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어머니의 뱃속에 있는 태속에서 열달을 지내다가 태어난다.
그렇다면 어둡고 캄캄한 그속에서는 도대체 무슨일이 일어난 것이었을까. 그것이 태생 란생 습생 화생의 네가지 태어나는 모습(四生)중에서 태생과 란생이 가지는 비밀스러운 운명이다. 생명의 이 비밀 스러움을 온천하에 밝힌것이 부처님이시다. 바로 그 엄청난 무명(無明)이 진행되었다는 사실 말이다. 처음에는 우주의 신령스러운 기운이 들어갔지만 뱃속의 오븐에서 무명으로 굽혀져 나온것이 우리다. 무엇때문에 하필 무명인가. 이유는 단 한가지 ! 살아서 존재하기 위함(生存) 때문이다. 무명을 뒤집어 쓰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무명을 빙자하지 않고서는 암수가 합하여 자식을 얻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소위 말하는 자기 보존과 종족의 계승이라는 것이다. 실로 무명은 살아서 존재하는 생명의 근본이다.
아주 신령한 사람이 살아남아 애를 놓고 해피 버스데이 노래나 부르고 앉아겠는가. 고해(苦海)에도 자식을 던져놓고 희희낙낙 종아하겠는가 말이다. 하여간 어머니의 태속은 신령스러운 우주의 기운을 받아 무명을 길러내는것이 그의 막중한 임무이다. 그래서 태어나는 아기는 무명이 억울하고 분해서 소리질러 운다. 태어나 울지 않는 아기는 병신이다.
이 무명을 이해하기가 거의 절망적인 것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우리의 선조들은 뛰어나게도 정(情)이라는 단어로 잘 표현해 두고있다. 뭇삶은 유정(有情)이다.불경에서도 처음 한문번역에는 중생이란 단어 대신에 유정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무명은 바로 정이다. 아는것조차 정이라서 정식(情識)이라고 이름한다. 정은 천한것이기도 하지만 귀한 것이기도 하다. 천하기 때문에 망정이라 하고 귀한것이라고 순정이라고 하여 망정과 순정을 분별해서 쓰는것이다. 망정은 될수 있는한 작은 부분으로 남기고 순정은 increase(增.증) 시키고 enlarge(長 장) 시키자는 것이 인류최대의 과제인 것이다. 희노애락 우비고뇌가 무슨 대역죄를 지었다고 그리 멀리하고저 수행하는가. 마음껏(大) 기뻐하고 마음껏 슬퍼하는 것이 대자대비의 마음이다.
대승은 무슨 큰 수레가 있어서 타는것이 아니라 마음껏 순정스러워 지는것이다. 우리가 소승이라고 폄하하는 하나의 현상은 실은 인간을 제도종교밑에 놓고 보자는 작태를 말하는 것이다. 하여 대승에 대한 믿음은 순정에 대한 믿음이다. 무명이 멸절된 열반의 세계에 대하여 순정이 샘물처럼 솟아나는 불국토를 염원하는 것이 대승의 세계관이다. 나는 댄스의 순정이란 유행가를 가끔 흥얼거리며 삶과 정(情)에 대한 생각을 일으키곤한다. “이름도 몰라 성도 몰라 처음본 남자 품에 얼싸안겨 푸른등불 아래 붉은 등불아래 춤추는 댄스의 순정”
우주의 섭리나 창조주의 뜻을 불교에서는 굳이 마음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이 섭리와 뜻에는 물리적이고 화학적이며 생물학적인 요소가 한꺼번에 포함되어 있는 그 어떤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마음은 이름도 없고 성도 없는 것인데 문득 마음에 무명이 안겨와서는 비로서 삶이 시작된것이다. 무명은 원래 깨끗하여 순정이었지만 삶의 연륜에 따라 잡정이 되고 물든정이 되어 너널너덜하게 된것이다. 이것은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의 모습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일체의 사회성을 뛰어 넘는다면 그곳에는 순정만이 남아 있게 되어 선과 악도 시도비도 없는 상태가 될것이지만 가정을 이루어야 하는 종족의 유지자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순정은 사회적으로 보장되는 순정이 아니면 안된다. 지금 인류는 그곳으로 가고 있다. 무한한 시간이 남이 있지 않는가. 우리가 시공을 초월한다는 것은 시공을 멸절하는 관념이 아니고 시간과 공간이 너무도 무한 하다는 것을 알고 믿는 것이다.’무량수여래’를 설법한 부처의 본의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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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마음의 큰 수레를 타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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