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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창조, 여섯째 날(2)
창 1:24-31
24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29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
30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 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31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 설 교 >
하나님의 인간창조
창 1장 26~28절 / 박봉수목사
인간은 어떻게 존재하게 됐을까요? 이 질문은 인간이 존재하기 시작하던 때부터 계속 있어왔고, 그리고 그 답을 찾기 위한 노력도 계속 있어왔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고, 그래서 인간이 존재하게 됐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이 답을 배제하고, 다른 답을 찾으려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들어진 피조물이 만든 분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알아보려고 다른 곳을 기웃거리며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과 다르게 상상도 해 보고, 자기들 생각에 맞는 증거를 찾아보려고 애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던 중에 나름대로 답이라고 내놓은 것이 소위 ‘진화론’입니다. 이 진화론의 주장을 결론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 소위 ‘생명의 나무’(Tree of life)입니다. 한 마디로 생명은 마치 나무의 가지치기처럼 진화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지구상의 생물들은 가지치기를 통해 죽지 않고, 생존한 맨 끝 가지들이라는 설명입니다.
오늘도 진화론자들은 이 생명의 나무를 더욱 정교하게 다듬는 작업을 해오고 있습니다. 근자에 DNA 분석을 통해 새롭게 다듬어진 생명의 나무가 공개되었습니다. 이 도표를 보면 45억년 전에 생명의 조상인 ‘루카’(Luca)가 등장을 했고, 이 루카에서 박테리아가 나왔고, 이 박테리아에서 시작된 생물종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식물과 동물로 진화했고, 결국 인간으로까지 진화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진화가 실제로 일어났다는 증거가 없다는 것입니다. 루카가 있었다는 증거가 없습니다. 그리고 진화의 중간단계의 화석이 발견되고 있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무척추동물에서 물고기로 진화하는데 1억년이 걸렸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무척추동물과 물고기 중간단계의 화석이 단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진화론자들의 주장은 일어날만한 가능성에 대한 것이지 실제로 일어난 사실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진화생물학자 스티븐 구즈(Stephen Gould)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의 교과서를 장식한 진화생명의 나무는 실제로는 그 가지의 끝과 마디에서만 나타난다. 그 나머지는 추정한 것일 뿐 화석에서 얻은 증거가 아니다.”
그리고 진화생물학자 매튜(L. H. Matthews)는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진화론에 대한 믿음은 하나님의 특별 창조에 대한 믿음과 마찬가지로 믿음 혹은 신앙의 범주에 속한다. 이러한 개념들은 한결같이 그것을 믿는 사람들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들이지만, 그 중 어떤 것도 지금까지 증명된 적이 없다.”
그렇습니다. 진화론은 사실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낸 일종의 종교와 같은 신념체계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인정할 수 없어서 그 대안으로 만들어 낸, 과학 아닌 일종의 종교적 주장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필연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정할 수 없고, 그렇다고 모른다고 할 수는 없어서 답을 찾다 보니 이렇게 밖에는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장로교의 신학과 사상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장 칼뱅은 그의 신학을 대표하는 책 [기독교강요]를 이런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인간을 알 수 없다.” 우리가 인간에 대해 알려면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잘 알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셨고, 인간을 위해 일하고 계시기 때문에 인간에 대해 잘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인간에 대해 알고 싶으면 먼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답을 찾을 수 있도록 성경에 우리 인간에 대해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을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어떻게 창조하셨다고 말씀하셨을까요? 본문을 중심으로 그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오늘 본문 26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이 말씀에서 주목할 것은 “우리”라는 표현입니다. 성부하나님, 성자하나님, 그리고 성령하나님 즉 삼위일체 하나님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성부하나님께서 성자하나님 그리고 성령하나님과 의논하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천지창조 중이십니다. 다섯째 날까지 다른 것들을 다 창조하시고, 마지막으로 인간을 창조하시기 직전입니다. 그런데 성부하나님께서 성자하나님과 성령하나님과 함께 모이셔서 의논을 하신 것입니다. 특히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자고 의논하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성부하나님께서 주도하셔서 함께 계획하신 대로 창조가 진행되어왔습니다. 그런데 인간을 창조하시기 직전에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한 번 더 확인하신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한 번 더 확인하신 것일까요? 인간창조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창조가 창조의 하이라이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동안 창조하신 피조물들과 다르게 창조하려 하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은 어떻게 지음을 받았다는 말일까요?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인간의 외모가 하나님을 닮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영적인 존재로 지음을 받았는데, 그 영이 하나님의 영을 닮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영성이 하나님을 닮았다는 것입니다.
골 3:10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 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한 마디로 말하면 인간이 영적인 지식을 가진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영이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존재인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은 특별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특별함은 두 가지 점에서 큰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는 인간은 다른 모든 피조물들과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진화론자들이 볼 때 인간은 그저 다른 동물들과 특별히 구별될 것이 없는 하나의 동물일 뿐입니다. 다만 현재까지 진화의 마지막 단계에 와 있기 때문에 다른 동물들보다 더 많이 진화되었을 뿐입니다. 앞으로 시간이 흐르면 인간에서 더 진화된 다른 동물이 나올 수 있는 여지도 있는 그런 존재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다르게 창조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인간을 천하보다 귀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다른 피조물들과 비교할 수 없는 아주 특별한 존재입니다.
다른 하나는 인간은 모두가 다 평등하다는 것입니다.
타락하고 패역한 인간 역사를 살펴보면, 늘 인간은 평등하지 않았습니다. 인간 위에 인간이 있고, 인간 아래 인간이 있어왔습니다. 신분 차별이 있었고, 인종차별이 있었고, 성차별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이 세상에는 인간차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모두가 다 같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은 모두 다 동등한 존재로 태어났습니다. 차별이 있으면 안 됩니다. 서로 다른 점 때문에 구별은 할 수 있어도 차별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인권을 소중한 가치로 추구해 가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복음성가 중에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형제의 모습 속에 보이는 하나님 형상 아름다워라
존귀한 주의 자녀 됐으니 사랑하며 섬기리.”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믿음의 눈을 열고 서로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서로를 귀하게 여기고 사랑할 수 있고, 그리고 서로를 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스리라”
본문 28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뒤에 명령하신 말씀입니다.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말씀이고, 다른 하나는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앞의 22절을 보면 다른 생물들에게도 명령하신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여기에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말씀만 있습니다. 그러니까 두 번째 말씀은 사람에게만 특별하게 주신 말씀입니다.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신학에서는 이것을 ‘하나님의 문화명령’(cultural mandate)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피조세계를 다스리라고 위탁하셨습니다. 이 명령은 인간에게 최초로 주신 사명입니다.
왜 이런 사명을 주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창조를 마무리하실 때 보시기에 좋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피조세계를 창조된 그대로 머물러 있게 두지 않으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면서 계속 확장되어가게 하셨습니다. 시간이 흘러 그 영역이 확장되고 피조물 수가 늘어나게 되었을 때 계속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실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께서 다스리라고 명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역사를 통해서 경험하고 또 확인하는 것은 그렇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 다스리는 권한을 이기적으로 사용해왔습니다. 욕심을 채우기 위해 이 권한을 남용해 왔습니다. 피조세계가 회복하기에 힘들 정도로 망가져버렸고, 세상 모든 피조물들이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지 않으신 것은 물론이고 분노하시게 되었습니다.
열왕기 상하는 이스라엘의 왕정시대에 대한 기록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들이 어떻게 나라를 다스렸는가를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목할 것은 각 왕들이 죽은 후에 평가하는 항목이 빠지지 않고 나옵니다. 그 기준에 반복되는 구절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여호와 보시기에”입니다. 그리고 평가는 두 종류로 구분되어있습니다. 하나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했다”고 칭찬을 받은 평가와 다른 하나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다”고 책망을 받은 평가입니다.
왜 이렇게 평가가 엇갈릴까요? 왕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왕의 권한을 다르게 행사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권한을 가지고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나라를 만들려고 힘쓴 사람은 좋은 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권한을 가지고 자신이 보기에 좋은 나라를 만들려고 했던 사람은 나쁜 평을 받았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스리라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예를 들어 가정을 만드시고 가정을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을 보시고 “보시기에 좋다!”라고 말씀하시도록 만들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일터를 주시고 그 일터를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일터를 보시고 “보시기에 좋다!”라고 하실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자연환경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자연환경을 보시고 “보시기에 좋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도록 만들어 가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스리라는 이 문화명령을 주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가야 사명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흙으로
창 2:7을 보면 하나님의 인간창조 이야기에서 결코 빼놓아서는 안 되는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 흙으로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원어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흙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원어 ‘아파르’(עפר)라는 말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 아파르라는 말은 성경에서 ‘티끌’, ‘재’, ‘가루’라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그리고 이 말이 동사로 쓰여질 때는 ‘부숴지다’라는 뜻으로도 쓰였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티끌처럼 보잘 것 없는 것을 재료로 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연약해서 쉽게 부숴질 수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의 반전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이 세상 모든 피조물과 구별되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모든 피조세계를 다스리라고 문화명령까지 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야말로 인간을 높이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는 인간이 흙으로 만들어졌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앞의 두 가지를 말씀하시고, 흙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빼놓지 않으시고 강조하신 것입니다.
왜 이 말씀을 덧붙이셨을까요? 두 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우선 겸손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하나님의 걸작품이고, 다스리라는 사명을 받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해도 그 본질은 흙이라는 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이렇게 높임 받고 세움 받은 것은 우리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이렇게 지으신 하나님 때문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겸손해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남다른 능력을 나타낼수록, 남다른 업적을 이룰수록 더욱 우리가 본래 흙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결코 교만한 자리에 앉지 않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다음 의지입니다.
흙은 연약합니다. 흙으로 만든 것들은 쉽게 부숴집니다. 흙으로 만든 도자기는 쉽게 깨집니다. 흙으로 쌓은 토담은 비바람에 쉽게 손상됩니다. 인간이 그렇습니다. 말 한마디에 상처받고 무너집니다. 조그만 어려움에도 주저앉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맡겨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려면 자기 힘만으로는 어렵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의지할 때 비록 나는 연약한 흙이지만 놀라운 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고백하게 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그렇습니다. 우리는 흙으로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더욱 겸손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도 잊지 마십시오. 그래서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만 마라보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다스리라는 명을 받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명을 이루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흙으로 지음을 받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더욱 겸손하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인간의 탄생, 창조와 진화
창 1장 26~27, 2:7 / 이종철목사
창조론과 진화론 논쟁
성서는 인간이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다고 선언합니다. 반면에 과학은 인간이 원숭이로부터 진화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을 믿습니까?
지난 1925년에 소위 원숭이 재판으로 불리는 유명한 법정 논쟁이 있었습니다. 당시는 진화론이 과학적 이론으로 막 정립되어 가는 시점이었고 미국 사회에서는 여전히 창조론이 우세했던 때였습니다. 미국 남부의 테네시 주에서 진화론 교육을 금지하는 ‘버틀러 법’이 통과되었고, 이 법에 반대해 진화론 교육을 했던 스콥스라는 사람이 법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멀리 홍콩에서까지 취재를 할 정도였고 사람들이 5천여 명이나 몰려들어 야외에서 재판을 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성경의 말씀대로 6일 창조설을 믿었던 근본주의적 경향의 신앙인들은 성경을 들고 항의하며 기도하였습니다. 당시 분위기는 창조론이 압도적이었기에 검사가 진화론을 비난할 때마다 방청석에서는 ‘아멘’ 소리가 가득했습니다. 법정은 진화론을 가르쳤던 스콥스 교사에서 100달러의 벌금을 선고하였습니다. 그러나 법정에서의 창조론의 승리는 이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진화론 교육을 금지했던 버틀러 법은 1968년에 연방헌법에 위배되는 것으로 폐지되고 진화론이 법적인 인정을 받게 됩니다. 1987년에도 창조론과 진화론을 동등하게 가르쳐야 한다는 주법에 대하여 연방법원은 또 헌법에 위배된다는 결론을 내려졌습니다.
이 논쟁은 최근까지도 이어졌습니다. 2005년에 창조론을 살짝 바꾸어 지적설계자의 설계 없이는 생명체의 탄생은 불가능 하다는 지적설계론을 주장하였지만 이 역시 위헌 판결을 받게 됩니다. 그 때 연방 재판관은 존 존스 판사인데 이 판사는 창조론을 믿었던 부시 대통령이 임명한 재판관이었습니다. 이 판결에서 지적설계론은 창조론의 재탕이지 과학적 가설이 아니다. 지적설계론을 수업시간에 가르치는 것은 위헌이다. 진화론이 완벽하지는 않지만 과학적 가설이 모든 것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을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고 판결하였습니다.
우리가 매우 신앙적이라 생각하는 미국의 분위기 또한 진화론을 과학으로서 인정하고, 창조론은 단지 신앙적 주장으로서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진화론이 확고한 과학으로서 학교에서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교회에서는 창조론을 확고하게 주장합니다. 인간의 조상은 원숭이가 아니고, 인간을 비롯한 우주의 탄생은 6천년 길어야 1만년이 되지 못한다고 주장합니다. 창조과학회 등이 나름대로의 근거를 들어가며 창조론을 계속 설파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신앙을 가진 청소년들은 신앙과 과학 사이에서, 창조론과 진화론 사이에서 갈등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기독교는 과학과 신앙 문제에 있어서 할 말이 없습니다. 16세기에 벌어졌던 천동설과 지동설 논쟁 때문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지구가 중심이고 지구 주위를 태양과 항성들이 돈다는 천동설을 믿고 있었습니다. 코페르니쿠스라는 학자가 여러 과학적 사실을 종합한 결과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지동설을 주장했습니다. 당시 교회는 시편 104편 5절의 “땅의 기초를 두사 영원히 요동치 않게 하셨나이다”는 말씀과 여호수아가 기브온 전투에서 “태양아 멈추어라”(수10:12) 했지 언제 “지구야 멈추어라” 했느냐며 성경에 위배된다고 하여 천동설을 이단으로 배격하였습니다. 갈릴레이 같은 사람은 법정에서 공개적으로 지동설을 부인하고 겨우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가 법정을 나서면서 말했다는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말이 전설처럼 내려옵니다. 그러나 이제 천동설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처럼 과학과 신앙 사이에 끊임없는 논쟁이 계속되는 이유는 우리가 성경을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과학책과 맞서는 것으로 보지 말아야 합니다. 서로의 길이 다릅니다. 지난 번에도 말씀드렸듯이 과학은 사실을 묻는 데 비해서 신앙은 의미를 묻습니다. 여기 자동차가 한 대 있습니다. 이 자동차의 움직이는 원리는 무엇이며, 내부 설계는 어떻게 되었으며, 발전사는 어떤가를 연구하는 것이 과학입니다. 반면에 그 자동차의 주인은 누구이고, 자동차를 만든 목적은 무엇이며, 바른 운전법은 무엇인지 묻는 것은 신앙입니다. 이처럼 과학과 신앙은 서로 배치되지 않고 그 질문과 목적이 다를 뿐입니다. 성경은 신앙의 질문에 답하는 책입니다.
지구와 인간 형성 과정의 문제는 과학이 탐구해야 할 영역입니다. 지구의 탄생 연대는 46억년에 이르고, 지구의 생명체는 고생대, 중생대, 신생대를 거쳐 진화해왔다는 것은 이제 정설이 되었습니다. 공룡은 수천 만 년 전인 중생대에만 존재했고, 인류를 비롯한 영장류는 수백 만 년 전인 신생대에 출현하게 되었습니다. 현생 인류 또한 5만 년 전의 크로마뇽인으로부터 그 기원을 찾고 그 이전에는 원숭이와 유사한 유인원의 형태에서 진화해왔다는 것이 진화론입니다. 이 진화론을 필적할만한 다른 과학적 가설은 현재까지는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창조론을 주장하시는 분들도 나름대로 과학적 근거를 제시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주장들이 학문적 신빙성이 없는 일방적 주장에 불과하다는 점입니다. 사이언스 지나 권위 있는 학술지에 게재되어 과학적 사실로 인정된 적이 제가 아는 바로는 거의 없습니다. 그냥 교회라는 틀 안에서 일방적인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화석학적 증거의 오류입니다. 창조론을 강의하시는 분들 중에는 공룡발자국과 인간발자국이 동시에 찍힌 화석 사진을 들고 진화론을 반박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미국 텍사스의 파룩시 강가에서 발견된 화석입니다. 만약 이 사진이 사실이라면 그날로 진화론은 끝납니다. 공룡은 6,500만 년 전인 중생대에 출현했고 인간과 닮은 영장류는 약 3백만 년 전인 신생대 후반에 출현했습니다. 그러니 이들이 동시에 존재했던 것으로 인정되면 이는 진화론을 결정적으로 깨버리는 발견이 될 것입니다. 제가 대학시절에 이 사진을 보고는 너무 흥분해서 그때 제가 발행하던 <대학기독신문>에 이 사진을 실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밝혀진 사실은 이 화석은 조작된 화석이었습니다. 1929년 대공황기에 그 지역 사람들이 상업적 목적으로 사람 발자국을 새겨 넣었다고 합니다. 실제 보면 오래된 화석 치고는 발가락 모양까지 지나치게 뚜렷한 화석이었습니다. 이 화석에 관한한 미국에서는 더 이상 과학적 논란은 없어졌지만 우리 한국교회에서는 여전히 진화론을 반박하는 근거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단적인 하나의 예이지만 창조론을 주장하시는 분들은 과학적 증거가 빈약합니다. 과학이라는 학문 영역에서 검증을 받지 못하고 있고 이 때문에 번번이 법정에서 패소하고 만 것입니다.
진화론의 한계
그렇다면 진화론만으로 우주와 모든 생명체의 탄생의 신비를 풀 수 있느냐? 아닙니다. 저는 이 진화론에 두 가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진화론이 진화를 근거로 신을 부정하려는 태도입니다. 생물은 우연하게 유기물질이 생기고, 이것이 어떻게 해서 생명체를 이루고, 그 생명체들이 자연도태 과정을 통하여 고등생물로 진화했기 때문에 결국 신은 없다는 결론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과학의 한계를 넘어서는 교만한 주장입니다. 과학 이론이 갑자기 신앙적 주장으로 비약한 것이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지층에서 다양한 자동차가 발견이 되었다고 합시다. 가장 오래된 지층에서 마차가 발견되고, 그 다음 지층에서 페달을 이용한 자동차가 발견되고, 다음은 증기로 가는 자동차, 그 다음은 가솔린으로 가는 자동차가 발견이 되었다고 해 봅시다. 이것을 쭉 나열해 놓고 자동차의 발달 과정을 연구하는 것은 과학의 영역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나가 자동차는 스스로 진화했기에 자동차를 만든 사람은 없다고 결론을 내리면 여기부터는 과학이 아닙니다. 자동차가 어떻게 스스로 만들어집니까?
두 번째는 진화론은 생명의 힘을 무시합니다. 진화는 오직 우연과 자연도태에 의해서 그렇게 된 것이지 다른 힘에 대해서는 외면합니다. 저는 모기 한 마리만 보아도 신기합니다. 그 작은 것이 날아다니는 것도 신기하고 정확히 빨대를 꽂아 피를 뽑아 먹는 것도 신기합니다. 아무리 인간 과학이 발달된다 할지라도 모기 한 마리 만들어내지 못할 것입니다. 저는 이 손가락만 보아도 신기합니다. 어떻게 이것이 정확하고 빠르게 컴퓨터 자판을 치고 예술 작품을 만들어내는지 신기하기만 합니다. 우리 인체는 또한 얼마나 정밀합니까? 심장이 100년 동안 손상 없이 뛰는 것도 신기합니다. 컴퓨터는 얼마나 정교하고 얼마나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것을 만든 것이 인간입니다.
자연은 가만 놔두면 무질서하고 폐허가 되는 방향으로 가지 정교해지지는 않습니다. 방은 그대로 놔두면 더 어지러워 질 뿐이지 바람이 샐 수 없이 불어서 어느 날 갑자기 깨끗이 정돈되지는 않습니다. 누가 그 방을 청소하기 전에는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진화가 그렇습니다. 자꾸 정교해지는 방향으로 진화가 이루어집니다. 어떤 분들은 인간이 탄생할 확률을 어느 날 먼지가 불어 점보제트기가 만들어질 확률에 비유합니다. 아무리 바람이 분다고 하여 이런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금강산에 가면 만물상이란 곳이 있어 만물의 형체가 유사한 바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확히 호랑이 형상을 하거나 인간의 형상을 한 것은 지구상 어느 곳에도 없습니다. 누가 조각하지 않는 이상 바람만 불어서는 정교한 조각이 나올 수 없습니다. 진화론은 이 생명의 힘에 대해서 좀더 경탄을 해야 할 것입니다. 생명체를 발전시키는 힘은 그 위에 부는 하나님의 바람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섭리의 힘이 생물계를 진화시키는 방향으로 인도해 오신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창조의 섭리
저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말씀을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창조했지만 그 창조의 방식에 대해서는 우리가 정확히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 27절과 2장 7절을 비교하면서 보십시오. 오늘 본문을 읽다보면 마치 하나님이 두 번에 걸쳐서 인간을 창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1장 27절은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 하여 인간을 말씀으로, 그것도 남자와 여자를 동시에 만든 것처럼 말씀합니다. 그런데 2장 7절은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하여 먼저 흙을 빚어 사람을 만들고 그 후에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인간을 만드셨다고 합니다. 하와는 한참 후에 아담의 갈빗대에서 탄생합니다.
왜 이렇게 다를까요? 저는 이것을 이렇게 설명하고 싶습니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의 설계도이고, 2장은 구체적인 실행과정입니다. 설계도와 건축현장은 다릅니다. 멋진 청사진이 나왔지만 그 청사진대로 건물이 서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고 지저분하거나 불완전한 과정을 거쳐서 완성에 이릅니다. 그렇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서는 설계도 대로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유능한 화가에게서 보다 중요한 것은 머릿속에 그려지는 그림이고, 그림이 떠오르면 작품은 그대로 만들어지게 됩니다. 인간이 탄생하는 과정은 위대한 조각가인 하나님의 손에서 처음에는 돌덩이에서, 다음은 어렴풋한 형체로, 그 다음은 보다 뚜렷하게, 그리고는 마침내 위대한 작품이 탄생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진화론과 창조론이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하나님의 창조가 진화론적인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졌다고 하면 우리의 신앙에서 위배됩니까?
성경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은 인내와 과정의 하나님입니다. 마음속에 계획을 가지고 계실지라도 성숙되기까지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열매를 맺기까지는 씨앗이 뿌려져 그것에서 싹이 나고 줄기가 자라고 꽃이 피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비바람과 뜨거운 태양을 견뎌야 합니다. 그것처럼 하나님은 우주가 처음 창조되던 때 그 가득했던 뜨거운 열기가 식기까지 기다리셨고, 알맞은 자연환경이 되어 그 대지로부터 생명체가 나오고, 결국 그 생명체에서 인간이 나오기까지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시계는 천천히 돌아가지만 확실합니다. 때가 되면 그 말씀대로 이루어 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도 그렇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을 흔히 ‘원시복음’이라고 부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이 말씀은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직후 하나님께서 주셨던 말씀입니다. 뱀은 사단을 상징하고 여자의 후손은 구원자를 상징합니다. 구원자가 올 때 사단은 그의 발꿈치를 물 것이지만 구원자는 사단의 권세를 파해 버릴 것이라는 인류 구원의 약속입니다. 이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성취 되었습니다. 사단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음에 이르도록 하였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구원하시고 부활하심으로 사망 권세를 파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구원의 약속을 에덴 동산을 떠날 때 주셨지만 그 약속은 근 4천 년 후에야 이루어졌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의 약속을 받았지만 그 땅을 받기까지는 4백여 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AD 70년에 완전히 망했지만 근 1900년이 지난 1948년에 그 땅을 다시 찾았습니다. 초대교회부터 신앙인들은 종말을 기다려왔고 지금도 경건한 신앙인들은 우주의 종말과 심판이 있음을 믿고 기다리고 있지만 아직 오지 않았고 언제 올 지도 모릅니다. 성경에서 증언하는 바는 하나님은 때를 기다리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우주를 심판할 충분한 이유가 있고 때가 되기까지 인내하십니다. 우리는 그 때가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반드시 올 것을 믿고 기다립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창18:10)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약속은 어떻게 실현이 되었습니까?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아들이 뚝 떨어졌습니까? 아닙니다. 남녀가 동침을 해야 하고 수정이 되어 열 달을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런 방식으로 성취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창조의 말씀이 진화의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이 전혀 신앙에 위배되는 생각입니까? 창세기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주 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이고 그 창조에는 또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창조의 실제적인 과정은 성경이 아니라 과학이 밝혀내야 할 부분이고 양자는 이렇게 서로 만날 수 있습니다.
