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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창조, 첫날에서 셋째 날(2)
창 1:1-13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4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5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6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8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9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0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1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12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3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
< 설 교 >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말씀
창 1장 1절 / 홍정길 목사
성경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일하시는 그분의 모습을 보여 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일하셨습니다. “빛이 있으라”하시니 빛이 생겼습니다. 말씀이라 함은 대응하는 실제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소리에 불과합니다. 탁자라는 말에 실제로 탁자라는 사물이 없다면 그것은 허공에 울리는 소리일 뿐임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인격자이십니다. 인격자라는 말은 자기의 말에 책임을 진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사는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인격자 되심과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믿습니다. 우리가 인격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사실 그 말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믿을 만한데 말은 못 믿겠다’라는 표현은 불가능합니다. 말이 곧 인격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말씀대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갈릴리 가나에서 예수님을 이 땅에 처음 소개한 마리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 앞에서 선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은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인격자이신 하나님께서 성경 말씀은 그냥 서술된 글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됐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세상의 모든 책과 차별을 두는 말씀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된 말씀. 바로 우리가 붙잡은 이 성경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지혜를 가르쳐 줍니다. 그래서 구원을 이야기 하려면 반드시 말씀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거기에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우리의 삶 속에 구체적으로 인생에 대한 교훈, 책망, 바르게 하고 의로 교육함으로 역사합니다.
성경은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하는지 교훈을 줍니다. 이 교훈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만드는 길이 성경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열심히 공부하면서도 실제로 살아보면 내가 말했던,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인생이 나인 것을 봅니다. 많은 사람이 자기가 옳은 생각을 했다고 자기가 옳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바른 생각을 하지만 나쁜 사람이 훨씬 더 많은 것이 이 세상의 현실입니다. 이런 우리를 성경은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해줍니다. 이는 성경이 갖는 놀라운 능력이고 힘이며 권세입니다.
오늘은 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교훈과 책망,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함이 역사에서 어떻게 실제로 드러나고 검증되었는지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본과 생명으로 삼아 이상적인 사회에 근접한 국가를 이룬 나라들이 있습니다. 일부 유럽의 국가들과 미국입니다. 이들은 복음주의 루터파와 칼빈파 개혁주의 교회 그리고 청교도 신앙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나라입니다. 물론 이들이 처음부터 이상적인 국가는 아니었습니다. 몇 백 년의 과정을 통해서 차츰 변모되고 발전했습니다. 때로는 전쟁 때문에 엄청난 피해와 고통이 있었지만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마음속에 품었던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염원했던 국가의 모습은 크게 네 가지 분야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정치입니다.
미국이 독립한다고 했을 때 유럽의 많은 나라가 걱정했습니다. 왕이 없는데 어떻게 질서를 유지할 수 있을지 몹시 걱정했습니다. 미국의 청교도들이 독립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리고 곧 지도자를 세우기 위해 투표를 하여 선출된 당선자를 대통령이라는 칭호를 붙여서 세웠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그때까지만 해도 완전치 못한 법으로 국가를 경영했기에 사람들은 왕을 뽑는다는 생각으로 대통령 선거에 투표했습니다. 초대 대통령으로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이 당선되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임기 당시에 대통령이 사임 의사를 밝혔습니다. 많은 사람이 혼란스러워하며 대통령의 자녀가 임직을 이어 받든지, 아니면 크롬웰처럼 당신의 대 때까지 만이라도 다스려 달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조지 워싱턴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우리 교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장로교회 헌법은 임직 기간이 3년입니다. 장로나 목사가 투표에서 위임이 되면 3년 후 재투표를 합니다. 대통령 임기 역시 그러해야 합니다.”
당시 미국의 교회는 임기 후에 재신임되지 않으면 다시 직분을 맡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교회의 전통이 곧 미국 정치에도 적용되어 초대 대통령이었던 조지 워싱턴은 대통령 직을 두 번 역임하고 물러납니다. 이것이 자유민주주의 미합중국의 시작입니다. 미국은 그들에게 익숙한 교회의 삶과 규범을 사회와 정치의 근간으로 삼아 가장 대표적인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따랐던 순종의 열매입니다.
두 번째로 경제입니다.
누가복음 12장 42절에 ‘선한 청지기’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선한 청지기란 ‘맡은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생애에 많은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은사를 내 것으로 여기지 않고 소중히 여기며 맡기신 일을 행해야 합니다.
세상 이치에 장사하여 이윤을 남기면 그 돈은 내 것입니다. 여기 세계 3대 상인이라 불리는 재리에 밝은 대표적인 상인들이 있습니다. 중국 상인, 아라비아 상인, 인도 상인 입니다. 이들은 장사 수단이 매우 뛰어났을 뿐 아니라, 돈을 버는 과정을 자세히 기록했기에 예로부터 해당 국가는 수학이 발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이에 비교하여 네덜란드 개혁교회 청교도들은 돈을 잘 버는 과정을 상세하고 오류 없이 기록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모든 돈이 내 것이 아니라 여기며 청지기의 자세로 수익의 사용처도 기록하여 재물을 바르게 사용했습니다. 그러자 유럽의 많은 부유한 상인들이 이들의 투명한 경영 자세를 보고 자산을 맡겨 투자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모든 것을 기록하여 투명하게 하니까 사람들이 신뢰합니다. 이 신뢰는 어떤 재산보다 큰 재산이 되어서 네덜란드는 세계에서 가장 큰 부가 모여들어 세계를 관리하는 나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본인이 대학 당시에 읽었던 막스 웨버(Max Weber)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책에 기록된 이야기입니다. 네덜란드인들의 철두철미한 청지기 정신은 오늘 세계 자본주의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세 번째로 교육입니다.
코메니우스(Johann Comenius)는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태어나 목사로 사역하다가, 30년 전쟁으로 황폐하게 된 보헤미아에 거주하면서 그곳에 모여든 고아들을 모아 함께 생활하며 교육을 했습니다. 그는 이전에 없던 새로운 방식으로 아이들을 교육했습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에베소서 6:4)
아이들을 가르칠 때 그들의 영혼이 상하거나 노엽지 않도록 했습니다. 코메니우스 이전까지 교육이란 수도원에 맡겨져 매로 엄하게 다스려지는 것이었습니다. 전혀 아이들의 인격을 존중하지 않았습니다. 코메니우스는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않고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라는 말씀을 교육을 통해 삶으로 실천했습니다. 그리고 200년 후에 스위스에서 페스탈로치가 그 정신을 계승하여 교육을 발전시킵니다. 이렇듯 현대교육은 코메니우스에 의해서 발전되었는데 이는 성경 말씀의 실제적인 적용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넷째, 이전 세계는 노예의 나라였습니다.
지구상에 얼마나 많은 노예가 존재했는지 모릅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조선시대 전 국민의 40%가 종의 신분이었다고 합니다. 노예는 물건처럼 사고파는 것이었고, 주인이 어떤 학대를 해도 도무지 문제가 되지 않는 물건에 불과했습니다. 소유물이었습니다.
노예제도의 부조리함은 백인 노예 문제 해결로 점차 개선된 듯했으나, 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데려와 일을 시켰던 흑인 노예들의 문제는 여전했습니다. 엄청난 학대로 얻게 된 노예들의 노동력으로 영국은 근대산업사회의 시작인 산업혁명 시대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번성한 산업을 바탕으로 오대양 육대주를 식민지배하는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노예는 모든 힘들고 어려운 일의 에너지원이었습니다.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는 이런 사회는 하나님의 말씀과 전혀 일치하지 않음을 깨닫고 자리에서 일어나 노예제도 폐지를 주장합니다. 그러자 그는 국익을 생각하지 않는 공상주의자이자 매국노라 불리며 수차례 생명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1789년 5월 12일 윌버포스가 노예제도 폐지를 하원에서 역설했습니다. 그리고 숱한 노력으로 1807년에는 노예무역 폐지 법안이 통과되고, 마침내 1833년 7월 26일, 영국의 모든 노예를 1년 내에 해방한다는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병상에서 이 소식을 듣게 된 윌버포스는 있는 힘을 다하여 침대에서 일어나 “주여, 이 날을 나로 보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울면서 하나님께 찬양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기쁨 속에서 사흘 뒤에 소천했습니다.
1863년 1월 1일, 미국 워싱턴D.C.에서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 대통령은 노예제도 폐지를 결정하는 선언문을 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평생에 이 선언서에 서명한 것보다 더 옳은 일을 한 것이 없습니다. 지구상에서 노예제도가 공식적으로 폐지되었음이 선언된 날입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라디아서 3:28)
주님의 말씀이 이런 신실한 사람들의 헌신 된 생애를 통해서 역사, 곧 사실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어떤 큰 업적을 이룬 결과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믿음의 사람들이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에 생겨난 결과입니다.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신명기 30:14)
사실 사회-삶의 문제란 불가사의하고도 신비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살아가는 자연스러운 이 보통의 삶이 바뀌지 않아서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가 엄청난 비밀을 몰라서 잘못 사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하며 누구든지 아는 것들을 순종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앞서 설명해 드렸던 정치, 경제, 교육, 신분제도 이 네 가지 분야에서만 봐도 결국 개념으로만 있었지 실제로 우리 안에서 이 귀한 것들이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말은 말대로, 현실은 현실대로 괴리가 있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주께서 하신 말씀이 실제가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성경 말씀이 국민의 문화를 지배하고 삶의 바탕이 됐을 때 비로소 귀하고 아름다운 축복이 우리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윌리엄 윌버포스는 ‘참된 기독교’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독교는 가진 자에게 베풀라고 가르친다. 권력자에게 겸허하게 직책에 맞는 책임을 다하라고 가르친다. 겸허한 마음을 가져 부유함을 자랑하지 말며, 권력을 남용하지 말 것이다. 그러면 불평등으로 사회가 갈등을 겪는 일이 줄어든다. … 기독교는 또한 장차 모든 인간을 차별 없이 살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 하지만 이름뿐인 기독교는 이런 일을 실천할 수 없다. 참된 기독교만이 그럴 수 있다. 겉보기로의 기독교가 아니라, 속으로의 기독교가 그럴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선한 일들이 실현되고, 정치가 부패하지 않게 하려면, 참된 믿음을 배양해야만 한다.”
한국교회가 성경공부를 참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도 안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말씀의 아름다운 것과 영광스러운 것이 따로, 우리의 불순종이 따로, 물과 기름이 하나가 되지 못 하는 것처럼 모든 성경공부와 제자훈련이 말씀이 육신이 된 우리 주님처럼 우리의 삶 속에 실제가 되지 못했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제자들 앞에 무릎을 꿇으시고 발을 씻겨주신 다음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나를 본받아서 발을 씻겨주는 인생을 살아라.”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은 자 된 것처럼 너희도 나를 본받으라.”
삶은 이론에 의해서 전수되는 것이 아니라 본에 의해서 전수됩니다. 성경의 많은 위대한 왕과 제사장들의 자녀들이 부모와 매일 함께하며 본으로 가르침을 받는 이 삶이 없어 실패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날마다 삶을 주고받고 전수했던 한 가족이 있습니다. 이 가족이 삶을 전수하는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도다.’
우리가 바로 사는 것의 유무는 우리 자식들이 제일 잘 압니다. 바통터치를 하려고 했는데 아니거든요? 많은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가 믿음의 선배나 아빠, 엄마가 터치하는 복음이 진짜가 아니라고 여겨지기에 교회를, 성경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나라를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더 말씀에 참여합시다. 내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진정한 축복을 전수하고 싶으십니까? 그 축복은 말씀이 드러난 삶의 본으로만 전해집니다. 우리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우리가 살아갈 때, 우리 가정은 복될 것이고, 이 나라는 영광스러운 나라로, 구원이 필요한 세상의 빛이 되는 나라가 될 줄로 믿습니다.
모든 것의 시작
창 1장 1~2절 / 이재훈목사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던지는 질문이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입니다. 이 질문은 사춘기 방황의 시절에 호기심으로 한번 던져 보는 게 아닙니다. 인간이 반드시 대면해야 할 질문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시작을 알고자 하는 이유는 시작을 아는 게 자신을 올바르게 아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고난을 당할 때 이 질문을 합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앞에 서 있을 때 이 질문을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에 이르기 전에 포기하고 맙니다. 방황하다가 끝나고 맙니다. 세찬 강물에 떠내려가는 통나무처럼 이 세상의 강물에 떠내려가듯 살고 맙니다. 깊은 고난 속에서 고난의 이유를 알고자 했던 욥도 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왜 이 고난이 나에게 주어졌습니까?”라는 질문을 파헤쳐 가면서 결국 이르게 된 것이 자신의 존재 이유입니다. 욥이 “나는 왜 여기 있는 것인가?”라고 질문했을 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대답하셨습니다.
“‘알지도 못하면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사람이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나서라. 내가 네게 물을 테니 내게 대답해 보아라.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네가 어디 있었느냐? 아는 게 있으면 말해 보아라. 누가 그 크기를 정했느냐? 네가 아느냐? 또 누가 그 위에 줄을 쳤느냐? 그 단단한 기초는 무엇 위에 세웠느냐? 모퉁잇돌은 누가 놓았느냐?’”(욥 38:2~6).
“빛의 근원지로 가는 길이 어디냐? 어둠이 있는 자리는 어디냐? 네가 그것들을 제자리로 데려갈 수 있느냐? 그것들의 집으로 가는 길을 아느냐?”(욥 38:19~20).
하나님의 질문이 폭포수처럼 쏟아집니다. 그 질문은 욥이 원하는 대답과 동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욥의 질문에 오히려 질문으로 대답하셨습니다. 그 질문의 요지는 “만물의 시작을 네 스스로의 능력으로 알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람의 능력으로 자신의 시작을 알 수 없다는 것에서 출발해야 고난이 해석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질문의 대답을 찾는데 실패하는 이유는 인간은 자신이 존재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사실만 인식할 수 있고, 그 때부터만 알 수 있기에 자신의 시작을 스스로 능력으로 알고자 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철학적 사고나 과학적 연구로도 인간은 그 시작을 명백하게 알 수 없습니다. 피조물의 모든 원리 자체가 창조에 의해 생겨난 이후 결과이므로 창조 그 자체를 설명하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과학이 제시하는 어떤 자료나 이론은 얼마든지 수정될 수 있고,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 그 자체에 대한 궁극적인 설명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창조의 광대함과 신비함은 과학이 모두 설명할 수 없습니다. 오직 모든 것을 시작하게 하신 하나님이 주신 계시와 말씀의 증거를 통해서만 그 시작의 이유와 비밀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말씀은 이 모든 것의 시작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과학적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닙니다. 우리의 호기심을 만족시켜주는 대답도 아닙니다. 오직 창조주 하나님이 만물을 시작하셨다는 계시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을 증거
“하나님께서 태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1절).
성경은 모든 것을 시작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증거합니다. 성경은 모든 것의 시작을 ‘창조’라는 단어로 표현합니다. 히브리어에서 ‘창조’를 의미하는 세 가지 동사가 있습니다. 첫째, ‘바라’라는 동사는 무(無)에서 유(有)의 창조로 이루어집니다. 이 동사의 주어는 언제나 하나님입니다. ‘아싸’라는 단어는 이미 존재하는 물질을 가지고 다른 물질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어로 ‘바라’는 ‘create’라는 단어를 쓰고, ‘아싸’는 ‘make’라는 동사로 구분해서 사용합니다. 우리말로는 ‘만들다’는 표현으로 쓸 수 있습니다. 또 ‘야차르’라는 동사는 특별한 목적에 따라 기존의 물질을 새롭게 조성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가장 먼저 무에서 유를 창조할 때 쓰는 단어를 썼습니다. 하나님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으로부터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있던 어떤 존재나 재료를 가지고 세상을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개역개정에서는 “땅이 혼돈하며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라는 단어를 씀으로써 이미 어떤 물질이 있었던 것처럼 표현하지만, 이것은 “형태가 없고 비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말 번역이 훨씬 낫습니다. NIV도 ‘비어 있다(empty)’고 썼습니다. 무를 어떻게 표현하겠습니까?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모든 것이 만들어진 것을 설명할 때 “형태가 없고 비어 있었다”는 표현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우연히 자연발생으로 생겨났다고 주장합니다. 또 이미 존재했던 어떤 물질로부터 우발적으로 형성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상태에서 창조를 통해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예술가들이 무엇인가를 만들 때 대개 어떤 재료를 가지고 작품을 만듭니다. 재료의 제한을 받게 됩니다. 아무리 창의적인 아이디어라도 재료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재료를 가지고 창조하지 않으시고, 무로부터 창조하셨기에 아무런 제한을 받지 않으시고 완전한 자유로 창조를 이루셨습니다. 모든 피조물에는 창조주의 흔적이 남겨져 있습니다. 아주 작은 생물, 미생물일지라도 하나님의 창조 흔적이 담겨 있습니다. 모든 것을 시작하신 하나님이 무로부터 유를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늘과 땅, 초월적, 실제적 영역을 포함
모든 것이 시작된 태초(in the beginning)가 존재합니다. ‘태초에’라는 단어는 ‘시작’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표현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표현, 인간을 위한 표현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은 “태초에 하나님이 계셨더라”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시간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시작 시점이 있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만물은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인간도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작과 끝이 없는 분입니다. ‘태초에’라는 표현은 창조의 정확한 시간, 연대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창조가 구체적으로 몇 년 전에 되었는지를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존재하게 된 시작이 있었다”, “그 시간의 출발이 있었다”고 말씀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역사 너머에 시작과 끝이 없으신 영원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만물이 시작되었고, 우리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게 이 말씀의 의미입니다.
또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늘과 땅은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를 의미합니다. 하늘과 땅은 우리 눈에 보이는 대기권과 우리가 딛고 있는 흙이 있는 땅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초월적인 세계, 보이지 않는 세계를 포함한 모든 초월적 영역,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실제의 영역을 포함한 것을 ‘하늘과 땅’이라고 한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 초월적인 세계와 우리가 경험하는 실제의 세계 모든 것의 창조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주기도문에서 가르쳐 주신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할 때 그 ‘하늘’과 ‘땅’은 대기권의 하늘과 우리가 딛고 있는 땅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영적 실제, 초월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뜻이 오늘 삶 속에,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랄 때 ‘하늘과 땅’이 같이 나옵니다. <골로새서> 1장 16절에서도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들, 곧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이라고 합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들’에 이어서 ‘곧’이라고 한 것은 해석입니다. 즉, 하늘과 땅은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이라는 뜻입니다. 이 해석을 근거해서 <니케아 신경>에서는 하늘과 땅이라는 표현이 쓰이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이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모든 것’이라는 표현을 한 것입니다.
창조는 ‘삼위일체 하나님’ 사랑의 열매
<창세기> 1장 1절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시작한 시점이 있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창조로 시작되었다는 것을 선포합니다.
“땅은 형태가 없고 비어 있었으며 어둠이 깊은 물 위에 있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움직이고 계셨습니다”(2절).
<창세기> 1장 1절에서 “하나님께서 태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선포하고, 2절에서는 땅에 집중합니다. 1절에서는 ‘하늘과 땅’이 나오고, 2절에서는 하늘이 언급되지 않고 땅만 언급됩니다. 1절은 모든 것의 창조에 초점을 두었다면, 2절에서는 땅의 창조에 집중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창세기> 1장 2~3절 이하에 나오는 하나님의 창조가 지구 중심의 창조를 설명한다는 의미입니다.
<창세기> 1장 1절과 2절은 1절의 결과로 2절이 되었다는 게 아닙니다. 어떤 연구자들은 ‘혼돈하여 공허하다’는 단어가 굉장히 부정적인 단어로 사용되었기에 1절과 2절에 큰 간격이 있었을 거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그 해석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창세기> 1장 1절과 2절 사이에 있는 많은 공백을 우리가 상상하며 해석하도록 하나님이 말씀을 기록하시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셨는데 그 결과가 공허하고 혼돈하다면 하나님 능력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하늘과 땅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는 설명 이후 2절부터 땅의 창조에 초점을 두고 설명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 1절과 2절은 시간적인 순서가 아니라 서술적인, 주제상의 순서라고 해석해야 합니다. 형태가 없고 비어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이 땅의 창조를 이뤄가는 과정을 설명했다고 해석해야 합니다. 형태가 없고 비어 있는 상태에서 3절 이하에 오는 6일 창조가 어떻게 형태를 만들고, 거기에 하나님이 내용을 채우시는 창조를 이루셨는지를 설명하는 표현입니다. 이 말씀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를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창조는 ‘삼위일체 하나님’ 사랑의 열매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 1~3절을 시간적인 관점으로, 우리의 생각으로 해석하면 늪에 빠집니다.
창조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을 알리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엘로힘, 성부 하나님입니다. <골로새서> 1장 16절에 보면 “만물이 아들로 인해 창조됐고 아들을 위해 창조됐습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 2절을 보면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움직이고 계셨습니다”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장 1~3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분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해 지음 받았으며 그분 없이 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요 1:1~3).
여기서 ‘그분’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이 계셨다’고 말하고,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셨다고 합니다. 만물이 그분을 통해 지음을 받았다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3절부터 어떻게 창조가 이루어집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성자 그리스도를 통해서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골로새서> 1장과 <요한복음> 1장 말씀과 맥락을 같이 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통해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말씀과 성령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시작하신 이유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고, 하나님만 계셨고, 삼위일체로 존재하신 하나님이 외로워서가 아닙니다. 의지할 대상을 찾으신 것도 아닙니다. 도움이 필요해서가 아닙니다. 도리어 하나님을 의존할 대상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의존할 대상을 창조하신 게 아니라 하나님을 의존하며 존재하는 대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 속의 사랑, 성령 안에서 그 아들과 누리시는 사랑, 그 사랑이 흘러넘쳐 창조하셨고, 그 사랑을 받아 누리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올려 드릴 대상을 창조하셨습니다. 만물, 모든 것이라는 창조가 나 한 사람, 나같이 작은 존재까지 연결되어 있습니다. 말씀과 성령으로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말씀과 성령으로 찾아오시고 붙잡고 계십니다.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창조의 신앙입니다.
“태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조주의 증언, 선언 그리고 대답
<창세기> 1장 1절 “하나님께서 태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는 말씀은 창조주의 증언입니다. 창조의 유일한 목격자가 계십니다. 창조주 그분입니다. 모든 창조를 이루신 하나님이 창조 역사를 증언으로 성령 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기록하셨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증언입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라는 말씀은 창조주의 선언입니다. 성경은 창조를 증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도 증명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단지 하나님이 하신 일을 선언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신을 증명할 필요가 없으신 분입니다. 모든 것의 시작을 이루신 하나님이심을 선언할 뿐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무신론을 거부합니다. 하나님의 존재, 창조주의 존재를 당연한 사실로 선언하기 때문입니다. 또 말씀은 유물론을 배격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만물과 구별된 하나님을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범신론을 배격합니다.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은 인격적인 분이기 때문입니다. 초월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가지는 종교, 철학, 사상, 신에 대한 관념 등 모든 것과 구별되는 게 하나님의 창조입니다. 선언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는 말씀은 창조주의 대답입니다. 하나님이 태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질문의 대답입니다. “너는 지음 받은 존재이다.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시작하게 하신 하나님의 창조의 결과다. 우리는 그분을 의지해야만 하는 피조물이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우연히 존재하는 존재가 아니다”라는 창조주의 대답입니다. 사람들이 오랜 시간 우연히 존재했다고 하는 막연한 대답을 하면 막연한 인생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피조물을 신격화합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 새겨진 하나님의 흔적, 창조주의 솜씨를 하나님께 돌리지 않으면 피조물 자체를 신격화합니다. 그래서 우상숭배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우상숭배를 가리켜 ‘인간의 자기기만이요 자기모순’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모든 피조물 가운데 가장 분명하게 하나님의 흔적이 나타나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으면 인간을 우상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창세기> 1장 두 구절의 창조 기록을 자신의 증언, 선언, 대답으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때로 사람들은 창조를 분석하면서 지적 호기심을 만족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사랑하고, 기뻐하고, 감탄하고, 예배드려야 합니다. 이 말씀은 논란의 대상이 아니라 순종의 내용이어야 합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하나님은 무로부터 세상을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당신이 무가 되지 않는 이상 하나님은 당신에게서 아무것도 만드실 수 없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없으면 아무것도 닌 존재가 될 때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영광 받으실 것입니다. 만물이 창조된 것을 말씀하는데 단 한 절이면 충분했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이 만들어진 창조를 설명하는데 1장의 30절이면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주제가 얼마나 심오합니까? 말씀이 단순한데 그 범위가 얼마나 광대합니까? 그런데 그 표현이 얼마나 간결하고, 과학적으로 얼마나 정확합니까? 전문적인 용어가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시작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합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하나님이 태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입니다. 창조가 우리의 모든 사고와 행동의 출발이고, 기초가 될 때 우리는 자신을 깨닫고, 창조주 하나님을 더 알게 되고, 우상에서 벗어나고, 올바른 역사의식을 갖게 되고, 참된 지혜를 가지고 살게 됩니다. <전도서> 12장에서 미래를 꿈꾸는 청년들에게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고 말씀합니다. 미래를 꿈꾸라고 하지 않고 기억하라고 합니다. 창조자를 기억하는 것이 참으로 우리에게 축복된 미래를 가져오는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창조자를 기억하며, 하나님의 지혜로운 백성으로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성경적 창조론을 대적하는 세 가지 이론
피영민목사 / 창세기 1:1~5
서론
제가 처음 설교를 시작할 때 괴로웠던 것은 매주 설교할 본문을 정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창세기 1장부터 차례대로 설교하니까 그런 고민이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순서대로 하니까 내용이 연결되어 성경 전체를 공부하고 자료를 만드는데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말라기까지 모두 마치고 오늘은 다시 창세기 1장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럼 신약은 언제 하느냐? 주일 찬양예배와 수요 예배에 하고 있습니다. 주일 낮예배만 나오시는 분들은 성경을 편식하게 되므로 주일 찬양예배와 수요 예배도 나오시기 바랍니다.
