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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산계급 문화대혁명 无产阶级文化大革命 Great Proletarian Cultural Revolution | ||
| 천안문 광장에서 마오쩌둥 어록을 들고 있는 홍위병들 | ||
| 기간 | 1966년 5월 16일 - 1976년 10월 6일 | |
| 장소 | 중국 영국령 홍콩 [1] | |
| 동기 | 수정주의로부터의 공산주의 수호를 명분으로 한 마오쩌둥의 권력 투쟁 관료주의와 부패에 찌든 중국공산당에 대한 대중과 학생들의 불만 | |
| 유형 | 당간부, 지식인 계층, 유산 계급을 대상으로 한 적색 테러, 반달리즘 | |
| 주동자 | 마오쩌둥 | |
| 사망 | 공식 | 170만[3] |
| 추정 | 100만 ~ 2,000만[4][5] | |
| 결과 | 류사오치 실각 마오쩌둥 권력 강화 문화유산 훼손 및 소실 지식인 계층의 위축 | |
1. 개요2. 설명3. 역사4. 문화대혁명의 내용5. 학살6. 영향7. 해외의 반응8. 문화대혁명의 비극들9. 주요 홍위병들10. 현대 중국에서의 인식
11. 관련 인물과 사건
11.1. 관련 인물11.2. 사건 목록11.3. 기타
一九六六年五月至一九七六年十月的“文化大革命”,使党、国家和人民遭到建国以来最严重的挫折和损失。这场“文化大革命”是毛泽东同志发动和领导的。
1966년 5월부터 1976년 10월까지의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당, 국가와 인민은 건국 이래 가장 심각한 좌절과 손실을 입었다. 이 '문화대혁명'은 마오쩌둥 동지가 시작하고 영도한 것이다.건국 이래 당의 약간의 역사 문제에 관한 결의(关于建国以来党的若干历史问题的决议)
1981년 6월 27일, 중국공산당 제11기 제6차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毛泽东同志对当时我国阶级形势以及党和国家政治状况作出完全错误的估计,发动和领导了“文化大革命”,林彪、江青两个反革命集团利用毛泽东同志的错误,进行了大量祸国殃民的罪恶活动,酿成十年内乱,使党、国家、人民遭到新中国成立以来最严重的挫折和损失,教训极其惨痛。一九七六年十月,中央政治局执行党和人民的意志,毅然粉碎了“四人帮”,结束了“文化大革命”这场灾难。
마오쩌둥 동지는 당시 우리나라의 계급 정세와 당 및 국가의 정치 상황에 대해 완전히 잘못된 판단을 내리고 "문화대혁명"을 발동하고 영도하였다. 린뱌오와 장칭 두 반혁명 집단은 마오쩌둥 동지의 과오를 이용하여 나라를 해치고 백성에게 재앙을 안겨준 수많은 죄악 행위를 저질렀으며, 10년에 걸친 내란을 초래하여 당과 국가, 인민으로 하여금 신중국 창건 이래 가장 심각한 좌절과 손실을 겪게 하였으니 그 교훈은 지극히 뼈아프고 참담하다. 1976년 10월, 중앙정치국은 당과 인민의 뜻을 받들어 단호히 "4인방"을 분쇄하고, "문화대혁명"이라는 이 재난을 종식시켰다.당의 백년 분투의 중대한 성취와 역사적 경험에 관한 중공중앙의 결의(中共中央关于党的百年奋斗重大成就和历史经验的决议)
2021년 11월 11일, 중국공산당 제19기 중앙위원회 제6차 전체회의
옛 것은 모조리 숙청하자. 문화, 교육, 정치, 가족 등 모든 것을
당시 슬로건#
