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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은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윤석준
2019년 10월 27일 주일오전
렉시오나리 : 욜2:23-32; 눅18:9-14
본문 : 갈3:10-17
제목 : “갈라디아서의 배경 : 율법주의란 무엇인가?”
주일오전찬송
경배찬송 – 시146편 1,3,5
십계명 낭독 후 찬송 – 시15편 1,2,3
사죄선언 후 감사찬송 – 시147편 3,4
렉시오나리 후의 찬송 - 시117편(고정)
아멘찬송 - 시108편 1,2
성찬식 찬송 - 시65편 3,5
폐회찬송 - 시91편 1,5
갈라디아서의 배경 : 율법주의란 무엇인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창세기 설교를 마치고 오늘부터 갈라디아서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구약 설교를 마치고 단번에 신약 본문으로 들어오게 될 때, 우리는 불과 한 주일 만에 수천 년을 점프하는 경험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롤러코스터 같은 탈것이라면 우리를 매우 어지럽게 하겠지만, 모든 성경은 전 시대에 걸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면에서 그런 걱정을 하시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비록 수천 년의 시간을 타임워프 하더라도 어지러움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비록 문화가 다르고, 시대가 다르고, 사는 환경이 다르고, 등장인물들과 배경이 되는 장소가 모두 다르더라도, 성경은 균일한 밀도로 주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일관된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들께서는 바로 엊그제 요셉의 죽음을 들으셨더라도, 오늘 갈라디아 교회의 율법주의자들을 만나실 때 크게 어려워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성령님께서 모든 시대에 동일한 가르침으로 우리들을 안도케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창세기와 갈라디아서 만큼이나 갈라디아 교회와 오늘날 우리들과의 간격 역시 있지만 우리가 동일한 확신을 가져도 될 것을 보장해 줍니다.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나 우리나 ‘같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며, 그들이나 우리나 ‘같은 믿음’을 갖고 있고, 또 죄 때문에 싸워야 하는 ‘같은 어려움’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서신에서 충분한 위로와 충분한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은 갈라디아서 설교의 첫 번째 시간으로 먼저 갈라디아 교회에 대해 잠깐 살펴보고, 갈라디아서 전체의 주제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갈라디아
갈라디아서는 보통 다른 바울의 서신들과 마찬가지로 교회의 이름을 딴 서신으로 ‘갈라디아 교회에게’ 보낸 편지였습니다. 하지만 조금 유의할 것은 1장 2절 말씀에서 보시는 대로 이 편지는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보낸 편지였습니다. 즉 갈라디아서는 한 교회에 보낸 편지가 아니라 갈라디아 지역에 있는 여러 교회들이 돌려 보도록 보내진 ‘회람 서신’이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쉽게 이해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갈라디아’라는 이름 자체가 ‘유은교회’ 할 때의 ‘유은’처럼 특정 교회의 이름이 아니라 ‘부산’과 같은 큰 지역을 포괄하는 지명이기 때문입니다. 즉 ‘갈라디아 교회에게’라는 의미는 ‘유은교회에게’라기보다는 ‘부산에 있는 교회들에게’라는 말과 더 비슷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는 ‘부산’처럼, 넓은 지역으로 ‘갈라디아’라는 이름을 가진 지역에 보내진 회람서신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때 이 ‘갈라디아’가 어디에 있는 지역인가는 아주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아마 성도들께서는 우리가 오늘부터 ‘갈라디아서’를 들으니까 ‘갈라디아 교회’가 어디에 있는지 집에 가서 지도에서 찾아보고 싶으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가 보내진 지역으로 생각되는 곳은 통상 두 지역입니다. 말하자면 ‘정확히 어디인지’는 잘 알 수가 없습니다.
