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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좌(5)】 "인간은 철두철미 지구사람" 信天함석헌
요한복음 5
인간은 철두철미 지구사람
우주인들이 갔다가 온 그 소감을 말하는데 제일 곤란한 거, 그 안에서 나온 배설물을 처분하는 거, 그게 제일 어려워. 다른 거는 다 괜찮은데 그게 제일, 그게 어려운 문제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깐 다른 조건은 과학을 이용하면 어떻게 적응을 해 갈수도 있고 또 극복 해 갈수도 있고 그러는데, 사람이 자기의 이 생리 자체의, 그 생리만은 어떻게 못한다 그 말 아니에요? 어떻게 보면 지구에서 지구의 중력이 있는데, 지구의 중력을 벗어나가는 게 큰일이란다 든지, 뭐 거기가 여러 가지 문제가 있어 어려울 것 같은데, 그것은 다, 기계는 참 교묘하게 된 모양 아니에요?
그래서 이제 달에까지를 갔다가, 이제 결국 달에 착륙도 한다지만 달에까지를 갔다가 무사히 돌아왔는데, 그런데 다른 문제보다도 그 배설물 나간 걸 어떻게 하나? 그러니까 그 말은 생리적인 조건은 어떻게 할 수가 없다고 봐요. 그래 난 그 러시아에서 처음에 스푸트니크 4호인가, 그 맨 처음에 올라간 그때도 그랬지. 이름이 우주인인지, 왜 어찌 어째 우주인이냐? 그런데 우주인, 우주인 자꾸 그렇게 부릅니다마는 어느 의미에서 우주인 될게 뭐 어디 있어요? 끝까지 지구인이지. 마지막에는 지구에 내려오고야 마는 그러니깐 우주에 까지를 갔다 와도 설혹 또 달엘 가서 거기 얼마동안 있다 그래도, 그건 지구를 거기까지 끌고 간 거지. 우리의 생리라는 건 지구의 일부분인데, 여기서 지구하고 나하고 이해가 하나 아니에요? 그런데 거기를 못 떠나 그러니까, 무슨 형식으로든지 산소를 여기서 약품으로 했거나 뭐라거나 산소를 가지고 가야하고 먹을 걸 가지고 가야하고, 그 점은 어떻게 뭐, 그러니깐 모르지요. 이다음 이제 이러는 동안에 얼마나 가야 변천이 생기는지, 변화가 생겨서 사람이 이 지구라는 환경을 떠나서 저기 다른 그 우주 거기 올라가도 그 환경에도 살 수 있게끔 생명의 그 적응성을 가지게 된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은 한은 지구에 사람이, 지구에 돌아와야지. 다른 건 다 변경을 할 수 있어도 내 자신은 변경을 못 한다, 변경이 된다 해도 아주 지극히 더뎌요.
그러니깐 지구에서 생물이 진화하는 것만 해도 대개 보통 말하면 백 만년, 한 백 만년씩을 단위로 하고 하지 않아요? 변천이 생겨도 그러니 사람이 이렇게 우주에 왔다갔다 다니고 나면 이 다음에 우리 생리까지도 아주 거기 적응해서 산소를 안마시고도 될는지 모르고, 물을 안마시고도 되는 인간이 생겨날는지 모르지만 그건 우린 알 수 없는 거고, 지금으로는 하여간 불가능해! 그런 의미에서 철두철미 지구 사람이지. 그러니까 우리 다른 거, 우리의 살아가는 걸 다른 수단, 이런 건 변경을 하려면 할 수가 있는데 우리 자체는 변경이 안된다 그 말이야! 그런 점이 이제 많이 아마 생각할 점일 겁니다.
이렇게 과학이 발달했다고 해서
만일 그렇다면 어떡할까? 인제 다 그 생각하는 분들이 걱정하는 것도 그거에요. 달을 간다든지 금성엘 간다든지 우주학이 발달이 되고, 그 기술이 그렇게 아주 올라가서 이보다도 더 빈번히 왔다 갔다 하게 될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되면 그 바깥에 결과로 얻는 거기 가서 무엇을 가져온다든지, 뭐 지식이 들어가는 그것보다도 인간 그 자체의 변화를 주는, 인간 자체의 변화라는 건 이제 생리적인 변화는 그건 안 생길는지, 뭐 생긴데도 지극히 서서히 뭐 도무지 안 생길는지도 모르지요. 어쩔 수 없이 그러니깐 도로 지구로 돌아오고야 말 그런지 모르지만, 그런 걸 그렇게 해보는 동안에 생각으로서 인간이 자기 자신을 생각하기를 대단히 그 전(前)과 다르게 생각할 그게 이제 바로 되겠나? 잘못되지나 않을까, 걱정이 거기에 있지 않아요?
