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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Original Good News or an Altered Version?
원래의 복음인가 개정된 버전인가?
Even more crucial than the previous factors discussed is the issue of whether the “good news of the kingdom” thus preached is the same “good news of the kingdom” preached by Christ and his apostles. We have a clear presentation of what Jesus’ apostles understood to be the “good news.” If one will simply take the Bible account and read the book of Acts and the various writings of the apostles, the contrast between their expression of the good news and that spoken at the doors by Jehovah’s Witnesses is notable. 앞서 논의한 요인보다 더욱 더 중요한 것은 "왕국의 좋은소식"이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이 전했던 "왕국의 좋은소식"과 과연 같은 것인가의 쟁점이다. 우리는 예수의 사도들이 이해한 "좋은 소식"이 무엇인지에 대한 명료한 기록을 소유하고 있다. 성경을 펴서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들의 여러 기록들을 읽어보면, 좋은 소식에 대한 사도들의 표현과 여호와의 증인들이 문 앞에서 말하는 표현이 뚜렷하게 대조된다. The Watch Tower message focuses on a good news that deals overwhelmingly with concerns about negative “world conditions” and the hope of early relief from the problems these bring, through the entrance of a perennially-at-hand “new world” directed by a new heavenly government.23 워치타워의 메시지는 "신세계"의 입구를 향한 부정적인 "세계 상황"과 이로 인한 문제로부터, 새로운 하늘 정부가 지휘하여 조기 구제의 희망을 다루는 좋은 소식에 압도적인 초점을 맞추고 있다.23 That unquestionably has great appeal, since it is normal for human nature to feel more immediate concern about existing external pressures that bring nagging difficulties. The thought of a government is predominant in the mind of Witnesses when they think of the “Kingdom,” and their view of that government is notably similar to that of modern governments of our time.24 The Watch Tower Society has, in fact, published both articles and talk outlines drawing parallels between the “Kingdom” and such governments, depicting the administrative, legislative, judicial and educational facets in both, including evidence of the Kingdom’s being a functioning “government” since 1914 in its “providing and administering written laws” and “providing an educational program” to its subjects, as also the ability to “finance” such a program, and even comparing the present “population” subject to that government with the population of various small countries.25 그것이 큰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는 데에 의심할 바 없는 이유는, 인간의 본성이 계속해서 어려움을 야기시키는 현재의 외부적 압력에 대해 당장 더 많은 신경을 쓰는 것이 매우 정상적이기 때문이다. 증인들의 '왕국'에 대한 개념은 하나의 정부라는 개념이 지배적이며, 그 정부에 대한 그들의 생각은 현대 정부에 대한 시각과 매우 비슷하다.24 사실 워치타워 협회는 '왕국'과 그러한 정부 사이의 병행점을 설명한 기사와 담화를 모두 요약해서 발행하였는데, 1914년 이래 왕국이 그 백성에 대해 "서면으로 된 행정법"과 "교육 프로그램 제공"에서 정부의 기능을 하고 있다는 증거를 포함하는 행정적, 입법적, 사법적, 교육적 측면들을 기술하고 있으며, 또한 이러한 프로그램을 위한 "재정적" 능력, 그리고 현재 그 정부에 종속된 "인구수"를 여러 작은 나라들의 인구수와 비교하기까지 하였다.25 It seems remarkable, in this connection, that Watch Tower writers can fail to see that their organization has done the same thing that they condemn in other religions, notably the Catholic Church. An article in the December 1, 1984, Watchtower, for example, speaks critically of Church father Augustine’s equating the kingdom with the church on earth, and quotes this summary of the effect of that teaching (page 6): 이와 관련하여, 워치타워의 집필자들은 그들의 조직이 다른 종교에서 특히 그들이 카톨릭을 비난했던 것과 같은 일을 저질렀다는 점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예를 들어, 1984년 12월 1일호 파수대 기사에서는, 교회의 대부라 불리는 오거스틴이 왕국을 지구상의 교회와 동일시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으로 말하며, 그 가르침의 영향에 대해 요약(6면)하여 이렇게 인용한다: |
Through the ecclesiastical hierarchy Christ is actualized as King of the kingdom of God. The area of the kingdom is coterminous [having the same boundaries] with the frontiers of the Church’s power and authority. The kingdom of heaven is extended by the mission and advance of the Church in the world. 교회의 교직 계급 제도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왕국의 왕으로 구현된다. 그 왕국 영역은 교회의 권세 및 권위의 범위와 동일하다. [같은 경계 안에 있다.] 하늘 왕국은 세상에 있는 교회의 포교 활동과 발전에 의해 확장된다.”(한국어 85년 4월 1일) |
Yet this is virtually identical with what the Watch Tower organization has done, and in the minds of its members “seeking first the kingdom” means essentially supporting, being submissive to, and working for the expansion of the “visible organization.” It boasts of the growing “population” within the frontiers of the organization and plainly expresses the view that their submission to the organization and its Governing Body equates with submission to Christ as King.26 It constantly applies to itself Messianic prophecies originally spoken to the nation of Israel, God’s “typical government.” In the January 15, 1988, Watchtower , for example, we read (pages 16, 17): 그러나 이것은 사실상 워치타워 조직이 해온 일과 거의 일치하며, 증인들의 마음 속에서는 " 왕국을 먼저 구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가시적 조직"의 확장을 지원하고 복종하며, 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 조직이라는 테두리 내에서 증가되는 "머리수"를 자랑하며, 그들이 그 조직과 그 통치 기관에 복종하는 것이 그리스도에게 왕으로 복종하는 것과 같다는 견해를 분명하게 표현한다.26 그것은 하나님을 "대표하는 정부"인 이스라엘 국가에 대해 처음부터 말해왔던 메시아적 예언 자체에 지속적으로 적용되어 왔다. 예를 들어 1988년 1월 15일호 파수대에서 다음과 같이 읽을 수 있다.(16, 17면): |
