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춘추전국시대, 천하의 영웅들이 세상의 패권을 놓고 재기와 지략을 겨루던.
하늘이 갈라지고 땅이 뒤흔들리던 혼란스러운 전쟁의 시대,
그 시대에 나, 서시가 살았노라,
영웅들은 천하를 호령하였으나
그 영웅들을 지배한 것은 나, 서시였노라
[경국지색(傾國之色) ~ 서시(西施). 일곱번째 이야기]
월나라와 오나라의 전쟁이 시작된지도 몇 십년이었다.
구천과 부차의 전대 왕들의 때부터 이어져온 전쟁은 십여년 전 구천이 부차에게
패하여 3년간 부차의 노복을 살고 월나라가 오나라의 영원한 속국이 됨을 맹세함으로써 일단락 되는 듯 하였다.
오나라의 속국이 된 월나라는 1년 마다 조공을 오나라에 곡물과 비단, 각종 철광석 등 진귀한
물건들을 바치었는데 그 중에서도 오왕 부차가 눈독을 들이는 것은 바로 월나라의 공녀들이었다.
비록 월나라가 대륙 안에서는 황하 근처의 중앙지역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오나라와 더불어 미개한
나라라 공공연히 비웃음을 당하긴 하였지만 바다에 인접하여 외국과의 무역이 용이하던 월나라는
작은 소국치고는 넉넉한 재력과 동시에 아름다운 여인들로 유명하였다.
하여 오나라의 부차가 그리도 눈독을 들였던 것인데, 부차는 특히 공물을 받게 된 것을 꼬투리
잡아 툭하면 월나라에 아름다운 여인들을 내놓으라 요구하였는데 차마 월나라의 손위 국가로
내색은 하지 못하겠고, 대신에 공녀들이 필요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을 때면 종종 월나라 국경을
공격하거나 오나라 지배 아래에 있는 월나라 지역의 백성들에게 심술을 부리곤 하였다.
하지만 얼마 전 부차가 그토록 원했던 월나라 최고의 기녀인 진홍과 비청을 손에 넣어 마음이 흡족했던
부차의 관용 아닌 관용으로 한동안 월나라는 숨을 돌리나 싶었지만 그것도 얼마가지 못하였으니,
월나라 궁 안, 환관장 이환영이 평소의 침착한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잔뜩 흐트러진
모습으로 어디론가 급히 달려가고 있었다.
"비켜라, 비켜!!!"
이환영은 손을 마구 휘저으며 허겁지겁 체면조차 따지지 않은채 급히 달려
그가 닿은 곳은 바로 왕 구천이 있는 대관이었다.
"전하!!!!"
대전 환관이 채 고할 틈도 없이 제가 먼저 문 앞에서 크게 고한 이환영은
가파른 숨을 헐떡거리며 안으로 달려들어갔다.
"환관장, 대체 무슨 일인가"
재상 범려가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그의 모습에 당황하며 물었지만
이환영은 헐떡거리며 고개를 내젖고 소매 안에서 반으로 접은 종잇조각을 꺼내었다.
그것을 받아본 범려는 삽시간에 얼굴이 굳어졌고
그는 두말 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 구천이 앉아있는 책상 앞에 서둘러 걸어갔다.
"전하, 큰일 났습니다"
한참 아래에서 올라온 상소들을 살피고 있던 구천은 고개를 들었다.
짙은 눈썹 아래 검은 두 눈이 유난히 날카로운 빛을 띈 구천은 범려보다는 조금 어려보였지만
그 얼굴에는 왕의 오만함과 고집이 숨기지 않고 옅보인다.
"무슨 일이냐,"
"오나라로 보내졌던 진홍과 비청이 죽었다고 합니다!"
"뭐?!"
구천은 눈살을 찌푸렸다.
