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지창조, 첫날에서 셋째 날(1)
창 1:1-13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4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5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6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8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9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0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1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12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3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
창 1:1-13 / 태초에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2) 땅은 아직도 제대로 꼴을 갖추고 있지 않은 상태였으며, 또한 아무 것도 생겨나지 않아 쓸쓸하기 그지 없었다. 깊디깊은 바다는 그저 캄캄한 어둠에 휩싸여 있을 뿐이었고 하나님의 영이 그 어두운 바다 위를 휘감아 돌고 있었다. 3) 하나님께서 `빛이 생겨나 환히 비춰라' 하고 명령하시자 빛이 생겨나 환히 비추었다. 4) 하나님은 빛이 환하게 비추는 것을 바라보시고 무척 흐뭇해하셨다. 그렇게 보기 좋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빛과 어둠을 나눈 뒤 5)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다. 이렇게 저녁이 지나고 다시 아침이 되어 하루가 흘러갔다. 첫째 날이 지난 것이다. 6) 하나님께서 `물 한가운데에 창공이 생겨나라. 그 창공이 위에 있는 물과 아래에 있는 물을 나뉘어라.' 하고 명령하시자 7) 그대로 되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창공을 만들어 창공 위에 있는 물과 창공 아래에 있는 물이 갈라지게 하셨다. 8) 하나님께서는 이 창공을 하늘이라고 이름 붙이셨다. 이렇게 저녁이 지나고 다시 아침이 되어 하루가 흘러갔다. 둘째 날이 지난 것이다. 9) 하나님께서 `하늘 아래 곧 땅 위에 있는 물은 한곳으로 모여 뭍이 드러나게 하여라.' 하고 명령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10)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광경을 보시고 무척 흐뭇해하셨다. 그렇게 보기 좋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뭍을 땅이라 이름 지으시고 한곳에 모여든 물을 바다라고 이름 지으셨다. 11) 하나님께서 `땅에서 파릇파릇한 풀이 돋아나거라. 또 낟알을 맺는 식물과 온갖 과일 나무도 자라나거라' 하고 명령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12) 땅에서는 푸른 풀과 낟알을 맺는 온갖 식물과 과일 나무가 자라났다. 이것을 보시고 하나님은 무척 흐뭇해하셨다. 그렇게 보기 좋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13) 저녁이 지나고 다시 아침이 되어 하루가 흘러갔다. 셋째 날이 지난 것이다.
하나님이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첫째 날부터 셋째 날까지 빛과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
태초에(1-8) 우주의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인 태초입니다. 하나님은 시간의 주관자이십니다. 태초가 요한계시록의 종말로 마무리됩니다. 하나님은 시작이요. 끝이십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천지는 단순히 하늘과 땅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성경 전체적으로 보면 하늘은 영적인 영역까지 포함합니다. “창조하시니라”로 번역된 바라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강조합니다. 이 때 땅은 혼돈 상태였으며 공허했습니다. 온 우주는 질서와 형태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서 창조의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질서와 생명을 준비하셨습니다. 모든 창조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가장 먼저 창조된 것은 빛입니다. 빛은 즉각적으로 존재하였습니다. 말씀의 권위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첫 번째 창조의 결과를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십니다. 빛은 낮이 되고 어둠은 밤이 되었습니다. 둘째 날 하나님은 궁창을 창조하셨습니다. 궁창은 하늘을 의미합니다(8). 하나님은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누십니다. 둘째 날 하나님은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종류대로(9-13) 셋째 날 하나님은 물을 한 곳으로 모아 뭍이 드러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물을 바다라고 부르십니다. 땅과 바다가 생명이 태어나고 자라게 될 터전이 준비되었습니다. 땅에는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가 존재하게 하십니다. “종류대로”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이 단어는 생물학적 또는 유형학적 범주를 나타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식물이나 동물들이 각각 고유한 특성을 가진 별개의 종류로 창조되었음을 강조합니다. 모든 생명체가 그 종류에 따라 독특한 특징과 성질을 지니고 있고 그것을 유지합니다. 진화나 변이와 같은 내용과 정반대입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고 함으로써 셋째 날의 창조가 완료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루를 저녁부터 시작하여 아침으로 이어지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창조한 내용들이 완성된 질서 속에서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함과 동시에 저녁이라는 불안이 아침이라는 희망을 바라보게 하는 영적인 의미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적용: 하나님이 둘째 날을 창조하신 후 다른 날과 같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지 않은 이유를 서로 나누어 봅시다.
예수님은 가죽부대의 비유를 들어 제자들의 비전을 키워 주셨습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마 9:17) 좁은 태도로는 폭넓은 삶을 살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수시로 옛 방식과 생각의 틀에 갇힙니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은 새로운 일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변하지 않으면, 원대한 비전을 품지 않으면,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를 놓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인생을 ‘새 포도주’로 채워주려 하십니다. 낡은 가죽부대는 버립시다. 생각을 바꿉시다. 과거의 틀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우리 삶 속에서 행하실 크신 일을 기대합시다.
< 설 교 >
들풀도 창조하신 하나님
창 1장 11~13절 / 이상호목사
하나님께서는 첫째날 천지를 만드셨습니다. 즉 우주 공간을 만드시고, 그 우주의 공간에 지구를 제일 먼저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그 지구의 모습은 완성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하나님은 빛을 만드시고 그 지구를 향해서 비추셨습니다.
빛이 비추임으로 비추는 곳은 낮, 반대편은 자연히 어두움인 밤이 만들어집니다. 지구는 계속해서 자전을 함으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창조의 첫째 날이 지나갑니다.
그 이튿날, 하나님께서는 물로 뒤덮여있는 지구를, 물 가운데 궁창을 만드심으로,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물을 나누십니다. 그리하여 물과 물 사이에는 대기권이라는 공간이 생기고, 그 공간을 하늘이라고 칭하십니다. 궁창 아래의 물을 바다라 칭하셨는데 참으로 신비한 창조입니다.
바다가 얼마나 넓고 큽니까? 세상의 모든 오물들이 바라도 유입되는 바다를 하나님께서는 세 가지의 방법으로 관리하십니다.
첫째, 바닷물에 소금을 넣어 물이 썩지 않게 하셨고,
둘째, 밀물과 썰물로 하루에 두 번씩 대대적으로 휘저으심으로 썩지 않게 하셨고
셋째, 파도를 일으켜 물 속에 산소를 공급해 줌으로서, 몇 만년이 지나도 물이 부패하지 않도록 자동 관리하는 시스템을 만드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바다는 대륙의 온도를 조절하는 냉 온방 장치역할을 합니다. 물은 비열이 크기 때문에, 낮에 햇빛을 많이 받거나, 또 밤에 대기가 싸늘하게 식는다고 해도, 물은 온도가 빨리 올라가거나 내려가지 않습니다. 따라서 바닷물은 지구의 낮과 밤의 온도차가 극심하지 않도록 조절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한 여름에는 밤에도 해수욕이 가능합니다.
또한 온난화 기체인 이산화탄소를 대기에 비해 60배나 많이 지니고 있음으로, 지구의 기후를 조절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만일 바다가 없었다면 여름이나 겨울철은 매우 덥고 추워서 인간들이 살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다는, 인간에게 무진장한 보화를 제공합니다. 무진장한 지하자원, 무진장한 생선들은 자원과 식량과 약이 됩니다.
그런데 물의 성분을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수소원자 두개와 산소원자 하나가 결합되어서 물이 됩니다. 수소나 산소, 모두가 불만 붙이면 폭발하는 인화성 물질이지만, 이 둘이 결합하면 불을 끄는 물이 된다는 것, 정말 묘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지구 표면의 71%를 바다로 만들어 놓으심으로, 우리가 가장 살기에 좋은 환경을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이것으로 두 번째 날의 창조가 마쳐집니다.
이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어서, 셋째 날이 시작됩니다.
오늘은 이 셋째 날에 과연 무엇을 만드셨는가를 살펴보기로 합니다. 우리가 이런 창조의 과정들을 하루하루 살펴보고 있노라면, 각기 다른 어떤 것들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어떤 일정한 목표를 두고서 순서에 입각해서, 창조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정한 목표는 다름 아닌 사람을 안주시키기 위함입니다.
사람을 거하게 하기 위하여, 얼마나 세심하게 한 작업 한 작업하고 계시는가를, 창조의 과정을 면밀히 살펴보면, 확연하게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풀을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차영섭씨는 들풀을 노래했습니다.
들풀 세상 / 글 차영섭
『들풀 세상을 바라보면 솔솔 재미가 있다. 들풀은 여럿이 모여 살기 때문에 볼만 하다. 꽃송이를 한 번도 피워보지 못한 풀도 있고, 자기 나름대로 피워보는 풀도 있으나 모두가 하늘처럼 푸르게 살고 있어 좋다.
생긴 모양도 다 다른 것이 서로 싸우지 아니하고 사이좋게 사는 걸 보면 예사롭지 않다. 봄에 다 같이 이 세상에 왔다가 가을이 오면 스스럼없이 다함께 어디론지 돌아간다. 공생이 무엇인지를 들풀을 보면 안다. 출신과 지역과 성분조차도 구분 없이 평등하다. 활기차게 살다가도 겨울이 되면 온몸을 얼려가면서도 은신하여 수양을 한다. 한 철 수양의 힘으로 한 삶을 생기 있게 사는지도 모른다.
들풀은 생명력이 강하다. 적자생존의 대명사다. 태풍이 몰아쳐 강한 나무도 버젓이 쓰러지는 판에 들풀은 끄떡없이 잠시 누웠다가 훌훌 털고 일어선다. 별빛이 총총한 밤에는 하늘로부터 이슬을 모아 햇볕의 따가운 열에도 몸을 지탱한다. 극심한 가뭄에 몸이 누렇게 떠도 비가 내리면 이내 푸른 몸으로 자기 몸을 되살린다. 누군가 귀찮다고 뿌리를 뽑아 버릴지라도 어떻게 해서라도 뿌리를 흙에 묻고 다시 살아나는 오뚜기가 된다. 누가 풀씨를 뿌리지 않았는데도 풀은 돋아나고, 땅을 깊이 파놓아도 그 자리엔 풀이 난다. 어디서 와서 삶의 터전을 이렇게 잡는 걸까.
들풀은 잎이며 꽃잎이 참 정교하다. 들에 나가 풀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보면 못생긴 데가 하나도 없다. 어느 손이 저렇게 정교하게 고안을 해서 만들었을까? 저런 얼굴이 되기 위하여 긴긴 세월 얼마나 많은 고통을 이겨냈을까? 세련되지 않으면서도 순수함이며, 자랑하지 않으면서도 겸손함이 더 없는 매력을 지니는 것은 아닐까? 꽃보다 아름다운 잎, 잎보다 아름다운 꽃이 들풀의 개성인 것 같구나. 하나도 같은 잎이 없고 하나도 닮은 꽃이 없도다.
들꽃은 아주 크지도 아니하고, 그렇게 화려하지도 아니하며, 보란 듯이 향기를 내뿜지도 아니하다. 향이 있는 듯 없는 듯 살포시 코끝을 간지럽힌다. 어떤 꽃은 꽃인지 아닌지 모를 정도로 바늘로 콕 찌른 것만큼 작다.
들풀의 세계에는 공생의 아름다운 모습이 있다. 바람이 일면 다 함께 춤을 추고, 바람이 억누르면 다 함께 누워서 저항한다. 대나무를 닮았는지, 서로 굳세게 엉킨 뿌리는 공동체를 형성하고 부단한 소멸과 자체 생성을 이루어지는 재래시장의 모습 같다. 달빛 아래 곤충들이 잔치하면 풀잎으로 기타를 연주하고 모든 벌레와도 공생하며 서로 돕고 사는 아름다운 세계가 여기에 있다.
나는 가끔 들풀에 귀 대이며 들풀에게 묻는다. 궁금한 게 있다. 지난겨울이 너무 추워 꽁꽁 얼어붙은 흙 속에서 혹 어찌 됐나 쭈그리고 앉아서 너희들에게 묻는다.
만상이 한 번 죽으면 다 죽었다고 하는데 너희는 이맘 때 쯤이면 언제나 죽은 듯이 갔다가 죽은 듯이 되 오는 그 부활의 힘이 무엇이냐고.
꽃이 되는 꿈? 아니면, 나무 되는 꿈? 용 되는 꿈? 여하튼 무슨 꿈이 있기에 재생할 거야. 봄만 오면, 들풀을 보노라면 들꽃들의 색깔이 아름답다.
내가 들꽃을 좋아하는 까닭은 들꽃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들꽃의 독특한 삶이 있기 때문이다. 잡풀로 이 세상에 태어나 누구 하나 거들떠 봐주지 않아도 홀로 고독을 넘어서 작으나마 꽃을 피웠기 때문이요, 도시에서 기웃기웃 날아다니는 꽃이 아니라 소박하고 순수하게 뚝심으로 이 강산을 지키며 사는 우리 민족성 같은 넋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요, 도시의 꽃처럼 인위적이고 차별화된 것이 아니라 무위자연 속에서 강인한 생존력으로 평등한 삶이 사람들에게 던지는 의미가 크기 때문이요, 누군가에 의해 지목받아 어떤 가슴이나 꽃병에 꽂히는 삶보다 들녘에서 자유롭게 이슬 머금으며 달밤에 귀뚜라미 풍류를 기다리는 희망이 엿보이기 때문이요, 태반이 이름 모를 꽃들이지만 별을 바라보고 커서 별을 닮아서인지 볼수록 또렷하고 또렷하며 또 또렷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름 모를 들꽃들에게 나의 마음을 전한다. 누가 널 꽃이라 부르더냐? 하도 작아서 더 애련한 존재야. 우거진 들풀 사이에서 촌락 이뤄 옹기종기 하얀 풀꽃들, 머리카락 끝자리 바늘 뜸만한 너의 얼굴, 이슬조차 앉을 수 없겠구나. 저리 저리도 작은 꽃을 때 맞춰 어느 손이 저렇게 달아놓았을까.
차라리 내가 너의 이름을 몰라서 좋다. 아무도 모르는 순결한 꽃이여. 누구 하나 꽃이라 섬기지 않아도 이렇게 사는데 익숙해진 진리여, 이대로 살아라. 뽑히는 일도 없이 평화로 자유로 끈질긴 생명력, 너에게서 우주를 본다.』
이제 하나님은 땅을 드러나게 하시고, 그 땅위에 풀과 씨 맺는 채소와 열매를 맺는 나무를 만드셨습니다. 11절과 1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어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땅을 만드실 때, 땅에서 자라나는 풀과 채소들과 나무를 만드셨는데, 하나님은 드디어 생명체인 식물을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풀과 채소와 과실을 만들 때에도, 재미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단어는 "각기 종류대로"라는 것입니다. 세 번이나 반복되는 이 말씀은 풀은 풀이요, 채소는 채소요, 나무는 나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섞지 않으셨습니다. 풀이 자라서 나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나무는 나무대로 완성품을 만드셨습니다. 풀이 자라서 나무가 되게 한 것이 아니라, 나무는 나무대로 완성품을 만드셨습니다. 발전하고 진화하고 종을 만들어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로 '종류대로'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질서의 하나님이시요, 조화의 하나님 이십니다.
채소를 종류대로, 나무를 종류대로, 새를 종류대로, 육축을 종류대로 하나님은 그 종류대로 완성품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섞거나 발전시키거나 진화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땅에 각종 씨 맺는 채소와 씨 가진 열매맺는 나무를 나게 하셨습니다. 씨는 곧 생명을 의미합니다. 단단한 껍질에 둘러 싸여서 그 생명을 보존하는 것입니다.
이집트의 수 천년 된 항아리 속에서 발견된 볍씨를 심었더니 싹이 났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이 작은 씨앗 하나에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단단한 껍질로 보호막을 싸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한 알의 씨앗 속에는 생명의 시발점인 배라는 것이 있습니다. 씨앗이 생명을 움트기 위해서 최초의 단계가 물을 흡수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수분으로 인하여 씨앗의 껍질이 부풀게 되고, 껍질이 터져 배를 성장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과정 속에는 정말로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가 숨어 있습니다. 간혹 씨앗을 심고는 물을 주는데, 싹이 안 트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대부분 물을 너무 많이 주기 때문입니다. 좀 전에 씨앗이 발아하기 위해서, 수분이 가장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말대로 빨리 발아하게 하려고 물을 흠뻑 주었더니 씨가 발아하지 않는 겁니다. 이럴 때 왜 그런가 하고 의아해 하실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물을 너무 많이 줘서 썩어 버렸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죽어 버린 것입니다. 죽었기에 썩어버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죽었느냐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씨앗이 수분을 흡수하고 겉껍질을 부풀리며 터치기 전까지는, 산소가 필요 없는 산소 이외의 것을 산화제로 하여 호흡하는 무기호흡을 합니다. 그러나 씨앗의 껍질이 터지자마자 무기호흡에서, 산소를 필요로 하는 유기호흡으로 순식간에 바뀌게 됩니다. 그러므로 산소를 필요로 하는데, 물이 너무 많게 되면 호흡곤란으로 죽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오묘하지 않습니까?
이토록 작은 씨앗 하나에도 엄청난 배려를 보이신 하나님의 솜씨에 우리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편한 대로, 하나님의 창조를 넘어서려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씨 없는 수박을 만들었다고 자랑했지만, 하나님은 씨 있는 것을 만드셨습니다. 씨가 없다면 한번은 먹기 편하겠지만 다음에는 먹지 못합니다.
씨 가진 것을 만듦으로 해서 오늘도 먹고, 다음에도 다시 먹도록 하신 것이니, 하나님만의 기발한 아이디어입니다.
사람들은 궁금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인가? 씨가 먼저인가 풀과 채소와 나무가 먼저인가? 어느 것이 먼저입니까? 그렇습니다. 분명히 12절에 기록되어 있기를, 하나님께서 땅에게 풀과 씨 맺는 채소와 씨 가진 열매맺는 과목을 내라고 명하시자, 땅은 즉각적으로 순종하고,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아무 것도 없던 흙만 있는 땅 위에, 하나님의 명령 한마디로, 온 지면을 통해서 솟아올라오는 풀과 채소와 나무들을 말입니다. 온 지구가 금시 푸른색 식물로 뒤덮이는 장관을 말입니다. 거기에 더하여서 각종 과일들은 빨갛고 노랗고 각종의 칼라로 얼마나 울긋불긋 아름다웠겠습니까?
마치 흑백 티브이 보다가 칼라를 보는 그런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솜씨입니다. 그저 쩨쩨하게 씨앗 몇 개 만들어 놓고 "이거 귀한 거다. 물 잘 주고 잘 키워서 씨앗 받아서 경작 잘해라 잘만 키우면 넉넉하게 먹을 수 있을 거다"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것을 각기 종류대로 풀이면 풀, 채소면 채소, 과일나무면 과일나무를 한번에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멋지고 풍성하신 솜씨입니까?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뭐라고 합니까? 진화가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마치 맛있는 사과한 알이 만들어지기까지, 수만 번의 발전을 거듭해서, 이런 맛있는 사과가 만들어 진 것처럼, 마음대로 상상을 하고는, 그것이 진짜인 것처럼 착각을 하고는 대단한 연구를 했노라고 의기양양해 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기껏 한다는 일이, 고구마 뿌리에 토마토 열매가 달리게 하는 기형나무를 만들어 놓고는 잘했다고 손뼉을 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식물을, 각기 종류대로 우리에게 이미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순리대로 잘 가꾸어서 먹으면 되는 것입니다.
풀은 보잘 것 없지만 위대합니다. 만약 이 지구에 풀이 없다면 얼마나 삭막할까요? 산과 들, 모든 길에는 풀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또한 모든 풀은 신비한 약초입니다. 독초도 다른 풀과 합해지면 해독되면서 약이 된답니다. 인간을 포함해서 많은 동물들은 풀을 먹고 삽니다.
땅을 만드신 하나님께서는 그곳에 여러가지 동물이 먹을 수 있도록, 먼저 식물을 만드셨습니다. 식물도 그냥 풀(각종 채소)과 씨맺는 채소/참깨, 들깨, 콩..., 쌀, 보리, 조, 수수, ..., 그리고 열매맺는 나무/호도, 밤, 사과, 배, 복숭아, 포도, 귤, 한라봉, 무화과, .... 그리고 나서 여섯째날 사람을 포함한 동물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의 마지막 단계로 땅의 짐승들을 만들기 시작하셨습니다.
24절과 25절을 보면 여기에도 "그 종류대로"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창 1장에 10번이나 반복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은 종을 바꾸지 않으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그대로 태초에 하나님은 모든 것을 만드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위대한 하나님의 창조의 모습을 고린도전서 15:38-41에서 더 분명히 볼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육체일지라도 모두 같은 육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육체가 다르고, 새의 육체가 다르고, 짐승의 육체가 다르고, 물고기의 육체가 다릅니다. 특히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하나님과 교제하는 존재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들이 자연을 파괴하고, 짐승처럼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부인하는 사람들은 원숭이가 인간이 될 수 있고, 인간이 짐승도 될 수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면서 인간은 하나의 육체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인간을 쾌락의 도구, 또는 경제적 활동의 도구로 생각합니다. 사람이 동물처럼 살기 시작했습니다. 인간과 동물이 섞일 수 있다는 발상에서 이 모든 것이 오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각기 종류대로" 만들어졌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창조의 모습을 회복해야합니다.
하늘에는 해의 영광이 있고, 달의 영광이 있고, 수천억 개의 별들의 영광이 따로 있습니다. 창조의 신비가 참으로 놀랍습니다. 우리는 동물의 육체와 비슷한 속성을 가지고 있지만, 결코 동물이 아닙니다. 땅의 형체가 아닙니다. 우리의 본체는 하늘에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하며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짐승같은 인생을 살고 있는지 보지 않습니까? 가까운 예를 들자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띠" 즉 개띠니, 뱀띠니, 호랑이 띠니 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왔다고 봅니다. 제주에도, 정동진 해수욕장에도 12지상이 있었습니다.
또 절이나 잡신을 섬기는 곳에 가보면, 짐승의 형상을 사람과 섞어 놓은 것을 볼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이 짐승으로 덮여 있는 것입니다.
윤회설이 가짜인 이유는 사람이 다시 짐승으로 태어난다는데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합니다. 사람이 짐승이 되었다가, 다시 사람이 되거나 하는 일은 절대 없습니다. 깨끗한 물과 더러운 물이 합해지면 결국 더러운 물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짐승과 인간이 합쳐진다면 짐승이 되어버립니다. 그것은 결코 인간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조차 자식을 결혼시킬 때 사주도 보아주고, 띠를 따져 궁합도 봅니다. 그것은 "내 자식은 짐승이요!"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 주셨습니다. 인간을 절대 동물이 아닙니다. 원숭이는 원숭이고, 사람은 사람입니다. 결코 종자는 바뀌지 않습니다. 그리고 인간만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복된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이것이 창조입니다.
동물과 식물과 해와 달과 우주의 모든 것을 다스리고, 통치하라고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인간은 이렇게 귀한 존재입니다. 짐승처럼 사는 자들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그들에게 제시하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빛과 바다와 땅, 그리고 땅에서 돋아나서 자라나는 풀과 씨 맺는 채소와 씨 가진 열매를 맺는 과목들을 각기 종류대로 단 한 번 만에 모두 만드신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사람을 위하여 만드신 것입니다.