. . . joyfully they cry out: “You have added to the nation; O Jehovah, you have added to the nation; you have glorified yourself. You have extended afar all the borders of the land.” (Isaiah 26:12, 15) In 210 lands around the earth, Jehovah continues to add sheeplike persons to his spiritual nation. Hundreds of thousands of new associates are being baptized . . . . More Kingdom Halls and Assembly Halls are being built. Watch Tower branches are extending their Bethel Homes and factories and are adding printing equipment. The growth is continuous! “오 여호와여, 당신은 이 나라를 크게 하셨습니다. 이 나라를 크게 하시고 스스로를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당신은 이 땅의 모든 경계를 멀리까지 넓히셨습니다. ”라고 즐거운 마음으로 외칩니다. (이사야 26:12, 15) 전세계 약 210개 나라와 지역에서, 여호와께서는 양 같은 사람들이 자신의 영적 나라에서 더욱 더 늘어나게 하고 계십니다. 새로 연합하는 수십만명의 사람들이 침례를 받고 있읍니다. 파이오니아 신기록에 달하는 달들에는 50만명 이상의 특별, 정규 및 보조 파이오니아들이 봉사합니다. 왕국회관과 대회회관이 더 많이 건축되고 있읍니다. 워치 타워 지부들이 벧엘 숙소와 공장을 확장하고 있으며, 인쇄 시설들을 늘리고 있읍니다.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고 있읍니다! This expansion comes because the “Prince of Peace” is directing the affairs of God’s people on earth. As Isaiah states earlier in his prophecy: “To the abundance of the princely rule and peace there will be no end, upon the throne of David and upon his kingdom in order to establish it firmly and sustain it by means of justice and by means of righteousness from now on and to time indefinite. The very zeal of Jehovah of armies will do this.” (Isaiah 9:6, 7) How grandly those words have been fulfilled today! 이러한 확장이 있게 된 것은 “평화의 군왕”이 지상에서의 하나님의 백성의 일을 감독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사야가 그보다 앞서 한 예언에서 이렇게 말한 바와 같습니다. “군왕의 통치의 풍성함과 평화가 끝이 없을 것이며, 그것을 확고히 설립하고 지금부터 정해지지 않은 기간 공평과 의로 그것을 유지하기 위하여 다윗의 보좌와 그의 왕국 위에 앉을 것이다. 바로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 일을 수행할 것이다.” (이사야 9:6, 7) 오늘날 이 말씀이 참으로 웅대하게 성취되었읍니다!(한국어 1988년 1월 15일 16, 17면) |
As the article itself states, the ‘fulfillment’ is seen, not in truly spiritual aspects, but in numerical growth—which brings more persons under the organization’s authority —and organizational expansion in properties, buildings and equipment. Augustine’s equation of the kingdom with the “church” is paralleled by the Watch Tower’s equation of the kingdom with the “earthly visible organization.” 기사 자체에서 언급되었듯이, '성취'는 진정으로 영적인 측면이 아니라 수치적인 성장으로 보여지며ㅡ 이는 더 많은 사람들을 조직의 권위 아래로 끌어들인다.ㅡ그리고 재산, 건물 및 장비의 조직적 확장을 의미한다. 오거스틴의 왕국과 "교회"의 등식은 워치타워의 왕국이 "지상의 보이는 조직"과 등식을 이룬다는 것과 병행적이다. The constant emphasis on the idea of “government” undoubtedly contributes markedly to the willingness of Witnesses to subject their thinking and their consciences to a religious system, to their acceptance of the imposition of a growing volume of “theocratic law,” numerous organizational rules and policies that must be observed. It is advantageous to such an authoritarian arrangement for congregational elders and traveling representatives to be thought of, not simply as humble servants of Christ and fellow disciples, but as “government representatives” empowered to administer the laws and policies of a functioning governmental system.27 Corollary to this emphasis on “government,” the Watch Tower Society, at least from and after 1935, has developed what one French writer described as a gospel of “spiritual materialism,” that is, an appeal to materialistic desires wrapped in spiritual terms. This is done by constant stress on the prospect of soon being able to enjoy endless material and physical benefits —with an abundance of choice food, with beautiful homes in lovely surroundings, with a return from the wrinkles, weakness and pains of old age to the vibrant health, beauty and strength of deathless youth —all this free from taxation, inflation, high costs of health and life insurance, accidents, disasters, crime and war. No sane person would fail to find such a prospect attractive. Any politician who could convince people he could effect such a change would win immediate election in any country. But the motivation for desiring such a problem-free, materially and physically ideal life actually demands no greater spirituality, certainly no greater Christianity, than that which moved Ponce de Leon to seek the fountain of eternal youth, or for the followers of Mohammed to desire the paradise of the “seventh heaven,” with its very earthly kind of delights.28 "정부"라는 개념을 계속 강조하므로써 증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생각과 양심을 종교 시스템에 종속시키려는 의지를 강하게 하고, 점점 더 늘어나는 "신권 질서"와 준수해야 할 많은 조직 규칙과 방침들을 풍성한 영적 마련으로 인식하도록 세뇌시키는 데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회중 장로들과 여행하는 대표자들을 그리스도와 동료 제자들의 보잘 것 없는 단순한 종으로서가 아니라, 현재 기능하는 정부로서의 법과 정책을 행사할 수 있는 "정부 대표자"로, 생각하도록 함으로써 그러한 권위주의적인 마련에 유리하게 작용하게 하였다.27 이러한 "정부"에 대한 강조와 함께, 워치타워 협회는 적어도 1935년부터 줄곧 오늘날까지, 한 프랑스 작가가 "영적 물질주의"의 복음이라고 묘사한 것, 즉, 물질주의적 욕망을 영적인 용어로 포장함으로써 좋은 소식을 호소하는 방향으로 발전시켜 왔다. 이것은 곧 무한한 물질적, 육체적 혜택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에 대해 끊임없이 강조하므로써 이루어진다. ㅡ 입맛대로 고를 수 있는 많은 음식과 아름다운 주변 환경에 아름다운 집이 있고, 노년의 주름, 나약함, 고통에서 벗어나 활기찬 건강, 아름다움, 그리고 죽음 없는 젊음의 강인함으로 ㅡ 이 모든 것이 세금, 인플레이션, 건강 및 생명 보험의 고비용, 사고, 재난, 범죄 및 전쟁의 위험이 없는 세상에 살 수 있다는 강조를 한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전망에 매력을 느끼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그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국민을 설득할 수 있는 정치인이 있다면 그는 어느 나라에서든 선거에서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문제가 없고 물질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이상적인 삶을 원하는 동기를 심어주고 발전시키고 강조하는 것은, 폰세 데 레온이 영원한 젊음의 샘을 찾도록 움직이거나 모하메드의 추종자들이 지상의 쾌락과 더불어 "제7의 천국"이라는 낙원을 바라도록 움직이게 한 동기보다 더 높은 영성이나, 더 심오한 그리스도의 정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28 The major problem in all this is that it is a greatly altered, embroidered, good news when compared with the good news that Christ’s followers preached, as recorded in the Christian Scriptures. Their message, and the language they used, focused, not on a “government,” but on a person, the person of God’s Son, Christ Jesus.29 The expression “Christ’s kingdom” primarily carries the meaning of “Christ’s reign or dominion” or “Christ’s kingly rule.”30 Since God is the sovereign source of Christ’s kingship and since this is God’s own arrangement, the expression “the kingdom of God” is often used as a synonym for the kingly rule of his Son.31 이 모든 것의 주요한 문제는 신약 성서에 기록된 것처럼,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이 전파했던 좋은 소식과 비교할 때, 그것은 크게 변질되고, 수놓여진, 좋은 소식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메시지, 그리고 그들이 사용한 언어는, "정부"가 아니라, 한 사람,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에게 초점을 맞췄다.29 "그리스도의 나라"라는 표현은 주로 "그리스도의 통치 또는 지배" 또는 "그리스도의 왕정 통치"의 의미를 담고 있다.30 하나님께서 이 그리스도의 왕권과 통치권의 근원이고 하나님께서 이것을 친히 마련하셨으므로 "하나님의 왕국"이라는 표현은 그의 아들의 왕권 통치와 같은 의미로 자주 사용된다.31 |
