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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
***간증: 1499. [역경의 열매] 김재열 (1-25) 고3 때 폐결핵으로 피 토하고 쓰러져
결핵요양원서 죽어나가는 환자 보며… “나도 이러다 혹시”
김재열 목사가 미국 뉴욕 부촌인 올드 웨스트베리에 있는 뉴욕센트럴교회 앞에서 이민목회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나의 고향은 전남 순천이다. 1947년 5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경찰공무원이었고 어머니는 일본에서 태어나 여자상업고를 나와 현지 백화점 경리로 일하다가 한국에 와서 중매로 아버지를 만났다.
순천역 근처에서 살다 보니 6·25전쟁으로 다친 군인들이 이동하는 것을 자주 목격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간호사가 되어야겠다는 꿈이 있었다.
우리 집은 기독교 신앙이 없는 가정이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이었다. 머리가 노랗고 파란 눈을 가진 미국인 한 가정이 하늘색 랜드로버 차량을 타고 왔다. 어린 시절 미국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저 사람들은 잘 사는 사람들인데 어떻게 전쟁으로 무너진 한국, 전라도까지 온 것일까. 어쨌든 나도 저들이 온 미국에서 꼭 살아보고 싶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들은 유진 벨 선교사의 후손으로 지역 개척교회를 지원하기 위해 온 것이었다. 그때로부터 50년이 지나 미국 뉴욕에서 한인교회를 담임하며 주일 유진벨재단 회장인 스티브 린턴 선교사를 초청해 간증을 들었다. 그런데 자신의 고향이 순천이라고 하는 게 아닌가.
“아니, 그럼 그때 하늘색 랜드로버를 타고 우리 동네를 찾았던 사람들이 당신 가족이었어요?” “오우,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이후 블랙마운틴에 거주하는 생존한 선교사 가족들을 만나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로 정담을 나눴다.
순천중앙초등학교 재학시절 아버지는 자유당 소속으로 시의원을 했다. 중학교 1학년이 됐는데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났다. 민주당 인사들이 자유당 인사들을 습격한다는 흉흉한 소문이 들렸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서울로 급히 거주지를 옮기게 됐다.
서울 집은 남산 밑자락이었다. 숭실중·고등학교에 다녔는데 미션스쿨이었다. 그때부터 예수를 만나는 축복이 시작됐다. 중학교 때 학교에서 성경은 배웠지만, 교회 출석은 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는 서소문에 있는 평안교회에 정기적으로 출석했다. 그러다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난 것은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운동을 하다가 다쳤는데 늑막염이 생겼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어느 날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폐결핵이었다. 결국, 국립마산결핵요양원으로 가게 됐다.
수용된 환자들은 거의 말기 환자였다. 중증 환자들이 한 달에 4~5명씩 죽어 나갔다. 오밤중에 각혈하는데 피 냄새가 정말 역겨웠다. 18세 청소년 입장에서 죽음을 실감한 때다. ‘나도 저러다 죽는 것인가.’
자포자기 심정이었다. 죽음을 앞두고 무료한 생활을 하다가 ‘박군의 심정’이라는 전도지 한 장을 봤다.
약력=총신대 졸, 합동신학대학원대 석사, 미국 뉴욕신학대학원 목회학 박사, 서울 산성교회 개척, 캐나다 토론토 열린문교회 담임, 미주한인예수교장로회(KAPC) 총회장, 현재 국제씨드선교회 명예 이사장, 미국 뉴욕센트럴교회 담임목사.
* [역경의 열매] 김재열 (1) 고3 때 폐결핵으로 피 토하고 쓰러져
* [역경의 열매] 김재열 (2) 기도 후 놀라운 영적 체험… "자네 폐결핵 다 나았어"
* [역경의 열매] 김재열 (3) 의식 없는 어머니 손 잡고 기도… "네 덕에 몸이 가볍네"
* [역경의 열매] 김재열 (4) 사흘 연속 예수님이 열차기관사 되신 환상이…
* [역경의 열매] 김재열 (5) 직분자들이 목사 흉보는 모습에 실망, 신학대 자퇴
* [역경의 열매] 김재열 (6) "빨리 망하고 목회하자"… 매상 대부분 헌금
* [역경의 열매] 김재열 (7) 분양받은 교회 잔금 못 치르자… 아내 "아파트 팔자"
* [역경의 열매] 김재열 (8) "험지로 가자"… 캐나다 이민목회 사역의 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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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역경의 열매] 김재열 (2) 기도 후 놀라운 영적 체험… “자네 폐결핵 다 나았어”
전도지 보고 영접기도 읊조린 후 생사 초월하는 자유와 기쁨 샘솟아 요양원 생활 6개월 만에 퇴원
‘박군의 심정’ 전도지. 김재열 목사가 1964년 국립마산결핵요양원에서 치료받을 때 이 전도지를 보고 회심했다.
손에 잡힌 것은 ‘박군의 심정’이라는 그림전도지였다. 맨 끝에 있는 영접기도를 진솔하게 읊조렸다.
“주 예수님, 오늘부터 저는 당신을 제 인생의 주인으로 모십니다.” 그런데 희한한 체험을 했다. 갑자기 몸이 붕 뜨는 것 같았다. ‘아, 중생의 체험이라는 게 바로 이런 것이구나.’ 그때부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생사를 초월하는 자유와 기쁨이 샘솟기 시작한 것이다. 국립마산결핵요양원에서 죽으려고 시도했던 것들이 생각나 부끄러워졌다.
1964년 요양원에 들어간 지 6개월이 지났을 때였다. 담당 의사가 밝게 웃었다. “김군, 축하하네. 자네 폐결핵이 다 나았어.” “아, 정말입니까.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래서 서울의 일요신문사 상무이사로 재직하던 아버지께 편지를 썼다. 그런데 답장이 왔는데 의외였다.
“재열아, 서울은 공기도 나쁘고 시끄럽다. 널 퇴원시키려고 그러는 것이다. 폐병은 쉽게 낫는 병이 아니다. 집에 올 생각 말고 큰집에 가거라.”
아버지의 명령대로 전남 여천군(현 여수시) 삼일면 큰집으로 갔다. 조용한 시골 어촌이었는데, 지금은 여수국가산업단지(여천공단)로 바뀌었다. 그곳엔 교회가 없었는데, 어느 날 도시에서 내려온 장로님 한 분이 방앗간 주인과 함께 가게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했다. 방앗간에서 멍석을 펼치고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젊은이는 나 혼자였고 대부분 아이와 노인이었다. “내가 매일 기쁘게 순례의 길 행함은 주의 팔이 나를 안보함이요~” 큰 소리로 찬송하다 보니 찬양 대장 역할을 하고 있었다.
어느 수요일 밤 예배에서 사촌 동생과 함께했는데, 장로님이 기도를 시키는 게 아닌가. 내가 믿음이 좋은 것으로 여겼던 것 같다. “자, 이제 우리 젊은 김 선생이 기도를 하겠습니다.” “하, 하나님. 저, 저희가 신도가 되게 해주시고… 주님께 감사하고 기도를 마무리합니다. 아멘.”
그때까지 공식적 자리에서 기도해본 적이 없었다. 진땀을 흘리며 기도를 마치고 ‘다시는 교회 다니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어느 날 장로님이 큰집에 찾아오셨다.
“김 선생, 그때 기도를 참 진지하게 잘했어요. 신앙생활은 꾸준히 해야 합니다. 믿다가 안 믿으면 시험에 들어요. 다음 주부터 우리 다시 예배드립시다.”
아버지 같은 장로님의 격려에 다시 교회에 나가게 됐다. 몇 달 후 사촌 동생을 데리고 점심에 산에 갔다. 동생에게 자랑했다. “저번에 내 기도가 어땠냐.” “어, 형 잘하던데.” “그래, 지금은 더 잘할 수 있다. 우리 저 바위에 걸터앉아 기도를 해보자.”
눈을 떠보니 사촌 동생은 사라졌고 해가 지고 있었다. 그런데 세상이 달라 보였다. 하늘이 빛나고 온 천지가 생동감이 넘쳤다. 산에서 나무가 넘실거리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었다.
‘와, 세상에 기도가 이런 것이었구나.’ 그때부터 기도의 강력한 영적 체험을 하고 부모 형제가 예수 믿도록 100일 작정 기도에 들어갔다.
“주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우리 가족들 꼭 예수 믿게 해주세요. 주님!” 그런데 100일 기도가 마무리될 때쯤 서울의 동생한테서 편지가 왔다.
***[역경의 열매] 김재열 (3) 의식 없는 어머니 손 잡고 기도… “네 덕에 몸이 가볍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집안 풍비박산… 전도 기회라고 생각 어머니 치유 통해 식구들 모두 교회로
김재열 미국 뉴욕센트럴교회 목사(오른쪽)가 1963년 숭실고등학교 2학년 재학시절 남한산성에서 친구들과 함께했다.
동생이 쓴 편지를 뜯었다. 잉크로 휘갈긴 글씨 속에는 절망만 가득했다.
“형, 빨리 서울로 올라와. 아버지는 신문사 퇴직하고 사업을 하다가 망했어. 어머니는 이름도 모르는 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어. 나는 팔뼈가 부러졌고 동생은 빗장뼈가 부러졌어. 이러다가 집안 풍비박산 나겠어. 빨리 와.”
편지를 읽어보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장남이라고 하는 인간은 폐병에 걸려서 2년 이상 집에 가지도 못하고 있었다. 편지를 움켜쥐고 땅바닥을 치며 소리를 질렀다.
“하나님, 정말 이래도 되는 겁니까. 예수 믿으면 복을 주신다고 했는데 복은 고사하고 집안 뿌리가 송두리째 뽑히게 됐습니다. 이게 뭡니까.”
한참을 그렇게 소리치고 있는데 하나님의 미세한 음성이 들렸다. “너 저번에 기도 제목이 뭐라고 했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족 모두가 예수 믿게 해달라고 했죠.” “그래, 그래서 그 상황이 된 거야.”
그 순간 망치로 머리를 맞은 느낌이 들었다. ‘아, 그렇구나. 이건 하나님이 주신 기회다. 가족들이 깨지고 넘어지더라도 예수님만 똑바로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고 축복을 받는다. 주님, 감사합니다.’
그날 서울행 야간열차에 몸을 실었다. 서울역에 내리니 동생이 마중 나와 있었다. “아니, 걸어서 5분 거리의 집인데 뭣 하러 나왔냐.” “편지에 썼잖아. 집안이 다 망했다니까.”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아버지는 신문사를 퇴직하고 사업을 시작했다가 몽땅 사기를 당했다. 금호동 종점까지 버스를 타고 갔다. 내려서 야산을 하나 넘어가는데 옥수동 부근이었다. 조그만 셋집에 병자가 된 가족들이 누워있었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엄마, 큰아들이 2년 만에 돌아왔는데, 대답 좀 해봐.” 누워있는 어머니는 의식이 없었다. 초췌한 몰골의 아버지는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머니는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그렁그렁’ 소리가 나더니 나중에는 숨넘어가는 소리가 났다. 가만히 있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 이제부터 내가 기도할 테니 같이 따라서 기도하세요. 그러면 병이 나을 겁니다.”
앙상한 어머니의 손을 잡고 눈물로 기도했다. 얼마나 기도했는지는 모른다. 눈을 떠보니 ‘그렁그렁’ 하는 소리는 사라졌다. 하루 이틀이 지나도 그냥 누워서 주무시는 것 같았다. 의식이 있는 것 같긴 한데 도무지 반응이 없었다.
사흘째 되던 날이었다.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문을 열어보니 어머니가 손빨래를 하고 있었다. 여름 벗어놓은 빨래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는데 하이타이를 뿌려놓고 살살 주무르고 있는 게 아닌가.
