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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잉글랜드 지방의 솔즈베리 평원에 있는 석기 시대의 원형 유적. 하지 무렵에 해가 뜨면 햇빛이 이 원형의 중심을 지나는지름을 형성함.영국 월트셔 솔즈베리 평원에 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윌트셔(Wiltshire)에 있는 스톤헨지(StoneHenge)와 에이브베리(Avebury)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거석군(megaliths) 중 하나이다. 두 곳의 유적에는 환상열석(環狀列石, stone circle)이 있으며, 환상(環狀)의 패턴을 두고 천문학적 의미에 대해 연구 중이다. 이 성스러운 장소와 인근의 신석기 유적지는 선사시대의 전례 없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세계유산인 스톤헨지와 에이브베리는 세계적으로 중요한 선사 시대 유적지이다. 이 유적지는 남부 브리튼의 초클랜드(chalkland) 두 지역에 있으며, 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의 의식·장례 관련 유적이 있다. 각 지역에서는 환상열석을 중심으로 헨지(henge)를 비롯한 다른 유적들을 볼 수 있다. 스톤헨지에는 애비뉴(Avenue, 종교적 의미가 있는 통로), 커서스(Cursus, 2개의 평행으로 뻗은 개천으로 둘려 싸인 땅), 더링턴 월(Durrington Walls, 석기시대 주거지역), 우드 헨지(Woodhenge, 스톤헨지와 유사한 나무로 만들어진 곳), 그리고 영국에서 가장 많은 흙무덤들이 밀집해 있다.
에이브베리에는 윈드밀 언덕(Windmill Hill), 웨스트 케넷 롱 배로(West Kennet Long Barrow), 생크추어리(Sanctuary), 실베리 힐(Silbury Hill), 웨스트 케넷(West Kennet), 백햄프턴 애비뉴(Beckhampton Avenues), 웨스트 케넷 팰리세이드 인클로저(West Kennet Palisaded Enclosures)와 중요 고분들이 있다.
윌트셔의 사르센 석(sarsen stone, 잉글랜드 중남부에 있는 사암)과 펨브로크(Pembroke)의 블루스톤(Bluestone)을 사용하여 만든 스톤헨지는 규모와 정교한 평면도, 세련된 건축 디자인, 돌들의 모양 등과 같은 독특함으로 인해 세계에서 가장 인상 깊은 선사 시대 거석 유적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또한 세계에서 가장 큰 선사시대 환형열석을 포함한 대규모 헨지가 있는 에이브베리와 유럽에서 가장 큰 선사시대 흙무덤인 실베리 힐은, 흙과 거석 건축의 걸작을 탄생시킨 탁월한 공학 기술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세계유산 안에는 정착지, 매장지, 그리고 흙과 돌로 된 거대한 건축물을 비롯한 선사시대 기념물과 유적들이 남아 있어 독특한 경관을 만들어내고 있다. 유적들의 모습을 통해 유적들이 건립되기까지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들었음을 알 수 있으며, 유적의 창조자들에게 이 대규모 유적지는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당시 사람들의 장례·의식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으며 동시에 선사시대의 기술·건축·천문학의 증거이기도 하다. 주변 풍경을 감안하여 섬세하게 배치된 기념물들은 신석기·청동기 시대를 이해하는 데 더욱 도움이 되고 있다.
스톤헨지, 에이브베리 및 관련 유적지들은 신석기 시대 인류의 창조적인 천재성이 낳은 걸작이다. 스톤헨지와 에이브베리는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신석기 문명의 원형 거석 유적지이다. 주변에 있는 많은 위성 유적지들은 이 유명한 유적지를 더욱 광범위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스톤헨지는 기원전 3100년~기원전 1100년에 건설되었으며 몇 단계의 건축 단계를 걸쳐 지어졌다. 선돌의 크기, 환상열석에 기반으로 한 배치의 완벽성 그리고 높이 면에서 가장 인상 깊은 거석 유적이다. 세 번째 건축 단계에서부터 선돌 위에 커다란 상인방(lintel)을 놓아 수직 블록에 접착한 듯한 엔타블러처(entablature) 형태로 만들었다. 건축에는 두 가지 석재가 사용되었다. 불규칙한 사르센석은 솔즈베리 평야(Salisbury Plain)에서 가져왔으며, 블루스톤은 스톤헨지 유적에서 약 200㎞ 떨어진 웨일스의 펨브로크 카운티에서 가져왔다. 구부러진 애비뉴는 바깥쪽 원에서부터 이어지도록 되어 있다.
