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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송화가족 원문보기 글쓴이: 송화
경북 경산시 7곳 전통사찰 소개합니다
경북 경산시 불굴사적멸보궁
불굴사는 신라 신문왕 10년(690) 원효스님에 의해 창건됐다. 그러나 그 뒤의 역사는 자세히 전하지 않고 있다. 다만 절 위의 암벽에 신비스러운 석굴이 있는데 이 석굴은 정 창건 이전에 원효대사가 득도한 석굴이라 해서 원효암(元曉庵), 또는 불암(佛庵)이라고도 불린다. 이 석굴은 또한 김유신 장군의 삼국통일 성취 기도처로도 알려져 있다. 아마도 ‘불굴사’라는 사명이 이러한 이유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이 후 화광당 한옥희대사가 주석 시 옥천암, 천성암, 청룡암 등 산내 12군데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조선조 중기만 하더라도 500동의 와가와 12암자, 8대의 물방아를 갖추고 쌀을 찧어 스님과 신도들의 공양미를 한 대사찰이라고 전해온다. 현재 암자 10개소와 물레방아 호박, 맷돌들이 발견되어 전하는 말이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 당시 왜구들에 의해 법당과 요사가 불타버린 뒤 여러 차례 중창 불사를 펼쳤으나 중수 관계는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조선 경종 3년(1723) 중창 후 영조 12년(1736) 병진 대홍수로 대형 산사태가 발생해 사찰이 거의 대파돼 쇠락하고 말았다.
불굴사의 이러한 쇠락에 관련하여 인근 강학리에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조선시대에 불교가 탄압을 받고 있을 때의 이야기다. 본래 불굴사는 굉장히 큰 절이었는데 절이 있는 계곡 안으로 들어가 보면 골짜기 마다 절이 있었고 밭이 곳곳에 있었다. 그때는 은해사도 불굴사의 말사였다.
그러나 불교가 탄압을 받기 시작하자 스님들은 일반 백성들에도 멸시를 받앗다. 지나가는 과객들도 절에 와서 괜히 스님을 업신여기고 밥 해달라, 뭐 해달라 하며 큰소리를 쳤다. 그러다가 조금만 잘못하면 덮어놓고 스님들을 때리기 일쑤였다. 불굴사는 이러한 과객들의 폐단이 깊었다. 그러나 스님들은 과객에게 항거할 수 없었다. 마침내 스님들은 참다 참다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었다. 그때 마침 한 점잖은 과객이 이 절에 들르자 스님들은 이 같은 폐단을 털어놓고 절에 손님이 적게 오는 방법이 없는지 물었다.
과객은 그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라면서 산 너머 솔밭에 가면 큰 거북돌이 하나 있는데 그 거북의 눈을 빼버리면 오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 절의 스님들은 과객들 때문에 워낙 지쳐 있었으므로 그 말을 듣고 좋아하며 거북의 눈을 빼버렸다. 그러자 청전 하늘에 갑자기 뇌성벽력이 치고 비가 쏟아지더니 이 산 저 산 다 떠내려와서 절이고 암자고 다 묻혀버리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러다 보니 이 절을 따르던 은해사 암자가 오히려 큰 절이 되고 불굴사는 결국 은해사의 부속 암자가 돼 버렸다.
원효암
원효암은 신라 문무왕 8년(668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해 수도했던 사찰로 알려져 있다. 그에 관한 문헌기록은 현재 전해오지 않으나 원효암 뒷산 기슭에 통일신라시대의 마애불이 남아 있고, 사찰 경내지에도 통일신라시대에 조성한 삼층석탑의 부재가 남아있어 원효암이 고찰임을 알 수 있다.
그 뒤의 자세한 연혁은 알려지지 않고 다만 고종 9년(1882) 긍월대사(亘月大師)가 중창했다고 전한다. 원래 대처승이 살고 있었으나 1860년 초 불교정화 당시 대처승을 내보내고 조계종에서 지금까지 조계종에서 관리해오고 있다.
근래에 들어와서는 1980년 대웅전과 산신각을 건립하고 사역을 정비했으나 1986년 초에 팔공산 일대에 대규모 산불이 발생해 전각을 소실하고 말았다. 이 후 1988년 극락전과 산령각을 다시 세워 지금까지 보존해오고 있다.
하양포교당
조계종 제10교구 본사 은해사 말사인 하양포교당은 창건시기나 창건자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어디에도 없다. 다만 조선 초기에 창건된 사찰로서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으로 인해 사찰로서의 본연의 임무를 상실한 채 유생들의 객사(客舍)로 함께 쓰여져 오다가 1927년 지석담(池石潭) 스님이 사찰의 재건을 위해 중수했다는 사실만 전해져 온다.
지석담 스님은 사찰의 중수와 아울러 은해사에서 부처님을 모셔와 봉안한 것이 지금까지 극락전 본존불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따라서 예전의 기록이 전무한 관계로 하양포교당의 창건주라고 하면 중창주인 지석담 스님이 보통 일컬어지고 있다.
