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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시 33:1-22
1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들이 마땅히 할 바로다
2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고 열 줄 비파로 찬송할지어다
3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아름답게 연주할지어다
4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그가 행하시는 일은 다 진실하시도다
5 그는 공의와 정의를 사랑하심이여 세상에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
6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7 그가 바닷물을 모아 무더기 같이 쌓으시며 깊은 물을 곳간에 두시도다
8 온 땅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세상의 모든 거민들은 그를 경외할지어다
9 그가 말씀하시매 이루어졌으며 명령하시매 견고히 섰도다
10 여호와께서 나라들의 계획을 폐하시며 민족들의 사상을 무효하게 하시도다
11 여호와의 계획은 영원히 서고 그의 생각은 대대에 이르리로다
12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13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굽어보사 모든 인생을 살피심이여
14 곧 그가 거하시는 곳에서 세상의 모든 거민들을 굽어살피시는도다
15 그는 그들 모두의 마음을 지으시며 그들이 하는 일을 굽어살피시는 이로다
16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세어도 스스로 구원하지 못하는도다
17 구원하는 데에 군마는 헛되며 군대가 많다 하여도 능히 구하지 못하는도다
18 여호와는 그를 경외하는 자 곧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19 그들의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그들이 굶주릴 때에 그들을 살리시는도다
20 우리 영혼이 여호와를 바람이여 그는 우리의 도움과 방패시로다
21 우리 마음이 그를 즐거워함이여 우리가 그의 성호를 의지하였기 때문이로다
22 여호와여 우리가 주께 바라는 대로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베푸소서
시 33:1-22 / [세상 만물 지어내셨네] 바르게 살려는 이들아, 여호와 하신 일 생각하며 기뻐 소리 질러라. 올곧게 살아가려 몸부림 치는 이들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2) 가야금을 타며 여호와께 감사하고 거문고를 뜯으며 여호와께 노래 불러라. 3) 노래를 지어 주님을 찬양하고 온갖 재주 다하여 악기를 연주하여라. 기쁨에 가득 차 힘차게 소리 질러라. 4) 여호와의 말씀은 늘 참되시며 주께서 하시는 일 하나같이 믿음직스러워라. 5) 주께서 바르고 정직한 사람을 아끼시니 여호와의 어지신 사랑 온 누리에 가득하도다. 6) 여호와께서 말씀으로 하늘을 지어내시며 그 입김으로 해와 달과 별들을 지어내셨도다. 7) 모든 바닷물을 한군데로 모아 놓으시고 깊은 물을 곳간에 모아두셨도다. 8) 온 땅이여, 여호와를 두려워하여라. 땅에 발디디고 사는 사람들아,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거라. 9) 주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지어내신 분. 주께서 명령하시자 온갖 만물이 그 모습을 드러내었도다. 10) 여호와께서 뭇 백성들의 계획을 꺾어 버리신다. 뭇 민족들이 세우는 궁리마다 깨뜨리신다. 11) 여호와의 계획은 영원토록 흔들리지 않으며 주님의 마음속 품으신 뜻은 세세토록 영원하리라. 12) 얼마나 복되랴.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모시고 사는 백성은. 여호와께서 당신 차지로 가려 뽑은 백성은. 13)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내려다보신다. 인간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신다. 14) 주께서 자리잡고 계신 곳에서 이 땅에 사는 이들 찬찬히 내려다보신다. 15) 주께서는 사람의 마음까지 다 지어내시고 사람이 벌이는 일 하나같이 다 헤아리신다. 16) 임금이 대군을 거느렸다 하여 전쟁에서 이길 성 싶으냐? 용사가 힘이 세다 하여 승리를 거둘 성 싶으냐? 17) 군마가 있다 해도 싸움에서 이기는 데는 쓸모가 없고 대군을 거느렸다 해도 살아날 구멍은 보이지 않는다. 18) 여호와께서는 주님을 모시며 살아가는 이들 지켜 보시며 주님을 신실히 믿는 이들을 보살피신다. 19) 위태로운 목숨 건져 주시고 굶주려 헤맬 때 구해 주신다. 20) 우리의 희망은 오직 여호와시니 주님은 우리의 도움, 우리의 방패 21) 그분 생각만 해도 우리 마음 기쁘고 거룩하신 주님의 이름 굳게 믿도다. 22) 여호와여, 한결같이 따스하게 대해 주소서. 우리가 이토록 주님만을 애타게 바라옵니다.
시편 33편은 저자를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내용을 통해 기쁨과 감사의 예배 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인은 먼저 의인들을 찬양으로 초청하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1-3) 시인은 의인들을 찬양으로 초청합니다. 의인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들에게 찬양은 마땅한 도리라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찬양해야 하는지 이야기합니다. 수금으로 감사하고, 비파로 찬송하라며 새 노래로 노래하고, 즐거운 소리로 연주하라고 말합니다(2-3). 3절의 즐거운 소리는 기쁨으로 크게 환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감사와 찬송이 점점 더 크고 기쁜 환호의 고백이 되어가는 것이 연상됩니다. 이처럼 구원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찬송에는 큰 감동과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4-9) 본 단락은 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 정직하고, 행하신 일이 진실하기 때문에 찬양해야 합니다(4). 정직하다는 것은 왜곡이나 거짓이 없다는 것이고, 진실하다는 것은 확고하고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거짓이 없고, 하나님은 그 말씀을 신실하심으로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의 능력으로 행하신 일들을 이야기합니다(7-9). 이처럼 말씀의 능력으로 행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마땅한 태도는 경외의 찬양입니다(8). 5절은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 자비와 사랑의 성품을 찬양의 근거로 이야기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성품의 한 측면만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성품을 찬양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나라들의 계획을 폐하시며(10-12) 하나님의 통치에 도전하는 나라들의 계획과 여호와의 계획을 비교하며 하나님의 통치가 영원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고, 그 통치 아래 거하는 나라와 백성들은 복이 있습니다.
모든 인생을 살피심이여(13-22) 하나님이 각 인생들을 면밀하게 살피고 계시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인생들의 마음까지 살피시며(15), 자신을 경외하고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찾으십니다(18). 그리고 건지시고 살리십니다(19).
적용 : 최근에 당신이 하나님을 찬양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 세상을 아름답게 하고 비난을 해결하며 얽힌 것을 풀어 어려운 일을 수월하게 만들고 암담한 것을 즐거움으로 바꾸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친절이다'라고 톨스토이는 말했습니다. 친절하면서 웃지 않는 사람은 없듯이 친절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항목은 바로 미소입니다. 미소가 흐르는 얼굴은 자신 있어 보이며 때로는 용기 있어 보이기까지 합니다.
< 설 교 >
항상 언제나 어디서나
한결 같이 여호와를 경외하십시오
시 33:1-3, 18-32 / 김삼환목사
흔히 교회에 나와서 믿음의 생활을 할 때, ‘하나님은 굉장하신 하나님이신데 굉장한 일을 해야 기뻐하시지 않느냐?’ 그렇게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물론 굉장하십니다. 상상할 수 없고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높고 위대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나오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언제나 하나님을 경외하고, 믿고,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고 나오는 그 자세로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또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굉장한 것을 기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힘들고 어렵게 해야지만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그건 복음이 아니지요.
구약성경 열왕기하 5장에 보면 나아만이라는 장군이 나옵니다. 이 분은 아람나라의 장군이었습니다. 참모총장, 국방부장관을 하신 분이에요. 이 분이 문둥병이 걸려서 병을 고치려고 해도 안 되고 어떤 방법으로도 낫지를 않았는데, 자기 집안에 있는 몸종중에 유대인이었던 소녀가 있었습니다. 이 소녀가 나아만에게 ‘이렇게 고생하시지 말고 우리나라에 가시면 하나님의 종이 있는데 거기 가면 나을 수 있습니다. 엘리사라는 선지자에게 한 번 가보십시오.’ 그래서 이 아람나라 왕이 친서를 써서 보냅니다. 엘리사에게 왔습니다. 많은 보화를 싣고 약대에다 온갖 보물을 가지고 많은 군대를 동원해서 찾아왔습니다. ‘좀 고쳐주세요. 문둥병을 낫게 해주세요.’ 그러니까 엘리사가 말하기를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을 씻으세요’ 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가만히 요단강을 보더니만 낙심을 하는 겁니다. 내가 무슨 이런 강에 목욕하러 왔느냐고, 굉장한 어떤 약을 처방을 하든지 굉장한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 할 줄 알았지 무슨 이런 이따위 강에다가 목욕하러 온 줄 아느냐고, 막 신경질을 내고 화를 내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돌아가겠다며 가지 않습니까? 그런데 밑에 있던 종이 말합니다. ‘아이 왜 그러십니까? 한 번 순종해 보세요. 어렵게 온 걸 말하면 더 힘들지 않습니까? 산에 천 번을 다녀오세요, 태산 같은 황금을 드리세요, 그러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쉬운 것이니까 한 번 하세요.’ 우리나라에는 이보다 백배나 더 큰 강이 있는데 다메섹강, 아마나강, 바르발강이 있는데 했지만 그래도 시종의 말을 들었습니다.
제가 마침 이번에 이스라엘에 가서 늘 한 번 가보고 싶었던, 레바논하고 시리아지역을 거쳐서 이스라엘로 들어갔습니다. 그랬더니 바로 그 강이 있는 겁니다. 나아만이 말했던 그 레바논 강과 아마나강을 제가 보았습니다. 이 강이 레바논 산맥에서 시작하는 큰물이 흐르는 강이니, 요단강 이 골목에 있는 도랑물하고는 비교가 안 됩니다. 그러니까 나아만이 그 강하고 비교를 하는 겁니다. 이 분은 강이 크고 굉장해야 은혜를 받는 줄 알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위대하시니까, 하나님은 능력이 많으시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낫는 것이지 강이 커야 은혜를 받는 게 아닙니다. 사람이 물고기일 것 같으면 강이 커야 좋겠죠. 하지만 강이 크면 고기야 클 수 있겠지만, 강의 크기와 하나님의 은혜의 크기는 다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의 강에서 크는 것이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복을 받는 것이지, 물고기와는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동물 같으면 산이 깊고 높으면 동물한테는 깊고 높을수록 좋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산이 높은 것과 물이 깊은 것 하고는 관계가 없습니다. 언덕에서라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믿음의 산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어야 그 은혜로 구원을 받고 축복을 받는 것이지 산이 높거나 강이 커서 기적이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세상 사람은 언제나 육적으로 굉장해야 거기에 행복이 있고 축복이 있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슨 장엄한 일을 해야 하나님이 좋아하시지 않느냐? 그런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앞에 이 강이나 저 강이나 하나님 앞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으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만 있으면 누구든지 무슨 신분에 관계없이 은혜를, 아무리 비천한 사람도 은혜 받고 아무리 중한 짐도 벗을 수 있고 아무리 무서운 질병도 나을 수 있고 아무리 저주와 어려움도 하나님은 넉넉히 해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외적인 일을 가지고 평가를 해서, ‘아이고 나는 어떻게 이런 것 가지고 사냐!, 이게 무슨 소용이 있냐!’ 그렇게 생각합니다. 모세는 지팡이를 가지고도 이스라엘을 이끌어 내지 않았습니까? 홍해도 지팡이만으로 가르시는 하나님이신데, 그걸 하나만 들어도 만군의 하나님만 함께하시면, 우리는 능치 못함이 없습니다. 다윗은 목동으로 물맷돌로 골리앗을 이겼고, 다윗은 수금으로 노래 부르고, 하나님을 경외하니까 마귀가 물러가고, 사울 왕이 불치의 병으로 고생했을 때 다윗의 노래를 통해서 마귀가 물러가지 않았습니까? 요사이는 음악으로 치료하는 것이 현대의학으로 굉장한 비중을 차지합니다. 그게 이미 옛날에 사무엘서에 나오지 않습니까? 찬송하면 마귀가 물러갑니다.
이번에 마침 이스라엘 구약학 교수인 장교수님하고 같이 갔는데, 이 분이 시편을 연구해서 그것가지고 박사학위를 받으셨답니다. 자기가 시편을 연구하면서 너무 많은 걸 깨달았다고 하시면서, 기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말씀은 백성들에게 전해지는 것이지만 찬송은 하나님도 기쁘게 하고, 사람도 기쁘게 하고, 자기도 기쁘고 모두가 좋은 것이 찬양이라는 겁니다. 그게 얼마나 귀한 말씀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다윗은 늘 찬양하고 목동으로 있으면서도 늘 찬양했던, 그런 감동적인 찬송이 가득차 있는 것이 시편이지 않습니까? 다윗은 왕으로 있을 때에도, 성가대원, 항상 찬송하는 사람만 4천명을 세워 놓았습니다. 나는 이번에 장교수님의 말씀을 듣고는, ‘왠 그렇게 많은 사람이 있을까?’ 했는데 정말 성경에 역대상을 보니까 4천명이 기록되어 있는 겁니다. 찬양을 좋아하시는 겁니다. 찬양을 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내게도 은혜가 됩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기도요, 찬양이요, 믿음이요, 예배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해서 예배드릴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겁니다. 동물은 삶의 목적이 없지만, 인간의 삶의 목적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 이것이 우리 인간의 가장 큰 축복입니다.
우리는 내가 가진 것이 많아서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하므로 행복하고 하나님이 함께하므로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외적인 것을 가지고 사람을 평가해서도 안 되고 자기를 더 낫다고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나는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나의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면 내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위에만 굳게 서면 일생동안 어디를 가든지 언제나 어디서나 무엇을 하든지, 오늘 찬송가에도 부르셨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이 나의 힘이요 기쁨이 되셔서 어디에 있든지 우리는 승리할 줄로 믿습니다. 신명기 6장 24절에 보면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하심이요 또 여호와께서 우리로 오늘날과 같이 생활하게 하실 것임이라 우리가 그의 명하신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믿는 것, 바로 그게 복입니다. 기독교는 복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교인들은 복을 받으려고, 행복하려고, 성공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하나님을 잘 믿는 믿음의 삶만 살아가면 이런건 저절로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똑같은 말입니다. 떡이나 찰떡이나 똑같은 말이듯이, 물이나 워터나 똑같은 말이듯이, 생수나 물이나 다 똑같은 말이듯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나 복이나 다 똑같은 말입니다. 잘 믿으면, 하나님을 잘 믿으면 저절로 복이 안 올 수가 없는 겁니다. 잘 믿는 것이 축복이고, 하나님을 잘 믿는 그게 의로움입니다. 아무리 의로운 사람이, 이 세상에 물론 없지만, 설령 의롭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떠나면 죄인이 되고 악에 빠지는 겁니다. 사람이 악한 일이라고 하는 것은 한 순간에 밀려오는 것이고 언제 악인이 되는 것,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 어떻게 보면 남을 죽이는 사람이 제일 착한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참다가 순진하게 생각하다가 술 먹고 욱해서 사람을 죽이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여러분 꼭 악해가지고 사람을 죽이는지 아십니까? 이 세상에 꼭 악해가지고 나쁜 일 하는지 아십니까? 선한 사람도 유혹을 받고 하다 보면 사기꾼에 휘말려서 사기를 할 수 있는 것이고, 한 순간에 넘어지고 타락하는 겁니다. 가족 간에도 어떻게 하다가 가정불화가 일어나서 한 순간에 밀다보니까 그 아내가 모퉁이에 맞아 귀에 부딪혀가지고 죽는 일도 있는 겁니다. 사람이 꼭 악한 사람만이 이 세상에 악인이 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언제 한 순간에 악에 빠져서 악의 길에 들어서서 악한 일을 행하게 되는 거고 넘어지게 되는 겁니다. 알코올중독자가 태어나면서부터 중독자가 어디 있습니까? 태어나서부터 나쁜 사람이, 사기꾼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을 떠나면 모두가 누구나 할 것 없이 이악한 세상에, 악에 노출되어 악에게 이용을 당하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면 내가 비록 악한 생각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붙잡아 주시는 겁니다. 우리도 낙심할 수 있고 화를 낼 수 있지만, ‘얘야, 김집사야 왜 화를 내냐 하고 성령이 감동하잖아요. 싸우려고 해도 얘야 너 은혜 받고 예배드리고 왜 그러느냐’ 성령이 우리 마음에 감동을 주시지 않습니까! 위로해주시고, 용기를 주시고 낙심될 때, ‘너 왜 그리 낙심하냐!’ 그래서 우리가 낙심을 안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인도 다 같이 넘어질 수 있는 일이 충분히 많이 있어도 성령은 때마다 우리를 도와주셔서 힘주시고, 용기를 주시고, 위로해 주시고, 새 힘을 허락하여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늘 함께하시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한 순간도 떠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부족할지라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은 뭐 내 힘으로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는데 하나님을 꼭 경외하는 게 필요하냐? 그렇게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만이 절대적입니다. 하나님 없이 우리가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하나님이 없이 우리가 어떻게 살 수 있습니까? 그냥 살기만 하면 또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 믿음이 어느 것과 비교할 수 없이 가장 귀하고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과 내 영혼의 축복과 내 영생과 죄 사함과 자유와 내 삶의 충만함을 위해서 항상 하나님의 은혜아래 우리는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저는 이번에 이스라엘에서 여러 지도자를 뵙는 중에 특별히 2005년에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로버트 아우만 교수님을, 히브리대학 교수인데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저를 만나서 얼마나 이 분이 순진하게 웃는지, 인터뷰할 때 웃는 이 사진을 좀 보십시오. 나는 세상에 태어나서 이렇게 어린아이같이 웃는 분을 처음 보았습니다. 세계 최고의 과학자고 이런 노벨상까지 받은 분이고, 어깨에 힘을 당당하게 줄 수 있는 분이고, 나같은 사람은 아예 만나주지도 않을 분이지만 만나서 너무도 기뻐하는 겁니다. 자기는 하루에 꼭 두 시간씩,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게 있는데 그게 성경 외에 탈무드를 읽는 겁니다, 저는 이 탈무드가 우리나라에 번역이 된 것이 그냥 유치해서 안 읽었는데 탈무드가 얼마나 어려운지 이 분 이야기가 성경보다 훨씬 더 어려운 게 탈무드라고 하고 유대인들은 탈무드를 열심히 읽는답니다. 자기는 50년을 탈무드를 하루도 안 읽은 날이 없이, 매일 2시간씩 읽는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이 세상을 어떻게 지혜롭게 살아가야 되느냐 하는 것이 그 안에 가득 차 있는 겁니다. 이 탈무드가 얼마나 어려운지 이걸 한 번 다 읽으려면 11년 7개월을 읽어야 이 탈무드 전체를 읽을 수 있다고 합니다. 성경은 안식일마다 하루 종일 자기 가족들하고 읽는답니다. 매일 기도생활을 하고... 여러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무식한 사람인 줄 아십니까? 유대인들은 이렇게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에 전심전력하지, 살아가는데 전심전력하지 않습니다. 돈 벌려는데 전심전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에 전심전력합니다. 제가 헤브론에도 가보니까, 많은 유대인들이 저녁이 되니까 저녁 기도시간에 할아버지가 애들 손자들 전부 손잡고 기도하러 올라오고 수많은 남자들이 와서 기도하고 성경 읽고 모든 생활이 바로 그겁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일생동안 박사학위를 받든,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지 않고 이렇게 읽는 겁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오늘 세계를 이끌어 가고 있는 겁니다. 세계의 경제, 세계의 과학, 세계의 정치를 움직이고 있는 겁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하나님을 잘 경외하는 것, 시간이 있어서 예배드리고 하찮은 것으로 생각하고 기도를 꼭 할 필요가 뭐 있냐?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잘 경외하는 이 믿음으로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 현대인들이, 하나님 없는 우리 마음들이 얼마나 공허합니까? 우리의 가슴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지고 내 머리에 하나님의 말씀 지혜로 채워지고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진 저들은 방황하지 않습니다. 세계에 유대인이 무슨 사기를 쳤다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유대인이 껄렁껄렁하면서 해매는 걸 본 일이 있느냐 말입니다. 우리는 국내에 있든 해외에 있든 사기꾼이 이글이글하고, 놀고먹는 놈팡이들이 이글이글하고, 엉뚱한 짓하고, 평생 술이나 먹고 술에 빠진 사람이 이글이글하고, 할 일 없이 놀면서 빈둥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도박꾼이 수백만입니다. 도대체 무엇입니까? 온갖 좋은 조건을 가지고도 외로워하고, 공허해하고, 뭐를 잡지 못해서 사람을 만나면 그저 남의 불평불만이나 하고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없는 우리 마음은 일생을 살아도 고아와 마찬가지입니다. 모두를 가져도 아무것도 없는 것 같고, 기쁨이 없습니다. 소망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편 34편 9-10절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모든 일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자도 늙은 사자는 힘이 없지만, 젊은 사자는 산속에서 왕이지 않습니까? 그런 젊은 사자는 혹시 굶주려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은 굶주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능력 있는 성도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인간의 힘은 지식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가슴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심령을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가득 채워서 이 세상을 승리하는 성도들 되기를 바랍니다.