집터를 닦고 난 뒤에, 건물을 짓고 그 다음에는 가구를 들여놓고, 맨 나중에 주인이 들어와 살듯이,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받들며 살아갈,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된 우리들이 살기에 알맞은 환경을 주시기 위해서, 세상만물을 이토록 세밀하게 준비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좋으신 하나님을 내 아버지로 모신 것이 놀랍도록 감사하고 행복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정해졌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그토록 아름다운 창조를 하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위하여,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를 날마다 생각하시며, 생각만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생각난 일들을 행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열매 맺는 신앙생활
창 1장 11~12절 / 피종진목사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어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창 1:11,12)
여기에 보면 하나님이 땅에 창조하신 모든 것이 제각기 열매를 맺도록 지으시고 열매를 맺었을 때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반면에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는 찍혀 불에 던져진다고 했습니다(마 3:10). 주님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기도 하셨습니다(마 21:19). 사실 우리도 어떤 면에서는 열매를 맺어야 하는 피조물입니다. 요한복음 15:16에 보면 주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이유에 대해 우리로 하여금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열매를 맺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떠한 열매를 맺어야 될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열매는
첫째, 성령의 열매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열매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첫 번째 나타난 열매는 사랑의 열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의 열매가 맺혀지는 사람이라야 진정으로 남을 이해할 수 있고, 동정할 수도 있으며, 남을 높일 수도 있고, 도와줄 수도 있으며, 또 서로 상대방을 수용하면서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열매가 맺히면 자연히 기쁨의 열매, 화평의 열매, 그리고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의 열매도 맺히게 됩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이처럼 귀한 사랑의 열매를 맺게 하여주신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은 교회를 창립케 하고, 또 교회를 부흥케 하며, 또 교회의 일꾼을 일으키게도 합니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행 6:3) 하나님은 성령이 충만한 사람을 하나님의 일꾼으로 선택하여 세워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스가랴 4:6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둘째, 전도의 열매입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 16:15,16) 우리 주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것은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모든 사람 앞에 예수가 구주이심을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분들에게 소망이요 생명임을 전해야 합니다. 예수를 영접하는 자가 바로 천국 시민이 된다는 것을 전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온 세계가 우리의 무대입니다. 우리는 앉아서 믿지 않는 자가 오기를 기다리는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가서 전해야 됩니다. 그리고 내 가족, 내 친척, 내 친구 뿐만 아니라 온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어느 시대든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발자취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수반됩니다. 성령이 그를 도와줍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손이 그를 붙잡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 머리 위에 성령이 임재하심으로 말에 권세가 있게 하고, 손과 발에 이적이 나타나게 하며, 기도할 때 하늘의 보좌가 움직이게 하며, 그리고 영권과 물권을 주셔서 감당할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때로는 모세에게 홍해가 갈라지게 했듯이, 요단강이 갈라지고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했듯이 불가능한 것도 하나님이 가능케 하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복음을 전하는 교회는 신앙이 병들지 않고 부흥하게 됩니다. 교회의 사명은 전도와 선교입니다. 전도는 고기를 낚는 어부와 같이 많은 생명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전도는 생명줄을 던지는 일이고, 마귀의 결박에서 해방시켜 주는 일이며, 죄와 저주, 멸망과 심판의 구덩이에서 천국으로 옮겨주는 행위이고, 예수님과의 만남을 성립시켜주는 일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서 최고의 축복은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0:19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전도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이러한 특권을 부여해주셨습니다. 다니엘 12:3에 보면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전도의 열매를 많이 맺으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제물의 열매입니다.
어떤 분은 연보주머니만 보면 기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시험에 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연보’라는 말은 ‘복’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연보 시간은 곧 하나님께 복을 심는 시간인 것입니다. 출애굽기 23:15에 보면 “빈 손으로 내게 보이지 말지니라”라고 말씀했고, 출애굽기 25:2에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내게 예물을 가져오라 하고, 무릇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 자에게서 내게 드리는 것을 너희는 받을지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또 말라기 3:10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서 이와 같이 명한 것입니다.
성경에 제물을 드리는 자세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을 보면 ①즐거운 마음으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7) ②감사한 마음으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이 봉사의 직무가 성도들의 부족한 것만 보충할 뿐 아니라 사람들의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를 인하여 넘쳤느니라”(고후 9:12) ③후한 마음으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너희의 후한 연보를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고후 9:13) 제물이란 우리의 몸도 제물이고, 시간도 제물이고, 물질도 제물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재간을 드리는 것도 제물입니다. 제물의 열매를 많이 맺으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고후 9:6)
넷째, 입술의 열매입니다.
“사람은 입의 열매로 인하여 복록에 족하며 그 손의 행하는 대로 자기가 받느니라”(잠 12:14) 바이런은 ‘말은 재산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어떠한 말을 하며 사느냐에 따라서 가난하게 되기도 하고, 부유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언어는 완전히 없애버리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은 허락지 않습니다. 또 시험 당할 때 피할 길을 주신다고 했습니다(고전 10:13). 좀 안된다고 자기의 능력을 바라보면서 ‘이젠 끝장이다’라고 하지 말고, 주님의 능력을 바라보면서 ‘나는 이제부터 시작이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안된다’고 하지 말고 ‘된다’는 말을 해야 합니다. ‘큰 일 났다’고 하지 말고 ‘별거 아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어렵다’고 하지 말고 ‘쉽다’고 말해야 합니다. 나는 어렵지만 주님이 함께 하실 때는 쉬운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서 열매가 달라집니다. 잠언 18:21에 보면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혀의 권세를 주셨습니다. 축복의 말씀을 전할 때는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게 합니다. 저주할 때는 사망의 역사가 나타나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혀의 권세를 가지고 생명의 역사를 나타내야 합니다.
에베소서 4:29에 보면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말을 할 때 항상 은혜로운 말을 해야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에 성령의 열매가 맺혀지고, 하나님께서 권세를 주셔서 능력있게 주의 복음을 전하며, 믿음을 주셔서 제물을 심어 부자가 되게 해주시고, 여러분의 입술에 혀의 권세를 주셔서 은혜로운 말을 통해서 생명의 열매를 많이 맺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 1장 9~15절 / 박병욱목사
요한복음 20:19-23
행복과 자존심
여러분은 언제 행복을 느끼십니까? 일이 잘될 때입니까? 성공했을 때입니까? 여러분, 자존심 상한적이 있었습니까? 아마도 ‘나는 자존심 상한 적이 한 번도 없었어’ 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한 분도 안계실 것입니다. 제가 질문을 바꿔서 다시 여러분께 묻습니다. 여러분은 언제 자존심이 상하셨습니까? 여러분은 얼마나 자주 자존심이 상하십니까? 우리는 실패했을 때,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실패했을 때, 단지 실패했다는 이유만으로 자존심이 상했는지, 실패에 대한 나와 다른 사람의 평가와 반응 때문에 자존심이 상했는지를 돌이켜 봅시다.
지난 주 중에 있었던 월드컵 축구 아시아 예선에서 한국 대표팀이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차두리 군은 아버지인 차범근 씨로부터 “경기가 그게 뭐냐” 하고 핀잔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공했을 때도 자존심을 상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성공했어도 행복하지 않을 수 있고, 실패했어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내가 실패했다는 같은 사실 앞에서도 어떤 사람은 나에게 위로와 격려를 줍니다. 어떤 사람은 힘을 줍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사람의 마음을 뒤집어 놓고, 오장 육부를 다 끓어 오르게 합니다.
축복과 저주
이렇게 위로를 주고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도구가 무엇입니까? 대부분의 경우에 행복과 불행은 말 때문입니다. 입 밖에 낸 말에는 무엇을 이루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는 부정적인 언어 사용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소위 저주에 익숙합니다. 저주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먼저 ‘무조건적인 저주’가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라도 그 저주의 대상자에게 닥치는 무조건적으로 저주가 임하는 것있습니다. 두번째는 ‘조건부 저주’가 있습니다. 조건부 저주는 처음에는 그 사람 위에 떠돌다가 그가 잘못을 저지르면 그제서야 그 사람에게 닥치는 저주를 말합니다. 조건부 저주는 금지된 무슨 행위를 하거나, 꼭 해야 되는 일을 하지 않을 때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건부 저주는 저주를 하면서 경고를 하는 효과가 있습니다(레5:1; 신27:14-26). 율법을 선포할 때, 또 그 율법 선포를 예배 형식으로 되풀이할 때 회중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게 하려고 저주를 선포했습니다. 신명기 28장에는 율법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복을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에게는 저주를 선포했습니다.
점장이나 무당은 주로 무조건적인 저주를 선포하고 이 무조건적 저주를 조건부 저주로 바꾸면서 이익을 취하는 것입니다. 저주는 사람 안으로 뚫고 들어가서 그 사람과 그의 가정을 망치고 대대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저주가 엄청난 파괴적인 효력을 지닌다면, 축복은 삶을 증진시키고 보존하는 힘을 넘겨줍니다. 사람이 한 번 내뱉은 말에는 효력이 있으므로 축복의 언어는 개인과 그 가정에 대대로 행복과 번영을 선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의 위력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무에서의 창조 creatio ex nihilo
창세기에 의하면 태초에 “하나님의 행동”이 있었습니다. 태초에 있었던 하나님의 행동은 “창조하시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창조는 이미 있는 재료로서 모양을 만드는 것이 아니고, 아무것도 없는데서 있게 만드시는 창조였습니다. 이것을 라틴어로 “creatio ex nihilo” 라고 합니다. “무(無)로부터의 창조”(creation from nothing)입니다.
그래서 “창조”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사역에만 씁니다. 창조는 무(無)에서 유(有)로의 창조를 말합니다.
말씀으로 창조/ 말씀의 능력
그렇다면 어떤 창조방법이 무에서의 창조에서 가능할까요? 하나님께서 무로부터 창조하실 때, 있게 만드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말씀으로 창조”하는 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습니다. 태초에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시니 그대로 되었습니다. 땅의 식물을 내라 하시니 식물들이 생겼습니다. 동물들아 있을지어다 하니까 그대로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말은 이루어집니다. 사람들이 말로 동의를 하면 이것이 세계 현실이 됩니다. 그런데 이 언어의 능력은 악한 자들이 먼저 알고 그 능력을 이용을 합니다. 2차 대전의 비극을 앞장서서 일으킨 히틀러는 “거짓말도 자꾸하면 사실이 된다”라고 믿었던 사람입니다.
지금 한국과 일본은 외교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말로하는 전쟁입니다. 지금 독도 문제가 말의 문제입니다. 일본이 독도를 점령하는 군사적인 행동을 한 것이 아닙니다. 2005년 3월 16일 일본 시마네(島根)현 의회가 2월 22일을 “다케시마(독도의 일본식 이름)의 날”로 제정하는 조례안을 통과 시켰습니다. 그렇지만 세계가 독도는 현재 한국 땅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잘못되어서 모든 세계의 여론이 한결 같이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인정을 하고 세계의 모든 지도가 일본 땅으로 표시를 하고 있다면, 50년~100년 후 잘못된 지도에 세뇌된 지도자들이 세계 정세를 판단할 때, 잘못 판단할 가능성이 훨씬 높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지혜롭게 대처를 해야 합니다. 말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현실이 되기 때문입니다.
말에 능력이 있는 사람
물론 말의 효력은 말한 사람이 누구이며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지에 달려있습니다. 고대 히브리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에게 특별한 축복의 능력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먼저 임종을 맞이한 사람이 축복의 능력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우리는 야곱이 죽음을 앞두고 자손들을 축복한 것(창48장)을 읽을 수 있습니다. 두번째는 특별한 은사를 받은 사람이 축복의 능력이 있다고 믿었습니다(민22-24장의 발람). 세번째로 특별한 직책을 가진 사람이 축복의 능력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예배 마지막에 회중에게 축복하는 제사장은 그 직책이 축복의 능력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말과 손을 빌어서 복을 전하게 하시지만, 복을 주시는 분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면서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는 곳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행동화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건화됩니다. 세상이 변화됩니다. 세상이 치유됩니다. 이 땅의 나라들이 새롭게 건설됩니다. 하나님의 새 창조의 사건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심령과 골수를 찔러 쪼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헛되이 돌아오지 않습니다.
“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 (사 55:10-11).
우리는 정결치 않은 일이나 사건을 결코 입에 담지도 말아야 합니다. 가슴아파 하는 비탄의 말이라도 자주 올려서는 안됩니다. 통탄하는 말속에 이미 부정적인 영향이 퍼져나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대화 내용을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주제로 우리의 혀와 입술을 사용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식사를 하면서도 “이사람도 참 훌륭한 사람, 저 사람도 훌륭한 사람이지” 하면서 사람들을 칭찬하고 나면 얼마나 행복해지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축복의 통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평화의 말을 전하라
먼저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인 우리는 평화의 말을 하여야 합니다.
"이날 곧 안식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19절)."
예수의 오심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를 가져오며 모든 두려움과 슬픔을 이기는 기쁨을 일으킵니다. 여러분의 말로 평화를 만드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처음 하신 말씀이 “샬롬” 입니다. “여러분에게 평화가 있길 바랍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인사인 것입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후4:8~9)는 평화가 예수님으로부터 옵니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평화를 위한 일꾼들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위해 복음을 들고 나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가는 곳마다 복음의 씨가 뿌려지고 복음의 씨가 뿌려진 곳에서 평화의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정의가 서며 불합리한 사회 제도가 개선되며, 잘못된 이념들이 폐기됩니다. 우리는 복음의 씨를 뿌리는 평화의 사절로서 이 세계 가운데 존재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분노가 있을지라도 분노의 말을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방금 화를 내며 말하고 싶었던 것을 그 내용을 다른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도리어 여러분의 말은 설득력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과 하나님께 죄를 짓지 않게 될 것입니다.
감사의 말을 하라.
두번째 우리는 감사의 말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작년 여름에 미국 교회를 탐방할 때, 처음 일주일 간을 버스 단체 여행으로 미국 서부 지역을 다녀 온 적이 있습니다. 한번은 멀리 앞에 앉은 일행 둘이서 큰 일이 난듯이 대화를 합니다. 카메라의 필름이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혹시 필름이 있느냐고 물어 보았지만 요즘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디지털 카메라를 사용하기 때문에 달리는 버스 안에서 필름을 구하기는 불가능했습니다. 갑자기 저에게 제 여행 가방 밑바닥에 넣어 놓은 필름이 생각났습니다. 공항에서 게이트까지 갔다가 그 필름을 사려고 면세구역까지 긴 길을 왕복해서 힘들게 산 필름이 기억났습니다. 그것을 그분들께 드려야 되겠다고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았습니다. 차가 관광지에 정차 했을 때, 내리면서 그분들에게 필름이 필요하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분들이 더 이상 사진을 찍고싶지 않구나 하고 생각을 했는데, 저를 따라서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운전기사에 부탁을 해서 화물칸의 문을 열고 구석에 있는 제 여행 가방을 찾아서 꺼네고 가방을 활짝 열어서 밑바닥의 필름을 꺼내 드렸습니다. 더운 여름날 얼마나 더운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가 필름을 드리자 마자 그 사람은 말한 마디 없이 필름을 낚아 채듯이 받아가더니 열심히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얼굴이 마주쳐도 전혀 감사의 인사를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처음 제가 필름을 드릴까요 물었을 때 고맙다는 말은커녕 전혀 반가운 기색도 하지 않았습니다. 필름을 건네주는 순간 “감사합니다” 하는 말 한마디 없이 낚아채듯 가져갔습니다. 이 사람들은 감사하는 마음은커녕 남의 것을 받았다는 생각조차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참 어이없는 경험 때문에 저에게 섭섭한 마음이 들면서 ‘내가 괜한 친절을 베풀었나’ 하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앞으로 와라. 뒤로 가라’ 하면서 열심히 사진 찍는 것을 보면 쓸데 없는 친절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 사람들 좋으라고 필름을 준 것이고, 처음부터 필름 값을 받겠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는데 필름 한 통 때문에 ‘내가 왜 이러나’ ‘내가 이렇게 필름 한 통 때문에 마음 상하는 옹졸한 사람인가’ 하는 자괴감이 들었습니다. 저는 저 자신이 이상해 지는 것을 느끼고서는 필름에 대한 생각을 잊으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이 일화는 저에게 많은 반성을 하게 했습니다. 첫째로 내 마음이 좁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좋은 자기 발견입니다. 두번째로 내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 무수한 사람들의 친절, 호의가 얼마나 감사해야 할 일이었는가?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감사하기는커녕 알지도 못하고 지나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세번째로 ‘사람들의 친절도 감사하지 못하는 내가 하나님의 은혜에는 제대로 감사하고 있는가’ 하는 반성을 하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베푼 호의에 대해 감사의 말을 듣지 못해 마음 아파 합니다. 그러나 이 때 다음의 두 가지 질문에 대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께 그처럼 감사를 드리고 있는가?
나는 이 세상에서 감사의 말을 듣고자 그 호의를 베풀었는가?
용서의 말을 하라.
세번째로 우리는 용서의 말을 해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하셨습니다. 성령께서 오신 것은 죄로부터 깨끗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성령께서 오셔서 죄를 용서하시는 것은 사람의 영혼 안에서 “인간의 새 창조”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죄를 용서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이미 죄 용서를 받았다는 것을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죄 용서를 전할 뿐만 아니라, 죄 용서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의무가 아니라, 권한입니다. 권세입니다. 권력입니다.
죄 사함의 권세를 거부함으로써 오는 부정적 권세를 누리지 말아야 합니다. 거부권(비토권)에 집착하는 사람은 병든 사람입니다. 권세와 권력은 잘 사용해야 합니다. 항상 적극적인 의미에서 사용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실 수 있도록 희생 제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다들 구경꾼 같습니다. 자기를 위한 희생에 대해서 들으면서 남의 이야기 듣듯이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위해서 옷 벗기우고 매질 당했어도 우리는 아프지 않았고 치욕스럽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모두를 용서하며 돌아가셨는데 우리는 아직 아무도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형제가 우리에게 죄를 지으면 몇번이나 용서할까요? 일곱번 하면 되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일곱번을 일흔번씩이라도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490번 용서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7은 “완전수”이고, 10은 “큰 수”입니다. 그러므로 칠을 칠십배 하는 것은 대단히 큰 수입니다. 즉, 무제한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 인간에게 가능한 일입니까? 우리는 먼저 한번의 용서가 힘듭니다. 더구나 두번째 용서해야 한다고 하면 속에서 폭발합니다. 세번째 용서하려고 하면 속이 무너져 내립니다. 네번 용서하려고 하면 내가 먼저 병에 거립니다. 다섯번째 용서하려고 하면 머리가 돌아버립니다. 여섯번째 용서하려고 하면 내가 먼저 죽어버립니다. 그래서 일곱번째는 용서를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용서의 한계는 일곱번을 넘기 힘듭니다. 일곱번을 용서할 수 있다면 성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490번씩이나 용서하고 무제한 용서할 수 있습니까? 예, 가능합니다. 한번에 일곱 번이나 490번 용서하려고 하지 말고, 한번에 한번씩만 용서하면 됩니다. 매 순간마다 ‘내가 지금 한번 용서하자’ 하는 마음으로 매번 용서하면 우리는 무제한적인 용서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생명을 전하는 말을 하라.
네번째로 우리는 생명을 전하는 말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숨이 없이는 말을 못합니다. 말은 숨을 내쉬며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숨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인간에게 숨을 불어넣어서 산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숨결, 성령이 인간에게 들어와서 사람이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성령 전달은 입김을 불거나 숨을 내쉼을 통하여 일어납니다. 그래서 숨은 성령입니다.
숨이란 영입니다. 숨은 생명입니다. 숨을 내쉬며 하는 말은 생명을 담아서 내 뿜는 말인 것입니다. 영이 담긴 말입니다. 말에는 말하는 사람의 생명이 담겨있습니다. 말은 생명을 담아서 하는 것입니다. 영이 담긴 말은 영을 전하고 생명이 담긴 말은 생명을 줍니다. 언어를 통해서 생명이 전달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생명의 언어를 말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이 없으면 아무리 탁월한 재능을 가진 사람일지라도 효과적인 사역이 불가능하게 됩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거듭하여 성령의 충만을 받도록 제자들에게 당부하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성령의 충만을 받아 능력있는 사역자들이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어떤 숨을 쉬느냐에 따라서 말이 달라집니다. 말은 영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악령에서 나오는 것은 저주이고 성령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축복입니다. 부활의 영으로 하는 말은 재창조의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하신 우주를 다시 한번 생명의 능력으로 새롭게 하십니다. 이것이 부활의 능력을 입혀주는 말씀의 재창조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생명을 전하는 메신저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현재 우리의 말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현실을 향하여 명령해야 합니다. “새 생명을 받아서 다시 살아날지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향하여도 외쳐야 합니다. “너는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할 지어다. 너는 하나님의 참 형상을 회복할지어다.”
우리는 우리의 말과 말씀 선포를 통해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동참해야 합니다. 이 세상이 변할 수 있다는 확신과 우리가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자신감과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창조의 때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자 모든 것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오늘날 우리를 통해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도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의 언어는 사람을 새롭게 만듭니다. 태초에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말을 통해서 새 사람을 창조하기를 원합니다. 새 세계를 만드시길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의 메신저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언어가 전도의 말, 용서의 말, 긍정적인 말, 위로하는 말, 용기를 주는 말, 사랑하는 말, 사람을 살리는 말로 가득차길 바랍니다.
여러분이 가시는 곳마다 생명의 사건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일하는 직장마다 변화의 사건이 일어나길 바랍니다.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마다 치유의 사건이 일어나길 바랍니다. 여러분이 복음을 전할 때마다 회개의 사건이 일어나길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가 사람들을 새 생명으로 살리시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동참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의 창조와 과학의 눈
창 1장 6~25절 / 이종철목사
신앙과 과학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면서 둘째 날 하신 일은 궁창을 만들어 물을 궁창 위의 물과 아랫물로 나눈 것이었습니다. 궁창은 빈 공간을 말하는데 이것이 하늘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장면에서 무슨 생각이 듭니까? 먼저는 궁창 위에 어떻게 물이 있을 수 있지? 하는 의심일 것입니다. 하늘은 파랗게 보이지만 거기에 물은 없습니다. 물론 비와 눈이 내리지만 그것은 땅이나 바다에서 올라간 수증기가 구름이 되어 내리는 것일 뿐입니다. 그렇지만 옛날 사람들은 하늘 위에 물이 있다고 그렇게 믿었습니다. 지금 현대인들 중에 하늘 위에 물이 있다고 믿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된 것입니까? 하나님 말씀이 틀린 것입니까? 하나님 말씀에는 전혀 오류가 없다고 믿는 분들은 그래서 다른 식의 주장을 펼칩니다. 이들은 처음 하나님이 하늘을 만드실 때는 하늘 위에 물이 존재했다고 주장합니다. 대표적으로 소위 ‘물보 이론’이란 것이 있습니다. 하늘 위에 지구를 감싸는 물보가 있었는데 이 물보가 노아 홍수 때 터져 모든 물이 땅으로 쏟아져 내렸다고 합니다. 그 물로 인해 온 땅이 다 잠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물보가 있었을 때는 지구에는 4계절이 없고 연중 따뜻한 날씨였다고 합니다. 인간 노화의 원인 중 하나로 드는 것이 자외선인데 이 물보가 막아 주어서 사람들이 장수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실제 가장 장수한 므두셀라는 969세까지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사실인지 어떤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과학적 근거가 없는 그냥 상상일 뿐입니다. 물층이 있었다면 그 무게 때문에 지상으로 떨어지던지 아니면 뜨거운 태양에 의해 증발해 버렸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 말을 믿고 싶습니까?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지구와 우주의 생성 연대에 대한 문제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6일에 걸쳐 우주 만물과 인간을 만들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17세기에 케임브리지 총장 라이트푸트라는 분은 성경의 모든 족보와 연대들을 계산하여 인간인 아담이 BC 4004년 9월 17일 금요일 오전 9시에 탄생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식의 계산은 우주의 탄생이 137억 년이고 지구의 연령 46억 년이며 인류의 탄생은 5만 년 전이라는 지질학자들의 주장과는 너무 큰 차이가 납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을 믿습니까? 창세기와 과학의 충돌 때문에 학교에서는 지질학자들의 말을 믿고 교회에서는 성경의 말을 믿는 것이 우리 현실이 되었습니다.
이를 조화시키기 위해 어떤 분들은 창세기 1장 2절의 혼돈의 기간이 매우 길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분도 있고, 창조의 하루를 24시간이 아닌 보다 긴 기간으로 계산하기도 합니다. 베드로서에서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벧후3:8)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이해하기 쉽도록 하루라고 하셨지 이 하루는 실상 몇 만 년 몇 억 년이 걸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창조론을 주장하시는 분들 가운데서도 창조의 연대 문제에서 서로 갈립니다. 수십 억 년에 이르는 지질학적 연대를 수용하시는 분도 있고(오래된 지구론) 문자 그대로 우주의 역사가 6천 년 길어야 1만 년을 넘기지 못한다는 분들도 있습니다(젊은 지구론).
여러분은 어느 쪽을 택하고 싶습니까? 둘 다 문제가 있습니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이들이 성경을 보는 방식의 문제입니다. 성경을 가지고 창조의 연대를 따지는 것은 성경을 잘못 읽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창세기 1장 성경공부를 인도하거나 학교에서 강의를 하면서 꼭 물어보는 것이 있습니다. “창세기가 과학서입니까 아니면 신앙서입니까?”하는 질문입니다. 과학서라면 사실이 더 중요하고, 신앙서라면 의미가 더 중요합니다. 과학서라면 정확히 우주 창조의 시점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가 중요하고, 신앙서라면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신 이유가 무엇이고 그 의미는 무엇인가가 더 중요합니다.
다시 쉽게 설명하겠습니다. 여기 자동차가 한 대 있습니다. 과학적 질문은 무엇입니까? 이 자동차의 원리는 무엇이고, 엔진은 무엇을 썼고, 자동차의 유형은 무엇이고, 언제 만들어졌고 어떻게 발전했는가? 일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적 질문은 무엇입니까? 이 자동차는 누가 만들었나? 주인은 누구인가? 만든 목적은 무엇인가? 올바른 운전법은 무엇인가? 하는 관심입니다. 서로 질문이 다른데 성경, 특히 창세기는 후자의 질문에 답하는 신앙서적입니다.
