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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혈귀 야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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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펌 절대 금지)
"날파리 같은 녀석들-."
그는 하늘을 향해 담배 연기를 토해냈다.
"참으로 성가신 녀석들이야- 난 그냥, 즐기는 것뿐인데- 요즘 인간들은 너무 즐길 줄을 모른다니까."
"사람들 죽이는 게 즐기는 거야? 그게 무슨 오락 게임이야?"
"다를 게 뭐가 있어. 표적을 찾아서, 조준해서, 죽이고, 찾아서, 조준해서, 죽이고-. 즐거움의 과정이란 그런 거잖아!"
"그래서 열심히 환기통을 들락거린 거야? 쥐새끼들처럼."
그는 코웃음을 흘렸다.
"다미 빌라 짓도 네 짓이지?"
"다미? 거긴 너무 좁은 곳이었어. 뭐- 여기도 이젠 지겨워졌어. 너 같은 날파리들 때문에! 하늘모가 뭐야? 웃기고들 있네- 그런 시답잖은 짓거리나 하다니! 그래서 난, 좀더 큰 곳으로 갈 거야. 옆집에서 일가족 전부가 죽어나가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 그런 곳! 얼마든지 있을 거야."
그는 다시 한번 하늘을 향해 담배 연기를 토해냈다. 그 유유자적한 모습에 화가 났다.
"누나가 어디 있는 지나 빨리 말해!"
"누나보다는- 네 모가지부터 걱정하는 게 순서 아닌가."
정혁은 가소롭다는 듯 그렇게 말한 후 담배꽁초를 뱉었다.
그리고 그는-
순식간에 내 등뒤에서 내 목을 조르고 있었다.
"오늘따라 날씨한번 멋지지 않니? 이런 날일수록 난 컨디션이 너무 좋단 말야!"
그는 내 목을 천천히 옥죄며 다른 한 손으로는 달걀을 으깨듯 내 손목을 으스러뜨렸다. 손에 쥐고 있던 스턴건이 바닥에 떨어졌다.
"가만- 또 한 명은 어디 갔지? 그 계집애 말야!"
그는 내 목을 조른 채 사방을 주시했다. 과연 희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둠에 분해된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년도 흡혈귀지? 난 다 알아. 그년이 이 아파트를 서성인 것부터- 흡혈귀 사냥꾼이라도 되는 양 설치고 다닌 것까지- 다 알고 있다고! 차라리 영화를 찍으라고 그래- 미친년."
그의 목소리는 격앙되어 있었다. 사라진 희선이 그의 신경을 몹시 자극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내 목을 움켜쥔 채 뒷걸음질 쳐서 물탱크가 있는 쪽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는 삼면을 열심히 주시했다. 나는 목이 잡혀 있어 꼼짝달싹할 수 없었다. 그가 조금이라도 힘을 더 가하는 순간 나의 숨통은 끊어질 것이다. 그러나 공포감 같은 것은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으나 그저- 꿈같은 아득함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이대로 나는 깨지 않는 꿈을 영영 꾸게 되는 것이리라!
마침내 그가 나를 내팽개쳤다. 나 따위는 신경 쓸 가치도 없다는 듯 그는 모든 촉각을 곤두세우고 사방을 경계했다. 바닥에 쓰러진 나는 정혁을 올려다보았고 그의 머리 위 높은 곳, 물탱크 위에 서 있는 희미한 물체를 발견할 수 있었다. 희선이리라! 그녀는 그렇게 녀석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가 있었던 것이다.
무언가 눈치를 챈 정혁이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희선이 수직 낙하했다. 그녀는 허공에서 두 손을 휘둘렀고 그녀의 손에 쥐어진 칼날이 반짝이는 것을 나는 보았다.
"그아악!"
정혁이 이상한 소리를 내며 얼굴을 감싸쥐었다. 그는 옥상 난간 쪽으로 도망을 쳤다. 그의 얼굴이 피에 번들거렸다. 악마 같은 몰골이었다. 그는 성난 야수처럼 울부짖으며 두 손을 난폭하게 휘둘렀다. 희선은 이십 센티미터 남짓한 칼을 수평으로 쥐고 적을 노려보았다.
