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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코포 다 폰테의 '선한 사마리아인'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네 인생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것>
지금은 강철체력을 자랑하지만(비록 초기 비만임에도 불구하고) 언젠가 저도 완전 ‘비실비실’ 할 때가 있었습니다.
모든 육체적, 정신적, 영적 에너지가 남김없이 빠져나가 불과 몇 걸음 걷기도 힘겹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온 몸으로 느꼈습니다.
누군가 의지하지 않고 제 발로 걷은 것이 얼마나 큰 은총인지!
아무런 지장 없이 편안히 숨 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보통 사람들 사이에서 평범하게 먹고 사는 것이 얼마나 큰 선물인지!
그렇게 따지고 보니 우리네 인생에 있어 정말 중요한 것은 뭐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저 남들처럼 하루하루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옆에 있고, 견딜만한 일상이 매일 펼쳐지고,
그 안에서 티격태격, 아옹다옹하지만 그래도 소소한 기쁨이 있고...
그것이 어쩌면 가장 행복한 삶이고 의미 있는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오늘도 얼마나 많은 장애우들이 얕은 턱 하나 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지 모릅니다.
오늘도 얼마나 많은 사회적 약자들이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외로워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오늘도 얼마나 많은 지상의 나그네들이 동료 인간들의 따뜻한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누군가가 건네는 작은 도움의 손길입니다.
동시대에 같은 하늘 아래 살아간다는 것, 이것 역시 보통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같은 시대를 살도록 엮어주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서로 돕고 살라고, 서로의 곤궁한 처지를 나 몰라라 하지 말라고, 서로의 고통과 상처를 어루만져주라고 우리를 한데 묶어주셨음이 분명합니다.
이런 면에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오늘 우리에게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오늘날 의료계에 종사하시는 사람들의 모토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법조계에서도 착한 사마리아인의 법(Good Samaritan Law)을 제정하자는 분위기가 커져갑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법이란
이웃이 처한 위급상황을 현장에서 목격하고도 구조하지 않는 구조 불이행(Failure to Rescue)을 처벌하는 법규입니다.
이미 프랑스를 비롯해서 독일, 핀란드, 스위스 등의 국가에서 시행되고 있습니다.
지척에서 누군가가 크게 다쳐 고통을 호소하는 상태에서도 전혀 무감각한 사람들이 많아집니다.
누군가가 죽어가고 있는 상황에서도 눈 한번 깜짝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자신의 목숨마저 보장되지 않은 위험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물불 안 가리고 먼저 뛰어 들고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상대가 누구이든 한 인간이 처한 위기 상황에 적극적으로 개입합니다.
제자들을 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 희생된 세월호 선생님들,
철로에 떨어진 취객을 구하기 위해 뛰어들다 목숨을 잃은 일본 유학생 청년,
흉기든 강도를 온 몸으로 제압한 시민,
이런 분들을 가르쳐 의인(義人)이라고 칭합니다.
이 시대 또 다른 착한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어쩌면 우리 시대 순교자들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이런 의인의 행동을 아무나 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평소에 언제나 자신의 이익과 뱃속부터 챙기는 사람, 이웃이 처한 곤경 앞에 절대로 개입하지 못합니다.
평소에 작은 것 하나 양보하지 않는 사람, 평소에 사사건건 따지고 대드는 까칠한 사람, 절대로 이웃들의 위기 상황 앞에 투신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정말 중요한 것이 오늘 내 삶의 자리에서 살아가는 나의 일상적인 삶의 모습입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장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뭣이 중헌디! >
오늘 전에 있었던 본당 젊은 부부가 잠깐 제가 있는 곳에 찾아왔습니다.
5살, 3살 정도 돼 보이는 두 자녀를 데리고 왔습니다.
남자 아이들인데 매우 귀여웠습니다.
큰 아이는 사내아이처럼 생겼는데 둘째는 약간 여성스럽게 생겼습니다.
그런데 보는 순간부터 큰 아이가 더 착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부모님들도 첫째가 더 착하다고 했습니다.
식사를 할 때도 둘째는 한 시도 쉬지 않고 계속 움직였습니다.
아빠가 안고 있었는데 좀처럼 아빠가 밥을 먹을 시간을 주지 않았습니다.
돌아다니다 울다 웃었다를 반복했습니다.
반면 큰 아이는 장난감 하나 가지고 얌전하게 놀고 있었습니다.