To speak of Christ’s “kingdom” then is primarily to speak of Christ’s “rulership,” and if one keeps that in mind in reading Scriptural references to the “kingdom” a considerably different sense comes through from that found in Watch Tower publications. One has but to read the expressions of Christ’s apostles to see that when they spoke of the “kingdom” it was predominantly in that sense which focuses on the person of the Son of God and his lordship. The expression “good news of the kingdom” means simply “the good news of Christ’s rulership.” 그리스도의 "왕국"이 의미하는 바는 주로 그리스도의 "통치권"을 언급하는 것이다. 만약 여러분이 성경에 언급된 "왕국"을 읽게 될 때 그 사실을 명심한다면, 워치타워 출판물에서 발견된 개념과는 상당히 다른 의미가 전달된다.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왕국"을 말할 때, 그 표현에서 읽을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인격과 주로서의 그의 권능에 초점을 맞춘 것이 지배적 의미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왕국의 좋은 소식"이라는 표현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통치권에 대한 좋은 소식"을 의미한다. We find the expression “good news” more than one hundred times in all the Christian Scriptures. Among these, only eight times does the expression “good news of the kingdom” occur. In all the other cases the good news is either specifically stated to be “the good news about the Christ” (or similar expressions) or the context shows that the reference is to Him, the person, not to a “government.” 우리는 "좋은 소식"이라는 표현을 신약 성경에서 모두 백번 이상 발견한다. 이 중에서, "왕국의 좋은 소식"이라는 표현이 8번 밖에 나오지 않는다. 다른 모든 경우에서 좋은 소식은 특별히 "그리스도에 관한 좋은 소식"으로 명시되거나, 또는 문맥이 언급하는 것은 "정부"가 아니라, 사람을 가리키는 경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What did the apostles and other Christian writers emphasize in describing that Messianic rulership and its effects? They consistently pointed to Christ’s ransom sacrifice, his victory over kings sin and death on behalf of all mankind, the authority the Father has given to his resurrected Son to liberate from the wages of sin and death all those who put faith in him. That was —and is —the good news the Bible itself brings us. The Biblical good news does not draw attention to, nor is it tied up with, some date, whether 1914 or any other date, nor does it attract by offers of alluring physical and material benefits “just around the corner.” It is tied up with an event, the event in which God’s Son fulfilled his primary mission as the Messiah and gave his life on our behalf, thereafter being resurrected to God’s right hand and serving as our advocate there.32 Only for this reason could Paul say to the Corinthians, “I decided not to know anything among you except Jesus Christ and him impaled.”33 사도들과 다른 그리스도인 필자들은 메시아의 통치권과 그 영향을 묘사하면서 무엇을 강조했는가? 그들은 한결같이 그리스도의 대속 희생과, 모든 인류를 대신하여 죄와 사망의 왕노릇에 대한 승리, 아버지께서 부활하신 아들에게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을 죄의 삯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권세를 가리키고 있다. 그것은 성경 자체가 우리에게 알려준 좋은 소식이었으며 현재도 여전히 그러하다. 성서의 좋은 소식은 1914년이든 다른 연도이든 어떤 특정한 시기에 관심을 끌지 않으며, "바로 목전의"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이익으로 유혹하는 것에도 관심을 돌리지 않는다. 그 좋은 소식은 하나님의 아들이 메시아로서 자신의 사명을 다하고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으며 그후 부활하시어 하나님의 오른편에서 우리를 변호하고 계신다는 사실과 관계되어 있다.32 오직 이러한 이유로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처형되신 분,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말할 수 있었다.33 That central event of the good news is an event of 1900 years past yet it remains the event of supreme importance for all of us today. The fact that our own personal realization of its full benefit is yet future in no way changes the fact that the most crucial event in human history took place back then and will not be surpassed by any future event. The future is, in fact, governed irresistibly by that past act. Whatever future benefits we yet receive are, in reality, aftereffects of that act. 그 좋은 소식의 중심에는 비록 1900년 전의 사건이 자리잡고 있지만 오늘날 우리 모두에게도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그 완전한 유익이 우리에게 친히 실현되는 것은 아직은 미래라는 사실이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이 그 당시에 일어났고 어떤 미래 사건도 그것을 능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결코 변경시키지 않는다. 사실 미래는 과거 행위에 의해 지배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앞으로 우리가 받을 유익과 혜택이 어떠하든지 그 과거 사건의 여파로 일어나는 것이다. The apostles plainly saw matters in this light, recognizing the overriding, overpowering finality and the determinative, preemptive nature of that event, Christ’s death and resurrection, and the effect of placing faith in the reconciliation and redemption made possible thereby. Only thus could they have spoken as they did, speaking of themselves and fellow Christians as though already possessing the highest blessings and benefits made possible by that ransom sacrifice. 사도들은 분명히 이러한 시각으로 문제를 보았는데, 이는 그 사건의 압도적이고도 강력한 최종 결과와 결정적이고 우선적인 성격,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그로 인해 가능해진 화해와 구원에 믿음을 두게 되는 결과를 인정하게 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과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그 대속 희생으로 인해 가능해진 최고의 축복과 혜택을 이미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말할 수 있었다. There is unquestionably a danger in focusing on the present to the detracting of the future fulfillment of God’s promises. (Compare 2 Corinthians 4:8; 5:1-10) An example of this wrong viewpoint is presented at 2 Timothy 2:17, 18. (Compare also 1 Corinthians 15:12) Hope is a principal Christian element and hope relates to what is future. (1 Corinthians 13:13.) 