차마 자신의 백성들을 적국에 보내어 나라의 안위를 유지하는 것이
매우 못마땅했던 구천은 대체로 공녀들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않았지만 이번 진홍과 비청에 관해서는
그녀들이 부차를 즐겁게 해주는 동안은 월나라에 오나라의 간섭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시간을
조금이나마 벌어줄 수 있어 그도 조금은 신경을 쓰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공녀로 보내진 지 이제 겨우 반 년을 넘긴 시점에서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인가,
"오나라에 있는 세작에게서 온 전갈인데 진홍과 비청이 오왕에게 죽임을 당하였다고 합니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냐, 부차는 그 아이들을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하였다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왜 갑자기 제 손으로 죽여?!"
"오왕이 진홍과 비청을 무척이나 총애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오왕은 그 아이들을 너무나
총애했던 나머지 그 아이들에게 후궁 첩지를 내리고 별궁을 지어주려 하였으나
오자서가 그것을 반대하고 나서!"
"오자서, 또 그 초나라 놈이란 말이냐!!!"
구천의 이마에 퍼런 핏대가 솟구쳤다.
"오자서가 오왕을 설득하여 진홍과 비청을 내치라 하여 결국
오왕은 진홍과 비청을 내치게 되었는데 오자서는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화근은 없애야 한다며 결국 두 아이들을 죽였다 합니다."
콰아아---앙!!!!!!!!!!
구천의 주먹이 나무 책상 위를 세차게 내리쳤고 그 충격으로 산더미같이 쌓여있던
상소문이 우르르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찢어죽여도 시원찮을 놈!!! 태재(太宰) 백비(伯噽)는 도대체 무엇을 했다더냐!"
"지금 오나라는 오자서의 뜻대로 움직이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최근 부차가 제나라 정벌에 뜻을 두고 있음을 전하께서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지휘하는 것이 오자서인데 부차는 자신의 아들들보다 이 오자서의 말에 더 귀를
기울인다 하여......"
"주, 죽일놈!!! 천한 초나라의 놈이 어찌 감히!"
구천의 얼굴은 분노로 시뻘겋게 타오르고 있었다.
범려는 얼굴을 굳히고 입을 다물었다.
오자서는 원래 초나라 사람이었지만 초나라에서 자신의 가족들이 몰살당한 것에
앙심을 품고 부차의 부왕이었던 합려 때 오나라에 귀순하여 상국(相國)의 위치까지 올랐는데
병법에 능통하고 지략이 뛰어났던 그는 유명한 병법가 손무(孫武)와 함께 오나라의 국력을 키워
초나라에 복수하고자 했던 자신의 목적을 달성시키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월나라의 공격을
받아 오나라는 초나라 정벌에 실패하고 만다.
그 때부터 오자서는 월나라에 무척이나 적대적이 되었고 사사건건 월나라가
오나라의 빈틈을 노려 재기를 꿈꾸는 것을 철저하게 틀어막는 것이었다.
그러니 구천이 오자서를 곱게 볼 리는 없었다.
오나라에 패하여 나라는 오나라의 속국이 되고 구천 그 자신은 신하인 범려와 함께
3년간 오왕 부차의 노복을 살았으니 천하가 구천에게 등을 돌린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가장 큰 힘을 지닌 아군은 바로 구천의 적지 한 가운데에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오나라의 태재(太宰)인 백비였으니, 재물을 밝히는 백비는 구천이 건네준
8명의 미녀와 금은보화에 눈이 멀어 오나라의 대재상이라는 직책에도 불구 월나라를 위하여
기꺼이 오나라에서 세작 역을 맡아해 주었다.
하지만 역시 대세는 오자서였으니, 이 오자서 말 한 마디면 부차는 아무리 자신이 아끼던
미녀들이라도 파리 잡듯 간단하게 죽여버리기도 하는 것이었다.
한동안 진홍과 비청이 부차를 즐겁게 해주어 간섭이 덜한 틈을 타 국력을 증강시켜보려 했는데
이리도 빨리 끝나버릴 줄이야...
"아무래도 시급하게 새로운 공녀를 보내야만 할 것 같습니다.
정보에 따르면 진홍과 비청의 일로 심기가 불편해진 오왕이 국경 지방의 마을을 치려한다는
소문이 있답니다."
