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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452
7월10일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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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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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pjkEVHab_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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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주의 종말에 대해서는 하느님 자비의 손길에 맡기고 각자 자신의 종말을 잘 준비합시다!>
선교 일선에 나선 복음 선포자들의 하루하루는 결코 편안하거나 안락한 나날이 아니었습니다. 적대자들로부터 수시로 생명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특히 유다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이들이 동족들로부터 받았던 협박과 모욕은 하늘을 찌를 정도였습니다. 천벌 받을 배신자로 낙인이 찍혔습니다.
이런 초세기 그리스도 신자들을 향해 건네는 예수님의 말씀은 참으로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오 복음 10장 22절)
더불어 심한 협박이나 박해 앞에 너무 정면 대응하지 말고 지혜롭게 처신하라고 구체적인 행동 강령까지 내려주셨습니다.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다 돌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마태오 복음 10장 23절)
사실 이스라엘 국토의 면적은 그리 넓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도 면적이 작은 나라에 속하는데, 우리보다 훨씬 소국입니다. 전라남북도 합한 정도입니다. 이 정도 면적이라면 도보로 도는데 걸리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겠습니다. 아주 천천히 돌아도 6개월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그러면 6개월 안에 사람의 아들이 온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종말과 관련된 예수님의 말씀은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이거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복음서 안에는 유다 묵시문학의 흔적이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이스라엘 전역에 성행했던 묵시 문학은 어려운 시기를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한 시도 중에 하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말이 다가오셨다고 말씀하셨지만 그날과 그 시간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알려주지 않으셨습니다.
유다 묵시문학과 종말 신앙을 하나로 묶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거짓 목자들이 주로 애용하는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2000년 대희년같이 숫자상으로 ‘있어 보이는’ 순간만 되면 종말 임박 신앙이 여기저기서 우후죽순으로 솟아올랐습니다. 아마도 2050년 2100년이 되면 무수한 사이비 교주들이 또 다시 거짓 종말 임박 신앙으로 선량한 백성들을 현혹시킬 것입니다.
종말 임박 신앙이 위험한 이유가 있습니다. 일상적 삶을 깡그리 무시하고 무너뜨리기 때문입니다.
며칠 뒤에 세상이 끝난다는 데 직장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공부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다 때려치우고 임박한 종말을 준비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런 논리로 사람들을 현혹시키며 한 인간 존재, 한 가정 공동체를 파괴시키는 악령들이 종말 임박 신앙을 가르치는 사이비 교주들인 것입니다.
종말 신앙 앞에서 우리가 취한 태도는 너무나 자명합니다. 오늘 하루를 마지막으로 여기고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루가 끝나면 그 하루에 깊은 감사를 드리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하느님께서 또 다시 은총의 선물로 이 하루를 주셨구나!’ 감사하며 새롭게 하루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조금은 지루해보이고 남루해보이는 우리네 일상사지만 그 안에 주님께서 굳건히 현존하심을 믿으며 기쁜 마음으로 하루를 엮어가는 것입니다.
역사의 종말이나 우주의 종말에 대해서는 하느님 자비의 손길에 맡기고 각자 자신의 종말이 개인의 죽음을 잘 준비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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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하느님 앞에서 비둘기가 될 때 세상에서 뱀의 지혜를 발휘하게 된다>
(유튜브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f-4WNbZrcg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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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라고 하십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이들은 양이고, 아직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들은 이리입니다. 이리들이 대다수인 세상에서 양들이 살아남으려면 지혜로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여기서 뱀은 죄를 짓게 만드는 본성이나 사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슬기와 지혜를 갖추어 위험한 이리들의 덫에 빠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세상에서 뱀처럼 슬기로울 수 있을까요? 하느님 앞에서 비둘기처럼 순박할 수 있으면 됩니다. 하느님 앞에서 비둘기일 수 있어야 사람들 앞에서 뱀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비둘기이면 하느님 앞에서 뱀이 됩니다. 순서가 바뀌면 안 됩니다. 하느님께 순수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사람들 앞에서 지혜롭습니다.
로마의 건국신화를 소재로 한 영화 ‘퍼스트 킹’(2020)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로마는 늑대로부터 키워진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에 의해 건국되었습니다. 형 로물루스는 신을 공경하는 인물이었고 동생 레무스는 자신의 힘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형은 육체적으로는 약했고 동생은 강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형제는 매우 우애가 깊었습니다. 서로를 위해 주저 없이 목숨을 내던질 정도였습니다.
기원전 753년, 두 형제는 그 지역의 가장 강력한 민족 알바롱가 인들에게 사로잡힙니다. 알바롱가 인들은 자신들이 사로잡은 이들을 서로 싸우게 해서 지는 사람을 신에게 제물로 바쳤습니다. 동생이 누군가와 싸움을 해야 했을 때 형은 자진해서 동생의 상대가 됩니다. 일부러 맞아주다가 죽은 척을 합니다. 죽은 척을 하다 일어난 로물루스는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여사제인 신녀가 자신에게 다가왔을 때 그녀를 인질로 잡고 나머지 포로들과 탈출에 성공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형 로물루스는 심한 상처를 입어 죽음 직전까지 다다릅니다. 신녀를 건드려서 자신들이 저주를 받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커지자 동생 레무스는 목숨을 걸고 형을 지킵니다. 그 와중에 신처럼 강한 힘이 자신 안에 있음을 느끼게 된 레무스는 그 무리의 왕이 됩니다. 레무스는 자신의 힘을 믿고 사람들을 제압하며 세력을 키워갑니다.
그러는 중에 신녀가 예언을 합니다. 두 형제가 한 형제를 죽이고 그 피의 힘으로 영원한 도시 로마가 세워지게 될 것이라고. 당연히 동생 덕에 간신히 생명만 부지하는 형이 동생에게 자신을 죽이라고 말합니다. 동생은 차마 그러지 못하고 그런 예언을 한 신녀를 처형합니다. 자신이 신이고 자신의 운명은 자신이 개척해나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반대하는 사람들도 처형합니다.
