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사자성(師子城) 창가학회 본부①~52p 초창기 창가학회(創價學會)에는 본부로 사용하던 단독 건물은 없었다. 은사는 사자후(師子吼)했다. "건물보다는 우선 조직을 반석같이 만들어라!" 애제자는 달렸다. '하루 빨리 본부를' 조직을 확대하고, 광선유포의 파동을 일으켰다. 그리고 위대한 사자성(師子城)은 탄생했다. '청년학회 승리의 해'인 2013년 5월, 이케다 SGI 회장이 이렇게 노래했다. 영광과 / 희망에 빛나라 / 사제성(師弟城) "날씨가 맑은 5월의 푸른 하늘 아래, 세계광포의 본진인 총본부가 창가(創價) 전 동지의 기쁨과 결의에 감싸여 위풍당당한 모습을 드러냈다." (<수필 '우리가 나아가는 승리의 길'>) 지금 전국의, 그리고 세계의 동지가 오직 하나의 목표를 향해 용약환희하며 전진한다. 다가오는 11·18 '창가학회 창립기념일'을 향해서! 도쿄 시나노마치에 모습을 드러낸 총본부 개관을 목표로! 총본부는 지상 7층 건물. 총본부 건설을 위해 2011년 1월 학회본부와 창가문화회관이 해체공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총마무리 단계에 들어갔다. 실은 총본부의 기초에는 말뚝을 하나도 사용 하지 않았다. 지하 22미터(일반적으로 빌딩에서 5층 건물에 해당)까지 깊게 파서 도달한 단단한 지반(1㎡당 50톤을 견딜 수 있는 강도가 있다) 위에 직접 철근 콘크리트 로 건물의 기초를 쌓아올렸다. 다시 말해 우뚝 솟은 창가의 대성(大城)은, 그 땅 속 깊이 기초까지 결코 무너지지 않는 견고한 건조물이다. 총본부는 창가의 동지가 철벽처럼 결합한 모습을 상징한다. 그리고 그 '토대'는. SGI 회장은 감사의 마음을 담아 눈에는 보이지 않는 '토대'를 이렇게 썼다. "전국 그리고 전 세계의 동지가 '대화의 꽃, 그리고 '승리의 꽃'으로 총본부의 완공을 장엄하게 하자!'고 분투한다. 그 진심 하나하나가, 용감하게 행동하는 하루하루가 인간주의 전당의 견고한 '토대'가 된다." (<수필 '우리가 나아가는 승리의 길'>) 지금까지도 학회의 본부는 동지의 승리가 토대가 되었다. 거기에는 고민하는 청년과 스승의 대화가 있었다. 청년이 스승에게 맹세하고, 냉엄한 현실에 자진해서 나섰다. 청년이 스승에게 승리로 보답하는 드라마가 생겨났다. 그것은 앞으로도 영원히 변함없다. 본지에서는 특별기획으로 학회본부의 역사를 따라가 보고자 한다. 실은 초창기 창가학회에는 본부로 사용하는 단독 건물이 없었다. 전쟁이 끝나고 얼마 뒤인 1946년부터 학회는, 도다 조세이(戶田城聖) 이사장(당시)이 경영하는 출판사 '일본정학관' 건물을 본부로 사용했다. 일본정학관은 정면의 폭이 두칸 반짜리 3층 건물로 도쿄 지요다구 니시칸다 2가에 있었다. 1층은 사무실. 2층에 방 세 개가 있고, 3층은 일본 부인신문사에 빌려준 적도 있었다. 중간층에는 방 하나가 있고, 복도에 면한 다다미 8장짜리에는 쌍바라지가 두 개 있었다. 세상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했던 작은 건물에서 역사는 조용히, 크게 움직이기 시작 했다. 은사 도다 이사장이 법화경을 강의한 곳도 이 건물 2층이었다. 1948년 9월 13일. 법화경 강의를 수강한 스무살의 이케다 SGI 회장은 그 감동을 이렇게 기록했다. "도다 선생님이야말로 인류의 스승이시다." "나는 약관 이십에, 가장 영광스러운 청춘의 길을 깨달았다." 1949년 1월 3일. 스물한살의 SGI 회장이 은사의 요청을 받고 첫 출근한 곳도 이 건물이었다. "일본정학관으로 처음 출근한 날은 1949년 1월 3일 이었다. ……'쇼카손주쿠(松下村塾)는 조그만 다다미 8장짜리의 방을 강의실로 사용 했다. 이 방도 작지만 여기에서 반드시 미래의 인재가 속속 배출한다.'고 (도다) 선생님은 자주 말씀하셨다." (<나의 이력서>) 1950년 8월 24일. 법화경 강의가 끝난 뒤, 사업이 최악의 고경에 빠진 은사가 창가 학회 이사장을 사임하겠다는 의향을 발표한 곳도 본부의 한 방이었다. 그날 일어난 일을 SGI 회장은 이렇게 회고한다. "도다 선생님은 당시 사업의 고경을 일목요연 하게 말하고 갑자기 발표하셨다. '심사숙고 끝에 생각한 바가 있어 이사장직을 사임 한다.' 모두 동요했다. '이사장이 바뀌면 스승도 바뀌는 것인가.' 나는 홀로 도다 선생님 방에 찾아가, 분해서 눈물을 흘리면서 이 점을 확인 받았다. 도다 선생님은 명쾌하게 대답해 주셨다. '아니, 그것은 아니다! 고생만 시키지만 자네의 스승은 나다!' (도다)선생님의 눈에도 눈물이 어렸다. 