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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시인)
1. 개요
시인 김수영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시여, 침을 뱉어라》 中
2. 생애
1921년 11월 27일 서울에서 지주였던 아버지 김태욱(金泰旭)과 어머니 안형순(安亨順)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나, 1968년 6월 16일 사망하였다. 김수영이 태어날 무렵부터 집안이 기울긴 했지만, 유년을 비교적 유복하게 보냈다. 김수영의 백부 김태흥에게 아들이 없었기에 집안의 장손이나 다름없었던지라 김수영은 온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자랐다.[3]
그는 유치원과 서당을 거쳐 8살이 되던 해 어의동공립보통학교(현 서울효제초등학교)에 입학했다. 6학년 때 갑자기 급성 장티푸스와 폐렴과 늑막염을 앓아 중학 입시에 실패하고 선린상업학교 전수과에 입학했다. 선린상업학교(현 선린인터넷고등학교) 재학 시절에는 시인 오스카 와일드의 작품들을 외워 읽을만큼 영어 실력이 유창했다고 한다.
또한 작품 중 완전히 일본어로만 작성된 글도 있다. 당시 일제 치하에서 성장했던 한국인들은 자의든 타의든 일본어에 유창한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다만 이는 친일 행위 같은 것이 아니라, 힘든 삶을 벗어나 살고 싶다는 식의 푸념 같은 글들이므로 오해는 금물. 아울러 김수영이 쓴 일본어 문헌은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의 역사적 가나 표기법의 영향을 받은 탓인지 지금은 히라가나로 쓰여야 할 부분에 가타카나가 쓰이는 방식으로 표기되어 있다.
1941년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의 도쿄상과대학 예과에 입학하였다.[4] 몰락해 가는 집안의 기대를 등에 지고 일본 유학을 떠났지만, 대학 입학 자격을 위한 예비학교[5]에 얼마간 적을 두었을 뿐 이내 학업을 포기하고 연극에 몰두하였다. 이 시기부터 해방을 맞기까지 그는 연극 활동에 몰입했는데, 그것은 현실 도피에 가까운 것이었다. 해방이 되자 그는 연극에 대한 관심을 접고 비로소 시를 쓰게 된다.
1943년 학병 징집을 피해 귀국하여 가족들과 함께 만주 지린성으로 이주했다가 8.15 광복과 함께 귀국하였다.
귀국 후에는 심영 등과 함께 공연을 하다가 1945년 11월 연희전문학교 영문과에 편입했다. 하지만 등록금 마련의 어려움 등으로 중퇴했다.
1946년부터 연극에서 문학으로 전향하여 본격적으로 시 창작을 시작하였다. 1946년 예술부락에 〈묘정(廟庭)의 노래〉를 발표하면서 등단한 후 김경린, 박인환과 함께 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발표하여 주목을 끌었다.
문학 활동 외에 생업을 위해서 평소에서는 번역가로서 일했다.
6.25 전쟁 때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에 의용군으로 징집[6]되었으나 탈출한다. 갖은 고생 끝에 서울에 다시 내려오는데 성공하였으나, 인천 상륙 작전으로 서울을 수복하고 패잔병 추적에 나선 경찰에 체포되어 부산의 거제 포로수용소로 압송되었다. 당시 거제리 포로수용소는 반공 포로와 공산주의자 포로들의 싸움터나 다름 없었다. 포로를 관리해야 할 군은 수용소 내부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있었고, 양 세력 간 자비 없는 패싸움과 유혈 사태는 일상적이었다. 김수영은 공포에 떨며 고초를 겪어야 했으며 3년 만에 민간인억류자로 석방되었다.
포로에서 풀려난 이후 통역 일과 잡지사, 신문사를 전전하며 시작과 번역에 전념하였다.
1950년대 문단에서 김수영은 ‘노랭이’라는 별명을 얻는다. 누구랄 것도 없이 가난하게 살던 당시의 문인들은 원고료를 받으면 집으로 가져가지 못하고 동료들의 막걸리값으로 풀어야 했다. 그것이 1950년대 한국 문단의 미풍양속이고 관습이었다. 따라서 원고료를 안주머니에 챙겨 꼬박꼬박 집에 갖다 주는 김수영의 행위는 이런 관례를 깨뜨려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김수영의 원고는 당시의 언론 상황에서는 과격한 내용이 많아서 어떤 잡지 편집자는 몇 밤을 새워 번역한 원고의 원고료를 받으러 온 김수영에게 대놓고 “당신이 일해 오는 것은 무서운 생각이 든다.”고 모욕적인 말을 내뱉기도 한다.