시골에서 곡식을 심어보면 신비합니다. 밭에 씨는 뿌려야 됩니다. 그러나 잡초는 뿌리지 않아도 납니다. 곡식을 밭에다 심어서 잡초를 뽑아내고, 곡식을 잘 가꾸어야지 곡식을 가꾸지 않고 뽑아내 버리면 어디서 나왔는지 잡초가 우거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내 안에 나도 모르는 이 잡초, 잡초는 기르지 않아도 원하지 않아도 찾아오는 겁니다. 음란의 잡초, 한 순간에 우리를 덮을 수 있어요. 예배를 드리면서 모든 정욕과 교만과 음란과 불의와 욕심의 모든 잡초를 뽑아내 버리기를 바랍니다. 원망과 의심의 잡초를 뽑아내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프랑스 대통령인 사르코지라고 하는 분은 자기가 주례했던 아가씨를 신부가 예쁘니까 그걸 탐을 내서 기어이 결혼했던 사람하고 이혼하게 하고 자기하고 살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주례를 아무데나 맡기면 안됩니다. 그게 잘못했다가는 자기 아내를 빼앗겨 버리는 겁니다. 주례는 순수하게 그 집을 축복해 주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25년이 지나서 그 사람하고 결혼을 합니다. 자기도 버리고.. 결혼해서 오래 사느냐? 정욕이 있는, 음란이 있는 사람은 오래 못 가는 겁니다. 그래서 그 사람하고 살다가 얼마 안 있어서 또 버리고 이번에는 이태리의 유명한 모델, 이 사람은 옷을 또 잘 벗는 사람이랍니다. 그 사람이 또 좋아가지고 사르코지가 거기에 또 빠져가지고 대통령일은 시시하게 두고 온갖 노는 데만 돌아다니고 그런다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득 채워야 어두움이 찾아오지 않는 겁니다. 온갖 세상의 나쁜 것들이 찾아와서 오늘 이 좋은 세상을 자꾸 낙심하고 자살하고 이러는 것은 하나님이 없는 잡초입니다. 예배드리면서 잡초를 뽑아내 버리기를 바랍니다. 예배드리면서 하늘의 것으로, 위의 것으로, 성령으로, 신령한 것으로 여러분의 영혼을 가득 채우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하십니다. 우리 인간은 영적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은 좋은 것으로 우리를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시편 62편에 보면 “백성들아 시시로 저를 의지하고 그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포학을 의지하지 말며 탈취한 것으로 마음에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 치심치 말지어다” 세상 것이 좀 잘 되어도 그게 얼마나 잘 되겠습니까? 대단한 것은 아니거든요. 하나님같이 영원한 축복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되나 안 되나, 있으나 없으나 세상은 다 그게 그겁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이 믿음위에 굳게 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많이 배워도 천하에 요사이 아이들 영어를 가르치고 좋은 학교들, 물론 좋은 학교가 좋지요. 그러나 천하에 없는 일류대학을 나와도 몇 년 만 지나면 다 무식해지고 요사이 얼마나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지성인이 어디 있습니까? 세상 적으로 뭐를 가져보세요. 몇 년 지나면 유행이 다 바뀝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저 끝까지 믿을 수 있는 분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 외에는 없는 줄로 믿습니다. 여호와가 나의 기쁨이십니다. 나의 힘이십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번에 이스라엘에 장교수님이 가서 말씀한대로 찬송이 참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찬양은 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릴 때 예배에도 찬양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십니까? 한번 보세요. 찬양은 여섯 번 나옵니다. 기도는 두세 번밖에 안 나옵니다. 설교는 한 번이지요. 찬양은 주기도문 찬양이 있고, 그 다음에는 만복의 근원을 부릅니다. 그 다음에 또 찬양하지요. 성가대가 찬양하지요. 중창단 있지요. 그 다음에 설교 끝나고 찬양이 있지요. 마지막에 일어나서 또 찬양 있지요. 찬양이 얼마나 많습니까? 찬양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내게도 기쁨이 되고 듣는 사람도 기쁘고 늘 찬양하면 내 영혼이 살아나는 겁니다. 항상 찬양하는 성도되기를 바랍니다. ♬나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니 내 입에 찬미가 항상 있으리라 너희는 나와 함께 주님을 찬미하자 우리 함께 그 이름 높여드리자 주님을 찾았더니 나를 들어주시고 온갖 무서움 가운데서 나를 건져주셨네 우러러 주님을 보라 기꺼우리라 우러러 주님을 보라 기꺼우리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오 할렐루야 오 할렐루야 오 할렐루야 주 이름 찬양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오 할렐루야♬ 하나님만이 만물의 창조자이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이 세상을, 하나님을 믿는 이 믿음을 내 영혼에 가득 가질 때 이것이 힘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힘, 세상을 살리는 힘, 가정을 살리는 힘, 행복의 힘, 지혜의 힘, 온갖 능력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겁니다.
노벨상을 받은 분이 286명인데, 그 중 예수 믿는 사람이 73%입니다. 이건 미국의 과학 엘리트, 미국의 노벨 수상자들의 책에 나온 통계예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총명하잖아요. 지혜롭잖아요. 모든 분야에, 음악도 뛰어나고 과학도 뛰어나고 경제 분야도 다 뛰어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유대인이 19%,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다 92%가 거기서 나오는 겁니다. 세계의 모든 위대한 문학가 솔제니친, 윈스턴 처칠, 슈바이처, 루즈벨트, 만델라, 마틴 루터 킹, 할것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영화롭게 해야 인류를 위해서도 좋은 일을 하고, 너를 위해서도 좋은 일을 합니다. 사랑도 하나님이 없는 사랑은 너도 손해고, 나도 손해고, 받아도 손해고, 주어도 손해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랑이어야 사랑이 살아나고 기쁨이 살아나고 ..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유대인의 1/10이라도 따라가려면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믿는 일에 얼마나 전심전력하는지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이 나는 유대인의 1/100도 따라올 수 없구나!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믿는 일을 저렇게도 잘 할 수 있을까? 정성을 다 하는 겁니다. 세상 일이 아무것도 아닌 일에 왜 그렇게 모두 바쁘십니까? 하나님을 경외하여 영원한 축복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을 미련하게 생각하고 쓴 웃음으로 비웃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버림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버림받는 일이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일이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쓰임 받는 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일인 줄로 믿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가치, 큰 은혜, 큰 기쁨, 큰 축복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이 얼마나 좋은 때입니까? 봄이 돌아와서 너무 좋은 때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봄은 봄대로, 여름은 여름대로, 가을은 가을대로 겨울은 겨울대로, 집에서는 집에서 대로, 들에서는 들에서 대로 항상 하루를 새롭게 살아갑니다. 아,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늘 감사와 감격으로 충만합니다. 여러분, 봄 냄새를 맡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들에서 모든 풀들이 자라나고 솟아나는 그 소리를 듣습니까? 꽃망울이 터지는 소리에 어쩔 줄 모르고 감격하십니까? 봄에 냇물 흐르는 소리를 들어보셨습니까? 봄비가 ‘속속속속’ 내리는 소리를 들어보셨습니까? 밤하늘을 올려다보십시오. 한 번 쳐다보십시오. 얼마나 상큼하고 얼마나 산뜻하고 새 옷을 갈아입은 이 동산들을 보면서 여러분, 어떻습니까? 얼마나 감격스럽습니까? 꽃 중의 꽃 진달래, 그 붉은색 하나하나의 하나님의 솜씨를 보셨습니까? 노란 꽃, 개나리를 보셨습니까? 너무나 아름다운 그 색깔이, 사람이 만든 이 세상의 어디에 가서 그런 아름다움을 볼 수 있습니까? 목련 꽃, 배 밭, 사과 밭, 들에 가서 보십시오. 봄나물 하나하나가 얼마나 향기롭습니까? 된장에다가 파뿌리를 그대로 통째로 넣어서 한 번 먹어보십시오. 하나하나가 하나님이 주신 이 계절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을 보면서 늘 찬송하며 감사하며 살 수 있습니다.
마귀는 이렇게 좋은 때인데도 문을 닫아 놓고, 기쁨을 모르고, 벚꽃을 내일 보러 가자고 하면 하필 그 전날 대판 싸움이 일어나서 그냥 봄을 통째로 보내는 겁니다. 술이 취해서 완전히 깨부수고 이 좋은 철에 아이들과 함께 사진하나 못 찍고 봄을 보내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있어야 자연도 있고 하나님이 있어야 인생도 있고 가정도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있어야 자녀가 볼 때 소중하고 부모가 볼 때 소중한 겁니다. 부모를 모실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지 요사이 왜 부모를 갖다 버리느냐? 왜 학대하느냐? 능력이 없습니다. 옛날에는 부모 하나만 모셨으니까 모실 수 있는데, 요사이는 온갖 일을 하려고 하니 모두 피곤해하는 겁니다. 아이들이 대화도 안 하려고 하고 모든 걸 안 하려고 해요. 애를 아예 안 낳으려고 하고, 안 살려고 합니다. 왜 그래요?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해야 모든 능력이 살아나는 겁니다. 하나님을 경외해야 만이 내 생각 속에, 내 마음 속에, 내 의지 속에, 어떤 어려움도 이길 수 있는 용기가 생겨나는 겁니다. 저는 산골 사람입니다. 내 주변을 돌아보면 좋은 것은 하나도 없었지만, 항상 내가 기쁨으로 살 수 있었고 감사하며 웃음으로 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항상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 늘 노래했습니다. 내 입에 노래가 그치지 않았습니다. 내가 노래를 부르지 않을 때는 악기를 가져다가, 풀잎을 가지고 부르는 노래도 수백 가지 할 수 있습니다. 잎마다 노래를 다 만들 수 있습니다. 풀피리 이거는 버드나무를 딱 빼가지고 불면 그것도 네 개, 다섯 개를 가지고 ‘펌버러범범’ 하면서 불면 하모니카가 없어도 하모니카가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함께하는 사람은 어디서든지 무엇이든지 악기가 되고, 무엇이든지 천국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십시오. 인생도 가정도 살아납니다. 큰일을 할 수 있습니다.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인구가 적어도 세계를 잡고 있습니다. 이번에 파리에서 온 친구들이 말하는데, 파리도 유대인들이 다 잡고 있답니다. 그 고급화장품들 샤넬이나 유명한 루이비통인지 하는 것도 유대인들이 다 잡고 있답니다. 세계의 패션, 세계의 보화들, 아르헨티나에도, 미국에도 유대인들이 다 잡고 있는 이유가 어디 있느냐? 그 사람들이 머리가 좋아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머리를 따라 갈 수가 없는 겁니다. 할렐루야!
여러분의 가슴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슴, 여러분의 머리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가 있어야 만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입니다. 하나님 없이 다 채워졌다 한들 뭐예요! 별 것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으로 가득 차기를 바랍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제가 2003년 10월 7일 아침,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 날은 토론토에서 집회를 마치고 그 교회에서 저에게, 토론토에서 한 시간만 오면 나이아가라 폭포가 있습니다. 버팔로에 있는 호텔에다 수고했다고 제일 좋은 방을 얻어주었습니다. 나이아가라는 캐나다 쪽에서 보면 전부가 다 보입니다. 미국 쪽에서 보면 30-40% 정도 밖에 안 보입니다. 그 폭포위에다 세계 제일의 호텔을 지었습니다. 폭포가 바로 내려다보이게 지은 겁니다. 그날 밤에 들어가서 자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려고 창문을 열었습니다. 얼마나 장엄한지 그냥 팍 팍 치는데 너무 장엄한 겁니다. 폭포를 보고 황홀에 빠져 있는 순간에 저 동쪽으로부터 마침 태양이 떠오르는 겁니다. 그 끝없는 넓은 곳에 태양이 떠오르기 전에 이미 붉게 물이 드는 겁니다. 무지개 같은 붉은 온갖 색깔들이 하늘을 쫙 덮더니 드디어 이글이글하는 태양이, 저는 그렇게 불이 타오르는 걸 처음 보았습니다. 막 불길이 이글이글 하면서 살아 있는 불덩어리들이 쑤욱 올라오는 겁니다. 그 장엄한 그 태양을 보면서 저는 나이아가라 폭포는 억 만 분의 일도 비교할 수 없고 이건 아무것도 아니고 세상에 있는 이 모든 것 어느 것을 비교할 수 있겠느냐 말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무엇으로 비교하겠느냐 말입니다. 태양도 저렇게 대단하거든 하나님 본체는 얼마나 더 위대하겠느냐 말입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지 보시란 말입니다. 태양과 비교할 수 있느냐 말입니다. 나이아가라 폭포와 태양을 비교할 수 없듯이 태양과 하나님을 또 어떻게 비교할 수 있느냐 말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며 믿으며 감사하며 그를 경외하는 일에 일생을 언제나 어디서나 어디 가든지 이 하나 위에 중심에 굳게 서기를 바랍니다.
새 노래로 찬송하는 삶
시 33장 1절 / 이수영목사
150편으로 이루어진 시편 전체는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라는 구절로 끝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당연히 해야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147:1에서는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선함이여 찬송하는 일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 하며, 146:2에서는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합니다. 145:1-2에서는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내가 날마다 주를 송축하며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라고 노래합니다. 실로 찬송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뿐만 아니라 영원히 해야 할 일이며 어쩌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에게 남을 유일한 일일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 나라에서는 더 이상 신학도 성경공부도 기도도 전도도 사회봉사도 필요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서는 재정부도 관리부도 다 없어지게 될 것이고, 북한선교부는 말할 것도 없이 영원히 사라질 것이며, 더더군다나 제일 힘들고 그래서 일부러 나서서 하겠다고 할 사람 별로 없는 경조부는 절대로 없을 것이지만, 성가대만 결코 없어지지 않고 영원히 남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찬송은 우리의 삶의 최종 목적이며, 개개인의 신앙과 교회의 모든 활동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시편인 33편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이 찬송에 관해 매우 의미있는 말씀들을 담고 있습니다. 그 1절은 찬송이 "정직한 자들이 마땅히 할 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절 은 수금과 열 줄 비파로 찬송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꼭 그 두 악기만을 쓰라는 것이 아니라 150편에서 말하듯이 나팔과 비파와 수금과 소고와 현악과 퉁소와 큰 소리 나는 제금 등을 대표적으로 표현한 것, 즉 할 수 있는 모든 악기를 동원하여 찬양하라는 것이라고 이해해야 할 줄 압니다. 3절은 "즐거운 소리로 아름답게" 찬송하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남이 하니까 그저 별 생각 없이 기계적으로 대충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운 마음으로 있는 정성을 다하여 가장 아름답게 찬송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4-5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그렇게 찬송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실하심과 공의로우심과 인자하심 때문입니다. 4-5절을 다시 봅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그가 행하시는 일은 다 진실하시도다/ 그는 공의와 정의를 사랑하심이여 세상에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
6절 이하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진실하시고 공의로우시며 인자하신 하나님으로 확신하게 하는 이유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행하신 일 속에서 그의 진실하심과 공의로우심과 인자하심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 일이란 다름 아니라 창조와 섭리와 선택과 구원입니다.
6-9절은 바로 창조주 하나님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그가 바닷물을 모아 무더기 같이 쌓으시며 깊은 물을 곳간에 두시도다/
온 땅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세상의 모든 거민들은 그를 경외할지어다/
그가 말씀하시매 이루어졌으며 명령하시매 견고히 섰도다".
10-11절은 만유의 주관자 되시는 섭리주 하나님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나라들의 계획을 폐하시며 민족들의 사상을 무효하게 하시도다/
여호와의 계획은 영원히 서고 그의 생각은 대대에 이르리로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13-19절은 선택과 언약에 성실하셔서 그의 백성을 굽어살피시며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굽어보사 모든 인생을 살피심이여/
곧 그가 거하시는 곳에서 세상의 모든 거민들을 굽어살피시는도다/
그는 그들 모두의 마음을 지으시며 그들이 하는 일을 굽어살피시는 이로다/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세어도 스스로 구원하지 못하는도다/
구원하는 데에 군마는 헛되며 군대가 많다 하여도 능히 구하지 못하는도다/
여호와는 그를 경외하는 자 곧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그들의 영혼?사망에서 건지시며 그들이 굶주릴 때에 그들을 살리시는도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와 선택과 구원의 역사를 그들의 삶 속에서 목격하고 성찰하며 그들에게 언제나 신뢰할 수 있는 도움과 방패가 되시고 언제나 의지할 수 있는 인자하신 하나님을 체험한 것입니다. 20-22절은 그들의 그 체험적 확신을 요약한 것입니다:
"우리 영혼이 여호와를 바람이여 그는 우리의 도움과 방패시로다/
우리 마음이 그를 즐거워함이여 우리가 그의 성호를 의지하였기 때문이로다/
여호와여 우리가 주께 바라는 대로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베푸소서".
여기서 우리는 3절에서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라"고 한 뜻을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보통 새 노래란 즐겁고 고마운 일이 새롭게 있을 때에 나오곤 하는 것일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항상 새 노래를 지어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겠습니까? 더더군다나 요즘같이 정치는 온 국민을 짜증나게 하고 분노하게 하며 경제는 어렵고 사업도 부진하며 실직위협과 취직걱정에 시달리느라 불안하고 답답하며 신나는 일도 신통하게 되는 일도 없는 때라면 우리가 어떻게 날마다 새 노래로 노래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와 선택과 구원의 역사를 돌아보며 "새 노래로 노래하라" 한 것은 우리에게 큰 의미를 던져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화나고 짜증나며 경제적으로 어렵고 온갖 걱정과 불안이 닥칠 때일수록 이 세상을 지으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주시고 우리의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삶 속에서 실제로 우리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 은혜를 입었으며 알고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감사할 일! 들을 베푸셨는지를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항상 우리의 도움과 방패가 되시며 언제나 우리가 신뢰하고 의지할 수 있는 하나님의 진실하심과 공의로우심과 인자하심을 새삼 확인하게 될 것이고 그 때에 우리는 날마다 새 노래로 노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그저께 오래간만에 만난 제 제자 목사 한 사람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가 최근에 외국에서 목회하는 한 친구 목사로부터 어떤 사람을 소개받아서 만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가 만나고 있는 사람은 병원에 입원해 있는 분입니다. 그 분은 의사였는데 태국에 의료봉사차 갔었고 고산족 소수민족 마을도 돌아본 후 돌아오기 전에 취미인 스쿠버 다이빙을 하다가 뇌를 다쳐 혼수상태에 전신마비가 되어 돌아와 시내 모 병원에 입원 가료 중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목사가 친구목사의 소개로 찾아가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의사들이 어떻게 손쓸 수 없었던 그 분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신체의 각 기능들이 회복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제자 목사가 말하기를 찾아갈 때마다 몸이 하나씩 하나씩 회복되는데 또 찾아간 어느 날 그 분이 한 번은 자기 보는 앞에서 하품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하품을 얼마나 시원하게, 그야말로 늘어지게, 하는지 보는 자기가 다 기분이 좋을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남이 하품하는 것보고 그렇게 감사하긴 처음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 돌아와 자기 교인들에게 그랬답니다: !
"여러분 하품하며 지낼 수 있는 것을 감사하십시오. 하품도 아무나 하는 것 아닙니다"라고.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품할 수 있는 것도 생각해보면 감사한 일입니다. 원할 때 눈을 감거나 깜박거릴 수 있는 것만 해도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릅니다. 만일 눈이 감겨지지 않거나 깜박거려지지 않는다면 얼마나 힘들고 괴롭겠습니까? 눈물나는 것도 감사할 일입니다. 눈에서 눈물 마를 날이 없는 분들은 생각을 돌려 아직 눈에서 눈물이 잘 흘러주는 것을 감사할 수 있기 바랍니다. 눈에서 눈물이 흐르지 않으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아십니까? 그러고 보면 우리는 감사할 일이 무궁무진한 것입니다. 숨쉴 수 있고 숨쉴 공기가 있다는 것도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들을 수 있는 것도 감사할 일이며, 볼 수 있는 것도 감사할 일이고, 걸을 수 있는 것도 감사할 일입니다. 일어설 수 있는 것도 감사할 일이고 앉을 수 있는 것도 감사할 일이며 누울 수 있는 것도 감사할 일입니다. 그러고 보면 하나님께 부를 새 노래는 매일 매일 끊어질래야 끊어질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볼 수 있는 눈만 있다면 항상 새 노래로 가득 찰 수밖에 없는 우리의 삶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특히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실패와 좌절을 겪으시고 근심과 불안 가운데 지내시는 믿음의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함께 우리의 눈을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에게로 돌려봅시다. 우리의 눈을 이 세상을 다스리시고 나의 삶을 주관하신 하나님에게로 향해봅시다. 나의 죄를 사하시고 나를 구원하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나에게 베풀어주신 온갖 은혜를 곰곰히 생각해봅시다. 우리가 깨닫지 못하고 누린 수없이 많은 복을 헤아려봅시다. 우리는 새롭게 새롭게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송할 우리의 노래는 날마다 새로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늘 새 노래로 하나님을 찬송하는 우리 모두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새 노래로 찬양하라
시 33장 1~22절 / 이종철목사
인생은 마땅히 여호와를 즐거워하며 찬양해야 한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의 마땅히 할 바로다”(1) 찬양하되 즐거움으로 찬양해야 한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사람이 있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다. 이들은 하나님을 외면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무관심한 사람들보다는 낫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사람보다는 못하다. 두려워하는 것은 마지못해 하는 것이지만 즐거워하는 것은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다. 자발적이기에 힘들지 않으며 아무리 헌신해도 아깝지 않다. 속에서는 기쁨이 솟아오른다. 천국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가는 곳이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자에게는 다른 복은 필요 없다. 그분과 함께 하는 것만이 유일한 복이다.
하나님을 찬양하되 모든 수단과 기구를 이용하여 찬양하여야 한다. 2-3절에서는 수금(하아프)과 비파와 인간의 목소리를 언급한다.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고 열 줄 비파로 찬송할지어다”(2) 소리를 낼 수 있는 악기라면 무엇이든 가능하다. 요즘은 경배와 찬양이 보편화됐지만 7,80년대만 해도 예배당 안에서 피아노 외에 다른 악기들을 사용하는 것을 경망스럽게 여겼다. 오늘 시편 말씀에 의하면 그것이 기타이든, 드럼이든, 전자올갠이든 그 어떤 악기든 하나님을 찬양하는 도구라면 마땅히 빠짐없이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다만 이런 악기들이 인간의 즐거움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거나 하나님께 집중하는 데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많은 악기들이 있지만 하나님을 찬양하는 가장 최고의 악기는 인간의 목소리이다.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공교히 연주할지어다”(3) 인간의 목소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하신 가장 완벽한 악기이다. 또한 목소리는 어느 곳이든 들고 갈 수 있는 악기이다. 가정에서 일터에서 걸어가고 머무는 모든 곳에서 찬양이 넘치게 하라. 찬양하되 새 노래로 찬양하라. 새 노래는 신곡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늘 불러도 즐겁고 주의 은혜가 날마다 새롭게 다가오는 것이 바로 새 노래이다. 아무리 새로 만든 곡일지라도 그 안에 은혜가 없으면 전혀 새 노래가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찬양하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첫째, 그는 하늘과 땅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6-9).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6) 세상을 만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창조의 6일 동안 “하나님이 가라사대”라는 말씀이 10번이나(1:3, 6, 9, 11, 14, 20, 22, 24, 26, 29) 울려 퍼졌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마치 어린아이가 유리창에 입김을 불어 그 위에 그림을 그리듯 하나님은 해와 달과 별을 그 입 기운으로 만드셨다. 자기 마음대로 흩어져 돌아다니던 바닷물을 모아 경계를 정하셨으며, 깊은 물은 하늘 곳간에 두시고 때를 따라 비와 이슬로 사용하신다(7). 천지가 충돌 없이 흩어지거나 사라지지 않고 제자리를 지키는 것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다.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명하시매 견고히 섰도다”(9) 태양이 동쪽에 떠오르는 것이나, 물질이 서로 잡아당기는 만유인력의 법칙 등 모든 자연법칙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명하신 바이다.
그래서 시인은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그 행사는 다 진실하시도다”(4)고 노래한다. 자연법칙을 법칙이라 부르는 이유는 규칙적이고 어김이 없기 때문이다. 자연법칙의 근원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말씀이 정직하고 진실하기 때문에 자연법칙도 변함이 없다. 하나님 말씀은 또한 모든 정의의 원천이다. “저는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심이여”(5a) 민족과 국가의 헌법을 우선하는 것은 도덕법이나 자연법이고 이들 법보다 우선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이다. 하나님이 정의로우시기에 세상의 법 중 정의롭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그 하나님 말씀은 차가운 진리가 아니다. 인자가 담긴 따뜻한 진리이다. 그 사랑은 온 세상에 충만하다. “세상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5b). 신앙인들은 세상이 마치 죄와 어둠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하는 부정적 생각을 가지기 쉽다. 아니다. 세상에 충만한 것은 주의 진리요, 주의 인자하심이다. 비록 타락으로 말미암아 죄가 침투했을지라도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은 이를 압도하고 있다. 사랑하기를 두려워 말라. 세상과 연대하는 것을 두려워 말라.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은 우주 구석구석 스며들지 않은 곳이 없으며, 하나님의 말씀은 계시지 않은 곳이 없다.