가톨릭은 원래는 진화론을 비판했습니다. 1950년대까지 가톨릭의 교황 비오 12세는 ‘인간탄생’이라는 교서에서 진화론은 “몰염치하고 분별력이 없으며 자연과학계에서도 증명이 되지 않은데다 공산주의자들이 즐겁게 이를 수용하는 이론”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진화론과 창조론의 갈등이 계속 되면서 가톨릭은 진화론에 대해서 신중한 조사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1996년 요한 바오로 2세는 ‘계시와 진화’라는 메시지에서 진화론을 수용하기에 이릅니다. “종교교육과 진화론 사이에는 아무런 대립도 없고 진화론은 가설 이상의 중요한 학설”이며, “이미 있던 존재(유인원)에 하느님이 생기를 불어넣어 아담이 탄생했으며, 진화론은 지동설처럼 언젠가는 정설로 인정받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가톨릭은 교리에서 매우 보수적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낙태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그런 가톨릭에서도 진화론과 창조론에 갈등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유럽의 기독교 또한 많은 부분 진화론과 창조론의 조화를 모색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까지 과학과 신앙의 갈등을 겪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숨결과 인간의 존엄성
시편 139편에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기우지 못하였나이다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시139:15-16)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빚으셨다고 말씀하십니까? 은밀한 데서, 또 땅 속 깊은 곳에서 지으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언제 아셨다고 합니까?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내 인생이 시작되기도 전에 아셨고 주의 책에 기록되어 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수정란 상태에 있을 때부터 아셨습니다. 아니 그 전부터, 우리라는 존재를 상상할 수 없는 그 아득한 시간의 때부터 우리를 알고 계셨습니다. 위대한 작가의 머릿속에 우리 인간이 존재했고 그 작가는 인간을 만들어내기 위해 오랜 세월 좋은 재료를 찾아 헤매었고 정성들여 깎아 결국 인간이라는 작품이 탄생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만약 인간이 원숭이로부터 나왔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을 부정하는 것입니까? 인간의 조상이 원숭이라고 한다면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일입니까? 진화론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에는 성경의 권위에 대한 문제 외에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기에 다른 생명체와는 달라야 한다는 그릇된 교만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인간 탄생의 과정에서 저는 두 가지 것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첫째, 인간이 자연 만물 앞에 겸손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6일째 제일 마지막에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이는 뒤집어 보면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는 우주 창조의 제일 막내라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기나긴 우주 역사를 대략 200억 년 쯤 잡고 그것을 1년으로 환산해서 계산해 봅시다. 그러면 지구의 탄생은 9월 9일이고, 공룡의 출현은 12월 24일입니다. 인간의 탄생은 12월 31일 밤 10시 30분입니다. 1시간 30분전 가장 막내로 태어난 인간이 마치 지구의 주인인 것처럼 권세를 부린다는 것은 매우 교만한 일입니다. 핵무기로 지구를 위협하고 산업화와 환경파괴로 지구의 온도를 높이는 일은 오랜 지구와 그 생명체 앞에서 경솔한 짓들입니다. 모든 만물은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창조되었고, 우리 또한 그 피조물 중 하나입니다. 우리를 만들기 앞서 수많은 생명체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감사를 배워야 할 것이며 어떤 생명체든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두 번째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인간 존엄성의 근거입니다. 인간의 존엄성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머리를 써서 도구를 만들 줄 알고 언어를 이용할 줄 아는 그 능력에 있습니까? 사유하고 반성하는 자유 의식을 가진 존재라는 데 있습니까? 아닙니다. 인간의 존엄하고, 다른 피조물보다 더 뛰어난 것은 그의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생기가 그 위에 부어졌다는 데 있습니다.
미켈란젤로가 로마의 시스틴 성당 천장에 천지창조라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중 ‘아담의 창조’는 매우 유명한 작품입니다. 완성된 아담이 한 손을 뻗고 있고 하늘에서는 하나님이 다른 한 손을 뻗어 서로 터치하는 모습입니다. 미켈란젤로는 인간의 의미를 정확하게 포착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인간됨과 존엄함은 그의 멋진 몸매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손과 맞닿는 순간 일어났습니다. 인간의 위대함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그 관계성에서부터 나옵니다.
루터는 ‘밖으로부터 온 의’ 또는 ‘낯선 존엄성’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존엄성이 그 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우리가 가진 의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마치 창녀와 같고 시골 처녀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왕으로부터 간택을 받았습니다. 갑자기 신분이 바뀌었습니다. 이것은 내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왕과의 관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다른 동물이나 우주보다 인간이 존엄한 까닭은 하나님이 특별히 아시고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시편 8편에서는 인간의 위대함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시8:4-5)
하나님의 사랑을 떠나서 인간의 의미나 존엄성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그 존엄성이 만약 우리 능력으로 된 것이라면 우리는 영화 <혹성탈출>에서 보듯이 우리의 경쟁자인 원숭이와 끊임없이 경쟁해야 하거나, 아니면 영화 <매트릭스>에서 보듯이 미래 사회에 출현할지도 모르는 기계군단들과 경쟁할 수밖에 없는 불안한 처지로 몰릴 것입니다. 인간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능력으로 존엄함을 따진다면 경쟁에서 도태된 사람들은 진화의 쓰레기 취급을 받아도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존엄성의 근거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것이기에 그가 가난한 자이든 부자이든, 그가 장애인이든 건강한 사람이든, 그가 어린아이이든 현자이든 다 존엄합니다.
인간의 존엄함을 과학이 가져다 줄 수 없습니다. 내 삶의 의미를 과학이 부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생기가 우리 위에 불어오는 순간 인간은 비로소 존엄하고 의미 있는 인간이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생기는 성령의 바람으로 불어오고 있습니다. 늘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함으로 존엄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
창 1장 26~28절, 고전 10:31~11:1 / 이성희목사
희극 배우인 찰리 채플린이 한번은 길을 지나가다가 ‘찰리 채플린 모방 대회’를 하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참가자들이 모두 훌륭히 자신의 흉내를 내고 있었습니다. 대회의 참가자들이 모두 채플린과 같이 분장을 하고 있었기에 누가 진짜인지 알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채플린은 호기심에 자신도 신청하여 자신의 연기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채플린이 채플린 모방 대회에서 결과는 3등을 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모창가수도 있고 다른 사람을 모방하여 먹고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소위 짱이 되기 위해서는 모창 정도는 해야 한다고 합디다. 남을 완벽하게 모방하는 것은 자신을 잃어야 가능할 것입니다. 사람들의 모방은 닮아가는 과정입니다. 모방하면 닮습니다. 채플린을 모방하는 사람들이 채플린보다 더 채플린 같아진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지속적으로 모방하면 닮습니다. 예수님보다 더 예수님 같아진다는 말은 잘못된 말이지만 우리가 사람으로서 예수님을 꼭 빼어 닮는다면 사람이기에 더 돋보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우리가 어제 내렸던 선택의 결과입니다. 내일은 오늘 우리가 선택한 결과가 될 것입니다. 내가 오늘 무엇을 선택하느냐 하는 것은 내일의 나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고, 따르고, 본 받으면 내일은 닮아 있을 것입니다.
알리스터 맥그래스(Alister McGrath)의 ‘예수님을 경험하는 영성훈련’(Knowing Christ)이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저자는 아주 복음적이고 훌륭한 학자입니다. 이 분이 원래 옥스퍼드에서 생화학을 공부한 분인데 독특한 과학적 관찰로 신학을 해석하는 부분들이 나옵니다. 그는 페니실린의 효능을 말하면서 어릴 때 페니실린을 맞은 경험을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페니실린에 대하여 알고 있었던 것과 페니실린의 실제 작용은 어쩌면 아무런 관계가 없는지 모른다”. 페니실린의 효능을 모르지만 맞으면 낫는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그 약의 효능을 전부 알고 복용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보면 그리스도의 닮은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중의 한 사람이 로렌스 형제라고 알려져 있는 니콜라스 헤르만입니다. 이 사람은 수도원에서 평생을 지냈습니다. 특히 수도원의 부엌에서 일을 하였기에 부엌의 성자라고 합니다. 이 분에게 다른 존칭이 없이 “형제”라고 부르는 것은 이 분이 성직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분은 사제도 수사도 아니었습니다. 이 분은 평신도였습니다. 이 분은 신학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 가운데 가장 하나님의 임재를 많이 체험하며 산 사람입니다. 이 분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예수님을 닮게 산 것은 신학적 지식 때문이 아닙니다. 지성적 앎 때문이 아닙니다. 이성적 판단 때문이 아닙니다.
진젠돌프는 말했습니다. “더 만족스럽고 오래 가는 것은 지식적 앎이 아니라 관계적 앎이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도 관계적 앎입니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아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머리로 알 때에 타인을 저주했습니다. 사나워져 있었습니다. 가슴으로 알고, 관계로 알 때에 자기를 저주했습니다. 겸손해져 있었습니다. 바울도 그랬습니다. 머리로 하나님을 알 때에는 죽이고, 잡아가고, 저주하고, 사나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슴으로 알 때에 살리고, 용서하고, 부드러워졌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닮아가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어떤 이가 얘기한 대로 “머리에서 가슴 가는 길이야말로 우리가 아는 가장 멀고 힘겨운 길 중에 하나일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을 닮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처럼 될 수 있겠습니까? 나 같은 죄인이 감히 예수님을 닮을 수 있겠습니까? 이건 겸손 같지만 사실은 겸손이 아니라 불신앙입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바울도 우리보다 잘난 것이 없는 범인입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린도전서 11:1에서 당당하게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푸아티에의 힐러리는 말했습니다. “우리는 할 수 없는 것을 시도하고 도달할 수 없는 곳을 오르며, 감히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감히 바라볼 수 없는 예수님, 감히 갈 수 없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러나 모방하면 닮아갑니다. 그리고 우리는 반드시 그 분을 닮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무엇을 닮아야 할까요?
첫째, 외모가 닮아가야 합니다.
외모는 사람들이 제일 먼저 판단 받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외모는 그래서 참 중요합니다. 중요하기에 우리의 외모가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남성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기에 우선 여성들은 외모를 닮기에 틀렸습니다. 여성이 남성의 외모를 닮아도 큰일입니다. 그런데 남성이라도 외모로는 너무나 다릅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유대인을 닮는다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이태 전에 영국 맨체스터대학교의 리처드 니브라는 법의학교수는 첨단기술로 예수님의 얼굴을 복원하였습니다. 1세기의 팔레스타인인의 모습을 재현한 것입니다. 저는 그 이미지를 보고 상당히 놀랐습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던 곱상하고 순한 인상에 긴 머리카락이 아니었습니다. 아주 사납게 생긴 팔레스타인의 테러리스트 같은 인상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편견일 것입니다. 그 동안 서양인들이 그려놓은 예수님의 상이 예수님이라고 생각하던 외모에 대한 편견입니다. 그런 외모를 우리는 닮을 수가 없습니다.
최근 멜 깁슨이 만든 영화 ‘수난’(The Passion of Christ)이 미국에서 엄청난 흥행에 재미를 보고 있습니다. 제작비가 2,500만 달러가 들었는데 개봉 첫날 2,360만 달러를 벌었습니다. 개봉 첫 주에 제작비의 4배가 넘는 흥행 수입을 올렸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4월 2일에 개봉을 한다고 합니다. 이 영화를 통하여 많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영화에 짐 카비젤이란 배우가 예수 그리스도 역을 맡았습니다. 아마 예수님은 그런 콧날이 오뚝한 미남이었다고 보지도 않습니다.
이사야 53:2에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 예수님의 모습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예수님은 요즘 말로 터프 가이가 아닙니다. 요즘 아이들이 좋아하는 꽃 미남도 아닙니다. 얼짱도 아니고 몸짱도 아닙니다. 외모로는 좋아할 만한 아무 것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아브라함 때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이 때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요한복음 8:57에는 말합니다. “네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30대 청년 예수님께 “오십도 못되었는데”라고 합니다. 정말 잠 안 올 말입니다. 혹시 누가 저를 보고 “은퇴 언제 합니까?”라고 한다면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그만큼 예수님은 젊었지만 아주 늙어보였습니다.
외모는 참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처럼 고운 모양도 풍채도 없지만 나의 외모에 당당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정상 여성들 가운데 70%가 자신이 비만이라고 생각한답니다. 그리고 비만 남성들 가운데 70%가 자신이 정상이라고 생각한답니다.
아시아권 여성들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하였습니다. 일본, 대만, 홍콩, 싱가포르 등이 참여하였습니다. 다른 나라 여성들은 50%가 자신의 외모 만족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여성 78.7%가 자신의 외모에 만족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아시아에서 우리나라 여성이 제일 못 생긴 모양입니다.
예수님의 외모를 닮자는 것은 예수님의 외형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그의 얼굴에 나타난 모습입니다. 인자하고 권세 있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잘 생긴 얼굴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의 모습에 놀랐습니다. 어린양처럼 약해보이고 백합화처럼 부드럽게 보이지만 예수님의 모습에는 권세가 있었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외모를 우리가 닮아야 합니다.
둘째, 내면이 닮아가야 합니다.
내면은 그의 마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아야 합니다. 빌립보서 2:5에는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합니다. 우리가 품어야 할 마음이 어떤 마음입니까?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졌고, 사람같이 되었고,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마음입니다.
예수님을 닮은 삶은 끊임없이 자기를 비우고, 종이 되고, 낮추고, 복종해야 합니다. 비움과 낮춤의 연습을 통하여 예수님의 내면을 닮아갈 수 있습니다.
창세기 1:26에는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공동번역에는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 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닮은 사람은 하나님의 내면을 닮은 사람입니다. 닮은 모습은 내면이라는 말입니다.
위선자는 의의 도를 갈망하기보다 오히려 의의 면류관을 갈망합니다. 그의 욕구는 그리스도를 닮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의 내면을 닮는 데는 관심이 없습니다. 단지 예수님의 권세에 관심을 가집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빌어 자신의 욕구를 채웁니다.
아인슈타인은 늘 꾸밈없는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항상 헝클어진 머리를 가지고 있었고 주름이 없고 무릎이 튀어나온 바지를 입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외부에서 저녁식사를 하기위하여 좀 깔끔하게 옷을 입으라고 하자 “왜 그래야지? 편하게 입고 있어도 다들 나를 알아보는데”라고 하였습니다. 또 한번은 국제회의에 참석하게 되어 정장을 입어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는 “왜 그래야지? 그러면 사람들이 날 못 알아볼 텐데”라고 하였습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이 그를 백악관에 초대하였을 때에도 그는 평상시와 같이 양말도 안 신고 갔다고 합니다. 그를 기억하는 것은 그의 외모가 아니라 상대성 원리입니다. 그의 내면입니다. 그의 실력입니다. 그가 상대성 원리를 연구하는 동안에도 종종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하여 물리학, 철학, 문학에 관해 토론을 하였다고 합니다. 존경하는 사람들을 닮아가려고 하는 그의 노력이었습니다. 훌륭한 사람들을 그의 역할 모델로 삼은 것입니다.
얼마 전 후나이 유키오라는 분이 쓴 ‘셀프 매니지먼트’라는 책을 보았습니다. 이 책에는 재미있고 유용한 글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자는 “겉모습은 그럴 듯하지만 알고 보면 형편없는 사람이 아니라 알고 보니 대단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말입니다. 알고 보면 대단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내면이 알차야 합니다. 내면이 그리스도를 닮으면 대단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외형에 비하여 내면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의 말에는 권세가 있었습니다. 간음 현장에서 여인을 잡아 와서 돌로 치려고 하던 사람들도 예수님의 몇 마디 말씀에 위압되어 다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런 내면의 권세, 영적 권위를 우리가 다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 삶의 결과가 닮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삶은 철저하게 용서하고, 대신 죽고, 죽은 후에 다시 사는 영원히 삶이었습니다. 찬송 158장 후렴을 들어보세요. “생전에 사랑, 죽어서 구원, 묻혀서 내 죄를 담당하시고, 부활로 우리를 구하신 예수 다시 오시리 영광의 그 날”.
예수님은 생전에도 할 일 있고, 죽어도 할 일이 있고, 묻혀도 할 일이 있고, 부활해도 할 일이 있고, 승천하시고 재림하셔도 할 일이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이 그리스도로서 할 일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살아도 할 일이 있고, 죽어도 할 일이 있고, 묻혀도 할 일이 있고,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가 부활해서도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빌립보서 3:10-11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며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바울이 본받으려고 하는 것은 삶만이 아닙니다. 죽음까지입니다. 죽는 것까지 닮아가려고 하는 바울입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닮고자 한 것은 예수님의 어느 한 부분이 아니라 전 삶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남을 살리는 삶입니다. 남을 용서하고 내가 죽고 남이 사는 삶입니다. 용서는 예수님이 하신 가장 큰 일입니다. 용서는 우리가 해야 할 가장 큰 일입니다. 어떤 필리핀 소녀가 자신이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을 듣고 교회가 술렁대기 시작하였습니다. 마닐라의 주교 몬시뇨르가 듣고 걱정이 되었습니다. 카톨릭 교회가 승인하지 않은 살아 있는 성자를 용인할 수 없었습니다. 세 번째 이 소녀와의 면담이 끝나자 주교는 이 소녀의 말이 사실인지 검사해보자고 하였습니다. “네가 다음번에 예수님과 대화를 나눌 때, 내가 지난번 고해성사에서 무엇을 고백했는지 그분께 물어봐 주었으면 한다” 그리고 그 다음에 소녀와 주교는 다시 만났습니다. 주교는 소녀에게 “그래, 네가 예수님을 만나 내가 무슨 고해성사를 했는지 여쭤보았느냐?” 그러자 소녀는 주교에게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잊어버렸다고 하신던데요”. 예수님의 마음을 잘 대변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꼭 닮아야 할 이야기입니다.
결론
맥스 루케이도가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십니다. 그렇지만 우리를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그 분은 우리가 예수님처럼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모습을 사랑하시지만 우리의 모습에 만족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토마스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란 책을 아시지요? 원래 이 책의 제목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세상을 멸시함”입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려면 세상은 멸시해야 합니다. 세상을 사랑하면 세상을 닮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면서 예수님을 닮아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 교회의 조인찬집사님은 황반변성이란 희귀병이 있습니다. 시신경이 집중되어 있는 망막의 중심부인 황반에 상하여 시력을 잃은 것입니다. 그런데 시력을 잃어도 당당하고 오히려 이전보다 더 은혜를 받아 감사하기 그지없습니다. 3월 30일에는 KBS 1텔레비전의 “생로병사의 비밀”에 집사님이 나와서 눈에 대하여 얘기한답니다. 그 날 모두들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일전에 조집사님께서 시각장애인의 어려움을 얘기하면서 두 가지를 특별히 얘기하였습니다. 첫째는 횡단보도에서 인도로 오르는 길에 자동차가 올라오지 못하게 무릎정도의 기둥을 만들어두는데 이것이 큰 걸림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걸리면 바로 촛대뼈라고 하는 경골에 닿아 굉장히 아픈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시각장애인들이 지팡이를 짚고 가는데 어깨로 가는 방향을 잡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지나가다가 어깨를 치면 금방 방향을 잃어버립니다. 그 다음부터는 엉뚱한 방향으로 가다가 남의 가게도 들어가고, 담장에도 부딪치기도 합니다. 그래서 시각장애인들의 어깨는 절대로 건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방향은 자세에 달렸습니다. 자세는 곧 방향입니다. 자세가 바르게 돼야 방향이 바르고 닮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도 삶의 자세에 달렸습니다. 그래야 삶의 방향이 바르게 됩니다. 그리고 그 방향이 우리로 예수님을 닮아가게 만듭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는 그리스도를 닮는 비결인 것입니다.
창세기 33장에는 야곱과 에서가 만나는 장면이 그림같이 나옵니다. 야곱은 자기 형 에서를 속이고 멀리 삼촌의 집에 가서 재산을 모으고 네 아내를 거느리고 열두 아들과 딸을 데리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형을 만날 일이 꿈만 같습니다. 형이 아직 화가 풀어지지 않았으면 어떻게 하나하는 걱정이 태산입니다. 그는 형을 만날 때 “내가 형님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창 33:10)라고 합니다. 이 말에는 야곱에 형에게 아부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오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같이 보인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에 “당신을 보니 예수님의 얼굴을 보는 것 같습니다”라고 할 수 있는 예수님을 닮은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
창 1장 26~28절 / 이명식목사
요즘은 과학이 고도로 발달하여 질병치료를 위해 인공장기도 만들어 낼 수 있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며칠 전에는 전 세계 과학계를 깜짝 놀라게 한 인간복제에 대한 획기적인 업적을 한국의 서울대학교 교수팀이 이루어 내어 인간복제와 불치병 치료에 대한 기대를 한껏 부풀리고 있습니다. 마치 과학의 힘으로 이 세상을 천국처럼 만들 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한 편에서는 생명에 대한 경외심과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기도 합니다.
과학의 힘으로는 근본적으로 인간을 행복하게 할 수 없습니다. 또 과학이 인간의 존엄성을 말해주지도 못합니다. 지난 세계에 비해서 과학이 고도로 발달한 지금 이 세계가 더 행복하다거나, 인간의 존엄성이 다 확고해 졌다는 증거를 아무도 찾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종교나 철학의 사상 역시 인간의 행복과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답을 주지 못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생명이란 사람이나 짐승이나 벌레나 다 똑같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생명은 윤회하는 것이고 언제든 다른 생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자연과의 합일을 말하는 동양사상 역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물음에 답을 주지는 못합니다. 동양사상은 사람들로 하여금 운명론과 우상숭배에 빠져들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역술인들도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답을 주지 못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사주팔자 라든지 ‘그 사람이 무슨 띠’인간라고 묻는 것은 알고 보면 인간을 다 동물의 차원에서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의 물음에 대해 성경만큼 명확하게 답을 주는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사람이 우연히 단세포 생물인 아메바에서 진화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짐승의 생명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단어는 인간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명쾌한 답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돈을 얼마나 많이 소유했느냐, 어느 정도 지식이 있는가, 어느 정도 배경이 좋은가에 관계없이 너무 귀한 존재들입니다. 나이가 들어 몸은 늙어도 여전히 귀중한 존재입니다. 육신적인 장애가 있을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귀한 존재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적어도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인간의 가치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인간은 동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고귀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숨결을 불어넣으시고 하나님의 형상을 주셨습니다.
세상에서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너무나 소중한 작품인 나라는 존재, 그래서 나를 기대하고 내 삶 속에 간섭하시는 하나님은 내가 죄 가운데 있을 때 나를 그대로 버려 둘 수가 없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나를 구원하셨습니다. 사람의 생명이 어느 정도 귀합니까? 십자가에서 당신의 아들을 죽이면서 사람을 구해낼 정도로 사람의 생명은 귀중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의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했다는 것은 두 번째 중요한 의미는 인간 창조에 있는 생명원리를 설명하기 위해 섭니다. 사람은 육체로만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동물은 먹을 것, 잠잘 곳이 있으면 행복하게 삽니다. 그러나 사람은 먹는 것, 잠자는 것으로 행복을 느끼지 못합니다. 사람은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짐승을 만드시고 저마다에게 날카로운 발톱이나 스피드, 뛰어난 힘을 주었습니다. 그것으로 살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아무리 작은 곤충이라도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보호기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할 때 날카로운 발톱을 주지 않았습니다. 스피드나 힘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것으로 살게 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또 그런 것이 있다고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을 때 비로소 행복을 누리도록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 못 만나고 힘만 있으면 불행해집니다. 하나님 만나지 못하고 배부르고 돈 많이 버는 것이 문제입니다.
성경적으로 보면 인간의 가장 큰 불행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 때부터 모든 문제가 다 온 것입니다. 오늘날 참으로 사람들이 삶의 가치와 행복을 원한다면 하나님의 형상을 먼저 회복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 목적으로 다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인간 창조를 어떻게 말합니까?
1. 하나님은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인간을 아무렇게나 창조하지 않고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창조하셨습니다. 본문 26절을 보십시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라 하시고”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존재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 분명한 존재이유, 분명한 계획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들의 생은 우연히 생겼거나 아무렇게나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모르는 인생은 결국 실패하고 말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들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하셨습니까?
2.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창 2장에서는 1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단어 대신 다른 단어를 사용합니다. 창2:4-7에 의하면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 흙으로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었습니다. 그러자 사람이 생령(living soul)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생령이라는 단어는 1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다른 표현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생기가 그 안에 있는 존재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대로’ 라는 말은 인간의 육체가 하나님을 닮았다는 말이 아니라, 사람이 영적인 존재로 그리고 하나님의 성품을 가진 존재로 지음 받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진정한 가치는 그 육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영혼에 있습니다. 흙으로 빚어졌지만 흙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의 진정한 가치는 영혼에 있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요즘 우리 시대의 비극은 사람들이 점점 육체화 되어가는 것입니다. 요즘 시대적인 흐름은 몸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입니다. 얼짱이니, 몸짱이니 하는 것에 너무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영혼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몸의 건강에는 관심이 있는데 영혼의 건강에 대해 사람들이 무지합니다. 외모를 아름답게 꾸미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면서 정작 소중한 영혼의 채움과 내적 기쁨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도 바로 이것에 실패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영적인 부분을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선악과 하나 따먹는 것이 무슨 대수냐? 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온 땅에 저주가 왔습니다. 노아시대의 사람들이 왜 심판을 받았습니까? 창6:3에 보면 단적인 평가가 나옵니다. 곧 ‘사람이 육체가 되었다’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에 빠져있습니다. 그래서 망한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사단이 예수님에게 시험하는 첫 번째 시험도 이 문제였습니다. “돌로 떡을 만들어 먹어라” 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실패합니까? 바로 불신자와 똑같은 육신적인 욕구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먹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 영적인 부분, 영성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배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기도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 우선적이 되기를 바랍니다. 매주 드리는 예배라고 다른 일보다 덜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혹시 이사를 하려거든 기준 자체를 육신에 두지 말고 영적인 삶에 두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가 멀다고 말합니다. 아닙니다. 교회가 먼 것이 아니고 우리 집이 먼 것입니다. 성도의 삶의 기준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선적이어야 합니다.
3. 하나님이 주신 축복과 권세를 회복해야 합니다.
