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익과 우익의 천년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이종찬 광복회장은 "정부가 근본적으로 태도를 바꾸지 않는 한 공식적인 광복절 행사에 안 나가겠다고 통보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에 있는 반역자들이 일본 우익과 내통해 오히려 전전 일본과 같이 가고 있다는 위기감이 들었다"고 했다. 이어 "독립기념관장을 포함한 국책기관의 일련의 인사사태는 이 정부가 1948년 건국절을 하자는 것"이라며 "이는 일본의 식민지배를 모두 정당화, 합법화해주는 일"이라고 했다.
이종찬의 정치적 성향은 어떠한가. 좌익들이 말하는 전두환 군사정권과 좌익 정당을 오고 간 인물이다.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정당 후보로 당선,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정당 후보로 당선,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정당 후보로 당선, 1992년 민자당 후보로 당선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새한국당 대선 후보 사퇴,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출마하여 낙선,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낙선을 한 바 있다. 2005년에는 탈당을 했다(나무위키 인용).
이후 이종찬은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 때에는 국민회의 대선기획본부장을 맡아 대선 전략을 총괄했고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된 후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위원장을 거쳐 안기부장에 임명되었고, 이후 김대중의 노벨 평화상 수상을 위한 홍보 기획을 하기도 했다. 국가정보원 재직 당시 언론문건 파문 당시 거짓말을 한 것이 드러나면서 국가정보원장 자리에서 경질되었다. 이후 19대 대선 때는 문재인 후보의 선대위에 고문으로 위촉되어 합류하였고, 2017년 12월 문재인 이 충칭의 임시정부 청사를 방문하였을 때 다른 독립운동가 후손들과 함께 동행하였으며 제20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윤석열 후보를 지지하는 시국선언에 참여했고 2023년 5월 25일, 광복회장에 당선되었다(나무위키 인용).
육사는 학교 내에 건립된 홍범도 등의 흉상을 이전하겠다고 밝히자 이종찬은 “홍범도 등 흉상 철거는 반역사적···이종섭 국방장관 퇴진하라”고 요구했고, 1948년 건국절 논란에는 임시정부 수립일을 건국일로 해야 한다고 주장을 하기도 했다. 이승만 기념관을 '괴물 기념관'이라고 비난을 했다. 더 나아가 "한국에 있는 반역자들이 일본 우익과 내통해 오히려 전전 일본과 같이 가고 있다는 위기감이 들었다"며 한국에 많은 친일파가 있는 것처럼 주장하고 있다.
앞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종찬은 우익과 좌익을 넘나들던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전두환 정권에 협력하고 우익 정당에서 4번의 국회의원을 지내더니 좌익 정당으로 이동하여 총선에 출마하였다. 좌익정권인 김대중 정권에서 안기부장(국정원장으로 변경)에 임명되고 문재인 대선 후보의 선대위 고문으로 위촉되어 활동하였고, 이번 대선에서는 윤석열 후보를 지지하는 시국선언에 참여하기도 했다. 2023년 광복회 회장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야말로 팔색조의 화려한 변화를 보여주었다.
먼저 자유시 참변에 대해 간략히 알아볼 필요가 있다. 1920년 만주에서 있었던 안산 전투,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 사상자가 발생하자 일본군은 대대적인 대일본 저항 독립군 부대 토벌에 들어갔다. 위협을 느낀 최진동·허욱 등의 총군부군대, 안무·정일무 등의 국민회군, 홍범도·이청천 등의 독립군과 김좌진·서일 등의 군정서군대, 노령지역의 의병대로는 이만군대·다반군대·이항군대·자유대대·독립단군대 등이 러시아 민주시로 집결을 했다. 총병력수는 3,000명 혹은 1,900여 명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1921년 2월 중순부터 6월 6일 사이에 자유시에 도착했다.
