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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운 영 紫雲英
#.73
“가서 귀인을 데려오라.”
쿨럭. 태율의 속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온 기침 한 번에 붉은 핏덩이가 솟아 바닥으로 쏟아졌다. 어깨, 허리, 팔, 다리 할 것 없이 가차 없이 떨어진 매질에 실컷 농락당한 그의 모습이 처참했다. 찢겨진 옷 사이로 드러난 부분은 살점이 떨어져 나간 듯 붉은 상처만이 남았다. 흠씬 매질을 한 병사들조차 지친 듯 숨을 몰아쉬며 이마에 맺힌 땀방울들을 닦아냈다. 천우의 명 한 마디에 몇 몇 병사들이 재빠르게 두 다릴 움직여 부영궁 쪽으로 사라지는 것을, 그가 지켜보고 있었다.
“진실을 말해. 무엇이든지.”
“.........”
“나를 기만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
어느새 제 앞에 가까이 다가와 있는 천우가 권력을 상징하는 봉을 들어 그의 턱을 추켜세웠다. 더 악독하고 지독한 형벌이 얼마든지 있음에도 이 정도에 머문 것은, 그나마 남아있는 일말의 옛 정 때문에서였다. 천우는 인정할 수 있었다. 지금과 같은 불미스러운 일들만 아니었다면 분명 그는 후생에서도 다시 만날 수 없는 충직한 신하라는 것을.
“어떤... 대답을.. 원하시옵니까..”
지친 듯, 그러나 아직 버리지 않은 고집이 담긴 태율의 말에 천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이없음에 입술을 비집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떨어져 있던 두 사람의, 이토록 닮아있는 대답이라니. 그의 비정한 손길이 결국 태율의 뺨을 강하게 스치고 지나간다. 한껏 낮아진 그의 목소리가 다시금 태율을 향해 묻는다.
“귀인을, 연모하였느냐.”
그것이 이 모든 일의 시작. 그리고 결말까지도 결정짓게 될 모든 근본. 들고 있을 힘이 없어 아래로 처연히 숙여진 태율의 고개가 그의 말에 반응하듯 미동한다. 쏟아져 내린 머리칼에 감춰진 그의 눈이 어쩐지 웃고 있을 것 같아 천우의 얼굴은 더욱 일그러진다.
“답하지 않아도 좋다. 곧 있으면 귀인이 도착할 테니.”
그리고 매정하게 돌아서는 천우의 등을 향해 내뱉어진 그의 목소리.
“......습니다...”
천천히, 황금빛 곤복이 뒤돌아선다.
“뭐라 하였느냐.”
“연모... 하였습니다..”
“........”
“제가... 귀인마마를, 홀로.. 연모하였습니다...”
...
우뚝. 멈춰서는 운영의 걸음. 이제 이 모퉁이만 돌면 곧 그의 모습이 있을텐데. 지금 제 귀로 스며든 그 목소리가 정녕 그의 것이 맞는지.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혼란스러운 머리가 멈춰 세운 발걸음이 조금도 떼어지지 않았다.
“어서 가시지요.”
저를 재촉하는 병사들의 힘에 이끌려 운영은 억지로 다리를 움직였다. 조금씩 강해지는 지독한 피의 비릿함. 그에 비례하듯 쿵쾅거리기 시작하는 심장. 이 모퉁이를 돌아도, 그가 어떤 모습이어도, 저마저 무너지면 안된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아보지만 주체할 수 없이 떨리는 손은 막을 길이 없었다.
“폐하, 모셔왔사옵니다.”
운영의 시선이 천우를 지나쳐 먼저 닿은 곳은 그리도 볼품없는 나무기둥에 묶인, 제가 늘 그리던 그리운 이였다. 항상 그렇게 반듯한 모습이었던 그인데. 넝마라고 해도 좋을 만큼 다 헤집어진 옷들 사이사이로 벌어진 상처에서는 진득하게 피가 흐르고, 마치 영혼이 떠나고 없는 사람인 양 미동조차 없는 모습에 운영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천천히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안돼...”
믿기 싫은 현실을 거부하듯 운영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힘들게 꺼낸 첫마디였다. 그리고 눈물이 가득 차오른 눈으로 천우를 올려다보았다.
“폐하....”
“아직 살아있으니, 눈물은 조금 이르지 않겠느냐.”
그러자 그의 말을 반증하듯 태율의 고개가 희미하게 움직였다. 온 힘을 다해 천천히, 그가 어떻게든 고개를 들어 운영을 눈에 담으려 하고 있었다. 운영은 보았다. 살아있는 그의 눈이 아직도 사랑 가득한 눈빛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을.