반면 신녀를 처형했다는 말을 들은 형은 매우 마음 아파하며 신녀가 들고 다니는 불씨를 찾아 다시 살려냅니다. 백성은 몸은 약하지만 자비로운 로물루스의 편에 서고 오직 힘에 굴복한 이들만 레무스의 편에 섭니다. 형은 동생이 알바롱가 인들에게 생명이 위태롭게 되자 마을 사람들과 함께 동생을 구합니다. 그러나 동생은 자신의 백성들을 마음대로 한다며 형에게 자신을 왕으로 섬기라며 덤비고 형은 쓰러진 척하다가 마지막에 동생을 찌릅니다. 이렇게 로마는 강력한 공포정치를 하려던 레무스가 아니라 신을 공경하던 형 로물루스에 의해 시작됩니다. 하느님 앞에서 뱀처럼 슬기로우면 사람들에게 비둘기처럼 당합니다. 반면 하느님 앞에서 비둘기가 되면 뱀과 같은 지혜를 주님께서 주십니다.
사람은 비둘기와 같은 마음과 뱀과 같은 마음을 동시에 지닙니다. 중요한 것은 누구 앞에서 어떠한 성격이 드러나게 할 것인가에 달려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 11,25; 루카 10,21)라고 기도하십니다. 하느님 앞에서 철부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참 지혜입니다. 이를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 성경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지혜롭다는 자들의 지혜를 부수어 버리고 슬기롭다는 자들의 슬기를 치워 버리리라.’”(1코린 1,19)
또 말합니다.
“아무도 자신을 속여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가운데 자기가 이 세상에서 지혜로운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가 지혜롭게 되기 위해서는 어리석은 이가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지혜가 하느님께는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을 그들의 꾀로 붙잡으신다.’”(1코린 3,18-19)
예수님의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라는 말에 집중합시다. 주님께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될 때라야 이 세상에서 진짜 뱀처럼 슬기롭게 됩니다. 자신이 슬기롭다고 믿는 사람은 그 꾀에 자신이 넘어갑니다. 자신을 믿지 맙시다. 이것이 뱀의 지혜입니다. 하느님을 믿읍시다. 이것이 비둘기의 단순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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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0,16-23 : 너희는 나 때문에 끌려가 재판을 받으며
“양들”과 “이리떼”의 의미를 보면 하느님의 창조물인 인간은 아무리 선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육에 따른 악한 것이 그 안에 항상 들어 있기 때문에 선할 때는 양이라고 하지만,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양과 같다고 한다.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은 이리라고 한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대하라고 하신다. 뱀은 지혜의 상징이며 비둘기는 순결의 상징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새로운 종류의 싸움을 준비시키신다. 그분 때문에 신앙 때문에 제자들은 부당한 대우와 형벌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신다. 이것은 선을 위해 악을 참고 견딜 때 승리가 있다는 것을 가르치시는 말씀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령이 정말 가치가 있는 것인지 따져보지 않았다. 그들은 그대로 순명하였다. 그들이 순종한 것은 어떤 무서운 일이 닥친다 해도, 그것을 견디어낼 수 있는 더 많은 은총을 받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 할 것이다.”((17절) 유다인들은 이렇게 하는 것이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한 일인 양, 회당에서 그들을 채찍질 할 것이다. 기도와 찬양을 바치고 성경을 읽는 그곳에서 사도들을 처벌할 것이다. 사실 사도들이 겪은 고통은 하느님께 바치는 희생 제물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19-20절)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큰 위안을 주시는 말씀이다. “말하는 이는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라고 하셨다. 즉 사도들은 하느님의 영 없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21절) 한 집안의 가족들이 서로 다툴 것이다. 이것은 꼭 가족들이라는 말이 아니라, 인간은 부모와 친척으로 불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에는 사람들이 일치하고 있었지만, 이 믿음 때문에 사악한 믿음과 충돌한다는 뜻이다. 그 사악한 믿음 앞에서 우리의 신앙을 증언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조심하여라.”(17절)고 하신다. 왜냐하면 모든 악 가운데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장 악하다는 사실을 알려주려 하셨기 때문이다. 인간이 동물보다 더 잔인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것은 동물에게는 이성이 없기 때문에 동물의 잔인함은 인간의 잔인함에 못 미친다. 이성적인 인간이 잔인하게 굴면, 그 잔인함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22절) 앞으로 신앙생활을 해 나가면서 만나게 될 사람들은 아마 이러한 사람들이라고 하시는 것 같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시작은 많이 하지만 끝에까지 가는 이는 별로 없기 때문이다. 은총으로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끝까지 견디어 낼 수 없다.
영광스러운 것은 어떤 좋은 일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좋게 끝맺는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 끝에 이를 수 있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되었으니 과거를 돌아보지 말고 우리의 마지막을 생각하라고 하신다.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시는 이유이다. 우리의 마지막 순간까지의 신앙을 묵상하고 항구하여야 한다는 말씀이다.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23절) 이는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유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박해를 하기 때문에 그 복음이 다른 나라로 들어갈 것이라는 의미이다.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올바로 살지 않으면 그 자격이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지게 된다는 말씀이다. 또한 박해를 당하면 당장 위험에 뛰어들어 죽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렇게 죽게 되면 그들에게 배워 은혜를 누리게 될 사람들에게 손해를 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말씀 안에 확고히 뿌리를 박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하느님의 일을 선택하는 삶 속에서 우리는 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나갈 수 있다. 자꾸 사람의 일로 돌아가려는 나를 잡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삶이며, 우리는 이 시대에서 순교정신을 살 수 있다. 지금의 순교는 바로 하느님의 뜻 때문에 나 자신이 죽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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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예수님의 말씀은 가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라는 말씀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뱀에 관하여 알고 있는 내용은 창세기 3장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원죄는 뱀의 유혹에서 시작됩니다. 간교한 뱀은 아담과 하와의 마음에 있는 욕망을 들추어내고 그들을 죄짓게 만듭니다. 비둘기는 창세기 8장의 노아의 홍수에 등장합니다. 비가 그치자 노아는 비둘기를 날려 보내고 비둘기는 마른 가지를 물고 옵니다. 이레가 지난 후 다시 날려 보낸 비둘기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땅에서 물이 빠졌다는 의미입니다. 비둘기가 평화의 상징으로 사용되는 이유일 것입니다.
슬기롭다는 것은 분별력이 있고 치밀하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뱀이 슬기롭다고 말씀하시는지 정확하게 알기는 어렵지만, 이 말씀은 오늘 독서의 표현을 생각하게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깨닫고, 분별 있는 사람은 이를 알아라.”
