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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4 / 이 교회가 내 교회다 (시84:1-5)
많은 교회가 전도지에 사용하는 문구 중에 ‘인생의 방황은 예수님 만나면 끝나고, 신앙의 방황은 좋은 교회 만나면 끝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 만나면’이란 말은 알겠는데, ‘좋은 교회’란 어떤 곳인가요?
여러분은 평소에 교회가 어떤 곳이며, 무엇을 하는 곳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성경에 보면 구약시대에는 교회라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대신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막이나 성전을 중심으로 모여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러다가 신약시대로 넘어오면서 예수님으로 인해 성전의 개념이 조금 바뀝니다. 요한복음 2:21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성전이라고 말씀하셨으며,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3:16절에서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신학 용어로는 교회를 ‘에클레시아’라고 합니다.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교회라고 하면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하여 모이는 장소’가 교회인 동시에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 각자’가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라도 교회에 모이기를 힘써야 하며, 또한 흩어져서는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교회로 살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이걸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모이는 교회, 흩어지는 교회’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교회에 모이기는 잘하는데 흩어지는 교회로는 전혀 기능을 하지 못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꽤 됩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모이는 교회, 흩어지는 세상 사람 중 하나’로만 살아간다는 겁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교회에 계십니다.
이게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교회에 모여야 할 이유입니다.
동시에 그리스도인은 성령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면 성령님은 언제나 우리 안에 계십니다.
이게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세상에 흩어져 살 때에는 나 사는 곳 어디에서나 하나님의 교회가 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이 ‘흩어지는 교회’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문제가 되느냐 하면,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까지도 불신자들은 늘 교회를 비판하고 비난합니다. 그런데 보면, 저들이 교회에 오지도 않는 처지에서 모이는 교회에 대해 뭘 얼마나 알고들 그러겠습니까?
저들이 교회를 비난하고 비판하는 것은 저들과 섞여 살면서 그들 눈에 비쳐지는 흩어지는 교회 즉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만을 보기에 그리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렇기에 비난하는 저들이 잘못됐다고 할 수만은 없습니다.
물론 작심하고 악의적으로 교회를 비난만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그렇더라도 비난하는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기 전에 그런 비난과 비판 앞에서 우린 교회로서의 우리 각자를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 다니는 내가 과연 교회 밖에서도 교회다웠는지를.
어떡해야 할까요? 우리가 세상에서도 흩어진 교회로 살려면?
우리 각 사람이 ‘교회 다니는 사람’으로서 ‘모이는 교회’에 대한 존재감이 분명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교회 다니는 사람이다.’라는 확신을 가지고 어디서든 ‘나는 여기서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정체성을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어야 하는 겁니다. 거기가 가정이든, 학교든, 직장이든, 어디서든 여러분이 흩어지는 교회로서의 삶을 제대로 살기 위해서라면 무엇보다 먼저 ‘내가 모이는 교회’ 즉 ‘내가 다니는 하나님의 성전’에서의 열심과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좀 억지스럽지만 이렇게 예를 들어 보자면, 프랜차이즈라는 말을 들어 보셨을 겁니다. 통칭해서는 ‘체인점’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어느 지역에서 튀김 통닭 체인점을 낸 사람이 자기 매장에서 취급하는 메뉴가 삼계탕이라고 한다면 어떨까요?
본점의 메뉴와 체인점의 메뉴가 다르다 보니 체인점 간판만 보고 들어온 사람들은 자기들이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메뉴를 취급하는 체인점을 비난할 것입니다. 또한 본점과는 전혀 다른 그런 체인점이 속해 있다는 이유로 본점까지도 비판할 것입니다.
이런 게 세상 사람들이 교회와 하나님을 비난하고 비판하는 이유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의 미성숙한 모습만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보니 그리스도인도 비판받고 교회도 비난받는 겁니다.
쉽게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인 우리를 세상 사람들은 ‘교회 다니는 사람’ 혹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을 텐데 막상 접해 보니 하나님은 안 보이고 안 믿는 나랑 똑같은, 아니면 나보다 못한 세상 사람 중 하나인 것을 알게 된다면, 그들이 그런 그리스도인인 나를 보며 교회와 하나님을 비난하는 것을 뭐라 할 수만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잘해야 합니다. 아닌 말로 전도를 하지는 못할망정 전도를 방해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힘써 교회에 모이고, 모여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하나님을 위한 열심부터 재충전하는 성도가 되려고 해야 합니다. 무엇이든 나에게 있어야 보여주지, 없는 걸 보여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하면 끔찍이 사모하며 애틋해하는 사람의 고백이 나옵니다.