“폐하...! 살려주십시오..!”
운영은 천우의 발목을 붙잡고 엎드려 애원했다. 그가 보내주었던, 세상 가장 훌륭한 장인의 손에서 태어난 귀하디 귀한 옷과 보석들을 걸친 아름다운 그녀가, 마치 누더기를 걸친 천박한 계집이라도 된 양 오열하며 빌었다.
“살려달라니, 누구를 말이냐.”
“폐하.. 흐흑.... 그 분은 아무런 잘못도... 흐흡...”
“잘못이 없다니. 귀인은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게로군.”
운영이 흐느끼며 천우의 표정 없는 얼굴을 올려다본다. 그의 냉정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미 그가 모든 사실을 실토하였다.”
“.........”
“저 죄인이 몰염치하게도 그간 귀인을 몰래 연모하고 있었다더군. 죽어 마땅한 대죄가 아니더냐.”
그대로 고개를 돌려 운영이 태율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는 말하고 있었다. 이것이 당신과 이소를 살리는 방법이라고. 누구든 한 사람이 피를 보기 전에는 이 지옥이 끝을 맺을 수 없을 거라고, 슬픈 눈으로 말했다.
“아니옵니다....! 아니옵니다, 폐하... 흐흡...”
어깨를 떨며 흐느끼는 운영을 천우가 애정 없는 눈길로 내려다본다.
“아니라니. 무엇이 말이냐.”
“저 역시.. 그 분을....”
“폐하...!”
온 힘을 다한 태율의 목소리가 운영을 말을 가로막는다.
“소신의... 말을.. 믿으십시오.. 한 치의 거짓도, 없사옵니다...”
제발 제 뜻을 따르라는 태율의 간절함이 운영에게 와 닿았다. 운영은 바닥을 향해 떨어뜨린 고개를 가로저으며 하염없이 흐느꼈다.
내가 어떤 말을 하고 어떤 모습으로 변한다 해도, 하루하루 더 많이 사랑하겠다고, 약속하겠소.
그 말의 따스한 온기가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바로 어제의 일처럼 이렇게도 생생한데..
“그렇다면 마땅히 벌을 내려야겠군.”
마지막 선고인 양 무겁게 떨어지는 천우의 한 마디에, 운영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
“폐, 폐하..!”
“저 두 눈으로 귀인을 보며 얼마나 불경한 마음들을 품었겠느냐. 여봐라!”
황제의 충성스런 개들의 우렁찬 대답소리.
“인두를 가져다 눈을 지져라.”
...
형조 안은 피워놓은 화톳불로 인해 대낮처럼 밝았다. 악귀의 눈처럼 붉게 타오르는 불빛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그 안에 자리한 모두의 긴장을 부추겼다.
“황제의 후궁을 남몰래 연모한 죄, 순진한 귀인을 주동하여 황궁 밖으로 이끌었던 죄, 그 모든 일로 하여금 황궁 안팎을 어지럽힌 죄. 그 전부를 인정하느냐.”
태율은 말이 없었다. 인정할 수 없는 자신의 죄를 짊어져야 하는 그의 마음에 어찌 한 줌의 두려움도 없었겠는가. 과연 현제(賢帝)라 불릴 만한 그 다운 형벌이라 생각했다. 이 두 눈으로 하여금 다시는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없도록 하는 것만큼 두렵고 끔찍한 형벌이 또 어디 있을까. 다만 두 눈을 잃어가는 모습을 그녀에게 보여야 한다는 것만이 슬프고 안타까울 뿐.
“죄인의 형(刑)을,”
“.........”
“시행하라.”
...
“안돼!!!”
비명소리와도 같은 찢어질 듯한 고함 소리에 뒤이어 어린 이소의 분홍빛 치마가 나타났다. 이미 눈물로 온통 젖어 있는 이소의 얼굴이 양 팔을 벌리고 태율을 가로막고 서서는 천우를 향해 자비를 베풀기를 간청했다.
“아바마마! 살려주세요...! 율을 용서해주세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운영과, 나무기둥에 묶인 태율의 사이에 선 이소가 두려움을 감춘 채 천우에게 말했다.
“그를 살려주세요...! 아바마마 제발..!!”
“누가 황녀를 형조에 들였느냐! 당장 처소로 인도하거라!”
병사 몇 몇이 이소를 향해 다가선다.
“내게 손 하나라도 대면 가만 두지 않을 것이야!!!”
