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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콩 달 콩 반세기 그 36(춘심이와의 해후.)
“여보여보여보여보!”
일요일, 늦은 아침을 먹고 신문을 뒤적이는데 아내가 호들갑을 떨었다. 부엌에서 안방까지 바람개비처럼 날아 와 내 앞에 엎어지며
“저 아즘씨야, 저 아즘씨!”
하고, 숨을 헐떡였다. 평소 진중하든 아내가 방정맞기 이를 대 없었다. 그리고는 물이 질퍽한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내 손을 마구 잡아당겼다. 나는 가슴이 쿵했다.
“왜이래? 당신!……”
“전에 말 했잖아. 우리 집 부엌에 구정물 퍼 붙는 여자. 방금 또 퍼 부었단 말이야. 빨리 가요 빨리! 사라지기 전에…… 보고 싶다 했잖아요?”
아내는 따발총 모양 따따따 쏘면서 나를 다짜고짜 끌었다.
그랬다. 한 달 전부터 아내는 부어있었다. 뒷집에 새로 이사 온 여자가 우리 집 부엌에 구정물을 시도 때도 없이 퍼부어 댄다는 것이었다.(우리가 살던 셋집이 윗집보다 두 자 정도 낮았다.)
“몰라 그러겠지. 알면서 누가 그러겠어?”
나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겼다. 아내도 처음에는 그런 냥 했었단다. 그런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아내의 불평은 짜증으로 변했다. 자주 듣는 나도 은근히 화가 돋아 따끔하게 이야기 해주지, 했다.
“이야기 안 했겠어요?”
“그래서?……”
“나 참 귀가 막혀! 아, 그래요? 하고는 쓰다 달다는 말 한마디 없이 돌아 서더라고요. 도리어 입을 삐죽거리며. 사람은 멀쩡하게 생겨 갖고……”
하루는 집에 돌아오니 아내의 볼이 퉁퉁 부어 있었다. 또 구정물을 퍼부어 대더란다. 아내는 팔뚝을 걷어 부치며 단호하게 선언했다.
“보자보자 하니 누굴 보자기로 아나, 가만있으니 가마떼기로 아나.”
아내는 드디어 일전 불사의 나팔을 드높이 불었다.
“여보여보여보여보!”
이번에는 내가 도리어 손이 발이 되도록 아내에게 빌었다. 구룡포 아주머니들의 곤조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머니에 오징어 배따는 칼을 집어넣고 다니는 그녀들은, 오징어 먹물로 화장을 하고, 입은 거칠어 쌍욕을(알고 나면 인간미 넘치고 소탈하고 순수한데 말이다.)달고 살았다. 붙으면 아내가 작살나는 것은 손금 들여다보듯 뻔했다. 잘 잘못을 떠나서 말이다.
허지만 사실은 나대로 찜찜한 구석이 따로 있었다. 그 아주머니가 혹시 수민이 엄마라면 흰죽 먹다 사발 깨는 우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수민이가 한 달 전에 이사했다는 집이, 들은 바로는 아무래도 우리 윗집이 틀림없었다. 지도 교사와의 만남을 한사코 피하는 부모이기에, 눈으로 확인은 못했지만 심증은 갔다. 궁여지책으로 아내를 구슬렸다.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나도 한 번 보자!”
따지고 보면 내가 더 궁금했다. 그 당시 나는 ‘전국소년체육대회’(그때는 ‘전국스포츠소년대회’라 했다.) 시범종목인 수영을 지도했는데 수민이라는 뛰어난 선수를 발굴했다. 수영에 천부적인 소질이 있는 3학년 여학생이었다. 가히 진흙 속의 진주였다. 수민이를 지도해보니 체력이나 심폐기능이 뛰어난데다 근성마저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키도 또래 아이들보다 한 뼘이나 크고 팔다리도 길쭉했다. 미끈한 몸매를 가져 유연성을 요구하는 수영 선수로는 제격이었다. 탐이 났다. 꼭 선수로 키우고 싶었다. 허나 부모들은 자녀들이 운동선수가 되는 걸 꺼렸다. 우수선수 한 명을 확보하려면 부모를 잘 설득해야한다. 가정을 몇 번이나 찾아가다보니 선수들 집의 수저가 몇 벌인지 꿰게 된다. 그런데 수민이 부모는 도대체 만날 수가 없었다. 아니 만나 주지를 않았다. 다만 쪽지만 보내 허락하니 찌지든 볶든지 마음대로 하랍 신다. 좀 별난 부모였다.