인간의 존엄성과 삶의 가치를 회복하려면 세 번째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축복과 권세를 회복해야 합니다. 28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 속에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다섯 가지 축복(권세)이 있습니다. 생육하라,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처음 세 가지는 동물에게도 똑같이 준 것입니다. 나중 2가지는 오직 사람에게만 주신 것입니다. 또 처음 세 가지,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한 것은 자연원리입니다. 그러나 나중 두 가지, 땅을 정복하는 것,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것은 초자연적인 원리입니다. 사람들은 동물의 차원에서만 살 수도 있습니다. 먹고 마시고, 자식 낳고 사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들은 초자연적인 원리인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 속에 살아야 합니다.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것은 온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일을 사람들에게 맡겼습니다. 영어성경에서는 ‘다스리다’라는 단어를 ‘dominion'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 단어는 domini라는 라틴어에서 왔습니다. domini는 주인이라는 말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세상을 관리하도록 위임받은 사람입니다. 다스리는 위치에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연을 숭배하는 것은 주인의 위치가 아닙니다. 자연을 마음대로 훼손하고 오염시키는 것도 주인의 마음은 아닙니다.
그런데 자연을 다스려야 할 사람들이 다스림을 받아야 하는 자연에게 오히려 무릎을 꿇고 있습니다. 우리는 돈을 다스리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돈을 숭배합니다. 돈의 지배를 받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주인의 위치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나무는 다스릴 대상이지 섬김의 대상은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나무를 보면 절하고 큰 돌만 보아도 절하고 태양이나 달을 보고 절합니다. 사람들이 달에게 자기의 소원을 빕니다. 아들을 낳아달라고 빌고, 부자 되게 해달라고 빕니다. 악한 사단은 사람들이 누구를 경배해야 하고 무엇을 다스려야 하는지 그 대상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우리는 잃어버린 하나님의 대리자, 주인의 위치를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생명을 회복할 수 있습니까? 태초에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떠나 그 영이 죽은 사람들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다시 들어와야 합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고 사단을 꺾었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고전15:45에 보면 놀라운 말씀이 나옵니다. 맨 처음 사람 아담은 산영(living soul)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창조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떠나자 그 영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에서 부활하여 살려주는 영(life-giving spirit)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만나야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면 그 분은 지금 성령으로 우리 안에 들어오십니다. 그것을 구원받았다고 말합니다. 요1:12에서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생명으로 영접하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1)엘로힘(Elohim)
창 1장 26~28절 / 이동원목사
도장 새기는 집에 한 손님이 왔다고 합니다. “도장 하나 새기는데 얼마입니까?” “예, 천원입니다.”/“한자나 한글이나 값이 같습니까?” “예, 같습니다.”/“이름자가 길건 짧건 값이 같습니까?” “아, 물론이죠”/이 말을 듣자 손님이 도장에 새길 이름을 내 놓았다고 합니다. 한 참을 들여다 본 도장집 주인이 묻습니다./“어느 것이 이름입니까?” “그게 다 이름인데요?”/“이게 한 사람 이름입니까?” “그렇다니까요?”/“아니 선생님, 이런 긴 이름이 어디 있습니까?” “있습니다. 제 아들입니다.”/“선생님, 혹시 저를 놀리시는 것 아닙니까?” “놀리다니요 분명히 제 아들 이름인데요” 도장 집 주인이 계속 못 믿는 표정을 보이자 손님은 호적등본을 보여 주었다고 합니다. 도장집 주인은 입을 다물지 못하는 표정이었다고 합니다. “원, 세상에 이렇게 긴 이름이 호적에 오르다니--” 거기에 적힌 이름은 “밝 차고 나온노미 새미나”였다고 합니다. “복을 차고 나온 것을 남들이 샘낸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배우리 지음 [고운 이름 한글 이름]에 소개된 내용입니다.
현재 한국에서 제일 긴 한글 이름은 “황금 독수리 하늘을 날며 세상을 놀라게 하다”라고 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긴 이름을 가진 사람은 유명한 피카소였다는 확인하기 어려운 유머도 전해집니다. 그의 훌 네임을 들어본 일이 계십니까? “파불로-딩고-호세-프란시스코-드 파우라-호안-드로스-레메디-오스--크리스피노-드 라산티스마-트리니나드-루이즈-피카소.” 보통은 "Pablo Ruiz Picasso"라고 하지요. 피카소의 성격과 기질상 그런 이름을 가질수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름은 캐럭터 곧 성격이요 기질이요 품성입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함께 연구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다양하고 여럿입니다. 왜 성경은 하나님의 이런 다양한 이름을 소개할까요?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어떤 한 이름으로 나타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다양한 이름을 이해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총체적으로 알아가는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이 참으로 누구인가를 이해함으로 우리는 그를 진실로 의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시9:10에서“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라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첫째로 생각할 하나님의 이름은 “엘로힘”입니다. 엘로힘은 본래 “엘”(El) 혹은 “엘로아”(Eloah)의 복수형입니다. 엘이란 말의 뜻은 “강한 자‘ 혹은 ’능력있는 자”라는 뜻입니다. 엘이란 단어는 히브리어 성경에 200회가 등장하고 복수형 엘로힘은 2,500회나 등장합니다. 창세기 1장에만도 31회나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창1;1에 “태초에 하나님이--”할 때에 하나님이 바로 엘로힘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이 하나님의 이름 엘로힘을 통해 알아야 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1.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창1:1은 바로 엘로힘이 하늘과 땅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신 것을 선언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단어로 엘로힘이라는 복수형이 사용된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 엘이라 하지 않고 엘로힘이라고 했느냐는 것입니다. 성경학자들은 대체로 두 가지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창조사역에 함께 동참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엘로힘의 어미형 “im(him)"은 일반적으로 세가지 이상의 존재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창1:26에도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고 하실 때 ‘우리’라는 복수인칭 대명사가 사용된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이 천사를 동원하여 천지 창조를 하셨기 때문에 ‘우리’라고 하셨다고 주장하기도 하나 성경 어디에도 천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존재라는 말은 없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로 계시는 하나님 그러나 그 하나님의 일체적인 사역이 바로 천지 창조의 근원이라는 사실입니다. 또 하나 가능한 해석은 히브리어에서 복수형은 종종 위엄이나 초월적인 능력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매우 일관성있게 창조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의 결과임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롬1:20을 보십시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현대 과학의 발달을 말하고 있습니다만 과학은 아직도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한 부분을 터치하고 있을 뿐 창조의 대부분의 영역은 여전히 신비로 남아 있습니다. 이런 창조의 신비를 알면 알수록 느끼면 느낄수록 우리는 창조의 주님께 엎드려 그분을 찬양하고 경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일찍 신학자 칼 바르트는 예배와 과학은 동일한 동기에서 시작된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창조세계의 신비에 대한 경외심”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엘로힘 하나님께 그의 피조물인 인생이 드려야 할 최고의 반응이 있다면 바로 찬양과 경배인 것입니다. 계4:10-11에 모든 시대를 대표하는 24장로들이 천국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하며 드리는 고백을 다시 묵상해 보십시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계4:11) 왜 경배합니까? 그가 만물의 창조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왜 찬양합니까? 그가 만물의 창조자 엘로힘이시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배우는 엘로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2.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창세기 1장은 엘로힘 하나님의 창조사역가운데서도 그 절정이 인간의 창조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천지 창조의 마지막 제6일의 마지막 창조사건을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창1:26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 여기 하나님이 바로 엘로힘이십니다. 그는 강하고 능력있는 분, 전능자이십니다. 그의 초월하신 능력으로 빚으신 최고의 걸작품이 바로 하나님을 닮은 인간인 것입니다. 여러분, 도대체 인간의 존재보다 더 신비한 존재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유명한 크리스챤 의사로서 작고한 폴 브랜드는 필립 얀씨와 함께 쓴 그의 명저 ‘오묘한 육체’에서 그가 의사로서 처음 살아있는 세포를 관찰한 감동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살아있는 세포의 존재야 말로 지상의 최대의 경이중 하나가 되어야 마땅하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진정한 생명의 경이를 깨닫는다면 우리는 깨어있는 하루 종일 이 세포의 비밀을 경탄하며 말해도 부족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나는 내 생애중 누구라도 이 세포의 신비를 설명하는데 성공한다면 나는 공중 광고문을 쓰는 여러 비행기를 전세 내어 하늘 높이 나르며 내 돈이 바닥날 때까지 온 하늘에 감탄 부호를 연달아 그리게 할 것이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9개월에 걸쳐 정교한 방법으로 기능을 나누는 세포들--수십억개의 혈구가 생겨나고 수백만개의 간상체와 원추체가 생겨나는데 단 하나의 수정된 난 세포에서 10조개에 이르는 세포가 생성되고 그리고 마침내 한 아기가 인간이 태어난다. 도대체 그 무엇으로 이 신비를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우리가 할 일은 시편기자와 더불어 감격하고 감사할 일 뿐입니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신묘 막측)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시139:14) 폴 브랜드의 묘사는 주로 우리의 육체에 대한 것이지만 인간의 영혼은 또 얼마나 신비로운 것입니까?
인간의 영혼이야 말로 하나님의 인격과 품성이 깃들어 있는 존재의 지성소인 것입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엘로힘 다음으로 제일 많이 나오는 단어의 하나가 “그 종류대로”라는 말입니다. 말은 말같이, 소는 소같이, 사자는 사자같이, 원숭이는 원숭이같이 그 종류(종자)대로 지음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사람에게 오면 달라집니다. 사람은 사람같이가 아니라 사람은 하나님같이 지음 받았다는 것입니다. 엘로힘 하나님은 당신의 놀라운 능력으로 당신을 닮은 존재를 지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처럼 인격을 가진 존재, 알고 느끼고 판단할수 있는 존재, 사랑할 수 있고 창조할 수 있는 존재로 지음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의 대상이요 기대의 대상인 것입니다. 우리가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바로 이런 엘로힘 하나님의 기대를 이루어 드리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그의 기대를 이루어 드리는 인생은 그와 더불어 교제하는 데서부터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분과 교제의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면 그분의 기대를, 그분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죄를 짓고 타락함으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상실한 인생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가장 중요한 이유도 바로 이 교제의 회복을 기대하심이었던 것입니다. 고전1:9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엘로힘의 하나님은 우리의 경배를 기다릴 뿐 아니라 우리와의 교제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3. 인간을 축복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엘로힘은 하나님이 자신을 닮은 존재로 인간을 창조하신 다음 제일 먼저 하신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축복하신 일입니다. 창1:28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엘로힘 하나님은 축복의 하나님이십니다. 인생의 범죄와 타락에도 불구하고 인생을 축복하고자 하신 하나님의 의지는 변하지 않습니다. 물론 인간이 범죄할 때 하나님의 일시적인 징계와 심판은 있습니다. 예레미야 애가3:33의 말씀은 이런 하나님의 심정을 보여주시는 흥미로운 대목입니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로다” 징계가 본심이 아니고 축복이 본심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인생이 돌이킬 때마다 축복을 회복시켜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노아의 홍수 심판이 지난후 엘로힘 하나님의 첫째로 하신 일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십니까? 창9:1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축복의 사역이었습니다.
엘로힘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경배하고 그분과 교제할 뿐 아니라 그분의 축복을 누리며 그분의 축복의 통로로 쓰임받는 것을 기대하십니다. 최근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의 “긍정의 힘”의 저자이며 미국에서 가장 빨리 성장하고 있는 휴스턴 레이크 우드 교회의 목사인 조엘 오스틴은 축복을 사역화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와 그의 교회의 교우들은 축복을 서약하고 축복을 생활화하고 있습니다. 그의 교회가 축복을 사역화한 이후--설명이 가능하지 않은 놀라운 축복들을 경험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비판은 마무리 건강한 비판까지도 악한 인생의 행동을 다소 늦추거나 교정할 수는 있지만 비판만으로 인간은 변하지 않습니다. 축복은 인간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아내가 변하지 않는 이유-남편이 아내를 축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변하지 않는 이유-아내가 남편을 축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변하지 않는 이유-부모가 자녀를 축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변하지 않는 이유-자녀들이 부모를 축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축복의 기도만 하고 축복의 말만 하기로 결심해 보십시오. 우리 모두가 축복의 통로가 되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 날 것입니다.
방향만 바꾸시면 됩니다.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기로 결심해 보십시오. 그것이 회개입니다. 저주의 삶을 청산하고 축복의 하나님께로 돌이키십시오. 비난과 비판의 습관대신 칭찬과 축복의 습관으로 돌아 서십시오. 고집스런 이기심의 항해를 청산하시고 항로를 바꾸어 보십시오. 지금 모습 그대로 가겠다는 것은 마귀가 내 마음에 심어놓은 고집입니다.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배 한척이 칠흑같은 어둠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갑자기 선장의 시야에 불빛이 들어옵니다. 너무 놀라서 긴급 무전을 타전하여 상대방에게 “방향을 동쪽으로 10도만 트십시오”라고 메시지를 보냈더니 곧 답신이 돌아왔답니다. “그럴수 없소. 당신이 서쪽으로 10도만 트십시오.” 화가 난 선장은 다시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나는 해군 함장이다. 네가 항로를 변경하라” 몇초후에 다시 메시지가 들어왔습니다. “저는 이등수병이지만 그래도 제가 방향을 바꿀수는 없습니다. 함장님이 먼저 항로를 바꾸셔야 합니다.” 화가 극도로 치민 함장은 최후통첩을 보냈다고 합니다. “이 배는 전투함이다. 앞으로 전진한다” 그러자 퉁명스런 메시지가 돌아왔습니다. “정 그러시다면 마음대로 하십시오. 여기는 등대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남편, 아내, 자식에게) 회개를 요구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먼저 방향을 바꾸셔야 합니다. 하나님께로 오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이 가르치신 삶의 방식을 따라 살기 시작해 보십시오. 그때부터 우리의 인생은 엘로힘 하나님의 능력과 축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형상
창 1장 26~28절 / 이성희목사
지난 주간에 호주 코스타에 다녀왔습니다. 코스타는 외국 유학생들을 위한 집회입니다. 시드니 근교에서 있었던 이번 코스타에는 약 700명의 유학생들이 참석하여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들의 뜨거운 찬양과 기도에 오히려 제가 은혜를 많이 받고 왔습니다. 한인 디아스포라를 통하여 세계화 시대를 열어 가실 하나님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들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여러 강사들 중에는 학생들이 좋아하는 몇 가수들도 함께 갔습니다. 지누션의 션이 함께 갔었는데 학생들이 굉장히 좋아하더군요. 그 다음날에는 미국에서 유승준군이 왔었습니다. 아이들이 정말 좋아하더군요. 뜨거운 집회에 강의, 설교, 기도, 찬양 모든 것이 은혜로웠습니다. 정말 그들에게 미래를 맡겨도 되겠다 싶을 정도로 좋은 학생들이었습니다. 이들에게 지구를 맡겨도 되겠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코스타는 지금 전 세계 13개국, 15곳에서 코스타가 매년 열리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매년 3,000명 모여 집회를 하고 있습니다.
그 곳에 가서 우리 교회의 강성진 김효영 부부를 만났습니다. 두 번씩이나 먼 수양관을 찾아와서 함께 얘기도 하고 기도도 해주었습니다. 남편이 가정의 제사장이 되라고 권면해 주었습니다. 열심히 살고 있는 모습이 대견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청년인 이재진군도 만났습니다. 여러 날 동안 코스타 집회에 함께 참석하였습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고 어제 한국에 와서 아마 오늘 교회에 왔을 겁니다. 모두들 만나서 참 반가웠고 외국에 가서도 늠름하게 사는 모습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오늘은 성서주일이며 인권주일이기도 합니다. 지난 주일에는 성경에 관한 말씀을 이미 드렸습니다. 오늘은 인권주일에 초점을 맞추어 말씀을 준비하였습니다. 인간의 인권이 성경적으로 보장되는 세계가 되게 합시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고귀한 인간임을 인정하고, 생명이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호주에서 오는 비행기에서 ‘아일랜드’(The Island)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이 영화의 배경은 2019년입니다. 지금부터 14년 후의 미래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메링연구소라는 곳이 극중 배경입니다. 인간을 복제하는 제품 공장입니다. 지구 상에 생태적인 재앙이 일어나 일부만 살아남아 있습니다. 지구 종말의 생존자라 믿고 있는 링컨 6 에코와 조던 2 델타는 유토피아에서 빈틈없는 통제 속에 삽니다. 잠자리에서 일어나면서부터 몸의 상태를 점검받고, 먹는 음식과 인간관계 등 철저하게 통제를 받습니다. 그들은 오염이 안 된 희망의 땅 ‘아일랜드’에 추첨 되어 가기를 원합니다. 추첨하여 보내는 것 같지만 사실은 신체부위를 제공하고 죽임을 당합니다. 링컨은 얼마 후 모든 것이 거짓이며 자신이 복제인간인 것을 알게 됩니다. 조던이 아일랜드로 떠나게 되어 준비를 하고 있던 중 링컨과 함께 탈출을 시도합니다. 연구소를 빠져나온 링컨은 자신을 복제하게 한 진짜 링컨을 찾아갑니다. 자신을 잡으러 온 추격자들은 진짜와 복제 가운데 진짜 링컨을 죽입니다. 결국 둘은 다시 연구소로 가서 다른 복제인간을 탈출시킵니다. 영화지만 단편적으로나마 끔찍한 인간의 과학과 인류의 미래를 볼 수 있는 영화였습니다.
동물 복제가 이미 성공하였습니다. 그 다음은 인간 복제의 수순인 것이 뻔합니다. 배아줄기세포복제가 당뇨, 치매, 노화 등을 치료할 것이라고 온 인류가 기대하고 있습니다. 특히 배아줄기세포의 윤리가 화두가 된 요즘, 다시 심각하게 인간의 존엄성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절대선의 가치는 없습니다. 줄기세포복제가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인간은 과학 시술의 도구가 아닙니다. 생명은 복제할 대상이나, 상업적 제품이나, 실험 도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이고, 인간 그 자체가 존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생명이 경시되는 어떤 과학도 거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간 사랑이 어떻게 표현되었습니까? 첫째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주셨습니다. 둘째는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십니다. 셋째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고 하였습니다. 넷째는 하나님은 이 세상의 한 사람도 멸망 받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99마리 양을 두고 1마리의 양을 찾으시는 주님이십니다. 다섯째는 구원받아 영생을 얻은 사람을 하나님의 보좌에 앉게 하리라고 하십니다.
인권이 왜 중요한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기본 권리는 지켜져야 합니다. 인간으로서 누리는 인간다움이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을 통하여 다시 한번 인간의 기본 권리를 살펴보기를 바랍니다.
첫째,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평등한 존재입니다.
26절에는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고 합니다. 27절에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고 합니다. 다시 창세기 5:1-2에는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라고 반복합니다. 성경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만드셨다고 합니다. 남자와 여자는 우열이 없이 평등하게 만드셨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일랜드’의 대사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30억년동안 진화되어온 인간이다”. “인간 복제 이거야말로 최첨단 과학이지”. 인간 복제란 인간의 몸을 새롭게 만드는 것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창조를 부인합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부인합니다. 인간의 몸을 새롭게 하고 건강하게 하고 질병을 없앤다는 것은 명분입니다.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인간의 생명의 존엄성입니다. 고객에게 “이것은 현명한 투자입니다. 60-70년은 더 살 수 있습니다. 아기를 대신 낳아주고, 폐와 간을 바꿔줍니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가 무시되고, 하나님의 형상이 일그러지는 것은 결코 선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야베스의 기도’의 작가 브루스 윌킨슨은 ‘꿈을 주시는 분’이란 책에서 “당신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다. 이 세상에서 당신과 똑같은 사람은 오직 당신뿐이다. 그 누구도 당신의 꿈을 대신 이룰 수 없다”고 합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나와 같은 사람은 나밖에 없습니다. 모든 개체가 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다 다르게 지어졌습니다. 어떤 사람도 나와 같은 사람을 복제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을 획일화하는 것은 안 됩니다.
이렇게 더 나은 세상이 되고 생명을 연장할 수 있다는 것은 심각한 속임수입니다. 성경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셨다고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받는 존재라고 합니다. 인간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거나 조작될 수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4:4에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 합니다. 골로새서 1:15에는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라고 합니다. 성경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인데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한 것은 너무 과분합니다. 그리고 감사한 일입니다.
파스칼은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고 사람 역시 그대로 앙갚음 한다”고 하였습니다. 자기 형상대로 예수님을 만드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고, 죽이고, 지금은 아예 예수님을 한 인간으로 격하하기고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인정하면 자신을 인정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하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인 것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진짜 인간이 아니야 복제품이야”. 링컨이 조던에게 자신들이 복제인간인 것을 알려줍니다. 자신들을 죽여서 고객을 만족시키려고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하나님 외에 누구에게 만족을 주기 위해 목숨을 버리게 만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즐겁게 하기 위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 영화의 내용에는 참 재미있는 대목이 있습니다. 복제인간에게 감정이나 느낌이 없으면 장기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고 감정을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복제인간이 서로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감정을 주었다는 것은 인간이 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자의식이나 고통이나 기쁨이나 미움을 못 느낀다면 진짜 인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형상을 주셔서 감정을 가지게 하시고 감정으로 하나님께 뜨거운 열정을 가지게 하셨습니다.
15세기 말 플로렌스의 조작가 아고스타 단토니오는 거대한 대리석 덩이를 가지고 조각을 시작하였지만 포기하고 40년을 방치해 두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어느 날 미켈란젤로가 돌에 흥미를 가기고 웅장한 작품을 보았습니다. 그는 방치된 그 돌을 다듬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이 역사상 최고의 예술로 꼽히는 다비드 상이 된 것입니다. 큰 돌 속에 묻힌 다비드 상은 조각가 눈에만 띄었던 것처럼 우리 안에 있는 그분의 형상도 하나님 자신만이 보고 아십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만듭니다. 남자와 여자도 차별이 없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어느 한쪽에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어느 한쪽에 더 많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최근에 와서 부부관의 변화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주종부부입니다. 얼마 전까지는 평등부부입니다. 이제는 각자부부라고 합니다. 가장 좋기는 주 안에서 서로 종속되는 것입니다.
영적 성장에 이르는 길은 많지만 간단하고 확실하게 말해 영적 성숙의 종착점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은 가장 성숙한 인격자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복음성가에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형제의 모습 속에 보이는 하나님 형상 아름다워라 존귀한 주의 자녀 됐으니 사랑하며 섬기리”.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귀한 존재입니다. 이 것을 찬양하기 바랍니다.
둘째, 인간은 모든 생명을 보존하고 다스릴 책임이 있는 존재입니다.
28절에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고 합니다. 인간은 결코 이용 대상으로의 가치가 아닙니다. 나의 이익을 위하여 남을 이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생물이 다 그렇습니다. 내가 중요하듯 남도 중요합니다.
마태복음 7:12은 황금률이라 불립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남이 누구입니까? 사람만입니까? 아닙니다. 모든 피조물도 그 대상입니다.
하나님은 특히 인간의 생명에 대하여 엄격하십니다. 창세기 9:6에는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고 하십니다. 다른 사람을 해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지 말라는 것은 절대 명령입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하나님의 형상 때문입니다. 그리고 보존해야 할 책임 때문입니다.
여호수아 20장에는 도피성이란 것이 나옵니다. 도피성은 영어로는 refuge입니다. 피난처입니다. 성경에는 도피성이 6곳에 있었습니다. 갈릴리 게데스, 세겜, 헤브론, 베셀, 길르앗 라못, 바산 골란입니다. 신명기 4:42에는 “원한이 없이 부지중에 살인한 자가 그의 생명을 보전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생명을 보존하시고 아끼십니다. 왜냐하면 그 생명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2:30에는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구약적인 관념에서 죽여야 하심에도 불구하고 죽이지 않으십니다. 생명을 보존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영화에서는 아기를 낳으니까 “좋은 제품이냐 꼬리표를 달아 보내”라고 합니다. 그 어머니는 죽였습니다. 인간이 하나의 제품입니다. 그들에게 인간은 자기들에게 돈을 벌게 해주는 고객과 복제된 상품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링컨과 조던이 도망갔을 때에 “제품 두개가 도망갔다”고 합니다.
링컨이 자신이 복제인 것을 알게 되어 자신을 복제한 톰 링컨을 찾아갑니다. 진짜 링컨을 만나 물어봅니다. “나를 복제하는데 얼마나 들었나요?” 500만 달러가 들었다고 합니다. “왜 그렇게 비싸죠?”라고 다시 물어봅니다. 그 때 톰 링컨은 “오래 살 수 있는데 그 까짓 것 아무 것도 아니야”라고 합니다. 오래 살고 건강키 위해서는 무엇이라도 투자하는 것이 미래인입니다. 추적한 경찰이 두 사람 가운데 진짜를 총으로 쏴 죽였습니다. 시체가 연구소에 들어왔을 때 “방금 들어온 시체 고객입니다”라고 합니다.
고객이 죽어서가 아니라 고객을 잃어서 슬퍼합니다. 생명을 잃고 하나님의 형상을 잃으면 인간도 물질로 변합니다. 복제는 새로운 유물론으로 빠지고 있습니다. 고객은 복제를 만들게 한 사람입니다. 한결같이 부자이고 유명합니다. 돈이나 명성으로 건강과 장수를 사려고 하는 미래인은 다시 유물론으로 빠져듭니다. 건강이나 장수나 인간을 물질화하는 새로운 이념주의의 세계입니다.
결 론
다니엘 벨이란 미래학자는 1960년에 ‘이데올로기의 종말’이란 책을 썼습니다. 냉전이 한참일 때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란 이데올로기의 종말을 예견했습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는 절대 종말이 없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지식을 과시하려고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냅니다. 현대인의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저의 생각에는 오래 사는 것, 건강이 현대의 이데올로기입니다. 건강은 절대 가치를 부여한 것 같습니다. 건강이라면 사람들은 엄청난 관심을 가집니다. 모두가 건강이 새로운 이념입니다.
이 이데올로기를 실현하기 위하여 복제도 허용합니다. 이 영화에서는 아주 중요한 대화가 나옵니다. 2015년에 인간의 복제를 허용하는 법이 통과되었다는 것입니다. 가능한 일입니다.