현재에 초점을 맞추면 미래의 하나님의 약속 이행이 저해될 위험이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비교 고린도후서 4:8; 5:1-10) 이 그릇된 관점의 예가 디모데 후서 2:17, 18에 나와 있다. (비교 고린도전서 15:12) 희망은 기독교의 핵심 요소이며 다가올 미래와 관련이 있다. (고린도전서 13:13) There is nonetheless detriment in a failure to recognize the fact that many of God’s promises have, in a spiritual sense, a present application in the lives of Christians. The “sealing” or “stamping” of God’s servants by his holy Spirit is presented as a “pledge” or “deposit” (“advance installment” [AT]; “token in advance,” [NW]) guaranteeing their promised inheritance. (Ephesians 4:13, 14) This present application of many of God’s promises has a faith-strengthening and hopestrengthening effect that merits serious recognition. Obviously, the complete and total realization of the Christian hope still lies ahead. The apostle Peter thus writes of the “new heavens and new earth that we are awaiting according to his promise.”34 At the same time, both he and other writers of the Christian Scriptures speak of many of God’s promises as already undergoing fulfillment toward believers, either actually or in a spiritual sense. They were at one and the same time both spiritual prospects and spiritual realities, sometimes expressed as the “already-not yet” element of Scriptural presentation of these promises. While not losing from sight that the ultimate fulfillment is yet future, we can see that this present fulfillment is true of much —possibly even the entirety —of what is stated in the passage of Revelation 21:1-5 to which Witnesses regularly refer as describing a future “new world.” They fail to realize that in the preceding Christian writings most of the things set out as produced by the “New Jerusalem” are also spoken of as, in a vital sense, already in existence at the time of those writings.35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많은 약속들이 영적인 의미에서 현재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적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치명적일 수 있다. 그의 거룩한 영에 의해 하나님의 종들을 "봉인"하거나 "인장"되는 것을 약속된 유업을(에베소 4:13, 14) "맹세" 또는 "보증"("미리 설치" [미국 역]; "앞선 증거" [신세계역])으로 표현한다.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을 현재 적용하므로 믿음을 굳건하게 하며 희망을 강화시켜 진실로 인정 받기에 합당한 결과를 가져오게 한다. 그리스도인 희망의 완전하고 절대적인 실현은 여전히 미래인 것은 분명하다. 사도 베드로는 이와 같이 "우리가 그의 약속에 따라 기다리고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34 동시에, 그와 그리스도인 성경의 다른 필자들 모두 실제로나 영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약속의 많은 부분이 이미 믿는 자들에게 성취되고 있는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것들은 아직 성취되지 않은 영적인 전망이나 벌써 성취된 영적인 현실 둘 다를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성서가 제시하는 약속의 요소들이다. 궁극적인 성취가 아직 미래라는 사실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증인들이 미래의 "새로운 세계"를 기술한다고 자주 반복해서 언급하는 계시 21:1-5 에서 언급되는 내용이ㅡ 상당 부분, 어쩌면 전체일 수도 있다ㅡ 현재에 성취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증인들은 앞서 살펴 본 신약성서 기록에서 "새 예루살렘"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의 대부분은 매우 중요한 의미에서 이미 그 기록 시기에 존재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35 Revelation 21:3, for example, speaks of the ‘tent of God being with mankind, of his residing with them and their being his people, God himself being with them.’ The Scriptures show that Christ’s ransom sacrifice brought about the reconciliation of believing men and women with God, bringing them from a state of enmity to one of peace and friendship with God.36 For that reason the apostle could speak of Christians at that very time as “a temple of a living God” in which “God’s spirit dwells,” a “place for God to inhabit by spirit,” and could quote the prophecy of Isaiah where the very same expression is found at Revelation chapter twenty-one: 예를 들어, 요한계시록 21:3은 "하느님의 천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다. 그분이 그들과 함께 거하실 것이며, 그들은 그분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실 것이다"라고 언급한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대속 희생이 인간 남녀를 하나님과 더불어 화해하도록 하였고, 그들을 하나님과의 적대적 상태에서 평화와 우정의 상태로 인도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36 그 때문에 사도는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영으로 거주하시는 장소였으며 계시록 21장에서 볼 수 있는 동일한 표현인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할 수 있었다: |
Just as God said: “I shall reside among them and walk among them, and I shall be their God, and they will be my people.37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그들 가운데로 걸어갈 것이며, 내가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며,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37 |
The apostle presents this promise of God’s dwelling with men and their becoming his people as having attained fulfillment; he did not present it as something future but as a relationship already in effect. His fellow apostle, Peter, clearly states, “You were once not a people, but are now God’s people.”38 Because of Christ’s sacrifice, and the reconciliation with his Father it made possible, in the first century the “tent of God” was indeed with men and He was now residing among them and they were His people, even as depicted in the Revelation account.39 사도는 하나님께서 사람과 함께 거하며 그들이 그분의 백성이 된다는 이 약속이 이미 성취된 것으로 발표한다; 그는 그것을 미래의 어떤 것으로서가 아니라 이미 유효한 관계로서 제시하였다. 그의 동료 사도 베드로는 "여러분은 한때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그분의 백성이 되었습니다."