둘째,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 하나님은 열방과 민족들을 다스리시는 역사의 주님이시기 때문이다(10-17). 열방들은 자기가 최고인 냥 무력을 자랑하고 어리석은 계획들을 도모하지만 그들의 계획은 허사로 돌아간다.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시며 그들의 생각을 무효로 돌리시기 때문이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계획만이 성취되고 영원하다(11). 이사야 선지자의 놀라운 비전을 보라. “보라 그에게는 열방은 통의 한 방울 물 같고 저울의 적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니”(사40:15) 거대한 애굽이나 바벨론이나 페르시아 제국도 하나님의 손에 비하면 물 한 방울과 먼지처럼 미미한 존재일 뿐이다.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커도 스스로 구하지 못한다(16). 하나님이 손가락으로 통의 물을 젓듯이 한 번 휘휘 저으면 세상이 요동을 친다. 결국 영영히 설 것은 하나님의 나라뿐이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으로 자기 하나님을 삼으신 나라는 복이 있다.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 바 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12) 시편 33편을 묵상하다보면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우리 시야가 열린다. 국제정세를 보면 강자가 위력으로 약한 나라를 누르며 정의는 힘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시편 시인의 위대한 찬양이 그 모든 역사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큰 손을 보게 만든다.
셋째, 여호와는 우리 인생의 주님이시기 때문이다(18-21). 여호와께서는 하늘에서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 인생들을 보고 계신다. 그분은 우리 마음을 지으신 분이기에 우리 속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아신다. “저는 일반의 마음을 지으시며 저희 모든 행사를 감찰하시는 자로다”(15). 이 말씀은 두려운 말씀이기도 하지만 우리에게 위로를 주는 말씀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헤아려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비록 실수투성이고 돌아보면 아무 쓸모없어 보이는 것이 우리 인생이다. 그러나 우리는 절망하지 않는다. 우리 마음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우리 중심을 아시기 때문이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 영혼의 목마름을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 육신의 기근에서 우리를 살리시는 하나님이시다. “저희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저희를 기근시에 살게 하시는도다”(19) 그러므로 우리 영혼이 하나님을 바라고 우리 마음이 하나님을 즐거워한다. 그는 우리의 환난 날에 의지할 큰 도움이시요, 우리를 시련의 불화살로부터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우리의 방패시다(20). 그래서 우리는 다만 그의 성호, 곧 그의 거룩한 이름만을 의지하며 찬양한다.
찬송은 정직한 자들이 마땅히 할 바로다
시 33장 1~12절 / 이종윤목사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라"(엡5:19)는 말씀의 라틴어입니다. 시편 33:1은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들이 마땅히 할 바로다"라고 합니다. 이때 정직한 자(성도)가 4가지 질문을 합니다.
I. 무엇을(What)?
정직한 자의 마땅히 할 바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찬송입니다. 의인들은 여호와를 즐거워하고 정직한 자들은 찬송합니다. 성도는 하나님께 찬송할 의무가 있습니다. 거듭난 성도라면 환난, 핍박, 역경 중에도 하나님께 찬양하고, 하나님의 이름, 성품, 선하신 인격을 이웃에게 증거함으로 찬양해야 합니다. 묵상 중에 찬양하며, 생활 속에서 찬양해야 합니다.
II. 어떻게(How)?
어떻게 찬양해야 합니까? 첫째 새 노래로 찬양해야 합니다.(3). 새로 지은 노래나 새 사람이 부르는 것이 아니라 새 마음 (거듭난 마음)으로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둘째 각종 악기로 찬양해야 합니다(2). 수금과 열줄 비파로 즉 당시 최고 악기를 동원하고 마음과 입을 총 동원하여 주님께 찬양해야 합니다. 셋째 즐거운 소리로 아름답게 연주해야 합니다. 듣기 싫은 소리는 즐거움을 감소시킵니다. John Wesley(1742)는 교회에서 찬송할 때 지킬 5대 법칙으로 1) 회중은 모두 함께 찬양하고, 2) 힘껏(정성껏) 찬양하며, 3) 겸손히 튀지 않게 부르고, 4) 박자와 고저, 장단을 맞추어 부르며, 5) 영으로 부를 것을 말합니다.
III. 왜(Why)?
찬송 없는 신자는 날개 없는 천사와 같습니다. 크리스챤에게는 기도와 찬양이 있어야 합니다. 성도에게서 찬양이 없다면 땅에 기어 다니는 벌레와 무엇이 다릅니까? 따라서 성도의 직분이 있는 한 찬송은 마땅히 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때문에 찬양해야 합니다. 그의 행하신 일이 다 진실하시기 때문에(4), 그는 공의와 정의를 사랑하시고 인자하시므로(5), 여호와는 창조주시기 때문에(6-11), 성도를 자기 백성으로 택하셨음으로(12-19) 찬양해야 합니다.
IV. 언제(When)? 그리고 누구를(Whom)?
그러면 언제 누구를 찬송해야 합니까? 첫째 찬송은 언제나 불러야 합니다. 아침에도 낮에도 저녁에도 가난할 때도 고통 중에도 불러야 합니다. 모든 순간 모든 상황 속에서 찬송은 불러져야 합니다. 둘째 찬송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서태지가 세상 노래는 부를 수 있으나 하나님을 모르는 한 찬양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마음으로 부르는 찬송은 하나님을 신앙치 않고는 부를 수 없습니다.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당신은 정직한 자(신자)입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이것이 우리가 마땅히 할 바입니다. 죽음의 이슬이 눈썹 위에 차갑게 얹힐 때까지도 늘 찬양하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
시 33장 1~12절 / 강용규목사
사사기에 이어 사무엘상을 여는 그 서두에 한나라는 여인이 있습니다. 한나는 아이를 낳지 못하여 성전에 올라가서 눈물로 부르짖으며 “하나님 저에게 자식을 주시면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고 기도했습니다. 한나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아들을 선물로 주셨고, 그 아들은 사사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인 왕정 시대를 여는 사무엘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애굽 땅에서 고통당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모세를 태어나게 하시고, 애굽 공주의 손에 이끌려 왕궁에서 교육받게 하시고, 미디안 광야에서 40년동안 교육받게 하셨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아브라함도 자손에 대한 축복을 약속으로 받았지만, 고향을 떠날 당시 그에게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 별들처럼 많게 될 것이다” 는 약속의 말씀처럼 복의 근원이 되게 하셨습니다.
시편 33편은 “하나님의 입으로 만물을 창조하셨고, 하나님의 입의 기운으로 모든 만물이 만들어졌다.”고 말씀합니다. 천지 창조는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어서 10절, 11절에 “열방의 도모를 폐하시고 민족들의 사상을 무효케 하신다. 그러나 여호와의 도모는 영영히 서고 그 심사는 대대에 이르리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반드시 이루어지지만, 하나님을 떠난 사람의 계획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벨탑 사건이 말해 줍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계신 곳까지 이르기 위해 탑을 쌓기 시작합니다. 탑을 쌓는 그들의 마음안에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욕망과 하나님이 침범하지 않은 영역을 만들어 사람들끼리 살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벨탑을 흩으시고, 사람들 또한 흩으셨습니다. 사람의 도모는 이렇게 흩어지지만 반대로 하나님의 계획은 분명하게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하나님의 계획대로 창조하셨습니다. 지금은 추운 겨울입니다. 그러나 이 추위가 3,4월까지 지속되리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하나님의 질서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피어선 신학교를 세운 피어선 목사님은 설교할 때마다 자주 “여러분, 역사는 그의 역사입니다.”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역사는 그 분의 역사 바로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아테네에서 아테네 사람들, 이스라엘 사람들, 세계 모든 만민들을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인간의 역사 한가운데서 하나님이 일하고 계시다는 중요한 말씀을 했습니다.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의 힘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신처럼 대했습니다. 어느 날 느부갓네살 왕이 이상한 꿈을 꾸었고, 그 꿈을 해석하기 위해 다니엘을 불렀습니다. 꿈의 내용은 왕이 7년 동안 고통의 시간을 보내게 될 텐데 그 때에 우주 만물을 다스리는 분이 자신이 아닌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에서 모세와 아론은 애굽 왕 바로를 찾아가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에 나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라는 명령을 그에게 전했습니다. 그때 바로 왕은 자신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누구인지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며 하나님을 업신여깁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열 가지 재앙이 내린 후, 그는 세상을 다스리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시고 운행하십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은 세상의 한복판에서 역사하실 뿐만 아니라, 여러분과 저를 계획안에서 창조하시고 이 땅에 보내신 분이시기도 합니다. 저는 키가 120cm밖에 안 되지만 아프리카에서 존경받는 영웅인 ‘어니벨츠’에 대해 많은 감동을 받곤 합니다. 그는 스위스에서 태어났고, 장성한 후에도 그의 키는 120cm에 불과했습니다. 키 때문에 그는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모르는 이국땅인 미국으로 건너가게 됩니다. 크리스천은 아니었지만 그는 무언가에 이끌려 교회에 들어가게 되었고 처음으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설교 중에 “여러분, 여러분은 모두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태어났고,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분명한 계획이 있습니다.”는 말씀이 그의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그 후에 그는 자신의 존재의미를 다시 깨닫게 되었고, 아프리카 오지에 있는 문맹인들을 찾아가서 복음을 전하며 글을 가르치는 학교를 세우게 됩니다. 여러분, 이와 같이 하나님의 도모는 영원히 변함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은 항상 선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분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사자 굴에 있는 다니엘을 끌어내어 바벨론의 총리대신으로 세우셨고, 음모 때문에 시위대장 뜰 감옥에 있던 요셉을 끌어내어 애굽의 총리대신으로 세우셨고, 빌립보 감옥에서 숱한 매를 맞고 지하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과 실라도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하면 하나님의 계획이 빨리 이루어지지만, 불순종하면 매를 맞다가 돌아서서 한참 후에나 그 계획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순종해야합니다. 요나를 보십시오. 요나는 니느웨 백성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반대해서 욥바로 가는 배를 타고 다시스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나를 가만 두지 않으셨습니다. 풍랑을 일으켜 물속에 빠지게 하시고 큰 물고기 안에 들어가 죽음을 맛보게 하셨습니다. 그제야 요나는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니느웨에 가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불순종하면 요나처럼 고생을 하게 됩니다. 불순종으로 자신만 고생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까지도 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은 하나님의 심사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의 심사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사랑의 마음입니다.
여러분, 2009년이 밝았습니다. 선택해야할 일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먼저 순종하시고, 여러분의 선택권을 하나님께 맡기시며 “하나님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저는 따르겠습니다.” 는 마음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내어맡기며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살므로 존귀하고 행복하며 많은 열매를 맺는 2009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하나
시 33장 1~3절 / 김영대목사
1970년대 후반쯤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렸던 "해바라기와 나팔꽃" 이야기로 오늘의 말씀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이야기의 줄거리가 너무 간단해서 제가 조금 각색을 했습니다.
"담장 아래 어느 꽃밭에 해바라기 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두 형제는 자기들의 이상인 햇님을 향해 뻗어가며 서로 누구의 키가 더 크게 자랄 것인지 경쟁하고 있었습니다. 때론 담장 너머의 세계에 대해서 서로 재미있게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두 형제의 발 밑에 한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기댈 곳을 찾아 이 두 형제 사이를 기웃거리던 나팔꽃이었습니다.
나팔꽃이 먼저 작은 해바라기에게 부탁을 합니다. "작은 해바라기 님! 저는 혼자서는 설 수 없는 존재랍니다. 저는 누군가를 의지하고 자라야만 꽃을 피울 수 있답니다. 해바라기 님께서 저의 기댈 곳이 되어 주신다면 저의 가장 아름다운 꽃을 당신께 보여 드리겠습니다"
이 말은 들은 작은 해바라기는 버럭 신경질을 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뭐라고! 나는 너처럼 거추장스러운 존재는 딱 질색이야! 나는 누군가가 내 몸에 와 닿는 것조차 싫어. 그런데 너는 나를 칭칭 감고 올라가 나를 꽁꽁 묶을 것 아니니? 나는 저기 하늘에 보이는 햇님을 향해 커 가는 것만으로도 벅차단 말이야. 그러니 다른 데나 가서 알아보라구"
작은 해바라기의 가시 돋친 말에 나팔꽃은 잔뜩 주눅이 들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나팔꽃은 큰 해바라기에게로 고개를 돌렸습니다. 무척이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말입니다. 그런데 큰 해바라기는 발치에 있는 나팔꽃에게 빙긋이 웃음을 지어 보였습니다. 큰 해바라기의 그 환한 미소에 힘을 얻은 나팔꽃은 용기를 내서 부탁합니다.
"큰 해바라기 님, 저는 혼자서는 일어설 수 없는 존재랍니다. 저는 누군가에게 기대야만 자라서 꽃을 피울 수 있답니다. 좀 거추장스럽더라도 큰 해바라기 님께서 저의 기댈 곳이 되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큰 해바라기 님께서 허락만 해 주신다면 저는 가장 아름다운 꽃을 보여 드릴 수가 있습니다"
큰 해바라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팔꽃 아가씨! 걱정 마세요. 제가 아가씨의 버팀대가 되어 드릴게요. 사실 햇님을 바라보며 남보다 더 크게 자라려고 경쟁하듯 달려온 나의 삶은 각박하기만 했답니다. 아가씨와 함께 저기 하늘의 햇님을 향하여 더불어 여행을 하고 싶군요. 어서 아가씨의 여린줄기를 제 몸에 기대세요. 제 몸에 약간 거칠은 솜털이 박혀 있긴 하지만, 조심조심 타고 올라오신다면 못 오르리 없을 거예요"
큰 해바라기의 기꺼운 허락을 받은 나팔꽃은 기쁨에 겨워 해바라기의 몸을 힘껏 감싸 안으며 자라 올랐습니다. 마침내 나팔꽃은 연분홍 나팔꽃을 가득 피웠고 바깥세상의 아름다움도 구경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나팔꽃의 아름다움으로 인해 큰 해바라기는 더욱 아름답고 우아해 보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거센 비바람이 휘몰아 쳤습니다. 비바람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쓸어 갈 것처럼 거세게 몰아쳤습니다. 밤새도록 불던 비바람이 잔잔해지고 드디어 아침해가 돋았습니다. 나팔꽃은 부랴부랴 꽃을 피워 아침을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나팔꽃은 작은 해바라기의 모습을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작은 해바라기가 목이 꺾인 채로 흔들거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난밤의 비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목이 부러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더 많은 바람을 맞은 큰 해바라기는 상처하나 없이 든든하게 서 있었습니다. 그 거센 비바람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큰 해바라기를 꽁꽁 감싸고 있는 나팔꽃 덩굴이 보호했던 것입니다. 아침의 따사로운 햇님을 향해 큰 해바라기와 나팔꽃은 함께 행복했답니다.
이 이야기는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적, 고립주의적 인생은 결국 파멸에 이르며, 더불어 사는 삶이 복된 것이라는 교훈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즉, 큰 해바라기와 나팔꽃의 공존의 삶을 통하여 더불어 사는 삶이 곧 나를 살리는 길임을 가르쳐주며, 또한 기대어 살기를 요청하는 나팔꽃의 부탁을 거절했던 작은 해바라기의 삶은 곧 스스로를 죽이는 길임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아니 교회에도 남이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자기주위에 울타리를 쳐놓고 자기만의 신앙과 삶에 행복하고 만족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행복도 아니요, 참되게 사는 길도 아니라는 것을 '해바라기와 나팔꽃' 이야기는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자신만의 행복과 영역을 고집하게 되면 거기에는 꼭 문제가 생깁니다. 결국 그런 사람들의 마지막은 외톨이가 되고, 작은 해바라기가 보여준 씁쓸한 삶의 결말로 끝날 수 있는 것입니다. 작은 해바라기의 삶의 형식은 자신의 마음의 문은 잠그어 놓은 채, 그 누구도 자신 곁에 다가서지 못하게 하는 방식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겐 특별히 사회적 경제적 약자들은 자신의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나약하고 병들고 버림받은 사람들의 기댈 언덕이 되어주는 것을 딱 질색합니다. 남과는 키 재기나 하고 재산 모으기에 혈안이 되어 남이 내 것을 가져갈 세라 염려하는 이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삶은 결국 비바람이 불면 자기 생활도 꺾이는 것을 우리 나라의 근·현대사 속에서 많이 보아왔습니다. 지주나 재산가일지라도 일제하에서 혹은 공산주의 치하에서 소작인들에게 자비를 베푼 이들은 해방 후에도 별 어려움이 없었지만, 어려운 이웃들을 모른 채하고 가렴주구(苛斂誅求)한 이들의 말로는 비참했던 것입니다.
반면에 여기 큰 해바라기의 삶은 우리에게 또 다른 삶의 방식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더부살이'를 용납하는 '모듬살이'의 가능성입니다. 사실 요즘도 살아가기가 힘든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다. 꼭 돈 문제 때문만은 아니죠. 여러 가지 이유로 살기가 참 힘들고 복잡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런 때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특별히 더불어 사는 비결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강자가 약자를 품어주고 약자가 강자에게 기댈 수 있는 든든한 버팀대가 되어 주는 세상이 된다면 어떤 어려움이 닥쳐온다 할지라도 넉넉히 이겨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 세상은 정말 살만한 세상이 될 것입니다.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나쁜 사람"이란 말을 "나 뿐인 사람" "자신 밖에 모르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답니다. 남 생각 안하고 그저 자신의 삶의 안락함과 편안함만을 추구하는 그런 사람이 곧 '나쁜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의 인생은 결국 추하게 되고 비참한 말로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중세기 신비주의자였던 마이스터 에카르트는 이런 말을 했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선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부르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가장 잘 어울리는 이름은 공감(共感)입니다"라고 했답니다. 우는 자와 함께 슬퍼하고, 웃는 자와 함께 즐거워 할 줄 아는 사람이 되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공감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셔서 구원주가 되신 인카네이션(성육신)의 사건은 인간을 상황을 공감하시는 사랑 표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함께 삶을 나누고 마음을 같이 하는 것은 교회 공동체의 본질입니다. 초대 교회의 모습이 바로 그랬습니다.
우리 꿈마을엘림교회의 모든 성도님들은 하나님의 뜻에 서로 공감하고, 성도와 성도가 서로 사랑의 삶을 나누면서 기쁨과 아픔을 함께 나누는 공감이 넘치는 교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 목사와 교역자와 장로님들이 그리고 모든 성도님들이 하나님 앞에서 공감되는 예배를 드리고, 공감되는 삶을 살 때 우리에게 크신 복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혹 남과 접촉을 꺼려하고 두려워하며, 남이 자신이 세계에 개입하는 것도 싫어하며, 자신의 마음 한 구석을 파고드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여 스스로 높이 세운 벽에 갇혀 사시는 분은 안 계십니까? 스스로 그 벽을 깨고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알에서 부화하여 병아리로서 새로운 세계로 나오기 위해서는 자신을 감싸고 있는 껍질을 깨뜨리고 나와야 하듯이 나만의 세계에 움츠려 있는 자신을 성도와 이웃에게 노출시키시기 바랍니다.
이번에 우리 교회에서 '엘림가족 운동회'를 여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자신들을 서로에게 펼쳐 보이며 서로에게 좀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여백을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함께 부대끼고, 나누고, 먹고, 뛰다보면 일상에서는 전혀 느낄 수 없었던 새로운 기쁨과 행복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감탄하시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형제가 연합하여 함께 동거하며 사는 아름다움을 만들어 가는 신앙공동체입니다. 혼자서는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머리되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함께 지어져 가는 공동체가 곧 교회인 것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함께 하는 일에 대해서 매우 강조하고 있습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 133:1)"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반대로 하면 이렇게 됩니다. "형제가 분열하여 각기 살아감이 어찌 그리고 악하고 추한 일인고". 더불어 함께 하는, 연합하여 어떤 일을 이루어 가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전도서 4장 9절에서는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계속하여 10∼12절을 보면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연합하여 공동체를 이룰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이웃들이 기뻐하고, 자신에게도 기쁨이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번 '엘림가족운동회'를 통하여 그리스도인들만이 누릴 수 있는 코이노니아의 기쁨, 더불어 사는 아름다움을 맛보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해바라기와 나팔꽃
"나팔꽃아!
키 작다고 슬퍼하지 마"
해바라기가 말했습니다.
내가 있잖아.
날 감고 올라 와
내 허리 끝까지
저 높은 하늘까지
내가 네 허리뼈가 되 줄께.
"해바라기야! 외롭다고 슬퍼하지 마"
나팔꽃이 말했습니다.
내가 있잖아
내가 널 꼭 감싸 줄께.
새 노래로 찬송하는 삶
시 33장 1~5절 / 이수영목사
150편으로 이루어진 시편 전체는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라는 구절로 끝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당연히 해야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147:1에서는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선함이여 찬송하는 일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 하며, 146:2에서는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합니다. 145:1-2에서는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내가 날마다 주를 송축하며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라고 노래합니다. 실로 찬송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뿐만 아니라 영원히 해야 할 일이며 어쩌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에게 남을 유일한 일일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 나라에서는 더 이상 신학도 성경공부도 기도도 전도도 사회봉사도 필요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서는 재정부도 관리부도 다 없어지게 될 것이고, 북한선교부는 말할 것도 없이 영원히 사라질 것이며, 더더군다나 제일 힘들고 그래서 일부러 나서서 하겠다고 할 사람 별로 없는 경조부는 절대로 없을 것이지만, 성가대만 결코 없어지지 않고 영원히 남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찬송은 우리의 삶의 최종 목적이며, 개개인의 신앙과 교회의 모든 활동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시편인 33편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이 찬송에 관해 매우 의미있는 말씀들을 담고 있습니다. 그 1절은 찬송이 "정직한 자들이 마땅히 할 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절 은 수금과 열 줄 비파로 찬송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꼭 그 두 악기만을 쓰라는 것이 아니라 150편에서 말하듯이 나팔과 비파와 수금과 소고와 현악과 퉁소와 큰 소리 나는 제금 등을 대표적으로 표현한 것, 즉 할 수 있는 모든 악기를 동원하여 찬양하라는 것이라고 이해해야 할 줄 압니다. 3절은 "즐거운 소리로 아름답게" 찬송하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남이 하니까 그저 별 생각 없이 기계적으로 대충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운 마음으로 있는 정성을 다하여 가장 아름답게 찬송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4-5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그렇게 찬송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실하심과 공의로우심과 인자하심 때문입니다. 4-5절을 다시 봅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그가 행하시는 일은 다 진실하시도다/ 그는 공의와 정의를 사랑하심이여 세상에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
6절 이하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진실하시고 공의로우시며 인자하신 하나님으로 확신하게 하는 이유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행하신 일 속에서 그의 진실하심과 공의로우심과 인자하심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 일이란 다름 아니라 창조와 섭리와 선택과 구원입니다.
6-9절은 바로 창조주 하나님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그가 바닷물을 모아 무더기 같이 쌓으시며 깊은 물을 곳간에 두시도다/
온 땅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세상의 모든 거민들은 그를 경외할지어다/
그가 말씀하시매 이루어졌으며 명령하시매 견고히 섰도다".
10-11절은 만유의 주관자 되시는 섭리주 하나님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나라들의 계획을 폐하시며 민족들의 사상을 무효하게 하시도다/
여호와의 계획은 영원히 서고 그의 생각은 대대에 이르리로다".
