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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원필비(戎垣必備)》는 순조 13년(1813년)에 훈련대장 박종경(朴宗慶)이 감조도감(監造都監)에서 무기를 수리하거나 새로 제작한 후 이들 무기를 그림으로 그리고 그 규격과 용법을 기록한 책이다
1 총통 우리나라는 이미 고려 말기부터 화포를 제작하여 사용하였다. 고려 우왕 때 이미 최무선(崔茂宣)에 의하여 대장군(大將軍)·이장군(二將軍)·삼장군·육화석포(六火石砲)·화포(火砲)·신포(信砲) 등의 화포가 제작되었으며 세종조에 이르러서는 화포의 개량이 이루어져 일총통,이총통, 삼총통, 쌍전총통, 사전총통, 사전장총통, 팔전총통, 장군화통, 철신포 등이 제작되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화살을 발사하였다. 16세기 이후의 대형 화포로는 천자총통(天字銃筒), 지자총통(地字銃筒), 현자총통(玄字銃筒), 황자총통(黃字銃筒)이 대표적인데 그 제원 및 사거리는 다음과 같다.
구분..........전체길이.........구경.........화살.................탄환
천자총통 (天字銃筒)....6척 6촌 3분......5촌 6분......대장군전1200보....... 수철연의환
지자총통 (地字銃筒)....5척 6촌 7분......5촌..........장군전 800보..........조란환200개
현자총통 (玄字銃筒)....4척 1분..........2촌 9분......차대전 2000보.........철환 100개
황자총통 (黃字銃筒)....3척 6촌 4분......2촌 2분......피령전 1100보.........철환 40개
천자총통 등 전래의 대형화기를 발사하기 위해서는 먼저 심지 구멍에 약선(藥線)을 끼우고 포구로 화약을 넣은 후 종이와 격목(檄木)을 넣고 다진다. 격목은 화약의 폭발력을 투사체에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나무 마개이다. 철환(鐵丸)이나 조란환(鳥卵丸)을 사용할 때는 중간에 토격(土隔)을 사용한다. 마지막으로 격목 위에 탄환을 넣고 약선에 불을 붙인다.
조선 후기에는 중국에서 전래된 불랑기(佛狼機), 홍이포(紅夷砲), 호준포(虎蹲砲), 대장군포(大將軍砲), 위원포(威遠砲) 등이 사용되었는데 이들 신형 화포는 발사 속도와 사거리 등에 있어서 그 이전의 화포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났다.
완구(碗口)는 그 주둥이가 밥그릇[椀] 모양으로 생겼다고 해서 완구라고 한다. 완구는 포강이 없고 약실과 포탄을 담는 완구만 있기 때문에 사거리가 짧고 수평 발사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구경이 크고 돌을 쏘기에 적합하다는 장점 때문에 오랜 기간 공성용 무기 등으로 사용되었다. 완구는 그 크기에 따라서 별대완구(別大碗口), 대완구(大碗口), 중완구(中碗口)로 나뉘는데 그 제원 및 사거리는 다음과 같다.
별대완구(別大碗口) .......350보(진천뢰)........400보(단석) 대완구(大碗口)........... 400보(진천뢰).......500보(단석) 중완구(中碗口)............350보(진천뢰).......500보(단석) 완구도 총통과 마찬가지로 화약을 넣고 격목(檄木)으로 막은 뒤 그 위에 단석이나 비진천뢰를 얹고 발사한다. 다만 비진천뢰를 쏠 때는 불발시 위험이 크기 때문에 약선 구멍을 두개 뚫어 사용한다 완구도 총통과 마찬가지로 화약을 넣고 격목(檄木)으로 막은 뒤 그 위에 단석이나 비진천뢰를 얹고 발사한다. 다만 비진천뢰를 쏠 때는 불발시 위험이 크기 때문에 약선 구멍을 두개 뚫어 사용한다.
대전(大箭)
조선 후기에 대형 총통으로 발사하는 화살로는 대장군전(大將軍箭), 장군전(將軍箭), 차대전(次大箭), 피령전(皮翎箭)이 있는데 이중에 피령전은 가죽으로 화살깃을 만들며 나머지 화살은 철우(鐵羽)를 사용한다.