그런 말들을 많이 하는데 제일 걱정하는 거는 사람이 지금만 해도 퍽 이렇게 과학이 발달했다고 해서 교만해졌는데, 요새도 그러니깐 신문에도 보면 뭐 거의 못할 거, 사람이 하려면 못할 것 없는 것처럼 이제 그런 말이 더러 나오고 그럽니다만 그런 문제가 제일 걱정이라 그 말이야. 그러면 사람이 아주, 정말 과학이 발달이 되면 모든 게 다 못할 것 없냐? 만능이냐? 모든 문제 해결 하겠느냐? 며칠 전에도 신문에 났습디다. 수 십 년 전에 했던 말이 거의 실현이 되지나 않을까……. 양을 산양새끼 태(胎) 속에서 끄집어내서 인공(人工)으로 지금 기르는데 성공했다고 그러지 않아요?
그야 벌써 지금으로부터 몇 십 년 전에 사람이 좀 가다가 이제 어머니, 어머니 뱃속에서 애를 길러내는 그런 일 아마 아니 할런지도 모른다 그랬는데, 그 염생이 성공하게 되면 처음에야 뭐 아마 무슨 병적(病的)으로 어머니 뱃속에서 열 달 채울 수 없는 애들을 끄집어내서 인공 태를 만들어가지고 기르는데 아마 성공 될 겁니다. 성공되겠지만, 그 담에 한걸음 나가면 당초 처음부터 어머니 배를 빌리지 않고 하는 그런 거하려면 그럴 거예요. 그렇게 되면 사람이 그럼 차차차차 뭐 그건 한 가지 예입니다마는 어떻게 하겠냐?
그래 재래(在來), 이때까지 오는데 그 종교에, 말하자면 뭐라 할까요? 하나님을 믿는 그 근거라 할까, 그런 점이……. 하나님은 전능하시지. 사람은 어디까지나 지음을 받은 물건이니까, 사람은 생명을 만들 순 없다든지 그래서 이제 과학 가지고, 과학이 어느 정도 물질계에 대한 지식을 알 수 있지만 어디 정말 천지에 모든 신비를 다 알 수 있나? 그래서 인제 거기 곧 근거를 두고 사람이 그래도 아주 방약무인(傍若無人)하게 그렇게 건방진 그런 태도엔 안 갈 수가 있었는데. 이제 차차 과학이 발달이 되면 아직도 생각이 깊은 사람은 아마 아니 그러겠지마는 보통사람은 말하면 뭐 사람이 하려면 못할 것 없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될는지도 몰라요.
그런데 그럼 사람이 정말 마지막에 가서 만능(萬能)으로 뭐든지 다할 수 있나? 그래 이제 태아(胎兒) 길러내는 얘기를 했습니다마는 벌써 이제 얼마, 몇 십 년이 되겠는지, 몇 백 년이 가겠는지 몰라도 갔다가는 사람, 죽었던 사람 다시 살릴 거다, 그래서 지금 미국에선 벌써 냉장고 속에 시체를 넣는 게 유행이 돼서 그 무덤, 그게 설비가 굉장히 아주 비싸게 된다고 그러지 않아요? 또 저번에, 작년에 언젠가도 어느 박사인가 그 사람도 심장인가 무슨 뭐 고장이 있는데 지금 의술보다는 적어도 이 앞으로 한 오십년 있으면 더 발달 될 거다, 그러니깐 자기도, 이제 냉동장치 속에 들어가서 가사(假死) 상태에 들어가는 거지, 그렇게 해서 오십년 있다가 그 다음에 나와서 수술 받겠다고 그러고 그랬다고 하는데, 그 다음에 그 사람이 그대로 실현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그 사람은 아마 가사상태로 냉장고 속에 들어가 있을 거예요. 그런데 그럴런지 안 그럴런지 모르지만 그럼 그런 거 이제 차차차차 그렇게 되면 사람이 못할 짓이 없을 거예요. 뭐 이제 그 몇 십 년쯤은 자다가 나오겠다고 그러고, 가서 그렇게 될런지도 모르고 또 그 다음은 정말 죽지 않는 장생불로(長生不老)하는 게 과학적으로 뭐 그런 거 지금 벌써 연구도하고 있지만, 수명(壽命)이 하여간 지금까지 연장 된 건 사실입니다마는 그런 거 훨씬 더해서 몇 백 년이라도 살 수 있게 된다든지 이런다면 그때 이제 사람의 마음이 그럼 어떻게 되겠나…….