"이...이, 천하의..!!!"
구천은 이를 바드득 갈며 분노로 차마 말을 잇지 못하였다.
"전하, 진노하시는 것은 나중으로 미루시지요, 지금 문제는
오왕에게 보낼 공녀인데... 지난 십 여년 간 전국을 샅샅이 뒤지어
여자들을 색출해 냈던터라 이제 더 이상 공녀로 보낼만한 계집이 없습니다."
"으, 으음!!!! 분하다!"
어쩌다 나라가 이 꼴이 되었는가,
이것이 다....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명월향 기주에게 연락하여 보아라!"
"명월향에서는 더 이상 기녀들을 내놓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가장 아끼던 기녀 둘이 그리 허망하게 목숨을 잃었는데 명월향 기주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한낱 기녀 따위가 왕명까지도 무시한단 말이냐!"
"전하, 굳이 왕명이 아니더라도 더 이상 명월향에도 부차를
충족시킬만한 기녀가 없습니다."
구천은 분한듯 부르르 떨다가 의자 위로 풀썩 주저앉았다.
"어찌하느냐... 어찌해...
이 시국을... 이 치욕을 도대체 어떻게 갚는단 말이냐,
아아, 내 대에 이르러서 이렇게 치욕스러운 시국을 맞았으니 이제 어찌 선대왕들을
뵙는단 말이냐...!"
탄식을 내뱉는 구천의 얼굴을 범려는 안타깝게 쳐다보았다.
그러나 이내 곧 범려의 얼굴에 여러가지 표정이 스쳐지나간다.
처음에는 안타까움,
그리고 그 다음에는 망설임.
무언가 할 말이 있는듯 하지만 섣불리 꺼내지는 못하고 망설이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 범려는 마침내 결심한 듯 굳은 표정으로 입을 떼었으니,
"전하, 소신이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온 것이 있습니다."
"생각해온 것이라니?"
"우리 월나라는 오나라의 속국이 된 치욕도 모자라 그 동안
그들의 속국이라는 이유로 마치 노예와도 같은 취급을 당하고 우리의 백성들은
그들에게 마치 짐승처럼 착취당하여 왔습니다. 우리의 여인들은 그들의 하루 노리갯 감으로
바쳐지고 있고 우리의 국력은 날이 갈수록 쇠하여 이제는 공녀 몇에 나라의 흥망성쇠가
달리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비참한 상황입니까, 전하. 이대로는 두고볼 수 없습니다.
무언가 특별한 대책이 필요합니다,
일단 우리는 오나라에 대항할 수 있는 군대를 증강시켜야 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저 오나라 놈들이 눈을 부릅뜨고 있는데 어찌 우리가 오나라에 대항할
만큼 군사를 키울 수 있겠느냐"
"그래서 제가 생각한 것이온데, 전하. 우리가 공녀를 바치어 오왕을 즐겁게 만들었을 때만큼은
오나라의 월나라에 대한 감시가 덜해진다는 사실을 기억하십니까? 우리는 바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네의 말은 오나라에 공녀를 보내어 부차의 감시가 덜해진 틈을 타 군사를
키우자는 것인가? 하지만 어떻게 그러겠는가. 부차의 성격이 마치 흔들리는 갈대와도 같아
변덕이 죽끓듯 하는데, 게다가 저 늙은 이리와도 같은 교활한 오자서가 버티고 있는한
어느 공녀가 다시 진홍과 비청과 같은 변을 당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있겠느냐?"
"그러니 부차의 마음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굴릴 수 있는 미색과 지략을 지닌 계집을
뽑아야 겠지요,"
"허나 지금 당장 공녀로 보낼 평범한 계집도 없건만 그런 천하절색에 지략까지 갖춘 계집이
어디 있겠느냐?"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여즉껏 우리는 발등의 불만 끄기에 급급하여 공녀들을 뽑는 족족 따로 교육하지
않고 보내버리곤 하였는데 이 공녀들은 미모는 뛰어날지 모르나 일국의 왕인 부차의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충족시켜줄 수 있을만큼 그 지식이 뛰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렇기에 지금껏 공녀로 보내진 계집들이 일 년을 넘기지 못하고 매번 내쳐졌던 것입니다.