이 세가지 화살의 기본 구조는 동일한데, 이년목(二年木)으로 화살대를 만들고 그 앞쪽에는 날이 없는 둥근 철촉을 단다. 화살깃은 세 개를 다는데, 화살깃의 아래쪽에 구멍을 내고 그 구멍과 화살깃 앞뒤에 철띠를 둘러 화살대에 고정시킨다. 각 화살의 제원과 사거리는 다음과 같다.
구분 ..........전체 길이..........화살촉 길이.......사거리..... 발사 총통 대장군전.......11척 9촌...........7촌............... 900보......천자총통 장군전.........9척 2촌 3분........ 5촌..............2000보......지자총통 차대전.........6척 3촌7분..........5촌 ..............2000보.....현자총통 피령전.........6척 3촌.............4촌..............1100보.....황자총통 총통으로 발사하는 대전(大箭)은 수전(水戰)에서는 적선을 파괴시키는데 사용하며 육전(陸戰)에서는 적의 보루를 파괴하고 적에게 심리적인 타격을 주기 위하여 사용한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대들보만큼 큰 화살을 쏘는 조선군에 대해서 본국에 보고하자 풍신수길은 부하들이 전투를 하기 싫어서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화를 내었다.
동차(童車)
동차(童車)는 천자총통 등 대형 총통을 거치하여 사격을 하거나 혹은 이를 운반 하는데 사용하는 작은 수레이다. 동차의 한 쪽은 높고 다른 한 쪽은 낮은데 높은 쪽에 침목(枕木)을 대고 그 위에 총통의 포구를 거치한다. 그리고 마삭(麻索)으로 동차의 좌우상하에 있는 둥근 철고리에 총통을 단단히 잡아매어 흔들리지 않도록 한다. 천자총통을 거치하는 동차의 바닥 부분은 가로 길이가 3척 5촌이고 세로 길이는 1척 2분이다. 그 위 사방으로 판자를 두르는데 앞부분은 높이가 1척 3촌이고 뒷부분은 1척이다. 바퀴는 통나무로 된 것이 네 개 달려있다. 동차를 사용하는 경우 사각(射角)은 침목을 앞으로 밀거나 끌어 당겨서 조절하였다.
동차 이외의 화기 거치 방법을 살펴보면 불랑기는 《기효신서(紀效新書)》에 그려진 것처럼 삼각 포가(砲架)에 얹어 사격하거나 화차에 얹어 이동하면서 사격하였다. 황자총통은 포신 아래에 정철(正鐵)이라는 뾰족한 고정 장치가 있어서 이를 나무 받침에 꽂고 뒤쪽의 모병(冒柄)에 나무자루를 끼워 사격하였다. 포신의 좌우에 포이(砲耳)가 달려있는 홍이포와 별황자총통은 서양식 포차(砲車)에 얹거나 고정식 기가(機架)에 얹어 사격하였다. 그 밖의 소형 총통은 대부분 총통 뒷쪽에 있는 자루에 나무 막대를 끼워서 들고 발사하였다
비진천뢰(飛震天雷)
비진천뢰(飛震天雷), 혹은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는 우리나라에서 창안된 포탄으로서 완구(碗口)에 담아 발사하면 멀리 날아가 땅에 떨어진 후 폭발하여 그 안에 있는 철편과 돌이 사방으로 날아간다. 임진왜란 때 화포장 이장손(李長孫)이 만들어서 경주성 탈환 전투에서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그 구체적인 제작 방법은 본문에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있다.
'무쇠를 부어 공처럼 둥글게 그 몸체를 만드는데 그 무게는 120근이고 직경은 1척 6촌 5분이다. 위쪽에 네모난 구멍이 있는데 직경이 3촌 8분이다. 화약은 5근을 넣으며 10량 무게의 쇠 덮개가 있다. 포구 안팎으로 실을 늘어뜨린다. 마디가 하나인 대나무를 포의 바닥에 놓고 안쪽의 실에 맞추어 자르고 대나무에 약선 구멍을 뚫는다. (목곡(木谷)을 만들기 위해) 자작나무에 톱으로 골을 파는데 빨리 터지게 하려면 10 바퀴를, 느리게 터지게 하려면 15 바퀴를 파며 느리고 빠르게 터지는 것이 이에 달렸다. 중약선(中藥線) 3척으로 골을 따라 두루 감고 죽통안에 넣는다. 약선의 양 끝 중에서 한 쪽은 죽통의 심지 구멍에 꽂고 다른 하나는 죽통 위로 내어 포구 밖으로 내놓는다. 죽통의 바깥쪽과 포구의 안쪽의 실에 행여 틈이 있거든 종이로 메워 틈이 없도록 한다. 연후에 덮개로 그 구멍을 단단히 막고 죽통 위의 도화선을 덮개에 나있는 구멍으로 뽑아내되 두치가 넘지 않게 한다. 화약 5근을 가루로 만들어 (비진천뢰) 허리의 구멍으로 흘려 넣어 사이사이를 모두 채운 뒤 격목으로 그 구멍을 막고 중완구(中碗口)에 재어 쏜 즉 300보를 간다.“
비진천뢰가 이렇듯 뛰어난 무기인데도 불구하고 임진왜란 이후 거의 사용된 흔적이 없다는 점은 의아스럽다. 원문에는 비진천뢰가 “잠적지화구(賺敵之火具)”, 즉 적을 속이는 화구라고 하였는데 이는 비진천뢰의 구조와 성능을 잘 아는 적에게는 비진천뢰 공격이 별 효과가 없었다는 의미가 아닌가 생각된다.
