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숙망 실현 주덕해 자치구 제1임 서기로 당선 수천만 인파 거리에 떨쳐나서 북장고 울리며 환호
국경 첫돌에 드리는 겨레의 선물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이 어제 같은데 벌써 국경 첫돌을 맞이하게 되었다. 당과 정부에서는 전국의 소수민족대표와 소수민족문공단 배우들을 북경에 초청하여 함께 명절을 쇠도록 마련해주었다. 동북인민정부에서는 조선족대표단을 파견하기로 결정지었다. 중공연변지위에서는 연변대학 부교장 림민호를 단장으로, 항일렬사가족 김신숙을 단원으로, 연길한어전문학교 교무주임 반룡해를 수원으로 한 대표단을 구성했다. 예술축전에 참가할 배우들은 새로 창작한 가무종목을 다그쳐 연습하였다.
9월 27일, 대표단일행은 북소리와 환호성속에서 북경역에 도착하였다. 수십만의 각계 대표들이 역에 나와 대표단을 맞아주었다.
9월 28일, 대표단일행은 로동인민문화궁에서 주은래총리의 국제국내정세에 대한 보고를 들었고 29일에는 주은래총리의 초청을 받고 북경호텔에 가 만찬회에 참석하였다.
9월 30일, 마침내 모택동주석의 초청을 받고 북경호텔을 향하게 되었다. 모택동, 류소기, 주덕, 송경령, 장란, 리제심 등 공화국의 주석, 부주석들과 정무원 총리 주은래가 연회대청앞에서 대표들을 맞아주었다.
10월 1일, 북경성은 새벽부터 징소리, 북소리, 폭죽소리속에 들끓었다.
림민호, 김신숙, 반룡해는 청첩장을 받고 천안문서쪽 관례대에 오르고 배우들은 북경시민들과 함께 시위행진에 참가하였다.
모주석을 비롯한 당과 국가의 지도자들이 천안문성루에 오르자 시위행진에 참가한 사람들은 손바닥이 아프도록 박수를 쳤다. 시위행진대오를 따라 관례대앞을 지날 때 조선족배우들은 격동에 넘쳐 “모주석 만세!”, “중국공산당 만세!”, “중화인민공화국 만세!”를 부르고 또 불렀다.
배우 김성민은 꽹과리를 맡았는데 한동안 지나니 꽹과리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는 그제야 꽹과리채가 꺾어졌다는 것을 발견했다. 10월 3일 밤, 중남해의 회인당에서 예술축전활동이 있었다. 주총리를 비롯한 지도자들이 이미 자리에 참석하고 있었다. 7시 10분, 회인당강당 동쪽켠에서 갑자기 박수소리가 터지자 모주석이 대청안으로 천천히 걸어들어왔다.
이어 선물증정의식이 있었다. 여러 민족 대표들은 순서대로 각기 주석대에 올라가 가지고온 선물을 모주석께 드리였다. 조선민족대표단은 세 번째로 주석대에 올랐다. 림민호가 먼저 연변인민들이 국경 첫돌을 璿?서명부 한책을 모주석께 올렸다. 다음 김신숙이 조선족 저고리와 조끼, 바지 한벌을 드렸다. 그다음 반룡해가 옥석으로 만든 벼루를 드렸다. 또 그 다음 예술단 단장 김동구가 조선족 회색두루마기를 모주석께 입혀드렸는데 두루마기의 길이와 품은 웅장한 모주석의 몸매에 딱 맞았다. 모주석은 두루마기를 흝어보면서 사의를 표하였다. 대청에선 우렁찬 박수소리가 울렸다. 마지막으로 배우 정영숙이 남색비단에 원앙새를 수놓은 방석을 드렸다.
선물증정이 끝난후 예술축전이 있었다. 연변문공단, 내몽골문공단, 신강문공단, 사천성의 장족, 묘족들의 가무종목은 명절의 분위기를 고조로 이끌었다.
연변문공단의 5개 종목은 그날 밤 문예축전의 4분의 1을 차지하였다. 먼저 대합창 “영용한 조선인민은 일떠났다”를 공연하였다. 주먹을 불끈 쥐고 힘차게 부른 노래소리는 화인당에 메아리쳤고 중남해의 정원을 넘어 수도인민들의 흉금을 울려주었다.
중앙방문단 연변 방문
1952년 7월 24일, 팽택민을 단장으로 하고 쌍쿵료를 부단장으로 하는 중앙대표단일행 50여명이 길림성인민정부 부주석 서원천의 안내하에 렬차로 연길에 도착하였다.
7월 27일, 연길시 3만명 여러 민족 인민들은 인민체육장에서 중앙방문단을 환영하는 성대한 모임을 가졌다.
28일, 중앙방문단을 환영하는 운동회가 있었다. 연길, 룡정 3개 시의 1900여명 선수가 조선족 씨름, 그네, 널뛰기 시합에 참가하였다.
중앙방문단은 연변에서 9일간의 방문활동을 끝마치고 8월 2일 저녁차로 연길로 떠났다.