12절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하여주심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13-19절은 선택과 언약에 성실하셔서 그의 백성을 굽어살피시며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굽어보사 모든 인생을 살피심이여/
곧 그가 거하시는 곳에서 세상의 모든 거민들을 굽어살피시는도다/
그는 그들 모두의 마음을 지으시며 그들이 하는 일을 굽어살피시는 이로다/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세어도 스스로 구원하지 못하는도다/
구원하는 데에 군마는 헛되며 군대가 많다 하여도 능히 구하지 못하는도다/
여호와는 그를 경외하는 자 곧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그들의 영혼?사망에서 건지시며 그들이 굶주릴 때에 그들을 살리시는도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와 선택과 구원의 역사를 그들의 삶 속에서 목격하고 성찰하며 그들에게 언제나 신뢰할 수 있는 도움과 방패가 되시고 언제나 의지할 수 있는 인자하신 하나님을 체험한 것입니다. 20-22절은 그들의 그 체험적 확신을 요약한 것입니다:
"우리 영혼이 여호와를 바람이여 그는 우리의 도움과 방패시로다/
우리 마음이 그를 즐거워함이여 우리가 그의 성호를 의지하였기 때문이로다/
여호와여 우리가 주께 바라는 대로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베푸소서".
여기서 우리는 3절에서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라"고 한 뜻을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니다. 보통 새 노래란 즐겁고 고마운 일이 새롭게 있을 때에 나오곤 하는 것일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항상 새 노래를 지어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겠습니까? 더더군다나 요즘같이 정치는 온 국민을 짜증나게 하고 분노하게 하며 경제는 어렵고 사업도 부진하며 실직위협과 취직걱정에 시달리느라 불안하고 답답하며 신나는 일도 신통하게 되는 일도 없는 때라면 우리가 어떻게 날마다 새 노래로 노래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와 선택과 구원의 역사를 돌아보며 "새 노래로 노래하라" 한 것은 우리에게 큰 의미를 던져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화나고 짜증나며 경제적으로 어렵고 온갖 걱정과 불안이 닥칠 때일수록 이 세상을 지으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주시고 우리의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삶 속에서 실제로 우리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 은혜를 입었으며 알고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감사할 일!
들을 베푸셨는지를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항상 우리의 도움과 방패가 되시며 언제나 우리가 신뢰하고 의지할 수 있는 하나님의 진실하심과 공의로우심과 인자하심을 새삼 확인하게 될 것이고 그 때에 우리는 날마다 새 노래로 노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그저께 오래간만에 만난 제 제자 목사 한 사람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가 최근에 외국에서 목회하는 한 친구 목사로부터 어떤 사람을 소개받아서 만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가 만나고 있는 사람은 병원에 입원해 있는 분입니다. 그 분은 의사였는데 태국에 의료봉사차 갔었고 고산족 소수민족 마을도 돌아본 후 돌아오기 전에 취미인 스쿠버 다이빙을 하다가 뇌를 다쳐 혼수상태에 전신마비가 되어 돌아와 시내 모 병원에 입원 가료 중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목사가 친구목사의 소개로 찾아가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의사들이 어떻게 손쓸 수 없었던 그 분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신체의 각 기능들이 회복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제자 목사가 말하기를 찾아갈 때마다 몸이 하나씩 하나씩 회복되는데 또 찾아간 어느 날 그 분이 한 번은 자기 보는 앞에서 하품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하품을 얼마나 시원하게, 그야말로 늘어지게, 하는지 보는 자기가 다 기분이 좋을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남이 하품하는 것보고 그렇게 감사하긴 처음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 돌아와 자기 교인들에게 그랬답니다: !
"여러분 하품하며 지낼 수 있는 것을 감사하십시오. 하품도 아무나 하는 것 아닙니다"라고.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품할 수 있는 것도 생각해보면 감사한 일입니다. 원할 때 눈을 감거나 깜박거릴 수 있는 것만 해도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릅니다. 만일 눈이 감겨지지 않거나 깜박거려지지 않는다면 얼마나 힘들고 괴롭겠습니까? 눈물나는 것도 감사할 일입니다. 눈에서 눈물 마를 날이 없는 분들은 생각을 돌려 아직 눈에서 눈물이 잘 흘러주는 것을 감사할 수 있기 바랍니다. 눈에서 눈물이 흐르지 않으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아십니까? 그러고 보면 우리는 감사할 일이 무궁무진한 것입니다. 숨쉴 수 있고 숨쉴 공기가 있다는 것도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들을 수 있는 것도 감사할 일이며, 볼 수 있는 것도 감사할 일이고, 걸을 수 있는 것도 감사할 일입니다. 일어설 수 있는 것도 감사할 일이고 앉을 수 있는 것도 감사할 일이며 누울 수 있는 것도 감사할 일입니다. 그러고 보면 하나님께 부를 새 노래는 매일 매일 끊어질래야 끊어질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볼 수 있는 눈만 있다면 항상 새 노래로 가득 찰 수밖에 없는 우리의 삶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특히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실패와 좌절을 겪으시고 근심과 불안 가운데 지내시는 믿음의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함께 우리의 눈을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에게로 돌려봅시다. 우리의 눈을 이 세상을 다스리시고 나의 삶을 주관하신 하나님에게로 향해봅시다. 나의 죄를 사하시고 나를 구원하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나에게 베풀어주신 온갖 은혜를 곰곰히 생각해봅시다. 우리가 깨닫지 못하고 누린 수없이 많은 복을 헤아려봅시다. 우리는 새롭게 새롭게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송할 우리의 노래는 날마다 새로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늘 새 노래로 하나님을 찬송하는 우리 모두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시33장 4~12절 / 황광민목사
어느 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하고 있는 탈북자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중국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는 중에 어느 목사님을 만나 성경을 받았습니다. 그는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고 성경을 열심히 읽었습니다. 그는 성경을 읽는 중에 믿음의 확신이 생겼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생겼습니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성경을 계속 읽으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성경을 13번 읽으면 한국으로 가게 해 주십시오." 그가 이렇게 기도한 것은 시편 33편 12절의 말씀에 크게 감동되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 바 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이 말씀이 탈북자의 마음을 크게 감동시켰습니다. 그는 이 말씀을 읽고 또 읽으며 깊이 생각해 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나라가 복이 있다는 판단을 내리고 예수를 잘 믿는 나라 한국으로 가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13번 읽으면 한국으로 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는 지금 한국에 와서 신학교를 졸업하고 전도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은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입니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의 마땅히 할 바로다.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고 열 줄 비파로 찬송할지어다.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공교히 연주할지어다." 아멘.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입니다. 우리를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 시의 배경은 히스기야로 알려져 있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어려움을 많이 당했으나 하나님께서 지켜 주셨습니다. 열왕기하 18장에 보면 히스기야가 앗수르의 랍사게의 공격을 받습니다. 랍사게는 편지를 보내 항복할 것을 명령합니다. 애굽을 의지해도 소용없으니 빨리 항복하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해도 소용없을 테니 항복하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였습니다.
그때 히스기야는 편지를 가지고 성전으로 올라갔습니다. 그 편지를 제단에 펼쳐 놓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유다를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 이사야를 보내 기도를 들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방법으로 히스기야와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셨습니다. 랍사게는 거짓 풍문을 듣고 급히 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후에 히스기야가 병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보내 죽게 되었으니 삶을 정리하라고 하였습니다. 히스기야는 그 말을 듣고 벽을 향하여 앉아 전심으로 기도했습니다. 열왕기하 20장 3절에 보면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로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라고 기도하며 심히 통곡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즉각 히스기야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이사야가 미처 성읍을 빠져나가기도 전에 하나님은 이사야를 돌이켜 히스기야에게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기도의 응답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눈물을 보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히스기야는 3일 만에 성전에 올라갈 수 있었으며 15년 간 생명이 연장되었습니다.
시인은 이러한 배경에서 보호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오늘은 봉독한 말씀을 중심으로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은 나라는 복이 있다>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권능의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나라의 경영과 도모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을 섬기는 백성들은 크신 능력으로 보호를 받습니다. 이제 본문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은 공의와 정의를 사랑하십니다.
5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저는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심이여 세상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공의와 정직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사야 30장 18절에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시라"고 하였습니다. 또 이사야 61장 8절에 "대저 나 여호와는 공의를 사랑하며..."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 11장 20절에 하나님은 공의로 판단하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본문이 "저는 공의와 정의를 사랑하심이여 세상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 판단하시는 분이지만 그의 자비하심도 충만합니다. 하나님께서 공의로만 판단하신다면 그 앞에 설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의 은혜와 자비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의 은총으로 보호를 받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만 강조하여 공의를 가지고 판단하시는 하나님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공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위해 공의를 행해야 합니다. 인간의 구원받는 과정에는 하나님이 부담하실 몫과 인간이 부담해야 할 몫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로 우리의 죄과를 담당하셨습니다.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을 믿지 않는 것이 불신앙이요, 불신앙의 결과는 심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몫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공의와 정직입니다. 이것을 행치 않는 것이 무책임이요 결과는 책망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를 행하는 사람에게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정의로운 나라를 굳게 세워 주십니다. 신명기 16장 20절에 "너는 마땅히 공의만 좇으라 그리하면 네가 살겠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을 얻으리라"고 하였습니다. 또 시편 106편 3절에 "공의를 지키는 자들과 항상 의를 행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하였습니다. 공의와 지적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보호가 있습니다.
백화점 왕 페니(J. C. Penny)는 1971년 95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 1,660여 개의 점포를 남겼습니다. 그가 처음 장사를 시작한 것은 1899년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콜로라도 롱몬트에 정육점을 냈습니다. 그런데 호텔의 주방장에게 뇌물을 주지 않으면 사업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페니는 신념을 굽히지 않고 정직하게 사업을 하려다가 실패하여 무일푼이 되었습니다.
그의 신념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는 무슨 일을 하든지 올바른 방법으로 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려고 하였습니다. 그는 이 말씀을 써서 가게에 붙여 놓고 장사를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비웃었습니다. 고지식해서 장사를 할 수 없다고 비난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업은 날로 번창하여 드디어 백화점의 왕이 되었던 것입니다. 정직한 페니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셨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으로 의를 이루어야 합니다.
4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말씀을 정직하며 그 행사는 다 진실하시도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면 정직해 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때 공의를 세울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십시오. 기독교는 단순한 기복종교가 아니라 말씀의 종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창조의 능력이 있습니다. 6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기운으로 이루었도다. 저가 바닷물을 모아 무더기 같이 쌓으시며 깊은 물을 고간에 두시 도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며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혼돈을 질서의 세계로 만드셨습니다. 공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던 것을 의미 있는 세계로 만드셨습니다. 그는 악한 영들을 통제하시며 능력의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바닷물을 모아 무더기 깊이 쌓으시며 깊은 물을 고간에 두었다는 것은 악한 영을 통제한다는 뜻입니다. 창세기 1장 2절에 있는 말씀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더라"와 일맥상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어서 세상을 하나님 보시기에 좋도록 변화시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에는 삶을 아름답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나라를 건강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세상의 어떤 도모나 사상도 하나님의 말씀을 능가할 수 없습니다. 10-11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열방의 도모를 폐하시며 민족들의 사상을 무효케 하시도다. 여호와의 도모(계획)는 영영히 서고 그 심사(생각)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라고 하였습니다.
민주주의 건 공산주의 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수 없습니다. 공산주의는 이미 그 허구성이 드러나 몰락하였습니다 .사회주의를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것도 하나님의 말씀의 수준을 따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으나 이 또한 하나님의 말씀의 수준을 따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세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 사회의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 시대를 이끌어 가는 시대정신이 되게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성도들의 책임이 큽니다.
셋째,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이 복이 있습니다.
12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 바 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면 의로운 백성이 될 것이며, 의로운 백성이 되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경외하는 백성들을 돌보십니다. 18절에 "여호와는 그 경외하는 자, 곧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저의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저희를 기근 시에 살게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또 20절에는 "저는 우리의 도움과 방패"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살피시고 지켜주십니다. 하나님은 자식을 보호하는 부모와 같습니다. 그의 자녀들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의 자녀들에게 복을 내려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노라 하면서도 믿음을 따르지 않는다면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요즈음 새벽기도회에서는 이사야를 강해하고 있습니다. 이사야가 예언하던 2700여 년 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무시당하고 있었습니다. 제사(예배)는 부지런히 드렸으나 말씀에의 순종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무수한 제물에 싫증이 났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제사를 집어치우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범죄 하는 백성들에게는 무서운 심판이 있을 것을 경고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그 말씀에 따라 생각하고 그 말씀에 따라 행동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계획의 기초로 삼으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의 중심이 되게 하십시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복을 주십니다. 그런 백성들을 하나님은 지켜 주십니다.
어느 아프리카의 왕이 영국 빅토리아 여왕에게 영국이 번영하는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여왕은 서슴지 않고 성경을 들어 보이며 하나님의 말씀이 비결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번영의 비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라의 부패를 막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 줍니다.
감사와 찬양의 이유
시 33장 8~19절 / 이성우목사(왜관교회)
오늘은 6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2014년 한 해를 새롭게 시작하고 나서 우리는 벌써 절반의 시간을 산 것입니다. 한 해의 절반을 마무리하면서 한번쯤 중간 점검을 해야 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중간 점검의 필요성은 이 세상 어디에나 존재합니다. 아무리 성능이 좋다고 뽐내는 기계들의 경우에도 결코 완벽한 상태로 오래가지 못하는 법입니다. 그러니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문제가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좀 더 좋은 기계는 문제가 생기고 고장이 나는 주기가 좀 더 길 뿐이지 결국 문제가 생기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각 개인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고 개인차가 있기는 하지만 결국 전체를 놓고 볼 때 아무런 문제가 없이 지속되는 인생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계도, 사람도 알고 보면 결코 완전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모두가 다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고 고장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외에는 아무것도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원래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나 기계를 대하면서 완전하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원래부터 완전하지 못하지만 설령 완벽해 보이고, 완전해 보이던 것도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문제가 생겨나게 되어 있는 것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들의 공통적인 특성입니다.
자, 그렇다고 한다면 지혜롭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은 완전하지 못해서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는 것에 대해서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한 번씩 중간 점검을 해서 문제가 생겼다 싶으면 서둘러서 보완하고 교정할 뿐만 아니라 수리해서 할 수 있는 한 원래의 모습에 가깝게 만들어서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렇게 중간 점검과 보수 작업을 한다고 해도 결국에는 언젠가는 정해진 시간만큼 역할과 기능을 수행하다가 그 이후에는 더 이상 정상적인 기능을 다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리고 말게 되는 것이 이 세상 모든 피조물들이 가지는 또 하나의 공통된 특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다보니 잘못하면 깊은 우울감에 빠질 수도 있지만 그래도 감사하고 정말 다행스러운 것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와 축복으로 우리 인간은 모든 피조물들이 가지는 두 가지 공통된 특성을 어느 정도는 넘어설 수 있는 길이 열려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하나의 큰 축인 육체적인 영역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도 해결되지 못하는 제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리고 말게 됩니다.
그러나 이 세상 모든 피조물들 가운데서 인간만이 가지는 또 하나의 큰 축이라고 할 수 있는 영적인 영역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사람으로, 그리고 성숙한 신앙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변화되고 하나님을 닮아가도록 새로운 기회를 주시며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가 돌아보면서 진단해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원래의 자리,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본성과 능력을 주셨습니다. 물론 안타깝게도 인간에게는 현재 자기가 잘 못된 상태에 있고, 더군다나 문제가 뭔지를 알 뿐만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 잘못된 상태를 온전하게 바로 잡을 수 있는지를 알면서도 미련스럽게 하나님이 주시는 감동을 뿌리치고 고집을 부리는 좋지 못한 본성도 우리에게 함께 주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어느 길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것은 자기 스스로의 결단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서 강제력을 동원하지 않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 가운데 하나가 바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어느 특정한 때를 주셔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정신없이 앞만 향해서 달려가던 우리의 삶을 잠시 멈추고 뒤를 돌아보면서 자신이 살아온 삶의 궤적을 살펴보면서 그동안 살아오면서 누렸던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헤아려 볼 줄 아는 마음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다가 덧붙여서 자신의 궤적을 살펴보면서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궤도를 수정하고자 하는 마음도 주신 것입니다. 바로 이 부분이 피조물들 가운데 다른 동물들과는 다르게 우리 인간만이 가지는 특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처럼 한 해의 절반을 살아온 시점이라든지, 한 해의 끝자락이라든지, 혹은 특별히 성경을 통해서 알게 된 다양한 절기들을 지키는 가운데 그 절기마다에 담겨져 있는 의미들을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 자신들의 삶을 하나님 앞에서 돌아볼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만약 우리 인간에게 이런 은혜가 주어지지 않았다고 한다면 아마도 우리 인간은 한없이 교만한 존재가 되고 은혜를 받고 살았으면서도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하는 배은망덕한 존재가 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더군다나 하나님 앞에서 감사할 줄도 모르고 그저 이기적인 욕심에 사로잡혀서 계속해서 은혜 받기만을 바라는 가운데 한없이 욕심스러운 존재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런 인간 군상들에게 나타날 수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자기의 욕심을 결코 만족시킬 수가 없게 되어서 계속적으로 불평불만을 가지고 살게 되고 결국은 행복하지 못한 인생을 살 수밖에 없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고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을 꼽는다면 아마도 자기에게 주어져 있는 행복한 환경에 대해서 그걸 행복으로 느끼지 못하고 그걸 통해 행복한 삶을 누리지 못하게 되는 사람일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인 시편 33편 8절~19절까지의 말씀은 앞서 말씀드린 그런 불쌍하고 어리석은 인간 군상과는 다르게 자신이 살아온 삶에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와 축복을 헤아려 보면서 자기 스스로도 감동하여 진정한 감격과 감사를 간직하고서 마음껏 하나님을 향해 찬양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도 자기처럼 하나님을 향해 감사하며 찬양하는 삶을 살도록 찬양의 자리로 초대하고 있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물론 이 시편의 작자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내용상으로 볼 때 우리는 그 사람이 바로 다윗이라고 하는 사실을 쉽게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선 시편 150편은 다섯 권의 책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그 중에서 첫 번째 책인 시편 1편부터 41편까지의 시편 가운데 거의 대부분이 다윗의 시라고 제목이 붙어 있을 뿐만 아니라 내용상으로 볼 때도 시편 33편은 다른 다윗의 시편들 가운데서 쉽게 발견되는 유사한 표현과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떻든 시편 33편이 다윗의 시편이라고 하는 어느 정도의 결론을 가지고 생각해 볼 때 우리가 아는 대로 다윗은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누리며 살았던 사람이었음을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다윗의 생애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다윗 자신도 분명하게 깨닫고 살면서 하나님을 향해서 남다른 열심을 가지고 감사하는 삶을 살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에게 주어진 남다른 은사인 찬양의 은사를 통해서 하나님을 마음껏 찬양하는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 23편 말씀에서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며, 필요한 것을 공급하시며 온전하도록 보살펴 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부족함이 없는 삶이었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다윗은 정말 하나님 앞에서 행복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다윗처럼 누군가로부터 은혜와 사랑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음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군가로부터 은혜와 사랑을 받게 되면 그 받은 은혜와 사랑만큼 자신이 소중한 존재요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 비해서 자존감이 상대적으로 훨씬 더 높을 뿐만 아니라 행복지수 또한 높은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하나님께로부터 그런 은혜와 사랑, 그리고 축복을 받고 살고 있음을 안다면 그런 사람의 자존감과 행복지수는 훨씬 더 높아질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은혜와 사랑, 그리고 축복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아가는 것은 또 다른 차원에서 삶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감사라고 하는 것은 마치 마르지 않는 샘물에서 물을 길어 올리는 것과 같아서 감사하면 감사할수록 더욱 감사가 풍성해지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행복한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아주 중요한 요소입니다.
본문 시편 33편은 국가적인 위기 상황에 처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재난을 면하게 된 것을 감사하는 찬양 시입니다. 그래서 이 시편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고 위기와 고난 가운데서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찬양의 가장 순수한 형태가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 그리고 하나님의 사역, 곧 하신 일을 찬양하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하심,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과 심판 등의 구체적인 증거를 들어서 하나님께 찬양을 올리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또한 기쁨과 즐거움을 주시는 하나님과 여기에 대하여 감사와 찬양으로 응답하는 인간 사이의 아름다운 관계를 노래하고 있으면서, 찬양은 성도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필수 사항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본문에서 다윗은 감사와 찬양의 이유에 대해서 분명하고 증거하고 있는데, 첫째,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 곧 진실하심과 말씀의 성취, 둘째, 변함없으신 하나님의 통치하심, 셋째, 하나님의 섭리하심, 곧 구원하심과 안전한 보호를 들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다윗은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가 되심이 감사와 찬양의 이유가 됨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본문에서 다윗은 감사가 인색한 우리에게 감사의 중요성을 가르쳐 주고 있으며, 우리의 삶 속에서 갖가지 크고 작은 고난과 시련이 있을 때, 이런 것들을 극복하는 진정한 해결 방법이 바로 전능자이신 하나님께만 있음을 명심하고 전폭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함을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다윗이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에 감사와 찬양의 이유에 대한 초점이 있다기보다는 그런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분인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곧 다윗이 굳건한 신앙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주며, 이러한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을 하나님은 결코 실망시키지 않는 분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족하고 허물이 많은 우리가 거룩하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와 사랑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께로부터 은혜와 사랑, 그리고 축복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하는 것 자체가 무엇보다 가장 분명한 감사와 찬양의 이유가 되는 줄로 믿습니다. 짧게는 지난 상반기 6개월의 삶, 길게는 여기까지 살아오신 여러분의 삶의 궤적을 돌아보시면서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와 사랑, 그리고 축복들을 한번 헤아려 보시고 그 가운데서 발견되어지는 감사와 찬양의 이유들을 하나씩 찾아내서 다윗처럼 온 마음과 열정을 다하여 감사하고 찬양하심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고 날마다 하나님과 보다 깊고 보다 멋진 사랑의 관계를 만들어 가시는 가운데 그 누구보다도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복 있는 백성
시 33장 8~12절 / 이수영목사
대한민국의 온 국민은 얼마 전 행복하기 그지없는 한 달을 살았습니다. 한·일 월드컵 축구열기로 뜨거웠던 지난 6월 한 달 동안의 그 흥분과 감격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 벅차 오릅니다. 한국전쟁이 끝난 다음 해인 1954년 처음으로 출전한 이래 단 한 번도 이겨보지 못해 1승의 한이 맺혀있던 우리나라 축구대표팀이 21세기 들어 첫 월드컵 대회인 이번 한·일 월드컵 대회에서 동유럽의 강호 폴란드를 맞아 산뜻하게 2:0으로 첫 승리를 거두었을 때 그 믿어지지 않던 현실 앞에서 우리가 맛보았던 놀라움과 감격은 아직도 우리의 뇌리에 생생합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의 놀라움과 감격의 행진은 거기서 그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반신반의하면서도 주최국의 체면과 홈 그라운드의 이점을 생각하며 1승 다음으로 욕심을 내보았던, 그 한없이 높아보이기만 하던 16강 진출의 벽을 훌쩍 뛰어넘었을 때는 정말 가슴이 터지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 선수들은 세계 5위라는 포르투갈의 그 날카롭고 줄기찬 공격을 완벽하게 봉쇄하며 무력화시켰습니다. 우리 선수들은 세계 최고 공격수의 한 사람이고 대회 시작 전부터 우리에게 공포의 대상이던 선수 피구(Figo)를 도무지 무엇 하러 그라운드에 나왔는지, 나와서 뭘 하고 들어갔는지 모르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이번 대회에서 가장 멋진 골이라고까지 평가될 정도로 시원한 한 골을 넣으며 비현실적인 승리의 꿈을 현실로 만들어놓았습니다.