단석(團石), 수철연의환(水鐵鉛衣丸)
단석(團石)은 둥글게 깎은 수마석(水磨石)이며 완구로 발사하는 투사체이다. 가장 큰 별대완구단석(別大碗口團石)은 무게가 120근에 달하며 대완구(大碗口) 단석과 중완구(中碗口) 단석은 각각 45근과 35근이다.
일반 총통의 경우 구경이 작아서 부피가 큰 단석을 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단석을 발사하면 거친 돌 표면에 의하여 포강이 크게 마모된다. 따라서 총통에는 단석 대신 수철연의환(水鐵鉛衣丸)과 연환(鉛丸)을 사용하였다. 수철연의환은 글자 그대로 무쇠 주물로 만들고 그 겉에 납을 씌운 포탄이다. 납을 씌우면 총통의 구경에 맞도록 마무리 가공을 하기에 용이하고 포강의 마모도 줄어든다. 연환(鉛丸)은 납을 녹여 주물한 소형 탄환이다.
천자총통으로 발사하는 수철연의환은 직경이 3촌 6분이고 무게가 13근이며 지자총통에 사용되는 것은 직경이 2촌 9분에 무게가 8근이다. 현자총통과 황자총통에는 연환을 사용하며 각각 직경 1촌 7분, 무게 1근 13량의 포탄과 직경 1촌 3분, 무게 13량(?)의 탄환을 사용한고 하였다.
조총(鳥銃)
조총(鳥銃)은 1543년 포르투갈 상인을 통해 일본에 전래된 뒤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우리나라에 전해졌다. 우리나라 최초의 조총은 임란 발발 다음 해인 1593년 9월에 이순신 장군이 제작하여 보급한 것이다.
종래의 우리나라 소화기(小火器)와 비교해 볼 때 조총은 총열이 길어서 사거리가 길고 적중률이 높으며 단조로 제작된 총열은 종전의 주조로 만든 총열에 비해서 인장강도가 높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염초(焰硝)가 많이 함유된 고성능 화약을 대량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또한 종전의 화기는 약선을 사용하므로 발사가 더디고 조준이 어려웠으나 조총은 불이 붙은 화승을 용두(龍頭)로 화문(火門)에 접하게 하여 순간적으로 발사하므로 사격이 신속하고 정확하였다.
우리나라가 조총을 제작하기 시작한 뒤 조총의 종류도 점차 다양해지는데, 주로 성에 거치하여 사용하는 대형 조총인 대조총(大鳥銃)과 천보를 날아간다는 천보총(千步銃), 말 위에서 쏠 수 있는 짧은 조총인 마상총(馬上銃)등이 개발되었다. 특히 외세에 대항하여 싸우던 조선 말기에는 서양의 라이플에 대적하기 위해서 천보총이 야전에서 폭 넓게 사용되었다. 그 밖에도 장조총(長鳥銃), 중장조총(中長鳥銃), 별조총(別鳥銃), 동사대조총(銅絲大鳥銃), 흑골조총(黑骨鳥銃)등의 이름이 전하지만 그 정확한 실체는 확인되지 않는다.
비몽포(飛礞砲)
비몽포(飛礞砲)는 독가스탄을 발사하는 화포인데, 모포(母砲) 안에 원통형의 자포(子砲)를 넣어 발사하면 멀리 날아가 땅에 떨어진 뒤 독가스가 터져 나온다. 모포의 길이는 1척 5촌 5분이고 그 아래에 나무자루는 6척 4촌 2분이다. 자포의 길이는 3촌 9분이고 직경은 2촌 4분이다.