문화대혁명(약칭 문혁)은 중국에서 1966년부터 1976년까지 10년 동안 마오쩌둥(毛泽东)이 선동하고 홍위병들이 실행한 적색 테러다. 중국 내에서는 우회적으로 "십 년 동란(十年动乱)"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 10년 동안의 운동으로 인해 중국의 수많은 지식인들이 탄압과 박해를 받았다. 중국공산당 역시 공격 대상에서 예외가 아니었으며, 극후반에는 마오쩌둥까지 때려부쉈다. 또한 수천 년 역사의 문화재가 상당수 희생당하거나 파괴되었으며, 그 대상이 무엇인지는 겨우 남아 있는 기록으로 추정해야 할 정도다. 자국의 문화를 지배자나 이민족이 아닌 자국민들이 스스로 멸절시키려 한 전례가 드문 사건이다.[6] 이로 인해 오늘날 중국 문화의 발전에 가장 큰 악영향을 미친 사건으로 평가되고 있다. 문화대혁명은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권력이 약화된 마오쩌둥이 권력을 되찾기 위해 일반 인민을 선동하여 일어났다. 해외뿐만 아니라 현대 중국에서도 문화대혁명은 공식적으로 극히 부정적인 사건이라 명시되고 있으며, 그 책임을 마오쩌둥의 책임이라 단언하고 있다.[7]
문혁의 악영향은 지도부 대부분이 조롱과 유배를 당하는 피해를 입은 중국공산당도 인지하고 있으며, 마오쩌둥 체제의 내재적 폭력성과 경직성, 그리고 현실적 한계를 예시할 때 많이 언급되는 사건 중 하나이다. 한편, 문혁 시기에는 다양한 사상들이 모순적으로 뒤섞여 표출되었기에 사회학적으로 흥미로운 연구 주제 중 하나로 손꼽히기도 한다. 특히 반봉건을 외치며 마오쩌둥을 봉건적으로 신격화하고, 그 마오쩌둥은 반제국주의를 외치면서도 중소국경분쟁이 일자 재빨리 노선을 바꿔 미국과 협상하고 오히려 국수주의를 반동으로 치부하는 행태를 보였다.
1966년에 중국에서 시작한, 대규모 사상·정치 투쟁의 성격을 띤 권력 투쟁. 수정주의(修正主義)·반당(反黨)·반사회주의자에게 철저한 비판을 가하였고, 마오쩌둥(毛澤東)·린뱌오(林彪) 등은 학생 중심의 홍위병과 혁명 소조(小組) 따위를 동원하여, 류사오치(劉少奇) 국가 주석 등 당과 행정부 간부를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실권파로 몰아 숙청하였다. 그 후 십여 년 동안 린뱌오의 실각 등 내부 대립이 끊이지 않다가 마오쩌둥의 사망 후 1976년에 종결되었다.
마오쩌둥은 1966년 이념의 성전을 발동함으로써 중국 전역을 뒤흔들었고 혁명정신을 되살리려 했다. 마오쩌둥은 학교의 문을 닫아버렸고, 학생들로 하여금 홍위병이 되어 ‘부르주아 전문가’로 일컬어졌던 교사, 교장, 교수들에 대항하는 혁명투쟁을 벌이도록 선동했다. 이 혁명운동은 사회전체를 혼란에 빠뜨렸다. 병원에서는 의사들이 화장실 청소를 하도록 강요당했고, 청소부들이 환자를 돌보았다. 홍위병들은 ‘자본주의의 길로 가고 있다’면서 정부와 당의 간부들을 공격하고 군부대의 무기고에서 탈취한 무기를 들고 싸움을 벌였다. 1969년에 인민해방군이 질서를 회복하기 전까지 온 나라가 사실상 무정부 상태 직전까지 치달아 있었다.
『판도라의 상자 중국』(p.19~20), 수잔 셔크 지음
의심할 여지 없이, 무산계급 문화대혁명 중에 무산계급 신사조, 신문화, 신풍속, 신습관이 반드시 지주들과 기타 착취 계급의 구사상, 구문화, 구풍속, 구습관 이런 부패한 것들을 대체할 것이다. 위대한 마오쩌둥 사상으로 무장하여 떨쳐 일어선 중국 인민은 반드시 온갖 잡귀신을 쓸어버릴 것이다.