지금 <성경>은 생활의 일부분이다
그때 마음이 적어도 지금이라든지, 또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 기독교가 생겨나고 불교가 생겨나던 때 사람의 마음과 같을 리는 없습니다. 암만 그래도, 지금 만해도 벌써 다른데. 그런데 우리가 종교의 역사를 더듬어보면 종교도 자꾸 발달해 오지 않았어요? 근데 맨 처음의 종교라는 건 뭐 차이가 많이 있기는 있습니다마는, 일반으로 인류학 연구하고 사회학 연구하는 사람들의 말, 그건 거의 일치되는 걸로 처음에는 신(神)이라는 생각이 인간이 자연계에서 오는 여러 가지 그 무력(無力) 밑에, 그 압박 밑에 있어서 불안 공포를 느끼는데서 그래 그 하나님이라 생각하고 섬기고 그랬다……, 말이 그대로가 다 뭐 아닐는지 모르지마는 하여간 우리가 생각해보더라도 옛날에 올라갈수록 하나님이라 해도 두려워하는 면이 많았지.
그런데 차차차차 지금은 거기다 비기면 거의 없어져 가지 않아요? 이 앞에 모든 게 발달이 돼가며 점점 더 희박해 질런지 몰라요. 사람이 아무래도 살기, 사는 조건이 어려울 때에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라고 하는 전능한 이한테 의존해서 그 하나님을 믿어야 산다, 인간이 불교 뭐 해도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고 나옵니다마는 인간이 무상(無常)하다, 덧이 없다는 게 그게 큰 종교적인 연관 지어 나오는 한 원인이 된 것은 사실입니다. 인간 덧없다, 사람이 다 낳다가 죽어버린다, 더구나 장래가 아주 기대가 되고 하던 사람도 갑자기 턱 죽어버리고 만다, 국가가 일어나서 문화가 발달이 되지만 가다가 또 다 흩어져 망해서 다 무너지고 자취는 알 수 없이 그렇게 된다, 그렇게 역사를 회고해 보면 인간이란 참 덧이 없는 거다, 그 무상한 그 생각 때문에 사람들은 그보다 더 영원불멸하는 확고한 뭣이 없을까, 그런 걸 이제 추구하는 마음이 종교적인 요구를 일으키게 됐다, 그건 일반으로 그렇게 말해 좋을 거예요.
그런데 그렇다면 그럼 이 앞으로 과학이 점점 이렇게 발달이 돼 가고 그러면 어드럴까? 지금도 벌써 이후(以後), 종교가 옛날에 비겨서 매우 약해진 것은 과학이 발달했기 때문에 그런 거, 그건 뭐 그대로 인정해 좋을 겁니다. 물론 종교라 거 아주 없어지겠나? 그건 별개의 문제지만 하여간 옛날에다 비긴다면 옛날에는 종교가 거의 살림의 전부 아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종교 믿는다고 그래도 『성경』은 생활의 일부분이지, 결코 전부라고 할 순 없는 태도의 ……, 뭐 그렇게 됐어요. 그런 것이 그 원인이 주로 어디 있냐? 그러면 과학 발달됐어요. 지식적으로 우리가 전에 모르던 것, 그 전에는 약하다는 말로 비가 오는 것조차도 어떻게 오는지 모르고, 우레가 우는 것도 어떻게 우는지 몰라서 하나님이 그러신다, 그렇게 믿어왔는데, 상기(아직)도 저 말하는 비 오신다, 비가 오신다고 그러는 사람 지금도 있잖아요? 그건 옛날에 하던 그 버릇대로 다신교적(多神敎的)인 생각이 지금도 이제 비 오신다, 비 주신다, 뭐 그러고 합니다마는, 지금 우린 이젠 그런 걸 종교적인 것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있잖아요? 그건 자연계에 법칙이 있어서 자연법칙대로 되가는 것, 더구나 요새도 그저 뭐 우주학 얘기하고 합니다만 우주학이 발달해가면 제일 이 기후조절, 기후 조절하는데 우선 많이 연구할거라 해서 사람이 어느 정도 마음대로 하게 하자면 그러면 참 아주 달라질 겁니다. 지금 달라진 것도 그래 된 거지만 이 앞으로 그럼 더 그렇게 될 것 아녜요?
