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테하노 팝(라틴 리듬을 미국 팝에 녹여낸 장르)을 이끌 스타로 떠오르다 팬클럽 여회장에 의해 살해돼 스물셋에 요절한 셀레나 퀸타니야의 아버지이자 매니저였던 아브라함 퀸타니야가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고 미국 일간 로스앤젤레스(LA) 타임스가 13일(현지시간) 전했다.
고인의 아들 A. B. 퀸타니야 3세는 인스타그램 계정에 "오늘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무거운 마음으로 전한다"고 썼다. 사망 원인은 공개되지 않았다.
유명한 멕시코계 미국인 음악 가문의 가장으로서 그는 딸 셀레나의 경력 쌓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95년 딸이 비극적인 죽음을 맞자 그는 이미지, 이름, 초상권 등 그녀의 유산을 지키고 관리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셀레나 이 로스 디노스, 가족의 유산'이 지난달 17일 공개돼 이들 가족 밴드의 미공개 인터뷰 등을 통해 삶의 족적을 살펴볼 수 있다.
셀레나가 세상을 떠난 직후, 아브라함과 가족은 위기에 처한 아이들을 돕는 자선단체 셀레나 재단을 설립했다. 그는 딸에 관한 수많은 텔레비전 스페셜에 출연했다. 자신의 음반사 Q 프로덕션을 통해 신인 아티스트들을 계속 프로듀싱했다.
제니퍼 로페즈를 세계적인 스타로 만든 1997년 전기 영화 '셀레나'에 아브라함은 공동 프로듀서로 참여했다. 2020년 넷플릭스 미니시리즈 '셀레나 더 시리즈'에는 리카르도 차바라가 아브라함을 연기했다. 두 번째 시즌까지 나아갔다. 2021년 아브라함은 회고록 '아버지의 꿈, 우리 가족의 음악 여정'을 출간했다.
1939년 2월 22일 텍사스 코퍼스 크리스티에서 태어난 아브라함은 1956년 인종차별에 직면한 치카노 록 그룹 디노스(The Dinos)의 멤버로 음악 경력을 시작했다. 클럽 주인이 밴드의 활동 비용을 대기도 했다. 그만큼 멕시코계 청년들이 공연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반면 스페인어로 노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멕시코 동포들로부터 외면을 당했다.
아브라함의 답답함은 전기 영화 '셀레나'에서 자신을 연기한 배우 에드워드 제임스 올모스가 유명하게 만든 명언 "우리는 멕시코인보다 더 멕시코인이 돼야 하고, 미국인들보다 더 미국적이어야 한다. 정말 힘이 다 빠져!"를 만들어냈다.
그는 결국 1960년대 그룹과 결별하고 워싱턴주 타코마 공군 기지 복무 중 만난 마르첼라 사모라와 가정을 꾸렸다. A.B., 수제트, 셀레나 세 자녀가 태어났고 그는 자녀들의 스타 잠재력을 발견했다.
A.B.가 베이스, 수제트가 드럼, 셀레나가 부드러운 보컬로 힘을 합친 트리오는 가족 식당인 파파가요스에서 자주 공연했으나, 이 식당은 1981년 경기 침체 이후 문을 닫았다. 가족은 텍사스주 레이크 잭슨에 있던 집을 팔고 코퍼스 크리스티로 이사할 수밖에 없었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셀레나 이 로스 디노스는 거리 모퉁이, 가족 파티, 사교 행사에서 공연했다. 아버지가 밴드 매니저로 부임한 후, 로스 디노스는 1984년에 프레디 레코드와 계약을 맺었다.
셀레나는 남성 중심 장르에서 어린 시절부터 많은 회의적인 시선을 받았으며, 첫 레이블 대표인 프레디 마르티네즈도 그랬다. 이런 여건에도 로스 디노스는 테하노 음악계에서 꾸준히 활동하며 여러 레이블을 옮겨 다니다가 결국 매니 게라의 독립 레이블인 GP 프로덕션과 레코드 프로듀서 프로덕션에서 8장의 앨범을 발매했다. 여러 앨범을 발표한 셀레나는 이후 테하노 뮤직 어워드를 지배할 수 있었다. 1987년에는 올해의 여성 보컬리스트 타이틀을 수상했다.
셀레나는 결국 소니 뮤직 라틴의 전 대표였던 호세 베하르의 관심을 끌었고, 그는 셀레나의 주된 언어가 영어인데도 그녀의 크로스오버 매력을 보고 1989년 EMI 라틴(캐피탈 레코드)과 계약했다. 이로 인해 'Como la Flor'(꽃처럼), 'Amor Prohibido', 'Bidi Bidi Bom Bom', 그리고 사후에 발매된 발라드 'Dreaming of You' 등 다섯 장의 앨범에 대표적인 히트곡들을 담았다.
1995년 셀레나가 팬클럽의 회장을 지낸 욜란다 살디바르에게 살해된 후 딸의 이미지를 강력하게 지키는 인물이 됐고, 언론은 이를 선정적으로 보도했다.