중앙문혁소조장 천보다
한자 문화권에서는 '문화 혁명(文化革命)' 또는 더 줄여서 '문혁(文革)'이라고도 한다. 원래 내세운 목표는 파사구(破四旧)라 하여, 낡은 사상(旧思想), 낡은 문화(旧文化), 낡은 풍속(旧风俗), 낡은 관습(旧习惯)을 타파하여 사회주의 리얼리즘적인 이타주의적이고 자기 희생적인 사회주의 문화를 창조하자는 것이었으나, 결과적으로는 그저 역사적인 문화 검열 사건이자 전국 단위로 실행된 대규모 반달리즘이 됐을 뿐이다.
주요 골자는 "옛 것은 모조리 숙청하자. 문화, 교육, 정치, 가족 등 모든 것을.#" 중국이란 넓고 오래된 나라에서 전국 규모로 일어난 이 사건의 이름은 문화'대혁명'이지만 그 실상은 문화'대숙청', 문화'대파괴'였다. 이때 일어난 파괴의 수준은 분서갱유 같은 승전국에 의한 패전국의 '문명 파괴'였다고 보면 된다. 단 외국의 문명이 아니라 자국의 문명을 파괴한 게 코미디. 앞서 언급했듯 모든 성공한 정치적 행위가 그러한 것처럼 문화대혁명의 명분 또한 "이제 경제, 정치 분야의 혁명이 완수되었으니, 그보다 상부 구조인 문화를 개혁할 단계다"라는 듣기 좋은 것이었으나, 문제는 이에 따라 구체제의 봉건적, 권위적인 관료제, 위계 질서와 같이 조금이라도 보수적이거나 우파적인 것과 관련된 모든 것을 파괴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중국사에서는 분서갱유, 소역의 14만 권 분서, 문자의 옥 등의 반달리즘이 여러 번 있었지만, 문화대혁명이 중국 문화 전체에 끼친 피해는 분서갱유와 소역의 분서, 문자의 옥을 훨씬 능가한다. 분서갱유와 문자의 옥은 적어도 자국의 문화산업까지 파탄내진 않았다. 이 문화대혁명식 반달리즘의 진수는 문화재 파괴뿐만 아니라 문화예술 관련 인사들에 대한 대규모 린치에도 있다. 주변에 문화예술 쪽으로 종사한다는 사람이 있으면 무조건 집에 쳐들어가서 게으름뱅이라는 터무니없는 죄를 뒤집어씌워 두들겨 팬 뒤 현실 체험이라면서 집단 농장에 감금하고 노예처럼 부려먹었다. 이러니 다른 국가들이 전부 제각기 대중문화를 발달시켜가던 20세기 후반에 중국의 대중문화는 그런 단계를 전혀 밟을 수가 없었다. 개혁개방이 실시되는 1980년대 이후로는 인적 자원 문제는 거의 해소되었다. 일단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시장 규모도 성장하면서 대중 문화도 성장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이 이런 식으로 "혁명"이라는 이름을 쓰면서도 실상은 그저 포스트 아포칼립스식 대폭동 비슷하게 흘러간 이유는 이 사건이 벌어지게 된 뒷배경 자체가 처음부터 극히 불순했기 때문이다. 문화대혁명 당시의 중국 정부는 대외적으로는 이 사건을 마치 프랑스 혁명의 동양판쯤으로 선전했다.[8] 서구 지식인들도 진실을 알기 전까지는 진짜로 이렇게 믿기도 했다.[10][11]
마오쩌둥이 이렇게 노욕의 끝판왕으로 사는 동안의 중국의 경제 성장도 침체되었다. 우선 1967년과 1968년도에 각각 -5.7%, -4.1%의 저조한 경제 성장률을 기록하며 류사오치 시절의 경제 회복의 성과를 까먹었다. 1969년과 1970년에는 홍위병이 하방되어 사회 혼란이 어느 정도 진정되고 농어촌 개발이 진행되어 16%, 19%의 경제 성장률을 기록했지만, 1970년대 초중반에 경제 성장이 2.3%까지 내려앉는 등 냉온탕을 오갔다. 결국 대만과 홍콩이 비교적 안정적으로 경제 성장을 유지하면서[12] 중국의 경제력을 급속히 따라잡았고, 중국은 잠재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면서 후진 개발도상국으로 남게 되었다. 1960년 세계 경제력 순위에서 중국은 세계 5위를 차지했고 1965년에는 6위를 기록했는데, 문화대혁명이 일어난 이후로는 서독과 이탈리아, 브라질 등에 따라잡혀서 1976년에는 10위로 떨어지게 되었고 1981년에 13위를 기록함으로써 정점에 달했다.[13] 그것도 그나마 인구 증가율이 높아서 유지했지, 그게 아니었으면 얼마나 더 떨어졌을지 모를 일이다. 결과적으로 중국은 문화대혁명의 후유증이 수습되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경제 성장에 힘을 쓰게 되었다.[14]
자세한 내용은 문화대혁명/역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A: 저는 그 모자를 쓸 수 없어요.
