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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창조, 첫날에서 셋째 날(3)
창 1:1-13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4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5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6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8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9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0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1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12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3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
< 설 교 >
존재와 인식
창 1장 1~5절 / 이정선목사
서양철학의 두 가지 큰 흐름은 존재론과 인식론입니다. 철학, 즉 philosophy라는 단어 자체가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철학은 진리를 탐구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리가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대답을 하는 것이 철학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대상이 존재하면 그것의 본질과 현상을 연구해서 그 정체를 밝히는 것입니다. 가령 여기 꽃 한 송이가 있다면, 이 꽃의 모양은 어떻게 생겼으며, 색깔은 어떤 것인지, 또 향기는 어떠한지 이런 것들을 밝혀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노란 꽃을 빨갛다고 하면 그것은 참이 아니라 거짓이 되겠지요. 이렇게 존재 자체에 집중해서 그 본질을 밝혀내려고 하는 것이 존재론입니다.
반면에 인식론은 그 대상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그 대상을 인식하는 주체와 방법론에 더 의미를 둡니다. 어떤 대상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인간이 그것을 인식하는 만큼만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꽃이 아름답다고 할 때, 꽃 자체가 아름다움을 내포하고 있다고 하는 것은 존재론에 의한 결론이고, 꽃의 여러 정보들, 즉 모양과 색깔과 향기 등이 관찰자의 감각기관을 통해서 수집된 다음 대뇌에서 그 꽃을 아름답다고 최종 판단을 하는 것이라고 하면 인식론에 의한 담론이 되겠지요.
시인 김춘수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어떤 대상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나의 인식세계 밖에 있을 때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식하는 방식에 의해 인식하게 됩니다. 그래서 동일한 대상을 가지고도 각자가 서로 다르게 인식하는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진리는 올바른 인식에 의하여 파악된다고 하는 것이 인식론의 요점입니다.
과학 책 같은 데 보면 곤충의 눈에 보이는 세상의 모습이 사진으로 나와 있기도 합니다. 우리 인간의 눈으로 보는 세상과 많이 다르지요.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주연했던 프레데터라는 영화에 보면, 일단의 군인들이 정글에서 투명한 괴물을 만나 사투를 벌이는데, 그 프레데터가 보는 세상은 마치 열 감지 카메라로 보는 것처럼 사물의 윤곽만 인식됩니다. 대상은 동일하지만 인식의 주체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인식되는 것입니다. 개가 보는 세상은 어떻게 생겼을까요? 우리는 개 역시 우리가 보는 것과 똑같이 세상을 볼 것이라고 짐작을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개는 색깔을 거의 구별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저는 어렸을 때 아이들이 하던 농담을 꽤 진지하게 고민했던 적이 있는데, 사람이 시력을 잃어서 개의 눈을 넣게 되면 똥이 맛있게 보인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존재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인식하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성경은 맨 처음 구절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선언합니다. 우리가 천지창조의 이야기를 잘 압니다만, 흔히 우리는 하나님이 첫째 날에 빛을 창조하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본문을 잘 보면 첫째 날에 지으신 것이 빛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창조행위가 있기 전에는 이 창조세계의 어느 것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1절부터 3절에 보면 창조세계에 속한 것들이 여러 가지 나옵니다. 먼저 1절에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이 빛을 만드시기 전에 하늘과 땅을 만드셨다는 말입니다. 학자에 따라서는 1절은 하나님의 천지창조 이야기 전체의 제목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런 주장은 2절에서 즉시 부정되고 맙니다. 2절에는 땅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빛이 만들어지기 전에 땅이 있었습니다.
땅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물도 있었습니다. 천지창조 이야기의 어느 곳에도 하나님이 땅과 물을 만드셨다는 말이 없습니다. 6절에서 하나님이 물과 물 사이에 궁창을 만드셨다고 했어요. 물은 이미 있었습니다. 또 9절에는 물이 한 곳으로 모여서 땅이 드러나게 하셨어요. 그때 땅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이미 거기에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1절에서 이미 그런 것들이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늘과 땅과 물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흑암이 있었습니다. 이 흑암이란 빛이 없는 어두움의 상태를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흑암이라는 것이 먼저 만들어진 상태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천체물리학에서는 암흑물질이라는 것을 발견해서 연구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첫째 날의 창조에는 흑암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또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다고 했는데, 이 깊음이라는 것도 하나의 피조물인지 아니면 흑암의 상태였는지 모르겠습니다. 깊음이라는 단어가 명사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독립된 피조물일 수도 있지만, 흑암의 속성으로 보아 흑암의 형태를 표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렇게 창조된 땅의 상태는 혼돈하고 공허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원래의 의미와 아주 동떨어진 의미로 이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 부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말 성경의 번역이 그런 오해를 불러옵니다. 혼돈과 공허라고 번역된 단어는 영어 성경에서 formless와 empty라고 번역되었습니다. 우리 쉬운성경에서는 ‘짜임새 있는 모습이 아니었다,’ 또 ‘생물이 하나 없이 텅 비어 있었다’고 번역했습니다. 그러니까 처음 창조된 땅은 마치 어린아이가 찰흙 한 덩이를 책상 위에 올려 놓은 것처럼 아직 뭔가를 만들어보기 전의 상태였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공허했다는 것은 텅 비어 있었다고 하는 것이 올바른 표현입니다. 공허나 비어 있다는 것이나 같은 의미이지만,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공허하다는 말은 ‘마음이 공허하다’와 같이 추상적인 서술을 하는 데 주로 사용됩니다. 그러므로 땅이 공허하다고 말할 수는 없고, 땅에 들어선 것들이 없이 텅 비어 있었다고 읽어야 옳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고 계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신은 성령으로 이해됩니다. 그래서 천지창조 사역에 삼위 하나님이 참여하신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신이 물 위에 운행하셨다는 것은 아직 형태가 다듬어지지 않은 땅에 어떤 작업을 행하시려고 깊은 관심으로 돌보시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여기까지의 창조행위를 쉽게 간과해버리는 이유는 아직 빛이 없기 때문입니다. 빛이 없으면 우리는 사물을 인식할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의 감각이 시각만 있는 것이 아니어서 손으로 만진다거나 소리를 듣고, 또는 냄새를 맡아서 사물을 인식할 수도 있습니다만, 흑암 속에 있는 하늘과 땅을 상상 속에서 인식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빛을 지으신 순간이 강렬하게 우리 뇌리에 각인되는 것입니다.
빛이 존재하게 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인식하게 됩니다. 빛이 있기 전에도 하늘과 땅이 존재하고 있었지만, 우리는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빛이 없으면 존재와 인식의 괴리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래서 요한은 예수님을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라고 했습니다(요 1:9). 빛은 그 자체가 인식의 대상이 됩니다. 어두움에 빛이 비취면 가장 먼저 빛이 인식됩니다. 그리고 빛은 다른 것을 인식할 수 있게 해 줍니다. 빛이 비취면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빛은 존재하는 대상이기도 하고, 인식의 수단이기도 합니다.
제가 며칠 전에 혼자서 오클랜드에 가는 길이었는데, 와이히 비치 근방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아침 햇살이 온 세상을 화창하게 비추고 있는데, 오른쪽으로는 바다가 보이고 왼쪽에는 수풀이 우겨져 있고 하늘은 마치 호수처럼 맑고 파랬습니다. 그 풍경이 참 아름답다고 생각하는데, 문득 그 아름다운 풍경이 내 눈에 인식되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개나 프레데터의 눈에 비친 풍경은 내가 보는 풍경과 매우 다를 것입니다. 저 하늘에서 빛이 내려와 이 모든 사물들이 내 눈에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신비로운지,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만약에 빛이 없다면 이 아름다운 풍경은 전혀 인식되지 못할 것입니다.
사람이 외부로부터 얻는 정보의 80퍼센트가 시각에 의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보는 것의 비중이 큽니다.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확실합니다. 최근에 개봉된 영화 중에 윌 스미스가 주연한 Seven Pounds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주인공이 재산과 장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줘서 일곱 사람의 삶을 바꾸고 죽는다는 스토리인데, 주인공이 눈을 기증하려는 시각장애인에게 전화를 걸어 시비를 겁니다. 사실은 모르는 사람이 전화로 못되게 구는데도 잘 참고 화를 내지 않는 좋은 사람인가를 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당신 바다가 무슨 색인지 알아?”
“파란색입니다.”
“뭐라고? 파란색? 당신이 알고 있는 대로 말해보란 말이야.”
시각장애인도 바다가 파란색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파란색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즉 시각장애인은 파란색을 인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산과 바다가 펼쳐져 있고, 파란 하늘에서 빛이 내려와 그 모든 것이 내 눈에 아름답게 인식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신비롭고 경이로워서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할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가 이 놀랍고 완벽한 세계가 우연히 생겨났다고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여기 성능이 뛰어난 자동차가 한 대 있다고 합시다. 매우 정교하고 정확하게 잘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동차를 처음 본 사람이 그것을 보고 우연히 생겨났다고 믿는다면 얼마나 우스운 일입니까? 잘 만들어진 자동차의 배후에는 반드시 그것을 만든 제작자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창조세계의 배후에는 반드시 창조주가 계십니다. 어쩌다가 우연히 단백질이 합성되어 생명체가 생겨나고 그것이 진화해서 인간이 되었다고 믿는 것은 돌멩이들이 굴러다니다가 우연히 자동차가 생겨났다고 믿는 것보다 더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 즉 하나님의 존재는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또 중요한 것은 그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세상은 분명하게 존재하시는 하나님 인식하기를 거부하는 세상입니다.
제가 지난주에 더니든에 갔었습니다. 더니든은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주로 정착해서 세운 도시입니다. 1800년대 중반에 대체로 도시가 건설되었는데, 도시 중앙에는 여기저기 거대한 예배당 건물들이 고딕 양식으로 잘 지어져 있습니다. 그리 크지 않은 도시이지만 예배당들이 얼마나 많은지, 차를 타고 지나다 보면 마치 블록마다 예배당이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그러니까 1800년대에 이 도시는 얼마나 경건한 도시였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 예배당들 꼭대기에 십자가가 없는 것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많은 예배당들이 극장이나 술집으로 개조되어 있었습니다. Chapel Apartments라는 것도 있더군요. 그렇게 경건했던 도시가 이제는 하나님 인식하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시의 중앙 언덕에 First Church of Otago가 우뚝 서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거의 박물관이나 관광지 코스 정도입니다만. 그 교회의 첫 번째 목사님이 오타고 대학의 초대 명예총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오타고 대학에는 중동에서 온 무슬림 유학생들의 수가 아주 많습니다. 의대처럼 들어가기가 어려운 학과도 이슬람 국가에서 돈으로 일정 부분 지분을 산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하나님의 존재와 인식 사이에 차이가 생기는 것은 커다란 비극입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어디서 어떻게 그 하나님을 인식하며 삽니까?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기는 믿는데 인식하지 못하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환상을 보거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거나 또는 꿈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거나 하면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은 큰일에만 관여하시고 나의 인생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내가 고난 중에 부르짖어도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습니다. 내가 곤란에 처해도 하나님은 모르는 체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원망하게 됩니다. 또 하나님이 매일의 삶에서 인식되지 않으니까 하나님 두려워할 줄을 모르고 제멋대로 살아버리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존재와 인식의 괴리가 생겨나면 우리는 경건의 모양과 능력을 잃어버린 더니든의 꼴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에녹은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창 5:24). 그것은 에녹이 날마다 환상을 보거나 음성을 들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매순간 하나님을 인식하며 살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인식하며 살 때 우리는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 곁에 계시는 것을 인식하며 살 때 우리는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인식하고 그 하나님과 늘 교제하며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은 변화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데 그치지 말고, 내 삶 속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하시며 역사하시는 것을 늘 생생하게 인식하며 살아가는 복된 그리스도인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화이팅을 하십시오
창 1장 1~5절 / 김경수목사
성경은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들에게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내용도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는 대표적인 말씀입니다. 말씀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사역에서 우리들은 그분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은 이 아침에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깊은 생각을 하셨습니다. 하기야 온 우주만물을 지을 때에 얼마나 생각이 많으셨겠습니까? 조그마한 건물도 설계를 하려면 짧지 않은 시간이 소요됩니다. 그런데 엄청난 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신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일 것입니다. 면밀히 생각하시고 난 후에 드디어 전능하신 그분의 입술을 통해 나오는 말씀으로 6일 동안 아름답고 웅장한 이 세상은 창조한 것입니다.