순박하다는 것은 성실하고 단순하다는 의미입니다. 아마도 여러 가지 길을 생각하거나 고민하지 않는 것으로 들립니다. “주님의 길은 올곧아서, 의인들은 그 길을 따라 걸어”간다.
분별하고 식별하는 것, 그리고 성실하고 단순한 것은 세상에 파견되는 제자들에게 필요한 덕목입니다. 제자들만이 아니라 세상에서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도 필요한 자세입니다. 무엇이 하느님의 뜻이고 무엇이 세상의 뜻인지, 무엇이 의로운 것이고 무엇이 불의한 것인지 분별하고 그 길을 묵묵히 따라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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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박해 때에>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마태 10,16).”
복음을 전하러 가는 일은 싸우러 가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평화를 전해 주러 가는 일이고,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 주러 가는 일이고,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해 주러 가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리 떼 가운데 놓여 있는 양들 같은 처지가 되더라도 이리 떼처럼 변하면 안 되고, 양의 본성과 모습을 잃지 않으면서 박해자 이리 떼를 양으로 변화시키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인가?” 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불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지난 이천 여 년의 교회 역사가 그것을 증명합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의 뒤를 따르면서, 예수님의 방식으로 일하는 사람입니다. 만일에 그 방식이 너무 힘들다고 해서 세속 사람들과 같은 방식으로 일하면, 즉 세속의 방식으로 복음을 전하면, 그 복음은 복음이 아닌 것이 되어버리고, 그 일은 실패로 끝나버립니다. 그러나 힘들어도 인내하면서 예수님의 방식으로 일하면, 그 일은 언젠가는 성공하게 됩니다. 결국에는 이리 떼가 양으로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라는 말씀은, “성령의 지혜와 예수님의 온유로써 일하여라.”라는 가르침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란 말인가? 17절 이하의 말씀이 이 질문의 답입니다.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마태 10,17-20)
박해를 받을 때, 그 박해를 오히려 복음 선포의 기회로 삼는 것, 그것이 바로 뱀처럼 슬기롭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박해자들을 미워하지 않고, 그들에게 앙갚음하지 않고, 인내하면서 그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 그것이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사람들을 조심하여라.”라는 말씀은, “사람들의 박해를 받더라도 신앙을 잃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라는 뜻입니다.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박해가 신앙을 증언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박해뿐만 아니라 모든 고난과 시련은 신앙을 증언하는 기회가 됩니다. 신앙생활을 하기가 어려운 때일수록 진짜 신앙인이 누구인지 잘 드러납니다.)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라는 말씀을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박해를 복음 선포의 기회로 삼는 것”에 대해서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그 걱정에는 “내가 과연 흔들리지 않고 잘 견딜 수 있을까?”라는, 자기 자신에 대한 걱정도 포함됩니다. 어쩌면 “나는 박해를 겪어도 끄떡없다.”라고 큰소리치는 것보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걱정하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걱정하는 사람은 도와달라고 기도하겠지만, 큰소리치는 사람은 자만심에 빠져 있다가 쉽게 꺾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모두 떨어져 나갈 것이라고 예고하시자.(마태 26,31) 제자들은 결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습니다. “베드로가 다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스승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모두 그렇게 말하였다."(마태 26,35) 우리는 예수님께서 체포되실 때 제자들이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라는 말씀은, 박해 때에 성령께서 도와주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박해자들은 자기들이 신앙인들을 박해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하느님과 예수님을 박해하는 것입니다.(요한 15,18-23) 그렇기 때문에 신앙인들이 박해를 받을 때, 하느님과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성령을 보내서 도와주십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어도 성령의 도움을 받는 것은 아니고, 믿음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의 도움을 받는 방법은 믿음과 기도입니다.)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다 돌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마태 10,21-23)
가족의 박해를 받는 상황과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는 상황은 박해가 최고로 심해졌을 때의 상황입니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정말로 견디기 힘든 최악의 고통이 될 것입니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도 신앙을 지키려는 노력을 ‘끝까지’ 해야 합니다. 여기서 ‘끝까지’는 ‘죽을 때까지’입니다.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죽을 때까지 신앙을 지키는 것은 결코 헛일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신앙 여정은 ‘지상에서 영원으로’ 가는 여행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인생은 잠시 지나가는 과정일 뿐입니다.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라는 말씀은, 무턱대고 목숨을 버리지 말고, 피할 수 있으면 피하라는 권고입니다. 순교는 인간의 선택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다 돌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라는 말씀은, “박해는 짧고, 신앙을 지킨 이들이 누리게 될 영광은 영원하다.”, 또는 “잠깐 동안은 박해자들이 이긴 것처럼 보이겠지만 궁극적인 승리는 예수님 쪽에 있다.”로 해석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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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
“경찰관이나 선생님, 의사가 젊다고 생각한다. 젊은이들이 얘기하는 화제에 대해 잘 모른다. 허리를 숙이면 소리가 난다. 일상적으로 쓰이는 전자기기들의 작동 방법을 잘 모르게 된다. 몸이 뻣뻣해졌다는 것을 느낀다. 오후에 낮잠을 자야 한다. 몸을 굽힐 때 신음소리가 나온다. 최신 음악 그룹의 이름을 모른다. 관절염이나 병에 대해 많이 얘기한다. 시끄러운 술집을 싫어한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면 중년이라고 합니다. 제게도 해당 되는 점이 있는 걸 보니 저도 중년인가 봅니다.
공자는 40세에 세상의 일에 미혹되지 않았고, 50세에 하늘의 뜻을 알았고, 60세에 마음이 유순해져서 무엇을 듣더라도 거북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공자가 생각하는 중년이라면 아직 멀었다는 생각입니다. 세상의 일에 마음이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이치를 따르기보다는 나의 욕심과 욕망을 따를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감언이설에 마음을 빼앗기곤 합니다. 무엇을 더 채우려는 생각에서는 중년이지만, 하늘의 이치를 깨닫고 실천하는 면에서는 중년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몸의 중년을 맞이할 것입니다. 생각의 중년, 마음의 중년은 끊임없는 성찰과 수련이 있어야 가능한 것 같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신앙의 ‘중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길은 올곧아서 의인들은 그 길을 따라 간다고 합니다. 죄인들은 그 길에서 비틀거린다고 합니다. 우리가 지혜와 분별이 충만하여서 주님의 길을 충실하게 걸어간다면 우리는 신앙의 중년을 사는 것입니다. 진리의 영을 받아들여 하느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사람이 신앙의 중년을 사는 것입니다. 두려워하고 걱정하기보다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믿고 주어진 길을 충실하게 걸어가는 사람이 신앙의 중년을 사는 것입니다.