조선족구역자치의 선포
1952년 8월 9일 “중앙인민공화국 구역자치실시요강”이 발표된 12일후인 8월 21일, 연변 각족 각계 인민대표대회의주비위원회의가 연길에서 열리였다. 회의에서 주비위원회의 상무위원을 산생, 대표회의의 임무, 대표자격 등 문제를 토론, 결정했다.
8월 29일부터 9월 2일까지 드디여 연변조선족자치구 제1기 각족 각계 인민대표회의가 연길시인민극장에서 소집되였다. 300여명 대표가 회의에 참가하였다. 동북인민정부대표 왕일부, 중공길림성위 서기 리몽령, 길림성인민정부 주석 률우문이 대회에 출석하였다.
동옥곤이 회의에서 “길림성인민정부 연변전원공서 사업보고”를 진술하고 주덕해가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구시정건설에 관한 보고”를 진술했다. 보고에서 주덕해는 “연변조선민족자치구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구성부문이며 연변조선민족자치구인민정부는 1급지방정권기관으로서 공동강령과 상급인민정부의 결의, 지시, 법령에 근거하고 민족구역자치실시요강의 규정에 따라 자치구내에서 자치권리를 행사하며 사업을 진행한다. 연변조선민족자치구 인민대표대회와 곧 창립될 연변조선족자치구인민정부의 임무는 민족특징을 돌보며 민족형식을 통하여 민족평등정책을 관철하며 여러 민족 인민을 단합시켜 체계적으로 절차를 밟아 정치, 경제, 문화 건설을 진행하는것이다”고 지적하였다.
대회에서 정식으로 연변조선족자치구인민정부를 창립하고 “자치구인민정부조직조례”와 “민족단결에 관한 결의”를 통과한후 제1기인민정부 주석, 부주석, 비서장 등을 선거하였다. 주적해가 제1기 연변조선족자치구 주석으로 당선되였다. 부주석으로는 동옥곤, 최채가 당선되고 비서장으로는 곽명광, 부비서장으로는 박창무, 장국근이 당선되였다. 전인영, 요흔 등 32명이 위원으로 당선되였다.
대회에서는 항일전쟁승리기념일인 9월 3일을 연변조선민족자치구창립기념일로 규정하였다.
자치구산하에는 연길시, 연길현, 화룡현, 왕청현, 훈춘현, 안도현이 포괄되여있었는데 인구는 도합 85만 4000여명이였다. 그중 조선족이 53만명으로서 62%를 차지하였다.
자치구인민정부 주석 주덕해가 연변조선민족자치구인민정부창립을 장엄하게 선포하자 대회장은 환호의 열도가니로 끓어번지였다.
얼마나 바라고 바라던 소망이였던가. 이것은 지난날 항일전쟁시기 “조국광복회 10대 강령”에서 제출되였던 동북에서의 조선인민족구역자치의 완전한 실현이며 자산계급민주주의를 구유한 애국지사가 신해혁명직후에 국회에 제출한 민족자치방안의 더욱 높은 단계의 실현이였다. 조선족은 마침내 이 나라의 주인이 되었다. 조선족은 소수민족신분으로 세계인구 4분의 1을 차지하는 새 중국의 광활한 땅에서 마음껏 활보할수 있게 되었다.
과거 조선인은 문헌상에서의 민간속에서 개간민, 조선인, 한국인, 고려인, 심지어 삼한인(三韓人)등으로 불리면서 고정된 족명조차 없는 망국노 류랑민의 생활을 영위해와야 했다. 그러나 이젠 조선족이라는 정치개념의 확립과 더불어 이런 력사현상을 완전히 사라지게 하였다. 쪽지게를 지고 오랑케령을 넘어온 족속, 쪽배를 타고 선구나루터를 건너온 족속, 그 족속들이 뼈를 심고 살을 파묻어 걸군 이 땅의 주인으로 되었다. 토지혁명과 전쟁의 불길이 흩날리던 항일전쟁, 해방전쟁의 나날에 조국강산에 진붉은 피를 휘뿌리며 영웅적 기개를 보여주던 그 민족이 이 땅의 당당한 주인이 되었다.
이날 연길시거리는 수천수만의 환호의 인파로 출렁이였다. 골목과 거리마다엔 민족복장을 떨쳐입은 주민들이 북장고를 울리며 덩실덩실 춤판을 벌리면서 자치구창립의 날을 경축하고있었다. 이 인파속에는 나젊은 작곡가 김성민도 있었다. 그는 최창준이 금방 써준 “자치주창립의 노런가 사를 손에 쥐고 주민들과 함께 춤노래판에 한도가니로 휩쓸렸다. 덩실덩실 춤추던 김성민은 불현 듯 주선률이 떠올라 무릎을 끓고앉아 기보하기 시작했다.
에루라 저절시구 좋구나 좋네
해란강도 노래하고 장백산도 환호하네
에루화 두둥실 장고를 울리세
연변조선족자치구 세웠네...
자리를 차고 일어난 김성민은 금방 작곡한 노래를 소리높이 불렀다. 주위의 사람들은 김성민의 노래에 맞추어 북장고 울리며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아름다운 노래소리는 조선족의 숙망을 담고 멀리멀리 울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