“어, 엄마 어떻게 된 거야.” “응, 재열아. 네가 기도해준 다음부터 몸이 가볍네.” “엄마, 아주 잘 됐다. 예수님이 엄마를 고쳐주신 거야.” “그런 것 같다.” 어머니의 치유사건을 통해 온 집안 식구가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동네 가정집에서 기도 모임이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당시 나는 친구들이 대학 생활을 할 때 아무것도 못 하고 실업자처럼 집에 있었다. 안수기도를 받으면 인생의 문제가 풀린다는 소문에 귀가 솔깃해졌다.
***[역경의 열매] 김재열 (4) 사흘 연속 예수님이 열차기관사 되신 환상이…
옆집 아주머니 제안에 안수기도 받던 중 형형색색의 환상이 펼쳐지기 시작
김재열 미국 뉴욕센트럴교회 목사가 1966년 기도 중에 봤던 환상을 직접 그림으로 그렸다. 전속력으로 달리는 열차의 기관사가 예수님인 환상이다.
서울 집에 왔는데 학교도 못가고 직장도 못 얻고 있었다. 교회 외에는 시간을 쏟을 데가 없었다. 새벽종을 치고 기도회를 마치면 집에서 밥을 먹고 다시 교회로 가서 청소했다. 교회 다니는 옆집 아주머니가 이런 제안을 했다. “김 선생, 우리 동네에 영락교회 다니는 권사님이 계신데, 거기 가서 기도해봐. 그러면 길이 열릴 거야.”
가정집에 가보니 중년 여성 10여명이 모여있었다. 간절히 기도하는 분위기였다. “안수기도를 받으러 왔군요. 가운데 누워서 기도 받으세요.” 나 혼자 남자인데 방 한가운데 누우려니 쑥스러웠다.
그런데 기도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형형색색의 환상이 펼쳐지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손가락을 움직일 수 있었다. 옷을 챙겨서 나가려는데 권사님이 물었다. “혹시 보이는 것 없었어요.” “없었어요.” 창피한 마음에 얼른 나왔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기도하러 갔는데 환상을 봤다. 누런 벼가 끝없이 펼쳐진 들판을 봤다. 피난 열차에 사람들이 많이 타고 있었는데,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었다. 열차가 어떻게 이렇게 강력한 힘을 갖고 달리나 봤더니 열차 기관사가 예수님이셨다.
“뭐 보이는 게 없어요.” 셋째 날은 거짓말할 수 없었다.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권사님이 입을 열었다. “주의 종이 될 환상이구먼.”
영적 깊이는 더했지만, 현실은 갈수록 초라해졌다. 가세는 더욱 기울었다. 당시는 청계천 철거민을 서울 상계동과 경기도 성남으로 강제이주시키던 시절이다. 옥수동에서 상계동 수락산 밑자락 판자촌으로 이사를 했다. 말이 월세방이지 나무 칸막이로 방 하나, 부엌 하나를 만든 허름한 움막이었다.
1966년 노원성결교회에 출석했는데, 교회 주변에 영육의 문제를 지닌 병자들이 참 많았다. 목사님을 도와 환자 심방에 나섰다. 불쌍한 환자를 보면서 기도하는데 손에서 수만 볼트의 전기가 나가는 것 같았다. 기도만 해주면 오뚝이같이 배가 팽팽하고 얼굴이 새까만 사람도 치유가 돼서 교회에 출석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그때 치유의 은사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교회 주변에는 특히 귀신들린 사람이 많았다. 옆집 처녀 중 하나는 귀신에 들려 옷을 벗고 동네를 돌아다녔다. 수건으로 몸을 감싸서 교회에 데리고 와 귀신을 내쫓았다.
깡패였던 처녀의 오빠는 교회가 자기 동생에게 험한 짓을 했다며 돌을 던지고 욕설을 퍼부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깡패 오빠도 회개하고 교회에 출석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하루는 치과의사인 미국인 선교사 부부가 교회를 찾았다. 통역을 해주며 정성껏 사역을 도왔다. 선교사 부부가 사역을 마치고 교회를 떠나면서 이런 말을 했다.
“미스터 김, 당신은 무엇을 하고 싶습니까.” “친구는 다들 대학생이 됐습니다. 대학에 진학해 공부하고 싶습니다.” “오, 그렇군요. 우리가 기도해 주겠습니다.”
7개월 뒤 미국 선교사님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서울 아현동 아현성결교회 내 선교사 주택으로 오십시오.” 찾아갔더니 선교사님이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역경의 열매] 김재열 (5) 직분자들이 목사 흉보는 모습에 실망, 신학대 자퇴
의류 도매상하는 친구 돕다 아예 떠맡아… 기도만 하면 “주의 종 되라고 불렀는데…”
김재열 미국 뉴욕센트럴교회 목사가 1968년 서울 필동 모 교회 전도사 시절 중고등부 야외활동에서 예배를 인도하고 있다.
선교사님이 내민 종이는 대학 입학원서였다. “미스터 김이 대학에 갔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후원하겠습니다.” 그리고 맨 밑에 보니 서울대학이라 적혀 있었다.
‘아, 하나님께서 나에게 서울대 진학의 길을 열어주시는구나.’ 지장을 찍고 자세히 보니 서울대가 아니라 서울신학대였다. 며칠 후 입학시험을 치고 서울신대에 합격했다.
1967년 아현성결교회 옆에 있던 서울신대에 입학했다. 선교사님은 2년간 신학대 학비와 용돈을 지원해 주셨다. 입학하고 보니 신학생들이 하나같이 우중충했다. 젊은이인데도 세상의 고민을 다 짊어진 것처럼 어두웠다. ‘뭐야, 신학생들이 이렇게 힘이 없어도 되는 거야. 영 마음에 안 드네.’
신학교 1학년에 입학하자마자 서울 필동의 모 교회 교육전도사로 부임했다. 중고등부 전도사였는데, 몇 년간 아주 재미있게 사역했다. 그런데 어느 날 교회 권사님과 집사님들이 모여 목사님 흉을 보는 장면을 목격했다.
‘아니, 나도 이제 얼마 후 저 길을 가야 하는데 성도들로부터 저런 이야기를 듣는 자리이란 말인가. 차라리 저런 욕을 듣느니 교회를 열심히 섬기는 평신도가 낫겠다. 저런 교인으로부터 사례비를 받고 일평생 어떻게 사나.’
만감이 교차했다. 목회자들의 모습을 보며 신학에 대한 회의감까지 몰려들었다. 그래서 덜컥 자퇴서를 내고 말았다.
1971년 대도백화점 여성의류 도매상에서 일하던 친구한테 찾아갔다. 친구는 칼빈대 총장을 지낸 김재연 목사였다.
“어이, 김재열 전도사, 다음 한 주간 여기 와서 가게 좀 보는 게 어때.” “왜.” “응, 조만간 미국 유학을 떠나려는데, 서류 수속을 밟으려면 대사관에 가야 하거든. 가게 좀 봐.”
잠깐 가게를 보는데 그렇게 큰돈은 처음 봤다. 당시 풀타임 전도사의 월 사례가 6만원이었는데, 그날 하루 매상이 100만원이었다. 지금 돈으로 하면 2000만원이 넘는 돈이다. 정말 돈을 자루에 쓸어 담았다.
일주일 뒤 친구가 왔다. “너 이민 가면 이 가게 누구한테 넘길 거냐.” “어, 아직 임자가 나타나지 않았어. 니가 한번 해볼래.” “응, 내가 할게.”
그렇게 허름한 집을 담보 잡아 사업을 시작했다. 7년간 사업을 했는데, 돈을 엄청나게 벌기도 하고 망하기도 했다. 부침이 정말 심했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심정이었다.
돈을 꽤 많이 벌 때였다. 장사는 잘되고 있었지만, 기쁨이 없었다. 특히 기도만 하면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내가 널 평신도로 부르지 않았다. 주의 종이 되라고 불렀는데 도대체 뭘 하는 것이냐.”
부르심에 대한 부담을 안던 중 1974년 아내를 만났다. 어머니가 교회에 다니는 자매를 소개해줬다. ‘여자는 여자가 제일 잘 안다. 특히나 나를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신 어머니가 선택한 여자는 물어볼 필요도 없다.’ 여자에 대한 두려움이 컸던 내가 결혼을 일사천리로 진행한 것은 어머니에 대한 신뢰가 컸기 때문이다. 어느 날 아내를 앉혀놓고 이야기했다. “여보, 나 도저히 안 되겠어.”
***[역경의 열매] 김재열 (6) “빨리 망하고 목회하자”… 매상 대부분 헌금
사업 접고 신학교로 돌아갈 생각에 망하기로 작정했지만 갈수록 번창… 복학 요건 안돼 총신대에 편입
김재열 미국 뉴욕센트럴교회 목사가 1974년 김숙희 사모와 서울 이화예식장에서 결혼예배를 드린 뒤 사진을 촬영했다.
“여보, 나 다시 신학교로 돌아가 신학공부를 해야겠어요. 사업이 아무리 잘 돼도 기쁨이 없어요. 염치없지만, 당신이 뒷바라지 좀 해주시오.”
신학교로 돌아가겠다고 다짐한 1974년의 어느 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 평신도로 살날이 1년도 채 남지 않았다. 마음껏 헌금 한 번 바쳐봐야 나중에 목회할 때 간증 거리라도 있지 않겠나.’
그때부터 주를 위해 망하기로 작정하고 하루 매상으로 들어온 돈 중 일부를 세지도 않고 누런 종이봉투에 담았다. ‘이렇게 하면 금세 망할 것이다. 더이상 세상에 미련을 두지 않으려면 철저히 망해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생각은 나보다 높고 컸다. 주를 위해 망하려 했지만, 사업은 오히려 날개 단 것같이 번창했다. 당시 원남교회 집사 시절이었는데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아파트를 분양받고 서초구에 땅도 매입했다.
경기도 부천으로 옮긴 서울신대를 찾아갔다. 학교를 떠난 지 9년 만이었다. 학교를 둘러보니 입학 동기가 교수가 돼 있었다. 창피했다. 교무처를 찾아갔다.
“제가 뒤늦게 복학하려 합니다.” “문교부 정관에 입학과 졸업 연도가 10년을 넘을 수 없습니다.” “그럼 다른 방법은 없습니까.” “다른 신학교로 편입하면 가능합니다.”
서울 동작구 사당동 총신대 신학부 2학년에 들어가 3년 만에 학부를 졸업했다. 37세로 두 아이의 아빠였을 때다.
그런 사이에 총신대에서 나온 분들이 합동신학교(현 합동신학대학원대)를 개교했다. 그래서 합동신학교에 입학했다. 이 학교는 박윤선 신복윤 윤영탁 김명혁 박형용 교수님과 신학생들이 함께 시작한 신학교로 철저한 개혁주의 신학을 표방하고 있었다.
1978년 미국 캘리포니아로 이민을 떠났던 김재연 전 칼빈대 총장이 잠깐 서울을 방문했다. “야, 김 전도사. 결국 주의 길로 다시 돌아왔구먼. 잘했어. 하나님이 부르실 때 곧바로 순종하는 게 가장 빠른 길이야. 혹시 강남에 유명한 교수님이 교회를 맡았다고 하시는데 함께 가보지 않겠어.” “그래? 마침 새로운 교회를 찾던 중이었는데 잘됐네.”
현 서울 강남구 신사동 소망교회 건너편의 영안교회였다. 김명혁 교수님이 목회를 겸임하고 있었는데, 인사를 드렸더니 교육전도사를 맡아달라고 하셨다.