"넌 뭐 하는 계집이냐! 너도 나와 같은 종족이면서 이럴 수 있는 거냐?"
정혁은 악을 쓰듯이 말했다.
"넌 나의 종족이 아냐!"
희선이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넌 그냥, 재미로 사람을 죽이는- 더러운 살인마에 불과해!"
"갸아악-!"
정혁은 성난 맹수처럼 돌진해왔다.
희선도 칼날을 세우고 달려갔다. 그녀의 긴 머리카락과 파란 코트 자락이 바람에 휘날렸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움직임을 육안으로 읽어낼 수 없었다.
시간을 초월한 듯한 순간이 지나가고 시간이 정지된 듯한 순간이 찾아왔다.
그들은 옥상 난간 부근에 비석처럼 우뚝 서 있었다.
희선의 칼날이 정혁의 가슴 부위를 깊숙이 꿰뚫은 상태였다.
상황종료다!
나는 속으로 그렇게 외치며 희선에게로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가서야 나는 상황이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칼날이 정혁의 가슴을 꿰뚫은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의 오른 손이 희선의 복부를 파고든 것은 내가 미처 몰랐던 사실이었다.
이윽고 그들은 비틀거리며 떨어졌다.
정혁은 휘청거리며 난간에 기대어 섰다.
희선은 배를 움켜잡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손에 쥐고 있는 칼이 목발처럼 그녀를 지지해 주었다.
"희선아- 마…… 많이 다친 거야?"
나는 희선의 어깨를 잡고 그녀의 상처를 살피려 했다. 그러나 그녀는 내가 접근하자 나를 밀쳤다.
"다가오지마- 내 피에 감염될 수 있어."
희선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마스크는 피로 물들어 있었다.
"어차피 감염된 상태인데 겁날 게 뭐가 있어."
나는 발악하듯 소리쳤다. 심장이 터질 듯이 울렸다.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라 온 몸의 피가 들끓는 것 같았다. 바닥에 버려진 벽돌 조각 하나가 손에 쥐어지는 순간 나는 몸을 틀어 정혁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이미 녹다운 직전의 권투선수처럼 난간에 등을 기대고 서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피가 역류하는 듯한 거북한 소리가 났다.
"대체 네 놈이 원하는 게 뭐야? 사람들을 죄다 죽이고 물어뜯고 해서 너에게 떨어지는 이익이 뭐냔 말이야! 왜 하필 이 아파트에 나타나 선량한 사람들의 피를 빨아먹느냔 말야, 이 악마야!"
나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그는 대답 대신 한 바가지의 피를 토해내며 골골거렸다.
"누나는- 누나는 어디 있어! 빨리 말해! 머리통을 박살내버리기 전에!"
나는 벽돌을 그의 눈앞에 휘두르며 고함을 질렀다.
"몰라 나도-."
그가 힘없이 대답했다.
"모른다는 게 말이 돼? 네가 잡아가는 걸 내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내가 잡아갔지만, 다시- 빼앗겼어."
"무슨 소리야 그게? 빼앗기다니?"
나는 벽돌을 내리며 물었다.
"다른 흡혈귀에게 빼앗겨 버렸어. 순식간에-."
"다른 흡혈귀라니? 흡혈귀가 또 있단 말야?"
"당연하지- 난 그 흡혈귀에게 물린 거니까-."
나는 잠시 귓전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만 들으며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정혁이 진짜 흡혈귀가 아니었던 것이다!
"누가 널 문 거지? 대체 진짜 흡혈귀는 누구란 말야?"
내가 소리쳤다.
정혁은 가슴의 상처를 손으로 꾹꾹 누르며 신음하듯이 대답했다.
"정…… 미…… 경……."
숨이 멎을 듯한 충격이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나는 내 손에 쥐어진 벽돌로 머리를 한 대 맞은 사람처럼 머릿속이 멍했다.
정미경.
혜주 누나가 실종되던 날 나에게 도움을 요청한 후 홀연히 사라진 미경 누나.
내가 '하늘모'를 만들게 된 이유이기도 했던 미경 누나.
그 청순가련한 여인이-
진짜 흡혈귀!
나는 더듬거리며 물었다.
