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더 빛나게 하는 그 노래, ‘안개’ / 양선례
남자는 최연소 경감을 달 정도로 능력있다. 자신이 하는 일에 사명감과 자부심이 강하다. 그런 남자가 용의자인 여자에게 끌린다. 남편을 살해한 혐의를 받는 그녀를 감시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빠져든다. 남자는 살인의 증거물을 눈감아 준다. 그리곤 자부심에 금이 간 자신을 ‘붕괴되었다’고 표현하며 여자를 떠난다. 그녀가 있는 도시를 벗어나 아내가 있는 곳으로 돌아온다.
몇 달이 지나 남자는 아내와 함께 간 시장에서 우연히 그녀를 만난다. 당황하는 그와 달리 그녀는 이 순간을 기다린 듯 자연스럽다. 곁에 있는 남자를 남편이라며 소개한다. 그런데 얼마 후 그녀의 남편이 살해당한다. 피의자로 다시 만난 여자에게 왜 그런 사람과 결혼했느냐고 묻는다. 그녀는 다른 남자와 ‘헤어질 결심’으로 그랬다고 말한다. 또 자신은 남편을 죽이지 않았다고 말하지만 남자는 그녀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다. 여자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그에게 오래 기억되는 방법을 찾는다. 양동이로 모래를 퍼서 해변에 커다란 구덩이를 판다. 서서히 밀물이 들어오고, 그녀가 만든 모래 산도 순식간에 사라진다. 남자는 뒤늦게 그녀를 찾아 해변으로 오지만 안개 자욱한 그곳에는 파도만이 철썩인다.
그 위로 음악이 흐른다. 우리나라 최고의 기타리스트라 일컬어지는 함춘호의 연주에 여자와 남자가 듀엣으로 부르는 ‘안개’이다. ‘나 홀로 걸어가는 안개만이 자욱한 이 거리.’ 전성기의 힘 있는 목소리와는 전혀 다르게 여자는 읊조리듯 담담하다. ‘그 언젠가 다정했던 그대의 그림자 하나.’ 깊은 연륜이 느껴지는 남자 가수의 묵직하면서도 절제된 음성이 뒤를 잇는다. ‘생각하면 무엇하나 지나간 추억’ 여자의 노래에 남자가 화음을 넣는다. ‘그래도 애타게 그리는 마음. 아아아아 아- 그 사람은 어디에 갔을까.’ 두 남녀의 마음을 대변하듯 정훈희와 송창식이 부르는 노래가 애절하게 이어진다. 음악이 영화를 더 빛나게 하는 순간이다.
영화의 어느 곳에도 사랑한다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표정과 목소리, 눈빛으로 주인공의 감정 변화를 섬세하게 묘사한 박해일과 탕웨이의 연기가 좋았다. 특히 탕웨이를 왜 세계적인 배우라고 하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흉내 낼 수 없는 독특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만추>에서 봤던 모습과는 또 달랐다. 그녀의 사랑법이 영화가 끝나고서도 내내 마음에 남았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 이야기다.
나는 그 감독의 영화를 즐기지 않았다. 여운은 긴데 뭘 말하고자 하는지 바로 이해가 안 될 때가 많았다. 왜 ‘천재 감독’이라는 수식어가 따르는지도 의문이었다. 이번만은 달랐다. 노래가 더 마음을 울렸다. 흥행에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지만(189만 명) 그는 이 영화로 제75회 칸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았다. 상을 타는 데 아마도 노래도 한몫하지 않았을까.
노래는 가수 정훈희의 데뷔곡이다. 그녀는 고등학교 1학년 때인 17세에 당대 최고의 작곡가 이봉조로부터 이 곡을 받았다. 알고 보니 이미 만들어 두고서 어울리는 가수를 찾던 중이었단다. 이번 영화에 쓰인 음악은 발표된 지 무려 55년 만에 다시 녹음한 것이다.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안개’ 노래를 들으면서 영화를 만들었다는 감독의 설득으로 성사된 일이다. 성대 결절 수술을 두 번이나 하고 회복 중이던 송창식의 답변도 예상되어 약속도 없이 감독과 그가 운영하는 미사리 카페에 무작정 쳐들어갔단다. 하마터면 못 들을 뻔했다. 일흔이 넘은 두 거장이 부르는 ‘안개’는 이렇게 태어났다. 노래가 영화를 한층 깊게 만들었다. 미묘한 사랑의 어긋남을 음악이 대변해 주는 듯하다.
노래방이 생기면서 가사를 보지 않고 끝까지 부를 수 있는 노래가 몇 안 된다. 분명 익숙한 곡인데 막상 생음악으로 도전하면 꼭 어느 한 구절이 막힌다. 이 노래만은 예외다. 남편의 회사에서 시내 나이트클럽을 통째로 빌려 망년회를 열었다. 노래자랑도 하는데 우리 부서 대표로 나가는 게 어떠냐고 남편이 권했다. 하늘의 별도 달도 말만 하면 그가 따 줄 거라 믿던 시기였다. 몇 가지 노래를 놓고 저울질하다가 ‘안개’로 정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에 만들어진 노래였지만 종종 흥얼거리던 터였다. 별다른 연습도 안 했는데 그날이 되었다.
큰딸을 둘째 형님에게 맡기고 모임 장소로 향했다. 생각보다 규모가 컸다. 조명이 번쩍거렸다. 참석자도 많았다. 그런데 심사위원이 낯익다. 운동회 날 보았던 우리 반 반장 아버지다. 남편 회사의 과장이라더니 그 자리에 떡 하니 앉아 있는 게 아닌가. 갑자기 가슴이 뛰었다. 노래를 어떻게 마쳤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우수상인가 장려상인가를 받아서 부상으로 식기 건조기를 받았다. 그것이 꽤 오래 우리 집 부엌에 놓여 있었다. 실력이라기보다는 사심이 많이 들어간 심사위원 덕이 아니었을까 싶다.