인간복제는 인간이 하나님의 최후의 영역을 정복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곧 신이요”라는 대사가 나옵니다. 이것이 해답입니다. 사람이 이제는 신의 자리를 꿰차고 신의 영역을 자신의 과학적 힘을 과시하는 노름을 하고 있습니다.
많은 돈을 주고 인간을 복제하여 장기를 다시 갈아 오래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새로운 아메리칸 드림이야”라고 합니다. 오래 사는 것, 건강이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된 시대의 대화입니다.
과학이 도덕을 상실하면 파멸의 도구가 됩니다. 지금까지도 그래왔습니다. 앞으로는 그 속도도 훨씬 빨라질 것입니다. “인간을 절대로 믿지마, 살아남기 위해서는 모든 일을 다 해”. 이런 시대에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의 존엄성이 다시 확인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과학, 진정한 도덕, 진정한 인간다움을 회복하기를 바랍니다. 인간의 회복은 과학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와 전능성을 인정하는 신앙에서 시작합니다.
성경적 신앙으로 인간을 회복하는데 교회가 앞장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창 1장 26~29절 / 김 조목사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 속에 지으심을 입고 이 땅에 보냄 받은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2005년도에는 하나님이 주신 크신 능력과 복을 받아 세상을 이기시고 하나님이 주신 권세 회복하여 세상을 다스리며 살아가는 성도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세상을 다 창조하신 후 마지막으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권한을 사람에게 위임하시는 본문 말씀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말씀을 제목으로 삼고자 합니다. 창세기는 한마디로 시작의 책입니다.
우주, 가정, 인간, 죄, 민족, 언어, 문명의 기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신명기까지 다섯 권을 모세오경이라 합니다. 이는 모세의 기록한 책인 것을 나타내는 말씀으로 그 첫 번째 책이 창세기라고 합니다. 창세기는 하나님의 창조뿐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섭리하시는 유일하신 하나님이시요, 주인 되신 하나님이 친히 다스리는 신정 국가의 준비와 인간을 구원하시려 계획하시고 “여인의 후손”(3:15)인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시는 복음 메시지의 시작으로 구속 계시의 막을 여는 책이요, 그 중 1장은 구족의 주체자와 인간의 존재 가치를 보여주는 신앙의 첫 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고 6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사람이 살 수 있는 배경을 준비하셨으니 참으로 질서 있게 완벽하게 치밀한 계획 속에 창조하셨습니다. 이를 믿느냐, 믿지 아니하느냐에 따라 천국과 지옥이 갈라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며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우리는 지극히 존귀한 자들입니다. (26-27절)
사람을 마지막에 창조하신 것은 사람이 거할 배경을 다 준비하신 것입니다. 또한 창조하심에도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포하시었으나 사람은 하나님이 직접 흙으로 지으셨으니(2:7) 창조의 방법부터 구별되었고 “우리의 형상, 우리의 모양”대로라고 3번 우리라고 하신 것은 복수 형으로 성부, 성자, 성령인 3위의 하나님이 깊이 의논하시고 사람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2:7)고 하셨는데 생기는 영혼(잠20:27), 호흡(사2:22), 기운(욥33:4)을 말함으로 생령 즉 살아있는 존재가 되어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게 하셨고 특히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어주셨습니다. 모양이나 형상은 동일한 의미의 말을 중요한 때 반복하는 말로 쓰여집니다. 굳이 구별하자면 형상은 닮은 외부형이요, 모양은 추상적인 면에서 유사점으로 내,외적인 모습이 하나님의 성품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로서 저급한 미생물이 고등한 상태로 진화되었다는 진화론이 얼마나 어리석은 이론인지 알게 되고 모든 피조물 가운데 사람만이 하나님과 사귈 수 있는 유일한 것임을(엡4:23, 골3:10)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극히 귀한 존재로 지어주셨습니다. 그러니 사람이 허무하거나 무가치한 존재가 아니요 하나님의 기운,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과 함께 기뻐해야 할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불순종하여 선악과 먹음으로 범죄하며 하나님과 단절되어 에덴에서 좇겨나 죽었던 것입니다. 자식의 고통을 부모가 차마 볼 수 없듯이 하나님이 구원하는 방법이 죄의 대가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담당하게 하시고 이를 믿는 자 죄 사하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은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고전6:19,20) 이렇게 존귀한 자로 하나님의 인정 받은 성도여, 존귀한 자답게 보다 아름답고 선한 자로 멋있는 삶에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어디서 왔다가 무엇 하려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서글픈 인생이 아니라 우주 만물의 주인 되신 하나님께서 존귀한 신분으로 여겨둔 자이기에 하나님 기쁘시게 하며 살아가는 성도 되시기 원합니다.
2. 우리는 하나님께 복 받은 자들입니다. (28절)
하나님이 복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22절에 동물들에게 주신 것과는 다른 것이 동물들에게는 일반적인 선포식으로 “주어 가라사대” 하셨지만 사람은 인격적 대우로 대화식으로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동물등과는 달리 하나님과 깊은 사귐 속에서 풍성한 삶을 살게 하셨으니 영,육간에 하나님이 복을 주셨으니 다 받아 누리는 2005년이 되시기 원합니다. 건강, 돈, 명예만 많다고 복은 아닙니다. 영적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며 마음에 평안이 있고 육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것이 참 복입니다. 욕심과 현실에 사로 잡혀 양심도 인간성도 상실해 버리고 작은 것도 참지 못하고 뒷일 생각도 없이 말된 행동하다 보니 세상이 다 일그러진 모습으로 보이고 이기주의에 쌓여 받을 것도 못 받는 어리석은 자 되지 말고 “하나님은 복 주고 지키시며 평강과 은혜 베푸시기를 원한다”(민6:24-27)고 하십니다. 그렇게도 복 주시기를 원하시는데 왜 받아 누리지 못합니까? 죄 때문(사59:1,2)입니다.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라고(약4:17) 하셨습니다. 기도, 전도, 봉사해야 할 줄 알면서 못했다면 철저히 회개하고 깨끗함 받고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복 다 받아 누리는 성도 되시기 원합니다.
3. 우리는 만물 다스리는 권한을 위임 받았습니다. (28-29절)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하실 것을 사람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정복하라” 함은 복종케하다, 발로 밟다는 뜻이요, “다스리라”는 것은 통치하다, 지배하다, 주권을 잡다 라는 것으로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하셔야 할 권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권한을 사람에게 위임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감사, 감격한 일 입니까?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조물주를 대신하여 세상을 통치하게 하셨으니 엄청난 권한을 하나님께 위임 받아 동물들의 이름도 지어주었으니(2:20) 이 권한 갖고 즐겁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권한을 다 빼앗기도 돈, 건강, 향락의 종이 되어 다스리기는커녕 다스림 받아 끌려 다니고 있지는 아니합니까? 이를 회복시켜 주시려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사 십자가에 피 흘려 주셨으니 그 은혜 그 사랑 힘 입고 세상을 다스리며 살아가는 성도 되시기 원합니다.
말씀마치겠습니다.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고 하나님의 권한까지 우리에게 맡기셨으니 온 천하를 사람을 위해 지어 놓으셨으니 천하보다 귀한 존재로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음 받았으니 사단이 사람에게 지독하게 유혹하는 것도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 받는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존귀한 자로 하나님이 영육의 복을 주시며 세상에 넉넉하게 다스리며 살아야 할 우리들입니다. 죄의 종이 되어 빼앗겨 버리고 좇겨 난 우리에게 다시 한 번 회복의 기회로 독생자를 보내주셨으니 이제 그를 믿고 철저히 회개하며 하나님이 원래 주셨던 것을 회복하여 존귀한 자답게 살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모세 오경이란 무엇인가?
- 모세가 기록한 다섯 권(창,출,레,민,신)의 성경이요, 율법서이다.
2. 창세기에 대하 아는 대로 말해보라.
- 시작의 책이다. 우주, 인간, 가정, 죄, 민족, 언어, 문화의 기원이요, 구속 계시의 막을 여는 책이다.
3. 하나님이 우리를(사람) 존귀하게 여기시는 것을 말해보라.
- 창조질서를 보이시고,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어 하나님과 교제하게 하셨고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하여 하나님 백성 되게 하셨다.
4. 존귀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겠는가?
- 존귀한 자답게, 아름답고 선하게, 하나님 영광 위해 살자.
5.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은 어떤 것인가?
- 교제하도록 영적, 육적 축복이다.
6.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말을 설명해보라.
- 다스리라는 말은 통치, 지배, 주권을 잡다는 말이다. 조물주를 대신해서 세상을 좋게 통치하라는 뜻이다.
7. 나는 지금 다스리고 있는가, 다스림 받고 사는가?
- 솔직하게 무엇에 다스림 받는가를 말하게 하라.
8. 오늘 나의 결심 한가지만 말해보라.
하나님의 특 대우
창 1장 26~29 / 이정익목사
사순절은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받으실 고난을 생각하며 묵상하는 부활절 전 40일간의 기간을 말합니다. 기독교에서 이 사순절은 절기 중에서 절정입니다. 기독교에서 예수님의 고난은 핵심이고 근간이고 은총이고 하이라이트 입니다. 이 고난주간이 지나면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절을 맞이하게 됩니다. 3세기까지는 부활절을 예비하기 위해서 2-3일간 금식을 하였고 사순절이 40일로 지키게 된 것은 기원후 325년 니케야 교회법에 의해서 시작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순절을 40일로 규정한 것은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이 40일간 금식기도를 한 것에 기인합니다. 동방교회에서는 사순절에 금식기도를 토, 일요일을 제외하고 7주간 하였고 서방교회에서도 6주간,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4세기 초부터 8주 동안 금식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재의 수요일”부터 사순절이 시작된 것은 7세기 라틴교회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때에는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물고기나 육식이나 달걀도 우유도 금지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에는 죄를 상징하는 붉은 옷을 입었고 할렐루야 찬송과 축제도 금하며 지내었고 특히 자선을 베풀고 회개하는 기간으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너무 형식적입니다. 하루도 금식하기를 꺼려하고 있습니다. 경건의 삶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 사순절 기간 동안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고 가능하면 절제하는 마음으로 조금이라도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정신을 발휘를 하였으면 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시는 이유와 목적을 알았으면 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는 말씀입니다. 그 창조과정을 살펴볼 때 특이한 사항을 한 가지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실 때 인간을 가장 염두에 두고 지으셨다는 점입니다. 인간을 지으실 때 하나님은 인간에게 특별한 의미를 두고 창조하셨습니다. 그것이 성경을 통해서 발견하는 내용입니다.
인간 특대우
본문을 보면 인간을 지으실 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지으셨다고 했습니다. 여기 형상을 따라 지으셨다는 말은 하나님의 속성과 거룩과 성결을 부여하여 지으셨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인간을 전체 세상의 주인으로 삼으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특 대우입니다. 인간을 영광의 존재로 지으신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값입니다. 대우를 받는다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행복한 일이고 감사한 일입니다. 누가 나를 알아준다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아주 소중한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아담을 특 대우해서 지으셨습니다. “하나님 형상을 따라서”, 그 말은 아담을 지으시고 그 아담과 늘 대화하시고 교제하는 대상으로 지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쯤 되면 인간의 수준이나 값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담을 그렇게 지으셨으면 하와는 또 얼마나 아름답게 지으셨겠습니까. 아담의 갈비를 뽑아서 하와를 지으셨다고 했는데 아담이 깨어나 보니까 곁에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이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그래서 일설에 의하면 아담이 하나님께 여쭙기를 “이 여인을 내 아내로 주시는 것입니까”하고 물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내 아내를 이렇게 아름답게 지으셨어요”하고 묻자 하나님께서 “네가 바람피우지 말라고 예쁘게 지었다“고 하셨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 아담의 후예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특대우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알면 우리 자신에게 부여된 영광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특대우를 하신 것은 인간이 특 대우를 받을만한 가치가 주어져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인간은 그런 존재입니다. 우리는 인간에게 그런 값이 주어져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너희는 천하보다 귀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와 같은 존재
창세기를 보면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실 때 예수와 같은 존재로 지으셨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인간에게 큰 기대를 하셨습니다. 부모들이 아기를 잉태했을 때 다 그런 소망과 기대가 있습니다. 장차 이 아이가 큰 인물이 될 것이라는 기대입니다. 그래서 태교도 하고 좋은 생각도 하고 좋은 음식을 먹습니다. 원래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 즉 예수를 닮은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가장 아름다운 성결한 낙원으로 지으셨습니다. 거기 악이 없었고 죄가 없었고 거기 독이 없었습니다. 완벽한 낙원이었고 천국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닮고 예수님의 수준으로 지어진 인간이 살아갈 곳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은 그런 존재로 지음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만큼 인간에게 큰 뜻과 목적을 두셨습니다. 마치 모든 부모들이 아이를 잉태하거나 낳고 기대하듯이 말입니다. 그것이 창세기 1장과 2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창세기 1장과 2장의 내용은 마치 천국의 모습이고 가장 선한 모습이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그 상태가 오래 계속 되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것이 창세기 1장과 2장이 전해주는 메시지입니다.
인간의 타락
그런데 그 인간이 그만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획이 틀어진 것입니다. 온갖 기대를 모았던 자식이 성장하여 타락의 길을 걸어 부모의 기대가 어긋난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탄식하시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또 때로는 인간을 지으신 것을 후회하시기도 했습니다. 참 불행한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3장은 불행장입니다. 창세기 3장은 불행으로 시작됩니다. 3장1절을 보면 “뱀은 ...” 하고 시작합니다. 여기 뱀은 타락을 부추기고 유혹하여 넘어지게 하고 순전한 사람을 타락하게 하는 사탄이고 마귀입니다. 마침내 뱀의 유혹을 받아 준엄하게 명령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 먹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타락하고 죄를 짓고 마침내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 결과 그 열매를 먹으면 죽으리라고 말씀하신대로 인간은 예수님 수준의 존재에서 죽음의 존재로 전락하게 됩니다. 참으로 불행한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어느 부흥회에서 선악과를 따 먹어서 추방되고 죽음이 오게 되었다는 설교가 있었습니다. 어느 불신 남편이 아내에게 이끌려 처음 부흥회에 와서 그 이야기를 듣고 집에 가다가 한숨을 내 쉬며 말했다는 것입니다. “미친놈, 선악과가 다 익어서 떨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떨어지건 주워 먹었으면 일 없었을 것을 왜 익지도 않은 열매를 따먹고 지랄이야.” 좀 기다렸다가 다 익어서 떨어지건 주워 먹었더라면 괜찮았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따 먹었습니다. 그 결과 인간은 그 열매를 먹으면 죽는다는 말씀대로 죽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아담내외를 당장 죽이지 않으시고 임시로 옷을 만들어 입히시고 겨우 현장 죽음을 유예했습니다. 그러나 아담내외는 앞으로 죽을 것이라는 선고를 받고 죽음을 생각하며 언젠가 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예들인 우리들도 모두 오늘도 언젠가는 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마음 졸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아담 내외는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렸습니다. 그 결과 그 좋은 특대우를 스스로 포기하고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죽음을 걱정해야 했습니다. 병들고 실패하고 먹고 살기 위해서 땀을 흘려야 했습니다. 아주 비참한 존재로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그것도 타의에 의해서가 아니고 자의로 스스로 자신들이 그런 우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신 것을 후회하셨습니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장벽이 생겼습니다. 그 전에는 하나님을 그리워했고 기다려졌는데 이제는 하나님이 오시는 것이 겁나고 부끄럽고 두려웠습니다. 비극입니다. 하나님의 실망이 너무 컸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결국 망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집착
그런데 하나님은 물러서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을 향해서 기대를 저버리시지도 포기하시지도 방치하시지도 않고 인간의 회복을 기대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다시 회복시키시기 위해서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는 “예수를 세상에 보내신 일”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왜 세상에 보내셨는가 하면 인간을 다시 회복시키려고 보내신 것입니다. 다시 회복시키셔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복원하고 인간을 죽음에서 건지시기 위해서 입니다. 인간을 다시 회복시키려면 누군가가 죄 값을 치러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에 예수를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구원을 얻고 영생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오셔서 “나를 믿는 자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고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은 “내가 주님을 믿는 순간 내가 다시 영적으로 회복되고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어두워진 내 눈이 뜨여져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타락한 인간이 원래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인간을 포기하신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자녀들이 죄를 짓고 타락하고 탕자가 되어 집을 나가면 괘씸하고 기대는 무너지겠만 그렇다고 그 자식을 포기하는 부모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그때 모든 부모들은 한결같이 다시 자식을 회복시키려고 뭔가를 시도할 것입니다. 그것이 부모들의 마음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로 인간을 창조하시고 큰 기대를 두시고 목적을 삼으셨는데 그 인간이 그만 죄를 지었다고 포기하시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비록 죄를 짓고 타락하였지만 다시 회복시켜 놓으려고 애를 쓰셨습니다. 비록 이미 인간이 죄를 지어 흠은 생겼고 탕자가 되었지만 다시 받아들이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예수를 보내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그를 믿기만 하면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되고 잃어버린 자녀의 자리를 회복하고 잃어버린 영성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사랑이고 아주 원대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예수를 보내신 것입니다. 고로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이 보내신 그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복음이라 하고 은총이라 하고 은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예수를 믿지 않는다면 그때는 정말 길이 없어집니다. 그 때는 말씀하신 그대로 준엄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고 죽음과 멸망만 있을 뿐입니다. 그것을 창세기에서 예표로 주신 상징이 아담내외를 대신해서 죽은 양의 사간입니다. 그 양은 아무 죄가 없습니다. 순전히 아담내외가 죽을 것을 대신해서 죽은 것입니다. 그 양이 죽음으로 아담내외는 당장 죽음을 것을 잠시 유예 받고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영원히 죽지 않는 길을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예수는 그래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오셔서 그 영원한 길을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또 하나는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일”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16-17절을 보면 “모든 성경은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고.. 모든 사람으로 온전케 하려함이라”고 했습니다. 간혹 이 구절을 잘못 해석할 때가 있습니다. 성경을 주신 목적은 “교훈과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려고” 교육재료로 주신 것은 아닙니다. 물론 성경은 교육적인 자료로 아주 훌륭합니다. 성경 안에는 많은 교육적인 자료들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성경을 주신 원 뜻도 목적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목적은 단순히 교육하고 깨닫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 “깨달아 알아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도 알고 예수를 보내신 뜻을 알아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게 하시려고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 3장16절의 “온전케 하려 함이라”는 말씀의 뜻은 “삶의 변화를 위하여” 라는 뜻입니다. 즉 그 말씀은 교육차원이 아니고 지식을 넓히는 차원도 아니고 생각을 깨우치는 계몽수준도 아닌 성경을 통해서 깊으신 하나님의 경륜을 깨달아 예수를 알고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성경을 주셨다는 말입니다. 고로 성경을 통해서 예수를 밝히 알고 하나님의 본뜻을 아는 일이 인간이 온전케 되는 일입니다. 그 온전케 되는 그 상태가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는 모습입니다.
보십시오. 여기에 유리병이 있습니다. 이 상태가 완전한 상태입니다. 아무 금도 없습니다. 이것이 완전한 상태입니다. 인간으로 말하면 죄를 짓기 이전의 에덴에서의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 완전한 유리병이 잘못 관리해서 금이 갔습니다. 그러면 이 유리병은 완전치 못합니다. 상품가치가 사라졌습니다. 그렇다고 이 유리병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버리기에는 이 병을 만든 사람이나 바라보는 사람 입장에서 아깝습니다. 그래서 이 병을 회복시키려 했습니다. 그 회복방법이 그 병을 만든 사람에게 가서 수리하는 것입니다. 마침내 그 유리병을 완벽하게 수리했습니다. 그 말은 이 유리병이 회복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그 유리병이 본래처럼 완전하냐 하면 아닙니다. 이미 이 유리병은 금이 갔고 수리를 했습니다. 이 병을 잘 수리했지만 아주 완전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 상태가 온전에 가까울 뿐입니다. 하나님이 타락하고 죄를 지은 우리를 온전케 하신다는 말은 우리를 그렇게 수리하신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내가 예수를 알고 예수께 가기만 하면 수리가 되어서 완전하지는 않지만 차선으로 온전해 질 수는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에 예수를 보내셨고 성경을 주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다시 회복시키셔서 온전하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한 가지 원대한 목표가 있습니다. 그 목표는 우리들이 위대한 성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위대한 철학자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위대한 인격자가 되는 일도 아닙니다. 우리의 가장 분명하고 확실한 목표는 우리들의 모델 되시는 예수를 닮아가는 일입니다. 내가 예수 안에서 은혜를 입고 영성을 회복하여 잃어버린 나의 본 모습인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그것이 우리의 신앙의 목표이고 목적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상에 예수를 보내신 것이고 성경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기대를 저버리지도 않으십니다. 지금도 여전히 우리를 기대하십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를 알기를 촉구하십니다. 그를 믿기만 하면 버리지 않고 포기하지도 않으시고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서 당신의 자녀를 만드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생각하면 그 하나님의 은혜가 한이 없으신 것입니다. 그 깊이와 넓이와 규모가 우리들이 상상하는 것과 비교가 될 수 없습니다. 이 사순절을 통해서 이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알되 깊이 있게 알고 깊이 있게 깨달아 예수를 닮아 예수의 수준까지 성숙해 가는 영적 성숙도 이룰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그래도 살만한 세상입니다
창 1장 26~31절 / 김영헌목사
세계 경제가 어렵습니다. 우리나라 경제도 어렵습니다. 기업들마다 월급을 줄여 일자리를 늘리고 관공서들도 월급을 줄여 더 많은 사람들이 먹고 살 수 있는 길들을 열고 있습니다. 은평구청 공무원들도, 구청장님의 말씀을 들으니, 월급을 떼내어 여기저기 일자리를 만들어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있다니 참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미국발 경제 위기는 서브 프라임 몰기지(Sub-prime Mortgage)로 인해 발생 되어졌습니다 이것은 우리와 상관없는 일이었습니다. 서브 프라임 몰기지란 미국 사람들이 저희들 나라 안에서 신용등급이 낮은 사람들에게 주택마련 자금을 빌려주는 ‘비우량 주택담보대출’을 말합니다. 그런데 금융사들이 너무 무분별하게 금융대출을 하자 집값이 거품으로 폭등하게 되었고 거품이 꺼지면서 집값이 폭락하자 담보로 잡고 돈을 빌려줬던 금융사들이 큰 타격을 받으면서 미국 금융기관들이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세계 금융기관을 비롯한 경제기구들이 서로 묶여 있다 보니 유럽과 아시아 경제까지 흔들리면서 오늘의 세계 경제위기를 몰고 왔습니다. 유럽의 몇 국가들은 국가부도를 초래했고 아프리카도 몇 개 나라도 부도를 냈습니다. 아시아의 주식시장도 붕괴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닐 듯 보여 집니다. 달러 환율이 폭등하고 주식시장이 폭락하여 전년대비 절반도 더 떨어졌습니다. 어디까지 추락할 것인가 염려들을 많이 하지만 10년 전 외환위기를 겪은 우리나라이기에 잘 견뎌 내리라 기대합니다.
어차피 경제는 늘 호황을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올라갈 때가 있는가 하면 내려 갈 때도 있습니다. 제가 짧은 세월을 살았지만 제가 경험한 바로는 10년을 주기로 경제위기가 찾아오는 것 같습니다. 1978년부터 일어난 첫 번째 오일쇼크는 세계 경제를 뒤흔들었습니다. 1988년부터 약 3년 동안 세계 부동산 거품이 꺼지면서 엄청난 위기를 겪었습니다. 일본은 그때 얻어맞은 상처를 치유하는데 20년 넘게 걸렸습니다. 1998년에는 우리가 이미 잘 아는 아시아의 외환위기였습니다. 우리나라는 그때 국가부도 위기까지 가서 결국 IMF의 돈을 빌려 나라경제를 지탱시켰습니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2008년에 미국의 서브프라임 몰기지 사태가 세계를 경제파탄에 몰아넣었습니다. 아직도 세계 경제가 그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서민일수록 더 살기가 힘들어 지는 것이 이런 경제위기입니다. 그러다보니 서민들은 세상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래저래 생활고에 시달려야 하고 되는 일은 별로 없는 듯합니다.
이런 때에 강호순의 연쇄살인 사건까지 겹쳐 우리의 마음을 더욱 어둡게 하였습니다. 사람의 목숨을 파리처럼 여기는 엽기적인 살인행각은 결코 이 땅에서 다시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인데 자꾸만 일어납니다. 대한민국은 살기 좋은 나라인데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마음이 아픕니다. 삼천리금수강산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나라인데 어찌 제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의 목숨을 살해할 수 있을까? 누가 선량했던 우리나라 사람을 이렇게 악하게 만들었습니까? 안타깝습니다.
언제인가 미국신문에 끔찍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애틀랜타에서 약 60여마일 떨어진 아덴스(Athens)라는 작은 도시에 사는 한 흑인 여성이 자기가 낳은 아이를 낳자마자 칼로 심장을 찔러 죽였습니다. 이 흑인 여성은 너무나 어려운 인생을 살고 있었는데 자기가 낳은 아이에게 이런 어려운 인생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죽였다는 것입니다. 이 흑인 여성은 인생은 고통스러운 것이니 구태여 오래 살 필요가 없다는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을 것입니다. 생명이 있어 아직 살고는 있으나 왜 살아야 하는지, 무엇하러 살아야 하는지 알지 못한 채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이 흑인여성 말고도 우리 주변에는 많이 있을 것입니다.
“언제까지 이런 고통스런 인생을 살아야 하는 것일까?”
“무엇을 위해 이런 고통을 받으며 살아야 하나?”