"거, 거짓말이지? 지금 한 말…… 거짓말이지?"
정혁은 이제 더 이상 서 있을 기운조차 없는 듯 다리가 꺾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까 그 계집애가 했던 말 못 들었어?"
그가 말했다.
나는 그의 말을 곱씹으며 희선이 했던 말을 기억해내려 안간힘을 다했다.
넌 나의 종족이 아냐!
희선은 분명 그렇게 말했다.
"진짜 흡혈귀에게는- 물린 자국 같은 게 없어."
정혁은 쥐어짜듯이 말을 마친 후 바닥에 쓰러져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정혁의 왼쪽 목뒤에 빨간 점처럼 두 개의 물린 상처가 있었다.
나는 손에 든 벽돌을 떨어뜨렸다.
아무리 생각해내려 해도 미경 누나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희선이 있는 쪽으로 걸어가다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졌다. 엉금엉금 기어가는 내 육신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오니 누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곤히 자고 있었다.
희선을 내 침대에 눕혔다. 그녀는 이미 의식을 반쯤 잃은 상태였다. 나는 희선의 마스크를 벗겼다. 백짓장처럼 창백한 그녀의 얼굴을 물수건으로 닦아주었다.
"야- 정신 좀 차려봐-."
나는 계속 희선의 어깨를 흔들며 그렇게 말했다.
이대로 그녀가 의식을 잃고 죽는 다는 것은 너무- 영화 같은 일이다. 그런 일은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계속 그녀의 어깨를 흔들었다.
희선은 눈을 가늘게 떴다 감았다를 반복하며 무언가 말을 하려 했다. 하지만 목소리는 쉽게 나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녀가 다시 살아나는 쪽이- 영화 같은 일이다. 그런 일은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런 생각을 부정하며 계속 그녀의 어깨를 흔들었다.
"이봐- 빨리 일어나 보라니까! 응? 설마 진짜로 죽으려는 건 아니겠지? 이제 일주일만 있으면 방학인데, 이렇게 죽기는 억울하잖아. 그러니 어서 정신 차리고 일어나라고!"
"……워."
그녀가 입술을 움직이며 뭐라고 말했지만 알아들을 수 없었다.
"뭐? 다시 말해봐!"
나는 그녀의 입술에 귀를 가져갔다.
"……괴로워."
"괴로워?"
"……너무 아파서- 괴로워……."
희선은 지독한 악몽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미간을 찌푸리며 힘들어했다.
"잠깐만- 기다려봐! 좋은 수가 있다니까!"
나는 다시 희선의 어깨를 거칠게 흔들었다. 그녀가 아주 약간 눈을 떴다.
"자- 내 피를 마셔- 그럼 괴로움이 사라질 거야."
나는 오른팔을 들어 그녀의 눈앞에 가져갔다.
"여기- 팔뚝을 깨물어. 근육이 별로 없어서 말랑말랑하니 깨물기 좋을 거야."
그녀는 실눈을 뜨고 나를 쳐다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가 웃는 모습을 보기는 처음이다.
"농담 아냐! 어서 마셔. 너처럼 이 프로 부족한 흡혈귀는 피를 마셔야 하는 거라고."
"……먹고 싶어."
희선이 입술을 움직이며 또 뭐라고 말했다.
"뭐라고? 먹고 싶다고? 그래- 어서 마셔. 먹고 싶은 만큼."
"……소이밀크- 먹고 싶어."
소이밀크?
"……그거 먹으니까 괴롭지 않았어……."
그런 거라면 내일 학교 매점에서 백 개라도 사줄 수 있어.
일어나기만 한다면!
그런 말들을 하고 싶었지만 정혁이 되살아나 내 목을 조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목이 막혀와, 더 이상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제기랄- 이런 감상적인 느낌은, 정말 싫은데!
밤은 새벽을 향해 가고 있었고 밖에서는 눈물 같은 가랑비가 베란다 창을 줄기차게 두드렸다.
그래서-
전설은 전설이다.
