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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와 만물의 내력
창 2:1-7
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2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4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5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 2:1-7 / 이렇게 하늘과 땅,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갈 온갖 것이 다 창조되었다. 2) 하나님께서는 ㄱ) 여섯째 날까지 만들어 오시던 일을 다 마치시고 일곱째 날에는 일손을 놓으시고 쉬셨다. (ㄱ. 히브리어 원문에는 `일곱째 날'이라는 뜻으로 되어 있다) 3) 하나님께서는 일곱째 날에 복을 내리시고 그날을 거룩히 여기셨다. 하나님께서 손수 창조하시는 일을 다 마치셔서 일손을 놓으시고 이 일곱째 날에 쉬셨기 때문이다. 4) 이상이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내용이다. [남자와 여자, 에덴 동산] 여호와 하나님께서 땅과 하늘을 창조하시던 날, 5) 땅에는 그 어떤 나무도 없었고 또 풀도 돋아나지 않았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땅에 비를 내리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땅을 갈 사람이 아직 없었기 때문이다. 6) 땅에서는 오직 안개만이 솟아 올라와 온 땅을 적시고 있었을 뿐이다. 7) 여호와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다. 그러자 사람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하나님은 6일간의 창조 사역을 마친 후 7일째 안식하시며, 그날을 복되고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또한 사람은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셔서 생명이 있게 하셨습니다.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1-3) 하나님이 6일간의 창조 사역을 통하여 천지와 모든 것이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창조 사역을 마친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일곱째 날을 복되고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그 일곱째 날을 안식일이라고 합니다. 안식일은 몇 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첫째로, 안식일은 하나님이 직접 정하신 날입니다. 둘째로, 복된 날입니다. 셋째로, 거룩한 날입니다. 넷째로, 그 안식일은 하던 일을 멈추는 날입니다. 안식하다로 번역된 샤바트는 쉬다라는 뜻이 있지만 하던 일을 중지한다는 뜻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는 6일 동안 해오던 일을 멈추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며 예배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4-6) 1장부터 2장 3절까지 언급하고 그것을 바로 천지 창조의 내력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톨레도트를 번역한 내력은 족보나 계보를 말하는 것으로 천지 창조의 계보를 말하는 것입니다. 1장에서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만드셨다고 하였습니다(창 1:1). 그런데 2장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만드셨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통합적으로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시려고 여러 가지 이름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중 여호와와 하나님이 대표적인 이름입니다.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만드신 초기에는 비도 없었고, 초목과 채소도 없었고,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습니다.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7) 이미 1장에서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하였습니다(창 1:27-28). 2장에서는 인간 창조에 대하여 덧붙여 설명하였습니다.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어 생명체가 되게 하셨다고 더욱 자세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적용: 당신은 복되고 거룩한 안식을 잘 누리고 있습니까? 당신이 누릴 안식을 방해하는 것이나 풍성한 안식을 누리는 방법에 대하여 서로 나누어 봅시다.
의심의 토양 위에서는 하나님이 주신 기회의 씨앗이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동정녀 마리아를 포함해서 성경 속의 위대한 인물들에게 하셨던 말씀을 똑같이 하고 계십니다. 일을 성사시키는 것은 우리의 힘이나 지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성령으로 크신 일을 이루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권능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우리에게 패배란 없습니다. 하나님은 길이 없는 곳에 길을 만드시며, 그분이 문을 여시면 아무도 닫을 수 없습니다. 적당한 때에 우리를 적당한 장소로 이끄시며,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우리 삶의 방향을 바꾸십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 설 교 >
첫 번째 사람 아담
창 2장 07절 / 이정선목사
우리 인간의 오래된 질문 가운데 하나는 인간은 어디서 왔는가 하는 것입니다. 철학과 고고학, 생물학 등 여러 학문들이 인간의 기원을 밝히려고 애를 써 왔고, 또 나름대로의 결론에 이르거나 추론한 것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성경구절만큼 인간의 기원을 명확하게 밝혀주는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어 생령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행위 가운데서 하나님의 구체적인 행동에 의해 이루어진 것은 인간의 창조 밖에 없습니다. 다른 것들은 모두 말씀으로 지으셨습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존재하게 된 것과 같습니다. 빛을 지으시기 전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셨다는 창세기 1장 1,2절의 말씀이 있습니다만, 그것이 어떤 것이었는지 구체적인 것은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어쨌든 다른 것들을 다 말씀으로 지으시고 마지막으로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서 인간을 지으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에서 인간이 가장 뛰어나고 중요한 존재라는 의미가 됩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습니다(창 1:27). 물론 천사도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이지만, 그들은 영적 세계에 속한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여기 천지창조에는 포함되지 않고 우리 인간과 비교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고 했는데, 그것이 인간의 근본입니다. 마르크스는 인간을 관찰하고 연구한 끝에 인간은 물질적 존재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깊은 통찰에 도달하고 고도의 문명을 건설한다 하더라도, 결국은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세계를 지배했던 알렉산더 대왕도 거대한 제국을 뒤에 남긴 채 서른 세 살의 젊은 나이에 죽어야 했습니다. 현대 과학기술 문명의 선구자라고 할 만한 아인슈타인이나 발명왕 에디슨도 싸늘한 시체가 되어 땅에 묻혀 있을 뿐입니다. 우리 역시 모두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이 아무리 재주가 있고 가진 것이 많아도 별 것도 아닌 존재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인생은 허무한 것입니다. 결국은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갈 인생이 뭐가 그리 대단합니까?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반밖에 보지 못한 소견입니다. 더 중요한 부분을 보지 못하고 하는 소리입니다.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신 것으로 인간의 창조가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흙으로 지으신 다음에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다른 피조물과 다른 부분이고, 그저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갈 인생 이상의 무엇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부분을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지으신 창조행위라고 봐도 좋겠습니다. 한 줌의 흙에 불과한 우리 몸뚱이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지혜와 성품을 불어 넣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품은 우주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인간이 탄생하였습니다. 그 첫 번째 사람이 아담입니다. 아담이라는 이름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 원문에 보면 하나님이 아다마로부터 아담을 지으셨다고 했어요. 아다마는 땅이고 아담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사람의 이름은 우리말로 하면 그냥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이 첫 번째 사람 아담은 온 인류의 조상이면서 원형(原型; prototype)이 되었습니다. 원형이라는 것은 마치 공장에서 제품을 찍어내는 틀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틀에서 찍혀 나온 제품은 그 틀과 다른 모양을 가질 수 없는 것처럼, 원형으로서의 아담에게서 나온 인류는 아담의 본질을 가지고 태어나게 됩니다. 그만큼 첫 번째 사람 아담의 역할이 크고 막중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아담의 입장에서는 그것을 몰랐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오늘 우리 입장에서는 중대한 일이 아닐 수 없지요.