자포 안에는 독약과 화약을 넣는데 독약은 천오(川烏), 초오(草烏), 남성(南星), 반하(半夏), 낭독(狼毒) 사매(蛇埋), 난골초(爛骨草), 금정비(金頂砒), 단홉(丹皀), 파상(巴霜), 철각비(鐵脚砒), 은수(銀銹), 건칠(乾漆), 건분(乾糞), 송향애(松香艾), 내웅(肭雄), 황금(黃金), 한석(汗石), 황초화(黃硝火), 유화(硫火), 삼회(杉灰), 유회(柳灰), 반묘(斑猫), 단장초(斷腸草), 연고(煙膏), 하마유(蝦蟆油), 골회(骨灰), 주사(走砂), 유황(硫黃), 세신(細辛), 감수(甘遂), 망사(䃃砂), 강분(薑粉), 동청(銅靑)을 섞어 만든다.
현재 육군박물관에 비몽포 실물 한 점이 남아있다. 하지만 여타 기록에서 비몽포의 제작과 사용 흔적이 거의 없는 것으로 보아 널리 사용되지는 않은 듯하다.
찬혈비사신무통(鑽穴飛砂神霧筒)
찬혈비사신무통(鑽穴飛砂神霧筒)은 바람을 이용하여 잿가루와 독성 분말을 살포하는 무기이다. 대나무로 만든 통의 길이는 3척이고 직경은 3촌 7분이다. 그 아래에는 4척의 나무 자루가 달려있다. 통 안에는 각종 독성 물질을 넣는데, 회(灰), 주사(走砂), 철각비(鐵脚砒), 유황(硫黃), 남성(南星), 반하(半夏), 세신(細辛), 감수(甘遂), 천오(川烏), 초오(草烏), 망사(䃃砂), 단홉(丹皀), 파상(巴霜), 반묘(斑猫), 강분(薑粉), 동청(銅靑)을 가루로 만들어 넣는다.
이를 사용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있다.
“보리 20근을 취하여 노구솥에 반쯤 익도록 볶고 그 아래에 군약(羣藥)을 마찬가지로 볶아서 취하여 사용한다. 병사가 적과 근접하여 싸울 때 가죽 자루에 이를 가득 담아 양손에 들고 등에는 찬혈비사신무통을 숨겨 지닌다. 순풍이 불어 이 것이 날아가고 적이 이 모래에 닿으면 오공으로 모래가 파고 들어가 구멍이 뚫려 피가 솟고 골수가 흐르며 서있는 자는 곧 정신이 혼미해져 땅에 쓰러지고 두 눈은 먼다.“
임진왜란 때 행주산성 전투에서 왜군이 목책을 뚫고 진입해 들어오자 처영(處英)이 거느리는 1천의 승군(僧軍)은 고운 재를 담은 주머니를 터트려 왜군들이 제대로 눈을 뜨지 못하도록 하고 백병전을 벌여 물리쳤다. 이 재 주머니 전술을 보다 정교화하여 잿가루에 독약 등을 첨가한 것이 바로 찬혈비사신무통이다.
목통(木筒)
목통(木筒)은 조선 초기의 산화포통(散火砲筒), 질려포통(蒺藜砲筒), 그리고 송(宋)나라와 금(金)나라가 사용한 진천뢰(震天雷)와 같은 종류의 폭발물이다. 이런 종류의 폭탄은 주로 성을 방어하는데 사용되었다. 하지만 《융원필비》에서는 일종의 지뢰 매설 방법인 매화법(埋火法) 다음에 목통을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매설용 지뢰로서 목통을 소개하고 있는 듯하다.
목통의 직경(直徑)은 1척 5분이고 입구의 직경은 6촌 5분이다. 그 안에는 소약(巢藥) 5냥과 능철(菱鐵) 50개, 지화(枝火)와 소발화(小發火)를 묶은 것 81개를 넣고 마른 쑥잎으로 빈 곳을 채운다. 속을 다 채운 후에는 뚜껑을 덮고 종이로 4 ~ 5번을 싸며 약선 구멍은 두 개를 뚫는다. 종합적으로 볼 때 목통(木筒)은 조선 초기의 질려포통(蒺藜砲筒)과 크기 및 제작 방법이 거의 동일하다.