모든 것이 흡혈귀의 소행이었노라고 경찰에 얘기했지만 모든 것이 미치광이 살인마의 소행이었노라고 경찰은 발표했다. 아파트에서 발견된 시체는 총 열 구였고 정혁의 시체는 그중 포함되지 않았다. 칼을 맞고도 그는 죽지 않았던 것이다. 다만 반신불구의 정신병자가 되어 모든 살인죄를 떠안아야 했다. '다미 빌라'의 살인죄까지. 그 모든 살인의 책임이 그에게 있는 것은 사실- 사실이다. 그의 엽기적 살인담은 연일 뉴스에 오르내렸고 인터넷 검색어 일 위를 차지하며 팬 사이트까지 만들어졌다. 저명한 심리학자들은 그의 범행을 두고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사회구조적인 병리현상의 문제라고 꼬집어 말하며, '사회 구성원들이 범죄자가 악의 씨앗을 키우기 전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보여줬더라면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고 대단히 아쉬워했다. 혹자는 이 세계를 덮고 있는 음양오행의 기운이 나날이 어둠을 잉태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참사가 끊이질 않는 것이라며 그 살인마는 단지 그 어둠의 희생자일 따름이라고 주장했다. 어쨌든- 내가 겪은 흡혈귀 이야기의 진실은 그렇게 현실 속에서 현실에 맞게 가공되고 각색되어져 풍문과도 같은 전설이 되었다. 전설은 그렇게 아이러니한 것이다. 이웃이 이웃을 죽인 현실이 사실은 흡혈귀의 전설이기를 바라면서 정말로 흡혈귀가 사람들을 죽인 전설을 현실로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더운물에 섞인 찬물처럼- 더운물로 여기고 싶을 때는 대충 더운물인데, 라고 말하고 찬물로 여기고 싶을 때는 대충 찬물인데, 라고 말하면 되는 것이다. 현실 속에 스며든 전설은 그렇게 미지근한 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말하기 좋아하는 누군가가 튀어 나와 사실은 그게 흡혈귀의 짓이었대, 그러면 '그게 정말이야?'하며 현실을 잊을 수 있을 테고, 세상에 흡혈귀가 어디 있어, 그러면 '그런 건 영화 얘기지'하며 현실에 안주할 수 있을 테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도 전설의 실체와 직면하기를 원치 않는다. 전설이 모호할수록 현실은 교묘해질 수 있으니.
그래서 전설은 전설인 것이다. 절대로- 현실 그 자체가 될 수 없다.
누나는 더 이상 밤마다 맨발로 외출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다. 전설이야 어쨌건- 잘 된 일이었다. 무수히 많았던 가짜흡혈귀들도 표면적으로는 정상을 되찾은 듯해 보였다. 그들 속에 내재된 바이러스가 언제 어떤 식으로 악을 분출시킬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사실 그런 것은- 누구나 다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목의 상처도 차츰 희미해져갔고 나중에는 아주 작은 점처럼 되어버렸다. 간혹 엘리베이터에서 만나게 되는 혜주 누나, 우식 형, 정규 등의 한때 흡혈귀였던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지 않았냐는 듯 나를 반겼지만- 분명 무슨 일인가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어색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하늘모는 잊혀진 전설이 되어 버렸다. 그런 게 정말로 있었던가, 하는 것처럼. 어쩌면- 이토록 삭막해진 세상에서 아파트에 사는 사람끼리 그런 친목 모임을 가졌다는 게 너무도 전설 같은 소리가 아니겠는가. 실제로, 사람들은 서로에게 무척 쌀쌀맞고 사소한 것에도 시비가 잘 붙었다. 모르겠다. 그것이 흡혈귀의 소행이 남긴 여파 때문인지. 처음부터 그랬던 것인지. 박상민과 떨거지들은 방학식이 있기 며칠 전에 나와 한번 부딪혔다. 그러나 별다른 사건 없이 싱겁게 끝이 나버렸다. 싸움이 시작되고 펀치 교환이 있을 즈음 순찰 중이던 경찰이 우리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후 박상민은 두 번 다시 나와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떨거지들을 계속 거느리고 다닐 만큼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았던 모양이다. 기말 고사 점수가 발표되었고 예상했던 대로 예상했던 점수가 나와 나는 예상 밖으로 놀랄 필요도 당혹해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 것은 이제 나에게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으니. 이웃 어딘 가에서는 여전히 끔찍한 살인이 자행되고 세상 어딘 가에서는 지하철과 건물이 테러 당하고 지구 어딘 가에서는 연일 전쟁이 터지고 엄청난 사람들이 죽어간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미스터리 사건들도 비일비재하다. 그 모든 사건들에 숨겨진 진실이야 어떻든-
내 인생의 잊을 수 없었던 목요일, 그 다음 날 이야기를 더 해야겠다.