라고 분명히 말한다.38 그리스도의 희생과 그것으로 가능하게 한 그의 아버지와의 화해가 있었기에, 1세기에는 하나님의 천막은 실제로 사람들과 함께 있었고, 그는 그들 가운데 거하고 있었으며, 그들은 요한 계시록에서 묘사된 것처럼 그분의 백성이었다.39 In the Revelation account, verse 4 states that God “will wipe out every tear from their eyes, and death will be no more, neither will mourning nor outcry nor pain be any more.” The first portion of this verse, as to God’s wiping out every tear and death being no more, exactly corresponds in content to the words of Isaiah 25:8. At 1 Corinthians 15:54 the apostle Paul quoted from that part of Isaiah’s prophecy, not as pointing to some earthly paradisaic conditions (as the Watch Tower publications regularly do), but with regard to the resurrection of Christians and their passing from mortality to immortality. Yet, in a sense, the ‘victory over death’ had already been gained for them, its “sting” had been annulled. Though Christians were still subject physically to death, in a very vital sense they were beyond its power and could remain beyond it by maintaining faith in Christ’s superior ransoming power. They knew that God had ‘made them alive’ though they were previously ‘dead in their trespasses and sins.’40 요한계시록의 내용에서 4절은 하나님께서 "그분은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더 이상 죽음이 없고, 슬픔과 부르짖음과 고통도 더는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린 것이다.” 라고 말한다. 이 구절의 첫 부분인,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더 이상 죽음이 없고"라는 부분은 이사야 25장 8절의 말씀과 정확히 일치한다. 고린도 15장 54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사야의 예언의 그 부분으로부터 (워치타워 출판물들이 자주 그렇게 하듯이) 어떤 미래의 지상 낙원적 조건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부활과 그들이 멸성에서 불멸성으로 변화하는 것에 관하여 인용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는, '죽음의 승리'가 이미 그들에게 적용되었고, 죽음의 '독침'은 무력해졌다. 비록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육체적으로 죽음에 굴복되었지만, 매우 중요한 의미에서 그들은 그 죽음의 힘을 벗어나 있었고, 그리스도의 탁월한 대속에 대한 믿음을 유지함으로써 그 죽음을 초월할 수 있었다. 그들은 비록 이전에 '자신들의 불법과 죄로 죽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살아있게' 하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40 Having died to sin and having been raised to “newness of life,” for them the reign of “king death” had ended; through Christ’s rulership they were no longer under “king death’s” dominion and law.41 For that reason the apostle John could say, “We know [not that we will pass over, but] that we have passed over from death to life, because we love the brothers.”42 In so saying, he was simply repeating Jesus’ identical expressions in which Jesus spoke of those putting faith in him as already possessing everlasting life because of that faith.43 That is evidently why Jesus could say, not only that “he that exercises faith in me, even though he dies, will come to life,” but also that “everyone that is living and exercises faith in me will never die at all.”44 All these powerful statements are certainly the equivalent in force of the Revelation statement, “and death will be no more,” and they all show that these results of Christ’s ransom were already in effect among his followers. 죄에 대해 죽고 "새로운 생명"으로 일으킴을 받아, 그들에게 죽음이 왕 노릇하던 것이 끝나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통치를 통해 "죽음이 왕노릇하던" 통치권과 율법아래 더 이상 있지 않게 되었다.41 사도 요한은 그런 이유로 "우리는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 갔다[미래시제가 아니라 이미 당시에 성취된 과거시제]는 것을 알았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라고 말 할 수 있었다.42 그렇게 말함에 있어서 그는 단지 예수께서 자신에게 믿음을 두는 자는 그 믿음 때문에 이미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한 것과 동일한 표현을 반복하고 있었다.43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나에게 믿음을 나타내는 사람은 죽어도 살아날"뿐만 아니라, "살아서 나에게 믿음을 나타내는 사람은 누구든지 결코 죽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분명한 이유이다.44 이 모든 강력한 진술은 분명 "더 이상 죽음이 없을 것"이라는 요한 계시록의 진술과 대등한 것을 이루며, 그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이러한 결과가 이미 그의 추종자들 사이에 효력이 발휘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As for mourning, outcry and pain, Christ had come precisely to carry out the commission foretold in earlier prophecy, namely “to preach good news to the poor . . . to bind up the brokenhearted . . . to comfort all who mourn, and provide . . . the oil of gladness instead of mourning, and a garment of praise instead of despair.”45 He did not fail in that commission and could say in the synagogue in Nazareth, “Today this scripture is fulfilled in your hearing.”46 His promise, “Blessed are you who weep now, for you will laugh,” did not need to wait until the distant future to begin having fulfillment, even as the other parts of the Sermon on the Mount did not require that long wait to experience realization. Rather than express “outcry” upon suffering mistreatment at the hands of men, his disciples were to rejoice and leap for joy.47 슬픔과 울부짖음, 고통에 대하여 정확하게도 그리스도께서는 일찍 예언의 말씀에 예고된 그 사명을 실천하려고 오셨다. 그것은 곧 "가난한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는 것... 슬픔이 있는 모든 이를 위로하고... 슬픔이 아닌 기쁨의 기름과 절망 대신 찬양의 옷을 제공하는 것"이었다.45 그는 그의 임무를 져버리지 않았으며, 나사렛 회당에서 "오늘 여러분이 듣고 있는 이 성경의 말씀이 성취되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46 "지금 우는 여러분은 행복합니다. 여러분이 웃을 것이기 때문입니다'라는 그의 약속은 산상 설교의 다른 부분이 실현이 될 때가지 그렇게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던 것처럼 먼 훗날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그의 제자들은 사람들 손에 학대를 당했을 때 "울부짖음"을 표현하기 보다는 기뻐했으며 그 기쁨으로 뛸 수 있었다.47 Even the reference to the removal of “pain” does not require the fulfillment of this Revelation vision to be solely a future one. The context in no way specifies it to be pain such as often accompanies illness or physical trauma. The translation of the term used by the apostle John (Greek pónos) is itself a matter of the translator’s choice, since the word basically means “toil” and only by implication “pain” or “anguish.”48 Thus the French translation by D’Ostervald assigns it its basic sense, rendering it by travail (toil) and the Spanish translations by Nacar-Colunga and BoverCantera both render it by trabajo (work).49 Christ gave the appealing invitation to all those “toiling and loaded down” to come to him and find—right then, and from then onward—refreshment and rest for their souls.50 Their religious leaders had laid heavy burdens upon them through their rigid, unrelenting legalism and their stressing the gaining of a righteous standing with God by means of specific works. Jesus likened this to putting heavy loads on men’s shoulders, something certainly painful to carry. The good news brought by God’s Son enabled them to become free of all these burdens, free from the frustration and weariness of endeavoring to satisfy such burdensome requirements, and thus end the pain, both emotional and mental, such struggle brought.51 심지어 "고통"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언급조차도 이 계시록 비전의 성취가 단지 미래 시점이 될 것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어떤 식으로든 문맥은 흔히 질병이나 신체적 외상을 동반하는 것과 같은 고통이라고 명시하지 않는다. 