하나님의 창조세계에서 사람이 가장 중요하고 최고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세계의 관리자로 임명하셨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창 1:28). 또 에덴동산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셨습니다(창 2:15). 말하자면 창조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한 가지 조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권세를 위임받아 세상을 다스리는 관리자입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그 권세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순종해야지요. 그 순종의 계약서가 바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였습니다(창 2:17). 다른 것은 모두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자기 판단대로 할 수 있지만, 그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보면서 자기가 해서는 안 될 일이 있고, 즉 그것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능력과 권위가 하나님으로부터 맡겨진 것임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아담은 그 나무의 열매를 먹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금지하신 것을 범하였고, 하나님과의 계약을 깨뜨린 것입니다. 이로써 하나님과 아담의 관계가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범죄라는 것은 전부 혹은 전무(all or nothing)의 성격을 갖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약 2:10-11).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면서, 아담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었고, 그래서 그 하나님의 형상에 근거한 그의 존귀함도 상실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심으로 아담이 생령, 즉 산 존재가 되었는데, 하나님과의 커넥션이 깨지니까 그 결과는 죽음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 즉 하나님의 계명을 불순종하는 것의 결과는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이 바로 그런 의미였습니다. 원형이 손상을 입게 되었으므로, 아담으로부터 내려온 인류 역시 죽음을 상속받게 되었습니다.
인류를 구원하시고 회복하러 오신 예수는 그래서 두 번째 아담으로서 살려주는 영이 되셨습니다(고전 15:45). 우리는 첫 번째 아담의 실패를 상속받아 무익하고 허무한 인생이었지만, 살려주는 영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기대되는 것은 아담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는 것입니다. 비록 아담의 피를 이어받아 죄의 성품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죄를 구속하셨고 우리를 의롭다 칭하셨으니, 이제 하나님께 순종의 제사로 우리의 삶을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선악과 앞에 선 인간
창 2장 4~17절 / 이종철목사
에덴 동산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을 만드시고 사람으로 하여금 그 곳에 살게 하셨습니다. 에덴은 ‘기쁨. 환희’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에덴은 기쁨의 낙원이었습니다. 에덴 동산의 풍요를 상징하고 있는 것은 10절에서 14절의 에덴 동산에서 발원하고 있는 네 개의 강에 대한 언급입니다. 비손, 기혼, 힛데겔, 유브라데입니다. 힛데겔은 티그리스 강을 말하고 유브라데는 유프라테스 강을 말합니다. 중동 지역에 있는 가장 큰 강들입니다. 에덴은 이 강들의 발원지입니다.
이스라엘이나 중동은 물이 부족하기 때문에 강과 시내를 풍요의 근원으로 표상합니다. 물 댄 동산, 물가에 심긴 나무, 시냇가에 심은 나무 등이 축복 받는 사람의 상징입니다. 우리가 장차 들어가게 될 천국에는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이런 강들 사이사이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가득합니다. 인간의 타락 이후 금지되었던 먹으면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생명나무도 있습니다.
먹을 것만 풍요로운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인간의 삶에서 꼭 필요한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바로 ‘노동’과 ‘사랑’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은 일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으로 하여금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15) 하셨습니다. 2장 19절에서는 각종 들짐승과 새들의 이름을 지어주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노동하지 않고는 살 수 없습니다. 노동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를 재현하는 것과 같습니다. 에덴 동산은 천국의 원형입니다. 우리는 천국에 가서도 노동을 할 것입니다. 다만 타락한 이후의 노동처럼 지겨운 노동이 아니라 즐거운 노동일 것입니다. 공산주의 사상을 만들었던 칼 마르크스는 하루 네 시간만 일하고 나머지 시간은 독서나 놀이 휴식으로 보내는 사회를 꿈꾸었습니다. 천국이 바로 그렇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인간은 사랑이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2장 18절 이하에서 하나님이 아담의 짝인 하와를 만들어줍니다. 하와가 탄생함으로써 낙원은 완성이 됩니다. 에덴 동산에서나 타락 이후나 인간에게 노동과 사랑은 가장 중요한 두 가지입니다. 우리 인생은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사랑하는 것 이 두 가지로 이루어집니다.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 섰을 때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 가지만 물어보실 것입니다. “열심히 살았는가?” “끊임없이 사랑했는가?”
