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대 벽 저편에서 중얼댄 말
나는 알아들었다
발 사이로 보이는 눈발
새벽 무렵이었지만
날은 채 밝지 않았다
시계는 조금씩 가고 있다.
거울 앞에서
그대는 몇 마디 말을 발음해본다
나는 내가 아니다 발음해본다
꿈을 견딘다는 건 힘든 일이다
꿈, 신분증에 채 안 들어가는
삶의 몽땅, 쌓아도 무너지고
쌓아도 무너지는 모래 위의 아침처럼 거기 있는 꿈
/
황동규, 꿈, 견디기 힘든
새들은 매일 밤
허공에 몸을 던지며 운다
추락을 꿈꾸며
환화한 나는 꿈속에서 매일 까무러친다
그대여, 내일은 더 아픈 가을이 오리라
난독한 책들과 부적합한 교감 사이에서 허둥대다
착각이 거대한 신념인 줄 알고 사는 동안
몸은 가고 없으리라
누군가 우는 동안
새들은 허공에서 날개를 접고
모든 감정은 새벽의 서리처럼 사라지고
어느 날 환술사가 내게 와 속삭여
나는 매일 조금씩 더 높은 곳에서 나를 밀어버리지만
언제나 저녁이면 초인종을 누르고 집에 돌아와 두 발을 씻고
몸을 누인다
영원한 추락의 자세로
땅에 떨어져 말라가는 살구처럼
/
정영, 추락의 자세
한쪽이 무거워진 새장은 기울어 있다
문은 닫혀 있고 열쇠는 반짝이지 않는다
낡은 철창에 푸른 번개가 치면
숨은 장소들이 삐걱삐걱 나타난다
뼛조각들을 희미하게 드러내며
별들의 어둠을 이어 붙인다
부유한 어제는 죽었다
가난한 내일이 홰를 친다
우리는 낮에만 태양이 타오른다고 말한다
우리는 밤에만 별이 빛난다고 믿는다
너에게 나는 빛나고 있니?
빛나는 건 모두 멀리 있니?
우리는 말이 새어나올까 봐
가슴에 손을 올리고 잠이 든다
우리의 귀는 새를 닮아 있고
심장은 새장 모양이다
새장을 열고 날아간 새들이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
/
박시하, 오래된 새장
휴일의 대부분은 죽은 자들에 대한 추억에 바쳐진다
죽은 자들은 모두가 겸손하며, 그 생애는 이해하기 쉽다
나 역시 여태껏 수많은 사람들은 허용했지만
때때로 죽은 자들에게 나를 빌려주고 싶은 때가 있다
수북한 턱수염이 매력적인 이 두꺼운 책의 저자는
의심할 여지없이 불행한 생을 보냈다 위대한 작가들이란
대부분 비슷한 삶을 살다 갔다 그들이 선택할 삶은 이제 없다
몇 개의 도회지를 방랑하며 청춘을 탕진한 작가는
엎질러진 것이 가난뿐인 거리에서 일자리를 찾는 중이다
그는 분명 그 누구보다 인생의 고통을 잘 이해하게 되겠지만
종잇장만 바스락거릴뿐, 틀림없이 나에게 관심이 없다
그럴 때마다 내 손가락들은 까닭 없이 성급해지는 것이다
휴일이 지나가면 그뿐, 그 누가 나를 빌려가겠는가
나는 분명 감동적인 충고를 늘어놓을 저 자를 눕혀두고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저녁의 거리로 나간다
휴일의 행인들은 하나같이 곧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다
그러면 종종 묻고 싶어진다 내 무시무시한 생애는
얼마나 매력적인가 이 거추장스러운 마음을 망치기 위해
가엾게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흙탕물 주위를 나는 기웃거렸던가!
그러면 그대들은 말한다 당신 같은 사람은 너무 많이 읽었다고
대부분 쓸모없는 죽은 자들을 당신이 좀 덜어가달라고
/
기형도, 흔해빠진 독서
초가을 햇살웃음 잘 웃는 사람
민들레 홀씨 바람 타듯이
생활은 품앗이로 마지못해 이어져도
날개옷을 훔치려 선녀를 기다리는 사람
슬픔 익는 지붕마다
흥건한 달빛 표정으로 열이레 밤하늘을 닮은 사람
모습 있는 모든 것은 사라지고 만다는 것을 알고
그것들을 사랑하기에
너무 작은 자신을 슬퍼하는 사람
모든 목숨은 아무리 하찮아도
제게 알맞은 이름과 사연을 지니게 마련인줄 아는 사람
세상사 모두는 순리 아닌 게 없다고 믿는 사람
몇해 더 살아도 덜 살아도
결국에는 잃는 것 얻는 것에 별 차이 없는 줄을 아는 사람
감동받지 못하는 시 한편도
희고 붉은 피톨 섞인 눈물로 쓰인 줄을 아는 사람
커다란 것의 근원일수록 작다고 믿어 작은 것을 아끼는 사람
인생에 대한 모든 질문도 해답도
자기 자신에게 던져서 받아내는 사람
자유로워지려고 덜 가지려 애쓰는 사람
맨살에서 늘 시골집 저녁연기 내음이 나는 사람
모름지기
이런 사람이야말로 연인삼을 만하다 할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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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안진, 자격
발을 쭉 뻗기 위해서는
조금 더 연해져야 했다
뭉개지면서, 우리는 자라고 있다
생각을 많이 할수록 우리는 없어져갔다
자전거 바퀴가 똑같은 길을 똑같이 지나갔다
발을 내려놓지 못하게
옆사람이 크게 부른다 메아리, 메아리를
작게 부르면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작게 불렀다
저녁은 매일 바뀌지만
밖에 둘 수 없어서
안쪽 문을 열어두었다
생각이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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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미옥, 매일의 양파
울고 싶을 땐 그냥 울어라, 내 딸아
울음을 너무 오래 참으면 네 몸뚱이가 눈물단지로 변한단다
울음을 너무 오래 참으면 네 영혼이 가시방석으로 변한단다
내 딸아, 울고 싶을 땐 그냥 울어라
울음을 너무 오래 참으면 결국 사막과 결혼하게 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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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소, 고슴도치 선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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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란 단어에는 'ㅇ'도 있고 'ㅏ'도 있고 'ㅊ'도 있고 'ㅣ'도 있고 'ㅁ'도 있는데
'밤'이란 단어에는 'ㅂ'과 'ㅏ'과 'ㅁ'만 있다
길게 늘여놓고 나서야 오랜 시간 나를 고민하게 만들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고야 마는 야속한 밤을 원망하게 된다
w.우주연합
첫댓글 오늘도 좋은 글 감사해요~
글이 참 좋아요~
주민님 오늘 글이 참 와닿는 날이에요. 위로 주셔서 감사해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