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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8월 3일, 토요일>
제7길 구봉산 길 트레킹을 마치고 무더위와 휴대폰 충전 이상으로 사진 촬영이 어려워 오늘은 여기서 트레킹을 중단해야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원거리를 나선 점 감안하여 다소 무리이지만 오후 1시 21분경 제8길 죽주산성 길 트레킹을 이어 갑니다~
화려한 고려문화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죽주산성 길은 용인의 석천리 황새울마을에서 출발하여 아기자기한 마을길을 지나서 봉황이 비상하는 형세의 아름다운 비봉산 숲길로 진입하게 되며, 비봉산 정상에서 과거 궁예의 배후지였던 죽산의 멋진 풍광을 지나면 죽주산성을 마주하게 됩니다~
죽주산성은 신라 때 내성을 쌓고, 고려 때 외성을 쌓았다고 하는데 세겹의 석성이 지금도 남아있고 보전 상태가 매우 좋은 편이며, 죽주산성을 내려오면 매산리로 접어드는데 매산리는 과거 죽산 지역으로 다양한 고려문화재 자원이 남아있어 고려문화의 향기를 진하게 느껴 볼 수 있습니다~
☆ 소요시간 : 4시간 30분 (13km)
☆ 코스 : 백암면 석천리 황새울마을 ~ 비봉산 ~ 죽주산성 ~ 매산리 석불입상 ~ 봉업사 당간지주 ~ 죽산면소재지
제8길 죽주산성 길 안내판을 배경으로 인증샷을 남기고 트레킹을 시작합니다~
초록 벼 물결이 가득한 들판을 지나며 뒤돌아 보니 저 멀리 아름다운 조비산이 보입니다~
커다란 한옥이 보이길래 잠시 들려보니 우가당(愚家堂) 이란 현판이 있지만 개인주택(?)인지 문이 굳게 닫혀 있습니다~
저 멀리 비봉산을 바라보며 내장리 하장마을 길을 지납니다~
무더위로 인한 물 부족에 대비해서 하장경로당에 잠시 들려 물 한병을 보충하고 갑니다~
하장동 느티나무 밑에서 잠시 쉬다 이 곳에서 좌측으로 마을을 통과합니다~
다시 한 동안 농로를 따라 초록 들판을 통과합니다~
차도를 건너서 지장도량 지통암 표석을 지나서 우측으로 갑니다~
가파른 차도를 오르고 전원주택들을 지나서 막다른 길의 능선 아래 명당(?)자리에 비봉산 지통암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지통암의 대웅전, 석탑 및 석불입니다~
커다란 바위에 새겨 놓은 약사마애여래불께 인사드리고, 시원한 약수물로 목을 축이고 물병도 보충하고 갑니다~
지통암 우측의 등산로를 따라 비봉산을 본격적으로 오르기 시작합니다~
두현리(하삼) 갈림길 이정표에서 비봉산 정상 방향으로 향합니다~
비봉산 정상 부위에는 죽산발전추진위원회에서 왕벗, 산벗나무 2,500주를 식재한 '사랑의 나무' 단지가 조성되어 있고 작은 돌탑도 쌓아 놓았습니다~
비봉산 정상(372m) 표석을 배경으로 인증삿을 남기고 죽산면 일대의 전경을 담아 보았습니다~
정상 쉼터를 뒤로 하고 벚꽃단지를 통과해서 죽주산성으로 향합니다~
가파른 데크길을 부지런히 내려 갑니다~
울퉁불퉁한 껍질을 가진 참나무과의 나무들이 많이 있습니다~
다시 오르막이 시작되고 매곡마을 갈림길을 지납니다~
죽주산성 성벽이 보이기 시작하고 이내 성벽길에 올랐습니다~
성벽 위로 이어진 길을 따라 성벽 가장 높은 곳으로 오릅니다~
잠시 우측 서쪽 방향으로 이어진 성벽을 바라보고 서둘러 좌측의 북문지와 포루로 내려갑니다~
탐방객들이 성벽위 너덜겅 길을 걸을 수 있도록 한 것을 보니 그 옛날 성벽을 아주 튼튼하게 쌓아 놓은 듯 합니다~
암문 수준의 작은 규모의 북문지를 지나서 한 동안 내려오다가 성벽 옆 숲속 그늘에서 잠시 작열하는 태양을 피하며 휴식을 취하고 갑니다~
동쪽 성벽 끝에 위치한 포루에 도착했습니다~
넓게 초지가 조성된 내리막 성벽길을 따라 동문으로 향합니다~
동문에 도착했는데 예상보다 규모가 적고 문루도 없습니다~
신출귀몰한 장군 신명(神明) 송문주 안내판을 일독하고 갑니다~
