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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창조, 넷째와 다섯째 날
창 1:14-23
14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 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 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 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18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9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20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21 하나님이 큰 바다 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22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23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창 1:14-15 / 하나님께서 명령하셨다. `저 창공에 하늘을 밝히는 여러 가지 빛이 생겨나라. 그 빛이 밤과 낮을 나누어라. 그 여러 가지 빛이 밤과 낮을 구분하는 표적이 되게 하여라. 또한 그 여러 가지 빛을 따라 나날과 햇수를 계산하게 하여라. 또 때마다 절기를 지키는 표로 삼게 하여라 15) 그 빛이 하늘에서 빛나 땅위를 비추게 하여라.' 그러자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다 이루어졌다. 16) 하나님은 이렇게 두 큰 빛 해와 달을 만드셨다. 그 중에서도 큰 빛인 해는 낮을 환히 밝히게 하시고 작은 빛인 달은 밤을 밝히게 하셨다. 또 밤을 밝히시려고 수많은 별도 만들어 놓으셨다. 17)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여러 가지 빛을 만들어 하늘 창공에 매달아 놓으셨다. 그래서 땅 위를 환히 비추게 하시고 18) 낮과 밤에 각각 빛나게 하시며 어둠과 빛을 구분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해놓으시고 무척 흐뭇해하셨다. 그렇게 보기 좋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19) 저녁이 지나고 다시 아침이 되어 하루가 흘러갔다. 넷째 날이 지난 것이다. 20) 하나님께서 명령하셨다. `물 속에는 살아 움직이는 물고기가 생겨나 부쩍부쩍 불어나라. 푸른 하늘에는 새가 날아다니게 하여라.' 21) 하나님께서는 엄청나게 큰 바다 생물과 물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온갖 물고기와 날개가 달려 하늘을 날아다니는 갖가지 새를 모두 지어내셨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보시고 무척 흐뭇해하셨다. 그렇게 보기 좋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22) 하나님은 당신께서 손수 지어 놓으신 것에다 이렇게 복을 내리셨다. `부쩍부쩍 불어나 바다를 가득 채워라. 또 새들은 수도 없이 늘어나 땅 위에 가득하여라.' 23) 저녁이 지나고 다시 아침이 되어 하루가 흘러갔다. 다섯째 날이 지난 것이다.
하나님은 넷째 날과 다섯째 날, 하늘에 두 광명체를 만드사 낮과 밤을 주관하셨습니다. 그리고 물과 하늘에 생물을 창조하시며 처음으로 복을 말씀하셨습니다.
광명체들(14-19) 첫째 날부터 셋째 날까지는 틀과 질서를 세우셨다면 넷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는 기존에 세워진 틀 안을 내용으로 채우십니다. 하나님은 넷째 날 광명체들을 창조하셨습니다. 첫째 날은 빛과 어둠을 나누셨다면 넷째 날은 큰 광명체로 태양을 창조하셔서 낮을 주관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작은 광명체로 달을 만들어 밤을 주관하게 하셨습니다.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특히 징조를 이루게 하셨다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중요한 도구로 쓰임받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실제로 구약이나 신약 그리고 마지막 요한계시록을 보면, 해와 달과 그리고 별들을 통해 이런 징조들을 알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계절과 날과 해를 있게 하신 분입니다. 인간과 동식물이 주기적으로 활동할 수 있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휴식을 할 수 있도록 리듬을 주셨습니다. 만약 밤이 없고 낮만 있었다면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 행복하지 않았을 겁니다. 밤은 하나님이 주신 안식의 시간입니다.
생물과 새들(20-23) 창조의 다섯째 날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물에 생물들이 번성하게 하셨습니다. 하늘에는 새들이 날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생물들이 한 날에 창조되었습니다. 진화론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오랜 시간을 지나면서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진화한 것이 아닙니다. 특별히 번성하게 하라는 뜻의 솨라츠는 수많은 생물들이 떼지어 다니는 모습을 말합니다(21). 즉 점진적으로 번식하여 증가하지 않았습니다. 무수한 생명체가 단번에 많아진 것입니다. 갑자기 조용하던 물과 하늘에 온갖 종류의 생명체들이 채워졌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처음으로 복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22). 바라크를 번역한 복은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물과 땅과 하늘에 온갖 생명체가 번성하여 가득하게 되는 것이 복입니다. 둘째, 물과 땅과 하늘이라는 구별된 자연 서식지가 주어져 다툴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이 복입니다. 셋째, 각자 다양한 자연 생태계를 유지시키며 증진시키는 것이 복입니다. 오늘날 생태계가 파괴되어 생물들이 멸종되는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적용: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태계를 보호하기 위해 하나님의 백성들이 실천해야 할 환경보호 운동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나누어봅시다.
우리 인생은 꿈보다는 ‘기대’를 따라갑니다. 기대한 만큼 이룹니다. 긍정적 생각을 품은 인생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부정적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인생은 꼬이게 마련입니다. 패배와 실패, 삼류인생을 기대하면 잠재의식은 우리를 그쪽으로 몰아가, 평범한 수준 이상의 어떤 시도도 못하게 만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전을 확장하려면 기대 수준을 높여야 합니다. 삶의 변화는 바로 생각의 변화에서 출발합니다. 하나님은 커다란 소망을 품으라 말씀하십니다. 소망이 없는 믿음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히 11:1) 소망의 또 다른 이름은 ‘높은 기대’ 입니다. 기대 수준을 높이라.
< 설 교 >
해와 달과 별 창조
이정원목사(참사랑교회) / 창 1:14-19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의 기원에 대해서 연구하고 설명해보려고 했으나, 아직까지 확실한 것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가설들을 내놓기는 했지만 신빙성이 없고 애매한 것들뿐입니다. 사실 인간이 이 문제를 푼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기원을 분명하고 쉽게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11:3)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으면 이 세상의 기원에 대한 문제가 너무나도 분명하고 확실하게 풀립니다. 과학자들이 다 설명하지 못한 문제들까지도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창세기를 대할 때 우리는 창조의 놀라운 신비와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첫째 날에 빛을 만드셨고, 둘째 날에 하늘을 만드셨으며, 셋째 날에 땅과 바다와 각종 식물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넷째 날에 해와 달과 별들을 만드셨습니다.
해와 달과 별에 대한 인간들의 태도
우리 머리 위에서 해와 달과 별들이 온갖 조화를 일으키며 빛나고 있다는 것은 정말 경이롭고 신비로운 일입니다. 이러한 천체에 대해서 고대인들은 주로 경외와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태양은 절대적인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단 하루라도 태양이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고대인들은 태양을 절대적인 신으로 생각했습니다. 밤하늘을 은은하게 비추며 하루하루 다르게 변하는 달을 보고는 자신들의 운명을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달을 운명의 여신으로 생각했습니다. 또 별들을 바라보면서, 그 수많은 별들은 각 사람의 운명을 나타내거나 좌우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별똥이 떨어지면 그것은 누군가가 죽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고대인들은 천체를 보면서 자신들과 공동체의 운명을 생각했으며, 그것들을 신으로 숭배했던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천체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요? 현대인들 역시 어느 정도는 고대인들의 사고방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천체가 과학적으로 규명되면서 해와 달과 별들에 대한 두려움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현대인들은 해와 달과 별들에 관해서 별 관심을 보이지 않고 살아갑니다. 요즘은 별을 관측하는 것을 취미로 삼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현대인들에게는 천체에 대한 관심이 없어진지 오랩니다. 현대인들은 세상의 쾌락과 돈 버는 재미에 정신이 팔려 살아가고 있습니다.
해와 달과 별을 두려워하며 신으로 숭배하던 고대인들의 태도는 잘못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모든 것을 완전히 무시하고 세상 쾌락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태도 역시 잘못된 것입니다. 해와 달과 별은 신도 아니고, 인간의 운명을 좌우하는 힘을 가진 것도 아닙니다. 그것들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들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그러한 헛된 생각과 우상숭배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무시해서도 안 됩니다. 성도는 이 광대하고 무한한 천체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기억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 쾌락과 죄악에 빠지지 말고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자연을 탐구하고 개발하는 과학적인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고 이 모든 자연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자연을 두려워하여 숭배하거나 무시할 것이 아니라, 잘 가꾸고 개발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를 발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분입니다.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은혜
하나님께서는 첫째 날에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빛과 어둠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하시고 어둠을 밤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넷째 날에 해와 달과 별들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해로 하여금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달로 하여금 밤을 주관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낮과 해를 이루게 하라 또 광명체들이 하늘과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14-16절) 여기서 주관하게 하셨다는 것은 다스리고 통치하게 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낮에는 해가 비취게 하셨고, 밤에는 달이 빛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태양이 빛을 내며, 달은 태양 빛을 반사하여 빛을 낸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이 없으면 빛이 없는 줄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해와 달과 별들을 만드시기 전에 먼저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이 빛을 경험했습니다. 애굽에 삼일 동안 흑암이 계속될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고 있던 곳에는 빛이 있었습니다. 해가 떠올라 빛을 비춘 것도 아닌데 빛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빛이었습니다. 그 빛은 오늘 우리에게는 신비롭고 기적적인 빛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넷째 날에 해와 달과 별들을 만드시고 그것들로 하여금 세상에 빛을 비추는 일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신비로운 빛 대신에 일상적이고 상식적인 빛 가운데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하고 기적적인 빛을 일상적이고 상식적인 빛으로 대치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역사가 일반적인 현상으로 대치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 반석에서 생수를 마시다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는 농사해서 얻은 곡식과 샘을 파서 얻은 물을 마시게 된 것과 같습니다. 하늘에서 만나가 내린 것은 과학적인 설명이 불가능한 일입니다. 반석에서 물이 나온 것 역시 기적적인 일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만나는 더 이상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정상적으로 농사를 지어서 양식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하늘에서 만나가 내리던 것이 농사를 지어 양식을 얻는 것으로 대치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역사가 일반적인 것으로 대치된 것입니다.
우리를 시험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능력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모든 것이 매우 일상적이고 상식적인 법칙을 통해서 유지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낮과 해를 이루게 하라”(14절)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자연법칙을 만드셔서 하나님의 특별하신 역사와 은혜를 일반화시키신 것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아도 세상이 유지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중심을 시험하고 계십니다.
만일 날마다 기적이 일어난다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 사람들이 다 하나님을 믿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엄청난 기적을 한 번 나타내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기적을 요구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사람들은 예수님께 기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이미 엄청난 기적이 나타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꾸만 기적을 요구했습니다. 기적을 나태내면 믿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런 기적을 통해서가 아니라, 정상적인 이성과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정상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을 깨닫고 발견하고 섬기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믿는 사람들도 그러한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병들어서 고생하던 중 기도해서 병이 나으면 하나님께서 고쳐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병원에 가서 수술하고 병이 나으면 의사가 고쳤다고 생각하지 하나님께서 고쳐주셨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직장이 없어서 어려움을 당하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취직하게 되면 감사합니다. 그러나 직장 생활해서 돈 벌면 그것은 자기가 수고해서 얻은 것이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을 때,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서 농사지어 얻은 양식은 자기들이 수고해서 얻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기억하지 못하게 되자, 그들은 우상숭배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날마다 기적을 나타내지 않으시고 일반적인 자연법칙으로 모든 것이 유지되게 하신 것은 은혜임과 동시에 시험입니다. 사람이 수고하고 애를 쓰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굳이 기도하지 않아도 돈 벌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줄 알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려 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살려는 간절한 마음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방법으로 우리에게 은혜 주시는 것은 우리를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신실한 성도가 되자.
우리는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을 찾으며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나 어려움이 사라지면 우리의 간절함도 사라집니다. 병들었을 때는 건강만 주시면 하나님을 잘 섬기겠노라고 다짐하며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다가 정작 건강을 주시면 자기 맘대로 살아갑니다. 가난할 때는 하나님께 매달리다가, 여유가 생기면 신앙생활에 열심을 내기보다는 놀러 다니고 싶어 합니다. 직장이 없을 때는 많이 기도하는데, 직장이 생기면 기도생활이 등한해지고 교만해집니다. 직장에 나가는 것이 예배에 나오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대학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그렇게 기도해놓고, 대학에 들어가고 나면 놀러 다니느라 교회는 뒷전입니다. 이 얼마나 부끄럽고 어리석은 일입니까? 그렇게 하면 우리는 정말 중요한 것, 더 큰 것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나는 요즘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풍성한 축복 주신 것을 정말 기뻐하며 감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면 하나님께서 더욱 큰 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복을 주실 때 조심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에 더욱 힘쓰고 기도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십일조 생활을 더욱 철저히 해야 합니다.
돈을 얻고 하나님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많습니다. 직장을 얻고 하나님을 잃어버린 사람들도 많습니다. 자식을 얻고 하나님께 등한히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대학에 들어가고는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도 많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직장을 주시고 승진하게 해주실 때 더욱 겸손하고 조심해야 하며 더욱 기도해야 합니다. 대학에 들어간 후에 더욱 겸손하고 믿음에 바로 서도록 해야 합니다. 사업이 잘되고 집을 샀을 때 더욱 긴장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하고 여전히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변함없이 은혜를 내려주실 것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해와 달과 별들을 만드신 하나님께서는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낮과 해를 이루게 하라”(14절) 하나님께서 자연법칙을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해와 달과 별들을 만들어 빛을 내게 하시고, 그 때부터 낮과 밤과 징조와 달과 계절과 해가 일정하게 계속되게 하셨습니다. 어느 누구도 이 자연법칙을 깨뜨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변함없는 자연법칙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여줍니다.
인간은 변덕이 심해서 믿을 수가 없습니다. 언제는 은혜 받았다고 그렇게도 좋아하며 믿음생활을 잘할 것처럼 하더니, 또 언제는 도대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보기도 어려울 정도로 주저앉아 버립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믿었다가는 반드시 실망하고 고약한 일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변함이 없으십니다. 한 번 말씀하신 것은 반드시 지키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안심하고 하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실망시키시는 법이 없으십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
태양이 작열하고 있을 때 우리는 그 태양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습니다. 하물며 인간이 어떻게 그 태양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볼 수 있겠습니까? 구약시대에는 함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갔다가는 즉시 죽임을 당했습니다. 죄인된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면하여 보고서 결코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거룩하시고 위대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고 구원하사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사랑해주십니다. 우리로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갈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얼마나 크신 은혜입니까?
태양과는 대조적으로 밤하늘의 달과 별들을 바라보면 우리는 평안과 위로를 얻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고요히, 그리고 잔잔히 다가와 우리를 위로하시며 평안을 주십니다. 때로 우리는 멀리 떨어져 있는 광대한 별들의 세계를 자세히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 자신이 얼마나 작게 느껴집니까? 그처럼 광대하고 끝없는 별들의 세계를 돌보시는 하나님께서 어찌 우리의 작은 문제들과 걱정거리들을 돌보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문제든지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가서 도우시는 은혜를 구할 수 있습니다.
전능하실 뿐만 아니라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은혜를 얼마든지 베풀어주십니다. 해와 달과 별들을 지으신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신 분이시며, 그것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은 또한 우리를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넷째 날에 해와 달과 별들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연법칙을 세우셔서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은혜임과 동시에 시험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자연법칙이 세상을 지배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연법칙을 세우시고, 그것을 통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자연계와 자연법칙의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고 있다고 해서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직장 일이라면 예배를 빠져도 되고, 죄를 지어도 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학교에서 시키는 일이라면 신앙과 예배도 뒷전으로 돌려버리는 자세를 가져서는 안 됩니다. 대학에 들어갔다고 해서 신앙생활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조금만 안정되면 교만해지고 해이해져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신앙생활을 소홀히 합니다. 얼마나 어리석고 부끄러운 일입니까? 자연계과 모든 자연현상들의 배후에 하나님께서 계시듯이,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의 배후에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배후에서 모든 것을 통치하시며,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우리는 결코 이것을 잊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겨야 합니다.
우리는 대자연을 통하여 하나님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대자연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신실하심과 자비로우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절대적으로 다스리고 계십니다. 따라서 하나님 백성들은 토정비결이니 징크스니 하는 것들을 믿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직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만 믿습니다.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인 우리에게 신실하시며 한없이 자비로우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두려워하며, 하나님만 경배하며, 하나님만 섬기며 의지해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변함없는 은혜를 내려주십니다. 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창조의 넷째 날
창 1장 14~19절 / 이상호목사
지난주 식물을 만드시고 오늘은 창조의 넷째 날, 해와 달과 모든 별들을 창조하신 날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생명은 자라나며, 생명이 자라는 데는 햇빛이 필요합니다. 이 넷째 날의 천체의 창조는 여섯째 날의 사람의 창조와 함께 그 창조의 근본적인 목적이 하나님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밝혀진 두 사건 중의 하나입니다.