당시 수영 훈련 상황을 떠올리면 지금도 기가 찬다. 죄를 지어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죄와 벌은 ‘엔트로피법칙’에 따라 언젠가 치른다니 내 죄가 하늘에 닿았다. 구룡포엔 수영장(요사이는 구룡포 초교에 수영장이 있다.)이란 본시 없었다. 바다는 파도가 심해 안 되고, 결국 방파제 안 내항 구석 진 곳에서 아이들을 물에 띄웠다. 내항은 배의 기름이 흘러나와 아이들이 훈련을 끝내고 나면 온 몸이 번질번질 기름투성이가 된다. 그러면 내가 하는 일은 매일 아이들의 몸을 억센 타올로 비누질하여 기름을 세척해 주는 일이 또 하나의 중요한 과제였다. 머슴애 계집애 할 것 없이 홀랑 벗겨 빡빡 문질러 주었다. 그러면 아이들은 간지러워 캐드득거리며 곱사춤을 추었다. 요사이 같았으면 신문 지상에 대서특필. 성 추행범으로 목이 댕강 안 했겠나! 그래도 당시에 항의하는 부모는 한 분도 없었다. 애들이 다 커서도 내 앞에서 생글거렸고, 나 또한 덤덤했다.
대회 며칠 전부터는 민물의 감각을 익히기 위해 십리나 떨어진 후동못에서 연습을 해야 했다. 긴 밧줄 곳곳에 우끼(그물을 띄우기 위해 스티로폼으로 만든 것.)를 묶어 물에 띄워 수영장 레인(어느 날, 수영을 아는 분이 보고는 특허 신청을 하라고 할 정도로 레인은 손색이 없었다.)처럼 줄을 치고 연습을 했다.
또 나에겐 선수 지도 보다 더 중요한 일이 세 가지 있었다.
하나는, 화톳불을 피워 주는 일이었다.
유월이라 하나 물속에 30분 정도 있으면 아이들은 몸이 얼어 달달 떤다. 그러면 아이들을 건져(?)내어 열을 보충해 주어야 했다.
둘은, 물뱀이 레인에 침범하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일이다.
못에는 물뱀이 더러 있었는데 아이들은 기겁을 하고 다시는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달달 떠는 게 아니라 덜덜 떨었다. 물뱀은 머리만 물 밖으로 까딱 들고 소리도 없이 접근하기 때문에 눈에 힘을 주어 살펴야 한다. 나는 수영복에 주머니를 만들어, 자갈을 차고 다니다, 물뱀이 나타나면 가까이 헤어가 자갈을 던져 쫓아냈다.
셋은, 먹이는 일이다.
수영은 체력의 소모가 대단하다. 잘 먹여야 기록이 오른다. 당시만 해도 학교에서 나오는 돈은 대회 출전비 정도와 쥐꼬리만 한 훈련비가 전부였다. 돈 없다는 학교만 쳐다보다가는 목에 기브스를 해야 한다. 교기를 지도하다보면 아이들이 안쓰러워 누구나 그렇게 된다. 아예 집에서 아이들 간식을 한보따리 준비해 들고 간다. 간혹 선수 부모들이 협찬하기도 했다. 얼굴을 한 번도 내밀지 않은 수민이 어머니는 그래도 돈을 보내거나 음식물을 자주 보내 주었다. 그러기에 수민이 어머니의 얼굴을 더욱 보고 싶은 것이다.
나는 부리나케 아내를 뒤따랐다. 숨을 죽이고 부엌 문틈으로 윗집을 올려다보았다. 수수깡처럼 비쩍 마른 서른을 갓 넘어 보이는 여인이 구정물 통을 든 채, 둔덕 위에 버티고 서 있었다. 낯이 익었다. 아니, 춘심이었다. 10년이면 산천이 변한다 했지만 내 어이 춘심이를 몰라보겠는가. 선명한 이목구비는 여전했다. 그녀는 우리 부엌 쪽을 불통하게 꼬나보고 있었다. 흡사 내가 거기 있으리라 알기라도 하는 듯. 나는 후다닥 안방으로 도망쳤다.
“왜 그래요? 당신. 내가 놀랐잖아요!”
눈이 동그래진 아내에게 나는 엄살을 떨었다.