신기한 것은 첫째 아이를 가졌을 때 이 부부는 신앙심으로 똘똘 뭉쳐서
약혼자 주말 봉사까지 하며 아이가 생기기 전부터 54일 기도를 바쳤고
그 기도가 끝나는 날 아이가 들어섰으며 그 이후에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함께 기도를 바쳤다고 합니다.
반면 둘째를 가질 때는 살림이 어려워져 아내까지도 일을 해야 해서
함께 아기를 위해 기도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둘째에게 매우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올 해의 최고 유행어 중 하나가 영화 <곡성>에서 아역 배우가 했던 “뭣이 중헌디!”입니다.
영화의 흐름상 매우 중요한 대사지만 이 말이 유행을 타는 것은 우리 삶 안에서 어떠한 경우에나 적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아이는 계속 “뭣이 중허냐고?”라고 아빠에게 따져 묻다가
“뭣이 중헌지도 모르면서!”라고 하며 나가버립니다.
아빠는 어둠의 세력으로부터 딸을 보호하고자 엄청난 노력을 합니다.
딸에게 주문을 거는 나쁜 사람을 처치하기 위해 동네 친구들까지 동원하여 자신이 경찰임에도 범법 행위도 감행합니다.
그러나 어떤 힘에도 온전히 의지하지 못하는 것이 그의 약점이었습니다.
친구들의 힘도 완전히 믿지 못했고, 자신이 불렀던 무당의 힘도 믿지 못했습니다.
무당이 굿을 할 때 딸이 매우 아파하자 결국 참지 못하고 굿판을 뒤집어엎습니다.
성당까지 찾아갔지만 그것도 온전히 신뢰하지는 않습니다.
자신을 지켜주려는 한 여인까지도 믿지 못하여 온 가족이 비극 속으로 빠져든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에서 아이는 계속 “뭣이 중헌디?”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진정 아이를 살리기 위해 뭣이 중헌지 모르는 아버지였던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도 뭣이 중헌지 모르고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세상은 조금씩 우리 삶에서 중요한 것이 덜 중요한 것처럼 여겨지게 만듭니다.
자녀를 위해 기도하는 시간보다 돈을 더 벌어야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처럼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정작 중요한 것을 주어야 하는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 교사는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네가 이미 알고 있지 않느냐?”라고 묻는 듯 하십니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율법에는 우리 온 존재를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쓰여 있습니다.
우리도 그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왜 물어볼까요?
그것이 제일 중요한 것이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사랑하는 것 하나밖에 없는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이나 교회의 가르침은 사랑하면 천국 가고 미워하면 지옥 간다는 이야기밖에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것보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안정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 더 중요했으면 좋겠기 때문에 자꾸 중요한 것에서 벗어나려고만 합니다.
오늘의 율법학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이 질문은 카인이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라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부자와 거지 라자로의 비유에서 부자는 왜 지옥에 갔습니까?
거지 라자로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거지 라자로는 개들에게 적어도 자신의 종기를 핥게 허락했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자신이 번 돈으로 자신이 쓰는데 무슨 상관이냐며
주위에서 굶주리는 사람을 자신이 목 숨바쳐 사랑해야 하는 이웃을 여기지 않은 것입니다.
마더 데레사는 길거리에 쓰러져 있는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이라 여기고 이웃이 되어주었습니다.
하느님은 아담을 창조하시고 나서 온 에덴동산의 동물들을 그에게 맡겼습니다.
그것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라고 한 것입니다.
이름을 지어주라고 한 것은 사랑하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마리마 막달레나의 이름을 불러 주신 것이 동산지기로서 아담의 역할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인간들에 대한 책임을 진 사람들이지,
내가 도와주어야 할 이웃이 누구인지 골라야 하는 선택을 할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오늘 산책하다가 작은 저수지에서 낚시하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만약 낚시꾼이 어떤 물고기를 잡아야하는지 잡지도 않은 상태에서 고르고 있다면 정상일까요?
낚시하는 사람은 닥치는 대로 잡기만 하면 됩니다.
선별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우리는 아프리카 저 멀리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들이 나의 이웃이고 그들이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만드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삼고 있다면
지금 우리는 이웃을 위해 우리 자신의 피를 쏟고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만약 무엇이 중헌지를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면
세상 것들을 더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면 무엇이 가장 중요한 일인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 뭣이 중허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당장 “제 목숨을 다하여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제 삶에서 가장 중요합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 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두 사람이 앉아서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한 사람이 아주 열심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듣고 있는 중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럴 것 같지요?