‘복약 안내서’를 써주는 한의사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의사는 색다른 복약 안내서를 작성했다고 합니다. 처방된 약이 어떻게 몸을 바꾸어 나갈 것인지, 앞으로 치료 계획은 어떻게 되는지, 몸이 달라지는 과정에서 어떤 증상이 나타날 것이며, 스스로 몸을 어떻게 관찰하면 좋을지 알려주었다고 합니다.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기도 했지만 복약 안내서를 읽고 기뻐하는 환자들이 있어서, 변화된 몸을 스스로 느끼는 환자들이 있어서 계속하고 있다고 합니다. 좋은 치료는 그저 약을 주는 것이 아니라, 환자와 끊임없이 소통하는 것이라는 한의사의 말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사제의 강론은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주는 안내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제는 먼저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합니다. 본인이 변해야 남에게 전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기 위해서는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시대의 흐름과 표징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허리가 아픈 사람에게 머리에 좋은 약을 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본인의 몸과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이야기하면서 율법을 실천하지 않는 율법학자의 위선을 책망하셨습니다. 실천이 없는 신앙은 참된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들이 채워진다고 해서 진정으로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욕망을 다 채우기도 힘들지만, 그렇게 채워진 것들은 그것이 사라지게 되면 더욱 공허하기도 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합니다. 화려한 언변과 지식으로 가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실’입니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입니다. 내가 원하는 만큼 상대방에게 해 주려는 태도입니다. ‘주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라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신앙은 만병통치약이 아닙니다. 신앙은 고통 중에서도, 절망 중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찾아 갈 수 있는 이정표입니다. 그렇게 끝까지 견디면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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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월드컵 축구를 보면서 늦게 잠이 드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는 주로 생방송을 보지 않고 하이라이트를 보는 편입니다. 주로 골을 넣는 장면을 보여 주기도 하고, 시간을 절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축구를 사랑하는 사람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늦은 시간이라도 생방송으로 볼 것입니다. 시험공부를 할 때도 그랬습니다. 처음부터 공부하기보다는 요점정리가 된 것들을 보곤 했습니다. 시간이 절약되기도 하고, 다른 것들에 시간을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하나 볼 것입니다. 그래야만 전체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 가톨릭교회는 부활하신 영광의 모습인 예수님을 제단에 모시지 않고, 십자가에 달리신 고통의 예수님을 제단에 모실까요? 그 질문에 대해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이렇게 대답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적대자들을 심판하기 위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을 넘어서는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가 인간의 죄보다 더 크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수난과 십자가의 고통은 요점정리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밀알은 죽는 고통을 겪어야만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뜻한 어머니의 품을 떠나야만 아이는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가는 길에 고통과 아픔이 있을 것이다. 때로 박해와 죽음도 있을 것이다. 가족과 헤어질 수도 있고, 사람들 앞에서 모욕을 받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라. 너희는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영이시다.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결혼이 삶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결혼해도 많은 문제가 생겨납니다. 하지만 결혼을 하면서, 이제 배우자들은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함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직장을 구해도 삶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승진도 해야 하고, 동료들과 잘 지내야 하고, 주어지는 과제를 충실히 수행해야 합니다. 그래야, 직장은 계속해서 급여를 주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있어서 마냥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자녀들이 잘 자랄 수 있도록 보살펴야 하고, 아이들을 위해서 헌신해야 합니다. 아이들은 예전처럼 부모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자녀는 가정의 희망이고, 미래이기 때문에 부모는 자녀에게 모든 것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들이 채워진다고 해서 진정으로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욕망을 다 채우기도 힘들지만, 그렇게 채워진 것들은 그것이 사라지게 되면 더욱 공허하기도 합니다. 오직 하느님께 의탁할 때 우리는 행복할 수 있습니다.
오늘 화답송은 우리가 어떻게 해야 참된 행복에 이르는지 말해 주고 있습니다. “당신은 가슴 속의 진실을 기뻐하시고, 남몰래 저에게 지혜를 주시나이다. 우슬초로 정화수를 뿌리소서. 제가 깨끗하여 지리이다. 저를 씻어 주소서. 눈보다 더 희어지리다. 당신의 크신 자비로 저의 죄악을 없애 주소서. 제 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제 잘못을 깨끗이 지워 주소서.”
지금 우리는 박해의 시기를 지내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먼 곳으로 떠나는 것도 아닙니다.
새로운 다짐으로, 주님께 받은 사명을 충실하게 전하려는 마음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신앙은 만병통치약이 아닙니다. 신앙은 고통 중에서도, 절망 중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찾아갈 수 있는 이정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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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으로 말미암아>
마태오 10,16-23 (박해를 각오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다 돌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사람으로 말미암아>
사람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연다
사람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닫는다
사람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기쁘다
사람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슬프다
사람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기운차다
사람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움츠린다
사람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위로받는다
사람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고통받는다
사람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산다
사람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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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지혜는 지식과 다릅니다. 지식은 자신의 능력에 대한 신뢰로 성장하지만, 지혜는 하느님께 자신을 내맡기고 인내하며 기다릴 때 주어지는 은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마음으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그들이 겪게 될 시련을 예고하십니다.
인간의 지식으로는 이리 떼 속의 양들이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지혜는 지식의 논리를 넘어 전혀 다른 결과를 이끌어 내는 믿음입니다.
이리 떼 속에서 양들이 고통을 겪게 될 텐데,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위로는 인간의 지식과 논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도 숨겨진 뜻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뱀은 사탄의 표상처럼 이해되어 왔고, 비둘기는 성령의 표지로 자주 드러납니다.
제자들이 의회에 끌려가고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서 증언하게 될 때,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라고 하시며, 뱀이 지닌 슬기로운 지식의 언어로 그들의 헛된 지식의 허상을 깨닫게 해 줄 지혜를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그 증언은 제자들이 쌓은 지식이 아니라, 그들 안에 살아 계신 아버지의 영, 곧 비둘기의 형상으로 나타나신 성령의 거룩한 언어로 이루어질 것임을 예고하십니다.