1958년 제1회 한국시인협회상을 받았다.
김수영이 시대와 예술가, 혹은 지식인의 참여라는 문제에 본격적인 관심을 갖고 나름의 활동을 하게 된 것은 4.19 혁명 이후의 일이었다. 1960년대로 접어들어서도 김수영은 여전히 양계와 번역료로 생활하면서 버젓한 직장을 가지지 않았으며, 시·시론·시평 등을 통해 우리 사회의 후진성과 허위 의식을 비판하고 진정한 참여를 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비난하는 성격의 글들을 발표하였다. 이러한 김수영의 자조적인 성향과 특유의 강렬한 시적 표현은 결과론적으로 독특한 시 세계를 형성하였고, 훗날 수능 단골이 되는 계기가 된다.
1966년 연세대 영문과에서 특강을 하게 되었다. 해방 직후 그는 연희전문학교를 잠시 다니다 중퇴한 적이 있지만 평생 연세대를 다녔다는 자랑을 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연세대에서 특강을 제안받자 무척 기뻐하며 이를 자랑하였다고 한다. 그는 강의 준비를 위해 국립도서관까지 가서 원서 자료들을 구했고, 학생들 앞에서 강의하는 톤과 억양까지 연습할 정도로 성실히 준비하였다고 한다. 그의 T.S.엘리엇(T.S.Eliot) 강의는 연세대 학생들에게 큰 인기를 얻어 강의실을 중강당으로 옮겨야 했다고 한다.
그토록 왕성한 활동을 벌이던 김수영은 1968년 6월 15일 문우들과 가졌던 술자리에서 귀가하던 중 가로등이 없는 어두운 길에서 시인을 발견하지 못한 버스에 치였다.[7] 의식을 잃은 채 적십자병원으로 실려가 응급치료를 받았으나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다음날인 6월 16일 유명을 달리 하였다. 신동엽이 「지맥 속의 분수」라는 조사(弔辭)에서 언급했다시피 그렇게 “어두운 시대의 위대한 증인을 잃었다”.[8]
3. 김수영 시의 특징
비판적이고 철학적인 시를 통해 당대의 상황을 표현하였으며 지금까지 없던 세계가 펼쳐지는 충격을 주는 시를 추구했다. 김수영에 관한 논의들은 대개 찬사와 비판의 양가적 평가들로 나뉘거나, 읽는 이의 호오가 분명한 경우들로 갈린다. 김수영의 한 가지 특징이나 한 편의 시에 대해 비판과 찬사가 팽팽히 공존하기도 하지만, 여러 논의들이 김수영의 마지막 시 「풀」을 인용하면서 시인의 의의가 마무리된다. 김수영의 시는 정반대의 가치를 지향하면서도 그 두 가치를 동시에 끌어안고 있는 양극의 긴장 위에서 균형을 잡고 있다고 할 수 있다.
3.1. 시어의 특징
김수영은 스스로 자신의 시어가 평범하다고 했지만, 시와 산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말(언어)에 대한 그의 생각은 매우 진보적이다.
1) 거칠고 힘찬 어조의 시세계 속에 담아낸 소시민적 자아에 대한 가차 없는 자기 폭로,
2) 후진적 정치 문화에 대한 질타, 빈정거림, 맹렬한 비판은 전통적인 한국시와는 결을 달리하며 한국어의 세련화와도 거리가 있다.
3) 김수영은 일체의 정립된 언어와 고정된 언어를 부정직한 것으로 여겼다.
4) 그의 언어는 관습의 언어가 아니라 “자기의 언어”이며, 대물림한 언어가 아니라 새로운 의미를 담고 있는 언어다. 5) 김수영의 시에는 한자어와 영어와 일본어가 동시에 등장하고, 문어와 구어가 구별 없이 사용되며, 관념어와 구체어가 섞여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가 즐겨 사용한 한자어, 일본어, 영어, 속어, 구어, 관념어 등은 어느 하나의 지배적 언어로 귀속되려는 언어에 대한 경계가 된다.[9]
3.2. 시의 세계
초기에는 모더니즘의 경향을 보였으나 점차 그 한계에서 벗어나려 하였고, 4.19 혁명을 고비로 강렬한 현실 의식을 추구하는 쪽으로 전환했다. 주로 자기 고백의 직설적인 어조로 소시민의 자기 각성, 지식인의 정직한 고뇌, 자유가 억압된 현실에 대한 항의를 다루며 과거와 현재를 넘어서 새로운 세계를 만들고자 하는 ‘온몸’의 시학을 주창했다.[10] 김수영은 자신의 시세계를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을 극복한 곳에 자리하고 싶었던 시인이다.[11] 때문에 그의 시를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을 넘어 열린 시각으로 읽어야 그의 시세계를 온전히 파악할 수 있다.