둘을 쉽게 설명해보자면, 첫째는 통상 갈라디아를 ‘갈릭’이라고 불리는 인종의 이름으로 생각하는 견해인데, 이렇게 볼 때 갈라디아는 오늘날 터키 지역인 소아시아 중북부 지방이 됩니다. 그리고 이곳이 갈라디아라면 이들에게 복음이 전해진 시기는 바울의 2차 선교여행 때이고(행16:6), 3차 여행 때 그곳을 다니면서 살핀 것이 되게 됩니다(행18:23). 이렇게 보는 견해를 ‘북부 갈라디아설’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둘째는 ‘갈라디아’를 ‘로마의 행정구역의 이름’으로 보는 견해인데, 이렇게 보면 갈라디아 지역은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와 같은 곳들을 포함하는 지역이 됩니다. 이 지역들은 바울이 1차 선교 여행 때 복음을 전했으며(행13-14장), 2차 선교 여행 때 다시 그 교회들을 방문한 것으로 사도행전에 나와 있습니다(행16:1-5). 이렇게 보는 견해를 ‘남부 갈라디아설’이라고 부릅니다.
둘 중 어느 쪽이 옳은지는 신학자들 간에 의견이 분분하지만, 사도행전에 기술된 내용을 따라 생각하자면 남부 갈라디아설이 좀 더 옳지 않나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에서 쉽게 읽을 수 있는 ‘갈라디아 지역’이란 말이 바로 로마의 행정구역 상의 이름을 뜻하는 것이고, 바울도 통상 서신서들을 보낼 때 이런 행정구역 명을 사용했기 때문에 이쪽이 좀 더 신빙성이 있어 보입니다.
그리고 만약 이것이 옳다면, 성도들께서 갈라디아 지역이 어디인지를 알기가 좀 더 쉬워집니다. 여러분들이 흔히 갖고 있는 성경 지도에서 ‘갈라디아 지역’이라고 표시되어 있는 것이 바로 이쪽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둘 중 어느 쪽이 분명하게 갈라디아 교회들이 있었던 곳인지를 확정할 수 없어도 그 사실 자체가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실제로 중요한 것은 이 서신을 받는 교회가 어느 지역에 살고 있었느냐가 아니라, 이 서신의 내용들이기 때문이고, 우리가 말씀을 통해서 전해 받아야 하는 주제들은 ‘이때 교회들이 당면했던 위기들과, 그 속에서 사도께서 무엇을 말씀하셔서 교회들은 어떤 가르침을 얻게 되었는가’이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로 갈라디아 교회에 대해 정리해 놓고 이제 본격적으로 갈라디아서의 주제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갈라디아서의 주제
바울 서신들 중에는 한 단어로 키워드를 정할 수 있는 책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에베소서의 키워드는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의 키워드는 ‘기쁨’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런 점에서 볼 때 갈라디아서는 보통 ‘자유’라는 키워드로 불립니다.
그리고 이때 ‘자유’라는 말의 의미는 우리가 통상 생각하는 ‘내 맘대로 하겠다’의 자유는 아닙니다. 이때 자유란 다른 것이 아니라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인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루터 선생님이 갈라디아서와 매우 관련이 깊은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루터 선생님은 갈라디아서를 사역 초기에 두 번(1519, 1523), 그리고 조금 시간이 지나서 또 두 번(1531, 1535) 강해했는데, 어떤 소개말에 보면 “갈라디아서가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대헌장이라면 루터의 갈라디아서 강해는 그리스도인의 독립 선언문이라고 불릴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루터 선생님은 탁상담화에서 갈라디아서를 “나와 약혼 관계에 있는 나의 서신이요, 나의 캐티 폰 보라(Katie von Bora, Katie는 카타리나의 애칭)”라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폰 보라는 여러분들도 아시는 대로 루터의 부인 이름입니다. 그만큼 루터가 갈라디아서를 사랑했다는 뜻입니다.
루터가 갈라디아서를 사랑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방금 말씀드린 대로, 이 책이 ‘자유’라는 말로 특징지어질 수 있는 성경이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는 ‘칭의’의 핵심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이 때 칭의란 ‘율법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의롭게 되지 않는다는 것’, 오히려 우리는 ‘복음을 통하여 의롭게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갈라디아서는 그야말로 율법과 복음의 대조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참된 자유가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있는 책이고, 그런 점에서 볼 때 루터 선생님이 싸울 수밖에 없었던 로마교회의 ‘공로주의’, 즉 ‘행함을 통해 의롭게 된다’는 가르침에 정면으로 대항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되는 책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루터 선생님은 갈라디아서를 무척 사랑했습니다.
율법주의와의 싸움
이렇게 갈라디아서의 핵심은 ‘율법을 통하여 의롭다함을 받으려는 자들’과의 싸움을 그 중심에 두고 있습니다. 간단하게 몇 부분만 말씀을 보도록 합시다.