고려 고종 18년(1231년) 몽고가 고려를 침입하였고, 이후 40년 동안 6회에 걸쳐 고려를 유린하여 전란으로 인한 피해는 경기 지역의 피해도 매우 극심했고 안성도 예외가 아니었으며, 몽고의 침입은 참혹했지만 고려의 항쟁도 치열하였는데 최씨 무신정권은 몽고군이 지나가는 주요 길목에 방호별감을 파견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산성에 들어가 항전하도록 독려하였는데,
안성의 죽주산성 전투는 고종 23년(1236년) 3차 침입때의 일로 죽주는 개경에서 충주를 거쳐 경상도 지방으로 내려가는 영남대로에 있는 교통 및 군사적 요충지라는 중요성 때문에 몽고군을 구주성(龜州城) 전투에서 격퇴한 경험이 있는 송문주 장군을 파견하였고,
몽고군이 온갖 방법으로 공격했는데 송문주 장군은 무릇 15일 동안 몽고의 공격방법을 예측하여 방어함으로써 그들의 공격을 무력화시켜 몽고군은 죽주를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고 되돌아 갔는바, 휘하 군사들과 백성들에게 미리 알러준 공격 계획과 방어 방법이 적들이 오면 과연 그의 말과 같았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그를 신명(神明)이라 하였다고 합니다~
죽주산성 동문을 통과합니다~
죽주산성(竹州山城) (경기도 기념물 제69호)은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매산리 비봉산정에 있는 고려시대 성곽이고 둘레 1,688m, 높이 2.5m의 토석성으로 현재 석축만 남아 있으며,
죽주(竹州)는 고려시대 죽산(竹山)의 옛 지명이고 이곳은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영남길 교통의 요지로써 이성은 죽주성 또는 매봉에 쌓아 매성으로 불렀으며 몽고군과 치열한 전투가 펼쳐진 곳인데 삼국시대에 처음 축조하여 몽고침략시와 임진왜란시에 재축하였고, 성벽은 내성, 중성, 외성의 3중 구조를 갖추고 있으며, 외성만이 원래의 성벽이 남아 있고 내성과 중성은 많은 보수를 하였으나, 중성 역시 성벽의 하부구조는 아직도 삼국시대 모습이 상당 부분 남아있는데 지금도 보존상태가 좋은 편입니다~
임진왜란 직후인 1605년 조선왕조실록에는 일본 성을 모방하여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남쪽 성벽의 동쪽과 서쪽 끝의 치성(雉城) 부분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고, 성 바깥에는 도랑(마른 해자, 외항)의 흔적이 있으며, 북문 옆에는 네모진 주춧돌과 기와조각이 흩어져 있어 건물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라 후기 진성여왕 때 견훤이 이 성에 진을 치고 세력을 키웠으며, 고려시대 고종 23년인 1236년 몽고군의 제3차 침입 당시에는 방호별감 송문주가 성 안에 피난해 있던 백성들과 합세, 몽고군과 싸워 이긴 전적지이기도 하며, 조선시대에도 청주와 충주의 두 길이 만나 서울로 통하는 요지인 이 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이 강조되어 성을 보수하였으며 병자호란 때에는 여기에 진을 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안성 죽주산성 현황도와 안내판 입니다~
고려 고종 23년(1236년) 몽고군이 이 곳 죽주산성에 이르러 고려군에게 항복을 강요하면서공격하였으나 그 당시 죽주방호별감(竹州防護別監) 송문주(宋文胄) 장군이 일찌기 구주성(龜州城) 전투에서 몽고군의 공격법을 경험하여 미리 알고 대비하였기에 이길 수 있었고, 이에 백성들은 그를 '神明' 이라 불렀으며, 성안에는 송문주 장군의 전공을 기리는 사당이 있습니다~
체제공이 쓴 송장군묘비명에는 몽고군이 죽주산성을 둘러싸고 물이 떨어지길 기다리는 전술을 쓰자 장군은 "멀리서 왔으니 어찌 배고프지 않겠는가 ! 삼가 이 생선으로 군량을 삼으라" 하며, 연못의 잉어를 잡아 적에게 보냈고, 이에 크게 놀라 적이 물러가니 뒤쫓아 무찔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성의 평탄지에 대한 발굴조사결과 신라시대 집수시설 6기와 조선시대 집수시설 2기가 발견 되었는데, 이는 죽주산성이 예로부터 물이 풍부한 성이었으며, 이러한 기록이 진실임을 밝혀주는 증거가 되고 있습니다~