제가 예수님을 믿기 전 저에게 영향을 미쳤던 책 중에 하나가 월간지 <리더스 다이제스트>입니다. 고등학교 시절에 읽었는데 그 달의 책 주제가 “죽었다 깨어난 사람들의 이야기”였습니다. 의학적으로 죽었다고 판명되었다 살아난 사람들의 간증을 모아놓은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죽음 이후 공통적으로 경험했고 또 다시 산 이후에 달라졌던 것은 두 가지였다고 그 책은 정리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자기 일에 열심을 다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부지런히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어린 나이였지만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사랑하자는 두 가지를 제 인생의 교훈으로 삼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는 인간의 중요한 두 가지 본질입니다. 우리 모두 최선을 다해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선악과의 의미 1. 인간의 한계
그런데 한 가지 불만스러운 것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다른 것은 보이지 않고 눈에 가시처럼 들어오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과입니다. 하나님은 이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경고까지 하였습니다. 인간이 그렇습니다. 열 가지 다 잘해 주다가도 한 가지만 잘못해도 섭섭하듯이 행복한 에덴동산이지만 선악과 때문에 마음이 걸립니다.
이 선악과만 없었다면 인간의 타락이 없었을 것이고 인간에게 수고하고 늙고 병들고 이별하고 죽는 고통은 없었을 것입니다. 모든 기독교 교리의 설명은 이 선악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써 원죄가 들어왔고 인류의 타락이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타락 이후 사망의 포로가 된 인류를 구원해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선악과가 미친 영향이 이처럼 크기에 우리는 이것을 주신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완전하신 하나님이 만드신 낙원에 필요 없는 것은 없습니다. 선악과도 반드시 인간에게 필요했기 때문에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선악과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선악과란 무엇입니까? 화가들은 선악과라고 할 때 사과나무나 무화과나무 같은 것을 연상하고 그런 그림을 그리기도 합니다. 선악과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열매와 같은 것이었을 것입니다. 이 선악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져 하나님만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선악에 대한 지식을 인간이 소유하게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선악과가 어떤 나무이고 그 열매의 효능이 무엇이냐는 것이 아닙니다.
선악과를 주시면서 내린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금령이 더 중요합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은 인간이 어떤 존재임을 보여줍니다. 인간은 하나님 말씀 아래서만 살 수 있는 피조물입니다. 선악과를 먹으려는 시도는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서 자기가 하나님이 되겠다는 인간의 교만함을 보여줍니다. 뱀이 하와를 유혹하면서 한 말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뱀은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는 말로 인간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3장 22절에서 하나님 또한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이는 하나님만이 아는 선악을 아는 지식이나 능력을 얻게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이 자기 지식과 자기 뜻대로 살아보려는 독립성을 뜻합니다. 선악과를 따 먹으려는 시도는 바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시도이고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선언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선악과의 효능이 아니라 거기에 딸린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두심으로써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 아래서만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래서 구지 선악과가 아니어도 무방합니다. 예컨대 하나님이 어떤 강을 지목하며 “이 강을 건너지 말라. 이 강을 건너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셔도 그 의미는 같습니다. 그 의미는 인간은 하나님 말씀 아래서만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을 하나님의 위치에 올려놓으려 합니다. 마치 반란을 꿈꾸는 노예나 자기가 주인이 되고자 하는 가축들의 저항과 같습니다. 인간의 한계성을 인정하라고 하면 인간들이 기분 나빠합니다. 인간은 도무지 자기 위에 있는 어떤 존재를 상정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이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인간이 바벨탑을 쌓는 이유도 하나님처럼 되려는 교만함 때문이었습니다.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창11:4) 흩어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이들은 제국을 형성하여 하나님께 대적하려 하였습니다. 인간이 한데 뭉쳐 있으면 어떤 거대한 악을 행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언어를 혼잡케 하셔서 제국을 형성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인간들이 신을 우상의 형태로 만드는 이유도 신을 컨트롤하기 위해서입니다. 우상은 공간에 매인 존재입니다. 그것처럼 신을 특정 공간에 가두어 놓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온갖 악을 저지르려 합니다. 우상은 말하지 못하고 인간이 부여한 특성만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상은 인간이 주는 제물을 먹으며 인간의 뜻대로 축복을 주고 저주를 내립니다. 그래서 결국 힘 있는 자에게 봉사하는 도구가 되고 맙니다. 인류가 만들어 놓은 우상체제가 다 그렇습니다. 권력자를 비판하는 우상은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지만 결국은 대부분은 노예로 전락하고 소수만이 하나님의 특권을 행사합니다.
인류 역사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려는 대대적인 운동이 일어났던 시대는 19세기였습니다. 인간에 대한 난관적인 생각이 가장 흥왕했던 시기입니다. 이때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죽었다는 것은 인간이 신의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는 선언입니다. 인간 이성과 과학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였습니다. 신학에서는 자유주의가 풍미해서 성경의 권위를 해체하고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땅으로 끌어내렸습니다. 과학에서는 진화론이, 사회과학에서는 공산주의 유물론이 풍미하며 유토피아적 세계를 꿈꾸었습니다. 한마디로 인간 이성으로 낙원을 건설할 수 있다는 인본주의의 극치였고 인간이 신이 된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낙관론은 20세기에 들어와 제1, 2차 세계대전과 공산주의 정권의 등장과 함께 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의 이성이 만든 결과라는 것이 전쟁과 폭력으로 수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수많은 나라들이 제국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하며, 결국 6백만 명의 유태인 학살이라는 가장 반인간적이고 폭력의 결정판을 만들어 낸 일이었습니다.