6일 동안 세상을 창조하신 창1장을 가만히 연구해 보면 반복적으로 나오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 말씀은 영어 성경으로 다시 번역해 보면 “하나님께서 좋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good"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음으로 인해 더 비전적이고 진취적인 삶을 살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먼저는, 하나님께서 매일 “good”이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나라들은 예외없이 “good, 좋았어, 잘했어”이라고 하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good morning, good afternoon, good night" 등등.
그런데 우리나라는 “good, 좋았어, 잘했어”라고 하는 말을 별로 사용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말을 많이 하지 않는 아니 말하는 기술이 별로 없다고 표현하면 도를 넘어섰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도무지 good이라고 하는 들어본 적이 흔하지 않다고 여겨집니다. 오히려 이런 말들이 많습니다.
“이것밖에 못했어.” “별로 준비를 많이 하지 못했구만” “혼난다” 등등.
어찌보면 불행했던 우리 자신들의 자화상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한이 많고 슬픔이 많은 우리들입니다. 즉, 상처가 많고 아픔이 많다는 말로 대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완벽주의를 기합니다. 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쌓이다보니 항상 자신의 모자람과 부족함에 대해 질책하고 자학하는 것입니다. 관용이나 용납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신앙생활 중에서도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율법주의로 나타나는 경향도 이와 다르지 않는 삶의 패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율법주의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죄를 알게 하시려고 율법을 주셨는데 세월이 흘러 유대 사람들은 율법을 하나님으로 대체하여 신봉하는 자들이 되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은 몰라도 율법을 지키면 구원을 받는 줄 알았던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율법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며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는 온전히 율법을 지킬 수도 없음에도 그들은 율법에 매여 삽니다. 그러니 어떤 현상이 생기는 것입니까?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자신이 늘 못나 보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더 무서운 것은 자신을 학대할 뿐만 아니라 자신도 지키지 못하는 율법을 다른 지체들에게 적용하면서 정죄하는 아주 잘못된 전통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는 사랑과 용납을 외치는 공동체인데 오히려 교회에서 더 많은 정죄와 판단으로 상처와 아픔을 당하는 일이 허다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도 지키지 못하는 율법을 다른 사람들에게는 매몰차게 적용하여 정죄하기 때문입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붙잡아 예수님께 데리고 옵니다. 물론 예수님을 책잡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는 말씀에 양심의 가책을 받고 모두 돌을 내려놓고 각자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모순되는 일입니까? 돌을 들고 큰소리를 내면 자신은 의롭고 죄를 지은 사람은 죽어야 한다는 이상한 논리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우리들은 자신을 자학하고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면서 사는 버릇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부정적이고 파괴적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적나라하게 웅변적으로 잘 나타나 있습니까?
첫째날 사실 온 우주만물이 창조된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부족한 것이 많고 모자란 것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매일 자신이 하신 일들과 당신께서 지으신 것들을 보시면서 ““good, 좋았어, 잘했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아직 온 우주만물이 지어진 것이 아닙니다. 과정입니다. 그런데도 매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good, 좋았어, 잘했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격려입니다. 칭찬입니다. 위로입니다.
진실로 하나님께서는 격려의 하나님이십니다. 칭찬의 하나님이십니다.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격려와 칭찬은 어떤 효력과 위력이 있습니까? 격려와 칭찬은 동기부여의 효력이 있습니다. 동기부여가 무엇입니까?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자극을 주어 행동하게 만드는 위력이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good, 좋았어, 잘했어”라고 하신 행간의 숨은 의미 중에 이런 효력과 위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에 놀라움을 금치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내면 깊은 곳에 내재되어 있는 마음인 것입니다.
“good, 좋았어, 잘했어”/한 번씩 따라해 보기
제 생각으로 아침에 새로운 창조의 일을 시작하실 때에는 “화이팅”을 하셨을 것 같고, 사역을 마치시고는 “good, 좋았어, 잘했어”라고 하신 것 같습니다. 화이팅은 용기를 갖게 하고 “good, 좋았어, 잘했어”라고 하는 말은 의욕을 갖게 해서 또 다른 일들을 힘 있게 하도록 만듭니다.
자,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며 무엇을 하든지 이와 같은 원리를 나에게 적용할 수 있다면 나의 삶은 놀랍도록 비전적이고 진취적이며 역동적인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침에 일어나서 하루를 시작할 때는 주님 안에서 “화이팅”을 외치고 시작하십시다. 그리고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돌아올 때는 비록 모자라고 부족함이 있으며 아쉬움이 있다고 하더라도 “good, 좋았어, 잘했어”라고 자신에게 격려를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니 실수가 있고 넘어졌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어느 때든지 적용되어야 하는 놀라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화이팅”과 “good, 좋았어, 잘했어”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부터는 생각과 말을 바꾸어야 하겠습니다. “잘 될까?” “오늘 하루도 불안한데” “오늘도 잘못되면 어떻게 하지?” “오늘도 어제와 같을꺼야”라고 하는 말을 거부해야 합니다. 하루를 출발할 때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주님, 오늘도 저와 함께 해 주십시오. 저는 주님과 함께 동행하면서 승리할 것입니다. 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 화이팅!”이라고 하십시오.
그리고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돌아올 때에는 “너는 그것밖에 못했어?” “참으로 한심하구나” “그러면 그렇지 너는 별 수 없는 존재야” 등등. 마귀의 속삭임을 물리치십시오. 마귀는 우리들의 모자라고 부족한 것을 지적합니다. 외모와 소유, 그리고 우리들이 한 업적들에 폄하를 하여 열등의식을 갖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격려와 위로를 기억하시면서 이렇게 외치십시오. “비록 실수는 좀 있었고 아직 완성은 안 되었지만 그래도 나는 오늘 대단한 일을 했어. good, 좋았어, 잘했어”
오늘 하루를 기억하면서 누구에게 자리를 양보했든지 아니면 운전 중에 양보를 한 것, 낯선 사람에게 문을 열어 주었거나 아니면 닫아 주었다든지, 커피를 타서 대접하였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한 일들을 기억해서 자신을 격려하십시오.
자신을 “good, 좋았어, 잘했어”라고 격려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을 “good, 좋았어, 잘했어”라고 칭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을 “good, 좋았어, 잘했어”라고 위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탕자의 이야기를 기억하십니까? 아버지의 재산 중에 절반이나 허랑방탕하게 탕진하고 돌아온 둘째 아들을 아버지는 무릎을 꿇려 놓고 호되게 질책하며 야단하지 않았습니다. 그와는 오히려 정반대였습니다. 잃어버린 재산을 따지지 않았습니다. 탕자는 입이 열 개라도 변명할 수 없었기에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면서 자신은 종이 되어도 어쩔 수 없다고 입으로 고백하면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아버지는 잃어버린 재산에 마음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집으로 돌아온 아들에게 마음이 있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good, 좋았어, 잘했어”
사랑하는 여러분! 자신을 격려하십시오. 칭찬하십시오. 위로하십시오. 완벽하기 때문도 아니요 온전하기 때문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도 나처럼 자신을 격려할 수 있어야 된다”고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의 십자가 보혈로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입니다. 결코 메뚜기가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창공을 높이 날며 먼 곳까지 비상하는 독수리들입니다.
자신을 격려하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도 격려하지 못합니다. 자신을 격려하지 못하는 사람은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자신의 못난 것만 보지 마십시오. 물론 못난 것이 잘난 것보다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격려하시고 칭찬하십시오.
왜 그래야만 합니까?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격려와 칭찬은 의욕을 불러일으키고 자극을 주어 또 다른 행동을 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격려와 칭찬보다 더 좋은 비타민은 없을 것입니다. 더 좋은 영양제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격려와 칭찬에 있습니다. 자신을 격려하고 칭찬하는 것을 습관화하십시오. 훈련하십시오. 매순간마다 격려하시고 칭찬하십시오.
놀라운 기적이 여러분들 삶속에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질병이 치유되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만이 놀라운 기적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역동적인 기적은 격려와 칭찬으로 인해 의욕이 불같이 일어나며 무엇인가 할 수 있고 해야 한다는 자극이 자발적으로 능동적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격려와 칭찬으로 가능합니다.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 자신을 격려하고 칭찬하듯이 다른 지체들과 다른 사람들도 격려하고 칭찬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의외로 가까운 사람들을 격려하지 못하고 칭찬하지 못하는 이상한 버릇을 가지고 있습니다. 잘 아는 사이에 굳이 격려하고 칭찬해야 할 필요까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나 잘못된 것입니다. 사실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 많은 격려와 칭찬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가까운 사이일수록 상처받기 쉽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부부가 서로 상처를 주고 아픔을 당하는 악순환을 되풀이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서로 격려와 칭찬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대화 기술이 없다는 것도 큰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대화 기술이 없다고 해도 하나님의 마음을 적용할 수 있다면 부부 사이는 사랑의 관계여야 합니다. 권태와 별거를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의 영성이 아닙니다. 마귀의 영성입니다.
아침에 출근하는 남편을 향해 오른손 주먹을 쥐고 위에서 아래로 내리면서 “화이팅”하고 격려하십시오. 하루의 승리는 50% 이룬 것입니다.
저녁에 퇴근하는 남편을 향해 오른손 엄지를 아래에서 위로 치켜세우면서 “good, 좋았어, 잘했어”라고 하십시오. 새로운 날에 더욱 의욕을 불태우면서 창의적인 역동적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자녀들은 부모님들의 격려와 칭찬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들을 윽박지르거나 그 어떤 명분으로도 협박하지 마십시오. 그것으로 자극이 되고 의욕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또 윽박지르고 협박하여 성공했다고 해도 결코 부모에게 좋은 것을 돌아오지 않습니다. 자식들이 복수하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그들을 격려하시고 칭찬하십시오.
