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백촌가(延白村家) / 조지훈
수숫대 늘어선 밭뚝길로 몰아 놓은 트럭은 배추밭 머리를 돌아 울타리 뒷길을 돌아 어느 촌가집 마당에 멈춘다.
젊은 중위가 뛰어내려 어머니를 부르니 뜻아닌 목소리에 가족이 몰려나와 서로 껴안고 울음 반 웃음 반 어쩔 줄을 모른다.
알고 보니 이 중위는 사년 전에 달아난 이 고장 젊은이 때 묻은 융의(戎衣)를 입고 와도 금의환향이 이 아니냐.
한잠 든 닭을 잡아 모가지를 비틀고 둘러앉아 한 그릇씩 국수 잔치가 푸지다. 내 뜻 아니한 이 촌가에 와 그 즐거움을 함께하노니 반가운 손이 되어 아랫목에 앉아 웃는 인연이여
흐린 하늘에서 달빛이 다시 나온다 평양 가는 트럭에 뛰어오르니 밤은 삼경! 사랑하는 자식을 하룻밤이나마 못 재워 보내서 안타까운 그 어머니를 생각한다.
아 우리나라 어머니는 모두 이렇게 속눈썹에 이슬이 마를 사이 없이 여위어간다. 남의 고향에를 먼저 왔길래 어머니가 벌써 나를 찾아와 계시다 어데나 계시는 어머니 모습!
1950. 10
『역사 앞에서』(신구문화사, 1959) / 『조지훈 전집1 –시』(나남, 1996)
감상 : 1945년 광복의 기쁨을 채 누리기도 전에 3.8선이 그어진 것은 우리민족의 비극을 예고하는 신호였다. 북위 38도선이 경유하는 지역에 황해도 연백이 포함된다. 연백은 연안과 배천(백천) 지역을 아우르는 말이며 예성강 하구에 연백평야를 형성하여 위쪽의 재령평야와 함께 대표적인 곡창지대였다. 연백은 온천으로도 유명한데 장만영 시인의 아버지도 온천장을 운영했던 분이다. 연백 출신의 장만영 시인은 월남 이후 ‘산호장’이란 출판사를 운영했으며, 조지훈은 시 이론서인 『시의 원리』(1953)를 이곳에서 출간한 인연이 있다.
연백의 운명은 광복 때는 남한에, 휴전선을 그을 때는 북한에 영토가 많이 넘어갔다. 북과 남이 대치되는 공간의 속성도 살펴볼 필요가 있겠지만 광복 후 한반도 곳곳이 이미 이념 대립의 장이었다. 심지어 자신의 신분이나 이념이 곧 생사를 결정하는 상황으로까지 이어졌다. 「연백촌가」 의 ‘이 중위’가 가족을 두고 남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광복과 동시에 벌어지고 있었던 셈이다.
미국과 소련에 의한 남북 분할이 이념 갈등의 단초가 되었지만 그 파장과 고통은 이 나라 국민이 고스란히 받아야 했다. 조지훈(1920-1968) 시인의 가족도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참화를 입는다. 「연백촌가」가 실린 조지훈 시인의 시집 『역사 앞에서』는 전쟁 전후의 상황에 대한 기록적 성격이 강하다. 「절망의 일기」를 보면, 성북동 자택에서 자고 있는 시인을 깨우며 북의 남침 소식을 전한 이는 박목월 시인이다. 6월 26일, 고려대에서 시론을 강의 중이었던 조지훈을 이한직이 찾아오고 불안한 중에도 조지훈은 “더럽게 살지 말자”는 생각도 한다.
또 하루가 지나 조지훈이 가족과 결별하는 선택을 했을 때 “죽음을 너무 가벼이 스스로 택하진 말라”는 아버지의 당부가 있었다. 아버지는 『통속한의학원론』을 집필한 한의학자며 조선어 표준말 사정 위원이기도 한 조헌영 선생이다. 제헌 국회의원이자 1950년에 2선까지 한 정치인이며 정치적 행동에 국가보안법이 적용되면 안 걸리는 사람이 없게 된다고 반대 의견을 냈던 진보적 지식인이었다. 조헌영은 서울에서 납북되어 평양으로 가면서 가족에겐 다시 볼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조지훈 시인은 서정주, 박목월, 이한직을 만나 전황을 더 살피다가 뒤늦게 피난을 가지만 한강에 막혀서 오도 가도 못하게 된다. 강을 건너지 못하고 가족을 걱정하다가 절벽에서 투신했지만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한강을 건너게 된다. 이후 조지훈은 문총구국대에 이어, 대구에서 결성한 공군종군문인단에 소속되어 단장인 마해송에 이어 부단장 직함을 갖고 대구와 전쟁터를 오가며 활동한다. 「풍류병영(風流兵營)」에선 서울 가족을 걱정하면서 총칼 대신 가슴에 청산가리를 준비하고 다니는 비장한 각오를 보이기도 한다. 「여기 괴로군 전사가 쓰러져 있다」에선 눈만 반쯤 뜨고 시체로 변해가는 소년병을 두고, “누가 다시 이 영혼에/ 총칼을 더할 것이냐”며 피아(彼我)를 떠나 전쟁의 참혹함과 안타까운 마음을 토로하기도 했다.
