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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문학, 곤륜산과 봉래산의 유선문학, 백두산 용맥론, 수근목간(水根木幹) 형세론
2018년 8월 26일
옛날에는 중원지역 산맥들이 곤륜산에서 흘러왔고
한반도의 산맥도 곤륜산에서 흘러나와 중국을 거쳐 들어왔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신라말기에 도선국사는
백두산은 한반도 지역과 동북아시아 산맥의 기원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
조선후기에는 서쪽에 곤륜산, 동쪽에는 백두산이 있다는 뜻에서
"서곤륜, 동백두"라고 동등하게 여겼습니다.
신라후기에도 곤륜산에서 산맥들이 내려와서 한반도 산맥이 되었다고 보았습니다.
예를 들어 신라후기 최치원 선생은
곤륜산이 모든 산맥의 기원이라고 보았고,
삼신산(봉래산, 방장산, 영주산)이 발해 동쪽에 있기에
신라가 삼신산에 가까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한국의 유선문학에는 신선이 되어 낙원에 유람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유선(遊仙)문학의 낙원을 곤륜산이나 봉래산에 두어 글을 지었습니다.
나중에는 고려 말기에 지리산의 청학동을 찾아내서 모든 희망을 걸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한국문학에서 곤륜산은 봉래산만큼 가깝고 중요합니다.
그런데 조선후기에는 백두산에 올라가서 노래와 글을 짓었습니다.
단군조선과 고구려 고토라는 기억은 백두산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조선후기의 백두산 문학이며 크게 발전하였습니다.
대종교는 유선문학이나 백두산 문학을 뛰어넘어
종교 입장에서 백두산의 신성함을 주장하여
독립운동의 터로 삼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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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말기 도선국사가 수모목간(水母木幹) 형세론 또는 수근목간(水根木幹) 형세론을 주장하여,
백두산에서 태백산을 거쳐 지리산까지 백두대간의 지리학 이론을 세웠습니다.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지리산까지 내려왔고
현재 광양시 백계산의 옥룡사는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내려온 용맥이 바다로 숨어드는 것을 막아주는 것입니다.
백두산 중심의 한반도 전체의 지리와 지형을 이해한 지리학 이론입니다.
물론 현대인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미신도 섞여있습니다만.
도선국사의 형세론은 현재 중고교 지리 교과서에서 참고하고 있습니다.
한국 지리학 역사에서 보면,
뛰어난 창작이고 위대한 발명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도선국사의 백두산 중심의 형세론은 한국 전통 지리학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백두산은 한반도 산맥의 기원이 되어 우리나라의 오악 오진을 이루며,
또한 백두산 북쪽지역에서 흑룡강까지 산맥들의 기원을 이루고 있습니다.
조선후기에는 새로운 지리 인식이 일어났습니다.
백두산이 한반도와 북방지역의 산맥들의 기원이 되고
압록강과 흑룡강까지를 포함합니다.
또한 바다를 보면, 동해바다를 포함하며
지리산을 거쳐 일본 열도와 유구 열도까지 백두산의 지맥이라고 보았습니다.
심지어 일본 후지산을 백두산의 자손이라고 보았습니다.
이것이 조선 후기사람들이 보았던 백두산 중심의 동아시아 지리 인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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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기와 고려시기에 분수계(分水界)를 참고한 지리학이 발달한 뒤부터
한반도와 북방지역의 산맥은 모두 백두산에서 기원하였고
곤륜산과는 상관없다고 여겼습니다.
물론 별자리(分野) 역시 중원지역과는 다르게 보아야한다고 보았습니다.
대표적인 학자는 고려말기 이승휴 선생입니다.
이승휴 선생은 요동지역과 한반도 지역은
중국과 하늘도 별자리도 구분하여야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것이 소위 하늘의 분야(分野)를 중국과 구분하자는 것입니다.
고려시기에도 조선초기에도 전국의 산천에 제사를 지냈습니다.
조선시기 영조 43년(1767)에는 함경도 성덕산(聖德山)에서
백두산을 바라보며 제사(望祀)를 지냈습니다.
하늘의 분야에서는 영성(靈星)과 노인성(老人星)에 제사를 지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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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선국사의 수모목간(水母木幹) 형세론 또는 수근목간(水根木幹) 형세론이
변천되는 것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도선국사가 874년 고려 태조 왕건의 아버지를 만나
송악산에 올라가 송악산의 지리와 풍수를 보았습니다.