아침에 학교에 갈 때 “화이팅”하고 용기를 주십시오.
저녁에 돌아올 때 “good, 좋았어, 잘했어”하고 피곤을 덜어주며 새로운 의욕을 가지게 하십시오.
목장에서 서로 격려하고 칭찬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서로 잘못을 일깨워주고 교육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나도 하기 어려운 종교적 의무를 지우지 마십시오. 조금 부족하고 모자람이 보여도 언제가는 온전하게 될 것으로 알아서 격려하고 칭찬해 주십시오.
“화이팅”과 “good, 좋았어, 잘했어”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직장이나 사업장을 대립과 반목의 장으로 만들지 마십시오. 그곳은 싸우는 곳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축복이 그들에게도 넘치는 장이 되어야 합니다. 항상 볼 때마다 “화이팅”과 “good, 좋았어, 잘했어”라고 하십시오.
“화이팅”과 “good, 좋았어, 잘했어”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이며 이 속에는 놀라운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동기부여가 되어 의욕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므로 비전적이며 진취적이고 역동적인 삶을 살게 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있는 곳에는 항상 하나님의 능력이 충만하게 흐를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대로 되어 좋은 세상
창 1장 1~8절 / 이수영목사
신구약성경 전체의 첫 장인 창세기 1장은 참으로 중요하기 이를 데 없는 내용들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거기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어떻게 생겨났으며 우리가 누리고 있는 온갖 자연적 환경들이 최초로 어떻게 조성되었는가 하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창세기 1장은 천지를 비롯한 만물이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 지으셨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하늘과 땅과 바다와 해와 달과 별들도 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이고, 빛과 어둠, 낮과 밤도 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며,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종 열매 맺는 나무들도 다 하나님께서 나게 하신 것이고, 온갖 종류의 하늘의 새와 땅의 짐승과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물고기도 다 하나님께서 생기게 하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남녀 인간은 하나님의 특별한 창조임을 강조합니다. 또 사람들이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여 하늘과 땅과 물에 있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고, 풀과 채소와 열매들을 그들의 먹을거리로 삼는 질서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임을 말해줍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창조의 손길이 아니고서는 아무 것도 없었고 아무 것도 있을 수 없었음을 말해줍니다. 본문3-5절은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말함으로써 시간도 역사도 하나님의 창조로부터 왔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들을 오직 말씀으로 지으셨다고 선언합니다. 본문 3절은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다"고 합니다. 본문 6-7절은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 하시니 그대로 되었다"고 합니다. 그 외의 모든 것도 하나님께서 그저 그것들이 있으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생겨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은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하나님의 전능하고 주권적이며 거역할 수 없는 의지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고 종속되어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은 또 우주 만물이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 안에서 지어졌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순서대로 질서있게 창조하셨고, 먼저 모든 생물체들이 자라고 번성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신 후에 생물체들을 있게 하셨으며,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라"(창1:22) 하셨습니다. 이 창조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모든 창조를 그 어떤 피치 못할 사정에 의하거나 마지못해 하셨다는 아무런 흔적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적으로 주권적이고 자유로운 자신의 의지로 만물을 지으셨음을 우리는 강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한 그 간결하고 단도직입적인 첫 문장, 첫 선언을 통해 하나님 자신은 그 누구에 의해서도 지음 받지 않으셨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홀로 처음부터 계신 분임을 가르쳐줍니다.
창세기 1장의 각 구절은 많은 해석상의 견해차이와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습니다. 오늘 본문 2절은 특히 그렇습니다. "그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는 이 구절은 그 한 단어 한 단어의 이해부터가 쟁점입니다. 그러나 많은 해석과 견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구절을 통해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우주의 모든 존재와 형태와 질서와 의미와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창조의 손으로부터 나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혼돈이니 공허니 흑암이니 하는 말들은 모두 "하나님의 창조의 손에 의하지 않고는 그 어떤 존재도 형태도 질서도 의미도 아름다움도 있을 수 없음"을 가리키는 부정적이고 비실체적인 개념들입니다.
사실상 많은 신학자와 과학자들이 창세기 1장에서 언급된 피조물들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거기에서 기록된 대로가 과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정확하고 증명될 수 있는지 없는지를 놓고 많은 싸움을 벌여왔으며 아직도 첨예한 대립과 조화의 시도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태초"라고 하는 것이 어느 시점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어느 정도의 첫 기간을 말하는 것인지? "천지"라고 한 것이 문자 그대로 하늘과 땅만을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우주의 모든 존재를 포괄적으로 일컫는 말인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제일 먼저 창조하신 것이 하늘과 땅인지, 아니면 빛인지? 만일 제일 먼저 창조된 것이 하늘과 땅이라면 왜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지가 있으라 하시니 천지가 있었다"는 말이 없으며, 7-8절에서 보듯 둘째 날에 또 궁창을 만드시고 그것을 하늘이라 부르신 것과는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지? 2절에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라고 한 것은 처음에 창조될 때의 땅은 아직 아무런 형태를 지니지 않은 어떤 원재료를 말하는 것인지? 또 그것이 가능하며 성경전체에 의해 지지될 수 있는 견해인지? 빛은 첫째 날 만드셨고, 14-19절에 따르면 광명체들은 넷째 날 만드셨다고 했는데, 광명체 없이 빛 자체가 먼저 있는 것이 맞는 이야기인지? 이 외에도 천지창조가 이루어진 6일이 과연 오늘날과 같은 하루 24시간의 6일인지? 아니면 얼마든지 길어질 수 있는 어떤 시간의 단위인지 등 의문과 논쟁점은 수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창세기 1장이 피조세계에 대한 과학적 보고서로서 의도되고 기록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이 창조이야기가 정말 우리에게 말하려는 것은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창조의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께서 지으신 이 세상에 관한 이야기보다, 이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에 관한 말씀에 더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홀로 스스로 계신 존재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유의 창조주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간과 역사의 창시자이시고 주인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존재와 모양과 의미와 질서와 아름다움을 만드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그 모든 것을 있게 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 누구의 강요나 간섭이나 도움을 받지 않고 하나님 자신의 주권적 의지와 자유 가운데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들을 아무렇게나 주먹구구로 지으시지 않고 놀라운 지혜와 깊은 사랑 가운데서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우리는 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뿐만 아니라 창세기 1장 전체에서 특별히 주목해야 할 반복적인 문장형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조금 줄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대로 되었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이고, 조금 더 줄이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니 좋았더라"입니다. 이 말씀으로부터 우리는 "이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될 때 좋은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으리라 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될 때 그 모든 것이 좋았다는 사실은 오늘날 이 세상을 뒤덮고 있는 온갖 추악함과 무질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님을 확인시켜줍니다. 즉 이 세상의 모든 악과 더러움은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라는 말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될 때 그 모든 것이 좋았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는 이 세상이 좋은 세상이 되는 길은 다름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임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좋은 세상을 원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세상이 좋은 세상이 되지 못한 원인을 다른 데에서 찾으려 하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려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먼저 매사를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며 사는지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이 세상은 좋은 세상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한 말씀 가운데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에 특히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좋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세상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 세상을 보는 우리의 눈을 하나님의 시각에 맞추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늘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줄 알게 되는 것이 최선의 길일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이 전하는 창조의 순서에 있어서 사람은 제일 나중에 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26-27) 창조하셨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생물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26, 28). 그리고 다른 창조의 날들과는 달리 사람을 지으신 제6일에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31)고 합니다. 이러한 사실들이 하나님의 모든 창조 속에서 사람이 차지하는 특별한 은혜의 자리를 말해주는 것임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사람이 갖는 특권만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주어진 책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한 28절의 말씀만을 볼 것이 아니라, 이에 앞서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하나님이 큰 바다 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한 20-22절의 말씀도 함께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6일의 창조를 마치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한 말이 사람에게만 해당된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31절을 다시 보면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했습니다. 즉 이미 먼저 만드시고 보시며 좋아하셨던 그 모든 것 위에 이제 사람이 더해짐으로써 온 세상이 더 좋아졌고 하나님의 창조가 완료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지, 오직 사람만 떼어놓고 심히 좋다 하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복 주신 다른 생물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릴 사람이 있는 세상이 정말 좋은 세상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책임이 얼마나 크고 중한지를 보아야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음은 특권임과 동시에 유일하며 특별한 책임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에게는 어떤 특별한 권리가 주어졌다기보다 오직 사람만이 그러한 책임을 부여받았다는 것 자체를 특권으로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은 세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나쁜 세상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전적으로 사람들이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뜻을 바로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이 세상을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은 세상이 되게 하도록 창조된 존재임을 이 시간 우리는 새롭게 자각해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할 때에만 심히 좋은 세상이 될 것임을 믿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심을 받은 존재답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창조의 재창조
창 1장 1~8절 / 박병욱목사
마태복음 8:23-27
창조의 이야기
여러분은 언제 과거의 사색에 잠깁니까? 그리고 아주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서 인생을 뒤돌아 볼 때가 언제입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재가 성공하여 바쁠 때는 과거를 별로 성찰하지 않다가 어렵고 힘들 때 주로 과거를 회상합니다. 사람들은 많이 힘들수록 더 먼 과거를 회상하며 아주 어린 시절을 떠올리곤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가장 깊은 고통의 때에 자신들의 역사를 뒤돌아보고, 더 나가서 온 우주 만물의 시작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성경의 시작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은 내용적으로도 모든 만물의 처음을 다루고 있습니다.
포로기의 상황 (삶의 자리, Sitz im Leben)
오늘 구약 본문 창세기 1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던 시대에 유대의 제사장 그룹에 의해서 발생되었다가 포로 후기에 고향에 돌아와서 쓰여진 것입니다. 우리가 이 내용을 잘 알기 위해서는 유대인들의 포로 생활을 상상해 보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기원전 6세기에 이스라엘은 바벨론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나라가 망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강제 이주에 의해서 정든 고향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전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거나 제사를 드리지도 못했습니다. 망한 나라의 백성으로서 포로로 이주한 사람들에게 아무런 희망이 없었습니다. 이들의 주변에는 모두 바벨론의 건축물 등 화려하고 웅장한 바벨론의 문화에 온통 둘러 싸여 있었습니다. 온 세상을 호령하는 바벨론의 정치가들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초라한 메뚜기나 지렁이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 땅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노예로 살아갑니다.
당시 사람들은 자신들의 처지가 자신들이 섬기는 신들의 능력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전쟁에서 바벨론 사람들에게 패배했다는 것은 바벨론 신이 이스라엘 신보다 힘이 더 세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바벨론 사람들의 신들의 힘은 눈으로 증명이 됩니다. 바벨론 성전인 만신전(Pantheon)은 승리의 상징처럼 웅장하게 우뚝 서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루살렘의 성전에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성전은 전쟁 중에 약탈을 당했고, 바벨론의 웅장한 성전에 비하면 예루살렘 성전은 화장실처럼 보일 정도로 초라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는 자신들의 하나님을 부끄러워하게 되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국 땅에서 추방의 위협 앞에 있었읍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포로생활은 말 그대로 종살이고 괴로운 삶이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신앙의 의심과 절망의 깊은 수렁에 빠져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삶의 자리” (Sitz im Leben)였습니다. 바로 이 삶의 자리에서 오늘 본문인 제사장 문서가 생겨났던 것입니다.