유적의 용도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 구조로 미루어 천체 관측용이라고 추측된다. 또한, 태양을 숭배하는 성역이었다는 이론이 오랫동안 이어졌지만, 일부 선사 시대 역사학자들은 이 이론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유 시인과 드루이드(druid, 드루이드교의 성직자)들의 민간전승 행렬인 연례 하지 의식이 시행되고 있다.
스톤헨지만큼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북쪽으로 약 30㎞ 떨어진 곳에 있는 에이브베리는 유럽에서 가장 큰 환상열석이 있는 유적이다. 바깥쪽 원은 약 100개의 선돌로 이루어져 있다. 유적지에서 발견된 도자기 파편들은 이곳에 기원전 3000년 초기 이전에 180개의 선돌이 놓였음을 말해 준다. 이 유적에는 동서남북으로 네 방향으로 길(그중 남쪽 애비뉴인 웨스트 케넷 애비뉴에만 거석이 줄지어 서 있다)이 나 있다. 에이브베리에서 멀지 않은 주변 유적지로 윈드밀 힐, 웨스트 케넷 롱 배로, 오버턴 힐(Overton Hill)과 함께 유럽에서 가장 큰 선사 시대 고분으로 알려진 실베리 힐이 발견되었다.
등재기준
기준 (ⅰ) : 스톤헨지, 에이브베리와 관련된 세계유산은 선사 시대의 창조적이고 기술적인 결과물이다. 스톤헨지는 건축학적으로 봤을 때 세계에서 가장 정교한 환상열석이다. 바깥쪽 원에는 두개의 커다란 돌을 세워 놓고 그 위에 수평으로 커다란 돌을 눕혀 놓고 정교하게 모양을 다듬어 연결한 삼석탑(三石塔)이 있다. 삼석탑의 설계와 독특한 기술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스톤헨지에는 블루스톤과 사르센이라는 두 종류의 석재가 사용되었다. 이 석재 중 가장 큰 것이 40t이상 나가는 규모인데 이 석재를 옮겨온 거리가 자그마치 240km 가량 된다. 스톤헨지 인근의 기념물 규모도 놀라울 정도이다. 스톤헨지 커서스와 애비뉴의 길이는 3㎞이며, 더링턴 월은 브리튼에서 가장 크다고 알려진 헨지로 지름이 500m이다. 이것은 선사 시대 사람들이 엄청나게 크고 복잡한 유적을 설계 및 건설할 수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에이브베리의 선사 시대 환상열석은 세계에서 가장 크다. 둘러싼 헨지는 둘레가 1.3㎞이며 거대한 제방과 도랑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방 안에는 다듬지 않은 180점의 선돌들이 세워져있는데, 큰 바깥 원과 2개의 작은 안쪽 원을 형성하고 있다. 에이브베리 환상열석은 네 방향의 출입구가 있다.
그중 두 곳의 뻗어 나온 길은 평행한 선돌을 세워서 웨스트 케넷(West Kennet) 애비뉴와 백햄프턴(Beckhampton) 애비뉴로 향하도록 방향을 표시하여 세웠다. 이것은 환형열석에서 인근의 다른 기념물들로 이어지도록 길을 안내하는 역할을 하는 거석들이다. 실베리 힐은 유럽에서 가장 큰 선사 시대 흙무덤이다. 기원전 2,400년 무렵에 만들어진 이 흙무덤은 높이가 39.5m이며 500,000t의 백악(白堊, chalk)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유적의 목적은 아직도 불분명하다.