그 목적이 무엇입니까?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해와 달과 별들을 궁창에 두어 땅에 비취게 하심이 그 근본적인 목적이었음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여섯째 날 사람의 창조의 목적도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려고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들에게 그것들이 비록 웅장하고 놀라운 것이지만 결국 그것들은 사람들을 위해 지어진 것에 불과함을 미리 밝혀 둠으로서 인간들이 천체를 숭배하는 일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신.구약 성경을 접해보지 못한 세계의 거의 모든 고대민족들은 한결같이 지구에 빛과 열을 제공하는 그 외면적인 현상에만 이끌려 태양이나 특정한 별이나 달을 숭배해 왔습니다. 고대인들은 하늘에서 비추이는 이 거대한 빛을 보고는 절대적인 신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태양을 신으로 모시고 그 태양신에게 어린 아이를 제물로 죽여서 바치는 행위를 함으로 태양신의 노여움을 풀려고 했습니다. 태양신이 노하면 가뭄이 계속됨으로 농사고 뭐고 안된다는 두려움이 그들에게는 있었습니다.
또한 달 역시 고대인들에게는 운명을 점치는 여신으로 간주했습니다. 달리 둥글다가도 반쪽이 되었다가 때로는 실낱같이 되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달이 아예 없어지기도 하니 이 얼마나 두려움의 존재였겠습니까? 그 당시에는 달빛을 받으면 정신 이상이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밤에 다닐 때는 항상 두건을 쓰고 다녔습니다. 정신병이라는 영어단어 'lunatic'은 'luna', 즉 '달'이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미치광이; 괴팍스러운 사람, 괴짜, 바보;【법】 정신 이상자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옛날에는 달에서 나오는 영기(靈氣)에 닿으면 미친다고 여겨졌습니다. 그러기에 달을 신격화해서 섬겼던 것입니다.
또한 별 역시 만만치 않은 존재였습니다. 애굽의 왕들은 다 자기 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왕이 죽으면 피라미드에 구멍을 내서 왕의 눈과 그의 별이 일치하는 위치에 시체를 안치한 것입니다. 바벨론은 별점으로 유명했습니다. 별을 보면서 인간의 운명과 국가의 장래를 점쳤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동방박사는 공부를 잘해서 석사코스를 밟은 후 박사가 된 사람이 아니라 별을 연구하는 점술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느 한 별의 징조를 보고 큰 왕이 탄생했다는 것을 알았고 그 왕에게 경배를 드리기 위해서 여러날 걸려서 베들레헴으로 찾아온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천체를 보고 점을 치는 점성술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태양과 달과 별들은 신도 아니고 절대적인 존재도 아니라고 못박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본문을 통해서 증거하고 계십니다.
14절에서 18절 사이에 기록된 말씀 속에 원어 성경을 보면 " ∼하기 위하여"란 뜻의 전치사가 무려 8회 이상 사용되고 있습니다. 무엇을 말하려는 것입니까?
이는 해와 달과 별이 그 자체가 어떤 능력을 지닌 것이 아니라 다른 피조물을 위하여 철저하게 봉사하도록 만들어졌음을 보여주는 구절인 것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이렇게 상세하게 태양과 달과 별들의 기능을 기록하신 이유는 타락한 인간들이 태양과 달과 별의 광대함과 신비로움에 감탄하여 이를 우상으로 섬기는 경향이 있을 것을 하나님께서는 이미 아시고 미리 철저하게 경계하신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새해 첫 시간이 되면 동해안으로 수많은 사람이 몰려갑니다. 새해 처음으로 솟아오르는 그 해를 보고 절을 하며 소원을 이루어 달라고 빕니다. 정월 보름이 되면 수많은 사람이 달을 바라다보며 소원을 기원합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해와 달이 말을 한다면 "이 어리석은 인간아 나에게 복을 달라고 하지 말고 나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께 소원을 아뢰라"고 할 것입니다.
이제 그 창조의 과정들과 목적을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치밀하신 창조의 솜씨를 살펴보기로 합니다.
14절을 보면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다"고 했는데 이 광명과 3절에 이미 만들어진 빛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광명체들이란 복수이며 해와 달과 별 모두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3절에 기록된 빛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오르"인데 14절의 광명은 "마오르"입니다. "오르"라는 단어는 빛 그 자체를 의미하는 밝다 빛나다라는 의미인데 이 "오르"라는 동사에 "마"라는 접두어가 붙게 될 때에는 그 동사가 이루어지는 장소 또는 도구를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본절의 "마오르" 는 빛을 내는 곳, 또는 빛을 내는 도구라는 의미를 가지게 됨으로 창조 첫날의 빛과는 확연하게 다름이 구분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해와 달과 별을 만드시고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14절)고 하셨습니다. 해와 달과 별들로 인하여 징조를 이루라는 말을 살펴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있어서의 징조는 해와 달과 별들의 변화를 통해서 이미 정해진 신의 뜻이 드러난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뭄이 들면 태양신이 노한 징조로 보았고 그 노함은 왕에 대한 불신임의 징조로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렇게 해석해서는 안됩니다. 이 징조는 일기의 변화에 대한 규칙을 발견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든다면 달무리가 끼이면 비가 올 것이라는 징조로 압니다. 저녁 노을이 붉게 물들면 날씨가 더워질 징조로 압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사시' 란 절기, 또는 계절을 말하는 것입니다. 계절의 변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아름다움과 조화를 지으셨습니다. 밤과 낮, 사시와 년한이 생기게 됐습니다. 두 큰 광명으로 하여금 하나는 낮을 주관하게 하셨고 하나는 밤을 주관하게 하셨습니다. 낮을 주관하는 태양의 크기는 지름이 140만km로 지구의 109배나 됩니다. 지구로부터 태양까지의 거리는 1억 5천만km로 지구에서 달까지 거리의 약 420배나 됩니다. 태양에서 나오는 열과 빛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태양에서 나오는 열과 빛은 수소원자가 헬륨 원자로 변할 때 나오는 것으로 수백만개의 수소폭탄과 같은 엄청난 에너지가 나오고 있습니다.
지구와 태양의 거리가 1억 5천만km나 되기 때문에 사람이 살고 동식물이 살아가지, 지구와 태양의 거리가 이 위치에서 좀 더 가까워져도 이 지구는 다 타 버리거나 잿더미가 되고 맙니다. 이 우주 안의 모든 생물은 태양에서 나오는 열과 빛에너지에 의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 천체에는 수천억개 이상의 별들이 있는데 이 지구도 항성, 즉 하나의 별입니다. 그 별 중에 가장 작은 별에 속합니다. 수천억개의 별들이 서로 충돌하거나 궤도를 이탈하지 않습니다. 만약 이 지구나 별들이 궤도를 이탈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지으신 우주는 충돌하는 법이 없도록 하나님이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가 얼마나 놀랍습니까? 다윗은 이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보고 시편 8:3-4에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라고 했습니다.
이 놀라운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두 광명, 해와 달로 하여금 해는 낮을 주관하게 하고 달은 밤을 주관하게 했습니다. 주관한다는 말은 자기 임무를 다한다는 뜻입니다.
태양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창조된 엄청난 열과 빛, 에너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빛의 청지기로 자기 의무를 다하고 창조주의 뜻을 그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해와 달을 만들지 않았다면 생물이 살수가 없습니다. 해는 우리에게 빛과 열을 주니까 없어서는 안될 것임을 모두들 잘 압니다.
그런데 달은 어떤 유익을 우리에게 주길래 반드시 필요한 것일까요?
달은 태양의 빛을 우리에게 반사해 줍니다. 반사되는 빛의 양은 달의 표면 크기에 따라 결정되는데 현재 달의 크기가 매우 알맞은 크기입니다. 더욱이 달은 지구를 향하여 늘 같은 면을 보이면서 공전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지구에 있는 관측자는 달의 이면을 결코 볼 수 없게 되는데 이는 일정 빛의 양을 지구로 공급(반사)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최근 학계에 일부 생물들은 야간에 일정 빛의 양을 필요로 하는 것으로 보고됨으로써 창세기 16절에 작은 광명으로 밤을 주관케 하시는 하나님의 숨겨진 섭리의 비밀이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두 번 째 달의 존재 이유는 지구의 중력을 유지시켜 주기 위함입니다. 지구와 달이 서로 당기는 힘의 세기를 지탱하기 위해서는 직경 850 km의 강철 케이블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달은 지구와의 평균 384,400km거리를 유지하며 편심도 0.05로 거의 정확한 원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지구는 태양을 편심도 0.017로 달보다 더욱 정확한 공전 원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지금까지 발견된 어떠한 행성이나 위성보다도 정밀한 원운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구에 있는 생명체를 보존키 위해서 지구와 달이 정확한 원운동을 하도록 배려하신 것입니다. 만일 달이 현재보다 10% 정도 지구에 접근하면, 커진 인력으로 바닷물이 대부분의 대륙을 쓸어버리게 되어 지구는 우리가 더 이상 살 수 없게 되어 버립니다. 일정한 중력 유지는 우리의 삶에 필수 요소입니다.
세 번째 달을 만드신 목적은 조류작용을 만드시기 위함입니다.
달의 동일한 면이 항상 지구를 향하고, 서로 일정거리를 유지하며 돌고 있는 또 다른 이유는 조력 때문입니다.
앞에서 설명한 달과 지구 사이에 작용하는 인력은 지구 표면에 조력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조력은 달에 가까운 지표 부분에서 다소 더 강하며 따라서 달을 향해서 해수면이 부풀어 오르게 되어 만조를 이루고, 반대로 달로부터 먼 지표 부분은 작은 조력을 받게 되어 해수면이 낮아지게 됩니다. 달은 자전하는 지구의 궤도를 돌게 되므로 매일 두 번의 만조와 두 번의 간조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조류(潮流 : 밀물과 썰물에 의해 발생하는 바닷물의 흐름)는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조류는 대양의 해안과 해협들을 정화하며, 해류가 계속적으로 순환하도록 도와주어 해양의 정체 현상을 막아줍니다.
정체된 해수의 부패현상은 해수에 포함된 소금이 방부 역할을 돕겠지만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합니다. 현대의 산업화로 인한 수질의 오염을 고려할 때 조류는 지구의 생물에게 산소의 공급원이 되어서 우리 인류에게는 필수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의 로마서 1장20절에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만드신 그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라고 하신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이미 모든 것을 아시고 예비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통하여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담아두셨는데 사람들은 애써 이 사실을 부인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리고 성경을 과학적이지도 못하고 엉터리라고 비난을 합니다. 성경이 비과학적이고 무지한 책이라고 심하게 비난을 받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대표적인 것이 이것입니다.
시편 19편 6절에 보시면 "태양은 하늘 이 끝에서 나와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태양의 온기에서 피하여 숨은 자가 없도다" 이 말씀을 가지고 태양이 왔다 갔다 한다 하여 중세의 카톨릭 교회에서는 천동설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런데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오가 보니까 그게 아니거든요. 지구가 왔다 갔다 하는데, 상대적 운동으로 태양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 뿐이라 하여, 지동설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재판에 들어갔고, 죽게 되자 할 수 없이 천동설을 인정한 뒤에 재판정에서 나오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 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어떻습니까? 세월이 지나서 지구가 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경은 지성인이 믿을 것이 못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현재 최첨단 우주과학자들인 나사의 과학자들도 우주 비행을 할 때, 모든 계산을 (사실은 우주선이 날아가고 있지만) 우주선은 정지해 있고 다른 모든 별들이 우주선 주위를 다니고 있다는 상대적 운동으로 계산하여 우주선을 쏘아 올리고 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최근에 와서 놀라운 사실이 발견되었습니다. 은하계 자체가 맹렬한 속도로 회전하면서 움직이고 있으며, 태양은 태양계 모든 별들을 데리고 시속 약 백만 km의 속도로 (로케트 속도의 백 배나 되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하늘 이 끝에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옛날에는 천동설만 주장하다가 지구가 돈다는 사실을 알고 지동설을 주장하였지만 이들은 한 부분만 알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 그대로 받아들여도 됩니다. 천동-지동설인 것입니다.
성경은 우주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그중에 창세기 혹은 그 이전에 기록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욥기에 우주에 관한 많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중에 하나인 욥기 38장 31절에 보시면 "네가 묘성을 매어 묶을 수 있으며 삼성의 띠를 풀 수 있겠느냐?"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묘성이라는 것은 황소자리에 있는 별로서 얼마 전 까지는 서로 아무관계 없이 뚝뚝 떨어져 있는 개개의 별로서만 알았으나, 최근에 와서 비로소 묘성은 성단(星團 : 중력으로 뭉쳐 있는 별들의 무리 = 떨기별)임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수 십 개의 별들이 서로의 인력으로 묶여 함께 움직이는 성단이라는 것이 밝혀진 것이지요.
묘성(들)이 개개의 별이 아니라 떨기별임을 천문학자들이 이제야 알게 되었으나, 성경은 3000년 혹은 그 이전에 정확한 묘사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에 "네가 삼성의 띠를 풀겠느냐?"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리온 별자리를 보셨을 것입니다. 사각형 구도를 하고 있는 별 네 개의 속에 3개의 가지런한 별들을 보았을 것입니다. 이 세 개의 별을 삼태성이라고 부르는데 삼태성은 장군의 허리띠입니다.
우리가 지구에서 볼 때 별자리는 흔들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욥에게 말씀하십니다. "삼성의 허리띠를 풀겠느냐? 인간은 할 수 없지? 그러나 하나님은 할 수 있다" 하시며 인간의 나약함, 무지함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이 말을 들은 인간들은 근래에까지도 웃었습니다. 인간의 생각에 별자리는 절대로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최근에 전문적인 천체관측에 의해 오리온자리의 삼태성은 지구에서 볼 때에만 세 개의 별이 줄을 서 있는 것이지 우주공간에 볼 때, 즉 입체적으로는 뚝뚝 떨어져 있는 별들임이 밝혀졌습니다. 즉 삼성의 허리띠는 풀려 있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사람들은 도저히 알 수 없었던 내용이 어떻게 성경에 씌여 있었을까요? 이러한 사실을 볼 때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이 지은 책이 분명함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또 별 중에는 혜성이 있습니다. 혜성이 날아가다가 작은 돌들이 지구, 달 등에 떨어지게 됩니다. 우주에서 날아와서 떨어진 돌 이것을 운석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운석의 존재가 과학적으로 확실하게 증명된 것을 1803년의 일입니다. 이 돌이 보통 돌이 아니고 우주에서 날아온 것이라는 것을 밝혀낸 것이 불과 200년 전입니다.
그런데 지금부터 3,300년 정도 이전에 기록된 여호수아서에 보면, 하나님께서 악한 아모리 족속을 멸하시며 특수한 방법을 쓰셨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큰 덩이 우박을 아세가에 이르기까지 내리게 하시매...". (수 10:11)
그런데 우리말 성경에는 번역에 약간 문제가 있습니다. 중국어 성경이나 이런 것을 보면서 번역을 하다 보니 이렇게 된 것 같은데요, 덩이 우박이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실제로 영어성경에 보시면 great stone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박'이 아니라 거대한 '바윗돌'이 떨어졌다고 되어 있습니다.
더욱 더 분명한 사실은 성경의 원전인 히브리어 성경에 보면 하늘에서 '에벤'을 떨어뜨려 멸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에벤'은 '바위' 흑은 '돌'을 뜻합니다. 히브리어에 우박은 '에벤'을 쓰지 않고 '바라드'라는 말을 씁니다. '우박'과 '돌'은 히브리어로 분명히 다릅니다. 그런데 한국의 번역가들이 "하늘에서 떨어졌으면 우박말고 뭐 있겠냐" 하고 오해하여 잘못 번역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관찰한 것은 불과 200년 전이지만 성경에는 이미 수 천년 전에 운석의 존재를 기록했던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넷째 날에 해와 달과 별을 만드시고 자전만 하던 지구를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하게 만드심으로 주야를 나누실 뿐 아니라 사시와 연한도 만드셨습니다. 주야, 사시, 일자, 연한은 시간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천지도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시간도 주셔서 살게하신 하나님, 특별히 우리나라에는 뚜렷한 4계절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 1장 14~19절 / 지용수목사
평소 저는 거의 텔레비전을 보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번 미국 집회 때 묵었던 호텔에서 CNN 방송을 켜보았더니 얼마 전 강진으로 피해를 입은 파키스탄 사람들의 모습이 방영되었습니다. 죽은 아들을 안고 오열하는 어머니, 죽은 줄 알았던 아들이 살아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 아들을 품에 안고 기뻐하는 아버지, 딸은 살았지만 남편이 죽은 것을 보고 울부짖는 여인……, 그것을 보고 저도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들을 긍휼히 여겨 주세요. 저들을 도와주세요.”