김 목사님은 부친의 순교 정신에 따라 순수한, 하나님 중심의 신앙인격을 갖고 계셨다. 하지만 이것이 그 교회 설립 멤버들에게 맞지 않았고 김 목사님이 갑자기 사임하시는 상황이 벌어졌다. 우리 가족도 함께 섬길 교회가 없어졌다. 김 목사님을 찾아갔다. “목사님, 개척 교회를 시작합시다.” “저는 이제 신학생들을 가르칠 것입니다.” 김 목사님은 첫 목회에 실망해 목회에 미련을 갖지 않고 계셨다. 그러나 끈질기게 부탁했다. “그럼 교회가 없는 지역을 찾아봅시다.”
그때부터 주일 오후에 차를 타고 인천 오산 동두천 등을 6개월 이상 돌아다녔다. 결론은 사람 사는 곳마다 이미 교회가 있다는 것이었다. 더이상 개척할 지역이 없었다. 마침 교회가 없는 곳이 있었다.
***[역경의 열매] 김재열 (7) 분양받은 교회 잔금 못 치르자… 아내 “아파트 팔자”
김명혁 목사님 모시고 강변교회 시작… 부교역자로 사역하다 산성교회 개척
김재열 미국 뉴욕센트럴교회 목사(왼쪽)가 2013년 11월 아내 김숙희 사모와 함께 김명혁 강변교회 원로목사의 사무실을 찾았다.
내가 사는 서울 강남구 청담동 삼익아파트가 막 입주하고 상가를 짓는 데 교회가 없었다. 김명혁 목사님과 함께 분양사무실로 달려갔다. 그리고 믿음으로 280㎡(85평)짜리 상가를 분양 계약했다. 잔금이 5800만원이었는데, 삼익아파트 한 채가 1200만원 하던 시절이었다.
가정예배를 드리는데 아내가 자꾸 울면서 이런 기도를 했다. “하나님, 우리는 이렇게 편하게 사는데 교회는 모일 장소가 없어서 죄송해요.” 듣다가 나도 마음의 감동이 일었다. “여보, 울 것 없어요. 우리 이 아파트를 건축헌금으로 드립시다.”
1970~80년대만 해도 서울 시내 대형교회는 영락교회 다음이 충현교회였다. 고등학교 친구 부모님이 장로, 권사였는데 충현교회 건축을 할 때 집을 팔아서 건축하는 모습을 봤다. 그래서 그때 알았다. ‘아, 교회 건축은 원래 저렇게 하는구나.’
성도 중 한 분이 자기 집을 보증으로 잡히고 건축헌금을 드렸다. 여기저기서 돈을 끌어와 1980년 김명혁 목사님을 모시고 서울 강변교회가 시작됐다. 강변교회 부교역자로 사역하던 나는 합동신학교 4회 졸업을 하고 교회 개척을 놓고 기도를 시작했다. ‘내 스타일상 시골 목회는 아니다. 체질상 도시목회가 맞다.’
84년 서울 송파구 지하실에서 산성교회를 개척했다. 기도만 하면 수많은 양 떼와 소 떼를 보여주셨다. 폐병에 걸려 죽음의 위기까지 갔지만, 다시 살려주신 하나님의 역사가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그때는 목회에 대한 불안조차 없었다. 주님이 하시는 역사였기 때문이다. 87년 60명이 출석할 때 2000명을 초청하는 전도대잔치를 열기로 했다. 날짜는 11월 20일부터 22일까지였다. 스티커를 수만 장 찍어서 집마다 붙였다. 조간과 석간신문에 전단을 삽입했다.
간증자로 지금은 목회자가 된 김신조씨와 연애인교회 서수남 집사, 전 국가대표선수 이영무 전도사를 초청했다. 그들을 간증자로 세우고 나는 15분짜리 짤막한 복음 메시지를 전하기로 했다.
드디어 디데이가 앞으로 다가왔다. ‘얼마나 교회로 올까.’ 전도 대잔치 날이 됐다. “두두두두.” 교회 사무실에 있는데 사람들의 발소리가 건물을 울렸다. 자그마치 1670명이 모였고 그중 결신자가 550명이나 됐다. 금세 출석 교인이 260명이 됐다. 지하실이 모자라 3층 상가를 추가로 얻었다.
하지만 여러 사람이 들어오다 보니 잡음이 컸다. 하루는 제직회를 하는데, 지하 예배당에 장의자를 놓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그러자 한 성도가 손을 번쩍 들더니 반대 의사를 밝혔다.
“목사님, 우리는 큰 교회가 되는 게 싫어서 여기로 왔습니다. 교회 성장보다는 이름 없이 구제하고 전도하는 게 진짜 교회 모습 아니겠습니까.” 그들은 사사건건 나의 목회에 태클을 걸었다. 지금 와서 보니 구제라는 명목으로 자기들이 꿈꾸는 교회를 만들려 했던 것 같다.
***[역경의 열매] 김재열 (8) “험지로 가자”… 캐나다 이민목회 사역의 길로
창립 멤버들 견제로 산성교회서 사임… 주님 인도하심 따라 토론토서 목회
김재열 미국 뉴욕센트럴교회 목사가 1987년 11월 서울 산성교회 목회시절 2000명 초청 전도잔치를 개최하면서 나눠준 전단지.
1984년 서울 송파구 석촌호수 주변 지하실 한 칸을 얻어 시작한 산성교회는 몇 년 만에 270여명이 모이며 안정적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교회창립 멤버들의 견제가 너무 심해 87년 사임했다.
신학교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어려운 목회지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인천 길병원 원목 인터뷰까지 마쳤다. 아내가 기도하더니 “원목 사역은 아니다”라고 했다.
김명혁 강변교회 목사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김재열 목사, 혹시 캐나다 갈 생각 없나.” 그 교회가 어떤 곳인지 알아봤다. 20여명 모인 교회인데 지난 10년간 6명의 목회자가 바뀌었다고 했다. “어려운 곳으로 가라는 주님의 인도하심이라 믿고 가겠습니다.”
88년 12월 네 식구가 함께 캐나다 토론토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해외는 처음이었다. 토론토 반석교회에 부임했는데,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갑자기 지구본 위에 점 하나 찍힌 곳에 가는 느낌이 들었다. 외로움이 밀려왔다.
이민 목회 사역을 기도로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혼자 토론토 근교 예수원이라는 기도원으로 향했다. 그날따라 폭설이 내려 차량이 길 한가운데 꼼짝없이 갇혔다. 사역의 앞날도 답답한 마당에 길마저 보이지 않으니 큼지막한 돌덩이가 마음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런 확실한 음성을 주셨다. “아들아, 내가 너와 세상 끝날까지 함께할 것이다.” 이는 내가 서울 남대문 대도백화점에서 의류사업을 할 때 엑스플로74 대회에 참가해 받았던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즉시 운전석에서 내려 바닥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주여, 잠시라도 믿음 없었던 종을 용서하소서. 주님께서 평생 같이해주신다고 했는데 이 못난 종이 딴생각을 했습니다. 주여, 회개합니다.”
기도원에서 1주일 금식하면서 이민목회가 하나님의 확실한 인도하심이라는 응답을 받았다. 주일에 한 번밖에 없던 예배를 늘렸다. 매일 새벽 제단을 쌓고 수요일 오전·오후 예배를 신설했다. 주일학교도 새로 만들었다.
새벽 5시 30분 새벽예배를 시작했는데, 처음 3개월 동안은 우리 부부만 기도했다. 어느 날부터 여집사가 부부싸움을 한 뒤 출석하기 시작했다. 그 집사가 응답을 받았다며 소문을 내자 삽시간에 30여명이 모였다. 전 교인이 20명인데, 이웃교회 교인도 10여명이 나오기 시작했다.
주일예배는 캐나다인들이 출석하는 성공회 교회건물을 빌려서 주일 오후 1시 30분에 드렸다. 캐나다 교인들은 주일 오전에 한 번만 예배를 드렸기에 사실상 우리 교회처럼 건물을 사용했다.
교회는 1년 만에 출석 성도가 150명으로 불어났다. 주일학교 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공간이 필요했다. “하나님, 새 예배당을 주님께 드리고 싶습니다. 기회를 주십시오.”
90년 10월이었다. 장로 한 명이 달려왔다. “목사님, 우리교회가 조만간 건축할 것 같습니다.”
***[역경의 열매] 김재열 (9) 성도들 “성전 건축은 다음 기회에”… 작정 헌금 속속
한 장로님 꿈과 똑같은 예배당 발견… 부담스러운 건물가에 고민하다 기도
김재열 미국 뉴욕센트럴교회 목사(앞줄 가운데)가 1988년 캐나다로 떠나기 전 송상철 미국 애틀랜타 새한교회 목사(앞줄 왼쪽), 고 안만수 화평교회 원로목사(앞줄 오른쪽)와 함께했다.
“목사님, 간밤에 제가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교회의 새 예배당을 봤습니다. 2층 유리 건물로 돼 있는데, 골목 마지막 부분에 있었습니다. 그 옆에는 아주 큰 성당을 짓고 있었어요.”
당시 예배당 건축은 시기상조였다. “장로님, 꿈값을 잘 지키고 계십시오.” 두세 달 후 부동산 중개업을 하던 장로 한 분이 찾아왔다. “목사님, 정말 좋은 예배당 건물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답사를 가보시겠습니까.”
그래서 교인들과 함께 가봤다. 그런데 내게 꿈 이야기를 했던 장로가 눈이 휘둥그레지는 게 아닌가. “목사님, 꿈에 보던 그 교회가 바로 이 교회입니다.”
그 건물은 캐나다 교회가 건축 중에 부도가 나서 은행으로 넘어간 물건이었다. 경매 중이었는데, 캐나다 달러로 97만 달러였다. 원래 건물 가격의 3분의 1 수준이었는데, 당시 한국 돈으로 10억원쯤 되는 큰돈이었다.
건물 가격이 알려지면서 부정적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 불경기에 왜 교회건축을 해야 합니까.” “구제를 해야지 무슨 교회건축입니까.” 더구나 꿈을 꿨다는 장로는 건축이 부담스러웠는지 슬그머니 사라져버렸다.
실망스러운 마음에 금식기도원에 가서 두 가지 기도 제목을 놓고 1주간 기도했다. “하나님, 이 불경기에 꼭 건축해야 합니까. 왜 우리 교인은 물질적으로 가난합니까.”
기도 중 비몽사몽 간에 하나님께서 내 혀를 뽑는 고통을 주셨다. “네가 이 혀를 잘못 사용해서 교인들이 가난해진 것이다.” 신음 가운데 주님께 물었다. “어떻게 제가 혀를 잘못 사용했다는 말씀입니까.” “처음엔 성경대로 설교하더니 이제는 교인을 위로하는 설교만 하고 헌신을 가르치지 않고 있다.”
1992년 1월 주일 강단에서 울면서 설교했다. “여러분, 여러분이 가난한 것은 제 잘못입니다. 용서해주세요.“ 그리고 한 주간 기도 속에서 주신 말씀을 나눴다. “불경기이기 때문에 그렇게 비싼 건물이 우리에게 연결된 것입니다. 불경기가 오히려 기회입니다. 주님께서 이 사실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예배 후 한 집사가 목양실로 찾아왔다. “목사님, 이번 건은 포기합시다. 다음을 위해 제가 10만 달러를 미리 작정하겠습니다.” 뒤이어 장로가 들어왔다. “목사님, 저는 5만 달러를 작정할게요. 이 돈으로 다음 기회를 준비하죠.”
마치 회의를 한 것처럼 계속해서 성도들이 들어오더니 5만 달러, 2만 달러, 1만 달러 등을 작정하고 갔다. 10여명이 그렇게 작정했는데, 67만 달러였다. 건물 가격이 97만 달러였으니 30만 달러가 부족했다.
다음 주일에 강단에서 선포했다. “여러분, 이렇게 작정 헌금이 모였습니다. 다들 이번 건을 포기하고 다음 기회를 기다리자고 했지만, 67만 달러가 모였습니다. 당장 그 예배당 매입을 추진합시다.”
