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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분명 끌어오르는 화를 삭히기 위해 잠시 나온건데, 이젠 차가운 콜라도 쓸모없어졌다.
" 아직도 그렇게 화를 참는건, 여전하네. 박미소. "
니가 바로 내 뒤에 있어서.
" 이젠 아는 척도 안하는 건가? 아니면.. 머 공과 사는 철저히 하겠다는 프로의식? "
공과 사라니. 너하곤 공과 사도 없어.
" 이거 쫌 섭섭하다, 우리 이렇게 모른 척할 만큼 안친했던 사이였어.? 미소야? "
" 그렇게, 부르지마. "
" 이제야 돌아보네. "
그렇게 한낱 추억에 불과해도 나의 아름다웠던 사랑 이야기를 다시 일깨워주지 마.
" .............................. "
" 잘 지냈어? 음, 더 예뻐진 것 같긴 하네. "
그런 감정 없는 듯한 말로도 말을 걸지마.
" 어때? 나 보니까 되게 놀랐나 보다. "
아니, 전혀. 그저 기분이 무지 나쁠 뿐 이야.
" 계속 나 혼자 얘기하고 있네. "
너 배우잖아, 대본 연습한다고 생각하면 되지.
니가 지금 내 앞에서 옛날과 같은 얼굴과 표정, 목소리로 나한테 얘기하는거 정말 싫어.
" 이러고 나와있어도 되는 건가요, 한우현씨. 곧 광고 끝날 시간일텐데요. 그럼 저 먼저 들어갑니다. "
" 박미소. "
지나가려는 데, 넌 내 팔을 붙잡지도 않았는데, 왜 니 목소리가 나를 붙잡니.
" 이러시면 곤란해요. 한우현씨. "
" 오랜만이니까 한번쯤은 웃어주면서 인사할 수 있잖아 . 우린 친구니까. "
아, 친구. 너는 친구, 나는 친구도 하기 싫어..
" 어? 박작가하고 우현씨 여기서 머해? 어서 들어와 ! "
이럴 땐 우리 피디님 타이밍 끝내준다니까.
다행히도 벗어날 수 있었다.
기억의 올가미에서.
- 그럼 로맨틱 드라마 시작하겠습니다! 소희씨, 오늘 사연을 소개해 주시겠어요?
- 네! 우와 오늘은요, 정말 귀여운 여고생이에요.
- 어머, 여고생이요? 와. 왠지 벌써부터 기대되는데요? 안그래요, 우현씨?
- 네, 하하
- 그럼 소개해드릴게요. 안녕하세요, 꽃다운 나이 18살의 이소영이라고 합니다. 저는 세 달 전에 만난 한 남자아이를 좋아하고 있습니다.
우연히 학교에 버스를 타고 가다가 항상 똑같은 자리에 그 아이가 앉아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솔직히 말해서 엄청 잘생긴 외모도 아니고 그냥 준수한 정도? 그래서 그런지 눈치를 못챘었나 봐요.
그런데 어느 비오는 날 버스를 타려고 뛰어가다가 넘어졌거든요, 이미 무릎에선 막 피나고 그래도 버스 타야하니까 허겁지겁 탔어요.
비오는 날 버스타면 정말 그 찝찝함이란, 말로 못하거든요. 더군다나 저는 무릎도 다쳤고, 그래서 엉거주춤 서있었어요. 바로 그 때.
-" 여기 앉아요. "
이건 상황극인데, 막내작가들아. 너희에게 하는 말이 아니란다.
이미 한우현의 대사 한 마디에 다들 하트 뿅뿅이다.
-" 네? "
-" 여기 앉으라구요. "
-" 아......아... 감사합니다. " 그날 처음 들었어요. 그 아이의 목소리. 그리고 그 날 처음 봤어요. 그 아이의 이름.
그날 이후로 쭉 그 아이에게만 눈이 따라가고 귀를 쫑긋 세우게 되네요. 하랑 언니, 저 어떻게 해야할까요?
고백.. 할까요? 라고 보내주셨습니다.
- 아, 정말 풋풋한 이야기에요. 저도 이럴 때가 있었는데, 어머! 피디님 웃지마요!
- 소영씨의 이야기 정말 이쁘네요. 안그래요, 우현씨?
- 아, 네 그렇네요. 하하
- 그럼 이참에 한번 얘기해볼까요? 소희씨, 소희씨는 이런 경험 없나요?
- 저요? 음, 저는 워낙 인기가 많아서... 아유 장난이구요, 저도 이런 경험 엄청 많죠, 그런데 저는 인내심이 부족해서 인지, 금방 끝났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참 이뻤을 추억들인데 그래서 한편으론 아쉽기도 하구요.
