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댓글신라 흥덕왕릉(興德王陵, 제42대 흥덕왕) 전면에 서 있는 호인 형상의 무인석상(무인상)이다. 흥덕왕릉 전면에는 문인석 1쌍, 무인석 1쌍, 석사자 2쌍이 정연하게 배치되어 있는데, 이 무인석상은 원성왕릉(괘릉)의 무인석상과 더불어 통일신라 왕릉 조각의 정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이다.
통일신라 하대인 8세기 말에서 9세기 초, 원성왕릉(괘릉), 헌덕왕릉, 흥덕왕릉과 같은 왕릉에 신라 고유의 무사가 아닌 서역 호인(胡人) 형상의 무인상을 왕릉의 최전선 수호상으로 배치한 까닭은 당시의 정치적·사회적 상황과 대외 교류사 측면에서 매우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서역 호인상을 능 앞에 세우는 것은 왕실의 권위를 극대화하는 훌륭한 통치 선전 도구였다. "동쪽 끝 신라의 왕 앞에 저 멀리 서역의 무사들까지 찾아와 무릎을 꿇고 왕을 시위(侍衛)한다"는 연출은, 신라 왕실이 단순한 한반도의 왕이 아니라 세계적 위상을 가진 군주임을 백성과 귀족들에게 과시하는 효과를 가졌다.
왕릉 전면의 서역 호인상은 단순히 이국적인 취향을 반영한 장식이 아니었다. 정치적 혼란기 속에서 왕권 강화를 위한 강력한 수호력 갈망, 실제 왕실을 호위하던 서역 친위 무사들에 대한 신뢰, 세계와 교류하는 신라 왕실의 높은 권위 과시라는 정교한 정치적·종교적 목적이 결합되어 나타난 통일신라 하대 석조 예술의 결정체였다.
통일신라 왕릉 표석 조각과 석물 제도는 원성왕릉(괘릉) → 헌덕왕릉 → 흥덕왕릉을 거쳐 구정동 방형분에 이르기까지 정교한 입체 조각에서 점차 평면화·형식화되는 조형상 조각 기술의 변화 및 퇴화 양상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한 기술적 숙련도의 저하뿐만 아니라, 통일신라 하대의 국력 약화, 왕권의 와해, 그리고 사회·경제적 동요와 맞물려 있다.
8세기 말 신라 왕릉 조각의 최전성기 원성왕릉은 신라 왕릉 조각 예술이 도달한 최고의 정점이자 기준점이다. 전면의 무인석(호인상)과 문인석, 석사자는 완전한 형태의 환조(丸彫, 3차원 입체 조각)로 제작되었다. 근육의 팽창감, 옷주름의 생동감, 어깨와 팔의 역동적인 볼륨감이 수려하다.
옷주름의 흐름이 자연스러운 드레이프(drape)가 아니라 일정한 간격으로 굳어진 패턴처럼 처리된다. 무기나 복식의 세부 묘사도 형태만 흉내 낸 평면적 기법으로 단순화된다. 네 모서리의 석사자 역시 근육질의 포효하는 야성미 대신, 굳어있거나 다소 희화화된 정적인 모습으로 변모한다.
통일신라 말기(9세기 말~10세기 초)에 조성된 구정동 방형분에 이르면 독립된 3차원 입체 석상 조각 기법은 사실상 소멸에 이른다. 왕릉 전면에 당당히 서 있던 문무인석·호인상 등 입체 석상은 더 이상 제작되지 않거나 기단 모서리 돌에 얕은 부조(저부릴리프)로 새겨 넣는 방식으로 축소된다.
구정동 방형분 모서리에 새겨진 무인상(폴로 채를 든 호인 형상)은 완전한 평면 벽면에 돋을새김을 한 형태로, 환조 조각으로서의 위용을 상실하고 거의 그림에 가까운 선각·저부조 형태로 퇴화한다. 병풍석 십이지신상 역시 정밀함과 입체감을 잃고 형상만 간신히 구분할 수 있는 기하학적 문양 수준으로 단순화된다.