나는 기뻤다. 그리고 생명 깊이 결의했다. '선생님에게 덮쳐오는 모든 난은 단호히 내가 물리치겠다. 그리고 기필코 기필코 도다 선생님을 회장으로 만들겠다' 하고." 때마침 이 무렵일 것이다. 오늘날 학회의 회관을 건설하게 된 간접적인 원인이 된 사제의 대화가 있었다. SGI 회장은 이렇게 썼다. "황궁 옆 수로(水路) 길을 도다 선생님과 함께 걷는데 갑자기 비가 내린 적이 있었다. 우산도 없고 택시도 다니지 않았다. 선생님의 사업이 고경에 처한 때였다. '둘이서 비를 맞으며 가자.' 하고 걷기 시작했을 때 선생님은 '저기에 맥아더가 있다.' 하고 손가락으로 가리키셨다. 그곳에는 연합국 총사령부(GHQ) 본부가 있는 제일생명 관이 우뚝 서 있었다. 당시 학회에는 차도 없고 더욱이 큰 건물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씀드렸다. '제가 열심히 일해서 좋은 차를 준비하겠습니다. 반드시 훌륭한 건물을 많이 세우겠습니다. 선생님! 안심해 주십시오.' 지금 전국 각지에도 새로운 회관이 속속 탄생하고 있다. 도다 선생님이 '전부 다이사쿠가 말한 대로 되었구나!' 하고 기뻐하시리라 나는 확신한다." (<수필 '우리가 나아가는 승리의 길'>) 1951년 5월 3일. 은사는 제2대 회장에 취임. 열렬하게 사자후했다. "75만 세대 절복을 달성하지 못하면 내 시체는 시나가와 앞바다에 던져 버려라!" 도다 회장은 5월에 도쿄 신주쿠구에 있는 '이치가야빌딩' 2층에 학회본부의 분실과 세이쿄신문 편집실을 마련했다. 이치가야빌딩은 임대 건물로 이키가야역에서 도랑을 낀 맞은편, 해자 거리 쪽에 인접한 콘크리트 3층 건물이다. 가운데 바람이 통하는 곳을 에워싸듯 작은 방이 몇개나 있었다. 2층에 있던 본부 분실에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면 넓이는 불과 4~5평. 창을 등지고 도다 회장이 앉는 의자와 책상이 있고, 그 앞에 둥근 의자 7~8개가 놓여 있었다. 당시의 회원은 3000명 정도. 이 작은 방에서 도다 회장은 찾아오는 회원 한사람 한사람의 생명에 희망과 용기의 불을 켰다. 병고, 사업의 어려움, 가정불화, 자식 문제, 인간관계의 대립…죽느냐 사느냐 하는 막다른 길에 몰린 고뇌가 많았다. 이케다 SGI 회장은 당시를 이렇게 기록했다. "스승은 찾아온 벗에게 소탈하게 말씀하셨다. '무슨 일인가?' 그 따뜻한 목소리와 안경 너머 빛나는 자애로운 눈빛에, 동지는 진심으로 안도하고 솔직하게 괴로움을 털어놓는 것이 보통이었다." (<수필 '신·인간혁명'>) 눈앞에 있는 한 사람을 구하느냐 못 구하느냐. 일대일의 목숨을 건 진지한 승부에서 광선유포의 파동이 일어났다. 이치가야 분실로 도다 선생님께 지도를 받으러 갔을 때입니다. 저는 스미다에서 양철 장난감을 만드는 일을 했는데 어음이 부도가 나서 거액의 빚을 지고 말았습니다. 분실에서 도다 선생님이 "무슨 일인가?" 하고 자상한 목소리로 물으셔서, 저도 모르게 "열심히 절복도 했는데 어음이 부도가 나서, 이게 공덕인지 벌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고 무기력한 소리를 했습니다. 그러자 "자네는 나에게 푸념하러 왔나?" 하고 불호령 이 떨어졌습니다. 위로해 주실 줄 알았는데 깜짝 놀라 그만 직립 부동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도다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네는 무간지옥의 벼랑 끝을, 가난 이라는 커다란 숙명의 짐을 지고 걸어가는 것과 같아. 만약 신심을 하지 않으면 평생 괴로울 것이네. 그런데 열심히 신심을 한 덕분에 크게 전중경수(轉重輕受)하고 있지. 이번에야말로 내가 책임을 질 테니까 1년 동안 지금까지 이상으로 절복을 하게나. 지금보다 두 배의 생활이 되지 못한다면 자네에게 내 목숨을 줘도 좋아." 엄격하고도 진심이 담긴 말씀에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때부터 한층 절복을 위해 동분서주 했습니다. 마침내 일도 순조롭게 발전해 정말로 이전보다 두 배 이상의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반담당원(지금의 반담)의 후임이 좀처럼 정해지지 않습니다." 하고 질문하는 지부 간부에게 이케다 회장은 이렇게 지도했다. "당분간은 지구담당원(지금의 지구부인 부장)이 겸임해도 좋은 경우가 있습니다. 또는 지부간부가 많이 격려하러 들어가십 시오. 그런 일은 머리를 써야 합니다. 