사실 과학이라는 것은 최근에 발달된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파스퇴르 실험이라는 것도 1860년대에 있었습니다. 파스퇴르는 용기에 열을 가해 무균상태로 놓으면 변질이 되지 않고 그대로 있다는 것을 실험으로 증명하였습니다. 그전에는 자연발생설이라고 하여 걸레를 놔두면 거기서 자연적으로 벼룩이 생기고 심지어 쥐도 창조된다는 식이었습니다. 최근까지도 이러했으니 창세기가 기록되던 모세 시대에는 과학적 마인드는 전혀 없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비가 오지 않으면 신의 노여움 때문에 그렇다고 하고, 제사를 통해서 신을 달래면 비가 온다는 생각이 일반적인 시대였습니다. 바다에 폭풍이 불면 포세이돈 신이 노해서 그렇다고 합니다. 오늘날도 바닷가 근처에는 얼마나 많은 미신들과 금기들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창세기 말씀을 읽을 때 성경이 처음 기록되던 시대의 눈으로 읽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들은 여러분들처럼 과학적 관심이 없었습니다. 궁창 위에 물이 존재하나 그렇지 않나 하는 질문을 갖지 않았습니다. 창조의 시점이 정확히 언제였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비가 오는 것은 당연히 하늘에 물들이 모여 있고 그 창문을 열 때 비가 온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에게 보다 중요했던 것은 그 물을 주관하는 자가 누구인가에 대한 물음이었습니다. 자신들이 믿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능력을 가지신 분이신가에 대한 궁금증이었습니다. 창세기는 이 물음에 답을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자연과학적으로 오류인 것들도 있습니다. 그러면 소위 경건한 사람들은 화를 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쓰신 성경인데 어떻게 오류가 있을 수 있느냐고 합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은 오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오류투성이입니다. 인간이 사용하는 문자로 어떻게 하나님을 다 담아 낼 수 있겠습니까? 문자로 기록되는 순간 무한하신 하나님은 제한 당하고 맙니다. 인간의 지식이 짧은데 어떻게 하나님의 고차원적인 지식을 다 계시해 줄 수 있겠습니까? 어린아이에게는 그 수준에 맞추어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이것을 하나님의 자기 낮추심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어린 아이 눈높이로 말씀하신 것이 성경입니다. 하늘에 물이 있다고 믿고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들의 수준에 맞추어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신앙 면에서 전혀 오류가 없습니다. 사실 성경이 기록된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 인생의 의미를 밝히고 생명과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 기록하셨지, 성경을 과학과 논쟁하라고 주시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1) 성경을 읽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 안에 있는 생명을 얻을 때 성경을 제대로 읽은 것입니다. 디모데 후서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3:16) 성경은 우리 행실을 바로 잡고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살도록 가르치기 위해서 기록되었습니다. 우리에게 과학적 지식을 주시기 위해서 성경이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과학과 신앙, 특별히 창조론과 진화론에 대한 논쟁은 다음 시간에 좀더 자세히 다루어 보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과학의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혼돈에서 질서를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과학은 존재합니다. 합리성이라는 것은 질서의 하나님이 존재할 때만 가능합니다. 18세기에 데이비드 흄이라는 사람이 “내일 태양이 동쪽에서 떠오를 것이라고 누가 확신할 수 있나?”는 문제를 제기해서 철학계가 발칵 뒤집힌 적이 있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라는 이론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누가 내일 태양이 떠오를 것이라 확신할 수 있습니까? 과거에 그랬다고 해서 미래에도 똑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 누가 확신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 신앙인들은 확신할 수 있습니다. 질서의 하나님께서 그렇게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성의 하나님이 우주를 합리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과학은 비로소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과학은 하나님이 만드신 우주 질서를 발견하고 기뻐하는 행위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만유인력을 발견했던 존 뉴턴이 고백했듯이 “자신은 바닷가에서 조개 하나를 발견하고 기뻐하는 어린아이와 같다”는 고백이 과학자들에게는 필요합니다.
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
궁창 위의 물에 대해서 말씀드리다 이렇게 서론이 길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시길 원하시는가? 창조의 과정에서 우리가 눈여겨 볼 것은 많은 부분이 물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중근동에서는 물을 다스리는 신이 최고의 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정착해서 바알 우상에 빠졌는데 그 이유는 바알이 비를 주관하는 신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바알 신을 섬겨야 농사가 잘된다고 그들은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선지서 곳곳에서 비를 내리는 자는 나인데 너희가 누구를 믿느냐고 탄식하고 계십니다. 엘리야가 갈멜산 상에서 750명의 바알의 선지자와 싸운 것은 누가 비를 주관하는 신인가의 문제였습니다. 엘리야가 기도할 때 비가 내림으로써 물의 진정한 주관자는 하나님임을 밝히 드러내었습니다.
이 물과의 싸움은 창세기 곳곳에 드러나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 2절에는 하나님의 신이 수면 위에 운행하셨다고 합니다. 물이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는 모습입니다. 둘째 날 물을 궁창 위의 물과 아래 물로 나누고 셋째 날에는 바다와 육지를 나누었습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은 확실히 물을 다스리는 분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시편에서는 하나님의 능력의 위대함을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물이 산들 위로 솟아올랐으나 주께서 꾸짖으시니 물은 도망하며 주의 우렛소리로 말미암아 빨리 가며 주께서 그들을 위하여 정하여 주신 곳으로 흘러갔고 산은 오르고 골짜기는 내려갔나이다 주께서 물의 경계를 정하여 넘치지 못하게 하시며 다시 돌아와 땅을 덮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시편104:6-9) 창세기는 한가로운 책이 아닙니다. 우상에 대항한 강력한 투쟁의 책입니다. 바벨론의 우상들이 신이 아니고, 가나안의 우상들이 신이 아니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하나님임을 선포하는 책입니다.
그것은 1장 21절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섯째 날에 바다의 물고기들을 만드는데 좀 특이한 것도 만듭니다. ‘큰 물고기’를 만드셨다고 하는데 큰 물고기는 고래 같은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sea monster’ 라고 합니다. 이는 바다에서 광풍을 일으켜 엄청난 파도를 일으킨다고 믿었던 고대의 신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시편 104편에서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크고 넓은 바다가 있고 그 속에는 생물 곧 크고 작은 동물들이 무수하니이다 그 곳에는 배들이 다니며 주께서 지으신 리워야단이 그 속에서 노나이다 이것들은 다 주께서 때를 따라 먹을 것을 주시기를 바라나이다”(시104:25-27, 개역개정판) 리워야단은 바다의 혼돈의 세력을 말하는데 마치 여기서는 바다라는 하나님의 어항에 담긴 물고기처럼 표현하고 있습니다. 헬라 로마 시대에는 바다의 신을 포세이돈이라고 하여 얼마나 두려워하였습니까? 배 사람들은 얼마나 미신이 많습니까? 그런데 성경의 선언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물고기에 불과하다는 선언입니다.
이 신앙은 단지 고대에만 필요한 것입니까? 제1차 세계대전 중 해군 병사로 참전했던 고취 포크라는 사람은 자기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만약 내가 빠져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더라도 울지 말기를 바라오. 비록 내 몸이 깊고 깊은 바다 가운데 잠겨서 죽게 되더라도 그것은 나의 구원의 주님의 손안에 있는 연못에 빠진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시오.” 이 병사는 전쟁의 두려움을 하나님에 대한 굳은 신앙으로 이겨내고 있습니다. 감리교 창시자 요한 웨슬리가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널 때 폭풍우가 몰아쳤습니다. 그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포에 떨었지만 한 쪽 컨에 있던 모라비안 교도들은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것은 폭풍우를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로마로 가는 길에 유라굴로 폭풍이 불어 낮인지 밤인지 모르고 배가 표류할 때 바울은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행27:23-24) 이런 믿음이 있었기에 바울과 함께 했던 276명은 전원 무사히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거친 폭풍우와 같은 우리 삶의 현장에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람아 멈추어라 바다야 잠잠하라” 하실 때 우리를 향해 거세게 달려들던 파도가 멈추고 우리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은 우주만물을 만드시되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드셨습니다. 창조의 6일 동안 내내 울려 퍼졌던 음성은 “하나님이 가라사대”였습니다. 이에 대한 결과는 “그대로 되니라”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복잡한 과정을 거치지 않았습니다. 무슨 복잡한 음모나 계획도 없습니다.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만 온 우주에 퍼질 뿐이었고 이 말씀에 순종하여 하늘이 만들어지고 바다와 육지가 만들어지고 해와 달과 식물과 동물들이 창조되었습니다.
당시 중근동에는 창조에 대한 여러 신화들이 있었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에뉴마 엘리쉬입니다. 에뉴마 엘리쉬는 이스라엘을 제외한 중근동의 주변 국가들이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살았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신화와 창세기의 말씀을 한 번 비교해 보십시오.
“바다의 여신인 티아맛(Tiamat)과 그녀의 남편 강물의 신인 압수(Apsu)는 고요를 방해하는 그들의 자녀들을 죽이기로 결심한다. 이 사실을 알아낸 현명한 신 이아(Ea)는 주문을 외워 압수를 죽인다. 티아맛은 새 남편인 킹구(Kingu)와 함께 전쟁에 나서는데, 이때 이아의 아들인 태풍의 신 마르둑(Marduk)이 나서서 티아맛을 죽인다. 마르둑은 바다의 신 티아맛의 시체를 둘로 갈라 하늘 위의 물과 땅 밑의 물로 갈라놓는다. 또한 마르둑은 해, 달, 별 등을 만들어 시간과 계절을 구분하여 만든다. 끝으로 마르둑은 킹구를 붙잡아 살해한 후, 그의 피를 진흙과 섞어 인간을 만든다. 그는 인간을 그의 신전에서 일을 하는 신들의 노예로 만든다. 신들은 마르둑이 자신들이 해야 할 일들을 인간이 하게 함으로써 쉬게 되어 마르둑을 찬양한다.”
여기에는 다양한 신들이 나오고 신들 간의 암투와 음모가 있습니다. 우주를 만든 이유도 신들의 장난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간을 만든 이유도 신들의 노예로 만들어 자신들이 하기 싫어하는 노동을 인간들이 감당 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에 대한 고귀함과 축복은 없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악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이와 비교할 때 성경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 한 말씀으로 끝납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 계실 뿐입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손한 복종만이 있을 뿐이지 어떤 항의나 암투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 한 마디에 거대한 우주가 만들어지고 지구의 수백 만, 수억 배에 달하는 태양과 별들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현대 우주탄생이론 중에 하나는 ‘빅뱅이론’입니다. 100억 여년 전 이 전에 우주에 대폭발이 있고 그 대폭발의 과정에서 오늘날의 우주가 형성되었다는 이론입니다. 지금도 우주 어느 곳에서는 별들이 생성되거나 사라지고 있습니다. 성경의 말씀에 대입하자면 오늘날도 우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별들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빅뱅을 명령하신 분도 하나님이요 지금도 우주는 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식물을 각기 종류대로, 물고기를 종류대로, 새들을 종류대로, 생물과 동물을 종류대로 내라고 하였습니다. 이 명령에 순종하듯 지구상에는 얼마나 많은 종류의 생물이 존재하는지 모릅니다. 전세계에서 파악된 새 종류만 해도 8,600여 종에 이르고, 곤충 종류는 알려진 것만 80만 종이요 대략 300만 종에 이를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생물들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생육하고 번성하고 온 땅에 충만합니다. 바다의 고기들을 보고 하늘에 철새들이 날아가는 모습을 보면 정말 장관인데 다 하나님의 말씀대로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시 19:3-4) 하나님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우주 끝까지 이르고 있다고 찬양합니다. 작은 들풀도 하나님이 만드신 솜씨요, 그 말씀에 순종하여 번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작은 풀들이 내고 있는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한 말씀입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사40:6,8) 이사야가 이 말씀을 선포할 때는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 상태로 있던 때였습니다. 이들은 포로생활이 오래 되어가면서 더 이상 해방은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가 해방과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하지만 이를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말씀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실현이 됩니다. 그것은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의 그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장을 읽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창조의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대로 우리는 해방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복되게 하리라는 희망을 꿈꾸었습니다.
이사야는 또 이렇게 노래합니다.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는 다시 그리로 가지 않고 토지를 적시어서 싹이 나게 하며 열매가 맺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사55:10-11)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실현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예수님께 나아와 중풍병 들린 자기 하인을 고쳐줄 것을 요청했던 백부장과 같은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 말씀하실 때 백부장은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마8:8) 하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마8:8)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 병도 순종할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이는 천지 창조시에 하나님의 말씀에 온 우주 만물이 그대로 순종했던 것과 같다 할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 질 것이라 믿습니다. 말씀 한 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셨던 신실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는 말씀대로 예수님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남을 우리는 믿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는 기도의 약속대로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그 어떤 것도 이루어짐을 믿습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6:19)는 말씀대로 우리는 축복과 저주의 권리를 행사합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는 말씀을 붙잡고 우리는 모든 어려움들을 이겨냅니다.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계22:20)는 주님의 말씀대로 우리는 이 세상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 아니요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심판하실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창조의 말씀의 능력은 여전히 온 땅에 통하고 세계 끝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바다
창 1장 6~10절 / 이상호목사
오늘은 창조절입니다.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환경문제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 지구 온난화의 문제입니다. 30년 후에는 한반도 전체에 오늘 날 제주도와 같은 기후가 나타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구가 더워지므로 빙하 및 남북극의 얼음이 녹아 해수면이 증가하여 해안도시들을 수몰시킬 것이고, 기후와 강우량의 변화를 가져와 주거 및 농업 생산에 큰 변동을 초래할 것입니다.
2. 오존층 파괴입니다.
오존층은 자외선, 즉 인체와 동식물에 해로운 자외선을 흡수 차단함으로서 지구상의 생태계를 보호해 줍니다. 미국 환경처(EPA)는 오존층감소 추세가 현 수준으로 계속되면 10년 후에는 전세계 피부암 환자가 5억에 달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3. 산성비의 문제입니다.
오염물질로 인하여 내리는 산성비는 어패류에 큰 피해를 주며, 식물의 생육을 억제하거나 고사하게 합니다. 또한 산성비는 토양의 산성화를 가속하여 토양을 척박하게 만드는 원인이 됩니다.
4. 대기오염과 위생의 문제입니다.
대기 오염물질은 기체 또는 먼지의 형태인데 이들은 눈 점막, 천식 등 호흡기 질환, 폐암 등을 유발하고 악취와 시야거리 악화 등을 초래합니다.
5. 수질 및 토양 오염입니다.
사람은 몸의 70%가 물이고 하루 2L의 물을 마셔야 하며 생활용수를 포함해서 하루 약 300L이상 필요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용 가능한 수자원은 전체의 0.01%에 불과합니다.
6. 열대 우림 파괴와 사막화로 이하여 지구 곳곳에서 기상이상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스스로 소중한 자연을 파괴하므로 스스로 멸망의 길로 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창조의 둘째 날입니다. 하늘과 궁창의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바다)을 지으신 우리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우리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는 셋째 날입니다.
하나님은 공기층인 대기권을 중심으로 물을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누셨습니다. '궁창 아래의 물'은 흙과 혼합이 된 지구의 물, 특히 바다를 말합니다. 그리고 '궁창 위의 물'은 지구에서 멀리 떨어진 공중의 물을 말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할 때 '궁창 위의 물'은 수증기 층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현대의 과학자들은 말하기를 이 수증기 층을 지구 위에 있는 바닷물과 같은 밀도로 압축을 한다면 9Km정도 두께의 물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물을 나누시되 궁창 아래의 물은 지금의 밀도를 가진 물로, 궁창 위의 물은 두터운 수증기층으로 확산하여 분포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말씀 한마디로 순식간에 온 대기권으로 확산되었다는 것이 어찌 놀라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이 대기권의 수증기 층을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엄청난 배려를 알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왜 물을 이렇게 두 부분으로 갈라 놓으셨는가에 대한 연구를 하였습니다.
기독교 과학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렇게 수증기 층을 만들지 않았다면 이 지상은 사람이 살 수 있는 환경이 도무지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물론 물로만 가득 찬 지구 위를 배를 타고서 수상생활을 할 수도 있었지 않았겠느냐고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또한 사람에게 아가미를 만드셔서 물 속에서도 호흡할 수 있게 하실 수도 있는 하나님일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물과 물을 나누신 이유는, 우리의 사고를 뛰어넘는 굉장하고도 세심하신 배려 때문이라는 것을, 과학이 발전하면서 사람들은 조금씩 조금씩 알아 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창조시의 수증기층은 지금의 수증기 층과는 현저하게 다른 수증기 층이었다는 것입니다. 지금보다 훨씬 더 두터운 수증기 층을 형성한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궁창 위의 수증기 층을 만드심으로 인하여, 수증기가 태양열을 알맞게 지구 위에 내려 쪼이게 하셨고, 또한 그 온기도 두터운 수증기 층에 의해서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배려하신 것입니다.
만약 수증기 층이 아니라 어떤 강하고 딱딱한 막이라고 생각을 한다면, 일단 내려 쬐인 태양열이 지구 표면의 복사열로 인하여 온도가 급격히 상승될 것인데 딱딱한 막은 그 열을 방출하지 못하게 함으로 지구는 뜨거워질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터운 수증기 층은 지구 표면에서 반사되고 있는 많은 열들을 분산시키는 역할을 감당함으로, 지구상에 청록빛 채소를 유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역할을 감당한다는 것입니다.
즉 이런 수증기 층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지구 내의 일정한 온도를 가장 적절하게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거의 일정한 기후로 말미암아 기류의 움직임이 안정되어서 폭풍이나 험한 일기는 없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두터운 수증기층은 우주의 유해한 방사선으로부터 지구를 완벽하게 보호하는 덮개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물과 물이 나누인 지구는 지금의 지구의 대기와는 완연하게 다른, 가장 살기에 적절한 상태를 유지하게 조성이 된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일년 내내 온화한 기후가 계속됩니다. 그리고 바람과 폭풍도 없습니다. 아무런 해로운 우주 방사선도 침투하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이 땅에 만들어진 모든 피조물들은 성장기가 계속되었을 것입니다. 그 사실은 지구의 지층에서 발견된 화석을 보면 쉽게 수긍할 수 있는 이론입니다.
지금의 이끼는 길어 봤자 3cm이지만, 고생대의 이끼화석은 그 키가 60-90cm나 되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잠자리의 날개 길이는 10cm 가량입니다. 그러나 과거의 잠자리는 발견된 화석을 보게 되면 날개폭이 90cm나 되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어떤 바퀴벌레는 30cm가 넘는 것의 화석이 발견되었습니다. 오늘날의 소라는 지름이 약 20cm까지 자라지만, 지름이 150cm가 넘는 화석으로 된 소라가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과거에는 덩치가 큰 동물들을 지구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뿔이 없는 물소의 등 높이가 5m, 길이가 9m에 이르는 엄청난 크기를 화석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마치 연변 총각의 입담을 듣고 있는 듯한 모습입니다. 또한 지구 전역의 온도가 일정했다는 것도 사실로 확인되었습니다.
시베리아 탐사 대원들이 그 추운 시베리아 열도에서 탐사를 하던 중, 아직도 열매가 달려 있는 과일나무를 거대한 얼음 층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또한 남극의 거대한 얼음 층 밑에서 삼나무 숲이 발견되었습니다. 이렇게 높이 뻗은 거대한 삼나무는, 절대로 추운 환경에서는 자라날 수 없는 식물임에도 불구하고, 남극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는 것은, 창조시의 지구는 이 두터운 수증기 층으로 말미암아, 전 지구가 동일하게 적정한 온도를 유지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증거인 것입니다.
이 수증기 층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하늘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궁창, 즉 대기권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 대기권 안에는,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공기라는 물질로 가득 채워 놓으셨습니다. 만약에 이 궁창이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단 몇 분 안에 다 죽고 말 것입니다. 공기의 비율도 우리 인간이 가장 숨쉬기 좋은 비율로 정해 놓으셨습니다. 산소의 비율을 21%로 정하심으로 우리는 적정하게 숨을 쉴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 좋은 산소 좀 많이 만들어 놓으시지 않았냐고 말할 분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산소의 비율이 21%에서 조금만 낮아져도 우리는 높은 산에 올라갈 때와 같이 산소 부족에 시달려 제대로 살 수 없을 것입니다. 반대로 높아져도 고산소증에 걸리게 되므로 정신이 혼미하게 되어 살 수 없게 됩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얼마나 정확하게 공기의 비율을 정하시고, 그리고 그 비율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식물을 만드시고 비율을 유지하고 계신가를 보면, 얼마나 놀라운 궁창의 창조인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세밀하신 배려는 마치 우리가 밥을 지어먹을 때와 비슷합니다. 우리가 밥을 먹으려면, 먼저 쌀을 사 와야 하고, 쌀을 물에 씻어야 하고, 쌀을 30분 정도 물에 불려야 하고, 알맞게 물을 부어서 밥솥에 넣고 센 불 끓여 댑니다. 물이 자작하게 줄어 들 때면 약한 불로 뜸을 들인 후에, 뚜껑을 열고 밥을 퍼서 그릇에 담아내어서, 우리가 숟가락으로 먹게 됩니다. 이 과정은 매우 단순한 과정 같지만 세밀한 조정을 필요로 합니다. 좋은 밥을 먹기 위해서는 좋은 쌀이 필요합니다. 쌀을 물에 씻을 때에도 잘 일어야 돌이 나오지 않습니다. 쌀을 물에 불려야 만이 고두밥 신세를 면합니다. 또 물 조정도 잘 해야 합니다. 손등에 찰랑거릴 정도의 물 양이 되어야지 질거나 되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화력의 조절 또한 매우 중요한 관건입니다. 처음에는 센 불로 하다가 알맞은 때에 약불로 하여서 조정을 해야 밥이 타지를 않습니다. 불을 끄고 나면 다 된 것인가 하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더욱 맛있는 밥을 먹기 위해서는 뜸이란 것을 들여야 하는데, 이 과정은 내부의 열기로 온기가 밥알 하나하나에 스며들게 하기 위한 작업입니다. 그리고는 밥을 한 번 흔들어 살살 퍼서 밥그릇에 담아서 먹는 것입니다. 맛있는 밥 한 그릇을 먹기 위한 준비 과정이 얼마나 정교하고 치밀합니까?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구를 선택하시고 물을 주시고 빛을 주시고 하늘을 만드시고, 공기를 만드시고, 해와 달과 별을 만드시고, 새를 주시고, 땅을 만드시고, 고기를 주시고, 식물과 동물을 만들어 주십니다. 그 동식물들을 다 만들고 나신 후에 바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가장 좋은 환경 속에서 편하게 잘 살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세밀한 배려하심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제 6절과 7절을 한번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궁창 위의 물은 하늘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그 물이 언제 쓰여졌는가? 바로 노아의 대 홍수 때입니다. 궁창 아래의 바다, 지하수, 샘물이 터지고, 궁창 위의 하늘의 물이 쏟아졌습니다. 위에 있는 물 층이 터졌기 때문에 전 지구를 뒤덮을만한 홍수가 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오존층이 파괴된다는 경고를 듣고 있습니다. 오존층이 파괴되면 외계로부터 오는 유해광선을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생길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심각했던 것이 바로 두터운 물 층이 깨진 것이었습니다. 오존층보다 더 완벽하게 지구를 보호했던 것이 물 층이었습니다. 물 층이 깨지면서부터 사계절이 생기고, 태풍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수명은 현저하게 줄어들게 된 것입니다. 대홍수 이전에는 사람들이 8백세, 9백세를 삽니다. 그러다가 노아 시대에는 3백, 4백세를 살고 시간이 흐를수록 수명이 점점 줄어듭니다. 그러다가 70~80세로 떨어졌습니다. 이제는 인간의 과학이란 것이 그나마 있는 대기권과 오존층마저 하나하나 파괴해 가고 있습니다. 자동차를 만들어서 내 뿜는 공해는, 대기권을 엄청난 이산화탄소로 채워나가고 있습니다. 냉장고의 냉매인 프레온 가스는 우주 유해광선을 막아주는 마지막 보루인 오존층을 구멍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해로운 방사선이 구멍난 오존층 사이를 비집고 들어옴으로 인하여, 피부암을 걱정해야 하는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서울에서는 이미 오존 주의보가 수시로 내려진다고 합니다. 오존 주의보가 발생을 하면 밖으로의 외출을 삼가 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완전하게 만들어 주신 이 지구를 보존해야 할 책임이 있는 자들입니다. 노아 시대와 같이 죄악이 관영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노하게 만들어서도 안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신 공기와 물을 무한정 있는 공짜라고 함부로 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창조 둘째 날을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가진 인간을 창조하기 위하여 하늘을 만드시고 대기권을 만드시고 수증기 층을 만들어 주신 하나님의 솜씨를 살펴보았습니다. 이런 창조의 일들은 다름 아닌 우리 인간을 위해 이 모든 것을 준비하신 것입니다. 우주의 중심으로서의 지구, 그리고 지구상의 가장 중요한 존재인 인간, 바로 나를 위하여 이런 엄청난 일을 계획하시고 실행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어찌 찬양치 않을 수 있겠습니까?
