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윈저Windsor
영국, 잉글랜드 남부, 버크셔 주 남부의 도시. 템스 강 연변에 있음. [바른 이름] 뉴윈저 New Windsor. 인구 13만 5000명. 강가에는 900년에 걸쳐 영국 왕실의 이름 높은 윈저 성이 있음. 윌리엄 1세에 의해 축조되어 그후 몇번 확대, 개축되었고 현재의 성은 조지 4세가 개축한 것임. 주위 공원에는 왕실 묘지가 있음.
런던 서쪽 약 37km 지점에 위치한다. 정복왕 윌리엄 1세가 템스강 북안의 절벽 위에 축성한 것이 시(市)의 기원이며, 그 후 성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시장도시가 발전하였고, 1276년 에드워드 1세로부터 시(市) 특허장을 받았다. 윈저성은 에드워드 3세에 의해 개축되었고, 그 뒤 소규모의 수리를 몇 차례 거쳐, 현재도 왕실의 별궁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에는 영국 국왕의 무덤도 많은데, 영국의 황금시대를 이룬 빅토리아 여왕도 이곳에 묻혀 있다. 시내에는 C.렌이 지은 시청사와 15세기에 지은 세인트조지 경당 등이 있다.
영국의 윈저 왕조(1917년~)-영국의 윈저 왕조는 1917년에 시작되었다. 1901년 빅토리아 여왕이 사망하고 즉위한 에드워드 7세(Edward Ⅶ, 1841년~1910년, 재위 1901년~1910년)는 부친인 앨버트 공의 출신지 이름을 따라 왕조 이름을 하노버왕조에서 삭스-코버그-고타(Saxe-Coburg-Gothat)로 개칭했다. 에드워드 7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조지 5세(George Ⅴ, 1865년~1936년, 재위 1910년~1936년)는 2012년 현재 영국 국왕인 엘리자배스 2세 여왕의 증조부이다. 조지 5세가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7년 국민감정을 고려하여 대전국인 독일식의 명칭 대신 왕실의 별궁 소재지 이름을 따서 윈저 왕조로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1.윈저성Windsor Castle
영국 여왕의 여름별장(내부입장관람)
윈저성의 경우 왕실내의 행사가 있는 경우 예고없이 현지에서 진행이 불가피하여, 일정이 대체되어 진행될수도 있다. 11세기 간소한 목조건축에서 비롯되어, 당시의 왕 윌리엄 1세 이래로 왕의 거성으로서 여러 차례 개축·정비를 거듭하였습니다. 중앙의 대원탑(大圓塔)이 중심이 되어 마치 좌우로 날개를 편 것 같은 형태이다. 귀중한 사료와 방대한 미술품의 콜렉션으로도 알려져으며, 그 중에서도 왕립도서관에 소장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초대형 데생이 유명합니다.
11세기 간소한 목조건축에서 비롯되어, 당시의 왕 윌리엄 1세 이래로 왕의 거성(居城)으로서 여러 차례 개축·정비를 거듭하였다.
좌익(左翼)의 구성은 정원을 둘러싼 정청(政廳)과 주거구역이 중심이고, 우익(右翼)은 대표적인 왕실예배당의 하나로 손꼽히는 성 조지의 채플(15세기)과 이를 둘러싼 성벽·탑으로 구성되었다. 또한 각 시대의 유서깊은 갖가지 유구(遺構)가 건축가들의 개성과 세월의 흐름이 어우러져 녹음으로 둘러싸인 성 전체에 독특한 통일·조화를 준다.
또한 귀중한 사료(史料)와 방대한 미술품의 콜렉션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 중에서도 왕립도서관에 소장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초대형 데생이 유명하다.
실제 거주자가 있는 성으로는 세계 최대이며, 영국의 세 군데 공식 왕실 주 거처 중 하나
주변의 몇 마일 떨어진 곳에서부터 시선을 사로잡는 윈저 성은 정복왕 윌리엄 시대부터 영국 왕실의 성채였다. 템스 강을 내려다보도록 지어진 이 성은 1165년 헨리 2세에 의해 재건축되었으며, 1216년에는 존 왕에 대항하여 일어난 반란군의 포위 공격을 견디어 냈다. 그러나 오늘날 보이는 성의 모습은 주로 제프리 와이트빌 경의 작품으로, 그는 1820년대에 조지 4세를 위해 중세를 모방한 로맨틱한 양식으로 이 요새를 개조했으며 성 조지 예배당에 묻혔다. 왕가에서는 1917년부터 이 성을 '하우스 오브 윈저'라 부르기 시작했다.
윈저 성에는 관리인, 성직자, 군인을 포함해 약 250명이 거주하며, 과거의 군주들의 초상화와 조상이 있는 의전실은 저명한 방문객들을 맞이하여 여흥을 제공해 준다. 이것들은 1992년 큰 화재가 난 이후 복구되었다. 이곳에 전시된 신기한 물품 중 하나는 트라팔가 전투에서 넬슨의 죽음을 가져왔던 총알이다.
