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판에 볍씨 넣기가 일찍 끝나자 이번에는 고추밭에 비닐 씌우기를 한단다. 품앗이다. 우리 밭은 비 오기 전 미리 씌웠다. 남편은 오후에 형님네 고추밭으로 오란다. 요즘 마음이 심란 하여 남편 몰래 보살님을 찾아가 나의 앞날을 물어보려 했더니 내일로 미루어야 하겠다. 완전 무장을 하고 형님네 고추밭 윗말로 갔다. 트랙터로 이미 흙은 잘게 갈아져 있었고 남편은 고추 두둑을 만들기 위해 골 타는 기계로 연신 골을 타며 다닌다.
헉! 비닐을 씌워야 하는 고추밭을 보니 식겁이다. 우리 고추밭의 5배는 넘는다. 그냥 밭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이마에 손을 얹어 바라볼 정도의 평수다. 나는 고추밭에 비닐을 씌우다 장렬하게 쓰러질 것 같은 불안감이 밀려온다. 그래도 난 비닐을 씌우는 기계를 믿어 보기로 했다. 우리에게는 비닐을 씌우는 기계가 있으니 천만다행이다. 집 안 형님과 품앗이를 하는 마을 형님 두 분이 오셨다. 남자는 아주버님과 골타는 남편뿐이다.
아주버님이 비닐을 기계에 맞추어 주고 고추 둑에 먼저 약을 뿌렸다. 벌레약이다. 땅에 좋지 않은 벌레를 다 사망 시키는 것이다. 우리 사랑스런 고추모를 위해서다. 비닐기계는 앞에서 두 사람이 손잡이를 잡고 끌면 비닐이 골에 씌워지면서 자동으로 양옆 흙이 덮인다. 그것이 비닐을 씌우는 기계가 할일이다. 그리고 두 사람은 삽을 들고 뒤를 쫓아가면서 비닐이 제대로 씌워지는지 확인하며, 씌워진 비닐위로 흙을 얹는 일을 한다. 말 그대로 삽질하는 것이다.
이 동네 품앗이는 남자는 구경할 수가 없다. 하늘같은 남편님을 너무 아끼나보다. 남자 살기에 좋은 마을이다. 우리 가운데뜸 마을은 어림없다. 아니 우리 집은 안 통한다. 우리 남편은 당연히 주부인 나를 아낄 의무가 있다. 왜냐고 물으시면 ‘소중하니까.’
며칠 전 우리 집 고추밭에 비닐 씌울 때 앞에서 처음에는 기계를 끄는 역할을 하였다. 죽을 뻔했다. 생각보다 흙바닥에서 기계를 끄는 일은 쉬운 게 아니다. 다음번에는 삽을 잡았다. 마을 형님 두 분이 기계를 끌고 가시고 나와 집안 형님은 뒤를 따라가며 삽질을 하여 비닐 위에 흙을 올려놓았다. 몇 고랑을 하니 숨이 차다. 힘든 일을 시키지 않은 남편 배려에 나는 이런 일이 익숙하지 않다. 하지만 품앗이는 부부끼리 어쩔 수 없이 하여야 한다.
숨을 헉헉대며 쉴 틈 없이 흙을 비닐에 올려야 하는 일은 도저히 숨이 가빠할 수가 없어 다시 기계를 끌게 다니겠다고 하였다. 기계 끄는 일도 만만치가 않다. 말 그대로 소에 쟁기를 달고 소가 끄는 그런 풍경이다. 나는 소가 아닌데 소가 되어 씩씩거리며 쟁기를 끌 듯 비닐 기계를 끌었다. 갑자기 예전의 우리 밭을 갈던 소가 생각난다.
우리 밭은 비탈길에 가운데 커다란 바위가 박혀있다. 그래서 경운기로 로터리를 칠 수가 없어 반드시 소에 쟁기를 달아서 갈았다. 과거에는 마을에 일소가 한 마리씩 있었다. 훈련을 시켜 일소를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마을 어르신들이 연세가 드시면서 길 드린 일소는 없어졌다. 지금의 비탈길 밭은 묵은땅이 되었다. 어느 날 내가 호미를 들고 그 밭을 일궈 보려고 갔었다. 호미를 땅에 내리치차 “탕”하고 튕겨 나왔다. 자갈밭이라 그런지 호미가 들어가지 않았다. 그 땅은 현재까지 묵히게 되어 잡초만 가득하다.