이 즈음에 신학계에서 일어났던 운동이 신정통주의입니다. 다시 정통을 부활하자는 운동입니다. 잃어버린 하나님의 권위를 다시 회복하자는 운동입니다. 칼 바르트가 중심인데 그가 로마서 주석을 썼습니다. 이 로마서 주석은 자유주의자들이 놀고 있던 놀이터에 떨어진 폭탄에 비유될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습니다. 칼 바르트는 “하나님은 하늘에, 인간은 땅에 있으니 잠잠할지어다”라는 전도서 말씀을 가지고 자유주의자들과 싸웠습니다. 인간의 이성은 하나님의 진리 아래서만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통제되지 않는 이성은 방종이나 인간 욕심의 합리화로 가고 맙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게 될 때 썩게 되어 있고 어리석게 됩니다. 세계에는 폭력과 파괴가 가득하게 됩니다.
인간이 철이 들 때가 있습니다. 자신의 한계와 무능력을 인정할 때입니다. 옛 성현들은 50이라는 나이를 ‘지천명’이라 하였습니다. ‘하늘의 뜻을 아는’ 나이입니다. 저는 이 나이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아는 나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습니다.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일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고개를 숙이는 나이입니다. 고개를 숙일 때 인간은 더 현명해집니다. 젊을 때처럼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어리석고, 또 이런 모습을 보면 불안합니다.
어떤 분이 유럽을 여행하다 나폴레옹의 초상을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의 초상화에는 대부분 빨간 망토가 매여 있습니다. 말을 타고 알프스 산맥을 넘는 모습은 매우 유명합니다. 이때 나폴레옹이 남긴 가장 유명한 말이 “나의 사전에는 불가능은 없다.”는 말입니다. 그 때 이 모습을 보는 순간 이 분에게는 빨간 보자기를 둘러매고 장난감 칼을 휘두르는 철부지 어린아이가 떠올랐다고 합니다. 아이들은 보자기를 매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기도 합니다. 그러다 다치죠. 나폴레옹은 용기는 가상하나 철이 없는 사람입니다. 불가능한 일이 없는 인생이 어디 있습니까? 인생은 한계가 있고 그것을 인정할 때 인간은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부족한 것이 인간입니다. 부족함을 인정하지 않으면 꺾이거나 추락하게 되어 있습니다.
선악과는 바로 인간의 한계와 부족함을 인정하라는 뜻에서 주어졌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할 때 행복합니다. 진정한 천국을 이루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선악과 앞에 선 인간이라는 겸손함입니다.
선악과의 의미 2. 자유의지
그러면 선악과는 이런 부정적인 면만 있는가? 아닙니다. 선악과는 다른 한 편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선악과를 주셨다는 것은 곧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주어졌다는 의미입니다. 자유의지는 곧 선택의 자유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을 거부하고 선악과를 따먹을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이런 선택이 주어졌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가진 최고의 특권입니다. 천사에게는 선악과가 없습니다. 천사는 무조건 순종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악마에게도 선악과가 없습니다. 악마는 무조건 거부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천사와 악마 사이에 있습니다. 자신이 선택에 따라서 천사가 될 수도 있고 악마가 될 수도 있습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질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요구하셨던 것도 가인의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입니다.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4:7) 인간은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동생 아벨과 함께 평화로운 삶을 살 수도 있고, 아니면 아벨을 죽인 결과 유리방황하는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불행히도 가인이 선택한 것은 살인의 길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가혹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유를 허락하셨습니다.
존 스타인벡이 쓴 『에덴의 동쪽』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스타인벡은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는 말을 중요 테마로 사건을 전개합니다. 그는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인간은 게으름과 연약함으로 인해 ‘나는 할 수 없습니다. 운명은 그렇게 결정되었습니다.’라고 하며 쉽게 신에게로 의지하려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선택이 가진 위대함을 생각해보라! 이것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 고양이는 선택이 없다. 벌들은 꿀을 만들어야 할 뿐이다.......인간은 매우 중요한 존재이다. 별들보다 더 중요한 존재이다.” 스타인벡이 그의 소설에서 인간의 영혼을 찬양하는 이유는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인간은 죄의 길을 갈 수도 있지만 그것을 거부하고 새로운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자유의지를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이것이 선악과의 축복입니다. 인간에게 부여한 자유의지는 너무도 강력해서 하나님도 손을 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20년 넘게 밧단아람에서 훈련시켜야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야곱이 스스로 깨닫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신 것이 아닙니까? 이스라엘이 그릇된 길을 갈 때마다 하나님이 하셨던 일이라곤 선지자를 보내어 그들을 설득하는 일이었습니다. 스스로 돌아오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의 모습이 바로 우리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둘째 아들이 자기 몫의 유산을 달라하였을 때 아버지는 아들의 뜻대로 줍니다. 둘째 아들의 선택이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아버지는 스스로 깨닫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셨을 뿐입니다.