우리는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또 그들에게 사랑을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사건을 접할 때 병아리가 물 한 모금 먹으면 하늘을 쳐다보듯이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됩니다.
이것은 남의 일이 아닙니다. 성경을 보면 말세에 그런 지진과 환난과 기근과 천재지변이 계속해서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파키스탄에서만, 인도의 국경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미국에서도, 서울에서도, 부산에서도, 광주에서도 일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지진과 천재지변은 횟수가 점점 더 많아지고 그 충격이 더 커지고 강력해지는 것입니다.
만일 그런 천재지변이 우리를 강타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말세에는 온 땅에 이런 일이 계속해서 오지만 누가복음 21장 34절에서 36절에 보면 주님께서 피할 길도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 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할렐루야!
우리는 이런 사건들을 볼 때 더 깨어서 하나님 앞에 나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파키스탄에 지진이 일어나기 전에 신비로운 일이 있었답니다. 지진이 일어나기 직전 이른 아침에 산의 모든 새들이 쇠톱으로 쇠를 자르는 것같은 비명을 지르며 허공으로 날아갔다고 합니다. 특히 까마귀들이 얼마나 괴성을 질렀는지 사람들은 고막이 찢어지는 줄 알았답니다.
이번뿐 아니라 지난번 남아시아 지진 해일 때에도 새들이 미친듯이 울부짖고 코끼리들이 언덕과 산으로 올라가고 산양과 다른 동물들도 미리 피했다고 합니다. 사람은 몰라서 피하지 못했는데 짐승과 새들은 피했던 것입니다. 새들은 신문이나 방송이 없어도 육감으로 위험이 올 것을 느끼고 피하도록 하나님께서 신비롭게 만드신 것 같습니다.
새들도 감각적으로 위험을 느끼고 피할 수 있도록 만드셨는데, 하나님께 주파수를 맞추고 사는 사람들에게 피할 길을 주지 않으셨겠습니까? 이런 때일수록 우리는 더욱더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어야 됩니다. 여리고 성이 무너지고 여리고 사람들이 다 죽을 때도 하나님께 주파수를 맞춘 라합과 그 집안사람들은 다 살았듯이 이 땅에 험한 일이 아무리 많아도 하나님께 채널을 맞추고 사는 사람은 구원받을 줄로 믿습니다.
이사야 43장 1절 이하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우리 인생은 장미꽃이 만발한 정원을 거닐듯 노래하며 지나갈 때도 있지만 정말 긴장해서 지나가야 할 때도 있습니다. 큰 물길을 만날 수도 있고 불속을 통과해야 되는 어려운 일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맞추어 살면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구원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 위대하신 하나님, 참새 한 마리까지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 천지를 지으실 때 무에서, 아무것도 없는 데서(from nothing) 모든 것을 지으셨습니다. 빛을 지으시고, 낮과 밤을 지어 구별시키시고, 질서를 잡으셨습니다. 그리고 공기 중에 물들이 뒤섞여 혼돈되어 있었는데 하늘을 만드셔서 하늘 위의 물과 땅의 물로 구별하시고 하늘과 땅의 질서를 잡으셨습니다. 또 흙과 물이 뒤섞여 있는 지구를 땅과 바다로 구별 지으신 후 모든 꽃들과 풀들과 오곡백과가, 산천초목이 자라도록 지으셨습니다. 할렐루야!
그 다음,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태양과 달과 하늘의 별들을 지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저것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아이들처럼 이 세상을 즉흥적으로 지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순서대로 질서 있게 지으셨습니다.
모든 풀들과 꽃들과 오곡백과는 태양의 열과 빛이 없으면 죽기 때문에 바로 다음 날 그것들이 필요로 하는 태양을 만드셔서 모든 생명을 살리셨습니다.
모든 식물과 모든 동물을 살리신 하나님께서는 우리 사람도 살리십니다. 또 우리 영혼을 살리시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영생을 얻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필요를 채워 주십니다. 풀과 꽃과 나무와 숲에 필요한 태양을 주신 하나님께서는 그것들보다 더 중요한 우리의 필요를 다 아십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제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우리 교회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다 아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25절에서 33절에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저는 예전에 공항이나 터미널에서 차를 타러 갈 때 가방을 어깨에 메려다가도 양복이 구겨질까 봐 그 무거운 것을 손에 들었습니다. 팔이 늘어질 듯이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네 옷보다 네 몸이 귀하니라.’
그래서 양복이야 구겨지든 말든 그것을 어깨에 멨더니 편안했습니다.
말씀이 사람을 살립니다. 순간순간 살립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참 기가 막힌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키가 작아야 좋은 사람은 키를 작게 하시고, 키가 커야 좋은 사람은 크게 하십니다. 그러니 키가 작다고 스트레스 받을 필요도 없고 키가 크다고 부끄러워 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따라 합시다.
“생긴 대로 살자.”
저는 제 키가 알맞다고 생각하는데, 저희 신혼 때 처숙모님이 “저 인물에 키만 조금 더 컸으면 얼마나 좋았겠나?”라고 하셨다는 말씀을 듣고 웃었습니다. 제 키가 이보다 조금 더 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정도가 제게는 가장 좋은 것입니다. 목사인 제가 너무 잘 생기면 교인들이 시험 듭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대로가 가장 좋은 것입니다.
서울에 사는 제 조카는 고등학교 2학년인데 공부는 하지 않고 매일 쌍꺼풀을 만든다고 시간을 다 보낸답니다. 그 정도라면 쌍꺼풀 수술을 해 주면 될 텐데, 아이의 아버지가 쌍꺼풀 수술을 반대한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제 아내가 그 아이의 부모에게 쌍꺼풀 수술을 해 주면 아이가 스트레스 받지 않고 공부를 열심히 할 것이라고 했더니 부모가 그 말을 받아들여 수술을 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아이가 “이제 나는 더 이상 소원이 없다.”라며 공부를 하더랍니다.
여러분도 쌍꺼풀 수술하고 싶으면 하세요. 그러나 쌍꺼풀이 있는 것이나 없는 것 때문에, 잘 생기고 못 생긴 것 때문에, 키가 크거나 작은 것 때문에 염려하면 안 됩니다. 염려한다고 키가 쑥쑥 자랍니까? 마음만 상합니다.
전도서 6장 6절에 『저가 비록 천년의 갑절을 산다 할지라도 낙을 누리지 못하면 마침내 다 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뿐이 아니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전도서 6장 3절, 4절에도 사람이 비록 자녀를 일백이나 낳고 장수한들 마음에 즐거움이 없으면 무엇 하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스트레스 받지 말고 즐거워하며 있는 그대로 기뻐하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 6:28-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Seek first his kingdom and his righteousness, and all these things will be given to you as well.)’
이 말씀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 편입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자신감이 있습니다. 그러나 실패하는 사람은 늘 불안하고 자신감이 없습니다. 그리고 성공한 사람은 대체로 걸음이 빠릅니다. 우리의 걸음이 빠르기를 바랍니다. 빨리 걸으면 운동도 되고 성공할 날도 올 줄로 믿습니다.
미국의 한 유명한 목사님이 몹시 힘들게 개척교회를 하고 있을 때입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는데 비행기 표를 사지 못하여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한 사장님이 백지 수표를 주시며 “목사님, 마음대로 쓰시고 오세요.”라고 했습니다. 목사님은 그 사장님의 도움으로 비행기 표를 사서 어머니의 장례식에 가게 되었습니다. 비행기 안에서 감사를 드리고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라는 빌립보서 4장 19절 말씀을 읽다가 ‘사장님을 보내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구나.’라고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장님의 수표는 일회적이지만 하나님께서는 한평생의 수표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비행기 안에서 “야! 하나님은 나의 백지수표다.”하며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고 합니다. 그 때부터 목사님에게서 힘이 흘러나와 설교가 달라지니 교회가 크게 부흥되고 목사님도 미국을 뒤흔드는 복음 전도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목자이시고 우리는 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주일을 지키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십일조를 드리고, 하나님 말씀대로 부지런히 살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나아가면 우리의 앞길에는 절대로 부족함이 없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The LORD is my shepherd, I shall not be in want.)』
내게 필요한 것을 다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딸이니 하나님을 닮아 하나님처럼 이웃의 필요를 채워 주어야 됩니다.
사도행전 9장 36절 이하에 보면, 재벌인 다비다는 교인들이 겉옷이 없으면 겉옷을, 속옷이 없으면 속옷을 채워 줍니다. 그런데 한 번만 채워 주는 것이 아니라 항상 계속해서 채워 줍니다. 영어 성경에 보면 ‘Tabitha, who was always doing good and helping the poor.’라고 되어 있습니다.
지난 주에 한 목사님은 택시를 탔는데 기사분이 식구는 많은데 수입이 적어 어렵게 산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기사분에게 상식 밖의 큰돈을 주었다고 합니다.
내가 일억을 번다고 자랑할 것이 아닙니다. 백억을 번들 나누지 않으면 자랑할 것이 아닙니다. 통장에 쌓이는 것이 많으면 좋지만 그것이 자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딸은 나누는 것이 많음이 자랑인 줄로 믿습니다.
저도 매주 두 세 사람을 채워 줍니다.
그렇게 나누면 어렵게 됩니까? 아닙니다.
누가복음 6장 38절에 말씀하십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할렐루야!
타작할 때 보면 타작한 벼를 가마니에 가득 붓습니다. 거기에 막대기를 넣어서 흔들면 벼가 쑥 내려갑니다. 그러면 거기에 또 벼를 더 갖다 붓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나누는 집에 축복을 주시고 또 흔들어서 더 채워 주시고 더 채워 주시고 넘치게 해 주십니다. 할렐루야!
지금 세계를 채워 주는 나라는 미국입니다. 러시아나 중국이 아닙니다. 미국이 한국을, 일본을 살렸습니다. 굶어 죽어가는 나라를 미국이 살립니다. 그런 미국이 최고로 부강합니다. 어려워도 미국은 계속 성장합니다. 이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 예배당을 지을 때도 확실한 숫자는 모르겠지만 4,50개 농어촌 교회를 계속해서 지원했습니다. 그래도 교회는 더 잘 짓게 되었고 지으면서 부흥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지금도 우리 교회가 우리 노회의 연약한 교회들을 거의 다 섬기고 있고, 때때로 어렵다는 소식을 들으면 또 지원해 드립니다. 전국적으로도 어려운 교회들과 신학대학들을 돕고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선교사를 후원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선한 일을 많이 하고 있어서 우리가 망했습니까? 더 잘 되는 줄로 믿습니다. 이제 우리가 짓는 새 성전에는 탁아소도 있습니다. 형편이 괜찮은 집은 아이들을 선교원에 보내도록 하고, 형편이 어려운 맞벌이 집은 아이를 교회에 맡겼다가 퇴근할 때 데려가도록 할 계획입니다. 지역사회를 채워 주는 일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0장 28절에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할렐루야!
대접을 받고 기뻐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대접 받는 것을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됩니다. 대접하고 기뻐하는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아들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세상을 아름답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창조하시고 그 다음에 아름답게 하셨습니다.
하늘의 태양빛을 만들어 주시니 꽃이 이제 비로소 꽃이 됩니다. 노란 꽃, 빨간 꽃, 모두가 빛을 발합니다. 아름다운 여인이라도 빛이 없으면 아름답지 않습니다. 빛이 없다면 화장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게으른 여자들도 빛 때문에 부지런히 세수하고 화장도 하고 옷도 차려 입어서 예쁜 것입니다.
푸른 바다, 푸른 하늘, 뭉게구름도 빛이 있어서 아름다운 것입니다. 가을이 되면 아름다운 단풍이 우리의 넋을 빼앗아가지만 빛이 없으면 그것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아름답게 하십니다. 밤하늘에 별들이 없으면 얼마나 캄캄합니까? 얼마나 절망적입니까? 별은 소망을 상징합니다. 하늘에 수놓인 별들을 보며 ‘별 하나 나 하나, 별 둘 나 둘, 어느 별이 내 별이고……’ 하면서 희망을 찾고, 또 그 별들을 보며 하늘의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창공에 빛난 별 물 위에 어리어 바람은 고요히 불어오누나’하고 감격의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찬송가 78장을 감격 차게 부르려고 설교 준비하면서 다섯 번이나 불러보았습니다.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저 솔로몬의 옷보다 더 고운 백합화 주 찬송하는 듯 저 맑은 새소리 내 아버지의 지으신 그 솜씨 깊도다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저 아침 해와 저녁놀 밤하늘 빛난 별 망망한 바다와 늘 푸른 봉우리 다 주 하나님 영광을 잘 드러내도다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저 산에 부는 바람과 잔잔한 시냇물 그 소리 가운데 주 음성 들리니 주 하나님의 큰 뜻을 내 알듯 하도다」 할렐루야!
기가 막힙니다. 하나님께서는 꽃을 이렇게 아름답게, 사람을 이렇게 아름답게, 세상을 이렇게 아름답게 하십니다. 우리 모두가 보기에 아름답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도 좋았습니다.(God saw that it was good.)
“내가 보니 좋다.” 할렐루야!
이 지용수를 그냥 두면 무엇을 하고 있을지, 무슨 짓을 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저를 아름답게 만들어 주십니다. 여러분을 아름답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갈수록 아름다워지는 것입니다. 저 지용수는 5년 뒤에, 10년 뒤에 더 훌륭하고 아름다운 인격자가 되고 목회자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름다운 장로님, 아름다운 성도님이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도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딸은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나 때문에 세상이 아름답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설교를 실감나게 하기 위해서 지난 목요일 밤 성회를 섬긴 후 밤 11시에 청계천에 다녀왔습니다. 설교는 발로도 해야 합니다. 보지 않고 본 것같이 하면 재미가 없습니다. 신문에서 보기는 했지만 그래도 직접 보고 직접 걸어보려고 가 보았습니다. 복원하기 전의 청계천은 칙칙하고 더럽고 냄새나는 어두움의 이미지였습니다. 그런데 서울 시장님과 서울시가 맑고 아름다운 청계천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 일을 하기 전에 반대가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시장님이 그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결단하여 첫날에 다리를 다 부수어버렸습니다. 다리를 부수어버리고 나니 그 많은 반대가 잠잠해졌습니다. 반대해 보았자 소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청계천 복원의 아이디어는 시장님이 기도하다 얻은 것이랍니다. 기도해서 얻은 아이디어에도 반대가 있을 수 있습니다. 반대가 있어도 꼭 해야 될 일은 해야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정치인들은 여론에 흔들리지 말고 원칙을 가지고 나라를 살리는 길로 나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서울시장님이 그 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청계천을 이루어 놓으니 지금은 얼마나 좋습니까? 매일 몇 십만 명이 그곳을 찾아온다고 합니다. 제가 갔던 그 늦은 시간에도 집에 가지 않고 ‘여기가 좋사오니’하는 사람들이 즐비했습니다. 또 그날 SK에서는 꽃 축제를 열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모릅니다. 와! 완전히 꽃섬이었습니다. 게다가 군데군데 작품이 있고, 맑은 물이 흐르고……. 3천 9백억을 들여 공사를 했는데 33조의 경제적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세계 상품이 되어 앞으로 많은 관광객이 모여들 것입니다. 청계천 때문에 서울이 아름다워지고 우리나라가 업그레이드되었습니다.
이명박 시장님은 대단한 분입니다. 교회 장로님인 그분과 점심 식사를 함께 한 적이 있는데 그때 그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목사님, 저는 다른 것은 못해도 교회 차량 안내는 꼭 합니다. 낮에나 밤에나 욕을 들어도 안내를 합니다.”
교회에서 15년째 차량 안내를 했다고 합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니 혹 어떤 분은 제가 이명박 시장님의 선거운동을 하는 것으로 오해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여당도 야당도 아니고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잘 하면 칭찬하는 사람입니다.