이 시절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신앙을 버리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분문은 정반대의 일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본문은 창조주이신 유일한 하나님에 대한 찬양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당시의 찬란하고 웅장한 바벨론 종교와 의식에 위축될 수 밖에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제사장들은 그것에 위축되지 아니하고 자신들의 하나님께 대한 찬양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인간과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대한 놀라운 신앙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첫 문장을 이런 위대한 신앙 고백으로 시작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천지창조에 대한 선언문입니다. 이 선언문에는 네 가지 중요한 낱말이 있습니다.
1. ‘태초’
먼저 “태초”라는 말입니다. 본문에서 태초라는 말은 창조의 시점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영원으로부터 시간이 시작되는 첫 출발점을 말합니다. 하늘과 땅은 영원전부터 있었던 것도 아니고 저절로 생긴 것도 아니고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고 그것들의 시작이 있었습니다.
2. ‘하나님’
둘째로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본문은 바벨론 사람들이 믿었던 바벨론 창조설화 (Enuma Elish)와 아주 팽팽한 긴장관계에 있습니다. 바벨론 신화에는 신이 여럿이 있어서 각각 다른 힘과 기능을 발휘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유일한 한 하나님이 계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만성전(Pantheon)이 필요가 없고, 바벨론의 그 많은 신 보다도 하나님 한 분의 능력은 더 크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우주를 설계 하고 지은 분은 세상의 여러 신들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고(출3:14), 전능하시고(창18:14), 거룩하시고(레11:44), 전지하시며(시19:1), 의로우시고(사45:21), 사랑이시며(요3:16), 불변하시고(히13:8), 진실(신32:4)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만이 세상을 창조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천지)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3. ‘천지’
세번째 중요한 단어는 “천지”라는 단어입니다.
바벨론 사람들은 별들이 자신들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별들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해와 달과 별은 신이 아니고 피조물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들은 인간들을 위해 피조된 빛을 내는 물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할 때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고 고백을 합니다. 여기서 천지란 온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모든 만물을 의미합니다.
4. ‘창조’
네번째로 중요한 단어는 “창조”라는 말입니다.
바벨론설화(Enuma Elish)에 의하면 모든 것의 출현은 가장 높은 신인 “마르둑”(Marduk)과 “혼돈의 신”(Tiamat)과의 처절한 싸움의 결과입니다. “혼돈의 신”의 시체조각으로 “마르둑”이 우주를 만든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하나님께서 별로 힘들지 않게 세상을 창조하신 것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떠어떠하게 “되어라” 말씀만 하시면 “그대로 되니라” 라고 하였고, 하나님께서 혼자서 만족스럽게 창조하셨습니다.
여기서 창조는 ‘처음으로 지었다’ 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창조하다’로 번역한 히브리 낱말은 이미 있는 것으로부터 다른 것을 만든다는 뜻이 아니라, 절대주권자답게 ‘무에서 유로’ 불러낸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창조’ 라는 말 속에는 창조자가 반드시 존재한다고 하는 사실과, 창조는 창조자가 자신의 뜻과 목적에 따라서 창조했다는 사실이 들어 있습니다.
바벨론 창조 설화에는 신의 시체 조각이 우주가 되는 등 우주 만물에 대해서 아주 부정적인 인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는 그 결과가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고 기록한 것처럼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계획대로 잘 이루어졌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포로기의 반성
여러분, 창조에 대한 신앙고백은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낸 창작물이 아닙니다. 이 신앙고백은 성령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시는 은혜의 수단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사랑하셔서 극심한 역사적 고통의 상황을 이기도록 하시는 위로의 말씀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천지를 창조하신 이토록 위대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역사를 새롭게 하실 것이라는 약속을 믿었습니다. 저들의 죄악을 용서하시고 분명히 새로운 기회를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고난은 새로운 기회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삶을 반성할 수 있고 역사를 돌이켜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내적인 재창조가 포로기에 일어났습니다. 고난 속에서 타락하여 벌 받은 백성이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극심한 고난이 이들의 신앙을 정화했습니다.
유대교의 랍비로서 뉴욕의 메모리얼 슬로언 케터링 암 센터의 상담가로 재직했던 크라우스가 쓴 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두 나무꾼이 뿌리를 내린 지 백년이 넘은 나무를 자르고 있었습니다. 나무를 자르자 나이테가 보였습니다. 젊은 나무꾼은 다섯 개의 나이테가 거의 붙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5년 동안 가뭄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라고 쉽게 결론을 내렸다. 나이테가 붙어 있는 이유는 그만큼 자라기 않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나이 많은 현명한 나무꾼은 젊은 나무꾼의 말에 동의하면서도 그와는 다른 관점 하나를 말했습니다.
“가물었던 해는 실제로 그 나무의 생명에 가장 중요한 시기였네. 가뭄 때문에 그 나무는 땅 속으로 뿌리를 더 깊이 내려야만 했겠네. 그래야 필요한 수분과 영양소를 얻을 수 있으니까. 그리고 가뭄이 사라지자, 나무는 튼튼해진 뿌리 덕분에 더 크고 더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을 것이네.”
이스라엘 백성들은 창조 신앙의 힘으로 바벨론 포로기의 고통을 이겨내고, 그들의 역사 속에서 계속되는 시련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출애굽의 기적을 다시 한 번 확인했습니다. 이집트의 포로기와 똑 같은 상황에서 다시 한번 하나님의 해방 기적을 사모하게 되고, 결국 역사적으로 이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는 창조 신앙을 새롭게 창조했습니다. 새로운 창조 신앙의 고백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새롭게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폐적이고, 독선적인 신앙이 새로워 질 수 있었습니다. 성전과 절기의 생생한 의미를 상실하고 성전이라는 장소에 집착하고, 절기라는 시간에 얽매이고, 제사라는 의례 행위에 고정된 신앙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생기를 잃어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혼합주의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고난의 시기에 이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본질을 제대로 알게 됩니다. 이들은 장소에서 자유롭고 절기에서 자유로운 하나님을 만나는 본질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땅만이 아니라, 바벨론 땅에서도 어디서든지 기도하는 자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으로 고백을 합니다.
참 신앙은 하나님의 창조를 발견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발견한 신앙은 현실의 역사를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역사를 창조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창조신앙으로 고난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고난은 잠자던 용기와 지혜를 깨운다. 사실, 고난은 우리에게 없었던 용기와 지혜를 창조해 내기도 한다. 우리는 오직 고난을 통해 정신적,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스콧 펙, M. Scott Peck).
신앙은 현실을 이기는 힘입니다. 신앙 고백은 현실을 이기는 고백입니다. 이 신앙고백은 하나님의 성령의 선물입니다. 우리가 입술로 하나님의 창조를 고백하면 모든 피조물이 새로워집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인생이 새로워집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여러분의 인생을 창조하십니다. 여러분이 이 신앙 고백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창조능력이 여러분의 삶에서 약동하게 하십시오.
오늘 여러분의 가장 큰 걱정을 목표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인생의 가장 큰 시련을 놓고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에게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능력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시련의 때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네 단어를 잊으시면 안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한 문장을 잊지 마십시오. 현실을 뚫고 나가는 힘이 이 속에 있습니다.
여러분, 창조신앙으로 이 세대의 불신앙을 이기시기 바랍니다. 창조신앙으로 현실의 문제를 뛰어넘는 위대한 능력을 얻는 한 해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구약과 신약의 성령의 역사
창 1장 1~2절 / 김홍도목사
물이 H2O 같은 원소로 구성되어 있지만 액체와 고체와 기체,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나듯이 하나님은 한 분이지만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의 삼위의 인격을 가지신 분이신데, 하나님이 세 분은 아닙니다. 또 성자 하나님이 성부 하나님보다 낮은 분이라든가, 성령은 성자 하나님보다 낮은 분이 아니십니다. 단, 예수님이 세상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실 때 스스로 자기를 낮추어 성부 하나님보다 낮은 형태로 오신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6~7절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라고 하신 말씀이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물론 성부나, 성자나, 성령 하나님은 모두 피조물이 아닙니다. 또한 영원하신 분입니다. 또 삼위 하나님은 다 전능하신 분입니다. 어느 인격이 다른 인격보다 먼저 존재했거나 나중 존재하시지도 않습니다.
1. 구약의 성경
① 창조하신 성령 하나님 성령님은 창조사역에도 함께 하신 분입니다. 창세기 1장 1~2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Spirit of God)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전에 말씀드린 대로 창세기 1장 1절과 2절 사이에는 많은 시간의 차이(gab)가 있다고 했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것(bara)이고, 2절부터는 천사장 루시퍼가 하나님보다 높아지려고 하나님의 보좌까지 찬탈하려다가 천사장과 그를 따르던 천사 3분의 1이 함께 타락하여 사탄과 마귀들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아름답던 우주가 함께 저주를 받아 대이변(catastrophe)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다시 재창조(recreation)를 하실 때에 성부 하나님과 함께 성자, 성령도 창조사역에 가담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 2절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Spirit of God)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신 즉 성령 하나님이 수면에 운행(move)하셨다고 했는데 이 “운행”이란 말은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밑에 품듯이 흑암과 혼돈의 땅을 품었다는 뜻입니다. 물론 성자 하나님도 함께 창조사역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란 말씀이 창조하실 때마다 나오는데 이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 즉 성자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라고도 하고 “예수님의 영”이라고도 합니다.
② 구약의 성령은 특정한 사명자에게 부어주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임하시지 않았습니다.
사사 중에서 삼손을 보면, 사사기 13장 24~25절에 “여인이 아들을 낳으매 이름을 삼손이라 하니라…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마하네단에서 여호와의 신이 비로소 그에게 감동하시니라”고 하셨고, 15장 14절에 “삼손이 레히에 이르매…여호와의 신의 권능이 삼손에게 임하매…”라고 말씀하셨고, 후에 드릴라에게 유혹을 받아 범죄하고 능력의 비결을 아르켜줄 때 성령이 떠나셨습니다. 사사기 16장 20절에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고 했습니다. 그 외의 모든 사사들에게 특별히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왕으로는 다윗 왕에게 성령이 임하셔서 사명을 감당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16장 13절에 “사무엘이 기름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워 이긴 용기와 능력도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절부터 보면 사울은 교만하여 여호와의 말씀에 불순종했기 때문에 성령은 떠나시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선지자의 예를 하나 들면 에스겔 2장 2절에 “말씀하실 때에 그 신이 내게 임하사 나를 일으켜 세우시기로 내가 그 말씀하시는 자의 소리를 들으니”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구약시대에는 특별한 사명 맡은 자에게 임했습니다.