예수님 또한 그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다가 자신을 팔 것을 아셨습니다. 만약 스승이라면 사랑하는 제자가 어리석은 선택을 할 때 때려서라도 말려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러나 주님은 유다에게 경고의 사인만을 보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유다의 선택을 존중하셨습니다. 유다는 결국 어둠의 세계를 선택했습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이란 것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인간이 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모든 죄를 사해주셨습니다. 주님이 모든 것을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믿는 것도 자연스럽게 생기도록 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각자의 선택을 존중하셨기 때문입니다. 생명과 사망의 길을 선택하는 것은 바로 인간입니다. 하나님은 밥상을 차려 놓았을 뿐이고 그것을 먹느냐 마느냐는 인간이 결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자유의지입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거나 강요하는 것만큼 큰 죄도 없습니다. 교만한 인간들은 하나님도 간섭하지 않는 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통제하려 합니다. 공산주의 국가가 그렇고 독재 국가들이 그렇습니다.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특권이고 이를 막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 사회도 자유로운 의견이 표출되도록 보장해주어야 합니다. 자신과 반대되는 의견을 말했다고 해서 밥줄을 끊겠다고 위협하는 행위는 비겁합니다. 서로 의견이 다를 수는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다른 의견을 말할 수 있는 자유를 빼앗는 것은 악입니다. “나는 당신의 의견에 반대하지만 당신의 말할 권리를 위해 싸우겠다”는 볼테르의 말은 민주주의가 무엇이고 자유의 소중함이 어떠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정부의 정책에 반대했다고 해서 파면시키거나 쫓아내고, 위협해서는 안 됩니다. 요즘 우리나라의 정치나 사회현실을 보면 우리나라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민주사회로 가기에는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사랑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유의지가 없으면 사랑도 없습니다. 노예와 주인 간에는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로봇과 인간 사이에도 사랑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노예나 로봇에게는 자유의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관계에서는 사랑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천사와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하고는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를 만드실 때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괴롭게 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순종을 받으시되 강제적인 순종이 아니라 자발적인 순종을 원하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멀리 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과 함께 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프로그램화 되어 있지 않습니다. 자발적인 순종에서만 기쁨이 있고, 그것을 받는 사람에게 영광이 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두려워서 입니까?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어서 입니까? 저는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정말 기쁜 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다른 가능성도 있지만 저는 다른 무엇보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정말 좋아서 믿습니다.’ 하는 고백을 하나님은 받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선악과를 동산 중앙에 심어놓으신 이유입니다.
사람은 ……
창 2장 7절 / 박경수목사
목적 :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첫 번째 시작이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는가? 사람이 자기가 누구인지, 어떤 존재인지 깨닫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자기를 바로 발견한 사람만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15장에는 탕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아버지의 재산을 절반이나 들고 객지로 가서, 허랑방탕한 생활로 재산과 인생을 함께 탕진해 버렸던 탕자이다. 그가 언제 아버지께 되돌아갔던가? 바로 자기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했을 때이다. 자기를 발견하지 못했을 때에는 아버지가 어떤 존재인지 별로 관심이 없었다. 단지 자기에게 유산을 주어야만 하는, 그리고 떠나야만 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처참한 몰골을 보았을 때, 아버지란 자신이 아버지의 종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돌아가야만 하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탕자가 자기가 누구인지 발견했을 때 새로운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고, 아버지와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 2:7).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흙으로 창조하셨다. 하고 많은 것들 중에서 왜 하필이면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을까? 그 이유를 안다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하신 뜻을 알 수 있다.
모든 생명은 흙에서부터 시작했다. 만일 흙이 생명의 양식을 제공해 주지 않는다면 식물은 물론 새나 동물 그리고 사람까지도 살 수가 없다. 바닷속의 물고기는 살 수 있지 않을까? 아니다. 바닷물을 담고 있는 바다의 밑바닥 또한 흙이다. 그러므로 흙이 없다면 모든 생물은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다. 인간은 생명을 서로 나누면서 살아야 할 존재로 만드셨음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얼굴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그런데 대부분의 그림들이 금발머리에 멋진 수염을 드리운, 멋진 세마포를 입고 있는, 영화배우 중 가장 근엄하게 생긴 얼굴의 모습으로 표현했다. 그런데 이천우 목사님은 다르다. 남루한 거지 옷에 찌그러진 깡통을 들고 있는 각설이 모습, 그것이 예수님의 모습이란다.
일곱 살 때 어머니를 여읜 목사님은 12살부터 거지들에게 끌려가 소매치기 생활을 하게 되었다. 한 사람이 아는 척하면 다른 사람이 칼로 옷을 찢고 돈을 꺼내는 방식인데, 목사님에게 돈을 꺼내도록 시켰다. 돈을 꺼내려는 순간, 어린 시절 주일학교 선생님에게 들었던 말씀이 생각났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남의 것을 도둑질하지 않습니다.” 목사님은 아주머니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저는 소매치기예요. 지금 큰 소리로 쓰리꾼이라고 외쳐주세요.” 무슨 말인지 몰라 아주머니가 멈칫하는 순간, 목사님은 눈치챈 소매치기들에게 끌려가 남산에서 ‘사형집행’을 당하게 되었다. 두목의 명령을 어기면 모두가 같이 짓밟은 후, 2층에서 1층 유리조각더미 위로 던지는 행위이다. 이것을 한 번도 아닌 2번이나 가했다.
간신히 그곳에서 도망 나와 청량리역으로 갔지만, 피투성이인 목사님을 도우려 하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다 쓰러졌다. 아무도 돌보지 않을 때 마침 우연히 그 앞을 지나던 각설이 한 명이 목사님을 발견한다. 그 자신이 거지이기 때문에 거지 차림의 목사님을 구하게 된 것이다. 온 몸에 박힌 유리를 뽑아주고, 유리가루는 자기 혀로 핥아 다 제거해 주었다. 혀가 찢어져 피가 흘러도 계속 핥았다. 정성이 헛되지 않아 목사님은 의식을 회복했다. 눈을 뜨고 발견한 각설이 모습을 보면서 목사님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면 분명 각설이와 같은 모습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유일하게 자기를 살려준 사람이 각설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신이 어려울 때마다 늘 도움을 베풀었던 사람은 모두가 다 각설이였다. 그래서 수십 년이 지나도 기도할 때마다 보이는 예수님의 모습은 늘 각설이이다.
예수님의 이름을 전도한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죽어가는 한 생명에게 구체적으로 생명을 나누어 주는 일은 더 귀한 일이다. 이 세상 어디엔가는 내 손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 사람에게 내 생명을 나누어주어야 한다. 그 사람이 기도할 때 예수님의 얼굴 위에 내 얼굴이 떠오르게 되는 날, ‘흙다운 인간’ ‘인간다운 인간’이 될 것이다. 성화가 될 것이다.