그 와중에 자유대대와 이항군 사이에 한인무력군통수권을 둘러싼 갈등이 일어났고 자유대대는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이 장악한 대한국민의회를 지지했고, 이항군은 상해파 고려공산당이 장악한 상해임시정부를 지지했으므로 결국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 간의 정면대결이 발생한 것이다. 즉 이항군을 이끌었던 박이리아는 군통수권장악을 위해 극동공화국 원동부(遠東部) 내의 한인부를 찾아가 이항군대는 자유대대로 편입되는 것을 거부하자 갈등이 발생하여 500여 명이 죽고 1,000여 명이 강제로 이주하여 강제노동을 하다가 죽게 된 사건이 만주시 참변이다. 이때 한인무력군대는 사실상 와해되었고 살아남은 일부는 볼세비키 군대에 편입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봉오동 전투에 대해 1920년 6월 22일 상하이 '독립신문'에서는 "적 사상병 12명. 아군의 손해는 미상하나 시체 24 그 외에도 상당한 사상자가 있는 것 같다"는 보도를 하고 있고, 6월 10일 간도국민회 제1남부지방회의 '호외'에서는 "적 전진부대 150명을 섬멸하고 아군 사망자는 근근이 3명"이라고 보도했다. 6월 13일 간도국민회 제2지방회의 '공보'에서는 "1. 적의 대대장, 중대장, 준사관 각기 1명. 병졸 49명이 즉사."라고 보도를 하고 있는데 적 사상병 12명 또는 50여 명의 일본군이 사살된 것으로 보이는데 상하이 '독립신문'의 보도가 더 신뢰가 가는 것으로 보인다. 봉오동 전투라는 것은 홍범도 등의 독립군 공로를 과장하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민주시 참변 당시 홍범도는 당시 어떤 행동을 하였을까. 1938년 무렵 직접 쓴 자서전 ‘홍범도 일지’가 있다. 일지에는 “1921년 동지달에 모쓰크와로 레닌동무게로 1921년 자유시에서 조선빨찌산을 어간에 뉴혈적 사변이 난데 대한 보고을 하려고 조선빨찌산대표로 갇다.” “그리고 레닌께서 저를 불러오라고 사단이 내려옴으로 제 레닌께 들어가서 뵈온 일도 있고 말씀에 대답한 일도 있다. 자유시 사변을 묻는데 몇 마디 대답한 일이 있었다.”라고 쓰고 있다. 레닌을 만나 홍범도는 레닌으로부터 금화와 권총을 선물받았고, 홍범도는 이 권총을 줄곧 차고 다녔으며 1923년 홍범도를 배신자로 몰아 암살을 시도하려는 감창수·김오남을 레닌이 준 권총으로 쏴 살해하였다고 한다(홍범도 장군과 자유시 참변 인용).
이와 같은 여러 사실을 보면, 민주시 참변의 중심적인 역할을 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이 홍범도라는 것을 알 수 있고, 볼세비키 공산당의 레닌을 찾아가서 민주시 참변을 보고 하였다는 것 ᅟᅵᆫ주시 참변으로 인하여 한인무력군대의 많은 독립군이 죽거나 러시아의 벌목장 등으로 가서 노동하다가 죽어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 놀라운 것은 독립군의 대다수가 공산당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상해파는 고려공산당이 장악한 상해임시정부를 지지했고, 자유대대는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이 장악한 대한국민의회를 지지했다는 것을 보면 한인무력군대, 상해임시정부의 성격을 어느 정도는 알 수 있는 대목이다(한인무력군대 중에는 일부의 민족주의자가 있었을 것으로는 예상된다).
앞으로 돌아가서 이종찬이 제기한 것들에 대해 간단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 육사에 건립된 홍범도의 흉상 철거 또는 이전과 둘째, 한국 내 반역자들이 일본 우익과 내통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육사에 건립된 홍범도의 흉상 철거 또는 이전에 대해서 독립단체나 이종찬이 반대를 하고 있다. 독립운동을 하였다는 사람들의 자손들은 그런 주장을 할 수도 있다. 일부에서 상해임시정부 내와 독립군 중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는 것을 이유로 육사에 건립된 홍범도 등의 흉상 철거에 찬성한다.
한국 내 반역자들이 일본 우익과 내통하고 있다고 하는 이종찬의 주장은 일본과 유대를 하고 북한의 무력침략 등에 대해 함께 해야 한다는 하는 국민도 다수 있다. 일본과 협력을 하는 것을 두고 반역자라니 일본 우익과 내통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국민도 있다. 프랑스는 독일의 침공을 받아 주권을 상실하였고 유대인은 독일에 의해 600만 명이 학살당하는 아픔을 겪은 국가들이다. 프랑스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독일에 부역한 반역자 5만 명 이상을 처형하였고 유대인은 독일과 원수로 지내기보다는 국가 수립을 하여 다시는 대학살이라는 슬픈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군사력을 강화하고 민족이 단합하고 있다.
조선 말기에 조선은 열강의 각축장이 되었고 왕권은 무기력하였으며 국민은 어리석었다. 그 결과 일본에 의해 국권을 상실했고 독립운동을 하던 자들은 하나가 되어 일본군에 저항하지 못하다가 독립운동을 하던 군대끼리 서로를 죽이는 참변을 겪고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한반도로 군대를 진입시키지도 못했다. 해방된 후에는 한국은 친일파를 처단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북한의 6.25 남침으로 300만 명 이상의 국민이 사상 되었고 천만 명의 이산가족이 발생했다. 휴전 후 북한 괴뢰군에 부역한 부역자, 전쟁 책임자를 제대로 처단하지 않았다. 그 결과 지금까지도 친일파 논쟁, 공산주의자 논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의 역사가 계속되는 이 논쟁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 좌익과 우익의 천년 전쟁이 끝나지 않은 이상 한국의 미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