와이트빌은 '워털루 챔버'라는 연회 홀과 가터 훈장 기사단을 위한 성 조지의 홀을 만들었는데, 에드워드 3세가 1348년 이 기사단을 세운 이후 기사단 임관 행사가 윈저에서 열려 왔다. 궁전에는 왕가의 수많은 보물과 홀바인, 루벤스, 반 다이크 등의 예술가들이 남긴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방문객에게 가장 인기가 있는 유물 하나는 1924년부터 전해 내려오는 메리 여왕의 인형의 집이다.
왕족들은 1475년부터 성 조지 예배당에 묻혀 왔다. 헨리 6세, 에드워드 4세, 가장 사랑했던 아내 제인 시무어와 함께 묻힌 헨리 8세, 참수당한 목을 도로 몸에 꿰매어 붙인 이후에 묻힌 찰스 1세, 조지 3세, 조지 4세, 윌리엄 4세, 에드워드 7세와 왕비 알렉산드라, 조지 5세와 왕비 메리, 조지 6세와 모후, 그리고 마거릿 공주 등이 그들이다. 앨버트 공은 1861년 윈저 성에서 사망했으며, 빅토리아 여왕과 함께 근처에 있는 프로그모어 마우솔레움에 안장되었고, 이후에는 윈저 공작과 공작부인도 그곳에 묻혔다.
런던 교외에 있는 명소 중에서 여행자에게 가장 인기 있는 곳이 윈저성이다. 런던에서 약 35km 떨어져 있으며 템스 강이 굽이굽이 흐르는 언덕 위에 세워져 있다. 강 반대편에는 녹음으로 둘러싸인 이튼 칼리지가 보인다. 시간이 되면 영국의 명문학교인 이튼 칼리지도 들러 볼 만하다.
템스 강변 언덕 위 가파른 경사지에 세워진 윈저성은 드넓은 공원이 펼쳐지는 아주 넓은 성이다. 1087년 정복왕 윌리엄이 성채에 기거하기 위해 목조 요새를 세우면서 시작되었고 그 후 여러 세기에 걸쳐 증개축되었다. 헨리 2세는 둥근 탑(Round Tower)을 지탱하기 위해 석조를 사용했고, 조지 4세는 통치 기간 중에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 둥근 탑을 높였다. 1992년 대화재로 스테이트 아파트먼트가 불탔으나 1997년에 복구되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성 내부는 세 구역(lower, middle, upper)으로 나뉜다.
윈저성은 런던 외곽 방어를 위해 1087년 윌리업 1세가 지은 건물을 토대로 하여 헨리 2세가 석조 건물로 개축한 성이다. 윈저성은 버킹엄 궁전과 함께 오랜 기간 동안 잉글랜드 왕의 성으로 사용되어 왔다. 1992년에 발생한 화재로 큰피해를 입었으나 여왕의 결혼 50주년이 되는 1997년에 완벽하게 복원되었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인형과 성의 모형, 가구를 볼 수 있는 메리 왕비 인형관, 레오나르도다빈치,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등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는 도열 라이브러리도 볼만하다. 헨리8세를 비롯한 10명의 영국 국황들이 탐들어 있으며, 여왕이 성에 머무를 경우 라운드 타워에 로열 스탠더드기가 게양된다.
2.비스터 빌리지Bicester vilage
유명 브랜드 제품을 저렴하게 판매하고 있는
영국 최대의 상가 아울렛 쇼핑. 경기도에 있는 아울렛과 같은 구조의 아기자기한 모습으로 모든 지역에서 사진을 찍으면 아름다운 사진이 연출됩니다. 이 곳은 영국의 현지인들도 세일기간 때마다 무수히 많이 이 곳을 찾는다고 합니다. 영국 특산물 및 쇼핑센터. 영국은 버버리, 아쿠아스쿠텀, 폴스미스, 멀버리, 닥스, 던힐, 바버 등으로 대표되는 각종 의류제품들이 유명하다. 최상의 품질을 자랑하는 English Breakfast Tea, Earl Gray와 같은 전통차가 유명하며 스코트랜드 지방에서 생산하는 Short Bread 비스킷도 유명하다. Portmerion, Royal Doulton, Wedgewood 등으로 대표되는 도자기 및 크리스탈 제품과 British Sterling Silverware는 세계적으로도 명성이 높다. 세계 최고 수준의 관광산업을 통하여 다양한 관광 기념품 판매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영국적인 특색을 표현한 인형이나 수집품이 대부분이다.
비스터 빌리지(Bicester Village)
처칠 생가로 유명한 블렌하임 팰리스(Blenheim Palace), 셰익스피어 생가가 있는 스트라포드-어폰-아본(Stratford-upon-Avon)과 인접해 있다.
- 위치: 50 Pingle Drive, Oxon, OX26 6WD
- 주요 취급품목: 각종 유명 디자이너 브랜드 할인 아웃렛(버버리, 던힐, 멀버리, 발리, 아쿠아 스쿠텀, 페레가모, 구찌 등)
- 전화: +44 (0) 1869 323 200
- 방문방법: 런던 말리본(Marylebone)역에서 Chiltern Railways 기차를 이용(매 30분 간격, 08:30~17:30)해 Bicester North Station 하차 후 셔틀버스 이용(총 1시간 15분 소요)
런던 비스터 빌리지·쇼디치
130여개의 명품과 현지 브랜드가 입점해 있는 런던 비스터 빌리지.