눈을 떠보니 마치 그래야 이야기가 되는 것처럼 희선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누웠던 침대에는 그녀가 흘려놓은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 베란다를 열어보니 울음을 그친 아이처럼 세상은 개어 있었다. 베란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희선이, 파란 코트에 커다란 마스크를 하고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침엽 정글 쪽으로 들어가 모습을 감추었다. 사라졌다.
어쩌면 그것은-
전설이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본 것 모두가 다.
나는 학교를 가지 않고 반나절 내내 경찰 조사를 받아야 했다. 그리고 남은 반나절은 희선의 하수도 집을 찾아 다녔다. 그러나 그 하수도로 통하는 최초의 맨홀 뚜껑이 있는 곳을 나는 찾을 수 없었다. 미로같이 이어진 그 골목을 아예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비슷한 골목을 찾아 코너를 돌고 돌았지만 그 막다른 골목은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정말로 미로에 갇힌 꼴이 되어 해가 저물 때까지 방황했다. 저녁 무렵, 나는 역으로 출발해보기로 했다. 하늘 아파트 앞, 침엽 정글로 들어가 맨홀 뚜껑을 열었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하수도 안은 지상보다 더 알 수 없는 미로였다. 그 시커먼 공간은 인간의 마음 속 같아서 도무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어둠 저쪽에서 희미한 발자국 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그러나 달려가 보면 아무도 없었다. 마침내 나는 돌아가는 길 마저 잃어버렸다. 아무 맨홀 뚜껑이나 열고 지상으로 올라와 보니 그곳은 번화가 골목이었다. 화려한 네온 간판이 번쩍이는 술집의 뒷골목이었다. 술에 취한 노인 한 명이 맨홀 뚜껑을 열고 올라오는 내 모습을 기이하게 쳐다보았다. 무슨 마음이었는지 나는 그 노인 앞에 놓여진 소주병을 들어올렸다. 참이슬이었다. 참이슬이든 아침이슬이든 나는 그것을 벌컥벌컥 다 마셔버렸다. 그리고- 밤거리를 오래도록 걸었다. 머릿속이 밤이슬을 맞은 풀처럼 눅눅해지는 기분이었다. 몽롱한 눈동자로 흥청거리는 번화가 골목을 바라보노라니 화려한 불빛들에 취한 그 거리가 천당인지 지옥인지를 가늠할 수 없게 했다. 여인의 웃음소리, 남자의 고함소리, 누군가의 노랫소리, 음악소리, 싸우는 소리, 통곡하는 소리. 그 모든 밤의 모습들이 눈앞에서 터지는 카메라의 플래시처럼 번쩍번쩍 나타났다 사라졌다. 불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어느 지점에서 파란 코트의 마스크 여인도 번쩍번쩍 나타났다 사라졌다. 번화가의 끝, 판자촌으로 가는 길목에서 나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속이 뒤틀리고 뇌도 뒤틀리는 듯했다. 참이슬은 거짓이슬이 되어 내 몸을 비틀고 있는 것이다. 쓰레기가 버려진 더러운 길바닥 저편에 코트 자락을 나풀거리는 다리가 보였다. 고개를 들어 정면을 보았다. 어둠을 향해 걸어가는 그녀가 보였다. 잠시 그녀가 나를 돌아보는 듯했다. 착각이었는지도 모른다. 밤은 유난히 어두웠고 판자촌 어딘 가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침대에 누워 빙글빙글 돌아가는 천장을 한참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그제야 침대 밑에 놓여진 희선의 가방을 발견했다. 가방 옆에는 정혁의 가슴을 관통한 피 묻은 칼도 있었다. 칼을 들어 형광등 불빛에 비춰보았다. 이것은 심판자의 칼인가, 전설의 칼인가. 칼을 내려놓고 가방을 뒤져보았다. 스턴건과 성수병, 보우건이 여러 개 나왔다. 제일 밑에서, 언젠가 본 적이 있는, 가족 사진을 발견했다. 어린 그녀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사진의 아래쪽에 날짜가 적혀 있었다.