“더 이상은 못살겠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 않을까?”
“이 세상은 살만한 곳이 못된다!”
때로는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살만한 곳이 못되는구나!” 그래서 어떤 이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살을 합니다. 살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여겨질 때 자살을 택합니다.
요즘 북한이 안달을 합니다. 우리 한국정부가 가만히 있는데도 돈 안 바친다는 것 때문인지 우리 정부를 헐뜯고 대통령에게 입에 담기 민망할 욕을 퍼붓더니 요즘엔 위협적인 으름장을 놓습니다. 또 다시 ‘핵’을 가지고 벼랑끝 전술을 일삼는 그들이 미사일을 쏜다는 것인지, 인공위성을 쏜다는 것인지 모르지만 위기를 조성합니다. 서로 간의 약속이었던 영해나 영공을 지나갈 수 없다며 협박합니다. 공짜로 지나가는 것도 아니고 일 년에 수 백 억원씩 돈을 주었는데도 생떼를 씁니다. 우리의 내부 분열을 획책하려는 의도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북한의 공산당에 대한 경계를 잘 해야 하는데 어떤 부류는 우리나라를 헐뜯고 북한의 김정일과 공산당을 좋아하는 친북세력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북한의 동포들을 얼마나 비참하게 만드는지를 보고 들으면서도 친북내지는 종북노선을 지향하는 사람들을 보노라면 답답하고 이해가 안갑니다.
어떤 이들은 그 꼴 보기 싫다며 이민 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땅이 살만한 곳이 못 된다는 것이죠.
그러나 가만히 생각하면 그래도 이 세상은 살만한 곳입니다. 특히 우리가 사는 이 나라는 지구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땅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도 이 땅이 살기 싫다고 자살도 합니다. 정말 이 땅과 이 세상은 살만한 곳이 못되나요?
아닙니다. 그래도 이 세상은 살만한 곳입니다.
첫째로 더 좋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나빠진다고 해도 역사를 보면 점점 더 좋아지고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과거보다는 현재가 더 좋아졌고 미래는 더 좋아질 것이 분명합니다. 세상이 점점 더 좋아지고 있다는 증거는 사람의 평균수명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서기 660년대의 평균수명은 25세였고, 1800년대는 37세, 1900년대는 45세, 그리고 2000년을 넘어서는 80세에 이르고 있습니다. 과학발전의 가속도로 보면 다음세대는 평균수명이 몇 배로 늘어날 수 있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병의 발생과 사망속도보다는 병을 치료할 수 있는 과학의 발전 속도가 더 빠르기 때문입니다. 2000년 전인 1세기에는 평균수명이 20세였다는 조사를 보면, 20세에서 40세로 평균수명이 늘어나는데 1900년이 걸린데 비해, 40세에서 80세로 늘어나는 데는 불과 100년도 안 걸렸습니다. 곧 평균수명이 100년을 넘어설 것입니다.
의학의 발전뿐만 아니라 과학의 발전은 삶의 환경도 편리하게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지금 삶의 환경이 아무리 나쁘다 해도 과거보다는 매우 좋아졌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냉장고도 없었고, 세탁기도 없었으며, 전기불도 없었습니다. 라디오나 TV도 없었습니다. 수화기라해서 높은 나무에 철사줄을 늘여놓고 광석에 바늘을 꽂아 수화기에 연결하면 라디오 방송이 잡혔습니다. 그러다가 1960년대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나오면서 전자세계에 혁명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세탁기와 냉장고의 출현은 여자들에게는 혁명이었습니다. 여인네들은 냇가에 나가 손빨래를 하느라 겨울에는 손등이 다 불어터졌습니다. 아이를 낳고나면 기저귀 빨래가 방과 마당에 가득 널려 있게 마련입니다. 산모의 일감이 첩첩산중이었습니다.
지금은 얼마나 편해졌나요! 아무리 빨래감이 많아도 세탁기에 넣으면 금방 빨아 나옵니다. 기저귀는 한번 쓰면 버리는 1회용이 나와서 10쌍둥이 길러도 문제없습니다. 최근에는 직장에서 코드만 누르면 밥솥의 밥이 저절로 되는 시대입니다. 벽결이 TV로 안방극장에서 24시간 TV를 봐도 시비 걸 사람이 없습니다.
지금 아무리 힘들어도 30년-50년 전보다는 훨씬 살기 좋은 세상이 되었습니다. 경제적으로 좀 어렵다고 낙심하거나 실망하지 맙시다. 우리의 부모님 시대보다는 우리가 훨씬 좋은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은 우리보다 더 좋은 삶을 살 것이고 우리가 상상도 못하는 좋은 음식을 먹을 것입니다. 세상은 좋아지고 있습니다.
둘째로는 우리는 혼자가 아니니 살만합니다. 가끔 TV에서 사자와 버팔로의 싸움을 봅니다. 1:1로 싸우면 사자는 상대도 안 됩니다. 단체로 싸워도 사자는 버팔로의 상대가 안 됩니다. 문제는 사자는 떼로 덤비는데 버팔로는 늘 혼자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자의 공격이 있으면 수 백 마리의 버팔로는 도망가기 바쁩니다. 부모가 사자의 공격을 받아도, 자식이 물어 뜯겨도 부모의 버팔로는 도망만 가지 함께 싸울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버팔로는 위기 때 혼자입니다. 사자는 어미사자를 비롯해 모든 가족(딸들)이 하나가 되어 합동작전을 벌립니다. 그러니 등치가 아무리 커도 버팔로는 사자와의 싸움에서 백전백패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혼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만물의 영장으로 홀로 세상을 살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사랑하는 가족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동료가 있습니다. 특히 우리는 같은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의 가족들이 있습니다. 입원과 요양을 하면서 수많은 교우들이 저를 위해서 기도하고 계신다는 것이 얼마나 저를 든든하게 하고 안심시키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제게 많은 교우들이 싸인을 해서 쾌유를 비는 롤카드를 보내주셨는데 어린 주일학교 학생이 “목사님 빨리 나으세요. 기도할께요!”라고 싸인한 것을 읽을 때, 콧날이 시큰하며 감사함이 가슴을 메웠습니다.
뉴스를 보니 아내를 위해 신장을 이식해 주신 분이 너무 고마워 남편이 자신의 신장을 다른 사람에게 기증한 분이 계셨습니다. 더불어 사는 세상이 너무 고맙고 감사할 뿐이라 했습니다. 마음을 열면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마음을 닫고 스스로 밀폐된 공간을 만들기 때문에 아무도 없는 혼자만의 세상을 사는 것같이 낙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요양을 하며 내 생애에 TV를 가장 많이 시청하였습니다. 자칫 연속극의 달인이 될 뻔했습니다. 통쾌한 복수를 이어가는 아내의 유혹, 천추태후, 다시 돌아온 일지매까지 보았습니다. 그중에서 ‘에덴의 동쪽’은 형제애를 물씬 풍겼습니다. 마지막 장면이 멋있었습니다. 잠깐 오해를 했던 형을 구하기 위해 악당들의 소굴로 들어간 동생 이동욱 검사가 묶여 있는 이동철 형에게 말합니다. “형! 내가 너무 늦었지? 미안해. 너무 늦게 와서 미안해.” 그때 악당이 동생에게 총을 발사하자 형이 동생을 막아서며 자신이 총알받이가 되고 동생을 살려냅니다. 그 멋진 장면을 다시 볼까요? 형이 있고 동생이 있어 그들은 외롭지도 않고 세상의 삶이 좋기만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님들!
하나님이 우리 인간들을 만물의 영장으로 삼으신 것은 우리에게 고매한 사랑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가족, 친구, 동료, 교우 등을 엮는 것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있기에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살만한 곳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사랑은 무엇입니까? 에릭 프롬(Erik Fromm)은 사랑을 5가지 속성으로 정의를 내렸습니다.
① 관심(Concern)입니다.
② 이해(Understanding)입니다.
③ 돌봄(Care)입니다.
④ 존중(Respect)입니다.
⑤ 주는 것(Giving), 또는 나눔(Share)입니다.
서로 관심을 갖고 이해하며, 서로 돌보고, 서로 존중하며, 내게 소중한 것을 남을 위해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랑입니다. 내 안에 이 사랑이 있는 한 세상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세상은 사랑해야 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 더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이 있습니다.
셋째로 나를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이 세상은 살만한 곳입니다. 예수님이 내 곁에 계시기에 감사한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봉독한 오늘의 말씀,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는 장면이 간단하게 나옵니다. 엿새 동안에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첫째 날, 빛을 만드시며 시작한 창조역사는 맨 마지막 날에 인간을 만들면서 절정에 이릅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만들고 난 후에는 꼭 “보시기에 좋았더라”(God saw that the it was good)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당신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드시고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God saw all that he had made, and it was very good)고 말씀하셨습니다. “심히”라는 부사를 하나 더 붙였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만물보다 우리 인간이 심히 더 좋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우리를 가장 사랑하신다는 징표입니다. 얼마만큼 더 사랑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요한복음에서 설명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스스로 독생자가 되셔서 우리를 죄악의 심판과 멸망으로부터 살려내시려고 생명을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셨다는 말씀입니다.
한 달반 동안 요양을 하면서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양평에 머무는 동안 창밖에 펼쳐지는 들녘과 산을 바라보며 많은 생각에 젖곤 했습니다. 그런 여유를 가져본 적이 별로 없었기에 제게는 매우 뜻 깊은 기간이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때부터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때 이미 목사가 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물론 사춘기 때 신앙의 방황이 있었지만 한번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저는 끝내 목사가 되었습니다. 제 얘기를 얼른 들으면 “어려서부터 목사가 되려 했으니 경건하고 아주 순수하게 자랐겠구나”고 상상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실제 상황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전쟁터나 삶의 현장에서가 아니라 죄악의 삶속에서 파란만장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어려서부터 부끄러운 일들을 많이 했습니다. 참외서리, 토끼서리는 기본이고요, 차마 생각도 하기 싫은 죄를 지으며 살았습니다.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으나 죄의 항목은 다른 이들보다 많으면 많았지 전혀 적지는 않을 것입니다. 창피한 인생을 살았음을 느끼고 또 느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매번 용서하시고 살려주셨습니다. 목회도 잘 하게 하셨습니다. 좋은 동역자들과 교우들을 제게 붙여 주셨습니다. 가정도 잘 지키게 했고, 자녀들도 잘 키우게 하셨습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명문대학 유학도 하고 보통서민들은 경험하지 못하는 좋은 경험을 많이 하게 하셨습니다. 감사하고 고마울 따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깊이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부족하고 죄 많은 인생을 사는 종인데도 이 세상에서 벌하지 않으시고 지금까지 참고 용서하시며 기다리셨습니다. 많은 축복도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내가 죽어 하나님 앞에 선다면 하나님은 뭐라 하실까? “내 너를 그렇게 사랑했거늘, 내 너를 그렇게 믿었거늘, 너는 어떻게 살았느냐?” 물으시면 난 무어라 답할 수 있을까? 목사인 저는 솔직히 두렵고 떨렸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한일 주님께서 보시고 훗-날에 나를 보고 무어라 하실까 주님 내게 오시면 나 어찌 대할까? 멀리 방황하던 나 불쌍한 이 죄인 이제 주만 생각하며 세상 영광 버리고 십자가를 내가 지고 주만 따라 가오리다.”(복1310: 주님내게 오시면)
아무리 생각해도 주님 앞에 선다는 것은 두렵고 떨리는 일이었습니다. 부끄럽고 창피해서 설 수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기왕에 심판을 받고 형벌을 받는다면 차라리 주님 낯 피해서 지옥으로 뛰어가는 것이 나을 듯 했습니다. 솔직한 고백입니다.
시편기자가 이렇게 부르짖은 것도 저와 같은 심정이었기 때문 일 것입니다.
『여호와여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주께서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으로 하옵소서』(시 25:7)
『Remember not the sins of my youth and my rebellious days; according to your love remember me, for you are good, O LORD.』
이 죄책감 때문에 몸부림치는 제게 들려오는 음성이 있었습니다. “염려하지 말거라. 나는 용서한 네 죄를 기억하지 않으리라.” 성경을 들고 이 말씀을 찾았습니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사 43:25)
이 말씀을 붙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붙들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여호와여, 너무 분노하지 마시오며 죄악을 영원히 기억하지 마시옵소서 구하오니 보시옵소서 보시옵소서 우리는 다 주의 백성이니이다』(사 64:9)
하나님은 히 10:17에서도 죄로 번민하는 사람들에게 분명한 위로의 말씀을 주십니다.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히 10:17)
사랑하는 여러분!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곳이 이 세상입니다. 사순절 때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사랑을 느껴야 합니다. 나의 죄를 도말하시고 기억조차 하지 않으시려고 당신의 몸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내모신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바로 우리에게 이 사랑을 보여주신 징표입니다. 저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내가 네 죄를 용서하고 다시는 기억조차 하지 않을 것이며 세상 끝날까지 너와 함께 하리라”는 음성을 들려주시는 예수님을 생각하는 기간이 사순절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은 정말 살만한 곳이 아닙니까?
나를 이 세상에 만들어 놓으시고 “보시기 심히 좋았더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 더욱 큰 목소리로 오늘 여러분에게 선포되고 있습니다. 아멘.
무엇을 남길 것인가?
창 1장 26~31절 / 강용규목사
일본 명치유신의 주역 중에 한 사람인 이노우에 가우로에 관한 일화입니다. 그가 일을 끝내고 밤늦게 귀가하다 괴한을 만났습니다. 괴한들이 그를 무차별적으로 때리고 칼로 이곳저곳을 찔렀습니다. 거의 죽어가는 채로 집에 도착했습니다. 온몸이 피투성이였고, 살아날 가망이 보이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형님, 이 고통을 없게 해 주십시오. 나를 좀 죽여주십시오.”라며 형에게 부탁합니다. 어떻게 형이 동생을 죽일 수 있습니까? 그럼에도 형은 동생의 고통을 그저 볼 수 없어 동생의 부탁을 들어주십니다. 그 때 노모가 동생을 죽이지 못하도록 덮쳤습니다. 늙은 어머니는 형이 동생을 죽이는 것을 눈뜨고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노모 덕분에 동생은 죽임을 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의사들의 정성어린 치료와 어머니의 희생적인 간호로 이노우에 가우로는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살아난 후 그는 “나는 죽었던 사람인데, 신이 나에게 생명을 더 주셔서 살게 되었다. 하여 내가 이 생명을 선한 일에 써야 되겠다.”고 다짐하며 온 몸을 다해 일본의 근대화를 이루는 주역이 되었습니다.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무엇을 남길 것인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본문 창세기 1장 26~31절의 말씀은 창조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시고 축복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녀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자녀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심은 자녀들을 축복하시기 위함입니다. 창세기 12장 1~2절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도 축복하시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의 부모들은 자녀를 축복하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그들은 자녀를 축복할 때 두 가지를 행했습니다. 하나는 아이의 머리에 손을 얹든지 포옹을 하든지 자녀와의 접촉 즉 터치를 통해 축복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이 자녀와 함께 하기를 원하나이다.”는 말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빌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축복하기 위해서이고, 자녀를 세상에 보내신 것도 축복하시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저는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평소에 말수도 없으신 무뚝뚝한 아버지셨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장례식 때 제 동생이 추모의 글을 낭독했는데,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남긴 가장 귀한 한 마디가 “너는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라는 말을 하며 눈물을 쏟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제 동생에게만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라 아무도 모르게 제게도 “너는 이 세상에서 최고의 목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한마디는 늘 제 마음에 남아있어 저를 일으켜 세우게 합니다.
마태복음 1장 족보를 보면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고, 야곱은 요셉을 낳고, 요셉은 마리아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낳았더라.” 고 기록합니다. 마태복음 족보에는 이처럼 ‘낳고, 낳고, 낳고’라고 쓰여 있습니다. 반면 창세기 5장의 족보에는 “아담은 930세를 향수하고 죽었고, 셋은 902세를 향수하고 죽었고, 에노스는 905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마태복음의 족보는 생명을 말하는 반면 창세기 족보는 죽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카이로와 이스라엘을 비교해 보면, 카이로는 죽음의 도시를 연상케 합니다. 이집트의 상징인 피라밋도 무덤이니 죽음을 나타냅니다. 반면 이스라엘에는 예루살렘 안에 다윗 왕의 무덤이 있지만 가짜입니다. 그곳에는 어떤 훌륭한 왕의 무덤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생명의 도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녀들에게 죽음과 생명 중에 무엇을 남기시겠습니까?
1980년대 제가 미국에 있었을 때의 일입니다. 당시 라이언 와이트라는 아이가 에이즈로 죽었습니다. 이 아이는 13세에 에이즈에 감염된 수혈을 받아 5년을 살다 죽었는데, 이 아이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 TV에 방영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아이에게 “내가 아버지로서 너에게 해줄 것이 없구나!” 마지막으로 할 말이 없느냐? 고 묻자 아이가 대답합니다. “아빠, 엄마 너무 감사합니다. 아빠, 엄마가 생명을 주셔서 저는 이 땅에서 즐겁게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아빠, 엄마는 저에게 예수님을 가르쳐주셨고, 저는 예수님을 믿어 영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아빠, 엄마는 저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하늘나라 생명록에 우리의 이름이 없는 것처럼 서글픈 일은 없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아이의 이름이 생명록에 기록되지 않는다면 얼마나 슬프겠습니까?
에녹은 하나님과 늘 동행하며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나라에 간 사람입니다. 에녹의 조상 중에 ‘셋’이 있습니다. 셋은 아담과 하와의 셋째 아들입니다. 셋의 후손은 모두 경건한 후손입니다. 반면 여호수아에 나오는 아간은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최초로 범죄한 자입니다. 그는 세라의 증손이요, 삼갈의 손자입니다. 세라는 유다와 다말 사이에서 낳은 아이입니다. 유다는 시아버지이고, 다말은 며느리입니다. 둘의 부적절한 관계에서 나온 아이가 바로 세라입니다. 그 세라의 후손이 바로 아간입니다. 출애굽기 20장, 제 2계명에서 “나를 경외하는 자의 자손은 천 대에 이르도록 축복하고, 범죄한 자의 자식은 삼, 사대에 이르도록 심판하겠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들어 잘 아는 이야기인데, 같은 시대의 두 가문 즉 맥스 쥬크와 조나단 에드워드의 가문을 조사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드의 후손은 873명, 맥스 쥬크의 후손은 1292명입니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미국의 영적 대각성을 일으킨 유명한 목회자요, 프린스톤의 총장이었습니다. 그 자손들 중에는 부통령, 상원 의원, 하원 의원, 성직자들이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반면 맥스 쥬크의 자손들은 낳자마자 죽은 아이가 302명, 직업적인 거지가 320명, 그밖에 범죄자도 많습니다.
부모의 삶이 자녀에게 크게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가 재물을 유산으로 남겨주지 않아도 아들, 딸에게 손을 얹고 축복할 때 우리의 아들, 딸은 축복받는 아들, 딸이 됩니다. 우리가 재물을 자손에게 남겨주지 않아도 경건한 삶을 살 때, 우리의 아들, 딸이 이 땅에서 존귀한 자가 되며, 우리가 재물을 자손에게 남겨주지 않아도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자녀에게 전할 때, 자녀들은 영생의 축복을 받게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란
창 1장 26~31절 / 이필재목사
21세기가 되면 세상이 훨씬 행복해지리라는 기대감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20세기는 인류 역사상 뚜렷한 두 가지 사건이 발생했는데, 그 중의 하나는 첨단 과학의 발전이었습니다. 그런데 과학이 인류의 불행에 사용되는 세기였다는 것입니다. 첨단 과학을 파괴 기구로 이용해서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피를 흘리게 되었습니다. 1, 2차 세계 대전을 비롯해 온 세계가 끊임없는 전쟁을 했던 20세기는 지칠 대로 지치고 절망하고 좌절했던 세기였습니다. 우리 한반도도 예외 없이 전쟁이 일어나서 300만 명 이상이 전쟁으로 죽었습니다. 21세기가 되면 인류가 전쟁의 고통을 깨닫고 평화의 지구를 만들 수 있을 것을 기대하면서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조금도 변한 것이 없는 악순환의 역사만이 인류의 괴로움이 되고 있습니다. 이제는 무엇보다 심각해진 것이 문화 충돌로 인한 테러 공포가 온 세상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 어떤 것이 터질지 모르는 테러 공포 때문에 이제 세계인에게 즐거운 여행이란 말이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공항에 들어서면서부터 기분이 나쁩니다. 신발까지 다 벗고 들어가라고 하고 검사를 받는데 의심이 나면 데리고 가서 바지까지 벗게 하는 여행이 되어버렸습니다. 여성들은 수치감이 더 심합니다. 여성들의 브래지어까지 철저히 검색기를 갖다 대고 조사를 할 정도입니다. 어떤 사람은 몸에 아무 것도 지닌 것이 없는데 계속 검색대에서 소리가 나니까 그 사람의 설명이 이렀습니다. “아마 오래 전에 내가 교통사고를 당해 다리에 금속 철을 붙여서 수술을 한 적이 있는데 그것 때문에 소리가 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구차한 설명까지 해야 되고 앞으로는 금이빨까지 조사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여행 가기가 싫어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공항 지나가는 것이 끔찍하고 창피스럽고 무슨 죄를 짓고 조사받는 것 같이 되어지는 것 같습니다.
우리 인간이 산다는 것은 성취를 바라봄입니다. 그리고 그 성취란 곧 행복을 말합니다.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는 행복감을 얻으려고 노력합니다. 우리가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어 하지 않습니까? 잘 먹으면 두어 시간 행복합니다. 여인들이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예쁘게 하면 하루 종일 행복합니다. 새 옷을 사면 한달 정도는 아주 행복해 합니다. 행복해지려고 공부도 하고, 돈도 벌고, 행복하려고 사랑도, 결혼도 합니다. 요즈음은 그러한 인간 심리를 이용해서 교회조차도 행복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교회에서 예배 많이 오라는 말을 뭐라고 합니까? “행복에의 초대”라고 합니다. “여기에 오면 행복합니다.” 그러면서 교회를 많이 광고합니다. 이제는 교회도 행복하려고 다니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내가 행복하게 살 수 있으려면 조건이 몇 가지가 필요합니다. 그 첫째가 구조적 조건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예를 들면, 개인의 행복과 생명을 존중하는 국가 구조가 있습니다. 반대로 개인의 권리나 행복을 무시하는 국가 구조가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피 땀 흘려 노력을 한다하여도 전체적인 구조가 잘못되어 있을 때는 아무 소용이 없게 됩니다. 요즈음 온 세계 가운데 가장 빨리 성장하고 있는 나라는 중국이라고 합니다. 모든 국민들은 큰 희망을 가지고 아주 신바람이 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 굶주리던 중국이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는가? 등소평이 빛을 비추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경제 구조를 바꾸어서 개인의 행복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시장 경제를 도입한 것입니다. 돈을 벌면 모두 자기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수십 번 중국 여행을 갔고 갈 때마다 교육국에 있는 지도자들과 만나고 심양 대학교와 특별히 친분이 있어서 총장, 부총장을 여러 번 만났는데 모두 똑같은 말을 계속 합니다. 등소평이 우리에게 빛을 전해주었기 때문에 그 빛을 보고 우리는 이렇게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학생 시절에 아테네 철학자 중에 빛을 발하는 사람을 찾기 위해서 대낮에 등불을 들고 돌아다녔다는 디오게네스를 우리가 매우 낭만적으로 생각했습니다. 그 사람의 철학에서 인간의 행복이란 뭐냐? 자연스러운 욕구를 자연스럽게 만족시키는 것입니다. 자연스러운 것은 부끄러울 것도 없고 흉한 것도 아닙니다. 이 원리에 어긋나는 관습은 반자연적이며 따르지 말아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살기 위해서 자기는 거지 같이 거리를 돌아다닌다고 했는데 그 소문이 알렉산더 대왕에게까지 들려져서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내가 한번 봐야 되겠다.” 찾아가서 보니까 정말 그렇게 하고 다닙니다. “당신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자연스러움을 느끼는 것인데 대왕께서 내 일광욕을 지금 방해하고 서있기 때문에 조금 비켜주시면 소원이 이루어집니다.” 알렉산더가 온다는데도 치장도 하지 않고 그대로 자연스럽게 있었습니다. 알렉산더는 디오게네스가 그렇게 건방지게 구는 것을 무시하지 아니하고 존중해서 “내가 알렉산더가 아니었다면 디오게네스가 되기를 희망했을 것이다.” 그래서 디오게네스 일화가 유명해진 것입니다. 영국의 사학자 토인비 박사가 런던 대학의 교수 시절에 학생들에게 강조한 역사관은 근래에 가장 높게 평가받는 역사 철학이 되었습니다. “이 세상은 창조적인 소수가 행복하게 만들고 파괴적인 소수가 세상을 불행하게 만든다. 어느 한 공동체나 나라에 창조적인 소수가 발하는 빛 때문에 온 국민이 행복한 것이다. 반대로 파괴적인 소수가 있을 때는 그들 때문에 다 불행해 지는 것이다.” 여러분! 세상의 역사가 그렇지 않습니까?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백성들이 행복하게 살려면 빛을 비쳐주는 사람이 필요하고 그 빛을 발할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합니다.