교회에 있으면 교회를 아름답게, 시에 있으면 시를 아름답게 하는 것이 귀한 일입니다. 할렐루야!
저는 양곡교회 목사이기 때문에 우리 양곡교회를 아름답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제가 미국 양곡교회를 섬길 때는 미국 교회를 아름답게 하려고 교회뿐 아니라 그 주변에 있는 일곱 여덟 집 앞까지 청소를 했습니다. 제가 청소하는 것을 보신 한 장로님께서 감동을 받고 ‘내가 하자.’라고 결심하셨답니다. 그래서 그 장로님이 저를 은퇴시키고 그 때부터 지금까지 그 너른 교회 안팎을 깨끗이 청소하십니다. 그런데 장로님이 새벽 3시 반에 오셔서 청소를 하시는 바람에 제가 미국 교회에 가면 그 전에 일어나야 하니 새벽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그 장로님이 지금 여기에 와 계십니다. 장로님, 일어서 보십시오. 여러분, 장로님의 얼굴이 얼마나 곱습니까?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충성하시니 건강의 복을 받아 얼굴이 저렇게 곱고 빛나는 것입니다.
가정주부는 집을 아름답게 가꾸어야 합니다. 제가 이번 집회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옷을 갈아입으려고 서랍장을 여니 그 안이 가지런하고 신발장도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어서 기분이 몹시 좋았습니다.
환경을 아름답게 가꾸어야 합니다. 아름다운 환경에 있으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또 우리의 현실도 아름답게 해야 합니다.
아름답게 하는 것은 감사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과 실라가 매를 맞고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그들이 거기에서 “하나님은 뭐하시는 거야? 복음을 전하는 우리를 이렇게 고생시키시다니? 머리털까지 세신다고 하시더니 그 약속도 지키지 않으시고…….”라며 원망했다면 감옥이 얼마나 칙칙했겠습니까? 그러나 감옥에서도 찬송하고 감사하니, 감옥이 밝아지고 옥문이 열렸습니다. 할렐루야!
이스라엘 백성이 길을 가다 길이 험해지니 모세를 원망합니다. 그때 뱀이 옵니다. 불평하는 사람이 뱀에게 물려 죽습니다. 아들이 죽고 남편이 죽으니 얼마나 힘듭니까? 밝은 태양 빛 앞에서 태양을 보는 사람은 “야! 태양이 뜨는구나. 하나님, 저도 저 태양처럼 떠오르게 해주세요.”하며 희망 차게 됩니다. 그러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그 밝은 태양 빛 앞에서도 뒤돌아서서 “여기에 그늘이 있네. 아침인데도 그늘이 있네.”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불평하면 밝은 곳도 어두워지고 감사하면 어두움도 사라지게 됩니다. 거름을 쌓아놓으면 파리가 몰려오고 벌레가 생깁니다. 그러나 꽃을 심으면 벌과 나비가 오듯이, 우리가 감사할 때 은혜가 오는 것입니다. 복이 오는 것입니다. 아름다워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평하면 그 사람도 뱀에게 물리지만 그 사람 때문에 많은 사람이 다칩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어디에서든 불평하는 말을 듣게 되면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그런 말을 하면 당신은 망하고 우리는 아픕니다.”라고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에는 모든 기관마다, 가정마다 감사만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아무리 어두워도 감사하면 하나님께서 빛을 주십니다. 그러나 태양이 떠오르는 아침에도 불평하면 그늘이 지는 것입니다. 마귀가 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귀가 우리를 쓰지 못하도록 마음 관리를 잘 해야 됩니다. 감정 관리를 잘 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쓰시면 귀하게 만들어 주시지만, 마귀는 쓰고 나서 버립니다. 마귀는 우리를 귀하게 만들어 주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2장 26절에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우리가 주님을 섬기고 감사하면 귀한 사람이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불평하면 마귀에게 끌려가서 뱀에게 물리게 됩니다.
집에서도 감사하고, 어디에서든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름답게 하는 것은 그 사람이 감추고 싶은 것은 감추어 주고 드러내고 싶어 하는 것은 드러내 주는 것입니다.
노아는 의인입니다. 성경에 보면,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을 다 멸하실 때도 노아 때문에 노아의 가족은 살리셨습니다. 창세기 9장에 보면, 그런 의인 노아가 포도주를 너무 많이 마시고는 그만 술에 취해 발가벗은 몸으로 누워 있었습니다.
어느 날, 여러분이 새벽 기도하러 일찍 나왔더니 제가 술에 취해 발가벗고 현관에 누워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럴 때 “아이구! 목사님, 꼴좋다.”라고 하면 큰일 납니다.
노아의 아들 함이 발가벗고 누워 있는 노아를 보고 ‘아버지가 우리보고 조심하라 하더니……. 뭐? 의인이라고? 의인 좋아하네. 술꾼이구만.’ 하며 형제들에게 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 동생. 아버지 좀 봐. 술에 취해 있는 아버지의 꼴을 좀 봐.”
함이 보지 않을 것을 보고 말하지 않을 것을 말하다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종의 종이 되었습니다. 자자손손 평생 종노릇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셈과 야벳은 ‘아이쿠, 우리 아버지께서 실수하셨구나.’하고는 옷을 가지고 뒷걸음쳐서 아버지의 몸을 덮어 아버지를 존귀하게, 아름답게 해드렸습니다. 그리고 아무 말 하지 않았습니다. 셈과 야벳은 보지 않아야 할 것은 보지 않고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셈과 야벳의 장막을 창대케 하시고 복에 복을 쏟아 부으셨습니다.
여러분, 노아같은 의인에게도 약점이 있었습니다.
제가 귀한 목사, 하나님의 마음을 추수 때의 냉수처럼 시원하게 해드리는 목사가 되고 싶어 노력합니다. 여러분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는 목사가 되고 싶어 노력합니다. 하지만 저 때문에 여러분이 고민하고 아파할 일이 있을 것입니다. 제가 아내의 마음을 쓸쓸하게 하지 않고 아내를 기쁘게 해 주는 남편이 되기를 원하지만 제 아내가 때로는 저 때문에 아파하듯이, 여러분도 저 때문에 아파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덮어주고 저를 아름답게 만들어 주면 여러분에게 복이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도 여러분을 아름답게 하고 있습니다. 종종 말씀드리지만 여러분을 섬기는 제가 어디에 가서 여러분을 나쁘게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우리 장로님들이 천사 같고 여러분이 천사 같다는 말만 합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우리 양곡교회를 아름다운 교회로 압니다. 제가 여러분을 아름답게 하듯이 여러분도 저를 아름답게 하시기 바랍니다. 누가 저를 허는 말을 하거든 “그런 소리 하지 말아요.”하고 막으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런 말 한 마디가 나쁜 누룩으로 퍼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이 이렇고 저렇고…….”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겠지만 혹 그런 사람이 있으면 여러분이 막으셔서 저를 아름답게 지켜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아름다운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서울의 한 교회 목사님은 이북에서 혼자 오셨습니다. 사모님은 뒤에 오시려 했는데 공산화가 되는 바람에 내려오지 못하신 것입니다. 이북에서 넘어온 다른 사람들은 재혼을 했는데 목사님은 “내 아내가 이북에 있는데 내가 어떻게 결혼을 하나?” 하시며 죽 혼자 사셨습니다. 그러니 온 교우들이 목사님을 존경했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마음이 약해진 목사님이 예쁜 여자를 보고 시험 들어 그 여자와 함께 잠을 잤습니다. 다음 주일, 어렵게 강단에 선 목사님을 마귀가 그냥 두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을 꺾기 위해 그 여자를 부추겼습니다. 그 여자가 목사님을 망신시키려고 목사님을 향해 걸어왔습니다. 여자가 걸어오는 것을 본 본 목사님이 뒷문으로 도망을 가셨습니다.
그래서 사실을 알게 된 장로님들이 모여서 의논을 했습니다.
“이북에 사모님을 두고 내려오신 목사님들이 거의 다 결혼을 하셨는데, 우리 목사님께서는 오늘까지 절개를 지키며 혼자 사셨습니다. 그 뜻이 얼마나 귀합니까? 어쩌다 일어난 한 번의 실수이니 우리가 덮어 드립시다.”
“그럼요. 그럼요.”
장로님들이 목사님의 실수를 다 덮어 드렸습니다. 목사님이 그 교회에서 30년간 목회를 잘 하셔서 대 교회를 이루고 은퇴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냥 넘어가기가 정말 어려운 일이라도 덮어 줄 때 아름답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잘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크게 되어야 됩니다.
우리 교우 중 한 분은, 집안 형편이 어려운 먼 친척이 결혼할 때 500만 원을 도와주었다고 합니다. 우리 교우가 경제적인 힘이 있으니 그렇게 도와주지, 한 달 수입이 백만 원밖에 되지 않으면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록펠러처럼 크게 되면 크게 도울 수 있고, 세상을 아름답게 할 수 있습니다. 록펠러는 미국의 거의 모든 대학에 교회를 세워 주었습니다.
아름답고 크게 되는 길을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복도 받아야 되지만 우리가 노력해야 됩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능력도 기르고 실력도 길러야 됩니다.
그 다음에 인격을 지켜야 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습니다.
“사람은 능력으로 성공하고 그 성공은 인격으로 지킨다.”
따라 합시다.
“능력으로 성공하고 인격으로 성공을 지킨다.”
성공하고도 인격을 지키지 못하면 무너집니다.
모 백화점의 사장이 어느 성악가와 눈이 맞아 집을 나가고, 그 부인은 부인대로 어떤 남자와 돌아다녔습니다. 그래서 그 집이 망했습니다.
인격을 지키지 못하면 성공해 놓고도 무너지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요셉처럼 인격을 지킬 수 있기 바랍니다.
우리뿐 아닙니다. 우리의 기업인 아들딸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크고 아름답게 가꾸어야 됩니다.
은퇴한 미국의 한 선교사님이 아들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제가 잡지 회사를 만들려고 하니 기도해 주세요. 그리고 가능한 대로 돈을 좀 많이 보내 주세요.’
선교사님에게 무슨 돈이 있겠습니까? 선교지에 가보면 선교사님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라면 하나도 귀합니다. 저는 선교지에 갔다 오면 그곳 아이들의 빛나는 눈이 떠오르기도 하고 가슴에 불이 붙어서 며칠간 밥을 먹지 못합니다. 그곳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어려운 선교지에서 돌아온 선교사님에게 무슨 돈이 있겠습니까? 선교사님은 통장에 있는 돈 600불을 다 털어서 아들에게 보내주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아들을 도와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아버지가 보내 준 편지와 돈을 받은 아들은 그 600불이 다른 사람의 600만 불보다 더 귀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이 잡지 회사가 잘 되게 해주세요. 잡지가 잘 만들어지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고 열심히, 성실히 일했습니다.
그가 바로 세계 잡지의 정상, 타임지의 창건자 헨리 R. 루스입니다. 선교사님의 아들이 기도하며 만든 타임지는 사람을 방탕하게 하거나 부패시키는 기사를 싣지 않습니다. 건전하고 유익한 것, 바른 것만 싣습니다. 헨리 R. 루스는 잡지로 세상을 아름답고 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제 아들과 사위가 방송국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들과 사위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방송국에서 빛을 발하도록 기도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또 우리 교회에서 대통령도 나오고 장관도 나오기를 바랍니다. 법관들도 많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재벌들도 많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자녀들에게 꿈을 심어주며 길러야 됩니다. 그리고 자녀들을 위해 손들고 기도해야 합니다. 자녀를 위해 새벽기도를 해야 됩니다. 자식에게 돈만 대주고 좋은 학교에만 보내면 될 줄 압니까? 우리가 새벽에 나와서 손들고 기도해야 이 유혹 많은 세상에서 아이들이 유혹과 어려움을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을 잘 길러 봅시다. 우리 자녀를 통해 이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어 봅시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멋진 가문을 이루어 봅시다. 가문의 전통을 자랑하지 말고 우리가 가문을 빛내 봅시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채워 주시고 아름답게 하셨듯이, 우리도 세상을 채워 주고 아름답게 하는 하나님의 멋진 자녀들로 살아가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물과 생명 그리고 인생의 교훈
이기복목사 / 창 1:20-23, 요 4:13-14)
1년 중 물을 가장 필요로 하는 계절이 다가왔습니다. 사람들마다 물을 찾아 나서는 계절입니다. 바다나 강과 유명 계곡에는 물을 찾는 인파들로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룹니다. 물과 인생은 한 시도 떨어질 수 없는 필연적인 관계입니다. 양식 없이는 살아도 물이 없이는 한 시도 못산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우주만물을 창조하실 때 처음에는 빛을 창조하시고 다음으로 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최초로 만든 에덴동산에는 4개의 강이 흐르게 하였습니다. 그 강이 에덴동산만 아니라 온 세계 생명체를 살리는 젖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류의 4대 문명의 발상지도 모두가 강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메스포타미아 문명은 유브라데스 강과 티그리스 강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중국의 문명은 황하 강, 인도의 문명은 인더스 강, 이집트의 문명은 나일 강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번성하였습니다. 또한 세계 모든 큰 도시나 수도는 강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미국의 뉴욕에는 허드슨 강, 런던의 테임즈 강, 파리의 세느 강, 모스크바에는 모스크바 강, 옛날 수도였던 상트 피테스부르크도 도심지를 관통하는 유명한 네바 강이 있습니다. 서독에서 동독을 관통하는 라인 강, 대한민국의 수도의 서울을 발전시킨 한강, 평양의 대동강, 백제의 수도를 이루었던 백마강, 영남지역의 젖줄 낙동강, 호남의 번영을 가져온 영산강 등을 볼 수 있습니다. 물이 한 나라와 도시에 이렇게 중요합니다.
물과 인생, 물과 생명은 과연 어떤 관계에 있을까요? 왜 그렇게 물이 중요한가요?
1. 물과 생명
물이 중요한 것은 생명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물이 없이는 어떤 생명도 존재가 불가능합니다. 창 1:20절에 보면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때문에 태초부터 물은 빛과 함께 생명을 생성하고 유지시키고 번성하게 하는 제일 중요한 요소입니다.
하나님은 최초로 인간과 생물들이 살 수 있는 에덴동산을 조성하셨습니다. 그 동산에 모든 생명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물이 필수였습니다. 그래서 에덴동산에 4개의 강을 만드셨습니다. 이것이 최초로 생긴 강입니다. 첫째는 비손 강, 둘째는 기혼 강, 셋째는 힛데겔 강입니다. 그리고 넷째 강이 유브라데 강입니다. 이것은 동서남북을 의미한다고 할 수도 있고 더 나아가 사방에 물이 흐르게 하였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 강에서 흘러나오는 물로 모든 생물이 살고 각종 과일나무에 열매를 맺게 하셨고 인간이 생존하게 하셨습니다. 지구의 약 70%가 물이고 지구 면적의 60%도 물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자연계만 아니라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에게도 물은 생명의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사람의 몸이 70%가 물이라고 합니다. 생명이 어머니의 배속에 잉태되어 10개월 동안 물속에서 살다가 마지막 임종할 때까지 물을 마시다가 가는 것입니다. 세계 보건기구인 WHO에서는 “사람이 물만 잘 마셔도 80%의 질병을 치유할 수 있다”고 발표하여 물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 우리의 신체 내에서 체온을 조절하고 혈액순환을 통하여 영양분과 배설물을 운반하는 것도 물입니다. 그래서 우리 몸속에서 물이 1-2%만 부족하여도 심한 갈증을 느끼며 5%만 부족하면 생명이 위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하여 광야 생활을 할 때에도 가장 필수적인 것이 물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반석에서도 물이 나게 하셨습니다. 사람은 음식을 먹지 않고 40일 길게는 70일을 견딜 수 있어도 물을 마시지 않고는 얼마 못삽니다.
물은 생명에 필수적인 요소이고 생명을 살리고 풍성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물이 흐르는 냇가나 들판은 생명이 풍성하고 약동합니다.
2. 물과 번성
지금까지 인류의 가장 치열한 전쟁은 기름전쟁이었습니다. 기름이 나는 지역이나 나라는 전쟁이 끊이질 않고 마치 지상의 화약고와 같이 되었습니다. 석유나 기름은 돈과 직결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물은 생명과 직결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름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물입니다.