본문의 표제어를 보면 ‘고라 자손의 시’라고 되어 있는데, 고라 는 레위의 증손이며 모세와 아론의 사촌 형제였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출애굽 이후 광야 생활 중에 모세에게 반역했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는데, 이때 하나님은 고라와 그의 무리는 준엄하게 심판하셨으면서도 고라의 자녀들에게는 자비를 베풀어 생명을 보존해 주셨습니다. 때문에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가슴 깊이 간직한 고라의 후손들은 이후 충성스럽게 하나님을 섬기는 레위인으로 살면서 주로 성전의 출입문을 지키는 문지기로 봉사하는 한편 일부는 성가대로 봉사했습니다. 그래서 시편 전체에도 고라 자손의 시가 다수 기록되어 있는데, 오늘 본문도 그중 하나입니다.
먼저 본문 1절 말씀을 보면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라고 했습니다.
고라 자손은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할 수밖에 없는 너무도 큰 은혜를 입었기에 당연히 하나님이 계신 교회 즉 성전도 극진히 사랑했습니다.
예전에 ‘예수님은 좋지만, 교회는 싫다.’라고 하시는 분을 상담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말은 틀린 말입니다. ‘예수님은 좋지만, 교회 안에서 부딪치게 되는 사람은 싫다.’라고 해야 제대로 맞는 말입니다.
교회도 사람들이 모인 모임이기에 세상 어느 교회도 완벽한 교회는 없습니다. 다들 나름의 문제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잠시 신약에 기록된 베데스다 연못의 장면을 떠올려 보세요. 그곳에는 병 고침 받기를 원하는 수많은 병자들이 모여 있더랬습니다.
그런데 그곳엔 예수님도 계셨습니다. 그리고 한 중풍 병자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때 중풍 병자의 대답이 무엇이었습니까?
물이 움직일 때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간다고 대답합니다.
병 고침 받겠다고 베데스다에 온 그는 거기서 온통 사람들만 볼 뿐이었습니다. 사람만 보며 낙심하고, 사람만 보며 절망하며, 자기가 병 고침 받지 못하는 이유를 사람에게서만 찾았습니다.
그러다가 그가 거기서 사람이 아닌 예수님을 만난 순간 그는 기적의 주인공이 되게 됩니다.
이렇듯 우리 역시도 고라 자손의 고백처럼, ‘주의 교회가 어찌 그리 좋은지요.’라고 할 수 있으려면 베데스다의 중풍 병자처럼 우리도 교회에서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에 오는 목적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함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 이외의 다른 이유들로 내가 교회를 싫어할 이유를 삼는다면 그런 사람은 모이는 교회에서 이미 실패했기에 세상에 나가서도 흩어진 교회로서의 삶을 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교회에서와 세상에서의 교회 되기에 실패했기에 하나님의 은혜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라는 성전’에 계시며 동시에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는 성도인 ‘나라는 성전’에도 계십니다. 그래서 교회가 세상에 내세워야 할 것은 세상에 이미 있는 것들이 아니라 세상에는 없는 오직 하나님만 보여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을 살 때면 세상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 증거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닌 말로, 교회나 그리스도인이 세상 것을 가졌으면 얼마나 가졌겠습니까? 건물로 치면 교회보다 더 큰 건물을 소유한 세상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람 수나 재물로 따져봐도 교회가 세상을 따라갈 수나 있겠는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교회에만 계십니다. 이 사실이 세상에 드러내야 할 교회의 자랑이며,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의 자부심입니다.
본문의 고라 자손만 해도 당시 하나님의 성전은 성막이라 해서 요즘의 텐트처럼 큰 천막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천막이 아니라 그 천막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사랑했기에 어찌 보면 초라할 수도 있는 천막마저도 사모하며 소중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2절 말씀을 보세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당시 고라 자손은 남들이 볼 땐 초라할 수도 있는 성막이 그에게는 범접할 수 없는 권위를 가진 왕의 궁궐로 여겨진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교회가 웅장하고 멋져서가 아니라 단지 하나님이 계신다는 이유만으로 교회를 사모했던 것입니다.
이렇듯 교회는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기에 교회는 하나님의 복이 주어지는 곳인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시편 128:4절에도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라고 했고, 5절에서는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복 주시려고!’