“저 여자, 이 동네에서 이름 난 깡이라고. 건드릴 생각 아예 접어”
내가 벌벌 떠는 꼬락서니를 보고 아내는 아래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해 영일군 소체 평가전(포항, 영일군 전체에 수영장이 없어 송라 25m 짜리 사설 수영장에서 경기를 했다.)에서 내가 지도한 세 사람이 군 대표로 선발되어 도 대회에 나가게 되었다. 물론 수민이는 자유형에서 군대표로 선발 되었다. 대구 시민 운동장 수영장에서 도 평가전이 있었다. 그런데 부모들은 어이 그리도 무심한지 한 사람도 따라나서지 않았다. 출발지(구룡포)에서 얼굴만 내밀었고, 수민이 어머니 춘심이는 그마져 모른척했다. 못난 것, 얼굴이라도 한번 디밀지! 보고 싶었다.
하루 전에 도착하여 정식 수영장 적응 훈련을 하는데 애를 먹었다. 훈련을 마치고 군 대표 감독에게 선수들을 인계하고 수영장을 나섰다. 그해 여름은 산조차 제자리에서 녹을 정도로 무덥고 긴 여름이었다. 어쨌든 홀가분했다. 지금 부터는 대구에 있는 친구들을 불러내어 코가 돌아가도록 마시는 일만 남았다. 수영장을 나서며 물주의 면상을 머릿속에 그리는데 누군가 나를 불렀다. 그것도 대구 바닥에서 아리따운 목소리로
“고 선생님!”
하고, 불러 세웠다. 돌아 섰다. 거기 춘심이가 서 있었다. 말끔히 차려 입고 빼쪽이 웃고 있었다. 그리고 입을 달싹거려 한 마디 더 붙였다.
“오오 빠!”
오오 빠? 나는 감전이 되어 그 자리에 굳었다. 여동생이 있어 ‘오빠’란 소리를 자주 듣던 사람과, 여동생이 없어 듣기를 소망했던 사람에게 ‘오빠’란 뉘앙스는 하늘과 땅이다.
수민이 경기를 보러 왔다고 했다. 우리 둘은 그길로 택시를 잡어타고 동촌으로 내달렸다.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못했던 나는 적당한 식당을 골랐는데 춘심이는 동촌그릴로 가자고 했다. 레스토랑 식이었다. 우리는 테이블 중앙에 자줏빛 갓등이 달린 둘만의 룸에 자리했다. 큰 유리창 밖 바로 밑으로 강이 흐르고 있었다. 며칠 전 쏟아진 장맛비로 강물은 흙탕물이었다.
중국 음식에 술은 고량주를 청했다. 우리는 한참동안 서로 말이 없었다. 둘 다 창문 밖 소용돌이치는 강물만 내다보았다. 창문이 없었더라면, 강물이 흐르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어떻게 됐을까. 아마 질식했으리라. 서로의 몸을 안다는 것은 천년을 넘나들어도 고래 힘줄처럼 질기게 엮이지만, 진행형이 될 수 없음을 인지하는 순간 절벽 앞에 선 것처럼 암담해 어찌할 줄 모르는 것이다.
“오빠!”
역시 탈출구가 막막할 때 남자보다는 여자가 대담했다.
“와 그러고 있는교? 전차에 받힌 사람모양……”
우리는 술잔을 나누었다. 그래 오빠다. 나는 니 오빤기라. 그녀의 ‘오빠’라는 말은 헤라클레스의 칼날이었다. 그 한 마디에 ‘히드라’ 머리처럼 수없이 쳐들던 욕망들이 잘려 나갔다. 허나 가운데 불사의 머리는 역시 빳빳하게 쳐들고 있었다.
춘심이는 일찍 찾지 않는 것을 사과했고, 그것은 강주사(춘심이를 겁탈하려던 사람. 알 콩 달 콩 12. 결국 둘이 결혼했단다.)의 의처증 탓이라 둘렀다. 수민이 수영도 나를 만나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단다. 지금은 어촌계에서 해녀들을 관리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대화가 10년 전 이가리로 돌아 갈 적에는 눈이 한없이 깊어갔다. 그러다 투정도 부렸다.
“우째 편지 한 통 없는교?”
“누구는?”
“내사, 그 잘난 글 보냈다가 우사할라꼬? 알면서. 호호호”하고, 자지러지다가 나에게 동의를 구하며 넉살도 피웠다.
“오빠오빠! 수영은 내가 했으면 잘 했을 끼라 그자그자?”