1)
1장 6절을 보시면 바울 사도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사도의 지적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다른 복음’을 좇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7절과 8절을 보십시오.
7절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8절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오늘날 우리가 보기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라는 말이 매우 섬뜩해 보이지만, 그만큼 사도께서는 이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께서 말씀하고 있는 “다른 복음”이란 것이 다름 아닌 율법을 좇는 것인데, 복음을 떠나 율법을 좇는 것을 “이상히 여긴다”(6절)고 하면서, 이에 대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전체의 주제가 복음을 떠나 율법을 좇은 자들에 대한 경고임을 1장부터 아주 잘 알 수가 있습니다.
2)
그리고 3장과 4장은 6장까지밖에 되지 않는 짧은 갈라디아서 안에서 ‘율법 대(versus) 자유’라고 하는 핵심 주제가 본격적으로 충돌이 일어나는 부분인데, 여기에서 사도께서는 이렇게 말함으로 논증을 시작합니다. 3장의 제일 첫 부분을 보십시오. 1절부터 3절까지를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11절과 12절도 읽어보겠습니다. 역시 3장에서입니다.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3장의 내용은 매우 선명합니다. “어리석도다!”라고 1절이 시작되는데 무엇이 어리석다는 것입니까?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냐 듣고 믿음으로냐?” 율법과 믿음을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시작하여 육체로 마치겠느냐?” 참된 믿음인 복음의 신앙과 율법주의에 의존하는 것을 극렬하게 배치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앞서 들으신 대로 갈라디아서는 ‘자유’에 대한 성경입니다. 그런데 이 때 자유가 무엇이냐? ‘복음이 율법에 대하여 주는 자유’입니다. 그런데 3장의 내용을 보니까 어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 갈라디아 교회 안에 율법이 복음을 대치하려는 경향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께서는 준엄하게 책망합니다! “너희를 구원한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였다!”, “너희는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갈라디아서의 주제가 무엇입니까? ‘행위가 아니라 복음으로’가 바로 이 갈라디아서의 핵심 주제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주의는 무엇인가? : 1.오해
이렇게 볼 때 갈라디아서의 배경을 이해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워 보이지 않습니다. 갈라디아서 전체는 이 ‘율법과 복음’ 혹은 ‘율법주의와 복음’이라는 구도 안에서 읽으면 될 것 같습니다. 어쩌면 별로 길지 않은 성경 안에서 이 정도의 구도로 선명하면, 이 갈라디아서 전체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쉬울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 중요한 문제가 하나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과연 우리가 율법주의라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나?’라는 사실입니다. 말하자면, 제가 여러분들에게 “여러분! 갈라디아서는 율법주의에 대하여 반대하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따르라고,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따르라고 가르치는 그런 성경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렸을 때,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떠오른 ‘율법주의’라는 상이, 과연 사도께서 말씀하시는 그 내용과 일치하는가......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에 문제가 있습니다. 만약 내가 생각하는 ‘율법주의’라는 것이 사도께서 말씀하고 계신 바로 그 율법주의와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의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갈라디아서를 전혀 오해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사도께서 갈라디아 교회에 경고하고 있는 바를 우리가 전혀 곡해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율법주의를 내가 바르게 이해하고 있는가’라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렇게 제가 문제 제기를 하면 “거기에 무슨 오해할 만한 일이 있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율법’이나 ‘율법주의’라는 것이 오해할 일이 별로 없다고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께서 말씀하고 있는 바를 자신은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 그렇게 여기실 수가 있게 됩니다.
하지만 여러분! 과연 율법주의에 대해 오해가 없을지, 내가 율법주의를 잘 이해하고 있을지 스스로에게 한 번 물어보도록 합시다. 제가 쉬운 질문을 해 보겠습니다. 한 번 생각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1)
우선 이렇게 한 번 물어봅시다.
“나는 십계명의 내용을 잘 지키는 것이, 복음이라고 생각하는가 율법주의라고 생각하는가?”
어떻습니까? 십계명을 지키는 것은 율법주의입니까?