허니, 이번에는 아예 가능성이 보이는 어린 계집아이들을 데려다가 미리 교육을 시켜
공녀로 보내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구천은 가만히 그 얘기를 듣다가 범려의 계획이 마음에 들었는지 표정이 밝아졌다.
하지만 이내 급격히 다시 표정이 어두워진다.
"그것은 참 좋은 계획인듯 하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 당장
발등의 불을 끄는 것이 아닌가,"
"그 문제에 관해서는... 제가 마지막으로 명월향 기주 옥환에게 말을 해보겠습니다.
그래도 되지 않는다면.. 고관대작들의 여식들이라도 보내야 겠지요.."
구천은 눈을 감았다.
고관대작들의 여식까지 공녀에 포함해 보낸다면 그들의 반발이 얼마나 거셀지,
불을 보듯 뻔했다. 안 그래도 민심도 흉흉한데 고관대작들까지 들고 일어선다면...!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발등의 불을 끄는 것이었으니,
"명월향 기주에게 왕명이라 전하고 기녀 몇 명을 간택하여 오시오.
만일 눈에 차는 아이가 없다면 재상이 알아서.....귀족 처녀들 중 적당한
처자를 간택하시오.
그리고 재상이 말한 계획, 그 계획에 대한 준비는 되어있는 건가?"
"지난 세월 동안 닥치는 데로 처녀들을 끌어낸 터라 백성들은 또 다시
자신들의 여식들을, 그것도 어린 여식들을 내놓는 것을 꺼려할 터이니
이번에는 제가 직접 나서서 찾아보려 합니다. "
구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재상에게 모든 일에 대한 전권을 위임하겠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성은이 망극하다는 대답이 지금 이 상황에 어울리려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범려는 더 이상 자존심이니 자괴감이니 하는 감정에 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오직 나라의 미래만을 생각하기로 했다.
구천에게서 모든 일에 대한 전권을 위임한다는 휘지를 받아든 범려는
절을 하고 대전에서 걸어나왔다.
금박으로 장식된 대전의 복도를 걸어가며 범려는 곰곰히 생각에 잠겼다.
가장 시급하게 해결할 일이야 당장 공녀로 보낼 계집을 찾는 것이었지만 그 문제보다는
앞으로 공녀로 보내질 어린 계집을 찾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것으로 이 월나라의 흥망성쇠가 판가름될 수도 있었으니,
문득 범려의 머리에 반년 전, 명월향에서 보았던 당돌한 어린 계집종이 떠올랐다.
정향의 종이었던 아이, 날카롭게 찢어진 눈에 시원하면서도 단정하고 오밀조밀하게
생겨 완벽한 이목구비가 눈에 띄었던 어딘가 아이답지 않게 냉철한 분위기가 흐르던 그 범상치 않던 계집.
그 떄 그 아이를 보며 저런 아이를 잘 교육시키어 공녀로 보낸다면, 하고 생각했었는데...
범려는 대전의 문밖으로 나왔다.
눈 아래 수백 개의 계단이 펼쳐져 있었다. 그 계단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끝이 보이지 않을듯 긴 층계를 내려다 보던 범려는 한 손을 들어 그 근처에 서있던
환관을 불렀다.
"무슨일이십니까?"
부름에 당장 달려온 환관이 공손히 허리숙이며 물었다.
".....환관 영록을 불러오게"
환관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환관 영록이라면 강 가(家)의.."
"내 집무실로 최대한 빨리 오라 이르게"
범려는 말을 마치고 층계를 내려가려 했다. 그러다가 그는 다시 몸을 틀어
환관을 한 번 쳐다보았다.
아, 잊고 있었군.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시 끌어내자 그 손바닥 위에는 금화 한 닢이 쥐어져 있었다.
환관은 몸을 더 굽신거리며 그 금화를 받아들었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환관들이란...