기준 (ⅱ) : 세계문화유산은 초기 신석기에서 청동기 시대까지 2000년 이상 건축이 발전했다는 것과 계속 사용되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유적과 주변 경관은 건축가, 예술가, 역사가, 고고학자들에게 큰 영향력을 미쳤으며, 앞으로도 연구해야 할 과제이다. 이 세계유산은 기원전 3700년~기원전 1600년에 이 유적이 세워졌으며, 약 2000년 이상 계속해서 사용되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연대기 편자인 헨리 드 헌팅턴(Henry de Huntington)과 제프리 드 몬머스(Geoffrey de Monmouth)가 스톤헨지를 세계의 불가사의 중 하나로 생각했던 12세기 이래, 스톤헨지와 에이브베리 유적지는 끊임없이 추측과 연구의 주제가 되었다. 연구 초기에 존 오브리(John Aubrey), 이니고 존스(Inigo Jones), 윌리엄 스터클리(William Stukeley)의 조사와 연구는 이후 건축가, 고고학자, 예술가, 역사가들에게 영향력을 미쳤다. 두 지역의 세계유산은 앞으로도 훌륭한 연구 과제가 될 것이다. 현재의 유적지는 몇 가지 이유로 종교적인 연관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기준 (ⅲ) : 스톤헨지와 에이브베리의 유적은 신석기와 청동기 시대 영국의 장례와 의식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스톤헨지와 에이브러리는 관련 유적지들과 함께 유례없는 경관을 만들어 낸다.
유적과 유적지의 설계 기술 및 위치는 고도로 조직화된 선사시대 사회를 보여 준다. 하지의 일출, 동지의 일몰 방향의 선상 위에 놓인 스톤헨지 애비뉴는 아마도 종교적인 행렬의 통로였을 것이다. 스톤헨지 환상열석의 배열을 통해 선사시대 건축자들의 천문학적 지식이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에이브베리에서 2㎞ 이상 떨어진 생크추어리로 연결되는 통로인 웨스트 케넷 애비뉴와 같은 몇몇 유적들은 길이와 크기 면에서 조직화된 선사 시대 사회를 증명하는 증거이다.
화장 묘지로 사용된 스톤헨지, 잉글랜드 남부 지역의 가장 큰 신석기 집단 석실 묘지로 알려진 웨스트 케넷 롱 배로, 그리고 한층 더 발전한 장례 의식을 보여 주는 수백 개의 매장지들을 보면 당시의 장례 문화 변천 모습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
스톤헨지와 에이브베리 거석 유적
1.스톤헨지Stonehenge-'공중에 걸쳐있는 돌'
영국에서 유명한 건조물의 하나인 스톤헨지(StoneHenge)는 영국 남부 솔즈베리 평야(Salisbury Plain)에 위치하며, 고대 영어로 '공중에 걸쳐 있는 돌'이라는 의미입니다.
스톤헨지의 건조가 착수된 것은 기원전 2800년경이며, 우리가 보고 있는 형태로 완성된 것은 기원전 1560년경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기원전 2100년경 스톤헨지로부터 자그마치 385km나 떨어진 웨일즈 남서부의 프레슬리산에서 청석(blue stone)이 이 곳으로 운반되어져 왔는데, 최고 5톤까지 나가는 이 돌들을 옮기는 일이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에 상황을 감안했을 때, 기중기와 같은 기구가 없이 50t 무게의 돌을 어떻게 운반했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여전히 남고 있다고 합니다.
학자들은 지레 받침대와 밧줄을 이용해 돌을 움직였을 것이라고 과학적인 추측을 할 뿐이다.
유럽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문화유산 가운데 가장 학설과 의문이 많은 유적지의 하나가 런던 남서쪽에 자리한 스톤헨지입니다. 스톤헨지는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독특한 선사 시대의 거석 문화를 엿볼 수 있는 곳이지요.
스톤헨지에 대해서는 우주에 살고 있는 외계인이 만들었다는 주장부터 중세 시대 마술사와 마녀들이 마술을 부리거나 춤을 추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기원했다는 이야기까지 많은 추측과 학설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정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답니다. 그저 추측일 뿐이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던 것을 기록한 것에 지나지 않지요.
런던 서남부 솔즈베리 평원에 있는 스톤헨지는 아주 흥미롭고 의문으로 가득한 유적지예요. 흙으로 쌓아서 만든 제방 안에 거대한 돌기둥을 세워 놓은 것으로, 스톤헨지는 고대 잉글로 색슨 언어로 ‘매달려 있는 바윗돌’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어요.
우주여행을 떠날 만큼 과학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의문을 풀지 못하고 있는 거석 유적지 스톤헨지를 찾아, 그 흔적들을 살펴볼까요?한마디로 말해 스톤헨지는 누구나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주장할 수 있는 유적지랍니다. 혹시 여러분들도 기발한 생각이 있다면 한번 주장해 보는 것도 좋겠지요.