흙은 사랑이 있다. 흙은 인간들이 버리는 온갖 더러운 오물들을 마다 않고 모조리 그 품으로 품는다. 만약 흙이 인간의 쓰레기를 품어주지 않았더라면 이 지구는 벌써 거대한 쓰레기장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다행히도 흙은 그 어느 것이든 가리지 않고 모두 포용함으로 깨끗하게 정화시켜 준다. 흙은 곧 사랑이기 때문이다. 참된 사랑은 상대를 가리지 않는다. 진정한 사랑은 모두에게 사랑이다. 하나님께서 사랑인 흙으로 인간을 지으셨다는 것은, 인간은 모두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함을 의미한다.
눅 10장에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 이야기가 우리에게 감동이 되는 이유는 그가 제사장이나 레위인도 아니면서 불구하고 강도만난 사람을 도와주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 자리에서 도와주었기 때문만도 아니다. “다음 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서, 여관 주인에게 주고, 말하기를 ‘이 사람을 돌보아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오는 길에 갚겠습니다’ 하였다.”(눅 10:35).
선한 사마리아인이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은 ‘이튿날’에도, ‘다음 날’에도 그 마음이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을 향한 우리의 마음은 쉽게 감동을 받는다. 하룻밤만 지나면 그 마음이 금세 변한다. 사마리아인이 그 자리를 떠나는 순간, 누구 하나 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의 마음은 여전하다. 지속적으로, 그리고 반복적으로 사랑할 수 있다.
한 신사가 산책하는 중에 거지를 만났다. 구걸하는 거지에게 뭔가를 주기 위해 뒤져보았지만, 지갑을 이미 집에 놓고 나온 터이다. 혹시라도 뭔가 있다면 그것이라도 주려고 다시 보아도 여전히 지갑에서 나오는 것은 먼지밖에 없었다. 너무 미안한 마음으로 신사는 거지의 손을 꼭 붙잡는다. 아무 것도 줄 것이 없다고. 거지는 그러나 자기가 이미 많은 것을 받았다고, 세상에서 제일 귀한 것을 받았다고 말한다.
거지가 신사로부터 받은 것은 사랑이다. 구별 없고, 지속적이며, 반복적인 사랑이었다. 그 사랑이 거지의 마음을 움직이고 감동시켰던 것이다. 사랑이 충만할 때 ‘인간 중의 인간’이라고 한다.
흙은 또한 거짓을 행하거나 속이지 않는다. 흙은 정직하다. 콩 심은 데서는 콩을, 팥 심은 데서는 팥을 준다. 대통령이 사과를 좋아한다고 해서 절대로 감나무가 사과나무로 변하지 않는다. 흙은 정직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정직한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음은 사람의 일생 동안 정직하라는 말씀이다.
옛날 어느 왕이 나라의 대신들에게 꽃망울이 맺힌 화분 하나씩을 나누어 주면서, 한 달 후에 꽃을 가장 예쁘게 가꾸어 온 자에게 큰 상을 내리겠다고 했다. 그날부터 대신들은 모두 자기에게 주어진 화분을 정성으로 대했다. 마침내 정해진 날이 돌아왔다. 모두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이다. 그 꽃들을 전부 왕에게 바쳤다. 그런데 제일 마지막으로 임금 앞에 나아온 대신의 손에 들려있는 화분을 보고는 모두 깜짝 놀랐다. 그 화분 속에는 화려한 꽃이 아니라, 말라 죽어서 비틀어진, 줄기만 볼썽사나운 꽃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들 죽이라고 소리를 질렀고, 왕도 노기 띤 얼굴로 자초지종을 신하에게 물었다. 그 대신은 죽을 죄를 죄인의 표정으로 대답했다. 정성을 다했지만 까닭 없이 죽는 것을 막을 재간이 없었노라고. 대답을 듣던 왕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한 달 전 왕은 뿌리를 모두 자른 채 꽃을 나누어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하들은 모두 싱싱하고 예쁜 꽃을 들고 왔다. 오직 한 사람만 정직하게 꽃을 들고 왔다. 그 사람이 상을 받는 것은 너무너무 당연하다.
흙은 불에 타지 않는다. 그러나 물을 부어 반죽을 한 뒤 불에 구우면 단단한 도구가 된다. 흙은 결코 자기 주장을 하지 않는다. 자기가 원하는 도구가 아니라, 토기장이가 원하는 도구로 기꺼이 자신을 내놓는다. 흙의 또 다른 특성은 ‘도구됨’이다. 도구로 만들어진 자기에 대해 불만을 가지지 않으며, 더욱이 다른 도구와 자기 자신을 비교하지도 않는다.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건강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돈이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남편이 출세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자녀들보다 내 자녀가 더 공부를 잘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은 불행하다고 한다.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는 한 행복한 인생은 이 세상에 절대로 없다. 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붙잡혀 사용되어짐이 가장 큰 영광이 되는 것처럼, 내가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어진다는 사실이 가장 기뻐야 한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직전,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자신의 어머니를 부탁했다. ‘네 어머니’라고 말씀하면서.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신 유언인 셈이다. 그때부터 요한은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는데, 전설에 의하면 마리아는 90세까지 장수했다고 한다. 이스라엘 여자들은 15세에서 18세 사이에 결혼하여 첫 아이를 낳았다. 아마도 마리아 역시 이때쯤 예수님을 낳았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33세에 돌아가셨으니 그때 마리아의 나이는 50세쯤 되었을 것이고, 그렇다고 한다면 제자 요한이 마리아를 모신 기간은 40년쯤 되는 것이다. 제자 요한의 나이를 20세쯤이라고 생각한다면 그의 나이가 60세, 혹은 70세가 될 때까지 모신 것이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다른 제자들은 초대교회의 영웅이 되어 세계를 누비고 다녔다. 게다가 사도 바울이라는 제자도 아니었던 사람마저도 유명세를 타고 있었다. 그런데 제자라는 이름을 갖고서도 불구하고 고작 요한이 하고 있는 일은 남의 할머니 뒷바라지나 하는 일이었다. 자기 자신이 얼마나 비참했을까? 자신은 예수님께서 가장 사랑했다고 직접 언급하실 정도의 인물 아니던가? 그런 내가 꼭 이렇게 살아야 할까? 자신에게도 야망이 있는데 말이다. 다른 동료 사도들이 유명해지면 유명해질수록 제자 요한의 자괴감은 그만큼 커질 수밖에 없다.