문화와 예술 분야에서 런던은 독보적인 아우라를 품은 도시다. 그 특유의 에너지로 1년 내내 수많은 여행자를 불러 모은다. 하지만 쇼핑에 관해서라면? 사실 그리 마음 놓고 즐길 수 있는 도시는 아니다. 한국보다 두 배 가까이 높은 환율과 비싼 물가 때문이다. 그런데도 영국을 방문한 여행객들이 아낌없이 지갑을 여는 것은 영국 출신의 명품인 폴 스미스, 버버리, 멀버리 등이 가진 ‘명품의 향기’ 때문이다.
유럽 9개 도시 입점한 시크 아울렛
여행지에서 일부러 아울렛에 들를 만큼 열혈 쇼핑 여행자는 아니지만 이번 여행은 시작부터 달랐다. 런던에 도착해 첫 번째로 들른 곳이 런던의 수많은 명승지 가운데 하나도 아닌 ‘시크 아울렛’이었다. 히드로공항에서 포드 갤럭시 차까지 빌려 여정을 시작했을 만큼 벼르고 벼른 여행이었다.
시크 아울렛 쇼핑(Chic Outlet Shopping)은 유럽의 9개 도시에 명품 쇼핑몰을 갖고 있다. 프라다, 지미추, 버버리, 토즈 등 명품 브랜드와 현지 브랜드의 지난 시즌 상품을 연중 30~60% 이상 할인된 가격으로 살 수 있는 아울렛이다. 삭막하게 지어 놓은 쇼핑몰 분위기가 아니라 작은 마을처럼 꾸며져 있어 이름에도 빌리지가 붙는다. 런던 외곽에 있는 비스터 빌리지(chicoutletshopping.com/ko/home/home), 파리의 라 발레 빌리지, 밀라노의 피덴자 빌리지 하는 식이다.
다른 여행 때와 달리 비스터 빌리지에서 아울렛 쇼핑을 하기로 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다른 나라의 아울렛보다 비스터 빌리지에는 ‘신상’(신상품)이 많다. 아울렛에 가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일반적으로 아울렛에서 파는 상품 중에는 유행이 한참 지난 것이 많고, 막상 사려면 마음에 드는 것을 찾기도 힘들다. 하지만 비스터 빌리지에는 최신 제품이 많이 들어온다. 바로 전 시즌의 ‘핫한’ 제품도 금방 찾을 수 있고, 알렉산더 맥퀸의 경우 시크 아울렛에만 공식 아울렛 매장이 있다.
벼룩시장과 꽃시장이 있는 쇼디치
비스터 빌리지에서 특히 돋보이는 매장은 영국 신진 디자이너들의 제품을 편집숍 형태로 꾸며 놓은 ‘브리티시 디자이너스 컬렉티브’ 숍이다. 16명의 유망한 현지 디자이너의 제품이 입점해 있으며, 매년 다른 주제를 가지고 디자이너들의 팝업 부티크로 운영되는 곳이다. 가격은 신진 디자이너라고 해서 만만치는 않지만, 독창적인 아이디어와 패턴이 단연 돋보이는 곳이다. 처음엔 서너 시간이면 비스터 빌리지 쇼핑은 충분하겠지 싶었다. 하지만 반나절이 언제 지났는지 모르게 시간이 지나버렸다.
어느새 양손에는 쇼핑백이 가득. 무겁게 들고 다닐 일 없이 차에 싣고 런던 시내로 들어왔다. 그 다음날 향한 곳은 지금 런던에서 가장 뜨는 동네인 쇼디치. 마침 일요일이라 쇼디치에서는 곳곳에서 벼룩시장과 브릭레인 마켓, 콜롬비아로드의 유명한 플라워마켓이 열리고 있었다. 쇼디치도 요즘은 관광객이 많아져서 현지인은 대부분 플라워마켓에서 시간을 보낸다고 현지 친구가 귀띔해주었다. 그곳에서는 꽃과 정원을 사랑하는 런더너들의 일상을 고스란히 지켜볼 수 있다.
예술가의 도시로 변한 박스파크
어디선가 밴드의 음악 소리가 들려 가본 곳은 쇼디치 하이스트리트역 바로 옆의 박스파크(Boxpark). 2011년 컨테이너를 쌓아올려 만든 이곳은 5년간만 문을 여는 팝업 몰로 1층에는 작은 부티크 쇼핑몰, 2층에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카페와 바로 이뤄져 있다. 얼마 전 서울에도 생긴 ‘커먼 그라운드’ 쇼핑몰의 콘셉트와 비슷하다.
컨테이너 건물 앞 작은 광장에는 비치 의자에 거의 눕다시피 한 사람들이 가득 앉아 인디 뮤지션의 공연을 즐기고 있다. 쇼디치에서 브릭레인으로 이어지는 이스트엔드는 런던에서 오랫동안 낙후된 지역이었다. 버려진 건물과 칙칙한 우범지대였던 이 동네는 값싼 임대료를 찾아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들면서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300여개에 달하는 스튜디오와 갤러리, 패션숍, 레스토랑, 카페 등이 생겨났고, 주말이면 수만 명의 시민이 다녀갈 정도로 주말 시장이 인기다. 그 어느 동네보다 자유분방하고 예술적인 분위기를 즐길 수 있는 쇼디치에서 디자이너와 예술가들의 신상품을 직거래할 수 있는 벼룩시장은 현명한 쇼핑을 즐기는 여행객이 들러야 할 또 하나의 필수 코스다.