지구촌 구석구석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집 안에서 다 알 수 있고, 우주선을 타고 탐험을 떠나는 최첨단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에도 스톤헨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밝혀진 것이 없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지요. 만약 여러분에게 스톤헨지가 언제, 누구에 의하여 만들어졌는지 묻는다면 과연 어떤 대답을 할까요? 아마도 선사 시대 사람이나 외계인, 마술사가 만든 유적지라고 답하는 친구들이 많을 거예요. 그렇습니다. 여러분의 대답이 어쩌면 정확한 답일지도 모르지요. 세계적인 고고학자와 인류학자들은 조금 더 구체적인 답변을 내놓을 수 있겠지만, 크게 보면 여러분의 답과 별로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스톤헨지에 관한 기록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8세기에 웨일스 출신의 역사가 네니우스가 쓴 《영국사》입니다. 네니우스는 《영국사》에서 스톤헨지에 대해 멀린이라는 마술사가 초능력을 써서 아일랜드에서 이곳으로 옮겨 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용도는 춤추는 데 쓰려고 했다고 합니다. 수백 년이 지난 1135년에 제프리 경이 쓴 《영국 왕과 역사》에서도 비슷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중세 이후에 나타난 기록은 오늘날 학자들이 주장하는 이론과 상당히 가깝습니다. 1666년 ‘오브리’라는 사람은 돌을 세울 곳을 중심으로 주변에 흙으로 둑을 쌓아 올린 다음, 돌이 들어갈 수 있는 구덩이를 파고 돌을 세웠다고 주장했습니다. 마술사가 세웠다는 주장과는 확실히 다른 것으로, 이 주장은 상당한 설득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오늘날의 스톤헨지에 대한 과학적인 이론도 오브리의 주장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이후 켈트족의 사제인 드루이드족은 자신의 조상이 만든 유적이라고 주장했으며, 21세기에 들어와서 산부인과 의사 앤서니 퍽스는 영국 왕립 학회지에 실린 논문에서 대지의 여신의 생식기라고 주장하여 세계적으로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최근에 한 퍼즐 연구가는 스톤헨지가 원뿔 모양의 거대한 건물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스톤헨지가 세워진 곳 주변은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살펴보아도 커다란 돌이나 산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직 드넓은 들판만이 펼쳐져 있답니다.
이것을 의아하게 여긴 많은 학자들이 유적지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서 돌이 어디에서 옮겨졌는지를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중으로 된 스톤헨지 유적지 안쪽에 있는 돌 하나의 무게는 자그마치 30~50t이나 됩니다. 이 돌들은 유적지에서 38km쯤 떨어져 있는 말버러의 다운스 구릉 지역에서 가져온 대사암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선사 시대 사람들은 이렇게 커다란 돌을 어떻게 운반했을까요? 선사 시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방법은 나무를 바닥에 깔고 바위에 줄을 매달아 끌어 오는 방법뿐이었다고 합니다.
스톤헨지 바깥쪽에 세워진 돌은 주변에서 전혀 볼 수 없는 약간 푸른색을 띠고 있는 현무암입니다. 흔히 청석이라 불리는 이 돌은 유적지 남서쪽 웨일스 지방에서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크기가 5~10t에 달하는 돌을 바다와 강을 건너 스톤헨지까지 옮겨 온 것이지요. 이를 증명하기 위하여 영국 BBC 방송국에서는 여러 학자와 젊은 학생들을 참여시킨 가운데 동력이 없는 아주 단순한 배를 이용하여 영국 해와 에이번 강을 건넌 뒤 육로를 따라 스톤헨지까지 가져오는 과정을 실험해 보았습니다. 실험 결과 가능한 일로 밝혀졌지만 지금과 비교할 수조차 없이 뒤떨어진 당시 선박과 기술을 이용하여 그 무거운 돌을 스톤헨지까지 옮겨 왔다는 것이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아직도 풀지 못한 의문으로 가득한 스톤헨지와, 잃어버린 도시로 알려진 페루의 마추픽추, 나스카 같은 유적지는 몇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보통 눈높이에서 바라보면 완벽한 형태를 파악하기가 어렵다는 점입니다. 헬리콥터와 경비행기, 아니면 열기구를 이용해서 높은 곳에서 보아야 전체적인 모습을 비교적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스톤헨지는 많은 부분이 무너져 버렸지만 다행스럽게도 원래의 모습을 추측해 볼 수 있는 거석들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스톤헨지 유적지 안쪽 돌들은 두 기둥 사이에 덮개돌을 올려놓은 П모양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런 형태의 돌이 5개인데, 전체적인 모습은 말굽 모양입니다. 