오누이가 힘겨루기로 쌓은 죽주산성 안내판도 있는데, 옛날 과부가 된 홀어머니 밑에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아있는 장사 남매가 살았는데 나라의 큰 전쟁시 도망쳐 나온 남동생을 그냥 용서해주기 어려워 누나가 죽산에 산성을 쌓는 내기를 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비스듬이 누워있는 석불들을 바라보고, 죽주산성 휴게소로 내려오다보니 입구에 죽주산성 표석이 있습니다~
드디어 제8길 죽주산성 길 스탬프 박스에 도착해 인증스탬핑을 마칩니다~
매산리는 옛날 한평ㆍ상구산ㆍ하구산ㆍ미륵당 마을로 이루어져 있고 과거 이 마을들을 한배미ㆍ웃지지미 ㆍ아랫지시미ㆍ미륵댕이 등으로 불리웠다는 마을 이름의 유래 및 속담 등에 대한 이야기 안내판도 있습니다~
성은사 표석과 죽산부사 우홍규 선정비 인 부사우후홍규청덕애민선정거사비(府使禹侯弘圭淸德愛民善政去思碑) 등 매산리 비석거리 비석들을 지납니다~
우홍규는 죽산부사를 거쳐 종2품인 벼슬인 경상좌병사(慶尙左兵使)를 지낸 높이 평가 받았던 인물이라고 합니다~
죽양대로를 마주하고 우측 죽산교차로 방향의 미륵당마을로 향합니다~
미륵당 문화재마을에 도착했습니다~
밥에는 바위가 들고 국에는 구렁이가 들었던 제삿밥 안내판이 있는데 미륵당 마을에서는 제사음식을 정성을 담아 차려야 한다는 취지의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미륵당 입구에 있는 '두려움을 없애고 소원을 들어주는 태평미륵' 안내판 입니다~
안성은 과거 팔만구암자가 있었다고 할 정도로 불교문화가 발전하였는데, 특히 안성 전역에 약 16구의 미륵이 분포하고 있을 정도로 미륵이 많아 미륵의 고장이라고 하며, 태평미륵이라고도 부르는 매산리석불입상의 수인(手印)을 보면 오른손은 두려움을 없애준다는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왼손은 중생의 모든 소원을 들어 준다는 여원인(與願印)을 취하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습니다~
매산리 석불입상(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7호)과 미륵당 오층석탑(향토 유적 제20호) 입니다~
매산리 석불입상은 미륵당이라 부르는 높은 누각 안에 모셔진 높이 5.6m의 보살상으로 높은 머리 위에 쓰고 있는 사각형 높은 보개(寶蓋)는 고려 초기 보살상에서부터 흔히 나타나는 모습으로 얼굴은 넙적하고 눈·코·입은 비례가 맞지 않아 독특한 인상을 주고 있는데 이러한 토속적인 얼굴은 높은 관과 더불어 보살상의 시대적인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듬직하고 우람하게 표현된 이 거구의 보살상은 개태사 석불입상(보물 제219호) 등 고려 초기 석불상들과 함께 당시의 대표적인 석조보살상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습니다~
미륵당 오층석탑은 미륵당내의 매산리석불입상 앞에 건립되어 있는 화강암 재료의 석탑으로, 현재의 위치가 원위치인지는 확실하지 않고, 규모도 작은 편 입니다~
미륵당을 돌아나와 죽산교차로 방향으로 차도와 농로를 따라 계속 직진합니다~
봉업사지(경기도 기념물 제189호)에 도착해서 안성 죽산리 봉업사지 당간지주(경기도 유형문화재 89호)를 담았습니다~
