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물 따라 흐른 인연 / 허숙희
서둘러 아침을 챙겨 먹고 파크골프장으로 나섰다. 구장으로 이어져 있는 남파랑 48번 길은 언제 보아도 아름답고 생동적이다. 섬진강의 잔잔한 강물 위로 아침 햇살이 번지고, 재첩잡이 배는 물길을 가르며 부산했다. 도착해 보니 파란 잔디에서 이미 많은 사람이 공을 치고 있었고, 스피커에서는 김종환이 부른 내가 좋아하는 노래 ‘100년의 약속’이 잔잔하게 흘러나왔다.
오늘따라 오래전의 시간이 물안개처럼 소리 없이 다가와 가슴을 적신다. 그이와 난 어느새 결혼 47년 차다. 그 시절 가장 인기 있던 신혼여행지는 제주였지만, 우리는 부산을 택했다. 남편이 군 복무 중이어서 혹시라도 비행기가 뜨지 못해 귀대 일자를 맞추지 못할까 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여행을 마치고, 그의 고향으로 가려고 새벽 버스에 올랐다. 겨울이 끝나지 않은 2월 중순이라 제법 쌀쌀했다. 남편은 코트가 없어 양복만 입었고, 짧게 깍은 머리 탓에 더욱 썰렁해 보였다. 나도 두루마기를 마련하지 못해 빨간 치마에 연두색 저고리만 입어 추워 보이긴 마찬가지였다. 지금 돌이켜보니 참 어설프고 안쓰러운 신혼부부였다. 하지만 그때 우리 마음은 조금도 초라하지 않았다. 앞날이 안개처럼 흐릿해도, 서로에게 기대며 살아가면 행복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믿음 하나로 이제까지 함께 걸어왔다.
버스는 구불구불 이어진 섬진강을 따라 달렸다. 강물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물안개가 은빛 장막처럼 일렁이며 차창 밖을 가릴 때면, 앞으로 우리의 삶도 이렇게 뿌연 안개 속을 지나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스쳤다. 멀리 보이는 지리산은 아직 하얀 눈이 녹지 않아 푸른 빛과 흰빛이 어우러져 멋스러웠고, 거대한 산의 품에 안긴 마을은 정겹고 평화로워 보였다. 장엄하면서도 포근해 보이는 산은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반드시 밝은 길을 찾게 된다고 응원하며 우리를 끌어안아 주는 듯했다.
남편의 고향 집은 모든 것이 낯설었다. 불을 때서 가마솥에 밥을 지었고, 잿불에 생선을 구워 먹었다. 방에는 고구마 뒤주가 있었고, 큼직한 쥐가 천장과 부엌에서 살고 있었다. 겨울에 얼어 있던 땅이 녹아 마당은 질퍽거렸고, 걸을 때 신발이 흙에 파묻혀 쑥 빠지기도 했다. 방에서 멀찍이 떨어진 변소에 가면 얼굴을 찌푸리게 하는 냄새가 훅 올라왔고, 휴지 대신 신문지가 걸려 있었다. ‘그의 집이 이럴 줄이야.’ 다시는 찾아오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부모님께서 반대했던 이유 중 하나가 이런 것을 내다보기라도 한 것일까?
동네 사람들 앞에서 전통 혼례를 다시 치렀고, 잔치는 사흘 동안 이어졌다. 그동안 시할아버지는 여기가 앞으로 서울보다 더 좋아질 테니 학교를 그만두고 내려오라고 끊임없이 말했다. ‘라디오 할아버지’라 불리던 그분은 라디오를 늘 곁에 두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떤 소식을 접했는지, 그 확신은 무척이나 단단해 보였다. 애지중지하던 첫 손자를 곁에 두고 싶어서였을지도 모른다. 이후에도 여러 해 동안 만날 때마다, 한번 생각해 보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퇴직 후 시골에서 살게 되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외국에 나가 한국어 학교에서 우리 말을 가르치고 싶어 ‘한국어 교사’ 자격증을 따 놓았다. 또 ‘다문화 상담사’ 자격도 취득하려고 늦은 나이에 사이버 대학에 입학해 열심히 공부했다. 그런데 사람의 앞날은 알 수 없는 일인가 보다. 어쩔 수 없이 남편을 따라 섬진강 변에 내려와 지낸 시간이 어느새 8년이 지났다.
여기는 역세권도 아니고 화려한 아파트 숲도 없다. 그래도 집 앞 섬진강 둔치에 파크골프장이 생기면서 이른바 ‘골세권’을 누리며 산다. 휴장 일인 화요일과 비 오는 날을 빼고는 거의 매일 출석 도장을 찍듯 나가, 하루를 온전히 잔디 위에서 보낸다. 수원 집보다 이 섬진강 변 고향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아졌고, 어느새 “여기가 더 좋다”는 말이 튀어나오게 되었다.