그리고 바깥쪽에는 거대한 돌기둥이 원형으로 세워져 있는데 기둥과 기둥 사이는 덮개돌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말굽 모양과 원으로 이루어진 거석 주변에는 힐스톤이란 또 다른 형태의 돌이 있습니다. 이 돌은 스톤헨지 거석 유적지 중심과 같은 선상에 있는데 하짓날 태양이 뜨는 방향과도 일치합니다. 이런 사실을 근거로 일부 학자들은 신석기 시대 때 태양을 숭배하는 의식을 올렸던 곳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증명할 만한 것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거석이 세워진 주변에는 흙을 파서 만들어 놓은 둥근 구덩이가 있는데 이 구덩이의 용도도 정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많은 조사와 연구 끝에 거석이 설치된 과정은 비교적 잘 밝혀져 있습니다. 돌이 들어갈 수 있는 구덩이를 파고 지렛대를 이용하여 밧줄로 돌을 고정시킨 뒤 200여 명이 줄을 끌어당겨서 세웠다고 합니다. 거석을 세운 후 덮개돌을 올리는 방법으로는 흙과 나무를 거석의 가장 높은 부분까지 쌓아 올린 후 돌을 올렸다는 설과 지렛대를 사용하여 쌓아 올렸다는 설이 있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앞의 주장을 더 지지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방법은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실제 실험을 통해서 얻어진 결과입니다. 어쨌든 두 방법 모두 기초 과학을 잘 활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스톤헨지는 3단계에 걸쳐 공사가 이루어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기원전 3100년경에 주변에 흙을 쌓아 올린 1단계 공사를 하였고, 기원전 2500년경에 웨일스에서 가져온 30개의 거대한 돌을 이용하여 바깥쪽에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평평한 바위를 올려놓는 공사를 하였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기원전 1600년경 말버러 언덕에서 옮겨 온 돌로 안쪽에 말발굽 모양의 삼석탑을 완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스톤헨지 유적지 부근에는 다른 거석 유적지가 몇 곳 더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곳이 스톤헨지 북쪽에 있는 에이브버리 유적지입니다.
에이브버리 유적지는 유럽 최대의 거석 유적지로 그 둘레만도 1.3km나 되고 흙을 파서 만들어 놓은 원의 둘레는 1.5km가 넘습니다. 둘레가 594m인 스톤헨지의 약 3배나 되지요. 에이브버리 유적지에 세워진 거석의 개수는 학자에 따라 다르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현재 27개만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원래 100개의 거석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고, 98개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스톤헨지보다 훨씬 규모가 큰 만큼 이곳에 세워진 거석의 크기도 대단합니다. 스톤헨지에 남아 있는 가장 커다란 거석이 50t인데 비해 에이브버리 거석은 66t이나 되고 대부분 50t이 넘는답니다.
에이브버리 유적지가 스톤헨지와 다른 점이 있다면 종교적인 성격이 강한 장소라는 점입니다. 에이브버리 유적지 중앙에는 작은 돌을 이용하여 이중으로 만들어 놓은 공간이 있습니다. 이런 공간은 다른 거석 유적지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답니다. 이것은 고대 국가에서 신에게 의식을 올렸던 제단과 비슷한데, 그래서 이곳에서 신에게 재앙으로부터 보호와 풍요를 기원하는 행사가 열렸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변에서 발견된 부서진 토기도 의식에 사용하는 음식을 담아 놓았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지요.
종교적인 색채는 에이브버리 유적지에서 전해 내려오는 전설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유달리 악마를 두려워했던 이 고장 사람들은 유적지 근처에 접근하는 것조차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이곳을 악마의 두목인 바알세불과 마녀들이 춤을 추며 잔치를 벌이는 장소로 믿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이곳을 지나가거나 머무는 것뿐만 아니라 보는 것마저 싫어했다고 합니다. 전설의 영향은 18세기 후반까지 이어졌지만 과학이 발달하면서 주민들은 이곳을 농지로 활용하거나 집을 지었고, 거석을 부수어 건축 자재로 사용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스톤헨지와 에이브버리 유적지가 신비로운 것은 오늘날의 과학으로도 그 진실을 밝혀 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고학이나 선사 문화를 연구하는 수많은 학자들조차 명확한 사실을 밝혀 내지 못하고 있지요.