어떤 경우든지 정체하지 않는다, 그런 결심으로 해야 합니다. 인사는 가장 중요합니다. 모든 실패의 원인은 금전과 인사입니다. 이 두 가지를 실패하면 가정에서도, 어떤 단체라도 잘못됩니다. 나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또 평생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반을 변독위약(變毒爲藥) 해서 '지구에서 제일, 지부에서 제일 가는 반으로 만들겠다!' 하는 결심으로 활동해야 겠지요. 나도 지금까지 모든 곳에 갔습니다. 어디에 가든 그곳에 혼을 담겠다, 광선유포 의 초석, 광선유포의 역사가 되겠다는 마음으로 했습니다. 내가 간 곳을 좋게 만들면 모두가 이번에는 거기에 이끌려 계속 따라오니까, 그렇게 하자는 결심으로 해왔습니다. 타성은 결코 안 됩니다." 이치가야빌딩에는 분실과 편집실 외에 젊은 이케다 SGI 회장이 영업부장으로 분투하던 회사의 사무실도 있었다. 도다 회장이 고문을 맡았다. 이 사무실이 이른바 '도다대학' 의 배움터기도 했다. "매일 아침, 일을 시작하기 전에 도다 선생님이 개인교수로 대학교육에서도 할 수 없는 만반에 걸친 지성(知性)을 훈련해 주셨다. (<수필 '신·인간 혁명'>) SGI 회장은 그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말했다. "월급도 못 받고 연립주택의 한 방에서 단무지로 야식을 하며, 구멍 난 양말을 꿰맨다. 열에 시달리다 깨어난다. 열이 나서 팔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땀을 흘린 밤이 여러 번 있었다. 이것이 스물두세살 때 내 청춘의 일면이기도 하다." (<나의 이력서>) "(도다)선생님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설령 아귀도(餓鬼道)로 고생해도, 지옥계(地獄界)에 시달려도 상관없다. 그래도 아무런 후회가 없다고 결심했습니다. 도다 선생님을 지키는 일이 광선유포를 지키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법화경의 지혜》) 초창기 여자부의 부대장이 이렇게 말했다. "이치가야 사무실에 돌아오자마자 마음고생 때문인지 풀썩 쓰러지듯 누우신 적도 종종 있었습니다. 그래도 이케다 선생님은 단 한번도 무기력한 소리를 한 적이 없었습니다. 남모르게 도다 선생님을 위해 당신 한 몸 내던져 애를 쓰셨지요." 도다 선생님이 1951년에 제2대 회장에 취임하시고부터 시나노마치에 본부를 마련할 때까지 2년간은 이케다 선생님에게 실로 격동의 나날이었습니다. 그 당시 도다 선생님의 사업을 다시 일으키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많은 사람이 느꼈습니다. 그러나 이케다 선생님은 은사의 사업을 필사적인 자세로 지탱해 훌륭하게 실적을 회복시켰 습니다. 당시 오타구에 있던 이케다 선생님 댁을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한눈에 피로하신 것을 느꼈습니다. 몸과 마음을 깎는 듯한 투쟁으로 한계에 이르는 싸움을 하는 것을 다부진 모습에서 느꼈습니다.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서른을 넘기기 힘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도다 선생님의 사업을 지키기 위해 서는 죽을 수 없습니다." '스승을 지킨다!' 이케다 선생님에게는 오로지 그것밖에 없었습니다. 이케다 SGI 회장은 청년에게 일관하여 말한다. "이웃 분들에게는 평상시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절대적으로 소중히 대해야 합니다." "이웃을 소중히 여기고, 이웃에 '인간으로서의 신뢰'를 넓히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이 SGI 회장의 신조다. 광선유포를 위한 행동이다. 이치가야의 분실이 있던 빌딩에서 두집 건너 해자 거리에 식당이 있었다. 이치가야 식당이라고 한다. 아침식사 때에는 노동자들로 가득했다. 그 시간대가 지나고 손님이 한적할 무렵 "안녕하세요!" 상쾌한 목소리와 함께 식당으로 들어서는 청년이 있었다. SGI 회장이었다. 젊은 영업부장은 이 식당을 자주 이용했다. 식당에서 일하던 어떤 부인의 체험담이 있다. ㅡ 식당을 그만두고 결혼해서 야마가타현으로 옮겼다. 