봉업사지는 죽산면 죽산리에 있는 고려시대 절터로써 봉업사(奉業寺)는 양주 회암사, 여주 고달사와 더불어 고려시대 경기도 3대 사찰로 꼽히는 거대 사찰이었는데, "고려사"에 따르면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남쪽으로 갔다가 1363년(공민왕 12년) 청주를 거쳐 올라올 때 이 절에 들러 태조의 어진(초상화)에 인사하였다고 하고, 이를 통해 봉업사가 고려시대 태조 왕건의 초상화를 봉안한 진전사원(眞殿寺院)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봉업사지는 오랫동안 죽산리사지로 알려져 오다가 1966년 경지정리 작업 시 출토된 유물의 명문을 통해 봉업사로 밝혀졌는데 이후 경기도박물관의 3차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통일신라시대의 ‘화차사(華次寺)’가 고려시대의 봉업사로 변환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청주호족 능달이 관여하였고 고려 광종 때인 963년과 967년에 중창되어 크게 성장하였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1530년 문헌에 의하면 이때에 이미 봉업사는 없어졌다고 하는데, 그러나 봉업사가 사라진 터에는 그때의 영광을 그려볼 수 있는 보물 제435호 봉업사지오층석탑, 경기도유형문화재 제78호 봉업사지삼층석탑, 제89호 봉업사지 당간지주 등의 문화재가 남아 있으며, 또한, 봉업사지 인근에는 칠장사, 관음당의 장명사지, 미륵당의 매산리사지 등이 남아있어 죽산지역의 불교문화가 융성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안성 죽산리 봉업사지 당간지주는 당간을 고정해 주는 두개의 지주대를 말하며 절 입구나 법당 앞에 세워져 있으며, 당은 부처와 보살의 공덕과 위신을 나타내는 깃발이고, 간은 당을 거는 장대로 주로 대나무나 철재로 만들었는데 예전에는 목재로 당간지주를 많이 제작한 것으로 보이나 남아 있는 목재 당간 지주는 많지 않습니다~
죽산리 당간지주는 현재 위치에 쓰러져 있던 것을 1980년에 바로 세워 복원한 것으로 높이4.7m, 폭 0.76m, 두께 0.5m로 약 1m 정도의 거리를 두고 한 쌍이 서 있는데 돌기둥의 표면이 거칠고 아무 장식이 없는 전체적으로 소박하고 간결한 형태로 보아 당간지주를 세운 시기는 안성 봉업사지 오층석탑(보물 제435호)과 같은 고려 전기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안성 봉업사지 오층석탑(보물 435호) 입니다~
봉업사터에 있는 봉업사지 오층석탑은 경기도의 대표적인 고려 전기 석탑으로 이곳 봉업사는 태조 왕건의 영정을 모신 국가에서 관할하는 사찰이었는데 조선 초기에 폐사되었고, 이곳에서 발굴된 통일신라시대 기와에 화차사(華次寺)란 명문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 초에 봉업사로 이름이 바뀐 것으로 추정됩니다~
탑의 높이는 6m로 여러 장의 크고 넓적한 돌로 지대석을 만들고 그 위에 단층기단을 두고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렸는데, 둔중한 기단부와 1층의 탑신이 유난히 타층 대비 높은 점 등에서 고려 시대 석탑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죽산교차로에 늠름하게 서있는 신명 송문주 장군 동상에 들렸다 봉업사지로 되돌아와서 농로를 따라 죽산면소재지로 향합니다~
농로를 따라 면소재지로 향하는데 한 쪽에서는 다자란 대파를 수확하고 한 쪽에선 작은 파 모종을 심고 있습니다~
매곡마을 표석이 있는 마을 입구에서 좌측 농로로 갑니다~
트레킹 종점 0.2km 전방 이정목을 지나서 바로 죽산터미널 사거리에 도착 후 다소 먼거리에 위치하지만 죽산면사무소에도 잠시 들렀습니다~
황새울마을을 출발하여 약 4시간 33분이 소요된 오후 5시 54분 경 죽산터미널에 무사히 도착하며 오늘의 행복한 제8길 죽주산성 길 트레킹을 마쳤습니다~
죽산터미널에서 오후 6시 정각 발 경일여객 1329번 시외버스를 타고 서울 남부터미널로 향합니다~
죽주산성길에서 만난 꽃과 버섯들 입니다~
첫댓글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요즘 ..