그럴 때 그럼 종교는 어디로 가(나)? 종교가 그때도 있을 것일까? 종교가 있다면 또 무슨 필요 때문에 어떻게? 그게 자연이 생각 안할 수 없어요. 그러니 과학이 발달이 되가는 것 따라서 사람의 마음이 그렇게 되가는 것, 그것은 막아낼 수 없을 것입니다. 가령 우리 개인에서 얘길 하면 어린애들이 어렸을 때에는 그저 부모님한테 전적으로 이렇게 의존해 있어서 말 듣고, 또 하라는 대로, 시키는 대로 하고 순종하고 그래댔는데. 아버지면 다야, 어머니면 다고 그랬는데, 차차차차 나이 들어오면 부모님한테 대해서도 비판적인 태도로 나오고 그러지 않아요? 개인으로도 그런데 이미 인류 전체로도 그럴 거고, 또 그렇게 되가는 그 아들 잘못이라고 그럴 수 없잖아요?
사회 혼란돼가는 원인의 하나
제 지능이 발달이 돼서 저도 생각이 늘어 가지고 어릴 때는 단순한 마음이니깐 아버지는 다. 아버지를 하나님 같이 믿고, 천사(天使)같이 믿고, 아버지만 있으면 돼! 호랑이가 온다면 선생님 뒤에 가 앉는다고 하는 옛 얘기! 호랑이만 오면 선생님 뒤에 가면 호랑이도 어떻게 못할 것 같이 믿던 게 옛날의 생각인데, 지금은 사회적으로 생각해도 어느 학교, 국민학교 애들도 나이 어린애는 잠깐은 좀 그러겠지만 벌써 지금은 그런 달라지지 않았어요? 아버지도 그래, 선생도 그렇게 돼. 나라의 임금이라는 게 더구나 그래. 벌써 그렇게 되면 소위(所爲) 우리 살아가는데 이 인류 살림에 있어서 권위라는 게 차차 없어져. 역사에 나아가는 방향에 권위라는 게 점점 없어져가는 거 봐야 하나.
그러나 사람이 그러면 체면, 권위, 권위라는 게 없이 이, 그럼 살림이 되갈 수 있냐? 인간 살림이 되갈 수 있나? 그 점이 참 생각할 문제일거에요. 난 수십 년 전부터 그럽니다만 현 사회, 이렇게 혼란돼가는 원인의 하나는 젊은 사람의 마음속에 권위의식은 좀 없어져서 그러는 게. 옛날 봉건시대에는 날 때부터 젊은 사람은 아주 그런 분위기속에 나요. 재하자유구무언(在下者有口無言)이라, 아랫사람은 말 못한다, 위에 권위가 딱 있어! 그러니깐 재주 있는 놈도 재주 없는 놈도, 인생이란 건 난다 하면 윗사람이 어떻게 하는 거 그것 봐서 해야 한다. 이것이 의식리에 무의식리에 들어가서 그게 어느 점 좋게 작용했어. 나쁘게 작용한 점도 있지만, 하여간 그렇게 좋게 작용을 해서 사회가 안정 세월 이루어져 가지고 이게 지도를 받아갔는데 지금 시대에는 가정에서부터 그럴 수가 없어요. 난 그런 점은 아주 부모가 잘못이라고 봅니다만 시대가 변했다, 그저 이렇게 생각하고 부모가 자식들을 기를 때에 ‘어려서는 말 들어야 한다’고 하는 그걸 강조하지 않아. 시대가 달라져서 그럴 수 없다, 이래가지고 그러니까 자라나면서부터 도무지 뭐 스스로 자기가 우리는 어린 사람이다, 상기(아직)도 판단도 불완전하다든지, 실행력도 불완전하다든지 그렇다는 의식이 없어요. 그렇게 하고 젊은 시대에 들어왔으니깐 그게 뭐 혼란에 빠지지 않을 리가 없을 겁니다. 그러니깐 개방이 돼서 옛날 모양으로 그저 재하자유구무언(在下者有口無言)이라고 해서, 딱 권위 밑에 해놓고 그건 젊은 사람은 늙은 시대를 위해 있는 거지, 젊은 시대 자체로서의 의미를 못가졌던 그런 건 잘못이야. 거기서 해방이 되는 건 좋아요. 그건 좋지만, 그 대신에 인생이라는 거 암만 그래도 날 때부터 이 지능이 다 발달된 것도 아니고, 더구나 도덕 양심이라는 건 어려서부터 자꾸 자라야 생명이지 날 때부터 다 기성품을 가지고 나는 거 아닌데, 배워가야 하는 건데, 그런데 무서운 거 없어져, 젊은 사람의 마음에 무서운 거 없어져. 그러면 걱정 아닌가?