우인에게 신심을 권유받고 입회했지만 좀처럼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그러던 때에 신심을 소개한 사람이 <대백련화>를 보여주었는데 어떤 사진에 내 시선이 고정되었다. "식당에 왔던 그 사람이다. 이케다 씨야!" "정말 시원시원한 청년으로 유달리 빛이 났지." "그래, 그렇다면 틀림없어" 하고 순순히 신심에 힘쓰기 시작했다. 1983년 SGI 회장이 야마가타를 방문. 약 20년 만에 다시 만났다. "오랜만입니다! 건강해 보이는군요." 진심 어린 격려에 '생애 광포의 제일선에서!' 하고 맹세했다. 부부가 함께 이룬 홍교는 100세대가 넘었다. ㅡ SGI회장과 잊지 못할 추억이 있는 사람은 그 부인뿐이 아니었다. "식당에서 매일같이 식사를 했다. 때로는 차만 마시고 바쁘게 나오는 경우도 있었는데 식당의 어머니와 딸은 대단히 친절하고 따뜻했다." (<수필 '신·인간혁명'>) 이웃에 사는 부인을 본부간부회 위성중계 회합에 모셨을 때였습니다. 세상에, 그 부인이 그 이치가야식당 주인의 딸이라고 하는 게 아니겠어요. 부인은 오랜만에 보는 이케다 선생님의 모습에 감동해서 당시의 추억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ㅡ 젊은 시절 이케다 선생님은 날마다 정오 조금 전에 네댓명과 이치가야식당에 오셨습니다. 협의를 하고는 뛰어나가는 상쾌한 청년이었습니다. 그 무렵 선생님은 야위고 때때로 기침을 심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정말 호감이 넘치는 청년으로 빈틈없고 늠름한 모습이었습니다. 손님이 많이 와서 다른 사람은 잊어버렸지만 선생님만은 똑똑히 기억합니다. 앉았던 곳, 차 주전자를 내거나 사무실로 배달을 갔던 일도 또렷하게 생각납니다. "어머, 오늘은 차만 드시는 건가요?" 하고 실례되는 말을 한 적도 있거든요. 선생님이 식당에 오시지 않게 되고 얼마 뒤 어머니가 "이케다 씨는 '천상의 사람'이 되어서 이제 더 만날 수가 없어" 하고 말씀하셨지요. 그 말의 의미를 모른 채 시간이 흘렀습니다. 어느 날 위성중계 회합에서 건강하신 이케다 선생님을 보았을 때 어머니가 한 말의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세계적인 활약에 진심으로 감탄했습니다. 그런 공부를 언제 하셨을까요. 정말 그립고 반가 웠습니다. ㅡ 그 보고를 들은 이케다 선생님은 어머니에게 추선제목을 올리고 시를 선물하셨습니다. "청춘의 / 추억 깊은 / 이치가야의 / 일본 제일인 / 식당 그립도다" 시를 받은 부인은 "1000만명을 지도하시는 분이 나 같은 사람에게 이렇게 시를 주시 다니 정말 믿을 수 없습니다. 기쁩니다. 어머니가 살아 계셨다면 얼마나 기뻐하셨을지. 시에 '이치가야' 하고 넣어주셔서 정말 기쁩니다. '일본 제일'이라니 과분한 말씀 입니다." 하고 감격했습니다. 그리고 "세계적인 이케다 선생님이, 이 작은 식당을 잊지 않으셨다." 하고 찾아오는 벗에게 시를 보여주며 선생님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합니다. 본부에서 결성한 조직은 두개다. 남자부와 여자부. 모두 청년부 조직이다. 남녀 청년부는 본부에서 처음으로 탄생했다. 1951년 7월 11일. 먼저 남자부의 결성식 이 열렸다. 7월 11일 오후 6시. 남자부결성식이 시작되었다. 일본정학관 2층은 남자부로 가득했다. 그중에는 스물세살인 이케다 SGI 회장의 모습도 보였다. "니시칸다의 작고 오래된 본부다. 불과 180명 정도의 출발이었다. 나도 일개 반장 으로서 참석했다." (<수필 '인간세기의 빛'>) 남자부의 4개 부대 체제가 발표되고 그 자리에서 도다 회장은 이렇게 분명하게 말했다. "오늘 여기 모인 여러분 중에서 반드시 다음 창가학회 회장이 나올 것입니다. 틀림없이 나는 이 안에 있다고 믿습 니다. 그 분에게 나는 정중히 인사하고 축하드리고자 합니다." 도다 회장은 머리를 깊이 숙였다. 그 엄숙한 모습에 모두가 깜짝 놀랐다. 니시칸다의 본부에서 열린 남자부결성식에 저도 참석했습니다. 마지막에 도다 선생님이 다시 한번 "오늘은 이 자리에서 다음 회장이 되실 분에게 인사를 드리고, 남자부대의 결성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하고 머리를 숙이셨습니다. '누굴 말하는 걸까?' 입회한 지 석달 정도밖에 되지 않은 저는 알 도리가 없었지요. 시간이 흘러 2년 뒤인 1953년, 제1부대였던 저는 부대장(部隊長)으로서 이케다 선생님을 맞았습니다. 