혀를 끌끌 차고 범려는 다시 층계를 내려갔다.
자, 이제.
무대를 세울 터를 잡아 놓았으니 그 무대와 기구를 마련하여야 할 터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약간의 자금이 필요하고...
그 자금을 대려면 무엇보다도 중간 돈줄이 필요한 법이지.
대전에서 조금 떨어진 자신의 집무실로 걸음을 옮기며 범려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마저 나는 것을 느꼈다.
"차라리 이 모든걸 한 편의 연극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홀가분하구나."
한 편의 연극이라..
대륙의 가장 변방의 작은 속국 월나라에서 벌어진 작은 소극 한편에 불과할 줄 알았던
이 연극이 어찌 그리 많은 이들을 울리고 웃겼는지.
그래, 그때는 그저 한 편의 연극일 뿐이었다.
결코 무대 밖을 벗어날 수 없었던 꾸며진 이야기인 연극.
--
"단이 엄마! 단이 엄마 있수?"
점심 때가 가까워질 무렵, 약야계의 륜이네 집 사립문을 열고 들어오며
유메이 네는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부엌에서 빠꼼 얼굴을 내밀던 륜은 상대가 풍성한 몸집에 사람좋게 생긴 유메이 네라는 것을
보고는 뽀르르 달려나온다.
"아줌마!"
"그래, 륜이 잘 지냈나? 어머니는?"
"엄마는 텃밭에 가셨어요"
오늘도 어김없이 눈만 내놓고 얼굴을 가린 륜의 눈이 유메이 네의 손에 들린 작은 바구니로 향한다.
대나무 바구니 틈으로 짭쪼롬하고 달짝지근한 냄새가 풍겨오른다.
"네 어머니가 점심 같이 먹자고 해서 오는 길이었는데 어디 빈손으로 올 수 있어야지,
식후 주전부리로 내가 빵 좀 쪄왔다. 어디, 밥 먹기전에 하나 먹어보련?"
절강성이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 시집 온 유메이 네의 말투에는 수십 년간 타향살이에
이제는 씻겨간 고향의 억양이 조금이나마 남아있었다.
다정스레 아이의 손을 잡고 처마 밑 담벼락 아래에 만든 평상위로 가 앉으며
유메이 네는 대나무 바구니를 열었다.
안에는 사람 얼굴만한 고구마 몇 개와 밀가루 떡 안에 달콤한 된장을 넣어 만든
만두와 돼지 기름에 지진 누름전 몇 장이 들어있었다.
륜은 침을 꼴깍 삼켰다.
하지만 차마 손을 뻗지는 못하고 망설이며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었다.
그 속을 아는 유메이 네가 빙그레 웃는다.
"와? 어머니 드시기 전이라 먹기 그렇나?"
뺀초롬한 검은 눈이 유메이 네를 올려다 본다.
그 눈이 하도 사랑스러워 유메이 네의 후덕한 얼굴에 연방 웃음꽃이 핀다.
"괜찮으니 니 먼저 먹어라.
이거는 밥도 아니고 주전부리니께 괜찮다. 내가 눈감아 줄게"
만두 하나를 쥐어주며 유메이 네는 륜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망설이던 륜은 먹기로 결심한 건지 얼굴을 가리고 있던 천을 끌러내렸다.
그리고 오물오물 만두를 입에 넣고 씹기 시작했다.
"우리 애기가 크기는 많이 컸다. 그 쪼만한 것이 언제 이렇게 컸는지.."
유메이 네는 륜이 태어날 적에 륜이를 받아주었던 산파 중 한 명이었다.
륜의 어머니 이화 부인과 절친한 동무 사이이기도 한 유메이 네는 심성과 언사가 소박하고 고우며
그 후덕한 인상만큼이나 정이 많아 마을 사람 모두가 좋아하는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모성애도 강하고 주변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깊은 유메이 네는 특히 자신의 손으로 받았던
륜이에 대해서는 제 친딸만큼이나 아끼는 터였다. 아이의 얼굴을 아는 몇 안되는 사람인 유메이 네는
륜에의 얼굴을 본 사람들 대개가 그렇듯 그 뛰어난 미모에 호감을 느낀것도 있었지만
아이의 기구한 운명을 예감했던 또 다른 한 사람이었던 터라 더욱 더 애착을 느꼈다.