또한 하나님께서 셋째날에 바다와 땅을 지으셨습니다.(9-10절)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하시니 그대로 되었습니다. 그 뭍이 지구이고 모인 물을 바다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땅과 바다를 지으시고 그것을 섭리하시고 운행하십니다. 바닷물이 넘치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창조의 질서를 파괴하지 않습니다.
땅과 바다의 비율을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바다의 비율이 현저하게 적어진다면 땅은 온갖 과실과 열매를 제대로 맺을 수 없을 것입니다. 바닷물이 말라 버리면 땅은 사막처럼 메말라 버리는 것입니다.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 살지 못합니다. 땅과 바다의 비율이 하나님 지으신 조화와 질서대로 움직이니까 사철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우리의 생명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번 휴가기간 중 많은 바다를 보면서 많은 깨달을 얻었습니다. 제가 바다에서 지은 시 『바다』를 읽겠습니다.
바 다
모든 걸 받아주는 바다
우리가 버린 오물과 흉물
우리가 먹고 싸는 모든 것까지 다 받아주는 바다
인간이 만든 모든 공해를 정화시켜 준다.
바다는 하늘에 순응한다.
하늘이 먹구름으로 검으면 바다도 검고
하늘이 맑으면 바다도 맑고
하늘이 파라면 바다도 파랗다.
바다는 바람에도 순응한다.
작은 바람에는 잔잔한 물결을 이루고
큰 바람이 불면 큰 물결을 일으켜
철썩이며 아름다운 화음을 낸다.
바다는 파도가 부서지는 바위를 통해
아름다움을 연출한다.
만약 바닷가에 바위가 없고 바람이 없다면
바다는 지루할 것이다.
바다는 언제나 거기에 있다.
사람들은 속이 상하면 바다를 찾는다.
바다가 언제나 거기서 받아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바다를 좋아하나보다.
바다는 찾아가서 무슨 이야기를 해도 다 받아줍니다.
하늘이 울면 바다도 웁니다.
하늘이 화를 내면 바다도 화를 냅니다.
하늘이 웃으면 바다도 웃습니다.
그러기에 섬 사람들은 바다를 보고 하늘의 뜻을 읽으며 산답니다.
우리 모두는 궁창을 만드시고 오늘도 호흡할 수 있는 공기를 주신 하나님, 그리고 궁창 위의 물을 만드심으로 우리에게 비를 주신 하나님, 궁창 밑의 물을 주심으로 생명유지의 근원으로 만들어 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격하며 감사하는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늘과 땅과 바다
창 1장 6~13절 / 이정원목사(참사랑교회)
하늘과 땅과 바다
창1:6-13
시골에서 7년을 지내고 나올 때의 감회가 아직도 생생합니다. 강원도 두메산골에서 살 때는 잘 몰랐는데, 그곳을 빠져나오면서 내가 정말 깊은 산골에서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거기에 비하면 이곳은 넓고 큰 도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도 좁고 작은 땅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간혹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을 벗어나 바닷가에 나가보면 끝없이 펼쳐져 있는 바다를 볼 수 있습니다. 높은 산에 올라가서 보면 끝없이 이어지는 산들을 볼 수 있습니다. 하늘을 바라볼 때 우리는 그 끝없는 하늘을 보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내려다보면 수많은 구름들과 바다와 땅과 사막을 볼 수 있습니다. 얼마나 광대하고 아득한지 모릅니다. 언제 보아도 하나님께서 지으신 이 대자연은 우리를 감탄하게 합니다. 거기 비하면 우리 인간은 얼마나 보잘것없고 미미한 존재입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이 작은 사회 속에서 살면서 자기가 대단한 존재인줄로 생각합니다. 대자연을 바라볼 때 우리는 겸손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둘째 날과 셋째 날에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모든 환경들, 즉 하늘과 땅과 바다를 만드셨습니다.
하늘과 땅과 바다를 만드심
맨 처음 세상은 공허하고 혼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고 계셨습니다. 이 상태에서 하나님께서는 가장 먼저 빛을 창조하셨고, 밤과 낮을 구분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늘과 땅과 바다를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물과 물을 나누심으로 하늘을 만드셨습니다. 지구를 덮고 있던 물을 위쪽의 물과 아래쪽의 물로 나누심으로 그 중간에 공간이 생기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중간에 생긴 빈 공간을 하늘이라고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래에 있는 물이 한 곳으로 모이게 하시고, 뭍이 드러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땅과 바다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생긴 땅에 하나님께서는 각종 식물이 나게 하셨습니다.
말씀의 능력
다시 한 번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들을 말씀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저 높고 광활한 하늘을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높고 낮은 산들과 평야들, 계곡들과 강들과 초원들을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세상의 각종 식물들을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능력이 얼마나 놀랍고 위대합니까?
이 말씀의 능력은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자들에게 오늘도 여전히 역사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백부장의 경우를 봅시다. 그 백부장은 예수님께 와서, 중풍병으로 심히 고생하고 있는 자기 하인을 고쳐주시라고 간구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백부장은 주님께서 말씀만 하셔도 하인이 나을 줄 믿는다고 말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칭찬하시고, “가라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백부장의 하인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로 그 시간에 완전히 나았습니다.
이러한 말씀의 능력은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의 경우에서도 확인됩니다. 천사가 나타나 순결한 처녀 마리아에게 엄청난 소식을 전했습니다.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눅1:31-33) 놀란 마리아는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천사가 다시 말했습니다.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수태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눅1:35-37) 마리아는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능력이 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그 말씀은 지금 우리에게도 능력 있는 말씀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들, 우리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들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자는 하나님 말씀의 능력을 보게 됩니다.
하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하늘을 창조하신 것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6-8상)
하나님께서 물을 위의 물과 아래의 물로 나누시고 그 사이에 빈 공간이 생기게 하셨는데, 이 공간이 바로 하늘입니다. 위로 올라간 물은 지구를 덮고 있는 물층을 이루었고, 아래로 내려간 물은 바다가 되었습니다.
궁창 위의 물
창조과학자들에 의하면 위로 올라간 물은 지구를 덮는 물층을 이루어 유해광선과 추위를 막아 주어 지구를 사람이 살기에 매우 쾌적한 곳이 되게 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창세기 전반부에 나오는 사람들이 어떻게 800-900년씩이나 살았는지를 설명해줍니다.
지구를 덮고 있던 이 물층은 노아 홍수 때 다 쏟아져 내렸습니다. 세상의 가장 높은 산까지 모두 물에 잠긴 것은 이 물층이 쏟아져 내렸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이 물층이 없어진 후로 세상에는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이 오게 되었습니다.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창8:22) 그래서 노아 홍수 이후 사람들의 수명은 급속도로 단축되어갔습니다.
지금은 오존층이 지구를 덮고 있으면서 외계로부터 오는 유해광선을 막아주고 있습니다. 공해가 심해지면서 이 오존층이 파괴될 것이라는 경고가 나오고 있습니다. 실제로 뉴질랜드 상공에는 이 오존층이 파괴되어 구멍이 뚫려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햇빛에 노출되면 피부암과 같은 질병에 걸리기 쉽다고 합니다. 처음에 이 오존층보다 더욱 완벽하게 지구를 보호하고 있었던 것이 바로 궁창 위의 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심판
노아 홍수 심판 때 궁창 위의 물층이 쏟아져 내렸으나, 그 물의 일부는 다시 하늘에 저장되었습니다. 처음 같은 물층을 이루고 있지는 않지만, 하늘에는 여전히 많은 물이 저장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때를 따라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십니다. 이 비가 와야만 사람과 동물과 식물이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비는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냅니다. 비가 오지 않으면 우리는 살 수 없습니다. 아무리 댐과 저수지 등 관개시설을 잘 만들어 놓아도, 비가 오지 않으면 다 무용지물이 되고 맙니다.
하늘에 저장된 물은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이 땅에 내립니다. 그런가 하면 이 물은 심판의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요즘 우리는 여름철마다 폭우로 인해 많은 피해와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여름철에 쏟아지는 이러한 폭우는 분명 하나님의 심판과 경고입니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일들을 보면서 자신과 민족과 나라를 위해 회개하고 바로 서기를 힘써야 합니다.
이렇게 하늘에 저장된 물은 적절히 내려 은혜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심하게 내려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작고 연약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 잠시만 비를 내려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조금만 과도하게 비를 내리셔도 우리는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늘로서 내리는 은혜
하늘에는 물만 저장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서는 비만 내리는 것이 아니라 만나도 내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이 사실을 직접 경험했습니다. 하늘에서 내린 그 양식은 사십 년 동안 매일 조금도 차질 없이 내렸습니다. 하늘에서 만나가 바닥나서 더 이상 내리지 않아 이스라엘 백성들이 굶었던 적은 하루도 없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은혜가 하늘로부터 내려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약1:17상) 오늘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이 이 땅에서 나는 줄 압니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을 땅에서 구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좋은 것들을 하늘에 예비해 두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을 바라보며 의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우리는 마음이 답답하고 곤고할 때 하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비를 내려주실 뿐만 아니라 필요한 모든 은혜를 내려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늘에 예비하신 은혜는 동이 나는 법이 없습니다. 그 은혜는 무한하게 준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늘을 바라보는 자는 그 은혜를 얼마든지 힘입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6)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합니다.
하늘을 바라볼 때 우리는 지구 위로 펼쳐지는 무한한 공간의 파노라마에 압도당하게 됩니다. 그 넓이와 높이를 누가 감히 측량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 하늘을 만드신 하나님은 얼마나 더 높고 위대하신 분이겠습니까? 성경은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시19:1-4상)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위대하심과 크신 권능을 하늘보다 더 잘 보여주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하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해야 합니다.
땅과 바다
성경은 땅이 물에서 나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이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라다 부르시니 보시기에 좋았더라”(9-10절)
베드로 사도도 그런 말씀을 했습니다.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벧후3:5) 시104편에는 좀 더 구체적인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옷으로 덮음 같이 주께서 땅을 깊은 바다로 덮으시매 물이 산들 위로 솟아올랐으나 주께서 꾸짖으시니 물은 도망하며 주의 우렛소리를 말미암아 빨리 가며 주께서 그들을 위하여 정하여 주신 곳으로 흘러갔고 산은 오르고 골짜기는 내려갔나이다”(시104:6-8)
물을 붙잡고 계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이렇게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다와 육지의 경계를 정하셨습니다. 만일 땅이 다시 평평하게 되거나 바닷물이 육지위로 올라오게 된다면 이 땅은 다시 물로 덮이고 말 것입니다.
사람들은 북극이나 남극의 얼음들이 녹으면 지구가 물로 덮일 것이라고 하면서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 물들이 땅위로 올라오지 못하게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다가 그 모태에서 터져 나올 때에 문으로 그것을 가둔 자가 누구냐 그 때에 내가 구름으로 그 옷을 만들고 흑암으로 그 강보를 만들고 한계를 정하여 문과 문빗장을 지르고 이르기를 네가 여기까지 오고 더 넘어가지 못하리니 네 높은 파도가 여기서 그칠지니라 하였노라”(욥38:8-11)
이스라엘 백성들은 실제로 하나님께서 물결을 벽돌처럼 쌓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실 때, 그리고 요단강을 멈춰 서게 하셨을 때였습니다. “주의 콧김에 물이 쌓이되 파도가 언덕 같이 일어서고 큰 물이 바다 가운데 엉기니이다”(출15:8) “백성이 요단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장막을 떠날 때에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에서 나아가니라 요단이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가에 잠기자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사르단에 가까운 매우 멀리 있는 아담 성읍 변두리에 일어나 한 곳에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새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그 모든 백성이 요단을 건너기를 마칠 때까지 모든 이스라엘은 그 마른 땅으로 건너갔더라”(수3:14-17)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바닷물이 땅을 침범하지 못하게 막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다스리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안심하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땅을 식물로 채우심
하나님께서는 땅에서 식물이 나게 하셨습니다. 아직 해와 달이 생기기 전에 땅에는 식물들이 있었습니다. 태양이 없었지만, 이 식물들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빛 아래서 생존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땅에 식물이 나게 하심으로 지면을 아름답게 꾸미셨습니다.
우리는 집에서 키우는 화초 하나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자꾸 썩여죽게 하고 말라죽게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무수하고 다양한 식물들을 완벽하게 기르시고 돌보십니다. 그것들은 곧 시들어 죽지만 그 속에 씨를 남김으로써 그것으로부터 새로운 식물들이 자라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생명을 계속 보존시키십니다. 이 식물들은 그렇게 약한 것 같지만, 그 생명력은 놀랍게 강합니다.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주관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자 땅에는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식물들은 얼마나 다양하고 아름답습니까? 이 모든 아름다운 초목들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꽃을 가져다가 눈앞에 두고 냄새를 맡아봐야 비로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없는 곳에 피어 향기를 토하고 있는 꽃들은 보는 사람이 없어도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자연계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본분이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것임을 배워야 합니다.
하늘과 땅과 바다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 자연계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권능과 위대하심 앞에서 겸손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존재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적절하게 비를 내려주시고, 바다를 붙잡고 계시며, 이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고 계십니다. 이 모든 것은 또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며, 그 은혜를 감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 1장 6~25절 / 이규현목사(수영로교회)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세기강3 주일
창1:6-25
무신론적인 도전들이 강세를 띄는 세상에서 창조 신앙을 확립하는 일은 중요하다.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것은 창세기에 나타난 말씀의 권위를 인정한다는 뜻이다. 서구의 교회가 무너진 것은 크게 두 가지로 이야기한다.
하나는 성경의 권위를 무시한 자유주의 신학이고 다른 하나는 교회의 세속화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는 신앙은 하나님을 절대적인 자리에 올려놓는 일이다.
창조신앙은 기초 중에 기초다. 창조의 하나님을 믿지 못하면 구원의 하나님으로 연결될 수 없다. 창세기를 이해해야 출애굽기로 넘어갈 수 있다.
마틴 루터는 “창세기보다 아름다운 책은 없고 창세기보다 유용한 책은 없다”고 했다.
1장에서 강조되는 것은 주어와 동사다. 주어는 “하나님”이시고, 동사는 “창조하셨다”. “만드셨다”는 하나님의 행동이 강조된다.
그리고 하루의 창조 사역이 끝날 때 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가 후렴구처럼 반복된다.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로 농축된 창조의 세계를 바라본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창조의 전경 전체가 한꺼번에 우리의 시야에 들어오지는 않는다. 우리의 한계다.
그럼에도 믿음의 날개를 펴고 상상력을 동원하여 최대한 창조 세계를 드려다 보라.
하나님이 말씀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피조물의 수가 얼마나 엄청난가?
하나님이 마치 노래를 부르듯이, 하늘과 땅, 바다와 강, 나무와 꽃들, 새와 물고기들의 종류가 얼마나 많은가? 식물만 해도 수 만가지다. 하나 하나 말씀으로 지으실 때 어쩌면 랩처럼 부르셨을지도 모른다.
*공간을 만드시고, 그 안에 내용을 채우시는 순서를 눈여겨보라.
순서대로 지으셨다. 일의 순서가 얼마나 중요한가? 순서를 잘못하면 복잡해진다.
하나님의 창조의 작업에는 질서정연함이 있다. 우주가 갑자기 폭발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완벽한 질서 속에서 만들어졌다. 질서는 하나님의 정신이다.
질서를 따라 창조되고 질서를 따라 창조된 우주만물들이 돌아가고 있다.
첫째 날은 빛의 창조다. 공허와 혼돈 속에서 빛은 모든 존재의 출발이었다.
둘째날은 궁창을 지으셨다. 셋째날은 땅을 지으시고 바다와 물을 나누셨다.
그리고 땅에 채소와 나무들이 자라게 하셨다. 셋째날부터 인간이 살게 될 땅에 대한 창조들이다.
넷째날은 해와 달과 별의 창조다. 작은 광명, 큰 광명으로 명명하고 있다.
다섯째날은 궁창을 나는 새와 물에 거하는 짐승들을 창조하셨다.
여섯째 날은 땅에 서식하는 짐승들을 지으셨다.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들이다.
그 다음 마지막으로 인간을 만드셨다. 셋째날 까지는 큰 덩어리들을 지으셨다면 넷째날부터 여섯째날까지는 구체적인 내용물들로 채워졌다.
*모두 각자의 영역이 있고 역할이 주어져 있다.
하나님은 피조물들을 지으실 때 각자의 위치와 역할을 정해 주셨다
각 피조물의 본질과 역할구분을 하셨다. 물과 땅은 각각 그 경계가 정해져 있다.
물고기가 하늘을 날 수 없다. 공중의 새는 바다에서 날 수 없다. 자기 영역이 있다.
태양과 달, 그리고 지구는 각자의 위치를 지키며 움직인다.
자기의 경계를 지키고 자기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그것을 거부하면 구조와 질서가 깨어진다
마귀가 하는 일은 무엇인가? 위치와 역할을 이탈하게 하게 만든다.
인간이 하나님의 위치에 서려고 하는 것, 남자와 여자의 역할을 뒤섞어놓으려고 하는 것
유전자들을 뒤섞어 변종을 만들려고 하는 것 등은 모두 질서를 깨는 일이다.
자기의 자리를 버리고 다른 자리를 넘보는 것은 창조의 원리를 거스르는 일이다.
산이 거기에 있고, 나무가 자기 자리를 지키고, 아버지가 아버지의 자리를 지키고, 어머니가 어머니의 자리를 지켜내는 일이 중요하다.
하나님이 본래 정하신 위치와 역할을 바로 알고 행동하는 것이 순리다.
오늘날의 과학은 신의 자리에 앉으려고 한다. 과학이 만능이라도 된 것처럼 착각한다.
인간의 능력이 극대화되고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려고 하는 것은 자기 위치를 놓친 것이다.
과학이 할 일은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에 대한 바른 이해다. 연구를 하면 할수록 창조자에 대한경외심을 가져야 정상이다. 과학이 우상이 되면 안된다.
과학의 발달은 하나님이 주신 지성을 드러낸다는 면에서 결코 과학과 성경은 충돌하지 않는다. 신학과 과학은 서로 도움을 주고 받아 피조물에 대한 더 많은 이해를 통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각자의 위치를 지키며 돌아갈 때 아름다워진다.
무엇이든지 자기 역할을 다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세상이 그냥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대로 만물이 돌아가고 있다.
하늘이 땅이 될 수 없고 땅이 하늘이 될 수 없다. 바다와 강과 땅에는 분명한 경계선이 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각자의 역할을 따라 살면 된다. 다른 사람을 부러워할 필요 없고 욕할 것도 없다. 축구에도 수비수와 공격수의 역할이 있다. 우리의 인체들도 모두 고유의 역할이 있다.
닭과 독수리는 다르게 지어졌다. 오리는 오리로 살면 된다. 오리가 자기 자리 짧음을 비관하고 동물병원에 가서 학 다리같이 길게 늘려달라고 하면 어떻게 될까? 서 있을 때는 멋있을지 모르지만 노를 젖듯이 젖기에는 부적합하다. 자기 위치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해변을 거닐 때 마다 거대한 파도 소리를 들을 때는 두렵다. 파도가 경계선도 없이 계속 밀고 들어오면 어떻게 하는가? 그러나 파도는 어느 지점을 넘어오지 못한다. 선을 지키고 있다. 제자리 놓여 있을 때 아름답고 보기 좋다. 그것이 질서다. 제자리를 지키는 것, 자기의 역할 대로 살아가는 것이 창조의 법칙을 따르는 피조물의 의무를 다하는 일이다..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셨다.
22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생육하고 번성하여 충만하라. 하나님의 피조 세계는 무궁무진하다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창세기안에서 복을 주신다는 것은 큰 주제 중 하나다.
하나님이 인간에게만 복을 주신 것이 아니다. 피조물들에게도 복을 주셨다. 동물들에게 복을 주셨다. 어떤 복인가? 생육하고 번성하는 복이다.
동물의 세계를 추적하는 다큐멘터리들을 보라. 생육하고 번성하는 힘은 놀랍다.
남극의 수컷 펭귄이 새끼들의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험난한 항해를 하고 돌아오는 모습은 감동적이다
수백킬로 밖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감지하여 산란을 위한 임시 습지를 알아차리는 홍학의 탁월한 감각을 누가 만드셨을까? 연어가 작은 민물에서 부화하여 바다로 내려가 2-6년을 보낸 후 정확하게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 알을 낳고 죽는 일들은 신비롭다.
작은 미물들이 생육하고 번성하려는 강력한 의지와 번뜩이는 지혜를 발휘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려는 본능은 하나님이 주셨다.
식물들도 마찬가지다. 처음 호주에 가서 과일 가게를 가서 놀랬다. 한번도 보지 못한 과일들이 많아 신기했고 그 규모에 놀란 적이 있다. 오렌지 한 자루에 2,3불에 산 기억이 난다. 땅이 넓은 나라들의 농장들의 규모가 엄청나다. 그곳에서 나온 식물이나 과일들을 보라. 옥수수 하나에도 수많은 옥수수를 만들어내는 생명들로 충만하다. 돼지가 1년에 20-30마리 새끼를 낳는다고 한다. 바다에서 나는 물고기들은 어떤가? 산란기에 보면 알들로 가득하다. 수를 셀 수 없는 알을 낳고 또 낳는다.
하나님은 풍성하신 분이다. 오병이어로 5천명이 배불리 먹고도 12광주리가 남는 역사는 놀랍다.
생육하고 번성한 모든 것들은 인간의 삶에 풍성함을 더해 준다. 인구가 아무리 많아도 하나님의공급은 부족함이 없다. 무한 리필이 가능한 생산력을 하나님이 부여하셨다.
세계적으로 식량문제는 이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류가 아무리 먹고 또 먹어도 모자라지 않게 하셨다. 굶어 죽어가고 있는 것은 인간의 탐욕이나 혹은 게으름 때문이다.
선진국들은 버리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나누면 지구 안에서 충분히 자급자족이 되고도 남게 하셨다. 인간의 탐욕을 극복하면 세상은 훨씬 더 풍성해질 수 있다. 하나님은 지금도 풍성하게 모든 것을 베풀어 주고 계신다. 악인과 선인에게 동일하게 햇빛을 비추시고 열매를 거두어 들이게 하신다. 아주 작은 미물들도 먹고 살도록 하셨다.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복이다.
*종류대로 지으셨다.
11, 21,24,25 반복된다. 24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절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늘의 나는 새 종류들의 종류가 얼마나 많은가? 땅에 각종 들 짐승들이나 바다 속의 물고기들의 종류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심해에 무엇이 어느 정도 있는지 우리는 다 모른다.
진화론자들은 한 종에서 다른 종으로 오랜 세월 동안 진화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종에서 종으로의 진화가 아니라 하나님은 각기 종류대로 지으셨다
종류, kind 히브리어로는 “민”이다. 한계가 지어졌다는 것이다. “각기 종류대로” 소는 소를 낳는다. 원숭이는 원숭이를 낳는다. 종과 종 사이를 넘을 수 없도록 만드셨다. 돼지가 고양이를 낳으면 기절초풍할 일이다. 거미가 딱정 벌레를 낳는 일은 없다. 가끔 돌연변이가 일어나기도 하지만 종을 뛰어넘지는 못한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대로의 종들이 유지된다.
종류대로 지으셨다는 말은 다양성을 의미한다.
왜 이렇게 다양하게 지으셨을까? 다양성 속에서 조화를 이루도록 하셨다. 가만히 보면 모두 필요하다. 조화를 이루면 모두 다 필요하다. 왜 저것을 만드셨을까? 하나만 보면 잘 모른다. 오묘한 조합을 이루며 공존하도록 하나님이 만드셨다. 퍼즐 한 조각만 보면 쓸모 없어 보인다. 그러나 하나 하나가 모두 요긴한 조각이다. 자르게 지으신 것을 인조이하라. 사람도 다르게 지어졌다. 쌍둥이도 다르다.
인류의 인구가 75억이상이 되지만 같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다르게 지으신 하나님을 찬양하라. 우리는 나와 다르면 괜히 열을 받는다. 기질이 다르다 우울질, 담즘질, 점액질과 다혈질의 특성이 있다. 점액질은 급한 것이 없다. 주일 아침에 교회 올 때 다혈질인 남편은 조금만 늦어도 현관에서 발을 동동 굴린다. 점액질 아내는 2부 놓치면 3부, 3부 놓치면 4부에 가면 된다고 생각한다. 주차장에 갔다가 키 가지러 다시 집에 간다. 다혈질 배우자는 기절 직전이다. 우울질은 어떤가? 매주일 오늘도 교회를 가야 되는지 고민한다.