누구나 살면서 적절한 해답을 찾지 못해 우왕좌왕해 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인간의 얄팍한 지식으로 답을 찾다 보면 또 다른 덫에 걸려 좌절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영의 언어는 기도를 통하여 깨닫게 되는 성령의 지혜입니다. 참된 지혜는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라.”라는 호세아 예언자의 목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그 목소리를 듣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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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재현 요셉 신부님]
예수께서는 사도들을 불러 권능을 주시고 파견하십니다. 사도들을 파견하시며 떠나 보내시는 예수님의 걱정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제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이 마치 양들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하십니다.
그러면서 목자 예수님은 양들에게 닥쳐올 위험을 말씀하십니다. ... 의회에 넘겨져서 매질을 당할 것이요 채찍질 당할 것이며 총독과 왕들에게 끌려가 재판을 받을 것이며 서로 고발하여 죽게 할 것이며 예수님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 라고 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해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양순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슬기와 양순함이 닥쳐올 어려움을 이겨내는 열쇠입니다. 비둘기처럼 양순하여라. 200주년 성서는 "순박하여라"로 번역합니다. 악한 것에 물들지 않는 것, 흠잡을 데 없이 순결한 것, 이것이 양순함의 의미입니다.
죄 없이 순결한 사람. 깨끗한 사람은 닥쳐올 위험 앞에서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제자들은 먼저 순결함, 양순함, 깨끗함으로 무장을 해야 합니다.
슬기로움은 무엇인가? 마태오 복음서는 현명함을 이렇게 3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1.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행하는 사람이 슬기로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지금 내가 한 말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 (마태 2, 24)
2. 맡겨진 책임을 다하는 사람을 슬기로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주인이 돌아올 때 자기 책임을 다하고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이 아니겠느냐 (마태 24, 46)
3. 신랑이신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사람이 슬기로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열 처녀의 비유에서. 등잔과 함께 기름을 준비한 슬기로운 처녀들처럼 준비하고 깨어 있는 것, 그것이 슬기입니다.(마태 25, 2 + )
순결함, 깨끗함으로 무장하고 말씀을 실행하고 깨어 준비하고 맡겨진 책임을 다하는 것. 그것이 어려움과 위험을 물리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바보가 되었고,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어서 현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1코린 4, 10) 그리스도를 믿음이 슬기며 현명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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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우리 사회에서 전염병처럼 퍼지는 현상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혐오’입니다. 누군가를 또 어떤 집단을 미워하고 싫어하는 감정을 말합니다.
물론 충분히 가질 수 있는 감정입니다. 그러나 이 감정이 폭력적인 행동으로까지 나아가고 있다면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언젠가 성지에서 어떤 아이가 친구와 대화하는 내용을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극혐’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입니다. 미워하고 싫어하는 강도가 더 심할 때, ‘극혐’이라는 단어를 쓴다고 하더군요. 아마 ‘혐오’라는 말로도 부족했나 봅니다.
어린아이도 쓸 정도로 미워하고 싫어하는 감정에 대한 타협과 조율 없이 무조건 싫다면서 파괴적인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도 별것 없습니다.
그냥 자기감정 표현으로 ‘극혐’이라고 말 한마디 하고는, 혐오하는 것을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런 혐오의 생각이 ‘묻지마’ 공격으로 나아갑니다. 자기중심적인 생각에서, 나와 다른 사람을 그리고 다른 집단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진다면 어떨까요? 이 세상에서 조화를 이루면서 함께 살아감은 불가능한 일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이렇게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생각이 하느님을 멀리하면서 함께 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아마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하느님을 향해서도 ‘극혐’이라고 외치지 않을까요?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제자들에게 어떤 무서운 일이 닥친다 해도, 그런 것들을 이겨 낼 수 있는 더 큰 은총이 그들에게 주어질 것을 약속하십니다. 제자들이 어디서 기도하든지, 심지어 자신들이 하느님께 봉사하고 있다고 믿는 세속 권력으로부터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려움의 순간에서도 주님께서는 지켜 주신다고 하시지요.
분명히 박해의 고통은 죽음까지도 나아갈 수 있는 커다란 크기입니다. 그런 박해의 고통을 주셨다고 하느님을 혐오하면 과연 하느님의 구원을 얻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 안에서 이끌어 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을 바라보면서 기쁘게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구원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예수님 시대처럼 피의 순교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하는 많은 유혹이 바로 우리의 박해자입니다. 하느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을 혐오하고 반대하면서,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구원의 선물이 멀리에 있지 않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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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모습>
귀가 예쁘거든 귀만 보여 주시오
눈썹이 곱거든 눈썹만 보여 주시오
입술이 탐스럽거든 입술만 보여 주시오
하다못해 담배가치 끼운
손가락이 멋지다면
그거라도 보여 주시오
보여줄 것이 정히나 없거든
보여줄 것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시도
기다린 뒤에도 보여줄 것이 없거든
뒷모습을 보여 주시오
조심조심 사라져가는 그대 뒷모습을
보여주시오
나태주 시인의 ‘뒷모습’이라는 시입니다. 이 시를 통해서 ‘사랑’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이 시의 화자에게는 어떤 모습도 다 받아들이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사랑하고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모습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모습으로 다가오셨고, 우리 역시 이 모습으로 살라고 명령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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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시詩같은 인생>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의 실천이 답이다-
잘 살기도 힘들지만 잘 죽기는 정말 힘듭니다. 잘 죽는 것은 생각있는 누구나의 간절한 소원일 것입니다. 아주 예전 개신교 목사님과 대화중 나눈 문답도 잊지 못합니다.
-“신부님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잘 살다 잘 죽는 것입니다.”-
참으로 만족했던 답변입니다. 지금 물어도 이 대답뿐일 것입니다. 마지막 마침표를 잘 찍는 죽음은 얼마나 중요하고 힘든지요! 마치 인생은 하나의 문장같기도 하고 시같기도 합니다. 더불어 떠오르는 말마디는 명화名畫, 명품名品, 명작名作, 명국名局입니다.