"송악산의 지맥(地脈)은 임방(壬方, 정북에서 15도 내외) 백두산에서 내려왔고,
평양 대동강의 수덕(水德)의 도움을 받는 수모목간(水母木幹) 형세가 되었고,
송악산에 마두명당(馬頭明堂, 말머리 명당)이 있다."고 설명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송악산에서 보면 송악산이 백두산에서 내려왔고,
송악산의 목덕은 대동강 수덕의 도움을 받는 상생관계(水生木)를 말합니다.
이러한 내용은 고려 태조의 「훈요십조」에도 반영되었습니다.
(현재 예를 들면 고양시 말머리 공원이 있는데, 북쪽에 황룡산, 고봉산, 견달산이 있고.
말머리에서 남쪽 한강 바라보고 있습니다.)
『高麗史』,「高麗世系」:“桐裏山祖師道詵,入唐,得一行地理法而還,登白頭山,至鵠嶺(송악산)。……遂與登鵠嶺,究山水之脈,上觀天文,下察時數,曰:‘此地脈,自壬方白頭山,水母木幹來,落馬頭明堂。’”
『고려사』,卷二:“癸卯二十六年(943)夏四月,御內殿,召大匡朴述希,親授「訓要」。……其二曰:諸寺院,皆道詵推占山水順逆而開創,道詵云:吾所占定外,妄加創造,則損薄地德,祚業不永。……其五曰:朕賴三韓山川陰佑,以成大業。西京,水德調順,爲我國地脈之根本,大業萬代之地,宜當四仲巡駐,留過百日,以致安寧。”
1275년 6월에 일식이 일어나자 태사국에서 고려의 덕운이 목위(木位)에 있으니까,
목덕의 청색 옷을 입는 것이 마땅하며, 목덕을 상극하는 금덕의 흰옷을 입지 말자고 건의하였습니다.
이것은 수근목덕(水根木幹)의 덕운론입니다.
『高麗史節要』,卷十九,忠烈王,乙亥元年:“六月,庚子朔,日食。太史局言:‘東方,木位,色當尙靑,而白者,金之色也。國人,自易服,多裼以白紵之衣,木制於金之象也,請禁白色。從之。”
1357년에 사천감 우필흥(于必興)은 도선국사의 『옥룡기(玉龍記)』를 인용하여 옷 색깔을 흰색에서 청색으로 바꾸자고 건의하였습니다.
고려의 지형은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의 형세가 수근목간(水根木幹)이니까 검은 흑색을 부모로 삼고 푸른 청색을 나 자신으로 여겨야한다고 해석하였습니다.
우필흥은 수근목간 형세론을 수목상생의 덕운론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1275년 태사국의 건의와 같습니다.
『高麗史』,「輿服、冠服」:“恭愍王六年(1357)閏九月 司天少監于必興上書:‘『玉龍記』云:“我國始于白頭, 終于智異, 其勢水根木幹之地。以黑爲父母, 以靑爲身。若風俗,順土則昌, 逆土則灾。”風俗者, 君臣百姓衣服冠蓋是也。今後, 文武百官, 黑衣靑笠, 僧服, 黑巾大冠, 女服黑羅, 以順土風。’從之。”
이와 같이 도선국사가 백두산부터 지리산까지 한반도 지형을 종합하여
개성 송악산과 평양 대동강의 상생관계를 수모목간(水母木幹)의 형세라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런데 뒤에는 형세론의 근거하면서도 덕운론으로 해석하였습니다.
그런데 조선 후기 성호 이익(李溺, 1681-1763) 선생은
서양의 지리학과 만국전도를 보고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서쪽 서울에서 사방을 보면, 조선의 국경은 북쪽 두만강 변경지역에서 시작하여 동쪽 금강산으로 내려오고 다시 남쪽 제주도의 큰 바다까지 내려갔다고 보았습니다. 금강산이 중요하고 북쪽과 남쪽은 국경선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조선의 남북국경선을 고려하여 목간수근("木幹而水根")을 주장하였습니다.
이익 선생은 덕운론에 따라 왕조의 운명을 점치고 늘리려고 하는 미신을 믿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익 선생은 서양 지리학과 국경선 관점에서 수근목간 형세론을 받아들이되
목간수근 형세론으로 고쳤습니다.