얼마 전 조선일보에 모건 스탠리 아시아태평양 수석 경제학자인 앤디시에 교수의 글이 실렸습니다. “이대로 가면 한국은 부활하는 일본과 급성장하는 중국 틈에서 필리핀 수준의 빈민국이 될 것이다.” 필리핀은 막사이사이 대통령 때 아시아의 흑진주라고 찬양을 받았는데 마르코스 대통령 때 빈민국이 되었습니다. 어느 역사관 안에서나 민중은 빛을 보고자 하며 그 빛을 통해 행복을 발견하려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뭐라고 하셨습니까? 자신이 인류 구원의 빛이 되시면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있으므로 세상이 행복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네가 있으므로 말미암아 네가 있는 그 공동체가 행복하게 만들어져야 하고 네가 대한민국에 살므로 말미암아 너 때문에 대한민국이 살기 좋은 나라가 되고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가정에서도 우리가 빛이 되고 교회에서도 빛이 되고 사회에서도 빛이 될 때에 그것이 주님의 제자다.”라는 진리를 주셨습니다.
1920년대는 세계가 경제 공황으로 고통을 받던 때입니다. 그 중에서도 미국의 경제 공항이 가장 심각하여 경제가 파멸 직전까지 갔습니다. 국가 경제가 이렇게 되니까 사회는 자연 발생적으로 무정부 상태가 되어 갱단들이 수없이 생겨나서 어찌나 무서운지 은행들이 갱단이 무서워서 전부 문을 닫았습니다. 그러니까 경제 활동이 완전히 마비가 된 것입니다. 약탈과 살인의 무정부 상태 폐허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이 시절 미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사람들은 마피아 조직에 가담하고 있던 알카포네의 부하들만이 살맛나는 그런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사회가 그렇게 어두워질 때 뉴욕의 한 시민이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리면서 “하나님 아버지, 내가 이 어두워져 가는 사회에 어떤 빛을 발할 수 있겠습니까? 나에게 그 길을 주십시오.” 기도하고 생각하다가 ‘아, 이렇게 하는 것이 뉴욕 시민에게 빛이 될 것이다.’ 자기 가족들과 온 친지들, 그리고 주변의 친구들을 다 불러 모아서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을 설명하고 “이 일에 협조해 달라. 이 사회에서 훌륭한 건물을 하나 지을 테니까 우리 다 같이 투자하자.” 합의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지고 있는 재산을 모두 다 함께 모아서 미국 사회가 바라볼 수 있는 건물 한 채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 집은 10층, 20층 날마다 올라가는데 점점 높이 올라가는 빌딩을 바라보면서 사람들은 궁금해서 묻기 시작했습니다. “몇 층까지 올릴 것입니까?” “네. 좀 더 올라갈 것입니다.” 50층 이상이 올라가기 시작하면서 신문에 기사화 되어 모든 사람들의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80층이 되었을 때 사람들은 “아! 이것은 미국의 희망이다!”라고 했습니다. 100층이 올라갈 때 “미국의 경제 공황은 이제 끝났다!” 그 빌딩을 바라보면서 사람들이 희망의 빛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102층 뉴욕 34번가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입니다. 그 빌딩 하나에 고용 인원이 18,000명이나 되었고 그 빌딩 하나가 뉴욕 시내에 생김으로 말미암아 일자리 창출과 경제 순환의 동기가 되어서 빌딩이 완성되었던 1931년부터 사회는 새로운 역사의 변환점이 되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누가, 무슨 일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회가 결정됩니다. 얼마 전에 우리들은 잠시나마 황우석 교수가 이 민족의 빛이 되리라는 희망을 가졌었습니다. 과학마저 거짓말을 할 줄은 누구도 생각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두움에 살던 중간기 역사의 히브리 민족이 어느 날 한줄기의 빛을 보고 요단강으로 다 몰려갔습니다. 세례 요한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기다리고 기대하던 예언자의 음성과 빛이 이제야 나타났다.” 모두 몰려왔습니다. 세례 요한이 그들을 향해서 한 말은 책망입니다. “이 독사의 자식들아!” 그런데도 그 앞에 다 몰려갔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회개하고 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아라.” “그렇게 하겠습니다.” 다 세례를 받았습니다. 누가, 무슨 빛을, 어떻게 비추느냐 여기에 따라서 세상이 결정됩니다. 때로 우리는 대통령을 뽑으면서 “당신은 이 역사에 이 민족의 빛이 되어 주십시오. 우리 모두의 갈 길의 방향을 가장 선하고 훌륭하게 정하시고 우리를 이끌고 그리로 가십시오.” 그래서 대통령을 뽑는 것 아니겠습니까? 바라볼 수 있는 지도자를 가진 민족, 창조적인 철학의 구조를 가진 백성은 행복한 것입니다.
오늘 성경말씀을 봅시다. 창세기 1장은 인류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은 왜 인간을 창조하셨는가? 확실한 이유가 여기 나타납니다. 창세기 1장 28절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서 창조하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의 모든 구조와 노력은 하나님의 복이 사람에게 임하는데 초점을 맞추어야 훌륭한 것입니다. 정치 철학도 하나님의 복이 백성에게 임할 수 있는데 초점을 맞추어서 결정해야 되고 경제 성장도 학문의 초점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도 직장도 교회도 나라도 모두 하나님의 복이 사람에게 주어지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결국 빛을 발하는 사람이란 누구인가? 하나님의 복을 받게 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복입니다.
그러면 인간의 복이 대체 무엇인가? 성경에서 복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을 합니다. 하나는 “self-congratulation”이라고 자기가 자기를 축복할 수 있을 때 그것이 복이라고 가르쳐 줍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우리 인간의 정체성(identity)을 보십시오. “Who am I(나는 누구인가)?”의 문제입니다. 즉, 자기 정체성의 확립입니다. 오늘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정체성을 확립시켜 주시고 인간 삶을 시작시켜 주시는 기록이 나왔습니다. 인간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나님이 정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과 우리들의 관계성을 설명해 주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너와 내가 하나가 되는 거룩한 결부의 생명체 원리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예수 그리스도를 내 안에 모신, 내가 예수 그리스도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가 곧 내가 되는 생명 결부의 원리! 내가 누구인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러면 내가 나를 어떻게 평가해야 합니까? 그것이 “self-congratulation”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축하하는 것입니다. 내 영속에 이 정체성이 확실히 자리를 잡을 때 그 사람이 하나님께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받는 복이란 첫째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을 받은 하나님의 형상됨의 영적 정체성이 있는 사람, 이것보다 더 큰 복은 없습니다. 지금까지 우리 기독교 역사에 그렇게 많은 순교자들이 생겼는데 도대체 젊은 나이에 왜 순교를 당해 죽고 마는가? 바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신분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받은 고통이 순교입니다. 왜 죽음을 당하면서도 그것을 버리지 않았는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최고의 복이라고 하는 마음의 확신이 있기 때문에 버리지 못한 것입니다. 죽으면서까지 지켜야 되는 하나님의 축복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다.”란 것입니다.
초대 교회 시절에 기독교인 박해로 인해 예루살렘에 살던 기독교인들이 외국 땅으로 다 흩어졌습니다. 당시 기독교 최고의 지도자 역할은 베드로였습니다. 외국으로 흩어져서 말할 수 없는 고통 중에 있는 교인들에게 위로의 편지를 보낸 것이 베드로전서와 후서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너희가 누구냐?” 옛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규정짓는 말을 합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우리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정체성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들을 보고 복 받은 사람이라고 해야 되는지, 아니면 벌 받은 사람이라고 해야 되는지는 자신의 신앙이 결정합니다. 비록 외국에 가서 나그네로 고통스럽게 살고 있지만 하나님이 내게 주신 가장 큰 복이 자신들에게 있음을 깨우치는 것입니다. 모두가 복 받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떠십니까? 하나님은 더하십니다. 날마다 하나님 자녀들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서 계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무엇이 복인가? 하나님이 주신 것은 다 복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제일 귀한 복을 주셨는데 믿음이 없다보니까, 또 세속에 너무 물들다 보니까, 세상 기준으로만 복을 생각하니까 제일 귀한 복을 발견하지 못하는 불행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나됨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내가 나를 축하할 수 있을 때 그것이 복 받은 사람입니다. ‘내가 누구인가? 하나님의 형상이다.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 거기에 대한 정체성을 확립하고 하나님의 복으로 내가 나를 객관성 있게 축하할 수 있는 능력 있는 사람, 그 사람이 복 받은 사람입니다. 이 믿음이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크리스천의 기쁨이 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두 번째 복음 “blessing share”입니다. 그 복을 나누어주는 것이 복입니다. 왜 하나님은 유대 백성을 선민으로 택하셨는가? 너희가 수고하여 온 세계인에게 하나님의 복을 나누어 주는 역할자가 되라는 뜻입니다. “너희는 땅 끝까지 찾아가서 하나님의 복을 나누어 주라. 열매 맺는 가지는 더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지금 갈보리 교회가 세계 선교에 공헌하고 있습니다. 왜 하는 겁니까? 복을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 메소포타미아에서 가나안 땅으로 보내셨는가? 당시는 가나안 땅이 세계인이 오고가는 중심 역할을 했습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애굽 대륙에서 왔던 사람이 요셉을 인신매매하여 은 20에 사가지고 갔습니다. 남쪽으로는 애굽 대륙의 아프리카 땅을 연결하고, 동쪽으로는 끝이 없는 아라비아 대륙을, 북쪽으로는 소아시아 일대가, 서쪽으로는 지중해라는 해상 통로가 있어서 로마를 비롯한 유럽의 관문으로 무역의 중심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세계인들이 오고가는 그 중심에 아브라함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사람 하나를 세워 빛을 발하므로 그 빛을 보고 하나님의 복을 나누어가지라는 계획 때문에 가나안 땅으로의 이주를 명령하신 것입니다. 결국 거기에서 아브라함의 후손 가운데 인류 구원의 메시야가 탄생하도록 하나님의 계획성 밑에서 되어진 일이 아닙니까?
내가 받은 복으로 또 다른 사람을 복되게 하는 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선교사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하나님의 복을 나누어주러 가는 사람입니다. 세계 역사를 살펴보십시오. 어느 나라나 기독교 선교사가 들어가는 나라는 다 문화적으로 영적으로 모두 복을 받았습니다. 기독교 복음이 들어가는 곳은 어느 곳이나 문화와 문명이 향상되었고 교육 국가가 되었고 경제 성장을 하고 미신이 사라졌습니다. 만약 우리 한반도에 아직도 복음이 안 들어온 상태라면 우리나라가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겠습니까? 기독교 선교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고 들어와 준 것이 복이 되어 오늘 우리의 대한민국이 있는 것 아닙니까? 우리 주변에서 하나님의 복을 내어 쫓는 사람이 간혹 존재합니다. 그 나라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여러분 역사적으로 살펴봅시다. 기독교 핍박의 대부 역할을 하던 소련은 세계 땅의 3분의 1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경제적 파탄으로 나라가 부도가 났습니다. 그래서 소련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14개 독립국가가 세워졌습니다. 러시아를 비롯한 새로 탄생된 나라들이 이제 선교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지난 30년 동안 북한이 굶어죽는다는 소리만 계속 들려오고 있습니다. 어린이들과 부녀자들조차 희망의 빛을 찾아서 탈북하려고 남의 나라 영사관 담장을 필사적으로 기어 올라가는 뉴스가 계속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당신들 왜 이렇게 하는 겁니까?” “다른 나라로 가기 위한 것입니다.” “어디로 가기를 원하십니까?” “한국입니다.” “왜 그곳에 가기 원하십니까?” “거기에 희망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10년 동안 대한민국 정부가 도와준 것만 6조5899억 원입니다. 민간단체들이 도와준 것은 그보다 훨씬 많습니다. 제가 목회하던 교회만 해도 5000명 식량을 4년 동안 계속해서 보낸 일이 있습니다. 교회를 내어 쫒은 것이 곧 복을 내어 쫒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복 자체시라.” 찬송가 28장에 “복의 근원 강림하사” 하나님이 복의 근원이 되시는 것입니다. 태초부터 하나님의 복으로 인간이 창조되었기 때문에 복을 받아야만 살 수 있는 존재들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인간을 복되게 하는 최대의 선물이고 이 복을 나누어주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입니다. 역사에 빛을 남긴 사람들이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는 역할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새해가 되면 첫 번 인사를 뭐라고 합니까?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그 말의 뜻이 뭡니까? “새해에는 내가 당신의 복이 되겠습니다. 내가 있으므로 당신이 행복하고 당신이 있으므로 내가 행복하여지는 관계로 이 새해를 살기를 원합니다.” 그런 뜻입니다. 교회가 무엇인가? 그러한 하나님의 복을 나누어 주는 곳입니다. 교회들이 관료주의, 상업주의 원리 문화에 젖어들면 이기주의적 공동체를 만들어서 자기 것 밖에 모릅니다. 그래서 중세기에 종교 개혁운동이 그렇게 거세게 일어났던 것 아닙니까? 만약 교회 공동체를 이기주의적 공동체로 만들게 되면 교회도 하나님이 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46년 걸려 건축한 예루살렘 성전을 보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 교회도 버림당하게 됩니다. 교회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복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저는 미국에서 신선한 충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미국인들이 사는 한 지역에 우리 한국인들이 많이 들어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미국인들이 피땀 흘려서 우리 갈보리교회 만큼이나 좋은 교회를 잘 짓고 목사님 사택까지 잘 마련하였는데 미국인들이 한사람, 두 사람 떠나고 한국인들이 많이 살게 되는 현상이 나타나니까 그 교회 교인들이 모여서 회의를 했습니다. “그 동안 우리가 피땀 흘려 건축한 이 교회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많은 복을 주셔서 잘 살았는데, 이 지역은 이제 한국인들이 많이 들어와 사는 지역이 되었으므로 우리가 계속 가지고 있는 것보다는 이 지역을 희망의 빛을 보기 위해 오는 한국인들에게 주는 것이 하나님이 더 기뻐하시는 일이다.” 결정을 해서 생전 보지도 못한 한국 교인들과 목사를 불러서 “이 교회를 가지십시오. 여기 목사 사택도 마련해 놓았고, 또 조금 수리하려고 은행에 10만 달러 헌금해 놓은 것이 있으니 다 가지십시오.” 한국 목사와 한국 교인들이 눈이 둥그레져서 “공짜로요?” “네, 공짜입니다.” “그러면 어떡하실 겁니까?” “우리는 또 조용히 떠나서 우리들이 가야할 교회를 찾을 테니까 이 지역이 복 받는 지역이 되도록 여러분이 이 지역에서 복을 받도록 가지십시오.” 제 친한 친구 가운데에도 그렇게 물려받은 교회가 LA에서 두 곳이나 됩니다. 그래서 한 때는 그 친구들이 선망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와! 얼마나 기도를 많이 했기에 하나님이 저렇게 공짜로 주셨느냐?” 교육관 시설도 얼마나 좋고 목사 사택도 얼마나 잘 꾸며져 있는지 모두 부러워했습니다. 교회는 공짜로 주는 곳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되돌려 받을 것을 기대하고 주지 말라. 그러려면 차라리 주지 말라.” 거룩한 명분의 아름다운 나눔! 그것이 교회입니다. 지금 갈보리 교회는 40개국에 선교비를 보내고 있습니다. 재정 보고를 매주일 하는데 1억 정도는 항상 마이너스 통장으로 운영해 가고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남을 주기 위해서 그러는 것은 괜찮습니다.
제가 목회 생활을 하면서 5곳에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 없는 지역에다 교회 하나를 지어놓고 한 사람이 들어오면 그 사람이 교회 와준 것이 너무나도 감사했습니다. 새벽기도도 나 혼자면 아예 아무도 안 나왔으면 그냥 자겠는데 한 사람이 뚜벅뚜벅 오는 소리가 납니다. 그러면 후다닥 일어나서 “기도합시다.” 이래가면서 다섯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이 땅에 교회가 세워지는 일에는 피가 끓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많은 선교 처소를 현재는 400군데인데 1,000군데를 목표로 하는 것입니다. 나눠주는 것이 복입니다. 받을 것을 기대하지 말고 공짜로 다 나눠주는 것입니다. “갈보리교회 교인들 모아서 뭐했는가? 다 온 세상에 나눠주고 말았다.” 괜찮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가 뭡니까?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제가 개척교회를 많이 했기 때문에 교구 목사님들한테도 항상 권합니다. 여기서 교구 목사로 일하다가 때가 되면 그 교구 식구들과 교회를 하나 세우라고, 교구 식구들 다 모시고 나가도 괜찮다고 합니다. 그러면 교회가 일곱 개가 되지 않습니까? “이게 얼마나 좋으냐?” “그러면 갈보리교회 교인들 다 없어지면 어떡합니까?” “안 없어진다. 여기는 여기대로 있다.” 그래서 내년 1월부터 한 사람이 하기로 했습니다. 우리 교인들 다 모시고 나가서 해도 괜찮다고 했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는 싸움질 하고 갈라지는 것은 잘해도 거룩한 명분의 아름다운 나눔은 잘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는 교회도 있어야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그 몸마저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공짜로 다 가져가라. 내가 줄 것은 이제 이것 밖에 없어.” 피 흘리고 쓰러지면서 다 가져가라 하셨습니다. “나는 이제 아무것도 없다.” 오늘 성경은 인류의 시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복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면 성경이 끝나는 요한계시록 22장에는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로다.” 성경은 복으로 시작해서 복으로 끝이 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갈보리 교회 교우 여러분! 하나님의 이러한 복의 임재가 여러분 가정에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신 진리, 하나님의 복을 받았으면서도 복인 줄 모르는 불행을 성령님이 깨우쳐 주시고 나는 가장 귀한 것을 받고 있으니까 형제들에게 이 복을 나누어줄 수 있는 믿음의 주님의 제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이곳에 이렇게 교회를 세워주신 것은 온 세상에 나누어주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세계 선교에 공헌하는 갈보리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사람은 누구인가
창 1장 27, 28 2:8 / 김명혁목사
제가 2008년 1월 13일 강변교회에서 은퇴한 후 지난 8년 3개월 동안 주일마다 전국에 있는 작은 교회들을 주로 방문하며 설교하고 있는데 2013년 5월 12일 주일 여기 의정부 사랑나눔 교회에 처음으로 와서 여러분들과 함께 예배 드리면서 “고난과 슬픔과 아픔이 보석으로”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고, 2014년 6월 29일 주일 두 번째로 와서 "자존감과 자신감"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고, 2015년 2월 1일 주일 여기 세 번째로 와서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는 신앙”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는데, 오늘 2016년 4월 3일 주일 여기 네 번째로 와서 “사람은 누구인가?”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고충엽 목사님이 사람의 ‘자존 감’에 대한 ‘격려’의 말씀을 전해달라고 부탁을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알아야 할 것들이 많은데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하는 것과 자기 자신을 바로 알아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거스틴과 칼빈은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과 자기 자신을 바로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지적했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앎으로 자기 자신을 바로 알게 됩니다. 오늘 아침에는 자기 자신을 바로 아는 것에 초점을 맞추면서 “사람은 누구인가?”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라고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삶과 운명이 정해 진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자신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부정적인 삶을 살게 되고, 자기 자신을 무가치하게 생각하면 무가치한 삶을 살게 되고, 자기 자신을 불행하게 생각하면 불행한 삶을 살게 괴고, 자기 자신을 비극적으로 생각하면 비극전인 삶을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후손들로 원죄와 자범 죄를 몸에 지니고 살아가는 우리 인간들은 과연 어떤 존재들입니까? 가치가 있는 존재들입니까? 무가치한 존재들입니까? 깨끗한 존재들입니까? 더러운 존재들입니다. 소망이 있는 존재들입니까? 절망적인 존재들입니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인들인 우리들이 우리 자신들을 바라볼 때 우리들은 모두 무가치한 존재들이고 더러운 존재들이고 절망적인 존재들이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의 선배님들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바라보면서 다음과 같은 절망적인 회개의 고백을 했습니다.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다윗).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이사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사도 바울). “나는 망할 지이옵니다”(어거스틴). “나는 작은 벌레입니다”(프랜시스). “나는 버림 받을 죄인입니다”(루터). “나는 망할 자이옵니다”(칼빈). “나는 눈 멀고 병 들고 연약한 죄인입니다”(웨슬레), “나는 아간과 같은 죄인입니다”(길선주). “나는 죄인 중의 괴수외다”(이기풍). “이 놈이 주님이 차지하셔야 할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습니다”(주기철).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며 티끌 같은 미말의 존재입니다”(이성봉). “나는 고멜과 같은 우상숭배한 음녀입니다”(김치선). “나는 어릴 때부터 범죄를 계속한 불의하고도 불충한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나는 큰 죄인임을 깨닫고 떨면서 울었습니다”(손양원). “나는 신사 참배한 죄인입니다”(한경직). “나는 83년 묵은 죄인입니다”(박윤선). 그렇습니다. 우리 죄인들은 누구나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바라보면서 우리들은 모두 무가치한 존재들이고 더러운 존재들이고 절망적인 존재들이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죄인들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소망이 있습니다. 유관순 열사와 손양원 목사와 한경직 목사와 성 프랜시스와 아브라함 링컨과 같은 분들은 참으로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긍정적으로 가치있게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사람은 누구인가?” 라는 제목으로 사람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사람의 가치와 자존감은 하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데서 옵니다. 어거스틴과 펠리칸 교수는 사람이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면 비관주의자가 되고 하늘과 하나님을 바라보면 낙관주의자가 된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기독교 신앙을 "비관주의적 낙관주의"라고 정의했습니다. 오늘 아침에 사람의 귀중하고 아름다운 ‘가치’와 ‘의미’에 대해서 세 가지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첫째로 사람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특제품이라는 사실입니다. 둘째로 사람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귀중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셋째로 사람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살 수 있는 존귀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누구입니까?
첫째로, 사람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특제품입니다. 제가 강변교회에서 목회할 때인 1999년에 “사람은 누구인가?” 라는 주제로 20 번 연속 설교를 한 일이 있는데 그때 제일 처음으로 한 설교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특제품" 이라는 제목의 설교였습니다. 제가 17년 전인 1999년 2월 7일 주일에 한 설교를 요약해서 소개하려고 하는데 그때 저는 설교를 다음과 같이 시작했습니다.
『"사람은 누구인가?" 오늘부터 새로운 주제를 가지고 설교를 시작합니다. 평양에 있는 역사 박물관에는 인류의 조상이 원숭이라고 분명하게 글로 도표로 그리고 그림으로 표현되어 있었습니다. 촬스 다윈은 사람이 아메바에서 기원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와 같은 표현과 주장은 모두 다 잘못된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사람의 기원은 원숭이나 아메바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주께서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시 139:14). 누가도 인류의 기원이 하나님이라고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 이상은 아담이요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라"(눅 3:38).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사람은 세 가지 재료로 지음을 받은 특별한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제일 먼저 흙이란 재료를 사용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창 2:7). 하나님께서 식물과 동물을 지으실 때도 흙을 재료로 사용하셨습니다(창 1:11,22). 흙은 자연의 기초가 되는 재료입니다. 식물도 동물도 광물도 사람도 모두 흙이란 재료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흙은 만물의 기초가 되는 재료입니다.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흙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한가지 재료를 더 사용하셨습니다. 특별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 특별한 재료를 사용하셨습니다. 그 재료는 하나님의 생기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만든 사람 속에 자기의 생기를 불어 넣으셨습니다.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생령이 된지라"(창 2:7). 그래서 ‘특제품’ 사람이 만들어 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또 한가지 재료를 더 사용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사람)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창 2:22). 하나님께서 여자를 만드실 때 사람의 한 부분을 재료로 사용하셨습니다. 가인과 아벨을 만드실 때는 부모의 몸의 일부를 그 재료로 사용하셨습니다.
『사람은 흙과 하나님의 생기와 그리고 사람의 일부분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는 자연성과 신성과 인성의 세 가지 성향이 있습니다. 흙으로 돌아가려는 성향과 하나님에게로 돌아가려는 성향과 사람에게로 돌아가려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목적하신 바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며 살도록 지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창 1:27). 하나님께서 사람을 자기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을 닮은 신적 존재로 지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생각하는 것이나 느끼는 것이나 결단하는 것이 하나님과 비슷하게 창조하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이야기도 하고 교제도 할 수 있는 신적 존재로 창조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릅니다. 아무리 무가치하게 보이는 사람도 모두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신적 존재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사람은 세 가지 목적을 가지고 살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첫째로 사람은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경외하면서 살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너는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하나님을 경외하라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13).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하심이라"(사 43:21).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경외하는 것이 사람의 본분이며 창조주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 사람의 본분입니다. 둘째로 사람은 사람을 귀중하게 여기고 친밀하게 서로 도우면서 살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아담에게서 취하신 갈비대로 여자를 만드시고”(창 2:20,22). 남자와 여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서로 친밀하게 도우면서 살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흑인도 백인도 모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것은 사람들이 인종이 다를지라도 서로 친밀하게 도우면서 살라는 데 창조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악한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형상이 조금은 남아 있습니다. 셋째로 사람은 만물을 보살피고 다스리면서 살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8). 여기 “정복하라 다스리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주를 보살피시고 다스리시는 방식으로 보살피고 다스리라는 말씀입니다. 자연을 파괴하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정복하라는 말씀은 발로 밟듯이 보살피며 다스리라는 뜻입니다. 즉 피조물에 굴복하거나 매이거나 붙잡히거나 노예가 되지 말고 발로 밟듯이 자연을 보살피며 다스리면서 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아침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첫 번째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람은 세 가지 재료로 지음을 받은 독특한 존재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신적 존재입니다. 사람이 지음을 받은 목적 세 가지를 말씀 드렸습니다. 첫째는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경외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사람을 귀중하게 여기며 서로 돕는 것입니다. 셋째는 만물을 보살피며 다스리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사람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지고 살아가십시다. 멋지게 사십시다. 보람되게 사십시다. 어제 50대밖에 안된 여신자 한 분에게 전화를 했더니 "사는 게 힘이 들고 재미가 없어요. 이젠 많이 살았는데요. 힘이 없어요" 라고 힘없이 말을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하면서 격려를 했습니다. “저는 60이 지났지만 사는 게 힘이 안 들고 재미가 있는데요"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특별하게 만드신 특제품들입니다. 특제품답게 자부심을 가지고 멋지게 보람되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위로와 축복이 어제 나에게 전화한 자매와 그리고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것이 제가 17년 전에 “사람은 누구인가” 라는 주제로 제일 먼저 한 설교를 요약한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입니까?