영국은 유럽 북서부의 작은 섬나라로 역사가 시작되었다. 고립된 섬나라의 지리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일찍이 문호를 개방하고, 대양 진출과 식민지 개척에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노력은 근대 수 세기에 걸쳐 스페인·네덜란드·프랑스와의 경쟁에서 영국이 결국 승리하여 제해권을 획득하고 광대한 식민지를 확보하여 대영제국을 건설함으로써 결실을 맺었다. 또 영국은 잉글랜드가 주도하여 주변의 웨일스,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를 통합하여 연합왕국을 이루게 되었다. 영국의 인구는 역사 초기에 침략을 통해 정착하게 된 여러 민족과, 중세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경로를 통해 이민해 온 민족들이 혼합되어 다양한 인종과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영국은 16세기 튜더 왕조 때부터 근대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여, 17세기 스튜어트 왕조 때 일어난 청교도혁명과 명예혁명으로 입헌군주정이 등장하게 되었고, 이후 하노버 왕조 때 산업혁명을 거쳐 마침내 산업사회가 출현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적응’과 ‘타협’이라는 두 태도가 영국 국민성의 주된 요소로 자리 잡게 되었다.
자국의 역사를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영국은 근대의 서구문명을 잉태하였다. 정치적으로 의회민주주의와 시민사회 탄생의 선례를 보여주었고, 경제적으로는 농업자본주의와 산업혁명을 일으켜 인류에게 산업자본주의로의 길을 예시하였다. 또 과학혁명을 통해 서구의 과학과 기술 발전의 지적 기초를 놓았고, 정치적 계몽주의와 종교적 이신론의 사상적 토대를 제공하였다. 종교적으로 가톨릭의 강대국들로부터 개신교를 지켜내 그 존속과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또한 영국에서 생겨난 퓨리턴은 미국 문명의 출발점이 되었고, 청교도주의는 미국 건국의 정신적 기초가 되었다. 이러한 과정들에서 근대 시민사회의 핵심적 가치관인 개인주의와 자유주의가 출현하였다.
영국은 문화적으로 셰익스피어와 워즈워스로 대변되는 영문학의 찬란한 금자탑을 쌓았고, 현대 대중문화의 발전도 선도하였다. 무엇보다 언어로서 영어는, 이를 국어로 쓰는 나라가 많아졌고, 오늘날 거의 세계 공용어로서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사회적으로 영국은 복지국가를 앞장서 실행하였고, 수많은 분야에서 시민의 사회참여와 사회봉사의 선례를 보였다. 스포츠 분야에서도 핵심 종목인 축구와 골프가 영국에서 출현하였다. 이제 영국은 영광스러운 시절을 거의 마감했지만, 아직도 다수 영국인의 정서 속에는 그들의 과거에 대한 강한 자부심과 노스탤지어가 자리 잡고 있다.
영국의 입헌군주정은 유럽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정치 제도로서 그 기원은 12세기의 플랜태저넷 왕가 시절부터 발전해 온 ‘의회제도’에 있다. 의회는 중세에 군주가 효율적 과세를 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이용하면서 발전해왔다. 또 이 제도는 튜더 왕조와 스튜어트 왕조를 거치면서 급속히 성장한 젠트리 계급이 명예혁명을 통해 ‘군주는 군림하지만 통치하지 않는다’는 정치 체제로 전환시킴으로써 더욱 발전하였다.
명예혁명 이후 의회는 권리장전(1689)과 왕위계승법(1701)을 통해 군주의 자격을 제한함으로써 입헌군주정의 기초를 확고하게 다졌다. 의회가 만든 법으로 탄생한, 하노버 왕가 치세의 거의 1세기 동안 독일 출신 조지 1세와 조지 2세의 의사소통 문제와 조지 3세의 정신질환으로 인해 내각책임제와 정당정치, 그리고 수상 주도의 국정운영 제도가 발전하면서 입헌군주정은 영국의 정치제도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게 되었다. 입헌군주정으로 체제가 안정되면서 영국은 여러 혁명을 거치면서도 대영제국으로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
의회정치가 발달하면서 점점 정치적 역할이 축소된 군주는 새로운 군주의 역할을 모색하게 되었다. 군주의 위상은 급기야 하노버 왕가의 말기인 19세기 후반 보수당의 디즈레일리 수상이 하노버 왕가의 마지막 군주인 빅토리아 여왕(1837~1901년)에게 군주의 새 역할을 제시하고, 대영제국의 상징으로 이용했을 정도로 위축되었다. 빅토리아 여왕의 자손들로 이루어진 윈저 왕가에 오면서 군주의 정치적 역할은 더 축소되면서 명목상의 위치에 머물게 되었다. 그러다 필요할 때는 정치적 역할을 하기도 했다.