요새도 뭐 우리나라도 그렇고 그렇습니다만, 일본서도 학생들이 야단하고 그런답디만, 일본사람들 과연 그런 거 봐도 젊은 사람 두려운 생각 없거든. 그러니깐 그렇게도 용기가 있다는데 사회를 자기네가, 그 “개조해가자!” 참 지성이 일선에 섰다 하는 자신을 가지고 “그러자!” 하는, 여하한 권위에도 무조건 복종하는 것 아니고 비판적인 태도로 가자하는 건 좋고, 사회개조 해가자는 의욕은 대단히 좋지만, 그러나 스스로 암만 그래도 인간이라는 건 자라나는 거고 어쩔 수 없이 지식이라는 경험에 토대를 두는 건데 경험이 채 그렇게 못 왔는데 그런 생각에 빠져버리면 그건 아주 걱정스러운, 내 이런 것은 과도시기(過渡時期)기 때문에 더구나 그럴 겁니다. 과도시기기 때문에, 좀 더 깨어나면 물론 아니겠지만 지금은, 지금은 참 그런데, 그 점이 참 걱정스러운 거예요.
그러니까 그 점을 어떻게 할 것인가? 종교가 그런 점에서 해줘야 하겠는데 종교자체가 도무지 권위를 잃었어. 본래 가톨릭에서 아주 권위주의를 너무 썼다가 거기대한 반동으로 프로테스탄트가 일어났어, 프로테스탄트도 또 그 다음에 아주 깨끗이 청산을 못하고 아직도 권위주의가 있습니다마는 인간적인 모든 권위를 제(除)해 버리는 것은 정말, 정말 참 권위에 참 복종하기 위해 그러는 건데, 쉬운 말 종교적인말로 하면 교권(敎權)에 반항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복종하기 위해 그러는 건데, 교권에 반항하면서 하나님(에게)조차도 그만 반항을 해, 교회가 하나님인줄 그렇게 오산(誤算)을 해가지고 종교자체가 그래 그럼 약(弱)해버리고 말지 않았어요?
그럼 그렇게 된 것이 이 대세(大勢)인데, 그래 그걸 뭘로 막을 수 없어! 그러면 이 종교가 어떻게 될 것인가? 젊은 사람의 마음에 아무 권위를 못 가지는 종교가 무슨 필요가 있나, 소용이 아무것도 없어요. 그래 내 아까도 저기서 얘기했습니다만, YMCA에서 뭐 「청년」지(誌) 라고, 「청년」지 낸다고 그러면서 누구누구한테 앙케이트 보내서 대답해 달라고 그랬어. 나는 본래 그런데 (대해) 대답할 자신도 없어요. 그리고 대답 하고 싶은 마음도 없어! 그래서 둬두었더니 또 독촉까지 왔어. 그랬더니 거 “YMCA에 대해서 기대가 무엇입니까?” “지금에 있는 상태를 보고 뭐 비판, 건설적인 의견을 말하면 무엇입니까?” 그러고. 안 보냈드니 독촉까지 왔더라니까. 그래 그나마 대단한 성의가 있어 묻는 것 같아서, 있는 대로 아주 기탄없이 말해달라고 그래서, 그래서 나도 정말 기탄없이 말했어!
“첫 조건은 그리스도의 정신을 살리십시오.”
“둘째 조건은 그걸 못하겠거든 차라리 해체해 버리십시오.”