B: 모자 쓰는 게 왜 그렇게 참을 수 없는 건가요? 나는 참을 수 있을 것 같은데.
A: 한번 쓰면 벗을 수 없으니까요!
B: 어떤 모자를요?
A: 반혁명 모자요!
B: 못 참겠네요!
B: 이런 모자는 어느 공장에서 파나요?
A: "4인방"이 세운 "모자공장" 이죠.
B: 아, 왕, 장, 장, 야오로 구성된 반당파가 세운 공장 말이군요.
A: 네.
A: 그 "주주" 왕이 직접 운영을 감독했고, "전략가" 장이 면밀히 계획을 세웠고, "경영자" 야오가 널리 홍보했고, "사장" 장이 곳곳에 판매했죠.
B: 장 사장, 장칭, 그 늙은 여우!
A: 그 사람이에요.
A: 장 사장은 이 "모자 공장"을 열기 위해 온갖 고심을 했고, 고대와 현대, 중국과 해외를 망라하여 다양한 디자인과 이름의 모자를 꼼꼼하게 생산했습니다.
B: 오, 어떤 종류의 모자가 있나요 ?
A: 공자와 노자의 낡은 모자를 가공하고, 왕밍의 낡은 모자를 재고 조사하고, 류샤오치가 남긴 낡은 모자를 독점하고, 린뱌오의 새 모자도 빼앗았습니다! 게다가 소련 수정주의자들이 만든 외국 모자와 마나파에서 만든 모자도 수입했습니다.
(중략)
B: 안녕하세요, 이렇게 큰 사이즈의 모자는 어떤 종류가 있나요?
A: "반역자", "간첩", "대군벌", "반당분자", "야심가", "주자파", "투항파", "수정주의", "악질 토호".
B: 와! 중간 사이즈 모자는요?
A: "반동", "반혁명", "흑색선전가", "흑수", "흑조폭", "경험주의", "민주파", "회색분자", "기회주의자".
B: 이 중간 사이즈 모자는 딱 맞네요. 이건 좀 작은 거 같은데요?
A: "걸림돌", "목낭청", "무골호인", "떡잎", "험담꾼", "확성기", "역류", "악습", "앞잡이".-장보화(常宝华), 장귀티엔(常贵田), <모자공장(帽子工厂)>(1976)
대약진 운동에 이은 2단 콤보 크리티컬 히트로 중국을 혼란에 빠트렸다. 사람과 사람 사이는 서로에 대한 불신으로 점철되었고, 심지어 가족 간에도 서로를 믿을 수 없었다. 개인의 인권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아버지가 마오쩌둥에 대해 아주 약간의 불만을 혼잣말로 중얼거리면 아들이 그것을 공산당에 보고하고, 홍위병들이 와서 아버지를 타도하는 식의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타도(打倒)란 말 그대로 때려눕힌다는 의미인데, 그냥 때려눕히는 게 아니라 이상한 모자[15]에 '더러운 자본주의의 개' 따위의 글을 적어서 씌우고 사람들이 많은 광장에 결박해 놓은 다음, 묶인 사람을 사람들이 와서 한 번씩 강렬하게 비판한 뒤 구타를 가하고, 외양간이나 화장실 같은 곳에 가두는 것을 말한다.