일소는 남의 집 밭 갈러 와서 힘들게 일한 만큼 후한 대접을 받았다. 커다란 빨간 함지박에 하나 가득 여물과 사료를 주었다. 수시로 시원한 물도 준다. 지금에 나는 소만도 못하다. 소처럼 낑낑대며 비닐 기계를 끄는데 후한 대접을 하지 않는다.
기계의 힘을 빌려 쉬울 줄 알았던 비닐 기계는 고랑이 높은 관계로 번번이 흙을 덮지 못하고 빠진다. 기계를 버려 버리고 싶다. 일하시던 형님이 밭 가로 지나가는 방울엄마를 보더니 여자들은 제주도로 이사 가잔다. 제주도는 남자들은 집에서 아기를 보고 여자들이 밖에 나가 일한다며 우리가 꼭 그 꼴이란다.
앞에서 기계 끄는 형님께 미안해 다시 일을 바꾸어 뒤따라가며 삽질을 하였다. 형님께서 한마디 하신다.
“젊은 사람이 삽질이 그게 머여? 삽에 흙이 반밖에 안 떠지잖아.”
“ 형님 무슨 말씀이세요. 하나 가득 뜰 수 있는데 일부러 반삽만 뜨는 거예요. 이렇게 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기술인데요. 훗, 모판에 볍씨 넣을 때도 꼭 맞추는 것보다 모판 두 개를 남기는 게 더 고난이도 기술이라고요”며 우겨대자 형님께서는 나의 말에 그만 웃고 마신다.
흙에 까만 옷을 입히는 것은 쉬운 게 아니다 쉬지 않고 땀을 흘려가며 하는데도 일이 빨리 되지 않는다. 칠성산으로 해가 기울기 시작한다. 칠성산 밑에 하얀 집에는 벌써 해가 기울어 그림자가 드리워져있다. 아직 이곳은 해가 쨍쨍한데 말이다.
“형님 저 하얀 집에 사는 사람은 저녁 해야겠네요. 저기는 해가 저물었어요!” 칠성산은 응달이다 보니 오후 4시가 되면 해가 지기 시작한다. 그래서 하얀 집은 밤이 길다. 바라다 보이는 가운데 뜸이나 장다리 골은 아직도 해가 중천인데 그 곳은 어두워진다.
고추밭에 비닐 씌우는 일은 오후 5시가 넘어서야 겨우 끝낼 수 있었다. 고추밭이 황색에서 까만색으로 변하였다. 요즘은 비닐을 씌우지 않으면 농사를 지을 수가 없다. 기후가 변해서인지 작물이 잘 자라지 않고 매일 호미를 들고 살아도 뒤에서 자라나는 잡초를 이겨낼 수가 없다. 사람은 풀을 이길 수 없어 비닐을 씌운다. 그럼 호미를 들고 살지 않아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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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닐을 다 씌우자 형님께서 바구니에 막걸리와 쑥개 떡을 내왔다. 하얀 막걸리를 노란 대접에 하나 가득 채워주신다. 앞에서 소 노릇과 삽질 하느라 막걸리가 단숨에 넘어간다. 한잔의 막걸리를 마시고 올해 쑥으로 만든 쑥개 떡을 아구작 아구작 씹어 먹었다. 밭둑에 앉아 일을 끝내놓고 마시는 막걸리와 쑥개 떡이 입안에서 척척 붙는다. 잠깐의 막걸리 파티를 끝내고 칠성산으로 저무는 해를 등에 지고 저녁밥을 하기 위해 집으로 돌아가는 길. 앞집 논에는 양상추가 푸른빛을 띠며 앙증맞은 모습으로 빤히 나를 쳐다보다 알 수 없는 웃음을 짓는다
첫댓글 수연 표 전원일기는 갈수록 진국이군요. 고된 농사일 속에서도 타고난 여유로 극복하시니 보기 좋습니다. 대풍 예고. 다음 호를 기대합니다.
물론 저의 빡쎈 고생으로 일궈진 풍년이겠지요..
맛갈스런 언어의 예술 전원 일기로 남편과 형님네 가솔 분들 동네 이웃 분들 청도 문학신문 복 많이 받으셨어요.ㅎ ㅎ
제가 밭에 나가서 일할때마다 그때그때 써놓은 글들이죠.. 이곳에 하나씩 올려봅니다..전 서정문학 예비란에 일기쓰듯 올린 글들입니다.
장하십니다^^일도 어려서 배워야 쉬운데,.............그래도 즐겁게하시는 모습이 보입니다^^
아마도 자연으로 물들어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날마다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자연인이 되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