4. 주요 작품
폭포 / 김수영
폭포는 곧은 절벽(絶壁)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규정(規定)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向)하여 떨어진다는 의미(意味)도 없이
계절(季節)과 주야(晝夜)를 가리지 않고
고매(高邁)한 정신(精神)처럼 쉴사이없이 떨어진다
금잔화(金盞花)도 인가(人家)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瀑布)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취(醉)할 순간(瞬間)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나타(懶惰)와 안정(安定)을 뒤집어 놓은 듯이
높이도 폭(幅)도 없이
떨어진다
푸른 하늘을 / 김수영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의 포로수용소의 제14야전 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펀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 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펀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뭇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 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 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 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 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 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이십 원 때문에 십 원 때문에 일 원 때문에
우습지 않느냐 일 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난 얼마큼 작으냐
정말 얼마큼 작으냐...
풀 / 김수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눈 / 김수영
눈은 살아 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놓고 마음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 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구름의 파수병 / 김수영
만약에 나라는 사람을 유심히 들여다본다고 하자
그러면 나는 내가 詩(시)와는 反逆(반역)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먼 山頂(산정)에 서있는 마음으로
나의 자식과 나의 아내와
그 주위에 놓인 잡스러운 물건들을 본다
그리고
나는 이미 정하여진 물체만을 보기로 결심하고 있는데
만약에 또 어느 나의 친구가 와서 나의 꿈을 깨워주고
나의 그릇됨을 꾸짖어주어도 좋다
함부로 흘리는 피가 싫어서
이다지 낡아빠진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리라
먼지 낀 잡초 우에
잠자는 구름이여
고생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세상에서는
철늦은 거미같이 존재없이 살기도 어려운 일
방 두간과 마루 한간과 말쑥한 부엌과 애처로운 妻(처)를 거느리고
외양만이라도 남과 같이 살아간다는 것이 이다지도 쑥스러울 수가 있을까
詩(시)를 배반하고 사는 마음이여
자기의 裸體(나체)를 더듬어보고 살펴볼 수 없는 詩人(시인)처럼 비참한 사람이 또 어디 있을까
거리에 나와서 집을 보고
집에 앉아서 거리를 그리던 어리석음도 이제는 모두 사라졌나보다
날아간 제비와 같이
날아간 제비와 같이 자죽도 꿈도 없이
어디로인지 알 수 없으나
어디로이든 가야 할 反逆(반역)의 정신
나는 지금 산정에 있다 ――
시를 반역한 죄로
이 메마른 산정에서 오랫동안
꿈도 없이 바라보아야 할 구름
그리고 그 구름의 파수병인 나
5. 시집
1959년 시집 『달나라의 장난』을 간행했다. 유고 시선집인 『거대한 뿌리』(1974)와 산문 선집 『시여, 침을 뱉어라』(1975)가 있고, 시와 산문을 모은 전 2권의 『김수영 전집』(1981, 개정판 2003)이 간행되었다.
6. 여담
사회주의와 문화적 자유주의를 끊임없이 추구한 시인으로 유명한데, 어느 정도냐 하면 그의 일기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통해 잘 알수있는데, 해당 글에서는 제2공화국의 2대악법(집시법, 반공법)에 관련하여 4.19 혁명이 미완으로 끝날 것이라는 걸 알고 강하게 비판했다.