화차(火車)
고려시대부터 우리나라는 기병 중심의 북방 이민족에 대항하기 위하여 전차(戰車)를 제작하여 사용하였다. 이 전차는 고대의 말이 끄는 전차와는 달리 병사들이 인력으로 밀고 끌어서 기동을 하며 적 기병의 돌격을 저지하고 아군 보병을 엄호하는 역할을 하였다.
거란이 80만 대군으로 고려를 침략하였을 때 고려군은 안융진(安戎鎭) 전투에서 수레의 앞쪽에 창검을 꽂은 검차(劍車)로 거란의 기병을 저지하는데 성공하였으며 이 승리를 바탕으로 서희(徐熙)의 담판이 성사되었다. 조선 초기에 화약 무기가 전래되자 전차에 화약무기를 장착한 화차(火車)가 제작되기 시작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이 문종(文宗) 화차이다. 문종이 제작한 이 화차는 수레 위에 사전총통(四箭銃筒) 50개를 장착하여 세전(細箭) 200발을 발사하거나 중신기전(中神機箭) 100개를 발사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었다.
산지(山地)가 많고 길이 협소하며 수성전을 중시하던 조선에서 화차나 전차의 생산은 그 후로 그리 활발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승자총통(勝字銃筒)을 탑재한 화차가 사용되었고 후금(後金)이 등장한 이후에는 금나라의 기병을 저지할 목적으로 전차와 화차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화차의 운용 전술에 있어서, 화차 뒤에 숨어서 방어전을 펼치고 승세를 탔을 때 보병과 기병이 출격하는 종래의 수동적인 전술을 벗어나서 적극적으로 수레를 밀며 전진하여 화기로써 적을 공격하는 새로운 전술이 개발되었다.
《융원필비》의 화차는 숙종(肅宗) 1년에 훈련도감에서 만든 것이다. 이 화차는 문종 화차의 사전총통 대신에 조총을 10개씩 5열로 배열하여 총 50개의 조총을 탑재하였으며 화차의 좌우에 나무 방패를 설치하고 그 아래로는 소가죽을 드리워서 병사를 보호하였다. 전차의 지붕에는 소가죽을 씌우고 여기에 기름을 먹여 비가 와도 조총을 발사할 수 있도록 하였다. 화차의 좌우에는 호랑이가 그려진 괵기(虢旗)를 세우는데 이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적 기병이 뛰어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목화수차(木火獸車)
목화수차(木火獸車)는 화차(火車)의 일종이지만 차진(車陣)의 위엄을 보이고 적에게 공포심을 주기 위하여 사자, 호랑이, 표범 등의 모습을 나무로 조각하여 화차 위에 설치하고 그 입에서 불을 뿜도록 만든 것이다. 화차방진도(火車方陣圖)를 보면 목화수차는 진문(陣門)에만 배치한다.
목화수차의 짐승 조각 안에는 화기(火器)를 설치하고 짐승의 입을 통하여 신화(神火), 독화(毒火), 법화(法火), 비화(飛火), 열화(烈火)가 발사되도록 하였으며 그 아래의 목판에는 조총을 다섯 자루씩 삼층으로 배열하여 발사한다.
화창(火槍)
이화창(梨花槍), 화창(火槍), 소일와창(小一窩槍), 신기만승화룡도(神機萬勝火龍刀)는 모두 창날 옆에 화구(火具)를 달아 3 ~ 4장 거리로 근접한 적에게 화염과 독무를 발사한 뒤 이를 다시 창으로 사용하는 장병기이다. 《무예도보통지》에는 '이화창(梨花槍)이란 이화(梨花) 하나를 장창의 끝에 매달았다가 적과 맞닥뜨려 한 발을 수 장(丈)이나 멀리 나가게 쏠 수 있다. 사람이 그 약에 손대면 즉사한다.“고 하였다. 화창(火槍)은 원래 송(宋)나라 시대에 처음 등장한 것인데 사거리가 짧고 한두 발 밖에 발사할 수 없는 무기이지만 창으로 겸용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계속 사용되었다. 척계광(戚繼光)의 《연병실기(練兵實紀)》에는 한 대(隊)의 병사중 두 명이 장병쾌창수(長兵快槍手)이며 이들은 나무 자루가 달린 총통에 연환(鉛丸) 20개를 넣어 발사한 뒤 이를 곤봉으로 사용한다고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후기까지도 화창이 계속 사용되었는데 《만기요람》을 보면 훈련도감에 이화창(梨花槍) 13자루가 소장되어있고 국왕 앞에서 무예를 시험하는 시예(試藝)에 이화창이 포함되어있다. 금위영에는 정철일와봉총(正鐵一窩蜂銃), 유철일와봉총(鍮鐵一窩蜂銃)이 있는데 이는 화구를 금속으로 제작한 일와창(一窩槍)으로서 납탄 100개를 넣고 쏘면 400보 가까이 나간다고 한다. 그 밖에도 조선 말엽에 훈련도감에서 쾌창을 다수 제작한 기록이 있다.