교회에서 사역을 할 때도 다양하다. 기획적인 사람은 모든 것이 매사에 꼼꼼하다. 철저하게 따지고야 무엇을 시작한다. 비저너리는 다르다. 일단 시작하고 본다. 공무원이 맞는 사람이 있고 사업이 맞는 사람이 있다. 참모가 어울리는 사람이 있고 리더 역할이 맞는 사람이 있다.
세상에 같은 것은 없다. 하나님이 만드신 다양한 피조의 세계를 보며 즐거워하라. 다르니까 좋은 것이 더 많다.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
피조물은 창조주안에서 존재의 의미를 가진다. 창조주가 있어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창조신앙이다. 하나님의 창조에는 그저 만들어진 것은 없다. 창조의 목적이 있다.
결코 우연히가 아니다. 창조의 목적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목적을 알 때 의미가 생긴다.
의미를 안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무서운 단어 중 하나가 “의미 없음”이다. 인간은 의미를 찾는 존재다. 돈을 벌만큼 벌고 자기가 원하는 자리에 올랐는데도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면 미친다.
인간은 의미가 생길 때 생명의 에너지가 나온다. 무엇을 하기 이전에 의미발견이 그렇게 중요하다. 하나님이 지으신 것들 안에는 의미가 들어있다.
계속 반복되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고 하신 것에 주목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선언이다.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신 것에는 미적인 부분이 있다. 하나님을 아름다움을 추구하시는 분이다. 인간이 예술을 통해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을 닮은 것이다.
그러나 보시기에 아름답다는 것은 단순히 외적인 것만을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다. 피조물은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을 위해 존재한다.
계4:11절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주의 뜻대로 있었다고 할 때 “뜻”이 바로 의미다. 그 지어진 목적이 선하고 좋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은 언제나 선하다. 필요한 것, 유용한 것을 지으셨다.
우리에게 고통을 주거나 혼란스럽게 하기 위해 만드시지 않았다 선한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것을 거부하는 순간 모든 것은 무너진다.
선하신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이 선이 아닌 것을 선택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제재를 받을 수 밖에 없다. 세상이 그냥 돌아가지 않는다. 모든 것은 창조의 원리와 법칙 아래 있다.
인간의 죄는 하나님의 지으신 목적을 위배했다. 그 순간 가시떨기와 엉컹퀴, 땅이 척박해졌다.
지어진 존재를 보면 그것을 지은 사람과 닮아있다. 고문 도구를 만든 인간이 선할 리가 없다.
요즘은 믿고 산다고 할 때 브랜화되었다고 한다. “그 사람 혹은 그 회사가 만든 것이라면 믿어도 돼”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이 지으신 것은 하나님의 인증이 붙는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만으로도 어떤 것이든 위대함이라는 단어를 붙여도 괜찮다.
안타깝게도 인간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작품에 심각한 손상을 가게 했다.
지금도 인간의 탐욕에 의해 계속적으로 파괴되어 가는 세상을 보고 있다.
신자들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보존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가능하면 공해를 일으키거나 환경을 파괴하는 일을 경계해야 한다. 일회용 컵 보다 머그컵을 사용하는 것도 좋다. 지나치게 많은 쓰레기가 나오는 것을 지양해야 한다.
또 본래의 모습을 파괴하지 않아야 한다. 산과 나무와 같은 환경을 그대로 두는 것이 개발하지 않아야 한다. 호주에서의 좋은 경험 중 하나는 좀처럼 개발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두는 것을 보았다. 인간의 손이 덜 갈수록 아름답게 보존된다. 상업적 목적을 위해 인위성이 들어가면 자연은심각히 훼손된다. 인간의 탐욕으로 훼손된 자연에 대한 대가는 고스란히 인간에게도 돌아온다.
현대자본주의의 발달과 함께 과학과 기술은 생태계들을 파괴하는 일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생태계의 파괴는 지금 인류 전체에 큰 재앙으로 예고되고 있다. 쓰레기대란이다. 얼마나 많은 것을 만들고 버리는지 모른다. 강과 바다로 흘러 들어간 미세플라스틱을 물고기들이 먹고, 그 물고기를 사람들이 먹는다. 인간이 버린 것을 인간이 다시 주워 먹는 격이 된다. 신자들은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 세계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환경문제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들의 가치를 떨어뜨리지 않고 귀중히 여겨야 한다. 짐승을 잔혹하게 죽여 껍질이나 털을 상품화하는 등의 일들은 세상을 혼란하게 만드는 일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들은, 식물이든 동물이든, 무엇이든 존귀하게 여겨야 한다.
*하나님의 창조는 완전하고 최고의 수준이었다.
오늘날 문명이 만들어낸 것들을 보면 감탄을 일으키게 할만한 것들이 많다
우리의 손에 쥔 핸드폰, 인터넷 시대는 놀라운 기술 문명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에 비할 수 없다. 하나님의 창조는 100% 완전하다.
간혹 하나님의 창조는 무엇인가 부족한 것처럼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동성애자들은 하나님의 창조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따진다. 그것은 죄로 인해 생겨난 결함이다.
창조 세계 안에 들어온 고통과 신음은 하나님의 작품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의 결과다.
하나님의 창조는 완벽 그 이상이다. 하나님은 오류가 없고 실수가 없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모든 만물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피조물이다.
당연히 만들어진 모든 것은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 있어야 한다.
우리는 창조의 법칙 안에서 활동하는 법을 익혀야 한다. 하나님이 만드신 시간 안에서 통제를 받으며 살고 있다. 그 누구도 시간의 흐름을 임의로 막을 수 없다.
육체적으로 늙고 죽어가는 모든 것은 창조하신 분과 연결되어 있다.
만약 우리의 삶 가운데서 창조하신 하나님을 부정해버리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눈에 보이는 물질세계만 남는다. 결국 유물론자가 되고 만다. 영적 세계는 무시된다.
하나님의 창조를 부정하는 순간 우리는 물질계의 일부로 전락한다.
애석하게도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섬기고 눈에 보이는 것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다.
창조신앙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영적 세계를 바라보는 눈을 열어준다.
창조주 하나님은 유일하신 절대자이다. 우리가 섬길 대상은 유일하다. 피조물의 모든 존재의 목적은 창조주를 위한 수단이지 목적이 될 수 없다.
창조의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는 이전보다 더욱 더 하나님 중심적인 사고를 익혀야 한다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하나님이 없이는 어떤 것도 가능할 수 없다는 것을 철저히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을 놓치면 우리의 삶은 통제 불가능한 세계로 들어가고 만다.
우리의 삶은 혼돈과 공허 속으로 빠져들고 만다. 오늘날 세상을 보라. 혼돈과 무질서가 자욱하다.
정보는 쏟아지고 지식을 쌓여가지만 인간은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모르면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없다. 존재의 근원을 모르면 의미도 없다. 거대한 우주 속에 인간은 지극히 작은 존재다. 그러나 하나님에게서 우주는 매우 작은 존재에 불과하다.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라.
창조의 질서를 따라 살아가라. 하나님이 만드신 목적을 바로 이해하고 순종하라.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시간표를 따라 돌아가고 있다.
창조의 하나님은 창조 이후에 팔짱을 끼고 계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바로 알아갈수록 창조의 오묘하고 거대한 역사 앞에서 할 말을 잊는다.
그 앞에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게 된다. 온 땅을 통치하시고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을 더 알아가는 열심을 가지라.
그리고 창조주 하나님에게 마땅한 예배를 올려드리는 삶을 살아가기 바란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창 1장 5절 / 강문호목사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면서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라는 말씀을 6번 하셨습니다.이 말씀속에는 깊은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밤은 <이미 늦었다>는 인생관이고 아침은 <아직 늦지 않았다>는 인생관입니다.밤은 비관이고 아침은 소망입니다.밤은 끝이고 아침은 시작입니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 말씀속에는 어떤 뜻이 들어 있을 가요? 이 말씀은 성경이 원하는 인간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이 말씀은 어떤 사람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1. 소망의 사람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소망의 사람을 의미합니다.저녁은 어두움이고 아침은 빛입니다.저녁은 절망이고 아침은 소망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에서 살 때 애급 백성들이 사는 곳에는 진한 어두움이 깔려 있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는 곳에는 광명이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하늘을 향하여 네 손을 들어서 애굽 땅위에 흑암이 있게 하라 곧 더듬을 만한 흑암이리라 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손을 들매 캄캄한 흑암이 삼일 동안 애굽 온 땅에 있어서 그 동안은 사람 사람이 서로 볼 수 없으며 자기 처소에서 일어나는 자가 없으되 이스라엘 자손의 거하는 곳에는 광명이 있었더라>(출10;21-23)
3일 동안 애급백성들은 처소에서 일어나는 자가 없었습니다.사람사람들이 서로 볼 수가 없었습니다.혹시 소변이라도 볼려고 일어나려면 더듬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하는 곳에는 광명이 있었습니다.애급은 밤의 인생이요,이스라엘 백성들은 빛의 인생이었습니다.
태양을 등지고 걸아가면 항상 그림자만 보고 걷게 되지만 태양을 앞에 두고 걸으면 항상 눈부신 태양만을 바라보게 됩니다.
아침이 되는 인생관!
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생관입니다.
영국의 죤 메어저 수상은 매우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그는 16살에 학교를 중퇴하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하여 노동의 현장에 뛰어 들었습니다.그는 새벽부터 노동 현장에서 콩크리트를 버무려야 했습니다.그리고 간단한 토스트로 아침 식사를 하였습니다.
그는 은행의 간부와 정치가로 명성을 얻은 후 서민들이 출입하는 식당을 자주 찾았습니다.그의 집도 서민들이 밀집된 지역이었습니다.
죤 메이저는 수상이 된 후 기자들로부터 고난의 세월을 어떻게 극복하였느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그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비관적인 생각을 가져보지 않았습니다.항상 소망을 가지고 일하면 부정적인 생각이 사라집니다.하늘은 표정이 밝고 긍정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에게 복을 줍니다"
염세적이고 부정적인 생각은 행복을 갉아 먹는 좀벌레입니다.표정을 바꾸면 생각도 달라집니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소망을 잃지 않는 인생관을 가진 이들의 표현입니다.
2. 성령의 사람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성령의 사람을 의미합니다.성경은 마귀의 사람은 <밤 사람>이고 성령의 사람은 <낮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가룟유다에게 마귀가 들어갔습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요13;2)
그런데 유월절 떡을 먹다가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자기를 팔 것을 제자들에게 알려 주었습니다.부끄러움을 느낀 가룟 유다가 밖으로 나가 버렸습니다.그 때가 낮도 아닌 밤이었다고 성경은 의미심장하게 강조하여 주고 있습니다.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요13;30)
마귀의 사람은 밤에 활동하고 하나님의 사람은 아침에 움직입니다.밤은 마귀의 시간이고 새벽은 하나님의 시간입니다.죄를 좋아 하는 이들은 밤에 활동하고 성령의 사람은 새벽에 활동합니다.
홍해가 갈라진 것은 새벽이었습니다(출14;24) 만나가 내린 것도 새벽이었습니다(출16;13)여리고성이 무너져 내린 것도 새벽이었습니다(수6;15) 예수님이 탄생하신 것도,부활하신 시간도 모두 새벽이었습니다(눅24;1)
사실 세계에서 새벽기도 출석율이 제일 많은 교회는 한국입니다.자랑스럽습니다.한국 교회가 세계에서 제일 먼저 새벽기도를 하게 된 동기가 있습니다.
1907년 원산 장대현 교회에서 사경회가 8일동안 있었습니다.1,500명이 모이는 큰 집회였습니다.길 선주 목사님이 강사였습니다.길 선주 목사님은 부모에게 조상으로부터 오는 죄,부모를 사랑하지 못 한 죄,서로 사랑하지 못 한 죄들을 회개하자고 설교하였습니다.이 때 성령의 불이 임하였습니다.
모두가 집으로 돌가지 아니하고 통곡의 눈물을 몇 일을 흘렸습니다.그 뒤로 오늘날의 새벽기도가 생기게 되었습니다.그러나 사실은 새벽기도의 근거는 성경입니다.성경의 인물들은 새벽기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구약성경 인물 중에서 새벽기도에 충실하였던 이가 있습니다.평민도 아닌 왕이었습니다.바로 다윗이었습니다.
그는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라는 말을 두 번씩이나 하였습니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시57;8)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시108;2)
그 후 예수님도 새벽을 깨웠던 분이셨습니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
1;35)
그 이후 참된 기독교인들은 새벽을 성실하게 지켰던 이들이었습니다.
중국을 복음화시키는 데 앞장 섰던 허드슨 테일러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허드슨 테일러가 기도하는 모습을 보지 않고는 중국의 태양이 떠오르지 않는다"
한 달 전 싱가폴에서 싱가폴 중심으로 일하고 있는 한국 선교사 40명이 모여서 성막 쎄민나를 가졌습니다.새벽에 인도네시아 선교사 조 시철 목사님이 설교하였습니다.그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선교사로 나오면 누가 보는 이가 없습니다. 원주민 가운데 새벽기도하는 이도 없습니다.그러나 나는 인도네시아에 파송된 후 지금까지 새벽기도를 혼자 할 망정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조 시철 선교사가 기도하는 모습을 보지 않고는 인도네시아 해가 떠오르지 않을 것입니다"
아침의 사람은 성령의 사람을 말하고 있습니다.
3. 새 출발의 사람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새출발의 사람을 의미합니다.저녁은 휴식을 말하고 아침은 일의 시작을 말해줍니다.그래서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라는 말은 이제 일을 시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런 말씀을 하여 주셨습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요9;4)
전도서 기자도 말하고 있습니다.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거두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저것이 잘 될는지,혹 둘이 다 잘 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전11;6)
이사야도 말하고 있습니다.
<네가 심는 날에 울타리로 두르고 아침에 너의 씨로 잘 발육하도록 하였으나 근심과 심한 슬픔의 날에 농작물이 없어지리라>(사17;11)
아침은 출발의 시간입니다.아침과 새벽은 성경에서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새벽기도를 제일 먼저 한 이는 아브라함입니다(창19;27) 야곱도 새벽제단을 쌓았습니다(창28;18) 모세도 새벽기도를 하였습니다(출24;4) 한나도 새벽기도하다가 사무엘을 잉태하게 된다는 응답을 받았습니다(삼상1;19) 욥도 새벽에 기도하였습니다(욥1;5) 우리 감리교를 창설한 웨슬레도 평생을 새벽 4시에 일어나 두 시간 기도하였던 분입니다.그 분이 기도하던 자리 밑의 마루는 눈물로 썩어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같이 성경의 인물들은 새벽기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파레이드 법칙이 있습니다.20%가 80%를 지배하는 법칙입니다.새벽시간 20% 4시간 가량을 잘 사용한 이들이 큰 일을 하였습니다.
워싱톤에게 신문기자들이 물었습니다.
"그렇게 위대한 일을 한 비결이 무엇입니까?"
워싱톤은 생각할 틈도 없이 말했습니다.
"내가 엄청난 일들을 다 처리하는 비결은 매일 4시에 일어났기 때문입니다.일어나 기도하고 일하면 남이 일어나기 전에 벌써 많은 일을 해놓게 됩니다"
밀톤은 <실락원>을 쓸 때 매일 4시에 일어나 아무도 방해받지 않는 시간에 집필하였습니다.나도 목회 24년을 새벽 4시반 경에 일어나서는 새벽기도후 잔 적이 없습니다.기도후 집에 가서 운동,식사,신문 큰 글씨만 읽기를 30분 정도에 마치고 7시반에 출근하였습니다.그리고 공부하며 책을 썼습니다.지금까지 84권의 책을 출판할 수 있었습니다.새벽은 성경의 시간이요 일 시작의 시간입니다.아침의 사람은 새 출발의 사람입니다.
4. 빛의 사람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빛의 사람을 의미합니다.밤은 어두워서 무슨 일을 하든지 불편합니다.실수하기가 쉽습니다.교통사고도 밤에 나기 쉽습니다.잘 안 보이기 때문입니다.그러나 낮은 모든 것이 잘 보이기에 실수하기가 힘듭니다.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었을 때 그를 살리러 가면서 이런 말씀을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 두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고로 실족하느니라>(요11;9-10)
예수님은 빛이십니다.무엇이든지 맑습니다.숨기는 것이 없습니다.저녁의 사람은 음흉하여도 아침의 사람은 다 들어 냅니다.
민수기에서는 예수님을 <한 빛>이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그를 보아도 이 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편에서 저편까지 쳐서 파하고 또 소동하는 자식들을 다 멸하리로다>(민24;17)
이사야는 예수님을 큰 빛이라고 말했습니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사9;2)
누가는 예수님을 돋는 해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을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눅1;78)
요한은 예수님을 참 빛이라고 불렀습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요1;9)
요한 계시록은 예수님을 광명한 새벽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 하시더라>(계22;16)
예수님은 이같이 빛이시고 우리에게 빛된 생활을 하라고 권면하고 계십니다.그래서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라는 말씀은 빛의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5. 축복의 사람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축복의 사람을 의미합니다.저녁은 어두움의 시간이고 아침은 빛의 시간입니다.솔로몬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거쳐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잠4;18-19)
새벽에 일어나서 일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게 됩니다.그러므로 축복의 사람이 됩니다.다윗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성중에 거하시매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시46;5)
하나님께 첫 시간을 바치는 것이 새벽기도입니다.첫 시간이란 좋은 시간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첫 시간을 바치는 이에게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그렇기에 성경의 수많은 기적들은 새벽에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새벽에 도와 주시니 복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제일 먼저 받는 복은 건강의 복입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이는 건강의 복을 받게 됩니다.
아침 운동하러 나가면 늘 만나는 이들을 만나게 됩니다.어쩌다 결석하는 이들이 있습니다.다음 날 만나서 "왜 어제 못 나오셨어요?"라고 물으면 "술마시고 늦잠 잤어요.그리고 아침 운동을 못 하였더니 몸이 엉망이예요"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새벽은 건강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새벽기도하면 건강의 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물질의 복도 받게 됩니다.
나는 지난 번에 우리 교회오셔서 부흥회를 인도하신 김 종순 목사님의 간증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어머니가 평양에서 피난나와서 부천에서 8대 갑부가 되기까지의 비결은 세 가지였습니다.
1. 평생 한 교회만 섬긴 것이었습니다.
2. 십일조를 매상으로 풍성하게 드린 것입니다.
3. 새벽기도입니다.늙어 세상을 떠나게 되었을 때 김 목사님 업고 새벽기도를 하셨습니다. 6개월을 업고 새벽기도를 하였더니 부천시에서 효자상을 주었습니다.그 결과 온 자녀들이 다 잘 되고 물질적인 복도 그렇게 받았다는 간증을 하였습니다.새벽은 축복의 시간입니다.
내가 일생 첫 부흥회를 인도하였던 교회는 전곡 전남 감리교회입니다.어느 덧 23년이 흘렀습니다.그 때 이 미남 권사님을 만났습니다.그 교회는 탄피를 나무에 달아 놓고 일년 12달 4시 30분이면 종을 울리는 교회인데 그 종을 이 권사님이 매일 새벽 울렸습니다.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추우나 더우나 종치는 것은 자기가 맡았습니다.누가 먼저 치는 것이 기분나쁘다며 일찍 와서 종 앞에 대기하고 있던 권사님이십니다.그 때 환갑이 넘었었습니다.그런데 지난번 미국 후러싱 교회에 갔더니 그 곳에 계셨습니다.너무나 놀랐습니다. 아직도 건강하고 자녀들이 모두 축 복받고 미국에서 잘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아침의 사람은 축복의 사람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 말씀은 5가지 종류의 사람을 말해줍니다.
1. 소망의 사람
2. 성령의 사람
3. 새 출발의 사람
4. 빛의 사람
5. 축복의 사람
알파와 오메가의 하나님
이필재목사 / 창세기 1:1, 요한계시록 21:1
헬라어의 첫 글자를 알파라고 하고 끝 글자를 오메가라고 합니다. 구약의 원어는 히브리어로 되어있고, 신약의 원어는 헬라어로 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 8절을 보면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라고 알파와 오메가로 하나님을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은 왜 자신을 알파와 오메가로 정하셨는가? 알파의 하나님과 오메가의 하나님의 의미를 살펴보기 위해 오늘 성경의 제일 첫 구절과 마지막 부분의 한 구절을 연결해 보았습니다. 우리들은 모두 하나님을 믿고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성경에는 우리가 믿는 사하님의 속성이 아주 많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하나님은 창조하신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도다, 하나님은 자비하시도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광대하시며 영화로우시고 오래 참으시며, 때로는 심판하시고 소멸하시고 때로는 질투하시고 무소부재하시고 영원하시며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시며, 하나님은 불변하시도다, 하나님은 구원하시며, 하나님은 용서하시는 분이시다. 뭐, 끝도 없는 하나님의 속성 표현이 성경에 가득합니다. 크로스웨이 성경공부 교재에는 “현대인의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요즘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해 재미있는 유머적 표현이 많이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하나님은 경찰이시다. 죄인을 잡아내시니까! 하나님은 은행장이시다. 모든 사람이 돈 달라고 하니까! 하나님은 왕이다. 모든 사람을 향해 명령을 하시니까! 하나님은 폭군이다. 자기를 안 믿으면 지옥에 간다고 하시니까! 하나님은 욕심쟁이시다. 온 우주 만물이 다 자기 거라고 하니까! 하나님은 처녀이다. 자기만 사랑하라고 하시니까! 하나님은 부인이시다. 질투하니까! 이런 하나님의 속성을 유머 감각적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포괄적으로 잘 표현한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가 하나님은 영이시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지니라.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영이신 하나님이 인간에게도 영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합니다. 지금 우리는 물질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영은 물질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열두 제자와 만났을 때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본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영과 물질의 구분을 예수님 자신이 하신 것입니다. 우리 육체는 물질입니다. 그런데 영의 세계는 물질의 세계에서 바라볼 때처럼 뚜렷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바울 선생이 고린도전서 13장에 “지금은 우리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이 영적인 세계를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온전히 알리라. 우리 물질이 다 소멸되고 영이 영의 세계로 갔을 때는 확실히 볼 수 있다.”라고 영의 세계를 표현했습니다. 출애굽기 33장에, 모세가 금송아지 사건으로 화도 났고 일도 하기 싫고 모든 것을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생길 정도로 많이 지쳐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계속 귀찮은 일을 시키니까 모세가 하나님께 요청합니다. “하나님, 내 앞에 한번 나타나셔서 모습을 보이시옵소서.” 그렇게 말합니다. “모세가 가로되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가 보이옵소서.” ‘도대체 하나님이 어떻게 생기신 분인지, 날더러 왜 이런 고생스런 일을 시키시는 것인지 한번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해봐야 되겠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합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모세에게 대답하십니다.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결국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하나님이 알려주신 것만 알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계시로 보여준 것 외에는 알 수 없는데 가장 분명하게 우리에게 보여주신 계시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 하나님을 본 것이라고 했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예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알지 못하는 것은 모르는 채로 남겨두는 것이 인간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의 속성은 유일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6장 4절에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유일신 개념! 나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는 것을 첫째로 선언하신 것이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유일신 하나님이 유일한 계시자로 세상에 보내신 존재입니다. 유일신이시기 때문에 우주 공간에 되어진 모든 일은 하나님의 솜씨요,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믿는 것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영의 계시로 우리 영을 깨어서 고백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하나님의 속성을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 말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시작과 끝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3단계로 말하면 창조와 구원, 심판 사역으로 성경에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습니다. 인간 구원을 위해서 일하시고 마지막에는 종말적 심판을 행하시도록 예언되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시작인 창세기! 그리고 하나님 사역의 종말인 요한계시록! 알파와 오메가로 이 시간에 연결해 보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일곱 가지 연결이 있습니다.
첫째로, 창세기 1장 1절은 하나님의 창조 시작으로 나타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러면 누가 그 말을 믿을 수 있는 것인가? 하나님이 만드셨는지 저절로 생겨난 것인지 누가 증명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영적 계시의 문제를 말한 것입니다. 영적으로 하나님이 계시를 주어 믿는 자만이 하는 고백적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를 반대할 수 있는 증거도 세상에는 전혀 없습니다. 저는 성경 다음으로 과학 서적을 많이 읽었습니다. 요즘 정신 물리학이라는 학문에서는 전 우주의 충만한 에너지가 있다고 합니다. 우주 안에 꽉 찬 에너지가 하나 있는데 그 힘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정신물리학에서 그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결국 하나님의 창조를 과학이 접근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넓은 우주 공간 안에 창조적 힘인 에너지를 가득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제는 과학이 하나님의 존재를 점점 더 증명해가는 그런 시대입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과학의 증거를 신앙적 용어로 말하면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다, 어디에나 계시다, 우주 공간 안에 어디에나 계시다!” 그래서 정신물리학의 용어로 “이 우주 안에는 에너지로 가득 찼는데 그 에너지를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용어가 사랑이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우주 공간 안에 지어진 모든 일을 마음대로 움직이신다. 우주 공간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하다.”