그리고 교인 대표와 함께 은행 이사회를 찾아갔다. “뭐라고요. 지금 가격에서 30%를 더 할인해 달라고요. 오 노. 97만 달러에서 1센트도 깎을 수 없습니다.”
***[역경의 열매] 김재열 (10) 예배당 새로 짓고 목회할 일만 남았는데 청빙이라니…
건물 매입 후 2년 공사 끝에 입당예배… 한 기도회서 뉴욕중부교회 후임 부탁
1994년 11월 캐나다 토론토 열린문교회 입당예배에서 김재열 목사와 성도들이 함께했다.
같이 갔던 장로님이 캐나다 은행 이사에게 하소연했다. “이사님, 교회는 개인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 코리안 이민자들이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이것밖에 없습니다.” “절대 안 됩니다.” “우리 교회 교인들은 대부분 블루칼라입니다. 67만 달러도 대출을 받아야 만들 수 있는 돈입니다. 이게 최선입니다.” “거참… 그럼 한번 생각해 봅시다.”
1992년 간절한 기도 끝에 건물 키를 넘겨받았다. 캐나다교회 건물은 교육관만 지었지 본당은 손도 못 대고 부도 난 상태였다. 2년간의 공사 끝에 94년 11월 입당예배를 드렸다. 예배당을 건축하고 장로 5명을 세웠다. 교인이 450여명으로 늘어났다.
96년 2월 미국 펜실베이니아 포커너기도원에서 동부지역 목사장로기도회가 열렸다. 간절히 기도하고 숙소로 돌아왔는데, 이철 목사가 내 방을 찾아왔다.
“목사님, 의논할 게 있습니다. 제가 서울의 남서울교회 홍정길 목사님의 후임으로 확정됐습니다. 그런데 뉴욕중부교회 후임자가 없는 상황입니다. 어제 김 목사님을 보는 순간 적임자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아이고, 저와는 상관없습니다. 지금 토론토 열린문교회는 한참 성장하고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정중하게 사양하겠습니다.”
이 목사는 토론토에 집회를 왔다가 내가 담임하는 열린문교회가 부흥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잠깐 교회를 둘러봤다고 했다. “김 목사님, 기도라도 하시겠다고 약속만이라도 해주십시오. 정말 급합니다.” “네, 기도는 목사의 일이니까 해보겠습니다.”
집에 와서 얘기했더니 가족들이 쌍수를 들고 반대했다. 나도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소문이 퍼지자 토론토 열린문교회 성도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강단에 서서 이렇게 선포했다. “이제 건축 마치고 편안하게 목회할 일만 남았는데 뭣 하러 험한 미국 뉴욕까지 가겠습니까. 저도 갈 맘이 전혀 없습니다.” 그날부터 나를 붙잡기 위해 장로 중심으로 비상 심야기도회가 열렸다.
그런데 그날부터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당시 토론토교회협의회 부회장이었는데, 정기총회 때 느닷없이 다른 사람이 회장에 선출됐다. 결격사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자동승계가 원칙인데, 갑작스러운 회장 선출로 마음이 좀 불편해졌다.
‘거참, 이상하다.’ 이어서 캐나다 노회 성경학교 교수 명단에서 빠져버렸다. 강의하지 않겠다고 통보한 것도 아니었는데, 새 학기 강의가 모두 없어졌다.
자존심이 상하기도 해서 물어보지도 않았다. 더 황당한 것은 토론토 교계 광고에서 내 사진이 지워진 것이다. 그리고 뉴욕의 신문광고에 내 사진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뉴욕중부교회 집사 중 한 사람이 내가 무조건 후임자가 될 것으로 생각하고 토론토 교계 신문에 전화해서 내 얼굴 사진을 삭제해 버렸다고 했다. 그리고 뉴욕에 있는 교계 신문에 전화해 뉴욕중부교회 담임목사 얼굴 사진으로 내 사진을 넣었다고 했다.
***[역경의 열매] 김재열 (11) 뉴욕중부교회 부임… 3년 만에 성도 1200명 폭풍성장
주일학교 공간 부족해 부모들 건축제안… “부촌에 이민자 교회 건축이 웬 말이냐”
김재열 미국 뉴욕센트럴교회 목사가 1996년 6월까지 담임했던 캐나다 토론토 반석교회. 지금은 토론토 다운스뷰 장로교회로 개명했다.
1996년 4개월간 기도하는데 캐나다를 떠날 수밖에 없는 징조가 자연스럽게 보이기 시작했다. 교인들마저 이렇게 이야기했다. “기도해보니깐 목사님이 뉴욕으로 가는 게 하나님 뜻인 것 같습니다.” 가족들도 처음엔 결사반대하다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는 확신이 들었는지 생각을 바꿨다.
그해 6월 뉴욕중부교회 3대 목사로 부임했다. 주변에선 다들 우려했다. “그 교회 악명높은 장로들이 있습니다. 보통 교회 아닙니다. 가지 마세요. 제 명에 못 삽니다.” “인간관계는 상대적입니다. 하나님이 가라면 가야죠.”
뉴욕에 도착하니 토론토 열린문교회와 건물은 물론 교세도 비슷했다. 처음부터 2명의 장로가 사사건건 태클을 걸었다. 장로 한 사람은 목회자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었다.
“요즘 목사들, 큰 교회 오라고 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갑니다.” “뭐라고요. 아니 이 교회가 성도가 얼마나 나오고 예배당이 얼마나 크다고 그런 소리를 합니까. 말을 함부로 하시면 안 됩니다.”
부임 이후 매년 등록 교인이 250명씩 늘기 시작했다. 3년 만에 성도가 1200명까지 불어났다. 의사와 약사만 55명이 출석했다. 뉴욕 동쪽 리틀넥에 위치한 예배당에서 2부 예배를 4부 예배까지 늘렸다. 주일학교 교육공간이 부족해서 컨테이너 4개를 놨다. 그것도 공간이 모자라 시차제로 예배를 드렸다.
1999년 어느 날 학부모들이 찾아왔다. “목사님, 이제 우리교회 건축을 합시다. 교육공간이 작아서 도저히 안 되겠습니다. 여기 180만 달러를 준비했습니다.”
롱아일랜드 올드웨스트베리의 8만4983㎡(2만5707평) 대지를 계약했다. 토지주는 미국 건축회사 회장이었다. 알고 보니 그 땅은 회장의 승마연습장이었다. 폐암 진단을 받은 그는 자신의 땅을 의미 있는 데 사용하고 싶었던 것 같다. 대출을 포함해 315만 달러를 지급했다.
그때부터 19년간 가시밭길이 시작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카운티에 건축신청을 하면서부터 교회 내 건축 반대파가 결집하기 시작했다.
“아니, 시가로 1000만 달러짜리 땅을 315만 달러에 산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그 땅은 분명히 하자가 있는 땅입니다. 롱아일랜드 부촌에 어떻게 이민자들을 위한 교회를 짓는다는 말입니까.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됩니다. 목사님께 항의합시다.”
교인 가운데 부동산 브로커를 하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들고 일어났다. 설상가상 올드웨스트베리 카운티에서는 교인 명부를 요구했다. 자신의 지역에 얼마나 사람들이 거주하는지 확인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당시 그 지역에 거주하던 성도는 한 명도 없었다. 1만6528㎡(5000평) 이상이 돼야 집을 한 채 지을 수 있는 동네였다. 20년 전 주택 최저 가격이 200만 달러를 웃돌던 부촌이었다. 당연히 동양의 이민자들이 들어오는 걸 좋아할 리 없었다.
***[역경의 열매] 김재열 (12) 건축 늦어지자 불평불만… 목회자·교회 재정까지 의심
교인 중 일부, 토지구매 리베이트부터 목사 사례비·활동비·자녀 교육비까지
김재열 미국 뉴욕센트럴교회 목사가 1999년 315만 달러를 주고 매입한 미국 롱아일랜드 올드웨스트베리 교회 부지. 축구경기장 10배 크기다.
안팎으로 고난과 역경이 닥쳤다. 타운에선 2년간 건축법 적용을 하지 않겠다고 나섰다. 건폐율도 12%에서 4%로 낮췄다. 소수민족인 한국인들이 들어오면 집값이 내려갈 것이라고 염려한 결과다.
갑질도 이런 갑질이 없었다. 문제는 내부에 있었다. 수년간 교회 건축이 진척되지 않으니 온갖 불평불만이 쏟아져 나왔다.
교인 중 일부가 2005년부터 토지구매와 관련해 리베이트 의혹이 있다며 문제를 제기됐다. 당시 시가로 1000만 달러가 넘는 거액의 땅을 3분의 1 값으로 구입했다는 데 의구심을 갖기 시작했다.
토지 소유주와 이면 계약서는 결코 없었다. 문제를 일으킨 사람들이 사실 확인을 요청하자 토지 소유주의 변호사는 ‘결코 그런 사실 없다’는 답변서를 보내왔다. 돈을 받았다고 지목한 부사장에게서 ‘그런 사실이 없다’는 친필 서명을 받았는데도 불신하는 사람들은 도통 믿으려 하지 않았다.
담임목사 사례비와 목회활동비, 자녀 교육비 문제도 걸고 넘어갔다. 당시 한국에서 그랬듯이 미주 한인교회도 담임 목회자와 부교역자에게 제공되는 사택비와 자녀 교육비는 별도로 계정관리를 했다. 비과세 항목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를 제기했던 사람들은 내 연봉 3만5000달러에 교역자 수양회비, 심방비, 사택 유지비 등을 모두 합산해서 마치 16만 달러가 넘는 사례를 받는 것처럼 부풀렸다.
영수증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영수증이 없는 경우 신용카드 명세서가 있다고 했지만, 대화가 되지 않았다. 의혹의 유언비어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러자 1200명 교인 중 이탈하는 이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저는 목사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성도입니다. 하나님의 돈을 그렇게 함부로 쓰지 않습니다. 수표 한 장도 사인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전혀 없습니다.”
사실과 다른 소문이 퍼지자 급기야 2005년 공동의회 때 6인 조사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했다. 교회 대표로 장로 3명과 문제 제기자 집사 3명으로 구성된 조사위원회는 7개월간 과거 10년간의 재정을 조사했다. 2006년 7월 보고서를 만들었다. 그러나 보고서 내용이 일방적이었기에 장로 3명은 동의하지 않는다며 거부했다.
한국교회나 미주 한인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다. 목회자 사례와 교회재정이 불투명하다며 반기독교 인터넷 언론을 통해 외부에 알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민주, 교회개혁, 투명성 확보 등의 거창한 이름을 내세운다. 하지만 문제를 제기한 사람들의 목적은 다른 데 있는 듯했다.
교회를 지키려는 성도들이 참다못해 목양실로 찾아왔다. “목사님, 허위사실을 유포하는 사람들을 더이상 내버려 둬선 안 됩니다. 이들을 징계해서라도 교회 질서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고통스러웠다. 문제를 일으킨 사람들도 목자의 심정에서 보면 똑같은 양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도 중에 교단 헌법에 따라 교회에 대한 기본적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선 권리 행사를 막는 게 성경적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역경의 열매] 김재열 (13) 건축 반대하던 성도들 “건축위원장이 뒷돈 받았다” 음해
노골적으로 예배 방해하며 막무가내 반대… 참다못해 권고휴직 내리자 더 거세게 반발
김재열 미국 뉴욕센트럴교회 목사가 2001년 뉴욕중부교회 시절 ‘교회 설립 31주년 감사 음악회’에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눈이 올 때는 쓸지 말라는 속담이 생각났다. ‘저렇게 불평하다가 진실을 알게 되면 그치겠지.’ 그렇게 교인을 믿고 미온적으로 대처했다. 그러나 분란을 일으킨 사람들의 소요는 그칠 줄 몰랐다.