우리는 그 16강 진출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너무 행복했습니다. 16강전에서는 이번 대회의 강력한 우승후보의 하나였고 항상 세계최강의 하나로 꼽혀온 이딸리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우리 선수들은 대포르투갈전에서 너무 많은 체력을 소모한 터였기에 이딸리아를 이긴다는 것은 사실상 기대하기 힘든 일이었고, 더 못 올라가도 한은 없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거칠고 교활한 플레이로 우리를 압도하던 이딸리아에게 선취골을 내주고 패색이 짙어가던 경기종료 2분전 우리는 기적같은 동점골을 넣었고 연장전으로 끌고 가 통쾌한 역전골을 터뜨리며 아주리군단을 격파하고 말았습니다. 한국의 8강 진출이라는 대이변이 연출되는 순간 온 국민은 너나할 것 없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껑충껑충 뛰었고 눈물을 흘리며 미친 듯이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처음으로 승리의 맛을 본 한국의 꿈은 이미 억누를 수가 없었습니다. 4강 문턱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나라가 또 하나의 우승후보였고 축구강국 정도가 아니라 축구광국이라고 할 수 있는 스페인인데도 더 이상 도무지 두려울 것이 없었습니다. 이딸리아와의 경기에서 연장전까지 가며 혈투를 벌이느라 선수들은 거의 다 탈진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한국선수들을 겁먹게 할 나라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의 태극전사들은 연장전후반을 합쳐 120분간의 대회전을 치룬 후 승부차기에 들어가 다섯 꼴을 한 골도 실축하지 않고 깨끗하게 성공시키며 무적함대라 불리우는 스페인을 격침시키고야 말았습니다. 무적함대의 격침, 이것은 곧 대이변을 넘어서 하나의 신화가 창조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아시아국가가 최초로 세계축구4강의 대열에 합류한 신화입니다. 그것도 출전사상 첫 승을 거두는 그 대회에서 곧바로 4강에 합류했다는 신화입니다. 전세계는 우리나라의 4강진출을 월드컵 축구경기의 역사를 통틀어 최대의 이변이라며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래서 준결승전에서 우리와 격돌한 나라, 월드컵 우승을 세 차례나 거머쥐었던 전차군단 독일이 우리 태극전사들에 맞서 얼마나 긴장하고 죽을 힘을 다해 뛰었습니까? 우리는 정말 우리나라 "대한민국"에 대해 얼마나 자부심을 느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온 국민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자부심을 갖게 한 것은 단지 축구경기에서 4강에 올랐다는 사실만이 아니었습니다. 광화문과 시청 앞 등 전국에서 군중이 운집하여 함께 대형 화면으로 경기를 보며 응원할 수 있는 곳에는 어디서나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붉은 옷으로 갈아입고 하나가 되는 놀라운 광경을 목도한 것입니다. 57년 전인 1945년 8월 15일 일본제국의 무조건 항복과 함께 대한민국의 주권회복이 이루어진 소식에 온 국민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 이래 이렇게 하나가 되어본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개인주의이고 단결력이 부족하다는 우리의 국민성에 대한 종래의 평가와 우려를 우리의 기억에서 깨끗이 지워버리며 세계의 여러 나라가 한국에 대해 두려운 생각을 가질 정도의 무서운 단결력을 만천하에 과시했던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자부심을 갖게 한 것은 단지 많이 모여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만이 아니었습니다. 세계가 더욱 놀란 것은 경기가 끝난 후의 보여준 질서의식이었습니다. 젊은이들이 미리 비닐봉지와 청소도구들을 준비했다가 모였던 자리에 남겨진 쓰레기들을 깨끗이 치우곤 하는 광경에 세계의 언론을 경의를 표했고 우리 스스로도 얼마나 흐뭇했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젊은이들이 이토록 자랑스럽고 믿음직해 보였던 때가 없었습니다. 그저 정치인들만 빼놓고는 온 국민이 다 자랑스러웠습니다. 그저 정치인들만 정신차려주면 이제 우리나라는 정말 세계가 부러워할 좋은 나라가 될 것 같다는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방약무도한 일제가 동원하여 왕궁에 난입시킨 칼잡이들에 의해 왕비가 무자비하게 죽임을 당하는 등 온갖 수모를 당한 끝에 나라를 빼앗기고 35년간 일제의 억압 아래 온 나라와 온 국민이 온갖 약탈을 당했던 우리입니다. 광복 후 5년만에 전쟁이 발발하여 3년간 전국이 잿더미가 되었던 이 나라입니다. 이 나라가 반세기도 채 안 되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울 뿐 아니라 최첨단의 시설을 완벽하게 갖춘 축구경기장들과, 친절한 미소와 흠잡을 데 없는 질서의식과, 세계최강 프랑스를 비롯한 우승후보들이 줄줄이 탈락하는 드라마보다도 더 드라마틱한 경기들과, 축구경기보다 더 재미있다는 한국민의 응원모습으로 세계를 놀라게 하고 즐겁게 해주는 나라로 우뚝 섰다는 것은 정말 가슴 뿌듯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이번 월드컵 공동주최국인 일본도 16강 진출이라는 칭찬할 만한 성과를 거두기는 했으나 승전가도를 질주하는 우리의 모습을 그저 부러움 속에서 지켜봐야만 했습니다. 오랜 역사 속에서 줄곧 우리를 위협하거나 우리에게 대국 행세를 해왔던 중국은 어땠습니까? 단 한 골도 넣지 못하고 전패하며 예선탈락하는 반면, 축구에 관한 한 그들의 우상들인 유럽의 강호 4개국을 줄줄이 격파하며 승승장구하는 한국축구를 바라보면서 속이 뒤틀려 우리나라에 온갖 험담과 욕설을 퍼붓는 옹졸함으로 그들의 좌절감과 공한증을 달래야 했습니다. 또한 오늘날 세계의 유일한 초강대국 미국은 예선탈락직전에 한국 덕분에 뒷문으로 16강에 끼어들 수 있었습니다.
국민들 사이에서는 이 월드컵개최 성공을 국가의 이미지를 개선하고 국가경제를 발전시키며 국력을 신장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말들을 많이 합니다. 물론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날 우리나라가 이토록 발전하게 된 원인이 무엇인지를 짚어봐야 하며, 우리나라가 진정 행복한 나라가 되기 위한 길이 어디에 있는지를 바로 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우리에게 이 물음들에 대한 대답을 준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이 들어있는 시편 33편은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는 예배용 시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8-9절은 땅이 이루어진 것이나 그 땅이 견고하게 유지되는 것이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땅위에 있는 사람들이나 모든 나라는 그 창조주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옛날부터 자연을 두려워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연을 두려워하기보다 자연을 지으신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개인이나 민족이나 나라가 견고히 서는 것은 다른 어떤 것이나 그 누구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에 달린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본문 10-11절은 하나님을 창조주로서 뿐 아니라 섭리주이시며 주권적 통치자로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생각만이 영원한 것이고, 하나님의 계획과 생각에 어긋나는 모든 민족이나 나라의 사고나 계획은 언제든지 사라지거나 쓸모없이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민족과 이 땅 위에 존재했던 모든 나라들은 한 때는 불교 또 한 때는 유교의 영향 아래 있었으며, 대대로 중국과 러시아와 일본과 미국의 생각과 계획 그리고 그들의 이익과 정책에 따라 좌지우지되기도 했고, 우리 스스로도 시대에 따라 친중, 친러, 친일, 친미정책을 번갈아 취하며 지내왔으며 그 열강들의 날개 아래에서 안전을 구하려고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복된 삶을 보장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2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말씀을 따르며 그를 하나님으로 삼고 섬기는 나라가 복 있는 나라라고 분명히 말하는 것입니다.
한 때도 그랬고 아직도 그렇지만 일부 젊은이들이나 지식인들이 좌경화가 우리의 갈 길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또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오랫동안 굳게 믿어온 것은 반공만이 우리의 살 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부정하는 공산주의사상을 받아들였던 나라들은 70년만에 다 피폐해졌고 결국은 살아남기 위하여 공산주의를 포기하고 말았음을 역사는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반세기전까지만 해도 남한과 같은 처지에 있었지만 공산주의로 무장하고 하나님을 부인하며 교회를 탄압하면서 지낸 북한이 오늘날 남한과 비교할 때 그토록 비참하고 불행한 처지에 놓이게 된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역사의 교훈입니다.
공산주의나 좌경화는 우리 민족의 살 길이 아니라 확실하게 망하는 길임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반공이 곧 우리를 살리고 행복하게 하는 길이라고 여겨서는 안됩니다. 월남도 반공했지만 망했습니다. 반공이 우리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는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로 믿고 따르지 않는 반공은 힘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나라를 향해 베푸신 그 비밀스럽고 놀라운 은혜를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국가의 주권을 되찾고 자유독립국가로 재출발하게 된 것이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공산괴뢰들의 침략을 물리치고 공산화의 위기로부터 벗어난 것이 우리 자신의 손으로 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21세기 초엽에 월드컵 축구경기 개최를 성공시키며 우리의 국력과 국가의 위상을 전세계에 과시할 수 있었던 것도 우리 스스로의 역량으로 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정말 크고 놀라운 은혜로 우리의 역사 속에서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 때문임을 믿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역사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주인도 배달민족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행복한 나라 만들 수 있습니다. 본문 12절이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우리나라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 살게 하신 거민들입니다. 하나님의 땅 위에 사는 거민들은 마땅히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해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 8절이 그렇게 노래합니다: "온 땅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세상의 모든 거민들은 그를 경외할지어다."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과 계획과 생각을 따르는 백성, 그런 나라가 오래 갑니다. 9-11절이 그것을 선언하지 않습니까: "그가 말씀하시매 이루어졌으며 명령하시매 견고히 섰도다/ 여호와께서 나라들의 계획을 폐하시며 민족들의 사상을 무효하게 하시도다/ 여호와의 계획은 영원히 서고 그의 생각은 대대에 이르리로다."
오늘은 우리 교회가 광복주일로 지키는 주일입니다. 57년 전 광복을 얻었을 때의 기쁨과 행복이 우리 민족의 영원한 행복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에게 광복을 주신 이는 오직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에게 대한민국을 주신 이가 하나님이심을 믿고, 그 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삼으며, 그를 경외하고 그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복 있는 백성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하나님의 기업이 되는 나라
시 33장 10~12절 / 김재곤목사
오늘은 해방기념주일로 먼저 우리나라의 근대 역사 가운데 일본의 침탈사를 살펴보면서 오늘의 말씀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1876년 일본은 대륙침탈의 야욕을 가지고 조선 땅을 대륙침탈의 교두보로 삼고자 강화도를 공격하며 조선과 강제로 강화도조약을 맺고 그동안 굳게 닫혀있던 이 땅의 문을 열게 합니다. 그리고 1894년에는 그동안 조선 왕실의 조공을 받으며 이 땅에서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던 청나라와 조선에 대한 세력 각축전이라 할 수 있는 청일전쟁을 일으켜 승리함으로 이 땅에서 우월한 지위를 확보합니다. 그러자 조선 정부는 그런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1897년에는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그리고 임금의 호칭도 왕이 아닌 황제로 바꿉니다. 그런데 조선이 러시아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나라 이름도 바꾸고 왕의 호칭도 바꾸자, 일본은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으려 하고 있던 영국과 미국의 지지하에 1904년 이 땅에 군대를 파견하여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여향력을 차단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러일전쟁을 일으킨 다음 승리합니다.
그렇게 청나라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그런 군사력을 바탕으로 이 땅의 치안을 담당해주겠다고 하면서 군사경찰제도를 일방적으로 시행하며 이 땅과 백성들을 지배할 기반을 닦아 놓습니다. 그리고 대한제국 정부에도 일본 정부가 추천하는 고문을 재무부와 외교부에 두도록 요구하여 얻은 다음 대한제국의 재정권과 외교권도 침탈합니다. 그리고 1905년 11월에는 대한제국과 외국과의 모든 관계는 일본 외무성을 통해서만 할 수 있다는 을사조약을 대신들을 협박하여 체결하는데, 이 조약이 체결됨으로 대한제국은 나라 이름은 있으나 실제로는 국권을 상실한 나라가 됩니다. 그래서 이 땅에 있던 영국과 청나라와 미국과 독일과 벨기에 등의 외국 공관들이 철수합니다. 그 뒤 일본은 1906년에 을사조약에 따라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삼아 한성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안중근 의사에 의해 1909년 하얼빈에서 암살당한 이토 히로부미를 초대 통감으로 파견하여 대한제국의 외교와 내정을 비롯한 모든 정사를 장악합니다.
그러자 고종은 1907년 헤이그평화회의에 특사를 보내 을사조약의 무효와 대한제국의 주권을 호소하려 했습니다만 실패합니다. 그리고 특사 파견 소식을 알게 된 일본은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킵니다. 그리고 1910년에는 3대 통감으로 부임한 데라우찌로 하여금 이 땅을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구체적인 내용을 시행하게 합니다. 그 결과 1910년 8월 22일에 이완용과 데라우치 사이에 일본과 대한제국을 하나로 합친다는 합병조약이 조인되었고, 이에 반발하는 원로대신들을 연금한 뒤인 1910년 8월 29일에 순종의 이름으로 나라를 일본에 넘긴다는 조칙이 내려집니다. 8개 조로 된 이 합병조약의 제 1조에는 “대한제국 전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히, 그리고 영구히 일본제국에 넘긴다”고 나와 있는데, 일본은 그 때부터 통감부를 폐지하고 총독부를 세워 이 나라와 백성을 통치합니다.
그래서 그 해 그 날로부터 이 나라는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하기까지 햇수로는 36년, 그리고 날수로는 12,771일 동안 일본의 짓밟힘을 받습니다. 그 36년의 하루 하루는 정말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의 시간들이었고, 그래서 당시 우리 민족은 매일같이 해방을 간절히 소망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상록수의 작가 심훈은 그 해방의 날을 소망하며 1930년 3월 1일에「그 날이 오면」이라는 시를 썼는데, 이 시에는 당시 우리 민족 모두의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그 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면은
삼각산이 일어나 더 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 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 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할량이면
나는 밤 하늘에 나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이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리이까
그 날이 와서 오 오 그 날이 와서
육조 앞 넓은 길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나이다.
오늘은 그렇게 일본에 나라를 빼앗겨 나라 없는 백성으로 온갖 억압을 받다가 그 억압에서 해방된지 76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그래서 오늘을 우리 교회에서도 해방기념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이 해방기념주일에 우리는 무엇보다도 나라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즉 나라가 얼마나 소중한가, 그리고 이 소중한 나라를 어떻게 잘 지켜 번성하는 나라가 되게 할 것인가, 그리고 그렇게 이룬 번성의 열매로 우리나라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우리가 생각해야 한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시간에 방금 말씀드린 나라에 대해 생각해야 할 세 가지 내용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1. 나라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는 월남전이 종전된 후 보트 피플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고, 요즘에는 난민이란 말도 많이 듣고 있습니다. 보트 피플이나 난민은 모두 다 나라를 잃고 다른 나라에 정착하기 위해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두말할 필요 없이 그들이 그렇게 비참하게 떠돌아다니는 이유는 다 나라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또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 중 많은 전쟁들이 자기들의 나라를 세우기 위한 전쟁입니다. 그 전쟁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기도 하고 큰 부상을 입기도 하는데, 다 자기들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목숨을 내놓고 싸우다 그리된 것입니다.
우리 민족도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기에 그런 비참함과 아픔을 겪었던 민족입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빼앗은 다음 저지른 만행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정리하면 크게 다섯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경제 착취입니다. 당시 우리나라의 어린이 사망률은 세계 2위였고, 백성의 평균 수명은 44세였습니다. 분명 그렇게 된 원인은 제대로 먹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먹을 것이 부족했던 이 땅에서 생산된 곡물의 60% 정도를 그들은 강제로 빼앗아 일본으로 가져갔습니다. 땅에서 생산된 곡물만 그랬습니까? 바다에서 생산되는 것들도 그리했습니다. 먹는 것만 그리했습니까? 지하자원도 그리했습니다.
둘째는 인적 수탈입니다. 그들은 1937년에 국민 징용령을 공포하여 이후 해방이 될 때까지 강제로 우리나라 사람들을 징용했습니다. 그 숫자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만 일제강제동원연구가인 다케우치 야스토라는 사람의 조사결과로는 약 80만 명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 중 43,000명 정도는 사할린에서 징용 생활을 했고, 나머지는 일본 본토와 남양군도에서 징용 생활을 했습니다. 임금도 제대로 주지 않았고, 밥도 제대로 먹이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죽이는 것도 서슴치 않았습니다. 또 2003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발표한 자료를 보면 학병을 포함한 군인으로 징집된 사람의 수가 23만 명 정도입니다. 이들은 일본과 중국과 만주와 남양군도 등 일본이 벌여놓은 전선에 투입되어 전쟁에 참여했고, 그 중 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었습니다. 또 조선여자정신대를 1943년에 만들었습니다만 그것을 만들기 훨씬 이전부터 비공식적으로 12세부터 40세까지의 여성들을 정신대로 뽑아가 군수공장에서 노동을 하게 했고 또 위안부로 데리고 가서 성노예로 삼았는데, 그 숫자가 얼마인지는 현재 알 수가 없습니다.
셋째는 문화 말살입니다. 그들은 우리 글을 사용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말로 말하는 것도 못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이 발행하던 신문인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와 당시 많은 사람들이 구독하던 잡지인 문장지도 폐간시켰습니다. 또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을 직장별 또는 지역별로 조직하여 일본문화를 따르게 하면서 민족문화를 말살하려 했습니다.
넷째는 민족 말살입니다. 그들은 내선일체나 일선동근론을 내세우며 일본과 조선은 하나라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창씨 개명을 통해 성을 일본성으로 바꾸게 하고, 또 백성들에게 황국신민서사를 외우게 하며 자신들이 일본신하로 일왕과 일본에 충성한다는 것을 맹세하게 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우리 민족을 말살하려 했습니다.
다섯째는 신앙 억압입니다. 그들은 신사참배나 동방요배와 같은 것을 강요했고, 종말론에 대한 설교도 못 하게 했으며, 성경에서 예언서를 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반일운동의 산실이라 생각하며 교회당을 파괴했고, 많은 신앙의 지도자들도 옥에 가두었으며, 1943년에는 우리 성결교회를 강제로 해산시키기도 했습니다.
이런 만행들을 일본이 이 땅에서 저질렀습니다. 그런데 그런 만행을 그들이 저지를 수 있었던 원인이 무엇입니까? 두말할 필요 없이 나라가 망했기 때문입니다. 분명 나라가 망하지 않았다면 그런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나라의 소중함을 알아야 합니다. 나라가 망하면 백성이 고통을 당합니다. 그리고 나라를 잃으면 백성이 비극을 겪습니다. 정말 내 나라가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감사할 내용인지 모릅니다. 이 해방기념주일에 나라의 소중함을 분명하게 인식하는 분들이 되기 바랍니다.
2. 이 소중한 나라를 어떻게 잘 지켜 번성하는 나라가 되게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십시다.
빼앗겼던 이 나라를 어떻게 우리가 되찾을 수 있었습니까? 여러 이유들을 사람들이 말합니다만 절대적이고 결정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함석헌 선생은 그의 책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해방은 하나님이 이 땅의 백성들에게 갑자기 주신 선물이었다’고 말합니다. 분명 하나님은 본문 13절 말씀에 나오는 대로 세상을 굽어보시며 모든 인생을 살피시는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 아무리 많은 군대와 힘센 용사가 있어도 그 군대와 용사가 역사를 움직이는 것 아닙니다. 분명 하나님이 우리나라를 굽어보시고 우리나라 백성들을 살피시며 해방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은혜를 왜 하나님이 베풀어 주셨습니까? 그것은 이 땅의 해방을 위해 수고한 귀한 분들을 하나님이 보셨기 때문입니다. 진정 이 땅에 하나님이 해방의 감격을 주시기까지 해방을 소망하는 신앙인들의 간절한 기도와 독립운동을 위해 인생을 바친 애국지사들의 헌신이 있었습니다. 주기철, 유관순, 박봉진을 비롯한 많은 신앙인들은 일제하 36년 동안 3.1운동을 비롯한 여러 독립운동을 주도하다가 생명을 잃었으며, 또 교회는 예배 때마다 모든 신자들이 한마음으로 간절하게 해방을 위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안중근, 이봉창, 윤봉길과 같은 많은 애국지사들과 독립군들은 일제하 36년 동안 몸을 바쳤습니다. 그리고 심훈, 이육사, 윤동주와 같은 많은 애국 시인들은 펜을 가지고 일제에 저항했습니다. 그런 신앙인들과 애국지사들과 애국시인들을 하나님이 보셨습니다. 그래서 일본을 원자폭탄으로 항복케 하셨고, 이 나라에 해방을 주셨습니다. 그렇게 되찾은 나라가 이 나라입니다.
그러기에 이제는 그렇게 되찾은 소중한 나라를 우리가 잘 지켜야 하고 번성하게 해야 합니다. 정말 우리가 중요합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이 나라를 잘 지킬 수있고 번성하게 할 수 있습니까? 인도의 수도 델리에는 인도의 위인 마하트마 간디를 기념하기 위해 그의 시신을 화장했던 곳에 만들어 놓은 공원이 있습니다. 이 공원을 라즈갓(Rajgaht)이라고 부르는데, 이 공원 안에 세워져 있는 화강암에 간디의 망국론으로 알려진 7대 사회악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 내용은 첫째, 원칙 없는 정치입니다. 둘째, 노동 없는 부입니다. 셋째, 양심이 마비된 쾌락입니다. 넷째, 도덕적 가치 없는 지식입니다. 다섯째, 도덕성 없는 상업입니다. 여섯째, 인간성 없는 과학입니다. 일곱째, 자기 희생없는 종교입니다. 그렇게 간디는 이 7가지 사회악이 나라에 있게 되면 나라가 망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간디의 이 말로 오늘의 우리나라를 살펴보면 우리나라가 흥할 나라입니까, 아니면 망할 나라입니까? 국리민복을 말합니다만 정치에 원칙이 없습니다. 땀 흘리지 않고 쉽게 부자가 되려 합니다. 쾌락을 위해 못 할 짓이 없습니다. 학력도 높아지고 지식도 많아졌지만 세상은 점점 더 삭막해져 갑니다. 돈을 버는 데 있어서 양심이나 배려는 안중에 없습니다. 과학의 발전으로 오히려 자연이 파괴되고 인간이 소외됩니다. 그리고 종교도 사업이 되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이 오늘 우리나라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가 걱정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간디의 망국론은 그 내용을 반대로 바꾸기만 하면 흥국론이 됩니다. 다른 사람은 그만 두고라도 신앙인인 우리부터 회개할 것 회개하고, 고칠 것 고치면 그것이 나라를 지키는 힘이 됩니다. 선조들의 기도와 희생으로 되찾은 소중한 이 나라를 잘 지키며 번성하는 나라로 만드는 분들이 되기 바랍니다.