창세기 1장의 내용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첫째 날부터 셋째 날까지 창조하시고, 넷째 날부터 여섯째 날은 창조하신 것을 채우셨습니다. 첫째 날은 하나님께서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태양보다 빛을 먼저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둠을 밤이라 칭하셨습니다. 둘째 날은 물 가운데 궁창을 두어 하늘이라 칭하고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셨습니다. 셋째 날은 궁창 아래 있는 물을 한곳으로 모아 드러난 뭍을 육지라 하였습니다. 넷째 날은 첫째 날 빛을 창조하신 것에 맞춰 낮을 주관하기 위해 해를 지으시고 밤을 주관하기 위해 달과 별을 지으셨습니다. 다섯째 날은 하늘에 날아다니는 새를 지으시고 궁창 아래 있는 물에 사는 물고기를 지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여섯째 날은 셋째 날 지으신 육지에 거하는 육축과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일곱째 날에는 안식하셨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수많은 불신자들과 과학자들이 이 진리를 조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믿는 것은 종교적인 맹신이지 과학적인 사실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진화론에 관한 여러 가지 증거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20세기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진화론을 주장하는 과학자들의 기세에 눌려 성경의 진리를 진화론자들의 말과 조화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20세기 중반에 일어난 소위 ‘신복음주의’라는 사상은 창세기 1장에 나오는 하루를 오랜 세월을 의미하는 단어로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화론과 성경을 섞어 만든 ‘유신론적 진화론’인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하루 24시간인 엿새 동안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셨고 그러므로 지금 존재하고 있는 지구는 수백억 년 된 늙은 지구가 아니라 젊은 지구라고 믿습니다. 기독교의 젊은 지구와 진화론자들의 늙은 지구가 대립하고 있는 것입니다.
1925년에 미국에서는 일명 ‘원숭이 재판’(스코푸스 재판)이 열렸습니다. 미국의 테네시 주의 공립학교에 과학 교사로 있던 존 스코프스가 진화론을 가르쳤습니다. 그 당시 미국의 법은 공립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치지 못하게 되어있었습니다. 그래서 재판이 벌어지게 되었는데 한 사람은 진화론을 옹호하고 한 사람은 창조론을 옹호하여 진화론과 창조론의 대결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스코프스는 유죄로 판결되어 100달러의 벌금형을 받았지만 이 재판을 통해 진화론은 세상에 퍼지게 되었고 창조론을 믿고 가르치는 사람들을 조롱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1960년 ‘바람의 상속자’에서는 진화론을 옹호하는 변호사가 창조론을 옹호하는 변호사를 조롱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진화론을 억압하는 것은 인간의 이성이 계발되지 않았던 16세기로 돌아가는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진화론을 비판하는 영화도 있습니다. 2008년에 만들어진 ‘지성의 추방’이라는 영화인데 진화론은 해답보다 더 많은 문제를 야기하는 사상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과학의 세계뿐만 아니라 문화의 세계에서도 창조론을 주장하는 사람과 진화론을 주장하는 사람이 나뉘어 있습니다.
.0이것은 기독교 세계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하루 24시간인 엿새 동안 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창세기 1장의 진리를 부인하는 3가지 사상을 비판하겠습니다. 부정적인 비판이 될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들이 공격받을 때 방어할 수 있는 무기를 갖춰야 하기 때문에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Ⅰ. 진화론
모든 진화론자들은 한 가지 사상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 사상은 1785년 스코틀랜드의 지질학자였던 제임스 허튼(James Hutton)이 제시한 ‘균일설’(uniformitarianism)입니다. 지구는 오랫동안 동일한 변화를 점진적으로 겪어서 현재와 같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균일설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급격한 변화로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부정합니다. 지구는 옛날부터 지금까지 환경도 동일하고 변화도 동일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 균일설이라고 한다면 기독교의 급변설은 지구가 원래 존재하지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어느 날 갑자기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제임스 허튼이 주장한 균일설이 생물학으로 침투한 것은 1859년 찰스 다윈이 출간한 ‘종의 기원’이라는 책이 출간되면서부터입니다. 이 책에서는 모든 만물은 한 가지 기원으로부터 오랜 세월동안 동일한 변화를 겪어 현재 존재하는 여러 종류의 종으로 발전했다고 주장합니다. 한 가지 물질에서 지속적인 변화가 일어나 인간도 되고 식물도 되고 동물도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원숭이가 얼마나 노력하면 사람이 될까요? 원숭이는 아버지도 원숭이고 자녀도 원숭이인데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인간이 된다는 것은 납득하기가 어렵습니다.
방사성 탄소연대 측정법에 따라 지구의 나이를 측정하면 약 5500만 년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도 사람에 따라 계산이 틀립니다. 평균적으로 5500만 년이고 우주의 나이는 150억 년 정도 된다고 합니다. 진화론자들의 결정적인 단점은 우주나 지구의 변화가 옛날이나 지금이나 동일하다는 근거가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일어나는 변화는 관찰할 수 있겠지만 옛날에도 동일하게 변화가 일어났다는 근거는 어떻게 찾느냐는 것입니다. 변화의 과정에서 외부 세력의 개입으로 급격하게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을 배제해야 하는 근거가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세상이 급격한 변화로 창조되었다고 말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 엿새 동안 만물이 지어졌다고 말합니다. 지금 현재의 세상은 처음 창조 때와는 다릅니다. 창세기 3장 17절에서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해 땅이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를 내고 지진이 일어나며 쓰나미와 태풍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리고 노아 당시에는 사람들의 계속된 악행으로 인해 홍수가 일어났습니다. 홍수로 인해 산 주위를 돌아다니던 물고기가 물이 빠지는데 미처 빠져나가지 못해서 화석이 된 것 아닙니까? 이처럼 세상에는 수많은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도 큰 격변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벧후 3:10).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땅과 그중에 있는 것이 모두 불에 녹아 죄가 완전히 제거된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베드로가 예언했습니다. 기독교는 만물이 균일하게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급격한 변화가 수시로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진화론자들의 균일설은 격변설을 배제하고 있지만 균일설은 과학적 근거가 없는 말입니다. 만물은 항상 동일하게 변화한다는 거짓된 가정에 서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부정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바로 만물이 옛날부터 그대로 있다고 말하는 균일설을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홍수로 인해 세상이 멸망되었다는 사실을 일부러 잊으려 한다고 했습니다. 만물이 항상 동일하게 변화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욥에게 하나님께서 질문한 질문에 대답해야 합니다.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욥 38:3~4). 진화론자들도 하나님께서 질문하실 때 대답해야 합니다. “너는 내가 만물을 창조할 때 어디 있었느냐?” 이렇게 질문하시면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아무 말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관찰과 실험으로 결과가 나오는 것만 진리로 받아들입니다. 관찰하지 못하고 실험해서 결과가 나오지 않는 것은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관찰하거나 실험해보지도 못하면서 억만 년 전에도 동일한 변화가 일어났다고 주장합니까? 진화론자들은 심각한 모순에 빠져있습니다. 그러니까 진화론은 과학이 아니라 신앙입니다. 자기들이 보지 못한 것을 믿기 때문에 신앙인 것입니다. 신앙은 신앙인데 성경의 신앙과 어긋난 거짓된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설사 백번 양보해서 균일설이 옳다고 해도 처음 변화를 시작한 물질은 누가 만든 것입니까? 진화론은 궁극적으로 대답할 수 없는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진화론자들은 단지 성경을 믿지 않으려고 하는 불신자일 뿐입니다.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느니라” (잠 26:12). 진화론자들은 성경을 믿지 않는 미련한 자인 것입니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서 머리 터지게 공부해서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미련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진화론의 기세에 눌려서는 안 되겠습니다.
Ⅱ. 유신론적 진화론(Theistic Evolution)
유신론적 진화론은 하나님을 믿긴 믿지만 진화론의 기세에 기가 눌려 양보한 사상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만 믿으면 되지 엿새 만에 창조하셨든 6억 년 동안 창조하셨든 무슨 상관이냐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믿지만 엿새 만에 창조하셨다는 것은 믿지 않는 것입니다.
이들은 창세기 1장에 나오는 ‘날’을 상징적인 표현으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하루가 아니라 오랜 세월로 보는 것입니다. 이런 이론을 ‘Day-Age Theory’라고 하는데 진화론과 창조론을 교묘하게 섞은 잡종 이론입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에게 제가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20장 8~11절에 보면 십계명 중 사계명이 나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출 20:8~11).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쉬셨으니까 인간도 엿새는 부지런히 일하고 일곱째 날을 쉬라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엿새가 오랜 세월을 의미한다면 우리도 동일하게 오랜 세월 동안 일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구약성경에서 ‘날’은 700번 이상 사용되지만 예외 없이 24시간을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됩니다. 그러므로 유신론적 진화론은 성경을 지성인들에게 납득시키려는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결국 원수에게 굴복해서 타협한 것입니다. 창조하신 것만 믿으면 됐지 며칠 만에 창조하셨는지가 왜 중요하냐고 말하는 사람은 예수님만 믿으면 됐지 예수님이 어디서 태어났는지가 왜 중요하냐고 말하는 사람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분입니다. 대구나 광주에서 태어난 사람은 예수님이 아닌 것입니다. 광주에서 태어났는데 자신이 예수라고 하는 사람은 사기꾼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유신론적 진화론을 믿어서는 안 되고 배척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Ⅲ. 간격이론(Gap Theory)
간격이론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 1:1). 와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창 1:2). 사이에 엄청난 시간 간격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왜 이런 사상이 나오게 됐느냐? 과학자들이 방사능으로 바위의 나이를 측정해보았는데 바위의 나이가 수백억 년이 더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젊은 지구를 말하고 있으니 어떻게 된 것이냐? 그래서 나오게 된 것이 창세기 1장 1절과 2절 사이에 수백억 년의 간격이 있다고 주장하는 간격이론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하나님께서 바위를 만드실 때 수백억 년 된 바위를 왜 못 만드시겠습니까? 얼마든지 그렇게 만드실 수 있으십니다. 간격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창세기 1장 1절과 2절 사이에 큰 변화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창조론의 격변설과 일치합니다. 그리고 ‘날’을 24시간으로 보는 점에서도 창조론과 일치합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이들은 진화론자들의 사상을 성경과 조화를 시키려고 했습니다.
간격이론은 20세기에 들어와서 세대주의 종말론자들에게 퍼지게 되었습니다. 스코필드 관주성경이 간격이론을 주장하는데 오늘날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세대주의 종말론자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세대주의 종말론자들은 종말론도 틀렸지만 창조론도 틀렸습니다. 성경은 간격이론을 주장할만한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 창세기 1장 1절과 2절 사이에 수백억 년의 간격이 있다면 2절과 3절, 3절과 4절 사이에는 왜 그런 간격이 없습니까? 창세기 1장 1절은 하나님께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다는 제목이고 2절 이하는 창조하신 내용입니다. 제목과 내용 사이에 수백억 년의 간격이 있어야 될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간격이론은 유신론적 진화론과 마찬가지로 진화론과 타협한 근거 없는 이론에 불과한 것입니다.
결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되 24시간 엿새 동안 창조하셨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그대로 믿어야 됩니다. 성경은 진화론자들이 주장하는 균일설과는 정반대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경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없는 세상에 말씀으로 엿새 동안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입니다. 인간은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인간 위에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이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동물과는 다릅니다. 짐승은 하나님의 형상이 없지만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물질을 창조하시고 물질을 체계화하고 조직화하시고 그 안에 생명체로 충만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통치하고 보존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인 것입니다.
과학자들이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 과정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관찰하면서 창조하신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헛된 신앙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하나님께서 처음 천지를 창조하실 때와는 다른 세상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보시기에 다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지진이나 질병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기도 하고 사건이나 사고가 끊이지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어서 땅이 저주를 받아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피조물 모두가 바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입니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롬 8:19).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 죄로 물들은 모든 부패와 타락이 제거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오기를 피조물들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광야에도 꽃이 피고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어도 뱀들이 물지 않는 새 하늘과 새 땅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불신자 과학자들은 바위의 나이(Age of Rocks)가 얼마인지에 관심이 있습니다. 바위의 나이가 왜 중요한지 모르겠지만 과학자들은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무엇이 중요합니까? 만세반석(Rock of Age)이 중요합니다. 만세반석은 누구시냐?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자신 것을 믿고 만세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주이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믿음을 가지고 죄가 완전히 제거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때 진화론자들은 그곳에서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유신론적 진화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큰 진노를 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있는 그대로 믿어야 됩니다. 성경은 계시이며 우리에게 믿으라고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성경대로 믿는 신앙인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목적이 있는 창조
창 1장 1~10절 / 이수관목사
새해 첫날도 아닌데 왠 창세기 1장을 설교하는가 싶으시지요?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앞으로 6개월간 연속해서 설교를 해야 하는데 그 첫날을 창세기 1장으로 시작하자는 마음이 컸던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것외에도 의미는 많습니다. 요즈음처럼 가치관과 세계관이 흔들리는 시대에 창세기 첫장인 천지창조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주시고자 하는 많은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안믿는 분들이나, 아니면 막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지기 시작하신 분들이 성경에 관심을 가지고 창세기를 읽기 시작하면 가장 먼저 다가오는 의문이 이 천지창조에 대한 얘기가 우리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과학 지식과 너무 다르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천지창조 기사만큼 신학자들간에, 철학자들간에, 그리고 과학자들간에 첨예한 대립을 보이는 곳이 또 없을 만큼 논란이 많은 곳입니다. 학교에서는 세상이 진화되었다고 가르치는데 어떻게 창조되었다고 믿을 수 있는가? 지구나 우주가 생긴 후 몇억 년이 지난 후에 지구에 생물이 살기 시작했다고 교과서에서는 가르치는데 이 우주가 6일만에 만들어졌다는 말이 사실일까 등등 여러가지의 질문이 생길 수 있지요.
하지만 과학이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기존에 우리가 배웠던 사실들이 사실이 아닐 가능성도 많다는 것들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지금 지구의 나이가 얼마인가를 밝히는 방사성 동위원소법도 문제가 있다는 이론과 실험들이 나와있고, 빛의 속도도 환경이나 굴절에 의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지금 반짝이는 별의 빛도 몇백광년전의 빛이다라고 주장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는 이론도 나와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천지창조의 이야기를 가지고 우주가 창조될 때 또는 지구가 창조될 때의 자세한 모습을 그려 보려고 한다던지 아니면 과학의 새로운 이론을 가지고 이 창조기사를 짜맞추려고 하는 것도 그리 바람직한 태도는 아닌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이 천지창조 기사를 쓰신 분의 의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는 가장 바람직한 태도는 쓰신 분이 어떤 의도로 이 글을 쓰셨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글쓴이의 의도에 영감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가 가장 잘 반영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창세기를 쓰신 분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면서 이 천지창조 기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I.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
우선 첫번째로 저자가 의도한 메시지는 유일한 신,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에 흐르는 Theme을 고려할 때, 그리고 그 중에서도 첫 부분을 차지하는 창세기의 Theme을 고려할 때, 이 천지창조 기사전체를 통해서 저자가 하고 싶은 얘기는 세상은 하나님의 목적이 있는 창조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즉, 세상은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고 단 한분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목적이 있으셔서 세상과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의 목적이 어떻게 어긋나기 시작을 했으며 그렇게 엉망이 되어 버린 세상을 하나님은 어떻게 언약이라는 방법을 통해서 구원하시는가 하는 구약 전체의 메세지로 넘어가려고 하는 도입단계에 이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의도에서 볼 때, 즉 세상은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어떤 목적에 따라 창조되었다는 성경의 주장에서 볼 때, 이 메시지를 통해서 우리가 발견하는 교훈은 진화론을 거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 진화를 거부한다
그래서 오늘은 아직 그런 생각을 구체적으로 해 본적이 없으신 분들을 위해서 진화론에 대한 문제점을 좀 정리하는 시간을 가져볼까 합니다. 사람들이 진화론을 믿고 있는 몇가지 근거가 있습니다. 저의 경험을 돌아보면 제가 진화론을 믿었던 이유가 크게 세가지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첫번째는 생명체는 우연히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밀러의 실험 결과입니다. 교과서에 나오지요. 그것이 제 머리속에 강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두번째는 다윈이 그린 생물계통수. 이것도 교과서에 나옵니다. 그리고 세번째는 그 계통수를 증명하는 것으로 오스트랄로피테쿠스 -> 자바원인 -> 네안데르탈인 -> 크로마뇽인으로 이어지는, 원숭이 같이 얼굴이 작고 허리가 굽은 모습에서 점점 허리가 퍼지는 모양으로 발전된 인류 조상의 화석의 증거들. 이런 것들이 제 머릿속에 쾅쾅 박혀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진화론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지금은 이런 것들이 다 근거 없다고 밝혀져 있는데 우리가 모르고 있는 겁니다. 예를 들면 밀러의 실험이 그렇습니다. 원시의 지구는 대기 중에 별의 별 물질로 가득차 있었고 그 물질들이 잘 결합되면 생명체가 만들어 질 수 있다라고 믿었기 때문에 1953년도 밀러라는 사람이 진공 유리관 속에 암모니아, 메탄, 수소등을 가득 넣고 기체화 시켜서, 거기에다가 전기 Spark를 가했더니 아미노산이 생성되었다는 실험인데, 그 실험으로 생명은 우연히 만들어 질 수 있다는 확실한 근거가 된 겁니다. 신문에 대서특필이 되었고, 교과서에 실렸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것은 과대 광고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일단 원시 지구에는 이 사람이 사용한 그런 물질이 없었다는 것이 정설이라고 하구요. 문제는 이사람이 만들어 내는 데 성공한 아미노산이 세포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 인자이기는 하지만 이 아미노산이 단백질이 되고, 단백질이 다시 세포가 다시 생명체가 되려면 아직도 까마득히 멀었는데도 생명체가 탄생한 것처럼 과대광고를 한 것이지요. 먼저 아미노산이 단백질이 되려면 100개의 다른 종류의 아미노산들이 정확한 순서에 의해서 배열되어야 한답니다. 우연히 되기는 불가능하지요. 그런데 그 단백질이 다시 하나의 세포가 되려면 그런 단백질 200여개가 기능에 따라 결합해야 되는데 그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DNA 정보가 필요한데 한 세포마다 있는 DNA 정보의 양은 실로 어마어마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아미노산이 우연히 생긴것 때문에 생명체가 우연히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시냇물가에서 조그마한 사금 한개를 발견한 것을 계기로 신라금관이 우연히 만들어 진것이라고 우기는 것보다 더 한 일이지요.
두번 째, 우리가 믿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 -> 자바원인 -> 네안데르탈인 -> 크로마뇽인도 마찬가지 입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결국 원숭이 뼈였다고 밝혀 졌지요. 그 다음 단계라고 믿어지는 자바원인은 사방 15m내에서 모은 허벅지 뼈와 두개골 윗부분과 어금니 3개로 상상해서 만든것인데, 당시 같은 지층에서 사람의 두개골이 발견된 것은 죽기 전까지 숨겼었데요. 결국 지금은 허벅지 뼈는 사람의 것이고 두개골 윗부분뼈는 원숭이 것이라고 밝혀졌다고 합니다. 그 다음 네안데르탈인은 등뼈가 휘어있고, 이마가 각이 있어서 중간 화석이라고 했는데 사실은 비타민이 결핍되면 지금도 등뼈가 휘는 사람이 있고, 지금도 이마에 각이 있는 사람이 많지요. 그래서 네안데르탈인은 현재 사람이다라고 발표가 되었답니다. 그리고 마지막 크로마뇽인은 지금 사람과 별 차이가 없는 완전한 현재 사람의 뼈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어이가 없지요?
그외에도 진화론은 너무너무 문제가 많습니다. 예를들어 진화론자들은 생물들이 장구한 세월을 통해서 조금씩 조금씩 변해왔다고 하거든요. 그렇다면 지층의 순서에 따라서 제일밑에는 조금 단순한 것들, 조금 위에는 조금 발전된 것들 나오다가 포유류가 나오고 그래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지층을 보면 전혀 그렇지가 않답니다. 저도 잘 모르지만, 그전에는 일부 해파리, 벌레같은 것만 있다가 캄브리아기 지층에 이르면 펑 하면서 온갖 종류의 화석이 다 나온답니다. 또 아무리 뒤져도 생물이 변하고 있는 중간모습의 화석은 발견할 수 없다는 겁니다. 이상하잖아요.
문제가 뭐 그것 뿐입니까? 인간이 고유하게 가지고 있는 윤리와 도덕은 어떻게 설명합니까? 진화론자들은 인간의 공동체가 발전하면서 윤리와 도덕도 발전한 것이라고 하는데 그건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왜냐? 인류가 본격적인 공동체 생활을 시작한것이 기원전 3,000년경이거든요. 그때부터 인류가 모여 살기 시작했고 그래서 문명이 발생하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기원전 2,000년경에 쓰여졌다는 함무라비 법전같은 것을 보면 오늘날의 윤리와 별반 다를것이 없어요. 뭐가 발전되어 왔다는 겁니까? 이성은 어떻고 언어는 어떻습니까? 강아지들 모아놓고 2만년이 지나면 개들이 말을 하고 인생을 논하고 그럴거라는 것이 상상이 되십니까?
이런 모든 의문을 한번에 해결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얘기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이것이 사람이 한 말이라면 누가 감히 이런 말을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창세기는 모세가 썼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살던 기원전 1,500년경에는 거의 모든 민족들이 세상이 어떻게 만들어 졌는가에 대한 여러가지 신화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400년 동안 노예생활을 한 이집트도 창조 신화를 가지고 있었고, 가까운 이웃 문명이었던 바빌로니아도, 그리고 좀 떨어져 있지만 에게해 문명도 다 창조의 관련된 신화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신화를 비교해 보면 거의 일맥상통합니다. 그들의 신은 사람같은 다신입니다. 다양한 인격의 신들, 불안정하고, 변덕스럽고, 변태적인 신들이 자기들끼리 싸우고 어쩌고 하면서 그 과정에서 세상을 창조했고, 그 안에서 인간은 신들이 장난치기 위해서 혹은 괴롭히기 위해서 만든 하잖은 존재일 뿐입니다. 그게 자연의 힘에 시달리던 그 당시의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었던 최선이었던 겁니다.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선지자 모세를 통해서 말씀하는 겁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2) 삼위일체 하나님의 무로부터의 선한 창조
두번째 이 창조기사에는 몇가지 창조에 관한 흥미로운 가르침이 있는데 그것들을 좀 살펴보고 지나가겠습니다. 첫번째가 無 로부터의 창조라는 개념입니다. 명확하지는 않지만 1절에 천지를 창조하셨다라고 할 때 창조라는 그 단어의 선택에서 그런 의도를 볼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에는 만들다, 창조하다라는 단어가 서너가지 있는데 여기에서 쓰인 이 단어 “바락크”는 하나님이 아무것도 사용하지 않고 무에서 뭔가를 만들어 낼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예를 들면 2장에서 하나님이 흙을 사용해서 아담을 만드실 때는 다른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요. 그래서 이 구절에서 얘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우주를 창조하실 때는 하나님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는 얘기이고, 뭔가 있는 것에서 만든 것이 아닌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Even 공간과 시간도 없었던 그런 완벽한 무의 상태에서 “있으라”하고 말씀하시니까 확- 이 우주, 즉 시간과 공간이 생겨났다는 얘깁니다. 멋있지요.
또 한가지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여기서 조금 엿볼 수가 있지요. 1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라고 하시고는 2절에서 하나님의 영, 즉 성령께서 뭔가를 하고 계셨다고 얘기하고, 3절에서 말씀에 관한 얘기를 하십니다. 이 구절을 가르쳐서 요한은 요한복음 1:1절에서 이 말씀이 인간 예수로 오기 전의 하나님중의 한분을 나타낸다고 하셨지요. 그래서 우리는 분명히 삼위일체 하나님의 흔적을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 하나님은 한가지 한가지 창조를 마치실 때마다 반드시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라고 얘기하면서 하나님이 창조 하신 세상은 선하고 완벽했다는 얘기를 하십니다.