륜이 역시 어머니만큼이나 저를 이뻐해주는 푸근한 유메이 네를 참 좋아하고 따랐다.
륜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유메이 네는 두건 아래 흘러내린 흑단같은 머릿결 한올을 다시
넘겨주며 다정스레 물었다.
"우리 륜이가 이제 몇 살이고?"
"이제 열 두살이요"
"세월 참 빠르다. 고 조막만한던 게 언제 이리 컸는지,
니 초경은 했나?"
륜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직 초경도 안 했나?
여물라믄 아직 좀 더 있어야 하나.. 허긴, 이 손목 좀 봐라.
이리 앙상해가지고 어디 나중에 얼라나 제대로 낳겠나.."
두툼한 자신의 손에 한줌도 안 쥐어지는 가느다란 륜이의 손목을 유메이 네는 혀를 끌끌
차며 내려다 보았다.
소매를 걷어올린 아이의 팔목은 나뭇가지처럼 말랐지만 보기 흉하게 앙상한 것이 아니라
타고난 선이 고와 백옥같은 피부와 어우러져 가냘픈게 보기가 나쁘지 않다.
그래도 열 두살이면 왠만한 계집애들은 초경을 시작할 나이인데,
몸이 이리 가냘프니, 시집 가서 애 하나 제대로 낳겠나.
이제 몇 년 후면 혼기에 들어서게 될 나이였지만 햇빛을 못 쬐고 살아 그런가
또래 아이들에 비해 몸이 가느다랗고 성장도 느린게 유메이 네는 벌써부터 걱정이었다.
이런 계집애들은 시집을 가서 아이를 잘 갖지 못하거나
출산 중에 죽는 경우가 허다했다.
하지만 유메이 네는 애써 나쁜 생각은 떨쳐 버리려 한다.
"그래도 니는 생긴게 이쁘니께 시집 가서 아는 못 낳아도 신랑한테
이쁨받고 살것이다."
시집 얘기가 나오니 륜의 눈이 동그래졌다.
크긴 컸어도 아직은 애기구나,
또래 계집애들은 벌써부터 동네 사내애들을 보며 저희들끼리 뺨을 물들이며
키득대는데 이 륜이는 도통 그런데에는 관심이 없었다.
시집 얘기를 해도 먼나라 이야기인 것마냥 심드렁하거나 지금처럼 놀란 토끼눈을 하거나,
어머니 이화부인이나 아버지인 서용은 젊은이들의 연애사에 대해 어린 딸에게 가르치기에는
이미 그 황혼이 저문지 오래인 사람들이었고 결국 륜에게 남녀사에 관해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이라곤 이모 격인 유메이 네였는데,
이참에 유메이 네는 어린 륜에게 남녀사이에 대해서 조금은 가르치기 시작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륜이는 누구한테 시집가고 싶은지 생각해 본적 있나?"
몇 년 전에 시집간 제 딸 유메이만 하더라도 륜이 나이 때, 륜이의 언니였던 단이가 시집간
과수원 집의 막내아들에 반해 그에게 시집간다 노래를 불렀던 터라 유메이 네는 륜이도
그런 사람 하나쯤은 저도 생각해 놓고 있겠지, 하고 내심 기대했다.
륜은 방긋 미소지었다.
음? 역시, 저도 생각한 바가 있어...
"없는데요"
참으로 명쾌한 답변이었다.
"정말 없나?
니는 누구 좋아하는 머스마도 없나?"
"별로요,"
솔직담백한 대답이었다.
조금 실망감을 느낀 유메이 네는 머리를 굴렸다.
그러자 한 얼굴이 유메이 네의 머릿속에 떠올랐으니,
"그래, 니가 아직 어려서 뭘 모르는 갑다.