신라 왕릉의 호인상과 석수 조각은 "역동적 3차원 환조 조각(원성왕),정형화된 입체 조각(헌덕왕), 원통형 도식 조각(흥덕왕), 벽면 2차원 저부조 조각(방형분)"으로 변화해 갔으며, 이는 신라 사회가 겪은 정치적·경제적 침체와 예술적 에너지의 감퇴를 정직하게 반영하고 있다.
왕실의 영원한 안녕과 절대적 권위를 상징하고자 능 전면에 거대하고 용맹한 서역 호인상을 최전선에 세웠지만, 정작 신라 사회는 그 석상들이 세워지던 시기(8세기 말~9세기)를 거치며 왕권의 급격한 약화, 참혹한 내분, 그리고 석조 미술의 퇴보라는 길을 걸었다. 참으로 깊은 역사적 섭리와 역설이 느껴지는 지점이다.
역사적으로 왕권이나 국가의 권력이 위기에 처할수록 통치자들은 역설적으로 외형적 상징과 능제(陵制), 권위적 연출에 더욱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원성왕, 헌덕왕, 흥덕왕으로 이어지는 신라 하대는 진골 귀족들 간의 왕위 쟁탈전으로 왕의 수명이 짧아지고, 쿠데타와 암살이 빈번하던 불안의 시대였다.
현실에서 왕권이 흔들리고 신하들을 통제하기 어려워지자, 사후의 무덤에서라도 "서역만국의 용맹한 무사까지 나를 호위한다"는 과장된 상징성을 통해 왕실의 정통성과 위엄을 수호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돌로 새긴 호인상의 강력한 수호력도 현실 세계에서 피비린내 나는 골품제 내부의 정쟁과 귀족들의 반란을 막아주지는 못했다.
원성왕릉(괘릉) 시대만 해도 통일신라의 넘치는 국력과 사실주의 예술의 정점이 석상에 그대로 녹아들어 있었다. 그러나 헌덕왕·흥덕왕대를 거치며 왕릉의 전체적인 '외형적 틀(문무인석, 석사자, 십이지신상 완비)'은 더욱 도식화되어 갖추어졌지만, 석상 하나하나에 깃든 생동감, 정교함, 볼륨감은 점차 퇴화해 갔다.
사후 자신과 왕실을 영원히 수호해 줄 것으로 믿고 웅장한 호인상과 석사자들을 능 앞에 세웠겠으나, 불과 몇 백 년 뒤 알천(북천)의 격랑과 범람 앞에 그 석물들은 능역을 지키기는커녕 강물에 쓸려 내려가 유실되고 말았다. 결국 그 호인상의 머리(두상)는 흩어져 학교 정원(경주고)의 조경석처럼 놓이게 되었고, 석사자들은 남의 절(분황사 탑 기단)로 옮겨져 액막이용으로 재배치되는 방황을 겪게 되었다.
첫댓글 신라 흥덕왕릉(興德王陵, 제42대 흥덕왕) 전면에 서 있는 호인 형상의 무인석상(무인상)이다.
흥덕왕릉 전면에는 문인석 1쌍, 무인석 1쌍, 석사자 2쌍이 정연하게 배치되어 있는데, 이 무인석상은 원성왕릉(괘릉)의 무인석상과 더불어 통일신라 왕릉 조각의 정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이다.
깊게 파인 눈매, 우뚝 솟은 큰 코, 얼굴 전체를 덮은 곱슬거리는 풍성한 수염, 머리에 쓴 머리띠(또는 터번 형태의 모자) 등 동아시아인의 신체적 특징과는 명확히 구분되는 서역인의 용모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어깨와 가슴, 팔을 감싸는 옷주름이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두 손으로는 큰 무기(몽둥이 형태의 칼 또는 방망이, '폴로 채' 또는 '무구'로 해석)를 짚고 서 있어 왕릉을 수호하는 당당한 위용을 과시한다.
원성왕릉의 무인상이 보다 입체적이고 역동적인 분노상(금강역사상)에 가깝다면, 흥덕왕릉의 무인상은 조형적 안정감과 정적인 당당함이 돋보인다.