- 와우, 정말요? 우리 소희씨는 너무 예뻐서 남자들이 줄 서있는 줄 알았는데? 호호 그럼 우현씨는요? 하긴 영화배우 한우현씨가 짝사랑을
했다고 하면 ... 와.. 팬분들이 난리나겠는데요?
- 글쎄요, 저도 아마 있었을 거에요. 제 기억으론. 고등학교 때인가,
- 정말요?
- 와, 지금 사이트가 난리가 났는데요. 7989님께서는 우현오빠! 짝사랑이라뇨! 설마 저..? 라고 보내주셨구요, 5050님께서는 우현오빠가 짝사랑
하셨다면 지금쯤 슈퍼모델인가요? 라고 재치있게 보내주셨네요. 그러게요, 정말 우현씨의 짝사랑 상대라면 꽤 미인이셨겠어요?
- 그거야, 사람마다 다르지 않을까요. 제 눈엔 되게 미인이었는데, 하하
- 어, 그럼 그 말은 미인이 아니란...
- 아, 그런게 아니라요.
라디오 부스안은 활기찬 웃음소리, 말소리가 들린다.
그렇지만 나는 그렇지 못하다.
한우현, 니가 고등학교 때 짝사랑 경험이 있었다는 거야? 말도 안돼.
분위기 맞추려고 거짓말도 술술 하는구나. 하긴 넌 원래 그런 애였지.
모든 사람들은 웃으면서 신나는 듯 얘기를 하는데 나는 멍하니 서있다.
- 그 아이는요, 미인은 아니었어요, 하하 그런데 너무 예뻤어요. 음, 마음이 참 고왔거든요. 제가 워낙 축구를 좋아해서 운동장에서 놀고 오면
항상 책상위에 제가 좋아하는 음료가 있었어요. 항상 모른 척 했지만, 그 마음이 정말 고맙더라구요.
그리고 어느 순간 좋아하게 되더라구요.
뒷통수를 맞은 듯 얼얼하다.
' 그리고 어느 순간 좋아하게 되더라구요. '
책상 위의 음료.
그리고 그 놈과 하필 눈이 마주쳐서.
- 어? 정말요? 와, 그럼 혹시 연예인 분들 중에 비슷한 이미지를 가지고 계신 분이 있나요?
- 와, 역시 하랑언니에요!
- 호호 제가 쫌.. 어때요, 우현씨?
- 글쎄요... 연예인 분들.... 음, 제 생각에는 저기 계시는 미소작가님하고 더 비슷한 거 같은데요.
이번에 절대 가벼운 것으로 맞지 않았다.
엄청나게 큰 망치가 내 마음을 퉁 하고 내리치는 느낌이랄까.
뭐야, 한우현. 너 뭐야.
내가 17살 때, 나는 그냥 여느 여고생과 같은 일상이었다.
" 봤어? 봤어? 우현이 또 축구해! 왠일이야, 너무 멋지다.. "
" 야 침흘리지마, 우현인 드러운 여자 안 좋아해. "
" 이 가시나가! "
항상 있는 풍경이었다.
그리고 나도 이런 풍경 중의 한 역할을 맡고 있기도 했다.
" 주연아! 나.. 매점가다가 우현이봤어.. "
" 으이구, 야 박미소. 제발 정신 좀 차려. "
" 아, 정말 백마탄 왕자님 같았어, 완전 오늘 대박이야... "
" 박미소, 또 시작이다. 차라리 매점 데리고 가서 아예 멀 사주지 그랬냐. "
" 헉, 이주연 ! 너.. 완전 천재야.... 아, 그럴껄 !! "
" 아 진짜 박미소, 넌 정말 대박이야 . "
이게 나의 일상이었다.
우연히 복도를 걷다가 마주쳤던 그 아이는, 내 마음을 설레게 했고, 6개월 가량 마음을 숨기고 있다가 표현하게 되었다.
" 어? 이게 머야? "
" 몰라, 짜식, 좋겠다! 아 나도 목말라. "
그리고 아무도 없는 점심시간이 되면 우현이가 가장 좋아한다는 음료로 항상 우현이의 책상을 시원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우현이가 그걸 마시는 모습을 너무나도 보고싶어서 그닥 친하지도 않은 우현이네 반 반장에게 가서 괜히 말을 걸며
힐끔힐끔 거리기도 했었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기를 한 6개월 정도. 어느새 일년이 지나 2학년이 되었다.