이익, 『성호전집』,제56권,「書三石說後」:
“東邦山勢,木幹而水根。起自北塞,迤東迤南,傅海而止。又飛霞過脈,陡起爲耽羅。提封其南北,各距數千里。間爲楓岳,所謂元化洞天是也。”
시간적 변천을 보면
도선국사의 수모목간 또는 수근목간의 형세론과 덕운론이 있고
고려시기에는 수근목간 덕운론이 강조되었고
조선후기에는 금강산과 남북국경선을 고려하여 목간수근 형세론이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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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왕조의 덕운을 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중국 왕조의 덕운도 아래와 같습니다.
사실 왕조의 덕운을 따지는 것이 논쟁거리이기 때문에
견해가 다양합니다.
고려시기에 수근목간(水根木幹)의 덕운론(德運論)을 주장하였는데.
어떤 까닭에서 나왔는지는 신라와 태봉국을 참고해야하며
아울러 북방민족국가 예를 들어 요나라와 금나라의 덕운도 참고해야할 것입니다.
신라의 덕운이 반드시 당나라의 덕운을 참고하였다고 볼 수 없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신라와 고려 모두 북방민족국가의 덕운 또는 중국 왕조의 덕운에 대하여
참고하거나 경쟁하였다는 것을 밝혀야할 것입니다.
우리나라 왕조의 덕운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신라는 금덕(金德)이고
궁예의 태봉국은 신라의 금덕을 상극하는 수덕(水德)이고
고려는 태봉국을 계승하여 여전히 수덕이고
조선은 목덕(木德)이라고 합니다.
신라---金德
태봉국---水德
고려---水德
조선---木德
섣달 납일(臘日)에 관한 연구를 보면,
신라---인일(寅日)---
고려---진일(辰日)---水德
조선---미일(未日)---木德
물론 우리나라의 왕조마다 덕운을 논의하였는데 대체로 위와 같다고 합니다.
중국 왕조의 덕운을 보면,
五帝---土德
夏---金德
商---水德
周---木德
漢---火德
隋---火德
唐---土德
宋---火德
金---土德
元---金德
明---火德
淸---水德
그런데 고려와 조선에 관련된 북방민족국가의 덕운을 보면,
거란족 요나라---水德
여진족 금나라---金德→水德→土德
만주족 청나라---水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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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두광정이 쓴『용성 집선록(墉城集仙錄)』을 보면,
뒤에 한무제가 서왕모의 훈계를 듣지 않고 주색에 빠지고 죽이고 정벌하는 것을 그치지 않았다. 요동지역을 정벌하고 조선을 공격하였을 뿐만 아니라 서남쪽 이족들과 교통하여 방어시설을 짓고 토목공사를 일으켰다. 중국 안에서 원망하는 발발이 일어났고 올바른 정치를 잃었다. 순행하여 돌아오는 길에 동해 세 사당에 왔으나 서왕모가 다시는 하늘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서왕모는 한무제가 요동지역을 정벌하고 조선을 공격하여 한나라 사군(四郡)을 설치한 것에 분노하였다고 합니다. 서쪽 강족들도 동쪽 조선의 멸망에 관심을 보였고 서왕모조차 한무제를 만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물론 이것이 두광정 개인의 생각인지 당시 사람들의 생각인지 알 수 없지만
서쪽 강족들도 자신들의 처지에서 조선의 멸망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사실상 서쪽과 동쪽 모두 한무제를 경계하고 있었습니다.
『용성 집선록(墉城集仙錄)』:
"其後武帝不能用王母之戒,為酒色所惑,殺伐不休。征遼東,擊朝鮮,通西南夷,築台榭,興土木,海內愁怨,自此失道。幸回中臨東海三祠,王母不復降焉。"
한나라 입장에서 조선을 멸망시키고 사군(四郡)을 두었다는 뜻으로 한사군(漢四郡)이라고 불렀습니다.
조선후기 학자들은 조선의 입장에서 사군을 폐지한 것을 강조하여 폐사군(廢四郡)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들도 폐사군이라고 불러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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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족 요나라는 섣달 납일에 모든 백신(百神)께 올리는 제사 날짜에 근거하여 수덕을 주장하였습니다.
요나라는 고조선이 요양(遼陽) 지역이고.
기자가 와서 조선의 백성들에게 팔조 법을 가르쳐서
예의를 숭상하고 농업과 양잠업도 가르쳐서 경제를 부유하게 발전시켰다고 합니다.