이 세가지 사실을 한 문장으로 얘기하면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무로부터 창조하신 선한 세상이었다는 얘기지요. 자, 그런데 지은이는 이 얘기를 왜 하는 것인가? 저는 하나님이 당시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神觀 과 세계관에 대항해서 이 얘기를 하고 있다고 보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생각은 신은 두려운 대상이기는 했지만 우리가 마음을 다해서 경배할 만한 대상은 아니었습니다. 신끼리 동침을 해서 아이를 낳고 그래서 그 밑의 신에게 최고 권위를 이양해 주고, 그런 과정에서 장난스럽게 만든 세상이기 때문에 물질은 악하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에 대해서 성경은 바른 神觀 과 세계관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한분 하나님밖에 신이 없다.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유일한 주권자이시고 이 세상을 다스려 가신다는 것을 얘기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하나님께서 목적이 있어서 소중하게 지으신 존재이며, 동시에 엉망인 이 세상은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자, 이런 세계관과 신관을 가지고 주위를 돌아보면 우리주위에는 정말 잘못된 신관과 세계관들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의 유명한 한 이단 종파들을 보면 하나님은 한분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 밑의 급인데 권위를 이양해서 창조에 동참하게 했다고 얘기하는 종파가 있지요. 성경에 따르면 잘못된 생각입니다. 또 불교나 힌두교 같이 모든 만물이 영적인 존재라는 믿음도 잘못된 것이지요. 해, 달과 같은 것은 우리가 절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만드신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게다가 윤회 사상같은 것은 처음에 뭐가 있었길래 윤회를 시작했는가에 대한 답이 없지요.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은 아니다 내가 창조하기 전에 아무것도 없었다. 나의 창조는 완벽한 무에서부터 시작되었다라고 얘기하고 계시지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는 이 세상이 악한 이유를 하나님께 Blame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입버릇처럼 왜 하나님은 세상을 이렇게 만드셨냐? 악은 왜 창조하셨냐? 그러면서 하나님께 Blame을 합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Blame을 받을 분이 아니라는 얘깁니다. 하나님은 완벽하게 아름답고 질서있는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이 자신의 선택으로 타락의 길을 걸은 것이고, 그래서 이 세상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지요.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흔히 일이 잘못되면 하나님을 원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깁니까? 왜 이렇게 하셨습니까?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잘못이 아니지요. 다 우리가 잘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것인데 우리는 습관적으로 하나님을 Blame 합니다. 물론 모르고 철없을 때는 그래도 하나님이 이해하십니다. 하지만 신앙의 햇수가 몇년을 넘어가는데도 습관처럼 하나님을 Blame하고 그러면 않되지요. 어째튼 우리는 유교 문화 그리고 불교문화에서 자라고 성장했기 때문에 우리도 모르게 하나님에 대해서 많은 오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요즈음에는 종교 다원주의다 열린 종교다 해서 종교는 결국 같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등 혼란이 많은데 그런 가운데 바른 신관을 가지셔서 잘 대처하시는 여러분되시길 바랍니다.
II. 사람이 창조의 정점이다
그 다음, 우리가 이 창조기사를 통해서 발견하는 굵직한 또하나의 테마는 사람이 창조의 정점이다라는 것입니다. 3절서부터 보면 첫날 빛을 창조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하루 하루 창조를 더해 가는 것이 결국 27절에 나오는 사람의 창조를 향해서 죽 진행되어 가고 있음을 느낍니다. 첫날부터 계속 사람이 살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가시고 모든 것이 준비된 상황에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고 하시지요. 그리고 클라이막스인 27절에 이르면 그전까지는 평범한 산문체이던 것이 아름다운 시로 바뀝니다. 우리 번역에서는 잘 안들어나지만 히브리어로 보면 아 여기가 포인트이구나 강한 인상을 받는다고 합니다. 자,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목적에서 사람을 창조하셨을까 그 첫번째 이유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해서 입니다.
1) 하나님과의 관계가 창조의 목적이다
26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라고 하셨는데 이 형상과 모양이라는 단어가 정확히 뭘 의미하는 것일까에 신학자들간에 이견이 참 많습니다. 우선 하나님은 영이시니까 하나님의 Physical한 모습을 본따서 사람을 만들었다는 의미는 분명히 아닙니다. 어떤 신학자는 그것이 사랑하고 생각하고 하는 동물과 구분되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속성을 의미하는 것이다라고 하기도 하고, 어떤 신학자는 그것은 인간의 영적인 면을 얘기하는 것인데,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지금은 외곡된 형상만 남아 있을 뿐이다라고 얘기합니다.
이 형상과 모양이 무엇을 의미하던간에 분명한 것은 그 말에서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이 담겨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를 닮은 아이를 낳고 싶어요.” 자기의 사랑을 쏟을 대상인 아이를 가지고 싶어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신 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만이 창조자와 의식적이고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고, 인간만이 하나님께 반응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즉, 다시 얘기해서 하나님은 우리와 관계를 맺으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기뻐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시편149편 4절에는 우리를 기뻐하신다고 하시고, 출애굽기 34:14절에는 나 주는 질투라는 이름의 하나님이다라고 하십니다. 우리와 사랑의 관계를 맺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면 하나님께서 스스로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우리도 붙이기 싫어하는 별명을 다 붙이셨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관계를 위해서 지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더 이상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나의 인생이 더 이상 내 자신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구요.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없는 삶을 살 때 필연적으로 행복하지 못하고 고생스럽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혹시 짝사랑을 받아보신 분 있으세요. 상대방이 나에게 구애를 보내는데 나는 별로 안좋은 경우, 그런 경험 해보면 좋을 것 같지요? 그런데 아니예요. 짝사랑을 하는 사람도 괴롭지만, 짝사랑을 받는 사람도 괴롭습니다. 그러다가 아 뭐 내가 대수라고 그냥 좋다는데 같이 살지 하고 살면 너무 마음이 좋고 행복한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짝사랑하고 계세요. 우리가 사람이 주는 사랑을 거절해도 마음이 괴롭고 힘들고 한데, 하물며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면서 어떻게 행복해 질 수가 있겠습니까?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도 알고 있어요. 우리가 도망을 다니고 있을 뿐이지. 그래서 지금 이 자리에 하나님께서 그토록 부르시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고집을 부리고 계신 분이 있으시다면 이제 고만 고집부리시고 하나님께로 오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므로써 삶이 회복되는 그런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2) 피조물을 다스릴 책임이 있다.
자! 그러면서 동시에 하나님은 인간의 책임을 규정해 주십니다.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는 것입니다. 땅을 정복하고 생물을 다스린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설마 정복한다는 말을 파괴하라는 명령으로 받아드리는 분은 없겠지요. 여기서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말은 간단히 얘기하면 다른 피조물에 대한 Care와 responsibility를 가지라는 얘기입니다. 즉, 사람은 자연보다 월등하게 가치있게 창조된 존재이지만 동시에 피조물의 일부로서 같은 피조물을 관리하는 책임을 가지라는 얘기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자연과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일종의 친족관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에는 인간과 자연이 적대관계인것 처럼 보일 때가 있고, 자연이 정복의 대상처럼 느껴질 때가 있지만 사실 자연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관리하라고 주신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자, 그럼 오늘날을 사는 우리는 어떻게 자연을 다스려야 할까요. 우선 자연이 우리에게 파괴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얼마 전에 케네다에서 모피를 얻기 위해서 한 시즌에 물개를 30만마리를 죽여서 각국의 성토의 대상이 되었는데요, 물론 하나님도 아담에게 가죽 옷을 해 입히셨지만 그건 잔혹 행위지요. 또 한국에서는 동면에서 막 깨어난 개구리가 몸에 좋다고 해서 다 잡아서 씨를 말리는 행위를 하는데 그것도 분명히 우리가 다스리고 있다고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자연을 파괴하며 산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차를 운전하면 공해를 유발해서 자연을 파괴하고, 종이를 낭비하면서 자연을 파괴하고, 일회용품을 쓰면서 자연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의 일년간의 기름 소비의 1/3을 미국에서 쓰고 있다고 합니다. 또 조사는 안해봤지만 일회용품의 1/2은 미국에서 쓰고 않을까 싶습니다. 어쩔 수 없기는 하지만 이것도 우리가 자연을 잘 다스린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제가 8년전 처음에 미국에 왔을 때, 한번 사용하고 버려지는 일회용품을 보면 가슴이 싸~하게 아프더라구요. 그러더니 이제는 저도 습관이 되어서 Fork 한번 쓰고 고민은 조금하지만 쓰레기통에 버리는 나를 발견합니다. 그래서 우리 조금만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가급적이면 일회용품 좀 적게 쓰고 기름도 좀 아낄려고 노력하고 조금 사이즈가 적은 차를 쓰고 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노력을 다 하고 그래서 조금이라도 자연을 다스리라는 우리의 책임에 충실한 저와 여러분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또 반대로 자연이 숭배의 대상이 되거나 인간의 존엄성보다 동물이 더 귀하게 여겨져서는 안됩니다. 예를 들면 동물 애호가 협회에 등록되어 있는 사람이 아무렇지 않게 아이를 낙태를 한다면 그것은 뭔가 잘못된 것입니다. 또 요즈음 보니까 Green Peace에서는 동물도 행복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고, 그래서 요즈음 보면 동물에게 인간에 버금가는 대우를 해 가면서 키우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것도 자연을 잘 다스리는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우리는 그 사이에서 균형을 잘 취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자연을 잘 다스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오늘 창세기 1장의 천지 창조 얘기를 훌터 보았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이 얘기를 통해서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은 세상의 주인은 한분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이 우리와 사랑의 관계를 맺기 위해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과 우리는 이 세상을 관리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셔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맞는 삶을 사시는 그런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창 1장 1~5절 / 조용기목사
<서론>
“하나님이 가라사대”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여러분 말을 못하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벙어리가 되면 얼마나 가슴이 터지도록 답답하겠습니까? 말이라는 것은 대화하기 위한 것만 말이 아닙니다. 말은 성경에 보면 창조하고 다스리는 힘이 그 말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대화를 할 뿐 아니라 우리 입으로 나오는 말로써 운명과 환경을 개척하고 창조하고 만들어나가는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지으시고 만유를 다스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론>
1. 말씀과 천지창조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지으신 것을 우리는 성경을 읽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 1절로 25절에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천지를 지으셨는데 하나님께서 소매 걷고 삽과 괭이 들고 나오셔서 만든 역사가 없습니다. 그냥 말씀만 하셨지요. 땅이 공허하고 혼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어 절단강산이 났을 때 성령이 운행하시고 그리고 하나님 말씀하시니 성령과 말씀이 우리가 사는 아름다운 세계를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저는 항상 마음에 절망을 가질 수 없는 것은 우리 주님께서 보내신 성령이 우리와 같이 계시고 하나님이 주신 창조적인 말씀을 우리 손에 성경으로 들고 있기 때문에 성령이 말씀을 받아서 세계를 새롭게 만드는 기적을 베풀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다 운명과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주어져 있습니다. 말을 통해서 운명과 환경을 변화시키고 성령께서 기도하는 여러분의 기도를 받아서 기적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지으신 것처럼 여러분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생기셨는지 한번 봤으면 좋겠다. 그러면 하나님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압니까? 거울에 가서 네 얼굴 쳐다보아라. 네 얼굴 모양이 어떻게 생겼는지 네가 보면 알겠지? 진짜 형상은 나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것입니다. 빌립이 예수님께 나와서 “주님, 아버지를 보여 주옵소서.” “빌립아! 여태까지 나와 같이 있으면서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하느냐? 나를 보는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꼭 같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한번 뵈어 주십시오. 야~ 이 사람아 여태까지 이 땅에 밥 먹고 살면서 내가 너인줄 몰랐느냐? 나는 너와같이 생겼느니라. 여러분, 너무나 놀라워서 신성모독이 될까 겁이 납니다만 사람은 하나님처럼 생겼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처럼 만들어졌습니다. 허울만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말하는 자체도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지은 것처럼 여러분도 말씀으로 여러분이 사는 주위 환경을 창조하게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대신해서 만물을 돌보아 주시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서 여러분의 운명과 환경을 여러분이 말로써 지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적 존재로 계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영적존재를 닮아서 죽지 않고 영원히 삽니다. 예수님께서 갈보리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시기 전에 강도가 ‘주님 나라 임할 때 나를 기억해 주시옵소서’ 할 때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오늘날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일주일 후에도 아니고 한 달 후도 아니고 명년도 아닙니다. 생명이 떠나는 그날 그 시에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 강도는 예수님 옆에 매달려 죽은 것이 정말 말할 수 없이 복을 받은 것입니다. 지상에서 오래 살고도 예수님 믿지 못해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사람이 허다히 많은데 이는 죄를 너무 많이 지어서 지상에서 죽지 못하고 심판을 받아 십자가에 매달려 예수님 곁에서 죽은 그 덕분으로 말 한마디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주님, 주의 나라 임할 때 나를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뭐 철야기도 한 것도 아니고 금식기도 한 것도 아닌 것입니다. 단지 주님 앞에 마음에 간절한 소원을 말했을 때 주님께서 ‘오늘날 너는 나와 같이 낙원에 있으리라.’ 낙원에 들어가서 주님과 함께 있다는 것은 영원히 산다는 것입니다. 영원히 살아요. 그런데 여러분, 주님의 뜻을 받들어 살고 주님을 섬기고 사는 여러분이 ‘주님! 나 갑니다. 받아주시옵소서.’ 그러면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오너라. 내가 받아주마.’ 여러분은 모두 다 영적으로 주님을 닮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창세기 2장 7절에 보면 “야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여러분은 타락하기 전에 모두 다 생력이 되었습니다. 살아있는 영입니다. 타락했을 때 영이 죽어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었습니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면 다시 거듭나서 타락한 영이 살아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을 통하여 모든 생물과 땅을 다스립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은 우리는 하나님처럼 말로써 땅과 생물을 다스린 것입니다. 말이 그렇게 기가 막히게 힘이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 26절에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살아있는 생물뿐 아니라 땅 그 자체도 다스리게 하자. 오늘날 타락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멋있게 만들었던지 사람들은 온 땅을 다 다스리고 땅에 있는 생물을 다 다스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을 하나님을 대신해서 다스리도록 만듦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구약의 말씀 속에 보면 수없이 많은 기사와 이적들이 있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이 나와서 기적을 행하시고 기적을 베푸신 것을 보면 놀라지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시대에 기적을 베푸신 선지자들을 하나님의 종들이 다 말로써 기적을 가져온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말로써요. 소매 걷고 인간의 주먹으로써 한 것이 아니라 말로써 한 것입니다. “야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출 14:15~16)
적군들이 떼를 지어서 습격해오고 앞은 홍해수가 창일한데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은 지팡이를 내밀어서 갈라지게 하라. 하나님이 대신 갈라지게 일해주시지 않았습니다. 모세를 보고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을 쫓아서 지팡이를 내밀고 물로 갈라지게 명하니 물이 갈라진 것입니다. 많은 오늘 일들이 하나님이 직접 일하시지 않고 네가 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았으니 네가 말씀으로 운명을 변화시킬 수 있지 않느냐? 네가 할 일을 내가 해주노? 네가 환경을 변화시켜라. 그러니까 얼마나 많은 일에 여러분 스스로가 누릴 수 있는 것을 누리지 않은 것은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해주시는 것도 있지만 많은 것은 여러분이 직접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실 때도 말씀으로 복을 주신 것입니다. 그 말씀이 따라 다니면서 복을 주셨지 하나님이 따라 다니면서 일일이 복을 주시지 않았었습니다.
창세기 12장 1절로 2절에 “야훼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주님이 말씀만 하셨습니다. 내게 네게 복을 줄 것이니 네가 창대하게 되라. 네 이름은 복이다.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만 들은 아브라함은 믿고 나갈 때 그 복이 다 따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축복도 말씀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2. 말씀과 예수님의 사역
우리가 예수님의 사역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도 성령을 받고 난 다음에 나가서 사역할 때 모두 말씀으로 했었습니다. 입술의 말씀이 얼마나 귀한지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마귀가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할 때도 예수님께서 주먹으로 마귀를 때려 쳐넘긴 것이 아니라 말씀을 하셨습니다.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아버지)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4)
말씀을 가지고서 마귀를 대적하니 마귀가 쫓겨나간 것입니다. 수많은 병자들을 말씀으로 고치셨습니다.
마태복음 8장 16절에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그러므로 말씀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세계를 주님께서 말씀으로 평정할 뿐 아니라 풍랑을 잠잠하게 하시는 것, 환경을 잠잠하게 하실 때도 말씀으로 잠잠하게 하셨습니다. 주님이 다른 방법을 쓰지 않으셨습니다.
마가복음 4장 39절에 보면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말씀으로 자연환경도 다스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너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기를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한 일을 너도 할 것이요 이보다 더 큰 것도 하리니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그러니 하나님 의지하고 말씀을 올바르게 사용한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지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자연도 다스리는 하나님의 말씀은 주님께서 강조해서 우리에게 가르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의 뿌리가 마른 사건이 있지요. 주님께서 아침 일찍 예루살렘을 나와서 베다니로 가는데 시장하신지라 무화과나무 단지에 가서 보니 무화과 때가 아니라 안 열렸다 말입니다. 주님께서 무화과를 저주했습니다. 뭘 하나님이 나무에 과일 없는데 과일 없다고 저주 하느냐?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위해서요. 다시는 사람이 너에게 과일을 따먹지 못할 것이라. 그렇게 했는데 그 이튿날 보니까 뿌리째 말라서 죽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여러분이 암이나 더러운 병이 들려서 고통당할 때 주님이 ‘물러가라! 다시는 이 몸에 붙어있지 말라!’ 그렇게 하고 나면 몸에서 떠나가버리고 없게 된 것을 보여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마태복음 21장 19절에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그러니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입술의 말로써 문제를 해결하고 살도록 주님께서 복을 주셨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은 자도 주님이 살리실 때 말씀으로 살리신 것입니다. 나사로의 무덤에 가서 마르다에게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않았느냐. 돌문을 옮겨 놓아라. 그래서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썩은 냄새가 나는 나사로의 돌문을 옮겨 놓으니까 예수님께서 ‘나사로야! 나와라!’ 죽은 사람이 벌떡 일어나서 수의를 입은 채 그대로 밖으로 나왔었습니다. 그러니 아주 이 말씀을 읽으면 어지럽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이렇게 큰일을 하실 수 있는가.
요한복음 11장 43절로 44절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기 전에 강도를 구원하실 때도 내가 말씀드린 것처럼 말씀으로 구원한 것입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 23:42~43)
내 나라에 임하기 위해서 기다릴 것 없다. 너는 오늘 이 세상을 떠나니까 나와 함께 낙원에 가 있다. 이 강도는 한없이 복을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지옥불에 들어갈 사람이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구원의 말씀을 받아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운명하기 전에 강도를 구원할 때 하신 말씀으로 구원하는데 하물며 온전한 우리들이 주님께 나올 때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것을 고백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면 모두 다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기독교는 구원받는데 조건이 필요 없습니다. 며칠 금식하라. 어떤 구절을 외워라. 어떻게 하라. 그런 것 없어요.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구원을 얻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 구주가 되심을 믿고 시인하면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3. 말씀과 제자들의 복음 증거
주님께서는 성경에 말씀과 제자들의 복음증거에 관해서도 이 말씀이 복음전도에 절대적인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베드로보고 예수님이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니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님이 무릎을 치시면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네 육체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계시해 주셔서 알게 해주신 것이다.’ 그때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4. 말씀과 우리의 신앙
오늘날 우리가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주인 것을 믿고 입으로 고백하면 당당하게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자꾸 내가 구원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모르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게 오는 편지도 보면 교회를 10년 다녔다. 20년 다녔다. 그래도 아직 마음에 구원받은 확신이 없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습니까? 그것은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고 성경에 말했는데 구원은 예수께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몸 찢고 피 흘려 죽으심으로 죄 사함을 허락했다는 것을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내가 구원받게 되는 것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내가 시인하면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입술로 시인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무리 교회 왔다갔다 하고 직분이 높아도 입술로 시인하지 아니하면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그냥 후보자가 되지요. 구원받는 후보자는 되어 있을지 몰라도 구원은 못 받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처참한 지경에 있을지라도 예수님 나의 구주가 되십니다. 나는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습니다. 그래, 내가 너의 구주다. 너의 고향은 천국이다. 주님께서 일러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이 구원의 능력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말씀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입니다. 마귀를 쫓아낼 때 귀신아 물러가라! 그런다고 귀신이 물러가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릴 때 보면 객구(객귀)가 걸려 기침을 하면 객구(객귀) 걸렸다고 우리 할머님이 우리를 나오라고 해서 마당에 꿇어앉혀 놓고 부엌칼을 들고 나와서 가슴이 서늘합니다. 저 칼로 찌를까 싶어서... 할머니 쳐다보면 눈 감고 있어라. 부정 탄다. 눈감고 있으면 머리칼을 잡고 귀신아 물러가라! 귀신아 물러가라! 그리고 난 다음에 이제 귀신이 물러갔으니 괜찮을 것이다. 예수를 믿지 않는 시골 할머니가 그런 것을 할 때 귀신이 쫓겨나가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 말씀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입니다.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이 사람에게서 떠나가라! 보혈로 쫓아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명하노니 이 사람에게서 떠나가라! 예수 이름으로 쫓아내는 것입니다.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묶음을 놓고 물러가라! 우리는 예수 이름을 가지고 나가도 마귀가 쫓겨나가고 말씀으로 해도 쫓겨나가고 그 다음 성령의 능력을 의지해서 명령을 해도 쫓겨나가고 예수의 보혈로 명령해도 쫓겨나가고 마귀는 이제 사면초가입니다. 서서 우리를 대적할 수 없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우리가 진리만 알면 얼마든지 쫓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계속 고백하면 말씀은 우리의 신앙을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말씀으로 자꾸 고백하는 것은 내 신앙이 굳어지고 건강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구주가 되신다. 감사합니다. 예수님께서 내 구주가 되십니다. 감사합니다. 그 말을 자꾸 하면 자꾸 할수록 여러분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꼭 콩나물 물 주는 것과 같습니다. 콩나물에 물을 자꾸 주면 콩나물이 자랍니다. 나는 어릴 때 윗목에다가 우리 어머님께서 콩나물을 키우는 단지를 얹어놓고 난 다음에 주야로 나를 보고 잠에서 깨어나서 콩나물에 물 줘라. 물 안 주면 안 된다. 그래서 하루 어머니에게 화를 냈어요. 아무리 물을 줘도 물이 다 빠져버리는데 그것 왜 자꾸 나보고 물주라고 합니까? 아예 큰 단지에다 물을 담가 놓고 콩을 심어놓지 자꾸 물을 주라고 합니까? 야 이놈아, 콩을 집어넣어 버리면 콩이 썩어버린다. 그러면 물을 주면요? 물을 주면 물이 빠지지만 그러나 콩나물은 자란다. 그게 내 마음속에 항상 신기했습니다. 콩나물의 물이 다 빠지는데 어떻게 자라느냐. 그래도 콩나물이 잘 자라면 그것을 가지고 비벼도 먹고 삶아도 먹고 도시락에도 넣고 아주 시골에서는 그게 반찬 제1호입니다. 물을 자꾸 줘야 돼요. 여러분 하나님 말씀도 이 큰 성경책을 어떻게 다 읽느냐고 걱정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매달마다 읽을 수 있도록 내가 간단하게 만든 책이 있는데 그것을 가지고 읽어도 좋고 성경책은 어느 곳을 읽어도 페이지를 들춰서 읽으면 그것이 여러분의 입술을 통해서 낭독되고 여러분의 귀를 통해서 들어가게 되면 마음속에서 자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쪼개는 역사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으로써 신앙이 자랄 뿐 아니라 하나님 말씀으로서 복도 받고 저주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몰라서 그런데 복을 말씀으로 자꾸 주면 그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건강해라. 축복받으라. 편안하게 돼라. 사업이 잘되기를 바란다. 기쁨이 충만하기를 바란다. 여러분이 입술로 복을 실제로 주는 것입니다. 설이 다가오니까 선물 꾸러미를 만들어서 주잖아요. 입에서 축복을 꾸러미로 만들어서 주는 것이 더 놀랍습니다. 그 축복의 꾸러미는 오랫동안 계속해서 축복으로 자라나기 때문인 것입니다. 저주도 그런 것입니다. 손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저주하면 그 저주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주 삼족을 멸할 것이라든지 혀가 빠질 놈이라는 것이 범이 물고 갈 놈이라는 것이 재앙에 걸려서 죽을 것이라든지 이런 흉악한 욕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럼 그 저주가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 저주받을 사람에게 내려올 뿐 아니라 말한 사람은 자기 입으로 나가니까 그 사람에게도 부스러기가 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므로 하나님이 영광을 얻기도 하는 것입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 50:23) 하나님께 감사로써 입술의 말로써 제사를 드리는 것도 큰 축복을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저그저 감사합니다. 기도가 안 나올 때 기도가 할 것이 없을 때 제일 좋은 것이 감사인 것입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그저그저 감사합니다. 오늘도 감사하기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해요. 감사해요. 여러분 감사를 아끼지 말고 하십시오. 하나님은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것을 굉장히 기쁘게 생각하고 영화롭게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언제든지 기도가 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감사해요. 하나님 감사해요. 하나님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감사해요. 감사해요. 그저그저 감사합니다. 조건 없이 감사합니다. 그러면 그 감사가 하나님께로 전달되면 하나님이 기뻐하심이 내 몸속에 향기롭게 나타날 때가 많습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 50:23)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13장 15절에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구원받은 사람은 구원받은 입술의 열매로써 항상 예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과 우리의 신앙은 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의 고백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고 말씀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말씀의 고백으로 신앙을 자라게 하고 말씀으로 축복도 하고 저주도 하고 말씀으로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게 되는 것이니 얼마나 놀라운지 말로 다할 수 없어요. 우리는 축복의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께 늘 감사하고 하나님 축복을 귀를 기울이고 기다리면 좋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축복의 말씀을 주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 제일 먼저 아담에게 축복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창세기 1장 28절에 보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나님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을 충만케 하라고 말하시므로 말미암아 자손을 많이 가지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요사이는 사람들이 자녀를 낳지 않기 때문에 다음 세대 걱정을 많이 합니다. 우리 한국의 지배적인 인물들이 저를 만나면 설교할 때 다른 설교도 하지만 애를 많이 낳으라고 설교 좀 해주십시오. 자녀들을 안 낳기 때문에 지금 큰일이지요. 우리 어릴 때는 자녀를 너무 많이 낳기 때문에 큰일이었는데 이 세상 살이가 모두 다 좋아도 큰일이고 모두다 안 좋아도 큰일이고 큰일은 큰일입니다. 또 자녀를 낳은들 옛날과 달라서 시집도 안 가고 장가도 안 가려고 하는데 어떻게 합니까? 또 요사이는 잘못되어서 동성끼리 결혼하겠다. 그것을 법제화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동성자들끼리 결혼하면 여러분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집 아들이 다른 남자애를 데리고 내 아내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인사 받으십시오. 한길로 갔다가 일곱 길로 도망을 칠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법제화 하려고 하고 있어요. 지금. 그러니 이렇게 뒤죽박죽된 세상에 우리가 성령충만해야 올바르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오시면 마귀의 일을 멸하여 주시고 하늘나라를 왕성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복을 주셔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고 했습니다. 땅을 그대로 내버려 놓지 말고 땅을 개간하고 정복하고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했으니 여러분과 나는 다스릴 사람으로 태어났지 다스림을 받을 종으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환경을 다스려야 돼요. 운명을 다스려야 돼요. 잘살고 못사는 것은 여러분 입술의 말을 통하여 다스려야 돼요. 그러므로 네 입의 말로 내가 묶였으며 내 입의 말로 내가 사로잡히게 되었다는 하나님의 말씀은 참 귀한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이 입술에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하십시오. 홍수 심판 후 방주에서 나온 노아에게도 먼저 축복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창세기 9장 1절에 보면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말씀으로써 축복을 해주신 것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인 것입니다. 땅에 충만하라. 그렇게 축복을 말씀으로 해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직접 말씀을 안 해주시면 여러분 자신이 자기에게 말해야 됩니다. 우리가 말은 하나님과 하기 위해서 말하지 않습니까? 기도할 때... 그 다음에는 이웃에게 말하기 위해서 말합니다. 그 다음에는 나 보고 내가 스스로 자백하기 위해서 말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너무 자백을 안 해요.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하면 기도는 하고 이웃하고 이야기하라고 하면 이야기도 잘하고 싸움도 잘하는데 자기 보고 말하라면 그 말을 안 합니다. 자기 보고 말해야 돼요. 야, 너 예수님의 보혈로 구원받았으니 항상 보혈을 의지해라. 너 건강해라. 너 건강하지? 튼튼하고 힘 있고 좋다. 늘 하나님께 의지하고 건강하라. 너는 축복받았다. 주님이 물질로 축복을 주신다. 너는 저주에서 해방되었다. 무엇이든지 잘된다. 기쁨을 가지고 살고 소망을 가지고 살아라. 자기 보고 말해야 돼요. 아무도 말 안 해주면 자기 보고 말해야지요.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를 축복 안하고 살기 때문에 축복을 많이 놓칩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말을 좀 많이 하시기를 바랍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복 받은 사람이다. 나는 평안하다. 나는 기쁘다. 좋은 일이 일어난다. 건강하고 말고! 그렇게 자꾸 말씀하십시오. 말은 그렇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말하고 이웃에 말하고 내 자신 스스로에게 말하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의 말씀을 주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에게 축복의 말씀을 해 주고 자기에게 더구나 축복의 말을 해줘야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토크쇼의 여왕’ 오프라 윈프리는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지금은 은퇴해서 사람들이 저 여자 얼굴을 못 봐서 모르는 사람이 있을지 몰라도 아주 우리는 목사이기 때문에 저 여자가 토크쇼 하는데 가만히 들어보면 정말 기똥차요. 어떻게 그렇게 말을 잘 이끌어나가고 말을 잘하는지 그는 말을 통해서 억만장자가 된 흑인 여자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굉장히 불쌍한 여자였습니다. 사생아로 태어나서 지독히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9살에 사촌오빠가 성폭행을 했습니다. 14살에 아기를 낳았는데 2주 만에 아기가 죽어서 고통을 많이 당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사는 환경은 절망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 흑인 여자를 누가 돌봐주는 것입니까? 그러다가 인생의 소중함을 깨닫고 아무도 나를 안 도와주니까 내가 나를 다스려야 되겠다는 교훈을 듣고서 잠자리에 들어갈 때나 일어날 때 자기가 자기에게 말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인생의 소중함을 깨닫고 매일 잠자리에 들기 전 그날 하루 동안 있었던 일 중에서 고마운 것 다섯 가지를 적으면서 삶에 대한 희망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녀가 다섯 가지 소망을 얻고 축복을 받은 것을 적으면서 크게 읽었습니다. 입술의 말로써 자기를 변화시킨 것입니다. 아무도 이 불쌍한 흑인 여자에게 동정을 안 해주니까 자기가 자기를 변화시키는데 다른 것으로 변화시킨 것이 아니라 말로써 변화시킨 것입니다. 말이 얼마나 힘이 있는지 보십시오.