목회자와 교회를 음해하는 이메일을 돌리고 교회 홈페이지에 비방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홈페이지를 차단하자 정의를 세우겠다며 독자적으로 사이트를 열어 온갖 음해성 글을 익명으로 쏟아내기 시작했다.
문제를 일으킨 주동자는 건축위원장 장로와 동갑이었다. ‘자기 으뜸’의 성격 소유자였는데, 삭발까지 하고 자신이 마치 정의의 사도인 것처럼 행동했다. 강단 앞 의자를 차지하고 앉아 의도적으로 책 넘기는 소리를 크게 냈다. 노트북 타이핑 소리로 예배를 방해하기 시작했다. ‘아멘’하지 말아야 하는 대목에 큰 소리로 ‘아멘’을 하면서 훼방했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대개 피택에서 떨어진 사람들이었다. 당회는 노골적으로 교회를 해치는 세력을 더이상 방관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개인적으로 불러 권면했고 교회 대표 두 사람을 보내 다시 권면했다. 그러나 돌이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결국, 당회에서 문제를 일으킨 사람들에게 권고 휴직 권징을 내렸다.
저들의 반발이 더욱 거세졌다. 집요하게 건축위원장이 땅을 구입하는 과정에서 뒷돈을 받았다고 공격했다. 증거서류를 내놓아도 막무가내였다.
그러다 청천벽력 같은 사건이 벌어졌다. 심한 스트레스를 받은 건축위원장이 갑자기 쓰러진 것이다. 그는 뇌출혈로 8개월간 혼수상태로 있다가 2007년 부활주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이 밀려왔다. 50대 장로가 같은 교회 성도들의 공격으로 생명을 잃었으니…. 반대세력은 뉘우치기는커녕 마치 자신들이 정의로 승리했다는 듯 손들고 찬양했다. 사람이 얼마나 악할 수 있는가를 봤다.
반대세력도 양심의 가책을 느낀 듯했다. 비리 증거를 찾아 증명하겠다며 혈안이 돼 있었다. 당시 교회의 재정관리는 완벽하게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공동의회에서 심의하고 채택한 예산안에 따라 각 위원장이 결재했다.
2개월에 한 번씩 제직회를 진행하고 집행 현황을 검토했다. 전·후반기 자체 재정감사를 했다. 연말에는 전문 회계사에게 수만 달러를 지급하며 감사를 받았다. 앞으로 있을 건축 대출금 신청에 필요한 서류를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 해 뉴욕검찰청에서 연락이 왔다. “검찰청 올리비에 검사입니다. 교회 재정 비리 고발장이 접수됐습니다. 맨해튼 검사실로 와주셔야겠습니다.” 검찰에 고발당하면 겁먹고 자신들을 찾아 화해를 시도할 것이라는 의도가 있었던 것 같다.
10년간의 재정 서류 박스 7개를 들고 검찰청에 갔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했다. “뉴욕중부교회에 재정 비리가 있다고 하니 저도 궁금합니다. 꼭 철저하게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검사가 당황하는 눈치였다. 서류를 보더니 3가지 질문을 던졌다.
***[역경의 열매] 김재열 (14) 재정 비리 의혹, 검찰 조사 4년 만에 무혐의로
장부 조사 결과 고발 내용 사실과 달라… 몇 년 뒤 공격 가담했던 성도 눈물로 후회
김재열 미국 뉴욕센트럴교회 목사가 2007년 초 조사를 받았던 뉴욕검찰청 전경. 사건은 4년 만에 무혐의로 종결됐다.
“목사님은 교회 수표에 사인을 직접 하십니까. 혹시 카드로 현금을 인출해 사용하신 적이 있습니까. 교회 운영 시스템은 어떻게 됩니까.”
“교회 수표는 각 운영위원장이 결제합니다. 현금 인출은 하지 않습니다. 카드도 없습니다. 교회 재정은 당회, 제직회, 공동의회 구조에 따라 예산을 심의·확정·집행합니다. 행정적 보완 기관으로는 교회-노회-총회의 구조로 돼 있습니다. 교회는 사기업과 엄연히 다른 시스템을 갖고 있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목사님, 소송법에 따라 일단 고발된 건을 반려하지 못하게 돼 있습니다. 조사는 하겠지만, 대부분의 고발은 허위로 끝납니다. 제가 교회 문제를 많이 취급해 봤습니다. 조사하면서 교회를 불평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게 뭡니까.” “재정문제였습니다.”
검찰은 교회 장부를 꼼꼼히 점검했다. 미미한 문제가 있긴 했다. 주방에서 반찬거리를 사서 몇 푼 안 되는 돈을 합산한 뒤 교회에 청구한 수표에 ‘캐시’라고 쓴 것이 몇 건 나왔다. 8년 전에 이웃 교회가 새 예배당을 구입할 때 건축헌금을 보냈는데 영수증이 없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그 교회로부터 소급해 영수증을 받아 제출했다.
반대측이 기소한 사건은 2010년 10월 무혐의로 끝났다. 신기한 것은 4년 만에 검찰청 사건이 종결된 그 주의 주말에 12년간 기다렸던 올드웨스트베리 교회부지의 건축허가가 낫소 카운티와 올드웨스트베리 타운에서 나왔다는 점이다.
그래도 반대 측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누가 돈을 해먹을 때 들키게 합니까. 기다리면 비리가 드러날 것입니다.” 영적으로 사탄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넘어뜨리기 위해 충동질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니 행동은 갈수록 거칠어졌다.
이렇게 교회를 대적하니 가정상황이 좋을 리 없었다. 각종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반대 측에 가담했던 사람들은 어느 순간이 되자 자기 가족에도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 감지한 듯했다. 그리고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성도 수가 급감했지만, 헌금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과 교회에 의구심을 가졌던 사람들이 성도의 의무를 똑바로 이행하지 않았다는 말이기도 했다.
사건이 종료되고 2~3년 뒤 공격에 가담했던 3가구가 찾아와 눈물을 흘렸다. “목사님, 교회를 떠나면 문제가 끝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도무지 교회 생활을 해도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저희가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타운의 건축허가는 조건부였다. 3500그루의 나무 수종과 굵기, 간격까지 지정했는데 타운이 일방적으로 설계한 조경공사를 통과하면 공사 허가를 내준다는 조건이었다. 건축위원장이 가져온 견적서에 따르면 조경공사만 1000만 달러가 들어갔다. 건물까지 지으면 몇천만 달러가 필요했다.
그러자 14년간 건축허가가 나오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던 시무장로들이 슬그머니 태도를 바꿨다.
***[역경의 열매] 김재열 (15) 1000만 달러 조경공사 앞에 ‘길 잃은 성전건축’
14년 만에 나온 조건부 건축허가에 시무장로들 의견 6대6 찬반 갈려… 반대하던 장로들 은퇴청원으로 압박
김재열 미국 뉴욕센트럴교회 목사(뒷줄 가운데)가 2015년 12월 장로 안수집사 권사 임직식을 갖고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14년 만에 건축허가가 나왔는데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느낌이 들었다. 시무장로 7명이 오더니 이렇게 이야기했다.
“목사님, 이제 건축은 여기까지입니다. 성전 건축은 다음세대에게 넘깁시다. 아니면 그 땅을 매각해 이곳을 증축합시다. 우리는 더이상 할 수 없습니다.”
14년간 강단에 올라가 대표기도를 할 때마다 건축허가를 달라고 울부짖던 장로들이 1000만 달러짜리 조경공사 견적서 앞에서 완전히 무너졌다. 마치 광야 1세대처럼 말이다.
건축위원장을 개인적으로 불렀다. “장로님, 1000만 달러짜리 조경공사 견적서를 달랑 한 장 제출한 의도가 뭡니까. 2~3개 견적서를 받는 게 관례 아닙니까. 자신 없으면 그만두셔도 됩니다.” 그래서 건축위원장은 사표를 내고 아내 건강을 핑계로 교회를 떠났다.
기존 장로 중 건축위원장을 맡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자연스럽게 건축위원회 총무로 일하던 신임 장로에게 위원장 자리가 돌아갔다. 이때부터 당회가 모이면 6대 6으로 건축 찬성과 반대 의견이 갈렸다.
12명의 장로를 수시로 격려했다. “장로님, 전 지금까지 세 번의 교회당 건축 경험을 했습니다. 지나고 보니 교회 건축은 돈으로 하는 것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평안교회 장로님들이 집을 내놓고 헌신했던 이야기부터 두 번 집을 담보로 건축헌금 했던 이야기를 했다. 서울 강변교회와 토론토 열린문교회 건축 간증을 들려줬지만, 반대하는 장로들은 막무가내였다.
시간은 자꾸만 흘러갔다. 악전고투 끝에 14년 만에 건축허가를 받고도 다시 건축 찬성과 반대로 나뉘어 2년간 표류하고 있으니 참으로 답답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기서 중단시키지 않으셨다. 2012년 말이었다. 건축을 반대했던 장로 5명이 목양실로 들어왔다.
“목사님, 죄송합니다. 우리가 더이상 목사님의 비전에 걸림이 되지 않으려고 시무장로 은퇴를 청원합니다. 부디 받아 주십시오.” 또 한 번 억장이 무너졌다. “절대로 받을 수 없습니다. 가지고 가세요. 새 믿음으로 다시 해 봅시다.”
반려했으나 완강했다. “여러분의 뜻이 정 그렇다면 한 주간 기도하고 가부를 결정하겠습니다.” 토요일 저녁 장로 부부를 초청했다. 가벼운 분위기로 즐겁게 식사를 마쳤다. 내가 새로운 제3의 계획을 가져왔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눈치였다.
“장로님들, 그동안 수고가 참 많았습니다. 내일 주일에 3부 예배에 모두 나오시기 바랍니다. 은퇴 기념패를 준비했습니다.” “네?”
이렇게 2년간 건축 비전을 표류시킨 6명의 장로가 깨끗하게 물러났다. 이 사건은 내 목회에서 가장 큰 결단이었다. 그렇지 않고는 도저히 건축할 수 없었다.
갑자기 시무장로 절반이 타의에 의해 물러난 상황이 됐다. 당사자들은 은근히 교인들이 일어나 자신의 처지를 대변해줄 것으로 기대하는 눈치였다. 교인들의 반응은 달랐다.
***[역경의 열매] 김재열 (16) 건축헌금 아무도 하지 않자 “담임목사인 제가 먼저…”
교회 형편과 맞지 않는 건축비 고민 중 유명 건축사에서 싼 가격에 건축 제안
로 매스너 R&M 컴퍼니 회장이 2014년 11월 미국 뉴욕 롱아일랜드 올드웨스트베리 뉴욕센트럴교회 착공 예배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새로운 분위기에서 드디어 건축이 활기를 띠었다. 건축 시공회사를 공모하기로 하고 광고했다. 몇 군데 회사가 의향서를 제출했다. 많게는 3200만 달러, 적게는 1800만 달러였다.
당시 교회 형편상 건축비는 1500만 달러를 넘을 수 없었다. 반짝 빛나던 밝은 태양이 또다시 먹구름 속으로 숨는 듯했다. 몇 달을 묵묵부답으로 묵언 기도에 들어갔다.
도무지 대안이 없었다. 또 6개월이 흘렀다. 어느 날 장로님이 달려왔다. “목사님,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조경공사와 비품 일체까지 포함해 1150만 달러에 다 맡아서 건축하겠다고 제안한 회사가 있습니다.” 여호와 이레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에 딱 맞는 맞춤형 건축회사를 붙여 주셨다.
‘R&M 컴퍼니’라는 미국회사였는데, 60년간 미국 교회당만 1800개를 건축한 미국 최대의 교회당 건축 전문 회사였다. 로 매스너 회장은 80세가 넘었는데 14살 때 모세가 성막을 바쳐 영광을 돌린 대목에서 감명받아 평생 교회당 건축에만 헌신한 분이었다. 이익을 위해 운영하는 회사가 아니었다.