③ 성령에 대한 요엘서의 예언
요엘 2장 28~30절에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주로 특별한 사명을 받은 특정한 인물들에게 성령은 부어주셨지만 이제 말세에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특별히 구약에서 빼놓을 수 없는 말씀이 스가랴 4장 6절의 말씀입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고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즉 여호수아는 종교지도자이며 제사장이며 평민이면서 신앙이 독실한 지도자로 스룹바벨과 성전을 재건하려고 하는데 여러 가지 방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도저히 성전 건축이 불가능해보였습니다. 이때에 여호와께서 주신 말씀이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하는 것인데, 즉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힘(might)”이란 육신의 힘(physical strength)을 의미합니다. 즉 인간의 완력(brawn)이나 인간의 두뇌(brain)의 힘으로는 되지 않고 오직 여호와의 신,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성전을 건축할 때에도 얼마나 사탄의 방해와 대적하는 사람이 많았습니까? 도저히 해결할 수 없어보였지만 뜨겁게 기도할 때 성령의 역사로 문제를 해결하고 건축을 완성할 수가 있었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큰 산이 평지가 되고 도리어 큰 산이 옮겨지면서 거기서 머릿돌이 나와 성전 건축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두뇌의 명석함이나 육신의 힘으로 할 수가 없고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설교자도 육신의 완력(brawn)이나 두뇌(brain)의 명석함으로 하게 되면 위험합니다. 두뇌가 너무 날카로워서 날카롭게 설교하면 잘못된 방향으로 날카로워서 남에게 상처를 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성령의 능력으로만 할 수 있고 교회의 부흥도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2. 신약시대의 성령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이 땅에 계시다가 승천하시기를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하신 말씀대로 120문도들이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모여 10일 동안 기도하다가 오순절에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모양이 각 사람 머리 위에 임하더니 다 성령의 충만을 받았습니다. 사도행전 2장 1~4절에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요엘 선지가 예언한 것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2장 17~18절의 두 구절을 인용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라고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했습니다. 여기의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하는 말씀과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한 말씀은 구약시대의 특정한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과는 달리 모든 사람에게 성령을 부어주신다고 한 대로 120명의 문도들이 약속한 대로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하신 말씀대로 예수님이 떠나가는 대신 또 다른 보혜사, 예수님과 똑같은 분이 오셔서 우리를 지도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인도해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또 승천하시기 전에 주신 약속의 말씀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24장 49절에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고 하셨는데 예수님의 약속의 말씀대로 10일 동안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다가 성령충만함을 받고 능력과 은사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유월절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고 안식일 다음날 첫 곡식단을 드리는 날 예수님이 부활하시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고 맥추절 혹은 칠칠절(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여 영혼의 추수가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고 예루살렘에서 교회가 탄생했습니다.
① 성령의 오심은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보혜사 성령이 오시는 목적은 예수님을 증거하라고 오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26~27절에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거하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예수님)를 증거하신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 성령이 오신 목적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에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라고 했습니다. 즉 보혜사 성령은 예수님과 똑같은 다른 보혜사입니다. 또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증거하는 일을 하십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고 예수님보다 자기를 증거하고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잘못되는 것이요, 성령 받고 은사 받고 예수님을 증거하거나 높이지 않고 자기를 높이고 자기의 유익을 위해 돈을 갈취하는 일을 앞세운다면 이미 잘못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또 성령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보내신다(요14:26)고 했으므로 예수님을 증거하고 예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② 성령의 능력은 영혼구원을 위해서
성령의 능력과 은사를 주시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하여 멸망할 영혼을 많이 구원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신유의 은사를 받아서 영혼구원은 하지 않고 자기를 높이고 위협하면서 돈을 버는데 써먹으려고 하는 사람은 이미 악령이 역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모두 영혼구원을 위해 최선을 다하다가 목숨까지 버리기도 했습니다. 영국의 Charles Spurgeon 목사님은 미국 50대도시에서 강의해주면 모든 여비를 다 대주고 그 옛날에 한번에 1,000불씩 주겠다고 제안해왔을 때 “더 좋은 일을 하겠습니다. 나는 영국에 머물면서 50명의 영혼을 구원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Francis Xavier 선교사는 “내가 영혼 하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매를 만 대 맞으라고 해도 매를 맞고 그 영혼을 구원하겠다”라고 했습니다.
구세군의 창시자, William Booth 대장은 “영혼 하나 구원하기 위해서 거꾸로 서서 춤을 추라면 춤을 추겠다”라고 했습니다. 1904년 영국왕 에드워드 7세의 초청을 받고 버킹엄 궁에 갔을 때 기념으로 앨범에 글을 쓰라고 했을 때 75세 난 그 노인은 엎드려 쓰기를 “각하, 어떤 사람의 야망은 예술에 있고, 어떤 사람의 야망은 명예에 있고, 어떤 사람의 야망은 황금에 있사오나 나의 야망은 사람 영혼에 있습니다”(My ambition is the souls of men)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것도 지옥 갈 우리 영혼을 구원하기 위함이며 3일
만에 부활하신 것도 영혼구원을 위함이요, 교회를 세우는 목적도 영혼구원을 위함이요, 성령충만 받는 목적도 영혼구원을 위함입니다.
Jonathan Edward 가 강조한 것도 영혼구원입니다. 한번은 “하나님의 진노의 손 안에 든 죄인들”이란 제목으로 설교했을 때 사람들이 지옥으로 떨어질까봐 기둥을 붙잡고 두려워 떨며 회개했다고 합니다.
오순절에 성령충만 받고 베드로가 뛰쳐나가 복음을 전할 때 3,000명이나 회개하고 구원받았습니다. 모든 제자들이 성령충만함을 받고 복음을 전하다가 거의 다 순교했습니다.
영국에 무디 선생의 교회에서 일하던 젊은 목사, John Harper 목사가 타이타닉 호가 빙산에 부딪혀 점점 가라앉고 있을 때 난간을 붙잡고 “당신 구원 받았느냐?”라고 하며 전도를 하였습니다. 물 위의 갑판 조각을 붙잡고 한 젊은이를 불러서 “당신 구원받았소?” 하고 물으니까 그 청년이 “아니오”라고 대답하니 자기가 붙잡고 있던 갑판 조각을 밀어주면서 “예수님 믿고 구원받으세요”라고 말하고 가라앉았다가 얼마후 다시 떠올라서 “당신, 구원받았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으시오” 하고 말하고 자기는 물속으로 가라앉았고 젊은이는 살아났습니다. 그가 Carper 목사님에 의해 마지막으로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하늘이 열리다
창 1:6~8, 20~23 / 이재훈 목사
세상의 모든 것이 존재하는 이유는 그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단순하고 명확한 진리를 믿으면 모든 것에 대한 대답을 얻게 됩니다. 이 단순하고 명확한 진리를 믿지 않으면 모든 것에 대한 복잡한 질문만 남습니다. 모든 것의 시작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세상이 우연한 어떤 작용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믿는 것은 대답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연을 기대하고, 우연을 의지하는 인생이 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전능하신 분의 능력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믿는 것은 믿음의 능력을 체험하는 인생이 됩니다. 창조에 대해 우리가 궁금해 하는 것을 모두 해결하지 못하는 부분이 분명히 있습니다. 무한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행하신 창조를 유한한 지식과 이성을 가진 인간에게 설명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창조가 불완전해서가 아닙니다. 인간의 유한성 때문에 모순처럼 보이는 게 당연합니다. 또 <창세기> 1~2장 기록이 창조에 대한 모든 지식을 빠짐없이 기록한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해 주시지 않은 내용을 가지고 유한한 인간이 연구를 통해서 완전한 지식을 가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복음서에서도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을 모두 기록할 수 없기에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것들만 택해서 기록해 주셨습니다. 하물며 창조에 대한 모든 지식을 빠짐없이 기록하는 게 가능하겠습니까? 그러나 분명히 믿어야 하는 것은 <창세기> 1장은 문학적인 비유나 상장. 신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증언이 담긴 역사적 기록이라는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는 말씀에서 ‘하늘과 땅’은 보이지 않는 모든 세상과 보이는 모든 세상을 포함한 모든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선언입니다.
세상은 진화론이 유일한 진리인 것처럼 많은 학문으로 높은 성을 쌓고 있습니다. 창조론을 주장하는 과학자들이 매우 소수이기에 사이비 취급을 합니다. ‘한국창조과학회’같은 단체를 과학을 부정하는 사이비 단체처럼 매도합니다. 여러분, 절대 그 정보에 휩쓸리지 마십시오. 천동설을 믿던 시대에 지동설을 주장했던 과학자들은 처형당할 만큼 죄인 취급을 당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믿는다고 진리가 아닙니다. 과학적 발견들은 도리어 진화가 아닌 창조를 증거합니다. 오묘한 자연의 섭리를 바라보며 아주 오랜 세월 우연한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다고 믿는 것과 이 모든 것을 전능하시며 지혜로우시며 완전하신 하나님의 설계를 통해서 질서를 따라 창조되었다고 믿는 것 둘 중 하나입니다. 어떤 실험이든지 믿음을 가지고 가설을 세우고, 그 가설을 토대로 증명해 가는 것이 과학적 연구방법입니다. 진화론자들은 진화되었다고 가정하고, 오랜 세월 우연한 변이 과정을 통해 이 세상이 형성되었다고 가정하고 실험합니다. 그러나 진화를 증명할 화석, 유전자 문제 등 중요한 과학적 근거들이 진화론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과학이 도달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역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볼 때 과학적 발견이 이루어집니다.
6일 동안 세상을 창조하신 이유
사람들은 하나님이 만물을 6일 동안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마음에 창조주를 거부하는 죄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피조되었다는 사실에서 출발할 때 겸손해야 하고, 창조주의 계획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야 하고, 우리 마음대로 살 수 없는 세상이 되어버리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이 6일 동안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진리를 계시하시기 위함입니다. 단 한순간에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지 않고 6일 동안 창조하신 것은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아주 오랜 시간 우연한 진화의 변이에 의해 세상이 형성되었다고 주장할 것을 미리 아시고, 하나님이 그 생각을 무너뜨리시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오랜 시간에 걸쳐 창조하신 것도 아닙니다. 진화를 사용해서 창조하신 것도 아닙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만들고, 순수하게 창조주 하나님의 놀라운 설계와 능력의 말씀으로 이 모든 세상을 질서 있게 존재하게 하셨다는 것을 어떻게든 부정해보려는 모든 시도를 무너뜨리시는 것입니다. 6일 동안 하나님이 얼마나 세상을 질서 있고, 전능하신 설계에 의해서 창조하셨는지를 보여줍니다.