그런데 사실 이렇게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눌 때 ‘듣고 있는 중’인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합니다.
정답은 “자신의 이야기를 준비하는 중입니다.”라고 하네요.
이런 상태에서 과연 진정한 대화가 될 수 있을까요?
서로 자기의 이야기를 준비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은 소통이 되지 않아서 싸움이 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세상은 나 혼자만이 살아가는 곳이 아니지요.
그렇다면 대화 역시 나 혼자만 말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잘 듣는 곳에서 진정한 소통을 가져올 수가 있으며,
이를 통해 많은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대화에 대해 생각하다보니 우리 사람들의 기본적인 욕구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내가 말해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것, 결국 다른 사람으로부터 사랑받고 싶은 것이 아닐까요?
‘행복을 빈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축복(Benediction)이라는 단어를 생각해 봅니다.
이 단어는 라틴어의 ‘누군가에 대해 좋은(bene) 말을 한다(dictio).’라는 뜻에서 나온 말입니다.
‘축복’이라는 이름을 직접 쓰지는 않더라도
아마 이 뜻처럼 다른 사람에게 좋은 말을 듣고 싶어하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내 자신이 인정받고 사랑 받아야 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정작 다른 사람들을 인정하고 또 사랑하는 것은 매우 힘들어하는 것 같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남에게도 베풀 수 있어야 하지만,
내 자신이 늘 중심에 서 있다 보니 남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한 내가 중심이다 보니
나를 위한 각종 핑계로 남에게 베풀 수 없는 이유를 만들어 나갑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의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사람들 중에 누가 제일 행복했을까요?
우선 등장인물을 보죠.
강도를 만나서 초주검이 된 사람, 강도, 사제, 레위인, 착한 사마리아 사람, 여관주인.
초주검이 된 사람이 행복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또한 죄를 지은 사람 역시 행복하지 않겠지요.
사제나 레위인은 모른 척 하고 지나갔다는 점에서 마음이 편하지는 않겠지요.
역시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사람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과 여관주인입니다.
여관주인은 돈도 벌고 좋은 일도 하니까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큰 행복의 주인공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일 것입니다.
비록 재산상의 손해를 보았지만 진정으로 남이 원하는 대로 베풀어 준 그 행동으로 인해
주님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얻을 자격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 사람이라고 생각해보십시오.
이 상태에서 어떤 사람의 모습을 원하시겠습니까?
당연히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모습을 원합니다.
이처럼 내가 바라는 그 모습으로 남에게 베풀 수 있을 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 서공석 세례자 요한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 복음은 어떤 율법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에게 질문하였고, 예수님이 답하시면서 발생한 이야기입니다.
율법교사는 유대교 사회의 기득권층에 속합니다.
그는 무엇을 배우는 사람이 아니라, 율법에 대해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복음서는 오늘 율사가 예수님에게 질문한 것은 그분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그 질문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서에 어떻게 되어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율사는 구약성서를 인용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했다고 답합니다.
예수님은 그대로 실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율사는 자기가 사랑해야 할 이웃이 누구냐고 다시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습니다.
강도들은 그가 가진 것을 모조리 빼앗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놓고 가버렸습니다.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해서 지나갔습니다.
레위도 거기까지 왔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해 갔습니다.
드디어 사마리아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강도 맞아 반쯤 죽게 된 사람을 보자 가엾은 마음이 들어,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로 치료해주고, 그를 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 가 간호해 주었습니다.
다음날 그는 여관 주인에게 돈을 주면서 간호를 부탁합니다.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아주겠다고도 말합니다.
그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맞은 사람을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하였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신 다음 예수님은 그 율사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고 율사가 대답하자,
예수님은 ‘가서 너도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율사의 질문은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사랑해야 하는 대상이 누구인지를 묻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이야기에 나온 사마리아 사람과 같이,
자기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가엾이 여기고, 돌보아주어 그에게 이웃이 되어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의 이야기에 나오는 사제는 성전에서 성무(聖務)를 하는 사람입니다.
레위는 사제를 도와서 역시 성전의 성무에 종사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위해 일한다고 알려진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성전과 율법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성전은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하신 하느님’(탈출 33, 19)이 이스라엘과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상징하는 건물입니다.
율법은 하느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계시기에 하느님의 선하심을 사람이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생활지침입니다.