3. 이룬 번성의 열매로 우리나라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나라는 이제 선진국이라 불리워지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가 선진국 대열에 서게 된 것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이 이제 선진국이 된 우리나라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럼 그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그 뜻은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는데, 첫째는 온 세상을 향해 복음을 들고 나아가 하나님이 아들과 바꾸신 세상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세상의 어려운 나라들과 사람들을 번성으로 얻은 열매를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영국을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불렀습니다만 언제 영국이 그런 말을 들었습니까? 신앙적 시각에서 그 때를 말한다면 그 때는 영국의 신앙인들이 1804년에 당시 성경을 보급하던 여러 단체들을 묶어 영국성서공회를 조직한 다음, 세계 수십 개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여 세계 곳곳에 성경을 보급하던 때입니다. 또 건국한지 250년밖에 되지 않는 미국을 세계최대강국으로 부르고 있습니다만 언제 미국이 세계최대강국이 되었습니까? 이것도 신앙적 시각으로 그 때를 말한다면 그 때는 19세기 후반부터 수많은 미국의 선교사들이 세계를 향해 나가 복음을 전하며 사랑의 봉사를 시작하던 때입니다. 즉 영국이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된 이유, 그리고 미국이 세계최강대국이 된 이유는 그 나라들이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섬기면서 그 신앙으로 갖게 된 힘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는 선교를 시행했기 때문이고, 사랑으로 봉사하는 섬김을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런 나라들이었기에 하나님은 그 나라들을 하나님의 기업으로 삼으시고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세계최대강국이라는 복을 주셨습니다.
저는 이 원리가 오늘 우리나라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으신 분이시고, 하나님을 잘 섬기는 나라를 기업으로 삼으시겠다는 약속을 하나님의 뜩을 이루어 드리려는 나라에게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잃었던 나라를 다시 찾는 감격을 76년 전에 누렸습니다. 그리고 그 날 이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기독교 신앙이 오늘에 이 땅 사람들의 최대의 신앙이 되었습니다. 그런 신앙 까닭에 우리나라는 오늘에 선진국으로 불리워지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번성의 열매를 우리나라나 이 땅의 사람들은 움켜쥐고 있으면 안 됩니다. 그 번성의 열매로 온 세상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려야 합니다.
진정 우리나라는 하나님을 더 잘 섬기는 나라가 되어 오늘보다 더 번성하는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번성의 열매로 복음을 모르는 세계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선교하는 나라가 되어야 하고,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받는 세계의 사람들을 사랑으로 섬기는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신앙인인 우리는 아직도 하나님을 모르는 이 땅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우리나라를 하나님을 정말 잘 섬기는 나라로 만들어야 하고, 나라의 평안과 번성을 위해 기도하면서 그 기도의 내용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더 번성하는 나라가 됩니다. 소망하기는 번성의 열매로 오늘보다 더 크게 땅끝까지 선교하는, 그리고 어려운 나라를 사랑으로 섬기는 우리나라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저는 해방기념주일인 오늘의 설교를 12절 말씀을 여러분과 한목소리로 읽으면서 마치려고 합니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이 말씀 그대로 우리나라가 철저하게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아 하나님의 기업이 되는 복을 받는 나라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기업이 되는 복을 우리나라가 받아 세상 마지막 날까지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잘 이루어 드리기를 소망합니다.
건강한 사귐이 있는 교회
시 33장 11~16절 / 이정익목사
요1서 1:1-4
우리교회는 55년 1월 30일 날 창립되었습니다. 금년으로 58주년이 맞습니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집안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58년 만에 오늘의 교회로 성장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역할을 다하는 교회로 성장시켜 주셨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세상에는 교회가 많습니다. 전국 곳곳에 교회들이 많이 세워져 있습니다. 산골에도 농촌에도 어촌에도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 덕분에 농촌 산골에서 살던 우리들이 모두 예수를 알게 되었고 만나게 되었습니다. 제가 태어난 우리 동네에 일찍이 교회가 있었다는 것이 오늘에 와서 생각해 보니까 그것은 무한한 은혜였고 축복이었습니다. 그때 울려 퍼졌던 교회의 종소리가 우리의 영혼의 잠을 깨웠습니다. 그 은혜로 오늘 우리들이 이 자리에 나와 앉아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하면 무한한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자면 그것은 교회가 아니고 예배당입니다. 예배당은 예배드리는 장소이고 교회는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체를 교회라고 부릅니다. 그 모임에 참여한 사람들은 모두 주님을 구주로 고백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주님을 닮고자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를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세상에서 하나님 백성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을 교회라고 부릅니다. 마태복음 16장18절, 18장17절을 보면 “교회”라는 말이 나옵니다. 교회를 헬라어로 “엑 클레시아”(ek klesia)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ek”라는 말은 “out“이라는 말로 ”나온 사람들” 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klesia 또는 kaleo” 라는 말은 “calling”이라는 말로 부르심 이라는 뜻입니다. 이 두 단어가 합성되어서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부름 받은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순전히 하나님이 불러 세상으로부터 구별해 내온 백성들의 모임을 교회라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사랑과 구속과 구원의 능력으로 선택받은 사람들이 교회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불러냄을 받은 무리들이 매주일 모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들이 모두 교회들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모두 교회이고 이 교회들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점에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또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에베소서 1장22-23절을 보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습니다. 또 예수를 교회의 머리로 삼았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교회의 머리는 예수이고 성도들은 지체들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이고 우리는 그의 가지들입니다.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각각 재능을 주셨습니다. 성도들은 주께로부터 받은 그 재능을 활용하여 교회공동체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도의 봉사이고 헌신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몸을 불살라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여러분들을 불러 모아 교회를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모두 예수의 지체들이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이 모여 다시 예수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교회의 머리이시고 우리는 모두 주님의 지체들인 것입니다.
동시에 교회는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속성이 거룩한 곳입니다. 그래서 부름 받은 그리스도인들을 성도라고 부릅니다. 고린도전서 1장2절을 보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교회는 거룩한 무리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성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말할 때는 성도라고 부르고 전체적으로 말할 때는 교회라고 부릅니다. 성도를 헬라어로 “하기오스”라고 부르는데 그 말은 거룩하다는 뜻도 있고 또 따로 구별된 사람들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는 할 수 있으면 거룩해야 합니다. 거룩함을 유지해야 합니다. 세상이 타락해도 성도들이 모인 교회 공동체는 거룩해야 합니다. 교회는 거룩한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거룩해야 할 공동체가 자꾸만 세속화 되고 타락하고 자꾸만 갈등하고 불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거룩성을 상실해서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오늘 교회를 향해 손가락질을 합니다. 왜냐하면 거룩해야 할 공동체가 왜 세속화 되어 가느냐 그 말입니다. 시장터에는 사람들이 싸우고 술주정하고 속고 속이고 해도 사람들이 아무 소리 안합니다. 그곳은 타락한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욕을 합니다. 비난을 합니다. 왜냐하면 거룩한 사람들이 모인 곳인데 왜 거룩하지 않고 세속화 되어가느냐 하고 욕을 하고 비난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속화되어 가면 맛 잃은 소금같이 됩니다. 버려집니다. 불행해 집니다. 그래서 교회는 거룩함을 유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거룩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교회는 이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또 교회는 “복음 증언 공동체”입니다. 동시에 교회는 성도들이 모여 예배하고 예수를 증언하는 공동입니다. 교회가 할 일은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세상에 예수를 증언하는 일입니다. 고로 모든 교회는 증언 공동체들입니다. 오늘 교회들이 직무 유기하는 교회가 많습니다. 오늘은 성장이 멈춘 정체시대이고 전도가 어렵다고 전도를 포기한 교회도 있습니다. 그것은 죽은 교회입니다. 교회가 퇴보하고 불화하고 갈등하는 교회는 직무를 유기하는 교회입니다. 교인들의 영을 죽이는 교회입니다. 몸에 종기가 나면 온 신경이 그곳에 집중되어 다른 일을 못하듯이 교회가 갈등하고 불화하면 종기 난 것처럼 온 신경을 그곳에 쏟게 됩니다. 이에 치통이 있어 보십시오. 온 신경이 하루 종일 그곳에 집중되어 일을 해도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교회가 할 일은 모든 역량을 모아 증언하는 일에 쏟는 일입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한마음을 품으라고 질책했습니다. 빌립보교회에는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여성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이 두 여성 지도자는 극심한 경쟁을 하였습니다. 매사 불화를 야기하고 편을 갈라 갈등을 유발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서로 경쟁적으로 일을 많이 해도 주님은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빌4:2) 권고하였습니다. 우리교회는 큰 장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건강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해마다 부흥합니다. 각 지체들이 열심히 헌신하고 할 일을 다 하고 있습니다. 서로 한마음을 품으려고 애를 씁니다. 서로 큰소리를 자제하고 협동심을 발휘하고 헌신하고 섬기려고 애를 씁니다. 교회는 거룩한 공동체로서 이 거룩성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을 잃으면 교회는 버려진 소금이 되고 맛 잃은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성령의 사귐의 공동체”입니다. 교회를 한자로 가르칠 敎자와 모일 會자를 씁니다. 모이게 해서 가르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아주 소극적인 의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사귈 交자와 모일 會 자를 써서 交會가 되어야 한다고들 말합니다. 주 안에서 서로 사귐을 강조하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교회는 가르치기도 하고 예배도 있어야 하지만 동시에 사귐과 교제와 나눔이 있는 곳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거룩한 친교 즉 코이노니아라고 말합니다.
본문 요한일서 1장1-3절을 보면 교회의 본질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특히 3절을 보면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성도들이 왜 예배당에 모이는가 하면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예배만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모여 예배하고 또 전도하고 복음을 증거도 해야 합니다. 또 교회는 모여서 증거 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도 아닙니다. 그 후가 더 중요합니다. 증거 한 뒤에는 서로 받아들이고 함께 사귀고 연합해서 한 가족이 되고 한 형제를 이루는 생활을 합니다. 그것이 사귐이고 코이노니아 입니다. 교회에는 성령의 권능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 성령의 권능은 이 영적인 코이노니아가 잘 이루어져야 나타나게 됩니다. 코이노니아가 없는 교회는 그만큼 활동성이나 기능이 약화된 교회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성령의 은사가 너무 많았습니다. 신유의 은사, 예언의 은사, 방언의 은사 등 은사가 충만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성도들 간에 영적 코이노니아 잘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파벌과 갈등이 있어 은사 선용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그 좋은 은사를 욕되게 한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는 은사도 풍성하였습니다. 거기에 영적 코이노니아도 거룩하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들은 매일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떡을 떼며 찬미하고 서로 나누었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날마다 믿는 사람들이 늘어났다고 했습니다. 성령의 능력은 코이노니아와 함께 갈 때 왕성하게 일어납니다. 교회는 서로 모여 섬기고 나누고 보완하는 일을 할 때 사랑이 표현되고 발휘되게 됩니다. 교회가 이루어야 할 이 코이노니아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수직적 코이노니아
먼저 하나님과 수직적으로 사귐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교회를 잘 지어 놓았습니다. 그것으로 다가 아닙니다. 그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하나 되는 일입니다. 성경에 사랑 은혜 감사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그 단어들은 모두 하나님과의 사귐을 이루는 단어들입니다. 성경공부를 통해서 주님의 진정한 뜻이 무엇인지 연구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수직적으로 관계를 더 깊이 가질 것인가를 연구하고 어떻게 하면 주님과 더 긴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를 연구하며 서로 은혜를 나누고 지체들끼리 은혜를 공유합니다. 그리고 복음전도를 통해서 새신자가 영입될 때 그들을 섬기고 세웁니다. 그때 그곳에 성령의 은혜가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수직적인 코이노니아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먼저 수직적으로 건강해야 합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건강해야 하고 나와 주님과의 관계가 건강해야 합니다. 그때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하고 인정되었을 때에는 나는 주저하지 않고 뛰어나가 행동하게 되는 성령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또 그 일을 위해서 뜨겁게 기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수직적인 관계와 사귐만 이루어지게 되면 성령의 권능에 사로잡혀 살아가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로 구성된 공동체라면 그곳에 누가 들어와도 아주 쉽게 사귐과 친교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처음 나온 사람도 쉽게 사귐에 동참할 수 있게 됩니다. 그 공동체는 불이 아주 잘 타오르는 화덕과 같습니다. 그 잘 타는 화덕에는 아무 나무든지 생나무 가지든지 무엇을 넣어도 잘 불태울 수 있습니다. 뜨거운 공동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교회 공동체가 이런 강한 중심을 이루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그 공동체가 수직적으로 잘 교제가 이루어진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먼저 수직적으로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와 친교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면 그곳에서 강력한 힘과 영적 은사를 발휘할 수 있는 능력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리고 그 힘은 또 다른 친교를 이루게 됩니다.
수평적 코이노니아
그것이 이웃을 향한 친교를 이루게 하는 힘입니다. 수직적인 코이노니아는 하나님과 관계를 말한다면 수평적인 코이노니아는 이웃과의 사귐을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좋아야 하지만 이웃과의 관계도 중요합니다. 내 옆에 있는 이웃이나 동료들이나 지체들 간에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교제를 통해서 서로 돌보는 삶이 수평적인 코이노니아 입니다. 서로 참여하고 통용하고 사귀고 교제하고 나누는 생활입니다. 오늘은 개인주의 의식이 아주 강한 시대입니다. 아파트 문을 굳게 닫아 놓고 교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집도 크고 돈도 있고 먹을 것도 있는데 외로운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건강하면 이웃과의 수평적인 관계도 잘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웃을 위해서 서로 헌신하고 중보하고 나누는 삶을 살게 됩니다.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고 중보하고 돕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수평적인 코이노니아 입니다. 교회는 이 친교가 잘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약한 사람에게는 힘이 되고 모르는 사람에게는 도움이 되고 시험이 있는 사람에게는 중보기도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수직적인 사귐이 잘 이루어지게 되면 수평적인 사귐을 위한 동기나 힘이나 능력은 아주 자연스럽게 공급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의 기본적인 순서입니다.
대사회적 코이노니아
대사회적 코이노니아는 교회 주위에 고통당하는 이웃과 함께 하는 삶을 통해 공동체적 사회를 이루는 일입니다. 교회 주변을 보면 온정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곳이 많습니다. 주님은 위로의 주님이고 위로의 성령이십니다. 교회는 위로의 처소가 되어야 합니다. 6.25때 교회에 사람들이 몰려왔던 것은 교회가 위로의 처소였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코이노니아를 이루는 곳입니다. 위로는 하나님과 친교를 이루고 아래로는 이웃과 친교를 이루고 옆으로는 대 사회와의 교제를 이루어야 합니다. 초대교회 때는 이 코이노니아가 잘 이루어졌습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고 주님께서는 그 교회에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가장 잘 조화된 코이노니아의 모습입니다. 그 자리는 수직적인 코이노니아가 이루어진 자리이고 수평적인 코이노니아도 이루어진 자리이고 대 사회적인 코이노니아 역시 잘 이루어진 자리입니다.
그래서 어느 곳이나 기 그룹을 끌고 나가는 리더가 중요합니다. 구역의 리더가 구역 활동만 잘 해도 이 세 가지 코이노니아를 잘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구역 안에는 믿음이 약한 분도 있고 오래 믿은 분도 다 있습니다. 구역 리더가 진정 정신과 믿음과 사명이 있다면 이들을 모두 온전하게 세워야 하겠다는 의지가 발휘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누구든지 섬기고 나누고 중보하고 세울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각 기관에서, 각 부서에서도, 교회학교에서도, 각 성경공부에서도 다 마찬가지로 이룰 수 있습니다. 그 공동체에서 코이노니아가 잘 이루어지도록 리드하면 코이노니아가 주는 은혜가 폭발하게 될 수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예수를 만나게 되고 동기를 얻게 되고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리더들이 많이 모여 있는 교회가 건강한 교제가 이루어지는 교회입니다. 그 시대에 할 일을 다 하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이 날마다 믿는 사람들을 더하게 해 주시는 부흥하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교회는 60주년을 앞에 두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그런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을 향해 할 일을 다 하고 주님을 향하여 할 일을 다 하고 새 세대들을 키워내는 교회로 성장해야 해야 하겠습니다. 교회는 건강한 영적 교제를 이루는 공동체입니다.
부활과 하나님 나라
시 33장 11~14절 / 이성희목사
여러분, 부활의 감격이 한 주간 내내 살아있었습니까? 부활의 기쁨은 하루살이 기쁨이 아니라 매일의 기쁨입니다. 연중무휴 즐거움입니다. 부활의 삶은 하나님 나라의 삶입니다. 변화한 삶입니다. 새로움의 삶입니다. 감격의 삶입니다. 죽음에서 깨어나고, 새 생명을 얻은 삶이란 그 어디나 하늘나라입니다. 부활의 소망과 확신이 있는 사람은 이미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삽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의 나라와 대비되는 나라입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나라는 유대 왕국입니다. 이상적인 다윗 왕국이 그들에게 있어서 나라였습니다. 이상적인 왕이 나타나서 이상적인 나라를 세우고, 민족이 해방과 자유와 평화를 누리는 것이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그리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심은 세상적 현실적 왕국이 아니라 영적 왕국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나님의 나라란 하나님의 주권이 임재한 곳입니다.
천국에 대한 경험을 쓴 책들이 제법 있습니다. 그 가운데 펄시 콜레의 “내가 본 천국”이란 책이 한참 읽혔습니다. 이 책에 보면 하나님의 나라가 지구의 북극에서 수직으로 6시간을 가면 지구의 8배 크기의 천국이 있다고 합니다. 천국의 옆에는 지구의 4분의 1만한 기록실이 있어 사람들의 모든 잘잘못을 기록한 방이 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이런 천국은 아닐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꼭 이런 기록실이 필요하겠습니까? 개인의 신비적 체험이나 환상을 주관화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주관적 신앙 경험을 객관화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가시적인 성격보다 하나님의 주권을 의미합니다. 로마서 14:17에는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구체적으로 의로 다스려지는 곳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이 세상은 불의가 지배하지만 불의를 의로 바꾸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평강이 있는 곳입니다. 이 세상 나라는 평강하지 못합니다. 늘 불안하고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평강합니다. 희락이 있는 곳입니다. 이 세상은 기쁨보다 근심, 걱정, 염려가 더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기쁨만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가 우리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7:21에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합니다. 우리 안에는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지 맥도날드의 소설 ‘공부와 커디에’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가장 낮고 깊은 곳에서 훌륭하게 일해낼 수 있는 사람일수록 저 높은 꼭대기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법이다. 왜냐하면 둘 다 따지고 보면 본질상 하나이기에”. 사실 높은 곳과 낮은 곳은 서로 통합니다. 극과 극은 서로 통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사는 사람들은 가장 현실적인 실제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 나라의 시민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잘 살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전 삶은 하나님 나라의 전파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디에 있습니까? 에덴 동산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은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상, 인간을 위해 만들어 주신 에덴동산은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하나님이 만족하신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마음대로 다스리시는 나라입니다. 이 나라가 하나님 나라입니다. 에덴 동산의 자리라고 알려진 이라크가 지금 전쟁으로 폐허가 되다시피 했습니다. 바벨탑의 유적, 아브라함의 고향 갈대아 우르와 하란이 있는 곳, 유브라데스강과 티그리스강이 있는 곳, 인류문명의 발상지 가운데 하나인 곳이 이렇게 무너졌습니다. 이 전쟁은 지구적인 재앙입니다. 전쟁을 원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하나님은 전쟁이라는 방법으로 하나님 의를 나타내십니다. 예수님은 원래 예수님 자신이 만드신 나라를 회복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세상이 파괴되지 않았으면 오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파괴되었기 때문에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십니다. 마태복음 4:17에는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준비하십니다. 40일간 금식하시고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첫 번째 선포가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예수님이 첫 번 째로 선포하실 만큼 하나님의 나라는 중요한 예수님의 선포의 내용이었습니다. 마태복음 9:35에는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중요한 목적이 천국 복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본격적으로 전파하신 것은 천국 복음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0:7에는 제자들에게 말씀합니다.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왔다 하고”. 제자들에게 권하신 것도 천국의 선포였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합니다. 천국의 시민 자격을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마태복음 18:3에는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합니다. 천국의 입장권을 설명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은 이 외에도 무수합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이 세상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를 엄격하게 구분하십니다. 어떤 사람들이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는 것에 대하여 질문을 하였을 때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에게 드리라고 합니다. 하나님 나라와 이 세상 나라를 구분해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8:23에는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하십니다. 이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를 엄격하게 구분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세상이 아닌 하나님 나라에 속한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둘째, 부활 후 40일간은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으면 바로 승천하시지 왜 40일간 세상에 더 계셨습니까? 이것은 중요한 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남아 있는 일을 두고 가실 수가 없었습니다. 남아 있는 그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40일간은 하셔야 할 일은 부활을 입증하시는 일과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시는 일입니다. 부활을 입증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부활 후에 15번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승천하실 때까지 꾸준히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셨습니다. 40일이란 유대인들이 잘 쓰는 수입니다. 노아가 방주를 다 만들고 나서 40주야 동안 비가 내렸습니다. 호렙산에서 모세는 40주야를 하나님을 대면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계명을 받았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데스 바네아에서 정탐꾼을 보내어 가나안을 정탐하게 할 때에 40일간 정탐을 하게 하였습니다. 블레셋 장군 골리앗은 40일 동안 이스라엘 군대를 위협하다가 다윗을 만나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40일간 금식을 하셨습니다. 40이란 수는 유대인들에게는 중요한 수입니다. 4는 땅의 수이며, 10은 세상적 만수입니다. 흔히 꽉 찬 수라고 합니다. 빈틈이 없는 수입니다. 40일은 꽉 찬 날 동안을 의미합니다. 40일간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할 일이 많으실 텐데 예수님은 이 날 동안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하나님 나라의 비유를 보세요. 하나님 나라는 알아듣지 못할 이상한 나라입니다. 천국은 마치 씨 뿌리는 자가 길가에 뿌리고, 돌밭에 뿌리고, 가시떨기에 뿌리고, 옥토에 뿌린 씨와 같다고 합니다.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렸는데 가라지가 난 것과 같다고 합니다. 천국은 마치 겨자씨와 같다고 합니다. 천국은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다고 합니다. 천국은 진주 장사와 같다고 합니다. 천국은 물고기를 모으는 그물과 같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이 말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십니다. 이게 무슨 나라입니까? 나라라면 국가의 왕이 누구인지, 요즘 같으면 입헌 군주제인지 공화제인지, 국토가 어는 정도인지, 중요 생산물이 무엇인지를 소개해야 합니다. 이것이 나라를 설명하는 것이고 국가를 홍보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알아듣지 못할 얘기만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하신 다음에 다시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을 가르치십니다. 마태복음 12:28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했다고 하지만 그들은 임한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누가복음 17:21에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는 하나님의 나라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얘기해줘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다시 40일간 더 세상에 계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후 40일간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소중한 기간이었습니다. 곧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셔야 하는데 이전에 꼭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얼마 후면 떠나는 입장에서 얼마나 간절하고 황급하게 전했겠습니까? 이런 긴급한 것이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셋째, 부활 후 사도들은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이전에는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아무리 얘기해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그들은 그 말씀을 알아들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만 하더라도 그들은 알아듣지 못하여 세상 나라의 자리다툼을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이 말씀하신 나라는 이 세상의 나라가 아니라 저 세상의 나라인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유일한 소망이며 궁극적 목적인 것도 알았습니다. 사도행전 8:12에는 빌립이 그 후에 사마리아에 가서 전도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승천 후에 제자들이 전할 것은 하나님의 나라밖에 없었습니다. 사도행전 14:22에는 바울이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에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외칩니다. 사도행전 19:8에는 바울이 에베소에서 “석 달 동안을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였다고 합니다. 사도행전 28:31에는 바울이 로마에서 이태동안 머물면서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고 합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의 결론입니다. 사도들이 한 일의 결론입니다. 지금도 사도행전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계속 하나님의 나라는 전파되고 있습니다. “예수 믿고 천국 갑시다”는 초기 한국 교회의 전도 구호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 교회가 기복적이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한국 교회는 초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선포의 중심 주제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절대 소망이었습니다. 사전에 보면 ‘소문’이란 단어를 “다른 사람이나 사건에 대하여 습관적으로 들어내는 말”이라고 합니다. 소문은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습니다. 소문은 틀릴 수도 있고 맞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 소문을 평생 전달한 분입니다. 하늘나라 소문은 ‘거룩한 소문’입니다. 기쁨의 소식이며 아름다운 소문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당부는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분부한 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사도들이 끝까지 목숨을 내놓고 한 일도 “하나님 나라” 소식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거룩한 소문’입니다.