당해본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평소 친분이 있거나 모르는 사람들에게서 언어와 신체폭력을 집단으로 겪고 나면 정신적으로 크나큰 상처를 입고 충격에서 헤어 나오기 힘들다. 피해자 중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혹은 이런 끔찍한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아서 자살하는 경우도 많았다. 아예 미쳐버린 사람도 부지기수. 한 예로, 소설《낙타 샹즈》를 발표하여 마오쩌둥으로부터 '인민 예술가'라는 찬사를 받았던 소설가 라오서는 그가 런던 대학교에서 일했었단 이유로 반동으로 몰린 후 공묘로 끌려가서 베이징 제8중학교에서 몰려나온 여중생 홍위병들에게 놋쇠 버클이 달린 혁대로 수없이 구타를 당하고 굴욕적인 사진이 찍히자, 정신적인 충격과 분노로 인해 자신이 어릴 적 살던 집 근처의 연못에 투신자살했다고 한다. 또한 그런 피해자 대부분은 원래 고위급 직책을 가지거나, 권위 있는 지식인 등 중국 사회의 엘리트들이었다. 정신이 멀쩡한 엘리트들이 그렇게 미쳐나가고 죽어가며 투옥되었기 때문에 중국 사회의 수없이 많은 인재가 사라져 버렸다. 더욱 더 끔찍한 사실은 마오쩌둥이 "자살은 인민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는 행위다." 라고 한 까닭에, 자살할 경우 그 사람은 장례식조차 공개적으로 치르지 못하고 쓸쓸하게 화장해야 했다는 점이다. 대사관을 불태우고 직원들을 끌고 다니며 두들겨팬 것. 서방 대사관은 말할 것도 없고 소련 대사관도 수정주의자 소굴이라고 포위를 당했고 인도네시아나 케냐, 몽골 대사관도 공격의 표적이 되었다. 홍위병의 이러한 외교공관 공격 중에서 가장 스케일이 컸던 것이 1967년 주중 영국 대표부 점령 사건이었는데 홍콩의 67폭동을 홍콩 당국이 무력으로 진압하자 홍위병들이 흥분하여 영국 대표부를 점령, 대표부 직원들을 억류하여 폭행한 사건이다. 이로 인해 외교 문제가 발생했고, 나중에 심각한 국제적 고립에 몰려 혁명외교를 철회한 마오쩌둥은 방중(訪中)한 북한의 오진우에게 "어떤 이들은 기회에 편승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 베이징에 있는 영국대표부를 불사르고 (중략) 그런 사람들이 바로 국민당이다." 라고 발언했다.[16]
극단적으로 문화대혁명에 앞장섰던 집단인 홍위병이 득세했는데, 이들은 대개 10~20대의 학생들이었다. 공통된 특징은 녹색 인민복과 모자, 무장 벨트, 마오쩌둥 어록을 착용한 채, 사람들에게 마구잡이로 죄명을 씌워서 때리고 부수고 빼앗는 것. 중국의 청소년 대부분이 홍위병에 가담했기 때문에 문화대혁명에 대한 소회는 각각 다르다. 어떤 사람은 이 시기를 그리워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재빨리 개념을 찾고 새 시대를 준비하다가, 개혁개방이 시행된 이후 외국에 나가서 성공한 사람도 있다.[17]
홍위병 대다수는 꿈에서 깨지 못해서, 나중에 마오쩌둥이 농촌에서 노동하며 배우자는 "상산하향 운동(上山下乡运动)"을 제창하자, 그에 따라 모조리 시골로 내려갔고, 1980년대까지 그곳에서 사실상의 굴라그 생활을 하면서 인생이 사그라졌다. 마오 사망 이후 권력을 장악한 덩샤오핑은 공산주의 이론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선부론"을 내걸고 노골적인 불평등성장 정책을 실시했는데, 이것이 일반 중국인들에게 무리없이 받아들여지게 된 이유는 대부분이 문화대혁명과 홍위병들의 만행과 광기에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18] 당시 마오쩌둥은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인해 권력 일선에서 퇴진했으나, 그 뒤를 이은 류사오치 등의 실용주의 정치가들이 실권을 잡고 예전 자신의 과오를 수정하는 모습에서 권력에서 소외되었다는 느낌을 받고 심한 분노와 권력욕을 느꼈다. 이에 아직 자신에게 남은 정치적 카리스마를 악용하여 정, 관, 군부의 권력 중심에 있는 이들을 숙청하고 권좌를 재확립하고자, 홍위병으로 대표되는 선동된 군중과 4인방, 린뱌오 등을 이용해 자신이 세운 국가를 자기 손으로 망가뜨린 것이다. 그러나 4인방을 숙청한 덩샤오핑 등은 마오쩌둥의 권위를 등에 업고 세력을 유지하기를 원했으며, 군중의 비난도 피하고자 죄과를 4인방에게만 물었다.