화창의 화구(火具)는 주로 종이를 말아서 만들며 그 안에 화약과 독약을 담는다. 다만 신기만승화룡도(神機萬勝火龍刀)는 구리 주물이나 철 단조로 화구(火具)를 만들고 그 안에 염초(焰硝), 유황(硫黃), 삼회(杉灰), 주사(硃砂), 수은(水銀)을 입힌 연환(鉛丸)등을 넣고 쏘므로 그 위력이 크다.
창(槍)
《무비지》에는 앞서 설명한 화창 3종류와 무차(武叉), 삼릉창(三稜槍), 사모(蛇矛), 용도창(龍刀槍), 환자창(環子槍), 아홍창(鴉項槍), 마병창(馬兵槍)등 모두 10 가지의 창(槍)이 소개되어 있고 도(刀)로는 신기만승화룡도(神機萬勝火龍刀)와 도도(掉刀) 두 가지가 소개되어 있다. 이들을 간략히 살펴보면 무차는 두개의 곁날이 각각 위와 아래로 뻗은 갈래창이며 삼릉창는 창날의 단면이 삼각형이고 각각의 면에 혈조가 있는 찌르기 전용 창이다.
사모는 장비의 장팔사모와 같이 파형(波形) 날이 있어서 경무장의 적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는 무기이다. 용도창은 창날 아래에 고(股)라고 하는 가지가 달려있다. 환자창(環子槍), 아홍창(鴉項槍), 마병창(馬兵槍)은 양날의 긴 창날이 달려있어서 베기 공격에 적합한 창이다. 도도(掉刀)는 송(宋)의 《무경총요》에 나오는 장병기로서 날의 길이가 가장 길다. 《융원필비의》 창은 모두 《무비지》의 내용을 그대로 옯긴 것이므로 조선 후기에 이들이 모두 실제로 제작되고 사용되었는 여부는 불확실하다. 하지만 만기요람을 보면 용호영에 능인창(稜刃槍)이 있는데 이는 삼릉창(三稜槍)과 같은 무기로 보이며 그 밖에도 마병창(馬兵槍)이나 무차(武叉)와 유사한 유물들이 확인된다. 따라서 이들 《무비지》의 장병기가 대량으로 제작 사용되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적어도 소량이 제작되거나 일부가 계속 보존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조선 후기에는 화기가 발달하고 농성전, 혹은 화차를 이용한 야전 전투가 중시되면서 창의 중요성은 상대적으로 낮아졌다. 《만기요람》에 나오는 병기의 종류별 수량을 중심으로 판단해 보건데 실제로 전투에서 운용된 장병기는 죽절창(竹節槍)과 협도(挾刀) 요구창(腰鉤槍), 난후창(攔後槍) 정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죽절창은 《무예도보통지》의 죽장창(竹長槍)이나 낭선(狼筅)과 유사한 무기로 보이며 요구창은 창날의 허리에 여러개의 갈고리가 달린 대 기병용, 혹은 수전용 창이다. 난후창은 어떤 형태의 창인지가 분명하지 않으나 뒤쪽에 칸막이가 있는 창(槍)이라는 의미이므로 창날의 아래에 석반(錫盤)이 달린 장창(長槍)이 아닌가 생각된다
환도(環刀)
이 그림은 조선 후기에 오군영에서 사용하였던 환도(環刀)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칼날은 거의 직선에 가까우며 칼 끝에서만 약간 휘임이 있다. 칼자루는 가죽끈으로 묶었는데 묶는 방식은 일본식이지만 간격을 넓게 하여 네 번정도만 감았다. 둥근 코등이의 한 쪽에는 구멍이 하나 뚫려있는데 이는 칼을 잠그는 비녀장을 끼우기 위한 구멍이다. 칼집에는 칼집고리를 달기 위한 가락지가 두개 달려있으며 이들은 횡철(橫鐵)로 연결되어있다. 전해지는 유물을 통해서 보건데 칼집은 대부분 한지를 바르고 그 위에 흑칠을 하였으며 간혹 마피(馬皮)나 어피(魚皮), 우피(牛皮), 화피(樺皮)를 씌우기도 하였다.