1898년 4월 21일
언제부턴가 그녀의 시간은 멈추어버렸다. 멈추어버린 시간 속에서 그녀는 백년도 넘게 살아왔다. 그녀는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죽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다. 그 영원한 시간은 그녀에게 있어 축복이 아니라 저주였으리라. 그 저주의 시작에 대해서 내가 아는 바는 없다. 정말로- 우주인의 짓이었을까. 시작이야 어떻게 되었든 그녀는 멈추어버린 시간 속에서 그녀만의 길을 걷고 있다. 그 길은 이 밤과 통하고 있고, 이 밤 어딘 가에 그녀가 있다. 그렇게 그녀의 전설은 밤을 지배하고 있다.
그렇게 내 소설은 끝이 났다.
'멈추어 버린 시간'
중편 분량의 소설이었다. 나는 그것을 인터넷에 올리기 전, 제목을 수정했다.
'흡혈귀 야녀(夜女)'로.
토요일 저녁, 한 통의 메일을 받았다.
미경 누나에게서 온 것이었다.
짧은 글이었고 그 글 속에는 나에 대한 사죄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의 피를 마셔야 했다고. 그래서 나쁜 사람들만 골라서 피를 마셨다고. 정혁은 자신에게 물리기 전부터 무척 사악하고 폭력적인 인간이었다고. 그를 막아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고. 그래서 떠나는 것이라고. '하늘모'를 알게 되어 무척 기뻤다고. 나를 알게 되어 무척 기뻤다고. '하늘모' 사람들과 이곳에서 조용히 오랫동안 살고 싶었노라고. 하지만- 이제 다시 혼자가 되어 살아가야 한다고.
메일을 삭제했다. 눈을 감고 미경 누나의 뒤를 밟던 그 밤의 기억을 떠올렸다. 단정한 정장치마 밑으로 드러난 그녀의 가는 다리가 무척 추워 보였었다. 윤기 나는 단발머리 아래로 앙상해 보이는 어깨가 몹시 힘겨워 보였었다. 그녀는 얼마만큼의 억겁의 시간을 버텨온 것일까!
베란다로 나가 아파트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일주일 전 이곳에서 푸른 코트의 마스크 여인과 처음 조우했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없다. 그녀의 결석에 대해, 그녀의 실종에 대해, 누구하나 관심을 가지는 이가 없다.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어쩌면- 그녀는 나에게만 존재했던 것일까! 이건 정말- 너무 전설 같은 얘기다.
조용히 현관을 나섰다. 현관을 나서기 전 누나의 방문을 열어보았다. 누나는 자고 있었다. 이제 목의 상처는 아주 희미해져 있었다.
옥상은 추웠다. 내가 입고 있는 코트 자락이 춤을 추듯 펄럭였다. 한여름임에도 감각을 잃은 겨울 바람이 옥상 위를 부유하고 있었다. 목덜미를 파고드는 바람에 몸을 맡기며 옥상 난간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어째서 지난 일주일간의 일들이 나에게 일어나야만 했는지를 되새겼다. 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이제부터 내가 뭘 해야할 지가 불현듯 떠올랐다. 이제부터 내가 할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었다. 결국 나는- 미경 누나를 찾아가야만 한다.
희선의 가방을 열어 칼을 꺼내 코트 안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준비해온 녹음 테이프에 녹음을 시작했다. 어쩌면, 인간으로서의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이민혁의 목소리를.
누군가가 어느 날 무언가에 대해 사명감을 각성하게 된다면 그것은 이성적 사고에 의해서가 아니라 직관적 육감에 의해서 일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의 행동양식에 대해 타인을 이해시킬 만한 논리적인 설명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째서 미경 누나가 흡혈귀가 되었는지. 어째서 희선이 공격형 흡혈귀를 심판하고 다니는지. 어째서 나도 모르게 내 몸이 흡혈귀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있는지. 그래서 지금 이렇게 스스로의 운명을 시험하려 하는 것인지.
