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무도 당당하게 큰 딸 옆에 차고 세탁소 대첩을 위하여 세탁소로 들어갔다. 다행히 그 주인은 딸애와 그 옷을 기억하고 있었다.
딸애에게 줄어든 옷을 입히며 사건의 개요를 말하고 보여주었다. 예습한대로 하나도 빼먹지 않고 알아듣게 말을 했다. 주인은 듣는 내내 침묵으로 일관했다. 다리미 증기를 내 옆에서 칙칙! 뿜어대며 일만 했다. 그의 침묵 앞에서 나는 점점 말이 많아졌다. 내가 듣기에도 내 목소리가 점차 딱따구리 톤으로 올라가는 것이 느껴졌다. 공연히 딸아이에게 눈치가 보였다.
언젠가 전략 아카데미 강의를 듣던 중 '전술'에 대한 경제적 방법 중 상대방의 힘으로 상대방을 제압한다는 '유술(柔術)'을 배웠던 적이 있었다. 상대방의 공격에 침묵으로 일관함으로써 상대가 도를 넘어서게 한다. 그러면 결국 상대방은 이성을 잃고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변한다. 상대편이 이렇게 자신의 공격에 스스로 화를 입는 상황이 되었을 때 비로소 최후의 일격을 가한다는 거였다. 유술이다. 잘못 걸렸다. 싸움의 고수이다. 침묵 끝에 일격이 그것을 증명했다.
"아줌마. 우리가 그 옷을 줄여 놓았다는 증거 있어요? 증명을 해서 가져오세요."하더니 말릴 겨를도 없이 휭하니 나가 버렸다.
옆에 서있던 종업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주인이 던지고 간 다리미를 똑 같이 내게 칙칙 뿜으며 비웃는 표정으로 참견을 했다.
"막말로 맡길 때 온전했다는 증거 있어요?"
참았던 화가 머리끝으로 온 몸의 기름을 활딱 끌어 올렸다. 만만하니 아랫사람이었다. 난 벼락같이 소리를 질렀다.
"야! 넌 빠져! 뭘 안다고 참견이얏!"
진창 싸움의 전조는 거의 "야!"나 "당신!"으로 시작한다. "뭐라구? 야? 이게 어따 대구 야래? 너 몇 살 처먹었는데 야아?" 이것도 수순이다. 그 다음 순서는 두말 할 것도 없이 부라린 눈알 가깝게 들이대고 더러운 막말을 침처럼 뱉으며 자멸의 수순을 밟는 것이다.
그때 전쟁 중에는 생각도 나지 않던 법이 나타났다. 경찰차가 앞에 서더니 경찰 두 명이 들어왔다. 험악한 상황을 보다 못한 딸애가 제 엄마 구한다고 112신고를 해버린 것이었다.
경찰이 나타나자 패악질 해대던 남자가 갑자기 돌변, 몸을 낮추더니 나를 향해 "사모님께서"라며 극존칭을 썼다. 힘 있는 자 앞에서의 힘없는 자의 몸에 배인 처신이었다. 세상의 이치였다. 동물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인 힘의 논리였다.
분해서 벌벌 떨던 몸에서 기운이 쭉 빠져나갔다. 허탈하기까지 했다. 그 남자에 대해 전의는커녕 오히려 처연함이 느껴졌다. 저런 사람을 붙잡고 내가 뭐한 짓이람.
자초지종을 들은 경찰이 내가 적용할 법을 설명해주었다.
"싸움 중에 욕으로 모욕을 느끼셨다면 모욕죄로 고소할 수 있으며 쌍방 해당됩니다. 다리미 증기에 위협을 느끼셨다면 위협죄로 고소하시면 됩니다. 세탁물 훼손 문제는 민사이니 경찰이 관여할 일이 아닙니다."
가까이 하기엔 법은 너무 멀고 난 12년 전과 같이 건진 거 하나 없는 싸움만 한 것이다.
"그런데 객관적으로 여기서 너무했구만. 옷이 망가졌는데 모르쇠를 한 것도 화가 날 텐데 고객에게 그렇게 대응하면 되겠나?"
나는 얼른 딸애를 보았다. 들었냐는 눈으로. 건진 것도 없고 싸움의 교본은 차치하더라도 자식 앞에서 한 싸움의 명분만큼은 있지 않았냐는 듯이.
세탁소 비닐에 싸인 옷을 들고 패잔병처럼 돌아가는 길에 딸애가 물었다.
"엄마. 아깐 나도 분한 걸 참느라 혼났어. 모욕죄, 위협죄, 민사 고소 다 할 거야?"
"아니. 안 해. 내가 더 모욕했고, 위협 전혀 안 느꼈는데...무슨 고솔 해. 그리고 사람이 살면서 때론 지는 것도 필요해. 아까 그 사람 변절하는 거 봤지? 그런 사람에게 이기면 뭣하겠니. 이기려면 나보다 강한 사람한테 이겨야지."
예습과는 다른 싸움이었고 자식 앞에 또 한 번의 참패여서 씁쓸했지만 숙제는 마친 기분이 들었다. 딸애는 앞으로 절대 싸움을 대신해 달라는 청은 안할 것이다.
<한국산문> 2012. 10월호 게재
1957년 서울 출생
2011년 29회 마로니에백일장 장원 수상 등단
한국산문작가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