셀레나의 죽음이 워낙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딸의 유산을 정당하게 지키려면 영화를조속히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셀레나'를 연출한 그레고리 나바는 올해 인터뷰에서 밝혔다. 그는 "영화감독으로서 진짜 진실된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다"면서 "난 가족과는 갈등이 없었는데 아버지와 갈등했다. 아버지가 그녀를 보호하려고만 들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긴장이 가장 높았을 때는 나바가 1992년에 결혼한 기타리스트 크리스 페레즈와의 도피 이야기를 다루기 시작했을 때였다.
나바는 아브라함이 "어린 소녀가 아버지의 말을 거역하는 것이 옳다고 화면에 내세울 수는 없다"고 말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녀가 옳다고 아는 일을 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게 더 중요하지 않나? 그리고 그녀가 크리스를 사랑하고 크리스도 그녀를 사랑한다는 걸 알기에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걸 말이죠?"
결국 아브라함은 마음을 돌렸다. "셀레나를 멋지게 보이게 하려면 내가 못 생겨 보여야 한다면, 그렇게 할 거야"라고 아브라함이 말했던 것을 나바는 기억해냈다. "그는 마음이 여렸다. 그는 마침내 그게 옳은 일임을 깨달았지만, 몇 시간이고 격렬한 토론이 필요했다."
하지만 큰 딸 수제트의 말은 조금 다르다. 1997년 전기 영화가 그녀의 눈에는 너무 이른 시기로 다가왔고, 일부는 아버지를 돈에 굶주리고 기회주의적이라고 여겼다는 것이다. 결국 그녀는 가족 안에서 서사를 통제하려는 압력이 있었다면서 그의 결정을 지지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털어놓았다.
나바도 동의했다. "아브라함은 그것을 빠르게 밀어붙이는 데 매우 현명했다, 셀레나는 우리 모두를 하나로 모았고, 그녀의 유산을 긍정적으로 확고히 했다. 그 영화 덕분에 모든 부정적인 감정이 사라졌다. 영화에서 그걸 보고 느낄 수 있다."
셀레나 퀸타니야 페레스는 1971년 4월 16일 텍사스 레이크 잭슨에서 태어나 1995년 3월 31일에 세상을 떠났다. 불과 24세 한창 나이에 세상을 등져 많은 충격을 줬고, 장례식에 수만 명이 운집해 비탄 속에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봤다. 계속 활동했더라면 라틴 문화와 미국 문화를 접목하는 데 더 많은 역할을 했을 것이었다.
셀레나를 살해한 요란다 살디바르는 텍사스주 샌안토니오에서 1960년 9월 19일 태어났다. 퀸타니야 가족과 가까워져 팬클럽 회장으로 활약하다 패셔니스타였던 셀레나의 의류 매장을 책임지게 됐다. 그런데 팬클럽 자금과 매장 수익을 횡령한다는 의심이 커졌고, 그 결과 살디바르와 가족이 충돌하는 일이 잦아졌다. 끝내 가족은 살디바르를 두 직책에서 쫓아냈고, 그녀는 화해하자고 셀레나를 쫓아다니기 시작했다.
어렵사리 두 사람은 비극적인 그 날, 코퍼스 크리스티의 한 호텔에서 마주 앉았으나 대화는 언쟁으로, 언쟁 끝에 격분한 살디바르가 셀레나의 등에 총을 쏘기에 이르렀다. 다친 몸으로 셀레나는 로비까지 나와 병원으로 후송됐지만 소생하지 못했다.
법원은 종신형을 선고하며 30년 후 가석방을 신청할 수 있는 기회를 줬는데 이제 그 시간이 돼 간다. 텍사스주 게이츠빌의 마운틴 뷰 교도소에서 복역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셀레나의 짧은 삶을 함께 한 열정적인 사랑의 주인공 크리스 페레스는 1990년 셀레나 이 로스 디노스에 기타리스트로 합류해 처음 셀레나를 만났다. 빼어난 연주 실력에 조용한 품성에 셀레나는 반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반대가 심할 것으로 예상돼 철저히 이를 숨겼다.
어느 날 결국은 둘이 함께 하겠다는 뜻을 밝히게 됐고 예상대로 아브라함의 반대가 극심했다. 결국 아브라함은 페레스를 해고했고, 딸은 그를 따라 나가 1992년 4월 2일 텍사스 누에보 라레도에서 서류 만으로 비밀 결혼식을 올렸다. 아브라함은 끝내 둘의 사랑을 받아들였고, 다시 페레스를 밴드에 합류시켰다. 둘은 자녀 문제를 상의했는데 셀레나는 더 큰 성공을 이룬 뒤에 가져도 늦지 않다는 뜻을 밝혔고, 페레스도 이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비극적인 그녀의 죽음 이후, 페레스는 한 동안 마음을 잡지 못했다가 다시 어렵게 음악 생활을 시작했다. 셀레나를 기리는 노래도 만들면서 써나간 자서전이 'To Selena, with Love'였고 2012년 출간했다. 그 뒤 다른 여성과 결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