새 건축위원들의 의욕이 넘쳤다. 그러나 사탄은 호락호락하게 물러나지 않았다. 모금팀장에게 건축 재정 계획과 모금 일체를 일임했다. 모금팀장이 입을 열었다. “이번 건축의 목표는 빚 없이 건축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헌금액수는 달라도 헌신은 동일하게!’를 표어로 잡겠습니다.”
건축위원장부터 집을 바칠 각오를 주문했다. 뉴욕중부교회 예배당 건물을 700만 달러에 매각하고 나머지 500만 달러를 성도들이 작정하면 무난하게 진행할 수 있을 듯했다.
건축 예산과 모금 계획은 너무나 간명했다. 곧 교회 앞에 광고했다. 그러나 자원하는 성도가 아무도 없었다. 건축위원장이 자원해 앞장서면 성도들이 참여하는 것이 보통 교회들의 관례였지만, 현실은 달랐다.
안타까운 시간이 그렇게 또 두어 달이 지나갔다. 가을 부흥회 마지막 날 밤이었다. 그 시간은 건축을 위해 합심 기도한 후 성도들 앞에 말했다.
“여러분, 담임목사인 제가 먼저 3년 치 사례비를 건축헌금으로 바치겠습니다. 자원해서 정성껏 참여해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아내와 아무런 상의도 없이 홀로 작정을 했다.
그다음 주일 모금팀장 집사님이 100만 달러를 헌신했다. 그때부터 50만, 30만, 20만 달러 헌금이 나왔다. 어려운 성도는 수천 달러를 헌금했다. 금세 450만 달러가 작정됐다. 믿음의 저력이 있는 성도들이 참으로 자랑스러웠다.
빛과 그림자는 늘 붙어 다니는 법이다. 작정 헌금이 모이면서 가시가 돋아나기 시작했다. 새 건축위원장이 100만 달러 헌금한 집사를 시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역경의 열매] 김재열 (17) “헌금 많이 한 교인만 우대하나” 건축위원장 몽니
작정 헌금액 차이나자 자존심 상한 듯… 많이 작정한 집사 노골적으로 모함
김재열 미국 뉴욕센트럴교회 목사(앞줄 오른쪽 두 번째)가 2015년 은행대출 계약을 완료하고 폴 현 모아은행장(앞줄 왼쪽 두 번째) 등과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아니, 100만 달러나 헌금하면 가난한 교인들은 어쩌라는 말입니까.” 건축위원장은 자존심이 상한 듯했다. 자신이 작정한 헌금 액수가 워낙 작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장로님, 이렇게 해보세요. ‘어려울 때 헌금에 앞장서 줘서 힘이 됩니다. 우리가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건축위원장으로서 이렇게 격려하고 그 집사님을 앞장세워서 협력하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 장로는 자존심이 상했는지 공을 세운 다윗을 미워하는 사울같이 변해갔다. 대표기도 시간이었다. “교회 건축을 앞두고 외식하는 부자들을 용서하여 주소서.” 그렇게 노골적으로 헌금 많이 작정한 집사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장로님, 기도 내용을 바꾸세요. 누가 들어도 덕이 안됩니다.” 서너 번 권면했는데 전혀 듣지 않았다. 그래서 3개월간 대표기도를 중지시켰다.
그는 성령이 떠나고 악신에 사로잡힌 사울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공격 대상이 모금팀장이 아니라 담임목사로 바뀌었다. “목사가 말이야 헌금 많이 하는 교인들만 우대하는 게 맞냐고.” 어느 날은 자신들이 교회 안에서 명예훼손을 당했다고 당회가 처벌해 달라는 청원서까지 제출했다. 늑대가 물러서더니 이제는 더 사나운 사자가 등장했다.
그래도 하나님의 사역은 여전히 전진하고 있었다. 건축 작정헌금도 목표액에 근접했다. 건축회사도 결정됐기에 공사를 본격적으로 준비해야 했다. 우선 1000만 달러를 건축 공사 보증금으로 지급해야 했다.
하지만 기존 건물을 매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택의 폭이 좁았다. 은행 대출밖에 없었다. 문제는 뉴욕의 시중 은행이 교회 대출을 아예 취급하려 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그런데 멀리 있는 필라델피아 모아은행의 폴 현 은행장이 1000만 달러를 대출해 주겠다고 했다. 그는 호성기 목사가 담임하는 필라안디옥교회에 출석하는 신실한 성도였다.
“제가 CBMC(기독실업인선교회) 세미나 강사로 목사님 교회를 찾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교회 비전을 듣고 때가 되면 도와야겠다는 감동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제게 은행장을 시킨 것은 목사님 교회 건축 도우라고 기회를 주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우리 교회 건축 공사가 거의 끝날 무렵에 그 은행을 떠났다. 지금은 북미주CBMC 사무총장으로 세계를 다니면서 비즈니스를 통한 선교 비전을 감당하고 있다.
2014년 드디어 새 땅 정지 작업에 들어갔다. 땅을 사고 15년 만의 일이었다. 온 교회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옛날 말 목장이었던 땅을 고르고 낡은 마사를 철거했다. 정지작업만 6개월이 걸린다고 했는데, 온통 먼지가 흩날렸다.
사택은 1999년 매입한 교회 부지 안에 있었다. 목장 관리인이 살던 160년 된 낡은 집이었다. 살수차를 운행했지만, 공사를 시작하자 사택은 먼지로 가득 찼다. 하루는 잠을 자는데 아내가 흔들었다.
***[역경의 열매] 김재열 (18) 공사장 먼지로 천식 위기… “목사님, 빨리 이사하세요”
160년 된 낡은 사택서 14년 동안 생활… 싼 집 찾았으나 자금 마련할 길 없자 제직회서 사택 구입 보조
미국 뉴욕센트럴교회가 2017년 올스웨스트베리 새 예배당으로 옮기기 전까지 사용했던 리틀넥 예배당.
“여보, 무슨 일이 있어요. 왜 흐느껴요.” 숨을 쉬면 색색거리는 소리가 났는데 1초 후에 휘익 소리가 났던 모양이다. 그게 아내 귀에는 흐느끼는 소리로 들렸다. 이튿날 주치의를 찾아갔다. “목사님, 빨리 이사하십시오. 내버려 두면 천식이 됩니다.”
이 소식을 들은 성도들은 눈물을 글썽였다. “목사님, 미안합니다. 사택을 진작에 준비했어야 했는데….” 허름한 사택을 사용한 이유가 있었다. 은행마다 건축 대출 조건이 까다로웠기 때문이다. 교회 통장에 잔액이 최소 100만 달러 이상 들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 조건을 맞추느라 사택 구매는 늘 뒤로 밀렸다.
새 땅에서 5분 거리에 싼 집을 찾았다. 계약금 4만3000 달러와 선수금 10만 달러가 필요했다. 우리 부부는 또 포기할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했다. 목사가 어디서 돈을 빌리겠는가. 계약하는 날이 됐지만, 여전히 빈손이었다.
내심 포기하고 있었다. 아내는 늘 그렇듯 기도하러 교회로 향했다. “사모님, 이것으로 우선 계약하세요.” 어느 권사가 개인 수표를 불쑥 내밀었다. “집값이 싸고 새 교회당에서 가까운 곳인데 놓치고 싶지 않네요. 목사님 건강도 생각하셔야죠.” 문제는 중도금 10만 달러였다.
당시 우리 부부는 완전히 빈털터리였다. 정말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것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3년치 사례금을 건축헌금으로 몽땅 드리다 보니 수중에 몇 달러도 없었다. 쌀이 없으면 어김없이 그다음 날 문 앞에 쌀 포대가 놓여 있었다. 교회는 수천만 달러 공사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0만 달러를 또다시 성도들이 분담하는 것은 부담스러웠다.
소식을 접한 당회에선 ‘재정 지출은 제직회 소관이라 권한이 없다’면서 제직회로 미뤘다. 이 모든 결정의 배후에는 교회 건축에 헌신하지 않으려는 건축위원장의 입김이 있었다.
제직회가 열렸다. 이때 장로님 한 분이 일어났다. “여러분, 지금까지 목사님은 목장 관리인이 살던 160년 된 낡은 집에서 14년을 사셨습니다. 그동안 주택비를 절약한 것만 따져도 30만~40만 달러가 족히 넘을 것입니다. 그런데 15만 달러 보조하는 것을 놓고 투표합니까. 그냥 박수 치고 만장일치로 받읍시다.”
하지만 기도 중에 비밀 투표가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투표 결과 서너 표가 많아 보조하기로 했다. 악인은 스스로의 웅덩이에 빠진다는 말씀처럼 처음부터 거수로 표결했다면 틀림없이 부결됐을 것이다. 건축위원장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매우 끈끈한 관계였기에 반대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힐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비밀 투표를 하는 바람에 몇 사람들이 마음을 바꿨다. 계획에 없던 사택이 그렇게 생겼다. 앙심을 품고 있던 건축위원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역경의 열매] 김재열 (19) 공사비 걱정하자 “하나님이 도우십니다”며 격려
매스너 회장 공청회서 낮은 원자재·인건비 비결 설명, 공사대금 연체되자 자기 돈 빌려주기도
김재열 미국 뉴욕센트럴교회 목사(왼쪽 네 번째)가 2014년 11월 뉴욕 낫소카운티 올드웨스트베리 예배당 착공식에서 로 매스너 회장(왼쪽) 등과 첫 삽을 뜨고 있다.
뉴욕센트럴교회가 새 예배당을 넉넉하게 건축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예비해주신 로 매스너 회장 덕분이다. 이 분은 1935년생인데 미국 캔자스에서 성장했다. 14살 때 모세가 성막을 만들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대목에서 자신의 사명과 비전을 얻었다고 했다. 60여년 동안 미국 내에 1만8000개 예배당을 건축해 미국 최대 건축가로 존경받는 분이었다.
건축위원회가 시공회사를 선정하기 위해 공모를 했다. 우수한 건축회사들이 1850만 달러부터 3000만 달러까지 견적을 보내왔다. 우리 교회의 형편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매스너 회장이 보내온 견적은 1150만 달러였다. 기대 이상의 파격적인 금액이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신뢰하고 계약을 체결했다. 평소에 이렇게 기도했기 때문이다. “하나님, 크든 작든, 네모나든 동그랗든, 누가 교회당을 만들어 그 자리에 갖다 놓으면 좋겠습니다.”
견적 가격이 너무 싸다고 의심하는 위원들도 있었다. 건축위원회가 공청회를 열어 매스너 회장을 초청해서 궁금한 점을 물었다. “회장님, 이처럼 낮은 가격의 견적을 어떻게 산출하셨나요. 뉴욕의 물정을 모르신 것 아닙니까.”
매스너 회장은 친절하게 두 가지 결정적 비결을 설명했다. 첫째, 원자재 구매 가격부터 달랐다. “60년간의 오랜 거래를 했기 때문에 원자재 구매 때 받는 혜택이 다른 회사와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철근을 살 때도 면세되는 주에 가서 공개경쟁입찰을 하기 때문에 원가가 현저하게 낮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인건비가 저렴했다. 오랫동안 함께 일해온 일꾼들은 남부지역, 특히 텍사스 애리조나 뉴멕시코 등 인건비가 저렴한 지역의 일꾼들이었다. 이들과 함께 공사장 근처에 집을 구해 숙식을 하기에 인건비를 다른 회사보다 낮출 수 있다고 했다. 정말 공사현장에 세워둔 자동차 번호판을 보니 10개 주의 번호판이 달려 있었다.
그래서 이 회사에 모든 공사를 맡겼다. ‘왜 우리 한인 교회들이 이 회사를 몰랐을까. 미리 알았더라면 재정적으로도 천문학적인 절약을 할 수 있었을 텐데….’