하나님은 이 땅에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통해 사람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우리가 교회를 통하여 받는 복은 우선은 영적인 복이겠지만, 하나님은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복까지도 약속하고 계십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무엇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느냐에 따라서 인생이 달라지고, 인격이 달라지겠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상은 이제부터는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 바뀌어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고라의 후손처럼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해졌다고 할 정도로 하나님이 계시는 교회를 사랑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나라 선교 초창기에 평양에 사는 도산 안창호 선생이 경성의 배재학당에 지원했을 때 아펜젤러 선교사가 물었습니다. ‘평양에서 경성까지 거리가 얼마나 됩니까?’
‘8백 리 정도 됩니다.’라고 하자 선교사가 ‘아니, 그 먼 곳에서 이곳까지 왔습니까?’라고 하니까 안창호 선생이 되물었습니다. ‘선교사님! 미국에서 이곳까지 거리가 얼마나 됩니까?’
선교사님이 ‘8만 리 정도 된다.’고 하자 안창호 선생은 ‘아니, 선교사님은 그 먼 곳에서 이곳까지 와서 선교하는데, 8백 리가 무엇이 멉니까?’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여러분의 교회사랑도 거리가 갈라놓지 못할 사랑이 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교회 사랑이 교회의 형편이나 교회가 가진 문제들로 인해 갈라지지 않는 사랑을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을 드립니다.
고라 자손은 또 고백하고 있습니다. 본문 3절 말씀을 보면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고백하게 된 배경을 볼 것 같으면, 압살롬의 반역 으로 인해 피난 길에 나서야만 했던 다윗과 동행했던 고라 자손이 성전을 섬길 당시 주의 제단 아래 둥지를 틀었던 참새와 제비 보금자리를 떠올리고는 부러워하며 미물들조차도 하나님의 성전에서는 그리 행복했거늘 나는 어쩌다가 성전에서 이리 멀리 떠나와 있는가를 한탄하며 가지 못하는 성전을 그리워하는 고백입니다.
결국 성도로서 가장 행복한 일은 ‘이 교회에 하나님이 계신다.’ ‘이 교회가 내 교회다.’라고 하는 믿음을 붙잡는 것입니다. 집은 내 육신의 보금자리이지만 교회는 내 영혼의 보금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영혼의 보금자리가 없게 되면 사람의 영혼은 결코 행복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며, 영혼이 불행하다면 살면서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할 수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크고 멋진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린다 해도, 아무리 훌륭한 목사님들의 설교를 듣는다 해도 거기가 ‘내 교회’가 되지 못하면 인생에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교회가 아니라 교회에 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어야 그곳이 ‘내 교회’가 되는 것이며, ‘내 교회가 좋구나’라고 할만한 은혜와 복을 받는 교회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교회를 어디 가서 찾을 수 있을까요?
굳이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좋은 교회는 그 교회에 속한 성도들의 열심과 기도로 만들어지는 것이니까요.
하나님도 그런 교회를 찾으시며 그런 교회에 복을 주십니다.
4절 말씀에서도 보시면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턴 여러분도 무심히 교회에 오려 하지 말고 교회에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러 교회로 오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교회에서 만난 하나님이 여러분이 사는 모든 곳에서의 하나님으로 역사해 주실 것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교회도 사람들의 모임이다 보니 때론 인간적인 모습이나 실망스런 행태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우린 그런 것을 보기 위해 교회 오는 것이 아님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 오는 목적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함입니다.
이쯤에서 다시 베데스다 연못의 장면으로 다시 가보면, 당시 그곳에 있던 중풍 병자에게 예수님은 “네가 왜 여기 왔느냐?”라고 묻지 않으셨습니다. 묻지 않아도 베데스다에 온 목적이 그가 병이 낫기 위해서임을 이미 알고 계셨기에 예수님은 그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렇듯 내가 교회 온 이유를 예수님도 이미 알고 계시건만 왜 아직 나만 모르는 걸까요?
우린 ‘예수님 만나기 위해 교회 오는 것’임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언제 어디서든 세상을 살며 “나는 교회 다니는 사람이다.”라는 확신과 “나는 예수님 만난 사람이다.”라는 고백을 통해 교회 안에서건 밖에서건 교회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고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교회를 ‘내 교회’라고 확신하고 사랑하시는 한, 하나님도 여러분을 ‘내 백성, 내 자녀’로 사랑하고 복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예배하는 이 교회가 작아도 좋은 교회가 되기를, 또한 하나님이 계셔서 은혜와 복을 넘치게 주시는 교회가 되게 하기 위해 언제 어디서든 교회를 위해 기도하시고, ‘이 교회가 내 교회다’라는 확신을 가지셔서, 세상에 살면서도 교회를 통해 주시는, 세상을 이기는 복을 받으며 사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