1950년 10월 3일 서울 성북동 집으로 귀환한 조지훈은 「서울로 돌아와서」를 통해 자신의 감회를 피력한다. 그간 근심의 대상이었던 아내의 건재를 확인하고 세 살, 여섯 살 아이를 만나 다행으로 여기면서도 자신을 걱정했던 아버지가 정작 돌아오지 못한 것을 비통해 한다. 고향인 영양에 있을 어머니 소식도 끊긴 상태다. 조지훈의 어머니는 남편과 떨어져 대구 피난 중에 화병을 얻어 돌아가신 걸로 언급되고 있다. 조지훈의 남동생도 학도병으로 참전했다가 전쟁 중에 사망했고 가족의 연이은 비보에 이어 고향마을의 이념 갈등 문제까지 더해지면서 조부마저 스스로 삶을 정리하고 만다.
서울로 돌아온 조지훈에게 서울신문사 오종식은 김영랑 시인의 죽음을 전하며 애통해 한다.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 박남수, 이한직 등을 《문장》지로 데뷔시킨 정지용 시인도 납북 도중 비행기 폭격으로 사망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전쟁 이후 생사가 확인되지 않는 김기림 시인도 전쟁 중에 사망했다고 보는 게 일반적 시각이다.
「서울로 돌아와서」의 마지막 결구는 “돈암동 길가에서 주워 업은 전쟁고아는/ 이름을 물어도 나이를 물어도 대답이 없다”로 되어 있다. 전쟁 발발 석 달만의 일이었다. 연백 출신 함동선 시인은 고향에 어머니를 두고 남쪽으로 내려와서 어머니를 다시 만나지 못하니 강제적으로 고아가 된 것이나 진배없다. 김기림을 찾아 3.8선을 넘어왔던 김규동 시인도 전쟁 이후 어머니가 있는 북쪽 땅을 다시는 밟지 못하고 늘 그리워했다. 거꾸로 김동환 시인은 전쟁 통에 고향인 북쪽으로 넘어갔으니 남쪽에 남은 최정희 소설가와 두 딸은 남편 없는 아내, 아버지 모르는 딸이 되고 말았다. 서울 돈암동에 신혼 생활 중인 김수영 시인은 서울을 빠져나오지 못하는 바람에 인민군에 강제 징집되었다가 전쟁 포로가 되는 우여곡절을 겪으며 가정사의 파탄을 견뎌야 했다. 일부 문인을 예로 든 것이지만 전쟁의 고통은 모두의 것이었다.
서울 수복 후 조지훈은 정운삼 시인과 동행하여 도보로 파주까지 나아간 뒤에 군용 트럭을 얻어 타고 해주를 거쳐 평양으로 나아간다. 정운삼 시인은 1951년 8월, 부산 밀다원 다방에서 유서를 남기고 음독자살하고 만다. 유서 내용만 봐서는 스스로 생을 마감한 이유를 짐작하기 어렵지만 전쟁 체험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조지훈은 평양으로 향하던 중 연백을 지날 때의 인상적인 경험을 「연백촌가」로 잘 표현해 두었다. 군용 트럭의 책임 장교였을 중위는 작전 수행 중에 짬을 내어 자기 집에 들른다. 전쟁 중에 소식을 모르는 자식이 살아온 자체가 금의환향이고 가족에겐 최고의 선물이 된다. 닭고기가 든 국수로 잔칫상을 차리고 웃음꽃을 피우는 가족을 보며 조지훈은 덩달아 흐뭇해하면서 “어데나 계시는 어머니 모습!”을 떠올린다. 이 땅의 어머니란 존재와 눈물까지 사무치게 그리던 조지훈은 군용 트럭을 쫓아오는 달을 보며 어머니 생각을 내내 했을 것이다. 뒷날 조지훈은 고향에 있는 어머니의 묘를 남양주로 이장해 온다. 어머니를 가까이 보려는 뜻에서였는데 공교롭게 그해 조지훈은 병을 이기지 못하고 어머니 앞에 묻혔다.
평양에 도착한 조지훈은 「패강무정(浿江無情」으로 평양의 인상을 기록하며 예서 오십 일 정도 머물렀다. 해가 바뀌고 중공군이 전쟁에 개입하고 인민군이 반격해 내려옴으로써 조지훈은 다시 평양을 떠나 남하하게 된다. 전선이 확대·이동·반복되는 와중에 인민군 편과 국군 편이 첨예하게 갈리면서 민간인들도 부득불 양쪽으로 갈라져서 서로의 목숨을 앗는 비극으로 치닫게 된 것은 남북이 함께 짐지게 된 해원(解冤)하기 어려운 아픔이다. 이런 현실이 곧 무정의 극치라고 한들 달리 변명할 말도 마땅치 않다.
중위의 가족도, 조지훈의 가족도, 다른 누구의 가족도 안녕을 보장할 수 없는 슬픈 현대사의 질곡에서 「연백촌가」는 잠시나마, 그것으로부터 벗어난 해방 공간의 느낌을 준다. 촌가에 부는 따스운 인정의 바람이 바깥의 무기와 내면의 결기를 녹이게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연백촌가」는 삶에서 정작 요긴한 것이 무엇인지 물어온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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