그런데 당시 저는 가정이 있었고 일도 몹시 바빠서, 이 인사를 계기로 "청년부를 그만두고 지부간부로 활동했으면 합니다만" 하고 자청했습니다. 그러자 이케다 선생님은 "당신은 청년부를 그만두고 어디에 갈 생각입니까." 하고 말하며 휙하니 돌아가셨습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서둘러 오타구에 있는 선생님 댁으로 찾아갔습니다. 선생님은 웃으며 "잘 왔습니다! 함께 목욕하러 갑시다." 하고 둘이서 목욕하러 갔습니다. 이런 저런 일을 물으신 선생님은 "청년부를 그만 둔다고 해서 지부간부가 된다는 보장이 없지 않습니까. 용감하게 싸워야 합니다!" 하고 약한 내 생명을 깨부수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광선유포는 절대적으로 청년부가 해야 합니다. 나를 따라오십시오." 하고 지도하셨습니다. 이후 선생님을 철저히 따른다는 마음으로 투쟁했습니다. 그러한 나날 속에서 결성일에 '누구를 말하는 걸까?' 하는 막연한 의문이 사라지고, 광선유포에 철저한 사제의 길, 남자부 정신을 배웠습니다. 남자부 결성식에서 도다 회장은 이렇게 외쳤다. "광선유포는 내가 반드시 완수해야 할 사명입니다. 청년부 여러분도 각자 그 존귀한 지위에 있음을 깊이깊이 자각하기 바랍니다. … 언제나 청년이 시대를 움직이고 새로운 시대를 창조합니다. 부디 여러분이 직접 이 존귀한 대사명을 반드시 달성하는 일이 내 유일한 바람입니다." 당시 참석한 청년이, 반성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말했다. "저도 남자부 결성식에 참석했습니다. 송구하게도 당일 도다 선생님이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만 어렴풋이 기억할 뿐입니다. 남자부가 결성된 날에 얼마만큼 깊은 의의가 있었는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깊이 실감합니다. 왜냐하면 도다 선생님과 이케다 선생님의 두 분의 호흡 속에서 거행된 행사였기 때문입니다. 은사의 뜻을 이해하고, 광선유포의 일체를 짊어지고 일어서는 남자부 조직을 만들어 주신 분도 이케다 선생님입니다. 그날 도다 선생님은 '전 세계 끝까지 이 대백법(大白法)을 전하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은사의 한마디를 '그대로' 받아들여 곧바로 실행하신 분은 이케다 선생님뿐이었습니다. 그 결성식은 사제의 엄숙한 의식이었습니다." 훗날 이케다 SGI 회장은 결성식을 회고 하며 이렇게 말했다. "열아홉에 도다 선생님을 만났을 때부터 내 인생은 정해졌다. 선생님도 알고 계셨다. 나도 알고 있었다. 이것이 불법(佛法)의 불가사의함이다." 1951년 7월 19일. 11일에 열린 남자부에 이어 이날 여자부 결성식을 니시칸다의 본부 에서 열었다. 일본정학관 2층에는 여자부원 74명이 생기발랄하게 모였다. 그중에는 열아홉의 이케다 가네코 여사의 모습도 있었다. "아내는 근무하던 긴자에 있는 은행 업무를 마치고 여자부 결성식에 달려 왔던 것 같다. …(가네코 여사는) 도다 선생님이 광선유포를 위해 진지하게 손수 만든 '여자부 1기생'이 되었다. 날마다 일과, 광선유포 하는 학회활동을 모두 해내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면서 초창기 여자부를 구축하기 위해 반장으로서 분투했다. 때로는 부대에서 최고의 확대도 이루었다고 웃으며 말했다. (<수필 '인간세기의 빛'>) 결성식에서는 여자부의 5개 부대 체제가 발표되었고, 그 자리에서 도다 회장은 자애 어린 눈으로 한사람 한사람에게 말을 건네듯 지도했다. "여자부원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행복해져야 합니다." 그날 여자부원 74명이 모였습니다. 방 두칸을 이은 회합장소는 가득 찼습니다. 저는 부대장으로 결의발표를 했습니다. 도다 선생님은 제2대 회장에 취임하기 전부터 "앞으로 시대는 젊은 여성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하고 여러 차례 강조하셨 습니다. "젊은 여성은 남녀노소 모든 계층의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융화하며 대화를 할 수 있는 '특권'을 지녔다. 창가학회도, 앞으로 광선유포 도상에서 젊은 여성이 매우 중요해질것입니다." 그리고 "젊은 여성이 강한 유대로 맺어져야 합니다." 하는 지도도 하셨습니다. 그러한 도다 선생님의 생각의 결실이 여자부 결성이었습니다. 