사제와 레위는 하느님을 섬기는 일을 전담한 이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에게 사람들이 제물을 봉헌하게 하면서 성전에서 일합니다.
그들은 그들에게 맡겨진 일 때문에 사람들 앞에 우월감을 가졌습니다.
그들이 하느님을 배경으로 우월감을 가지면서 그들이 말하는 하느님은 사람들 위에 무섭게 군림하는 분이 되었습니다.
율사와 사제들은 율법과 제물봉헌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들을 하느님이 엄하게 벌하신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이 믿고 있는 하느님은 사람을 돌보아주지도 않고, 가엾이 여기지도 않으며, 선하지도 않습니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에서 사제와 레위가 강도 맞은 사람을 돌보아주지도 않고, 가엾이 여기지도 않는 것은
그들이 믿고 있는 하느님이 율법 지킬 것과 제물 바칠 것만 바라보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예루살렘의 성전과 이스라엘의 율법에 대해 잘 모릅니다.
그는 강도 맞아 초주검이 된 사람을 보고 그를 가엾이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사람을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면서 그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습니다.
인간이 만든 성전과 인간이 만든 율법입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사람들이 깨닫게 하기 위해 사람이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사제와 율사는 성전과 율법의 중요성을 강조한 나머지,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하신 하느님을 잊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원초적 체험, 곧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시는 하느님을’ 되살리기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그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아계시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일을 실천하는 우리의 삶 안에 하느님은 살아계십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 자비롭고 불쌍히 여기는 분이라,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자비를 실천하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이 주신 유일한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명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서로 사랑하시오.”
(요한 15, 17)
하느님의 생명이 하는 일을 알려주고 실천한 예수님이었습니다.
초기 신앙인들이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고백한 것은
그분이 하느님의 생명을 충만히 사셨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고치고 살리셨듯이,
우리도 그렇게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랑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입니다.
“그대들이 서로 사랑을 나누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그대들이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요한 13, 35)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의 사마리아 사람과 같이,
자기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해 이웃이 되어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자녀가 도움을 필요로 할 때,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기에 최선을 다합니다.
바울로 사도의 말씀입니다.
“그것은 문자의 계약이 아니라 영의 계약입니다.
문자는 죽이지만 영은 살립니다.”
(2고린 3, 6)
사랑은 문자인 율법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문자는 죽입니다.
성전과 율법에 충실한 오늘 복음의 사제와 레위는 초주검이 된 사람을 버려두고 갔습니다.
강도 맞은 사람을 돌보아주고 살리라는 말은 율법의 문자에 없습니다.
이렇게 문자는 죽입니다.
율법을 모르는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맞아 죽게 된 사람을 보자 그를 가엾이 여겼습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그를 살렸습니다.
그는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한 것입니다.
하느님은 교회의 법이나 신심행위와 같은, 우리가 계획하고 만든 일 안에, 우리 계획의 산물(産物)로 살아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자비로운 선한 마음 안에 살아계십니다.
자비와 가엾이 여김은 우리가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제1독서로 들은 신명기는 말합니다.
“말씀은 하늘에 있지 않다...
그것은 너희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
너희 입에 있고 너희 마음에 있다.”
불쌍히 여김과 가엾이 여김은 사마리아 사람의 마음에도 우리의 마음에도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실천하면, 하느님의 숨결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고,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가 됩니다.
- 부산교구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1)
착한 사마리아인이 강도당한 사람을 도와준 일은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한 일”입니다(루카 10,27).
사마리아인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발견하자,
마치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처럼 그 사람을 도와주었습니다.
지금 ‘하는 것처럼’이라고 표현하긴 했지만,
아마도 분명히 그 사마리아인은 그 일은 자기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서 했을 것입니다.
사랑 실천은 바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거창한 명분을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듯이 그냥, 당연히 해야 하는 일입니다.
2)
착한 사마리아인의 사랑 실천은 ‘원수’를 사랑한 일입니다.
(원수에게 이웃이 되어 준 일입니다.)
그 당시에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원수와도 같은 관계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사마리아 여자에게 마실 물을 청하셨을 때,
그 여자는 물을 드리기는커녕 유다 사람이 왜 사마리아 여자에게 마실 물을 청하느냐고 말했습니다(요한 4,9).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에게 물 한 모금도 주기 싫었던 것입니다.
어떤 사마리아인들의 마을이 예수님과 예수님의 일행을 배척했을 때,
화가 난 야고보와 요한은 그 마을을 불살라 버리자고 말했습니다(루카 9,54).