어이구, 근데 느그 어머니는 뭐하러 가서 여태 안오시나?..."
은근슬쩍 이화 부인을 언급하는 유메이 네.
"근데 륜아, 어머니가 보살펴 주시던 그 읍내에, 거 있잖니, 진 대인이라고
그 귀족 영감 손자... 어렸을 적에 맨날 너 업고 다녔던 그 도령 이름이 뭐더라?"
"샤오룬 오라버니요?"
"그래, 그 샤오룬 도령. 그 도령은 이제 나이가 몇 살이라더냐?"
"오라버니가... 나보다 세 살 많으니까 이제 열 다섯이요"
"어이쿠, 그렇게 장성하셨구나.
그래.. 이제 그 도령도 혼기가 찼으니 조금있으면 참한 처자를 아내로
맞아야겠네, 이쁜 각시도 얻어 제 가정도 꾸미고.. 이쁜 아가들도 낳고..
한 일 년만 있음 그렇게 되겠네.
근데 만약 그 도령이 장가가면 륜이는 섭섭해서 어쩌냐?"
"왜 섭섭해요?"
"아니, 장가 가서 어른이 된 도령이 제 안사람도 아닌 외간 여자인
너를 그때까지 지금처럼 만날 수 없는 노릇 아니겠니? 장가 가면 아이도
낳아서 아버지가 될텐데,
그렇게 되면 이제 도령이 아끼고 사랑해야 할 것은
그 아내와 아이들이지 륜이가 아니잖니? 그러니 도령은 더 이상 너랑
같이 다닐 일이 없어질 것이잖아."
륜의 검은 눈에 충격이 어렸다.
어렸을 적에는 맨날 저를 등에 업고 다니면서 놀아주고, 맨날 제 편을 들어주던
샤오룬 오라버니. 외출하는 길마다 저를 데리고 다니며 늘 자상하게 보살펴 주던 그 오라버니가
다른 여자에게 장가를 들어 아이를 낳게 되면, 이제는 무등을 태워주고 편을 들어주는 것은
자신이 아닌 그 새로운 아내와 아이들이 될 것이었다.
어째서 자신은 그것을 지금껏 깨닫지 못했던 것인가!
"샤오룬 오라버니가 장가를 들어요?"
"도령도 이제 혼기가 찼으니 조만간 곧 그러지 않겠니?"
륜의 검은 눈에 방울방울 눈물이 졌다.
그저 놀리려고 한 말이었는데 갑자기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니
당황한 유메이 네는 륜이를 얼르며 눈물을 닦아준다.
"륜아! 왜 우는 거니? "
하지만 륜이의 눈에는 쉽게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
오랜만에 올리죠?ㅎㅎ
요즘 쵸큼 바빠요~ 방학해서 여기저기 놀러가느라고ㅎㅎ
방학하면 한가해서 소설 많이 올리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바뻐-_-;;
참, 최근에 친구랑 영화 천사와 악마를 보러갔다 왔어요~
눈이 완전히 훈훈하더군요ㅎㅎ
바티칸 스위스 경비대~ 참으로 바람직한 기럭지에 바람직한 외모를 지닌 아이들이었어요ㅎㅎ
영화 보는 내내 하앍거리며, 어서 바티칸 행 비행기 표를 끊어야겠다고 생각했다눈ㅎㅎ
특히... 나의 완소남, 이완 맥그리거의 섹쉬함은!+ㅁ+
사제가 그렇게 섹쉬해도 되는걸까요?ㅎㅎㅎ
이완 맥그리거.. 이름은 익히 들어봤는데 스타워즈 땜시롱 아저씨 이미지가 강했고..
(사실 그게 이완 맥그리거인줄도 몰랐는데-_-;;)
암튼 천사와 악마를 계기로 이완 맥그리거가 급 좋아졌세요!