신라 하대(9세기 초)까지도 중앙아시아, 서역과의 교류가 지리적·문화적으로 깊게 이어졌음을 증명해 주는 결정적 실물 자료이다. 서역 출신의 용병이나 상인, 용맹한 무사들이 신라 왕실 및 귀족 사회에서 입지를 다지고 왕릉의 수호신으로까지 새겨졌음을 보여준다.
8세기의 원성왕릉(괘릉)에서 확립된 '문인석-무인석-석사자-십이지신상'으로 이어지는 신라 완성형 능제(陵制)가 9세기 흥덕왕릉에서도 그대로 계승·발전되었음을 잘 보여준다.
흥덕왕(제42대)은 앞서 살펴본 헌덕왕(제41대)의 친동생이다.
따라서 경주고등학교 정원에 머리 부분만 남아 보존되어 있는 헌덕왕릉 호인상 두상 역시 원래는 이 흥덕왕릉 무인석상과 동일하게 당당하고 우람한 전신 호인 무인상 형태로 왕릉 전면을 지키고 있었을 것이다.
알천의 범람으로 헌덕왕릉의 석물이 실전·파손된 반면, 흥덕왕릉의 무인석상은 능역의 소나무 숲속에 본래의 온전한 형상과 배치를 유지한 채 남아 있어 9세기 신라 석조 예술의 정수를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통일신라 하대인 8세기 말에서 9세기 초, 원성왕릉(괘릉), 헌덕왕릉, 흥덕왕릉과 같은 왕릉에 신라 고유의 무사가 아닌 서역 호인(胡人) 형상의 무인상을 왕릉의 최전선 수호상으로 배치한 까닭은 당시의 정치적·사회적 상황과 대외 교류사 측면에서 매우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통일신라 하대는 진골 귀족들 간의 극심한 왕위 다툼으로 정치적 불안이 극에 달했던 시기였다.
원성왕, 헌덕왕, 흥덕왕은 모두 쿠데타나 왕위 정쟁을 거치며 권력을 잡았거나 불안정한 정국 속에서 왕권을 지켜내야 했던 인물들이다.
신라 내부 귀족이나 군사들은 정쟁에 따라 언제든 배신할 수 있는 정치적 이해관계에 얽혀 있었다. 반면, 연고가 없고 오직 왕실에만 예속되어 강력한 용맹함을 발휘하는 서역 출신 친위 무사(용병)들은 왕실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과 '강력한 물리적 힘'을 상징했다.
신라인들에게 낯설고 이국적인 서역인의 우람한 체구, 깊은 눈매, 사나운 인상은 인간 세계의 정적뿐만 아니라 죽음 이후의 능역을 침범하는 악귀나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는 초자연적인 엑소시즘(퇴마)과 수호의 아이콘으로 여겨졌다.
실크로드를 통해 신라로 유입된 소그드인 등 서역인들은 단순한 무역상에 그치지 않고, 그 특유의 용맹함과 무예 덕분에 왕실 친위대나 용병으로 고용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게 점쳐진다.
당시 당나라에서도 서역인 무사들을 황제 직속 친위대로 다 수용하였는데, 당의 문물과 제도를 적극 수용하던 신라 왕실 역시 서역 출신 무인들을 실제 경호 세력으로 두었을 것이다.
왕이 생전에 자신을 가장 가까이서 밀착 호위하던 핵심 친위 무사(호인 무사)의 형상을 사후에도 능 앞에 세워 영원한 호위무사로 삼고자 했던 실제적 반영이다.
서역 호인상을 능 앞에 세우는 것은 왕실의 권위를 극대화하는 훌륭한 통치 선전 도구였다.
"동쪽 끝 신라의 왕 앞에 저 멀리 서역의 무사들까지 찾아와 무릎을 꿇고 왕을 시위(侍衛)한다"는 연출은, 신라 왕실이 단순한 한반도의 왕이 아니라 세계적 위상을 가진 군주임을 백성과 귀족들에게 과시하는 효과를 가졌다.
당시 신라는 장보고의 청해진을 중심으로 한 당·일·서역을 잇는 동아시아 해상 무역의 중심지였으며, 이러한 만국 교류의 중심으로서 가졌던 신라인들의 자부심이 왕릉의 석 조각 미술로 승화된 것이다.