따라서 현대 영국의 입헌군주정에서는 하원 다수당의 당수가 수상으로서 나라를 통치하는 역할을 하고, 여왕은 국가의 수반으로서 의전상의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의회 우위의 정치적 구도가 확립되어 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필요할 때는 국민을 위한 발언을 해왔다.
현대 영국의 입헌군주정에서 군주의 행정 권력은 사라졌지만, 군주는 여전히 공식적으로 헌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국가의 원수이자, 행정·사법·입법부의 수반, 국교회의 ‘수장’이면서 군대의 최고사령관이다. 군주는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며, 법률 제정이나 세금 부과, 공적자금 사용 등을 할 수 없으며 독단적으로 행동할 수 없다. 군주는 정부 관료들의 조언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 또 의회의 개회와 해산과 같은 중요한 의전적 역할을 수행해야 하고, 의회가 통과한 법률에 동의(서명)를 한다.
왕은 또 정부각료와 공직자들을 임명하고 작위를 수여한다. 영국의 공직자들은 군주에게 충성을 선서한다. 군주의 핵심권력은 수상의 선택과 지명권이다. 수상은 통상적으로 하원의 다수 의석을 가진 정당의 지도자가 되어 왔지만, 분명한 다수의석을 가진 정당이 없거나 혹은 정치적 상황이 불투명하면 군주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군주는 국가의 원수로서 국제무대에서의 역할도 수행한다.
윈저 왕가의 마지막 군주인 엘리자베스 2세는 즉위 후에 어려운 문제들을 극복하고 왕실의 위상을 회복하기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 우선적인 것은 대영제국의 해체에 대한 대응이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즉위할 1952년 무렵 대영제국의 위상은 거의 무너지다시피 하였다.
조지 6세 재위 시에 빅토리아 여왕 때부터 차지한 인도 황제의 지위를 잃은 것(1947년)을 시작으로 실론, 미얀마, 말라야, 이집트, 로디지아 등이 연이어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심지어 영연방의 국가들도 모국인 영국과는 큰 틀만 유지하고 독립된 정치구조를 구성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런 대외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영국 내부에서도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시대적 흐름 속에서 국민들은 왕실의 존재가 과연 필요한지 의문을 갖기 시작하였다.
영국지도
이즈음에 왕위에 오른 엘리자베스 2세는 어떤 형태로든 왕실이 변화하지 않으면 존속 자체가 위협을 받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여왕 부처는 왕실이 처한 위기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나섰다.
여왕 부처는 우선 영연방 국가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1953년 11월부터 6개월간 호주와 뉴질랜드 등 이전 영연방에 속해 있던 여러 국가를 순방하였다. 그 후로도 여왕은 남아프리카와 페르시아 만 연안 국가들을 꾸준히 순방하였다.
그녀의 적극적인 행동으로 1977년 즉위 25주년에 35개국의 영연방 지도자들이 축하 연회에 참석하는 등의 결실을 맺었다. 여왕은 급속하게 추락하던 영국 왕실의 위상을 회복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오늘날 엘리자베스 여왕은 모든 영연방 54개 회원국의 명목상의 수장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다수의 영연방 회원국들에서는 여왕이기도 하다. 여왕은 2년에 한 번씩 열리는 영연방 국가수반 회의에 참석하여 각국의 수장들과 개별회담을 갖는다. 매년 크리스마스에 여왕은 모든 영연방 회원국들에 라디오와 텔레비전으로 사적인 메시지를 방송하며, 매년 3월 영연방 기념일에는 라디오를 통해 축하 메시지를 방송한다.
엘리자베스 2세는 여론을 중시하고 국민을 위하는 태도에서 역대 군주들과 같은 모습을 보였지만, 정치에 발언권을 행사하려는 면에서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였다. 그녀의 현실 정치에의 발언은 즉위한 지 얼마 후인 1956년에 발생한 중대 사건에서 행해졌다. 그 해 이집트의 민족주의자 나세르 수상이 수에즈 운하 봉쇄 및 국유화 조치를 일방적으로 취하자 영국의 이든 수상은 무력행사를 통해 원상회복을 시도했고, 그 군사작전은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이 수에즈 운하 사태에서 취한 이든 수상의 대응방식은 영국의 외교 역사상 치명적인 실책 중 하나였다. 영국이 군사력을 사용한 것은 영국의 건실한 외교의 전통과 명성을 훼손시켰고, 군사 작전의 실패는 영국의 위신을 크게 실추시켜 일등 국가로 간주되던 영국의 전성기가 끝났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외교관 출신인 이든 수상이 사태를 평화롭게 해결하지 않고 군대를 사용한 것은 권력 남용이라고 생각했다. 입헌군주제에서 수상이 행한 행동이라 간섭할 수는 없었지만, 당시 여론이 이든을 등지기 시작하자 그녀는 사적인 견해임을 전제로 다른 인사들을 외면하고 보수당의 맥밀런에게 차기 수상이 될 준비를 하도록 권하였다. 이후 맥밀런이 수상의 자리에 오르게 됨으로써, 국민들에게 여왕의 정치적 역할을 확실히 느낄 수 있게 해 주었다.