기자 조선이 40대를 넘게 유지되었다고 합니다.
거란족 요나라는 기자 조선이 동북아시아를 문명화시켰다고 자랑하였습니다.
기자 조선을 동북아시아 문명화의 상징으로 여겼습니다.
거란족은 백두산이 신성하여 사람들이 함부로 올라가지 않았고,
올라가더라도 대소변을 싸갖고 내려왔을 만큼 신성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遼史』,卷三十八,地理志二,東京道:“東京,遼陽府,本朝鮮之地。周武王釋箕子囚,去之朝鮮,因以封之。作八條之教,尚禮義,富農桑,外戶不閉,人不爲盜。傳四十餘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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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족 금나라는 처음에 금덕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런데 요나라를 멸망시킨 뒤에는 수덕을,
북송을 멸망시킨 뒤에는 토덕을 주장하며 덕운을 바꾸었습니다.
1202년 토덕으로 바꾸면서 많은 근거를 논의하였습니다.
이런 논의를 모은 서적이 『대금덕운론(大金德運論)』입니다.
그런데 금나라는 조상이 신라 출신이라고 민족 정체성을 나타냈고
신라를 조상의 나라라고 받들었습니다.
백두산에서 발상(發祥)하였다고 믿었기 때문에
1175년에 백두산 산신을 흥국영응왕(興國靈應王)으로 책봉하고.제사를 올렸습니다.
금나라가 처음에 금덕을 주장한 근거는 백두산의 흰색을 따랐다고 말하지만,
조상이 신라 출신이므로 신라의 금덕을 그대로 따랐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금나라 문인 조병문(趙秉文, 1159-1232)은 「장백산행(長白山行)」노래를 지어
"백두산이 높아 하늘에 닿고, 흰옷 입은 신선이 자주 나타난다."고 찬양하였습니다.
금나라가 토덕으로 바꾸었지만 여전히 금덕의 흰색을 존숭하였습니다.
(長白山雄天北極,白衣仙人常出沒。)
여진족도 백두산을 숭상하고 흰색을 왕조의 색깔로 삼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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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은 여진족에서 갈라져 나왔습니다.
만주족은 여진족처럼 백두산을 발상지로 여기고
기자 조선이 동북아시아 문명화를 이끌었다고 평가하고,
삼한의 예의와 풍속이 높고 좋은 데
기자 조선을 계승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만주족은 동쪽에는 군자의 나라가 많았다고 말하고,
자신들이 중국에 들어와서 한족을 통치하는 것을 합리화시켰습니다.
『滿洲源流考』,卷十六,國俗(一):“謹案,自肅慎氏楛矢石砮,著於周初,徴於孔子。厥後,夫餘、挹婁、靺鞨、女真諸部,……至於崇禮讓、重祭祀,以及官制、語言之屬,史文所載,均有可稽,
所謂東方多君子之國,而尊君親上、先公後私,尤習尚之,固然無庸勉強者也。”
청나라 강희황제는 1709년에 중국 오악의 우두머리 태산의 용맥이
백두산에서 내려왔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백두산에서 요동반도 섬들을 거쳐 산동반도 봉래현에서 나와 태산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강희제의 태산 용맥론입니다.
중국 한족은 옛날부터 중국 지형에는 삼대 용맥이 있는데
곤륜산에서 흘러나왔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진시황의 만리장성은 황하의 수룡(水龍)이 바다로 도망가는 것을 막고
태산은 삼대 용맥 가운데 가장 성대한 중맥(中脈)의 용(龍)이 바다로 도망가는 것을 막는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강희제는 태산 용맥론을 주장하여 중국 한족이 믿었던 풍수론을 부정하였습니다.
사실상 강희제의 태산 용맥론은
신라와 고려와 조선시기에 믿고 있던 백두산 기원설을 확대시킨 것입니다.
당시 조선 지식인들은 새롭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물론 한족 관료와 지식인들은 겉으로는 찬성하고 찬양하였지만
일반 풍수론에서는 수용하지 않았습니다.
조선학자와 관료들 예를 들어 김육 선생은 1636년 북경에 사신 가서
북경의 진산들이 모두 백두산에서 내려온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김육 선생은 강희제보다 먼저 백두산의 지맥이 북경의 진산이라고 보았습니다.
* 한국과 중국의 연구성과를 참고하여 내용을 해석하였습니다.
먼저 설명하였던 내용을 크게 고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