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사학계가 만들어 놓은 함정에 빠지면(이주갑 인하설)광개토대왕비문에 나오는 왜가 신라 침공설이 정당화 될 수 있다.
일본 관학 사학자들의 함정에 놀아난 다면 백제 역사적 사실 마저 '고이왕'이 보낸 칠지도가 약 120년 후의 '근초고왕'으로 둔갑될 수 있다. 그 진실을 알리려 한다.
<백제 칠지도의 제작연대와 만든 왕에 대한 정확한 사실알기>
글:글돋(金文培)선생
먼저 「七支刀」(링크)에 관한 <일본서기> 해당 기사부터 보기로 하자 '구저 등이 찌쿠마나가히꼬를 따라(야마토 조정에) 왔다. 칠지도1구, 칠자경1면 및 각종의 중요한 보물들을 바치면서 말하기를 ,[신의 나라의 서쪽에 강이 있는데 ,(그 강물의) 원천은 谷那의 철산에서 나옵니다. 그곳은 멀어서 7일을 가도 빠듯합니다. 마땅히 이 물을 마시고(즉 이 물맛을 보고) 이 산의 철을 채취하여, 길이 성조(야마토 조정)에 바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위의 내용은 신공52년(252년, 이주갑 인하 372년)에 백제왕이 久? (구저)를 일본 貴國(기나이조정)에 보내 조공했을 때, 야마토 조정에서는 찌쿠마나가히고(천웅장언)를 귀국하는 구저에 딸려서 백제에 보낸 일이 있었는데 이번에 다시 구저 등의 사신들이 야마토에 귀환하는 찌쿠마나가히꼬를 따라서 重寶를 가져 왔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문제되는 편년이다. 원래 일본서기 편년상으론 신공52년(252년)에 '칠지도'가 일본에 하사된다. 하지만 어느틈인가 일본 사학계에서 신공52년(252년)이 이주갑 인하되어 371년으로 둔갑되어져 버렸다. 그로인해 칠지도를 하사한 백제왕은 원래 백제8대왕 고이왕 (234년~286년)에서 '근초고왕(13대 재위 346년~375년)'으로 변해져 버렸다. 일본 관학자들의 함정이 무엇인가를 고찰코자 이 글을 쓴다. 물론 자세한 내용은 <임나신론/고려원/95년 김인배,김문배 공저>에 자세히 소개되어있다. 오랜 시간이 흘렸지만 아직도 일본학자들이 파 놓은 함정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어리석음으로 백제 역사의 진실성도 왜곡되어지고 파급효과 큰 드라마 속까지 왜곡되어지는 사태가 발생하여 이를 안타깝게 생각하여 다시 간단하게 요약하여 핵심만 기술코자한다. <자료:드라마 근초고왕 > 요즈음 오랫만에 백제의 역사 영웅 '근초고왕'에 대한 드라마가 주말에 눈과 마음을 집중시키고 있다. 그 드라마의 원작은 이문열가 지은 책(대륙의 한)에 근거를 두고 있다. 드라마와 사실과완 픽션과 넌픽션의 차이이지만 필히 역사적인 중요한 사실은 왜곡되어서도 않되고 왜곡되어진 통념이라면 언젠가는 누군가가 문제성을 제기하여 바르게 잡아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그 핵심적인 점은 '칠지도'를 왜왕에게 하사한 백제의 왕이 '근초고왕'이라고 드라마는 말하고 있다. 이 주장은 일본 학계가 주장하는 내용이다. 물론 한국 사학계에 그 주장에 동조하고 있다. 하지만 이 주장에 반하는 학설을 '임나신론/고려원 95년 김인배,김문배 공저''에서 제기되었다. 벌써 15년 전의 책이라 설들이 잘 알려지지 않은 점이 안타까워 블로그를 통해서 약설하고자 한다.