인간과 지구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인간이 죄를 짓는다는 것입니다. 죄의 결과는 하나님의 우주 질서를 파괴하고 인간과 하나님의 불미를 가져왔습니다. 악령이라고 하는 인간 이상의 힘이 모든 인간의 세계를 자기 뜻에 맞게 하려고 하기 때문에 악령의 지배를 벗어나지 못한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 나라 회복 질서를 깨뜨리는 일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을 보시면 “모든 피조물이 바라는 것은 썩어짐의 종노릇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리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탄식하며 다 고통 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라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병들어 가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 안의 모든 피조물은 지금 함께 고통을 겪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수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를 고대하고 있다고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거기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은 무엇인가? 오늘 요한계시록 21장 1절에 나타납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하나님은 우주 창조이며 또 끝이 되시니 알파와 오메가가 되신다. 하나님이 맨 마지막에는 완전하게 에덴의 회복을 가져올 것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이, 인간들의 죄와 인간들의 무질서, 악령의 역사로 파괴되는 그런 세상이 되었지만 맨 마지막에는 오메가로, 새 하늘과 새 땅을 새로 창조하실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성격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하나님은 인간의 생명에 영원성을 주시려고 창세기 에덴 나무에 생명나무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의 질서를 깨뜨리고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하나님의 생명나무의 축복을 금지하십니다. 창세기 3장 22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에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에덴동산에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십니다. 결국 기독교 진리는 영생의 문제입니다. 생명 불멸의 진리! 그러나 인간은 불행하게도 죄 아래로 떨어져 흙으로 되돌아가게 되는 불행의 심판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습니다. 그러면 인간 영생의 길은 영원히 막혀버린 저주인가? 창세기에서 금지한 생명나무를 요한계시록에 와서 열어줍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2절 “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라고 했습니다. 생명나무를 연다는 말씀은 그 다음 구절에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생명 불멸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은 처음에 알파로 약속하시고 마지막에 오메가로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습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죄 아래로 떨어진 인간이 슬픔과 고통의 역사를 살아야 한다고 창세기에 선언하셨습니다.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 흙으로 돌아가리라.” 여자도 고통을 받습니다.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나님이 창세기 1장에 약속한 인간의 행복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알파로 주어진 하나님의 축복 선언은 무효인가? 창세기 1장 27절에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축복받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이 하신 인간의 영원한 축복은 소멸된 것인가? 저주로 영원히 끝이 나는 것인가? 하나님의 형상됨의 축복이 가시덤불, 엉겅퀴, 얼굴의 땀, 해산의 고통, 종신토록 수고, 저주, 이런 말들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알파의 약속은 영원히 없어진 것인가? 오늘 본문 요한계시록에 하나님은 알파의 약속을 오메가로 회복하십니다. 요한계시록 21장 4절에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 이러라.” 알파의 약속을 오메가로 성취하신 하나님을 보실 수 있습니다. 처음에 영생을 선물 받은 인간이 죄로 인해 사망이라는 최고의 무거운 형벌이 주어졌습니다. “필경은 네가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실제적으로 인간에게 최고 고난스러운 문제는 죽음입니다. 죽음이 다가온다는 것이 가장 슬픈 사건입니다. 로마서 5장에 보시면 아담으로부터 사망이 왕 노릇했다는 말이 나옵니다. 사망 앞에서는 누구든지 꼼짝 못하고 벌벌 떱니다. 사망이 큰 소리로 명령합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사망의 권세를 무기 삼아 전쟁이 생기고 강도가 생기고 흉악범이 생깁니다. 사망 없는 영생을 하나님이 알파로 주셨습니다. 그러면 인간은 사망 앞에 영원히 벌벌 떨어야 되는가? 알파를 주신 하나님의 영생의 축복과 약속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오메가적으로 하나님이 바꿔놓으셨습니다. 요한계시록 20장 6절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오메가로 약속을 하시고 성취하신 것입니다.
넷째로, 하나님은 에덴동산의 최초의 사람을 아담으로 표현해서 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첫째 아담 즉, 알파의 아담은 죄 아래로 떨어져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모든 아담의 후손들은 죄인으로 태어나서 죄 아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알파의 아담을 언제 회복하신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로 회복하셨습니다. 에덴의 아담을 첫번째 아담이라고 부르고 예수 그리스도를 두번째 아담이라고 부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2절에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린도전서 15장 45절에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첫 번째 아담, 두 번째 아담! 즉, 창세기의 아담이 알파의 약속을 받았는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면 인간은 영원히 죄 아래로 떨어지고 마는가? ‘아니다. 두번째 아담, 회복의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인간의 모든 영을 회복시킬 것이다. 알파와 오메가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알파의 아담 위치를 완전하게 오메가로 회복시키셔서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는 종말적 구원의 약속을 하나님이 오메가로 성취하신 것입니다.
다섯째로, 사탄의 문제입니다. 사탄의 존재는 천사장의 타락이라고 성경에서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이 사탄의 활동 기간을 제한하셨습니다.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못 된 줄을 알므로 크게 분 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그래서 그 영향권에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인간을 죄 아래로 떨어뜨려 하나님과 원수가 되게 했던 사탄의 존재는 하나님이 마지막에 그러면 어떻게 하시는가? 요한계시록 20장 10절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천사가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 손에 가지고 하늘로서 내려와서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잡아 일천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이렇게 마귀의 마지막에 대해서 오메가적으로 성취하십니다. 에덴에 나타났던 옛뱀 즉, 마귀는 영원히 결박을 당해서 그 활동을 중지시키시고 영원한 고통의 자리에 있게 하는 알파와 오메가의 하나님이십니다.
여섯째로, 하나님은 하늘나라의 상징적 장소를 이 세상에 하나 주셨습니다. 예루살렘이라는 장소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은 거룩한 성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3장 37~39절에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예수님 자신의 슬픈 탄식으로 성경에 예언하셨습니다. 그대로 폐허가 됐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거룩한 성이 왜 이렇게 폐허가 된 겁니까? 그러면 예루살렘은 영원히, 영원히 폐허인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처음의 계획대로 회복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새 예루살렘이 오메가로 등장합니다. 요한계시록 21장 2절에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옛날 알파의 예루살렘은 다 폐허가 됐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12절에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오메가로,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이 나는 내가 처음에 약속한 거룩한 성을 이렇게 회복시키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알파의 예루살렘을 오메가의 새 예루살렘으로 회복시키시는 알파와 오메가의 하나님이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창세기와 요한계시록을 연결하고 계십니다. 오늘 말씀에 “새 하늘과 새 땅” 왜 “새”자가 들어가는가? 망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영원히 망가질 것인가? ‘아니다. 새 세상으로 바꿀 것이다. 나는 내가 본래 계획하고 알파로 축복한 나의 세상을, 그리고 나의 백성을 이렇게 옛날보다 더 좋은 모습으로 단장하고 회복시킬 것이다.’ 이렇게 연결이 되는 성서의 기초입니다. 의미가 반대인 것도 많이 있습니다. 창세기의 창조 사역은 만물의 시작으로 알파적 역할이 나타납니다. 요한계시록의 오메가적 사역은 만물의 소멸입니다. 창세기에 “빛이 있으라!” 하셨는데 요한계시록에는 햇빛이 쓸데없습니다. 창세기의 가시덤불과 엉겅퀴의 세상이 요한계시록에는 “그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며졌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셋째는 옥수요 넷째는 녹보석이요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한째는 청옥이요 열둘째는 자정이라.” 이렇게 반대적인 의미의 알파와 오메가로 표현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그리스도의 알파는 고난의 종입니다. 구유 탄생, 노동자의 삶, 고난의 사역, 골고다 십자가, 전부 다 고난입니다. 그런데 오메가적 사역은 어떻게 약속되어졌습니까? ‘심판의 주, 만왕의 왕, 천사장의 나팔소리로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오메가적 그의 삶이 그렇게 반대적 의미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영광의 주로 예언되어져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자신을 한번 생각해 보면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이 알파의 세상에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하나님 백성의 알파는 고난입니다. 당연히 주님을 위해서 고난스러워야 합니다. 십자가 없는 신앙생활을 하려니까 시험이 많습니다.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영원히 고난과 희생이냐? 오메가는 지상에서 하나님을 위해 손해 본 모든 것이 영광으로 나타난다는 약속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 마지막장 요한계시록 22장 12절에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 오메가적 약속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21세기에 들어와 영적 느낌이 없습니까? 재앙적 분위기가 온 세상에 가득해 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규모적인 인명 피해 사건이 21세기에 들어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요즘 권위 있는 방송들이 앞으로 조류독감의 우리나라 피해 예상을 국민의 32퍼센트로 잡고 43만명 정도가 사망할 지도 모른다며 이런 예상을 공공연하게 방송 뉴스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될지도 모릅니다. 21세기는 세계 곳곳이 재앙적 분위기로 처음부터 지금 몇 년 동안 가고 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영적 추수기 현상이 나타나는 느낌이 영적으로 주어지는 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한번 계획하신 일은 반드시 행하시기 때문에 “나는 알파와 오메가야! 나는 내가 약속하고 내가 계획한 일을 다 이루고 말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성격입니다. 오메가의 영광을 위해 과거보다도 우리는 더 훌륭한 신앙생활이 필요해진 때가 지금입니다. 지금 우리는 알파의 순례에서 오메가를 향해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메가의 생애가 계시록의 약속대로 여러분에게 주어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하나님은 계획하시고 성취하시고 창조하시고 마지막에는 오메가로 성취하시는 것을 믿습니다. 창세기와 요한계시록은 이렇게 분명한 연결을 우리들에게 주고 있는데 우리의 영을 열어주셔서 하나님의 역사의 손길을 볼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제는 세상이 영적 추수기가 된 것을 저희들이 압니다. 하나님이여!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여러 가지 사건들에게서 무감각한 우리의 영이 알지 못하는 영적 느낌을 성령님이 깨우쳐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처음과 최종이신 하나님
창 1장 1절 / 김남준목사
I. 본문의 배경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신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인간이 타락했으나 하나님은 그 목적을 포기하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의 원래 목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우리를 구속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은혜를 공급해 주시며 우리를 참 신자로 만들어 가십니다. 참 신자가 되어감으로 참 인간이 될 수 있고, 참 인간이 되어감으로 비로소 그 인간은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조의 목적과 구속의 목적은 일치합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거셨던 기대와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한 우리에게 거시는 기대가 동일한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과 연관되어, 우리의 삶의 필요에 의해서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즉, 자기 인생의 행복과 유익을 위해서 살다가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을 때 비로소 고개를 들어서 하나님을 바라고, 도와주시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렇게 사는 이유는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살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갖고 싶지만 전적으로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살지 않고, 하나님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위대하심을 자신의 인생의 목적에 활용하며 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도 자기 인생을 위한 신앙일 뿐 하나님을 위한 신앙이 아닙니다.
II. 처음이신 하나님
하나님의 무한하고 위대하심, 영광스러우심과 완전하심에 대해 성경에 많은 묘사를 하고 있는데, 요한계시록에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한 그림 같은 묘사가 있습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계 22:13)는 말씀입니다. ‘알파’는 희랍어 알파벳의 첫 번째 글자이고 ‘오메가’는 마지막 글자입니다. 이것은 ‘알파’ 앞에 문자가 없고, ‘오메가’ 뒤에 문자가 없듯이, 하나님이 모든 만물의 궁극적인 시작이시고 또한 모든 만물의 궁극적인 최종이 되신다는 사실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떻게 만물의 시작이 되시고, 또한 최종이 되시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A. 천지창조의 궁극적 원인이심
우선 하나님이 ‘처음’이라는 것입니다. 처음이신 하나님이시므로 모든 천지 창조의 궁극적인 원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아주 분명하고 간단명료하게 우주를 포함한 이 세계의 기원에 대한 답을 줍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아무 것도 없었는데,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는 재료가 없는 상태에서의 창조였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A-1. 피조물과 구별되심
물질은 창조의 의지를 가지고 있거나, 그 자체가 능력을 공급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격체로서 창조의 의지를 가지고 계시고, 또 말할 수 없는 지혜로 창조세계의 비밀들을 엮으면서, 창조 안에서 가지고 계셨던 목적을 위해 모든 창조세계가 기여하게 하십니다. 이런 점에서 분명히 먼저 인정해야만 하는 사실은,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과 전적으로 구별되신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아무리 뛰어난 솜씨로 조각을 해서 사람을 만들어놓았다고 할지라도, 만든 사람과 조각품 사이에는 엄연한 존재론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작품이 아무리 뛰어날지라도, 하나는 물질일 뿐이고 하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둘이 비슷하거나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창조의 세계가 바로 하나님과 그런 질적인 차이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첫걸음은 이 세계는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고, 하나님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피조물과도 겨룰 수 없이 뛰어나고 탁월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의미에 있어서, 인간이 모든 피조물보다 뛰어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존재의 의미에 비하면 인간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은 모든 인간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 위에 뛰어난, 완전히 구별된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A-2. 피조물이 그를 의존함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분일뿐만 아니라 지금도 사람을 태어나게 하시고, 살아있던 사람들을 죽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누구도 그것을 거역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모든 천지창조의 궁극적인 원인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 당신을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는 것입니다. 또한 실제로 하나님은 한번 창조해놓은 세계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지금도 붙들고 계시고 운행하고 계십니다. 모든 피조물을 보존하시고 통치하시며, 이 창조의 세계를 질서 있게 엮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이렇게 살아서 숨 쉬며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 것도, 주님이 의지를 가지고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신앙인으로 살게 하시려는 작용을 멈추지 않으시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B. 천지창조의 계획
하나님이 이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 그 계획은 아주 아름답고 조화를 이루는 탁월한 것이었습니다.
B-1. 천상 나라와 지상 나라 : 천사와 사람을 두심
이미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에 하늘나라를 창조하셔서 그곳에 천사들을 살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천사들에게 하늘나라를 전적으로 위탁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천사들은 하늘나라에 거하시는 하나님과 이후에 창조될 이 땅의 인간들을 섬기기 위해 부리는 종들로써 창조되었습니다. 지금은 비록 천사들이 인간보다 뛰어난 것처럼 여겨지지만, 하나님은 천사들에게 인간에게 주신 그런 지위는 허락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인간의 존재, 그리고 인간과 맺으신 하나님의 독특한 관계는 천사들에게는 정말 부러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지만 하늘에 묶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래서 하늘나라를 만드시고 거기에는 천사를 두셔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시고, 이 땅에는 피조세계를 만드시고 사람을 두셔서 이 땅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서 또 다른 하나님의 나라가 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만들어놓으신 이 모든 우주 가운데 지구는 일부에 불과하지만 종교적인 의미에 있어서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이 다른 별이 아닌 지구,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인간이 살고 있는 지구는 온 우주를 주고도 바꿀 수 없을 정도의 의미를 가진 곳입니다. 그러한 이 땅에는 지상나라를 만드셔서 아름다운 창조물들로 가득 채우시고 거기에 흙으로 사람을 빚어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그렇게 태어난 인간에게 하나님께서는 천사에게도 주시지 않은 독특한 지위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대신해 이 창조세계를 다스리고, 그 세계 안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이 지상의 세계에 하나님의 통치가 그대로 이루어지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늘에서는 하늘나라의 천사들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땅에서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창조세계를 다스리는 인간으로 말미암아 당신이 창조하신 온 세계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창조의 궁극적인 목적이었습니다. 이러한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이 이 세상에 피조물들을 만드시고, 모든 피조물들을 만드신 다음 마지막으로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창조된 인간은 모든 피조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계획을 이해하는 지혜를 가지고, 이 모든 피조세계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섬기며 살아가도록 하셨습니다. 이러한 위치에서 살아갈 때 인간이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의 목적이고 구체적인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습니다. ‘인간이 과연 하나님을 대신해 피조세계를 다스릴 만한 능력이 있는가?’입니다. 하나님의 대리자가 되어서 일을 맡기신 하나님께 만족을 드릴 정도로 완벽하게 이 세상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인간이 하나님이 되어야지만 가능한 것입니다. 비록 죄는 아직 들어오지 않았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 빚어진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닮았으나 하나님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이 그렇게 되는 것을 원하시지도 않았고, 될 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님 안에 있는 성품처럼 완전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죄가 없었을 때에도 창조된 그 자체 속에 이미 불완전한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이 창조의 목적을 이루는 하나님의 중요한 방법이라는 것을 주목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불완전함으로 인해 주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이 세상을 창조의 목적대로 결코 다스릴 수 없다는 주님을 향한 절대의존의 마음을 갖고 그 마음 때문에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B-2. 만물을 하나로 만드시는 충만하심 : 인간과 만물의 연대
그런데 신비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을 모두 따로 따로 창조하시고 인간을 마지막으로 창조하셨는데, 이것을 각각 개별적으로 존재하도록 내버려두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하나 창조하시되, 그 창조된 모든 피조물을 하나로 연결된 핏줄처럼 묶으셨습니다. 그 모든 만물들 위에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심으로서 이 하나 하나의 피조 된 창조물들이 인간과 함께 모두 한 핏줄처럼 연결되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이것을 상호교통(Communication)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 하나로 묶여 교통하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증거를 들어보겠습니다. 아담이 불순종하고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순전히 아담과 하와의 개인적인 선택과 불순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죄에 직접 동참하지 않은 땅도 함께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 즉, 인간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통해서 상호교통이 이루어질 때, 피조물 하나하나가 전부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B-3. 창조의 면류관, 사람을 만드심
그런데 죄가 들어옴으로 인간과 연결을 맺고 있는 모든 피조물들 또한 하나님과 관계에서 끊어지면서, 마치 전기가 나간 것처럼 창조될 때 그 아름답고 찬란한 영광이 모두 사라진 것입니다. 죄가 그렇게 망가트려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구원해주시고, 그 복음이 전해져 끊임없이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됩니다. 이 과정이 바로 모두 끊어졌던 피조물들과의 관계를 다시 복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인간과 자연 사이에 하나로 엮어졌던 이 창조의 상호교통이 회복되고, 그 관계 하나하나에 하나님이 다시 충만하게 계셔서, 원래 죄가 들어오기 전에 창조시의 그 찬란한 영광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로 이런 계획을 가지고 창조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바로 그런 창조의 면류관입니다.
그래서 창조로 돌아가서 인간을 존재론적으로 보면,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지 인간 자신 스스로에게 기이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존재함에 있어서 자신의 존재에 어떤 것을 보텐 적도 없기 때문에 자신을 위해서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 존재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모두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 창조되었고, 그 창조하신 분은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 권리가 없고, 자기 자신을 위한 삶으로 인해 행복할 수 있도록 만들어지지도 않았습니다. 여기에 바로 인간이 ‘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나를 이 세상에 창조하셨는가?’를 깊이 탐구해야 할 당위성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는 어떻게 보면 사람을 위한 창조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만드시고 인간이 거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다 갖추어놓으신 다음에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세상의 모든 창조는 인간을 위한 준비로서 창조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인간 자신의 행복이 최상의 목표가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향한 절대의존의 마음을 가지고 순종하면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세계가 원래적인 창조의 영광을 간직하고 언제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는 세상으로 가꾸어야 합니다.
그 모든 일의 궁극적인 근원은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즉, 하나님 자신이 그 모든 세계를 창조하시고 그 모든 세계의 궁극적인, 최종적인 원인자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끊임없이 생각해야 될 것은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지고 있는 이 모든 것들 때문에 누리는 행복과 만족, 그 이상의 목적을 위해서 부름을 받았으며,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지 않는 것은 하나님 앞에 죄입니다. 죄를 정의할 때 그 죄는 하나님을 향한 불순종이나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모자라는 것으로 정의될 수 있는데, 그것을 더 뿌리까지 캐고 들어가 보면, 자기 자신이 온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만족을 누리고 행복해지는 것이 자신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깨트려지지 않는 한 그가 하나님을 섬기고, 부분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쓸모없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이 세상을 창조한 목적이 하나님에게 있고, 자신이 이 피조물 중 한 사람으로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도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하고, 하나님의 창조한 목적을 따라 사는 것이 내 인생의 참된 영광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나 헌신적인가는 나중 문제입니다.
III. 최종이신 하나님
성경은 또한 하나님이 최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이 시작일 뿐만 아니라 마지막이라는 의미입니다.
A. 천지만물의 최종적인 목적이심 : 만물이 하나님께로 돌아감
이것은 하나님 자신이 천지창조의 최종적인 목적이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은 더 큰 목적이 있습니다.
그의 구원하신 빛을 선전하고 계속 추구해 나가다보면 마지막에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목표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1장 36절은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들이 그렇게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벗어나서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태어난 인간 역시 그런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거스를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악인도 있고 선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이 모두 각기 자기의 생각을 따라 살아가는 것 같지만 결국 그 모든 인간들 하나하나가 모두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떠나서는 살수 없도록 하나님께서 운행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악인들도 결국은 심판을 받음으로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보여주는 훌륭한 재료가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들은 이런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모든 피조물과 인간은 이 세상에 존재함으로 마지막 사라질 때까지 결국은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하나님으로 말미암고 하나님 속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유한한 존재는 결국은 무한 속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참된 본분은 바로 인간의 이런 이치를 바르게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이 세상에 몰두하며 살아가지 않고, 자신이 어디로부터 왔으며, 마지막에 어디로 돌아가는지,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피조물로서의 위치가 어디인지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본분에 열중함으로써 모든 피조물들과 확연하게 구별되는 것입니다.
B. 그러나 창조 세계에 의존치 아니하심
하나님이 당신의 기쁨과 만족, 영광을 위해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은 창조세계를 통해 비로소 하나님이 되시고, 창조세계에서 받는 영광을 통해 비로소 영광스러워지시는 분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 우주에 아무런 물질이 존재하지 않고 천사조차 창조되기 이전에도 하나님은 하나님이셨고 그의 영광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들이 그 창조의 세계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에도 하나님은 하나님이셨고, 죄로 말미암아 이 온 땅이 타락하고 더러워졌을 때도 하나님은 하나님이셨습니다. 또한 인간의 범죄로 창조의 질서를 무너진 이 망가진 피조세계가 하나님의 영광에 어느 부분도 훼손할 수 없었다는 사실은 너무나 분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것 위에 뛰어나고, 이 지구상에서 이 피조의 세계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든지 탁월한 영광이시며, 그 영광의 본체이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무엇으로도 하나님의 본체적 영광에 어떤 영향을 끼칠 수도 없고, 하나님은 홀로 하나님이시고, 그의 영광은 영원무궁하고 무한합니다.
IV. 결 론
인간이 경험하고 있는 불행과 고통은 수없이 많습니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그런 고통들을 해결하고 행복하기 위해 몸부림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아무리 불행으로부터 벗어나 행복해지려고 애쓴다고 해도 그런 노력 속에서 거두는 성공은 결국 이 땅에 있는 자원을 많이 모으거나, 심지어는 남에게 있는 자원을 강탈해서 더 많이 자기소유로 삼음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고 하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A. 인간의 모든 불행은 자기 자리를 모르는 것
인간의 모든 불행의 궁극적인 뿌리는 죄며, 그 죄의 궁극적인 뿌리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해주실 때 지정해주신 자리에서 이탈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 자리에 있을 때 가장 아름답게 빛나며 행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끊임없는 사랑과 진리로 빚어져 새사람이 되게 하신 그 목적도 결국은 그 창조의 원래 자리에 돌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하는 개별적인 순종과 헌신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떠난 사실을 깊이 회개하고 진실로 하나님이 지정해주신 자리로 돌아가고 싶은가 정직하게 돌아보는 것이 하나님께는 더 중요한 것입니다.
B. 불행해진 인간의 유일한 희망 : 천지창조시 지정된 자기자리로 돌아가는 것
하나님이 주신 원래 자리를 잃어버리고 불행해진 인간에게 남아 있는 마지막 유일한 희망이 있습니다. 그 희망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로 인간에게 원래 주시려고 했던 이탈한 인간의 참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 이외에는 인간에게 어떤 희망도 없습니다.