9월 20일[13]
언론자유나 사상의 자유는 헌법조항에 규정이 적혀 있다고 해서 그것이 보장되었다고 생각해서는 큰 잘못이다. 이 두 자유가 진정으로 보장되기 위해서는 우선 자유로운 환경이 필요하고 우리와 같이 그야말로 이북이 막혀 있어 사상이나 언론의 자유가 제물로 위축되기 쉬운 나라에서는 정부가 적극적으로 이 두 개의 자유의 창달을 위하여 어디까지나 그것을 격려하고 도와주어야 하지 방관주의를 취한다 해도 그것은 실질상으로 정부가 이 두 자유를 구속하게 된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정부가 지금 할 일은 사회주의의 대두의 촉진 바로 그것이다. 학자나 예술가는 두말할 것도 없이 국가를 초월한 존재이며 불가침의 존재이다. 일본은 문인들이 중공이나 소련 같은 곳으로 초빙을 받아 가서 여러 가지로 유익한 점을 배우기도 하고 비판도 자유로이 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언론의 창달과 학문의 자유는 이러한 자유로운 비판의 기회가 국가적으로 보장된 나라에서만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김수영, 「일기초(抄)2」, 『김수영 전집 2:散文』[14], 713-731쪽, 민음사. #
이에 대해 2008년 당시 옮긴이는 다음과 같이 평했다.
검열이란 정부 기관이나 영진위[15], 기윤실[16], 유림[17] 따위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다. 검열은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 이미 존재하며, 자기 검열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검열이다. 글쓰는 사람이 조건반사처럼 글을 쓰면서, 심지어 혼자 생각에 잠겨 있을 때조차 스스로의 글과 생각을 제한해야 한다면, 거기엔 실질적인 검열이 없더라도 언론 자유가 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가령 불평은 있지만 검열 때문에 불평을 말할 수 없는 오웰의 『1984』보다 불평 자체를 느끼지도 못하는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가 더 끔찍한 세계다.
닉네임 '엔디', 2008년 6월 2일, 「일기초(抄)2」의 9월 20일 부분을 평하며. #
김수영이 좌우의 대립에 대해서 염증을 느끼고, 자유에 대한 강렬한 의지를 표한 것에는 배경이 있다. 6.25 전쟁 당시의 경험이다. 김수영이 조선인민군에게 강제로 차출되었다는 이야기는 앞에 했는데, 그는 이와중에 탈출을 시도했다가 실패해서 총살당할 위기를 간신히 모면한다. 이후에 겨우 다시 탈출해서 서울의 자신의 집으로 갔더니 이번에는 인민군이라고 잡혀서 거제 포로수용소로 보내진 것이다. 거제도 포로수용소도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포로수용소에도 좌우익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두 집단은 맹렬하게 대립했다. 좌우익 세력 모두 서로를 린치했고, 한쪽으로 몰렸던 사람은 다음 날 화장실에서 시체가 되어서 떠올랐다고 한다. 김수영은 이 곳에서 2년을 버티면서 좌우익의 대립에 진저리를 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앞서 설명한 통념과 달리 남로당원이었다. 그러던 중 서울신문 1949년 11월 19일자 2면 광고란에 '탈당 성명서'가 실렸는데, 주소지가 가족이 운영한 식당이다. 이는 이 광고를 발굴해낸 인하대 국문과 김명인 교수에 따르면, 국가보안법과 보도연맹 등으로 대표되는 폭압에 의해 (주소지가 집에서 하던 식당이라는 걸 볼 때 가족의 억류도 있었을 것이고) 강제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터지자 그는 8월 3일, 의용군에 가담했는데 이는 '월북이나 입산은 커녕 최소한의 투쟁도 하지 않고 전향 선언을 해버린 자신을 반성'하며 자원했다고 한다. 헌데, 9월 28일에 탈영한 후 11월 11일 거제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석방되었는데, 9월 28일은 알다시피 서울 탈환일이었다. 즉, 진정한 재재전향(...)이라기 보다는 실제 현실에 대한 실망 내지는 서울 탈환으로 인해 또 다시 현실적 선택을 했다는 것. 그러나 4.19 혁명, 특히 쿠바 혁명에 대한 흥분과 몰두를 볼 때, 사회주의 자체에 대한 동경과 신뢰는 오랫동안 포기하지 않았다는 게 김명인 교수의 분석이다. *
술을 좋아했다. 현실에 좌절하고 갑갑해하는 그에게 술이 마지막 해방구였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한번은 술에 취해 눈밭에 엎어져 있던 것을, 지나가던 학생이 업어서 경찰서에 데려다 준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자 술에 취한 김수영 시인은 순경을 보자마자 "내가 바로 공산주의자올시다!"라며 넙죽 절을 했다고 한다.[18][19] 매일같이 술에 취해 가족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잠자는 아내와 애들을 깨워서 울리기도 하고, 그의 특유의 전위적 시론 때문에 다른 문인들과 쌍욕을 하며 싸움질을 하기도 하는 초특급 민폐쟁이이기도 했다. 그리고 서술되어 있듯이 세상을 떠나던 시점에도 술을 마셨던 것을 생각하면 결국 술 때문에 명을 달리한 셈이다.