사도 요한이 사용한 용어(그리스어, 포노스)의 번역 자체는 번역자의 선택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지만, 그 단어는 기본적으로 "고통" 또는 "고뇌"를 함축하는 "힘들게 일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48 따라서 도스테르발드의 프랑스어 번역은 그것의 기본적인 의미를 부여하여 '고역' (힘들게 일하는 것)으로, 나카르 콜룽가와 보베르칸테라에 의한 스페인 번역은 그것을 모두 '트라바조'(노동)으로 번역한다.49 그리스도께서는 "고생하고 짐진" 모든 자들에게ㅡ바로 그때부터 이후로 계속ㅡ 그에게 와서 그들의 영혼에 새 힘과 쉼을 얻으라는 호소력 있는 초대를 했다.50 그들의 종교 지도자들은 엄격하고 가차없는 율법주의와 그들이 특정한 행위를 통해 정의로운 지위를 얻어 하나님께 의로운 상태가 된다고 강조함으로써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웠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사람의 어깨에 무거운 짐을 메는 것에 비유하였다. 그것은 분명히 괴로운 것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 가져온 좋은 소식은 그들에게 이러한 모든 부담에서 벗어나게 해주었고, 그러한 부담스러운 요구들을 이행하기 위해 노력하다가 오게 되는 좌절감과 지쳐 피곤함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어, 그런 무모한 노력에서 오게 된 감정적이고 정신적인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었다.51 The expressions, the “former things have passed away” and “Look! I am making all things new,” are likewise clearly paralleled by statements in the apostolic writings—with reference to a relationship and circumstance then present, not limited to some distant future time.52 In almost identical language to that of Revelation, the apostle writes: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리고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는 표현은 사도에 의해 기록된 내용과 분명히 병행하고 있다.ㅡ 먼 미래의 어떤 시대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관계와 상황에 대해 관련되어 있다.52 사도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
Consequently if anyone is in union with Christ, he is a new creation; the old things passed away, look! new things have come into existence.53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은 누구든지, 그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옛것은 사라졌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생겨났습니다.53 |
How true those words were at that very time! An old covenant had been replaced by a new one, and God’s laws were now written in the hearts of those joined to his Son. Though previously dead in sin Christians had been raised to live a new life, as if having had a new birth, serving in the new way of the Spirit and not in the old way of the written code; believers, both Jew and Gentile, were formed into “one new man” and reconciled with God, entering into the relationship of sons of God. A new force now molded their thinking and they cast off their old life course and clothed themselves with a new course, one constantly renewed in the likeness of its Creator. No longer subject to and dependent upon some human priesthood in their approach to God, they could now draw near to God with full assurance by a “new and living way,” opened to them by their one High Priest and Mediator, God’s Son.54 In all of the above cases the “already” and “not yet” factors apply with the hope of the ultimate realization yet to be fulfilled, but with that hope greatly fortified by the dispensations now in effect. 바로 그 말씀들이 당시에 얼마나 참되었겠는가! 옛 계약이 새 계약으로 대체되었고, 하나님의 율법이 그의 아들과 함께 한 사람들의 마음에 기록되었다. 이전에 죄로 인해 죽은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새로 태어난 것처럼 일으킴을 받았으며, 기록된 법전의 옛 방식대로가 아니라 영에 의한 새로운 방식으로 섬기게 되었다; 유대인과 이방인 신자들 모두는 "하나의 새로운 사람"으로 형성되어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아들들로서의 관계에 들어갔다. 이제 새로운 힘이 그들의 생각을 형성하고, 그들은 옛 인생 행로를 버리고, 새로운 행로로 옷입게 되었으며, 창조주를 닮아가는 새로운 길을 끊임없이 걷는다. 더 이상 인간 제사장의 지배를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접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그들의 한 대제사장이자 중보자인 하나님의 아들인 "새롭고 살아있는 방법"에 의해 완전한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다가갈 수 있었다.54 위의 모든 경우에서, "이미 이루어졌다"와 "아직은 미래이다"라는 시기를 나타내는 요소들은 " 여전히 궁극적인 실현의 희망으로 적용된다. 그러나 그 희망은, 당시에도 유효하게 적용됨으로 인해 미래의 적용은 더욱 크게 강화되었다. |
23 The Watchtower, April 15, 1983, pages 16-21; May 1, 1982, pages 8-11. Though heavenly, it is to have earthly representatives, “princes,” including prominent servants of God from the pre-Christian period and “qualified” men from among modern-day Witnesses. See the Watchtower of August 15, 1989, page 17; Man’s Salvation out of World Distress At Hand! (1975), pages 360-365.
24 The concern to draw such comparison is doubtless implicit in the reference to the Kingdom as not simply a “government” but “a real government,” an “ actual governmental arrangement.” See, for example Reasoning from the Scriptures, page 226; the Watchtower, May 1, 1982, pages 9, 10.
24 그러한 비교를 이끌어내려는 왕국을 단순히 "정부"가 아니라 "실재하는 정부" 또는 "실제의 정부 마련"이라고 지칭하는 데에 함축되어 있다. 예를 들면, 성서로부터 추리함, 226면; 파수대, 1982년 5월 1일호, 9, 10면을 참조하라.
25 Examples may be found in Shining as Illuminators in the World (a 1977 manual for “pioneer” Witnesses) pages 108-110; and the Watchtower of June 15, 1988, page 5. The May 1, 1982 Watchtower, page 10, contains a picture of U.S., British and Soviet political capitals, and a mountain symbolizing the Kingdom, along with the caption, “As human governments are real, so is the heavenly Kingdom government.” The Watchtower of January 1, 1991, page 4, states that in its numbers the Witness “nation” now outranks “some 60 of the 159 member nations of the UN.”