무더위에 수고 많으셨어요 덕분에 님의 후기를 따라가봅니다.
물안개님 ! 정말 무더운 날씨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루 걷고나서 다음날은 열을 식히느라 에어컨 속에서 보냈습니다~
격려해주심에 깊은 감사드립니다 ~
항상 건강 유의하시며 행복한 길나섬 하시길 기원드립니다~
7길과 8길을 같은날 걸으셨다니 초행길을 더운데 수고 많으셨습니다.
7길도 힘들던데 8길까지 걸으시다니요.
저는 아직 8길은 안가봐서 모르겠지만 대단하십니다.
이제 9,10 두개길만을 남겨두셨군요.
거리상 먼거리에 있어 접근이 다소 힘드시겠습니다.
하지만 남은길도 무사히 완주 하시기 바라며
폭염에 건강 조심하세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가곡님! 영남길은 오가는 길이 멀어서 한번 길 떠나면 무리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8길은 7길에 비해서 훨씬 수월한 편입니다~
오늘도 영남길 9, 10길을 걸어 완주를 마무리하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서둘렀지만 10코스에서 무더위로 쉬는 시간이 더 필요했고 트레킹을 마치고 10코스 종점에서 귀가하는 것도 버스는 이용이 어렵고 택시도 충북지역이라 배차가 잘 안되어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항상 세심한 격려를 아끼지 않으심에 깊은 감사드립니다 ~
건강하고 행복하게 여름 나시길 기원드립니다~
수고하셨읍니다. santajeon 님.
계속되는 더운날씨에 비봉산을 넘으시며 땀을 많이 흘리셨죠
그래도 시원한 숲길이 있어 제 8길은 더위를 피할수있었고
가장 많은 문화유적등 볼거리가 많아 더위를 식힐수 있을듯 싶네요.
앞으로 남은 9-10길이 더위와의 싸움인거 아시죠.
끝까지 건강 조심하시고 무사 완주 하시기 바랍니다.
최윤영(연산동)님 ! 7코스를 걷고 무더운 날씨로 다소 지쳤턴터라 지통암을 오르는 길과 죽주산성 길을 내려올 때 함들었습니다~
죽산향교를 들리지 못한 것이 조금 아쉽지만, 미륵담 마을을 지나며 여러 문화재를 즐겁게 보고 왔습니다~
응원해 주신 덕분에 어제 9, 10길을 조금 무리지만 무사히 걷고 완주를 마쳤습니다~
항상 격려해주심에 깊은 감사드립니다 ~
무더위에 건강 유의하시며 안전한 발걸음 이어 가시길 기원드립니다 ~
무더운 날씨에 영남길마저 완주에 나서신
산타전님 수고 많으십니다. 언제한번 만나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홧팅~.
우분트님 ! 영남길 도보 시작 후 차일피일 미루다 영남길 완주를 무더위속에 마무리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뵌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요즘 평화누리길 3차 완주를 시작하신 듯합니다~
저도 2차 완주 도전중으로 조만간 뵙고 인사드릴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막바지 무더위에 건강 유의하시길 기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