원문에 환도라는 이름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 칼을 환(環)이라고 부르는데 칼집이 있고 고리[環]를 달았으며 고리[環]에 끈을 달아 패용(佩用)한다. 그런고로 병지에는 환도를 요도(腰刀)라고 칭하였으나 실은 검(劍)이다.“라고 하였다.
한편 도(刀)와 검(劍)의 구분에 대해서 저자는 나름대로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피력하고 있다. “옛날에는 도(刀)와 검(劍)이 제도가 다르고 부르는 이름도 달랐다. 도는 자루가 길고 칼날과 모철(冒鐵)이 있다. 검은 자루가 짧고 날이 길며 칼집이 있다. 지금의 사람들은 자루와 날의 길고 짧음과 고리와 칼집의 있고 없음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도라고 부른다. 하지만 도는 패용(佩用)하는 병장기가 아니며 창(槍)과 같은 종류임이 명백하다.” 하지만 이는 충분한 근거가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도(刀)는 원래 고대로부터 생활 도구로서 존재하였고 나중에 등장한 전투용 칼은 모두 검(劍)이라고 불렀던 것인데 당시의 검은 양날이었다. 그 뒤 외날의 전투용 도검이 등장하자 전투용 칼이라는 의미로 검(劍)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형태적으로 도(刀)와 유사하므로 도(刀)라고도 불렀던 것이므로 이 두 이름을 반드시 구분할 필요는 없겠다.
편곤(鞭棍)
《융원필비》의 편곤(鞭棍)은 편(鞭)의 길이가 6척이고 자편(子鞭)의 길이는 1척 2촌이며 마상(馬上)에서 쓴다고 하였다. 그림에 나타난 형태를 보면 고리가 하나뿐이고 굵기가 비교적 가는 점등 대부분의 특징이 《무예도보통지》의 편곤(鞭棍)과 비슷하지만 길이가 좀 더 짧다.임진왜란 때 명군으로 참전한 북방의 기마병이 이 편곤을 사용하여 왜군을 공격하니 왜군들이 모두 머리를 싸매고 도망쳤다고 한다. 편곤은 환도에 비해 공격 가능 거리가 훨씬 더 길고 투구로 무장한 적에 대해서 보다 강력한 타격을 줄 수 있었다. 게다가 칼에 비해서 익히기도 쉬웠기 때문에 조선 후기에 널리 사용되었다. 《만기요람》을 보면 훈련도감의 기병들은 환도와 함께 편곤을 반드시 휴대하였다. 그러나 화기의 성능이 개선되고 화력이 강화되자 기병에 의한 돌격 전법은 점차 사라지게 되고 편곤도 아울러 사라져가게 된다.
간각칠궁(間角漆弓), 장전(長箭), 편전(片箭), 통아(筒兒)
조선 후기로 오면 화기의 발달로 인하여 궁시(弓矢)의 중요성이 매우 낮아지게 된다. 각궁은 주 재료인 물소 뿔을 수입하여야 했고 민어 부레풀과 소 힘줄 등도 대량으로 조달하기가 어려웠으므로 제조 자체가 어려웠고 비가 오거나 날씨가 습하면 부레풀이 녹아 제 성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이에 반하여 조총은 재료의 수급이 용이하고 습기를 덜 타는 것은 물론 비가 오는 경우에도 우구(雨具)를 이용하여 발사할 수 있었다. 게다가 사거리와 관통능력 측면에서 활은 조총의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따라서 조선 후기에는 활이 조총의 보조 무기 정도로 이용되었을 뿐이다.
본문에는 활의 종류로 간각칠궁(間角漆弓) 하나만 소개되어 있고 화살은 편전(片箭)과 장전(長箭)이 소개되어 있다. 간각칠궁은 습기를 막기 위해서 활채 안쪽의 물소 뿔과 그 접합 부분에 흑칠을 한 것인데 “날이 흐리거나 비가와도 화살의 힘이 약해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통아와 편전은 조선 전기의 것과 거의 동일하며 다만 조선 전기의 통아가 손목에 감기 위한 큰 고리가 달려있었던데 반하여 조선 후기의 통아는 셋째 손가락에 걸기 위해 고리를 작게 만들었다.