“① 오늘도 거뜬하게 잠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② 유난히 눈부시고 파란 하늘을 보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③ 점심 때 맛있는 스파게티를 먹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④ 얄미운 짓을 한 동료에게 화내지 않았던 저의 참을성에 감사합니다. ⑤ 좋은 책을 읽었는데 그 책을 써준 작가에게 감사합니다.” 이런 아주 평범한 것을 가지고 감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적은 일에 감사하면 더 하나님이 감사를 크게 주실 테니까요. 왜냐하면 적은 것에 감사하면 하나님이 큰 것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윈프리에게 사소한 것에 감사하므로 큰 축복을 주신 것입니다.
시편 50편 23절과 같이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하나님의 구원을 이 여자에게 보여주어서 미국 토크쇼의 여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그가 번 돈은 말로 다할 수 없었습니다. 모든 미국의 남성들이 이 윈프리하고 살고 싶어했습니다. 말도 잘하거니와 돈도 많기 때문에... 학교 공부도 못하고 쓰레기더미같이 내버림을 당한 여자가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므로 말미암아 그 일생을 바꾸는 것이 누가 빽을 써서 손을 잡고 이끌어 준 것도 아니고 자기 입으로 자기를 축복해서 그 자리에 올라간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아직 점심 잡수시고 그 입으로 다른 것 한적 없지요? 다른 사람에 대한 욕을 하지 말고 나에 대한 축복을 그 말로 하시기를 바랍니다.
미국 심리학자들은 오랜 연구 끝에 감사가 가져오는 변화를 과학적으로 입증했습니다. 감사를 하면 실제로 뇌의 좌측 전전두피질을 활성화시켜서 스트레스를 완화시켜 주고 행복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감사를 하면 뇌 전전두피질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어요. 여기 어디에 있어요. 그것을 활성화 시켜서 나를 기쁘게 하고 감사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리학자들은 화가 나고 스트레스가 쌓일 때 얼른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를 하면 스트레스가 풀리고 화가 풀린다는 것입니다. 감사는 뇌의 재설정(reset) 버튼을 누르는 것과 같아서, 뇌의 좌측 전전두피질이 활성화 되어서 기분이 좋아진다는 것입니다. 어려운 말은 우리가 알아들어도 모르니까 그냥 지나가고요. 그런데 감사의 습관을 만들기 위한 가장 쉽고도 강력한 방법은 “감사 일기를 적는 것”입니다. 감사 일기를 적는 것은 대단하지요. 저는 매일같이 하나님 앞에 감사 일기를 적습니다. 큰 노트를 내 책상에 갖다놓고 아침에 일어나서도 기도하고 난 다음 제일 먼저 그 노트에 하나님께 감사한 것을 다 적습니다. 저녁에는 잠자기 전에 그 책에 다 이름을 적는데 좋은 사람 이름 적고 나쁜 사람 이름 안 적습니다. 그것 남아있으면 안되니까. 그렇게 하므로 굉장히 마음이 청소되고 믿음이 맑아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 로버트 에몬스 교수의 실험에 의하면, 감사 일기를 매일 또는 매주 쓰는 사람이 일이나 운동 등에서 훨씬 더 좋은 성과를 냈다고 합니다. 감사를 하면서 일을 하거나 공부를 하거나 하면 성과가 훨씬 많이 나타난다. 그것은 대학교 교수가 안 되어도 저도 그런 말 하겠습니다. 불평하고 일을 하면 일이 됩니까? 불평을 하고 일을 하면 일이 안돼요. 감사로 일을 하면 일이 잘돼요. 목사에게는 설교준비가 제일 첫째 준비인 것입니다. 설교준비를 할 때 아무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고 가슴이 답답할 때가 많습니다. 그때는 성경책 덮고 노트 펴놓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여태까지 주님께서 말씀 주신 것 감사한데 오늘도 말씀을 주십시오. 날보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에게 하나님 심부름으로 가서 대접을 하는데 말씀이 안 나오면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 말씀을 주시옵소서. 나중에 답답하면 하나님 한번만 살려 주십시오. 이번 한번만 살려주면 다음에는 더 많은 시간을 가지고 준비를 하겠습니다. 여러분, 주의 종들이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는데 그냥 책만 펼치면 말씀이 나온다고 생각하면 큰 오해입니다. 어떠한 사람 말하기를 입만 열면 나오는데 뭘 걱정합니까? 하나님 말씀이란 것은 사람의 생명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기 때문에 얼마나 조심해서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종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말씀을 하나님이 충분히 공급해 주시도록 기도를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여러분이 그런 점들에게 주의 종들을 도와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의 환경을 아름답게 조성하고 다스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여러분의 환경을 아름답게 조성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겠습니까? 여태까지 설교한 것, 다 헛것 아닙니까? 입에서 아름다운 말을 하라는 것입니다. 내 아름다운 환경을 조성하고 다스리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말을 써라. 그 말이 힘이 있고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리기 위해서는 무엇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까? 입술의 아름다운 고백이 있어야 된다. 말을 통해서 하나님이 역사하는 것이니까. 4차원의 영성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주셔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 운명을 바꾸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생각도 깊어지고 꿈도 아름다워지고 믿음도 강하게 되고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의 환경이 좋아진다. 그러므로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강하고 담대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되는 것입니까? 입술의 고백이 강하고 담대해야 되는 것입니다. 너는 강하라. 담대하라. 힘 있으라 그렇게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복을 받고 싶으면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복을 받고 싶은데 어떻게 해요? 한번 크게 해보세요. 입술로 복을 고백해야 되는 것입니다. 따라 말씀하세요. 여러분 이름 여러분이 말하세요. 나는 내 이름 말할테니까요. 용기야~ 복 받으라. 그러면 복이 지금 임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입의 말로 내가 묶이며 입의 말로 내가 사로잡힘을 당한다고 말은 그렇게 힘이 있는 것입니다. 말은 그냥 대화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복을 받는 수단이 되고 저주를 하는 수단도 되는 것입니다. 입술의 말이 그렇게 큰 능력과 힘이 있는 것을 우리가 알고 말을 아껴 사용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형제, 자매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말을 잘못 사용하므로 말미암아 운명과 환경을 버리는 일이 많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큰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준비가 다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다 이루었다 하실 때 죄 용서를 준비해 놓았지요. 거룩하게 되도록 예비해 놓았지요. 병 고침 받도록 예비해 놓았지요. 아브라함의 축복을 받도록 예비해 놓았지요. 천국에 가도록 예비해 놓은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내 것이 되느냐. 입술의 고백으로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용서받은 의인이다. 나는 용서받은 성결한 사람이다. 나는 채찍에 맞은 공로로 병 나은 사람이다. 나는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이다. 나는 천국 백성이다. 그것이 바로 축복을 여러분이 가지고 오는 길인 것입니다. 그 말을 한두 번 하지 마시고 시간이 있을 때마다 계속 하십시오. 나는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고 강건함을 받은 사람이라고 자꾸 말하십시오. 그것이 그냥 지나가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말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나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서 그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남보다 남에게 꾸어줄지라도 꾸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늘 마음속에 생각하고 나는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한다. 자기보고 말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내 말이 너를 묶었으며 내 말이 너를 사로잡혔다고 그렇게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말로써 축복을 묶어 놓을 수도 있고 말로써 마귀를 내어 쫓을 수도 있고 말로써 환경을 아름답게 변화시킬 수가 있고 말로써 여러분의 주변에 축복을 내려 줄 수도 있고 얼마나 많은 일들이 말로써 이루어지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우리가 동물과 다른 것은 말로써 스스로 다스리고 축복받고 살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많으면 그 나라가 축복을 받는 것은 기도를 통해서 좋은 말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그 말이 축복을 넘치도록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말 자체를 귀하게 여기고 하나님이 말씀 주신 것을 아름답게 생각하고 늘 여러분 스스로를 축복하고 이웃을 축복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하나님은 만물의 주인입니다
인명진목사 / 창 1:1-5, 계 4:1-11 요 1:1-5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우리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제대로 알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돌아보아야 할 문서가 있습니다. 바로 대한민국의 헌법입니다. 헌법 속에는 우리나라가 어떤 나라인지에 대한 국가 정체성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헌법을 열면 제일 먼저 헌법 제 1조가 눈에 뛰는데, 바로 그 문구에 우리나라의 정체성을 분명히 밝히는 조문이 나옵니다. 조문은 두 항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헌법 제 1조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헌법 제 1조 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
이 조항은 1948년 7월 17일 헌법을 제정한 후 9번의 헌법 개정을 겪으면서도, 한 번도 변하지 않고 헌법 전체의 중심을 잡아왔던 핵심항목입니다. 그동안 독재 정권이 나라의 헌법을 유린할 때에도 이 헌법만큼은 고치지 못했습니다. 권력을 잡기 위해 총칼로 수 천명을 죽인 폭력 정권도 감히 손댈 수 없었던 항목이 바로 헌법 제1조 1항과 2항이었습니다.
사람의 생명도 정권 유지하기 위해 죽이는데,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 저들은 우리나라 헌법을 이렇게 바꾸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대한민국의 주권은 권력자에게 있고, 권력은 총칼과 힘으로부터 나온다.” 이런 마음을 바탕으로 법을 무시하고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그래서 이 헌법 정신을 지키기 위해, 우리나라 민주화를 위해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싸워왔습니다. 그런데 요즘 대한민국은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민주공화국인가? 하는 의구심이 국민들 사이에 팽배해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민주공화국이라는 것과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국가의 정체성이 백성들을 일깨우며 불의한 권세들에게 저항하게 만들었습니다. 백성들로 하여금 오욕의 역사를 씻어내고 헌법 제 1조의 정신이 구현된 올바른 나라를 세우고자 계속 노력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은 누구에게 속해 있는가? 하는 만물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 있다면 우리는 어디를 찾아가야 하고 누구에게 물어야 합니까? 그것은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을 열면 금방 첫 번째 책, 창세기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성경을 펴자마자 등장하는 문구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우리나라 헌법의 제 1조 1항을 보는 것 같은 대명제가 선언됩니다. 이는 매우 놀랍고 경이로운 선언입니다. 성경의 첫 문장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위대한 신앙고백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 나의 생명과 내개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고,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고백입니다. 세상의 만물은 우연이나 자연적인 원인에 의해 발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의 행위에 의해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만드신 분이기도 하지만 이 세상이 그분에 의해 운행되고, 그분이 주인이라는 신앙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이 세상의 만물이 처음에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과 깊음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어떤 생명체도 살수 없는 버려진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이 그 위를 운행하셔서 모든 생명체를 만드시고, 서로 조화를 이루어 생육하고 번성하게 만드셨습니다. 그것도 그분의 신비한 능력의 말씀으로 말입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또한 하나님이 창조하신 매뉴얼들은 참 황홀합니다. 엿새 동안에 차근차근 만들어내신 그분의 창작품들을 보면 지금 우리가 생존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들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빛과 어둠을 통하여 낮과 밤을 만드시고, 하늘과 땅을 만드시고, 땅 위에 있는 모든 생물을 있게 만드셨고, 해와 달과 별 같은 우주의 광명체들을 만드셨으며, 육지와 바다와 공중의 생명체들까지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로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음을 세상에 선포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모든 피조물 속에는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과 마음이 담겨 있고, 존귀와 영광을 드러내도록 하나님의 표와 씨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작가들이 하나의 예술품을 만들고 나서 작품 앞 뒤 면에 낙관을 찍거나 사인을 해둡니다. 그리고 제품을 만들고 나서는 어느 회사 제품인지 상표를 새겨둡니다. 심지어 국적까지 기록합니다. 예를 든다면, Made in Korea처럼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신 제조자 마크는 무엇입니까? 모든 만물에는 창조주의 애정과 영광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경 말씀 처음 시작부터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요즘 표현으로 한다면 “Made by God”이라 브랜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만물은 스스로 있거나 미세한 것에서부터 지금까지 진화해 왔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물론 생물이 부분적으로 진화해 왔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주인 없는 작품이나 부모 없는 미아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작은 물건 하나도 만든 사람이고, 조그마한 그림 하나도 그린 작가가 있기 마련입니다. 하물며 이 원대하고, 조화로운 세상을 하나님 아니고 누가 만들겠습니까? 결국 인류는 창세기 1장 1절의 선언을 믿느냐 거부하느냐에 따라 두 종류의 존재로 분리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누구입니까? 창세기 1장 1절 선포에 의지하여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과 내 생명의 주인 되심과 내가 가진 모든 것의 주인 되심을 믿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복종과 헌신이 바로 우리의 진정한 평화요 자유이며 새 질서임을 고백하는 무리들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선언의 파장은 결코 만만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 선언이 그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이었습니다. 자신만 알고 자기중심의 세계관을 공고히 하려는 자에는 이 선언은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입니다. 사실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과 인간의 투쟁의 역사입니다. 본질상 하나님과 사람은 싸움의 상대가 되질 않습니다. 질그릇이 토기장이에게 어찌 싸움을 걸 수 있겠습니까? 무엇을 놓고 싸운 것입니까? 인간은 끊임없이 없이 하나님과 주인 자리를 놓고 다투었습니다. 하나님 자리를 차지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창조주가 누리는 영광과 명예를 자신이 취하려 했습니다. 영광과 명예를 독점하려는 인간의 욕망이 너무도 강렬했습니다.종의 위치에서 주인의 자리로 나가려 하고, 나그네의 위치에서 주인의 자리로 나가려 하고, 섬김의 자리에서 다스림의 자리에 서려고 합니다.스스로 힘이 있다고 생각했던 모든 정권과 권력과 사람들이 그러했습니다. 이것은 인류 역사가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기가 주인 되려고 하는데 가장 걸림돌이 되는 대상은 누구입니까? 바로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죽이려고 교회를 핍박하고 성경을 불태우려 했습니다. 지난 일제 치하에서 일본 제국주의는 교회에 있던 성경을 거두어 가서 창세기와 출애굽기와 요한계시록에 먹칠을 해서 그 부분 성경을 읽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나중에는 그 말씀을 암송해서 설교를 하니까 성경마저 강제로 빼앗아가기도 했습니다.
제가 문경에서 7년 동안 섬겼던 교회는 올해로 110주년 되는 교회입니다. 그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인데, 원주로 의병 나갔던 전승달 성도라는 분이 복음을 받고 고향에 돌아와 자기 사랑채를 내어 교회로 모였습니다. 1903년에 세워졌는데, 일본은 교회가 항일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1920년 교회를 패쇄시켜 버리고 예배당을 처분해서 경안노회에 귀속시켜 버렸습니다. 그래도 몰래 교회로 모이자 일본 순사들이 교회에 들어와 성경 채에 먹칠을 해버렸습니다. 뒤에는 그래도 하나님 말씀을 전하자 예배 시간에 순사들이 들어와 성경을 압수해 가버렸습니다. 이때 초대 장로님의 딸이 라헬로부터 지혜를 얻어 성경책을 자기 치마에 얻고 성경을 깔고 앉고 감추어 버렸습니다. 일본 순사가 일어나라고 하니까 라헬처럼 “저는 생리 중이어서 일어날 수 없습니다.” 하여 감추었던 그 성경 책 한 권으로 일제 치하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일본이 패망할 무렵 예배당 종을 군수문자로 쓰기 위해 강제로 빼앗아 문경군청에 갔다놓았다가 일본 실고 가지도 못하고 패망하고 말았습니다. 나중에는 신사를 지어놓고 하나님이 아니라 일본 천황에게 동방요배를 강요하기까지에 이르렀습니다. 교회는 끊임없이 하나님만이 유일한 주인이라 고백하면서 신사참배를 거부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는 자신들이 섬기는 임금이 천황인데 천황말고 하나님이라는 신이 있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일본 놈들이 하나님 섬기는 것을 우상숭배라고 간주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웃으실 발상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오만방자한 발상입니까? 하나님이 웃으셨습니다. 그래서 역사상 전무후무 했던, 들어보지도 못했던 원자폭탄이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떨어졌습니다. 결국 일본 천황은 항복을 선언했고, 이와 동시에 “천황은 신이 아니고 인간입니다.” 인간선언을 결국 하고 맙니다.그러자 자신의 제국주의와 인간의 권력이 영원할 줄 알았던 일본 극우 인사들이 “덴노 헤이까 반자이!” 천황 폐하 만세를 부르며 활복자살한 사람이 수천에 이르렀습니다. 이 말속에는 신이었던 천황이 어찌 인간 앞에 굴복할 수 있습니까? 반문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 역사에는 “내가 모든 것을 주인” 이라고 생각하는 교만한 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끊임없이 도전 받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서신서 요한 계시록과 복음서 요한복음은 1세기 말 90년에서 95년 사이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그 당시 로마제국의 기독교 탄압은 극에 달했을 때입니다.
특히 주후 81년에서 96년 사이의 황제인 도미티안은 유달리 기독교인들이 “오직 하나님만이 주님이시다.”, “오직 예수가 구주시이시다.”는 신앙고백에 강력하게 반발했습니다. “오직 세상의 주인은 카이사르다.” 로마 황제 도미티안 자신이 세상의 주와 하나님으로 부르도록 강요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성도들은 굶주린 사자의 밥이 되고, 노예가 되고, 집을 다 빼앗겨도 “오직 하나님만이 주인”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기에 이 시대에 예수를 주로 고백한다는 것은 정말 목숨을 걸어야 했습니다. 예수가 주님이심을 믿는다는 것 때문에 순교하든지 부인하고 배교하든지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밧모 섬에 유배가 있었던 박해받는 신앙공동체를 향해 “그리스도가 세상의 주시시다”고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요한복음 다시 한번 보십시다. 여기에는 창세기에 선포된 내용을 재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창세기에 말씀으로 영으로 계셨던 하나님이 요한복음에는 보이는 하나님인 예수라는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보다는 더 선명하게 창조주 하나님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3절 말씀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런 하나님의 만물의 주인 되시는 주권 선언이 황제 우상종교가 판을 치던 철권통치 앞에서 세상을 뚫고 나왔다는 점입니다. 거짓 평화의 상징인 “팍스 로마”(Pax Romamana)의 깃발을 무시하면서 터져 나왔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종교 권력에 빠져 생명 구원에 대한 관심보다는 자신의 의로움을 뽐내고, 무참하게 민중을 짓밟고 있었습니다. 힘없는 사람을 죄인 만들기에 몰두한 거짓 종교와 불의한 정권을 거부하면서 이 선언이 터져 나왔다는 점입니다.