이런 아름답고 깊은 인생은 누구나의 소망일 것입니다. 이런 분을 가끔 만나면 참 기분이 좋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믿고 바라고 사랑하는 신망애信望愛의 삶을 살 때, 누구나의 가능성이 참되고 착하고 아름다운, 진선미眞善美의 명화인생입니다. 절대 하느님 없이는 이런 명품인생, 명국인생은 불가능합니다.
바둑이 더 실감이 갑니다. 삶은 흡사 바둑같습니다. 저의 바둑 실력은 아마 아마 2급은 될 것입니다. 예전 고등학교 시절 공부보다도 바둑에 빠져 지냈던 적이 많습니다. 지금은 아예 바둑을 두지 않은지 수십년이 지났지만 그 때는 바둑에 밤새운 적도 꽤 많았습니다.
은총과 더불어 끝까지 한 수 한 수 노력을 다해야 명국입니다. 아무리 잘 두어도 한 수 삐긋하여 악수나 패착을 두면 그대로 바둑은 끝납니다. 실수를 하더라도 결정적 패착을 두지 않는 한 최선을 다해 노력하면 기회는 오고 명국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만족한 바둑이 드물듯이 만족한 삶도 드뭅니다.
저 역시 신의 한 수를 두듯 하루하루 강론 쓰기로 하루를 엽니다. 하루하루가 한 수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참으로 감사하게도 악수를, 패착을 두지 않고 하루하루 후회없는 삶을 살아온 것 같습니다. 그래도 방심이나 교만은 금물입니다. 깨어 겸손히 하루하루 ‘신의 한 수’를 찾듯이 살아야 할 것입니다.
언젠가의 갑작스런 선종善終은 없습니다. 하루하루 깨어 최선의 한 수를 두듯 살아가는 것입니다. 해인총림 방장 벽산원각 대종사의 경자면 하안거 결제 법어 마지막 싯구입니다.
-“고요하고 고요한 본마음 바탕이 나의 고향이요
성성惺惺이 깨어 있는 삶이 나의 집이로다”
하루하루 매순간 참으로 깨어 있을 때 마음의 순수입니다. 한 순간에 무너지는 패착이 문제입니다. 무사無私, 무아無我, 무욕無慾의 순수한 마음으로 임할 때 명국인생입니다. 주변에서 잘 사는 것처럼 보였는데 한 순간에 무너져 목숨을 잃는 사람이나 사고나 중병으로 누워있는 분들을 보면 참 안타깝습니다.
새벽 인터넷을 여는 순간, “<속보> 박원순 시장 삼청각 인근서 숨진 채 발견”이란 비보가 톱뉴스 제목으로 나왔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 노희찬 전 정치가, 정대협 쉼터소장 손영미 엘리사벳도 이렇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지막 마침표로는 너무 안타깝습니다. 평생 삶을 잘 살기도 힘들지만 잘 마치기는 정말 힘듭니다.
아주 예전 시처럼 살고 싶은 마음에 써놨던 시가 있습니다. 22년전 써놨던 시입니다만 지금도 여전히 희구希求하는 삶입니다.
-“시처럼 살고 싶다
하얀 여백의 종이 위에 시처럼
침묵沈默의 여백餘白의 시공時空안에 시처럼 살고 싶다
여백을 가득 채운 수필이나 소설이 아닌 시처럼 살고 싶다”-1998.1.24
하느님을 참으로 사랑하여 기도에 맛들이고 끊임없이 회개의 삶을 살 때 각자 고유의 명화, 명시, 명품, 명국, 명작인생입니다. 각자 고유의 명시같은 인생에는 끊임없는 기도와 끊임없는 회개가 답입니다.
보십시오. 성서의 사람들은 예외없이 시편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시편을 참으로 사랑하고 시편을 살았습니다. 하여 우리가 평생, 매일, 규칙적으로 고백과 기도로 바치는 시편성무일도가 그렇게도 좋습니다. 시처럼 깊고 아름다운 명시 인생으로 만들어 주는 시편은총의 선물입니다. 세상에 생명과 빛, 희망 가득한 찬미와 감사의 시편들보다 더 좋은 시도 없습니다.
성서의 예언자들 역시 시편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외없이 사랑의 시인이자 신비가인 예언자들이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 호세아서도 참 깊고 아름다운 시입니다. 시같은 인생을 살았던 호세아입니다. 회개의 은총이 참 놀랍고 아름답습니다. 회개로 살아나는 사랑에 마음의 순수입니다.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라.
너희는 죄악으로 비틀거리고 있다.
너희는 말씀을 받아들이고 주님께 돌아와 아뢰어라.”
이런 회개의 촉구에 응답한 이들에게 쏟아지는 주님의 놀라운 은총은 그대로 미사은총을, 시편성무일도 은총을 상징합니다.
“이제 내가 반역만 꾀하는 그들의 마음을 고쳐주고
기꺼이 그들을 사랑해 주리라.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이 되어 주리니
이스라엘은 나리꽃처럼 피어나고
레바논처럼 뿌리를 뻗으리라.
이스라엘의 싹들이 돋아나
그 아름다움은 올리브 나무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으리라.”
얼마나 아름답고 깊은, 은혜로움 가득한 시인지요.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할 때 누구나 시인이자 신비가가 될 수 있습니다. 뱀처럼 슬기로운 분별의 지혜에 비둘기처럼 순수한 마음을 지닐 수 있습니다. 저절로 사람들을 분별하여 다치지 않을 수 있고 난국에 처해서도 답변의 길이 열립니다. 사실 말하는 이는 내가 아니라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언젠가의 지인의 질문에 대한 답도 성령의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건강하십니까?”
“노력합니다!”-
대답하니 이보다 더 좋은 대답도 없고 성령의 지혜로운 답변이라 생각했습니다. 무엇보다 끝까지 기다리며 인내를 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자세로 끝까지 견뎌내며, 버텨내며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백미이자 결론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아직 끝나지 않는 작품입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로 다시 정성을 다해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정성과 노력은 그대로 내 인생 작품에 반영될 것이고 주님도 이런 과정을 눈여겨 보실 것입니다.
마지막 선종과 더불어 주님께 바칠 내 명화같은, 명국같은, 명시같은 인생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하루하루 ‘신의 한 수’ 같은 삶을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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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이시라면?>
참는데도 한계가 있다는 말을 합니다. 인간이기에 한계를 갖는 것은 자연스런 일입니다. 사실 참다 보면 병이 생깁니다. 그래서 마음속에 쌓아두지 말고 풀어버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더군다나 주님의 이름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가족 간에도 마음이 갈라질 텐데 그 때에 참고 견디라고 하십니다. 서로의 뜻이 다르고 오해가 있을 때 참고 기다려 주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때야말로 인내가 필요한 때이고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처신할 때입니다.
