 중요한 선언과 성원들의 순종을 요구하는 궁극적인 수혜자들이다. 모든 증인들 중에서 너무나 명백한 배타적 지위를 가진 통치체 성원들이 "여호와와의 조직이라는 가족내에서 다른 형제나 자매들이 누리지 않는 특별한 관계임"을 분명히 암시하는 특권과 권능으로, 어떻게 전세계 모든 집단에 대한 최고 집행기구, 입법부, 대법원의 역할을 하는지, 이 통치체 성원들은 방금 인용된 그러한 진술들을 얼굴을 붉히지 않고 발표하도록 허용할 수 있는지 나는 수긍할 수 없다. 어떻게 어떤 집단의 사람들이 방금 제시된 모든 높은 역할과 권위를 그들 자신에게 귀속시킴으로써 이루어지는 것보다 더 높이 ´자신을 평가´할 수 있을까? 방금 인용한 단락을 분석했을 때, 사실상 모든 ´일반´ 증인 성원들에게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진 것과 동등하게 개인적 관계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끊임없는 주입식 프로그램을 결합시켜, 조직이 취하는 자세의 이 모든 궁극적인 효과는 지적 위협이다. 증인들은 성경을 읽을 때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불신해야 하고, 자신의 마음과 그 동기를 불신해야 하며, 아무리 양심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하려고 해도 양심을 건전한 길잡이로 불신해야 한다는 것을 미묘하게 느끼게 된다. 그들의 신뢰는 오직 "조직"에 있어야 한다. 그들은 그것에 발맞춰 행진해야 한다. 그리스도와 성령의 인도를 어떤 방향으로든 조직과 달리 따르는 것은 하나님보다 앞서 달려가는 것이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