물이 없으면 아무리 땅이 넓고 비옥하다 하여도 사막이나 다름없는 불모지가 됩니다. 아프리카의 사하라 사막, 미국 서부의 모하비 사막, 몽골의 고비사막, 아라비아 사막 같이 끝도 없는 평원에 식물이나 사람이 살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물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막에 물만 흐른다면 최고의 옥토가 될 것입니다. 아프리카가 넓은 땅임에도 불구하고 황폐하고 못사는 이유가 물 때문입니다. 물만 충분하면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가 될 것입니다. 물이 이렇게 중요하고 인류의 번영과 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구약시대에는 우물을 가지고 치열한 싸움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구약성경에도 보면 강을 중심으로 풍요로움과 번영을 가져왔습니다.
3. 물의 심판과 구원
어디나 물이 흐르면 생명이 살아나고 약동하듯 영적으로도 생수가 흐르면 영혼이 살아납니다. 성경에서 보면 물은 인류의 심판과 구원을 상징하였습니다. 창세기 6-9장에 보면 죄악으로 관영한 세상을 물로 심판한 노아 홍수의 심판이 있습니다. 창 7:4절에 “지금부터 7일이면 내가 40주야를 땅에 비를 내려 내가 지은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버리리라”고 말씀했고 11-12절에 보면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40주 40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고 말씀했습니다.
현대에 와서도 물은 인류에게 큰 타격을 주기도 합니다. 가뭄과 폭우나 집중 호우는 큰 피해를 가져다줍니다. 천재지변(天災地變)의 가장 무서운 힘이 바로 물입니다. 특히 지구의 온난화 현상으로 말미암아 북극의 빙하가 녹아내리고 그 녹은 물 때문에 바다의 수위가 높아지면서 무서운 재앙이 엄습합니다. 그런데 지구온난화의 가장 큰 주범이 온실가스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연을 함부로 한 결과는 인류에게 큰 재앙으로 되돌아옵니다.
우리교회의 영구표어는 “하나님사랑, 이웃사랑, 나라사랑 그리고 자연사랑”입니다. 우리가 자연을 잘 보호하고 보존하는 것은 우리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일이고 우리의 후손들에게 가장 중요한 유산을 물려주는 것입니다.
물은 인간의 구원과도 직결됩니다. 출애굽을 할 때 하나님은 선민 이스라엘 백성을 물이 넘실거리는 홍해 바다에서 극적으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때에도 물의 기적을 통하여 구원하였습니다. 광야에서 물이 없어 죽어갈 때 반석을 치게 하여 물을 공급하여 주셨습니다. 또한 물이 써서 먹지 못할 때 나무 잎을 넣어 단물이 되게 하였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인 성령을 물로 비유하셨습니다. 에스겔 47장에서 보여주신 환상에서 성전 문지방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강물을 이루었고 모든 생명체들이 살게 되었으며, 병을 고치고, 철마다 열매를 거두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수를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요 4:14절에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계시록 2:16절에도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들에게 값없이 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요3:5).
4. 물을 통한 교훈과 지혜
1) 생명을 공급하여 주는 교훈입니다.
모든 생명체들이 물이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생명을 주는 물에게서 교회와 성도들은 배워야 합니다. 우리도 모든 생명체에게 생명을 공급하는 사명을 가지고 산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에게 생명의 양식인 말씀과 생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여 주어야 합니다.
2) 물은 부드럽고 겸손합니다.
물은 만져 보면 너무나 부드럽습니다. 누가 만져도 특별한 힘을 주지 않습니다. 또한 물은 겸손의 모델입니다. 그래서 물은 언제나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려 갑니다. 모든 물은 낮은 곳으로 흘러가 결국 가장 낮은 곳 바다에 가서 머물게 됩니다. 언제나 순리를 따릅니다. 그렇다고 물이 약한 것이 아닙니다. 잘 이용만 하면 수력발전, 해상 무역 등 거대한 힘을 발휘합니다.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하고 씻어 내는 힘이 있습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물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부드러움과 유연함 그리고 겸손함과 순리를 잘 따르는 지혜와 교훈을 본받아야 합니다.
3) 물은 언제나 조화를 이루고 하나가 됩니다.
물은 색깔이 없고 어떤 물과도 조화를 이루며 하나가 됩니다. 서해 바다와 동해 바다를 합쳐 놓으면 자기의 색깔이 없이 하나가 됩니다. 또한 물은 어떤 그릇에 넣어도 그릇에 자신을 적응시킵니다. 물에다 색깔을 풀면 그 색깔에 따라 물이 변합니다.
우리도 이렇게 서로 조화를 이루고 하나가 되는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수십 년을 같이 살고 한 솥밥을 먹으면서도 하나가 되지 못합니까? 평생을 한 교회를 다니면서도 하나가 되지 못하고 다투는 것 정말 부끄러운 일입니다.
4) 물은 언제나 자신을 희생합니다.
물은 자신을 희생하여 모든 오염을 제거합니다. 더러워진 옷을 깨끗하게 해 주고 물은 폐수로 버림을 받습니다. 물은 자신은 더러워지지만 다른 것을 깨끗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희생입니다. 펄펄 끓어 국이 되고 맛있는 찌개가 됩니다. 짠 물이 되어 김장을 맛나게 합니다. 펄펄 끓는 물이 되어 각종 세균을 박멸합니다. 심지어 독한 염색약을 넣어 아름다운 색깔의 옷을 만듭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물과 같은 존재가 되어서 희생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죽어 가족이 살고, 이웃이 살고, 민족이 사는 것입니다.
5) 물은 치료의 능력이 있습니다.
물은 색깔도 없고 특별한 맛도 없지만 사람과 모든 생명체를 치료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의학에서도 물을 많이 섭취해야 건강에 좋다는 것이 증명이 되었습니다. 날마다 물만 충분하게 마시고 깨끗이 닦고 하면 질병을 이길 수 있습니다.
모든 질병 예방에 물로 씻는 일은 기본입니다. 그리고 물에는 치유의 능력이 있어 각종 질병을 치료합니다. 물에는 미네랄이 함유되어 건강유지에 아주 중요합니다. 베데스다 연못은 어떤 질병이든 치료하는 기적이 있는 못이었습니다. 실로암도 눈먼 자를 씻어 뜨게 하였습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물과 같은 존재가 되어 남에게 생명을 주고 병들고 약하고 문제 있는 사람들을 치료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소독약도 물이 있어야 만들 수 있고, 소독도 환부를 씻어 내는 일도 물이 있어야 합니다.
물은 빛과 공기와 함께 하나님께서 주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이 귀한 선물을 잘 관리하고 보존하여 우리의 후손들에게 선물로 물려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모든 물이 오염이 되고 그로 인한 각종 질병이 인류를 망하게 합니다. 우리는 물을 마음껏 사용하고 심지어는 낭비하지만 물이 없어 죽어가는 민족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대한민국도 물 부족국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프리카 사람들보다 20배의 물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물을 귀하게 여기고 절약과 함께 오염을 방지하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만물을 번성하게 하라
창 1장 20~25절 / 이상호목사
오늘은 현충일, 6월 5일은 세계환경의 날입니다. 이에 발맞추어 교회도 6월 첫 주일을 환경주일로 정하여 벌써 38주년 기념주일입니다. 환경보존은 단순한 캠페인이나 시민운동이 아니라, 성경적 일이며 신앙적인 일입니다. 성경은 환경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는지 환경보존이 왜 중요하며 어떻게 보존하며 해야 하는지 배우도록 하십시다.
모든 생물은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모든 생물들은 누가 만들었을까요? 창 1:11-12에서 하나님께서 땅에 있는 모든 풀과 채소와 나무를 그 종류대로 만드셨음을 말하고 창 1:21절에서는 강과 바다의 짐승들 모든 물고기들을 그 종류대로 만드셨고, 하늘에 나르는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셨다고 했습니다. 24-25절은 가축과 땅에 기는 모든 짐승을 만드셨습니다. 모든 생물은 하나님이 만드셨고 또 기르십니다.
땅, 바다, 하늘에 있는 모든 생물들은 소중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소중하게 여기는 작품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생물을 만드신 후 보시기에 좋았다고 했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시선으로 모든 생물들을 사랑스럽게 봐야합니다. 소중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자연은 그것을 만드신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자연은 우리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작품들을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이 애지중지 아끼는 것이니 우리도 그렇게 다루어야 합니다. 자연을 훼손함은 자연을 만드신 하나님께 대한 도전입니다. 하나님의 작품을 망가뜨리는 무엄한 행위입니다. 자연을 사람의 이용물로나 편의의 도구 또는 이익의 재료로 삼지 말아야겠습니다. 모든 생물은 하나님이 만드셨음을 믿고 소중하게 여기기 바랍니다.
생물들도 생육하고 번성하는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만 축복한 게 아니라 생물들에게도 복을 주셨습니다. 20절 물들에게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22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고 했습니다. 그들도 번성하여 물을 채우고 땅을 채우고 하늘을 채우라고 복을 명했습니다. 하나님은 새들에게 종족보존 본능을 넣어 주셨습니다. 보금자리를 짓기 위한 그들의 수고는 눈물겹습니다. 펭귄들이 추위에 알을 품고 있음을 보면 감동입니다. 풀과 꽃과 나무들도 땅에 충만하기 위해 바람을 통해 씨를 퍼뜨립니다. 씨가 날아갈 수 없을 땐 짐승들에게 자신의 향과 맛으로 유혹하여 열매를 먹게 하여 씨를 널리 퍼트립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생물들 중 38%가 멸종 위기에 있습니다. 하루에 100여개 종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번성의 복을 사람이 훼방하고 있습니다. 이는 생물들에게 주신 복을 창조주의 뜻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국가 통치자가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지켜주는 것처럼 모든 생물을 다스릴 권한을 부여 받은 사람도 생물들의 안정된 터전을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사람은 다른 피조물들에게 횡포를 부려서는 안 됩니다. 저들에게 주신 생육하고 번성하는 복을 침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 삼으신 것은 모든 피조물들이 생육하고 번성하는 복을 누리도록 도우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생물들을 통치하여 그들이 행복하도록 해야 합니다. 생물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맛을 보게 해주어야 합니다.
생물들이 없이는 사람도 없습니다.
창조의 순서를 보면 식물과 짐승이 사람보다 먼저입니다. 그 이유는 동식물이 없으면 사람이 생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생물들은 사람이 없어도 충분히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동식물이 살지 못하는 곳에서 생존이 불가능합니다. 나무가 없는 사막은 사람도 살 수 없습니다. 짐승이 살 수 없는 곳은 사람도 살 수 없습니다.
생물이 살아야 사람도 삽니다. 노아가 방주에서 까마귀를 내보냅니다. 앉을 곳이 없으니 공중을 배회를 했습니다. 비둘기도 땅에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새들이 살지 못하는 땅은 노아도 살 수 없습니다. 얼마 후 비둘기가 감람나무 연한 새 잎을 물어다 준 후 방주로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새가 땅에 살 수 있음을 통해 노아가족도 땅에 발을 디딜 수 있는 희망을 가졌습니다. 지금 땅에 사는 많은 종들이 멸종되고 있습니다. 생물들은 살기 불편한데 사람만 편하게 살 수 없습니다. 생물들이 잘 사는 곳이 사람 살기도 좋은 곳입니다.
생물은 사람의 간섭을 싫어합니다. 모든 생물들은 사람이 만들어지기 전에 있었습니다. 사람이 방해만 하지 않으면 저들끼리 잘 삽니다. 휴전선 비무장지대는 사람의 간섭이 전혀 없으니 수많은 생물들이 낙원을 이루고 있습니다. 세계 최대의 가치를 지닌 생태지역이 되었습니다. 지구에서 사람이 10년만 자리를 비우면 환경은 복원됩니다. 기후환경의 문제도 해소됩니다. 생물들이 살기 좋으면 사람도 살기 좋은 곳이 됩니다. 생물을 소중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혜택이 우리에게 돌아올 것입니다.
모든 생물들을 보며 하나님을 찬양하라.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만물은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는 도구입니다. 자연은 하나님의 지혜와 영광을 드러냅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자연은 하나님의 영광을 펼치는 무대입니다. 창조 속에 하나님의 지혜와 솜씨가 담겨져 있습니다. 모든 피조의 세계는 하나님을 알게 하는 계시의 도구입니다.
에덴에서는 성경이 없이도 하나님을 알 수 있었습니다. 죄가 없었다면 지금도 성경 없이도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타락하여 오염되긴 했지만 아직도 창조 안에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전능하심 그리고 지혜로움을 엿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연만물을 통해 하나님의 지혜와 영광을 바라보며 그분을 창조주로 믿고 찬양해야 합니다. 시편 104:24-25 “여호와여 주께서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그들을 다 지으셨으니 주께서 지으신 것들이 땅에 가득하니이다. 거기에는 크고 넓은 바다가 있고 그 속에는 생물 곧 크고 작은 동물들이 무수하니이다.” 시인의 찬양이 나의 찬양이 되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연에 담겨진 하나님의 위대한 솜씨와 지혜를 찬양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지으실 때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함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시선으로 자연만물을 사랑스럽게 바라보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들도 자연을 보면 창조주가 저절로 생각날 수 있도록 자연을 보존해야 합니다. 꽃 한 송이를 보더라도 창조주의 숨결을 느끼도록 해야 합니다. 자연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보며 창조주 하나님을 노래할 수 있기 바랍니다.
창조 회복을 꿈꿉시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창조의 회복을 꿈꿉니다. 죄로 사람만 아니라 피조의 세계가 오염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모든 생물들을 본래대로 회복케 하는 일입니다. 창조회복의 완성은 예수님께서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심은 타락한 창조를 회복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 일을 위하여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의 재림 때 창조의 회복이 완성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대리통치자인 사람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의도대로 모든 피조물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대상 16:31-32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며 모든 나라 중에서는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통치하신다 할지로다. 바다와 거기 충만한 것이 외치며 밭과 그 가운데서 모든 것은 즐거워 할지로다. 그리 할 때에 숲 속의 나무들이 여호와 앞에서 즐거이 노래하리니 주께서 땅을 심판하러 오실 것임이로다.” 그러나 하나님의 대리통치자인 사람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의도대로 모든 피조물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대상 16:31-32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며 모든 나라 중에서는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통치하신다 할지로다. 바다와 거기 충만한 것이 외치며 밭과 그 가운데서 모든 것은 즐거워 할지로다. 그리 할 때에 숲 속의 나무들이 여호와 앞에서 즐거이 노래하리니 주께서 땅을 심판하러 오실 것임이로다.”
그래서 롬 8:19-21에 모든 피조물들은 탄식하면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신자들이 예수님의 재림을 고대하듯, 모든 피조물은 진실한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사모합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피조물을 아끼고 사랑하는 신자들을 말합니다. 피조물들은 자기를 아껴주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염원하고 있습니다. 피조물들을 해하는 가짜 신자말고 자연을 아껴주는 진짜 신자를 기다립니다. 우리가 바로 피조물들의 신음을 멈추게 할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때문에 모든 피조물들이 노래하고 박수치고 즐거워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동안 배운 대로 생활 속에서 행동하는 것입니다. 불필요한 전등 하나를 끄고, 종이 한 장도 아껴 사용하는 작은 실천을 행동하는 것입니다. 자연을 귀히 여김이 성경적이며, 믿음의 일로 여기기 바랍니다.
물과 성장
이성희목사 / 창 1:20-23, 히 10:19-22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물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둘째 날의 창조입니다. 하나님이 물을 창조하실 때에 관심을 가지시고, 정성을 기울이신 흔적이 나타납니다. 창세기 1:6에는 물 가운데 궁창을 만드셨고, 물과 물이 나뉘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1:7에는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을 나누셨다고 하였습니다. 1:8에는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1:10에는 뭍을 땅이라고 하셨고, 물을 바다라고 칭하셨다고 하였습니다. 물의 창조는 신비 중의 신비입니다. 하나님의 걸작입니다. 물은 H2O입니다. 수소 둘과 산소 하나가 결합된 것입니다. 상온에서 색, 냄새, 맛이 없는 액체를 물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단순한 결정체인 물이 바닷물, 강물, 지하수, 우물물, 빗물, 온천수, 수증기, 눈, 얼음 등으로 지구상에 존재합니다. 물은 고체, 액체, 기체 세 상태로 지구표면에서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합니다. 지구 표면적의 4분의 3이 물입니다. 약 13억 3000만km3가 물입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지만 지하수가 약 820만km3입니다. 이 물은 지구의 엄청난 자원입니다. 물은 순환합니다. 지상의 물이 수증기가 되어 구름이나 안개가 되고 다시 비, 눈 혹은 우박이 되어 하천이나 호수 등으로 흘러 들어갑니다. 물과 물의 순환만 봐도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 분명합니다. 얼마나 신비한지 물방울 하나가 작은 우주입니다. 그런데 이런 물이 점점 오염되고 먹을 물이 적어진다는 것은 비통한 일입니다. 지난번 캐나다에 갔을 때에 텔레비전에서 이런 얘기가 나왔습니다. 미국에서 더 많은 물을 요구하지만 캐나다에서는 물을 줄 수 없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캐나다는 세계의 쓸 수 있는 물 즉 가용수의 20% 이상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많은 빙하를 가지고 있고 넓은 국토에 비하여 적은 국민수가 물을 깨끗하게 합니다. 더구나 많은 공산품과 제품 등을 미국에 의존하고 있기에 공해를 유발하는 공장이 적습니다. 이런 저런 이유에서 맑은 물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래는 물 전쟁이 심각할 것이 뻔한데 엄청난 미래적 자원을 소유하고 있는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먹을 물을 안정적으로 공급받는 지역은 52%뿐입니다.