그까짓 YMCA 둬도도 소용이 없어요 그리스도와 상관이 아무것도 없지 않아요? 그건 뭐 할라고 그래요. 그 노릇 그런 거 한다는게 잘못이라고 아녜요. 그건 거는 다른 단체서 하면 좋은데, 그리스도엔 당치도 않은 일을 그리스도가 한다고 그럴 거야? 이 불쌍한 나사렛사람 위해서 할 것 없지 않냐 그말이야! 난 그 사람이 가엾어서 그래. 꼭 자기는 자기대로 있는, ‘철저하게 영(靈)에 살자’ ‘정신에 살자’고 해서 일체 이 세상에 걸 내버리고 십자가(十字架)에 달린 그 사람을 가져다가 왜 뭐 사회 클럽에 대장(隊長)을 만들어가지고, “댄스, 여기 오면 배웁니다” “뭣, 뭣이 시험에 여기 오면 배웁니다” 그거야 다른 사람도 할 수 있지 않나? 왜 크리스천(Christian)하고 무슨 상관이 있나? 크리스천이란다고 그거 안하고 산다는 거 아니예요. 허지만 적어도 중심점에 어찌 그럴 수 있겠나? 그래 그런 대답을 해보내긴 했습니다만.
참 혁명적인 소리가 있는 곳
그런데 이 종교가 이거 뭐예요, 그것도 그저 오늘도 그 말씀도 뭐라고 전(나는) 상기도 분명한 대답을 거기에는 못합니다. 그러니까 그래 그렇잖아도 나는 “낡은 신앙은 다 없어졌고 새 신앙은 상기도 얻지 못했다” 그래, 그러나 이게 낡아서 이것 가지고 안되는 줄은 알아요. 안되는 거! 그럼 안되는 거, “새것 없는데 왜 안됐다는 말만 하냐?” 그런다면, 뭐 듣기 싫은 분은 그만 둘 거지만 나는 새것은 못 얻었어도 나는 아니면 아닌 거라고 하는 말은 해야 새것 올 거다, 새것 올 거다.
이렇게 가는 가운데 새것을 우리가, 그리고 좋은 실 예가 예수님 자신이거든. 그때에 있어서 아주 참, 참 새롭지 않아요? 이제 오늘 우리가 읽어가는 데도 그렇습니다만, 그러니까 그 시대 사람들이 못 봤지 않았어요? 받아들이질 못해! 그런데 지금 우리가 보면 어떤고 하니, 우린 ‘아! 그렇지. 예수님이 옳지!’ 예수님이 옳은지(를) 알아요. 그때 사람들로서는 참 받아들이기가 어려워요. 그런데 그때보다도 더하지 않은가? 이 앞으로…….(잠시 침묵함) 그 얘기는 그만 하고 오늘 이제 10장 22절 하겠습니다.
예루살렘에 성전(聖殿) 수복절이 돌아왔는데 때는 겨울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성전 안에 있는 솔로몬행각을 거닐고 계셨습니다. 그러자 유대사람들이 예수를 둘러싸고 말했습니다. 당신이 언제까지 우리의 마음을 졸이게 하시렵니까? 당신이 그리스도인지 아닌지 분명히 말해 주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이미 말했는데도 너희가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 이름으로 행하는 그 일들이 곧 나를 증거한다. 그러나 너희가 믿지 않는 것은 내 양(羊)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는다. 나는 내 양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따른다. 내가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들은 영원토록 망하지 않을 것이요. 또 그들을 내손에서 빼앗아 갈자가 없을 것이다. 그들을 내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무엇보다도 위대하시고 내 아버지의 손에 있는 것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이때 유대사람들이 예수를 치려고 다시 돌을 들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권능을 힘입어 여러 가지 선한 일을 너희에게 보여 주었는데, 그 중에 어떤 일 때문에 나를 돌로 치려고 하느냐?”
유대사람들이 대답했습니다.
“우리가 당신을 돌로 치려는 것은 선한일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독한 때문이요. 당신은 사람이면서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했소.”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율법에 내가 너희를 신(神)이라고 하였다하는 말이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고 하셨고, 또 성경은 폐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여 세상에 보내신 자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말한 말을 가지고 어찌하여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하느냐?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않거든 나를 믿지 말라. 그러나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을 믿으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될 것이라.”