처음으로 우현이와 인사를 하게 되었다.
" 이주연~ "
" 머야, 에에.. 한우현. "
주연이하고 우현이는 중학교 동창이라고 했으니까, 물론 그 전에도 서로 알긴 했지만 나를 배려했던 걸까.
주연이는 그닥 우현이와 인사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주연이가 우현이하고 같은 반이 되어버린 것이다.
슬프게도 나는 옆반.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주연이네 반에 와서 주연이랑 수다를 떨고 있는데 우현이가 나타난 것이다.
" 머야, 이주연. 그 반응은? "
" 아이고 송구합니다, 킹왕짱 킹카 한우현님. "
" 비꼬는거야? 내가 너보다 인기가 많아서? "
" 어련하시겠어, .. 아, 미소야. 여긴 한우현, 알지? "
나를 보며 한쪽 눈을 찡긋거린 주연이.
" 이주연, 니가 친구도 있었어? "
" 왕따가 아니라서 참으로 미안하네. "
" 농담이지~ 미소? 이름이 미소야? 우와, 이쁘다 이름. "
매운 고추를 먹을때도 이렇게까지 열이 오른적은 없고, 아무리 무서운 영화를 보아도 이렇게까지 떨린 적이 없었고,
고열에 시달리는 감기에 걸려도 이렇게까지 식은땀이 난 적은 없었는데,
" 아...아....안녕.. "
" 우와, 이주연. 니 능력으로 이런 친구도 사겼냐? 대단한데? "
나를 보며 방긋 웃으며 주연이에게 농담을 던지는 우현이를 보고, 내 심장은 다시 한 번 폭발.
그 후로도 일년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나는 항상 주연이와의 하교를 했고 그 목적은 주연이의 반에 누구보다 빨리 가서 기다리며
우현이를 마주치는 일이었다. 그리고 내 음료수 고백도 쭉 이어졌다. 어쩌면 주연이가 있어서 더 편했다.
그렇게 1년을 보냈을까, 3학년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꿈에 그리던 우현이와 같은 반이 되었다.
" 미소야!! 그동안 심심했지? 나랑 같은 반이니까 걱정 푹 놓으렴"
" 주,주연아... 저기 들어오는 애... ... 진짜 우현이 맞아...? "
" 박미소! 이씨, 나도 너랑 같은 반이거든!!! "
미안, 주연아. 너의 말은 하나도 들리지 않았어. 오직 내 대각선에 앉아있는 그 아이만 보였거든.
" 어? 이주연 또 같은반인거야? "
" 왜 싫으냐, 이놈아. "
" 그래도 미소랑 같은반이라 좋다. 헤헤 안녕 미소야. "
" 으..응???? 어..어 아.안녕..... "
" 머야~ 왜 그렇게 놀래??? "
" 으..응.. 아.안녕.. "
" 또 인사하는 거야? "
방긋방긋 웃는 우현이.
참으로 신은 불공평하다. 이렇게 잘생기고 멋진 아이가 세상에 다정다감하기 까지 하다니!
그런데 지금 돌이켜 보니 그 아이와 같은 반이 되었던게 가장 큰 불행이었던 것 같다.
" 머냐 박미소? 거기 우현이 책상인데? 설마 지금까지 음료수 니가 준 거였어? "
걸.렸.다.
내가 걸린 상대는 우현이의 친구였던 한 아이였다.
제길. 똥 밟았어. 쟤 진짜 입 싼대..
드디어 걸린거야. 언젠가는 걸리겠지 했지만, 1년넘게 잘 지켜진 비밀이엇는데.
" 저, 저기. 그니까. 단지 떨어져 있어서 주워준거 였는데... "
" 에이, 박미소! 거짓말 치지마! 내가 다 봤는데? ㅋㅋㅋㅋ 야, 너 우현이 좋아하냐? "
" 응? 아니거든!!"
" 오케이! 오늘도 나의 입담이 발휘할 때가 되었군. ! 난 나간다 ~ 안녕 박미소~ "
큰일났다.
어떻게 하지.
완전, 나. 걸렸는데.
모든 아이들이 나를 쳐다보는 눈빛이 가히 심상치가 않았다.
" 박미소, 너 어떻게 된거야... "
놀란 주연이가 나에게 속삭였다.
" 그..그게.. 그니까....... "
" 미소야, 애들 다 아는 것 같아, 그냥 신경쓰지마. 기집애들, 지네도 맨날 꺅꺅 거리면서 너처럼 표현했어? 못했잖아. "
" 주연아 나 어떡해 .... "
그래도 주연인 내 친구였다.