이러한 은사의 구상과 그 실현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케다 선생님이 깊이 관여 하고 크게 힘쓰셨던 게 틀림없습니다. 실은 여자부 결성식 전날인 1951년 7월 18일. 니시칸다에 있는 본부 2층에 '대법홍통 자절광선유포 대원성취'의 창가학회 상주어본존을 안치했다. 남자부 결성(7월 11일). 본부에 상주어본존 안치(7월 18일). 여자부 결성(7월 19일). 그리고 7월 22일. 도쿄 이치가야의 도쿄 카세이학원(家政學院) 강당에서 임시총회가 열렸다. 강당의 단상 중앙에는 새로 마련된 불단이 놓였고 창가학회 상주어본존이 안치되었다. 이날 하루종일 걸린 총회 마지막에 남녀 청년부가 단상을 가득 메우고 '학회의 노래' 와 '동지의 노래'를 모두 합창했다. 노래가 끝나자 도다 회장이 단상 중앙으로 나와 얼굴 가득 웃음을 띠고 참석자 약 1700명에게 이렇게 강조했다. "여러분, 지금 이 단상에 선 청년들을 보십시오. 석존의 불법도, 젊은 제자들의 손으로 넓혔습니다. 대성인의 고제(高弟)도 모두 청년이었고, 그만큼의 대사업을 해냈습니다. 지금 학회에 이토록 생기발랄한 투사가 모여 있는 한, 학회의 앞날은 양양합니다. 여러분, 이 남녀 청년부에 부디 기대해 주십시오." 소설《인간혁명》에 이렇게 씌어 있다. "도다 조세이는 곰곰이 생각했다. '새 시대의 혁명에는 그에 걸맞은 새로운 조직이 필요하다. 그 조직이 하나의 약동하는 생명체로서 발전하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한 조건은 대체 무엇 일까.' 이 문제가 5월 3일 회장에 취임한 날부터 도다의 머릿속을 줄곧 떠나지 않았다. … '(창가학회는) 묘법유포의 조직인 이상, 조직의 중심축은 말할 나위도 없이 순수무구한 신심뿐이다.' 그런 생각에 다다르자 그는 지금까지의 학회에 빠졌던 것이 바로 그 신심의 근본인 어본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학회에 남녀 청년부라는 새로운 조직이 탄생했다. 그리고 본부에는 상주어본존이 안치되었다. 드디어 조직이 약동하기 시작했다. 실로 광선유포는 청년의 손으로 진척된다. "교학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교학시험 공부는 어디서부터 손을 쓰면 좋을지 모르 겠습니다." 하고 질문한 청년부에게 이케다 회장은 이렇게 격려했다. "그러니까 더욱 남보다 한발 앞서는 곳에 신심이 있습니다. 세간의 모든 투쟁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실력을 쌓기 위해서도 또 후배를 위해서도,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끈질기게 공부를 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범위가 발표되니까 알기 쉬운 부분부터 하십시오. 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선배에게 '부탁합니다!' 하고 열심히 물어보는 마음가짐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다행히도 어본존 근본으로, 고생해도 전부 열매를 맺기 때문에 고마운 것입니다. '시험이 힘들다'고 해도 자신을 위해서이지 않습니까. 본부에 가는 것도, 회합에 가는 것도 전부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어본존을 근본으로 한 활동에 헛됨이 있을 리 없습니다. 부질없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자신이 이미 신심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위한 공부라고 생각하는 게 좋습니다." 당시 도다 회장은 청년에게 이렇게 지도했다. "학회의 어본존은 세계광포를 위해 싸우기 위한 어본존. 세계광포를 달성하기 위한 어본존. 투쟁하기 위한 어본존입니다." 은사의 구상을 "그렇게 말은 하지만 현실은……" 하고 듣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그대로' 실행한 청년이 있었다. 도다 제2대 회장은 '75만 세대 절복'을 생애 원업(願業)으로 삼았다. 회장 취임 당시인 1951년. 회원수는 약 3000명. 75만 세대는 실로 250배의 확대다. 회원 대부분은, 도대체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결과가 달성될 때까지 6년 반이 걸렸다. 