물랑루즈랑 다른 영화들도 다시 봐야할거 같아요~하앍하앍+ㅁ+
이완 맥그리거, 대표적인 영국 훈남중의 한 명이죠, 왜 그런진 몰라도 영국 영화배우들 중에
그렇게 이목구비가 반듯한 사람들이 많아요. 실제로 저희 학교에도 영국에서 전학온 여자애가 있었는데
그 여자애도 영국인(앵글로 색슨족이라고 하죠?) 특유의 짙은 눈썹이라든지 반듯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더라구요. 왠지 고지식한 분위기도 풍기지만 전 그래도 영국 훈남*훈녀들이 좋아요ㅎㅎ
아흥~ 특히 대박인건 그 악센트! 그걸 지칭하는 용어는 까먹었는데 영국 악센트도 귀족들이
쓰는 악센트가 또 따로 있대요~ 옛날에 어떤 배우가 그런 말투를 썼었나, 아님 연기였나(기억이 가물가물~)
암튼 그 말투 약간 느릿하면서도 오만한게 꽤 멋졌다고 생각했세요.
한 때 영국 영어가 배우고 싶어서 로제타까지 사려고 생각했던 저였지만...걍 그만 관뒀던 옛날(그래봤자 몇 년 전)이
생각나네요ㅎㅎ
천사와 악마,
솔직히 방대한 책 내용을 몇 시간짜리 필름에 집어넣기란 게 사실상 불가능하니
그닥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나름 괜츈했세요,
근데 난 영화 내용보다 바티칸 훈남이들이랑 이완 맥그리거의 초작살 사제복 폭풍간지밖에 생각이 안나네-_-
특히 이완 맥그리거의 그 탄탄한 허리~+ㅁ+
.
.
.
제 자신이 흡사 절구통과 같은 튼실한 허리를 가지고 있는터라 그런 탄탄하고 겹살 없는 허리를 동경해요-_-;;
절.대 뵨태는 아니랍니다~ 믿어주세요-ㅁ-;;;
첫댓글 즐겁게 보고갑니다~ 재상이 왠지 공녀문제로 여러번 자존심을 굽혀야 될것 같네요~그나저나 자신의 딸을 공녀로 보낼생각을 하게됬으니..;;;;; 작가님글 보고 저도 천사와 악마 보고싶네요~친구가 보고싶다던데 ㅎㅎ
내용도 꽤 재밌었어요, 별생각없이 보기에는 참 좋은 영화인듯 해요^^ 다빈치 코드처럼 심오한 내용도 아니라서 더 쉽고 재밌게 본듯 해요, 기회가 된다면 함 보러 가셔도 괜찮을듯 합니다ㅎㅎ
재밌어요.......이렇게 길게 써주시다니.....감사할 따름..ㅋㅋ 앞으로도 이정도의 방대한 량(?)으로 써주시면 안될가요? 무리겠죠...ㅜㅜ 여튼 열심히 써주세요!!!!
방대한 량... 제 특기입니다요, 맨날 쓰다보면 끊기가 애매해서 스압이 장난이 아니라는-_-;; 게다가 전 뻣속까지 한국인이라 밥도 글도 화장품 샘플도 쥐꼬리만한건 싫더라구요ㅎㅎ 무조건 많이~ 무조건 길게~ㅎㅎ
재밌어요^^기다린시간들이아깝지않다능~
감사합니다~ 넘 오래기다리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앞으로는 빨랑 올리도록 할게요ㅎㅎ
넘잼써횻!!! 빨리 담편 보러~~ 분량을 좀 늘렸으면 좋겠어요.!!빨리 읽어서 그런가... 너무 과한 욕심인가요.ㅋㅋㅋㅋ 천사와 악마 왠지 보고 싶네요ㅎㅎ 저도 영국사람 좋아요! 반듯한 얼굴ㅋㅋ 특히 눈썹이용~
크흥~ 천사와 악마.. 눈 정화가 필요하시다면 전 추천합니다요, 아주 샤방샤방거리는게~ 아흥아흥~ -_-;;;
다음화도 기다려요^^
감사합니다~ 잼있게 읽으셨나요?ㅎㅎ
흥미진진한 스토리가 계속 클릭을 유도하네요ㅎㅎ 정말 글 잘쓰세요^ ^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