먹고 마시고 죄를 짓는 일은 너무나 허무하고, 잠시 있다 모두 사라지는 것입니다. 또한 선에 대한 추구, 예의바른 삶, 예술, 그리고 학문에 기여하는 것, 이런 모든 것들은 인간이 원래 자신의 자리로 돌아갈 때만 의미가 있는 것 일뿐 모두 사라져버리는 것들입니다. 결국은 이 세상의 어떤 것도 하나님이 인간을 이 세상에 창조하신 원래의 목적을 대신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유한한 존재로 살면서도 우리는 무한을 꿈꿉니다. 그래서 유한한 생애를 마감하고 무한으로 돌아갈 때, 그 무한은 두려움과 침묵이 아니라, 무한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품으로 돌아가는 무한으로의 회기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동안에 그 영원한 세계로 돌아가는 그 무한을 꿈꾸고 그리워하며, 주님이 이 땅에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을 이루어드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 돌립시다
창 1장 1절 / 강성찬목사
세계가 어떻게 되어 있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는 인생들의 커다란 의문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기에 대해 성경은 정확한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합니다. 이 말씀을 믿느냐 믿자 않느냐에 따라서 인간의 가치 판단이 갈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유신론과 무신론의 차이가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의 나눔이 있습니다. 영생과 영벌의 나눔이 있습니다. 신자와 불신자의 구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교회라는 표어로 한해를 시작하며 이 달은 창조주 하나님게 영광돌리는 달입니다
태초에 창조 하였다고 합니다. 태초란 말은 첫머리 시작 등을 의미 합니다. 창조의 시기인 태초는 영원에서 시간이 시작되는 시점입니다. 즉 영원으로부터 시간이 분리되어 나온 시간의 원점 바로 그 순간입니다. 어떤 것의 시작이 아니라 절대적인 시작 곧 모든 것의 시작을 말 합니다. 모든 것이 시작하는 절대적인 시작이요 시간 자체의 시작입니다.
나아가 태초라는 시간 즉 천지가 창조되던 때임을 직접 말해 줍니다. 그러므로 태초라는 순간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태초라는 시간의 단위는 하나님의 창조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결과적으로는 태초는 물질이 영원하지 않고 태초라는 순간 즉 시간과 함께 시작했음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셨다고 합니다.
책에는 저자가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가 그것을 써야 합니다. 그림에는 화가가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가 그것을 그려야 합니다. 건물에는 건축가가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가 그것을 지어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사는 세계도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계획하여 만든 것입니다. 이 위대한 설계자, 건축자, 창조자를 우리는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엘로힘)은 두려워서 어쩔 줄 모른다(알라흐)는 말에서 온 이름입니다. 하나님은 권능을 가지신 대 우주의 주인 되시는 엄위로우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능력이 무한하시어 온 인간이 그 앞에서 떨 수밖에 없는 장엄하신 신이요 창조주로서 피조물과 구별되는 성품을 가지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온 피조물이 그 앞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하며 다른 어느 것과는 비교 되지 않는 유일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이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옛날 독일에 훌륭한 기독교인 영주가 있었는데 그는 라인 강변의 훌륭한 고성에서 살고 있었다. 그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 아들은 지혜와 덕으로 모든 주위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한번은 그가 집에 없는 동안에 한 프랑스 귀족이 손님으로 왔다. 이 손님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으며, 하나님을 신뢰하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영주는 여러 가지 아름다운 것들을 보여 주기 위하여 그 무신론자를 그의 성과 영토로 안내하였다. 그는 다른 것들 중에서 몇몇 매우 아름다운 광경들을 그에게 보여 주었다. 그는 그것을 보고 매우 감탄하였으며, 영주는 '이것들은 모두 내 아들이 설계한 것이오.'라고 말하였다. 정원은 그의 아들에 의해 고상하고 훌륭하게 설계되고 가꾸어졌으며, 모두 아담하고 단단하게 건축된 마을의 집들도 그의 아들에 의해서 설계되었다. 그 신사는 이 모든 것을 보고 난 후 감탄하며 말했다. '당신은 그와 같은 아들이 있으니 참으로 행복하겠소!' '내 아들이 훌륭한지 어떻게 알았소?' '하지만 당신은 내 아들을 본 적이 없지 않소?' '없지요. 하지만 나는 그가 한 일로 그를 판단할 수 있소.'
'마찬가지라오. 나도 하나님을 뵙지 못했으나 그분이 창조하신 우주만물을 보아 그분이 어떤 분이 신지 알 수 있다오.'
창조의 위대함을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이 들에 산보를 나가셨다가 발에 무엇인가 부딪히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주어 보니 회중 시계였습니다, 그는 시계를 처음 보았습니다. 아주 이상하게 생겼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본 그의 말은 이것이 어디서 생겨 났을까 가 아니라 이것을 누가 만들었을까 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주는 우리는 그냥 생겨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만드심에 의하여 있게 되었습니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와싱톤이 어렸을 때에 하나님의 창조에 대하여 잘 이해하지 못 할 뿐만 아니라 받아들이지 아니하자 부모님들 이 그에게 믿도록 하기 위하여 뒷동산에다 와싱톤의 이름을 따라 꽃씨를 뿌리고 꽃이 피어 아름다운 모습이 되었을 때에 그를 데리고 산에 올라 이곳에 이러한 것이 저절로 생겨났으니 얼마나 신기한 일이냐고 하자 와싱톤은 이것은 그냥 생겨난 것이 아니라 부모님이 저를 위하여 만드신 것이라고 함니다. 그래서 부모님은 너는 이 작은 일도 그냥 된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어찌하여 이 우주는 그냥 되었다고 하느냐고 하자 그때에 자기의 어리석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창조를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한 과학자가 창조의 사실을 인정하지 아니하자 친구 크리스천 과학자가 지하실에다가 천체의 모형을 만들고 우연히 이러한 일이 생겨났다고 하자 그 친구는 이것은 우연이 아니고 누군가가 그렇게 만들었다고 하자 자네는 이 작은 우주는 누군가가 만들었다고 하면서 장엄한 우주에 대하여는 어찌 우연히 생겨났다고 하느냐고 하자 그 불신 과학자가 믿게 되었다고 도 합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있으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시니 창조가 말씀으로 된 것을 말 합니다.
말씀의 종교입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오 인격적인 하나님이시오 신실한 하나님이심을 가르칩니다. 말로서 만족하지 못하는 세계는 인간 세계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인간의 세계는 언행이 일치해야 한다고 하나 하나님의 세계는 언행을 나누어 생각하지 않습니다.
창조(바라)는 하나님의 행위에 관해서 사용하며 무조건이라 할 수는 없으나 일차적으로는 기존 재료를 필요로 하지 않는 말슴의 창조 행위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만든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한은 하나님의 재료 없는 중에서의 만듦을 의미하게 되고 여기에서 무에서의 창조를 가리키는 교리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기원론에 대한 기독교의 독특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창조하신 재료를 사용 하여 창조하시기도 합니다.
사람을 지으실 때 남자는 흙으로 여자는 남자의 갈빗대를 사용 하시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시니 완전한 창조입니다.
그러므로 물질은 선도 악도 아님을 알게 합니다. 그러므로 물질은 바로 쓰면 유익을 줍니다. 곰팡이에서도 페니실린을 끌어내고 삼대에서는 베를 뽑는가 하면 대마초와 같은 해독 물질이 나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도 좋았더라는 아닙니다. 인간의 범죄 이후에는 질서가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창조의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히 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믿으면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아니합니다.
어떤 젊은 자유기고 화가가 자신의 그림을 팔기 위하여 여러 신문사를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그의 그림을 사 주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캔사스 시에서 발행되는 어떤 신문의 편집자는 그에게서 재능을 전혀 찾아볼 수 없노라고까지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능력을 믿었고 작품을 팔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그는 교회 홍보물에 그림을 그리는 일자리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림을 그릴 장소로 생쥐가 우글거리는 창고를 빌렸고, 누군가가 자신의 작품들을 사줄 것이라는 희망으로 계속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그 창고에 살고 있는 생쥐 한 마리가 그에게 커다란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고 그리하여 그는 '미키마우스'라고 불리는 만화의 주인공을 창조해내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렇게 해서 월트 디즈니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을 나온 아랍인 청년 무사 알라미는 자기 고국으로 돌아와서 낙토를 만들려는 계획을 세우고 여리고 계곡으로 갔습니다. 멀리 사해와 모압산지가 보이는 그곳은 지구상에서 가장 낮은 지대였습니다. 무사 알라미는 이 사막을 파고 지하수를 개발하기로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은 절대로 이 마른 땅에는 물이 나오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창조 이후 아직까지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모래밭이었지만 창조의 하나님은 여기서도 생명이 살 수 있도록 하셨으리라는 가능성을 믿고 그는 곧 지하수개발에 착수했습니다. 1주일을 파고 열흘을 파 보았으나 여전히 모래뿐이었습니다. 한달, 두 달이 지나고 석 달이 지났지만 물은 여전히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낙심치 않고 계속 여섯 달을 팠는데 마침내 물이 조금씩 고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그 물줄기를 보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물을 끌어 들여서 사막을 옥토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는 그 주위에 거대한 농장을 만들고 농민학교를 세웠다. 수확된 바나나와 오렌지를 비행기에 실어 베이루트, 쿠웨이트로 수출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마른 땅에서 기적을 이루어 놓았습니다.
하나님의 재 창조의 사실을 믿을 수 있습니다.
영국의 스로스츠란 죄수는 영국과 오스트레일리아에서 40년간이나 교도소 생활을 하고 가죽 체찍으로 50번씩 여덟 차례나 맞았으나 그의 생활은 전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경찰이나 교도소에서도 그를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그가 구세군 숙박소에서 하룻밤 신세를 진 인연으로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고 거듭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구세군 출옥자 보호소에서 18년간 봉사하였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간증했습니다. '400번의 가죽 채찍이나 40년간의 교도소 생활로도 변화되지 않은 내가 그리스도로 인해 불과 1, 2분 만에 변화되었습니다.'
한 세균학 검사실에서 3백여 종류의 우유 견본 검사 의뢰가 들어왔는데 조수가 교수에게 일이 벅차겠다고 걱정했더니 그가 하는 말이 “한 번에 하나씩만 하면 벅차지 않아”라고 말했습니다. 이 평범한 말 가운데서 우리는 인생의 중요한 교훈을 발견하게 됩니다. 산더미 같은 일생의 과제를 한꺼번에 처리하려고 하다가 부담이 되어 포기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시작이 반이라고 생각하고 해보면 쉽게 풀리는 것을 기억하고 꾸준히 끝까지 열심히 하면 좋은 결과가 오게 됩니다. 하루 한 시간씩 집중적으로 성경을 일생 동안 공부하면 신학자가 될 수 있고 하루에 한 사람 전도하면 최대의 전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거북이처럼 걸어가야 함은 신앙은 인내이기 때문입니다. 욥은 졸지에 재산을 잃고 자녀도 건강도 그리고 아내도 잃고 친구의 공격을 받았지만 믿음의 행보를 결코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하루하루를 정성껏 살면 후 일에 보람을 지닐 수 있습니다. “보라! 난 이겨냈노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고통, 패배, 고난, 슬픔이라는 감각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바로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밤이 지나면 새벽이 오고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우주만물을 창조하고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지금 탕자를 찾고 계십니다. 머리에 과학의 모자를 쓰고 허리에 이성의 칼을 차고 등에는 재물의 배낭을 메고 손에는 쾌락의 지팡이를 짚고 사는 현대의 탕자를 부르고 있습니다. 재창조하시는 하나님 앞으로 하루에 한 발자국만 나아가면 위대한 역사가 나타납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모든 것을 맡길 수 있습니다.
“돈은 강하다. 왕은 더 강하다. 여자는 좀더 강하다. 그러나 진리는 가장 강하다.”(마르틴 루터) 왜 진리가 가장 강하다고 했을까요? 재물, 권력, 인간 모두는 유한하고 가변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으나 진리는 불가변성이며, 영원의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만들어낸 사상, 철학, 이념, 주의(ism)도 모두 변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물은 언젠가는 사라지지만 진정 하나님의 말씀은 끝까지 존재합니다.” 결국 낮은 이 세상의 가변성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가변성은 영원성으로 변해야 합니다. 절망의 실체를 모르는 사람은 소망의 소중한 가치를 알 수 없습니다. 불안을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평안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가을의 풍요로움을 잘 아는 사람은 여름에 땀흘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의 허무함을 진정으로 아는 사람은 저 세상의 영원함을 바로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푯대 삼고 사는 인생과 비진리에 조정당하며 사는 인생의 차이는 큽니다. 낮은 곳의 가변성이 높은 곳의 영원성으로 변해야 된다는 필요성을 어거스틴은 절감했다합니다. 그러나 가변성이 영원성으로 변화되는 과정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변성의 세상이 영원성으로 고쳐지길 간절히 원하시는 분이, 바로 이 세상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오염되어 썩어져 가고, 변질되어 악취 나는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거듭나야 합니다. 또한 거듭난 그리스도인을 통해서 이 세상은 새롭게 변화되어야 합니다.
자연을 지배하며 정복하며 살 게 됩니다. 기적의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한 나그네가 프랑스 접경 알프스산맥을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나그네는 황량하고 메마른 불모지를 보며 탄식했습니다. '신의 저주를 받은 땅이로군.' 그곳은 풀 한포기 없는 죽은 땅이었습니다. 나그네는 광야에서 등이 굽은 노인을 만났습니다. 노인은 도토리가 가득 담긴 가방에서 도토리를 꺼내 쇠지팡이로 땅에 구멍을 낸 후 도토리를 심고 있었습니다. 나그네가 노인에게 다가가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노인이 대답했습니다. '내가 심은 도토리가 싹이 나면 이곳은 아름다운 숲으로 변할 것입니다.' 나그네는 노인에게 무모한 일을 그치라고 충고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25년 후, 우연히 그곳을 방문한 나그네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곳은 울창한 숲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새들의 노래와 꽃의 향기가 가득한 축복의 땅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의 사랑과 희생이 황무지를 축복의 땅으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을 때 지배하며 다스리며 사는 사명을 감당하게 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시니라. 얼마나 분명한 말씀입니까. 이 말씀 바로 믿고 함께하는 모두가 됩시다.
하나님은……
박경수목사 / 창 1:1
목적: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모습을 알자.
하나님이 누구신지 아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의 첫 번째 의무이다. 자식이 아버지를 알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당연한 일인가? 아버지를 모르기 때문에 불효자가 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과 무관한 사람이다.
세상의 모든 지식을 갖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에 대해 완전히 알 수는 없다. 안다고 말하는 것은 교만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것을 토대로 최선을 다해 알아 나가는 모습은 꼭 필요하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창 1:1). 네 글자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태초” “하나님” “천지” “창조”. 그런데 정말 아는 것일까?
“태초”는 언제일까? 우주가 생긴 것은 언제일까? 몇 백만 년 전? 몇 천만 년 전? 아니면 몇 천억 년 전? 과학만능 시대라고 하지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모른다”이다. “태초”가 언제인지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다.
“하나님”은 누구실까? 하나님을 완전히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다. 안다는 자체가 불가능하다. 단지 하나님께서 자기를 보여주신 모습에 한해서만 알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조차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언제나 겸손하게 무릎을 꿇으셨다. 그런데 어떻게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을 완전히 알 수 있겠는가? 시작부터 불가능하다.
“천지”는 얼마나 클까? 최신 과학 설비를 동원하여 인간이 관측할 수 있는 가장 먼 별은 200억 광년 거리에 있는 별이다. 200억 광년의 거리란, 1초에 30km를 날아갈 수 있는 빛이 200억 년을 단 한순간도 쉬지 않고 달려서야 이를 수 있는 거리이다. 이것은 인간의 과학에 의해 확인된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천지’의 전체인가? 아니다. 이것은 ‘천지’ 중 아주 일부분에 속할 뿐이다. 그런데 어떻게 감히 누가 ‘천지’를 안다고 하겠는가?
“창조”는 누가 알까? 누가 ‘창조’를 알아 그 능력을 행할 수 있을까? 내 몸은 내 것이다. 그것은 맞다. 내 머리카락도 내 것이다. 그렇다면 내 마음대로 흰색을 검은색으로 바꿀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내 키를 내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인공심장을 만들었다며 자랑했지만 결국 17년 만에 합병증으로 죽고 말았다. 무엇이 창조의 능력을 보일 수 있을까? 사람은 ‘창조’의 비밀을 알 수도 없고, 행할 수도 없다.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이 창 1:1의 말씀이다. 이 말씀은 이해의 말씀이 아니라 결국 믿음의 대상일 뿐이다. 우리가 이 구절을 믿게 되면 하나님을 창조주로 고백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렇다면 인간은 절대로 우연히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인간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하나님이시다.
S병원에서 명성을 떨치던 젊은 의사는 우연한 기회에 검진을 받았다가 그 자신이 암환자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도 말기였다. 남의 병을 고쳐주며 온갖 명성과 부를 누리던 사람이, 자기 몸속에 퍼지는 암세포를 까맣게 몰랐다. 동료들이 수술을 시도했지만, 개복 후 다시 덮을 수밖에 없었다. 너무 늦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로부터 몇 주일 후 그는 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인간은 무력하다.
창 1:1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은 아주 분명하다. 성경이란 “피조물에 대한 창조주의 사용 설명서”이다. 이 세상 모든 제품에는 반드시 사용 설명서가 첨부되어 있다. 제조자가 그 제품에 대하여 확실한 설명을 하고 있는 책이다. 고가 제품일수록 설명서는 자세하다.
인생이 값지면 값질수록 사용설명서를 잘 읽어야만 한다. 바로 성경이다. 그래야만 고장 나지 않고 값지게, 그리고 영원히 사용할 수 있다.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창 1:27). 하나님께서는 남자일까, 여자일까? 사람들에게 가장 궁금증을 자아내는 부분이다. 간단하다.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따로 창조하셨음은 하나님의 성품을 각각 남자와 여자에게 나눠주셨다는 뜻이다. 남자만도 아니고, 여자만도 아니라는 말이다. 즉, 하나님께는 부성(父性)과 모성(母性)이 모두 다 있다.
부성이란 강력함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홍해를 단번에 가르셔서 이스라엘을 건너게 하셨다. 이스라엘을 침공한 앗수르 산헤립의 군대를 일순간에 진멸하셨다. 강력한 부성을 가지신 분이시다. 그러나 강한 것은 섬세하지 못하다. 강함은 반드시 부드러움과 섬세함이 있을 때 완전해진다. 하나님께는 이 두 가지가 모두 다 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신발을 해지지 않도록, 옷이 낡지 않도록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그뿐인가?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만나와 메추라기로 필요한 모든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베풀어 주셨다. 아이의 표정만 보아도, 울음소리만 들어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는 것은 어머니의 마음이다. 철길에서 노는 아이를 향해 기차가 덮쳐들 때, 그 죽음의 자리로 뛰어들어 아이를 살려내고 대신 죽는 사람은 오직 어머니밖에 없다. 한없이 부드럽고 포근한 마음, 모성의 마음이 하나님께 있다.
미국에 입양을 간 한국 청년이 고국에 돌아왔다. 원망을 많이 했다. 세상에 자기 자식을 버리는 엄마가 어디 있느냐고. 미국의 양부모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한국 청년을 어느 초라한 묘지로 인도했다. 그리고 말문을 열었다. 한국전쟁 참전 중, 눈보라 치는 날 자기 발밑에 무언가가 걸리더란다. 혹시나 싶어 눈을 헤쳤더니 한 여인이 갓난이를 끌어안고 있더라는 것이다. 더 놀란 이유는 어머니가 발가벗은 상태로 자기 옷을 전부 벗어 아기를 둘러싸고, 온 몸으로 껴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홀로 내버려졌던 무덤 앞에 서서 아들은 울면서 자기 옷을 벗어 무덤 위를 덮었다. 이제라도 어머니의 몸을 자기 옷으로 감싸겠다고.
이것이 어머니의 마음이다. 아버지의 마음은 다르다. 추워서 운다고 하면 아버지는 대뜸 소리칠 것이다. 사내가 그까짓 거 때문에 우느냐고 말이다. 아버지는 내가 강하게 일어서기를 바라고, 어머니는 나 때문에 울면서 죽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으신다.
아버지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드리기 위해 직접 만든 아들이 있었다. 선물은 몇 주에 걸쳐서 완성되었다. 만들었다는 흥분 때문에, 오늘 드린다는 흥분 때문에 아들은 얌전히 아버지가 오시는 것을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뛰어가기 시작했는데,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코가 깨졌고, 선물은 부서졌다. 아들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한 채 엉엉 울었다.
아버지가 등을 두들기며 말씀하신다. “얘야, 괜찮아. 별일 아니니 걱정 마.” 소년의 눈물은 그치지 않는다. 어머니가 오시며 말씀하신다. “얘야, 정말 큰일이구나. 어쩌면 좋니? 네가 그토록 열심히 만들었던 선물이 산산이 깨어졌으니…….” 소년의 마음을 이해한 것은 어머니였다. “얘야, 나는 네가 지금부터라도 다시 새롭게 시작했으면 좋겠다. 우리가 이 깨어진 조각들을 모아다가 집에 가져가서 다시 만들어보면 어떻겠니?”
어머니의 섬세한 사랑과 배려 속에서 아들은 힘을 얻는다. 깨어진 조각들이지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얻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등을 한 번 두들기며 괜찮다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깨어진 조각들을 붙잡고 다시, 같이 시작하자고 말씀하신다. 어머니의 마음이 있는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하나님이시다.
영화는 3분 이내에 승패가 갈린다. 3분이 되도록 관객의 눈을 끌지 못한 영화는 외면당한다. 그 이상 아무런 이유도 없이 기다릴 관객은 없다. 첫 번째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뒤이어 나오는 것들의 성격을 규정짓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후 첫 번째 하신 일이 무엇이셨을까? 사람을 축복하는 일이셨다. 며칠 혹은 몇 달이 지나서가 아니었다. 사람을 창조하신 바로 그 날, 바로 그 날 사람들에게 복을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해서 복을 주시기 원하시는 분임을 증거이다.
‘복’이란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After Service”이다. 값비싼 물건일수록 애프터서비스는 확실하다. 처음 운전한 차는 기아의 프라이드였다. 이 차를 타면 살벌했다. 운행 중에 시동이 꺼지기 때문에 늘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시동을 다시 거는 방법이 너무 웃겼다. 보닛을 열고 엔진에 연결된 잭을 뺐다가 다시 연결하면 끝이다. 그 간단한 것을 정비소에서 어떻게 처치할 수가 없어서 늘 그러고 다녔다. 그 작은 잭 하나가 흉기 중의 흉기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애프터서비스가 나쁘면 돌아보지를 않는다. 피조물인 인간은,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애프터서비스 없이는 결코 사람답게 존재할 수가 없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먼저 받음으로 비로소 사람이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하나님은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그들을 창조하시던 날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고 하셨다.”(창 5:2).
어리석은 사람이 있다. 물건을 팔기 위해서 덤으로 껴주는 것, 아니면 애프터서비스 때문에 사야 할 것을 사지 못하고 엉뚱한 것을 사는 사람 말이다. 덤이나 애프터서비스는 물건을 팔기 위한 상술에 불과하다. 이것들이 목적이 된다면 판매한 자동차는 더 이상 자동차가 아니다. 자동차보다 절대로 덤이나 애프터서비스가 중요해선 안 된다.
피조물인 인간의 목적은 언제나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 목적이다. 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한다면 그것은 덤을 얻기 위해 자동차를 사는 사람과 똑같다. 어리석다. 복 자체가 그에게는 하나님일 뿐이다. 우상을 섬긴다는 말이다. 우상은 인간을 철저하게 파괴하는 흉기이다. 사람은 복이 아닌 하나님을 사랑해야만 한다.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똑똑히 알고 있거라. 너의 자손이 다른 나라에서 나그네살이를 하다가, 마침내 종이 되어서, 사백 년 동안 괴로움을 받을 것이다.”(창 15:12).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서 살 사람들이다. 단, 조건이 있다. 그 땅을 축복으로 얻기 전에 반드시 훈련을, 고난을 거쳐야만 한다.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나를 선택하셨다. 축복을 누리라고. 그리고 축복을 누릴 수 있는 훈련을 받으라고.
우리 생각에는 단순하다. 하나님께서 복 주시려고 작정하셨으면 좋은 집에서, 푹신한 침대에서, 온갖 좋은 것들을 먹으며 편안하게 지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나님의 생각은 전혀 다르다.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생기기도 전부터 벌써 훈련과목을 다 정해놓으셨다. 그것은 감당하기 힘든 ‘노예생활’이라는 과목이었다. 하나님께서는 훈련을 거친 자만 복을 누리도록 원칙을 정해 놓으셨다.
사병보다도 장교가 될 사람은 당연히 훈련량이 많다. 사병보다 훈련을 적게 받은 장교는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다. 육사에서 한 명의 장교를 훈련시키기 위해서는 약 3억 원의 비용이 든다. 그 돈이 아까울까? 아깝지 않다. 한 명의 장교가 제대로 훈련을 받으면 그 한 명의 장교로 인해 이 땅이 든든해질 수 있다. 수십 수백 명의 사병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
제대로 훈련 받은 자만이 오직 강한 자가 되고, 지도자가 될 수 있다.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타고 났다 하더라도 훈련 없이 발휘되는 능력은 단 하나도 없다. 정상을 올라가는 데에 왕도가 있을 수 있는가? 없다. 훈련만이 비결이다. 훈련 받지 않은 사람이 올림픽에서 메달 따는 것이 가능할까? 절대로 없다.