그것은 두 사도만의 감정이 아니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의 마을은 불살라도 된다는 것이 당시 유대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렇게 서로 증오하고 적대감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사마리아인이 유대인을 도와준 일은 원수에 대한 사랑을 실천한 일이 됩니다.
(따로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강도당한 사람은 유대인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인을 등장시키신 것은 의도적으로 하신 일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 다 이웃이고 형제입니다.
그러니 민족, 인종, 종교, 신분, 직업, 사상 같은 것을 따지지 말고 무조건 사랑을 주어야 합니다.
‘원수’란 원래 없습니다.
내가 원수라고 생각하는 이웃만 있을 뿐입니다.
3)
그리스도교의 관점에서, 강도당한 사람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마태 25,40)
이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나에게 해 준 것과 같다.” 라고 표현하시지 않고,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라고 표현하신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곤경에 처한 사람을 보면 예수님을 사랑하듯이 도와주어야 한다.”가 아니라,
“지금 곤경에 처한 그 사람이 바로 예수님이니 당연히 도와드려야 한다.”입니다.
따라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도와주지 않고 외면한다면,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외면한 일이 되어버리고,
그러면 신앙인의 자격을 스스로 버리는 일이 됩니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마태 25,45)
히브리서 저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형제들을 꾸준히 사랑하십시오.
나그네 대접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를 대접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있으면 여러분도 함께 갇혀 있는 심정으로 그들을 기억하십시오.
학대받는 사람들이 있으면 여러분도 같은 학대를 받고 있는 심정으로 그들을 기억하십시오.”
(히브 13,1-3.공동번역)
여기서 ‘나그네’는 절실하게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뜨내기’를) 뜻합니다.
‘천사’는 사실상 하느님을 뜻하는 말입니다.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느님을 대접한 사람은 아브라함입니다(창세 18장).
4)
강도당한 사람을 바로 ‘나’로, 착한 사마리아인을 예수님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내가 잘한 일이 있어서도 아니고, 나에게 무슨 자격이 있어서도 아니고, 나에게 뭔가를 바라셔서 그러시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나를 사랑하니까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사랑에는 사랑 말고는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 기도하는 것인데,
무엇을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가는 명확합니다.
받은 대로 다시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주면 됩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그 사마리아인이 사랑을 실천한 것은 ‘가엾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루카 10,33).
의무감 때문에 한 일도 아니고, 대가를 바라고 한 일도 아닙니다.
아마도 그는 충분히 도움을 준 다음에는 말없이 떠났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강도당했다가 사마리아인의 도움을 받은 그 사람은 그 뒤에 어떻게 되었을까?
(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 사람이 그 뒤에 어떻게 살았는지는 모르지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루카 10,37)
이 말씀은,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카 10,29)”라고 물은 율법학자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강도당한 사람에게 하신 말씀으로 생각해도 됩니다.
사실 우리는 누구나 도움을(사랑을) 주고받으면서 살고 있습니다.
자기가 실천한 선행과 사랑은 바로 잊어버려도 됩니다.
그러나 자기가 받은 은혜와 선행과 사랑은 잊으면 안 됩니다.
신앙인으로서 우리가 받은 하느님(예수님)의 사랑과 이웃의 사랑을 생각하면,
우리는 우리가 베푼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대단히 크고 많은 사랑을 받았고,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웃 사랑 실천’은 자신이 받은 사랑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에서부터 시작되는 일입니다.
- 전주교구 / 함열본당 상지원 공소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울타리를 허물고 다가가 기꺼이 내어주는 사랑>
오늘 복음에서 한 율법 교사가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묻습니다(10,29).
그러자 그분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 이웃이 누구이며 사랑의 범위는 어디까지인지를 알려주십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에서 다양한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먼저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던 한 사람이 강도를 만나 옷 벗김과 폭행을 당하여 초주검이 됩니다(10,30).
폭력적인 이웃을 만난 것입니다.
이 만남에서는 그 어떤 생명의 숨결도 창조의 손길도 찾아볼 수 없었고 단절과 파괴로 치달아버렸습니다.
그런데 사제와 레위인이 이렇게 초주검이 된 상태로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고는 피해서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버립니다(10,31-32).
괜히 도와줬다가 변을 당하거나 죽은 사람일 경우 율법에 따라 정결예식 등을 해주어야 하니 부정을 타서는 안 된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제와 레위인은 피투성이가 된 사람을 보기는 하였으나 멀찍이 피해 지나쳐버립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직무에 충실할 생각뿐이었고, 고통받는 사람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외면해버렸습니다.