결론
로널드 롤하이저는 그의 책 ‘영성을 찾아서’에서 “현대인은 교회에 관해서는 휴가중이다. 하나님 나라는 원하지만 교회는 원치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휴가 아니지요? 여러분은 다 우등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나라는 교회의 연장입니다. 교회에 관하여 휴가이면 하나님의 나라도 휴가가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 도마의 일생 가운데 외경은 이러한 일화를 적고 있습니다. 도마는 노예 신분으로 목수가 되어서 인도에 건너갔다고 합니다. 그 당시 정상적인 방법으로 인도에 가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노예가 되어 팔려가는 길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도마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자원하여 노예가 되고, 목수 기술을 배워 인도로 건너갔습니다. 그의 기술이 뛰어남을 보고 인도 왕은 거액의 돈을 주면서 왕궁을 지으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도마가 왕궁을 지으려는데 마침 인도에 참혹한 흉년이 들어서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 모습을 본 도마는 도저히 그 많은 돈으로 사치스런 집을 지을 수가 없어서 그 돈으로 양식을 구하여 죽어 가는 사람들을 살리고 구제를 하였습니다. 기일이 되어 왕이 살펴보니 궁전은 되어있지 않고 돈마저 도마가 다 허비했습니다. 왕은 노하여 도마에게 사형언도를 내리고 죽일 날짜까지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도마의 사형집행 전날에 왕의 사촌 동생이 죽었습니다. 죽어서 하나님 나라에 가서 묘한 환상을 보고 깨어나 돌아왔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가보니 굉장히 화려한 큰 궁전이 하나있는데 너무 좋아서 곁에 가보니 그것은 바로 자기의 형인 인도 왕의 궁전이었습니다. 그래서 천사에게 “이 궁전을 누가 지었습니까?”하고 물었더니. “사도 도마가 왕을 위해 지은 것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다가 깨어나 돌아와서 그 사실을 형에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때 왕은 깜짝 놀랐습니다. 도마를 사형집행을 하려던 참인데 그가 자기를 위해 하나님 나라에 큰 궁전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왕은 도마를 석방시켜 주고, 오히려 도마의 말을 따라서 개종하여 예수를 믿게 되고, 도마를 도와서 힘써 복음 전도를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현세만 바라보던 왕의 눈이 열려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하나님 나라의 보화를 보았을 때 그의 생명이 변화되고 풍부해지고 아름다워지고 거룩해졌던 것입니다. 카톨릭의 신학자 한스 큉은 “목사가 교회를 향해 파송된 성직자라면 평신도는 세상을 향해 파송 받은 성직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파송 받은 성직자입니다.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소문을 전파해야 할 성직자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세상으로 파송합니다. 나가서 부활을 전하십시오. 하나님 나라를 전하십시오. 세상 사람들의 집을 저 하늘 나라에 지어드리십시오. 그리하여 주님이 그렇게도 전하기 원하셨던 하나님 나라를 세상에 전하고 세상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나라 복음
이성희목사 / 시편 33:12-14, 누가복음 4:42-44
서론
사람들은 가장 이상적인 나라를 누구나 꿈꾸고 있습니다. 이상향, 낙원, 선경(仙境), 서방정토(西方淨土)와 같은 이상적 나라를 꿈꿉니다.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등장하는 ‘무릉도원’, 제임스 힐튼의 소설에 나오는 ‘샹그리라’ 그리고 전설적 황금의 나라 ‘엘도라도’를 사람들은 그리워하고 머릿속에 상상의 나라를 만들어냅니다.
허균의 ‘홍길동전’에는 ‘율도국’이라는 우리나라 소설에 등장하는 이상향이 있습니다. 사회변혁의 기치를 들었던 홍길동이 이상향인 율도국을 오키나와 남부 류우큐에 세운 이야기입니다. 왕이 홍길동 체포령을 내리지만 신출귀몰한 홍길동은 잡히지 않았습니다. ‘홍길동을 병조판서에 임명한다’라는 방을 붙여 놓으면 홍길동이 나타나게 될 것이므로 그 때 홍길동을 체포하려고 하였습니다. 방을 본 홍길동은 대궐에 당당히 들어가서 임금님께 인사를 한 후에 하늘로 솟아올라 구름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홍길동은 남경을 가다가 율도국을 발견하고 왕이 되어 이상적인 나라를 다스립니다. 율도국은 태평성대를 이루고 홍길동과 왕비는 시신을 남기지 않은 채 연기처럼 사라지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상적인 나라는 꿈입니다. 사람이 통치하고 사람들이 사는 동안 이상적인 나라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이상적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에는 완벽하게 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와 같은 나라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에덴과 마지막에 우리 모두가 갈 하나님의 나라 외에는 완벽한 나라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에는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라는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간절하게 소망하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를 드리는 사람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대로 살아야 합니다. 사랑과 정의와 평화, 이런 마음으로 살아야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옵니까? 복음을 알고 믿으면 하나님의 나라가 옵니다. 복음을 알지 못하면 하나님의 나라도 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복음을 통하여 도래합니다. 복음이 아니면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는 방법은 없다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5:3에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할 수 있는 조건입니다. 심령이 가난할 수 있는 자는 누구입니까? 복음을 가진 자가 심령이 가난할 수 있습니다. 심령이 부요한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필요로 하지 않는 자입니다.
누가복음 17:21에는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라고 합니다. ‘안에’라는 말은 헬라어로 ‘엔토스’라는 말인데 이 말은 영어로 말하면 ‘in’이 아니라 ‘within’ 혹은 ‘among’이라는 뜻입니다. ‘within’이라는 뜻은 복음을 가진 사람의 내면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는 말입니다. ‘among’이라는 뜻은 그리스도와 제자들의 공동체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목적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이웃에게 전합시다. 복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합시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이 땅이 복음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되게 합시다. 이것이 복음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나라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누가복음 4:43 상반절에는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라고 합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기쁜 소식인 복음의 내용은 굉장히 넓고, 다양합니다. 우리들의 삶에서 건강, 장수, 재물, 명예, 성취, 합격, 결혼 등은 잠시 동안의 기쁨을 주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다 가져도 하나님의 나라가 없으면 참 기쁨이 없으며 복음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은 영원한 기쁜 소식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집 걱정이 없습니다. 아버지의 집에는 있을 곳이 많습니다. 돈 걱정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부요는 은행과 비교할 바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오래 사는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영원히 사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에서처럼 음식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무엇을 먹을까’라는 것은 쓸데없는 걱정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처럼 명예를 추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거기에는 모두가 면류관을 쓰고 레드 카펫보다 영광스런 황금 길을 걷고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고통이나 걱정도 없습니다. 그 곳에는 아픔도 애통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죽음을 걱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거기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는 곳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나라를 복음으로 얻을 수 있다고 하니 복음이 얼마나 위대합니까? 얼마나 좋고 기쁜 소식입니까?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때 천사들이 목자에게 나타나 노래하면서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하러 왔다고 하였습니다.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므로 도래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께서 마음에 오시므로 도래합니다.
마태복음 4:23에는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초기 사역은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제가 2009년에는 한 해 내내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근래 강단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말씀이 거의 없다고 하는 글을 읽고 하나님의 나라를 강조한 것입니다. 요즘에는 설교에도 번영, 신앙, 은사, 사역 등을 외치면서 제일 중요한 주제인 하나님의 나라가 빠져 있는 것을 봅니다. 핵심을 빼고 핵심이 없는 복음을 논하는 시대가 되었다고 비판합니다. 이런 때에 복음이 쇠퇴하고, 복음이 쇠퇴하면 교회가 쇠퇴합니다. 신앙의 본질이 훼손되면 그리스도인들이 무기력해지고, 교회가 사회로부터 비난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국가를 강력하게 만든 방법들이 있습니다. 경제, 국방, 기술, 정보 등을 강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치가들은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 이슬람의 자본을 들여오고 문화와 종교도 함께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강하게 만드는 데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복음 외에 강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복음 때문에 강해지고, 복음 때문에 자랍니다.
초대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역동성을 실천하였습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성도들은 그들의 선포에 하나님의 나라를 빼놓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복음 전파는 하나님의 나라의 선포였습니다. 초대교회가 고대하는 것은 예수님이 그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 다시 오시는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는 것이고,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것이었습니다.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그 찬양의 후렴 가사에 “오 주님 같은 친구 없도다. 저 천국 없으면 난 어떻게 하나. 저 천국 문을 열고 나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라고 합니다. 저는 이 찬양을 들을 때마다 ‘천국이 없으면 어떻게 하다니 별 걱정을 다 하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찬양의 주제는 그런 뜻이 아니라 천국이 확실히 있다는 강조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의심할 바 없이 확실히 있습니다.
“만일 죽음 후에 천국이 없다면”이라는 말이나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이라고 한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입니다. ‘만일 천국이 없다면’, ‘만일 부활이 없다면’이란 말보다 더 근본적으로 ‘만일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복음은 거짓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너무나 확실한 사실입니다.
신비주의자 스베텐보리는 아이작 뉴턴에 버금가는 과학자였지만 영계를 경험한 후 과학을 접고 27년 동안 경험한 영계를 전하였습니다. 그의 글과 말을 모은 ‘위대한 유산’이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천국은 자기가 평생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곳입니다. 그것을 ‘쓰임새’라고 합니다. 천국에서 할 일 없는 영인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들은 모두 쓰임새를 통해 기쁨을 찾고 보람을 찾습니다. 천국에서는 실직자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면에서 완벽한 나라인 것을 증언하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1:15에는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복음으로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복음이 핵심인 나라입니다. 복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위해 보내심을 받으셨습니다.
누가복음 4:43 하반절에는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친히 오신 것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이나, 전하신 것이나, 사신 것 모두가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천사장 가브리엘이 누가복음 1:9에는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받았노라”고 합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가브리엘이 보내심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세례요한은 요한복음 1:6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합니다. 요한이 그냥 태어난 것이 아니라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바나바와 사울이 사도행전 13:4에는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라고 합니다. 그들이 자신의 뜻대로 선교사로 간 것이 아니라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선교사로 사명을 가지고 주의 일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구약신학을 공부하다 보면 ‘모형학’(typology)이란 주제가 있습니다. 구약의 모든 인물이나 사건은 그리스도 모형이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3:15에는 처음으로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이 나타납니다. 뱀은 사람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고, 사람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는 것은 사탄은 사람을 시험하고, 그리스도께서는 사탄을 멸하신다는 예언입니다. 창세기부터 성경 전체의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셉은 야곱의 많은 아들들 가운데 가장 사랑받는 아들이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사랑받는 독생자이셨던 것과 같습니다. 요셉은 사랑하는 형제들에게 팔렸습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에게 팔렸습니다. 요셉은 애급뿐만 아니라 주변의 많은 사람들을 기근에서 구했습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를 구원하셨습니다. 이런 요셉이 창세기 45:8에는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신 것처럼 요셉도 하나님이 애급으로 보내셔서 사람들을 구원하셨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모세는 탄생에서부터 예수님의 모형이었습니다. 바로는 모세가 태어났을 때에 히브리 남자아이들을 다 죽이라고 하여 그 어머니가 그를 광주리에 담아 나일강에 띄웠습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셨을 때에 헤롯이 두 살 이하의 남자아이들을 다 죽이라고 하여 애급으로 피난을 가셨습니다. 모세는 예수님과 닮은꼴입니다. 저의 가족 중의 한 사람이 오래 전에 교회학교 교사를 하면서 아이들에게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했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에 남자 아이들을 다 죽이라고 해서 예수님의 어머니가 광주리에 예수님을 담아 나일강에 띄워 보냈는데 바로가 이를 알고 화가 나서 두 살 아래의 남자아이들을 다 죽였다”고 하였답니다. 모세의 탄생과 예수님의 탄생이 혼돈이 된 이유는 탄생이 닮았다는 말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애급에 보내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세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모세의 지팡이는 엄청난 하나님의 힘을 가진 하나님의 지팡이였습니다. 구약의 나무나 지팡이는 십자가의 상징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급에서 이끌어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셨다는 모형입니다. 출애급기 3:10에는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급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지 않겠다는 모세를 억지로 보내십니다. 억지로라도 보내신 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한 열망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인간으로서 힘든 성육신, 탄생, 고난, 십자가, 죽음을 겪으신 것은 인류 구원의 열망 때문입니다. 모세를 보내어 백성을 구원하신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어 인류를 구원하셨습니다.
갈라디아서 4:4-5에는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시간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은 우리를 속량하시고,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시려 함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갈라디아서 4:6에는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은 이제 그 아들의 영을 보내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게 된 것이 복음입니다.
요한복음 20:21에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 같이 이제 예수님은 우리를 세상에 보내십니다. 보내어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사명’(mission)이란 말은 라틴어의 ‘보내다’(sending)라는 말에서 유래 되었습니다. ‘보내다’라는 말은 사명을 주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자는 배우는 자라는 뜻이지만 사도는 보내심을 받은 자이며, 사명을 받은 자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보내셨다는 것은 사명을 주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면서 받은 그 사명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결국 구원받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택하신 사람들을 그냥 곁에 두시는 것이 아니라 내어보내십니다. 예수님이 친히 세우신 제자들, 70인, 베드로, 요한, 바울을 포함한 사도들, 초대교회의 교부들, 모든 그리스도인 그리고 수많은 선교사들, 이들 모두를 보내시며 보내신 목적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 목적은 하나님 나라의 선포이며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신 목적이 예수님이 우리 보내신 목적과 일치합니다. 그 목적은 복음 전파입니다.
인류 역사상 최장수 인간은 므두셀라입니다. 구약의 인물들은 그 이름에 다 뜻이 있었듯이 그의 이름에도 묘한 뜻이 있습니다. ‘므두’란 ‘죽다’라는 뜻이며, ‘셀라’는 ‘보내다’는 뜻입니다. ‘죽고 나면 보낼 것’이란 뜻입니다. 그가 죽고 나면 무엇을 보냅니까? 홍수를 보냅니다. 므두셀라가 죽던 해에 노아 홍수가 시작되었습니다. 노아의 방주가 완성되던 해이고, 노아가 600세가 되던 해입니다.
우리 모두의 이름에는 소명이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의미 없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까? 소명 없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가진 소명을 넓게 보면 모두가 하나님의 나라 선포입니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는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면 나는 참 인간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에서는 우리 모두가 어쩔 수 없는 죄인입니다. 종교개혁가 루터는 위대한 일꾼이었지만 그도 죄가 없어서 개혁가가 된 것이 아닙니다. 그가 죄를 고백할 때에 너무 자기의 죄가 무거워 그 중압감에 기절하였다는 일화도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될 때에 다시는 죄 짓지 않는 영적 존재로 변화하여 참 인간으로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결론
레바논 계 미국인인 시인 칼릴 지브란은 “어른들이 아이들을 닮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좋으나 아이들에게 어른들을 닮으라고 해서는 안 된다. 어른은 살아 있는 화살인 아이들을 쏘아 보내는 활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어른은 활이고, 아이들은 화살입니다. 어른들은 보내는 자이고, 아이들은 보냄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보내는 활이라면 우리는 화살입니다. 교회는 우리를 파송하는 활이라면 성도인 우리는 세상으로 날아가는 화살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보내십니다. 교회는 우리를 세상으로 파송합니다. 세상이 더 중요하게 바라보는 것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우리입니다. 교회가 아니라 성도인 우리입니다.
시인 롱 펠로우의 ‘화살과 노래’라는 멋진 시가 있습니다. “나는 허공으로 화살을 쏘았네. 어딘지 모르지만 땅에 떨어졌네. 너무도 빨리 날아갔기에 눈은 그것을 따라갈 수 없었네. 나는 허공에 노래를 불렀네. 어딘지 모르지만 땅에 떨어졌네. 날아가는 노래를 따라갈 만큼 누군들 날쌘 눈을 지닐 수 있을까? 먼 훗날 참나무에 박힌 부러지지 않은 그 화살을 찾았네. 한 친구의 가슴속에 처음부터 끝까지 남아 있는 나의 노래도”.
내가 쏘아 보낸 화살은 누군가의 가슴에 박혀 있습니다. 내가 부른 찬양은 내 친구의 가슴속에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당장은 아니라도 전파하여 내어보내면 반드시 훗날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옛날에 전하신 화살인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전 인류의 가슴 속에 2,000년이 지난 지금 단단히 박히고, 회심하게 하여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는 역사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도 구원의 화살을 많이 쏘아 보내기를 바랍니다. 구원의 찬양을 많이 부르기 바랍니다. 언젠가는 우리 복음의 화살이, 복음의 찬양이 내가 알지 못하는 이들의 가슴에 남아 구원받는 놀라운 역사가 반드시 나타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좋은 화살, 기쁨의 찬양이 되어 그리스도의 복음의 씨앗이 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주로 인하여 즐거워하라
시 33장 12~20절 / 엄기호목사
초기 한국교회의 불의 사자라 일컬어지는 김익두 목사는 생전에 설교를 통해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천한 사람이 귀한 사람과 같이 있는 것을 즐겁다 하며, 어진 친구를 만나 같이 있는 것을 즐겁다 한다면, 신자가 하나님의 아들과 같이 있게 되는 즐거움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다니엘이 사자 굴에 갇혔을지라도, 주께서 사자의 입을 봉하여 해롭게 못한 때, 비록 사자 굴에 있었지만, 그 즐거움은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다니엘의 친구 세 사람이 비록 불화로 가운데 던진바, 그 즐거움은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요한이 밧모섬에 정배 갔을지라도, 주께서 같이 하시고,계시를 보여 주시는 때, 그 즐 거움은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보여 주시기도 하시며, 강론할 좋은 제목을 알려 주시기도 하고, 실 수할 것을 붙들어 실수 못하게도 하시며, 잘못하면 통회하는 마음도 주시고, 우리 소 망되는 하늘 나라를 보여 알게도 하시는 때, 그 즐거움이야말로 어떠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한국교회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김익두 목사의 말씀처럼 주님으로 인해 우리 가 얻는 즐거움은 세상의 언어로 다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님으로 인해 즐거워하기 보다는 세상이 주는 작은 즐거움, 혹은 쾌락 에 더 주목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에 목적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의 보잘 것 없는 즐거움에 목적을 두고 있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오늘 시편기자는 “우리 마음이 저를 즐거워함이여”(시 33:21)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편 33편 전체를 살펴볼 때 기자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으로 인해 즐거워할 수 없는 상황 중에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시편기자가 어려운 환경가운데서도 주로 인해 즐거워한다고 찬양할 수 있는 이 유는 무엇일까요? 원수의 온갖 계략에도 불구하고 창조주 하나님을 향한 굳건한 믿음 을 고백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1. 주님께서 살펴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시편기자는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감찰하사 모든 인생을 보심이여 곧 그 거하신 곳에서 세상의 모든 거민을 하감하시도다”(시 33:13-14)라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자녀들이 어떤 고난이나 장애물을 만나든 보호하시며 지켜주십니다. 눈동자 같이 살펴주시고(시 17:8),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며(시 121:4-5) 우리들을 살펴주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영원토록 지켜주십니다. 시편기자는 시편 121편 7절 이하에서 “여호와께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고 찬양했습니다.
세계 제2차대전 때의 일입니다. 독일군의 연이은 폭격으로 불안하여 밤잠을 이루지 못 하는 영국 런던 시에서 평안히 잠을 자는 할머니 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 할머니의 소 문을 듣고 한 기자가 찾아가 그 비결을 물어봤습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이렇게 대답했 습니다.
“나는 매일 밤 기도한답니다. 그리고 나면 하나님께서 항상 지켜주신다는 확신이 들 어 평안하게 잠자리에 들게 되지요. 사실 하나님과 내가 둘이 다 깨어 있을 필요는 없 잖아요?” 그렇습니다. 우리를 지으시고 보살펴주시는 그분께서 주무시지도 않고 우리를 지켜주신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은 어떤 환경 속에서도 평안히 잠잘 수 있습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항상 살펴주신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은 어떤 고난 가운데 서도 즐거워 할 수 있습니다.
2. 기근에서 살펴주시기 때문입니다.
한 선교사가 선교지역이 심한 기근에 처한 때 일어난 사건을 간증한 것입니다. 기근이 심해지자 선교사와 교인들은 모여 하나님께 먹을 것을 주시도록 기도했습니다. 추수 때까지는 한 달 이상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그들이 간절한 기도를 시작한지 나흘째 되던 날, 지평선 너머에서 검은 구름이 몰려오 더니 곧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보통 쏟아지는 비가 아니었습니다. 검은 곡식 낱알들이 비처럼 쏟아지는 것이 었습니다. 무엇보다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진 곡식들은 먹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내린 검은 낱알들은 추수기까지 모든 주민들이 먹고 지탱할 만큼 충분 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후에 알게 된 사실은 몽고지방의 심한 폭풍우로 곡식 창고들이 파괴되어 곡식 들이 광풍에 날라 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곡식들은 1500마일이나 되는 이 마을까 지 운반된 것이었습니다. 본문에 보니 “저희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저희를 기근시에 살게 하시는도다”(시 33:19)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생활의 기근에서 살펴주십니다(고후 9:10). 그리고 생활의 기근보다 더 중요한 영의 기근, 은혜의 기근에서 우리를 살펴주십니다( 고후 9:8).