위의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유독 안광이 강렬했던 사람이다. 그래서 혹자들은 '시인의 눈'이라는 평을 내리기도 했다고.
생전 박인환과 절친하였으며, 어떤 때에는 서로 성향 차이로 멀어지기도 하고 영향을 받기도 하는 등 애증의 관계였다.
배우 안성기와 상당히 흡사하게 생겼다.
생전 ‘하이데거’ 철학을 좋아하여, ‘존재와 시간’을 애독했다고 한다.
민음사에서 김수영 시인의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1981년부터 김수영문학상을 제정하여 시상하고 있다.
6.1. 배우자 김현경과의 관계
죄와 벌 / 김수영
남에게 희생을 당할 만한
충분한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
살인을 한다.
그러나 우산대로 여편네를 때려 눕혔을 때
우리들의 옆에서는
어린 놈이 울었고
비 오는 거리에는
40명 가량의 취객들이
모여들었고
집에 돌아와서
제일 마음에 꺼리는 것이
아는 사람이
이 캄캄한 범행의 현장을
보았는가 하는 일이었다.
-아니 그보다도 먼저
아까운 것이
지우산을 현장에 버리고 온 일이었다.
충격적이게도 이 시는 김수영이 실제로 겪었던 일을 다룬 시이다. 김수영이 길거리에서 어린 아들이 보는 앞에서 배우자를 우산대로 후려팬 것이다. 그러고도 남이 보는 것만 걱정하고 다음에 생각하는 것은 우산을 놔두고 온 것을 아쉬워한다. 그런 와중에도 배우자를 때린 것에 대한 아련한 후회와 자신에 대한 조소가 담겨있다. 그러나 이런 일은 한 번만 있었던 일이 아니었다. 여기에는 배경이 있다.
선린상업학교 야간을 졸업한 김수영은 일본 유학 시기에 학교 선배인 이종구에게 얹혀 살았다. 이 이종구와 잘 알고 있던 것이 후일의 배우자가 되는 김현경이었다. 셋이 복잡하게 얽힌 관계였는데, 김현경의 아버지의 첩이 김현경의 아버지 외의 남자와의 관계로 낳은 사람[20]이 이종구(1990년 사망)였고, 유년 시절부터 알던 이종구를 아저씨라고 부르던 김현경은 그동안 교제하던 시인 배인철이 요절한 후 이종구의 소개로 사귀게 된 것이 이종구의 막역지우이자 후배인 김수영이었다. 관련 자료
김현경은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를 다녔고, 정지용에게 시를 배웠으며 프랑스문학에 심취했다고 할 정도로 인문학적 소양이 있었다. 김수영과 김현경의 처음 만남도 스승과 제자에 가까웠다. 그러다 연인이 되었다. 김현경의 아버지는 만국박람회의 기획자인데다 광산도 소유한 사업가였고, 김수영의 집안은 가세가 다 기울어 히토츠바시대학 유학 시절에는 생활비도 제대로 못 보내서 김수영을 선배 집에 더부살이하게 만들 정도로 보잘 것 없는 설렁탕집에 불과했다. 당연히 찬성할 리 없는 관계였지만 두 사람은 돈암동에 살림집을 잡고 결혼한다. 1950년 30세 김수영과 결혼했을 때, 김현경의 나이는 25살이었다. 예술적 감수성이 있었고 김수영에게 시를 배웠던 김현경은 나름대로 당대 문단에서 아이돌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문제는 역시 6.25 전쟁이었는데, 결혼하고 터진 6.25 전쟁 때문에 김수영은 인민군에게 의용군으로 강제 차출된다. 하지만 의용군을 탈출했던 김수영이, 이번에는 한국군과 유엔군에게 서울 집 근처에서 체포되어서 거제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다. 문제는 의용군에 끌려간 김수영의 생사가 묘연해진 상황에서, 아이를 김수영의 모친에게 맡겨둔 김현경이 이종구와 부산에서 살림을 차렸다는 것이다. 김수영은 1952년 12월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풀려나왔는데, 부산에서 가족을 만났을 때 김현경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후에 김수영이 김현경과 이종구가 사는 곳을 찾아갔을 때, 김현경은 김수영과 같이 가는 것을 거부했다. 이 때, 김수영이 받은 충격과 절망으로 다음과 같은 시를 쓴다.