유대인 회사에 취직한 사람이 있었다. 새벽 일찍 출근하면 밤 12시가 넘어서까지 일을 시킨다. 게다가 휴일도 주지 않는다. 다른 회사와 비교해보면 자기가 하는 일을 보통 3∼4명이 나누어서 일을 맡는다.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어 참지 못하고 회사 사장을 만나 따졌다. 보조 직원을 뽑든지, 아니면 사표를 받아달라는 것이었다. 사장의 대답은 의외였다. “나는 당신을 믿고 고급 훈련을 시키는 중이다. 따라오라.” 그리고 정말 1년 후 보조하는 사람 3명과 함께 특별한 일을 맡기는 것이다.
군대에 가게 되면 제일 힘든 훈련이 두 가지가 있는데, 유격 훈련과 행군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늘 같이 한다. 유격장에 가게 되면 사람 취급을 전혀 받지 못한다. 마치 개나 돼지처럼 천한 동물 취급을 당한다. 빨간 모자를 쓰고 있는 유격 조교 얼굴 보는 것은 너무 싫다. 그러나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가 없다. 어쩔 수 없이 빨간 모자를 쓰고 있는 유격 조교의 손에 의해 이끌림 받아 다음 코스로 이동을 하기 때문이다.
유격 조교의 얼굴을 피할 방법이 있을까? 딱 한 가지이다. 유격 훈련이 끝나면 두 번 다시 얼굴 볼 일이 없다. 유격 훈련을 받고 있는 동안에는 빨간 모자의 유격 조교 얼굴을 계속 보아야만 한다. 장소를 옮겨도, 시간이 바뀌어도 빨간 유격 조교 얼굴을 계속 보아야만 한다. 그러나 유격 훈련이 끝나면 그들의 얼굴은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된다. 볼 필요가 없다. 저절로 내 눈 앞에서 사라진다. 훈련이 끝나는 동시에 나는 더 강한 군인이 되어 있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훈련, 광야에서의 40년 시간을 거쳤다. 다윗도 사울의 칼날을 피해, 때로는 미친 시늉까지 하며 특별 훈련을 받았다. 사병 훈련이 아닌 장교 훈련이다. 아니, 한 나라를 이끄는 지도자로서의 훈련이다. 내가 받고 있는 훈련은 사병 훈련인가, 지도자 훈련인가? 기쁨으로 그 훈련을 받고 있는가?
한 가지 묻자. 내가 하나님의 자녀 맞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의 훈련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만약 하나님의 훈련을 당해보지 않았다면, 나는 설익은 하나님의 자녀이다. 절대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가 없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시련의 기간을 보내고 있는가? 축하한다. 하나님의 지도자 학교에 입학한 증거이다. 시련을 피할 필요가 없다. 이겨야 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아브라함처럼, 모세처럼, 다윗처럼 세우시려고 하는 기회이다.
편안한 삶을 살기 위해서 기도하면 안 된다. 강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살기 위해서 침을 질질 흘리며 미친 시늉을 해보았는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견딜 수 없는 상황을 만난 다윗이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다윗은 하나님을 찬양한다. 지금 이 순간 하나님께서 나를 강하게 훈련시키고 계심을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다윗의 믿음은 지금도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이스라엘 국기에 다윗의 별이 그려질 정도이다. 시공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이 존경하는 일인자가 되었다.
하나님을 아는가? 하나님을 경험하였는가?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있는가?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
김남준목사(열린교회) / 창 1:1
I. 본문해설
창세기 1장 1절은 구약 성경의 시작이고, 성경 계시 전체의 시작이며, 이 세계의 시초와 인류 역사의 시작이다. 이 위대한 선언은,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과 이 세계가 그분에 의해 창조되었고, 그분의 뜻을 따라 창조되어 운행되어진다는 세 가지 사실을 알려준다.
II. 하나님은 어떤 존재이신가
A. 하나님에 관한 두 질문
하나님에 관한 두 질문이 있다. 첫 번째, ‘하나님은 무엇이냐’는 질문으로, 어떤 존재이신지를 묻고 있다. 답은 초월적인 타자성이다. 하나님은 만물보다 지극히 초월적이시고 위대하시며 지극한 위엄과 영광, 탁월하심이 인간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과 비교될 수 없는 존재이시다. 두 번째는 ‘하나님은 누구인가’ 하는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묻는 질문이고, 피조물들과의 내재적인 관계성을 묻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물질세계 속에 섞일 수 없는 분이시지만 이 세계와 관계를 맺고, 특히 인간과 관계 맺는 속에서 어떤 성품을 가진 존재이신지를 보여주신다. 비참한 자에게는 긍휼하신 성품을, 악을 행하고 돌이키지 않는 자에게는 정의로운 성품을, 유한한 존재인 인간에게는 영원하신 성품을 보여주심과 같이 사물이 처한 상태에 따라 다양한 속성으로 나타나신다.
B. 거룩하신 하나님
성경은 이와 같은 두 질문을 통합해,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제시한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존재적인 초월성과 도덕적인 완전성이다. 존재적인 초월성 앞에 서게 될 때 인간은 티끌에 불과한 아주 가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두려움 속에 주 앞에 엎드리고, 하나님의 도덕적인 완전성을 발견할 때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지를 깨달아 회개하고 용서를 받으며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 떨리는 두려움과 이끌리는 사랑으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그것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아는 백성들의 모습이다.
III. 드넓은 우주와 하나님
A. 우주의 크기를 생각함
과학자들에 의하면 우주 이 끝에서 저 끝까지의 거리가 약 150억 광년 정도라고 한다. 1광년은 빛이 1년을 달려간 거리이고, 달까지 걸리는 시간은 1.2초, 1년을 빛이 달려갔을 때의 총 거리는 10조km이다. 이런 빛이 150억년을 달려가야 할 거리이니 계산하면 1500억조km 거리인데,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머릿속에서 상상하겠는가?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지구는 태양계에 속해있고, 태양계는 우리 은하계에 속해 있으며, 우리 은하계는 약 천억 내지 이천억 개의 항성들로 이루어져 있다. 칼 세이건에 의하면 행성까지 포함해 약 4조개의 별들로 이루어진 집단이 우리 은하계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누구인가? 어마어마한 우주의 수천 억 개 은하 중 하나, 그 은하 중 수많은 성단 중 하나, 그 수많은 성단 중 태양계 하나, 그 태양계 중에서도 수백 개 별들 가운데 세 번째 지구, 그것도 아시아, 그 중 토끼만한 나라, 그것도 가운데 두 토막 나서 남쪽, 그 남쪽에서도 평촌 변두리의 한 곳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다. 이것은 또한 공간에 대한 하나님의 무한한 세계에 대한 사유를 통해, 시간과 영원의 세계로 우리를 이끈다. 하루살이는 내일의 의미를 모르고, 10년을 애벌레로 준비했다 한 달 동안만 사는 매미의 일생은 한 달이다. 인간이 오래 산다고 해봐야 100세, 좀 더 양보해 110세 쯤 된다 하더라도, 하루살이로 보면 24시간 20분쯤 산 것이고, 매미로 본다면 30.1일 산 셈이다. 이것이 억겁을 흐르는 이 무한한 우주의 공간과 침묵하는 시간 속에서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주는가? 우주의 시간의 흐름을 기준해 보면 우리가 100년을 살다 죽는 것과 입속 세균을 한 모금의 가글로 토해 놓을 때 죽는 그 세균의 수명의 길이와 다를 바가 없다.
B. 지성의 한계를 생각함
인간 지성의 한계 때문에 많은 인간들은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이 모든 세계가 그분으로부터 창조된 것을 잘 모른다. 인간의 지성은 이 세계에 익숙해진 생각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랑을 찾아보겠다고 배를 갈라 장기를 들추지는 않는다. 사랑은 콩팥이나 쓸개, 간이나 허파처럼 그런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신과 물질의 세계는 밀접한 연관이 있지만 물질을 찾는 방법으로 정신을 찾을 수 없다. 이 세상에 물건을 찾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은 그 행위 자체가 하나님께 대한 중대한 모독이다.
IV. 가장 큰 의무: 하나님을 앎
우리의 가장 큰 의무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우리 일생의 회개해야 할 가장 큰 잘못은 하나님 알기를 게을리 한 태만이다. 오늘날과 같은 복음의 때, 어디든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접촉할 수 있고, 교회생활을 하면서 진리의 책들과 들을 수 있는 말씀이 있고, 형제들로부터 진리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이곳에서 우리는 핑계 댈 수 없다. 하나님께 대한 무지를 고집한다면, 스스로 하나님 알기를 거절하고 어둠속에 살기로 선택한 결과이다.
V. 적용과 결론
우리는 땅에 코 박고 매일매일 문제에 시달려 살아가지만, 우리가 이 세상을 마름하고 무한한 우주 공간속에 한 티끌이 되어 사라질 그때에도 그것이 의미 있는 고민이고 갈등일까? 하나님은 인간을 순간을 살아도 영원에 잇대어 살 수 있는 존재로 창조하셨다.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문제를 문제로 느끼는 이유는 영원한 세계에 대한 무관심과 자기만을 위한 이기심에서 생겨난다. 이 땅은 우리에게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지만 궁극적인 해답은 하나님께 있고 영원한 세계에 있다.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과 맺는 관계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자리에서 주님을 섬기며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시 생각하는 창조신앙
창 1장 1~5절 / 인명진목사
한국교회의 현실에서 지식인들이 깊은 신앙심을 가지기가 상당히 힘이 듭니다. 지성과 영성의 동행을 쉽게 허락하지 않습니다. 특히 과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더욱 더 그렇습니다. 절대가치로 여기는 성경의 첫 장을 열자마자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시니라”로 시작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따라서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시고, 우리는 그분의 피조물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우주에는 코스모스라 불리는 조화로운 질서가 있습니다. 낮이 되고, 밤이 되고, 또 밤이 낮으로 변합니다. 아주 규칙적입니다. 찬송가 가사에 있듯이 해지고 황혼 깃들 때 동편에 달이 떠오릅니다. 우리가 달이 떠오르는 방향과 시간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이 우주가 정확하게 움직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정확한 질서를 따라 우주가 돌아가고 있다는 것은 틀림없이 정교한 계획을 가진 존재가 있다는 것을 믿게 만들어줍니다. 이것이 바로 창조론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아주 소중한 기독교 진리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문제는 창조론을 어떤 식으로 믿느냐는 것입니다. 보수적인 한국교회에서는 창세기 1장을 마치 사진사가 사진 찍듯이 촬영해 놓은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한순간에 믿음이 없는 사람으로 간주하고, 성경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으로 취급합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신앙과 과학, 신앙과 지식이 동행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의 지식인 성도들이 택한 길이 신앙 따로, 지식 따로의 길입니다.
이런 한국교회 현실에 반기를 들고 나선 학자가 한 명이 나타났습니다. 서울대에 제직하고 있는 장대익 교수입니다. 이분은 원래 독실한 기독교인이었고, 보수적인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시시하게 예수 믿은 것이 아니라 한국복음주의를 대표하던 "복음과 상황"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진화론이 과학이 아니라면 과학은 없다.”는 글을 전격적으로 발표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믿는 창조론은 비과학적 추론이며, 본인은 과학자로서 진화론을 과학적으로 믿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을 버리겠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것입니다.
우리나라 과학계를 대표하는 카이스트와 서울대 출신 과학자, 그것도 복음주의 신앙을 가지고 있던 분의 전격적인 전향은 저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한국교회가 한 명의 인재를 잃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저 고민은 장대익 교수 한 사람의 고민이 아니라 과학이 인간의 생각까지 지배하는 세상 속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고민일 것입니다.
오늘은 매월 첫째 주 세대통합예배로 드리면서 유치부, 유년부, 초등부, 청소년부 아이들이 어른들과 함께 예배하고 말씀도 듣습니다. 이들은 학교에서는 진화론을 배울 것이고,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창조를 신앙으로 고백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 적잖은 도전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과학이 보이는 세계를 지배하는 세계 속에 살면서 진화론과 창조론의 불편한 동거를 하고 있습니다.
장대익 교수가 말한 창조론은 비과학적 추론이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을 버리겠다는 주장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은 과학과 전혀 반대가 되는 우매한 집단의 종교가 됩니다. 그분의 주장이 정확하다면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창세기 1장은 비과학적 내용이므로 폐기되어야 할 내용입니다. 얼마 전에도 장대익 교수는 한 대담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왜 내가 기독교라는 끈을 놓게 되었는지부터 설명할 필요가 있는 듯합니다. 나는 10여 년 동안 진화론과 과학철학을 업으로 공부해 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과학과 신앙 사이를 오고 갔습니다. 유신론이자 진화론자로서 지적 분열을 느끼지 않으며 갈 수 있는 길을 모색해 왔습니다. 나는 신앙의 테두리 안에서 모든 것을 일관되게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할수록 입고 있는 신앙의 옷은 점점 누더기가 될 뿐이었습니다. 변칙 사례가 너무 많아서 핵심을 바꾸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모든 걸 신앙 안에서 설명하려는 기독교의 사고방식을 버리게 되었고, 유신론적 진화론, 불가지론을 거쳐, 지금은 진화론적 무신론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 분의 긴 논지의 핵심은 성경 말씀이 과학적 진리에 위배되므로 자신은 기독교 신앙을 공개적으로 버리고, 진화론적 무신론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 분은 학자적 양심을 속이지 않고 그대로 표현했는지도 모릅니다. 창조론과 진화론, 종교와 과학, 신앙과 지식 이 둘 사이의 평행선은 마치 철도의 궤도처럼 나란히 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한 줄 철도 창조론만이 유일한 진리라는 붙들고 있고, 진화론을 받아들이면 창조신앙을 거부하는 사람들이라고 정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과학의 도전 앞에서 교회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침묵은 바람직한 해결 방법이 아닙니다. 진화론은 현대 과학의 철학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과학 분야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가 진화론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학 만능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자동차, 컴퓨터, 핸드폰, 가전제품들 모두가 과학의 힘을 빌려온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 과학의 힘이 인간의 사고마저 지배하여 모든 것을 물질 중심으로 보게 만들었습니다. 이제는 과학이 우리의 신앙마저 판단하고 있습니다. 진화론에서 신앙도 구석기 시대에 무지몽매한 인간들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치부해 버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학과 지식의 이름으로 신앙을 부정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창조주 하나님이 이 시대에 초라한 모습으로 뒷전으로 밀려나 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인간마저 인간이 만든 기계에 밀려 인간의 소중한 가치를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어쩌면 지난 번 이세돌 9단과 인공지능 알파고와의 대결의 결과 4대1은 과학과 인간의 관계를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지금 흔들리는 터전 위에 서 있습니다.
과학만능시대에 인간의 근거가 흔들리는 이 사회 속에서 우리는 창조신앙을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진화론이 과학적 사실이기 때문에, 신앙을 버리는 행위가 정당하다면 교회는 어떤 해답을 제시해야 할까요? 설교자가 이 문제에 대해 침묵하고 있었던 것은 그만큼 뜨거운 감자이기 때문입니다. 성서적 해답을 제시하면 보수적인 교회와 과학계 양쪽에서 욕을 먹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설교로서 금단의 열매를 들고 강단에 서 있는 심정입니다.
먼저 창세기는, 성경은 우주의 기원을 말하는 과학책이 아니라 과학자를 위한 복음, 현대인을 위한 복음입니다. 복음을 과학으로 여기는 우매한 일이 세상에 어디에 있습니까? 이것은 비교의 감이 되지 않는 것을 비교의 대상으로 올려놓은 것입니다.
창조론과 진화론, 과학과 신앙은 솜사탕과 솜의 관계와 비슷합니다. 솜사탕과 솜은 생긴 것이 비슷하고 이름도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의미와 용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생긴 것이 비슷하다고 솜사탕을 솜처럼 쓰거나, 솜을 솜사탕처럼 먹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또한 솜사탕으로 이불을 만들거나 소독용 탈지면으로 쓰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연인들이 놀이동산에서 데이트할 때 함께 나누어 먹는 것이 솜사탕이고, 이불을 만들거나 상처를 소독할 때 쓰는 것이 솜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창조 이야기는 우주 기원에 대한 과학자들의 기록이나 연구 논문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과학적인 방법으로 접근해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선언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창세기 말씀은 과학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과학자를 위한 복음입니다. 과학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주가 탄생했던 아득했던 순간에 대한 우주기원설이 아니라 지금 일어나고 있는 우리의 야기입니다. 창세기는 까마득한 옛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지금 여기를 위한 여기입니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의 창조가 이루어지기 전 상태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를 운행하시니라.”혼돈하고 공허한 상태!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짙은 어둠의 상태!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창세기를 말씀을 최초로 듣는 독자의 현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창세기 1장의 최초의 독자는 누구였을까요? 이 말씀을 기록한 저자는 누구를 대상으로, 어떤 사람을 염두에 두고 이 말씀을 기록했을까요? 창세기를 처음 읽었던 사람들은 바벨론으로 끌려간 유대인 전쟁포로들이었습니다. 나라는 망하고 성전은 무너지고 남의 나라 땅에서 전쟁 포로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어’ 하는 절망의 슬로건으로 미래를 도배해 버린 사람입니다.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땅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성전과 나라의 주권을 송두리째 잃어버리고 불안과 염려 속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을 더욱 낙담시킨 것은 자기 나라를 망하게 하고,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시킨 바벨론은 승승장구하며 세계를 점령해 나가고 있습니다.
바벨론 포로로 잡혀 온 사람들은 왕족, 제사장, 지식인들이었습니다. 자기 나라에서는 괜찮은 지위에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전쟁포로들이 남의 나라 땅에서 가질 수 있는 직업이 무엇이었겠습니까? 때로는 강제노동에 동원되기도 하고, 호구지책으로 노동으로 연명했을 것입니다. 제국의 톱니바퀴에 끼어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돌아가는 인생, 죽어야 이 악순환에 해방될 수 있는 상태, 그래서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절망의 상태, 이것이 바벨론으로 끌려간 전쟁포로들의 현실이었습니다.
창세기는 바로 이런 사람들을 위해 쓰였습니다. 혼돈과 어둠으로 인해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쓰인 것이 창세기 1장입니다. 바로 이 사람들에게 “빛이 있으라!”선포된 것입니다. 창세기는 지나가던 사진사가 우연히 하나님이 창조하시는 장면을 카메라에 담아놓은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객관적인 사진 한 장이 아니라 우리의 사연과 눈물과 고백이 담겨 있는 인생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런 성경의 이야기를 자신은 진화론을 믿기 때문에 믿지 못한다고 말한다면 너무도 격에 맞지 않는 접근입니다. 인생의 이야기가 과학으로 해부가 됩니까? 신앙고백이 과학적으로 진단받아서 옳다고 증명되어야 진리가 되는 것입니까? 솜사탕과 솜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바벨론 전쟁포로에게만 들려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만약 이 말씀이 유대인의 창조설화라면 우리는 창세기를 읽는 대신에 단군신화를 읽어야 할 것입니다. 왜 우리가 남의 나라 사람들의 창조설화를 읽고 믿어야 합니까? 빛이 있으라 하신 창세기의 말씀은 옛날 옛적에 살았던 바벨론 전쟁포로에게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내 삶은 보잘 것 없다고 의기소침해 있는 이들에게, 암담한 현실 가운데서 내일을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이들에게, 도저히 헤어나올 수 없는 악순환의 늪에 빠져 있는 이들에게,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의 선포입니다. 생명과 빛으로의 초대입니다.
그렇다면 바벨론의 세계화 물결과 우상의 바다에 빠져있는 유대인들을 생존할 수 있도록 도와 준 사람은 누구입니까? 누가 이런 거센 도전 앞에서 하나님의 시각을 가지고 성서적 답변을 주었습니까? 단순하게 질문한다면 창세기 1장을 누가 기록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바로 제사장들입니다.
바벨론 포로로 왕족 귀족 제사장들을 잡아갔습니다. 약 10만 명 정도를 포로 끌고 갔습니다. 백성들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인물들과 지식인들을 모두 다 잡아간 것입니다. 그중에서 현실에서의 성공과 번영을 목표로 삼던 왕족과 귀족들은 바벨론의 가치관과 우상 앞에 대부분 동화 되었습니다.
그러나 제사장들의 눈은 달랐습니다. 저들의 눈은 당대를 지배했던 바벨론 문명의 눈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우리 이야기로 한다면 과학의 눈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혼돈과 어둠의 세계를 똑똑하게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영원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다른 눈으로 바벨론의 세계화와 우상숭배를 바라보았습니다. 바벨론 포로로 잡혀 왔던 제사장들이 했던 일은 이스라엘의 과거의 역사를 낭독하는 일이었습니다. 성서가 책으로 편집되지는 않았지만 파편과 두루마리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는 일이었습니다. 저들이 그렇게 한 이유는 바벨론의 세계화와 우상숭배 앞에서 하나님께서 제시하는 새 길을 찾으려 한 것입니다.
‘왜 이스라엘은 나라를 잃어버리고 전쟁포로로 잡혀와 고난을 당해야만 하는가? 왜 성전이 무너지고 나라가 망하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고 가만히 계셨는가? 바벨론 신 마르둑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보다 더 강하단 말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바벨론 포로로 잡혀 간 유대인들이 직면했던 심각한 신앙적 물음이었습니다.
오늘 창세기 1장은 이런 질문들에 대한 제사장들의 대답입니다. 창세기 1장은 선포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아직도 모든 것을 다스리고 계신다. 그분은 그 어떤 신보다 더 강하신 분이다. 바벨론의 신 마르둑보다 더 위대하신 신이다. 그분은 세계 최고의 제국 바벨론보다 더 강하신 분이다. 그분은 온 세상을 다스리신다. 세계는 그분의 것이다. 그분이 만드셨기 때문이다.” 창세기 1장은 밑바닥에 이런 신앙고백이 흐르고 있습니다.
이 창조신앙으로 포로생활을 다른 눈으로 보시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세상이 달라보였습니다. 절망 속에서 새로운 빛줄기를 보게 되었습니다. 전쟁포로로 쳇바퀴처럼 돌다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공허와 혼돈 속에서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시작이 보였습니다. 마침내 안식하신 하나님의 끝이 보였습니다. 진짜로 하나님이 열어 가실 새 세계가 보였습니다.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내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창세기는 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일곱째 되는 날 쉬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정말 말이 안 되는 표현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쉬실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자신들처럼 노예 생활하는 것도 아니고 막노동으로 육체의 피곤을 느끼실 분도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창조의 마지막 순간에 쉬셨다고 기록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모든 피조물들에게도, 우리에게도 마지막으로 안식할 때가 온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들에게 결국 마지막 순간은 다가오게 됩니다. 이것이 피조물의 한계입니다. 창조는 시작에 대한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마지막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생명이 창조되는 순간만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끝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마지막 누구에게나 닥치는 죽음을, 최후의 안식을 대비하라는 것입니다.
로마의 황제나 장군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면 개선문을 통하여 성대한 잔치가 벌어집니다. 아마 잔치 중에 가장 화려하고 풍성한 잔치가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자축하는 개선식일 것입니다. 열렬한 시민들의 환호에 도취되어 있는 황제와 장군 뒤를 따르는 제의를 맡은 사제가 귓속말로 속삭입니다. “메멘토 모리! 너의 죽음을 기억하라.” 시민들의 환호의 함성만 귓전에 들릴 때 사제는 다시 반복합니다. “메멘토 모리! 너의 죽음을 기억하라.”지금 전쟁에서 승리한 당신도 곧 죽게 될 운명이라는 것을 알라는 것이지요. 그러니 절제하라는 말이지요.
여러분, 영원히 살 것처럼, 전쟁에서 늘 승리할 것처럼 살지 마십시오. 피조물인 인간의 유한함을 인정하고 생각과 마음을 낮추어야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우리의 인생 전체를 맡겨야 합니다.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께 불안한 미래를 맡겨야 합니다. 그것이 피조물인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은 깊음 위에 있지만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를 운행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하십시오.
사랑하는 갈릴리 가족 여러분!
오늘 우리도 창조신앙을 다시 고백해야 합니다. 과학이 인간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기술과 물질이 인간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린다고 말입니다. 그러면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향해 “빛이 있으라!” 하시면서 조화와 질서를 회복시켜 줄 것입니다. 생명과 빛으로 다가오시는 하나님 앞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찬양하는 것 외에, 우리가 무엇을 더 할 수 있겠습니까? 창조주 하나님을 고백하여 어둠과 혼돈을 빛과 생명으로 바꾸시는 갈릴리 성도들 위에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