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삼촌
김여하
하나뿐인 엄마의 형제 외삼촌의 兒名(아명)은 여든 쇠였다. 여든까지 소처럼 튼튼히 잘 살라는 뜻일 것이다. 외삼촌은 경남 지리산 아래 외딴집에서 혼자 부모님을 모셨다. 초등학교는 문 앞에도 못 가보셨다.
집 앞 마당에는 늑대가 어슬렁거리고 천장에는 구렁이가 수시로 꿈틀댔다. 위로 셋이나 되던 형들은 모두 요절하고 하나 남은 누이는 일본 사람들이 돈 많이 번다는 꾐에 빠져 부관연락선을 탔다.
외삼촌은 혼자 나무를 하거나 물고기를 잡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는 십리밖에 있었고 문 앞에도 가보지 못했다. 그래도 언문은 떼어 일본서 오는 누이의 편지를 부모님께 읽어드렸다.
-그 누이, 엄마는 외삼촌이 서른이 넘어서 해방되자 고향으로 돌아오셨다. 엄마는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혼자 사는 동생을 남편의 고향으로 데리고 와서 같이 살았다.
대구 칠성시장 근처의 양철지붕 아래 단칸방에서 아버지, 엄마, 큰 누나, 형, 작은 누나, 나, 동생이 꼬물꼬물 양동이 속의 미꾸라지처럼 모여 살았다.
이제껏 나는 외삼촌이 남과 얼굴 붉히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절대로 남과 다투지도 않았다. 이래도 허허, 저래도 허허 하셨다. 대신 외삼촌은 5%쯤 부족했다. 무슨 일을 시켜도 완전히 마무리 하는 적이 없었다.
엄마가 없는 돈을 아버지 몰래 한 푼 두 푼 모아서 새우 장사를 시켰다. 지게에 새우 독을 지고 이 동네 저 마을로 팔러 다니는 일이었다. 일곱 살 나도 할 것 같은 그 일을 몇 그릇 팔지도 못하고 새우 독을 버썩 깨먹고 말았다. 지나가던 아낙네들이 줄줄 흐르는 젓갈을 보며 혀를 끌끌 차면서 저 육젓 아까와 어쩌노 하니
“담아가 자시소”만 연발하시며 담배를 피우셨다.
물론 그날 밤 엄마에게 혼쭐이 났지만 그냥 허허 웃으셨다.
아버지가 장사에 실패하시고 고향으로 낙향 하실 때도 따라오셨다. 같은 방 쓰다가 집을 사서 아래채에 계실 때까지 같이 끼니를 때웠다.
쉰이 넘은 아버지는 쌀 열 세가마니 받는 큰 일꾼이었으나 마흔도 안 된 외삼촌은 고작 여섯 가마니를 받았다. 그나마 온전히 받은 적은 한 번도 없다. 모내기 즈음해서 일 못하겠다고 파이치고 오셨기 때문이다. 쌀은 물론 돌려주었으며. 그날부터 엄마의 구박은 시작되고.
어쩌다가 집 나온 아낙 하나를 주어다가 같이 산 적이 있다. 그 아낙은 10%쯤 모자랐다. 돈을 몰라서 외삼촌이
“일 원, 십 원” 하며 가르치셨다. 한밥 중 통시에 가노라면 외삼촌과 그분이 불을 꺼놓은 체 “일 원, 일 원. 십 원, 십 원 하는 소리가 들려서 웃던 기억이 어제 같다.
십여 년 같이 사시다가 진주 근처의 고향에 가시더니 다음해 멸치를 한 짐 지고 오셨다. 가까운 동네에 지고 다니며 모두 떨이를 하셨다. 그 후로 해마다 같은 일을 번복하셨다. 수입도 꽤 괜찮은 눈치였다. 덕택에 내 도시락 반찬은 늘 멸치였다. 하긴 김치보다 열 배 낫지만.
스무 살 아래인 외숙모에게 열 살 차이라고 뻥을 치셔서 결혼하고 슬하에 이남 일녀를 두셨다. 외숙모는 농사를 지으시고 외사촌 동생들은 모두 똑똑해서 일가를 이루고 살고 있다.
내가 일 년에 한 번 정도 가면
“하야, 자주 온네이 내 오래 몬산다” 하시던 외삼촌은 환갑을 몇 해 지내고 돌아가셨다.
엄마가 보내주신 돈으로 외딴집을 새로 지으시고 살다가 전염병으로 돌아가신 부모님을 나란히 누이신채 집에 불을 지르고 기어 나오신 외삼촌.
경호강이 바라보이는 산소에 가도 막걸리 한 잔 대접할 길 없는 외삼촌.
엄마가 돌아가실 때 한 시간 차이로 못 본 남매. 여든쇠는 여든을 못 채우고 돌아가셨다.
지금은 두 분이 만나 어린시절처럼 오순도순 살고 계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