결론은 백제8대 '고이왕(234~286)' 시대에 이뤄진 역사적 사실을 120년 (이주갑 )인하한 '근초고왕' 시대에 이뤄졌다는 설을 일본 학계에서 줄 곳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핵심엔 역시 '광개토왕비문' 에 나타나는 '왜가 바다를 건너와서 신라성을 침공하고...' 대충 이런 기사에 촛점을 두고 왜의 한반도 침략설에 촛점을 맞추다 보니(광개토왕비문의 시작의 연대 391년) 4세기이다.
왜의 침공세력의 주체가 '신공황후'라고 일본학자들은 촛점을 맞추었다. 오직 [일본서기]에 나타난 '신공황후의 '고衾新羅(고금신라)' 정벌과 동일한 광개토대왕비문에 대비할 요량이었다. 하지만 신공황후의 기사는 '일본서기' 충애왕 9년 조' 기사에 나타나고 있다.
신공46년 조에 처음 나오는 卓淳(다꾸의 땅)은 충애왕9년 '고금신라'완 이표기에 불과하다. 흔히 신공후의 신라정벌이라 일컬어지는 충애 8년~9년조의 기사는 한.일간에 늘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다.
신공의 <삼한 정벌>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광개토왕비문의 '왜의 신라'침입년대를 맞추기 위해서 2주갑 인하설을 재기하기 하였다. 하지만 이 기록의 충애9년은 일본국년표에 의하면 AD200년이다. 백제는 제 5대 초고왕:AD166~재위48년),에 해당한다. 이주갑 인하를 단행해도 320년인 셈이다. 391년 비문과는 역시 년대가 맞지않는 모순을 가지고 있지만, 억지 주장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주감 인하년에 백제는 11대 비류왕(304~346년)에 해당된다. 칠지도 제작연대도 일본서기년대 일본국년기록에 의하는 이주갑 인하할 때 비류왕의 차남 근초고왕(346년~375년)에 비로서 해당되어진다. 하지만 일본국년표에 의하면 원래 '백제 고이왕' 시대에 칠지도가 왜왕에게 하사되어지지만 일본 관학자에의해 일본서기의 조작과 위작으로 '근초고왕'에 해당되어진다고 믿어왔다.
<사진자료:드라마 근초고왕 캡쳐/칠지도 덴리시 이소카미 신궁에 안치된 백제 고이왕 때 왜왕에게 하사한 칼> 모두 광개토대왕비문에 신공후의 신라정벌 년대를 맞추기 위해 만들어진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게 된다. 일본서기도 응신기와 신공기가 날조되는 과정을 겪게된다. 하지만 조작된 것은 삼국사기를 비롯한 한국문헌과는 연계성이 결려된 기사들로 채워지고 있다.
일본서기에 나타난 '칠지도'에 대한 기록으로 부터 모순된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타국(한국역사기록)과의 문헌비교에서 <신공기>의 객관성이나 정당성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이 무엇보다 二周甲設의 적용에 원인이 있었다. 말하자면 이주갑설은 보편적 이론이 될 수 없는 모순을 내포하고 있고, 따라서 여기서 도출한 개별 현상은 거짓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울러 일본의 기성 사학계의 주장은 때때로 쉽게 납득하기 힘든 모순과 오류에 가득한 억지 주장이었던 것도 발견할 수 있었다.
<神功紀>의 역사적 사실에 관한 비판적 숙고 신공기의 객관성이난 정당성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이 무엇보다 '이주갑설'의 적용에 원인이 있었다. 일본의 기성 사학계의 주장은 때때로 쉽게 납득하기 힘든 모순과 오류에 가득찬 억지 주장이었던 것도 발견할 수 있었다. 신공기의 이주갑설이 잘못된 것이라면 이 또한 '칠지도'의 왜왕 하사품, 주인공왕도 '근초고왕'에서 '고이왕'의 하사품으로 바꿔야한다.