요한의 인생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힘없고 연약한 한 여인을 40년이나 모시면서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삶으로 경험하였다. 인생에 대한 더 깊은 통찰력을 가질 수 있었다. 또한 부활하신 주님과 남모르는 깊은 관계를 유지했을 것이다. 드디어 마리아가 죽었을 때, 노인이 된 요한은 해야 할 또 다른 일이 있었다. 요한복음을 쓰게 하시고, 요한 1, 2, 3서를 쓰게 하셨다. 요한계시록까지도 말이다. 다른 사람들이 달가워하지 않았을 상황을 40년이나 보냈지만, 그 속에서 요한은 준비시키시는 예수님의 손길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 있게 예수님에 대한 각종 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 남들이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일에 도구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들이다.
질문을 하자. 단지 흙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생명, 사랑, 정직, 도구됨의 삶을 살 수 있었을까? 창 2:19에 의하면 짐승 역시 흙으로 지어졌다. 사람과 쥐는 유전자가 자그마치 99%나 똑같다. 쥐와 사람의 가치가 같은가? 짐승이 과연 흙으로 지음 받았다는 것만으로 참다운 생명의 삶을 살고 있는가? 지속적이고도 반복적인 사랑을 구별 없이 행하고 있는가? 언제 어디서나 서슴없이 진리의 도구되기를 즐겨하는가? 아니다. 짐승은 똑같이 흙으로 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자기 본능, 자기 욕구에 따라 살아갈 뿐이다. 짐승과 사람의 차이는 분명히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 2:7). 만약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지으시는 것만으로 그치셨다면, 인간은 짐승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짐승과 달리 인간에게는, 흙으로 지으신 뒤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넣어 주심으로 생령이 되게 하셨다. 이것이 바로 사람과 짐승의 차이다. 인간이 생령으로서의 삶, 영적인 면을 상실해 버린다면 그는 더 이상 짐승과 구별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인간답지 못한 사람들을 가리켜 짐승 같은 인간, 혹은 짐승보다 못한 인간이라 부른다.
목회를 하면서 사람들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가 참 많다. 공통적으로 사람들이 놓치는 것이 하나 있다. 사람들이 스스로 내린 자신에 대한 평가는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언제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눈먼 자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평가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판단하시는가? 내가 그린 그림이 예쁘다고 생각하면 무엇하겠는가? 심사위원장이 제일 예쁘다고 판정해주어야 할 것 아닌가? 내가 내리는 판단보다도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판단이 그래서 중요하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시 8:1~9).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셨다고 하는 말은 하나님께서 나를 어머니처럼 자궁 속에 잉태하셨다는 말이다. 나를 지으심은 나를 출산하심이다. 그리고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기꺼이 죽으심으로 당신의 생명을 나에게 부어주셨다. 하나님 앞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 그것이 바로 내 모습이다.
“이스라엘 백성아, 내가 이 토기장이와 같이 너희를 다룰 수가 없겠느냐? 나 주의 말이다. 이스라엘 백성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 안에 있듯이, 너희도 내 손 안에 있다.”(렘 18:6).
사람됨의 회복
창 2장 7절 / 문기태목사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성경은 증거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속에 사람을 두고서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하시며 참으로 만족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하나님께서 본래 지으신 사람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한 사람이 되면 좋은 그리스도인도 될 수 있습니다. 좋은 아빠나 엄마가 될 수 있습니다. 좋은 남편이나 아내가 될 수 있습니다. 좋은 목사도 되고 좋은 집사도 될 수 있습니다. 좋은 선생님, 좋은 학생이 되며 좋은 사회인도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사람입니다. 그러나 겉모습만 사람일뿐 사람됨을 포기한 사람도 많습니다. 그래서 욕을 할 때 '사람같지 않은 놈' 또는 '짐승같은 놈'이라는 표현을 많이 씁니다. 사람으로서의 존귀한 가치를 포기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쩌다 그렇게 되었습니까? 사람이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을 거스리고 타락한 수 외형은 사람의 형태를 갖추고 있지만 인간성을 상실하고 죄로 가득찬 존재가 되었습니다.
구원이란 여러 의미를 갖고 있는데 그중에 중요한 하나는 사람됨의 회복입니다. 죄로부터 용서받고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됨을 포기하게 만드는 악한 사단의 권세로부터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참된 사람으로 우리를 다시 창조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본래 지으신 모습대로 참 사람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자신을 가리키는 호칭중에 가장 즐겨 사용하신 용어가 무엇입니까? 인자- 사람의 아들입니다. 저는 처음에 그것이 불만이었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가리켜 천자라고 하시지 왜 시시하게 인자라고 하셨을까? 그러니 사람들이 예수님을 깔보고 함부로 하신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왜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를 가리켜 인자라고 부르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인자라는 호칭을 통하여 당신께서 참 사람이심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참 사람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해 애쓰셨습니다. 고귀한 사람의 가치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참 사람됨의 회복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이 되라고 자녀에게 가르칩니까? 여러분 스스로 무엇이 되려고 하십니까?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본래의 목적대로 참 사람으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람됨을 회복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가 참으로 사람됨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창세기 2장 7절을 중심으로 사람됨의 회복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들에 귀를 기울이기 바랍니다.