인연이란 강물과 닮았다. 가뭄으로 끊길 듯하다가도 다시 흘러가고, 빙 돌아가도 결국 닿을 곳에 이른다. 결혼하던 날, 물안개 속에서 어렴풋이 바라보던 우리의 앞날은 강물이 제 길을 따라 흘러가듯, 나도 어느새 물결처럼 흘러 여기에 머물고 있다. 시할아버지의 말씀이 47년이 흐른 지금 이렇게 현실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구장에서 돌아와 창문을 열고 저무는 해를 바라본다. “내가 선택한 사랑의 끈에 나의 청춘을 묶었다.” “100년도 우린 살지 못하고 언젠가 헤어지지만 세상이 끝나도 후회 없도록 널 위해 살고 싶다.”라는 노랫말을 되새겨 보았다. ‘100년의 약속’은 거창한 맹세가 아니라, 힘들고 어려울 때 함께 견뎌온 시간이라고 생각하며 악보를 찾아 하모니카로 불었다.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선율은 앞으로 남아 있는 시간을 후회 없이 사랑하며 살라고 나를 어루만져 주는 듯하다.
첫댓글 선생님의 사랑 맹세가 하모니카 선율에 실려 섬진강가에 퍼지는 소리가 저에게까지 들리는 듯합니다.
세월이 점점 빠르게 느껴져 안타깝지만 마음만은 처음처럼 살려고합니다. 남의 눈 의식하지 않고. 글이 유난스러울까봐 걱정이예요. 그건 아직 글솜씨가 부족한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좋게 봐 주시니 고마울 뿐입니다.
수년 내에 남파랑 48번 길을 따라 걸어보겠습니다. 물안개를 바라보고, 햇님이 강물에게 건네는 속사임도 듣고 싶네요. 걸으면서 선생님의 애창곡 ‘100년의 약속’도 들어 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구간입니다. 오시더라도 노래는 불러 드리지 못합니다. 노래는 젬병입니다. 대신 하모니카는 서툴지만 불어드릴 수 있습니다. 꼭 사모님과 함께 오세요. 혼자 오시면 만남 사절입니다.
코트, 두루마기가 없어도 모델 커플이셨을 거 같아요. 47년, 정말... 길고 아름다운 인연이세요.
돌이켜보니 47년 어느새 흘렀네요. 갖가지 힘든 일이 가로막았지만 넘고 여기까지 왔어요. 늘 앞으로 30년만 함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47년이 지나도 젊은 시절의 마음을 그대로 간직한 채 살아가시니 선생님께서는 나이드신 표시가 나지 않나 봅니다. 사부님과 오래오래 행복하게 지내시길 바랍니다.
그런가요? 그렇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내가 선택한 사람이니. 선생님의 바램 고맙습니다.
어휴, 선섕님의 이야기가 물안개를 담은 수묵화처럼 아름다워요. 후배들에게 슬기로운 결혼생활 역할을 단단히 하는 선생님의 글을 격하게 애정합니다.고맙습니다.
아휴! 내 이야기가 수묵화가 아니라 섬진강은 1년 내내 수묵화입니다. 정말 아름다운 곳입니다.
글이 잔잔하게 흐르는 섬진강 물줄기를 닮았습니다. 그 곁에 사셔서 그럴까요.
대선배님의 글을 읽으며 늘 '따라쟁이'가 되고 싶은게 제 마음입니다. 요즘은 선생님의 글을 남편에게도 들려주고 있어요. 섬진강가 정말 아름다운 곳이랍니다.
글이 그림이 되었네요. 두 분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듬뿍 느껴집니다.
그런가요? 건강하게 함께 할 날이 그동안 함께한 날보다 많지 않을 것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섬진강가에 사시는 선생님은 좋으시겠어요. 강물처럼 이야기가 술술 풀려 매번 감동으로 읽습니다. 두 분 항상 행복하세요.
고맙습니다. 선생님의 답글을 읽으며 퍼뜩 생각 난게 있어요. 앞으로는 ''섬진강변'이란 말 대신 '섬진강가'라는 단어를 써야겠다고. '변'은 한자어고 '가'는 가장자리를 뜻하는 우리 말이니까. 하하하. 우리 글쓰기 방에서 교수님의 한글을 사랑하는 마음을 배운 덕이라 생각됩니다. 이래저래 일상의 글쓰기에서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글쓰기 선배님의 칭찬을 받으니 힘이 불끈 솟아나네요. 글향기님처럼 내 글에서도 향기가 나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허숙희 저도 섬진강을 좋아 해 늘 찾고싶은 곳이거든요. 그래서 가끔 하동 솔밭공원을 찾곤합니다. 왕~ 부러워요. 하하
아름다운 글 잘 읽었습니다.
글 속 두 분의 사랑이 강물처럼 묵묵히 흐르면서도, 서로를 단단히 묶어주는 밧줄처럼 느껴지네요.
사랑 때문에 제주도도 못 오시고, 아쉽지만 그만큼 서로에게 깊이 묶여 있다는 사실이 부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