공사대금을 매월 한 번씩 지급했다. 은행에서 대출받은 금액에서 지급했지만, 교회가 매월 지급하는 공사대금의 10%를 부담하는 조건으로 계약돼 있었다. 지급 액수가 작을 때는 부담이 없었다. 그러나 공사가 본격화되자 점점 대금이 늘었고 교회가 감당할 수 없어 서너 달씩 연체가 됐다. 애가 탔다. 그런 중에 매스너 회장이 현장에 왔다. 미안함에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께서 모든 기도를 응답해주시는데 한 가지… 공사비에 어려움이 없도록 기도하는데 잘 안 들어 주시네요.”
“패스터 킴, 염려하지 마세요. 제가 지금까지 60년간 재정 때문에 공사를 중단한 교회는 한 군데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도우십니다.”
매스너 회장은 나의 어깨를 감싸줬다. 며칠 후 편지가 한 통 왔는데 50만 달러 수표가 들어 있었다. 세상에 어느 건축회사 사장이 자기 돈을 빌려주면서 공사를 하는가. 알고 보니 자기 집을 저당 잡혀 보낸 돈이었다.
***[역경의 열매] 김재열 (20) “재정 비리… 목사가 집 샀다” 계속되는 불신의 돌팔매
작정 헌금 부담에 성도들 교회 떠나고 비리 조사 종결된 후에도 악성 댓글 여전
미국 뉴욕센트럴교회 성도들이 2014년 11월 새 예배당 착공식에서 기도 제목을 적은 종이비행기를 날리고 있다. 성도들의 종이비행기는 타임 캡슐에 봉인됐다.
교세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점점 줄어들었다. 성도 수가 600명대로 떨어졌다. 성도들이 떠나는 이유도 여러 가지였다. 자녀들이 싸웠다고 떠나고, 인사성이 없다고 떠났다. 보기 싫은 사람이 있어서, 친한 교우가 안 나와서, 집이 멀어서 떠난다고 했다. 교회가 시끄러워 떠난다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이는 사실 작정헌금의 부담을 피하려는 명분이었다. 어쨌거나 교회를 은혜롭게 이끌지 못하는 시간 시간이 괴로웠다.
그즈음 서울에서 전화가 왔다. “김 목사, 나 김명혁 목산데… 여기 와서 목회하면 어떨까.” “네? 목사님,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떠나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생각 같아서는 미국을 당장 떠나고 싶었다. 그러나 재정 비리가 있다는데 해결하지 않고 떠나면 평생 주홍글씨처럼 달고 살아야 할 것 같았다. 무엇보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힘들었다. 검찰 조사가 종결됐는데도 이 사실을 보도해주는 언론이 없었다.
여전히 불신의 돌팔매는 계속됐다. 같은 노회 목사들의 눈초리가 무서웠다. 교회 개혁과 정의를 부르짖는다는 언론은 연신 ‘찌라시’ 같은 소식을 쏟아냈다.
인터넷에도 악성 댓글이 달렸다. ‘재정 비리 운운… 목사가 집을 샀다!’ ‘박윤선, 김명혁 목사의 제자라는 사람이 어찌 그럴 수가….’ 어느 날 뉴욕의 동문 목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김 목사님,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IP주소를 추적해 악의적 글을 쓴 사람을 찾았습니다.” 미국 조지아주에 사는 후배 목사였다.
“이 목사, 인터넷에 악성 댓글을 올렸네요.” 그는 펄쩍 뛰었다. “뭐라고요. 난 그런 일 한 적 없습니다.” “솔직하세요. IP주소 확인해 볼까요. 선배가 곤경에 빠지면 이렇게 해야 하는 겁니까.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전화 한 통 해서 들어보면 알 텐데. 조심하세요.” “예….”
사람은 믿을 존재가 아니라 사랑해야 할 존재라는 말이 맞았다. 이때부터 교회 밖 출입을 끊는 습관이 생겼다. 심방도 할 수 없었다. 변명하러 다닌다는 오해를 받는 게 싫었다. 그래도 묵묵히 강단에 엎드려 자유를 얻곤 했다. 우리 부부는 오밤중에도 차를 몰고 존스 비치 바닷가에 가서 소리소리 지르며 하늘을 향해 울분을 토해내곤 했다.
이런 북새통에도 역사는 이어졌다. 정지 작업을 마치고 2014년 11월 30일 교우들이 모여들었다. 보이지 않는 얼굴도 상당수 있었다. 하나님은 앞장선 사람들을 통해 일하셨다. 기쁨과 감격의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렸던가. 16년 만에 첫 삽을 떴다.
그런데 이 기쁨의 날에 역대 건축위원장들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1대와 3대는 벌써 천국으로 갔다. 2대와 4대, 5대 건축위원장은 가깝고도 먼 길을 올 수 없었을 것이다. 6대 건축위원장이 새롭게 세워졌다. 교우들은 비전과 기도 제목을 적은 종이비행기를 하나 둘 셋 신호에 맞춰 힘차게 날렸다.
***[역경의 열매] 김재열 (21) ‘뉴욕센트럴교회’로 개명… 공동기도문 갖고 집중 기도
이미지 나빠진 교회 이름 마음 걸려 변경… 교회 건축은 재정보단 철저한 기도 필요
미국 뉴욕센트럴교회 성도들이 하루에 2번 이상 기도할 때 활용했던 ‘비전랜드 새 예배당 건축 기도문’.
새 예배당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본의 아니게 이미지가 나빠진 교회 이름이 마음에 걸렸다. 2015년 12월 공동의회에서 교회 이름을 변경했다. 원래 미국 정부에 등록된 이름이 뉴욕중부교회(Central Presbyterian church of NY)였다. 벌써 영어권 교인들은 ‘센트럴처치’라고 부르고 있었다. 제직회에서 엉뚱한 이름보다 ‘뉴욕센트럴교회’로 바꾸자고 제안했고 그대로 결의했다.
이름이 달라지니 마치 새로운 교회 교인이 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교회 건축은 기분만으로 짓는 것은 아니었다. 재정이 있어야 하지만 철저하게 기도가 필요했다. 그래서 모이면 기도하고 헤어져도 기도했다. ‘비전 랜드 건축 기도문’을 갖고 한마음 한뜻으로 기도했다.
18년간 드린 기도의 횟수를 모두 합산한다면 셀 수도 없을 것이다. 착공하면서 입당까지 4년 동안에는 집중적으로 기도했다. 특히 공동 기도문을 사용했는데, 공적으로 모일 때마다 한목소리로 읽고 기도했다. 최소한 300명의 성도가 하루 두 번씩 낮과 밤에 기도했다. 기도 당번을 짜서 예배당 건축 현장에 가서, 중보기도실에서 기도했다.
착공한 후 4년 동안 성도들의 기도 횟수를 합산해 보니 무려 100만번 이상 기도를 드렸다. 나도 개인적으로 1만번 이상의 기도를 했다. 구하고(Ask) 찾고(Seek) 두드리라(Knock)는 ‘3K’ 전법을 사용하며 기도했다.
참으로 놀라웠다. 하나님은 기도 이상으로 응답해 주셨다. 미국 최고의 전문 건축 회사를 붙여 주셨다. 지난 13년 이상을 애를 먹이고 방해하던 시커먼 먹구름들이 쾌청하게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300명의 기드온 용사만 남겨 두셨다.
만약에 건축 도중에 느헤미야의 주도로 이스라엘 백성이 성벽을 건축할 때 비웃었던 ‘산발랏’(느 4:1)이 일어났다면 그 결과는 비참했을 것이다. ‘아, 이날을 위하여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그렇게 울었나 보다….’ 정말 쾌청한 날이 이어졌다.
어느 날 교회 건축을 맡은 R&M 컴퍼니 사장이 문짝 색깔로 12개 샘플을 꺼내 놓았다. 장로들은 모두 자기 취향의 샘플을 집었다. 도저히 의견 통일이 되지 않았다. 결국은 투표로 결정하고 헤어졌다.
하지만 마음이 영 불편했다. 자기가 주장했던 색깔이 선택되지 않았던 장로 얼굴이 자꾸만 어른거렸다. 카펫 색깔로 교회가 갈라졌다는 얘기가 생각났다. 그래서 전화를 걸었다. “사장님, 아까 결정은 캔슬입니다. 앞으로 모든 것을 위임합니다. 더 이상 묻지 마세요.” 그 후로는 다시는 모이는 일도 없었다.
예배당 건축은 문짝 색깔 하나 결정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때부터 수많은 결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문제는 제각각 결정하다 보면 동선이 꼬이고 통일성도 없어진다는 것이다. 문 색깔이 천장과 바닥, 벽과 조화가 되는 것은 기본이다. 그렇게 비전문가들이 매번 모여서 하나하나 색깔까지 정한다면 한국식도 아니고 미국식도 아닌 국적 불명의 예배당이 탄생할 게 뻔했다.
***[역경의 열매] 김재열 (22) 교회 건물 반지하 될 처지… “차라리 땅을 2m 깎자”
공사 할 때마다 방해 공작 펼치는 당국… 땅 파자 최상급 모래 나와 공사비로 충당
2700만 달러를 투입해 2017년 10월 미국 뉴욕 올드웨스트베리에 완공한 미국 뉴욕센트럴교회를 위에서 내려다 본 모습.
주님의 교회가 만신창이가 되고 공사에 어려움도 겪었다. 그때마다 성도들은 애간장을 태웠다. “하나님, 어찌 침묵만 하십니까.” 담임목사인 나는 이 말만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때가 되면 풀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모르는 주님만의 비밀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가 보니 하나님께서 타운을 사용해서 왜 그토록 장기전을 펼치셨는지 깨닫게 됐다. 우리의 생각과 주님의 생각은 완전히 달랐다. 만약 교회의 요청대로 1300석 설계허가를 내줬다면 어떻게 됐을까. 입당 후 몇 년 만에 코로나19 사태로 쓰러졌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전체 공사액은 2700만 달러(약 300억원)였다. 만약 타운이 허가를 일찍 내줘서 건축했다면 거액의 재정을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온갖 ‘메기들’을 동원해 지연 작전을 사용하셨고 18년간 장기 분할 상환 방식으로 공사비를 감당케 하셨다.
타운은 건축법과 고도제한을 앞세워 예배당을 높이 올리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울며 겨자 먹기로 본당 건물은 땅을 파고 계단 8개를 내려가는 구조로 만들었다. ‘눈비가 올 때 어르신들은 또 얼마나 불편할까.’ 별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현장 사장이 이런 제안을 했다. “목사님, 계단을 내려가는 구조보단 차라리 땅 전체를 2m 깎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거 좋습니다.” “그런데 그 광활한 땅을 깎으려면 50만 달러가 추가됩니다.” “50만 달러라고요?” 그런데 막상 땅을 파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뜻을 알게 됐다. 롱아일랜드에서 최상급의 모래가 묻혀 있었다. 그 모래를 팔아 50만 달러를 충당하고도 남았다.
도시가스 설비 견적도 50만 달러나 나왔다. 워낙 땅이 넓으니 큰 도로에서 가스관을 끌어오는 데 돈이 든다고 했다. ‘아니, 툭하면 50만 달러야. 우리가 무슨 재벌인 줄 아나. 겨우 재정을 맞추고 있는데….’ 방법이 없었다. 침묵하며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도시가스는 필수인데 도무지 대안이 없었다.
그러던 중 자문 변호사인 레빈이 아이디어를 냈다. 공사현장에 인접한 그린씨 집에서 가스관을 끌어오자고 했다. 1년 6개월을 설득해 허락을 받았다. “목사님, 이제 가스관 공사비가 4만5000달러로 확 줄었습니다.”