25 <세상에서 빛을 비춤> ("파이오니아" 증인들을 위한 1977년 지침서) 108-110면 및 1988년 6월 15일호 파수대, 5면에서 예를 찾아 볼 수 있다. 1982년 5월 1일호 파수대(10면)에는 "인간 정부가 실제인 것처럼 하늘 왕국 정부도 그러하다."라 설명과 함께 미국 영국 소련의 정치 수도와 왕국을 상징하는 산이 그려져 있고,1991년 1월 1일호 파수대(4면)은 증인"나라"는 그 순위에서 현재 "유엔의 159개 회원국 중 60여개국"을 능가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26 See Chapter 12, pages 426-429.
26 12장, 426-429면을 참조하라.
27 This aura of impressive governmental authority is enhanced by the teaching that “qualified ones” among these elders will become “princes” in the New Order. Jude’s words about “disregarding lordship and speaking abusively of glorious ones” are also applied to “anointed followers who serve faithfully as appointed Christian overseers,” and to “responsible men in the congregation,” with warning against failure to show submission to these men as the “glorious ones” referred to. See the Watchtower of August 15, 1982, pages 28, 29; January 15, 1979, page 25.
27 이런 인상적인 정부적 권위의 분위기는 이들 장로들 사이에서 "자격을 갖춘 자"가 새로운 질서에서 "군왕"이 될 것이라는 가르침에 의해 강화된다. " 권위를 업신여기고 영광스러운 이들을 비방"한다는 유다의 말은 또한 "임명된 그리스도인 감독자로서 충실히 섬기는 기름부움 받은 추종자들"과 "회중에서 책임 있는 사람들"에 적용되며, "영광스러운 이들"이라고 불리는 이 사람들에게 복종을 나타내지 않는 것에 대한 경고한다. 파수대 1982년 8월 15일호 28, 29면 1979년 1월 15일자 25면을 보라.
28 The Watch Tower Publications Index 1986-1989, page 130, under “Kingdom” contains the sub-topic “blessings to earthly subjects.” In its references one does find such items as the “fatherhood of Jesus Christ,” “relationship with Jehovah,” and “spiritual prosperity,” but these constitute a very small fraction of the approximately 43 listings. Most of them are about subjects such as “babies healthy,” “crime ended,” “depression cured,” “deserts blossom,” “ecology restored,” “economic management,” “economic slavery ended,” “food abundant,” “forests restored,” “handicaps removed,” “natural forces controlled,” “peace with animals,” “pollution ended,” “population equilibrium,” “poverty ended,” and so forth. The predominance of these listings reflects accurately the degree of emphasis placed on the promised satisfying of material and physical desires found in the magazines and books they refer to.
28 1986-1989년 워치타워 출판물 색인 130면에 "왕국" 아래에 "땅의 백성에 대한 축복"이라는 소주제가 포함되어 있다. 인용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성(父性)", "여호와와의 관계", "영적 번영"과 같은 항목도 찾을 수 있지만, 이것은 약 43개의 목록 중 매우 작은 부분을 차지할 뿐이다. 대부분 '건강한 아이', '범죄가 종식되다', '우울증 치료', '사막 꽃피기', '생태 복원', '경제적 노예가 끝나다', '풍부한 식량', '회복된 숲', '장애가 제거되다', '자연의 힘을 통제하다', '동물과의 평화', '공해 종식', '인구 균형','가난으로부터 벗어남' 등의 주제를 다룬다. 이러한 목록들로 거의 채워졌다는 사실은 그들이 참조한 잡지와 책에서 언급된 물질적, 육체적 욕망의 충족을 약속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는 점을 정확하게 반영한다.
29 Compare Acts 8:12 with Acts 5:42, 8:4, 5, 35.
29 행 8:12과 행 5:42, 8:4, 5, 35를 비교.
30 The term “kingdom” as found in the Christian Scriptures comes from the Greek term basiléia, which does not have the modern sense of a “government” which the Watch Tower Society would like to give it. As the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states, the term “refers to the ¯being or nature or state of a king, i.e., his dignity, and secondarily the expression of this in the territory he governs. The sense of dignity is primary in the LXX, Philo, and the NT.” The focus is on a person, even as in Oriental lands the kingdom resided (as to power and authority) in the person of the king. Reference works as a whole combine to show that the sense is that of “kingship” or “reign,” not the idea of a governmental organization as persons today think of it. While the meaning of the term basiléia may also refer to the domain in which the rulership is exercised, that sense is secondary.
30 신약성서에서 볼 수 있는 "왕국"이라는 용어는 그리스어 바실레이아(basiléia)에서 유래했는데, 바실레이아(basiléia)는 워치타워 협회가 가르치고 싶어 하는 "정부"라는 현대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 <신약신학사전>에 따르면, "왕의 존재, 자연 또는 상태, 즉 그의 존엄성, 그 다음으로 그가 다스리는 영토에서 이러한 것을 표현해 내는 것을 말한다. 70인 역, Philo, NT에서는 주로 존엄성에 의미를 둔다." 동방 지역에서도 왕국의 의미는 왕으로서의 인격(권력과 권위에 관한 것)에 초점을 맞춘다. 참고문헌은 오늘날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부조직의 개념이 아니라 '왕정'이나 '통치'의 의미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전체적으로 작용한다. 바실레이아(basiléia)라는 용어의 의미는 통치권이 행사되는 영역을 가리킬 수도 있지만, 그 의미는 부차적인 것이다.
31 Compare Luke 19:11-15; Revelation 12:10; it may be noted that in verses 12 and 15 of the passage in Luke the New World Translation renders basiléia by “kingly power,” while in the footnotes of certain editions it shows the alternative rendering of “kingdom.” The nobleman in the parable of Luke 19 did not travel to a far country to receive, and return with, a “government” but kingship and kingly authority.
31 누가 19: 11-15; 요한계시록 12:10; 누가의 12절과 15절에서 신세계역은 "왕의 권능"으로 의해 바실레아를 번역한 반면, 특정 판의 각주에는 "왕국"이라는 번역이 대체적으로 나타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누가 19장의 비유에 나오는 귀족은 먼 나라로 가서 "정부"를 인양하여 돌아온 것이 아니라 왕위와 왕권을 받아 돌아왔다.