강한 것은 부러지고 그래서 부드러운 것이 굳센 것을 이깁니다. 그러니 어떠한 처지에서도 더욱이 주님을 증거 하는 자리에서는 예수님께서 취하셨던 방법을 선택해야 합니다. 어떤 상황이나 처지에 구애됨이 없이 예수님 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묻고 행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지금 당장은 지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이깁니다. 감정이나 분위기에 휘둘리지 않고 신앙 안에서 굳건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매사에 '예수님이시라면?'이라는 자문이 필요합니다.
열왕기 하권 20장에 보면 히즈키야 왕이 병들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됩니다. 이때 히즈키야 왕은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울며 기도를 드렸습니다. 히즈키야 왕이 마주한 벽은 인간이 절대로 넘을 수 없는 죽음의 벽입니다. 그러나 히즈키야 왕 자신의 한계상황을 하느님께 내어 놓고 울며 기도했을 때 그 벽을 넘어설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의 눈물을 보시고 세상에서의 생명을 15년 더 연장해 주셨습니다. 15년을 연장해 준 것이 대단한 의미가 있느냐고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간에 회개하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였다면 모든 것을 얻은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벽이 참으로 많습니다. 인간적인 한계상황의 벽이 산 너머 산입니다. 생로병사는 물론이고 고독, 미움과 분노, 죄가 한계상황으로 다가옵니다. 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견디는 것입니다. 특별히 일상 안에서 히즈키야 왕처럼 벽 앞에서 기도하며 주님 이름으로 말미암아 참고 견디면 반드시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공격을 공격으로, 모욕을 모욕으로, 미움을 미움으로 되갚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혹 참을 수 없다면 잠시 동안 하느님께서는 ‘나의 결점에도 불구하고 항상 참아주신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은 따지지 않고 참아 주시는 데 내가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서 되겠는가? 은혜를 입었으면 은혜를 베풀어야 함은 당연합니다. 그래도 참을 수 없다면 사랑으로 하느님께 앙갚음하십시오.
참고 견뎌서 모두가 구원을 얻기를 바랍니다. 모함이나 수근 거리는 소리에 속상해 하지 말고, 뒤에서 딴 소리하는 사람 때문에 억울해 하며 상처 받지도 말고 오직 주님의 이름 때문에 견디시길 바랍니다. 잠잠하게 참고 견디면 의심 없이 주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이 순간 다가오는 한계를 주님으로 말미암아 극복하시길 기도합니다. 힘들고 지칠 때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에 하느님의 모든 사랑이 존재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할 때 악, 고통, 죽음은 힘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우리에게 생명과 희망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미움과 실패, 그리고 죽음의 도구에서 사랑과 승리와 영광, 그리고 생명의 표징으로 변화되었습니다."(프란치스코 교황2013,726세계청소년대회)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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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지혜와 분별을 촉구합니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마태 10,16)
예수님께서 사도들 파견에 앞서 솔직한 심경을 표현하십니다. 이리떼 속으로 가는 양이라니요, 얼마나 무서운 상황입니까!
실제로 예수님은 의회에 넘겨짐, 채찍질, 미움, 박해 등등 사도들 앞길에 지뢰처럼 묻혀 있을 난관과 어려움들을 구체적으로 나열하십니다. 아무래도 복음 선포의 길이 장밋빛만은 아닐 듯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미리 알려 주시지요.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마태 10,16)
성경에서는 뱀이 그다지 긍정적 이미지는 아닙니다만, 적어도 지력은 지니고 있습니다. 그 머리를 타인을 유혹하고 속이는 잔꾀로 쓸 때는 형벌 감이지만, 주님의 뜻을 헤아리는 슬기로 작동한다면 완전히 다른 결과를 낳겠지요. 실제로 광야의 구리뱀은 이스라엘에게 구원의 이미지로 등장합니다.(민수 21,9)
비둘기는 노아에게 싱싱한 올리브 잎을 물어다 주어 세상에 물이 빠졌음을 알려준 새로 유명하지요. 그런데 오늘 말씀께서는 제게 아가의 비둘기를 떠올려 주셨습니다.
"바위틈에 있는 나의 비둘기
벼랑 속에 있는 나의 비둘기여
그대의 모습을 보게 해 주오
그대의 목소리를 듣게 해 주오
그대의 목소리는 달콤하고
그대의 모습은 어여쁘다오."
(아가 2,14)
아가에서 비둘기는 연인(주님)이 사랑하는 여인을 불러낼 때 부르는 애칭입니다. 비둘기라 불리운 그 여인은 불타는 사랑으로 연인(주님)을 갈망하다가, 또 사랑이 주는 두려움에 움츠리며 바위틈에 몸을 숨기기도 합니다. 사랑의 두려움과 열정 사이에서 연인을 응시하며 귀를 기울이는 비둘기는 순수와 정결을 상징하지요.
복음 속 사도들에게 요구되는 뱀의 슬기와 비둘기의 순박함은, 첫째, 아버지의 영께 의탁하고 걱정하지 말 것(마태 10,19-20 참조), 둘째, 끝까지 견디어 구원을 받을 것(마태 10,22), 셋째, 박해하는 이에게 맞서거나 보복하지 말고 피할 것(마태 10,23 참조)입니다.
구원은 온전히 아버지의 일이니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미움이나 분쟁에도 휘말리지 말고, 인내와 의탁으로 복음 선포의 소명을 수행하라는 뜻이 아닐까 합니다.
제1독서는 호세아 예언서의 끝부분으로 본문 안에 내내 토해지던 격렬하고 뜨거운 사랑과 분노의 언어들이 질서를 찾으며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당신뿐이십니다."(호세 14,4)
주님 사랑에 등 돌리던 이스라엘이 긴 배반의 시간을 끝내고 주님 앞에 돌아와 뉘우치며 고백합니다. 그들은 먼저 "황소가 아니라 입술을 바치겠다"고, 형식이 아닌 마음으로 제사를 바치겠다고 약속합니다. 이어 주님 대신 믿고 의지했던 "아시리아"가 자기들을 구원할 수 없음을 비로소 인정합니다. 마지막으로 "저희 손으로 만든 것" 즉 우상을 섬기지 않겠다고 다짐하지요.