조경공사를 마쳤더니 스프링클러가 문제였다. 타운에 수도 연결 신청서를 제출했더니 단숨에 거절당했다. “우리 타운은 2000명 기준으로 수도시설이 설계돼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인구가 갑절로 늘면서 용수가 절대적으로 모자랍니다. 교회에서 알아서 충당하십시오.”
또 얼마의 시설비가 늘어날까. 툭하면 돈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다른 데 있었다.
“목사님, 동네 사람들에 따르면 깨끗한 지하수가 공사장 밑에 있다고 합니다.” “오,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그렇게 지하수를 개발해 1년에 10만 달러 이상의 수도비를 절감하고 평생 공짜로 쓸 수 있는 보물을 찾았다. 교회 건축은 결코 하나님이 외면하시지 않으셨다.
***[역경의 열매] 김재열 (23) 입주 허가 직전 날아온 추가공사비에 전전긍긍
“너와 함께…” 주님 말씀 떠올리며 힘내… 이웃 교회 목사 배려로 잔금 절반 해결
김재열 미국 뉴욕센트럴교회 목사가 2017년 8월 교회건축 막바지에 봤던 유튜브 동영상. 왼쪽 기도자가 김 목사다.
2017년 8월 길고 긴 18년 성전건축공사 대단원의 막이 내릴 때가 됐다. 매우 까다롭다고 소문난 안전종합검사인 소방서 검사를 통과했다. 이제 타운의 최종 입주허가만 받으면 됐다. 온 교회가 기대감으로 부풀었다. 그런데 70만 달러의 추가 공사비 청구서가 날아왔다. 교회가 여러 조건을 지키지 못해 발생한 금액이었다.
마른 수건처럼 교회는 정말 한 푼도 짜낼 수 없었다. 터널 끝이 가장 어둡다는 말처럼 또다시 암흑이 시작됐다. ‘지금 준공검사 허가를 받지 못하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옛 교회 건물을 비우면 우리는 갈 곳이 없다. 하청업자들은 집단 소송에 들어갈 것이다.’ 정말 난감했다. 정신이 아찔했다. 말로는 교인을 위로했지만, 정작 난 그날부터 두문불출했다. 애간장이 녹아내렸다.
기도하다가 염려하길 반복했다. 정말 갈피를 잡지 못했다. 찬양이라도 들으면서 마음의 여유를 갖고 싶었지만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유튜브 찬양을 틀었는데 눈에 익은 사진이 나왔다. ‘엑스플로 74’ 대회 장면이었다.
그런데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는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어, 내 사진이 어떻게 여기에…’ 27살 때 여의도광장 아스팔트 위에 무릎 꿇고 기도하던 복장 그대로였다. 누가 찍었는지도 모르는 내 사진을 43년 만에 유튜브로 처음 본 것이다.
당시 아스팔트 위에서 간절히 기도할 때 주님은 이런 약속의 말씀을 주셨다. “내가 너와 영원히 함께하리라.” 지난 세월 주님은 어렵고 힘들 때마다 이 말씀을 기억나게 하셨고 새롭게 해주셨다.
당시 이 말씀을 붙들고 아내와 결혼했고 이듬해 신학교에 복학할 수 있었다. 임마누엘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교회를 건축하면서 아무런 진전 없이 18년의 세월이 흘러가고 낙심될 때마다 이 말씀이 힘이 됐다. 마음이 가벼워졌다.
힘을 얻고 교회로 향했다. 이웃교회 목사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목사님, 돈 필요하면 말씀해 주세요. 당분간 빌려드릴 수 있습니다.” 자신도 과거 교회건축의 어려움을 겪었던 경험자로서 내다보신 배려였다. 그걸로 잔금 중 절반을 치렀다.
현장 사장이었던 브라이언이 이런 제안을 했다. “남은 34만 달러는 하청업자에게 지급해야 하는 금액입니다. 탕감을 한번 요청해 보시죠. 남자 대 남자면 싸울 확률이 90% 이상이니 여성이 나서야 합니다.”
그의 조언은 오랜 경험에서 나온 것이었다. 우선 영어를 잘해 감동을 줄 사람이 필요했다. 교회 사정도 알아야 했다. 적임자는 내 딸 재넷 집사뿐이었다.
재넷 집사는 32명의 업자를 일대일로 만났다. 18년간 교회 스토리를 들려줬고 간절히 호소했다. “그동안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는데 당신도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차라리 교회에 잔금을 헌금해 주십시오. 그러면 세금 공제 영수증을 발행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두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셨다. 이렇게 70만 달러의 추가 공사비도 말끔히 정리했다. 아무리 큰 문제도 하나님 앞에선 티끌 같았다.
***[역경의 열매] 김재열 (24) 성도들의 헌신·믿음으로 ‘품격 높은 성전’ 완성
미국 뉴욕센트럴교회 성도들이 2017년 12월 새예배당 입당 감사예배에서 찬양하고 있다.
2017년 12월 3일 입당예배 때 시장과 이사진, 주민을 초청했다. 동네 품격을 높여주는 뉴욕센트럴교회의 조경과 건물에 만족하는 분위기였다. 올드웨스트베리의 시장인 프레드 카릴로가 활짝 웃으면서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패스터 킴, 당신은 스트롱맨입니다.”
2019년 교회 연말 결산을 했는데, 20여년간 이루지 못했던 초과 달성을 했다. 코로나19라는 팬데믹 상황에서도 구제금과 장학금만 10만 달러가 넘었다. 입당 3주년인 지난 3일까지 건축 대출의 3분의 1을 상환했다.
주님의 성전을 건립하는 데 끝까지 헌신한 성도의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세상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성도들의 헌신 앞에 넘치도록 갚아 주셨다.
S집사가 그렇다. 그는 교회건축을 시작할 즈음 폐업하고 경제적으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주택 대출도 연체돼 은행에서 수차례 경매 통지서가 날아올 정도였다. 그런데도 적지 않은 건축 헌금을 작정했다. 시간이 지나도 경제 상황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그런데 2014년 헌금 연말 결산서를 보니 S집사가 작정한 2만 달러를 모두 헌금했다. 아내가 큰 교통사고를 당해 보험회사에서 위자료를 받았는데 그대로 성전건축에 바친 것이었다.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잠도 자지 못하고 울며 기도하던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하나님의 일이 우선이었습니다.” 눈물을 흘리던 S집사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하나님께선 눈물에 약하시다. 6년 후 하나님은 수십 배를 되돌려 주셨다. 세 자녀가 받은 장학금만 90만 달러가 넘는다. 8년간 받은 대출 혜택은 20만 달러가 넘는다. 수만 달러를 헌금으로 심었는데 50배가 넘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것이다. 덤으로 자녀 2명은 대학 졸업 후 좋은 직장을 얻었다. 이처럼 하나님은 심는 자에게 풍성하게 주시는 분이다.
K집사는 2014년 세 자녀의 교육보험을 해지해 5만 달러를 헌금했다. 가정예배를 드리다가 자녀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런데 그때부터 자녀들이 교회에 대한 자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부모에게 끌려 겨우 교회를 다니던 아이들이 적극적인 신앙인으로 변한 것이다.
학교 공부도 달라졌다. 첫째는 약대 장학생이 돼 박사학위과정까지 학비 지원을 받았다. 둘째도 SAT 시험에서 만점을 받고 시카고 사립 의대의 전액 장학생이 됐다. 미군복을 납품하던 K집사는 미국우선주의 정책으로 정부 장려금까지 받으며 봉제사업을 계속 확장하고 있다.
교회 건축 실무를 10년 이상 맡았던 Y집사는 국제 부동산 투자회사를 운영하면서 회사가 계속 성장세에 있다. P집사는 블랙스톤이라는 세계적 헤지펀드에서 고위직으로 일하며 적지 않은 건축헌금을 드렸다.
감사한 것은 영어권 젊은이들이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신앙 선배들의 모델을 본받고 있다는 점이다. 주일 100여명의 영어권 청년과 30~40대가 모이는데 이들에게 한국적 야성이 자연스럽게 전수되고 있다.
***[역경의 열매] 김재열 (25·끝) 비전랜드 통해 ‘알찬 교육, 널리 선교, 고루 봉사’ 실천
장기적 신앙교육 위해 순차적 학교 개설… 선교 사각지대 없애고 지역 사회와 함께하는 섬김의 현장 되길
지난해 8월 미국 뉴욕센트럴교회에서 개최된 여름 캠프에서 유초등부 어린이들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나는 1996년 7월 뉴욕센트럴교회 위임목사로 부임했다. 제일 먼저 찾은 곳은 펜실베이니아주 포코너기도원이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뉴욕 목회의 비전을 찾기 위해 집중적으로 기도했다.
1주간 기도하는데 주께서 분명한 영감과 비전을 주셨다. 그것은 3대 사명으로 ‘알찬 교육, 널리 선교, 고루 봉사’였다. 그때부터 ‘벅찬 예배, 영광을 돌리든지 은혜를 받든지’라는 구호를 외치게 됐다.
미국 공립학교는 건국 초기부터 1960년 케네디 대통령 재임 때까지 크리스천 데이스쿨 시스템으로 운영됐다. 하지만 인본주의 세속교육이 뿌리내리고 기독교 가치가 거세되면서 공교육 현장이 무너져 내렸다.
‘알찬 교육’은 매주 주일학교 한 시간 모임으론 신앙교육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데서 시작한다. 유아부터 고등학생까지 교회 ‘크리스천 데이스쿨’ 책임교육을 통해 철저하게 훈련된 신앙 리더를 배출해야 한다. 하나님은 이런 꿈을 이루라고 넓고 광활한 비전랜드를 주셨다.
코로나19라는 팬데믹이 아니면 올해부터 유치원을 개설해, 한 해에 1학년씩 고등학교까지 개설할 계획이었다. 장기적으론 대학까지 세우는 교육비전을 갖고 있다. 코로나19 상황이 잦아지는 대로 본격적으로 사역에 착수할 계획이다.
‘널리 선교’는 성도와 교회에 부여된 지상명령이다. 우선은 20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고 200명의 성도가 늘 선교지에 머무는 비전을 갖고 있다. 단기 선교부터 중장기 선교사까지 포함하는 비전이다. 성도는 ‘가든지 보내든지’ 선교의 비전을 이어가야 할 의무를 지닌 사람이다. 현재 6가구의 파송선교사와 28곳의 협력선교사, 선교기관 9곳을 돕고 있다.
‘고루 봉사’는 교회가 언제나 지역 사회를 위한 섬김의 현장이어야 함을 뜻한다. 이 비전 아래 ‘이웃섬김 센터’를 설립하고 24시간 봉사팀을 파견하는 시스템을 준비하고 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전인적인 신앙과 인격의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다.
특별히 뉴욕실버선교회를 16년간 운영하며 초고령사회로 진입하는 추세 가운데 실버세대에게 선교적 사명을 훈련하고 있다. 현재 13가구의 실버 장기 선교사가 세계 각처에서 사역하고 있다. 한국의 시니어선교회도 뉴욕실버선교회에서 노하우를 얻어 출발한 것이다.
꿈을 주신 하나님께서 일을 직접 구체적으로 이루시니 놀랍고 감사할 뿐이다. 아직 더 이뤄야 할 사명이 있다. 미국 뉴욕의 부촌인 롱아일랜드에 비전랜드라는 기본 인프라를 구축해 놨으니 실천할 일만 남았다.
지금까지 한인 이민 사역을 소개했다. 부족한 목회자를 끝까지 신뢰하면서 헌신해 준 뉴욕센트럴교회 가족에게 감사드린다. 지난 20여년간 함께했지만, 여러 사정으로 공동체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과거 교우에게도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을 고백하고 싶다.
어디에서 주님을 섬기든지 지난날 부족함을 생각하며 더욱 믿음으로 분발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주님 앞에서 만날 때 ‘잘했다’ 칭찬받도록 각자 섬김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으면 좋겠다. 모든 영광을 주님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