“싱크로나이즈드스위밍은 딱이지. 코를 집게로 집고……”
나도 너스레를 떨었다. 우리 둘은 오랜만에 같이 웃었다. 제주도 말씨는 간곳없고 능청스레 포항말로 익살을 피웠다. 세월은 속일 수 없는가보다. 조금은 능글능글해져 있었고 눈 꼬리 치는 것이 궁둥이에 아홉 개의 꼬리를 감춘 여우였다. 그 중에서도 백여우. 금방 터질듯 한껏 익어 있었다. 그러나 세속에 무젖지는 않았다.
맞다. 그녀는 내게 무좀이었다. 없어진 줄 알았는데 다시 나타나 내 마음을 흐트러트렸다. 아니다. 잿더미 속에 묻어둔 불덩이였다.
“그런데 말이다. 그건 무슨 심술인데? 남의 부엌에 구정물 퍼붓는 심뽀는?”
“히히히……” 그녀는 유난히 가는 허리가 부러질 가봐 걱정되게 깔깔거리다 웃음이 덜 가신 목소리로 받았다.
“나도 몰라, 나도. 그 심보! 아무도 몰라……”
그녀의 얼굴은 술 탓인지 갓 탓인지 붉게 물들고 있었다. 나는 갓이 있는 등불을 좋아한다. 갓 없이 오는 등불은, 그녀에게 비치는 빛이 민낯 같아서 어색했으리라. 자주색 갓에 따라 변하는 그녀의 모습이 매혹적이었다.
네 등불의 갓은
너를 포도주 빛깔로 물들이고
-H. 카로사(carossa), 「집에 가는 길」에서
나는 그런 그녀의 얼굴에서 10년 전 앳된 춘심이의 실루엣을 찾아 헤맸다. 햇볕에 그을려 가무잡잡하면서도 매끄러운 피부, 성냥개비를 세 개까지 올려놓던 짙은 속눈썹, 궁노루를 닮은 티 없이 맑은 눈, 그 아래로 야무지게 뻗은 콧날, 그리고 항상 방긋 벌어 진 붉은 입술은 무언가 갈망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글을 배우러 와, 몸을 포개듯 접고, 세운 무릎을 두 손으로 깍지 끼워 안고, 맹랑하게 올려다보던 까만 눈동자. 바다에 나가면 전복을 따 막무가내로 내 입에 넣어주던 손길. 내 허리를 감싸고 풀무질하듯 쏟아내던 뜨거운 입김. 흘러간 지난날은 모두 아름다웠다. 꿈같고 달콤했다.
10년이 흘러 마주앉은 그녀는 아직도 조붓한 얼굴선에서 애티가 곳곳에 서려 있었다. 부드럽게 내려오다 안중을 만난 콧날은 여전히 시원스럽고, 애써 오므린 입술은 다소곳한 기색을 더했으나 자신을 안으로 가두려고 몸부림치는 표상 같았다. 그러나 짙은 머젠타색 립스틱 입술에 가렸다 이따금씩 드러나는 하얀 이. 붉은 입술과 대비되어 굶주린 야수의 이빨이기도 했다. 술에 익어 답답해 진 가슴을 쥐어뜯듯이 열어젖힌 가슴팍은 빠개 젖힌 농익은 석류였다.
두툼한 나의 입술
알알이 붉은 뜻을
내가 어이 이르리까
보소라 임아 보소라
빠개 젖힌
이 가슴
―조운(월북 시조시인)
우리는 독한 고량주를 물마시듯 들이켰다. 그녀는 아홉 개 꼬리가 달린 백여우로 변해 갔고, 나는 헤라클레스의 칼날에 맞아 잘려진 머리는 곱으로 다시 나는 히드라로 변해 갔다. 그녀는 촉촉하게 젖었고, 나는 제우스의 번개 지팡이를 주체 못해 끙끙거렸다. 나는 엉큼하게, 그녀는 앙큼하게, 상대가 무너지기를 기다리며, 상대가 무너진 후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갈등에 묶여 허우적대고 있었다. 그럴수록 나는 사는 건 역시 황홀하고 낭만이 깃들어 있다고 단정했고, 그리스인 ‘조르바’의 여자를 혼자 두는 것은 남자의 수치라는 말을 곱씹다가, 어린 시절 영화관에서 스크린에 빗물이 줄줄 흘러내리다 탁 하고 먹통으로 변하듯, 나의 필름도 끊어졌다.
너무도 강한 아침 햇살이 내 눈을 파고들었다. 창호지를 통해 아침 햇살이 튀밥처럼 하얗게 쏟아져 들어왔다.