32 l John 2:1, 2; consider also Peter’s preaching at Pentecost and when addressing Gentiles in the home of Cornelius, as recorded at Acts 2:14-36; 10:34-43.
32 요한1서 2: 1, 2; 사도행전 2:14-36과 10:34-43에 기록된 대로 오순절, 베드로의 설교와 고넬료의 집에서 이방인에게 연설할 때를 고려 하라.
33 1 Corinthians 2:2; compare 2 Timothy 2:8.
33 고전 2:2; 을 딤후 2:8.과 비교하라.
34 2 Peter 3:13.
34 벧후 3:13
35 Revelation 1:1 says of the revelation given to John that it was to show “the things that must shortly take place.” Yet, while its visions frequently pointed to the future, particularly in connection with God’s ultimate acts of judgment, a reading of Revelation demonstrates that many of the things stated had either already occurred or were then taking place. Chapters 2 and 3, as just an example, deal with conditions in seven Asia Minor congregations, conditions that were current at the time, not something future. The visions in chapter 4 of God’s celestial glory, of the sacrificial lamb and his purchase of mankind, were not of future circumstances or events but of circumstances and events that were then in effect. The “river of the water of life” of Revelation chapter 22 was certainly then flowing, so that the invitation to “anyone that wishes” to come and “take life’s water free” did not need to wait till the distant future but was already being extended to people through the making known of the good news. (Revelation 22:1,2, 17; compare John 4:7-14; 6:35; 7:37, 38.) Only by comparing the visions with that which is stated elsewhere in the Christian Scriptures can the present or future element and application be determined, for it is a sound rule that the symbolic must always be understood by, and conform in meaning to, that which is factually and clearly stated elsewhere, never the other way around.
35 요한계시록 1:1에서 요한이 받은 계시는 '곧 일어나야 할 것들'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의 비전이 자주, 특히 하나님의 궁극적인 심판과 관련하여, 미래를 가리켰지만, 계시록을 읽어 본 사람이라면, 언급된 많은 것들이 이미 일어났거나 혹은 그 때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2장과 제3장은 단지 하나의 예로서, 소아시아의 7개의 회중의 상태를 다루고 있다. 미래의 어떤 것이 아니라 그 당시의 상황들이다. 하나님의 천상의 영광, 제물 어린 양과 그가 인류를 구속하는 4장의 환상은 미래의 상황이나 사건이 아니라 이미 그때부터 시행되고 있는 상황과 사건이었다. 요한계시록 22장의 '생명수가 흐르는 강'은 당시에도 분명히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생명수를 그저 가져가라'는 초대장은 먼 훗날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었으며, 좋은 소식을 사람들에게 알려 이미 확장되어 가고 있었다. (계 22:1,2, 17과 요한 4: 7-14; 6: 35, 7:37, 38을 비교.) 오직 신약성서 자체의 다른 부분과 언급된 환상을 비교해야만 현재 또는 미래의 요소 및 그 적용을 결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상징은 성경의 다른 부분에 있는, 사실적이고 분명하게 언급되는 것에 의해 이해되어야 하고, 의미상 부합되어야 하는 것이 정상적인 규칙이지 달리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36 Romans 5:10; 8:7; Luke 16:9; compare James 2:23.
36 롬 5:10; 8:7; 눅 16:9; 을 약 2:23. 와 비교하라
37 2 Corinthians 6:16; see also 1 Corinthians 3:16; Ephesians 2:22.
37 고후 6:16; 또한 고전 3:16; 엡 2:22. 를 참조
38 1 Peter 2:10.
38 벧전 2:10.
39 We may also note that in Hebrews chapters 8 through 10 the inspired writer shows that the earlier earthly tabernacle, in which God was symbolically present among his people Israel, pictured God’s greater, heavenly “tent” and says that this was as “an illustration for the appointed time that is now here.” (Hebrews 9:9) He goes on to make plain that the heavenly tent was already in place and that Christ, as high priest “of the good things that have come to pass,” was even then ministering there on behalf of sinful mankind. (Hebrews 9:11)
39 우리는 또한 히브리서 8장부터 10장까지는, 일찍이 지상의 회막에서 하나님이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 상징적으로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더 큰 하늘의 "천막"을 묘사하고 이것이 "지금 이곳에서 정해진 때를 위한 예시"라고 말한다. (히브리어 9: 9) 하늘 천막은 이미 그 자리에 있었으며 그리스도는 "일어난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셔서, 죄 있는 인간을 위하여 그 곳에서 봉사하고 계셨다. (He brews 9:11)는 사실을 계속하여 그는 분명히 말한다.
40 Ephesians 2:1.
40 엡 2:1.
41 Romans 5:21; 6:4.
41 롬 5:21; 6:4.
42 1 John 3:14.
42 요한1서 3:14.
43 John 3:36; 5:24, 39, 40; 6:47; 20:31.
43 요한 3:36; 5:24, 39, 40; 6:47; 20:31.
44 John 11:26; compare Romans 6:9-11.
44 요한 11:26; 을 롬 6:9-11과 비교.
45 Isaiah 61:1-3, NIV.
45 이사야 61:1-3, NIV.
46 Luke 4:18-21.
46 눅 4:18-21.
47 Luke 6:22, 23; compare James 1:2, 9, 12.
47 눅 6:22, 23을 약1:2, 9, 12과 비교.
48 738면 참조.
49 예루살렘역은 “슬픔” 으로 번역하였다.
50 Matthew 11:28-30.
50 마태 11:28-30.
51 Matthew 23:1-4; 12:1-13; 15:1-11; we may note that at Acts 15:10 the apostle Peter also speaks of the Law itself as “a yoke that neither our forefathers nor we were capable of bearing.” Christ set them free from such heavy yoke.
51 마태복음 23:1-4; 12:1-13, 15:1-11; 15:1-11; 우리는 사도행전15:10에 사도 베드로가 율법 자체를 "우리 조상이나 우리도 감당할 수 없는 멍에"라고 말한 것을 주목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그렇게 무거운 멍에로부터 해방시켰다.
52 Revelation 21:4, 5.
52 계 21:4, 5.
53 고후 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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