그러니 그 말씀을 믿고 따랐던 저 갈릴리의 힘없는 예수 공동체의 무리들이 그 벅찬 세상의 위세와 무시 앞에 얼마나 긴장과 공포 속에 지냈을까요? 만약 세상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없었다면 교회 공동체는 하루 아침에 무너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임 당하심과 부활을 통한 영광과 승리의 모습을 목격하지 못했다면, 창세기 1장과 요한복음 1장의 위대한 창조선언은 역사 속에서 빛을 발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요한복음 1장 5절의 선언은 더 메아리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또한 요한 계시록의 내용은 도미티안 황제의 박해로 밧모 섬에 유배된 사도 요한은 한층 더 깊은 신앙고백을 우리에게 울려주고 있습니다.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로서, 세세토록 살아계신 이에게”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리며 경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그런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까닭을 이렇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주께서 만물을 지으셨는데, 그 만물은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지난 달 10월 25일 박정희 대통령 서거일을 맞아 나들목 교회에서 제1회 박정희 대통령 추모예배가 드려졌습니다. 십자가가 있어야 할 자리에 박정희 대통령의 초상화가 걸려 있고, 설교자로 나선 분은 “하나님도 독재를 했으니 우리도 독재가 필요하다”는 망발을 일삼았습니다. 제가 그리스인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웠습니다. 이것이 한국 사회에 비춰진 기독교인의 모습이었습니다. 여러분, 박정희 대통령을 추모하는 것은 우상숭배입니다. 고 박정희 대통령이 예수님을 믿었습니까? 예수 믿지 않았습니다. 믿은 적이 없습니다. 예수를 믿은 적이 없는 데 어떻게 교회가 그를 추모할 수 있습니까? 역사의 공과 사는 논하지 않더라도 민주공화국에 사는 목사들이 죽은 권력을 추모하고 독재를 찬양하다니 억장이 무너질 일입니다. 한국교회는 타락했습니다. 하나님을 만물의 주인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주인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새마을운동을 성경 구절에 빗대어 찬양하고, 찬송가를 불러야 할 때 박대통령이 만든 노래를 불렀습니다. 북한에도 교회가 있다는데 북한 교회조차 김일성 초상화를 걸어 놓고, 김일성의 정책을 얘기하며, 김일성의 노래를 부르면서 예배를 보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마 이 장면을 북한의 지하교회 성도들이 보았다면 한국교회는 더 이상 교회처럼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문제의 발언, "한국은 독재를 해야 돼. 정말이야 독재 해야 돼." 대한민국은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민주공화국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룬 민주주의인데 목사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는 것은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기를 포기한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문제는 지난 34년 동안 조용하게 있던 교회가 공교롭게도 그의 딸 박근혜 대통령이 집권하자 권력의 아부하기 위해 이런 작당을 벌인 것 아닙니까? 한국교회는 회개해야 합니다. 권력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두려워해야 합니다. 권력을 연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연애해야 합니다. 우리 믿음의 선진들은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권력 앞에도 아부하지 않았고, 무릎 꿇지 않았습니다. 굶주린 사자 앞에서도 예수님만이 주시다고 선언했습니다. 카이사르가 주인이다고 선언하는 어두운 세상 속에서도 우리 믿음의 선진들은 “하나님만이 만물의 주인이다.” 고백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 지배 아래에서 “천황이 신이다.”고 동방요배를 강요받을 때에 교회 문을 닫더라도 신사참배에 항거하는 믿음의 선진들이 많았습니다. 왜 우리의 믿음의 선진들은 불이익과 박해가 올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렇게 행했습니까? 오직 하나님만이 만물의 주인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 이외에는 어떤 것도 주인 될 수 없고, 섬길 수 없기에 하나님이 주인 됨을 선언하며 올곧게 걸어왔습니다, 여러분, 언제 예수님이 헤롯 임금의 추모예배 드렸습니까? 초대교회 성도들이 로마 황제 추모예배 드렸습니까? 오늘 한국교회는 헤롯 황제 추모예배 드려주고 있습니다. 로마 황제 추모예배 드려주고 있습니다. 종말로 우리가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촛대를 다른 나라로 옮기지 않을까 심히 두려운 마음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제일 미워하시고 싫어하셨던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의 최고의 타락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분노하실 만큼 근본적인 타락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권력을 종교화 하는 것이고, 종교를 권력화 하는 것입니다. 동서고금의 역사 속에서 권력을 종교화 하려 했던 수많은 독재자들이 있었습니다. 애굽의 바로는 자신의 이름을 태양신의 아들이라 지칭했고, 일본은 천왕이라 불렀습니다. 북한의 주체사상도 결국은 권력을 종교화 시켜 놓은 한 사례입니다. 자신의 권력이 영원할 것이라 생각하며 성역화 한 것입니다. 권력이면 안 되는 일이 없는 것처럼 믿는 것입니다. 이런 시대 속에서 사람들은 권력을 종교처럼 신봉합니다. 권력이면 안 되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 권력은 종교와 같은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종교를 권력화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의 다른 것이 다 변질되어도 종교만큼은 변하지 않고 자기 자리를 지키기를 원합니다.우리가 생각하는 종교의 본질은 힘 있는 권력 앞에서 예언자 역할을 하고, 힘없는 자들 앞에게 친구로 다가가는 멋진 모습입니다. 그러나 종교가 본질과 목적을 잃어버리면 세상의 보루와 같은 종교도 권력화 되어 타락합니다. 성직자들이 종교를 통해 권력을 가지려 합니다. 교회가 권력화 되면 국민들의 마음과는 동떨어져 자신들만의 성전을 높이 쌓아올립니다. 섬기고 나누는 작은 자의 자리에 서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자기 몸집 자랑하고, 힘자랑합니다. 하나님이 처절하게 심판했던 두 가지가 바로 권력을 종교화 하는 것이고, 종교를 권력화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는 하나님을 연애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연애하고 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재물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기자와 사도 요한은 한국교회에게 엄중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세상의 주인은 누구냐? 만물의 주인은 누구냐?너희는 권력을 주로 섬기려느냐? 예수를 주로 섬기려느냐? 오늘 둘 주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창세기 기자와 사도 요한은 성도들에게 반문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주인이 누구냐? 만물의 주인이 누구냐? 너희는 재물을 주로 섬기려느냐? 예수를 주로 섬기려느냐? 오늘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는 우리에게 누구시며, 우리가 왜 예수를 찬양해야 하는 지에 대해 밝혀주고 있습니다. 또한 온 세상 만물이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며, 복종해야 하는 지를 명백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갈릴리 가족 여러분!
만물의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주인이고, 존귀와 영광을 받으실 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나의 생명과 나의 가진 재산도 모든 것이 하나님 것임을 고백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권력을 연애하지 않고, 돈을 사랑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 1번으로 사랑하여 주님이 복 주시는 사람들 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사람
피종진목사 / 창세기 1:1-5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면 마음에 평안함이 있고 주님을 위해서 살면 소망이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 때문에 사느냐? 먹기 위해 사는 사람은 좋은 음식점을 찾아다니고 요리를 만들며 먹는 기쁨을 사치를 좋아하는 사람은 금은보석 패물을 몸에 지니고 모으며 온 정신을 쏟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생명에 관한 것도 아니고 영원한 소망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께서 명하신 바를 순종하며 살면서 인류에게 은혜를 끼치고, 덕을 끼치는 아름다운 삶을 누리는 성도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창세기 1장에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는 말씀이 7회나 기록되어 있는 중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신 여섯째 날에는 ‘심히 좋았더라’(1:31)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이 어떠할 때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는지 성경 말씀 속에서 찾아 상고하면서 우리 모두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사람’으로 회복되기를 축복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영이 운행하는 사람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 1:1)아멘.
만물들도 마찬가지지만 우리 인생은 특별히 하나님의 영이 운행하실 때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사람이 되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운행’이란 ‘덮어서 포위하고 점령하며 좌우한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자동차는 운전기사가 합니다. 또 비행기는 조종사가, 배는 항해사가 좌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인류 세계를 운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그 영에 사로잡힌 사람은 안전하고, 행복하고, 미래가 보장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영이 운행하는 사람입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롬 8:9)아멘.
형태, 조직 등에서 명칭은 가질 수 있지만,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며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항상 하나님의 영이 운행하는 사람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어거스틴은 잘못된 길로 깊이 빠졌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한 사람의 변화는 복음을 들고 찾아간 그에 의해 영국은 세계의 신사(紳士)의 나라가 되었고 한민족이 구원을 받으므로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대제사장의 명령을 받고 기독교를 박멸하고, 결박해서 고통을 주는 흉악한 사람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하나님의 성령 역사로 거꾸러져서 변화 받아 대 바울로 변화되고 소아시아에 복음을 전하고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히면 역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사람은 아무리 도덕적, 윤리적, 철학적, 문학적, 예술적, 또는 인간의 고행으로 몸을 혹사한다 해도 결코 선함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이 아니면 한 사람도 의인이 될 수 없고 다 간악해서 하나님을 떠나 타락한 사람이 되기 때문에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3:10a)고 했습니다. 이처럼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은 도덕 윤리로 새로운 인격으로 변화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계시므로 주님의 생각으로 선하심과 온유하심과 긍휼하심이 충만하시길 축원합니다.
둘째, 분별의 역사가 있는 사람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과 어둠이 나뉘어 밤과 낮으로 구별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기뻐하는 사람은 구별할 줄 아는 사람, 즉 분별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마취되면 감각이 없어 아픔도 모르게 되듯이 사탄이 역사하면 의(義)인지, 불의(不義)인지 혹은 하나님의 뜻인지 사람의 뜻인지 분별하지 못하고 천국의 길인지 지옥의 길인지 분별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가 참신인지 바알이 참신이지 분별하지 못하고 둘 사이에서 머뭇거릴 때 엘리야 선지자는 여호와와 바알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책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내 뜻이 혼합 돼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 내가 손해를 보고 어려움이 있어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면 축복이 있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죽고, 촛물같이 녹아지는 어려움과 고통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위해 그것을 선택할 수 있는 믿음과 결단이 있다면 하나님 보시기에 참으로 좋은 사람이 될 줄로 믿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2)아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그 순간에 하나님 자녀가 되어 신분변화가 되고, 생활의 변화도 일어나야 합니다. 이를 성화(聖化)라고 하는데 성화는 점진적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 된 성도들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빛과 어둠, 육의 일과 영의 일을 분별할 줄 알고, 성령의 역사와 사탄의 역사를 분별할 줄 알고, 축복과 저주의 길을 분별할 줄 알고, 의와 불의를 분별할 줄 아는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사람으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열매를 맺는 사람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1:12)아멘.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사람은 열매를 맺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무화과나무로 성도를 비유했고 이스라엘을 비유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스라엘입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에게 원했던 것은 무화과 잎이 아니라 열매입니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요 15:8)아멘.
주님이 가장 기뻐하는 제자는 열매를 많이 맺는 사람입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마 3:10)아멘.
우리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무슨 열매를 맺어야 합니까? 성령의 9가지 열매(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를 맺을 뿐만 아니라 전도의 열매, 입술의 열매, 사명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것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함입니다.
열매 맺는 삶은 기도의 응답을 받는 약속이 보장된 약속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요 15:16)아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창조하신 본래의 모습 곧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사람’으로 회복되는, 그리하여 성령충만함으로 분별의 지혜를 얻고 열매를 맺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는 산 증인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창조주를 기억하라
창 1장 1~13절 / 윤태성목사
3월이 시작된 오늘은 민족의 독립을 외쳤던 3.1절이기도 합니다.
나라 잃은 백성들에게 얼마나 큰 슬픔인가 일제 36년을 통해서 우리는 경험하였습니다. 이런 의미를 기억하며 3월에는 제가 하나님의 나라를 중심으로 해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이 달에 읽어보시라고 추천해 드리려는 책이 있습니다.
신경숙씨의 장편소설 “엄마를 부탁해” 읽어보신 분이 계시겠지만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 이렇게 시작 되는 소설은 서울에 사는 자식들 편하라고 아버지 생신을 치르러 시골에서 올라오시다 서울역에서 아버지 손을 놓치고, 엄마가 실종됩니다. 가족 앞에 벌어진 큰 사건에서 이제까지 느끼지 못한 엄마의 사랑을 가족 구성원들이 담담하게 풀어갑니다. 엄마의 부재를 통해서 가족들은 엄마에 대해서 그동안 얼마나 무지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실종신고를 해야겠는데 엄마의 나이가 주민등록상의 1938년생인지 실제나이인 36년생인지 이것부터 정확하게 모릅니다. 그리고 엄마는 늘 필요한 것을 채워주시는 분, 당연히 엄마일거라는 것, 여자일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외면해 버립니다. 그리고 가족들의 고백을 통해서 엄마를 추억합니다. 이 딸은 결국에 가서 로마의 여행가운데 성베드로 성당에서 피에타 상에서 그 어머니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아들을 부여잡고 슬픔에 잠겨있는 마리아상에서 그 어머니의 숭고한 마음을 깨닫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어머니는 무엇을 상징하겠습니까? 아마도 가장 근본적인 존재를 잃어 버린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과학이 발달하고, 물질은 이전에 비해서 풍요롭습니다. 지식의 증가하지만 무엇가 부족함을 느끼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모습입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 시대는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을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의 삶의 자리는 심하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방에서 살기 어렵다’ 실제로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개인의 크고 작은 난관들이 있습니다. 저는 이런 때가 다시 한번 우리의 근본을 돌아보는 때라고 생각을 합니다. 가장 원론적인 이야기로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해야하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천지창조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면서, 창조의 원리와 창조하신 목적, 이 땅에 이루어가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1. 창조 세계를 인정하라.
인간에게는 풀어야하는 근본적인 질문이 있습니다. 이 근본적인 질문은 그것을 생각하는 사람과 그것을 외면하는 사람의 차이만 있을 뿐 누구도 이 3가지 질문에서 자유한 사람이 없습니다. 먼저는 나는 누구인가? 나라는 존재는 어떤 존재인가 두 번째 이 땅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그리고 나의 인생은 나는 어떤 이유로 이 땅에 살아가는가 즉 나는 어떻게 되는가? 그것을 해결하고자 인류는 철학과 종교, 정치체계까지 만들어 보지만 어느 곳에서도 속 시원하게 답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위대한 선언이 나옵니다. 창세기 1: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것은 만드신 분의 선언이고 공포입니다. 이것을 증명하는 것도 아니고, 이것은 타협의 산물도 아닌 신적인 권위를 이야기합니다. 다른 것은 어떤 존재에 대한 증명이 필요하지만 이 신적인 선언은 이 자연만물의 절대적인 기준이 되고 이 모든 현상을 풀어갈 수 있는 기본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모든 생물들이 본분을 알고 피조물임을 깨닫게 됩니다.
사 45:8 “너 하늘이여 위에서부터 의로움을 비같이 듣게 할찌어다. 궁창이여 의를 부어 내릴찌어다. 땅이여 열려서 구원을 내고 의도 함께 움돋게 할찌어다. 나 여호와가 이일을 창조하였느니라” 하늘과 땅에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창조 세계를 보면서 창조하신 분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을 미국에서는 “지적 설계론”이라고 합니다. 이 거대한 우주에는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피하지만 어떤 창조주에 의해서 지적으로 설계되어 있다는 학설입니다. 혹은 현대 물리학에서는 “우주에 에너지가 있다.” 그 에너지가 사랑이다 라고 이야기 합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시면 우리가 사는 이 우주는 얼마나 광대합니까? 이 우주의 크기를 알 수 있는 것이, 지구에서 관측할 수 있는 별은 200억 광년에 있다고 합니다. 빛의 속도 80만 Km 즉 1초에 지구를 7바퀴 반을 돕니다. 그 속도를 가지고 200억 광년이 되야 도착을 할 수 있고 그 이후에 무엇이 있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이 넓은 우주 속에 태양계가 있고 태양계가 속해있는 은하수가 있습니다. 그 은하계 하나만의 길이가 10만 광년인데 그런 은하계가 천 억 개가 있다 추정입니다. 그냥 추정할 뿐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계산기로는 도저히 근접할 수 없는 수치입니다. 이런 신비 앞에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이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묻지지도 않고 따지지도 말고” 믿을 수밖에 없는 진리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얄팍한 기술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의 세계입니다. 그것은 마치 너무 많이 알게 되면 컴퓨터가 Over Rord로 랙을 먹거나 브레이크 다운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존재와 본성의 질문은 끓임 없이 질문되어 왔지만 누구도 풀 수 없는 문제이고 최고의 지성을 가진 사람들도 속 시원하게 대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간단 명료 않게 “우리 하나님이 창조하셨다” 우리가 다시 한번 이 우주속의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를 안다면 우리의 삶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의 환경에 어려움과 고통이 있을지라도 나는 여전히 주님이 만들어주신 창조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 그분을 신뢰 할수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ex)명절이 되면 고민하시는 할아버지를 본적이 있습니다. 큰아들의 손자와 작은 아들의 손자가 같이 집에 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 와락 앉기는 것은 좋은데 서로 무릎에 앉으려고 달라 듭니다. 사실 할아버지 마음은 큰아들의 아들 장손을 앉혀서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아 글쎄 나이는 똑같은데 옆집 가까이에 살고 있는 작은 집 손자가 “비켜 우리할아버지야” 그러면 아무리 장손이라도 깨깽하고 비켜갑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야곱과 에서가 생각이 납니다. 그들을 보시면 에서가 더 중요한 인물이지만 그는 장자의 명분을 경홀이 여겨서 팥죽 한 그릇에 자신의 신분을 팔아버립니다.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 이런 믿음이 있다면 이 땅에서 우리는 당당하게 살 수 있습니다. “여기는 우리집이야” “하나님은 나를 위해서 이모든 것을 창조해주셨어”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야” 이렇게 당당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모르는 부자에게 주눅이 듭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잘 생긴 사람 앞에 가면 위축이 됩니다. 장손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분을 잊어버리는 손자와 같습니다. 이 장손은 “비켜 내가 이 집 장손이야” 이런 자신감이 필요합니다. 한번 같이 할까요 “운명아 길을 비켜라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시다 ” 자신감이 필요합니다. 그 자신감을 가지기위해서 우리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늘 주님 앞에 나오셔야 합니다. 누가 부모님에게 귀여움 받는 자녀입니까! 자꾸만 부모곁에 나와서 자기의 일을 이야기하고 작은 일도 상의하는 자녀가 부모님을 기쁘게 하는 자녀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입니까? 그의 낯을 주님께로 향하는 사람입니다. 주님 앞에 나와서 예배드립니다. 주님의 나의 창조주 되심을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누가 복이 있는 사람입니까?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와 같은 사람입니다. 시냇가에는 말씀이 흐릅니다. 그곳에 뿌리를 내리는 나무에게 시절의 은혜, 창조주의 은혜가 넘치게 됩니다. 주님, 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을 나는 신뢰하고 높여드립니다. 이런 고백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2. 창조의 원리가 흐르게 하라
창세기 1장 1절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때 창조하셨다는 단어를 “바라”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께서 무로부터의 창조하셨다는 의미와 연결이 됩니다. 영어 성경가운데 God made라는 말은 신학적인 오류가 있고 create라는 단어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 분은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권능이 있고 능력이 있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요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하나님이시라” 첫째 날에 빛이 있으라 모든 생명체의 근원이 되는 빛의 역사입니다.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태양과 달과 별의 빛은 발광체의 빛으로 처음의 빛이 아닙니다. 둘째 날은 궁창을 창조 하셨습니다 궁창 즉 대기권을 나타나내는 말로 땅위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누는 공간을 이야기합니다. 셋째 날은 바다와 땅이 생기고 그곳에 나무들이 자라게 됩니다. 넷째 날이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을 만드시고 다섯째 날은 바다에는 어류와 땅에는 조류를 만드셨습니다. 여섯째 날이 되어서 모든 짐승들과 사람을 창조하십니다. 7일째에 안식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7일간의 창조를 보시면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1일부터 7일까지 어떤 순차적으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음만 먹으시면 하루에도 모든 것을 창조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7일이라는 날 속에서 어떤 계획이 있고 어떤 목적을 분명히 가지고 계셨습니다. 또한 이런 창조가 어떤 구조 속에서 연결이 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기본이 되는 날이 있고 그 바탕위에 또 다른 창조의 날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첫째 날과 빛을 통하여 넷째 날의 하늘의 태양과 달과 별과 같은 발광체가 만들어 집니다. 둘째 날 궁창을 통해서 다섯째 날의 바다의 어류와 하늘의 조류를 만드십니다. 셋째 날의 바다와 땅과 나무를 만들어 놓으시고, 땅의 짐승들과 사람을 창조하십니다. 짐승과 사람이 함께 창조가 되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안다면 우리가 진화론이 얼마나 허구인줄을 알 수 있습니다. 진화론자들은 어떤 바다에서 생물이 세포 분열을 하고 아가미와 허파가 생겨서 개구리처럼 바다에서도 살고 육지에서도 사는 동물이 진화되어 포유류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물에 사는 동물과 땅에 사는 동물을 각각 만드셨습니다. 또한 진화론자들이 사람과 비슷한 원숭이에서 사람으로 진화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과 동물은 지구라고 하는 공간에서 함께 살아가기 때문에 필요한 기관과 비슷한 기능을 가진 장기들로 만드신 것이지, 진화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원숭이와 사람은 비슷합니다. 그런데 원숭이와 인간이 분명히 다른 것은 사람들에게만 영을 허락하시고 인간에게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비슷하다고 확률이 높다고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창조의 사역의 특징을 보시면 흘러가게 하신다. 계속해서 집중하고 계십니다. 무엇위해서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이어가게 하십니다. 하루 하루의 창조를 통해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안식을 하게 하십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살아가게 하기 위함 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역사를 위해서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 주십니다. 가만히 생각해보시면 하나님께서 시간이 필요하십니까? 하나님은 시간이 필요하신 분이 아닙니다. 인류역사라고 하는 것은 시간으로 이루어졌지만, 시간의 창조자 하나님께서는 역사이전에도 존재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을 위해 공간을 창조하십니다. 우주라는 말은 레헴이라는 말로 어머니의 “자궁”을 의미합니다. 즉 인간을 위해서 우주를 만들어 주셨지만 하나님의 범위가 우주가 아니라는 것이고 하나님은 무소부지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창조의 역사를 보면서 하나님은 순서와 시간을 중요하게 생각하시고 시간이 흐르고 역사가 흘러가며 발전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늘에만 머물러 계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죄와 죽음으로 분리가 일어난 것을 그분이 친히 찾아오셔서 막힌 담을 허물어 주셨습니다.
창조의 역사 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복음의 역사를 이어가게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를 안다면 복음이 흘러가도록 해야 합니다. 어떻게 흘러가겠습니까? 먼저는 가정에서 내가 받은 복음의 역사가 나 뿐 아니라 우리 자손에게로 흘러가게 해야 합니다. 복음은 나를 통해서 가족과 주변사람들에게로 전해져야합니다. 창조의 질서가 빛으로 공간으로 땅과 하늘과 바다와 육지로 식물과 동물계로 흘러가듯이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점점 넓어지고 풍성해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먼저주변을 보시면 나와 막힌 관계가 미워하는 사람과의 막힌 관계가 다시 흘러가야 합니다. 내가 먼저 찾아가고 손을 내밀고 주님의 사랑의 역사가 흘러가는 것 그것이 복음의 역사입니다.
나오는 말)
시편 19편에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우리가 이 우주를 본다면, 그 속에 빛나는 하늘을 본다면, 새 봄의 새싹의 새 생명을 본다면 그것은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임을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엄마의 태중에 생명체가 생겨납니다. 생명체가 배안에서 착상 외 되는 것도 신비이지만 저는 심장을 생각할 때 누가 쿵하고 뛰게 했는가. 엄마가 태아를 품고 있었지만 엄마가 그 태아의 심장을 뛰게 한 것이 아닙니다. 아이를 잉태하고 갑자기 배를 탁쳐서 아이가 깜짝 놀라 심장이 뛰게 한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에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 수많은 우주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나를 만들어주시고 과거세대에도 없고 현세대에도 없고 이후 세대에도 없는 이 세상에 절대적인 나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아직도 이러한 진리를 모른 채 “인간은 한 번 왔다가 죽으면 끝이다” 창조주를 모르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창조주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안다면 생명을 소중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그 사실을 알면 삶이 숙연해집니다. 내가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를 깨닫고 주님 앞에 가까이 하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뿐만 아니라 내 주변에는 아직도 이런 창조의 세계를 모르고 진화론이나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다 생각하는 숙명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게 하는 것 그것이 복음의 출발이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 살아계시다 마음의 확증으로 이 세상에서 승리하실 뿐 아니라 이런 복된 섭리를 증거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위대한 종소리
창 1장 1~2절 / 지용수목사
우리가 한 주간을 그래도 경건하고 깨끗하게 말씀대로 살았다면 신바람이 나게 하나님 앞에 나아와 정말 기쁘게 예배를 드릴 수 있지만, 원치 않은 일로 넘어지고 쓰러지고 부끄럽게 되었을 때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올 때 기쁘기는커녕 ‘나는 왜 이렇게 못났을까?’하는 무거운 마음에 얼굴을 들기가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거룩하고 깨끗하게 살다 온 사람들만 환영하는 것이 아니라 더럽혀진 몸으로 와도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안아주시며 주님의 피로 깨끗하게 씻어주십니다. 게다가 말씀도 먹여 주시고 생수도 마시게 해 주십니다.