그 구체적인 사례로서 신공 55년(255년, 이주갑 인하 375년) ●64년(264년,이주갑 인하 384년).65년(265년, 이주갑 인하 385년)조의 기사는 모두 백제 왕의 사망에 따른 왕위 교체 및 즉위에 관한 내용을 싣고 있는데, 이것들이 모두 120년(二周甲)의 차이가 난다고 하는 일본 학계의 이주갑설은, 특별히 그 연대 외에는 일률적으로 소급 적용 시켜 따져 봐도 상호 유관성도 없을 뿐만 아니라 같은 조건하에서 앞으로도 계속 관찰될 수 있는 계연성도 없다는 점에서 보편적 이론이 될 수 없다.
또 <신공기>의 46년(246년,이주갑 인하 366년).49년(249년,이주갑 인하 369년)조 기사에 보이기 시작하여,55년(255년,이주갑 인하375년).64년(264년, 이주갑 인하 384년).65년(265년, 이주갑 인하385년)조에 계속 등장하는 백제 왕이름의 肖古(백제5대왕) 및 왕자 貴須(6대왕,구수왕의 장남)을 '근초고왕((백제13대) 및 ' 近仇首(근귀수)'(참고<14대는 '근수구'/구수와 수구는 완전 다른 이름>)王이라고 주장하는 기성 학계의 단순한 추측이나 주관적 판단은 결코 논거가 될 수 없다. 이것은 논거의 진실성에 관한 문제로서, 논거는 어디까지나 구체적인 사실을 근거로 삼는 사실논거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초고왕의 사망 연도와 근초고왕의 그것이 다르며, 또 어째서 두 사람이 동일 인물인지를 입증할 만한 근거를 아무것도 제시 못하는 처지에서 초고왕이 곧 근초고왕이라고 하는 이런 억측은 논거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아무튼 이처럼 <신공기>의 본문에 신공에 관한 기사는 삭제되고, 그 대신 엉뚱하게 백제 왕의 교체 기사(즉 백제 왕의 사망 및 즉위 기사)를 삽입 기재함으로써 이런 것들이 대개의 연구자들로 하여금 <<일본서기>>의 내용을 파악함에 있어 오류의 함정에 빠지도록 해 왔던 것이다. 요컨대 백제 왕명의 허위기재야말로 사실 은폐를 위한 소위 위장용으로 사용된 가면이었다고 필자는 파악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근초고왕(13대)없이 초고왕(5대 166~214년)의 가면을 쓰고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것으로 잘못 본 기성 학계에서는 이를 이주갑(120년) 인하하여 해석하면 진상을 볼 수 있다고 착각한 데서부터 추리의 판단력이 흐려져, 그 동안 <일본서기> 연구의 성과들이 대부분 오류의 함정에 빠지도록 유도해온 데에 <신공기>의 기술 방식상의 어떤 특징이 있었던 것이다.
다분히 의도적이었던 것으로 판명되는 <일본서기>편찬자에 의해 행해진 허위사실의 조작을 꾀함으로써 그들이 기대한 것은 다름아닌 역사적 사실의 은폐였다고 생각된다. <일본서기>의 조작 시작이 원래 서기를 쓸 당시에 의도되었는지, 후세에 조선반도 정벌론의 당위성 때문에 이주갑 인하를 맞춰서(광개토대왕 비문에 맞춰서) 행해졌는지를 밝히는 일에도 주목해야할 숙제이다.
그렇다면<일본서기> 편찬자, 혹은 후세 학자들의 의도한 사실 은폐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를 밝히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 된다. 여기서 특별히 눈여겨보아야 할 곳이 있다. 그것은 신공46년(246년, 이주갑 인하 366년)조에 '시마노-스꾸네'의 지시로 慊(사람人변)人 '니하야'와 탁순인 '와꼬'가 백제국을 방문했을때, 백제왕 肖古가 그들을 후히 대접했다는 기록이다. 또 신공 49년(249년,인하(369년)조에 백제.왜 연합군에 의한 신라 7국 평정기사에서 백제 왕이름인 '초고왕(재위166~214년)'과 왕자 귀수가 다시 등장하는대목이다.