제가 보기에 한국교회 성도들이 이 점에 있어 정말 취약합니다. 무엇이 율법인지, 무엇이 복음인지, 아마 제대로 구분할 수 있는 성도들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십계명은 율법입니까, 복음입니까?”
아마도 제 생각으로는 “십계명은 율법입니까 복음입니까?”라고 물으면, 대다수의 성도들이 “율법입니다”라고 대답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제 이렇게 대답하자마자 문제가 생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십계명을 ‘지켜야 할 것’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지요. 지금 갈라디아서의 주제와 연관시켜 말해 보자면, “그럼 사도께서는 율법을 좇지 말고 복음을 좇으라고 말하면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무시무시한 경고까지도 일삼고 있는데, 그러면 우리는 왜 오늘날 십계명을 지키는 것입니까?” 이렇게 물으면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겠습니까? 십계명이 율법이라면서요? 그러면 율법을 준수하는 것은 갈라디아서의 직접적인 주제, 바로 그것이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십계명을 지키지 말아야 하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2)
그러면 이제 이 십계명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겠습니다.
넷째 계명을 생각해 봅시다. 넷째 계명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입니다. 여기에서 요일을 따질 생각은 없으니 안식일을 그냥 주일이라고 생각하고 한 번 질문해 보도록 합시다. “나는 주일을 지킵니까?” 그렇다면, 주일을 지키는 이유는 넷째 계명, 즉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라는 계명 때문에 지키는 것입니까?
그러면 문제가 곤란해지지 않습니까? 나는 그러면 율법을 준수하는 사람이 되는 거로군요. 그러면 나는 갈라디아서에서 바울 사도께서 저주하신 바로 그 저주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까? 나는 율법을 준수하니까 율법주의자가 되는 것인가요? 넷째 계명을 지키려고 애를 쓰니까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처럼, 바울 사도의 걱정의 대상, “저주가 있을지어다!”라고 한 그 대상이 되는 것입니까?
여기에 우리는 무엇이라고 대답을 해야 합니까?
3)
이번에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다시 접근해 봅시다. 전혀 반대 방향에서의 접근입니다.
우리는 사실 조금 전에 십계명이나 넷째 계명에서도 그렇지만, 이미 쭉 신앙생활을 해 오면서, 또 우리 교회에서 가르치는 가르침을 배워 오면서, 신약 성경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약에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도 모두 지켜야 할 것으로 알고 믿고 있습니다. 조금 전에 우리는 “십계명을 지키고 있습니까” 혹은 “넷째 계명을 따라 안식일을 기억하고 거룩히 지키라”라는 질문을 받았지만, 사실은 평소에 늘 이런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조금 더 나아가서 생각해 보면, 신약 성경 안에도 사실은 본질적으로는 “무엇 무엇을 하라”는 가르침이 모두 구약의 율법의 중심과 같은 것들을 가르치고 있고,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지키고 준수하려고 노력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거꾸로 이렇게 물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는 율법이 아니라 복음이라고 했는데,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말란 말인가?” 도리어 이렇게 물을 수가 있는 것이지요. “율법을 지키지 말라니? 율법이 하나님의 말씀인데, 그걸 지키지 말란 말이야?” 이렇게 물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4)
여러분의 이에 대한 대답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십계명을 지키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무엇이라고 대답합니까? 여러분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계명을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만약 “저는 지키고 있습니다. 지키려고 애를 씁니다”라고 대답한다면, 그러면 갈라디아서가 말하고 있는 주제는 무엇인가요? “율법이 아니라 복음”이라고 말했는데, 그러면 그 때 ‘없어져야 하는 율법’은 무엇인가요? 우리는 분명히 지금도 율법을 지키면서 살고 있고, 또 신약 성경 역시도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율법의 여러 항목들을 지키라고 강조하고 있는데, 왜 갈라디아서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 “저주를 받을 일”이라고 하고,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까? 도대체 율법은 지켜야 하는 것입니까, 지키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까?
율법주의 : 2. 정체, 갈라디아서가 말하는 율법주의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이 문제를 듣고 문제의 본질을 정확하게 이해했습니까? 제가 제기한 문제에서 무엇에 문제가 있는 것인지를 알아채셨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께서는 분명히 율법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이 말이 맞는 말일까요? 과연 사도께서는 정말 ‘율법을’ 공격하고 있는 것일까요? 율법은 정말 신약 시대에 와서는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이 되었습니까? 우리가 성경의 다른 부분들을 배우면서 전혀 그렇지 않다고 배워오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사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사도의 요구는 무엇일까요?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무엇을 잘못하고 있었으며, 사도의 권고는 무엇에 관한 것이었을까요?