첫 번째 3일은 무형의 상태에서 이 세계의 형태와 영역을 창조하셨습니다. 나중 3일은 그 형태에 존재하는 피조물들을 창조하셨습니다. 크게는 형태를 만들고 나서 채우는 질서가 나타납니다. 6일 동안의 창조를 다른 시각으로 보면 각 3일은 하늘로부터 시작해서 땅으로 진행됩니다. 셋째 날을 보면 땅이 식물을 내고, 여섯째 날에는 땅이 동물을 냅니다. 첫째 날과 넷째 날이 짝을 이루는 단일한 창조를 하지만, 둘째 날과 다섯 째 날은 이 두 가지 측면을 가진 창조를 하고, 셋째 날과 여섯째 날은 분리된 두 개의 창조를 행하십니다. 점진적으로 하나님이 질서를 만들어 가시는 창조를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은 둘째 날과 다섯 째 날이 짝을 이루는 창조를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물 가운데 공간이 생겨 물과 물이 나누어지라’ 하셨습니다”(6절).
둘째 날에 물을 나누심으로 하늘을 만드시고, 물에 거주하는 생물과 하늘의 생물, 곧 어류와 조류를 창조하셨습니다. 물 가운데 공간이 생기도록 물을 나누셨습니다. “물을 창조하셨다는 기록이 없는데 물은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라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 2절을 다시 살펴보면 “땅은 형태가 없고 비어 있었으며 어둠이 깊은 물 위에 있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움직이고 계셨습니다”고 했습니다. 2절의 ‘땅’은 세 번째 날에 나오는 물이 한꺼번에 모이게 해서 바다를 만들 때 드러난 그 땅이 아닙니다. <창세기> 1장 1절에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고 할 때 그 땅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지구를 말합니다. <창세기> 1장 1절은 하나님이 모든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전체적인 선언이고, 2절은 그중에 땅의 창조, 즉 지구의 관점에서 창조를 바라보는 것을 기록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태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2절부터 땅의 창조를 설명합니다. 보이지 않는 세상, 또 우리가 거주하지 않는 환경에 대해서 기록을 하면 이해할 수 없고, 불필요하기에 인간이 거주하는 지구 환경을 중심으로 한 창조에 초점을 둔 것입니다. 그러므로 1절은 지구보다 더 큰 창조의 선언입니다. 그 결과로 지구의 창조가 이루어지기 이전의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2절에 물로 덮여 있는 형태가 없는 상태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절이 천지창조 전체의 선언이면서 동시에 2절 이하에 땅의 창조에 대한 배경이 됩니다. 종교개혁자 장 칼벵도 1절의 하늘과 땅의 창조에 2절의 ‘물’이라는 원물질의 창조가 포함된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1절과 2절에 엄청난 시간이 들어있다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온 우주를 존재하게 하셨는데 그중에서 우리가 땅이라고 말할 수 있는 지구의 창조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일부분만 설명하시고, 2절이 땅의 창조 과정이기에 여기서 물도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빛의 창조 이후 물을 나누심으로 그 사이에 공간을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때 지구의 상태가 물의 상태였습니다. 물로부터 모든 것이 나왔다는 게 아니라 물을 나누심으로써 공간과 대기권을 만드셨습니다. 진화론은 항상 단순한 물질로부터 점점 복잡한 것으로 진화한다는 게 가설인데 물(H2O)은 그 자체로 완전합니다. 물보다 미세한 요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수소, 산소, 핵 등은 물보다 훨씬 미세합니다. 그런데 만일 이 세상이 수소나 핵으로부터 시작했다면 얼마나 위험합니까? 가장 안전하면서도 단순하지 않은 복합물질이 물 아니겠습니까? 이 물을 나누심으로 대기권을 만드시고, 세상을 조장하셨습니다. 과학적으로도 신비하고 놀랍고 합리적인 설명입니다. 물의 분리를 통해서 공간을 창조하셨고, 공간 위의 물과 아래 물로 나누셨습니다. ‘공간 위의 물’이라고 표현된 것은 창조과학회 과학자들의 설명에 의하면, 언제든지 물이 될 수 있는 수증기 상태의 존재입니다. 물이 기체 상태로 있다가 비가 되는 것처럼, 언제든 물이라고 할 수 있는 정도의 기체, 하늘에 떠 있는 상태를 물이라고 표현한 일종의 덮개 효과(Canopy effect)를 만듭니다. 그래서 지구를 뒤덮고 있는 수증기의 띠가 덮개 효과를 발휘해서 인간이 거주하는데 최적의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입니다. 그 근거가 <창세기> 2장 5~6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였고… 안개가 땅에서 솟아 나와 온 땅을 적셨습니다.”
비가 내리려면 기압골이 있어야 하는데 기압골이 필요 없는 완전한 상태, 안개만 땅에서 올라오고, 그 자체가 인간이 거주하기에 완벽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수명이 노아의 홍수 이전과 이후 크게 바뀌는 것입니다. 홍수 이전에는 인간이 800~900년 사는 게 가능했던 이유는 공간 위 물의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바닷물이 출렁이듯 물이 하늘에 떠다녔다는 뜻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홍수 심판 때 하늘의 물이 쏟아졌다는 것은 공간 위의 수증기 상태의 물이 쏟아져 내림으로써 지구를 보호하는 띠가 사라짐으로써 인간의 수명이 급격히 줄어들고, 오존층이 파괴되고, 영향을 받게 되고, 추운 곳과 더운 곳이 생기고, 북극과 남극이 생기고, 인간이 거주할 수 없는 광야가 생기는 지구 상태에 혼돈이 왔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과학적 설명이고, 하나님 말씀에 근거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서
하나님이 물을 나눠서 ‘하늘’이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하늘은 <창세기> 1장 1절의 하늘이 아닙니다. 그 하늘은 보이지 않는 모든 세계를 포함합니다. 여기서 하늘은 우리가 ‘Sky’라고 말하는 하늘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하늘의 창조를 통해 의도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장엄한지요! 주께서 그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습니다”(시 8: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창공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보여 줍니다”(시 19:1).
우리 눈에 보이는 하늘, 대기권과 대기권 밖에 있는 더 넓은 의미의 하늘이라면 우주를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흔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늘의 하나님께서’라고 할 때 그 하늘은 우리가 볼 수 없는 영역에 계신 하나님이 우리가 눈에 볼 수 있는 하늘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빛이신 하나님이 빛을 만들어 주셔서 우리가 볼 수 있게 하신 것처럼, 빛과 하늘, 모두 하나님의 흔적입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하늘로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끝없이 펼쳐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 제자들을 만나시고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하늘을 바라보며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을 바라보게 하신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도록 하신 것입니다.
상상력과 창조력을 일깨우기 위해서
둘째, 하늘을 창조하심으로 인간의 상상력과 창조력을 일깨우시기 위함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하늘, 정말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바라보면서 “아무것도 없네”라고 한다면 과학적 상상력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닙니다. 일단 하늘이 파랗습니다. 공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대기권 밖으로 가면 파란색이 점점 없어지고 어두워지지 않습니까? 공기층이 있기 때문이고, 공기층이 인간을 보호해 주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기체 상태의 많은 요소가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특히 망원경이 발달하면서 더욱 그렇습니다. 망원경이 발달하면서 우리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별의 크기가 실제 크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헬라어로 인간을 ‘앤트로포스(?νθρωπο)’라고 합니다. 영어로 인류학을 ‘앤트로폴로지(Anthropology)’라고 하는데, 여기서 나온 말입니다. 앤트로포스라는 말은 ‘위를 바라보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하늘을 바라보는 존재입니다. 보이는 것만 바라보는 사람들은 상상력이 부족합니다. 상상력이 없으면 문명이 발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하늘을 보고, 그 하늘에 움직이는 해와 달과 별을 보며 무한한 우주를 발견하며 인간은 겸손하게 됩니다. 무한한 우주는 무한하신 하나님의 흔적입니다. 우주의 광대한 규모를 완전히 표현할 수 있는 단어조차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으뜸 되는 태양계의 태양조차 사실은 지극히 평범한 별 하나일 뿐입니다. 은하에 있는 수많은 별 중에 하나고, 그 은하도 수많은 은하 중에 평범한 하나입니다. 성경이 보여주는 것은 무한한 우주의 중심이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무한한 우주를 보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위해 다 만들었어. 이 모든 것을 너를 위해 만들 만큼 너는 소중해. 그렇게 인간은 고귀한 존재야.”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지구를 떠나서 달 주위를 맴돈 때가 1968년입니다. 크리스마스이브입니다. 우주선을 타고 달의 지표면을 돌면서 생명이 존재하지 않는 달에 올라간 비행사들이 지구로 어떤 교신을 했는지 아십니까? 그들이 지구로 보낸 것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습니다”입니다. 달에 가 봤더니 지구가 정말 아름다운 것입니다. 지구 같은 행성이 없는 것입니다. 화성을 가보고, 달을 가보고, 다른 행성을 가봐도 사람이 거주할 수 없었습니다. 지구처럼 완벽한 환경을 가진 행성이 있을까요? 모르겠습니다. 아직까지 인간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생명을 공급해주시기 위해서
셋째, 하나님이 하늘을 창조하신 것은 지구의 피조물들에게 생명을 공급해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보는 대기권, 파란 하늘을 순수하게 건조한 상태로 보면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라 무색, 무미, 무취의 상태의 기체들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질소 78%, 산소 21%, 기타 1%입니다. 80km 안에 일정하게 존재한다고 합니다. 산소보다 더 많은 것이 질소입니다. 대기 중에 가장 풍부한 기체인 질소가 지구상에 사는 생명체들의 영양소 공급원입니다. 비가 오면 식물들이 살아나지 않습니까? 질소 때문입니다. 비가 내리면 질소의 화학작용에 의해 영양을 공급받고 산소를 뿜어냅니다. 그래서 비온 뒤에 숲을 가면 그 맑은 공기가 우리를 살리는 것입니다. 기체 속에 있는 질소를 통해 식물들이 공급을 받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천둥 번개를 무서워합니다. 번개가 칠 때 온도가 높지 않습니까? 그것이 질소를 반응시켜서 화학작용에 의해 더 풍성한 영양을 공급합니다. <욥기>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번개의 빛으로 먹을 것을 넉넉히 공급하신다.” 번개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또 지구 주변에 운석들이 떨어지는데 대기권이 없다면 그대로 떨어져서 엄청난 피해를 입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빗물도 떨어질 때 대기권이 없으면 바위를 뚫을 수 있는 엄청난 파괴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빗물을 기분 좋게 맞을 수 있는 것은 공기층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연한 과정, 오랜 시간 지나다보니 어떻게 됐다고 믿고 싶습니까? 아니면 하늘을 보며 완벽한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습니까?
진화론자들은 어떤 한 가지 종에서 모든 종이 나왔다고 하는데, 대기권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공기도 진화합니까? 생명이 거주하는 생명체만이 아니라 환경과 빛이 어떻게 진화했는지 설명하는 진화론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존재한다고 말할 뿐이지, 발견할 뿐이지, 빛의 기원은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빛을 창조하신 분을 설명합니다. 물을 나눔으로, 대기권을 창조하심으로 생명이 유지될 수 있는 기초 환경을 만드신 하나님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종류대로’ 창조하셨다!