여기에는 하느님을 발생시키는 진정한 만남, 성사적 만남이 없고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생각과 행동만이 있습니다.
이런 스침의 관계는 깊은 인격적인 관계로 나아갈 수 없고 진정한 사랑과도 무관합니다.
마지막으로 어떤 사마리아인이 길가에 쓰러져 있는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줍니다(10,33-34).
그뿐 아니라 여관 주인에게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잘 돌봐줄 것을 부탁하고 떠납니다(10,35).
강도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폭행을 당한 그 사람에게 다가간 사람은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정통 신앙에서 벗어난 사마리아인들을 무시하고 경멸했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은 자신들을 원수처럼 여기는 사람을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10,33) 다가가 진정한 이웃이 되어 아낌없는 사랑과 봉사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고귀한 동료 인간들의 고통과 아픔, 부당한 현실과 비인간적 상황 앞에서는 오직 사랑해야 할 의무만이 있을 뿐입니다.
거기에는 종교나 이념, 종족과 신분, 개인적인 차이 등 그 어떤 조건도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랑에는 조건도 한계도 없고, 그 어떤 울타리도 머뭇거려야 할 중립지대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하고 어떤 만남을 갖습니까?
길거리에 쓰러진 사람을 만날 때, 누군가가 폭행을 당하거나 소매치기를 당할 때, 교통사고로 위급한 상황을 당할 때
외면하거나 비겁한 침묵을 하고, 못 본 척 하며 지나쳐버리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하느님을 공경한다는 것은
인간의 존엄함을 적극적으로 다가가 지켜나가며 억울한 이들의 인권을 되찾아주며,
고통 받는 이들을 연민의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오늘도 고통 중에 있는 원수에게 오직 연민의 마음으로 다가가
조건 없이 모든 것을 내어주며 아낌없이 사랑을 나누었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도록 마음을 가다듬었으면 합니다.
이제는 나 자신의 안위와 행복에만 몰입하는 이기주의에서 탈피하고,
동료 인간들의 아픔과 비인간적 상황에 적극적이고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대하는 우리가 되도록 해야겠습니다.
이웃이 누구이냐를 생각하기보다 내가 먼저 좋은 이웃이 되어주기로 힘쓰면서...
- 프란치스코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영원한 생명의 길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오늘 복음에서 어느 율법교사가 일어나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묻습니다.
질문한 의도는 불순하지만 질문 자체는 우리 모두의 근본적 갈망을 표현합니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시험하려 물었다지만, 역시 율법교사의 진정성이 담긴 물음입니다.
옛 사막의 수도승을 찾았던 이들의 질문들도 이와 일치합니다.
‘스승님,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스승님, 제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정말 사람답게, 보람있게, 행복하게, 잘 살고 싶다는 갈망의 표현들입니다.
그럴 때마다 사막의 스승들은 그에 맞는 단순명쾌한 처방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바로 사막교부들의 금언집이 바로 이런 스승과 제자의 문답내용을 모아 놓은 책입니다.
여전히 혼란한 삶중에 자기를 잊고, 잃고 살아가는 오늘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설득력을 지닌 금과옥조의 예화들입니다.
‘과연 한 번뿐이 없는 삶을 이렇게 살아도 되나?’
끊임없이 자문하면서 덧없는 허무한 삶이 아닌,
의미충만한 ‘참 나’의 행복한 삶을 살고 싶은 근본적 갈망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오늘은 여러 측면에서 영원한 생명의 길에 대한 처방을 제시합니다.
지혜로운 스승 예수님은 직답을 피하고 율법교사 자신의 입을 통해 답을 찾아내도록 유도합니다.
1.
예수님 ;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율법교사 ;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하였습니다.”
예수님;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참 삶의 길은, 영원한 생명의 길은 경천애인(敬天愛人), 사랑의 이중 계명 하나뿐입니다.
이대로 실천할 때 비로소 영원한 생명의 길이 활짝 열립니다.
말문이 막힌 율법교사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질문으로 인해
우리는 예수님의 착한 사마리안의 비유를 통해 정말 귀한 깨달음을 얻습니다.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순전히 자기 중심적 질문입니다.
2.
이웃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과연 나의 이웃은 누구입니까?
나는 누구의 이웃입니까?