그 돌파구를 연 것은 무엇인가. 1952년 1월 31일에 열린 1월도 지부장회. 도다 회장은 엄격한 어조로 강조했다. "기러기 행진은 이달로 일체 중단한다!" "맥진(驀進)이 있을뿐." "겁쟁이는 가라." 이 소리가 울려 퍼진 장소도 또한 니시칸다의 본부였다. 당시 지부의 한달 홍교는 100세대에 미칠까 말까한 정도였다. 이것이 한줄로 나아가는 '기러기 행진'이라 불린 활동의 한계였다. 이 벽을 뚫고 '75만 세대'를 향한 돌파구를 연 것이 바로 젊은 이케다 SGI 회장의 '2월 투쟁'이었다. "지금이야말로 벽을 부숴라! 승리의 돌파구를 열어라! 나는 (도다)선생님의 기대를 내 사명으로 하여 맹렬하게 궐기했다." (<수필 '신·인간혁명'>) 가마타지부 지부간사로 임명된 스물네살의 청년이 "맥진이 있을 뿐!"이라는 은사의 사자후에 응했다. 다음달 말(2월 29일)에 본부에서 열린 2월도 간부회. '가마타지부 201세대!' 간부회에서 나온 발표에 모두 순간 귀를 의심했다. "201세대. 이것은 그 누구도 아니다. 이케다 선생님의 힘이다." 당시 가마타지부 지부장의 말이다. 이 가마타지부의 장거에서 파동이 일어났다. 이해 말, 학회는 2만 2000세대. 전년 말의 5700세대에서 네배 가까이 크게 발전했다. 75만 세대의 돌파구는 여기에서 열렸던 것이다. 이해 12월, 새롭게 본부 건설부지가 도쿄 신주쿠구의 시나노마치로 결정되었다. 초창기 간부는 말한다. "도다 선생님의 자택은 미나토구였지만 메구로역에 가까워서 모두 '메구로에 있는 도다 선생님댁' 하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마키구치 선생님의 자택은 도시마구에 있는 메지로. 메구로와 메지로. 두 스승의 자택이 있던 장소를 선으로 연결하면 시나노마치 근방을 지납니다. 사제의 의의를 담은 땅에 새로운 본부가 생긴 것이지요." 1953년 1월. 도다 회장은 2만 세대에서 7만 세대로, '5만 세대 획득의 대원'을 외치며 본격적인 확대를 내세웠다. 도다 회장은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만약 그해에 좌절했다면 도다 조세이가 회장에 취임할 때에 선언한 평생의 맹세인 75만 세대를 달성하겠다는 원업은 실패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이해도 또 스물다섯살의 이케다 SGI 회장은 파동을 일으켰다. 분쿄지부장대리로서! 남자부의 제1부대장으로서! 1953년 2월. 분쿄지부의 홍교는 70세대(가마타지부는 약 700세대). 정체에 고민하며 모두 자신감을 잃었다. 4월 20일, SGI 회장은 분쿄지부장대리로 취임. 5개월 뒤인 9월. 분쿄지부의 월간 절복은 200세대가 넘었다. SGI 회장은 당시 오사카 간부의 말을 일기에 이렇게 썼다. "9월의 어본존 유포는 분쿄에 졌다'며 원통해했다." (《젊은날의 일기》) 분쿄지부가 전국에 파동을 일으 켰다. 그 자신감과 기세에 도다 회장은 유머를 섞어 "강장제라도 먹였나" 하고 큰 소리로 웃었다. 10월 30일. 도쿄 도시마공회당에서 열린 본부간부회에서 '학회는 5만 세대 획득의 대원' 달성이 확실시된다고 발표했다. 또 같은 해 1월 6일, 이케다 SGI 회장은 제1부대장에 취임. 청년 확대전을 개시했다. 1월도 부원수는 337명. "연말까지 각 부대 1000명으로 확대" 이것은 은사가 제시한 목표였다. SGI 회장은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썼다. "가마타지부(2월 투쟁)가 광선유포의 돌파구를 연 것처럼, 청년부에서도 어딘가 한 곳이 확대의 모범을 보이면 그 파동은 반드시 전 일본(전 세계)으로 넓혀진다." (<수필 '인간세기의 빛'>) 제1부대는 11월에 부원 1025명으로. 제1부대장은 '부대 1000명으로 확대'를 달성했다. 1953년에 이케다 선생님이 제1부대장으로 취임하셨습니다. 저희 제1부대의 멤버 들이 무엇보다 고대하던 것은 오타구의 이케다 선생님 댁에 방문하는 일이었습니다. 선생님 댁 방에는 책꽂이가 빙 둘러져 있고, 엄청난 숫자의 양의 책이 빼곡이 꽂혀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책 한권을 꺼내 펼쳐보니 어디나 빨간 줄이 쳐 있었지요. 축음기가 있는 방에서는 종종 레코드를 틀어주셨습니다. 선생님이 갖고 계신 축음기는 손으로 돌리지 않고 전기로 레코드판을 돌리는 것으로, 저음이 심금을 울렸습니다. 