각자에게 주어진 운명은 각자만의 우주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만의 멈추어버린 시간 속에서 자신만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옥상 아래로 펼쳐진 밤의 도시. 그 속에는 공격형 흡혈 바이러스를 꼭꼭 숨겨둔 채 터뜨릴 기회만 포착하며 살아가는 무수한 악마들이 존재한다.
나는- 착한 쪽인가, 나쁜 쪽인가!
저 깊고 무거운 어둠의 진실을 누가 알 수 있으랴!
나는 단지, 내가- 악마가 아니기를 바랄 따름이다. 그것은 지나친 욕심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녹음을 마치고 주머니 속에서 칼을 꺼내든다.
새로운 전설이 시작되려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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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 분량의 호러소설을 또 하나 완결짓네요~! 이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전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목없는 여 살인마'와 좀 닮아 있는 지도 모르겠네요~ 원래는 그냥 긴 단편 정도로 쓰려 했는데 쓰다보니 원고지 360매 분량의 중편이 되어 버렸습니다. 더 길게 쓸 수도 있었지만 지난번 '신들린 인형'때와 같이 좀 여운이 긴 결말로 마무리지었습니다. 여러가지 궁금증은 모두 보시는 분들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호러 미니소설 공모전이 진행중인데 아직 이틀째라 그런지 참여율이 높지 않네요! 부디 많은 분들이 그동안 마음 속에 담아두었던 이야기를 마음껏 펼쳐주시길 기대합니다~
단편이 될지, 장편이 될지 알 수 없지만 다음 공포소설을 올리게 될 그날까지 모두 행복하세요~
첫댓글 드뎌 올라왔네욤^0^/ 항상 무언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결론~ 조아욧! 조은글 ㄳㄳ^^
후후후후후... 수고하셨습니다~ 너무 재미있게 읽었어요..^^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공포나 혹은 호러소설이라고 하지만 전 매번 제이슨님의 글을 읽으면 추리소설을 읽는 느낌이라 더욱 좋은거 같아요..^^다음 번 작품도 기대할께요~더위 조심하세요^^
으흐흐 드디어 완결.. 근데 뭔가 아쉽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잘 읽었습니다 ^-^
우와~ 드디어...넘 잼있었어요...ㅋ
항상 재미있는 작품을 올려주는 제이슨친구님의 무한한 상상력에 경의와 감사를 표합니다^^.. 다음 작품이 올라올 때까지 어떻게 기다려야 할지 ㅠㅠ.. 하루빨리 다음 작품 올라오길 기대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재미있게 잘 읽었어요 ~~~^^*
잼나게 잘 읽었습니다...지금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시네요.. 내 이웃에 누가 살고있는지 모르고 사는게 현실이니깐요^^ 항상 제이슨님의 글을 읽으면 제이슨님의 연세가 궁금해져요.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제생각에) 아주 젊은 사람은 아닐거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아주 많은걸 겪은 노련한 분일꺼란 생각이들어요
역시 너무너무 잼있었어요 ㅠ.ㅜ 어쩜..이리도 글을 잘 쓰시는지.., 쵝오~!!!!!!!!!!
ㅎㅎ 마지막편으로 드디어 결말이 나네요. 정말 풍부한 내용의 글인 것 같습니다 최고입니다!
감사..잘읽었습니당..
답글 주신 님들 모두 감사합니다. 언제나 행복과 행운이 가득하시길~!
흐아.. 간만에 놀러 와서 의외의 수확을 얻었습니다+_+ 잘읽었습니다!!
플로라 님 답글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너처럼 이프로 부족한 흡혈귀]...이 부분 원츄...ㅋㅋㅋ
이야 언제나 제이슨 친구님 글에만 리플이 가득하네요.. 오늘 흡혈귀야녀 1편부터 다보는데 혼났습니다. 항상 재밌는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와,,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이번에 이민혁군의 미경누나를 만나서 일어나게 되는 과정.. 2탄을 써보신느게.. 궁금하네요.. 정말 글을 잘 쓰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