한편 《융원필비》에는 소개되지 않았지만 조선 후기에는 활 만큼이나 수노(手弩)의 보급률이 높았다. 수노는 나무로 만든 탄창에 짧은 화살을 여러 개 장전하고 나무 손잡이를 당겨 연사하는 소형 노(弩)인데 임란 때 명나라에서 제갈노(諸葛弩)라는 이름으로 전해졌다. 궁술이 발달한 조선 전기에는 노(弩)가 널리 활용되지 못했지만 화기의 발달로 인하여 궁술이 쇠퇴한 조선 후기에는 숙련이 필요 없다는 장점 때문에 짧은 사거리와 낮은 관통력에도 불구하고 수노가 수성용 투사병기로 널리 사용되었다.
갑주(甲胄)
《융원필비》의 갑옷은 형태적으로는 포형(袍形) 두정갑(頭釘甲)이고 찰(札)의 재질은 가죽이다. 즉, 전체적인 형태는 두루마기와 같이 전체가 한 벌로 되어있고 앞섶이 열리는 구조이며 옻칠을 하고 서너 겹으로 겹친 가죽 조각을 갑옷의 안쪽에 황동 못으로 고정하고 의복 밖으로 드러난 황동 못을 둥글게 다듬어 장식적인 효과를 얻었다. 어깨 위에는 두 마디로 된 견철(肩鐵)이 있어서 어깨를 보호한다. 순조(純祖) 때 편찬된 《만기요람》을 보면 오군영(五軍營)의 보병들은 대부분 피갑(皮甲)을 입었으며 기병은 철갑(鐵甲)을 입었는데 그 형태는 모두 위의 그림과 같았을 것이다.
현존하는 조선시대 갑옷 유물의 대부분은 그림에 나타난 바와 같은 포형(袍形) 두정갑(頭釘甲)이다. 조선 초기에는 찰(札)에 구멍을 뚫어 서로 연결한 찰갑(札甲)이 주로 사용되었으나 찰갑은 찰을 엮는 사슴가죽 끈의 조달도 어렵거니와 한두 해가 지나면 끈이 끊어져서 자주 보수를 해야 했다. 따라서 조선 후기에는 찰을 황동 못으로 의복에 고정하는 두정갑이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조선 후기의 갑옷 유물로는 두정갑 외에 두석린(豆錫鱗) 갑옷이 여러 점 존재하는데 두석린갑은 단순히 말해서 두정갑을 뒤집어 찰을 드러내고 여기에 화려하게 색을 입힌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두석린 갑옷은 두정갑에 비해서 찰의 크기가 상당히 작기 때문에 충격의 흠수 효과는 그리 좋지 않으며 소수의 최고위 장수만이 장식적인 목적으로 이를 착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피갑(皮甲)의 방호력은 철갑(鐵甲)에 비하여 낮은 것이 사실이지만 시석(矢石)을 막는데는 효과적이었으며 철환(鐵丸)의 경우에는 어차피 철갑으로도 막기 어려웠기 때문에 조선 후기에는 피갑의 사용이 보편화되었다. 본문에서는 피갑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지금 구비하는 갑주(甲胄)는 여러 가지 색깔[方色]의 가죽으로 만들고 칠(漆)을 하였으니 견고하면서도 가벼워서 편리하다. 어찌 반드시 금빛 비늘과 자수(刺繡)로 장식하여 헛되이 사치스럽고 보기에만 아름답게 하겠는가.”
조선 후기의 투구 유물은 대부분이 그림에 나타난 투구와 같은 모습이다. 머리에 쓰는 부분인 감투는 조선 전기의 원주와 거의 같지만 앞쪽에 작은 챙이 달려있고 그 아래로 이마를 가려주는 작은 금속판이 달려있다. 투구의 좌우와 뒤쪽에는 드림이 드리워져 있는데 이는 조선 전기에 목을 둘러 보호하던 호항(護項)을 대신하는 것이다. 드림의 소재는 대부분 갑옷 소재와 동일하다. 정수리에는 삼지창 형태의 장식과 소꼬리털[毦]이 달려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