덩샤오핑 이후 중국공산당 수뇌부를 비롯한 중국의 엘리트 중 이공계(理工界) 출신이 많은 것도 문화대혁명의 영향이 지대하다. 문화대혁명 때 인문계 및 사회과학계에 대한 공격이 너무 크다 보니, 상대적으로 깔 거리가 적은 자연과학 및 공학 계열로 인재들이 몰렸던 것. 물론 문화대혁명 당시 이과 인재들도 고생했지만 문과 인재들에 비하면 그나마 나은 수준이었다. 실제로 중국공산당의 유력 파벌 중 중국공산주의청년단(中国共产主义青年团)의 경우, 해외유학 경험이 있는 이공계 인재들이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19]
이 사람 좀 봐. 마치 5,000만 명을 죽인 작은 천사 같잖아. 그렇지? 당신 맞지?
문화대혁명의 10년 동안 중국에서는 최소 수십만 명, 최대 2천만 명에 달하는 엄청난 사람들이 희생당했는데, 학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반동분자로 지목된 사람들을 무자비한 구타와 채찍질, 총살, 교살, 칼로 찌르기, 절벽에서 떨어뜨리기, 생매장, 투석형, 익수, 참수, 다이너마이트에 묶은 후 폭파하기, 삶아 죽이기 등 다양한 방법들을 동원해 처형했으며 여성들은 끔찍한 성고문을 당한 뒤 처형되었다.[20][21][22][23]
이후 마오쩌둥은 홍위병들이 필요없어지자 의도적으로 이들 간에 충성 경쟁을 시키고 분열과 이간질을 부추겨 내전이 발발했다. 제각각 분열된 홍위병 파벌들은 각자 무기고를 털어 박격포와 고사포, 장갑차까지 동원해 중국 대도시 곳곳에서 시가전을 벌였으며, 문화대혁명 기간 중국의 상당수 중고생과 대학생들이 홍위병이라는 이름으로 마오쩌둥이 조직한 정치적 대중운동조직에 동원되었다. 당시 이들에 의해 살해당하거나 박해를 받아 사망한 사람들은 무려 10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베이징:문화대혁명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베이징 8월 폭풍 사건이 일어난 1966년 8월 18일부터 9월까지 10,275명이 사망했다. 특히 다싱구에서는 1966년 8월 27일부터 9월 1일까지 단 5일 동안 생후 38일밖에 안 된 아기와 80세 노인까지 포함해 공식 통계로만 325명이 살해당했다. 8월 31일 단 하루 동안 100명 이상이 사망했고, 심지어 힘없는 노약자들과 어린이들이 가장 잔혹하게 살해되었다.[24] 게다가 홍위병들은 희생자들의 피로 문화대혁명을 찬양하는 문구를 벽에다 쓰는 극악무도한 악행까지 저질렀다.[25][26][27]
후난성의 다오현: 1967년 8월 13일부터 10월 17일까지 총 4,519명이 살해당하거나 강제적으로 자살했다. 당시 학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죽일 사람의 자식들에게 '부모님이 많이 아프니 가능한 한 빨리 와라'라는 거짓 전보를 보낸 후 이 자식들이 오면 바로 가족들을 몰살했다. 그런데도 다오현에서는 문화대혁명이 끝난 후 학살에 가담한 수천 명이 넘는 사람들 중 단 11명만이 징역 3~10년형이라는 솜방망이 처벌을 받아 마을 주민들이 항의하여 직접 베이징을 방문하는 일까지 있었다.[28][29]
후난성의 사오양현: 다오현의 학살의 영향을 받아 1968년 7월부터 9월까지 약 1,700명이 자살을 강요받거나 살해당했는데, 얼마나 많은 시체들이 강에 버려졌는지 시신들이 지역 정수장 내부의 수도 펌프를 막는 경우까지 생겨 주민들이 반 년 동안 수돗물을 마시는 것을 거부할 정도였다. 게다가 후반부로 갈수록 학살은 그동안 쓰던 살해 방식이 더 이상 살인자들에게 쾌감을 줄 수 없다는 이유로 더욱 끔찍해져만 갔다.[30]