만일 내가 세상을 떠난다면 나의 죽음을 슬퍼하며 울 이웃은 몇이나 되겠는지요?
만일 내 주변의 이웃이 세상을 떠났을 때 진정 슬퍼하여 울 이웃은 몇이나 될까요?
내가 곤경에 처했을 때 나를 도운 착한 사마리아인은 누구였었는지요?
반대로 이웃이 곤경에 처했을 때 내가 착한 사마리안이 되어 도운 경우는 있었는지요?
한 번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3.
사람이라고 다 사람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는 사제, 레위인, 사마리안의 세 부류의 사람들이 나옵니다만
진정 참 사람은, 영원한 생명의 구원을 받은 사람은, 전혀 종교인이 아닌 사마리아 사람 하나였습니다.
보는 이가 아무도 없는 줄 알고 슬며시 피해 간 사제와 레위인이었지만 하느님은 보고 계십니다.
과연 내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나는 이 셋 중 누구였을까요?
셋 다 각자의 업무로 바빴겠지만,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 상태의 사람앞에 멈춘 것은 사마리아 사람 하나뿐이었습니다.
4.
영원한 생명의 길은 무엇입니까?
저는 세 측면에 걸쳐 묵상했습니다.
이 셋대로 살 때 비로소 착한 사마리안이 되어 살 수 있습니다.
참 신비로운 것이 예수님이 두 모습으로 계시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착한 사마리안이요 하나는 초주검이 된 사람입니다.
착한 사마리안을 통해 자비로운 예수님의 모습이 환히 드러납니다.
또 역설적으로 초주검이 된 사람을 통해 고난 받는 예수님의 모습이 잘 드러납니다.
지극히 작은 자들중 하나에게 해 준 것이 예수님 당신께 한 일이라 하지 않습니까?
곤경중에 있는 사람을 돕는 것이 바로 주님을 돕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곤경중에 있는 이들을 통해 우리의 도움을 청하는 주님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5.
영원한 생명의 길에 이르는 첫째가 ‘지금 여기 가까이를 주목하라’는 것입니다.
신명기의 모세가 옳은 처방을 줍니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계명은 너희에게 힘든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늘에 있지도 않다.
또 그것은 바다 건너편에 있지도 않다.
사실 그 말씀은 너희에게 아주 가까이 있다.
너희의 입과 너희의 마음에 있기 때문에, 너희가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일체의 변명이나 핑계를 봉쇄합니다.
몰라서 실천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알아도 실천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의 이중계명 같은 말씀은 공부하지 않아도 잘 들여다 보면 우리 마음 안에 새겨져 있고 우리 입에 있습니다.
어찌 말씀뿐입니까?
모든 문제의 답은 밖에 멀리있는 것이 아니라 안 가까이 있습니다.
어디나 하느님 계신 성지이니 굳이 멀리 성지 찾아 가지 않아도 됩니다.
외출한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바로 나라고, 여기에 하느님을 놔두고 밖에서 찾는다고 신비가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말합니다.
바로 여기가 하느님 계신 하늘 나라요, 하느님께 열린 하늘 문입니다.
곤경 중에 처한 이웃을 찾아 나설 것도 없으니
바로 자비의 눈만 열리면 내 가까이 주변에서 얼마든지 찾아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여 현자들의 ‘카르페 디엠!’, 지금 여기 현재를 살라는 간곡한 당부입니다.
6.
영원한 생명의 길에 이르는 두 번째는 ‘영적시야를 넓히라.’는 것입니다.
자기 도취, 자기 만족의 우물 안 개구리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행의 목적도 견문을, 즉 시야를 넓히는 데 있습니다.
일본을 무시하는 나라는 한국뿐이 없다는 말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삼면은 바다로 한면은 북한에 의해 포위된 지정학적 고립무원의 한국의 처지가 우물 안 개구리 식 편협한 사고를 키울 수 있습니다.
작금의 한국의 현실이 지극히 불길하고 위태롭다는 생각을 합니다.
정말 정신 바짝 차리고 우리의 처지를 직시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사제와 레위인은 그 영적시야가 완전히 차단되었습니다.
이런 저런 계율이나 율법은 충실히 지켰을지 몰라도 정작 하느님의 원하시는바를 몰랐습니다.
이런저런 선입견, 편견, 고정관념으로 차단된 시야입니다.
바로 종교인들의 취약점입니다.
한 마디로 사랑이 빠졌습니다.
반면 사마리아인의 영적 시야는 활짝 열려 있습니다.