세계는 닥쳐오는 물 전쟁으로 심각한 분쟁을 겪게 될 것입니다. 학자들의 말을 빌리면 10년 뒤의 물 부족은 20억 톤 가량이라고 합니다. 지금 지구가 겪는 기름전쟁과는 비교가 안되며 원유보다 물이 더 비싼 시대가 된다고 합니다. 옛날 중국의 제자백가(諸子百家)들은 물을 가지고 인생을 비유하고 물 흐름을 통하여 세상을 보았습니다. 고자(告子)는 "인간의 본성은 물 흐름과 같은 것이다. 수로(水路)를 동쪽으로 내면 동으로 흐르고, 서쪽으로 트면 서로 흐른다. 이처럼 사람도 가르침이나 습관에 따라 선악 어느 쪽으로 흐른다"고 하였습니다. 시자(尸子)는 물은 네 가지 덕을 가지고 있다(水有四德)고 하였습니다. 물은 만물에 삶을 심어주니 인(仁)이 있고, 세상의 추함을 씻어주니 의(義)가 있으며 유연하면서도 강하니 용(勇)이 있고 솟아나도 채워지지 않으니 지(智)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노자(老子)는 최고의 선(善)이란 물과 같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물은 만물에게 혜택을 주지만 스스로 주장하여 생색을 내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만물이 싫어하는 낮은 곳으로만 내려 흐른다. 낮고 보이지 않는 데에 침착하게 머물러 있어 이 세상의 괴로움을 말없이 감당해 낸다. 물은 아무 말 않지만 이렇게 큰말을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모두가 싫어하는 낮은 곳으로만 찾아 흐르니 도(道)가 있다"고 했습니다. 어느 날 공자는 물가에 앉아 제자인 자공(子貢)에게 말했습니다. "물은 백 길 벼랑도 두려워 않고 흘러내리니 용기가 있고, 아무리 옹색한 곳에라도 침투하니 통찰력이 있으며, 지상의 더러운 것을 씻어버리니 감화력이 있다. 그래서 군자는 흐르는 물을 바라보길 좋아하는 것이다". 이렇게 동양에서도 물은 유연하면서 힘이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물은 유연하기에 힘이 있습니다. 참 힘있는 사람은 유연함을 잃지 않습니다. 유연함을 보이면 이미 유연함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물은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성경의 물은 생명입니다. 물은 만물을 번성하게 합니다. 물은 변화하게 합니다.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지칭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물을 통하여 성장하고 번성하고 변화합니다.
첫째, 물은 생명입니다.
하나님은 물을 지구의 생명으로 만드셨습니다. 물은 지구의 생명줄입니다. 젖줄입니다. 빛 다음에 물을 창조하셨습니다. 빛은 첫째 날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루 종일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물은 둘째 날 창조하셨습니다. 하루 종일 물만 창조하셨습니다. 그 만큼 소중하고 정교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빛이 생명입니다. 물이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생명을 주신 일이었습니다. 혼돈은 생명이 없습니다. 창조는 생명을 공급하신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물이 없으면 죽습니다. 매말라집니다. 인체는 약 70%가 물입니다. 어류는 약 80%가 물입니다. 물 속의 미생물은 약 95%가 물입니다. 창세기 1:11에는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시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고 하십니다. 셋째 날의 창조입니다. 하나님은 물을 만드신 다음에 채소를 만드십니다. 물은 채소를 자라게 하는 생명의 공급원입니다. 채소를 먼저 만들었다면 물이 없어 살지 못했을 것입니다. 물을 만드신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입니다. 니나(Nina)는 앗수르와 바벨론 신화에 나오는 물의 여신입니다. 대양의 신으로서 인류창조의 신인 에아의 딸입니다. '니나'란 '물의 마님'이라는 뜻입니다. 우물과 강의 여신으로서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피하여 가지 않았던 니느웨의 수호신입니다. 그런데 앗수르와 바벨론에서는 니나가 없으면 농사도 못 짓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물이 없으면 살 수 없음과 마찬가지입니다. 바벨론의 번성을 니나에게 의존하였습니다. 니느웨의 번성을 니아에게 맡겼습니다. 루시 쇼는 그의 책 '물댄 동산 같은 내 영혼'(Water My Soul)에서 "물은 태초부터 창조의 근본요소이었다"고 하였습니다. 물은 생물이 생존하는데 필요한 절대적 요소입니다. 방주가 창일한 물위에 떠다녔듯이 전 세계의 70%인 물위로 배가 떠다니며 교통과 산업을 번창케 합니다. 아르메니아 정교회 신학자, 구로디안은 "물은 창조의 피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물은 또한 세례의 근본 요소이기도 합니다. 이사야 55:1은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하십니다. 그 물은 갈증을 해소합니다. 그 물은 생명이 있습니다. 그 물은 살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 첫 번째 기적은 물이 포도주가 되게 하는 기적이었습니다. 물은 그 자체가 생명력이 있습니다. 물은 포도주가 됩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 군병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양편의 강도의 다리를 꺾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미 운명하셨기에 다리를 꺾지 않고 죽음을 확인하기 위하여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습니다. 예수님의 옆구리에서는 피와 물이 쏟아졌습니다. 예수님은 피와 물을 쏟으심으로 우리를 위해 남김없이 생명을 공급하셨습니다. 물은 생명입니다.
둘째, 물은 번성하게 합니다.
본문은 짧은 글이지만 "번성"이란 단어가 네 번 기록됩니다. 물이 생명인 것은 물의 본성입니다. 물이 번성하게 하는 것은 물의 역할입니다. 창세기 1:20에는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땅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고 하였습니다. 창세기 1:21에는 "하나님이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라고 하십니다. 창세기 1:22에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어 가라사대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다 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고 하십니다. 번성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물은 생물들로 하여금 번성케 합니다. 물이 없으면 살지 못하지만 물만 있으면 살 수 있습니다. 미생물들은 물만 있으면 삽니다. 습기가 있는 곳에는 무엇인가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건조한 곳에는 살지 못합니다. 시편 23:2에는 "푸른 초장으로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라는 목자의 고백이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에서 물은 소중한 자원입니다. 더구나 양을 치는 목자들에게는 절대적인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싸우고, 죽이고, 시기하던 중요한 자원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옛날에는 자기 논에 물을 대려다 서로 싸우고 삽으로 쳐죽인 일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아전인수(我田引水)란 말이 생겨난 것입니다. 특히 양들은 적응력이 약하기 때문에 물이 있는 곳으로 인도하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시편 65:9에 "땅을 권고하사 물을 대어 심히 윤택케 하시며 하나님의 강에 물이 가득하게 하시고 이같이 땅을 예비하신 후에 저희에게 곡식을 주시나이다"란 말씀이 있습니다. 당시의 복의 상징은 물이 가득한 강입니다. 땅에 물이 있어 윤택한 것입니다. 농경사회의 물은 복의 가장 중요한 요건인 것입니다. 성경에도 마른 샘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샘이 마르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저는 캘리포니아에 살면서 마른 내, 건천을 많이 보았습니다. 여름 내내 물 한 방울 없는 강이 많이 있습니다. 겨울에 우기가 되면 조금 흐르다 곧 말라버립니다. 마른 내는 번성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선 물이 있어야 번성케 합니다. 물이 없으면 번성도 없습니다. 십장생이란 것이 있습니다. 해, 산, 물, 돌, 소나무, 달 또는 구름, 불로초, 거북, 학, 사슴이라고 합니다. 중국의 신선(神仙) 사상에서 유래된 장수물로 자연숭배의 대상이며 원시신앙과 일치합니다. 우리 풍습에는 십장생의 그림을 벽, 창문, 병풍, 베갯머리, 신부의 수저주머니, 선비의 문방구 등에 그리고 붙였습니다. 오래 잘 살겠다는 인간의 욕망이 표현된 것입니다. 요즘의 물은 십장생에서 제외될 듯합니다. 물이 오염되어 먹지 못할 물이 너무 많습니다. 장수가 아니라 단명의 상징이 될 것 같습니다. 물이 번성하게 하는 것이지만 물이 오염되면 그 반대가 될 것입니다. 물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라 죽습니다. 물 때문에 잎이 무성한 것이 아니라 시듭니다. 물 때문에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열매가 떨어집니다. 엘리사가 여리고에 갔을 때입니다. 여리고의 생도들이 엘리사에게 와서 "이 성읍의 터는 아름다우나 물이 좋지 못하므로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나이다"라고 하면서 물을 깨끗하게 해 주기를 바랍니다. 엘리사는 여리고의 샘이라는 물 근원에 올라갑니다. 그리고 소금을 그 근원에 뿌렸습니다. 물이 깨끗하게 되고 많은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물은 번성케 합니다. 물이 깨끗해야 토산이 번성합니다. 번성케 하기 위하여 깨끗해야 합니다.
셋째, 물은 깨끗하게 변화하게 합니다.
물은 순환합니다. 물은 순환하면서 언덕을 깎아내고, 강의 흐름 바꾸고, 흙이나 바위를 멀리 운반합니다. 큰비나 강이 범람하면 산을 깎고, 깊은 골짜기 만들고, 단단한 바위를 침식시킵니다. 격랑은 끊임없이 해안선을 침식하여 섬이나 대륙의 형태를 변화시킵니다. 물은 지금도 이 지구를 변화시켜 나가고 있습니다. 물이 밀려오면 모든 것이 순식간에 씻어지기도 합니다. 얼마 전에 있던 것이 깨끗하게 사라지게 합니다. 물에 떠내려가고 아무 것도 없을 때 깨끗하게 사라졌다고 합니다. 물은 이렇게 깨끗하게 없이합니다. 지형을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도 변화시킵니다. 물은 또한 지구상의 기후를 좌우합니다. 증기나 수력전기가 되어 산업의 근원인 기계를 움직이게도 합니다. 물은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의 힘이란 무한합니다. 물만큼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물은 무서운 힘을 가지고 무섭게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수가 우물가에서 한 여인을 만나셨습니다. 이 여인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요구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그로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생수이십니다. 물이 아무데나 들어가듯이 예수님은 어디에나 들어가십니다. 아무리 별난 마음에도 예수님이 들어가지 못할 곳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변화하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물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 물입니까? 어디에나 들어가는 성격입니다. 변화하게 하는 성격입니다. 히브리서 10:22은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고 합니다. 맑은 물로 씻었으니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나아갈 수 있습니다. 나아가면 됩니다. 어떤 분은 "최초의 거울은 물이었다"고 합니다. 물에 자신을 비춰봅니다. 물에 비춰보면 자신의 변화한 모습이 보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거울입니다. 예수님께 비춰보면 우리의 변화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변화의 주님이시고 변화를 알 수 있습니다.
결론 오래 전에는 펌프를 사용했습니다.
펌프 물을 마시기도 하고, 빨래를 하기도 하고 그 물로 세수도 했습니다. 펌프로 물을 저어 올릴 때에 먼저 한 바가지의 물을 붓습니다. 그리고 힘차게 저으면 물이 올라옵니다. 많은 물을 얻기 위하여 한 바가지의 물이 필요합니다. 이 물을 마중물이라고 합니다. 큰 물을 마중하는 작은 물입니다. 마중물만 있으면 풍성한 물을 얻습니다. 작은 한 바가지의 물만 있으면 많은 물을 얻습니다. 마르지 않는 샘을 얻습니다. 쉴새없이 흐르는 강을 얻습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얻습니다. 이사야 55:1에는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고 합니다. 작은 한 바가지의 물을 가지고 나아가기만 하면 많은 물을 공급받습니다.
여러분은 마중물을 가지고 있습니까? 작은 믿음으로 생명수 샘물을 마시며, 갈하지 않는 한 주간의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인가
창 1장 20~23절 / 민경설목사
록펠러는 1837∼1937년까지 100세로 장수한 세계적인 갑부입니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을 포기 한 채 남다른 사업수완으로 자신을 위한 꿈을 이루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치의 병상에서 자신의 인생을 조명하게 되었고. 그리고 그는 야망과 출세를 위하여 살았던 삶을 철저히 회개합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주셨고 주님을 새롭게 만남으로 심령이 고쳐지고 삶의 목표가 바뀌기 시작하면서 썪어 가던 육신을 고침 받게 됩니다. 그후 그는 삶의 목표를 하나님을 위하여, 인류를 위하여 살 것을 고백하였고, 그리고 미국의 대 유전을 발견하고 거부가 되어 세계적인 록펠러 제단을 세우고 세계 여러 곳에 인류평화에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나이가 강건하면80, 그렇지 않으면70으로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인생을 살아갑니다. 이기간 동안 어떻게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인가 한번쯤 점검하는 여러분이 되야 합니다. 어떻게 사는가의 삶의 질에 따라 그 인생이 길어지기도, 짧아지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므두셀라는 969세를 살았습니다. '므두셀라'의 뜻은 '이후에 심판이 있다'는 말로 현재의 말로는 '이렇게 살면 심판이 있다'는 뜻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그의 생애는 자녀를 낳았다는 기록 뿐 이기 때문입니다. (창5:25∼26)"므두셀라는 일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 라멕을 낳은 후칠백팔십이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이렇게 살면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히9:27)"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우리에게 의탁된 인생을 이렇게 살면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이, 크고, 높이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며 어떻게 사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본문의 다섯째 창조의 날을 통하여 인생이 어떻게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인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1.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살아야 합니다.
(창1:20)"하나님이 가라사대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생물, 무생물, 인간은 모두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살아야 잘사는 것입니다. 인간의 기분, 느낌대로 사는 것은 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뜻은 무엇을 하는가에 있지 않고 그 일의 목적이 무엇인가에 있는 것입니다. 일 자체가 하나님의 뜻을 가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일의 목적에 따라, 의미에 따라 하나님 뜻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사:43:7)"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성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된 사람입니다.
2. 이 세상을 이기는 생명을 가져야 합니다.
(창1:21)"하나님이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 세상의 모든 중심은 생명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에 눈을 떠야 합니다. 물 속의 물고기가 중요한 것이며, 하늘의 새가 중요한 것입니다. 이 우주를 창조한 것은 생명을 존재케 하기 위한 것입니다. 성경에 물고기와 새의 생명체를 말한 것은 구원의 진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물고기는 헬라어로'잌투스'라고 하며, 스펠로 하면 '예수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물고기가 사는 물은 세상을 말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물에 떠내려가지만 물고기만은 물살을 가르고 위로 올라갑니다. 새 또한 유일하게 땅에서 하늘로 치솟는 생명체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땅으로 떨어지지만 새만은 세상을 뚫고 하늘로 날을 수 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세상을 등지고 유일하게 하늘로 치솟는 자가 되야 합니다.
3. 번성하고 충만해야 합니다.
(창1:22-23)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어 가라사대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다 물에 충만 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 많은 사람은 수적으로 충만하기를 원하지만 수적인 것으로 인간은 만족하지 못하며 질적으로 충만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적, 질적으로 충만하고 번성해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가 내 속에 오셔야 합니다. 그분만이 인간을 충만케 할 수 있습니다. 잘사는 방법은 충만한 후 번성해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 자의 충만은 남을 위한 충만 이어야 합니다. 참으로 잘사는 것은 예수로 나는 충만하고 그것으로 남을 번성케 해야 하는 것입니다.(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 충만한 자는 번성하여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의 위치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 세상을 이기고 예수로 충만하여 남에게 번성케 하는 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 아 멘 --
창조의 5일 모든 생물, 동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창 1장 20~23절 / 이상호목사
이제 하나님의 창조는 다섯째 날로 접어듭니다. 다섯째 날은, 바다나 강이나 호수에 사는 온갖 종류의 물고기들과, 물속에서 사는 모든 종류들의 생물들을 창조하시고, 하늘에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모든 것들을 만드신 날입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창조의 네 날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창조의 다섯째 날을 접하게 되는데, 하나님의 천지 창조 사역 중에서 이 다섯째 날의 기사는, 가장 역동성이 넘칩니다.