스톤헨지와 에이브버리 거석 유적지는 오직 인간의 힘으로 거대한 돌을 운반하고, 지렛대와 흙을 이용하여 수십 톤에 달하는 거대한 바위를 세운 뒤 그 위에 덮개 돌을 올려놓은 신기한 조형물입니다. 보고 또 보아도 신석기 시대 사람들이 만들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습니다.
스톤헨지와 에이브버리 거석 유적지를 둘러보다 보면 안타까운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것은 극성스러운 사람들의 행동 때문에 많은 유적이 사라져 버렸고 남은 유적도 자유롭게 둘러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집이나 정원을 가꾸느라 소중한 유적지를 훼손해서 오늘날의 사람들은 물론이고 후손들에게도 옛 모습을 보여 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유적지가 자꾸 파괴되자 영국 정부에서는 스톤헨지 주변에서 야영을 금지하고 가까이 접근할 수 없도록 막아 유적지를 보호하고 있습니다. 비록 가까이에서 볼 수는 없지만 그나마 이런 노력을 통해 후손들에게 보다 잘 보존된 문화유산을 물려줄 수 있다는 것이 다행스럽습니다.
지구상에는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문의 장소들과 불가사의한 사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곳이 거석 유적지입니다. 스톤헨지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지구상에는 수많은 크고 작은 거석 유적지가 흩어져 있으며 우리나라도 그중 한 곳입니다. 세계적으로 보면 유럽에 가장 많은 거석 유적지가 흩어져 있습니다. 규모에서도 단연 최고이지요.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지중해의 섬나라 몰타가 대표적인 나라입니다.
프랑스 거석 유적지는 도버 해를 사이에 두고 영국과 마주하고 있는 서부 해안을 따라 형성되어 있습니다. 브르타뉴 남쪽 지방에 흩어져 있는 거석 유적지는 기원전 4000년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또 카르나크 지역을 중심으로 30km 주변에 흩어져 있는 거석 유적지는 줄잡아 수백 곳이나 됩니다. 스톤헨지만큼 거대한 돌은 없지만 전체 면적과 돌의 개수만큼은 단연 세계 최대 규모입니다.
지중해의 작은 섬나라 몰타에는 거대한 거석 신전이 있습니다.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몰타 거석은 스톤헨지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돌을 이용하여 신전을 만들어 놓은 곳입니다. 어떤 거석 유적지보다 보존 상태가 좋고, 세련된 구조에 장식성이 뛰어나답니다. 몰타 거석 유적지는 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예배를 올렸던 곳으로, 조각상과 벽화 등을 통해 선사인들의 종교관도 엿볼 수 있는 장소입니다. 하지만 이런 거대한 돌을 어디에서 옮겨 왔는지 아직도 밝혀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동아시아에서는 드물게 많은 거석 유적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보다 수십 배 넓은 중국과 인도에서도 거석 유적지를 찾아보기 쉽지 않습니다. 더욱이 우리나라의 고인돌 유적지는 여러 지역에 걸쳐 분포되어 있는데 이 역시 다른 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모습입니다. 특히 고인돌이 많이 모여 있는 고창, 화순, 강화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답니다.
고인돌의 형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아래에 돌을 받치고 그 위에 마치 탁자를 연상시키는 넓은 돌을 올려놓은 것이 많습니다.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입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 중에도 무게가 엄청난 거석이 있지만 이런 거석들은 사람들이 인공적으로 만든 것보다는 자연적으로 생긴 거석이 많다고 합니다.
스톤헨지, 프랑스 카르나크 선사 유적지, 몰타 거석 신전, 이스트 섬의 유적지에 세워진 거석들은 하나같이 크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모양새는 다르지만 스톤헨지와 프랑스 거석 유적지는 원 모양으로 돌들을 세우고 그 중앙이나 부근에 두 개의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돌을 올려놓은 거석이 많은 반면, 몰타 섬의 거석들은 커다란 돌을 나열한 건물 형태입니다. 그리고 칠레 이스트 섬에 있는 거석들은 단순한 돌을 세워 놓은 것이 아니라 사람 얼굴 모양의 거대한 석상이란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