그런데 실은 백제왕 초고의 재위기간은 166년~214년(49년간)까지 이므로 신공46년이라는 <일본서기>의 249년과는 모순된다. 말하자면 249년(신공 49년)은 백제 초고왕이 이미 사망한 지 35년이 지난 뒤이므로 연대가 전혀 맞지 않다는 뜻이다.
<기성사학계의 이주갑 인하설 진상>
바로 이 때문에 일본 사학계는 신공 49년을 이주갑 인하한 369년의 己巳年으로 파악하였고, 이로써 실은 백제 고이왕(古爾王/8대234~289년재위) 때의 사건을 2干支(간지) 끌어내린 이 시기의 백제 왕인 근초고왕 24년(369년) 및 왕자 近貴須(일본 신찬성씨록) 연대에 교묘하게 맞춰놓고 있음을 알게 된다.
다시 말새 연대가 훨씬 앞서는 초고왕과 전연 상관없는 것을 王名의 유사성을 빌려 초고왕은 근초고왕과, 왕자 귀수는 근귀수와 혼동을 일으키도록 교묘히 이중으로 조작함으로써 <고이왕234년~286년> 연대의 모든 것을 완전히 지워 버릴 수 있다고 착안한 데에<일본서기> 편찬자의 의도가 숨겨져 있었다고 보인다.
쉽게 말하면 이것은 <고이왕> 때 백제에 의한 일본으로의 진출 사실을 은폐 내지 호도하려는 의도적인 조작이던가, 후세 정한론학자들의 광개토왕비문 발견으로 신라정벌설 당위성을 위해서 391년 시작으로 나타난 비문의 왜, 신라 침공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신공기의 '고금신라'정벌설년대를 <일본서기상>2주갑 인하하는 조작술책 쓴 것 같다.
소위 이주갑설이란 것도 이런 것들에 비롯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전자의 경우, 왜 그와 같은 조작이 필요했던 것일까. 그 것은 고이왕(8대왕) 이전부터, 이를테면 초고왕(5대왕/고이왕은 초고왕의 후손)때에 이미 백제가 해상을 통한 큐슈(九州)에의 진출이 이루어지고 고이왕 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본격적인 침공을 개시함으로써 이 무렵부터 일본열도가 백제의 영양권 아래 놓이게 되는 치욕스런 사단을 놓고 후일의 <일본서기>편찬자들은 은폐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필자는 보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병인년(246년,백제 고이왕 13년, 신공 46년)에 나오는 [갑자년(244년)]에 백제 사자 3인이 탁순(현재 일본구주 사가현 多久市)에 와서 일본(기나이지방)으로 가는 길을 물었다]고 한 데서 부터 사실 은폐는 시작된다. 그리고 이 갑자년을 백제 근초고왕代의 갑자년인 同王19년(364년)으로 혼동 인식케 하는 수법으로 고안된 것이 신공 55년(255년:병자년,고이왕22년)조의 「백제초고왕薨(서거)」이란 기사와 56년(256년:병자년,고이왕 23년)조의 「백제초고왕자 귀수立爲王」과 같이 <신공紀>와는 아무 상관 없는 백제 왕의 사망 및 즉위 기사로 대체시킨 기술방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진실을 말한다면, 신공 46년은 실제 <일본서기> 기년 그대로 쳐서 246년의 병인년으로 백제 고이왕 13년에 해당하며, 그보다 2년전인 신공 44년은 고이왕 11년의 갑자년 (244년)이다.
요컨대 고이왕 시절에 일본의 큐슈가 백제에 의해 정벌당하는 역사적 사실을 의도적으로 감추기 위해 <일본서기> 편찬 당시던지 아니면 그 후세 관학자에 의해서 고이왕 연대의 것은 모조리 삭제해 버릴 수 있는 방편으로 교묘하게 고안해 낸 것이 백제 왕명의 허위 기재와 사망 및 즉위 기사의 대체였던 것이다.