이는 다섯째 날 창조 된 것들이, 물속을 쏜살같이 헤엄치거나 때로는 부드러이 유영하는 온갖 바다 생물들과, 푸른 창공을 아름답게 날개 짓 하며 날아다니는 온갖 새들, 그 뿐 아니라 모든 것들이, 온 하늘과 바다 속을 그득히 채우며 활기차게 움직이는 모습 때문일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물고기도 한 종류, 새도 한 종류만을 만드셨다면, 이 세상은 너무나도 단조롭기 그지없었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물 속에 있는 물고기가 꽁치 딱 한 종류라면 얼마나 지겹겠습니까?
여기를 봐도 꽁치, 저기를 봐도 꽁치, 꽁치 구이, 꽁치 자반, 꽁치 조림, 꽁치 회, 꽁치 무침, 꽁치 포, 꽁치 젓갈..... 아마 꽁치를 보기도 싫어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낚시 좋아하시는 분들, 역시 잡았다하면 꽁치만 올라옵니다. 물고기마다 다 손맛이 다른데 이거 영 재미가 없습니다.
하늘의 새도 그렇습니다. 참새 한 종류만 만드셨다면, 얼마나 멋없겠습니까? 나무 한 그루에 참새가 수 백 마리가 앉아 있는 것을 상상해 보세요. 그러나 나무 한 그루에 온갖 종류의 형형색색의 새들이, 각기 다른 음성으로 노래를 하고 있으면, 전혀 지루하지 않습니다. 너무나도 아름답기만 합니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는 정말 너무나 멋진 예술가시구나! 라는 것 또한 느낄 수 있습니다.
물론 한 종류씩만 만들어서 물고기하면 꽁치, 새 하면 참새, 이럴 때 좋은 것도 있겠지요. 무엇이냐 하면 생물시간에 우리 학생들 얼마나 좋겠습니까? 복잡하게 여러 종류의 물고기나 새를 외우지 않아도 되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외우기 싫어하는 사람들을 전혀 배려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말로 아름답게 모든 것들을 종류대로 창조하셨습니다.
이제 그 창조의 솜씨들을 한번 살펴보기로 합니다. 먼저 2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라고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명령을 하고 계십니까? 물들에게 명령을 하고 계십니다. 물은 생명입니다. 동식물들은 물로 생명을 유지합니다. 그런데 마치 물들이 무슨 귀가 있어서 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생물로 번성케 하라! 고 명령을 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과, 우리들이 하는 말의 엄청난 차이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는 말은, 상대방이 의식이 있어야만 전달이 됩니다. 즉 말귀를 알아들을 수 있는 자라야만이, 하는 말이 전달이 됩니다.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자기의 의식이 없는 식물인간은, 아무리 말을 한다고 할지라도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물들에게, 땅에게, 하늘에게, 어디에든지 간에, 바로 명령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명령 한마디에, 생물이 있어라! 하면 생물이 있게 되고, 짐승이 있어라! 하면 짐승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창조의 넷째 날까지 만든 바다와 하늘과 땅은, 모두가 하나님의 피조물들이고, 종들입니다. 이 자연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명령하심을 대기하고 준비하고 있는 자세가 되어 있는 존재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라면 즉각적으로 순종을 하고, 하지 말라는 것은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물들에게 생물로 번성케 하라고 명령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명령을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마치 물들이 무슨 창조의 능력이라도 있어서, 물이 수많은 물고기들을 만들어 내지는 않았을까? 하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만약 이런 능력이 물들에게 있다면, 사람들은 물을 숭배하게 될 것입니다. 물을 어떤 창조의 능력자로, 기적자로, 섬기게 되었을 것입니다. 물은 절대로 자신이 무엇을 만들어 낼 능력이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물들에게 명령을 하신 것은, 이런 의미입니다. 물들이 생물들을 계속 살 수 있도록 책임지고, 지켜주며, 보호해 주라!는 것입니다. 우리말에는 "생물들을 번성케 하라"고 함으로서, '번성'이라는 단어가 물속에서 많이 불어나게 하라는 명령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본문을 원어로 살펴보면 좀 해석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들은 생물 중 헤엄치는 것으로 헤엄치게 할지니라"고 해석이 됩니다. 우리말 성경은 그저 생물이라고 번역함으로서 그 구분이 명확치 않습니다. 그러나 원어에는, 생물의 다음에 헤엄치는 것이라는 "쉐레츠" 란 단어가 더 삽입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물 중 헤엄치는 것" 이라고 번역이 됩니다.
그리고 번성케 하라 에 사용된 단어는 "솨라츠"입니다. 이 단어는 '헤엄치는 것' 이라는 단어 "쉐레츠"의 동사형입니다. 그러니까 "헤엄치는 것"의 동사형인 "헤엄치다"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해석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들은 생물 중 헤엄치는 것으로 헤엄치게 할지니라" 그러니까 하나님의 명령은, 물들이 하나님이 만드신 각종 헤엄치는 생물들을 잘 헤엄칠 수 있도록, 모든 환경을 잘 유지하라는 명령인 것입니다. 그래야지 그곳에서 잘 적응하여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헤엄치는 생물들을 물에서 살게끔 계획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의 물들은 바다만을 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다와 강이나 호수, 연못, 작은 시내 등의 모든 물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다는 바다대로 적정한 염도를 유지함으로써, 바다에 살 수 있는 생물들을 보호해야 할 책임이 주어진 것이고, 강은 강대로 수질을 적절하게 유지함으로 담수어가 살 수 있도록 유지해야 함을 말합니다. 사실 바다는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런 절묘한 운영 시스템을 이미 조성해 주셨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래서 밀물과 썰물, 그리고 파도, 해수면의 증발, 이런 것들을 통해서 바닷물의 짜기를 바다 물고기가 살기에 가장 적당하게 조정해 놓으시며, 오염된 것들을 정화시켜 주는 것입니다.
강물 또한 이런 자정능력을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우리가 여름철에 물놀이를 가면 이런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시원하게 물이 흐르는 계곡 윗쪽에서 빨래를 하고, 머리를 감고, 설거지를 하는 몰상식한 짓거리들로 인하여, 거품이 일고 뿌옇게 된 혼탁한 물이 흘러 내려옵니다. 그런데 한참 밑으로 내려가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맑은 물로 변해서 내려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물론 이것도 어느 정도이지,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2-3m 간격으로 물을 오염시키게 되면 이 또한 무용지물이 되고 맙니다. 사람만큼 환경을 파괴하는 존재도 없습니다. 사람만큼 하나님의 명령을 안 듣는 존재도 없습니다. 그러나 물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즉각적으로 명령에 순종을 합니다. 그리고 그 순종은 지금까지 잘 이행되어 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다나 강물들은, 물속의 생명체들이 살수 있게 도와주고, 보호해 주는 기능을 잘하라는 명령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는 "땅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고 명령하십니다. 물고기가 물에서 활동을 하듯이, 이제는 새가 활동하는 범위가 소개됩니다. 여기서 '궁창'이라는 단어는 원어로는 '궁창 면'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궁창이 어떤 면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의 궁창 면은, 땅을 향한 궁창의 밑 부분, 즉 땅을 마주 대하는 아래의 범위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땅위 하늘의 궁창 면이라는 것은, 지상에서 한정된 높이의 공간을 가르키는 것으로서, 새의 활동 범위가 한정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실제로 새는 어느 정도까지의 하늘을 날 뿐이지, 아주 높은 하늘을 날지는 못합니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 높이 날 수 있는 것일까? 궁금해집니다.
공기가 희박한 에베레스트 산은 날 수가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새는, 특별한 호흡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전문 산악인이라도 헉헉대며 산소 부족을 겪는 에베레스트 산일지라도, 전혀 숨차하지 않고 넘어서 날아갈 수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는 이렇습니다. 사람은 호흡할 때 들이마시는 산소나, 내쉬는 이산화탄소가 같은 통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산소가 들어가서 허파꽈리에 이를 때쯤이면, 같은 통로를 이용하여 밖으로 나오는 이산화탄소의 양 때문에 허파꽈리에는 산소와 이산화탄소가 함께 차 있게 된다고 합니다.
쉽게 말해 아무리 숨을 밖으로 내뱉어도 허파에는 약 20~35퍼센트의 공기가 차 있으므로, 밖에서 들어온 새로운 공기만으로는 허파를 채울 수 없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조 때문에, 허파에서 산소와 이산화탄소가 교환될 때의 효율성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새는 전혀 다른 호흡 기관을 지니고 있습니다. 몸 속에 5-9개의 공기주머니를 갖고 있는데, 이 공기 주머니들은, 앞공기 주머니와 뒷공기 주머니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새가 공기를 들이쉴 때 공기는 먼저, 뒷공기 주머니로 들어갔다가, 내쉴 때에는 앞 공기 주머니로 가서 기관을 통해서 빠져나갑니다. 앞공기 주머니와 뒷공기 주머니 사이에, 허파가 놓여 있음으로 인해서, 사람과는 달리 허파에 늘 이산화탄소와 섞이지 않은 새로운 공기를 제공하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공기가 들어오는 주위에 혈액을 공급하는 혈관들의 배열이, 포유류와는 완전히 다름으로, 공기중의 산소가 혈액 속에서 녹아질 때 훨씬 더 빨리 확산됨으로써 굉장한 에너지를 공급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새들이, 공기가 희박한 하늘을 날게 할 때, 훨씬 더 효율적인 호흡을 할 수 있게 하나님께서는, 이미 구조적으로 세밀하게 설계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쥐에게 날개를 달아준다고 할지라도, 호흡이 가빠서 날지를 못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 얼마나 정교하신 창조입니까?
이제 21절을 보면, 하나님이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며,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큰 물고기"에 대한 의견이 분분합니다. 원래 큰 물고기란 단어는 '탄닌'이라는 단어입니다. '탄닌'은 히브리 동사 '길게 뻗다' 라는 '타난'에서 파생된 것으로서, 긴 몸집을 가진 동물을 가리킵니다. 영어성경 킹제임스 버젼에는 큰고래라고 해석을 하고 있지만, 그리 적절한 번역은 못됩니다. 왜냐하면 이 '탄닌'이라는 단어는 '고래' 이외에도 종종 사용되었습니다.
출 7:9에 모세가 집어던진 지팡이가 뱀이 되었을 때, 이 '뱀'이라는 단어가 "탄닌"입니다. 겔 29:3절에 나오는 '큰 악어'라는 단어도, 이 "탄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욥 17:12의 '용'이나, 렘 51:34에 기록된 '용'도 이 "탄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원어에 충실하게 해석을 하게 되면, 긴 몸집을 지닌 커다란 물짐승을 말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적당합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말하여서 네스호에 나오는 괴물이다, 뭐다 라고 말을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정확한 종을 알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또 만드신 것이,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니까 물고기만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해삼, 멍게, 말미잘, 불가사리, 그리고 각종 게들, 심지어는 물고기들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먹이인 플랑크톤까지도, 다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먹이사슬까지도 계획하시고, 종류대로 다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에는 날개 있는 모든 새들을 종류대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나오는 새라는 단어는 원어로 "오프"인데, 이는 단순히 새만을 말하는 단어가 아니라, 레11:20에 나오는 '곤충'에도 이 단어를 사용함으로, 새 뿐만이 아니라, 날개를 달고 날아다니는 모든 곤충까지도 다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들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생물들을 괴상망측한 것을 만드시지 않으셨음을, 우리는 알 수 있는 말입니다. 그리고는 이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만드신 모든 것이 흡족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복을 주시기로 작정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곰곰히 살펴보면, 이제까지 4일 동안의 창조에서는, 피조물들에게 복을 주신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5일째 되어서야, 비로소 피조물들에게 복을 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5일째 비로소 복을 선포하신 것은, 호흡하는 생명을 지닌 생물들이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생명을 지닌 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보호하심이 없으면, 충만하고 번성하기 어렵기 때문에 특별한 관심을 보이신 것입니다.
여기서 ‘복을 주다’라는 단어인 "빠라크"는 성공, 번영, 다산과 관련해서 종종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5일째 창조된 생물들에게 복을 주신 것은, 바로 다산과 번성의 복을 내려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바다는 물론이고 큰 강과 작은 시내, 호수와 연못에 이르기까지 온갖 물고기들로, 물 속에서 사는 모든 생물들로 그득히 채우시고, 푸른 하늘도 숱한 새들로, 나는 곤충들로 날개 짓 하며 온 사방, 활동하게 하신 이 다섯째 날의 사역은,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에, 무한하게 주시고자 하는 풍요로움과 아름다움, 기쁨과 생명력 등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창조의 대상, 곧 피조물들의 기능적 완벽성뿐만이 아니라, 그 미적 완성도까지 배려하신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모든 작품은, 그 만든 작가의 의도를 담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이 만드신 우주의 웅장함 속에, 아름답게 수를 놓으신 생물들의 정교함은, 무에서부터 유로, 온 세상을 있게 하신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그 생각의 깊고도 오묘하심을, 너무나도 잘 알 수 있게 합니다. 또한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의 풍요로움과, 그 안의 모든 생명들의 역동성은, 하나님 안에 있는 축복과 생명의 무궁함을 증거 해 줍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의 아름다움과 다양함은, 하나님 마음의 아름다우심과 그 감정의 풍부하심도 보여줍니다. 그렇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주권자이시며, 능력자이시며, 심판자이시며, 모든 생명의 보호자이십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예술가이시며, 또한 스스로 생명력에 넘쳐흐르시며, 우리에게 생명의 기쁨과 환희를 넘치도록 부어주시는 축복자 이십니다. 이렇게 온 하늘과 온 물들 속을, 기쁘고 힘차게 살아가는 아름다운 것들로 가득 하게 하신, 하나님의 풍요로우심에 대하여, 시편 기자는 이런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도 이런 시편 기자의 고백이, 하나님 만드신 자연을 바라 볼 때마다, 울려 퍼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내로 지음 받은 하와
창 1장 20~24절 / 이정선목사
하나님의 창조질서는 하나님의 지혜에 의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것들은 우리 인간의 지혜로 파악하기 어려운 것도 있고, 우리의 본성적인 욕구와 다른 것도 있습니다. 어쨌든 하나님의 창조질서는 우리가 다 헤아릴 수 없는 심오한 하나님의 지혜를 반영합니다.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신 것도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남자와 여자를 서로 다른 별개의 존재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 산 영이 되게 하신 것이 남자입니다. 그런데 여자는 그 남자의 갈빗대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니까 남자와 여자가 원래는 하나였다는 말입니다. 한 몸이 남자와 여자로 나뉘어서 두 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24절에 보면,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나눠진 두 몸이 다시 한 몸이 됩니다. 이것이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의 창조질서입니다. 인간의 존재와 삶에 대해서 하나님이 정하신 원리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여자가 창조되었는데, 여자가 창조된 목적은 남자의 돕는 배필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남자는 남자만으로 온전할 수 없습니다. 돕는 배필이 없는 상태로는 안 된다는 말이지요. 아담은 매우 탁월한 존재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세계의 관리자로 삼으신 대로 그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결국 아담은 혼자였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피조물 가운데서 그 어떤 것도 아담과 동등하게 교제하며 아담을 도울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감정을 공유하거나 대화를 나눌 상대가 없습니다. 아담이 힘들고 지칠 때, 또 그가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갈팡질팡할 때, 그를 위로하고 힘을 북돋아주며 조언을 해 줄 수 있는 상대가 없는 것입니다. 말이 그렇게 하겠어요? 개가 그런 역할을 하겠어요? 그래서 여자가 없는 남자는 외롭고 무기력한 반쪽일 수밖에 없습니다. 여자로 인해서 남자는 온전한 인간이 됩니다. 감정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부족한 부분이 채워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주 멋지게 표현된 것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아담의 고백입니다. 그것은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자 혼자서는 존재 의미가 없습니다. 창조된 목적이 남자를 돕는 배필이 되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여자의 첫 번째 의의는 아내가 되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되는 것은 그 다음의 일이지요.