이후 주지로서 알려진 고승으로는 고봉, 현고, 보원, 동관, 유곡스님 등이 주석했으며 지난 2001년 주지로 부임한 성본스님이 쇠락한 사역(寺域)을 정비하고자 5평 남짓한 극락전을 34평으로 신축하고, 칠성각 중․보수, 설법전 부처님 봉안, 공양간 건립 등 사격을 일신하고 포교에 매진하고 있다.
안흥사
1.창건배경 및 역사와 설화
안흥사는 원래 경산시 남천면 협석리 잡수골 백자산 자락에 위치한 신라 고찰이었는데 자세한 사역을 알 길이 없다. 해방 후 한국전쟁으로 가람이 소실되어 경산시 백천동으로 다시 중창했다가 다시 1965년 삼남동으로 사찰의 위치를 옮겼다. 그러나 사세가 기울어 유지를 못하다가 1971년 3월 현재의 위치로 옮겨 작은 전각을 짓고 명맥을 이어갔다.
최근에는 1994년 대적광전을 지었으며 2001년 경산불교회관을 지어 지역포교에 힘쓰고 있다. 경산불교회관에서는 초심자 교육, 기초교리 강좌를 비롯해 요가, 다도 등 불자들을 위한 강좌를 상시 운영하고 있다.
경흥사
경흥사는 신라 무열왕 6년(659) 원효스님의 스승이라 일컬어지고 있는 혜공(惠空)스님에 의해 창건됐다. 창건한 이후 여러 차례 중건이 있었으나 중창 직후의 화재로 인해 건물이 소실됐다고 전한다.
창건에 대해서는 조선 인조 15년인 1637년에 창건했다는 설이 있다. 이는 1990년 10월 경흥사 법당 해체 복원 중 상량도리 중앙부에서 발견된 상량문에서 비롯됐는데 ‘영좌경산남면동학산경흥사삼창기(嶺左慶山南面東鶴山慶興寺三創記)’와 ‘숭정2년6월 일 경흥사신창기(崇禎二年六月 日 慶興士新創記)’, ‘강희58년기해2월 일 법당중수이시창내증(康熙五十八年己亥二月 日 法堂重修而始創乃會贈)’ 등이다.
경흥사의 창건연대를 밝혀주는 신창기의 연호가 숭정(崇禎) 2년 정축(丁丑)이 아니고 숭덕 2년 정축(1637년)이라는 것인데 이는 건양 2년(丁丑) 삼창시에 연호를 잘못 옮겨 적은데서 비롯됐다고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 경흥사의 신창기는 신창이 아니라 중창일 것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의승군(義僧軍)들을 이 곳에서 최초로 훈련을 시켜 전쟁에 참가토록 했는데 당시 의승군의 숫자가 700-800명 정도 되었다고 전한다.
1990년 대웅전에 봉안하였던 주불의 복장에서 발견된 동고 서사선(東皐 徐思選)이 1644년 쓴 사적기에 의하면 원래 경흥사는 주변에 4-5개의 부속 암자가 있었다고 하였고, 임진왜란으로 사찰이 전소되기 이전만 하더라도 현재의 가람 동편을 중심으로 큰 가람이 배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또 여기에는 수십 명의 학승들이 상주하였던 곳으로 되어 있다.
한때는 절에서 먹는 쌀을 씻은 쌀뜨물이 아래 마을까지 매일같이 흘러 내려올 정도로 경흥사에 사는 스님들이 많았다고 전한다.
제석사
제석사는 신라시대 원효스님이 태어난 곳에 지어졌던 사라사가 폐사 되었다가 약 400여년 전 한 농부가 이곳 주변에서 밭갈이를 하던 중 불상과 탑신 등이 발견되어 절을 짓게 되었다고 한다. ‘한국사찰전서’에 의하면 1625(인조3년)년 유찬(惟贊)이 창건하였고, 1802년(순조2년) 거사 손대권이 중창하였으며, 1910년 월파(月波)가 중창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뒤 1993년 만호(萬湖)가 중수하였다.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절이 쇠락하여 빈터였는데, 1962년 이곳에 대웅전을 다시 중건하고 ,1965년에 칠성각도 중건하였다. 1977년 제석사 주변에 인가가 꽉 들어 차 담장을 세우면서 현 칠성각 서편 60cm정도의 땅속에서 기와조각 사이에서 금불상이 출토되었으나 현재는 그 불상의 행방을 알 수 없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과 삼성각, 요사, 그리고 적연스님이 2004년 중건하여 2006년 원효스님 팔상도를 봉안한 원효성사전이 있다.
반룡사
반룡사의 창건 시기 및 청건주에 대해서는 661년(문무왕1) 원효스님이 창건했다는 설과 고려시대 원응(圓應)국사가 창건했다는 설리 유력하다. 원응국사는 청도 운문사를 중창한 뒤 이 곳에 와서 신흥암(新興庵)이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고 한다. 또 신라의 심지(心地)왕사가 창건했다는 설도 있으나 자세한 내용은 전해오고 있지 않다.
