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2월 24일(월)
* 시작 기도
(눅 10:20)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주님...
제자들을 둘씩 짝을 지어 각동 각처로 보내어 병자들을 고치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하였는데 심지어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게도 하였고 귀신들이 제자들에게 항복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런 은사로 인하여 기뻐하지 말고 오히려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 곧 은혜로 인하여 기뻐하라고 하십니다.
오늘 우리들 역시 눈에 보이는 기적이나 은사에 격한 반응을 보이면서도 정작 나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에는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눈에 보이는 표적이 많은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하고 놀라운 반응을 이끌어내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은 결국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같이 내가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자기주장 의지에 다름 아님을 고백합니다.
이런 모습이 나의 실존입니다.
오늘도 이런 나는 죽기를 원합니다.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사오니 오직 예수로 부요한 자 되게 하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워주소서.
자기 자신을 옳게 보이려고 예수님께 ‘내 이웃이 누구냐’고 물었던 율법사와 같은 나를 심판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요 15:9-17
제목 :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1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 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를 통하여 아들 자신과 제자들의 관계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들의 관계를 다시 한 번 확증하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을 때 열매를 맺을 수 있듯이 우리 또한 주님 안에 거할 때만 열매를 맺을 수 있는데 그 열매는 곧 영생의 열매이다.
이 영생의 열매를 맺은 자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얻게 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든지’이다.
‘무엇이든지’는 세상과 땅에 속한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영생을 얻은 자는 이미 세상에 속한 것 곧 만물 안에 속한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다.
마치 세상의 임금은 아들과 관계할 권리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아들의 생명을 얻어 이 땅에서부터 영생을 누리는 자들이 구하는 것은 세상에 속한 그 무엇이 아니다.
다만 날마다 말씀으로 주님과의 교제를 통하여 영생을 누리는 것과 또한 아직 영생을 얻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중보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영생의 열매를 많이 맺는 자를 통해서 아버지가 영광을 받으시며 또한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될 것이다.
한편 아버지와 아들 자신의 관계를 통하여 아들과 우리와의 관계 또한 그렇게 되기를 원하신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아들도 제자들을 사랑하셨으므로 이제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할 것이다.
아들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제자들도 아들의 계명을 지키면 그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될 것이다.
이것을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이유는 주님의 기쁨이 제자들 안에 있게 하여 그들도 역시 기쁨이 넘치게 하기 위함이다.
주님께서 주시는 계명은 이미 13장에서 언급하신 것처럼 주님이 제자들을 사랑하신 것 같이 제자들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
따라서 너희들도 내가 가르치는 대로 행하면 나의 친구이다.
이제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않을 것은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친구라고 하는 것은 이미 너희들에게 내 아버지께로부터 들은 모든 것을 다 말했기 때문이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였다.
그 이유는 너희들로 하여금 가서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렇게 함으로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아버지께로부터 다 받게 하려 한다.
그리고 내가 이것을 너희들에게 명하는 것은 너희들이 서로 사랑하게 하려는 것이다.
오늘 본문의 주제는 ‘사랑’이다.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오늘 아들의 생명을 받은 우리들을 표상한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열매 곧 영생의 열매를 많이 맺으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그는 주님의 제자가 된다.
여기서 아버지가 받으시는 영광은 사랑의 결정체이다.
창세전에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여 당신의 생명을 주셨다.
생명을 받은 아들은 아버지의 모든 명령에 100% 복종한다.
아들의 복종을 받은 아버지는 그의 복종을 착취하거나 빼앗지 않으시고 그 받은 복종에 아버지도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신다.
이처럼 아들은 복종하는 사랑을 하고 아버지는 자신을 다 내어주는 사랑을 하신다.
(요 15:10b)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요 14:31)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이를 통하여 아버지는 당신을 사랑하는 아들에게 영광을 나타내시는데 그 영광이 곧 자신을 계시하는 것이다.
이를 가리켜 ‘본질의 계시’ 또는 ‘존재의 드러남’이라고 한다.
그와 같이 우리도 동일하게 아들의 계명을 지키면 아들을 사랑하는 것이요 그 사랑에 아들 역시 우리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는 사랑을 하신다.
그 사랑은 자신을 다 내어주는 사랑 곧 십자가의 사랑이다.
그 십자가에서 아버지의 영광이 온전히 드러난다.
따라서 아버지의 말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아들에게 아버지의 영광 곧 사랑의 결정체가 드러난 것이다.
(요 7:39)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여기서 말하는 영광이란 아들의 십자가 죽음을 의미하며 그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아버지의 영광이 아들에게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복종과 사랑의 관계 안에서 그 존재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 관계 속에 아버지와 아들의 기쁨이 충만하며 또한 아들과 우리들의 관계 속에서도 복종과 사랑의 관계가 유지될 때 우리들 역시 기쁨이 충만하게 된다.
주님께서 명하시는 계명 곧 새 계명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비근한 예로 친구가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내어주는 것, 그보다 더 큰 사랑이 없는데 우리 주님께서 종보다 더 못한 우리들을 이제는 종이라 부르지 않으시고 친구라 부르신단다.
왜냐하면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지만, 친구는 주인이신 아들이 아는 것을 다 말해 주었기 때문이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땅에 속한 자로서 인간적인 사랑을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는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사랑하는 그런 관계 안에서의 사랑이다.
다시 말하면 영생을 얻은 자로 아들의 생명을 가지고 사랑하는 관계를 말한다.