좁은 여관방이라 나 혼자라는 것을 직감했다. 다만 머리맡에 메모지와 냉수 한 사발이 놓여있었다.
-조끄뜨레 하기엔 하영 먼 당신-
10년 전 나 몰래 떠나면서 남긴 메모 내용과 글자 하나 토씨 하나 달라진 것 없었다. 아니다. 달라져 있었다. 글씨체가 세련되고 달필이 되어있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술로 인해 필름이 끊어 진 적은 부지기수다. 그러나 애써 복원하지는 않았다. 아니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나 자신을 믿기 때문이다. 내 안에는 수많은 또 다른 내가 존재한다. 그들은 서로 할퀴고 비난하다가도, 서로를 인정하고 한 덩어리로 뭉치기도 한다. 좋게 말하면 분답고, 다양하고, 분분하다. 나쁘게 말하면 개판이다. 한쪽에서 예들어 사람은 겸손해야 해 하면, 또 다른 나는 ×까네 한다. 개에게나 던져 주라고 비아냥거린다. 다른 쪽에서 좋은 글이나 말을 늘어놓으면, 또 다른 나는 너 유치원에 다녀? 한다. 젊은 날에 터득해야 할 덕목들을 이제 하늘과 통할 나이에 무슨 송아지 개밥 먹는 소리냐며 타박이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을 믿는 것이다. 다양한 ‘나’들이 분답고 분분하게 소리 내다가 끝에는 뭔가를 건져 내니까. 잘났건 못났건, 잘하건 못하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도 내에서 내 인생 내 스타일대로 허적허적 살아가자고 다독인다. 그러기에 하루에도 수 십 통씩 날아오는 ‘이러자 저러자’ 혹은 ‘이렇게 아니면 저렇게 살아야 한다.’는 유자명자들의 글을 인용한 글들은 아예 읽어 보지도 않고 ‘삭제’를 눌러 버린다. 내 삶은 내가 살아가는 것이다. 허지만 어쨌든 나를 생각해 메일을 보내 주신 분들, 이 자리를 통해 양해 바랍니다.
내가 지금 무시기 껄렁한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가?
그래, 맞다. 춘심이 이야기를 하다 삼천포로 빠졌다. 나는 그날 여관방을 나서며 주먹으로 이마를 탁 쳤다.
또, 한 장 넘기자!
전날 밤을 복원하지 않기로 했다. 복원은 회원님들 몫으로 남기고자한다. 어떤 복원이라도 나는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고, 그 가능성은 충분히 열려 있다고 조언한다. 다만 여러분은, 여러분의 관점에서 조명하는 것에 100% 신뢰를 두지는 말았으면 한다. 직접 겪지 않고는 진실을 알 수 없으니까.
사실, 패턴에 따르기만 하면 인생은 편안하다. 기승전결로 끝나는 해피엔딩은 우리 모두에게 익숙한 법이니까. 남들과 다르지 않다는 안도감. 하지만 내밀한 나의 고통과 슬픔과 고독을 저당 잡힌 게 아닐까. 태연한 인생이 아니라 태연한척하는 인생들을 나는 경계한다. 그리고 나는 묻는다. 정말 잘 살고 있느냐고. 이 물음의 기착지는 언제나 ☞나다.
첫댓글 현란한 문장 표현력, 내용의 깊이를 알 수 없이 빠져 들게하는
작품의 구성력, 도데체 자네의 문학적 자질은 어디까지인가?
이 아름다운 가을에 정신없이 읽을거리를 주어 행복했다
방금 이준석의 특강을 듣고 무무의 글을 읽으니 이준석의 강의에 동감하게 되는구나.
사람은 자기만의 스토리가 있고 또 자기만의 스토리를 만들어야 한다고. ㅡ義 峰ㅡ
흥미진진 하게 내려가다 보니 아쉽게 끝이네요~~
춘심님과의 인연, 그 아름답고 끈질긴 인연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을것 같습니다.
훗날에 또 꼭 만날수 있어 더 더욱 좋은 추억 만들수 있기를 기원해용....
내 안에는 수 많은 또 다른 내가 존재한다_내 삶은 내가 살아가는 것이다...그러나 판단이 항상 옳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 반대로 가는 수가 많기 때문에 후회 하고 후유증에 시달려도 그것은 또 새로운 나의 출발점일 수도 있다..그냥 해 본 말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