여왕은 치세 후반기인 1980년대 보수당인 대처 수상의 정책에 대해서도 불만을 표시하였다. 영연방의 유지와 평화로운 공존을 희망해오던 여왕은 대처 정부가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영연방을 거칠게 대하는 외교 정책을 하자 크게 못마땅해 했으며, 대처 수상이 1982년 포클랜드 전쟁을 시작하기 전 형식적이지만 여왕의 승인을 받으려 하자, 전쟁에 대한 반대의 의사를 완곡하게 표현하기도 하였다. 무엇보다도 여왕은 대처 정부가 사회적 약자들에 비정한 사회정책을 강행하는 데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대처 정부가 고금리의 통화주의 정책을 시행하면서 전통적 제조업이 몰락하고, 노동탄압적 정책을 강행하면서 실업자의 수가 크게 늘었다. 국영 기업의 무리한 민영화와 자치단체의 주택 판매로 주택과 금융 부문의 일시적인 경기 호황이 있은 후, 1988년부터 경기 침체에 빠지면서 주택 대출금을 갚을 수 없게 된 수많은 가구들은 집을 압류당하고 거리로 내몰리게 되었다.
대처 정부의 조세정책도 퇴행적으로 이루어졌는데, 최상위 소득에 대한 세율은 80% 이상에서 60%로, 그리고 다시 40%로 대폭 낮추면서, 다수 국민의 세금 부담은 늘렸다. 무엇보다도 보통국민의 소비물품 부과세를 2.5%에서 17.5%로 7배나 대폭 늘렸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영국은 빈민층 실업자인 ‘하위계급’이 크게 늘어났다.
이러한 심각한 상황이 계속되자 여왕은 대처의 정책 거의 전부가 2차 세계대전 이후 항상 국가에 이바지해 왔던 ‘정치적 합의(완전고용과 복지국가 건설)’의 전통에 큰 위협이 되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여왕은 대처에 대한 자신의 부정적 생각이 언론을 통해 국민에게 알려지기를 원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조부 조지 5세와 아버지 조지 6세의 태도를 본받아 국민의 여론을 존중하면서 국민을 위하는 정치적 발언을 하였으며, 고조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의 전통을 따라 가정생활의 모범을 보이는 군주상을 추구하였다.
20세기 초부터 영국의 윈저 왕가는 역대 군주가 나름의 역할을 해오면서 입헌군주정의 존재 이유를 국민들이 공감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조지 5세는 의회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면서 복지국가를 추구하려는 자유당에 협력하는 태도를 보였고, 후임자 조지 6세는 국가 위기 시에 국민과 위험을 함께함으로써 국민들에게 의지가 되고 심리적 안정감을 주는 역할을 하였다. 엘리자베스 2세도 대영제국의 위상을 회복하고, 모범적인 중산가정의 주부상을 추구하면서, 국민의 여론을 대변하고 어려운 국민들을 위하는 태도를 보여줌으로써 국민들에게 군주와 왕실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하지만 윈저 왕가의 선왕들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갖은 노력을 통해 세운 왕실의 위상과 군주제의 존재 가치는 자녀들에 의해 추락되면서 영국인들의 회의와 냉소의 대상이 되어 오고 있다. 다이애너 왕세자비 사후에 찰스를 폐위하고 아들인 윌리엄을 후계자로 삼자는 제안이 많은 지지를 받았고, 심지어는 영국 왕실을 폐지하자는 말까지 떠돌기 시작하였다.
찰스 왕세자의 불륜과 그 비극적 결말로 수세기 동안 지속되어 온 영국의 입헌군주정은 존폐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별문제 없이 찰스 왕세자나 윌리엄 왕세손이 왕위를 계승하면 비록 윈저 왕가는 끝나더라도 입헌군주정은 마운트배튼윈저 왕가로 지속될 것이다. 이처럼 왕가의 명칭이 마운트배튼윈저로 바뀔 것이 예상되는 것은 일찍이 1960년 2월 8일부터 엘리자베스 여왕이 남편 에든버러 공작의 성 마운트배튼을 왕자나 왕녀 및 방계 후손들에게 붙이도록 명을 내렸기 때문이다.