이러한 하나님의 창조질서는 우리 인간이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원리입니다. 만들어진 모든 것은 그 목적과 용도에 따라 사용해야 할 원리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자동차는 사람을 태우고 빨리 가기 위한 목적과 용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동차를 물건 넣어두는 창고로 사용한다면,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습니까? 또 휘발유를 넣어야 가는 자동차에 물을 넣어서는 갈 수가 없습니다. 원리를 무시하거나 거스르면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없습니다.
아담이 코끼리, 사슴, 토끼, 꿩, 닭, 이런 동물들하고만 지내다가 한번은 깊은 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눈앞에 못 보던 누군가가 와 있는 것입니다. 아담은 한눈에 이 존재가 다른 동물들과는 전혀 다른, 자신과 동류라는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아담이 여자를 보고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하나님이 자신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다는 것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고 합니다.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한다’는 이 말은 말이 안 됩니다. 이게 번역문의 한계입니다. 백 번을 읽으면 뜻이 저절로 통한다고 하지만(讀書百遍 意自通), 이 번역문은 천 번을 읽어도 뜻이 나오지 않습니다. 히브리어 원문에는 남자라는 단어가 이쉬(ish)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어에는 명사에 성이 있어요. 남성 명사에 아를 붙이면 여성 명사가 됩니다. 그래서 이쉬라는 남성 명사에 아를 붙여서 이샤(isha)라는 여성 명사를 만든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남자에게 여자를 만들어주셔서, 남자와 여자가 행복하게 잘 살았을까요?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따라 남자와 여자가 서로 돕고 의지하며 사는 모습은 너무 아름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배가 아파서 그 꼴을 볼 수 없었던 게 있습니다. 바로 사탄입니다. 만일 우리의 가정에, 특히 남편과 아내 사이에 오해와 불신이 생겨나고 괴로운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대로 아름답게 사는 꼴을 보지 못해서 그것을 훼방하는 사탄의 방해가 틀림없습니다. 사탄은 남편을 통해 아내를 괴롭히고, 아내를 부추겨 남편을 넘어뜨립니다.
아담은 여자를 하와라고 이름 지었는데,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되었다는 의미로 그런 이름을 지었습니다(창 3:20). 그런데 이 하와의 결정적인 실수가 뱀의 꾀임에 넘어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남편에게도 주어 먹게 했다는 것입니다. 뱀이 이렇게 묻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언제 하나님이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했습니까? 먹지 말라고 한 것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뿐입니다. 하나 먹지 말라고 한 것을 다 먹지 말라고 한 것처럼 과장하고 왜곡해서 우리의 판단을 흐려놓습니다. 이럴 때 정확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으면 간단하게 시험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하와가 대답합니다.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여기까지는 좋아요.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왜 하와는 그렇게 엉터리로 대답을 했을까요?
하와는 이 명령을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지 못했습니다. 아담이 받았지요. 그러니까 하와는 아담으로부터 이 명령을 전해 들었을 것입니다. 만지지도 말라는 말은 아담이 하와의 호기심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첨가를 한 것일까요? 아니면 하와가 잘못 들었던 것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사람들이 그것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면 이런 비극이 생기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고 배워야 할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몰랐던 것이 아닙니다. 잘 알았어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당당히 말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알고 있는 내용은 엉터리였습니다. 그렇게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자기 멋대로 해석하고 올바로 배우지를 못했기 때문에, 사탄의 꾀임과 시험에 그만 넘어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 결과로 남편을 도와야 할 아내가 오히려 남편을 타락으로 인도하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면 하나님의 창조질서, 즉 남편을 돕는 배필로서의 아내의 역할도 제대로 수행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정말 충실한 아내는 남편을 돕는 배필의 역할을 잘 수행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창조질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믿음 좋은 것과 좋은 아내 되는 것은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비록 우리의 어머니 하와는 그렇게 실패했지만, 오늘 우리는 그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남편을 세워주고 채워주는 아내의 본분을 잘 감당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복되고 심히 좋아야 할 세상
창 1장 20~31절 / 이수영목사
최근 가장 뜨거운 정책적, 사회적 논쟁거리의 하나가 된 것이 새만금 간척사업입니다. 정부와 여당이 중단되었던 이 사업을 계속 추진하기로 최종결론을 내리자 환경단체들이 일제히 반발하며 심지어는 정부퇴진운동을 벌일 의사까지 밝히고 나섰습니다. 공해와 환경오염과 생태계파괴의 문제는 오늘날 우리에게 너무나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그 입장을 정리해 보는 것이 필요하리라 생각합니다.
공해니 환경오염이니 생태계파괴니 하는 것은 이미 새롭지도 놀랍지도 않은 우리의 일상사가 되어버렸습니다. 전국 곳곳의 강과 하천에서 물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하며 물과 강바닥들이 시커멓게 죽어있고 썩어버린 현장을 언론매체를 통하여 거의 매일 목격할 수 있습니다. 공기도 땅도 물도 어느 것 하나 온전히 남아있을 수 없게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금수강산이라고 부르던 우리나라는 이제 온통 쓰레기천지요 독극물저장고가 되어버린 듯 합니다. 거기서 나오는 것들은 무엇 하나 마음놓고 먹고 마실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사람 뿐 아니라 짐승도 벌레도 나무도 풀도 살 수 없는 더럽고 무서운 세상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이 강토를 이 지경으로 만든 것은 단순한 환경오염행위를 넘어서서 생명파괴행위이며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중대한 범죄행위임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하나님의 이 세상 창조이야기의 한 부분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거기서 우리 인간과 온 피조물을 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바로 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속에는 인간의 존재를 규정하는 가장 본질적이고 중요한 언급이 들어있습니다. 즉 하나님 앞과 이 세상 가운데서 인간이 누구인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본문 26절과 27절에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보았습니다. 또 28절에서는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은 존재이며 땅을 정복하고 다른 생물들을 다스릴 권리를 부여받은 존재임을 확인하곤 했습니다. 29절을 통해서는 모든 식물들도 다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며 인간의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이 세상 다른 것들을 지으신 날들에서는 그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한 반면에 인간을 만드신 날에는, 31절에서 보듯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한 사실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모든 창조세계 안에서의 인간의 우월성과 지배적 특권을 재확인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금세기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이 말씀 속에서 주로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 하는 물음에 관심을 가졌지 인간 외의 타 피조물들이 어떤 존재인가 하는 물음에는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인간과 타 피조세계 사이의 관계도 바르게 인식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 결과는 인간들이 오랜 세월동안 생명의 젖줄이요 삶의 터전인 이 아름답고 복된 자연세계를 점차적으로 그리고 갈수록 가속적으로 망가뜨리고 파괴하고 오염시키고 황폐케 하고 죽어가게 할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을 향하여 위험하고 위협적이며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무서운 존재로 만들어 버리는 것을 기독교신앙이나 신학은 방치했거나 아니면 막아내지 못하고 만 것입니다.
환경보존의 문제가 보기 좋으냐 보기 싫으냐 문제가 아니라,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가 되어버린 오늘날 우리는 우리 각자의 의식과 생활방식에 대한 깊은 반성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돌아가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창조의 뜻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우리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말하는 26절 이하를 보기 전에 20절부터 25절의 말씀에 새롭고 진지한 성찰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먼저 20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물들은 생물로 번성하게 하라 땅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셨습니다. 물 속에는 온갖 물고기들이 떼지어 헤엄치고 살며, 하늘에는 온갖 새들이 무리 지어 날며 사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신 것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뜻대로 되었을 때 21절 끝에 있는 대로 그 세상과 광경을 하나님께서 보시고 좋아하신 것입니다. 2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 물고기와 새들에게 복을 주시고 생육하여 번성하며 온 누리에 충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28절에서 보는 대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말씀하시기에 앞서 다른 생명체들을 향해서도 꼭 같은 복을 주시고 마찬가지로 말씀하셨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이 피조물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결코 취소되거나 변경될 수 없는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이라 할지라도, 아니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기 때문에 더더욱 하나님의 뜻을 어길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의 복을 위해 자연의 복이 파괴될 수 없습니다. 사람의 생육과 번성과 충만을 위해 자연의 생육과 번성과 충만이 희생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둘 다 하나님이 복 주시고 하나님께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충만하라고 말씀하신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바로 이 전제 아래에서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모든 채소와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라" 하신 말씀들의 참 의미를 이해해야 함을 보게 됩니다. 이 세상 그 어느 것도 인간이 주인인 것은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며 모두의 행복과 번영을 위해서 인간에게 그 보존과 관리의 책임이 맡겨졌을 뿐입니다. 자연계가 하나님의 복을 누리며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힘쓰는 것은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입니다. 그 사명을 바르게 감당하지 못하거나 그 사명에 거슬려 행동하며 산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이기를 거부하는 것이며 또 참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26절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다는 사실과 바다와 공중과 땅의 모든 것들을 다스릴 책임 사이를 아주 밀접하게 연관시키고 있습니다. 물론 성경 전체의 증거와 가르침에 따라 생각할 때 "타 피조물에 대한 선한 관리자 됨"이 하나님의 형상, 즉 참 인간됨의 의미의 전부라고 할 수는 없으나 빼놓을 수 없는 그 일부인 것도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 앞에서 우리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서있습니까? 몸에 좋다, 정력에 좋다는 말만 들으면 곧 그 좋다는 것의 씨를 말리는 것이 우리네 사람들입니다. 약재로 좋다는 소문 때문에 코뿔소나 호랑이를 비롯하여 멸종위기에 몰린 동물들이 얼마나 많으며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수난을 겪는 짐승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곰 쓸개즙이 몸에 좋다고 곰을 잡아다가 멀쩡한 몸을 뚫어 쓸개에 직통 수도관을 꽂고 수도꼭지를 달고 자물쇠까지 채워놓는 사람이 과연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살 자격이 있는 인간이겠습니까? 개고기가 몸에 좋다고 닥치는 대로 잡아 먹다보니 개 값이 천정부지로 뛰고, 그러니 한 푼이라도 돈을 더 벌겠다고 개고기에 물을 먹여 근수를 부풀려서 음식점에 내다 팔고, 그 사실도 모르고 땀 뻘뻘 흘리며 "아 좋다, 아 좋다" 연발하며 먹는 우리 사회의 모습, 쇠고기 근수를 늘리기 위해 멀쩡히 살아있는 소의 다리를 잘라놓고 피를 쏟게 하여 갈증난 소로 하여금 다량의 물을 마시게 만드는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봅니까? 이렇게까지 동물을 학대하고 착취할 명분과 권리를 어디에서 누구에게서 받았습니까? 이러한 가혹행위를 한 사람이나 그 행위를 통해 간접적인 이익을 누린 사람이나, 그러한 일들을 방관했거나 저지하지 않은 모든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오늘날 자연훼손과 생명말살의 현실에 대해 책임을 나눠져야 할 공범자들임을 시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창조의지와 창조질서에 대한 중대한 죄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회복의 가능성과 그 방안이 보이지 않을 만큼 심각해진 이 환경파괴의 상황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살아야 할 세상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바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지향하는 하나님나라 속에서 인간과 온 피조세계와의 진정한 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올바른 관계의 세상을 의미한다고 여러 차례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올바른 관계가 서고, 인간과 인간사이에 바른 관계가 이루어질 뿐 아니라, 인간과 타 피조물 사이에도 바른 관계가 회복되는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이 세 번째 관계를 무시하거나 소홀히 해서는 안됩니다. 물론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의로운 관계가 먼저 회복되지 않고서는 우리들 사이의 사랑의 관계가 회복될 수 없으며, 우리들 사이의 사랑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고서는 우리와 타 피조물 사이의 평화의 관계가 회복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를 되찾으려는 갈망은 인간들 사이의 화평한 관계를 되찾고자하는 염원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온 창조세계와의 평화한 관계를 되찾으려는 진지한 노력에로까지 연장되고 확대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얻는 구원의 내용과 하나님나라의 모습 속에는 이 세 번째 관계가 포함되어있음을 우리는 이사야서 속에서 대표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 11장 1∼5절과 10절은 이새의 줄기에서 나올 메시아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는데 그 사이에 있는 6∼9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세계 속에서 온 피조물들 사이에서까지 완전한 평화가 있는 삶이 복되고 심히 좋은 삶이며 그러한 세상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본문 31절에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한 것은 사람만을 가리키는 것이 결코 아님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한 것입니다. 온 피조물이 다 함께 어울려 하나님의 복을 누리고 생육하며 번성하고 온누리에 충만하며, 그렇게 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잘 받들 사람이 있는 그 총체적 모습, 그것이 하나님께서 보시고 심히 좋아하신 창조의 질서였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회복하고자 하시는 하나님나라의 한 모습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분명히 해야합니다. 자연을 지키고 환경을 보호하는 일은 그 누구의 일이기에 앞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사회적인 일이 아니라 신앙적인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질, 자연과 평화를 이루는 복되고 심히 좋은 세상을 위해 힘쓰는 것은 당연한 책임이고 의무입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에 보시고 좋아하신 세상을 이루려고 노력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보기 흉하게 망가지고 병들고 썩어져서 사람도 물고기도 새들도 살기 힘들어진 한반도의 강토를 산 좋고 물 맑고 인심 좋은 나라, 삼천리 금수강산으로 되돌려놓는 일은 바로 한국교회와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지상명령으로 여겨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강토와 생활환경을 회복하고 보존하기 위하여 우리가 해야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첫째는 자기밖에 모르고 남을 생각할 줄 모르는 이기주의와 욕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사실상 인간이 자연을 훼손시키고 오염시키는 것이 자연 그 자체에 대한 적대감정이나 원한 때문인 경우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바른 인간관계가 파괴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의 행동이 남에게 미칠 영향 같은 것에는 아무 관심이 없는 이기주의와 나만 더 많이 벌면 그만이라는 비뚤어진 욕심이 환경파괴의 근원이라는 말입니다. 주변의 산림과 농토와 하수가 맹독성 농약으로 썩어가든 죽어가든, 나만 기분 좋게 골프를 즐길 수 있고 또 골프장 만들어 떼돈 벌 수만 있다면 아무 상관없다는 사람들, 정화시설을 제대로 가동시키면서 어느 세월에 큰돈 만들 수 있겠느냐고 하면서 T.V나 신문에서 아무리 고발보도를 해대도 귀 틀어막고 양심에 철판 깔고 비밀하수관으로 독극물이나 다름없는 폐수·오수를 무차별 방류해 버리는 기업주들, 내가 사용하고 버리는 생활용품들이나 일회용 상품들도 무시 못할 오염원임을 알면서도 손쉽고 편리하다는 이유로 자제할 줄 모르고 써 버리는 대다수의 의식 없는 소시민들, 이 모두의 욕심과 이기주의와 무관심 때문에 우리의 아름다웠던 강산이 병들고 죽어가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환경을 오염시키는 것은 오염된 인간입니다. 생태계의 파괴는 파괴된 인간성 때문입니다. 오염된 인간성을 정화하고 파괴된 인간성을 회복하는 첫 걸음은 조금만 더 남을 생각할 줄 알고 조금만 덜 욕심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한결 나은 세상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는 절약하는 정신과 습관을 기르는 것입니다. 먹는 것을 포함해서 우리가 소비하는 대부분의 것은 공해를 산출하며 생산된 것이고 오염을 유발하며 버려지는 것들입니다. 따라서 오염과 공해를 줄이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불요불급한 소비를 최대한 억제하는 것입니다. 꼭 필요한 만큼만 쓰는 절약정신과 습관을 기르는 것입니다. 절제와 절약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주님 오실 때까지 지켜야 할 미덕입니다. 언제부터 어떻게 하다 그렇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의복이건 가전제품이건 가구건 자동차건 한국사람들만큼 자주 바꾸고 쉽게 버리는 사람들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나라를 망하게 하는 길이며 국토를 망가뜨리는 행위라 규정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앞장서고 온 국민이 함께 이제 "아껴 쓰고 나눠 쓰고 고쳐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는" 정신을 끊임없이 실천하며 생활화할 때 우리의 생활환경은 서서히 살아날 것이고 우리는 보다 낳은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복되고 심히 좋은 세상을 망쳐놓은 우리의 죄와 욕심과 이기주의와 게으름을 회개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실 세상, 모든 사람에게 항상 복되고 유익할 나라를 가꾸어 가는 일에 힘과 지혜를 모으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