招魂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 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빗겨 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招魂은 전통 喪禮 가운데 첫번째 단계로서 죽은 사람의 혼을 세 번 불러 그의 죽음을 확인하는 의식이다. 소리쳐 부르는 목적은 죽은 자를 깨우기 위해서라지만, 모두 다 그것이 불가능한 줄을 알기 때문에 초혼 의식은 더욱 애절하다. 김소월의 시 <招魂> 역시 죽은 자의 혼령을 ‘부르다가 내가 죽을’ 만큼 처절한 시어로 절규하고 있다. 이 시는 다양한 운율의 형식을 보여주고 있어 정형시를 공부할 때 가장 자주 인용되기도 한다. <招魂>은 1925년에 출간된 시집 「진달래꽃」에 수록되어 있다.
<招魂>은 애달픈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소월은 10대 초 세 살 연상인 한동네 처자 오순과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반대로 두 사람의 사랑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 소월은 부친이 왜놈들에게 맞아 실성하는 바람에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 손에서 자랐다. 열네살 되던 해, 소월은 할아버지의 중매로 다른 처자와 혼인했다. 5년 뒤 오순도 晩婚을 했지만 결혼하자마자 남편의 모진 학대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아내와 소월의 관계를 알고 시기했던 것이다. 오순은 3년을 버틴 끝에 온몸이 쇠꼬챙이처럼 말라 죽었다. 부음을 듣고 단숨에 써내려간 시가 <招魂>이었다.
소월 김정식은 1902년 평안북도 구성군에서 태어나 할아버지가 광산업을 하는 곽산군에서 자랐다. 광산을 경영하고 있던 할아버지는 아들이 정신줄을 놓자 손자를 데려다 직접 키웠다. 어린 소월은 외숙모 계희영으로부터 수많은 전래동화를 전해 들으면서 시심이 쑥쑥 자라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는 <진달래꽃>도 외숙모를 위해 지은 시다. 계희영은 남편으로부터 소박을 맞았는데, 그런 남편을 원망하기는커녕 여전히 그리워하고 있었다. 소월은 외숙모의 그러한 순정을 <진달래꽃>에 담아냈던 것이다.
진달래꽃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 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소월은 곽산에서 소학교를 마친 뒤 1915년 이웃 정주에 있는 오산중학교로 진학했다. 여기서 정신적인 스승 조만식과 문학 스승 안서 김억을 만났다. 소월은 곽산 출신인 안서로부터 詩作 지도를 받았으며, 1920년에는 안서의 추천으로 「創造」誌를 통해 등단했다. 안서는 서구문학을 우리나라에 소개하는 등 문학 분야에 많은 업적을 남겼는데, 6‧25 때 월북하여 평화통일촉진위원회 중앙위원을 역임하다가 숙청되었다. 1925년 소월은 살아생전 유일한 시집이 되는 「진달래꽃」을 출간했다. 소월을 대표하는 주옥같은 시들이 10대부터 20대 초반까지 다 씌어졌다는 얘기다. 그러고도 그의 노트에는 수많은 유작이 남아 死後에 동료들에 의해 빛을 보게 된다.
설립자 이승훈이 3‧1운동 때 민족대표의 한 사람이었다는 이유로 오산중학교가 폐교되자 소월은 상경하여 배재중학교에 편입했다. 이승훈은 인재를 키우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오산학교를 설립한 교육자‧언론인‧사업가‧민족운동가였다. 배재중학교를 졸업한 소월은 왜국으로 건너가 동경대학교 상과대학에 입학했지만, 그해 가을에 일어난 관동대지진 때 왜놈들이 조선인들을 대거 학살하자 학교고 뭐고 서둘러 귀국해버렸다. 소월은 서울에서 문예지 「靈臺」 동인으로 활동하는 등 본격적으로 詩作에 전념했다.
시가 한창 원숙해질 즈음, 소월은 할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곽산으로 내려가 광산 일을 돕기 시작했다. 그를 나락으로 이끈 잘못된 선택이었다. 광산은 소월이 오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이내 탄맥이 끊겨 폐광되었다. 소월은 처가가 있는 구산으로 내려가 동아일보 지국을 차렸지만 이내 실패하면서 가난에 찌들기 시작했다. 실의에 잠긴 소월이 술독에 빠지자 친구들이 하나둘 떨어져 나갔고 급기야 친척들도 외면하기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병인 류머티즘까지 악화되어 소월을 코너로 몰았다. 33세 때인 1934년 12월 24일, 소월은 아편을 있는 대로 털어넣고 세상을 하직했다. 그의 詩才를 생각하면 참으로 애석한 일이요 국민적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시인으로서 우리에게 엄청난 영감과 위안을 주었으면서도 막상 자신의 인생은 너무나 가늘고 짧게 끝나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는 것이다.
소월이 타계한 지 43년 만인 1977년, 서울의 한 고서적상에서 소월의 ‘詩作 노트’가 발견되었다. 문단이 시끌시끌해진 대사건이었다. 더욱 놀라운 일은, 그 가운데 상당수가 소월의 스승 안서 김억의 명의로 이미 발표된 시였다는 점이었다. 시인들뿐만 아니라 문학계 전체가 큰 충격에 빠졌다. 소월이 서둘러 낙향한 것도 어쩌면 스승에 대한 배신감과 함께, 서울의 시단에는 더 이상 설 땅이 없다는 절망감 때문은 아니었을까? 아무리 좋은 시를 써도 안서가 요청하면 내주지 않을 수 없었을 터이니 말이다.
남산 순환도로에는 ‘소월로’라는 정겨운 도로명이 붙여져 있고 소월시비도 조성되어 있다. 시비는 그와 연고가 없는 다른 지역에도 많이 조성되어 있다. 그만큼 소월의 시를 사랑하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리라. 1986년 한 음악학자가 발표한 논문에 의하면, 우리나라 가곡의 20% 내외가 소월 시를 가사로 채택했다고 한다. 널리 알려져 있는 것만 해도 <진달래꽃>을 필두로 <엄마야 누나야><먼 훗날><산유화><접동새><가는 길><초혼><예전엔 미처 몰랐어요><못 잊어> 등 귀에 친숙한 노래들이다. 그림 공부를 위해 가요계를 떠났다가 미술대학 교수를 정년퇴임하고 37년 만에 가요계로 돌아온 정미조도 이화여대 재학 중 소월 시 <개여울>을 노래하여 폭발적인 인기를 누린 바 있다.
개여울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홀로이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파릇한 풀포기가 돋아나오고
잔물이 봄바람에 헤적일 때에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시던
그런 약속이 있었겠지요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서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가도 아주 가심은 않노라심은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
첫댓글 비가와서 먼지도 씻겨 간 새로 다시 산뜻한 이 아침에
상큼한 詩茶 한 잔 한 듯하네.
소월 시인처럼 아름다운 그대의 이 글.....!
상큼한 茶 한 잔이로세.
기 알고 있는 내용도 있지만 소월시인에 대한 자세한 정보 잘 읽었네. 남작가 고마우이.
친구들에게 많은 지식과 정보를 깨우쳐 주는 친구께 항상 존경과 고마움을 느키지만 직접 따뜻한 차 한잔도 대접하지 못하는 자신이 부끄럽기 한량없네. 너그러이 봐 주시게나. 언제 한번 기회를 기다려 보겠네. 미안하고 부끄럽네.....
기억은 가마득하지만 중학교때 진달래를 가까이하고 친숙해 젔는데 이런 세세한 부분도 이제야 알게 되네
고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