우리는 기본적으로 사도 바울께서도 그러했고, 다른 모든 성경의 저자도 그러했듯이, 어떤 이들도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율법’을 금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율법주의’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이런 상상을 합니다. 예를 들어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바울 사도께서 하신 이야기를 들으면 이런 상상을 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율법에 매여서 복음을 떠나버렸어. 예를 들자면 십계명의 여러 조항들을 열심히 지키느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지 못한 거야.”
하지만 여러분! 과연 그럴까요? 사도께서는 십계명의 여러 조항들을 열심히 지키는 것을 과연 금지한 것일까요? 오히려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사도라면, 어떤 이들이 복음을 전해 들은 후에 그 복음을 따라 살기 위하여 율법에 나와 있는 여러 행위들, 예를 들어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혹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런 계명들을 제대로 지키기 위하여 노력을 하고 있다면, 그 사람들은 도리어 칭찬을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바울 사도께서는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를 구원하신 것만 생각해야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이런 것들을 지키려고 하는 것은 율법주의에 해당돼, 그런 것들을 지키려는 것은 모두 저주 받을 일들이야”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가 피상적으로 ‘율법 아닌 복음’이라고 할 때 우리가 이해하는 그 ‘율법’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이 때 ‘율법’이라는 것을 축소시켜서 ‘할례를 받는 일’이나, ‘안식일이나 절기를 지키는 일’로만 율법의 내용을 국한시키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은 어떤 경우에도 이런 종류의 일들만 ‘율법’이라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율법이라 할 때에는 제가 조금 전에 말씀드린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같은 것들을 다 포함합니다. 제가 예에서 십계명을 말씀드린 이유는 십계명이야 말로 율법의 대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들이 다 율법이지 할례나 안식일이나 절기를 지키는 것만이 율법이 아닌 것입니다. “믿음이냐 행위냐” 이런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 사도께서 갈라디아 교회에 큰 위기의식을 가지고 경고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율법을 너무 너무 잘 지켰다” 이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율법’과 ‘복음’을 이상하게 대조시켜서, 행위로 무언가를 하면 ‘율법주의’라고 하고, 마음 속으로 무언가 예수님만 생각하면 ‘복음’이라고 하는 이상한 기준을 갖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갈라디아서가 경고하는 율법은 전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약성경은 모두가 다 이런 율법들을 잘 지키고 준수하기를 기대하고 권합니다. 심지어 현대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에 나오는 저런 규정들은 모두 준수하기를 기대하고, 또 사도와 같은 목회자가 있다면 성도가 저런 율법의 규정들을 잘 준수하고 살기 위해 삶을 잘 정돈한다면 칭찬할 것입니다.
따라서
따라서 여러분! 오히려 사도께서 경고하고 있는 것은 ‘내면적인 문제’입니다. 정신의 문제, 판단의 문제입니다. ‘행위가 있었느냐 없었느냐’가 아닌 것입니다. 겉모습으로서의 행위는 언제나 격려되고 권장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나 야고보서는 행위가 동반되지 않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고 합니다. 행위가 있었다는 것이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율법주의의 중요한 문제는 ‘행위가 있느냐’가 아닙니다. 이것을 잘 기억하십시오. 율법주의의 중요한 문제, 갈라디아 교회에 문제가 된 사실은 ‘율법을 지킨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외형적으로 지키는 것이 그들에게 생명을 가져다 줄 것으로 믿었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문제인지를 잘 아셨습니까?
갈라디아 교회의 문제는 어제까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믿던 사람이, 오늘부터 갑자기 십계명의 내용을 지키기 시작했다......이런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십계명의 내용이 상치되는 것이 아닌데 그것이 왜 문제가 되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잘 믿는 사람이 십계명의 내용을 잘 지키면 그것은 칭찬받아야 할 일이 아닙니까?