왕실이 처한 위기 상황과 입헌군주정의 존속에 대해 여왕이 어떤 노력을 할지는 아직 미지수이지만 여왕의 재위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여왕 사후 영국의 입헌군주정의 앞날을 점치기가 어렵다. 다만, 영국인들 다수의 정서 속에 전통과 옛 영광스러운 시절에 대한 향수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고, 왕실이 그 시절을 상징하기 때문에 여왕 사후에도 당분간은 입헌군주정을 존속시키는 방향으로 국민 여론이 형성될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윈저 왕가의 첫 군주였던 조지 5세(1865~1936, 재위 1910~1936년)는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상원의 권한을 축소하려는 자유당의 시도에 부딪혔다. 당시 애스퀴스 내각은 로이드 조지가 만든 ‘인민예산’을 상원이 부결시키자 상원의 권한을 대폭적으로 축소하는 의회법안을 하원에서 통과시켰다. 이 법안은 예산안에 대한 상원의 거부권을 완전히 폐지하고, 다른 일반 법안의 경우는 2년에 한해서 거부권을 허용하되, 하원이 그 법안을 3회기를 연속해서 통과시키면 법률로 확정하는 대신 하원의 임기를 7년에서 5년으로 단축하는 것이었다. 상원은 당연히 이 법안을 거부했다. 이제 유일한 해결책은 1832년의 ‘제1차 선거법 개정’ 시의 선례에 따라 왕이 법안 통과에 필요한 만큼의 상원의원을 새로 만들어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해 4월에 사망한 에드워드 7세를 승계해 새 국왕에 오른 조지 5세는 귀족의 양산을 주저했다. 그러자 수상 애스퀴스는 명확하고 단호한 국민의 의사를 보여주기 위해 의회를 해산하고 1월에 이어 12월에 또 다시 총선거를 실시했다. 결과는 1월의 선거와 거의 비슷하게 자유당의 승리로 나왔다. 조지 5세는 2차에 걸친 선거를 통해 확인된 국민의 의사를 존중하여 애스퀴스 내각이 요구하는 대로 귀족의 양산을 약속하였다. 결국 귀족 상원의원들의 양보로 법안이 상원을 통과함으로써 영국은 민주주의로 한발 더 다가서게 되었다.
또 조지 5세는 국민의 정서를 고려하여 왕가의 이름을 바꾸기도 했다. 현 윈저 왕가의 원래 이름은 작센-코부르크-고타(Saxe-Coburg & Gota, 1901~1917년) 왕가였다. 이 이름은 빅토리아 여왕의 독일 태생 부군인 앨버트 공의 성을 따른 것으로, 그들 사이에 난 맏아들이 에드워드 7세이다. 아버지의 성을 따라 에드워드 7세가 작센-코부르크-고타 왕가의 첫 군주가 되었고, 조지 5세는 두 번째 군주가 되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중 반(反)독일의 국민 정서가 커져가자 조지 5세는 1917년 7월 17일 왕명을 내려 영국 국적을 가진 빅토리아 여왕의 모든 남자 후손들에게 '윈저(Windsor)' 성을 쓰도록 선포했다. 윈저는 영국 왕실과 긴 연고를 가진 윈저 타운과 윈저 성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었다.
조지 6세(1895~1952, 재위 1936 ~1952년) 부처는 2차 세계대전 중 피난을 가지 않고 공습이 계속되던 런던에서 국민들과 위험을 함께했다. 폭격 속에서도 그들을 버리지 않고 왕이 주변에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에 국민들은 위로와 안도감을 느끼고 자랑스러워했다. 매우 위험한 상황에도 버킹엄 궁을 떠나지 않고 있던 왕과 왕비는 1940년 9월 공습 때는 죽음의 위기를 맞기도 했다. 이렇듯 위험한 상황에서도 국왕 부처는 인근 동부 런던 지역을 여러 차례 찾아가 상처와 굶주림으로 고통받는 국민들을 위로하곤 하였다.
이러한 태도로 왕실은 국민들로부터 사랑을 받게 되었고, 입헌군주정의 존속은 물론 엘리자베스 2세의 왕위 계승도 무난하게 이루어지게 되었다. 평화로운 대외정책을 희구하고 어려움에 처한 국민을 감싸려 하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태도는 이처럼 어려운 시절을 국민과 함께하려 했던 부모의 영향이 크게 작용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터졌을 때 엘리자베스(1926~, 재위 1952~현재)는 동생 마거릿 공주와 함께 피신하여 스코틀랜드의 밸모럴 성과 윈저 궁 및 부속 별장 등으로 피신하여 시간을 보내다가 대전이 절정에 달한 1945년 초, 부친 조지 6세를 찾아가 자신도 조국을 위해 봉사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부친의 허락을 받고 또래 젊은이들과 함께 봉사를 했던 그녀의 모습에서 일찍이 미래의 국민을 위하는 군주의 자질이 엿보인다. 재위 중 여왕은 군주의 역할을 무난히 해오다가 자녀들 문제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왕실의 위상이 추락하는 와중에도 엘리자베스 여왕이 영국의 상징적 통치자로 존재하는 것은 그녀의 지혜로운 처신 때문이다. 여왕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여성 중의 한 명이지만 늘 검소함을 잃지 않고 있다. 그녀는 1980년대 왕실 유지비용이 많이 든다는 여론이 커지자 재산 소득(부동산 소득이 연 수백억 달러)에 대한 세금을 내겠다고 선언을 했고, 왕실의 혜택을 받는 왕가 가족의 범위를 극소수로 제한함으로써 비판여론을 잠재우려 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즉위 초기만큼 정치에 관여하지는 않지만, 지금까지도 중심을 잃지 않는 범위에서 신중하게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곤 한다. 여왕은 지난 60여 년의 재위 기간 동안 13명의 수상과 함께 영국의 국정을 돌봐오면서 입헌군주정 내에서 나름의 역할을 하려고 애써왔다. 그동안 여왕은 이든과 대처 수상의 정책에 대한 불만을 표시했던 것을 제외하고는 대다수 수상들과 조화로운 관계를 형성하면서 의회와의 관계도 원만하게 유지하고 있다.