이는 내 것을 내 것이라고 하지 않으며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는 사랑이고, 또한 원수도 사랑하는 사랑이다.
그러나 이런 사랑을 만물 안에서는 누구라도 할 수 없다.
잠시 하는 척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항상성으로 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아들의 생명을 얻어 삼위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곧 아들이 있는 ‘나 있는 곳’이요 아버지 집에서는 가능하다.
따라서 주님께서 명하신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은 아래에서 난 자로, 땅의 생명인 아담의 생명으로 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오직 아버지의 뜻인 영생을 얻어 날마다 그 나라에 속한 자로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주님이 보내신 보혜사, 진리의 영으로 인하여 감당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는 주님이 주신 새 계명 곧 ‘사랑하는 것’을 오해한 자였다.
내게 있는 것을 나눠주고, 가난하고 없는 자들을 도와주는 것으로 사랑을 표현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지속성이 없었다.
그런 사랑도 가히 칭찬 받을 만한 사랑이긴 하지만 문제는 땅에 속한 자요 아담의 생명으로 사랑을 하려니 지치고 때로는 짜증이 나기도 하였다.
내가 김해에서 목회를 할 때 교회 앞에 장애인복지관이 있었다.
그 복지관에 속한 한 장애인이 두루마리 화장지를 팔러 오곤 했다.
나는 그 사람을 볼 때 그냥 돈을 얻으러 오지 않고 장애인으로서 힘들지만 그래도 화장지라도 팔려는 것이 참 예뻐보였다.
그래서 여러 차례 사주었다.
얼마나 많이 샀던지 교회 창고에 화장지가 가득 쌓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사람이 또 화장지를 사달라고 왔다.
이제는 교회에 화장지가 너무 많아서 사줄 수가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 사람도 고집이 만만치 않았다.
가라고 해도 가지 않고 끝까지 버티고 있는 것이다.
그 때 나도 모르게 내 자존심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나도 지지 않고 끝까지 사지 않았다.
그동안 사주었으니까 한 번쯤 그냥 가도 될 법 한데, 올 때마다 반드시 팔고 가려는 그 속셈이 나를 화나게 만들었다.
이제는 장애인이라고 하는 긍휼한 마음이 사라지고 오히려 오기가 생겨서 절대로 안 사줄 거라고 마음 먹었다.
그래도 가지 않고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자, 급기야 나는 화를 내고 말았다.
사실 이것이 나의 본성이 아닌가?
주님의 사랑은 한이 없는 사랑이다.
다함이 없는 그 사랑이었기에 십자가에 죽기까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켰으며 또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오르신 것이 아닌가?
나의 사랑이란 지속성이 없는 무상성의 사랑이었으며, 인간적인 사랑에 지나지 않았다.
장애인을 도와주면서 나의 의를 드러내려는 자기주장의지가 나를 사로잡았다.
그런 나 자신을 보면서 나의 본성이 드러나고 마는 제한적인 사랑 앞에 내 안에 있는 마성을 보았다.
단적인 例이지만 나는 이런 자이다.
파고 또 파도 죄밖에 나오지 않는 자요, 그런 나는 죽기에만 합당한 자이다.
그런 나를 우리 주님께서는 끝까지 참으시고 인내하셔서 결국 모래 위에 서 있는 나를 심판하시고 반석 위에 다시 세우시려고 하셨다.
주님의 심판은 나를 살리기 위한 사랑의 징계였다.
그 심판을 통하여 나의 실존이 드러났고 아담의 본성으로 하나님과 분리된 자로서 사망의 열매를 맺는 자였음이 여실히 드러나고 말았다.
나의 실존이 얼마나 비참하고 더러운지 나는 미처 몰랐다.
나는 나름대로 제법 괜찮은 사람인 줄로 알았다.
그러나 나는 죽기에만 합당한 자임이 백일하에 드러난 것이다.
그런 나를 주님은 심판하셨지만 그 심판과 함께 그 크신 사랑을 베푸셨다.
그 사랑은 창세전에 약속하신 영생을 주시는 주님의 신실함이다.
나는 오늘도 그 주님의 신실함 앞에서 머리를 조아린다.
나는 할 수 없으나 오직 다른 보혜사인 진리의 영으로 인하여 말씀과 함께 주님과 깊은 교제와 사귐을 가지며 그 안에서 아들에게 주시는 영광의 빛을 본다.
그 영광의 빛이 내 심령 가득 채워지기를 소망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주님의 사랑을 오해하였던 자가 여기 있나이다.
주님께서 새 언약 백성에게 주신 새 계명인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오해하여 나의 의를 드러내는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게다가 내가 제법 괜찮은 사람으로 인정받으려 했던 악인 중의 악인이었나이다.
마땅히 죽어야 할 자이나 이런 나를 주님께서 살리기 위하여 심판하시고 그와 함께 생명이라는 은혜를 베푸셨나이다.
비록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지만 이제 아들의 생명으로 하늘을 사는 자 되게 하셨으니 그 생명이 오롯이 나의 생명이 되어 영생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이 복음을 통하여 단 몇 사람이라도 아들의 생명을 얻어 영생을 누리게 하옵소서.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정말 영혼을 사랑하는지가 중요하오니 그 사랑이 이제는 나의 의를 드러내는 수단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복종이 되게 하옵소서.
그것이 주님의 기쁨이요 또한 나와 영생의 공동체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