최근에도 그 노래를 불렀다. 십여 명이 참석한 모임에서 반주도 없이 두서너 곡 이어지더니 내게도 차례가 왔다. 영화를 보기 전이었지만 대강의 내용은 알고 있었기에 이 노래와의 오랜 인연을 설명했다. 최근에 개봉한 영화여서 그랬을까. 다른 데서 부를 때보다 환호성이 컸다. 그날 밤에 집에 와서 영화를 보았다. 배우와 음악, 감독이 잘 버무려진 맛난 비빔밥 맛이었다.
첫댓글 방금 유튜브에서 그 노래 안개를 감상했어요.
설명해주신 영화의 장면들이 스치는듯 상상됩니다. 맛깔스런 글 잘 읽었습니다.
하하. 기회가 되면 영화로 보시지요.
글 쓰는 분들은 분명 좋아할 만한 영화랍니다.
아련하거든요.
옴마, 식기 건조기까지 탔었네요. 그러고 보니 양 교장이 정훈희 노래를 좋아하는구나. 이번 글에서 소개한 '안개'와 지난 시간에 몇 소절 선보였던 '꽃밭에서'랑
하하, 그런가요?
썩 좋아하지는 않는데 어쩌다 보니...
문단 연결이 매끄럽네요. 글이 빛납니다. 저도 이런날이 올까요.
선생님의 이번 글도 매끄럽고 좋습니다.
그런 날이 분명 올 겁니다.
저 지금 춤춥니다.
칭찬해 주셔서요.
유튜브 가서 영화도 찾아서 보고, 음악도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은 노래해서 수상도 하셨으니 노래도 잘 부르실 것 같습니다.
수상까지요.
그건 편파적인 심사위원 덕인 걸요.
잘 부른다기 보다는 즐깁니다.
음악은 내 친구!
항상 곁에 있어요.
그런데 멀티가 아니라서 일은 안 되어요.
글도 조용해야 써지고요.
영화를 꼭 보렵니다! 잘 읽었습니다.
하하. 실망할지도 몰라요.
또 숙제를 주시네요(헤어질 결심, 안개). 글 고맙니다.
숙제는요.
저 숙제 내 주기 안 좋아합니다. 하하.
사실 전 그 영화 썩 내키지 않았어요. 평소 안개는 좋아하지만 화면에 짙게 깔린 습한 분위기가 살짝 무섭고 탕웨이의 비슷한 눈빛이 싫었거든요. 그래서 대 배우 인가 봐요. 그런데 선생님 글을 읽으니 한결 기분이 나아지네요. 글도 너무나 좋은데 노래도 실력자이시네요.
부럽습니다.
좀 어둡긴 하지요?
즐겨 부르는 노래이긴 합니다만, 자랑할 만한 수준은 아니랍니다.
노래 듣고 부르는 걸 아주 좋아합니다.
선생님이 부르는 '안개' 듣고 싶습니다. 히히
하하, 과연 그런 날이 올까요?
내조의 여왕이시네요. 회사에서 아내가 상 받을 만큼 노래를 멋지게 잘 불러 주셨으니 얼마나 어깨가 으쓱하셨을까요.
질투나게 멋있는데요.
후일담 역시 기억이 안 납니다.
내조의 여왕이라고 하면 남편이 두드러기 반응 보일 겁니다.
저도 이 영화 집에서 봤어요.
앞부분은 좀 지루했는데 뒤로 갈수록 몰입하게 하는 힘이 있어서 집중하게 되더군요.
선생님 이번 글 정말 좋네요.
사랑스럽고 다재다능하셔서 부럽습니다.
주말에 지인의 결혼식 다녀오느라고 새벽까지 앉아 있었어요.
미리 초안을 써 두긴 했지만 마음에 들지 않아서 엎지락뒤치락했답니다.
선생님 글도 좋았어요.
묘사 부분이 길어서 교수님께 혼나겠다 생각했답니다. 하하.
@이팝나무 정말 다음 번 글부터는 혼나지 않게 써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저는 영화는 보진 않았지만 정훈희가 출연한 프로그램에서 그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니 노래가 너무 좋더라구요.
영화는 호불호가 갈리니까 음악만 좋은 걸로 하지요.
이제사 영화 보고 옵니다. 네플릭스로 보는데 화면이 너무 어두워 적응하고 공감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같은 현실 앞에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남자는 '공교롭다'고 말하고 여자는 '그 여자 참 불쌍하겠다' 말합니다. 어렵게 본 영화라 더 기억에 남을 듯 합니다. 노래도요. 고맙습니다.
하하, 찾아서 보시기까지?
고맙습니다.
관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리니까요.
음악이 절묘하다는 것만 공감하면 되지요.
월요일에 시작해서 지금 막 마무리 했습니다. 선생님이 말한 송서래의 사랑법이 마음에 듭니다.
1. 눈으로 사랑해요.
2. 박해일 눈이 저렇게 컸었나? 살인의 추억에서는 얇게 쫙 찢어진 눈으로 봤는데.
3. 붕괴 전으로 돌아가요. - 나는 여기서 심장이 찢어진다.
4. 불륜은 왜 아름답고 아픈가?
여러 날 걸린 것 보니 재미가 없었군요.
2번에서 빵!
터졌습니다.
@이팝나무 아니예요, 재밌었어요.
애들 재워 놓고 밤에 보니, 계속 잠들어버려서 그랬어요. ㅎㅏ하.
대한항공 기내식 비빔밥이 떠오르는 맛갈나는 평론이네요.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