한 유명한 목사님에게 한 성도가 찾아와서 고민을 털어 놓더랍니다.
“목사님, 저는 하나님의 아들답게 살려고 무척 노력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렇게 때도 묻고 형편 없습니다. 저는 구원 받은 자가 아닌가 봅니다.”
목사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답니다.
“저 개를 보세요. 저 개는 말썽도 피우지 않고 나를 볼 때마다 꼬리를 흔들며 기쁘게 해줍니다. 집도 더럽히지 않고 나를 귀찮게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부엌에 있는 저 아기를 보세요. 내 아들인데 얼마나 골치 아픈 일을 많이 저지르는지 모릅니다. 아무 때나 똥과 오줌을 싸고 옷을 새로 사 입혀 주어도 금방 더럽히고 말도 잘 듣지 않습니다. 정말 골치 아픈 아들입니다. 그래도 나는 내 재산을 저 골치 아픈 아들에게 주지 개에게 주지 않습니다. 비록 형제가 부족하다 해도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예수님께서 형제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형제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형제는 천국을, 모든 재산을 상속 받을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우리는 귀하게 살아도 하나님의 자녀요, 때 묻히며 살아도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니 귀하게 살아도 주님 전에 나아와 겸손하게 은혜를 받아야 되고, 막 살고 더럽혀졌어도 주님 앞에 나와야 새로워져 재출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을 걸고 언제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와 승리하고 또 승리하며 실패해도 또 승리하는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말씀으로 우리를 재출발하게 하시고, 말씀으로 가다듬어 주시고, 말씀으로 용기를 주십니다.
어느 목사님께서 설교를 하시는데 휴대폰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습니다. 목사님께서 “예배 시간에 휴대폰을 끄라고 그만큼 했으면 꺼야지, 또 안 껐군요.”하고 꾸짖으셨습니다. 그리고 설교를 다시 하시는데 목사님의 호주머니에서 휴대폰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러자 목사님께서 당당하게 폰을 꺼내시더니 “예, 하나님. 말씀하세요.”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온 교우들이 한바탕 웃었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성도가 하나님과 대화를 해야 하지만 목사님들은 특별히 하나님과 가까운 대화를 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교인들이 모든 일을 제쳐놓고 교회에 오는 것은 예배드리기 위함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함이지, 목사의 강연을 들으러 오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창세기를 강해할 때도 제 말이 나가지 않고 저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만 증거되도록 여러분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때때로 저는 21, 2년 전에 섬겼던 서산교회의 성회를 생각하곤 합니다. 거기에서 감명 깊은 간증을 많이 들었는데, 특별히 김경용 장로님의 간증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90이 넘으신 분이 제 앞에서 무릎을 꿇고 계셔서 민망했던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장로님, 편히 앉으세요.”
“아닙니다, 목사님. 저는 하나님의 종인 목사님과 전도사님 앞에서는 절대로 편하게 앉지 않습니다.”
“장로님, 그래도 지금은 편히 앉으세요.”
“목사님, 저는 하나님의 종 앞에서는 무릎을 펴고 앉지 않습니다.”
지금도 제가 새신랑 같은데 20년 전에는 얼마나 어렸겠습니까? 장로님이 총각같은 어린 목사 앞에서도 무릎을 꿇고 앉아계셔서 저도 무릎을 꿇고 차를 마시며 장로님과 대화를 했습니다. 장로님께서 하신 말씀 중 지금도 제게 특별히 기억되는 것이 있습니다.
장로님께서 청년 시절에 교회에 다니면서도 천국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고, 하나님께서 계신 것 같기도 하고 안 계신 것 같기도 해서 긴가민가했답니다. 그런데 하루는 새벽기도회에 참석했다가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경험하게 되었답니다.
목사님께서 팔복에 대해 설교하실 때, 그 순간 앞자리에 앉아 있던 한 나병환자의 상처가 없어지고 피부가 새로워졌답니다. 나병환자가 깨끗하게 되는 것을 자신의 눈으로 본 장로님이 ‘하나님은 살아 계시는구나! 하나님은 살아 계시는구나!’하고 그 때부터 정성을 다해 주님을 섬겼답니다. 그래서 서른이 조금 넘은 나이에 장로님으로 피택 받았는데, 그때 그분이 고민을 했답니다. 이웃 교회의 장로님들 중 몇 분이 장로님이 된 후에 “나는 교회의 어른인데…….” 하다가 망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랍니다. 그래서 ‘장로가 되어서 망하면 안 되지. 겸손한 장로가 되어야지.’하며 ‘하나님, 어떻게 하면 겸손하게 봉사를 할 수 있을까요?’하고 기도하는 중에 종 치는 일이 생각나더랍니다. ‘아! 하나님의 인도구나.’라고 생각한 장로님이 새벽마다, 주일 낮마다, 주일 밤마다, 삼일마다 종 줄을 잡고 종을 친 것이 60년이 지났답니다. 90이 넘은 그 때까지도 종을 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시기를 “목사님, 제가 종 줄을 잡았더니 하나님께서 제 가족들의 건강의 줄을 잡아주셔서 한평생 병원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집안이 이렇게 복을 받았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60년이 넘도록 종을 치며 충성하신 장로님의 그 귀하신 모습이 몹시 향기로워 가슴이 찡해졌습니다.
제가 어릴 때는 시계가 있는 집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종소리를 들으면 ‘아, 새벽 예배 첫 종이구나. 이제 곧 새벽 예배가 시작되겠구나.’하고 알았습니다.
그런데 새벽 기도를 알리는 그 종소리는 우리에게 많은 메시지를, 교훈을, 의미를 전달합니다. 누워 있는 사람에게는 ‘일어나라. 일어나라. 일어나라.’하는 소리로, 교회에 가고 있는 사람에게는 ‘천당, 천당, 천당’하는 소리로 느껴집니다. 저는 ‘땡그랑 땡 땡그랑 땡’하는 종소리를 들을 때면 가슴속 깊은 곳에 ‘천당 천당’하는 느낌이 왔습니다.
종소리와 함께 종소리 속의 교훈이, 의미가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학교에서도 종을 칩니다. 그 종소리는 ‘시작하는 시간이다.’ ‘마치는 시간이다.’라는 것을 알려 줍니다.
우주에 울려 퍼지는 종소리 같은, 창세기 1장 1절의 말씀은 먼저 이 광활하고 신비로운 우주를, 하늘과 땅을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지으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선명하게 알려줍니다.
저는 매일 창세기를 읽습니다. 눈을 뜨면 먼저 기도하고 창세기 1장을 읽는데,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라는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우주에 울려 퍼지는 위대하고 거대한 종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이 종소리는 오고 오는 세대까지 계속 울려 퍼지는 것 같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위대한 종소리 같은 말씀을 읽을 때마다 제가 얼마나 큰 감동을 받고 감사하는지 모릅니다.
미켈란젤로가 마리아 상을 만든 다음 스스로 도취되어 “사람이 만든 작품이 어찌 이렇게 훌륭할 수 있는가?”하며 마리아 가슴 띠에 자기 이름을 기록하고 사인을 했습니다. 그리고 흥분해서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의 눈앞에 푸른 하늘과 뭉게구름, 아름다운 산천, 꽃과 벌, 광활한 세계가 펼쳐졌습니다. 그 순간 그는 부끄러워 어쩔 줄 몰랐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대하고 놀라운 이 우주를 지으시고도 사인하지 않으셨는데, 나는 이 작은 작품 하나를 만들어 놓고 거기에 도취되어 사인을 하다니…….’
그 후로 미켈란젤로는 모든 작품에 그의 이름을 기록도 하지 않고 사인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도 그의 작품이 너무 탁월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의 작품을 보면 “아, 이것은 미켈란젤로의 것이구나.”하고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 모든 것을 지으셨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사인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하늘의 별, 꽃 한 송이, 풀 한 포기도 우연히 있을 수 없고 사람이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지으셨다는 것을 우리가 감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이 우주를 보면 참 신비롭습니다. 어떻게 지구가 날마다 23.44도로 자전을 하면서 또 태양을 도는지, 어떻게 달이 지구를 돌면서 함께 태양 궤도를 도는지 신비롭습니다. 또 그 스피드가 1초도 어김없습니다.
메릴랜드 주의 한 기계회사에서 인공위성을 발사하기 위해 컴퓨터로 10만 년 전까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태양 궤도의 진행을 체크하니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24시간이 없어진 것입니다. 내로라하는 과학자들이 아무리 연구를 해도 없어진 24시간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만일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면 인공위성이 충돌할 수 있어서 계속하여 그 이유를 찾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럴 때 한 타이피스트 여직원이 연구소 소장에게 말했습니다.
“소장님, 저는 교인입니다. 성경에 보면 여호수아가 기도할 때 태양이 거의 하루 종일 멈췄다는 사건이 있습니다.”
소장은 “웃기는 소리 하지 말아요.”하고는 코웃음을 쳤습니다. 그러나 그 여직원의 말이 자꾸 메아리쳐 성경을 구해다가 아무도 몰래 여호수아서를 읽었습니다. 그는 여호수아 10장에 가서 충격을 받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모리 족속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붙이시던 날에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고하되 이스라엘 목전에서 가로되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지어다 하매 태양이 머물고 달이 그치기를 백성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도록 하였느니라……』
여호와께서 아모리 족속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맡기시던 날에, 이스라엘 백성이 칼로 아모리 족속을 치고 있는데 해가 지려 했습니다. 만일 해가 져서 적을 다 치지 못하여 도망갔던 적들이 다음에 다시 무장하여 쳐들어오면 문제가 되기 때문에 다급해진 여호수아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태양아! 기브온 위에 머물러 있으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멈추어라.”라고 외쳤습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의 믿음의 기도를 받으시고 거의 하루 종일 태양과 달을 멈추어 서게 하셨습니다.
이 사건에 충격을 받은 소장이 컴퓨터에 들어가 여호수아 시대로 거슬러 가 보니 없어졌던 23시간 20분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러면 40분은 어디에서 없어졌을까?’하고 궁금해 하던 그는 ‘혹시 그 40분도 성경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며 떨면서 성경을 읽어나갔습니다. 그러다 열왕기하 20장에서 또 충격을 받았습니다.
히스기야 왕이 병으로 죽게 되었을 때 전심으로 기도하니 하나님께서 그를 살려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 증표로 해 그림자를 10도 물러가게 하셨습니다. 해시계는 원점으로부터 360도가 한바퀴이고 10도가 40분입니다. 그러니 나머지 40분은 바로 거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소장은 무릎을 꿇고 “오! 정확무오하신 하나님, 하나님 앞에 제가 무릎을 꿇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이 우주를 우연히 짓지 않으시고 정확하게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몰랐습니다. 이 우주를 위대한 분이 만드셨을 것이라는 것은 알지만, 그분이 하나님이신지는 몰랐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종을 울리듯 선명하게 말씀하셔서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만드셨음을 우리가 알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인생이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훤히 알고 갑니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고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고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가는 것을 훤히 아는 것입니다.
다른 데는 답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지으셨습니다. 진화론을 주장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학설에 불과합니다. 원숭이에서 사람으로 되는 중간 고리 화석도 없고 사람 같은 원숭이도 없고 원숭이 같은 사람도 없습니다. 진화론은 하나의 가설입니다.
원숭이와 사람은 너무 다릅니다. 원숭이가 속옷 하나 걸치는 것을, 손수건 하나 만들어서 사용하는 것을 보았습니까? 원숭이가 생일을 맞이했다고 꽃을 꺾어서 ‘happy birthday’ 하고 부르는 것을 보았습니까?
따라 합시다.
“원숭이는 원숭이다.”
어느 중학교 생물 시간에 선생님이 진화론을 가르치면서 “원숭이가 우리 조상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기독교인 학생이 말했습니다.
“선생님, 그러면 선생님도 원숭이 후손이란 말입니까?”
“말하자면 그렇지.”
“그러면 선생님은 원숭이의 몇 대손입니까?”
“야 이놈! 수업이 끝나면 교무실로 와!”
수업 후 학생이 교무실에 갔습니다.
“너 예수쟁이지?”
“예.”
“네가 믿는 하나님을 보여주라. 그러면 나도 믿을게.”
“선생님, 정신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야, 이놈아! 내가 정신이 없기는 왜 없어. 있지.”
“선생님, 정말 정신이 있습니까?”
“있지.”
“그러면 선생님의 정신을 한 번 보여주세요. 그러면 저도 하나님을 보여 드리지요.”
“이 맹랑한 놈!”
그 학생의 말에 선생님이 더 이상 할 말을 잃었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지으셨습니다. 보십시오. 나무가 바람에 꺾여 500년이 지나면 책이 되어 나올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만들어야 책이 됩니다. 바다의 모래가 한 100만 년 뒹굴면 강대상이 되어 나옵니까? 아닙니다. 만들어야 강대상이 나옵니다. 쇠를 억만 년 놓아두면 마이크가 됩니까? 아닙니다. 만들어야 마이크가 됩니다. 오래 되면 고장나는 마이크도 만들어야 나오는데, 몇 천 년이 지나도 고장이 나지 않고 기름을 붓지 않아도 계속 타오르는 태양, 이 신비로운 우주가 어떻게 그냥 나왔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내가 만들었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시면 사람이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 놀라운 우주를 하나님께서 지으셨습니다. 사람도 하나님께서 지으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다 아니 궁금한 것이 없습니다. 할렐루야! 다 알고 사니 얼마나,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목회하는 것이 어렵지만, 목회를 알면 쉽습니다. 목회를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맞추려 하니 어렵지, 사람에게 맞추지 않고 하나님께 맞추어 나가면 하나님께서 다 인도해 주십니다. 알고 나면 다 쉽습니다. 우리가 모르니 어렵지, 알면 다 쉬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이것은 엄청난 지식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자기에 대한 지식도 가짜고 세상에 대한 지식도 가짜입니다. 인생이 무엇인지 한평생 연구하는 철학자도, 그 학문도 가짜입니다. 물음표(question mark)로 시작해서 물음표(question mark)로, 해답 없이 끝납니다.
그러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이 한 마디 말씀만 받아들이면 하나님을 알고 자기를 알고 세상을 알게 됩니다. 이것을 아는 우리는 감사하며 살아야 됩니다.
그리고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이 우렁찬 종소리 같은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태초 전부터 계신, 영원하신 하나님’이심을 웅변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여기에 서 있는 것은 제게 부모님이 계셨다는 증거가 됩니다. 여러분이 여기에 계신 것은 여러분의 부모님이 계셨다는 증거가 됩니다. 여기에 바이올린이 있는 것은 바이올린을 만든 사람이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이 우주가 있는 것은 이 우주를 만든 분이 계셨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분은 바로 하나님이신데, 하나님께서는 태초 전에, 우주를 만들기 전에 계셨다는 것입니다. 우주나 사람이나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께서 지으셔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습니다.
‘창조’라는 말을 히브리어로 보면 네 가지 뜻이 있는데, 그 대표적인 두 가지는 ‘바라’와 ‘바나’입니다
‘바라’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입니다. Nothing에서, 아무것도 없는 데서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창조는 ‘바라’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만드는 것입니다.
‘바나’는 있는 것에서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입니다. 아담의 갈비뼈를 뽑아 여자를 만드신 것은 ‘바라’가 아니고 ‘바나’입니다.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실 때는 있는 것으로 지으셨지만, 이 모든 천지를 창조하실 때는 없는 것에서 지으셨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데서 있는 것으로, ‘바라’로 창조하셨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말씀은 시간 전에 벌써 영원히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알려줍니다. 시간도 창조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신비롭게도 하나님은 만드신 분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계셨는가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그냥 계십니다. 할렐루야!
따라 합시다.
“하나님은 본래부터 계신다.”
출애굽기 3장에 보면, 모세가 양떼를 몰고 꼴과 물을 찾아 서편으로 서편으로 옮기다가 호렙산에 이릅니다. 호렙산의 한 떨기나무에 불이 붙은 것을 보고 ‘산불이 났구나.’라고 생각했는데 불이 번지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았습니다. ‘이상한 불이구나.’하고 가까이 가는데 “모세, 모세!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모세가 엄청난 충격으로 떨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네 조상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다. 내 백성이 애굽에서 당하는 고통을 보고 그 신음 소리를 듣노라. 내가 내 백성을 구원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옮기리라. 네가 가서 그 일을 감당하라.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오! 하나님, 우리 백성이 어떤 하나님이 보내서 왔느냐고 물으면 제가 무어라 대답할까요?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제가 어떻게 대답할까요?”
그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이름을 말씀하십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I am who I am.)” (출애굽기 3:14)
이것이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하나님은 만들어지신 분, 누구와의 사이에서 나신 분이 아니고 스스로 영원히 계신 분이십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 삼위일체로 인격이 셋인데 한 분이십니다. ‘엘로힘’이라는 히브리어는 복수이면서 단수인 이상한, 특별한 명사입니다.
요한복음 1장 1, 2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라고 말씀하십니다. 말씀이 예수님이신데, 태초에 벌써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오늘 본문 2절에도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신은 성령인데 성령께서는 태초부터 계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영원하십니다.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은 영원하십니다.
히브리서 13장 8절에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Jesus Christ is the same yesterday, today, and forever.)』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 합시다.
“하나님은 영원하시다.”
우리가 섬기는 아버지가 만 년 사시다가 늙고 병들어 돌아가시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원하도다 영원하도다」하고 찬양합니다. 또 그 영원하신 성령을 우리가 받아서 영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처럼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한복음 11:25-26)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죽어도 우리의 영혼은 죽지 않는 것입니다.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태초 전에 계셨다는 것이고, 또 하나님을 믿으면 믿는 그 사람이 영원히 산다는 것입니다. 굉장한 종소리 같은 말씀입니다.
그리고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우렁차게 울리는 종소리 같은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웅변적으로 선언하는 말씀입니다.
왜입니까? 하나님께서 이 광활한 우주를 지으신 목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를 살게 하시려고 이 우주를 지으셨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여기에서 복을 받으며 살라고 우주를 만드신 것입니다.
이사야 45장 18절에 말씀하십니다.
『여호와는 하늘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며 땅도 조성하시고 견고케 하시되 헛되이 창조치 아니하시고 사람으로 거하게 지으신 자시니라 그 말씀에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할렐루야!
이 엄청나게 많은 별들 가운데 사람이 사는 별은 신비롭게도 지구별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지구에만 아름다운 산천을 만드셨습니다. 꽃을 지으신 것도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아름다운 꽃을 보며 기뻐하라고, 결혼식장에 장식하라고, 결혼 기념일에 꽃을 선물하라고 우리를 위해 지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결혼 기념일이나 아내 생일에는 아내에게 꽃을 선물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루 종일 날아다니며 꿀을 만드는 벌을 지으신 것도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우리에게 꿀을 먹이시려고 벌을 만드신 것입니다. 부지런히 먹고 살찌는 돼지를 지으신 것도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열심히 꼴을 먹는 소도 우리를 위해 지으셨습니다. 우리에게 우유와 버터와 고기를 주시기 위해 소를 지으신 것입니다. 달걀을 낳는 닭도, 바다의 물고기도 우리를 위해 만드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생선을 먹을 때든 육고기를 먹을 때든 미안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물고기를 맛있게 먹으면 물고기들은 아마 ‘감사합니다. 제 사명을 다했습니다.’라고 하며 우리에게 고마워할 것입니다. 닭을 잡을 때 살생한다며 미안해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살인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지, 살생하지 말라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먹든 감사하며 기쁜 마음으로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맛있는 배, 사과, 감, 땅콩도 다 우리 사람을 위해 지으셨습니다.
또 우리가 살기 좋게 공기도 만들어 주셨습니다. 대기권 밖으로 나가면 공기가 없습니다. 이 지구에만 산소가 있습니다. 이 지구에만 비가 오고 눈이 옵니다.
우리 하나님께 감사의 박수를 올려 드립시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해 만들어 주셨습니다.
거기에 더하여 아들 예수님을 주셨습니다. 천국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세상도 살 만한데, 천국은 얼마나 놀랍겠습니까? 그것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보아라 즐거운 우리 집 밝고도 거룩한 천국에」
우리가 창세기 1장 1절 말씀만 제대로 깨달아도 너무 좋아서 미칩니다. 하나님께 미쳐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고마워요. 하나님, 고마워요.”하게 됩니다.
부족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주셨습니다.
그리고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울리는 종소리 같은 말씀을 깨달으면 ‘그래, 온 우주를, 천국을, 모든 것을 다 선물로 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은혜를 갚으며 살아야지. 나는 아버지를 위해 살아야지.’하는 감동으로 하나님을 위해 사는 자가 될 줄로 믿습니다.
목회하면서 저는 형제에게도 받기 어려운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오래 전에 제가 네 분에게서 큰 선물을 받았습니다. 친형제에게도 받기 어려운 큰 선물을 받아서 제가 매일 그 네 분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합니다. 그 은혜를 갚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도저히 계산할 수 없는, 엄청난 선물을 다 받았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삶은 마땅히 하나님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숨을 쉬는 것도 주님을 위해, 먹고 마시는 것도 주님을 위해, 운동도 주님을 위해, 옷을 입는 것도 주님을 위해, 결혼도 주님을 위해, 살아도 죽어도 주님을 위해, 이것이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께 시간을 바쳐 예배 드리는 것을 제일 우선 순위에 두어야 합니다. 지각하는 것은 온전한 시간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 드리기 전에 달려와서 기도하고, 축도 후에도 돌아가기 싫어 조금이라도 더 교회에 오래 앉아 있고 싶은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야 합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다 받아 놓고도 십일조 드리는 것을 아까워한다면 그 사람은 믿음이 없고 생각이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깨달으면 십의 이조인들, 십의 삼조인들 못 드리겠습니까? 우리가 살아 있을 때 기쁨으로 드리고 땀 흘려 봉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한 집에서 소와 돼지가 함께 살았습니다. 소는 늘 주인의 사랑과 칭찬을 받는데, 돼지는 늘 “더러운 돼지, 욕심 많은 돼지.”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하루는 돼지가 소에게 말했습니다.
“소 형, 소 형, 나는 억울합니다. 형이 사람들에게 우유와 고기와 버터를 주지만 나도 사람들에게 삼겹살도 주고 햄도 주고 베이컨도 주는데 왜 사람들은 형만 좋아하고 나는 푸대접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억울합니다.”
그러자 소가 이렇게 말했답니다.
“확실히는 모르지만, 나는 살아 있을 때도 우유와 버터를 주지만, 자네는 죽은 후에라야 고기를 내놓으니 그런 것이 아닐까?”
우리가 충성을 한다고 하면서도 ‘나중에 형편이 나아지면 하지. 내가 죽은 후에 내 재산을 드려야지.’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돼지의 충성과 같습니다. 살아 있을 때 우유 같은 십일조를 드리고, 살아 있을 때 버터 같은 전도, 버터 같은 교회 청소를 할 때 아름다운 봉사가 되는 것입니다. 살아 있을 때 잘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살아 있을 때 전력을 다 쏟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주를 지으셔서 우리에게 주시지만, 하나님의 집은 하나님께서 짓지 않으십니다.
우리 교회를 지을 때 힘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장로님들이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때 저희 식구들도 몇 년간 거의 김치만 먹었습니다. 아이들 도시락 반찬도 거의 날마다 김치와 어묵이었습니다. 그래서 저희 아이들이 ‘어묵’ 생각만 해도 몸서리친다고들 합니다. 교회를 짓는 동안 모두 함께 정말 고생했습니다. 그때 제가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이라면 하늘에서 시멘트와 벽돌이 우두두둑 쏟아지게 하고 천사를 보내어 하룻밤에 다 짓도록 하겠습니다. 아버지의 집을 짓는 우리를 왜 이렇게 고생시키십니까?”
하나님의 응답이 어떠하셨는지 아십니까?
‘내 집은 너희가 지어야 한다. 너희의 눈물과 기도와 헌금으로 힘들게 지어야 된다.’
여러분, 우리가 그렇게 힘들게 짓고 나니 얼마나 좋았습니까? 막 춤을 추고 싶고, 길을 가다 보아도 좋고, 얼마나 좋았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가 얼마나 복을 받는지 모릅니다. 아버지의 집이라고 지었는데, 우리가 여기에서 예배드리며 은혜를 받고 축복을 받습니다.
또 교회를 지은 다음에 우리 교회가 받은 복이 한이 없습니다. 가정마다, 집집마다 아이들이 얼마나 잘 되고 사업이 얼마나 잘 되는지 모릅니다.
만일 천사들이 교회를 다 지어주고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얼마나 미안하겠습니까?
우리가 힘들여 교회를 지었으니 교회만 보아도 눈물이 나오고 좋은 것입니다. 다 같은 내 자식이라도 힘들고 어렵게 낳은 자식이 더 귀하게 여겨지듯이 우리가 힘든 가운데 지은 교회가 더 귀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집을 지어드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상을 주십니다.