다섯째 날로 넘어가면 하나님이 아래 물과 위의 물, 대기층과 공간을 형성하심으로써 그 공간을 나는 새들을 창조하셨고, 물속에 다니는 물고기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물에는 생물이 번성하고 새들은 땅 위 하늘에서 날아다니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큰 바다 생물들과 물에서 번성하는 온갖 생물들을 그 종류대로, 온갖 날개 달린 새들을 그 종류대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습니다”(20~21절).‘그 종류대로’라는 말씀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진화론은 다윈의 종의 기원이 말하는 것처럼 단순한 하나에서 많은 종류가 나왔다고 주장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처음부터 ‘종류대로’였습니다. 각 종류대로 창조된 것이지 하나에서 여러 종류가 나온 게 아닙니다. 진화론이 결정적으로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게 어류와 조류입니다. 물고기와 새는 진화론으로 설명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어류와 조류를 창조하신 게 정말 기묘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진화론이 나올 것을 아셨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 처음부터 물고기로 존재하는 종류와 하늘을 나는 종류가 다르게 종류대로 창조되었습니다. 어류와 조류가 섞이는 화석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전 세계적인 화석은 지구적인 홍수를 증거할 뿐입니다.
세상은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진화하며 질서를 만들어가는 게 아니라 원래 오묘하고 복잡하고 광대한 것이 조화 있고, 질서 있게, 하나님의 지적인 설계에 의해서 창조되었습니다. 인간의 죄로 점차 망가졌을 뿐입니다. 여전히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오묘하고 조화로운 창조의 신비가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고, 모든 것을 종류대로 창조하시며, 우리를 존재하게 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절망을 넘어 희망으로
창 1장 2~5절 / 이영훈목사
6.25 한국전쟁 73주년을 맞아서 창세기 1장 2-5절의 말씀을 가지고 “절망을 넘어 희망으로” 이와 같은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바로 73년 전 오늘 주일날 새벽 4시에 북한군이 선제 타격작전 계획에 따라 38선 전 전선에서 남침을 개시했습니다. 이 전쟁은 3년간 이어졌습니다. 6.25 한국전쟁은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동족 간에 일어난 비극적인 전쟁이었습니다.
북한이 공산화가 되고 난 다음 김일성은 1949년 3월에 소련을 방문하여 스탈린을 만나 무력 남침계획을 알립니다. 스탈린은 그때 북한에 소총 1만 5천정, 각종 포 139문, T34 탱크 87대, 항공기 95대의 무기 지원을 약속하면서 아직은 전쟁을 일으킬 때가 아니라고 만류하며, 중국의 지도자 마오쩌둥을 찾아가 협의토록 했습니다.
마오쩌둥은 김일성을 만나 중국인민해방국 내 조선인 2개 사단을 넘겨주었습니다. 1949년 6월에 미군이 남한에서 철수하자 공산주의 동조 세력을 규합시켜 남한 내부 전역에서 빨치산 무장봉기를 지시하였고,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전쟁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시작된 이 전쟁이 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기까지 희생된 군인과 민간인, 사상자 숫자가 남한이 230만, 북한이 292만, UN군 15만, 중공군 90만으로, 총 660만 명이었습니다. 이에 더하여서 전쟁미망인이 33만 명, 피랍인이 320만 명, 전쟁고아 10만 명, 월남한 피난민이 약 300에서 500만 명, 이산가족이 약 1천만 명에 달하였습니다. 국가 산업 생산력의 약 80%가 다 파괴되고, 건물이 초토화되었으며, 모든 재산을 다 잃고 국토가 잿더미에 뒤덮였습니다. 그 인적, 물적 피해는 천문학적인 숫자로 계산할 수가 없을 정도로 우리 대한민국이 큰 피해를 입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공산군 점령지에서 그 어떤 계층보다 핍박받고, 투옥되며, 고문당하고 순교한 사람들이 바로 기독교 지도자들과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350대 탱크를 앞세운 5개 사단 규모의 북한 공산군이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와 3일 만에 서울을 함락시킵니다. 그리고 3일간 쉬었다가 다시 여세를 몰아 내려와서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갑니다. 순식간에 남한 전체가 공산화되는 것 같았습니다. 6.25 한국전쟁 직후 피난 내려온 기독교인들이 부산에 모여서 민족과 교회와 개인의 죄를 회개하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어린아이부터 나이 많으신 교계 지도자들까지 통곡하며 주님을 바라보며 울부짖어 기도했습니다.
그때 한국으로부터 구원병을 요청하는 전문이 미국 트루먼 대통령에게 당도합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잠자리에 들었다가 일어나 침실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어떻게 이 일을 결정해야 되나 고민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될 순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의 결정에 따라서 수많은 미국 청년들이 피를 흘려야 할 것이고, 그에 따라 한반도 정세가 왔다 갔다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마침내 이 같은 결정을 내렸습니다.
남한이 공산치하에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 없다. 6.25 전쟁에 미국이 개입하는 것이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길이다. 모든 수를 써서라도 그들을 막아야 한다. 기도하는 가운데 결정하고 UN군의 도움을 얻기 위하여 긴급히 UN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했는데 거부권을 가진 소련이 참석하지 않아서 한국전쟁 파병이 결정되었습니다. 16개국이 이 전쟁에 참여하여 우리 대한민국을 지켜주었습니다. 이게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한 기도의 결과이고, 하나님의 도우심의 은혜로 6.25 한국전쟁으로 우리가 공산화되지 아니하고 이 나라를 지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잿더미가 된 이 폐허 속에서도 절망 가운데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모두 한마음이 되어 절망을 딛고 일어났습니다. 그 중심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습니다. 1953년 67달러였던 국민 총소득이 2021년에 34,980달러가 되어 522배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의 피해를 입은 나라 가운데에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유일하게 다른 나라에 원조를 주는 복 받은 나라가 되었고, 세계 10대 경제 대국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인데, 오늘날 이런 풍요로움 속에 살면서도 많은 사람이 눈앞에 있는 작은 문제만을 바라보고 절망을 얘기합니다. 낙심하고 탄식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가 아침에 뉴스를 보니까 어제 초등학교 5학년짜리가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서 뛰어내려서 목숨을 끊었습니다. 너무나 학교생활이 힘들고 살기 힘들다고 삶을 포기한 것입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절망을 얘기하고 절망 가운데 탄식하고 무너지지만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절망을 얘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희망을 노래합니다. 인류의 절대 희망되신 예수님, 우리 구세주가 되시기 때문에 우리는 절망 가운데 희망을 노래하고 주님의 은혜로 날마다 모든 어려움을 이기며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절대 절망이 변하여 절대 희망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문제가 변하여 응답과 해결로 우리에게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상처가 변하여 회복이 되고 우리 삶 가운데에 하나님의 은혜를 가져다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절대 긍정 절대 감사로 무장해서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믿음으로 전진 또 전진해 나아가는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성경을 보니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다음 2절에 가서 땅이 공허하고 혼돈하며 흑암이 깊음 가운데 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성경 창세기 1장 2절은 이와 같이 말씀합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는데 2절에 가서 갑자기 상황이 바뀌어져서 땅이 공허하고 혼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성경학자들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섬기던 루시퍼라고 하는 천사가 교만이 들어와서 하나님처럼 되려고 했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쫓겨나 공중 권세를 잡은 다음 이 모든 세계가 흑암 위에 있게 되었다고 해석합니다. 이사야 14장에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14장 13~15절입니다.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스올 곧 구덩이 맨 밑에 떨어짐을 당하리로다
그래서 천사가 타락해서 공중 권세를 잡음으로 말미암아 이 땅이 공허하고 혼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게 된 것입니다. 그 죄의 뿌리가 바로 교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피조물로 지음 받은 천사가, 피조물로 지음 받은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려고 했기 때문에 죄가 이 땅에 임하게 되었습니다. 죄가 인류 역사 가운데 임하게 된 것입니다.
이 사탄이 뱀에게 들어가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담과 하와를 유혹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된다고 유혹했습니다. 그래서 하와가 먼저 선악과를 먹고 옆에 있는 아담에게 주어서 그들이 죄 가운데 빠지게 된 것입니다.
모든 죄의 뿌리가 교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믿고 나서 철저히 깨달아야 되는 것은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주님께 영광 돌리고 주님의 뜻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흑암이 깊음 위에 있게 됨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절망이, 질병이, 저주가, 사망이 온 세상을 뒤덮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믿기 전에 우리의 마음이 흑암의 깊음 위에 있었습니다. 마음이 공허하고 혼돈해서 기쁨이 없고 늘 마음이 울적하고 아무것도 아닌데 상처받고 낙심하고 쉽게 무너지는 우리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난 다음에 우리가 이 절망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 삶의 유일한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우리 마음의 절망을 걷어낼 수 없습니다. 시시각각 우리에게 다가오는 많은 문제와 어려움과 고통을 우리가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오직 우리의 구세주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실 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절망을 이기고 문제를 이기고 어려움을 이기고 질병을 이기고 주님 안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류의 희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니까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 하나님의 영은 수면에 운행하시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믿고 난 다음 승리하는 신앙생활의 비결은 하나님의 영이 임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해야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마음 가운데 임할 때 흑암의 권세가 물러가는 것입니다. 염려, 근심, 걱정이 떠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자꾸 시험에 들고 말 한마디에 상처받고 무너지는 이유는 성령이 운행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예수님 믿고 난 다음 반드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성령충만을 받고 또 받아야 됩니다. 우리 인간이 연약하고 무기력하기 때문에 성령충만 받지 못하면 사소한 일에 시험 들고 상처받고 무너지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 받아서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순복음교회 65년의 이 모든 역사가 바로 성령충만의 역사였습니다. 성령충만의 역사로 시작해서 65년의 역사 가운데 세계 최대의 교회를 이룰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령충만 받아서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흑암의 권세를 물리치고 반드시 주님 안에서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주님의 귀한 일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2. 빛이 있으라
성경은 이어서 빛이 있으라고 말씀합니다. 창세기 1장 3절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성령이 우리 마음 가운데 임할 때 내 마음에 빛이 비춰지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의 빛이 비춰지는 것입니다. 생명의 빛이 비춰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온천지를 창조할 때 말씀하셨습니다.
“빛이 있으라”
빛이 있으라!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 하나님의 영이 운행하시고 난 다음 하나님 말씀하시기를 “빛이 있으라.” 하신 그 순간 모든 흑암의 권세가 걷혀버리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시작되고 광명의 새날이 밝게 된 것입니다.
우리 마음 가운데 빛이 임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절망과 고통과 괴로움이 임할 때 주님의 빛이 비춰지면 이 절망의 어두움이 떠나가는 것입니다. 여기 이 성전에 많은 불이 켜있어서 환하지마는 불을 끄는 순간 전체가 흑암으로 뒤덮일 것입니다. 그러나 스위치만 올리면 다시 온 성전이 환해지는 것처럼 우리 마음에 주님의 빛이 비춰져서 흑암의 권세를 물리쳐야 되는 것입니다. 이 빛이 우리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1장 4절에 보니까.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내게 뭐라 말하나 굉장히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누가 칭찬하면 막 기분이 좋고 하늘을 나는 것 같다가도 누가 뭐라고 하면 욕하면 저절로 주저앉고 맙니다.