너를 잃고 / 김수영
늬가 없어도 나는 산단다
억만 번 늬가 없어 설워한 끝에
억만 걸음 떨어져 있는
너는 억만 개의 侮辱(모욕)이다
나쁘지도 않고 좋지도 않은 꽃들
그리고 별과도 등지고 앉아서
모래알 사이에 너의 얼굴을 찾고 있는 나는 인제
늬가 없어도 산단다
늬가 없이 사는 삶이 보람있기 위하여 나는 돈을 벌지 않고
늬가 주는 모욕의 억만 배의 모욕을 사기를 좋아하고
억만 인의 여자를 보지 않고 산다
나의 생활의 圓周(원주) 우에 어느날이고
늬가 서기를 바라고
나의 애정의 원주가 진정으로 위대하여지기 바라고
그리하여 이 공허한 원주가 가장 찬란하여지는 무렵
나는 또하나 다른 遊星(유성)을 향하여 달아날 것을 알고
이 영원한 숨바꼭질 속에서
나는 또한 영원한 늬가 없어도 살 수 있는 날을 기다려야 하겠다
나는 億萬無慮(억만무려)의 모욕인 까닭에.
1954년 김현경은 이종구를 떠나서 다시 김수영을 찾아온다. 이후 김수영과 김현경의 삶은 부부라기보다는 동거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김수영은 김현경을 사랑하면서도 분노했고, 복잡한 마음으로 살았다. 상단의 시 '죄와 벌'은 1960년대 초에 쓰여진 시이다.
하지만 김현경은 이후 김수영의 독자이자 비평가였으며, 의상실을 경영하고 디자이너로 활동하는 등 상당한 예술적인 능력을 보여줬다. 김수영이 죽고 45년 동안 그의 시를 알리기 위해서 노력한 것도 배우자 김현경이었다. 이 김현경이 나중에 김수영을 그리면서 쓴 자서전이 바로 '김수영의 연인'이다. 이 자서전이 김현경의 실드가 좀 강하다고 생각하여 좀 더 객관적인 둘의 관계를 알고 싶다고 한다면 '김수영 평전'을 읽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아내인 김현경과 선배인 이종구의 관계와 살림을 차린 위치에 대해 얘기해준 사람도 생전 절친했지만 애증이 교차하는 관계인 친구 박인환이고, 김현경에게 거부당하고 나서 이종구를 떠나 다시 김수영을 찾아온 김현경을 받아준 것도 박인환의 설득이 크게 작용했다.
참고로 김수영이 배우자 김현경에 관해 쓴 시 가운데서는 아래와 같은 야리꾸리한 것도 있다.
성(性) / 김수영
그것하고 하고 와서 첫 번째로 여편네와
하던 날은 바로 그 이튿날 밤은
아니 바로 그 첫날 밤은 반시간도 넘어 했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
그 년하고 하듯이 혓바닥이 떨어져 나가게
물어 제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지간히 다부지게 해줬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
이게 아무래도 내가 저의 섹스를 개관하고
있는 것을 아는 모양이다
똑똑히는 몰라도 어렴풋이 느껴지는 모양이다
나는 섬찍해서 그전의 둔감한 내 자신으로
다시 돌아간다
연민의 순간이다 황홀의 순간이 아니라
속아 사는 연민의 순간이다
나는 이것이 쏟고 난 뒤에도 보통 때보다
완연히 한참 더 오래 끌다가 쏟았다
한번 더 고비를 넘을 수도 있었는데 그만큼
지독하게 속이면 내가 곧 속고 만다
6.2. 미발표 시: 김일성 만세
김일성 만세 문서 참조. 단, 원래 이 시는 미발표 시가 아니었다. 2곳의 신문사에 보내었으나 2곳 모두에서 실어주지 않은 것이다.
7. 대중매체
지식채널e에서 김수영에 대해 2부에 걸쳐 다룬적이 있다. 제목은 그 해 4월, 시인 김수영. 1부 2부
2004년에 방영한 EBS 드라마 명동백작에서 김수영의 일생을 다뤘다. 당시 김수영 역을 맡은 배우는 이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