위에서 말한 [칠지도]에 관하여 학계에서는 현재 일본의 덴리(天理)시 이소-노-카미(石上) 신궁에 있는 칠지도라고 하는 데 대해서는 이의가 없다. 하지만 그를 하사한 백제왕이 일본서기 편년상으론 원래 '고이왕'시대였는데, 어찌된 일인지 위와 같은 이유로 120년 인하된 편년으로 둔갑하여 '근초고왕'으로 바뀌는 역사왜곡이 되었다.
반드시 바로잡아서 이미 백제 고이왕 시대에 요서지방과 일본 큐슈지방을 정벌한 해상왕국 백제의 시대를 120년 바로 잡아야한다는 사실이다. 일본서기의 조작에 동원된 서술방식상의 한 특징을 구체적인 예를 대별하면 ⑴ <일본서기>의 본문과는 관계없이 단독으로 삽입된 백제 왕력 ⑵ <일본서기>의 分註에 <백제記>로부터 인용하였다고 밝힌 기사로, 간지를 명시하거나 왕력에 편입시킨 것. ⑶ <일본서기>의 기사이면서 干支를 표시한 기사 ⑷ 대외관계 기사 중에서 그 시작을 언급하고 있는 기사가 <應神紀>에 집중되어 있는데 그러한 종류의 유사한 기사가 상당수 <웅락기>와 중복되는 것 등이다.
아무튼 <일본서기>의 이러한 기록들은 간지를 二甲子(120년) 내리면<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왕력과 완전히 일치하며, 따라서 가장 쇤뢰할 수 있는 기사들라고 기성학계에서는 믿어 의심치 않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 백제 왕력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예를 든 백제 왕의 교체기사들만 특별히 二干支(120년) 상향 조정되어 있을 뿐이므로, 이것을 기준으로 종래의 설처럼 그 나머지 것들까지 모두 일률적으로 二干支(120년) 위로 끌어올려 보아야 한다는 소위 「연대 설정의 기준」으로 삼을 수 없다는 데 있다.
즉 <신공기>나 <응신기>의 연대와는 전연 상관없는 훨씬 후대의 백제 왕 교체기사를 간지에만 적당히 맞추어 배분, 수록함으로써 기년상의 혼란을 통한 「진실의 은폐」라는 반대급부를 얻을 수 있다는 목적의식인 것이다.
요컨대 은폐하고 싶은 진실이란 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일본서기>의 재해석을 통해 보아온 것처럼 한반도로부터 백제 세력의 큐슈 침탈을 통한 일본열도에의 진출과 기나이 야마토 조정에 대한 지나친 관여와 수호였던 것이다. 야마토 왕권으로서는 상당히 굴욕적인 초기 韓地 백제와의 관계를 그들의 주체적 사관에 의해 기술할 역사서인 <일본서기>에서만은 은폐 내지 삭제해 버리고 싶은 나머지 이 같은 기년 조작을 꾀했을 것이라는 논리가 첫번째이고 두번째는 정한론 관학자들의 일본서기 조작을 통해서 광개토왕 비문의 <왜 신라정벌>의 당위성을 획득하기 위해서 <신공기)와<응신기> 연대 조작 획책이다.
신공. 응신 양대에 걸쳐 소위 이주갑 인상설을 타당한 이론인 양 일반화 한 식민사관에 길들어진 한국사학계도 그 모순점과 오류를 지적할려는 의지조차 보이지 않아, 사라진 백제의 진실된 해양왕국역사는 120년 후로 후퇴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사학자 문정창 선생의 백제사에 나타난 <고이대왕의 요서지방 정벌과 해상왕국 건설>관련된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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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전혀 다른 향가 및 만엽가 원문보기 글쓴이: 庭光散人글돋先生
첫댓글 대륙벡제의 실체를 잘 정리해 주셨습니다 잘 봤습니다~~고 문정창선생님의 저서를 얄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