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교(48·전 대전지방국세청 감사계장, 현 대구지방국세청 영덕세무서)씨는 내부 고발자다. 내부 고발자는 기업이나 정부기관 내에 근무하는 내부자로서 조직의 불법이나 부정거래에 관한 정보를 신고하는 사람을 뜻하는 것으로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는 구절을 읽어보면 단박에 알 수 있다.
그는 영덕세무서로 옮기기 전 대전지방국세청 감사계장으로 재직할 당시 2002년 4월부터 국세청이 일부 기업 등에게 세금을 불법적으로 감면해주는 등의 내부비리가 있음을 적발하고, 5개월 동안 내부에서 이를 바로 잡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하지만 오히려 자신에게 표적수사가 이뤄짐을 알고 2002년 12월16일 대전시청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를 고발한다.
이후, 국세청 관계자들은 그를 정신병자 취급하다시피 했고, 다른 언론이나 시민단체에서도 묵과했고 결국 영덕세무서로 좌천성 인사를 당하는 등의 어려움을 겪었다. 그가 오마이뉴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후회는 없냐?’라는 물음에 그의 답변 내용을 보더라도 당시 상황이 얼마나 절실했는지 알 수 있다.
“전혀 없다. 똑같은 상황이 또 생겨도 지금처럼 대응할 것이다. 몇 번을 생각했다. 내가 가는 길이 옳은지, 조직을 위해 참으라고 하는데 진정 조직을 위하는 게 뭔지.. 지리한 싸움이 되더라도 죽는 날까지 싸우겠다. 결국은 나 혼자다. 혼자 싸우다 쓰러져 죽는 한이 있어도 싸운다. 이대로 죽기는 억울하다. 한 사람이라도 도와주는 사람이 있으면... 지금 내 손을 잡아줄 사람이 하나라도 있으면 바랄게 없겠는데….”(2003년1월19일 오마이뉴스 인터뷰에서)
아무도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 상황에서 외딴섬에 혼자 떨어진 그의 손을 기자회견 한 달 뒤 대전 경실련이 잡아줘 같이 공동기자회견을 열었고, 오마이뉴스의 계속되는 보도, 검찰의 수사의지로 현재 검찰수사가 진행되고 있으며 한씨가 고발한 몇몇 기업에게 120억 여원의 세금을 추징하게 했다.
그는 얼마 전 연이어 대전 참여자치주민연대와 대전 경실련에서 주는 참여자치시민상과 사회정의상을 수상했다. 이는 시민단체에서 진실을 끝까지 놓지 않고, 싸우며 지킨 한화교씨를 높게 평가했기 때문이다. 그를 지난 23일 본사에서 만났다.
■옥천의 자긍심을 지키겠다
경쾌하게 들어온 그는 여전히 의연했다. “힘 있다고 이기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오랫동안 많은 고민을 하고 보니 불교의 ‘인과응보’라는 말이 곱씹어지더군요. 제가 알고 있는 진실, 이것을 끝까지 놓지 않는다면 결국 이기게 돼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감사계장은 바로 승진을 하기 위한 자리였고, 달콤한 유혹도 많았지만, 윗사람을 택하기보다는 내가 이끌고 있는 아랫사람의 눈을 생각했습니다.”
그가 한 일은 일신의 영달을 위해서, 유명세를 치루기 위해서 한 내부 고발이 아니었다. 내부적으로 해결하려 5개월 동안 철저하게 투쟁했지만, 결국 회유와 협박을 번갈아가면서 심지어는 자신을 정신병자로까지 내몰며 묵살하려고 한 거대 권력에 대한 저항으로 그는 자신을 내던졌다.
그 사이, 부안 성당의 문규현 신부, 언론노조 신학림 위원장, 언론개혁시민연대 성유보 공동대표 등이 많은 격려를 해주었고, 역시 내부고발자로 물러난 감사원 감사관 출신 이문옥(민주노동당 부패추방운동본부 본부장)씨는 영동세무서에 있을 당시 하룻밤을 같이 새며 많은 도움을 줬다고 얘기했다.
“어쩌면, 최근 화제가 된 실미도로 끌려간 옥천 사람들과 저의 입장이 같았습니다. 실미도 대원들이 권력 집단에 의해 빨갱이로 매도당했던 것처럼 저도 마찬가지로 정신나간사람, 배신자로 낙인 찍혀 수없이 맘고생을 했습니다.”
■내고향 옥천을 사랑합니다.
그는 현재 군서초 47회 동창회장을 맡고 있다. 97년도 동창들의 힘을 결집해 성대하게 47회 동창회를 개최하며 군서초 총동창회가 만들어지게 된 계기를 만든 것도 그의 힘이 크다.
“체계적으로 한번 멋지게 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동창들의 관심을 최대한 끌어보려고 했죠. 2000년도 졸업 30주년 기념동창회를 크게 했고, 5년마다 한번씩 성대하게 꾸며보려구요.” 군서초를 졸업하고, 옥천중(22회)을 졸업할 때까지 줄곧 반장이었던 그는 대전고를 졸업했다. 그리고 몇차례 서울대 시험을 봤지만 낙방하고 국세청에 시험을 봐 바로 들어갔다. 그 때가 1976년도다.
“제가 국민학교 6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어머니 혼자 6남2녀를 키우느라 고생 많이 하셨죠. 신발을 신고 다니지 못했고, 거의 맨발로 다닐 정도로 가난했습니다. 고등학교는 옥천 장용호 장학회의 도움을 받아 다녔고, 빨리 취업을 해야겠기에 국세청으로 들어갔습니다. 맨 처음 장항세무서에 근무하다가, 홍성, 예산, 영동 세무서를 거치고 대전지방국세청 조사계장, 감사계장을 지냈죠”
중앙의원의 유현근 사무장, 대전 KBS의 이종국 기자, 동양화재 최정복 대전지점장, 국민은행 김준태 진천 지점장 등이 옛 친구들이란다.
“고향이 많이 힘이 됐어요. 내 사랑하는 동창들, 고향사람들이 맘속으로 나를 후원해 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앞으로도 고향에 누가 되지 않도록 열심히 살겠습니다.” 그는 오는 3월4일자로 고향 가까운 곳으로 인사발령이 날 것이라며 다시 시작하는 기분으로 일하고 싶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