주페가 작곡한 '경기병 서곡'을 들으면서 선생님은 "이 부분은 출진하는 때다." "여기는 개선하는 부분" 하고, 마치 눈앞에 그리듯 줄거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돌아오는 전차 안에서 동료와 함께 "굉장하지!" "또 선생님 댁에 가자!" 하고 감동을 나눴던 일이 지금도 또렷이 기억납니다. 즐거웠지요. 제1부대의 투쟁은 힘들었 지만 생애 추억이 될 정도로 즐거웠습니다. 은사가 제시한 목표에 젊은 이케다 SGI 회장은 분쿄지부장대리로서, 또 제1부대장 으로서 승리로 응답한 1953년 11월. 학회본부는 니시칸다에서 시나노마치로 이전 했다. 당시의 청년부 간부가 이렇게 회고한다. "이케다 선생님은 시나노마치에 본부가 이전했을 당시를 돌아보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군가가 하는게 아닙 니다. 한사람 한사람 모두가 힘을 합쳐 본부를 지켜야 합니다. 광선유포의 본진인 본부를 지키는 것은, 모두가 행복해지는 복운을 쌓는 일이 됩니다.' "업무 관계로 만나는 사람이 있는데, 사람을 보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질문한 청년에게 이케다 회장은 잘 알아 듣도록 지도했다. "그것은 몇 번이고 부딪쳐 시행착오를 겪어 봐야 합니다. 근본은 신심 제일입니다. '오늘 하루의 투쟁을 승리하게 해주십시오' 하고 말이지요. 그러한 신심 위에 섰을 경우는 제천선신이 가호합니다. 나쁜 사람은 자연히 '결점'을 드러냅니다. 또 떠나갑니다. 이것이 근본입니다. 어쩔 수 없는 이치입니다. 아무리 주의해도 악인은 약삭 빠르고 악지혜가 잘 돌아갑니다. '허점을 이용하자' 하고 호시탐탐 노리는 법이 지요. 신심의 토대 위에 서서 자신이 크게 성장하면, 자연스럽게 '이것은 위험하다' '이건 대체로 걱정 없겠는데' '이 사람은 만나도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을 많이 만나십시오. 경험을 많이 해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거기에서 자기만을 기준으로 삼으면, 알 수 없게 되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윗사람에게 보고 하고 윗사람의 의견도 잘 들어보고, 거울로 삼아 대조해 보고 판단하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시행착오입니다. 남의 의견을 듣지 않는 사람은 그것으로 끝입니다. 반드시 상사에게 의논하고 보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을 되풀이하다 보면 정확히 사람을 볼 줄 알게 됩니다." 이케다 선생님이 '본부를 지킨다'고 하신 말씀은 다름아닌 은사를 지키고, 회원을 지키는 일입니다. 거기에 제자의 길이 있고, 행복의 길이 있다고 가르쳐 주셨지요." 11월 13일. 시나노마치의 새로운 본부에 학회의 상주어본존이 안치되었다. 시나노마치에 본부가 이전한 그 다음달 도다 회장은 간부회(도쿄 도시마공회당) 에서 이렇게 말했다. "본부가 생겨 몹시 기뻐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새로운 본부라 해도 이전에 어떤 나라 대사의 관저로 써, 목조 모르타르로 된 양옥을 개축한 건물이었다. 대강당이 다다미 70장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이케다 SGI 회장은 시나노마치의 본부 탄생을 위한 제자의 '맹세'를 소설 《신·인간혁명》에 이렇게 썼다. "('세간이 깜짝 놀랄 만한 본부 건물이 있어야 겠다'고 말한 간부에게 도다 회장은) '외형에만 혹하지 마라. 내가 있는 곳이 본부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지금은 건물보다 반석같은 조직을 구축할 길을 생각하게.' 야마모토 신이치는 그런 도다의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선생님, 제가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하루 빨리 모두 신경을 쓰지 않고 모일 수 있는 독립된 본부를 마련하겠습니다.' …… 신주쿠구 시나노마치에 학회본부가 탄생했을 때, 도다는 마치 어린 아이처럼 기뻐하는 모습이었다. '드디어 되었군! 굉장하지 않나. 위대한 창가성(創價城) 이다.' …… 그것은 제자의 맹세가 이룬 결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