오히려 갈라디아 교회의 문제는, 어제까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자신들의 구원의 근거임을, 그래서 계명을 지키면서도 그 계명의 생명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임을 잘 알고 믿던 사람들이, 오늘 갑자기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없더라도 내가 계명을 외형으로 지키기만 한다면 거기에 생명이 있다’고 말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의 핵심이 그것입니다. 율법주의의 핵심은 ‘행위로 무언가를 준수하는 것’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바른 신앙을 가진 신자가 행위로 율법을 준수한다면 그것은 추천할 일입니다. 율법주의의 진정한 핵심은 ‘율법의 껍데기는 아무런 생명력을 갖고 있지 않고, 율법이란 언제나 복음이라는 내용을 전달해주기 위한 수단일 뿐인데, 어느 날 갑자기 성도들이 껍데기를 하다가 보니까 속 내용이 없더라도 껍데기만 지키는 것을 통해서도 충분히 생명이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하게 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회에 바로 그런 일이 발생했습니다. 할례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을 보여주는 표식으로, 죄를 끊어야 생명이 있다는 것, 자신을 포기해야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 그래서 우리 존재의 근원이 우리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표식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본질이 되는 것이 온 신약 시대에는 할례는 “할례나 무할례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어떤 곳에서는 유대인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하고, 헬라인 디도에게는 할례를 행치 않았습니다. 본질이 있을 때 외형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갈라디아 교회 안에 거짓 것을 가르치는 유대 교사들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할례 그 자체에 효력이 있다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겉모습 그 자체에 생명이 있다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미혹되었습니다. 본질이신 하나님과 그분의 생명의 말씀이 아니라, 겉모습과 껍데기의 우상이 마치 효력이 있는 것처럼 여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성례전적으로 주신 것에, 하나님의 본질이 빠지게 되면, 그래서 도구가 도구만으로 남게 되면, 그것은 반드시 우상숭배가 됩니다!
1) 주일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생명력이 넘치는 예배가 빠진 ‘날의 준수’가 되면 그것은 “저주 받을 우상숭배”가 됩니다. 2) 십일조나 기타 헌금을 하는 것이 형제/자매에 대한 나의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의 헌신과, 또 하나님께 자신의 것을 드리는 것을 통해서 청지기 의식, 곧 나의 것이 나의 것이 아닙니다......라는 마음이 없이 외형만 남아 돈만 바치게 된다면, 그 자체가 “저주 받을 우상숭배”가 됩니다. 3)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그 순서 순서 마다에 스며 있는 하나님께 대한 참된 경외 속에 드려지는 예배가 되지 않고, “나는 주일이었고, 예배를 드렸어”라고 말하기 위한 치레로서의 허례허식이 되면, 그 예배 행위는 그 자체로 “저주 받을 우상숭배”가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사도께서는 이렇게 강렬하게 갈라디아 교회에 경고했을까요?
여러분들께서 이제 또 다시 배우시겠지만, 바울 사도의 서신들 중 시작 부분에 이렇게 강력한 아나테마! 저주 문구가 나오는 성경은 갈라디아서 외에는 없습니다. 왜 이렇게 사도께서는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을까요?
그만큼 율법주의의 함정이 무서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주의는 우리 속에 도사리고 있는 ‘나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어’라는 의식을 충족시켜 줍니다. 실제로는 거기 전혀 생명도, 경외도, 하나님도 없는 것인데, 외형적으로 무언가를 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살아 있다”라는 대리만족을 줍니다. 그러므로 이 생명력 없는 율법주의야말로, 참으로 위험한 것이며, 참으로 경계해야 할 것이어서, 사도께서는 준엄한 말로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갈라디아서를 배우게 됩니다. 이 전체를 훑어 나가면서, 이 전체의 주제가 되는 이 ‘율법주의’를 절대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생활에 이것을 반드시 척도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어떠한 피조물도 껍데기로서는 그 하나님을 담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없이 껍데기만 있다면 그 자체로 우상숭배입니다. 이 생명력을 잃지 않는 우리들이 됩시다. 율법주의에 강하게 경고하는 사도의 경고를 마음속에 잘 새겨서, 우리의 예배가, 우리의 하나님 경외가, 우리의 율법준수가, 하나님 사랑 없이, 이웃 사랑 없이 행해지는 것이 되지 않도록 항상 유의합시다.
주께서 복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