둘째로, 사람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귀중한 존재입니다. 사람의 가치와 행복은 사랑 받음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성부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신데 악독이 하늘에까지 상달한 니느웨의 죄인들과 동식물들을 심판하시는 대신 불쌍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푸신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욘 4:10,11). 성부 하나님은 가난하고 불우한 별 가치가 없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시면서 우리들도 고와와 과부와 나그네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음이니라”(신 10:17-19). 성자 예수님께서는 건강한 사람들이나 의인들을 귀중하게 보시지 않고 오히려 병든 자들과 죄인들을 귀중하게 보신다고 말씀했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 9:12,13). “예수께서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마 9:36). 성자 예수님께서는 죄인 중의 죄인인 일곱 귀신 들린 막달라 마리아와 부도덕한 수가성 여인과 핍박자 사울과 배신자 베드로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손길을 펴시고 또 펴시고 또 펴셨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각색 죄인들이 함께 모여있던 예루살렘에 강림하셔서 저들로 하여금 울면서 회개하도록 저들을 도우셨고 이방인 가이사랴에 강림하셔서 이방인들로 하여금 무릎을 꿇고 회개하도록 저들을 도우셨고 지금은 자기와 세상과 돈과 정욕에 사로잡힌 우리들로 하여금 쥐꼬리만한 눈물이라도 흘리면서 회개하도록 우리 죄인들을 돕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강변교회에서 목회할 때인 1999년에 “사람은 누구인가?” 라는 주제로 20 번 연속 설교를 한 일이 있는데 19 번째로 한 설교가 "헵시바와 쁄라로 지음 받은 존재" 라는 제목의 설교였습니다. 그때 한 설교를 요약해서 소개하려고 하는데 그때 저는 설교를 다음과 같이 시작했습니다.
『"사람은 누구인가?" 오늘 19번째 설교를 합니다. 오늘 사람은 하나님께서 너무나 기뻐하시는 존재이고 하나님께서 극진히 사랑하시는 존재이고 하나님께서 제일 좋은 것으로 축복하시는 존재라는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쁄라라 하리니"(사 62:4).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다시는 너를 버리운 자라 칭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칭하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나의 기쁨이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나의 사랑이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바가 될 것임이라"(사 62:4). 사람이 누구입니까? 사람은 "헵시바와 쁄라로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과 사랑의 대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여기 이스라엘은 구원함을 받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가리킵니다. 강변교회 초기에 조춘국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평생 불교를 믿던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고통스러운 일로 인해 척추암에 걸렸습니다. 그러던 중 한도정 권사님의 인도로 성경공부에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 먹으며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했습니다. 조춘국씨의 삶은 바꾸어졌습니다. 근심이 변해서 기쁨이 되었고 미움이 변해서 사랑이 되었습니다. 그는 수 많은 사람들에게 전도했습니다. 저는 그 분이 너무나 예쁘고 너무나 귀했습니다. 한 4년후 조춘국씨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다 하고 기도와 찬송 가운데 운명했는데 그 때 제가 그 분의 눈을 감겨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조춘국씨를 구원하신 다음 조춘국씨를 향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했을 것입니다. "다시는 너를 버리운 자라 칭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칭하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나의 기쁨이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나의 사랑이라] 하리니."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고 너무나 기뻐하시고 극진히 사랑하신다는 하나님의 고백의 말씀을 들을 때 놀라움과 감격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토로했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관데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시 8:4). 스바냐 3:17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꼭 같은 말씀을 했습니다.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습 3:17). 우리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의 고백의 말씀을 들을 때 너무나 큰 놀라움과 감격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어떻게 제가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이 되며 어떻게 제가 하나님의 사랑의 고백의 대상이 됩니까?" 우리는 그저 하나님 앞에서 입을 다물고 눈물을 흘릴 뿐입니다.
『눅 7장에 나오는 죄인인 한 여자는 주님의 사랑에 감격해서 그저 눈물을 흘릴 뿐이었습니다. "죄인인 한 여자가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눅 7:37,8). 이 여인은 주님의 극진한 사랑과 기뻐하심을 받고 눈물과 사랑으로 응답을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여자를 보시고 기뻐하시며 더욱 더 그를 사랑하시며 칭찬하셨습니다.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눅 7:47,50). 여러분들과 저는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이 되었고 사랑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배순자 집사님이 손자 찬후를 보고 그저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사랑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구원 받은 배순자 집사님을 보시고 그저 즐거워하시고 기뻐하시고 사랑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목사도 새로 교회에 나와서 은혜 받고 믿음의 걸음마를 시작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저 좋고 기쁘고 즐겁고 사랑스럽습니다. 지난 금요일 연합구역 모임에서도 우리 교회에 2주 전에 등록하고 새로 나오기 시작한 정영숙씨와 이경아씨가 교회를 좋아하고 하나님을 좋아하게 되었다는 솔직한 고백의 말을 했는데 저는 그들을 보기만 해도 즐겁고 좋고 기쁩니다. 회개하고 죄 사함 받고 예수 믿게 된 여러분들은 모두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이 되었고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시고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눅 15:22). 회개하고 돌아온 탕자에 대한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과 기쁨이 눅 15장에 나타나 있습니다. 배은망덕한 아들, 알거지가 되어 돌아 온 탕자를 기뻐할 이유도 사랑할 이유도 축복할 이유도 아버지에게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맏아들은 아버지가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축복하는 것을 보고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을 뿐 아니라 노를 발했다고 했습니다. "저가 노하여 집에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눅 15:28). 그러나 아버지는 그저 즐거워했습니다. "살진 송아지를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아버지는 돌아 온 아들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돌아 온 아들을 보고 즐거워했고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혔습니다. 손에 가락지를 끼웠습니다. 발에 신을 신기었습니다. 살진 송아지를 잡았습니다. 즉 아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의식주와 존귀한 지위를 모두 하사했습니다. 돌아 온 아들을 축복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회개하고 돌아와서 하나님을 믿는 자들을 축복하십니다. 의식주를 축복하십니다. 존귀한 지위도 주십니다. 사회에서 존경을 받게도 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축복하셨고 이삭을 축복하셨고 야곱을 축복하셨습니다. 고넬료도 루디아도 브리스길라도 가이오도 축복하셨습니다. 그들의 집이 모두 교회가 되었습니다. 영혼이 잘 되게 하시고 범사에 잘 되게 하시고 몸이 건강하게 축복하십니다.
『사람이 누구입니까? “헵시바와 쁄라로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즉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과 사랑의 대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너무나 기뻐하시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극진히 사랑하시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일 좋은 것으로 축복하시는 존재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단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죄인인 한 여인처럼, 탕자처럼 회개하고 아버지 품으로 돌아 온 자가 그렇습니다. 데마 같이 유다 같이 하나님의 품을 떠나면 기쁨의 존재 대신 슬픔의 존재가 되고 사랑의 존재 대신 미움과 저주의 존재가 됩니다. 우리는 회개하면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 와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기쁨과 사랑의 대상이 됩니다. 우리는 존귀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좋아하는 존재가 아니라 우주의 하나님께서 좋아하시고 사랑하시는 존귀한 존재가 됩니다. 우리는 존귀한 존재답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 앞에 아름답고 예쁜 모습도 나타내 보이고 재롱도 부리고 멋도 부리고 자부심도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이 여러분들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이것이 제가 17년 전에 “사람은 누구인가” 라는 주제로 19 번째로 한 설교를 요약한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입니까?
셋째로, 사람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갈 수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제가 17년 전인 1999년 2월부터 7월까지 “사람은 누구인가?” 라는 주제로 20번 설교를 했는데 1999년 년 7월 11일 주일에 20 번째로 즉 마지막으로 한 설교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야 하는 존재" 라는 제목의 설교였는데 그때 한 설교를 요약해서 소개합니다. 제가 그때 설교를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사람은 누구인가?" 지난 주일 사람은 헵시바와 쁄라로 지음 받은 존재라고 설교했습니다. 즉 사람은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존재라고 설교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 설교를 듣고 왜 목사님이 진작 그런 설교를 않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설교를 듣고 격려와 위로를 많이 받았다고 감사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요사이 좋은 설교를 들으면서 은혜를 많이 받아서 얼굴이 더 예뻐졌다고 자랑했습니다. 다 좋습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심과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하나님의 축복하심을 받으며 사는 존재가 우리들이라는 말씀은 너무나 좋은 말씀입니다.
『오늘 아침에는 "사람은 누구인가?" 라는 주제로 마지막 20번째 설교를 하겠습니다. 사람은 누구입니까?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살아야 하는 존재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 존재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부모님의 사랑과 기쁨을 받으며 사는 자식이 부모님을 사랑하고 부모님을 기쁘시게 하며 살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기뻐하심과 사랑하심과 축복하심을 받으며 사는 존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랑하고 영광을 돌리며 살아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유교의 세계에서는 사람의 존재 가치를 부모에게 효도하고 가문을 빛내고 군왕에게 충성하는데 둡니다. 공산주의 세계에서는 사람의 존재 가치를 국가와 수령님에게 충성하는데 둡니다. 20세기 말 현대 세계에서는 사람의 존재 가치를 아마 개인의 행복과 쾌락을 추구하는데 둘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세계에서는 사람의 가치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둡니다. 특히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For the glory of God)를 삶의 모토로 삼았습니다. 칼빈의 삶의 모토는 "하나님께만 영광을" (Soli Deo gloria)이었습니다. 종교개혁의 산물인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문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이뇨?" 라고 질문한 다음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니라"고 대답했습니다.
『오늘 아침 저는 여러분들에게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사람은 누구입니까? 여러분에게 있어서 사람의 존재 가치는 무엇입니까? 이 질문은 "사람은 누구인가?" 라는 주제의 설교 중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요 가장 본질적인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질문 여하에 따라서 여러분들이 이기적으로 살 수도 있고 이타적으로 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 질문 여하에 따라서 여러분들이 짐승처럼 살 수도 있고 천사처럼 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인본주의적 삶을 살 수도 있고 신본주의적 삶을 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아침 몇 가지 성경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이 수령님을 노래하는데 있지도 않고 연인을 노래하는데 있지도 않고 내 명성을 노래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노래하며 하나님께 찬송을 부르게 하는데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지으신 목적이 하나님 찬송을 부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박치원 장로님을 지으신 목적이 물론 라트라비아타나 안중근 오페라를 노래할 수도 있지만 박치원 장로님을 지으신 근본적인 목적은 하나님 찬송을 부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가대원들을 지으신 목적도 성가대원들이 찬송을 부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있다는 말씀입니다. 모두 그렇게 믿으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지 말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라는 데 있습니다.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고 자기에게 돌리다가 충이 먹어 죽었다고 했습니다(행 12:23). 전두환 대통령이 대통령 말기에 "총재에게 영광을" 이라는 플락카드를 내 걸고 자기가 영광을 받으려고 하다가 백담사로 쫓겨가는 치욕을 당했습니다. 자기 자랑을 많이 하는 사람은 위태로운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자랑하고 싶은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라"고 분부했습니다(빌 3:3). 자기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선언하기도 했습니다(갈 6:14).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자기 노래를 부르라고요? 아닙니다. 자기 자랑을 하라고요? 아닙니다. 하나님을 노래하고 하나님을 자랑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지어주셨습니다.
『"이 병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어느 날 예수님께서 베다니의 나사로가 죽을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가 슬픔과 절망에 빠져 사람들을 예수님에게 보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함이라"(요 11:4). 죽을 병에 걸린 이유가 슬픔과 절망 가운데서 살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 된 한 사람을 보셨습니다. 제자들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이 사람이 소경 된 것이 자기 죄 때문입니까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그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요 9:3). 나면서 소경으로 불행하게 태어난 이유도 한 평생을 슬픔과 절망 가운데서 살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을 보시는 눈은 달랐습니다. 건강한 사람은 물론 나면서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이나 죽을 병에 걸린 사람을 보실 때 그 사람의 존재 가치는 그저 병자로 슬픔과 절망 가운데서 불행하게 사는데 있지 않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있다고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안흥규 장로님을 보시는 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 장로님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함이라." 중풍병에 걸린 한 사람의 존재 가치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저희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눅 5:25). 문둥병에 걸린 한 사마리아인의 존재 가치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눅 17:15). 여리고 성에 살던 한 소경의 존재 가치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있었습니다.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좇으니"(눅 18:43).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보실 때 베드로가 죽음을 통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을 내다 보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요 21:19).
『손양원 목사님의 존재 가치도 조니 에릭슨의 존재 가치도 송명희 시인의 존재 가치도 그리고 여러분들과 저의 존재 가치도 모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건강한 사람은 물론 병든 자들을 보실 때도 그들이 모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야 할 존귀한 존재들로 보셨습니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함이라"(요 11:4). 지금 예수님께서 여러분들을 보시는 눈 빛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시시한 존재가 아닙니다. 불행하게 살 존재가 아닙니다. 어떤 한 사람만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 존재도 아닙니다. 어떤 한 가문이나 어떤 한 사업이나 어떤 한 학문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 존재도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각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 존귀한 존재들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의 삶에는 변화와 혁명이 일어납니다. "나 같은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다니!" 삶의 보람과 감격과 기쁨을 발견하게 됩니다.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에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삶의 의미와 가치의 전부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데 두었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 1:20,21). 사도 바울은 가장 가치 있는 높은 차원의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높이고 예수님을 자랑하며 살았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산다는 것은 하나님 생각에 사로잡혀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너무 좋아하면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 생각에 사로잡혀서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음악공부를 하든지 경제공부를 하든지 사업을 하든지 가정 일을 하든지 하나님 생각에 사로잡혀서 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일 수가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가 있을까? 늘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좋아하면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두 가지로 요약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정성껏 예배드리면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롬 12:1). 둘째는 이웃을 기쁘게 하고 이웃에게 유익과 사랑을 베풀면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라"(고전 10:33). 자기 집착에서 벗어나 하나님 생각에 사로잡혀서 위로는 기도와 예배에 전념하고 옆으로는 전도와 봉사에 전념하는 삶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 여러분들의 남은 생애가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고 "이웃의 유익을 위하여" 사시는 생애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만 영광을"이 여러분들과 저의 삶의 모토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이것이 제가 17년 전에 “사람은 누구인가” 라는 주제로 20 번째로 한 설교를 요약한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사람은 누구인가?” 라는 제목으로 사람의 ‘자존 감’에 대한 ‘격려’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고충엽 목사님이 사람의 ‘자존 감’에 대한 ‘격려’의 말씀을 전해달라고 부탁을 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 사람의 ‘자존 감’에 대한 ‘격려’의 말씀을 잘 들었습니까? 사람은 누구입니까? 사람은 무엇보다 먼저 죄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이 우리 자신들을 바라볼 때 우리들은 모두 무가치한 존재들이고 더러운 존재들이고 절망적인 존재들이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람들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첫째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특제품들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귀중한 존재들입니다. 셋째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살 수 있는 존귀한 존재들입니다. 우리들의 몸과 마음과 영혼 속에는 죄악으로 가득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몸과 마음과 영혼 속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조금은 남아있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없는 부끄러운 존재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우리들은 가난하고 무식하고 병들고 죄악으로 가득한 부끄러운 존재들이지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살 수 있는 특별한 존재들입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찬송가 405장 410장 414장을 다 같이 부르면 좋겠습니다.
복을 주시며
창 1장 27~28절 / 강성찬목사(전주동부교회)
영국 에딘버러 의과대학에 제임스 심슨 경 이라는 분은 마취제 클로로포름을 발견한 사람으로 알려 집니다. 그 당시까지는 수술을 할 때 마취를 하지 않고 그대로 생살을 찢고 했습니다. 그래서 수술을 하는 사람들의 공포심은 이루 말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심슨 경이 발견한 클로로포름 덕분에 그 뒤로 많은 사람들이 수술의 공포감에서 해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에 제자들이 찾아 와서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선생님, 평생을 통해서 가장 위대한 발견을 했다고 한다면 무엇을 들겠습니까?.” 그들은 그가 “마취제 클로로포름을 발견한 것이 내 생애 최대의 발견이었다.”하고 말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는 너무나 뜻밖의 대답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내 생애에 있어서 최고의 발견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불쌍한 죄인인 나를 위해 죽으시고 나를 구원해 주셨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라고 말을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맨 나중에 창조하심은 인간을 위해 모든 조건을 준비해 두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를 보여줍니다.
사람이 모든 피조물들 중 가장 나중에 창조됨은 세상을 창조하는 일에 사람이 하나님을 도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갖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라 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맨 마지막에 창조되었다는 사실은 사람에게 영광과 은총이 아닐 수 없었다고 봅니다. 왜 영광이 되는가요? 창조의 방법이 덜 완전한 것에서부터 보다 더 완전한 것으로 발전하였기 때문이라 합니다. 왜 은총이 되는가요? 사람이 거할 저택이 그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완전히 준비되고 꾸며진 이후에야 비로소 그가 창조되었기 때문이라 합니다.
사람은 창조 받은 즉시 눈에 보이는 모든 피조물들을 소유하여, 그것들을 관찰하며 즐거움을 얻을 수 있도록 사람을 지으시고 복을 주셨습니다.
복을 주시며의 복의 기본 뜻은 '무릎 꿇다'(시 95:6)로 이 말이 하나님께 적용될 때에는 '찬송하다'(9:26), 피조물에게 적용될 때에는 '축복하다'(27:33)란 뜻이 됩니다.
복을 주시며(창 1:22)는 직역하면 그러자 그분께서 복을 주셨다 입니다. 복을 주셨다는 것은 삶의 모든 정황 가운데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잘 되도록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가운데서 이러한 하나님의 복은 성공 번영 다산과 관련하여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좌절감에 깊이 빠진 사람이 담임 목사를 찾아가 신앙 상담을 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교육도 많이 받지 못했고 부모님께 받은 상속 재산도 없고 몸도 건강하지 못합니다. 저는 항상 열등의식과 좌절감, 자학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천한 저에게 무슨 복을 주시겠습니까?" 하고 말했습니다. 그 사람에게 목사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어느 날 미국 시카고의 한 호텔에서 노신사 한 사람이 접수원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여보시오, 이 호텔에서 제일 값이 싼 방을 안내해주시오." 그런데 접수원이 이 노인을 보는 순간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당대 유명한 거부 록펠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니, 당신은 록펠러 씨가 아니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노인은 그렇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이 접수원은 "아니, 당신의 아들은 우리 호텔에 오면 언제나 제일 비싼 방을 구하는데 어떻게 당신은 제일 싼 방을 구하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록펠러는 안경 너머로 접수원을 바라보더니만 "내 아들에겐 나 같은 부자 아버지가 있지만 나에게는 그런 아버지가 없다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실의에 빠진 사람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 목사님은 "형제님은 자신을 비천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당신 아버지가 얼마나 부자인줄 아시오?"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은 "아니, 우리 아버지가 부자라고요."하며 놀랐습니다. 형제님은 "예수님을 믿습니까?" "네, 믿습니다." "형제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요." "네, 부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얼마나 부요하시고 존귀하신 분이십니까. 형제님은 바로 그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입니다." 우리를 지으시고 복을 주시었습니다.
남자와 여자를 지으시고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한 남자와 한 여자를 지으셨습니다. 이것은 모든 민족들이 한 혈통이며 한 줄기로부터 나온 자손들이라는 것을 알고 이로써 서로 사랑하게 하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창 2:18)하십니다.
좋지 못하니(로 토브)하신 좋지(토브)는 상대적으로 '더 낫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선하신 뜻을 좇아 지으신 피조물 중에 보시기에 좋지 못한 것은 본래 하나도 없었습니다(1:31). 따라서 이 말은 다만 아담이 혼자 지내는 것보다 하와와 함께 거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더 낫다는 의미입니다.
돕는 배필(에제르 네게드)은 '조력자', 반려자'란 뜻입니다. 이것은 남편에 대한 아내의 마땅한 역할이 어떠한 것인지를 암시해 줍니다(고전 11:9 ; 엡 5:24). 그러나 이 말이 남성 우위론의 근거로 잘못 사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남녀의 차이는 신체적, 기능적 문제이지 인격적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남자든 여자든 다 그분의 성품을 함께 나눠 받은 동등한 인격체일 뿐입니다(고전 11:11).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라고 합니다. 최초 결혼에 나타난 원리는 책임을 지닌 성숙한 존재로서 부모로부터 떠나는 '독립성' 동등한 두 인격체가 만나는 '연합성' 두 몸이 사랑으로 하나되는 '합일성'입니다. 이러한 연합과 합일의 원리는 장차 신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신부되는 그의 교회와의 완전한 '연합'을 예표 합니다.(엡 5:31, 32)
하나님께서는 6일 동안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당시 제일 마지막 날에 모든 피조물을 대표할 존재요, 다스릴 존재요, 당신의 영광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하지만 그는 다른 피조물들이 짝을 이룬 것과는 달리 홀로 독처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돕는 배필을 만들어 주기로 하시고, 그를 잠재우신 후 그의 갈빗대로 손수 여자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동시에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돕는 배필]이라는 것은 상대가 자신을 도와주기를 바라는 것보다 자신이 먼저 상대를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어느 젊은 부부가 결혼을 하고 시부모를 모시고 자녀를 낳아 키우며 살았습니다. 살아가면서 속상한 일도 많이 있지요. 지혜로운 아내는 남편에게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여보, 내가 앞치마를 45도로 돌려 있었을 때는 내가 몹시 속상해 하고 있다는 표시이니까 잘해 주세요." 하고 부탁을 했습니다. 남편이 퇴근하고 돌아와서 가끔씩 아내가 앞치마를 돌려 입었을 때는 비위를 맞추어가며 극진히 잘했습니다. 그렇게 사랑을 받은 아내는 자기만 그렇게 받으니 미안해서 "여보, 당신도 직장생활 하면서 속상한 일을 당했을 때는 퇴근하면서 모자를 돌려쓰세요? 그러면 내가 잘 해 드릴께요." 남편이 속상해서 모자를 돌려쓰고 퇴근한 날은 신경을 써서 잘해드렸습니다. 이렇게 번갈아 가면서 서로 잘해주며 살았습니다. 어느 날 남편이 직장에서 속상한 일이 생겨 모자를 돌려쓰고 퇴근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아내도 속상한 일이 생겨서 앞치마를 돌려 입고 있었습니다. 이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람은 다 모자라고 허물이 많고 부족한 일이 생겨서 이런 경우를 만날 수 있는데 이때는 하나님의 은혜로 해결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온전히 하나를 이루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짝지어서 부부로 삼아주신 것은 서로 간에 돕는 배필이 되라고 하심입니다. 내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나의 배우자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기대하는 배필이 되라고 우리를 짝지어주신 것은 아니라 상대를 도와주는 배필이 되도록 지으시고 복주시었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며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복을 주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충만하라는 모든 생물에게 주신 복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창 1:22)고 합니다.
생육은 결실하다 무성하다 창대하다로 번역 되며 기름진 땅에서 햇볕을 충분히 받아 잘 자란 과일 나무에 과일이 주렁주렁 매달린 상태를 뜻합니다.
'번성'하라는 '많을'(7:17) 뿐만 아니라 '크고'(스 10:13) '강한'(대하 11:12)상태를 뜻합니다. 이와 같이 유사한 언어를 반복하여 기술한 것은 하나님이 생물들에게 생명의 보존력과 번식력을 복으로 주심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복은 오늘날에도 생명체마다 제각기 갖고 있는 자기 방어 수단과 독특한 출산 방식으로써 종족을 보존, 번식시키는 것에서 잘 드러납니다.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채워주심'(렘 15:17)으로 '넘칠'(수 3:15)정도로 '가득한'(6:13) 상태를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서 복의 신적 기원을 풍부함을 보여 주는 표현입니다.
만물은 '온 땅에 거하도록'(행 17:26)지어졌습니다. 이 땅은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하여금 보다 나은 상태를 준비하는 수습생으로서 거하게 하고자 정하신 장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에게는 모든 생물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말씀을 더하십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8)고 합니다.
정복하라(카바쉬)는 '발로 밟다'(미 7:19), '복종시키다'(민 32:22)란 뜻으로 이 세상의 여러 곳을 다니며 그 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는 것을 뜻합니다.
다스리게는 '주권을 잡다' '지배하다', '세력을 떨치다', '통치하다'라는 뜻입니다. 인간이 다른 피조물들을 주관할 수 있는 권위와 능력을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고등한 존재로서 다른 피조물들에게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는 절대주권을 행사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로 볼 때 땅으로 대표되는 이 지상의 모든 것에 대해 권한이 본질적으로는 창조주 하나님께 있었으나 이것이 인간에게 위임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복과 다스림의 권한이 결코 하나님의 창조물을 인간 마음대로 취급하여도 좋다는 방종의 허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는 땅을 개발하여 자연을 잘 관리하여 선한 목적을 이루라는 하나님의 문화 명령(Cultural Mandate)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택하신 백성들을 지켜 보호하시고 필요를 따라 도움의 손길로 함께 하십니다.