사회적으로 여왕 부처는 영국 각지의 기관, 기업체, 지역사회 등을 방문하며 버킹엄 궁에서 많은 내외국인 방문객들을 맞고 있다. 여왕은 적십자사, 영국문화원, 영국학술원 등을 포함한 다양한 종류의 단체들의 후원자이다. 여왕의 부군 에든버러 공도 과학, 기숙, 스포츠, 자연보존, 청소년복지 등과 관련된 많은 단체들의 총재 겸 후원자이다. 특히 에든버러 공은 세계자연보호기금의 명예총재로 활동해 왔다. 이러한 여왕 부처의 정치적·사회적 역할은 다수 영국 국민이 왕실을 긍정하는 부분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윈저성
런던 교외에 있는 명소 중에서 여행자에게 가장 인기 있는 곳이 윈저성이다. 런던에서 약 35km 떨어져 있으며 템스 강이 굽이굽이 흐르는 언덕 위에 세워져 있다. 강 반대편에는 녹음으로 둘러싸인 이튼 칼리지가 보인다. 시간이 되면 영국의 명문학교인 이튼 칼리지도 들러 볼 만하다.
템스 강변 언덕 위 가파른 경사지에 세워진 윈저성은 드넓은 공원이 펼쳐지는 아주 넓은 성이다. 1087년 정복왕 윌리엄이 성채에 기거하기 위해 목조 요새를 세우면서 시작되었고 그 후 여러 세기에 걸쳐 증개축되었다. 헨리 2세는 둥근 탑(Round Tower)을 지탱하기 위해 석조를 사용했고, 조지 4세는 통치 기간 중에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 둥근 탑을 높였다. 1992년 대화재로 스테이트 아파트먼트가 불탔으나 1997년에 복구되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성 내부는 세 구역(lower, middle, upper)으로 나뉜다.
로어 워드(Lower Ward)
윈저 성의 성문인 헨리 8세 문 입구로 들어서면 세인트 조지 성당(Saint George's Chapel)이 나온다. 헨리 8세에 축조한 고딕 양식의 교회인데, 이곳에는 헨리 8세를 비롯한 왕족의 묘소가 있다. 천장 밑에는 가터(Garter) 작위를 받아 기사가 된 사람들의 문장이 찍힌 기사석이 있다.
미들 워드(Middle Ward)
성의 상징인 둥근 탑이 있다. 평상시에는 영국 국기가 게양되지만 여왕이 머물러 있는 동안에는 왕실기로 바뀐다.
어퍼 워드(Upper Ward)
성 안에서 가장 볼거리가 많은 곳이 스테이트 아파트먼트(State Apartment)이다. 여왕이 거주하는 방들인데 공식 행사가 있을 때만 사용된다. 루벤스나 뒤러의 그림, 가구 장식품, 갑옷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에서 가장 인기 있는 퀸 메리 인형관(Queen Mary's Dolls House)은 한 건축가가 여왕을 위해 실제 크기의 12분의 1로 축소 제작한 미니어처 모형의 저택으로 가구, 식기, 전등이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다. 여왕이 체류하는 동안은 관람을 제한하므로 미리 확인해 두자.
근위병 교대식
성 정문 앞에서는 매일 오전 11시(겨울에는 격일로 진행)에 근위병 교대식이 진행된다. 버킹엄 궁전의 교대식보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가까이에서 편하게 구경할 수 있다.
이튼 칼리지(Eton College)
1440년 헨리 6세가 설립한 퍼블릭 스쿨(영국의 상류층이나 부유층 자제들이 다니는 중등교육 사립학교). 수업료와 기숙사비가 비싸 왕실을 비롯한 상류 계층의 엘리트 코스로 인식되고 있다. 옥스퍼드 대학이나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입학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는 명문학교이다. 출신 대학교보다는 퍼블릭 스쿨 출신이라는 것이 사회에 진출했을 때 더욱 도움이 된다고 한다. 이는 과거 엄격했던 영국의 계급 제도가 지금까지도 남아 있으며 영국 사회를 지탱하는 한 요소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튼 칼리지는 퍼블릭 스쿨 가운데 명문 중의 명문으로 꼽힌다. 이튼 칼리지는 남자만 다니는 기숙사 학교로 운영된다. 왕실의 자제로 기숙사에서 다른 학생들과 함께 생활한다. 상류 계급은 원래 가정교사를 두고 교육했으나 학교라는 공공장소를 만들어 교육하는 시스템으로 탄생시킨 것이다.
정규 수업으로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집중적으로 배우며 19세기부터는 수학, 과학, 기술 교육을 추가해 교육한다. 정규 수업 외에 인격 도야를 위해 크리켓, 풋볼, 보트 등의 스포츠 경기를 한다. 이튼 칼리지 졸업생 중에는 영국 수상을 지낸 인물이 18명이나 된다. 또한 세계적인 문호 헉슬리, 조지 오웰 등도 이곳에서 수학했다. 학교 안에는 15세기에 세워진 성당과 성당을 둘러싼 회랑이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이튼 생활을 소개하는 박물관이 재미있다. 이튼 칼리지의 역사와 학교 생활의 단면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