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로방(福爐房) / 여상현
고린 자반 토막 퀴퀴한 길목짝
저마다 고달픈 노염인 양 뿜어대는 자욱한 담배연기
복로방 유난히 낮은 천정이
지친 나그네들의 가슴을 누른다
자꾸만 흐려지는 남포등 심지
돋구며 돋구며 갈(渴)한 하품 속에
다시금 내일의 이정(里程)을 헤아리며 감발을 푼다
돌아앉아서 부스럭대던 웬 중년 나그네
은전(銀錢) 소리를 내고 저 혼자 놀라 주춤하고
수잠을 자던 황아장수 영감도 덩달아 놀란다
목침을 못 벤 불평은 초저녁부터 코들이 들고 일어났고
「감돌」을 꺼내 보이며 입심껏 떠들던 영감님
긁적긁적 샤쓰 밑에서 금을 파는 게다
「대한독립」을 이러니저러니
큰 기침 섞어가며 떠들던 노인도
상노아이 못 데리고 온 것이 무척 뉘우치는 듯
안절부절못하다가 새우잠이 들었다
죽창(竹窓)을 밝히는 뜰 앞 장명등
방은 해안 가까운 해만(海灣)처럼 어수선한데
외입쟁이 애꾸눈이 토산(土産) 망아지의
이따금 구르는 발굽 소리가 자칫 외로웁구나
이윽고 머나먼 마을에 닭 우는 소리
지새는 방을 털고 일어나 내 아직도 천릿길을 가야 하는가
- 『칠면조』, 정음사, 1947. (일부 현대어 표기로 바꿈)
감상 - 여상현 시인(필명 여성야)은 1914년, 전남 화순에서 태어났다. 고창고등보통학교에 이어 1939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했다. 1947년 시집 『칠면조』를 냈으니, 함경도 경성 출신의 동갑내기 이용악 시인이 『오랑캐꽃』(1947)을 출간하고 다섯 달 이후의 일이다. 시집에 수록된 이용악 시인의 「전라도 가시내」와 여상현의 「영산강」은 소재도 그러하지만 민족의 역사, 한과 정서를 아우르는 작품으로 주목을 요한다. 이용악과 여상현은 해방 이후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해서 활동하다가 6.25 전쟁 도중 월북 혹은 납북되고 만다. 이용악은 정지용, 백석과 함께 한국문학의 중심으로 이미 자리매김이 된 듯한 인상을 주지만 여상현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아직 부족한 감이 있어 보인다.
여상현의 「복노방(福爐房)」은 봉놋방의 오기일지도 모르겠다. 봉놋방은 여러 나그네가 한데 모여 자는, 주막집의 가장 큰 방을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굳이 한자 표기로 된 것은 1937년 발표된 이태준 소설 『복덕방(福德房)』에서 보듯 마을 대소사를 논하고 부동산 매매까지 처리하는 장소로 복덕방이란 단어가 이미 사용되고 있었으니 그런 시류에 맞춰 말을 만들어 쓴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 시의 눈에 띄는 특징은 당시 봉놋방 정경을 한 편의 풍속도처럼 보여주는 데 있다. 정물화된 그런 느낌이 아니라 김홍도 화가의 풍속화처럼 활기와 유머가 넘친다. 골목 주막방에 자반 냄새, 담배 냄새, 발 냄새가 섞여 한껏 구린 중에 누가 실수로 은전 소리를 낸다. 은전 소리를 낸 사람도 듣는 사람도 깜짝 놀라는 장면이 웃음을 준다. 은전을 들킨 나그네는 불안한 마음에 상노아이라도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광석을 의미하는 “감돌” 역시 1930년대 이후 식민지 금광시대의 열풍을 지나온 시대상을 반영한다.
또 한편 해방 이후의 어수선한 시기를 맞아, 나라의 갈 길을 걱정하는 나그네의 목소리도 성량을 높여간다. 시인의 「보리씨를 뿌리며」를 보면, 1946년 대구에서 시작된 10월 항쟁과 그 이후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이것도 해방 덕이랍니까/ 알알이 샅샅이 털어가려는 바람에/ 동네방네 고을 고을마다/ 항쟁의 불길이 터지고야 말았소/ 쌀은 못 먹으니 보리로나 주림을 여이려는 것이었소”하는 대화가 이어지며 봉놋방 열기도 뜨거웠을 성싶은 것이다.
「복노방(福爐房)」의 마지막 두 구절에선 이육사 시인의 「광야」가 오버랩된다. 이육사 시인 사후인 1945년 발표된 「광야」엔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는 서두와 함께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을 기다리는 시인의 육성이 담겼다. “천릿길”을 마저 가려는 여상현 시인한테서 육사의 저항 정신이 불쑥 느껴진 것인데 이런 말이 근거를 갖거나 아니면 교정되기 위해서라도 여상현 시인의 삶과 문학에 대한 연구가 폭넓게 이루어지기를 빈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