장시성의 루이진시: 1968년 9월 23일부터 10월 초까지 반역자를 찾는다는 명목으로 문화대혁명 당시 통계로만 991명이 목숨을 잃었다. (강제적으로 자살한 699명 포함)[31]
광시 좡족 자치구: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10만~15만 명의 사람들이 학살당했고, 한 가족의 아버지와 딸을 살해한 후 그 희생자의 아내와 딸을 강제로 자신의 아내로 취하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최소 137명이 식인 광풍의 피해자가 되었다. 참고로 식인 가해자 80%는 공산당의 간부였기 때문에 이 식인은 민중들이 혼란상 속에서 벌인 것이 아닌 중국공산당이 조직적으로 실시한 것으로 여겨진다.[32][33]
Song Yongyi: Guangxi의 정부 기밀 문서에 따르면, 그 기간 동안 150,000명이 비자연적 원인으로 사망했습니다. 그 중 30,000명은 식별 가능한 신원이나 성별조차 없었습니다. 그들 중 95 %는 완전히 살해되거나 고문이나 학대의 결과로 사망했습니다. 무력 충돌로 사망한 사람은 5% 미만이었습니다. 또 다른 30,000명은 실종된 것으로 기록되었습니다.
RFA: 당신은 당신의 책에서 식인 풍습을 언급합니다.
Song Yongyi: 그 부자연스러운 죽음 중 많은 사람들이 혁명 대중에게 먹혔습니다. 광시의 독립 연구원들은 한 현에서 총 421명이 먹힌 것으로 집계했습니다. 광시의 27개 현에서 식인 풍습에 대한 보고가 있었습니다 . 이는 광시시 현 전체의 3분의 2에 해당합니다.
이른바 흑오류라고 불리는 한 남자는 그 자리에서 맞아 죽었습니다. 그에게는 11세와 14세의 자식이 있었습니다. 현지 관리들과 민병대들은 그런 사람들을 근절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두 아이를 죽였을 뿐만 아니라 먹었습니다. 광시성 푸베이현에서는 35명이 숨지고 먹혔습니다. Liu Zhengjian이라는 사람은 가족이 완전이 몰살됐습니다. 그의 17세 딸 Liu Xiulan는 9명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녀의 배를 찢고 그녀의 간과 가슴을 먹었습니다. 이런 사건들이 매우 많았습니다.
RFA: 왜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합니까?
Song Yongyi: 문화대혁명 때 이 정치운동은 기본적으로 법이 없었고 정치인들이 선동해서 서로 죽이고 있었습니다. 사람과 짐승의 경계가 점점 흐려지고 그 경계를 넘는 것이 매우 쉬워졌습니다. 지주에 대항하여 '투쟁'하고 사람을 죽이는 것은 정상이었습니다. 그 당시 모든 곳에서 일어났고, 군부, 당 간부, 민병대는 모두 토지 개혁 군중의 일부였습니다. 이런 일이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있어서 식인 풍습이 광시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34]
내몽골 자치구: 1967년부터 1969년까지 1946년에 해산된 내몽골인민혁명당(PRP)에 협조한 것으로 몰려 약 35만 명이 구금되고 2만 8천 명이 살해당했다. 당시 내몽골 자치구에서는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은 거의 살아남지 못했으며, 50종류 이상의 고문이 동원된 참상들은 악몽에 시달릴 것 같을 정도로 끔찍하기 그지없었다고 전해진다.[35][36] 내몽골 인민혁명당 숙청 사건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