1858년 미국 뉴욕 한 가정에 다리는 절고, 눈은 잘 안보이고, 호흡에 문제가 있는 소아마비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처음에 그 부모는 하나님을 원망했으나 곧 생각을 바꾸어 아이를 선물로 여기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부모는 날마다 아이를 어루만지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너를 사랑하신단다. 하나님이 너와 늘 함께하시고 지키신단다. 너를 귀히 쓰신단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이 아이가 28세 때 뉴욕시장이 되었고 그 후 뉴욕 주지사와 미국 부통령을 거쳐 43세의 나이로 미국 대통령이 됩니다. 이 사람이 바로 미국의 26대(1901∼1909)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라 합니다. 부모의 기도대로 하나님이 지켜주셨고 도와주시고 복주시는 은총이 함께 한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지으시고 복을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덴 사람들을 향해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행17:22)라고 외쳤는데 이는 굳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 하더라도 인간은 자신을 의탁하고 복을 구할 대상을 찾는 본질적 성향을 지닌 존재임을 알 수 있게 합니다.
사도 바울이 아덴 사람들에게 종교성이 많다고 말했을 때 사용된 종교심이라는 용어는 (deisidaimonestevrou" 데이시다이모네스테루스)는 '두려워하다'라는 의미의 말(deilov" 데이로스)과 신이라는 뜻의 말(daivmwn 다이몬)이 결합된 형태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종교성이란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신에 대한 두려움'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칼빈'(Calvin)은 그의 저서 기독교 강요에서 인간은 누구나 선천적으로 신에 대한 인식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을 역설하였습니다. 또한 '루이스 벌콥'(Louis Berkhof)도 인간의 삶에 있어서 종교는 보편적 현상이라는 점을 지적하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종교는 기독교나 여호와 신앙만을 일컫는 것은 아니며, 단순히 포괄적인 의미에서 신에 대한 인식과 그 신에 대한 경외심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인간에게만 있는 종교적인 가능성을 가리켜 '종교의 씨'('칼빈'(Calvin)라고 표현했으며, 사도 바울은 인간의 속성 가운데 '하나님을 알 만한 것'(롬 1:19)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왜 인간에게만 종교성이 있는가 할 때 그것은 인간은 다른 피조물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특별한 도모가운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이 다른 모든 동물들과 구별된 독특한 존재가 된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창 1:26)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 창조와 동물 창조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동물들을 흙으로 지으셨습니다.(창2:19)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흙으로 지으신 다음에 '생기'를 불어 넣으시어 생령이 되게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인간이 처음 창조 되었을 때 생령 곧 영적 생명을 지닌 존재가 되었음을 알 수 있고 이 영적 생명은 곧 하나님의 형상임을 알 수 있으니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입니다(요4:24)
하나님께서 영적 존재인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도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당연히 영적인 소망과 함께 영적인 지향성을 지니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 가운데 인간의 이성, 지성, 양심 등이 넓은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구분될 수 있으며, 이 넓은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요인 때문에 인간은 신을 찾고 영적인 갈구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종교성은 하나님께서 주신 요소이나 그것만으로 바른 신앙을 갖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 종교성에 하나님의 계시가 맞추어질 때에 비로소 신앙이 바르게 자리 잡는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특수 계시 곧 성경과 성령의 도우심을 받지 못하면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거듭난 심령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 할 때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스위스의 철학자 중에 힐티는 인간 행복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인간적인 방법과 논리, 그리고 지식을 가지고 행복을 추구하려 해도 이는 추상적인 것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결국 그가 발견한 것은 성경을 읽고 성경 안에서 참다운 행복을 깨닫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 후 힐티는 모든 사람들의 추앙 받는 행복론 자가 되었고, 77세로 삶을 마감할 때까지 매일같이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감사하고, 찬송하는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의 ‘행복론’에서 “주 안에 있는 시간이 행복한 시간이며, 찬송하는 시간이 평화로운 시간임”을 확실히 깨닫고 증거 했다고 합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책상에서 빛바랜 낡은 성경과 ‘영원한 평화’라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논문이 발견되었는데, 거기에는 “진정한 행복은 그리스도에게 있으니 파랑새를 잡으려 하는 허황된 행복론 자들이여 어서 속히 주님 품으로 돌아오라.”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이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생임을 기억하고 참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사랑의 관계 안에서만 인간은 가슴 가득한 기쁨과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밖에 있는 것은 다 거짓이요, 허위요, 마귀의 속임수에 불과한 것입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는 전도자의 말과 같습니다. 물거품은 분명히 있지만 붙잡아 보면 그 속엔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아무리 버잘 것 없는 존재로 취급 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천하 보다 귀한 존재로 우리를 인정 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당당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아울러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항상 존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께 존귀한 존재인 만큼 다른 사람도 동일하게 존귀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멸시 한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행동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곧 하나님의 형상의 반영이기 때문입니다. 국가 원수의 사진을 고의적으로 훼손한다면 국가 원수의 모독이 됨과 같이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것은 그 안에 내재된 하나님의 형상을 멸시하는 것이므로 신성모독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존귀한 자로 여길뿐더러 다른 사람도 존귀한 자로 여겨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시고 복주셨습니다.
교육하고 선교하고 봉사하며 천하보다 귀한 영혼 사랑으로 전도하되 복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한 번 깨닫고 사명 감당하며 영광 돌리는 교회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일곱째 날을 복주사
이동규목사 / 창1:31-2:3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기계는 쉼이 필요 없습니다. 쉼이 있다고 해도 단순합니다. 열과 부하를 식히고 줄이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쉼은 까다롭습니다. 그냥 쉬어서는 안됩니다. 영화도 보고 취미생활도 즐기고, 외식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제 기능을 발휘합니다. 그래서 노동계에서는 최저생계비에 문화생활비도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 쉼은 이렇게 중요합니다.
두 나무꾼 친구가 산에 올라갔습니다. 경쟁적으로 나무를 찍어 장작을 만들어갑니다. 한사람은 유달리 승부욕이 강했습니다.그는 친구에게 지지 않을려고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열심히 나무를 찍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친구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50분 일하고 10분 쉬는 식으로 숨을 돌려 가면서 일했습니다. 어느덧 산을 내려갈 시간이 되어 두 사람은 각자 서로가 수고한 결과를 비교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셈일까요 ? 쉬어가면서 일한 친구가 더 많은 장작을 장만했더랍니다. 승부욕이 강한 친구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투덜거렸습니다. "내가 더 열심히 했는데도 왜 자네 것이 더 많단 말인가 ?" 그러자 다른 한 친구가 점잖게 설명했습니다. " 나는 10분씩 쉴때마다 도끼날을 갈았다네."
당연히 이길 수 밖에 없었습니다. 도끼날 무디어 지는 줄도 모르고덮어 놓고 열심만 낸다고 되겠습니까 ? 쉬는 시간은 도끼날을 가는 시간입니다. 도끼날을 가는 시간이 나무를 베는 시간을 죄우합니다. 안식은 일을 결정하고, 주일은 한 주간의 삶을 결정합니다. 예배는 한 주간의 삶의 질을 결정합니다. 쉼은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시간입니다. 하나님 안에 들어가는 시간입니다. 도끼날을 갈게 됩니다. 문제는 여유입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님 안에의 안식입니다.
현대인들은 너무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늘 각성 되어 있습니다. 일에, 인간관계에, 걱정에 불안에, 성공에 각성되어 있습니다. 매일 꿈꾸듯 몽롱한 것도 문제지만, 매일 각성되어 있는 것도 문제입니다. 끊임 없이 각성 시키면 돌아 버립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통화를 해야 장사가 되는 휴대폰 회사에서 ‘꺼두셔도 좋습니다’란 광고를 내 보냅니다.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은 이 만큼 쉼이 없습니다.
이런 현대인들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쉼의 말씀입니다.
* 하나님이 쉬셨습니다.
왜 쉬어야 합니까? 여러 이유와 설명이 필요하겠지만, 하나님이 쉬셨기 때문에 우리도 쉽니다. 이것이 가장 큰 이유요 근거입니다. 쉬어야할 필요가 없는 하나님이 엿새를 일하시고 이레째 쉬셨습니다. 물론 안식의 원칙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믿음의 인간들도 쉽니다. 하나님의 안식은 우리 안식의 모범이요, 규범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서 안식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하시는 하나님이시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일만 하시는 하나님이시라면, 우리 인간은 참으로 삭막하고 불안할 것입니다. 끊임 없이 우리에게 일만 강요하는 하나님이라면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이 쉬시고 우리에게 쉼을 요구하십니다. 이것이 은총입니다. 쉬시는 하나님은 은총의 하나님이십니다.
일없이 쉼이 없고, 쉼 없이 일이 없습니다. 일은 쉼을 만들어야 하며, 쉼은 또 일을 창조합니다.
* 하나님 안에서 안식
‘안식(솨바트)’이란 말은 일에 지쳐 골아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일을 마친 후 새로운 활동을 시작하지 않고 잠시 휴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창조의 연장으로서의 쉼이요, 창조를 위한 쉼입니다.
사실 쉼은 창조의 연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참된 쉼은 창조의 끝에 나오는 쉼이라야 의미가 있습니다. 매일 쉬고 또 쉬는 쉼은 하나님의 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쉼은 엿세 일하고 그 일의 창조의 연장으로서 이레째 쉬는 것입니다. 그래서 쉼은 창조의 중단이 아니라, 창조의 연장이요, 창조의 다른 모습입니다. 이렇게 되면 참된 쉼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안식일을 거룩하게(카다쉬) 하셨습니다. 이 날을 하나님이 거룩하게 하시니 거룩해진 것입니다. 안식일이라는 그 날 자체가 거룩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거룩을 생산하십니다. 날의 주체는 하나님입니다. 안식의 주체도 하나님입니다. 본말이 전도되어서는 안됩니다.
거룩한 사람은 일하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는 사람입니다. 마르다 보다는 마리아입니다. 쉼이 올바라야 일도 올바라집니다. 우리 교회에서 이것 무척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촛점, 중심, 질서도 같은 원리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의 쉼은 어떤 것이어야 합니까? 하나님 안에서의 안식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안식 하는 것은, 체념이나 게으름하고는 다릅니다. 일하지 않고 쉬는 사람 중에도 불안은 있고, 분주하게 일에 몰입해 있는 사람 중에도 하나님의 안식을 겸험하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문제는 일이 아닙니다. 문제는 이렇게 자연 속에 있는 휴양림이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안식입니다.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을 잘 아시지요? 다섯 남자의 편력에도 참된 영혼의 쉼이 없어 방황하고 목말라하던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참된 복음의 진리를 주셨습니다. 그랬더니 이 여인은 영혼의 안식을 얻고 삶의 생기를 찾았습니다. 물동이를 던져 버리고 마을로 뛰어 내려 갔습니다. 생기 발랄한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렀스니다. 참된 쉼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쉼입니다. 육체가 편해서 쉼이 아닙니다. 정신이 안정되어서도 진정한 쉼은 아닙니다. 영혼이 평화를 누려야 참된 쉼입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안식은 열심히 일해도 쉼입니다.
일곱째 날은 복주신 날입니다.
여섯째 날 까지는 단지 보시기에 좋은 날이지만, 일곱째 날은 복주신 날입니다. 안식일은 근본적으로 인간에게 복주는 날입니다. 인간에게 축복된 날입니다. 인간을 위한 날입니다. 때문에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일곱째 날- 복주시는 날의 지대를 만들어야 합니다.
일곱째 날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많습니다. 끊임 없이 일하고 있습니다. 일곱째 날은 하나님이 복주시고 거룩게 하셨습니다. 거룩하게 하신 것은 곧 구별된 지대를 말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지금 자신에게 반문해 봐야 합니다. 나의 삶에서 구별의 지대는 있었는지? 나의 삶에서 거룩의 지대는 있었는지? 기도하고 하나님과 대면하는 시간,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 하나님과 연합하는 시간, 하나님과 화해하는 시간, 하나님의 용서와 은총을 덛 입는 시간은 모두 거룩의 지대요, 참된 안식의 시간입니다. 영혼의 엔돌핀이 막 나오는 시간입니다. 이것이 거룩의 지대입니다.
이런 복된 거룩의 시간은 하루 사이에도 있어야 하고, 한 주간 사이에도 있어야 합니다. 한해의 사이에도 있어야 하지요. 주님과의 대면을 잃어 버리고 사는 사람은 쉼표가 없는 사람의 삶입니다. 참으로 복을 누리지 못하는 삶이라 할 수 없지요.
사실 참된 쉼은 얻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입니다. 쥐는 것이 아니라, 놓는 것입니다. 투쟁, 긴장, 염려, 성급함, 조급증, 과잉책임감, 소유욕, 다 얻으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손에 무엇을 움켜 쥐려고 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믿음, 평온, 온전함, 안식은 버리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손에 무엇을 가지지 않는 것입니다. 손엣 것을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것입니다. 버림은 쉼이요, 이것이 복입니다.
여러분 여기 불영계곡 깊은 곳, 통고산 자연 휴양림에 오셨을 때, 좋~타 소리가 절로 났지요? 이것이 창조입니다. 보기에 좋은 것은 좋~타입니다. 하나님이 하루 하루의 창조 끝에 하신 말씀이 우리에게 전수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안식(쉼)은 그 좋~타를 누리는 것입니다. 누리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누리지 못하는 사람의 불행을 아십니까? 만들기만 하고 누리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결핍하고 빈곤한 처지에 있지만 누릴줄 아는 사람은 참으로 복있는 사람입니다. 왜요? 누리는 만큼 자기의 것이 되니까요.
어떤 중학생이 미국에 있는 친구와 팬팔을 하는 데 자신의 집을 찍은 사진을 한장 보내 왔더랍니다. 보니까, 수영장도 있고 넓은 정원에 그림 같은 집이더랍니다. 그래서 자신이 살고 있는 초라한 판자집을 찍어 보낼 수가 없어서 경복궁 앞에 가서 바지를 걷어 부치고 양치질을 하는 사진을 찍어서는 밑에다 "My House"라고 써서 보냈더랍니다.
사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전부 내것일 수 있지요. 푸른 금오산도, 굽이치는 낙동강도 그 자연을 정말 아끼고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우리는 좁은 집에 살지만 금오산을 우리 정원의 뒷 배경으로 하고 낙동강을 정원의 앞 배경으로 생각하고 넉넉하게 이용하고 살면 되지요. 자연은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것이니까요. 예술회관은 우리 집의 문화관 쯤으로 넉넉히 생각하고, 시립도서관은 나의 서재로 생각하면 되겠지요. 언제나 이용할 수 있으니까요.이렇게 생각하면 우리집의 정원은 몇 백 만평이 되고요, 우리집의 서재는 장서가 몇 만권이나 되고요, 우리집의 문화관은 최고의 시설을 자랑하는 것이 되지요. 문제는 누리는 것입니다. 누리자고 치면 전부 내것이요, 누리지 못하고 소유하는 대만 집착하면 전하는 가져도 항상 불만족이요 결핍입니다. 누리지 못하는 것은 내것이 아닙니다. 누리는 만큼 내 것이 됩니다. 이 심오한 진리를 한 번 경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는 주일이면 오후에 꼭 나들이를 갑니다. 무슨 수련회나 특별한 시간이 필요하면, 무주 리조트든, 자연 휴양림이든 갑니다. 이것 다 우리 것입니다. 우리 교우들 중에 소유하고 있는 분은 한 분도 없습니다. 그러나 빌려서라도 참으로 잘 누리면 누리는 사람의 것입니다. 다 하나님의 것이요, 다 우리 누리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여기서 물질로 부터의 진정한 자유가 있습니다. 다 나의 재산이예요. 꼭 쌓아 두지 않아도 됩니다. 뭐 든지 동원해 보세요. 선포해 보세요. 나의 것이 됩니다. 크고 거창한 것, 조건이 맞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골프는 조건이 까다롭습니다. 경기 규칙이 까다롭고, 경기 진행하는 조건이 까다롭습니다. 그래서 누리는 행복의 조건도 까다롭습니다. 18홀이면 축구장 90개를 만들 수 있는 면적입니다. 이렇게 많은 조건을 갖춰서 경기를 해야 한 두 사람의 행복을 보장해 줍니다. 그러나 진짜 삶을 누릴줄 아는 사람은 커피 한잔에 들꽂잎 하나에도 행복해 하는 사람입니다. 고급 양식이나 풀빵 하나나 누리는 사람에 따라 효용가치는 같거나 풀빵이 더 클 수 있다는 사실은 큰 축복입니다. 마약, 마리화나로도 행복의 자극이 적어 허덕대는 사람이 있는 반면, 작은 일에도 감동하고 감격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문제는 누림입니다.
그런 까닭에 지금 가지고 있는 것, 지금 조건을 최대한 동원하세요. 최대한 누리세요. 이것이 안식이요, 쉼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여섯째 날의 창조물을 누리세요. 여러분의 엿새 동안의 창조물은 작을 수도 있고 클 수도 있습니다. 거창할 수도 있고 하찮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여섯째 날의 창조물은 어떤 것입니까? 어떤 것이든 일곱쨰 날의 누림이 없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계속 창조만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요? 누림이 없어요. 불만족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의 진정한 안식과 쉼을 누릴 줄 아는 사람은, 자신의 여섯째날의 창조물이 은총이요, 보기에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요, 은혜입니다. 만족입니다. 누림입니다.
닻이 없는 배를 한 반 상상해 보세요. 파도에 지치고, 에너지는 떨어지고 그래도 정착할 곳이 없어 험한 바다를 떠 돌아야 하는 배를 상상해 보세요. 우리는 내릴 닻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정박할 항구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한 주일에 한 번 영혼의 항구에 닻을 내리고 정박을 합니다. 세파에 지친 영혼을 달래고, 수리하고 재충전하고 평화를 가득 채웁니다.
그대의 배에는 닻이 준비되어 있습니까? 그대의 배는 정박을 잘 하고 있습니까? 그대는 복을 잘 누리고 있습니까? 그대는 거룩합니까?
<기도문>
주님, 관리하고 통제하고 일하는 것은 배웠으나 참으로 안식하는 법은 배우지 못했습니다. 하여 서투르고 어색합니다. 주님, 일하며 안식하고, 안식하며 일하게 하소서. 주님 저희의 엿새 동안의 창조물을 참으로 넉넉하게 누리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은혜의 수단들
창 1장 31절 / 양인국목사(서신교회)
1.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뜻 안에서 세상을 아름답게 세우도록 불러주셨다. 그리고 우리가 그 부르심에 응답하며 살 수 있도록 필요한 은혜의 수단들을 주셨다. 오늘은 그것들 가운데 특별히 언어와 믿음과 행동에 대하여 살펴보기 원한다.
2.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쁘신 뜻에 따라 세상을 아름답게 세워가도록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수단들 가운데 하나는 언어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 언어를 사용한다면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 시킬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처럼 언어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계시의 말씀인 성경과 우리의 경험을 통하여 언어가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실례로서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하나님은 빛을 창조하실 때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셨고 그 말씀대로 빛이 있었다. 만일 하나님께서 빛을 창조하실 때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면 세상에 빛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 하나님께서 땅의 풀과 과목들을 창조하실 때 먼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고 말씀하셨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지 않으셨다면 땅에 채소와 과목들이 있었을까?
우리는 동일한 예들을 주님께서 행하신 일들 가운데서도 찾을 수 있다. 제자들은 갈릴리를 건너가고 있을 때 큰 광풍을 만나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께 도움을 청하였고 주님은 제자들을 광풍으로부터 지켜주시기 위하여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잠잠하라 고요하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때 그 바다가 고요하고 잔잔해졌다(막4:35-41).
만일 이때 주님께서 바람을 꾸짖지 않으셨다면 그리고 바다에게 잠잠하라 고요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면 바다가 고요할 수 있었을까? 우리가 본문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제자들이 광풍으로 인하여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을 때 주님께서도 제자들과 함께 그 배에 타고 계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때 주님은 주무시고 계셨기 때문에 바람을 꾸짖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제자들은 주님을 깨우고 자신들을 광품의 위협으로부터 구원해 주시기를 구했던 것이다. 놀라운 사실은 주님께서 광풍이 일고 있는 그곳에 계셨지만 바람을 꾸짖으시기 전까지 그리고 바다에게 조용하고 고요하라고 명하시기 전까지 광풍은 계속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께서 병자들을 치유해 주실 때에도 말씀으로 치유해 주셨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실례로서 주님은 두 맹인을 치유하실 때 그들에게 “너희 믿음대로 되라(마9:29)”고 말씀하셨다. 만일 주님께서 이와 같은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면 그들이 눈을 뜰 수 있었을까?
이와 같은 예들은 모두 언어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언어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우리 가운데 아름다운 일들이 세워지기도 하고 아름다운 것들이 오히려 황폐해지기도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일들은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 찾을 수 있는 공통점은 그들 모두가 긍정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사람들과 함께 할 때 우리도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반면 부정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우리는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일을 하는 사람을 찾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오히려 그들과 함께 할 때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일을 하던 사람들 조처 위축된다. 이처럼 언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능력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 따라 각각 다르게 나타난다.
놀라운 사실은 언어를 통하여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에 따라 지음 받은 사람에게도 언어를 주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언어를 사용함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도록 하려 하심이다. 하나님은 2020년 한해 우리를 통하여 때를 따라 모든 것이 아름답게 세워지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어떻게 이와 같은 일들을 이룰 수 있는가?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언어를 통하여 이와 같은 일을 행할 수 있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계시의 말씀을 통하여 언어를 어떻게 사용할 때 능력이 되는지 귀를 기울이고, 다음으로 귀에 들리는 인도의 말씀에 따라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계시의 말씀뿐만 아니라 우리의 경험을 통하여 이미 알고 있는 지식에 따라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우리는 경험을 통하여 이미 부정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경우도 부정적인 언어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 또한 우리는 경험을 통하여 삶의 여정에서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직면하는 대부분의 문제들이 상처 주는 말로 인하여 온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경우도 상처 주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이해 해 주는 말과 격려하고 위로하는 말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언어는 자신뿐만 아니라 이웃들을 세워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은총으로 허락해 주신 한 해 동안 우리는 이처럼 사람들을 세워주는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우리가 이와 같은 언어들을 사용할 때 비로소 우리를 통하여 때를 따라 모든 것이 아름답게 세워질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때에 따라 모든 것을 아름답게 세우도록 주신 은혜의 수단들 가운데 다른 하나는 믿음이다. 특별히 믿음은 우리의 관점을 새롭게 해 주고 동기를 부여해 줌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세상을 아름답게 세우도록 이끌어 주는 은혜의 수단이다. 우리는 믿음의 사람들을 통하여 믿음이 어떻게 우리의 관점을 변화 시켜 주는지 그리고 어떻게 우리를 행동으로 이끌어 주는지 알 수 있다. 실제로 히브리서 11장은 아벨을 시작으로 믿음의 조상들과 사사들과 그리고 모세를 비롯하여 수많은 선지자들과 평범하지만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의 예를 통하여 믿음이 그들을 어떻게 새로운 삶으로 인도해 주었는지 말해 주고 있다. 믿음은 그들로 하여금 알지 못하는 것들을 알게 해 주었고(히11:2),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보게 해 주었고(히11:7), 듣지 못하는 것을 듣게 해 주었다(히11:8). 그리고 이로 인하여 그들은 인간의 상식을 뛰어 넘는 불가능한 일들을 할 수 있었다. 놀라운 사실은 히브리서는 그들이 이와 같이 놀라운 일을 할 때마다 “믿음으로”라는 말을 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이처럼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믿음이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처럼 믿음은 사람들로 하여금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관점으로부터 새로운 관점을 갖게 해 주고 이로 인하여 새로운 삶을 살게 해 준다. 히브리서는 이와 같은 사실에 대하여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11:1)”라고 말해 주고 있다. 마찬가지로 믿음은 우리에게도 지금까지 세상에서 살아왔던 삶과는 또 다른 삶이 있다는 것과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의 방식과는 또 다른 삶의 방식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줄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믿음으로 새롭게 알고, 보고, 들은 것에 따라 행할 때 모든 것이 때를 따라 아름답게 변화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때를 따라 모든 것을 아름답게 하도록 주신 은혜의 수단들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말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때에 따라 모든 것을 아름답게 세우도록 주신 은혜의 수단들 가운데 또 다른 하나는 손과 발이다. 즉 행동이 또 하나의 은혜의 수단이라는 의미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행동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14:21)”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고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준다.
만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지 않았다면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을까? 만일 모세가 홍해 앞에서 애굽의 군대가 추격해 오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지 않았더라면 홍해가 갈라졌을까?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니느웨 성에 가서 그들에게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지 않았더라면 니느웨의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 받을 수 있었을까? 베드로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성전 문 앞에서 구걸하던, 나면서 못 걷게 된 사람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라고 하지 않았더라면 그가 걸을 수 있었을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믿음의 사람들이 손과 발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행하지 않는다면 그곳에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삼손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능력을 받은 사람이었지만 그 능력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말씀에 따라야 했다. 그가 따라야 할 것은 머리를 깍지 않는 것이었다. 안타까운 것은 이처럼 그는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말씀에 불순종하는 순간 그 능력들 가운데 조금의 능력도 사용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삼손의 예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놀라운 은혜를 받았을지라도 말씀에 따라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면 그 은혜들 가운데 조금도 누릴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준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때를 따라 모든 것을 아름답게 세우기 위해서는 그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행동은 때를 따라 모든 것을 아름답게 세우기 위하여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수단들 가운데 또 다른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올해 하나님은 서신에 속한 우리 모두를 통하여 때를 따라 모든 것을 아름답게 세우기 원하신다. 그리고 이를 위하여 우리에게 언어와 믿음과 행동이라는 은혜의 수단들을 주셨다. 한 해 동안 이와 같은 은혜의 수단들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모든 곳을 때를 따라 아름다운 곳으로 세우는 삶을 살기 원한다.
3. 함께 기도하자. 하나님! 은총으로 허락해 주신 2020년 한 해 동안 주께서 주신 은혜의 수단들을 사용함으로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모든 곳을 때를 따라 아름다운 곳으로 세울 수 있게 해 주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