왕릉 전면의 서역 호인상은 단순히 이국적인 취향을 반영한 장식이 아니었다.
정치적 혼란기 속에서 왕권 강화를 위한 강력한 수호력 갈망, 실제 왕실을 호위하던 서역 친위 무사들에 대한 신뢰, 세계와 교류하는 신라 왕실의 높은 권위 과시라는 정교한 정치적·종교적 목적이 결합되어 나타난 통일신라 하대 석조 예술의 결정체였다.
통일신라 왕릉 표석 조각과 석물 제도는 원성왕릉(괘릉) → 헌덕왕릉 → 흥덕왕릉을 거쳐 구정동 방형분에 이르기까지 정교한 입체 조각에서 점차 평면화·형식화되는 조형상 조각 기술의 변화 및 퇴화 양상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한 기술적 숙련도의 저하뿐만 아니라, 통일신라 하대의 국력 약화, 왕권의 와해, 그리고 사회·경제적 동요와 맞물려 있다.
8세기 말 신라 왕릉 조각의 최전성기
원성왕릉은 신라 왕릉 조각 예술이 도달한 최고의 정점이자 기준점이다.
전면의 무인석(호인상)과 문인석, 석사자는 완전한 형태의 환조(丸彫, 3차원 입체 조각)로 제작되었다. 근육의 팽창감, 옷주름의 생동감, 어깨와 팔의 역동적인 볼륨감이 수려하다.
호인상의 분노상(금강역사적 표정)이나 석사자의 살아서 요동치는 듯한 움직임 등에서 정교한 사실주의와 당당한 패기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봉토를 둘러싼 병풍석의 십이지신상 역시 깊은 돋을새김(고부릴리프)으로 조각되어 석재 밖으로 튀어나올 듯한 생동감을 자랑한다.
헌덕왕(재위 809~826) 대에 이르면 8세기의 웅장한 사실주의가 꺾이고 정적이고 도식적인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경주고 교정의 호인상 두상 및 유실된 석물 추정편 등에서 보듯, 조각의 이목구비나 윤곽이 원성왕릉에 비해 다소 둔중해지고 입체감이 옅어진다.
세부 표현이 얌전해지고 정돈된 인상을 주지만, 원성왕릉 무인석상 특유의 터질 듯한 근육감이나 역동적인 기개는 대폭 줄어든다.
봉토 하부 병풍석에 새겨진 십이지신상도 양각의 깊이가 얕아져 부판(浮板) 같은 평면적 느낌을 주기 시작한다.
흥덕왕(재위 826~836) 대는 왕릉의 전체적인 형식은 완벽히 갖추었으나, 개별 석물의 조각 기법에서는 명확한 양식적 퇴화가 드러난다. 무인석상과 문인석상의 신체 선이 사실적인 인체 구조라기보다는 '원통형 석주(돌기둥)'에 선을 그어 조각한 듯한 형태로 변한다.
옷주름의 흐름이 자연스러운 드레이프(drape)가 아니라 일정한 간격으로 굳어진 패턴처럼 처리된다. 무기나 복식의 세부 묘사도 형태만 흉내 낸 평면적 기법으로 단순화된다.
네 모서리의 석사자 역시 근육질의 포효하는 야성미 대신, 굳어있거나 다소 희화화된 정적인 모습으로 변모한다.
통일신라 말기(9세기 말~10세기 초)에 조성된 구정동 방형분에 이르면 독립된 3차원 입체 석상 조각 기법은 사실상 소멸에 이른다.
왕릉 전면에 당당히 서 있던 문무인석·호인상 등 입체 석상은 더 이상 제작되지 않거나 기단 모서리 돌에 얕은 부조(저부릴리프)로 새겨 넣는 방식으로 축소된다.
구정동 방형분 모서리에 새겨진 무인상(폴로 채를 든 호인 형상)은 완전한 평면 벽면에 돋을새김을 한 형태로, 환조 조각으로서의 위용을 상실하고 거의 그림에 가까운 선각·저부조 형태로 퇴화한다.
병풍석 십이지신상 역시 정밀함과 입체감을 잃고 형상만 간신히 구분할 수 있는 기하학적 문양 수준으로 단순화된다.