"이제 내가 반역만 꾀하는 그들의 마음을 고쳐 주고 기꺼이 그들을 사랑해 주리라."(호세 14,5)
이에 주님은 기다리셨다는 듯, 성경을 읽는 이들도 놀랄 만큼 다정하고 따사로운 어조로 당장 사랑의 회복을 선언하십니다. 나리꽃, 아름다움, 올리브 나무, 레바논의 향기, 곡식 농사, 포도나무, 포도주, 방백나무, 열매... 주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축복의 단어들이 얼마나 아름답고 풍요롭고 자애로운지요...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깨닫고 분별 있는 사람은 이를 알아라."(호세 14,10)
사랑의 배신과 진노, 경고와 징벌, 회개와 회복, 그리고 다시 사랑. 신랑이신 하느님과 신부인 백성 사이에서 이 모든 현실들이 숨가쁘게 오가고 난 뒤, 주님께서 지혜와 분별을 말씀하십니다.
이렇듯, 파란만장한 사랑의 굴곡을 거친 뒤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지혜란, 우리의 구원이 사람의 힘이나 우상에게 있지 않고 오직 주님께 달렸음에 대한 깨달음이 아닐까요. 또 사랑의 대상을 정확히 분별해 그분께 자신을 온전히 의탁하는 순박함이 아닐까요.
사랑하는 벗님! 지혜와 분별 안에서, 슬기롭고 순박하게 주님을 열렬히 사랑하고 섬기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그분만이 우리 구원이시고 사랑이시며 전부이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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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하느님의 은총이 눈에 띄게 우리에게 나타났다.
티토서는 구원을 그리스 철학적인 개념으로 묘사한다. 우선 ‘현현’(Ephiphanie), ‘나타남’이라는 개념이 나온다.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에게 나타났다. 은총이 눈에 띄게 되었다. 그런 다음 ‘교육’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당신 은총을 나타나게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삶, 예수 그리스도와 어울리는 삶을 살도록 교육시키신다. 이 새로운 삶은 또다시 당대의 그리스 윤리철학이 제시한 헬레니즘적인 생활방식의 이상향에 어울리는 개념으로 묘사된다. 그리스도인들은 희망을 왜곡하여 이 세상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오히려 이 세상에 대한 책임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올바르게 생활하여 주변 세계에 모범을 보여 주어야 한다.
-안젤름 그륀, 「희망」에서
♣하느님의 은총이 눈에 띄게 우리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살고자 하는 그리스도교인들은 또한 자신들의 삶으로 세상에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의 은총이 드러나도록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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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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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도 여전히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특히 오늘 말씀은 그들이 박해와 어려움을 당하게 될 상황에 대처할 수 있도록 미리 무장시키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마태 10,16)
여기서, 우리가 알아들어야 할 것은 먼저 제자들을 파견하는 것이 마치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보낸다.”는 사실입니다. 결코 이리 떼를 제거해주거나 쫓아주지 않고, 오히려 그들 가운데로 보낸다는 사실입니다. 곧 세상이라는 어장은 결코 환상적이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그 질곡과 어려움 속에 던져진 것입니다.
사실, 교회도 수도원도 마찬가지입니다. 결코 환상적인 곳이 아닙니다. 때로는 서로가 이리가 되어 헐뜯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못된 곳에 온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러한 이곳에 우리의 파견지인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할 것은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 대처방법을 가르쳐주십니다.
“그러니 너희는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순박하게 되어라.”(마태 10,16)
여기서, “슬기롭다”는 말의 성서에 따른 뜻은 “지혜롭다”는 말과 같습니다. “지혜롭다”는 것은 먼저 “하느님을 경외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 지혜는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10,19-20)
이는 “슬기로움”이 많이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이 사랑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슬기로움은 사랑 때문에 핍박과 박해를 받기도 하고, 끝내는 죽기까지 하는 것을 말한다 할 수 있습니다. 지혜이신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순박하다”는 말의 성경에 따른 뜻은 “온유하고 겸손하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성품인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거듭난 자의 성품과 덕입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나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이는 “순박함”이 그저 화를 내지 않고 온유한 성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강한 것을 말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순박함’은 끝까지 믿고 참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마지막까지 희망을 꺾지 않는 것입니다. 온갖 굴욕을 받기까지, 끝내는 배반 받고 죽기까지도 믿는 것입니다.
따라서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순박하게 되어라.”는 말씀은, 설혹 이리 떼에게 생명을 노략질 당한다하더라도 “죽기까지 사랑하라.”는 말씀이요, “끝까지 믿고 희망하라.”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께서는 박해를 두고, 산상설교에서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마태 5,12)고 하십니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 5,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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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마태 10,16)
주님!
가슴 깊이 슬기로움을 가르치소서!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많이 사랑하는 슬기로움을 주소서.
목숨이 노략질 당하는 굴욕 속에서도 믿고 희망하는 순박함을 주소서.
십자가에서 지니신 그 순박함과 슬기로움을 가르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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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WvhAplUMy9U&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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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마태 10, 16)
이 무더위
속에서도
꽃은 피어납니다.
삶을 살지만
아직도 삶다운
삶을 살지 못하는
우리들 삶입니다.
슬기와 순박은
이와같이
삶 안에서 함께
이어져 있으며
삶 안에서
함께 걸어갑니다.
어려움의 반복이
우리 삶의
실제 모습입니다.
그러기에
더더욱
지혜와 슬기
정직과 투명함이
필요한 때입니다.
우리 삶을
끝까지 끈기있게
견디게 하는 것은
우리의 길을
가게 하는 오롯한
믿음입니다.
오롯한
믿음은 우리의
마음을 먼저
하느님 안에서
제대로
보게 합니다.
삶의 문제 해결은
어떻게, 무엇을
해야할지를
가르쳐주시는
믿음의 주체이신
하느님께 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뱀같은 슬기를
비둘기같은 순박을
배웁니다.
고통 없는
지혜가 없고
고통 없는
순수가 없습니다.
지금 제일
중요한 것은
이 시간을
슬기롭게 견디는
기도의
삶입니다.
꽃을 피우시는
하느님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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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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