이데오르기, 편견, 종교관념 등 시야를 차단하는 모든 색안경을 벗어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사람 현실을 보는 자비의 눈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의 시야요 수도생활을 통해 성취되어야할 경지입니다.
살아갈수록 너그러워지고 자비로워짐으로 드넓은 내적시야를 지닌 사람이 진정 영성가입니다.
토마스 머튼에 대한 평이 생각납니다.
‘그는 가톨릭 이전에 그리스도교인이었고,
그리스도교 이전에 종교인이었고,
종교인 이전에 사람이었다.’
그는 ‘관상가-경계인-보편인’의 발전경로를 말하여
궁극엔 좌우사방 내적시야가 활짝 열린 보편인을 최고의 경지로 칩니다.
바로 토마스 머튼 자신이 이 경지에 이르렀던 분입니다.
오늘 콜로새서의 그리스도 찬가가 우리의 내적시야를 한없이 넓혀 줍니다.
얼마나 웅장한 우주적 그리스도를 노래하는지요.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향하여 창조되었다는 고백입니다.
그리스도로부터 출발하여 그리스도로 수렴되는 우주 만물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리스도가 우주만물의 중심이자 의미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그리스도가 자랑스럽게도 당신 몸인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세계로, 우주만물로 활짝 열린 교회의 시야는 그대로 하느님의 시야입니다.
‘과연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그분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화해시키셨습니다.’
바로 이를 실감케 하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하여 우리의 영적시야를 넓혀주는 미사 은총에 감사해야 합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할 때
우리의 편협한 시야는 하느님의 시야를 닮아 날로 넓어질 것입니다.
7.
영원한 생명의 길에 이르는 셋째는 ‘연민의 사람,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가엾이 여기는 자비로운 연민의 마음은 값싼 동정이 아니라
함께 공감하고 동참하는 마음, 실행에 옮기는 마음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초주검이 된 사람을 지극 정성 간호하는 사마리아 사람의 미지막 부분의 묘사는 얼마나 감동적인지요.
감동적인 사마리아인의 예를 드신 후 예수님은 단도직입적으로 율법 교사에게 묻습니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 누가 강도를 만나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내 이웃이 누구인가’ 물을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되어 줄것인가’ 물으라는 것입니다.
곤경중에 있는 이들의 이웃이 되어 주라는 것입니다.
내 중심이 아니라 곤경중에 있는 이웃 중심이 되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만이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임을 깨닫습니다.
1. 멀리 밖에서가 아닌 지금 여기 가까이를 보십시오.
2. 내적시야를 부단히 넓히십시오.
3. 곤경중에 있는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이웃이 되십시오.
바로 이것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
자비하신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복음의 착한 사마리안처럼
갖가지 모습으로 곤경중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치유의 구원을 베풀어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루가 10,37ㄴ)
아멘.
- 성 베네딕토 수도회 성 요셉 수도원
♣ <굿뉴스> 매일미사 묵상글 담당 신부님의 묵상글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오늘 율법 교사의 질문에서 우리는 인간의 나약함과 두려움을 봅니다.
자신의 삶 안에서 늘 마주치는 불확실성과,
결국은 죽음을 맞이하게 될 인간의 한계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인간은 이 두려움을 이겨 내려고 하느님을 만나고 싶어 하고,
하느님 안에서 영원한 안식처를 얻을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찾던 하느님의 모습은 큰 변화를 겪게 됩니다.
하느님을 '절대적 타자', 곧 우리와 완전히 다른 분으로 인식했던 구약의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만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그분과의 계약, 곧 율법에 충실함으로써 구원을 얻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절대자이신 하느님께 바칠 만한 절대적 충실함은 오히려 인간에게 더 큰 짐을 지워 줍니다.
반면, 우리에게 다가오신 메시아는
우리와 완전히 다른 분이 아니고,
하느님의 모상이시면서 동시에 완벽하게 우리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이제 하느님께 드려야 할 봉헌도
율법 안에서의 완벽함이 아니라, 우리 일상에서 만나는 이웃들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착한 사마리아인은 비록 무시와 경멸을 당하는 사람이었지만,
종교적으로 거룩한 직분을 가진 이들이 그냥 스쳐 지나갔던 그 가엾은 사람에게 다가가 치료해 주고,
자기가 가진 것을 나누어 쉴 곳을 마련해 줍니다.
모든 것에 앞서 그의 근본적인 선택은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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