신라 왕릉의 호인상과 석수 조각은 "역동적 3차원 환조 조각(원성왕),정형화된 입체 조각(헌덕왕), 원통형 도식 조각(흥덕왕), 벽면 2차원 저부조 조각(방형분)"으로 변화해 갔으며, 이는 신라 사회가 겪은 정치적·경제적 침체와 예술적 에너지의 감퇴를 정직하게 반영하고 있다.
왕실의 영원한 안녕과 절대적 권위를 상징하고자 능 전면에 거대하고 용맹한 서역 호인상을 최전선에 세웠지만, 정작 신라 사회는 그 석상들이 세워지던 시기(8세기 말~9세기)를 거치며 왕권의 급격한 약화, 참혹한 내분, 그리고 석조 미술의 퇴보라는 길을 걸었다.
참으로 깊은 역사적 섭리와 역설이 느껴지는 지점이다.
역사적으로 왕권이나 국가의 권력이 위기에 처할수록 통치자들은 역설적으로 외형적 상징과 능제(陵制), 권위적 연출에 더욱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원성왕, 헌덕왕, 흥덕왕으로 이어지는 신라 하대는 진골 귀족들 간의 왕위 쟁탈전으로 왕의 수명이 짧아지고, 쿠데타와 암살이 빈번하던 불안의 시대였다.
현실에서 왕권이 흔들리고 신하들을 통제하기 어려워지자, 사후의 무덤에서라도 "서역만국의 용맹한 무사까지 나를 호위한다"는 과장된 상징성을 통해 왕실의 정통성과 위엄을 수호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돌로 새긴 호인상의 강력한 수호력도 현실 세계에서 피비린내 나는 골품제 내부의 정쟁과 귀족들의 반란을 막아주지는 못했다.
원성왕릉(괘릉) 시대만 해도 통일신라의 넘치는 국력과 사실주의 예술의 정점이 석상에 그대로 녹아들어 있었다.
그러나 헌덕왕·흥덕왕대를 거치며 왕릉의 전체적인 '외형적 틀(문무인석, 석사자, 십이지신상 완비)'은 더욱 도식화되어 갖추어졌지만, 석상 하나하나에 깃든 생동감, 정교함, 볼륨감은 점차 퇴화해 갔다.
이는 왕실이 제도는 성대하게 유지하려 애썼으나, 정작 이를 뒷받침할 국가적 재정, 장인들의 예술적 모티베이션, 그리고 시대를 관통하는 당당한 시대정신(기개)이 빠르게 고갈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가장 극적인 아이러니는 바로 질문의 출발점이었던 헌덕왕릉의 석물들이다.
헌덕왕은 숙부로서 조카(애장왕)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인물로, 재위 기간 내내 김헌창의 난 등 대규모 반란을 겪으며 왕권을 지켜내야 했다.
사후 자신과 왕실을 영원히 수호해 줄 것으로 믿고 웅장한 호인상과 석사자들을 능 앞에 세웠겠으나, 불과 몇 백 년 뒤 알천(북천)의 격랑과 범람 앞에 그 석물들은 능역을 지키기는커녕 강물에 쓸려 내려가 유실되고 말았다.
결국 그 호인상의 머리(두상)는 흩어져 학교 정원(경주고)의 조경석처럼 놓이게 되었고, 석사자들은 남의 절(분황사 탑 기단)로 옮겨져 액막이용으로 재배치되는 방황을 겪게 되었다.
왕이 꿈꾸었던 "서역 호인의 영원한 수호와 불멸의 왕권"이라는 이상은, 신라 하대의 "정치적 혼란, 예술적 퇴보, 그리고 훗날 하천 범람이라는 자연의 스러짐"이라는 냉혹한 현실과 대비되며 우리에게 강한 역사적 무상함(無常)을 느끼게 한다.
오늘날 남아있는 경주고의 호인 두상이나 흥덕왕릉의 무인석상은 단순한 조각품을 넘어, 화려했던 신라의 찬란함과 그 이면에 가려진 하대의 쓸쓸한 역설을 동시에 증언해 주는 가장 인간적인 유물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