저항하는 이소의 목소리. 저를 지켜내기 위한 작은 이소의 몸부림에 태율의 눈에서 기어이 마지막 눈물이 흘러내렸다. 다시는 이소를.. 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뭣들 하느냐, 당장 처소로 데려가래두!!”
“아바마마!! 안됩니다! 율을 용서해주세요!!!”
그러나 장정들의 힘을 막기엔 이소는 너무나 작고 연약했다. 그들에게 이끌려 억지로 뒷걸음질 치던 이소가 안된다고 고함을 치다가는, 결국 눈동자가 까무러지며 그 자리에 기절하고 말았다.
“이소야!!!!”
운영이 달려가 이소를 품에 안아들었다. 그 아이의 어깨를 흔들며 간절하게 이름을 부른다. 병사 하나가 이소를 등에 업고는 재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를 뒤따르는 운영. 천우의 손짓에, 다른 병사들의 손에 떠밀려 운영도 함께 형조에서 사라진다. 짧은 소란이 지나간 형조는 다시 고요에 휩싸였다. 천우는 높은 단상에서 내려와 태율의 앞에 섰다.
“이소가, 황실의 혈맥이더냐.”
무거운 질문에, 태율은 어렵지 않다는 듯 답을 내어놓는다.
“공주님의.. 귀하신 몸 어느 곳에... 소신의 천한 피가 흐르겠사옵니까..”
천우는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너의 말을 오롯이 믿어 넘길 정도로 호락한 나라고 생각지 마라. 한 때 나를 위해서 목숨을 걸었던 너의 충절이 아까워, 그 신의를 생각하여, 그녀를 위하려는 너의 작은 소망을 이뤄주려는 것뿐이다.”
“........”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
다른 말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저 그녀를 행복하게.. 해 달라는 것 외에 떠오르는 말이 없다. 이제 두 눈을 잃고, 그녀마저 잃게 되었지만 어떤 바람도, 아무런 욕심도 없다. 그런데.. 왜 이다지도 두려운 걸까. 지금 이 두 눈으로 보는 것이 세상을 받아들일 마지막이라면, 마음껏 열어두어 모든 모습들을 담아두고 싶은데. 감은 눈을 뜰 수가 없다. 태어나 처음으로, 가장 커다란 공포가 자신을 짓누른다..
저벅저벅. 천우의 발소리가 그에게서 점점 멀어진다. 천천히 들어 올려지는 그의 한 손이, 형을 시행하라는 명을 내리고 있었다.
첫댓글 ㅜㅜㅜㅜㅜ
정말 가슴이 미어져요... 천우가 운영일 사랑하지 않았으면 태율은 영원히 충직한 신하일텐데.. 이소와 운영은 언제나 웃을 수 있었을텐데... 너무 다들 안타까워요 ..모든 사람들이.
이연에서도 자운영에서도 눈을 잃게 되네요... 태율이 마지막에 운영과 이소를 모두 볼 수 있었다는 것 정도만 다행이랄까요..ㅠㅠ 이렇게 끔찍한 일이 지난후에 가장 마지막에는 해피엔딩이었으면 좋겠어요......
ㅜㅜ 어제부터 오늘까지 1화부터 다읽었어요 ㅠㅠ 율이랑 운영이랑 ㅜ.ㅜ 안되는건가 ㅠㅠㅠ 제발 해피엔딩이면 좋겠어요 ㅜ.ㅜ
ㅠㅠㅠㅠㅠㅠ 슬퍼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엉엉 ㅠㅠㅠㅠㅠ
아아........천우가 정말 밉네요ㅠㅠ황제라는 직위하나로 어찌 정말 잔혹할수있는건지..천우미워요!!ㅠㅠ 태율이랑 이소랑 운영이가 불쌍하네요..사랑하는 님의 눈이 머는걸 눈앞에서 보고만있어야하니..이소도 그렇고 다들 왜이렇게 아픈사랑을 하는건지..새드이던 해피엔딩이던 작가님의 생각을 밀어드리겠습니다!!새드면 기꺼이 눈물을 흘리며 볼것이고 해피면 기꺼이 웃으면서 볼터이니 작가님은 마무리까지 힘내세요!!항상 응원해드릴께요!!화이팅!!
-0- 충격이네요.....알바하고 무진장 피곤해서 들어왔는데 잠깐들어왔다가 소설읽고 잠이 번쩍.! 말도안되.. 천우가 너무너무 잔인하네요 그래도 어쩜 그 앞에서 눈을 지지라고 명을 -0-
제가 쫌 늦었네요ㅠㅠ 천우가 밉네요. 태율이 이제는 운영과 이소를 보지 못한다니... 슬퍼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