그러나 여러 설 중에 가장 힘을 얻고 있는 창건설은 원효대사 창건설이며 원응국사는 중창주로 봐야 옳다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 이유는 이 곳이 설총과 갚은 연관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원래는 경산 압량부 출신인 원효대사가 경주로 가는 지름길인 왕재 아래에 이 절을 창건했다고 전한다. 왕재는 용성면 육동지구의 용천 1동과 용전리를 경계하는 구룡산의 지산인 반룡산 깊은 계곡을 오르는 오솔길 중 하나를 일컫는 말이다. 일설에는 산 정산에 어느 왕의 태를 묻었다하며, 왕의 태를 묻었던 고개라 하여 왕재라 칭하여 진다고도 한다. 이 곳 왕재와 설총과의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아래와 같다.
때는 통일신라대 직전, 원효의 고향인 경산에 만삭이 된 신라 무열왕 인 요석공주가 남편 원효를 만나기 위하여 원효의 고향 집 초개사를 찾았으나 이에 원효가 만나주지 않자 당황한 나머지 요석공주는 원효를 만나지 못하고 원효의 고향인 불지촌에서 설총을 출산하였다고 한다. 막상 아기는 출산하였지만 양육하기가 어려웠던 요석공주는 주변의 스님들의 안내로 지금의 용성면 용전리 소재 반룡사에 머물게 되었고, 이곳에서 설총은 유아기를 요석공주와 함께 보내었다고 한다.
그때 신라의 무열왕 내외는 몰래 경주에서 산내 지역을 거쳐 지금의 왕재를 통하여 반룡사 뒷산을 넘어 딸 요석공주와 손자 설총을 만났다는데, 신라왕의 내외가 이 산을 넘어왔다 하여 붙어진 이름이 곧 왕재란 이름이다.
그러나 이 설화에도 의문점이 많다. 어찌하여 신라의 왕이 한참 전쟁시기인 때에 공주를 만나기 위하여 첩첩산중에 위험을 무릅쓰고 친행을 할 수 있었나 하는 문제다. 말하지만 전설은 전설인 만치 반룡사 또한 초창이 원효대사이고 보면 예사롭지만은 아니한 인연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한 ‘동국여지승람’을 보면 고려의 석학 이인로(李仁老)가 반룡사에서 읊은 ‘반룡사시’에 이 곳을 동도(東都)라고 칭한 것을 보면 경주의 직할지가 아니었던가 한다.
고려로 접어들면서 반룡사는 문종 때 원응국사가 주석하면서 대중창을 하면서 각지의 고승대덕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해동 3반룡사(평양, 경산 자인, 고령)’로 이름이 높았다. 고려 말기의 몽고의 난리 등 어지러운 시대를 지나 조선시대에 들어서 반룡사는 쇠퇴일로를 걷다가 급기야 임진왜란을 만나 대가람이 하루아침에 소실되고 말았다.
그 후 조선 인조 19년(1641)에 계운(戒云),명언(明彦)대사가 일대 중창을 했으며 당시 다섯 암자였던 내원암(內院庵), 취운암(翠雲庵), 대적암(大寂庵), 은선암(隱仙庵), 안적암(安寂庵)도 함께 중창 또는 창건했다. 각 암자의 위치를 따져보면 반룡사를 기준으로 내원암은 동으로 400m, 대적암은 동으로 800m, 은선암은 동으로 1200m, 거리에 각각 위치하며 취운암은 북쪽 100보 거리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런데 1996년 중앙승가대학교에서 실시한 반룡사 주변조사 결과 반룡사의 동쪽과 동남쪽에서 암자터 2개소와 1개소의 부도군지가 확인돼 5개 산내암자의 실재를 가늠케 하고 있다.
이와 같은 중창은 1641부터 60여년간 진행됐는데 반룡사는 무려 26개의 전각, 당우, 문루 등이 건립되었다. 이 정도의 규모라면 17세기에 존재했던 국내 어느 사찰에 비해 결코 크게 뒤지지 않는 사격에 해당된다. 그리하여 17세기의 중창을 계기로 거대한 사찰의 위상을 갖추어 가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경상도읍지’를 보면 산내암자인 내원암을 포함해 선당(禪堂), 승당(僧堂), 대광정(大光殿), 가허루(駕虛樓), 관음전(觀音殿), 원음전(圓音殿), 향적루(香積樓), 해탈문(解脫門), 영우전(影于殿), 해운당(海雲堂), 제월루(霽月樓), 명월당(明月堂), 만월루(滿月樓), 법성료(法性寮), 원융료(圓融寮), 천왕문(天王門), 명부전(冥府殿), 팔상각(八相閣), 홍려전(鴻廬殿), 무상원(無常院), 극락전(極樂殿), 내향각(內香閣), 외향각(外香閣), 봉황문(鳳凰門), 금강문(金剛門) 등 25개의 전각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러한 전각은 연차적으로 건립되었던 것인데, 이러한 규모라면 반룡사가 18세기에는 거찰로 존속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