‘네가 내 집을 짓는다고 수고했다. 네가 내 집을 지었으니 내가 큰 상으로 네 집을 지어 주겠다.’ 할렐루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을 주시려고, 은혜를 주시려고, 더 큰 기쁨을 주시려고 성전을 짓게 하시는 것입니다.
노아의 방주에는 약 4만 5천 마리의 동물이 들어갔습니다. 4만 5천 마리의 동물이 들어가려면 기차 188대만 있어도 됩니다. 그런데 노아의 방주는 기차 522내 분의 용적량이었습니다. 그러니 노아의 방주에는 4만 5천 마리가 아니라 9만 마리, 12만 마리의 동물이 들어가도 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많은 사람이 와도 편안히 예배드리고 먹고 마실 수 있는 노아의 방주같은 큰 방주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저는 수년 전부터 ‘하나님, 7천석 교회를 주십시오. 7천석 교회를 주십시오. 7천석이 안 되겠으면 5천석이라도 주십시오.’하고 기도했습니다. 7천석 교회가 되고 부속 건물이 들어서면 만 명이 함께 예배 드릴 수 있고, 4부로 예배를 드리면 4만 명이 예배 드릴 수 있으니 아이들을 합하면 우리가 기도하고 있는 대로 십만 명 제단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힘 주시는 대로 우리가 되겠지만, 이번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말 큰 것을 주셨습니다. 우리도 시간과 정성을 바쳐 하나님을 위해 큰 일을 이룰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질서와 권위
창 1장 1~2절 / 김홍도목사
로마서 13장 1절
1. 천사장의 반역과 저주
건전한 신학자들의 성경 해석에 의하면 창세기 1장 1절과 2절 사이에는 엄청난 시간의 차이(gab)가 있다고 합니다.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한 말씀에서 이 “창조(creation)”는 “바라(bara)”인데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을 의미하고 그 후부터 나오는 “아사(asha)”나 “야차르(yatzar)”는 “있는 재료를 가지고 만들다” 혹은 “재료를 가지고 조립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1장 1절은 아담 이전의 세상(Pre-
Adamic World)이라고도 하고 현 창조 이전의 세계(Pre-Cosmic Universe)라고도 합니다. 창세기 1장 2절은 “재창조(recreation)” 혹은 “창조의 회복(restoraion)”이라고도 합니다.
첫 번 창조된 우주의 저주받은 상태를 창세기 1장 2절에 “땅이 혼돈(chaos)하고 공허하며 흑암(darkness)이 깊음(deep)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첫 번 창조된 우주가 왜 이렇게 혼돈하고 공허하고 캄캄한 무질서의 세계가 되었느냐 하면 그룹 천사장 루시퍼(Lucifer)의 반역 때문입니다. 천사장 루시퍼는 용모가 뛰어나고 지혜가 충만하고 큰 권세를 부여 받은 존재로 하나님의 정부에(God's government), 국무총리(Prime Minister)였다고도 합니다. 에스겔 28장 12~17절에 “…너는 완전한 인이었고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왔도다…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불의가 드러났도다…네가 범죄하였도다 너 덮는 그룹아 그러므로 내가 너를 더럽게 여겨 하나님의 산에서 쫓아내었고 화광석 사이에서 멸하였도다 네가 아름다우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며 네가 영화로우므로 네 지혜를 더럽혔음이여 내가 너를 땅에 던져 열왕 앞에 두어 그들의 구경거리가 되게 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루시퍼는 예수님 다음으로 가장 뛰어난 존재였는데 그가 교만하여 하나님보다 높아지려 하고 하나님의 보좌까지 저주받고 쫓겨나 사탄이 되었습니다. 유다서 1장 6절에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천사장의 위치를 지키지 않고 더 높아지려다가 저주받고 쫓겨났습니다. 이사야 14장 12~14절에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라고 한 이 말씀이 천사장이 교만하다가 타락하여 저주받은 기원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또 요한계시록을 보면 천사들 1/3이 천사장을 따라 쿠데타에 참가했다가 저주를 받고 마귀가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고 사탄은 질서를 파괴하고 혼돈하고 어지럽게 만드는 존재입니다.
2. 질서를 위해 권위를 세우심
하나님은 질서 있는 세상, 질서 있는 국가, 질서 있는 가정을 만들기 위해 적재적소에 권위(authority)를 주셨습니다. 아래 있는 사람은 위에 있는 권위자에게 순종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 마귀는 질서를 파괴하고 권위에 도전하고 불복종하는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공산주의(communism)는 사탄의 사상(satanism)입니다. 공산주의 사상에 물든 사람들은 국가의 권력도 타도하고 평등주의(equalitarianism)를 주장하며 권위를 부정합니다. 대학 총장의 책상을 부수고, 사장의 자동차를 불태우고, 질서유지를 위해 세운 경찰관들을 불태워 죽입니다. 그 사람을 처벌하지는 않고 민주화투쟁의 영웅이라고 포상까지 합니다.
로마서 13장 1절에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당시 로마 식민지 밑에서 살고 있었지만 국가가 죄악 된 일을 시킨다면 불복하고 그에 대한 벌을 받으면 된다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13~14절에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유대나라가 로마 식민지 하에 있을 때 “가이사(황제)에게 세금을 내야 합니까, 안 내야 합니까?”라고 물을 때 예수님은 황제의 화상을 보이시며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황제의 것은 황제께 바쳐야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권위에 복종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모든 권위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연한 것도 아니고,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고, 스스로 권위를 창조하려고 해서 된 것도 아닙니다.
3. 권위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
질서를 파괴하고 어지럽게 하는 것은 사탄의 역사입니다. 공산주의 혹은 주체사상에 물든 사람들의 행동을 보십시오. 권위에 도전하고 화염병 던지고 몽둥이를 휘두르고 온갖 거짓말로 사회를 어지럽게 합니다. 왜냐하면 공산주의나 주체사상은 사탄 마귀의 사상이기 때문입니다.
◎ 교회에서는 더욱 영적 권위에 순종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13장 17절에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영적 권위자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고 했습니다. 교회에 세운 영적 권위자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도하는 중에 결정하는 일에는 “아멘” 하고 따라줘야 교회가 평안하고 자신도 복을 받습니다. 영적 수준이 낮은 자에게 현혹되어 이해가 안 되는 일이 있어도 순종하고 복종하면 됩니다. “복종”은 마음에 안 들어도, 이해가 안 되도 영적 권위자가 결정한 일에는 거역하지 말고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에나 자신에게나 유익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 가정에서도 위에 있는 권위자에게 순종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했습니다. 부모는 잘났든 못났든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자이기 때문에 거역하지 말고 순종하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6장 1~3절에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했습니다. 창세기 9장에 보면 홍수 심판이 지난 후 당대의 의인이었던 노아가 포도주를 과하게 마시고 잠이 들었는데 그만 벌거벗고 하체를 드러내놓고 잠을 잤습니다. 그때 세 아들 중 함이 이를 보고 비방하고 조롱하고 흉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셈과 야벳은 겉옷을 가져가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 덮어드리고 아비의 하체를 보지도 않고 흉보지도 않았습니다. 노아가 잠이 깬 후 이 사실을 알고 함은 “종의 종이 되라”고 저주했고 셈과 야벳은 축복했습니다. 이 말씀의 중요 교훈은 아버지 노아가 하체를 드러낸 실수보다 아버지의 권위에 도전하고 비방한 죄가 백 배나 더 크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나 족장은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모가 무식하다고 무시하고, 물려준 유산이 없다고 멸시하고, 부모를 구타하고, 여행가서 버리고 오는 자식들이 많다고 합니다. 이것이 다 하나님의 권위에 거역하는 일이고 질서를 파괴하는 일입니다.
◎ 또 사회생활 할 때도 윗사람에게 복종하는 것이 권위에 순종하는 것이고 복 받을 일입니다. 골로새서 3장 22절에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고,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주께 하듯 하라고 하셨습니다. 권위에 반항하고 질서를 어지럽게 하는 것은 사탄의 역사입니다.
◎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이 아내에게 남편을 자기 권위자로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5장 22절에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고 하셨습니다. 분명한 질서를 지켜야 합니다. 그렇다고 남편들은 아내를 종처럼 부리고 폭력을 행사해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에베소서 5장 23~23절에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성경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 25절에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고 한 이 말씀은 예수님이 우리 위해 생명을 버리셨듯이 아내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기까지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울왕은 교만하여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하다가 버림을 받고 다윗을 기름 부어 왕으로 삼았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시기하여 몇 년이나 죽이려고 추적해 다녔습니다. 이때에 다윗은 사울을 몇 번이나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죽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기름 부어 권위자로 삼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처치하실 때까지 손을 대지 않고 기다렸습니다. 자기는 기름을 부음 받았고 사울왕은 버림받은 왕이었지만,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몇 번이나 왔을 때에도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처리하실 때까지 자기가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권위를 존중히 여기고 순종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윗의 권위를 들소의 뿔같이 높여서 죽을 때까지 지켜주셨습니다. 권위에 순종한 만큼 큰 권위를 주셨습니다.
4. 권위자가 지녀야 할 필수 조건
① 내가 가진 권위는 하나님의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잘나서 높은 사람이 된 것처럼 우쭐대서는 안 됩니다. 권위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모세가 구스 여자를 얻은 다음 쿠데타를 일으킨 다음 땅이 갈라져 고라와 다단 지파를 진멸하신 다음 열두 지파 족장들의 지팡이를 모아서 지성소에 두었다가 꺼내 보았더니 아론의 지팡이에만 싹이 나고 꽃 피어서 살구나무 열매가 맺혔습니다. 이것은 살구나무 지팡이가 좋아서도 아니고 제사장 아론이 잘나서도 아니고 전혀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으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나무 자체는 아래, 위를 자른 바싹 마른 나무였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영권입니다. 그 영권이 제가 잘나서 받은 것처럼 교만하거나 우쭐해선 안 됩니다.
②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한 만큼 영권이 강해집니다. 육신의 생각대로 행동하거나 일을 처리해선 안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전에 자기 생각대로 움직여선 안 됩니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자기 뜻대로 육신의 소욕대로 행동하는 사람을 존중히 여길 사람은 아무도 없고 하나님도 그에게 주신 권위를 보장해 주지 않습니다. 자기의 뜻은 부서지고 깨어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6장 24절에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③ 항상 주님과 교제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영교하는 일이 없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습니다. 모든 문제는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일을 처리하는 데서 생기는 것입니다. 다윗은 전쟁하러 나갈 때에 “가리이까, 말리이까?”라고 꼭 하나님께 물어본 후에 결정했습니다. 무엇이나 기도해 보지 않고 결정할 때는 문제가 발생하거나 실패하게 됩니다. 예수님도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하시는 일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더욱이 교회에서 영권을 부여받은 자나 교회의 직분 맡은 자는 들나귀처럼 제멋대로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항상 하나님과 영적 교제를 계속해야 합니다.
말세지말을 맞이해서 가정이나 교회나 국가가 권위가 짓밟히고 어지러워져서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빠져 있습니다. 이 질서를 회복하려면 권위를 존중히 여기고 순종하는 일이 필수적입니다.
창조와 비전의 하나님
창 1장 1~5절 / 이정익목사
아이들은 궁금한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 자꾸만 묻습니다. “나는 어떻게 태어났어요?”, “이 세상은 어떻게 만들어졌어요?”, “나는 왜 여자로 태어났어요?”. 아이들이 질문을 한이 없이 합니다. 그것은 당연한 질문입니다. 이것은 어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른들도 궁금한 것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 것일까?”. 생각해 보면 참 궁금한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성경 창세기가 주어진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고 행복한 일입니다.
성경 창세기는 이 세상의 근원과 시작과 처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창세기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의 근원과 기원과 시작을 규명해 주는 책입니다. 그리고 창세기는 하나님과 세상과의 관계를 그리고 세상과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를 보면 단순히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을 창조했다는 것만 말씀하지 않고 그 배후를 보면 더 깊은 질서도 법칙도 길도 창조하셨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세상 창조
창세기 1:1절을 보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로 시작합니다. 이것은 창세기가 말하고자 하는 대원칙을 선포한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라는 지점에서 시작되고 발원됩니다. 느헤미야 9장6절을 보면 “하늘과 하늘의 하늘과 일월성신과 땅과 땅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신 이에게 경배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14장7절을 보면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셨다”는 말입니다. 나는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나는 계획조차도 없을 때 하나님은 나를 창조하셔서 내 부모에게 나의 양육을 맡기신 것입니다. 참으로 오묘한 일입니다. 그렇게 해서 내가 세상에 태어났고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시작된 것입니다.
어느 어린 아이가 할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이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 하셨지요?”, “그렇지”, “그럼 할아버지도 하나님이 창조 하셨겠네요?", “물론이지”, “그럼 나도 창조 하셨겠네요?”, “물론이지”, 그러자 아이가 말했습니다. “하나님 요즘 솜씨 참 좋아졌어요.” 하나님은 지금도 창조를 계속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말에서 시작되고 출발됩니다. 이것이 전제되어야 나의 믿음의 삶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이 전제를 신뢰할 때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설정됩니다.
질서와 법칙의 창조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또 그 배후를 움직이는 질서도 법칙들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세상의 삶의 내용을 보면 그 배후에 질서도 길도 법칙도 함께 창조되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시면서 세상을 구성하고 운영되는 모든 질서와 법칙도 함께 창조하셨습니다. 빛을 창조하셨지만 빛만 창조하신 것이 아니고 빛을 구성하는 모든 법칙도 질서도 함께 창조하셨습니다. 또 인간을 창조하셨지만 몸만 창조하신 것이 아니고 몸을 구성하는 모든 질서도 함께 창조하셨습니다. 인체를 들여다보면 몸속에는 가는 핏줄로 이어지게 몸이 움직이고 운영되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인체를 보면 아주 복잡하게 만들어졌지만 서로 충돌하지 않고 아주 질서정연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몸속에서 피가 한 바퀴 도는데 46초가 걸립니다. 자동차 한대가 움직이는데 부품이 만 3천개로 조립되어 있습니다. 747 제트기는 3백만 개의 부품으로 만들어졌고 우주왕복선 5백만 개의 부품으로 조립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몸 안에 있는 세포조직은 25조 개의 가느다란 혈관과 세포로 조직되어 있다고 합니다. 입속에 있는 혀에만 9천개의 미각 세포가 들어 있어서 기능을 발휘해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얼마나 신비한 일입니까. 하나님은 이 세상의 커다란 우주인 하드웨어도 창조하셨지만 자세히 보면 아주 작은 세밀한 조직과 질서인 소프트웨어도 창조하셨습니다.
천체를 보십시오. 얼마나 복잡하고 미묘합니까. 그럼에도 질서 정연하게 이 우주가 돌면서 서로 충돌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창조의 질서입니다. 물은 높은데서 낮은 데로 자연스럽게 흐르게 하셨습니다. 바다 물이 많지만 그 많은 바다물이 육지로 넘치지 않게 하셨습니다. 햇볕이 뜨겁지만 그러나 햇빛이 이 세상을 태우지 않게 하셨습니다. 하늘에 무수한 별들이 널려 있지만 그 별들이 땅으로 쏟아지지 않게 하셨습니다. 땅속에는 물과 바닷물과 석유가 혼재되어 있지만 그러나 서로 질서를 지켜 자기가 있어야 할 곳에 머물러 있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이 우주의 질서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질서와 법칙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우리 인간은 그 질서를 지키며 존중하며 살아야 합니다. 성경은 또 그 질서를 지키라고 강조하십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오늘에 와서 인간들이 이 질서를 무시하고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이 세상의 질서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해가 독을 뿜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온난화가 발생하고 기류에 일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앞으로 이 세상에 엄청난 재앙이 일어날 것입니다. 뿐만 아니고 인체의 질서도 파괴시켰습니다. 인체도 질서정연 하게 움직이던 것이 술로 담배로 마약으로 알코올로 질서를 망가트려서 각종 무서운 질병이 발생하였습니다. 물이 자연스럽게 흐르던 것을 사람들이 무분별하게 개발해서 물이 넘치지 말아야 할 곳으로 넘치고 있습니다. 질서를 안 지키면 이렇게 됩니다. 이러다 언젠가는 또 질서를 무시하고 지키지 않은 일로 인해서 엄청난 재앙이 이 땅에 타나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이 세우신 자연과 인생의 법칙을 존중하고 지켜야 합니다. 열매 맺기를 원하는 사람은 수확의 법칙을 존중해야 합니다. 건강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건강의 법칙을 존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질서와 법칙을 무시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철야기도를 열심히 하고 높은 곳에서 뛰어 내려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중력의 법칙을 만드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만홀히 여기는 행동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 하나님이 만드신 질서와 법칙을 존중해야 합니다. 질서와 법칙을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일입니다.
안전위한 법칙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이렇게 질서와 법칙을 만드신 뜻에는 몇 가지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는 안전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법칙과 원리는 모두 우리로 하여금 복을 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복은 법과 질서의 삶을 통해서 안전의 통로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법칙을 존중해야 합니다. 그 삶에 안전이 보장되고 복을 받는 통로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또 하나는 사랑입니다. 이 질서와 법속에 사랑이 들어있습니다. 사랑은 법이고 질서입니다. 서로 사랑하면 서로를 보호하고 믿고 행복을 만들고 안전한 삶과 인생이 주어집니다. 그런데 사랑이 사라지면 다 잃게 됩니다. 사랑의 원리를 생각해 보십시오. 전혀 관계가 없는 두 사람이 만나 사랑이 싹이 틉니다. 그렇게 사랑하게 되면 서로를 돌보게 됩니다. 그리고 사랑을 키우고 행복을 가꾸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면서 행복한 가정으로 만들어 나갑니다. 얼마나 신비한 일입니까. 이 사랑의 원리를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질서와 법칙은 우리에게 안전과 행복을 주시기 위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이 질서는 중앙선과 같은 것입니다. 중앙선을 이탈하면 곧 바로 큰 사고가 나고 파괴가 주어지고 다 잃게 됩니다. 모든 피조물은 한번 태어나면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매 순간 애프터서비스를 하십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착각입니다. 자세히 알고 보면 모든 피조물들은 매순간 하나님에 의해서 새롭게 생명력을 보충 받고 보존되어 생명력을 지탱하며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비전도 창조
하나님이 이 세상의 보이는 것만 창조하신 것이 아니고 비전도 꿈도 창조하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가득히 꿈으로 비전으로 채워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비전의 책이라고 말씀합니다. 위인들은 하나같이 이 성경을 통해서 꿈을 전수받고 비전을 얻어 후에 위인들이 되었습니다. 본문을 보면 세상을 창조하신 후 아담에게 분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충만 하라, 정복하라, 다스리라”, 이것이 하나님이 성경 속에서 창조하신 비전이고 꿈이고 환상입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뻗어나가고 발전하고 향상하고 전진하고 왕성하게 움직여 나가는 섭리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12명의 제자들을 불러서 훈련을 시키십니다. 그 12명이 120명으로, 유대와 사마리아로, 로마로, 유럽으로, 마침내는 전 세계로 퍼져 나갑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정복하고 충만한 역사가 일어납니다. 아주 작은 겨자씨는 땅에 심겨지면 커서 새들이 깃드는 큰 나무로 성장합니다. 박 씨 하나는 작은 것이지만 땅에 심으면 온 지붕을 덮습니다.
우리는 이 눈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처럼, 땅의 모래처럼 창대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젓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또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고 비전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비전의 하나님입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눈을 가져야 합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지금은 고기를 잡지만 이제부터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상상도 하지 못했지만 성령은 바울에게 “로마로 가서 전도하라”는 환상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비전의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환상을 가져야 합니다. 이 세상을 “다스리라, 정복하라, 충만하라”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꿈이고 비전입니다.
그 말은 이 넓은 세상을 개척하라, 꿈을 펼치라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원대한 꿈과 비전과 환상입니까.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이 꿈을 모릅니다. 그래서 안목도 좁고 자기 안에 갇혀 살 때가 많습니다. 그 결과 가족 간에, 형제간에 아옹다옹하면서 다투며 살아갑니다. 이웃 간에 조그만 이해관계 때문에 티격태격 하면서 살아갑니다. 자신의 일이 잘 안 풀린다고 삶을 저주하고 비관하고 때로는 삶을 포기하는 일도 발생합니다.
하나님 중심의 삶
느헤미야 9장6절을 보면 “하늘과 하늘의 하늘과 일월성신과 땅과 땅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보존하시는 하나님을 경배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14장7절을 보면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즉 모든 것의 중심은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모든 삶에는 중심이 있습니다. 그 중심이 무시되면 흔들리게 되고 분열과 갈등을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가정의 중심은 아버지가 아닙니다. 아버지는 바깥사람이기 때문에 중심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가정의 중심은 어머니인 것입니다. 어머니는 안사람입니다. 아버지가 아무리 못났어도 어머니가 중심이 있으면 그 가정은 든든히 서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내입니다. 어머니입니다. 언어를 보면 어머니가 가정의 중심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계집’, ‘가시내’, ‘에미나이’ 모두 욕이 아니고 우주의 근원을 나타낸 말입니다. ‘아내’는 ‘안에 있는 사람’이 진화한 말입니다. ‘계집’은 쌀 껍데기를 벗겨 내면 겨가 있습니다. 그 겨가 쌀을 둘러싸지 않으면 자랄 수가 없습니다. 어머니, 아내는 그 겨의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여자를 ‘겨집’이라고 했지만 후에는 ‘계집’으로 음운이 변화한 말입니다. 이 말은 여성이 생명을 품는 존재로 인식한 말입니다. ‘에미나이’는 북쪽에서 사용하는 말로 ‘어미로 태어난 이’라는 뜻이고 ‘가시내’는 ‘가시나이’의 준말로서 ‘가시’는 옛말에 ‘아내’를 뜻하고 이 ‘가시’가 나중에 ‘각시’로 변합니다. 그리고 부부를 ‘가시버시’라고 했는데 여기서 ‘버시’는 오늘의 ‘벗’이라는 뜻으로 가장 친한 사이인 부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가시’는 왜 ‘아내’인가 하면 ‘가시’는 ‘갓’ 이라는 뜻이며 ‘갓 태어난. 갓 시집온 갓난아이’라는 뜻입니다.
엄마도 아이가 태어나서 최초 발음 시 ‘엄’자가 나온다고 해서 엄마입니다. 거기다 존재의 높임말인 ‘니’자를 합쳐서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이 ‘니’가 더 높아져서 ‘ㅁ’ 자를 붙여 ‘어머님’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이 ‘어머니’가 줄여져서 ‘엄니, 엄마’가 되었고 높이면 ‘어머님’이 되고 낮추면 ‘l’가 떨어져 나가 ‘엄마’가 됩니다. 어머니는 모든 삶의 중심입니다. 그래서 살아가다가 고달프면 아버지 보다 어머니를 먼저 생각합니다. 또 살아가다가 어느 순간 놀라면 ‘엄마’하고 부릅니다. 그 말은 어머니가 삶의 한 중앙에 서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놀라면 ‘어머머’ 하는데 그 말이 ‘어마마마’로 발전하여 대왕대비의 호칭이 되었습니다. 결국 이 세상의 모든 근원은 아내, 어머니에게서 시작된다는 말입니다.
한 가정의 중심이 이렇게 아내, 어머니에게서 시작된다면 이 우주의 중심은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살아가다가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에 어머니를 찾듯이 살아가다가 가장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에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게 되어있습니다. 그것은 이 우주의 중심이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가장 편안한 곳, 가장 평안했던 곳이 어머니의 자궁속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장 외로울 때 잠자는 모습이 자궁 속에 있었던 때의 그 모습으로 모두 웅크리고 옆으로 누워 외로워합니다. 그리고 살아가다가 어렵고 고독할 때 모두 어머니를 찾고 어머니에게로 달려가려고 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삶의 중심이 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영혼이 가장 편안함을 느끼는 곳이 하나님의 품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삶에서 궁극적인 자리에 놓이게 되면 모두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리고 죽은 후에는 그 영혼이 모두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그것은 이 우주의 중심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만물만 창조하신 것이 아니고 질서도 법칙도 정신도 아울러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질서를 존중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의 삶에 안정이 보장됩니다. 열매 맺는 삶이 주어집니다. 사랑의 삶이 만들어집니다. 그런데 그 질서를 무시하고 살면 안전도 사라집니다. 재앙이 주어집니다.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외로움이 몰려옵니다. “하나님과 함께”, 그것은 창조의 대 원리입니다.
어둠 속의 빛
창 1장 1~5절 / 서정호목사
기독교는 빛의 종교입니다. 세상에 있는 어두움을 몰아내는 빛의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첫 장,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첫 말씀이 “빛이 있으라” 였습니다. 혼돈과 공허, 흑암이 가득한 세상에 밝은 빛, 온 누리를 비취는 환한 빛을 창조하심으로 창조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구원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두운 우리 마음에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영광의 빛을 비췸으로 구속 사역을 시작하십니다.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후 4:6)고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면 삶의 질서를 회복합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삶의 의미를 발견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게 되면 사는 목적을 되찾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여러분의 삶을 드리기만 하면 그의 영광스런 빛 속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빛의 종교요 빛은 기독교의 성격을 잘 드러내 줍니다. 그래서 성경은 주님의 탄생이나 주님의 사역을 빛으로 묘사하곤 합니다. 아기 예수를 팔에 안은 경건한 노인 시므온은 다음과 같이 찬송합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 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눅 2:29- 32).