아모스 선지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 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 8:11 이하) 우리에게 있어 육식의 기근, 생활의 기근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바로 영의 기근, 말씀 의 기근입니다. 말씀의 기근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이, 정신이, 환경이 피폐해 지는 것이며 감사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말씀의 기근, 영의 기근 때문에 주로 인해 즐거워하지 못하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로 먹이신 그 하나님을 의지하며 날마다 하 늘의 만나인 말씀을 통해 영의 기근에서 벗어나는 성도,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3. 방패가 되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찬양합니다. “우리 영혼이 여호와를 바람이여 저는 우리의 도움과 방패시로다”(시 33:20) 하나님께서는 원수의 공격에서 우리를 보호하는 방패가 되어주시며(시 27:1-3), 질병 에서 보호하는 방패가 되어주십니다(시 91:5-11). 또한 전쟁에서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시 118:6-7).
우리는 매순간 영적전쟁을 하는 하나님의 군사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싸움이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12)고 했습니다. 우리를 공격하는 적은 굶주린 사자와 같이 우리를 사망으로 이끌고자 약점을 찾고 있 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적의 공격에서도 안전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피할 산성이 되어주시고 반석과 방패가 되어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 여러 곳에서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와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방패가 되어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 더욱 견고히 서는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조들이 어떤 환난이나 인생의 장애물 속에서도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하나님으로 인해 즐거워하는 삶을 살았듯이 우리 역시 주로 인해 즐거워하는 성도가 되어야합니다. 날마다 눈동자와 같이 우리를 살피시는 하나님, 기근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 방패가 되어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그래서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나의 대적, 나의 원수된 행악자가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다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안연하리 로다”(시 27:1-3)고 고백하는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시 33장 12~22절 / 황광민목사
들어가는 이야기
미국의 유명한 통계학자로서 국가 재정에 관련한 책을 쓴 로저 밥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국가의 번영은 그 나라 국민의 지적 영적인 성장에 달려 있다. 돈이나 부유함에 달려 있지 않다.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스페인 등과 같은 나라들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했던 나라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몰락했다. 그들이 부가 자신을 구하기는커녕 멸망을 재촉했다는 사실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우리나라(미국)는 지금 가장 부유한 선진국가지만 머지 않아 곧 2류 국가로 전락하고, 그 다음엔 땅으로 곤두박질치게 될 것이다."
프랑스 사람 토크빌은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가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나는 미국의 위대성을 발견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미국의 항구, 비옥한 토지, 광산이나 상업이 번창하고 있는 곳에서는 그 위대함을 찾을 수 없었다. 미국의 한 교회에 들어가 목사가 외치는 정의로운 설교를 듣기 전까지는 미국의 위대한 힘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말하거니와 미국은 위대하다. 왜냐하면 미국은 선하기 때문이다. 만약 미국이 그러한 선함을 계속 간직한다면 미국은 영원히 위대할 것이다."
그렇습니다. 한 나라의 위대한 힘은 경제력이나 군사력에 있지 않습니다. 큰 경제력이나 군사력은 오히려 멸망으로 인도하는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진정 힘있는 나라가 되려면 그 나라의 정부와 국민이 정직하고 선을 추구해야 합니다. 진리가 큰소리 치는 나라, 윤리와 도덕이 살아있는 나라, 백성이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아는 나라가 강한 나라입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에서 시인은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 바 된 백성은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많은 군대나 많은 말들이 구원하는 힘이 되지 못하며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의 도움과 방패가 되신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오늘은 봉독한 본문을 중심 하여 "여호와로 하나님을 삼은 나라"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국가란 무엇인가?
먼저 "여호와로 하나님을 삼은 나라가 복이 있다"는 말씀을 드리기 전에 국가란 무엇인가를 살펴보겠습니다. 본 헤퍼 라는 독일의 신학자는 국가를 하나님의 위임으로 이해했습니다. 국가는 교회와 가정과 더불어 하나님이 세우신 제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에 말씀을 주셨고 국가에게는 칼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인간 세상의 현실은 칼도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국가를 세워 사자로 삼으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이 정하신 바라...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롬13:1-4)
이처럼 국가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선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자입니다. 국가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선한 목적을 이루는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국가의 정부는 부패하고 타락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는커녕 백성들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니버는 서로 상반되는 듯한 국가에 대한 두 가지 견해를 말했습니다. 첫째, 사회의 질서와 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튼튼한 정부가 요청된다. 둘째, 권력이 집중된 국가나 정부는 부패하기 쉽다. 그러므로 교회는 국가 정부가 튼튼하기를 기도함과 부패를 방지하기 위하여 예언자적인 비판을 던져야 합니다. 그래서 튼튼한 정부가 사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과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애쓸 때 복 있는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복있는 나라
그러므로 여호와는 자기 하나님을 삼은 나라가 복이 있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을 섬기는 나라는 그 자체가 이미 복을 받고 있음을 말합니다. 12절의 말씀을 보십시다.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 바 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아멘. 즉 하나님을 섬기는 나라는 이미 하나님이 자신의 기업으로 선택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택하기 전에 먼저 그 분이 우리를 택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즉 믿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지요. 믿습니까?
우리나라가 하나님을 잘 믿는 나라가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하나님께 무엇을 더 바라기 전에 먼저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많은 나라들 중에서 우리나라를 택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 주신 것 감사 드려야 합니다. 선교 100여 년에 20%의 국민의 하나님을 섬겼던 예는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많은 교회들과 종탑에서 빛나는 십자가를 자랑스럽게 가지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또 하나님을 섬기는 나라가 복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환난에서 건지시며 시험을 이기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도움이시며 방패입니다. 이 좋으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나라는 복이 있습니다. 이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찾아오셔서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15:1). 그리고 말씀하신 대로 아브라함의 가는 길에 방패가 되셨으며 믿음으로 순종한 아브라함에게 큰 상급으로 보상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을 지켜주신 좋으신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지켜주실 줄로 믿습니다.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그러면 이제는 복 있는 나라가 되기 위하여 하나님을 어떻게 섬길지는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분이지만 기복신앙은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데는 인간의 책임이 따른다는 말입니다. 단순히 복을 비는 것으로는 하나님께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복을 받으려면 그 분과 뜻이 맞아야 합니다. 그분을 기쁘시게 해 드려야 합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은 하나님의 복을 받으려면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합니다. 13-15절을 봉독 하십시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감찰하사 모든 인생을 보심이여 곧 그 거하신 곳에서 세상의 모든 거민을 하감하시도다. 저는 일반의 마음을 지으시며 저희 모든 행사를 감찰하시는 자로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우리의 마음속까지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인간의 마음도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까지도 하나님 앞에 숨길 수가 없습니다. 다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 복을 받습니다.
"지금 내가 혼자 있을 때 나의 모습이 나의 신앙수준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행동을 신사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체면 때문에라도 조심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이 무서워 행동을 자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혼자 있을 때는, 보든 사람이 없을 때는 본래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날 수 있습니다. 그때 자신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것이 나의 신앙수준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는 누가 옆에 있느냐 없느냐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의 중심까지 헤아리시는 하나님 앞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옆에 누가 있으나 없으나 변함이 없습니다. 말과 행동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두 얼굴의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항상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기를 힘쓰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살아야 복을 받습니다.
18절을 보십시다. "여호와는 그 경외하는 자 곧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는 살피사 저희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저희를 기근 시에 살게 하시도다." 할렐루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하나님은 사랑하십니다.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들에게 복을 내리십니다. 저희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신다고 하였습니다. 또 저희를 기근 시에 살게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경외하는 사람들을 영적으로, 육적으로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라
그리고 하나님의 복을 받는 나라가 되려면 의지해야 합니다. 16-17절을 보겠습니다.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커도 스스로 구하지 못하는 도다. 구원함에 말은 헛것임이요 그 큰 힘으로 구하지 못하는 도다." 나라가 군사력이나 경제력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군사력이나 경제력이 큰 나라가 쉽게 무너지는 경우도 많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해야 튼튼하게 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방패요 도움이십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나라가 복을 받습니다.
역천자는 망하고 순천자는 흥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늘을 거스르는 백성은 망하고 하늘을 섬기는 백성은 흥한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세상 돌아가는 현상을 보고 지어낸 말이지만 성경의 뜻과 일치합니다. 구약성경은 이것을 역사적으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신명기에 보면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면 복을 받고, 순종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신명기 사관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하여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사시시대를 훑어보십시다. 사사시대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태평한 가운데 하나님을 떠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방인의 손을 들어 이스라엘을 치시고 고통을 당하게 하십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호소하며 부르짖습니다. 이를 하나님이 들으시고 사사를 보내 백성들을 구원하게 하시고 땅에 평안을 주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평안을 주신 하나님을 쉽게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등집니다. 그래서 다시 고난을 당하게 되는데 이러한 과정이 여러 번 반복된 것이 사사시대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할 때는 평안이 있었으나 하나님을 등지면 고난을 당했습니다.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스라엘은 솔로몬 왕이 죽은 뒤에 남북으로 분열되었습니다. 그때가 B. C 930년경이었습니다. 북왕국은 여로보암의 영도 아래 시작되어 B. C 722년 앗시리아에게 함락 당할 때까지 19명의 왕에 의해 다스려졌습니다. 남왕국은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의 영도 아래 시작되어 B. C 586년 바빌론에 함락될 때까지 역시 19명의 왕에 의해 다스려졌습니다. 양쪽에 왕들이 수는 똑같이 19번입니다. 그러나 우상숭배에 젖어 있던 북왕국은 혁명을 아홉 번이나 겪으면서 약 210년 만에 망했고 신앙부흥운동이 간간이 일어났던 남왕국에는 혁명이 한번도 일어나지 않고 약 350년 간 유지되었습니다. 이 차이가 무엇입니까? 이 차이가 하나님을 완전히 떠난 북왕국과 간간이 신앙부흥운동을 일으켰던 남왕국의 차이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과 하나님을 등진 백성 사이에는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너희가 못 박고 하나님이 살리신 예수
이성희목사 / 시편 33:18-20, 사도행전 4:10-12
이순신장군을 성웅이라 칭합니다. 이순신장군은 임진왜란 당시에 옥포해전, 한산도해전, 부산포해전, 당황포해전 등을 모두 승리하였습니다. 한산도에는 두억(頭億)이란 마을이 있는데 이순신군대가 자른 왜군의 머리가 그 마을에 억 개나 밀려왔다고 하여 그렇게 불렀다고 합니다. 이후 왜군은 이순신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었다고 합니다. 이순신장군이 전라좌수사로 여수에 있다가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본영이 있는 한산도 제승당에 왔습니다. 한산도에는 왜군이 얼씬도 않았다고 합니다.
임진왜란 때 홍의장군이라 불리는 곽재우장군도 얼마나 용맹했던지 왜군이 그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었다고 합니다. 일제강점시대에 김두한의 이름만 들어도 왜경들이 벌벌 떨었다고 합니다. 월남전에서는 한국군의 이름만 들어도 베트콩들이 벌벌 떨었다고 합니다. 왜 벌벌 떱니까? 그 이름이 아니라 그 인물이 떨 만큼 힘이 있고 용맹하다는 의미입니다.
여호수아 2:9에는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라고 합니다. 광야생활을 마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향해서 들어가려고 할 때에 여리고의 왕과 백성들이 이스라엘 이름만 들어도 무서워 떨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름은 내 자신을 말합니다. 이름은 그 사람 전체를 의미합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제일 먼저 가지는 자기의 것이 이름입니다. 정해준 이름은 대개는 죽을 때까지 가져갑니다. 죽을 때까지가 아니라 죽은 후에도 그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내 이름을 잘 보존하고, 훼손당하지 않게 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유대인의 성명철학에는 사람은 지어준 이름대로 산다는 사고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름은 자신이나, 자신의 혼이나, 자신의 명예나, 자신의 권위와 관계가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한국인들도 이름에는 의미가 다 있습니다. 그래서 항렬을 따라 이름을 짓지만 좋은 뜻을 가진 자를 선택하여 이름을 짓습니다.
위대한 교부이며 설교가인 크리소스톰은 “아이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이름을 지어주라, 어떻게 하든지 선하게 살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름을 잘 지어야 합니다. “사람은 그 이름대로 된다”(people become what you call them)라는 말도 있습니다. 사람은 이름도 잘 지어야 하지만 “망할 것”이란 말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꾸 그렇게 부르면 망합니다. 대신 “흥할 것”이라고 많이 해야 흥합니다.
이름에는 의미가 있고, 뜻에 따라 이름을 짓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을 보면 이름에 뜻이 다 있습니다. 레아가 첫째 아들을 낳고 ‘보라 아들이라’는 뜻으로 르우벤이라 지었습니다. 둘째 아들을 낳고 ‘들으심’이라는 뜻으로 시므온이라 지었습니다. 셋째 아들을 낳고 ‘연합’이라는 뜻으로 레위라 지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아들을 낳고 ‘찬송하리로다’라는 뜻으로 유다라고 지었습니다. 라헬의 몸종인 빌하는 라헬이 아기를 낳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고 자기가 아들을 낳아 ‘억울함을 푸심’이라는 뜻으로 단이라고 지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아들을 낳고 ‘경쟁함’이라는 뜻으로 납달리라고 지었습니다. 모세도 미디안 광야에서 아들을 낳고 ‘타국에서 객이 되었다’라는 뜻으로 아들의 이름을 게르솜이라고 지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에 가지신 이름인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 이름대로 이루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입니다.
옛날에는 지방자치제 규약으로 ‘향악’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잘못을 범하게 되면 상민에게는 태형 40대를 때렸고, 양반들은 때릴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이름을 써들고 앉자 있게 하는 명예형을 내렸습니다. 이런 이름에 가하는 형벌을 ‘만좌명책’(滿座名責)이라 불렀습니다. 역사에 보면 명성황후는 대원군의 이름을 엉터리로 적어놓고 무당으로 하여금 저주하게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고귀하게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이름은 고귀한 구원의 능력이 있는 이름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기적으로 걷지 못하는 사람을 걷게 했을 때에 관원들이 물었습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이에 대하여 베드로와 요한은 그 물음에 대하여 해답을 주었습니다. 그 해답을 통하여 오늘에 주신 말씀을 마음에 새기기를 바랍니다.
첫째, 예수의 이름으로 사람이 건강하게 됩니다.
사도행전 4:10에는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고 합니다. 너희는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하나님은 다시 살리셨다고 합니다.
베드로의 답변은 “너희”가 죄인임을 알라고 하는 경책인 동시에 “하나님”은 살리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악은 언제나 죽이려 하고, 선은 언제나 살리려 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죽음이나, 아픔이나, 고통을 원치 않으십니다. 죽이려는 종교를 보세요. 신의 이름으로 테러와 전쟁을 일삼는 종교는 바른 종교가 아닙니다. 죽음을 원치 않고 살리시는 생명의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사람을 살리시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람을 건강하게 하십니다.
베드로의 이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에 대한 해답이 주는 의미입니다. 첫째는 베드로가 “내가 고치지 않았다”고 한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은 고치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고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고치신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의 손을 이용하지만 사람이 고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친다는 뜻입니다.
마가복음 16:17에는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내 이름으로”라고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에 치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든 자가 낫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에 치유가 있는데 예수님의 이름을 도용하여 자기가 고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환자를 때리고, 묶어 놓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합니다. 지난 주간에도 익산의 어느 목사가 아이를 고친다고 데려다놓고 굶기고 학대해서 문제가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7:22에는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행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때 주님은 거짓 선지자들에게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을 도용하여 자기가 행한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라는 이름은 성경에 19번이나 있습니다. 고치시는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 예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 가운데 가장 소박한 이름에도 치유가 있고, 능력이 있습니다. 유대인의 왕이나 하나님의 아들 같은 위대한 이름은 말할 것도 없이 더 큰 힘이 있습니다.
나사렛 예수는 치유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귀신 들린 자가 예수님께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미문에서 구걸하던 걷지 못하는 사람에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하였습니다. 나사렛 예수는 예나 지금이나 사람을 치유하는 이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은 영혼을 살게 할뿐만 아니라 육체가 사는 능력이 있습니다. 요한 장로님은 영혼이 잘 되고,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하기를 바란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영혼도 구원받고 육체도 강건한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병환 중에 회개하고 육체까지 건강해진 사람을 많이 보았습니다. 육체를 입고 사는 사람이 육체를 외면하고 살 수 없습니다. 마지막 날에는 우리 모두가 육체로 구원받고 영적 육체로 다시 그리고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벤허’라는 영화에 보면 벤허가 친구 멧살라의 모함으로 노예로 잡혀가고 어머니와 누이가 한센병에 걸려 굴 속에서 삽니다. 마차경기로 멧살라를 이긴 벤허가 집으로 돌아오다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가 쓰러지시는 것을 보고 벤허가 일으켜 드립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에 비가 내리고 번개가 비치는 순간 어머니와 누이의 한센병이 낫습니다. 예수님은 치유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라틴어로 ‘cure’라는 말의 원래 의미는 치유의 의미와 함께 돌봄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치유는 예수님의 돌봄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체를 고치시고 심령을 돌보심을 의미합니다. 육체가 치유 받지만 그것만으로는 예수님의 치유의 참 의미가 아닙니다.
치료는 “누군가에게 통하는 방법이 있지만 누구에게나 통하는 방법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치유는 모든 사람에게 통합니다. 예수님께서 고치지 못할 병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우리 몸을 깨끗하게 치유 받기를 바랍니다.
둘째,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사도행전 4:12에는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고 합니다. 이 세상에는 예수의 이름 외에 구원받을 이름이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세주이십니다. 예수님 외에 사람의 죄를 대신해줄 수 있는 신인(神人)은 없습니다. 대신 죽을 사람도 없고, 다시 사실 하나님의 아들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신성과 인성을 가지신 유일한 구세주이십니다.
요즘에 ‘기독교는 너무 폐쇄적이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기독교의 폐쇄성이나 기독교의 독단은 당연한 것입니다. 예수님 외에 구원자가 없다는 것이 폐쇄적이고, 독단이라고 합니다. 만일 이것이 폐쇄성이고 독단이라면 기독교는 그래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타협할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문을 닫고 사는 것은 아닙니다. 활짝 열려 있습니다. 대화도 합니다. 교류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자란 사실은 양보나 타협이 있을 수 없습니다. 종교다원주의란 예수님 외에 많은 그리스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구원자는 얼마든지 많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믿지 않습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를 사하려고 예수님 외에 누가 십자가에 달리셨습니까? 대신 죽으셨습니까? 누가 다시 살아나셨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구원’이란 헬라어로 ‘헤 소테리아’입니다. 이 말은 단순히 사람을 고친 육적 구원뿐만 아니라 죄와 죄의 형벌인 죽음과 영원한 심판으로부터 구원하는 전인격적인 구원을 의미합니다. 메시야로 말미암은 완전한 구원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구원은 우리의 영혼과 육체 전체가 새로워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에는 구원받지 못할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구원받지 않아도 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이 필요하며, 모든 사람이 육적 영적 완전한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온전한 구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21에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구원의 보편성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3:16에도 마찬가지로 구원의 보편성을 말씀합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누구나 다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 “그를 믿는 자”라는 조건이 있습니다. 누구나 다 구원을 받되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기독교의 진리 가운데 가장 위대한 단어의 하나가 ‘단번에’(once for all)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만대를 위하여 단번에’라는 뜻의 헬라어 ‘에파팍스’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나사렛 예수’라는 이름은 모든 사람에게 그리고 모든 시대에 구원이 되는 이름이라는 뜻입니다.
사도행전 22장에는 바울이 천부장 앞에서 변증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16절에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는 왜 주저하느냐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를 씻으면 누구나 다 구원을 받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순교하기 직전에 하나님 우편의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행 7:59). 예수님의 이름에 부탁하면 우리의 영혼을 받으십니다. 우리 모두가 우리 삶의 마지막에 예수님의 이름에 각자의 영혼을 부탁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영혼을 받으시고 구원하여 주십니다.
“구속하다”라는 말은 ‘건지다’, ‘도로 사다’, ‘회복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은 표를 구할 경우에 ‘표를 얻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구원이란 하늘나라로 가는 승차권을 얻은 것입니다. 설날이나 추석 때에 귀향열차나 비행기나 버스의 승차권을 얻는 것은 복권에 당첨된 것 같은 귀중한 표입니다. 귀한 음악회나 프로야구결승전의 입장권을 누군가가 구해준다면 엄청나게 기뻐할 것입니다. 구원은 가장 귀한 하늘나라의 입장권 표를 주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아인슈타인 박사가 뉴욕에서 기차를 타고 어디엔가 가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 승무원이 승객의 기차표를 조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아인슈타인 박사는 표를 호주머니에서 찾고 있었지만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한참 호주머니를 뒤지고 있는데 승무원은 “아인슈타인 박사님, 저는 당신을 잘 압니다. 속이고 타실 분이 아닌데 표를 못 찾는 걸 보니 있는 줄로 알고 그냥 갑니다” 하더니 자리를 떴습니다. 승무원이 검표를 마치고 돌아와 보니 아직 찾고 있었습니다. 승무원은 아인슈타인 박사에게 “걱정 말고 표를 찾지 마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아인슈타인 박사는 “그게 아닙니다. 내가 내릴 역이 표에 기록되어 있는데 내가 어느 역에서 내리는지 알 수 없어서 표를 찾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천재들은 이런데 소홀한 경우가 많습니다. 목적지를 알지 못하면 내릴 수 없습니다. 목적지를 알지 못하면 아무데서나 내립니다.
얼마 전에 KTX를 타고 전주에 설교와 강의를 하러 갔습니다. 그 KTX는 여수까지 가는 기차였습니다. 갈 때는 혹시 내가 내릴 역을 지나칠까 조바심이 나서 잠이 오지 않고 긴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서울로 돌아올 때는 용산이 종점이기에 안심하고 잠도 자고 쉴 수가 있었습니다. 지나칠 염려도 없고 못 내릴 염려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이란 하나님의 나라가 종점입니다. 우리 인생의 목적지가 예수님의 이름인 것을 알기에 늘 평안합니다. 자유합니다. 즐겁습니다. 이런 평안과 자유함이 하나님이 구원받은 자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결 론
프랑스 군인들은 전쟁터에 나갈 때에 배낭 속에 두 권의 책을 지니고 다녔다고 합니다. 성경과 파스칼의 ‘팡세’입니다. 파스칼이 ‘팡세’를 집필한 동기를 어느 책에서 보았습니다. 파스칼의 여동생이 불치병으로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환상 가운데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타나 그녀의 눈을 건드렸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동생이 파스칼을 찾아가서 말했습니다. “오빠, 이상한 일이 있어요. 기도하는 가운데 십자가가 나타나 내 눈을 건드렸는데 방금 내 눈이 고쳐져서 잘 보여요”. 이때 파스칼은 중얼거렸습니다. “나는 철학자의 하나님을 믿지 않고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노라”. 파스칼이 죽은 후에 그의 옷에서 이상한 가죽 조각이 발견되었습니다. 파스칼이 입던 옷깃마다 ‘나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노라’라고 적은 가죽조각을 지니고 다녔음을 발견했습니다.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살리신 예수님의 이름은 우리 육체를 구원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영혼과 육체를 함께 고칩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은 우리를 치유하는 능력입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은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는 힘입니다. 영생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우리 모두가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를 하나님이 다시 살게 하신 나사렛 예수 그 이름을 의지하여 우리 육체가 치유 받으며, 우리 영혼이 영원히 사는 구원의 삶을 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