그 때에 유대사람들이 다시 예수를 붙잡으려고 하니 예수께서 그들의 손을 벗어나 피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요단강 건너 요한이 처음에 세례 주던 곳으로 가서 거기서 유(留)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에게 와서, “요한은 기적을 하나도 행하지 않았으나 요한이 이 사람에 대하여 한 말은 모두 참이다” 하고 서로 말했습니다. 그곳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 유대교 사람들이 점점 예수님을 이제 받아들이질 못하고 배척을 하게 되던 그 얘기입니다. 그런데 그 위에서 이제 여러 말했던 그런 게 있어서 그러겠지요. 예수님을 붙잡고 “당신이 언제까지 우리의 마음을 졸이게 하렵니까? 당신이 그리스도인지 아닌지 분명히 말해주십시오.” 이 말을 들으면 참 어느 면으론 동정이 가는 말입니다. 이 얼마나 안타까워서 한 말이에요?
“여보세요. 이 메시아면 메시아라 분명히 말하고, 아니면 아니라 제발 말을 해 달라. 사람 가슴 졸려서 죽겠어. 이제 가슴을 졸이게 하길 언제까지 하겠느냐?” 그러고 말했다고 하는데 퍽 동정이라 하면 동정이 가는 말입니다. 그러나 왜 그러냐? 그 점 우리가 생각할 점이예요. 이제 요 아래 내려가서 이제 “하나님이냐? 사람이냐?” 토론이 나옵니다마는 이런 데가 이제 예수님의 아주 참 혁명적인, 새 종교인 소리가 있는 곳입니다. 그 때문에 바로 십자가에 달리게 되는데, 이렇게 그 일이 맞지 않아요? 그럼 이쪽 사람들도 종교의 요구가 있다면 간절히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아요? “이렇게, 언제까지 이렇게 우리 마음을 졸이게 하겠소?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라 그러고 말해 주시오.” 그러는 거 보면 어느 정도 간절한 요구가 있다고 그럴 수 있어요.
그런데 그럼 어째 예수님에 이 소리가 못 받아들여지고, 종래 아주 서로 이러고 말았나? 우리는 물론 지금은 예수님을, 안다고 하는 자리에 섰으니까 예수님이 옳다 그러지 않아요? 그럼 그 사람들이 어째 무엇 때문에 그럼 실패를 했나? 그런 점을 오늘 중에 생각해보자는 거예요. 그럼 그 마음이 ‘졸인다’, 왜 그랬을까? 마음이 졸인다는 건 그건 무슨 때문일까? 졸인다는 건 마음이 갈라졌기 때문에 그래. 갈라진 상태에 있는 마음이 전적으로 이를 향했던지 또 아니라 했던지 그랬다면 졸이우지를 않아! 졸이우는 건, 어느 면에서 보는 것도 같고 또 아닌 것도 같고, 이렇게도 못하고 저렇게도 못하는데 마음에 졸이는 데가 있어.
그러니깐 마음이 자체로 하면 분열된 마음이야. 그러면 마음에 분열이 무엇 때문에 왔나? 그게 문제야! 우리가 종교적인 체험에 들어가려면 믿음에, 하나님을 예로 들어도 좋습니다만, 학문적인 말로 종교적인 체험에 들어가려면 마음이 하나가 된 마음이 아니면 안돼! 믿음이란 하나다, 하나 된 마음의 그 상탭니다. 믿음이란 그런 의미에선 통일이라 그럴 수 있어요.
그런데 갈라진 마음가지곤 안돼! 그러면 갈라지면 왜 갈라지냐? 그러면 이것 역시 목적이 둘이기 때문에 갈라지는 거야, 생각이 갈라지는 거야. 이들이 “우릴 언제까지 이렇게 졸이게 할 터이오?” “메시아라든지 아니라든지 그렇게 말해주시오.” 그러는데 그 생각할 거는 그들의 메시아라는 게 그게 뭐냐? 그들이 메시아를 바라고 기대는 것은 사실이에요. 저 유대사람의 역사라는 것이 처음부터 일관해서 아주 그걸 가지고 이렇게 책을 쓴 사람도 있습니다마는 메시아라고 하는 그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일관화한 그 일념을 놓고 그걸 기다려. 시대(時代) 시대, 그 메시아 오길 기다리는 가운데 전개 돼 간 것이 이스라엘 역사예요. 유대민족 역사예요. 오늘날 까지도 그건 그렇게 말할 수 있어요. (녹음5, 32: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