" 미소야, 아까 승철이가 그러던데... 음료수 준게 너였어? "
그런 예쁜 눈으로 나한테 물어보면 어떡해, 우현아..
" 응?? 아... 저... 그..그니까..... "
" 머, 고마워. 잘마셨어, 그동안 히히. 오오 내가 그거 좋아하는건 어떻게 안거야? 애들이 되게 부러워했는데 "
내가 그래서 널.. 계속 좋아하나봐.
그래 까짓것, 어차피 들킨거.
그 뒤로 내 음료수 고백은 계속되었고, 어느 덧 수능을 보게 되었다.
그 때까지도 나는 우현이가 좋았다.
" 주연아, 이번...수능 끝나면, 고,고백하려구.. "
" 정말? 미소야, 정말루? "
" 응.. "
" 와!! 드디어 고백하는구나, 하긴 고백안해도 이미 다 알겠지만. "
" 이주연!! "
" 알겠어, 힘내 호호 "
그리고 나는 고백을 결심했다.
솔직히 대학교를 같이 갈 수 있었던 것 도 아니고, 우현이가 내가 싫다고 해도 덤덤하게 받아들일 자신도 있었다.
그래서 우현이에게 할 말이 있다는 문자를 하고 잠깐 만나기로 했다.
그리고 우현이에게 말한 장소로 가던 중, 뜻밖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 야, 내가 미쳤냐. "
" 왜~ 너한테 고백하려고 부른거 아니었어? "
" 와, 한우현 좋겠네. 고백도 받고. "
이게 무슨 소리지......
" 야, 시끄러. "
" 왜그래 ㅋㅋㅋ 한우현 완전 부럽다 . 아오 부러워. "
" 그래 ㅋㅋ 이참에 한번 잘 해봐 "
" 아우, 쪽팔려. 걔는 왜 나한테, 이러냐. 아 그냥 쫌, 거절하기 불쌍해서 계속 받아준거야. "
이게...... 내가.. 아는 우현이 목소리인데, 인정하고 싶지 않다....
" 머? 그럼 너 불쌍해서 그런거였어? "
" 당연하지, 야, 솔직히 내 이상형 너네도 알잖냐, 그냥 같은 반이고 수험생이었으니까 조용히 넘어가고 싶어서 그랬던 거야. "
믿기지가 않아서 눈을 비벼보고, 귀를 쑤셔보기도 했다.
같은 반...이고 수험생이라...? 불쌍해서..? 내가.......?
내가 널 좋아하는 게 , 그게 .. 불쌍해서 그런거였어? 내 마음이 불쌍해서... ?
참을 수가 없었다.
참아야 했던 걸까.
참을수가 없었던 게 내 탓은 아니니까,.. 돌아서는 데 내 폰에서 벨이 울렸다.
이건 왜 지금 울리는 걸까.
"미소..야? "
그 예쁜 목소리. 나한테 항상 다정했던 그 목소리로 그렇게 부르면 미련한 나는 돌아볼 수 밖에 없어.
" 미소야, 왜 그냥가~ 나 기다리고 있었는데. "
" 우현아, 너 크리스마스 때... 구세군 같은 곳에 돈 넣어본 적 있어? "
" 돈? 머 모금같은거? 응. 해봤는데,? 근데 왜? 설마 이거 말하려고 ? "
여전히 웃고 있다.
" 응, 아니. 넌 정말 착한 것 같아. 그런데 착한 줄 알았던 것 같아. 내가. "
" 무슨말이야..? "
" 아니, 연예인 소속사 오디션봤다 그랬지? "
" 응? 응 헤헤, 미리 사인해줄까? "
" 넌 분명 합격할거야. 지난 3년간 좋아하지도, 이상형도 아닌 나한테 친절하게 대해줬으니까. 하늘이 감동했을거야. "
" 무슨말을 하는거야? "
" 난 불쌍한 애거든. 불쌍해서 니가 그냥 받아준 애. "
잘했어. 눈물도 흘리지 않고, 한글자 한글자 또박또박.
이미 우현이 뒤에는 멍한 얼굴의 친구 2명이 나와있다.
그 애들도 한번씩 쳐다봐주고 마지막으로 우현이를 쳐다보았다.
" 나 너 좋아한 적 있는 건 맞는데, 이젠 아니야. "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 듯한 우현이었지만, 더이상 내가 있으면 큰일이 날 것 같아서 바로 돌아섰다.
뒤에서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했던 목소리를 가진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했던 아이가 내이름을 부른다.
안녕,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