이사야는 주님의 사역을 어두움에 비취는 빛으로 예언했습니다.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마 4:15-16). 그리고 더 나아가 주님 자신도 우리 생각보다 자주 빛이나 등불을 설교의 소재로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하나님은 빛의 근원
인간은 지극히 나약한 존재이지만 한 사람의 인생에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스며들면 보석처럼 영롱한 인생으로 변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셨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빛이 있으라"하시니, 빛이 생겼습니다. 그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셔서, 빛을 낮이라고 하시고, 어둠을 밤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하루가 지났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 3절에 '빛이 있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나오는데 이 첫째 날의 빛은 넷째 날에 창조된 해와 달과 별에 의한 빛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빛의 근원이십니다. 하나님은 이 혼돈과 공허한 상태에 빛을 부여하십니다. 넷째 날의 빛은 자연의 빛이지만, 첫째 날의 빛은 하나님의 본성, 생명, 사랑, 질서, 등의 보다 근원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후에 이 세상을 거두실 때, 하나님은 해와 달과 별들의 빛을 먼저 거두십니다. 그러나 해가 필요 없는 빛은 천상에서 영원히 빛나게 됩니다. 이 빛의 역사는 매우 놀랍고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에 이 빛이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요? 에덴 동산에서 죄를 짓고 떠난 인간은 이 빛의 영광을 잃고 말았습니다. 어둠과 혼돈과 공허가 다시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창세기는 신약의 복음서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데 특히 창세기 1장은 요한복음 1장과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1:4-5 "그(예수) 안에 생명이 있었나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8: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오고 있는 것'으로서의 미래
오늘은 대림절 둘째 주일입니다. 주님이 오심을 기다리며, 그 오심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우리 삶을 정리하여 보는 절기입니다. 대림절의 중요한 의미는 "빛이 있으라"고 저 태초의 어둠을 향해 말씀하시던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빛을 비춰 주시는 신앙의 계절임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대림절에 우리가 정말 기다리고 간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속을 비추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깨닫는 진리의 빛을 비춰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셨던 그리스도 예수님의 얼굴에 문득 나타나 보이셨던 하나님의 영광, 세상 사람들이 눈으로는 볼래야 볼 수 없는 '고난 속에 있는 영광'을 볼 수 있는 눈을 한 번 더 열어 주시기를 간구하며 겸손히 기다리는 신앙의 계절임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근대문명 이후로, 분명히 우리의 외부세계는 무척 밝아졌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둘러싼 주위의 빛들이 더 휘황찬란하게 밝아져 가는데도, 우리는 어쩐지 점점 속이 어두워져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피마자기름으로 등불을 밝히고 심지를 북돋우시면서 삯바느질 하시던 우리 할머니 시대, 석유기름 등잔이나 호롱불 아래서 공부하고 책을 읽던 가난한 시절의 사람들의 마음이 우리들 보다 더 어둡지 않았습니다. 밤이 되면 온 동네가 어두워졌어도 도리어 총총히 어둠을 뚫고 빛나는 저 우주공간 멀리를 내어다 보고 은하수 별들의 흐름을 보면서, 농부들은 밤의 논둑길을 걸어 다녔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비록 물질적으론 훨씬 현대인들보다 가난했을지라도 마음속을 비추는 '본래적 빛',‘이성의 빛', ‘양심의 빛', ‘영적인 빛’을 잃어버린 적이 없었습니다.
빛에는 여러 가지 차원의 다른 빛들이 있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을 만드신 후에 궁창을 비추는 발광체들 곧 우리가 말하는 물리적 빛을 지으시기 전에, 하나님은 '빛이 있으라'하고 빛을 맨 처음 지으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빛은 해와 달과 별들이 우리 눈에서 다 꺼져 버린 뒤에도 남아 우리를 비취는 더 근원적인 빛인 것입니다.
우리 이 땅의 목숨이 다 끝나 죽음을 맞이할 때, 우리 앞에 홀연히 비춰 나오며 우리를 둘러싸는 빛이 있을 것인데 그 빛은 물리적 빛이 아니라 사도 바울이 저 다메섹 도상에서 본 빛도 그런 빛이요,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그 얼굴이 해처럼 빛날 수 있었던 것도 그 빛 때문인 것입니다. 이 빛은 화폐가 지닌 물질구매력이 타면서 발산하는 그런 경제 에너지의 빛이 아닙니다.
바울사도는 고린도 후서 4: 6-10 말씀 속에서 이 빛, 이 엄청난 능력, 이 신비의 빛은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빛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질그릇 속에 담겨져 있는 이 빛은, 고난 속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당하는 역경, 환난, 그리고 박해 속에서 더욱 더 빛나는 빛이요, 체험되는 빛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석류껍질이 깨어지면서 진주처럼 빛나는 석류 속 알이 드러나 보이듯이 이 생명의 참 빛은 '고난과 환난' 속에서 지지 않고 우뚝 서서 도리어 하늘의 참 빛과 삶의 근원적이고 미래적 삶을 대망하는 모든 사람들의 눈에 보여 지는 빛입니다. 한줌의 진흙덩어리가 도공의 손에 들려 형태를 입은 후에 지피는 장작나무 불 속에서 수천도 열과 압력을 받은 후에라야 청자 백자로서 변화되는 이치와도 통하는 것입니다.
대림절이란, 우리들의 심령이 이 세상의 욕망과 탐심과 근심 염려에서 마음을 돌이켜 마음이 가난해져야 할 계절입니다. 우리가 만들어가고 형성해 가는 미래 못지않게 더 중요한 우리에게로 오고 있는 미래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삶 속에 현존하는 생명의 신비 앞에 경외의 마음과 감사의 마음을 회복해야 할 계절입니다. 무엇보다도, 내 심령 속의 어두움을 쫓아내고 다시 한 번 더 주님이 밝혀 주시는 진리와 생명의 등불을 되찾아 불빛을 더 밝게 자기를 성찰하는 계절인 것입니다.
인디언 우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해가 어둠이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별이 해를 데리고 아주 컴컴한 굴로 갔습니다. 그러나 그 굴에 해가 들어서자마자 어둠은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에 역시 해에게 흑암을 보여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해가 있는 곳에 어둠은 없다
해가 있는 곳에 어둠은 전혀 없습니다. 해가 가는 곳이면 어디서나 어둠은 물러가고 빛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해 자체에는 어둠이 전혀 없습니다. 다만 그 햇빛이 가려지는 곳에 어둠이 깃들일 뿐입니다. 해가 지면 날이 어두워지고 밤이 오지만, 밤은 영원한 것이 아니고 일시적인 것입니다. 곧 또다시 아침이 오면 어둠은 물러가고 환한 낮이 되는 것입니다. 겨울에는 낮보다 밤이 더 길지만 그렇다고 어둠이 본질적인 것이고 빛이 부차적인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리 밤이 길어도 그것은 곧 낮에 의해서 물러가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깜깜한 밤에도 해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해는 반대편에서 계속 빛을 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밤에 뜨는 달을 보면서 우리는 밤에도 해가 빛나고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이런 자연의 원리는 곧바로 영적인 원리이기도 한 것입니다.
요한일서 1장 5절에 보면, "우리가 그리스도에게서 들어서 여러분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요, 하나님 안에는 어둠이 조금도 없다는 것입니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빛의 근원이 되시는 분이요, 빛 그 자체이시기 때문에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다는 것은 곧 이해가 됩니다. 따라서 그가 계신 곳에는 언제나 빛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신 분이니까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세계에 빛이 충만하여 있는 것입니다. 다만 잠시 그 빛을 가리는 것들이 있어서 거기에 어둠이 깃들이지만, 그 어둠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가리는 것들이 치워지는 순간 곧 어둠은 물러가고 빛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어둠이 빛보다 우세하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빛은 언제나 빛나고 있는 것이며, 결코 어둠은 영원할 수가 없습니다. 빛은 영원하지만 어둠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빛의 역사는 영원하지만 그것을 가리는 악의 어둠의 훼방은 일시적이며, 결국은 물러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을 우리의 세계관으로 삼을 때, 우리는 이 세계의 역사를 새롭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이것을 우리의 인생관으로 삼을 때 우리 자신의 삶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빛이 없는 세상은 온갖 범죄와 죽음이 지배하는 곳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본래 빛으로 창조된 세상이기 때문에 빛을 받지 않으면 그 세상이 병들고 시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햇빛을 전혀 보지 못한 식물이 자라지 못하고 죽는 것과 똑같은 원리입니다. 사람들도 햇빛을 오래 보지 못하면 우울증에 걸리게 됩니다. 겨울이 긴 캐나다 같은 곳에 사는 사람들은 우울증에 많이 걸리게 되는 것이 바로 해가 짧기 때문입니다. 서양 사람들이 자주 햇볕에 벌거벗고 누워 햇볕을 쪼이는 것은 건강을 위해서입니다. 특히 북유럽의 경우 흐린 날이 많고 해가 짧기 때문에 개인 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썬팅을 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병
육체적 건강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우리가 하나님의 빛을 받지 못하면 병들게 되는 것이고 그것이 오래 갈 때 많은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사랑 대신 미움으로 살게 되며, 감사와 기쁨 대신 짜증과 불평으로 가득 차게 되며, 화해와 관용과 용서 대신에 분쟁과 갈등으로 조용할 날이 없으며, 정의와 평화는 사라지고 불의와 부정부패가 판을 치며, 불평등과 착취와 억압이 일상화되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의 빛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어둠 속에서는 빛의 열매인 선(善)과 의(義)와 진실(眞實)은 없고 악과 불의와 거짓만이 독버섯처럼 돋아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 감사함과 기쁨과 사랑 대신 짜증과 불평과 원망으로 살아갈 때는 하나님의 빛이 필요한 때입니다. 서구 사람들이 위통을 벗고 햇볕을 쪼이는 것처럼, 우리 자신의 위선과 체면의 꺼풀들을 벗어 던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면 그의 빛이 우리 가운데 들어오면서 우리 속에 자리 잡았던 모든 어둠의 요소들을 몰아내실 것입니다.
상실감이 우울증의 출발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잃어져 가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재산, 명예, 건강, 젊음, 지위, 권세, 사랑하는 사람이나 사랑하는 마음, 존경하는 마음 등. 그러나 진정 우리의 삶 속에서 빛을 잃지 않으면 우리가 살아갈 희망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참된 생명의 빛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세상의 어둠과 대결하시어 그 어둠의 세력들을 꺾어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그 안에 우리가 거하게 되면, 우리 속에서 모든 어둠은 물러가고 빛으로 말미암아 생명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계절이 겨울이고 모든 나무들이 청청한 잎을 갖고 있지 못하지만, 봄이 오면 봄볕이 온 땅에 퍼지면서 겨우내 움츠렸던 생명들이 힘을 얻으면서 싹이 돋고 꽃이 피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따뜻한 봄볕을 받는 모든 식물들은 생명의 활발한 역사를 시작하여 성장하며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런 봄볕을 받았는데도 싹도 나지 않고, 꽃도 피지 않는 나무는 죽었거나 병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사랑할 줄 모르며, 감사할 줄 모르며, 의롭게 행하지 못하며, 진실치 못하면 그것은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햇빛이 비치면 반드시 거기에서 싹이 나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받으면 거기에 반드시 새로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겨울도 은총의 계절이다
초가 자신을 태워 빛을 만드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십자가에 희생하시므로 영원히 꺼지지 않는 생명의 빛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이 빛을 받은 사람은 누구나 다 변화되어 새로운 삶을 이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 새로운 생명을 얻은 우리에게는 어둠의 위협이나 시련이 문제가 아니라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긍정적인 요소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빛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밤도 아름다운 것입니다. 밤은 휴식의 시간이며, 재창조의 시간들이 되기에 밤이 결코 부정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어둠과 밤은 빛과 분리되었지만,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빛 안에 통합되어 부정적이고 악의 상징에서 긍정적이며 선한 것으로 그 이미지가 바뀐 것입니다.
겨울도 마찬가지입니다. 빛을 믿는 사람들에게 겨울은 오히려 휴식의 때이며, 새로운 창조를 위한 준비 기간이 되는 것입니다. 겨울이 혹독하게 추울수록 그 겨울이 지난봄에는 더욱 화사하게 꽃이 피게 마련입니다. 참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는 그 어둠과 밤, 그 겨울은 생명을 시들게 만드는 무섭고 혹독한 시련이며 독소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그것을 지배하던 사탄이 물러감으로 이제는 더 이상 어둠은 두려움이 아니며, 겨울도 은총의 계절로 변화된 것입니다.
비록 오늘 우리 사회가 경제 위기를 통하여 시련을 겪고 있지만, 그리스도의 빛 아래서 볼 때 그것은 결코 부정적인 사실만은 아닙니다. 우리를 각성시키는 겨울의 계절이며, 자신의 무성하였던 잎을 떨구고 조용히 새로운 생명의 약동을 위하여 준비하는 추운 겨울이라고 생각하면, 이 겨울은 우리에게 오히려 유익한 것이며, 우리가 잘 참고 견디기만 한다면 우리를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빛의 열매를 맺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을 내어 주시므로 만들어 내신 빛으로 어두웠던 세상을 이제 환하게 밝히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어둠은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니며, 혼돈은 더 이상 무질서가 아니며, 죽음은 더 이상 우리를 위협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비쳐진 그 찬란한 빛으로 말미암아, 어둠과 혼돈과 죽음은 모두가 생명의 빛 속으로 흡수되어 그 속에 지녔던 독소들은 빠져나가고 이제는 새로운 생명이 그 안에 깃들이게 된 것입니다.
우리 속에 들어온 빛은 우리 자신을 변화시킬 뿐 아니라 그 빛은 반사를 통하여 다른 사람을 비추는 빛이 될 수 있습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우리 속에 비추면 우리가 변하여 발광체가 되어 빛을 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예언자는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빛을 발하라"는 말은 빛을 받아드리라는 말과 같습니다. 빛이 올 때 그 빛을 받으면 그 빛이 우리를 변화시켜 그 빛을 반사하게 되어 마치 우리 속에서 빛이 나오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언자는 빛을 반사하라고 하지 않고 "빛을 발하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참 빛을 영접하면 그 빛은 우리 자신을 변화시킬 뿐 아니라 우리에게서 나간 빛이 또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다음 단계를 위한 충분한 빛
흔히 우리는 미래를 내다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나는 내년에 어떻게 될까? 지금부터 5년이나 10년 후에 나는 어디에 있을까?"라고 우리는 물어 봅니다.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없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한두 시간 동안 혹은 내일 무엇을 해야 하는지와 같은 바로 다음 단계를 볼 수 있을 충분한 빛만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삶의 묘는 우리가 지금 볼 수 있는 것을 즐기고 어둠 속에 있는 것에 대하여는 불평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곧 다가올 다음 단계를 비출 충분한 빛을 갖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나아간다면, 우리는 전 생애를 기쁨 가운데 살 수 있으며, 또 우리가 얼마나 멀리까지 가고 있는가를 보고 놀라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작은 빛 속에서 기뻐하고 모든 그림자를 빼앗아 가는 강한 빛을 요구하지 마십시오.
"이제는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현재의 순간을 사랑으로 채워 가리라" 구엔 반 투안 신부의 고백입니다. 깨어난 사람들의 공통된 고백은 불만과 불평이 아닌, 감사와 기쁨입니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에 만족하고, 내게 있는 것이 내게 필요한 충분한 것임을 알고 만족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작은 빛, 볼 수 있는 그것을 즐기며 충분히 활용하는 가운데 더 멀리까지 나갈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입니다. 지금이 내게 충분합니다. 지금 나의 영성이, 지금 나의 믿음이, 지금 나의 사랑이, 지금 나의 가족이, 지금 나의 일이 내게 가장 적합하고, 내게 가장 필요한 것으로 주어진 은혜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창 1장 1~5절 / 이상호목사
오늘 예배드리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넘쳐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지난 주 창 1:6-10절을 읽고 바다에 대해서 말씀드렸는데 한 가지 말씀을 추가하고 오늘 말씀을 전합니다. 바다는 위대합니다. 바다는 낮은 곳에 위치하여 겸손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넓은 품이 있습니다. 바람이 있기에 파도가 칩니다. 바위가 있기에 멋지게 파도가 부서집니다. 바다에게 바람과 바위는 걸림돌이 아니라 바다를 더욱 멋있게 연출하도록 하는 디딤돌입니다.
오늘 이 시간 같이 은혜받고자 하는 말씀의 제목은 ‘창조주 하나님 -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입니다.
오늘 본문 창세기 1장 1절을 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우리가 믿는 성경은 맨 처음 창세기 1장1절에서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 얼마나 장엄한 선언입니까? 누가 감히 이런 엄청난 말을 할 수 있습니까? 공자가? 석가모니가? 소크라테스가? 아니면 점쟁이가? 무당이? 아니면 유명한 소설가가? 시인이? 아니면 철학자가? 누가 감히 이런 대단한 선언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신 오직 하나님만이 “내가 천지를 창조했느니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유일하신 분이십니다. 이 창세기는 천지의 창조로부터 동물과 식물의 창조, 인간의 창조, 그리고 가정과 교회, 국가의 창설 등 모든 세계의 창조를 말하고 있습니다.
요즈음같이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어둡고 혼란할 때 가장 활기를 띠는 곳이 점 집, 무당 집이라고 합니다. 이유는 사람들 모두가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마음 상태가 불안하고 초조하기 때문입니다. 믿고 의지할 데가 없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어려운 현실의 무게를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우리들은 믿고 의지할 든든한 백이 되시는 창조주이시며 우리의 주인되시는 하나님께서 계시니 얼마나 든든하고 감사합니까? 이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가 누구입니까? 인류역사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우주만물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이 물음에 대해서 오늘 본문 창세기 1장 1절에서 분명한 그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말씀은 바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인이시며 우주만물의 주인이시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모르는 어리석은 백성들이 자기 앞도 가리지 못하는 점쟁이나 돌로 만들어진 부처를 찾아가서 무릎을 꿇고 소원을 빌고 자기의 앞길을 예언 받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습니다. 전12:1에서 솔로몬왕은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천지를 창조하신 우주만물의 주인이신 전능하신 하나님만을 믿고 잘 섬기며 살아가야 합니다.
1. 하나님께서는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십니다. 1절
창1:1을 다시 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 말씀을 믿습니다. 이 말씀을 믿는 사람은 성경 전체를 다 믿게 됩니다. 이 말씀을 믿는 것이 우리가 사는 길이요, 이 말씀을 믿지 못하고 거부하는 것은 죽음의 길입니다. 지구상의 모든 생물, 무생물은 모두 하나님의 창조로 이루어진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 말씀하신대로 창조되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무의 상태에서 우주만물이 창조된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요,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으셨다고 하는 것은 엄연한 과학적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천지창조의 위대한 사건을 남녀노소, 빈부귀천, 무식한 자, 유식한 자할 것 없이 누구든지 쉽게 이해할 수 있고 쉽게 받아들일 수 있고 쉽게 믿을 수 있도록 간결하고 쉽게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셨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말씀은 오직 믿음으로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과학적으로, 우리의 지식으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들에게 우리 인생의 중심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피조물이고 하나님은 창조주입니다. 이렇게 창조주가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시며 오늘도 살아계셔서 우리가운데 역사하시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1절 : 혼돈, 공허, 흑암 중 하나님의 영이 수면에 운행
3절 : 빛의 창조
4절 :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5절 : 낮과 밤을 지으신 하나님 - 낮의 아름다움은 두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밤을 주셔서 아름다운 밤하늘을 보게 하시고 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2. 하나님께서는 우주만물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주만물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인생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그래서 우주 만물, 해, 달, 별들은 물론이고 국가, 사회, 가정, 교회, 사업체, 우리가 가진 모든 재산, 우리들의 몸과 마음과 생명까지도 다 하나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만 섬기며, 하나님께만 예배드리며,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아가야합니다. 만약 우리가 내가 스스로 주인이 되어서 내 생각대로, 내 마음대로, 내 고집대로, 내 욕심대로만 살아간다면 매우 고달플 것입니다. 이 사람은 우주만물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첫째날에는 빛을 창조하시고 이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고 칭하셨습니다. 둘째날에는 궁창을 창조하시고 이 궁창을 하늘이라고 칭하셨습니다. 셋째날에는 땅과 바다 그리고 채소와 식물들을 창조하시고, 넷째날에는 해와 달과 별과 시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섯째날에는 새와 물고기를 창조하시고, 여섯째날에는 동물들과 우리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마지막 일곱째 날에는 모든 창조를 마치시고 하루를 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일주일중 6일동안은 열심히 일하고 주일날 하루는 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신 우리 인간들을 특별히 사랑하셔서 우리 인간들에게 복을 주시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며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들을 다스릴 수 있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들은 모든 동식물을 먹고 다스립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만물의 영장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과학, 교육 등 모든 분야에서 그 주인으로서 이에 대한 모든 주권을 가지고 계십니다. 교회에만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고 세상의 모든 분야에 어디든지 하나님께서 계시며, 교회에서만 하나님이 주인이 아니고 세상의 모든 분야에 하나님이 주인이시며 하나님의 주권이 미칩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영역주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영역에서 주인되시는 하나님의 재산을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로서, 사환, 종으로서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과 재산을 맡아, 관리하며, 보존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청지기의 사명입니다. 만약 우리가 우주만물의 주인되시는 하나님을 거부하고, 우리가 스스로 주인이 되려하고, 하나님을 오히려 종으로 부리려할 때 창조질서가 파괴되고 다시 혼란과 공허와 무질서가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결코 하나님 위에 군림할 수 없으며 주인되시는 하나님을 종처럼 부리려 해서는 결코 안됩니다. 내가 사업을 하고 직장을 다녀서 돈을 벌었다고 해서 그 돈이 다 내 돈이 아닙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 것을 우리가 맡아 대신 관리할 뿐이며 하나님께서 “도로 내놓으라”고 명하시면 아깝더라도 다 내놓아야 합니다. 우리는 죽을 때는 말없이 모든 것을 놓고 가야합니다. 이 모든 것들 중 하나도 가지고 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다 하나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청지기의식이 분명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많은 재물을 소유하고 관리할 수 있는 자격을 주시고 물질의 축복을 크게 주셔서 사업도 크게 일으킬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번 것이 다 내 것이라고 다가지려는 욕심을 부리면 주인되시는 하나님께서 도로 다 빼앗아 가버립니다.
3. 창조주이시며 우주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책임져주십니다. 어미가 자식을 사랑하고 암탉이 병아리를 품듯이 말입니다. 시 17:8을 보면 우리를 눈동자 같이 지켜주시고 주의 날개 그늘아래 감추어주신다고 했습니다. 시 121:6절에 보면 낮의 해와 밤의 달이 해치 못하도록 보호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자연 다큐 3년간에 걸쳐 제작한 『백로의 일대기』를 보면 기가 막힌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알을 낳고 알을 품는 백로는 뱀의 공격을 물리칩니다. 냇가에서 연신 먹이를 먹고 잘게 부숴서 새끼에게 먹이는 모습은 신비롭습니다. 그래서 단테는 말하기를 “자연은 신의 예술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서 40:26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고 말씀하시며 43:1절에서는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주인되시는 하나님 것입니다. 그래서 나와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십니다. 이사야서 41:10절을 말씀처럼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라고 말씀하시며 전능하신 능력의 오른손을 펴서 우리를 도와주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고 섬기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아무런 근심, 걱정, 염려, 불안, 초조할 것이 없이 담대히 그냥 하나님만 믿고 나가면 됩니다. 여호와이레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앞길을 인도하시면서 우리가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해주시고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5절 끝에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8절, 13절, 19절, 23절, 31절 등에 반복적으로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관을 볼 수 있는 말씀입니다. 어둠에서 밝음, 부정에서 긍정, 저녁에서 아침으로 희망적인 역사관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침에 “(밤새)안녕하세요?”하고 인사하지만 서양 사람들은 ‘굳 모닝!’(좋은 아침)이라고 인사합니다. 날씨에 관계없습니다. 좋은 아침을 맞는 하루하루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우리는 이 말씀을 의심하지 말고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이론적으로, 논리적으로, 과학적으로, 우리의 지식으로, 우리의 경험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설명될 수도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그대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성경 전체가 믿어집니다. 그리하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새로운 하나님의 축복의 세계가 우리들의 눈앞에 펼쳐지는 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수천 여 가지의 축복의 약속들이 이루어집니다. 그리할 때 강하고 담대하게 이 땅에서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 지경이 넓혀지며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권세를 얻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으로 이 험악한 세상에서 싸워 승리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우주만물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신앙만이 우리들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가 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오늘 이 시간에도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내가 너를 도와 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앞길을 천국 가는 그 날까지 형통케하시고 좋은 길 축복의 길로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