요즘 SNS의 댓글 하나 때문에 살고 죽는 사람들이 있어요. 막 사람들이 칭찬하면 좋았다가 욕을 하면 그냥 혼자 낙심해서 무너져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말하는 거 한 마디에 좋아하고 기뻐하고 아침엔 좋았다가 저녁에 낙심했다가 이러한 삶을 살면 안 됩니다.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 안에서 기뻐하고 감사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칭찬받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내게 뭐라고 그래도 아무런 의미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고 하나님께 칭찬받는 주님의 일꾼이 되기를 바랍니다.
악한 원수 마귀는 우리가 예수님 믿고 잘 되는 것을 제일 싫어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 믿는 사람들 상처를 입히려 합니다. 또 부흥하는 교회에 흠집을 내려고 악한 원수 마귀가 날뜁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만 바라보고 나아갈 때 흑암의 권세는 멸망을 받게 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큰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1편 6절에. 무릇 의인들의 길은 야훼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인정받으면 하나님이 흑암의 권세를 물리쳐주시고 우리를 인정하시고 우리의 삶에 큰 복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 가서 어떤 일을 하고 어떤 계획을 세우고 누구를 만나서 무슨 얘기를 하든지 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모습이 될 때 하나님이 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이 복을 받기 위해서 빛 되신 주님이 우리 마음 가운데 오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이 땅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사람들이 처음에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 9~10절은 말씀합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우리가 예수님을 알지 못할 때 마음은 여전히 어둠 가운데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알고 믿을 때 그 마음에 생명의 빛, 구원의 빛, 은혜의 빛이 비춰져서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가 잘 되며 강건하게 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는 은혜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빛 되신 예수님을 마음에 모셔드리고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3.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성경은 나아가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와 같이 말씀합니다. 1장 5절입니다.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사람들이 보통 하루를 말할 때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되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하루를 계산하는 것은 전혀 반대입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것은 무슨 의미가 있느냐? 우리 삶에 어떤 저녁이 되고 어떤 밤이 오고 어떤 고통이 괴로움이 환난이 어둠이 다가와도 우리에게는 희망의 아침이 밝아온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희망이 되어 주셨습니다.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셔서 우리의 영원한 희망이 되시고 영원한 아침이 되시고 영원한 새벽이 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절망의 밤이 다가옵니다. 문제의 밤이 다가옵니다. 때때로 가정에 어려움이 다가오고 육신에 질병이 다가오고 사업에 문제가 있어서 무너져 내리고 이와 같은 밤이 다가옵니다.
그러나 그 밤의 절망에 앉아서 넋 놓고 탄식하고 있을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밤이 깊어도 밝아오는 새벽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어떤 밤도 다가오는 새벽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새벽의 신앙을 갖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문제가 다가오고 어려움이 다가와도 우린 새벽의 신앙을 갖고 일어나고 또 일어나서 모든 어려움 이기고 반드시 승리하는 것입니다.
코로나 3년을 지나가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고통을 당했습니까? 수많은 영세소상인이 가게 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목사님, 이 가게 한 달 월세가 200만원인데 200만 원을 낼 수 있는 수입이 생기기는커녕 한 달에 100만 원도 수입 못 될 때가 많습니다. 손님이 없으니까요.” 조그마한 가게 분식점인데 손님이 없어요. 하루 종일 문을 열고 있어도 두 명 세 명 올까 말까 합니다. 코로나가 아주 심했을 때는 손님이 하나도 안 와도 매일 아침에 가서 음식을 만들 재료는 사와야 되는데 하루에 몇 십만 원씩 사다 놓고 저녁때가 돼서 그냥 그대로 모든 재료를 그냥 놔둬서 상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 날과 그런 시간을 지냈습니다.
그러나 그 밤이 깊고 긴 것 같아도 이제 우리에게 희망의 새벽이 밝았습니다. 축복의 새벽이 밝았습니다. 이제 코로나가 끝났으니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희망의 새벽밖에 없습니다. 축복의 새벽밖에 없습니다. 기적의 새벽밖에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잘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것입니다. 다시 우리는 일어나면 됩니다. 믿음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절망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축복을 넘치게 부어주실 것입니다. 시편 30편 5절은 말씀합니다.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밤에는 우리가 통곡하며 아파서 울고 괴로워서 울고 슬퍼서 울고 상처받고 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의 새벽은 밝아오는 것입니다. “목사님 너무 오랫동안 제가 마음고생하고 너무 힘들고 괴롭습니다.” 그래도 새벽은 밝아옵니다. 낙심하지 마십시오. 더 이상 절망하지 마십시오. 상처에 매어있지 마십시오. 새벽이 밝아오고 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우리에게 저녁은 다가오지만 반드시 아침이 다가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문제 염려 근심 걱정을 다 주님께 맡겨야 됩니다. 시편 55편 2절입니다.
네 짐을 야훼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할렐루야.
이번 선교대회 때 알래스카에서 사역하시는 윤호용 목사님께서 저한테 책을 한 권 주셨어요. 『알래스카에서 하나님 나라를 꿈꾸다』 제가 이 책을 읽으면서 가슴이 먹먹해져서 눈물도 나고 또 밤에 감동도 받고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제가 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사랑하는 자기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은 그 간증을 다 담고 있습니다.
알래스카가 원래 러시아 땅입니다. 러시아는 알래스카가 얼음덩어리라고 생각해서 갖고 있어도 나라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될 거라고 생각해서 저 땅을 내놨습니다. 역사를 찾아보니까 영국에 문의하니 영국이 안 산다고 그러고, 캐나다에도 구매를 문의하니 캐나다도 안 산다고 그러고, 미국에다 팔려 했는데 미국 역시 안 산다고 그랬습니다. 그래도 미국에 사달라고 떼를 쓰고 팔아서 1867년에 720만 불에 팔았습니다. 그냥 거저 얻은 거죠. 그 땅을 샀다고 슈어드 국무장관이 얼마나 욕을 먹었는지 모릅니다. 지금 그 땅에서 뭐 석유가 나오고 온갖 천연자원이 다 나와서 황금의 땅이 되었는데 크기만 우리나라의 17배입니다.
미국령이 된 알래스카에 윤호용 목사님이 1989년도에 이민을 갑니다. 그는 그곳에서 사업을 잘해서 성공적인 삶을 살다가 예수님 만났습니다. 그래서 소명 받고 한국에 와서 신학 공부를 하고 한국에서 신학교를 졸업했을 때 한국에서 개척할 수 있도록 초청받았지마는 ‘내 사명은 알래스카에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알래스카로 다시 건너가서 교회를 개척합니다.
미국 이민교회라는 것은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 모릅니다. 저도 미국에서 이민 목회를 해봤지만 참 힘들었습니다. 첫날 금요철야 할 때 3명이 나왔어요. 3명. 저는 여의도 교회에서 살아가지고 숫자에 대해 관심이 없었는데 미국 가보니까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됐습니다.
그런데 이 알래스카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그 힘든 상황에서 하나님이 윤 목사님과 함께해 주셔서 5년 만에 교회를 짓고, 교인은 재적 성도 94명으로 크게 부흥했습니다. 할렐루야.
2012년 7월 13일. 13일의 금요일입니다. 그날 금요예배로 말씀을 선포하고 있는데 그 당시 스무 살이었던 아들이 교통사고가 났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성도님과 함께 다 같이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기도가 끝날 때쯤 장로님이 다가오셔서 귓속말로 얘기했습니다.
아들(태원)이 천국 갔대요...
사랑하는 아들과 작별 인사도 하지 못한 상황이었고 그 마음에 찢기는 고통으로 울부짖어도 모자랄 상황인데 하나님이 그의 마음에 위로함과 평안함을 주셨습니다. 눈물로 기도하며 주님이 주신 평안함을 가지고 이렇게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저희 아들 태원이를 주님의 품으로 인도하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기쁘게 받아 주시옵소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이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자녀를 잃은 분 얘기를 들어보니까 그 자녀와 비슷한 아이만 봐도 눈물이 나고,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고, 이름만으로도 눈물이 나고, 그냥 몇 년 동안은 정신없이 그 죽은 아이 때문에 고통을 느낀다고 했는데 이 목사님이 예배 중에 그 사랑하는 큰아들이 교회학교에서 열심히 교사로서 봉사하고 청년부 활동 열심히 하고, 교회 일에 모든 일을 다 솔선하였던 그 아들이 세상을 떠났으니 얼마나 슬프겠습니까? 그때 그 마음에 <이 땅에 오직 주밖에 없네> 그 찬송이 큰 위로함을 주었습니다. 저도 일본에서 사역할 때 이 찬송을 많이 불렀는데요.
<복 256장 : 이 땅에 오직>
이 땅에 오직 주 밖에 없네
그 무엇도 나를 채울 수 없네
주님의 평안 내 안에 있네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네
이 찬송을 부르며 장례 예배 때 성도님 앞에서 이와 같은 고백을 합니다.
사랑하는 나의 아들 태원이가 천국에 갔으니, 나는 이제 더욱 더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려고 합니다. 훗날, 우리 태원이를 천국에서 만나려면 삯꾼 목사는 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저는 이제부터 부끄럽지 않은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갈 것을 이 자리를 빌려 선포합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먼저 떠나보내고 나서 더 열심히 주님의 일에 힘써서 2021년에는 알래스카의 주도시인 주노에 한인교회가 없어질 상황에서 교회를 세우고, 또 베델의 지역에 지교회를 세우고, 2023년에는 페어뱅크스의 지역에 세 번째 지교회를 세워서 알래스카 복음화에 큰 역사를 이루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그는 그의 책 뒷부분에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이 책 뒷부분의 이 고백이 내 마음에 얼마나 감동을 줬는지 모릅니다.
새 생명을 낳을 때,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고 죽어야 하는 연어처럼 나 역시 죽는 시간이 있었다.
연어는 알래스카의 대표적인 그 생선인데 많은 연어가 알래스카에 가서 알을 낳고 죽습니다.
감히 어찌 내가 죽을 수 있으랴. 내가 죽고 내 안의 예수님이 사시는 것, 그것은 내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결국 주님께서는 그 일을 내 안에서 이루셨다. 주님의 은혜로 나는 예수로 인해 죽고, 예수로 인해 다시 사는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나는 지금도 알래스카라는 나의 영적인 본향에서 새 생명을 낳기 위해 예수님과 동행하고 있다. 나는 알래스카에서 예수님과 함께 사는 연어다.
여러분, 어떤 절망이 있어도 우리에게는 희망의 새벽이 밝아옵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우린 주님의 은혜로 다시 일어납니다. 어떤 슬픔이 있어도 주님이 나를 붙들어주시기 때문에 나같이 쓸모없고 부족한 자라고 할지라도 나를 너무나 사랑하시고 함께하시고 내 삶을 주관하고 계시기 때문에. 여러분 포기하지 마십시오. 더 이상 절망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영원한 희망의 아침을 품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영원한 새벽의 신앙을 품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일생이 다 가도록 주님의 은혜 가운데 희망의 새벽을 품고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믿음의 고백으로 찬송가 310장을 함께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