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녕대군을 일면 영포대군이라고 말한다.
이명박의 형 이상득을 이르는 말이기도 했다.
태종 이방원의 큰아들로 일찌감치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부왕의 마음은 곧 충녕대군(세종)을 향했다.
그러자 문무백관은 그의 허물만 들춰냈고, 결국 왕통은 그를 비켜갔다. 그래도 그는 태연자약했다.
그가 동궁에서 쫓겨날 때 명재상 황희가 힘써 항변했다. 그로 인해 황희는 6년 동안 귀양살이를 했다. 후세의 실학자 ‘이익’도 세자 폐위는 잘못이라 했다.
양녕은 실상 용렬하지 않았다. 명 태종은 조선국 사신으로 중국에 온 양녕의 손을 붙들고 어질다고 칭찬했다. 양녕은 문장에도 뛰어나 <동문선>에도
그의 시가 실렸다.
“안개로 아침밥 짓고(山霞朝作飯) 밤중에 달로 등불 삼노라(蘿月夜爲燈)”
라는 그의 시는 선비들의 심금을 울렸다. 그는 글씨에도 빼어났다. 지지난해 불탄 숭례문의 현판을 쓴 사람이 바로 그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사실이다. 이수광도 그것이 사실이라 주장했다.
훗날 이규경은 현판 글씨의 주인공이 세조 때 문신 정난종이라고 말했지만, 그 근거는 미흡하다.
양녕은 활 솜씨도 있었다. 까마귀 때문에 대궐 안 감나무에 열매 하나 구경하기 어렵게 되자, 활시위를 당긴 것도 그였다.
그를 미워하던 부왕도 그 솜씨에 반해 웃었다.
다재다능했지만 양녕대군의 최고 장점은 도량과 해학이었다.
“내가 살아서는 왕(세종)의 형, 죽어서는 부처(효령대군)의 형이 아니냐”
라고 말한 것만 보아도 충분하다.
그의 말년은 세조 치하였다. 세조는 왕자와 대신들을 많이 죽였기 때문에 다들 벌벌 떨었지만, 양녕만은 우스갯소리로 늘 왕을 편하게 대했다.
그는 천수를 누리며 난세를 무난히 헤쳐나갔다. 세상 사람들이 그의 지혜와 배짱을 부러워한 것은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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