1. 참 사람이 된다는 것은 생명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세상에는 없는 재료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게서 사람을 지으실 때 사용하신 재료는 흔하디 흔한 흙이었습니다. 철도 있고 금도 있고 온갖 보석도 있는데 하나님께서 왜 흙을 사용하셔서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사람을 지으셨을까요? 흙은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까?
모든 생명은 흙에서 나옵니다. 흙속에는 온갖 영양과 수없이 많은 미생물이 있습니다. 모든 식물이 흙에서 공급되는 수분과 양분으로 생명을 유지하고 열매를 맺습니다. 그리고 모든 동물이 흙에서 나는 것을 먹어야 살 수 있습니다. 물고기도 흙에서 자라는 미생물을 먹고 삽니다.
이처럼 흙은 생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의 보고인 흙을 사용하셔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사람은 흙에서 나왔습니다. 따라서 참 사람이 된다는 것은 생명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생명성을 회복한다는 것은 생명의 법칙을 알고 거기에 순응하며 사는 것입니다.
흙은 지구상의 모든 생명을 위하여 자신안에 감추인 온갖 좋은 것을 인색하지 않고 다 내어 줍니다. 모든 생물들은 흙을 통하여 공급받고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생명을 다 살고는 다시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또 다른 생명체에 생명을 나누어 주고자 다시 흙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께서 흙이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우리에게 큰 소리로 설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흙이 흔하디 흔한 재료이지만 흙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다른 모든 생물들을 살리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흙은 제 역할을 다 한 존재를 다시 받아 주고 되돌아가게 도와줍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다른 이들에게 유익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욕심만을 생각하고 다른 이들의 필요에는 무관심합니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위해 자신을 내어 주려고 하는 이들은 아주 드뭅니다. 그리고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인지를 잊고 살아갑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자신도 곧 흙으로 돌아가고야 만다는 사실을 잊고 살기 때문입니다.
[맹모삼천지교]에 대하여 다 알고 계실 것입니다. 맹모가 맹자를 데리고 장의사옆으로 이사가서 살았습니다. 아이가 날마다 장의사 놀이를 하고 지냅니다. 안되겠다 하고 여겨져서 시장바닥으로 이사갔습니다. 그랬더니 맹자가 날마다 장사꾼 흉내만 실컷 내며 놀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단하고 학교 옆으로 이사갑니다. 그랬더니 책을 열심히 읽는 흉내를 내다가 책을 열심히 읽는 사람이 되었고 맹자의 어머니도 현모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그것을 조금 다르게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맹모가 이왕이면 처음부터 학교옆으로 이사하지 장의사나 시장 옆으로 이사하였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것은 맹모가 처음에 장의사 옆으로 가서 산 것은 맹자에게 먼저 인생의 죽음을 일깨워 주고자 한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날마다 장례식을 보면서 자라게 하여 인생이 언젠가는 끝난다는 진리를 가르치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장바닥으로 이사간 것은 죽음을 알아야 생존의 현장에서 바르게 살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학교옆으로 이사한 것은 생과 사를 분명히 아는 자만 그 속에 참된 교육을 담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자녀를 사랑하십니까? 먼저 자녀들에게 인간은 죽는 존재라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럴 때 그 자녀가 인생에 한 부분이라도 귀한 시간을 무익한 일에 탕진하지 않고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생명성을 회복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결심만 한다고 저절로 생명성이 회복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힘입어야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혀 골고다 언덕위에서 달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세워진 곳이 골고다였습니다. 왜 골고다에 세워졌을까요? 골고다라는 뜻은 해골이라는 말입니다. 그 동산의 모양이 해골모양이었는지, 그 언덕이 사형집행장으로 사용되어 해골이 많이 뒹굴고 있어서인지, 전설처럼 하나님께서 최초로 창조하신 사람 아담의 무덤이 그곳에 있어 그의 유골이 발굴되었기 때문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해골이라는 곳에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해골위에 십자가가 꽂히고 그 십자가를 통해서 위로부터 그리스도의 보혈이 흘러 내립니다. 마태는 그 때에 일어난 일들을 기록하며 "땅이 흔들리고 바위가 갈라지고 무덤이 열리고 잠자던 많은 성도들의 몸이 살아 났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무덤에서 나와 거룩한 도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나타났다.(마27:51-53)" 라고 증거합니다. 보혈을 통해 흐르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수많은 죽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신안에 품는 사람은 오늘도 십자가를 타고 흐르는 보혈을 힘입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새롭게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신의 정수리에 꽂겠습니까? 자신도 해골이 될 것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입니다. 자신도 흙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의심없이 받아 들이는 사람만이 생명의 소중함을 알고 그리스도의 보혈을 받아 들입니다.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에 닿아 새 생명이 시작되는 사람만이 사람됨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속에도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습니까? 그 십자가를 통해 지금도 예수님의 보혈이 흐르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생명이 여러분에게 날마다 참 사람의 생명이 되살아 나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참사람이 된다는 것은 영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사람을 빚으신 뒤에 사람의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습니다. 그러자 생령을 가진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된다는 것은 흙으로 지음받은 육체적인 존재로만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숨을 간직한 영적인 존재로 회복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영성을 갖지 않으면 짐승과 별반 다른 점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짐승에게도 영성을 주시지 않고 사람에게만 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죄를 범하고 점차 영성을 상실해갑니다. 그러면서 사람됨도 상실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도 죄를 짓고 영성과 사람됨을 상실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오셔서 찾으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히브리어에서 아담이라는 말과 사람이라는 말은 같은 말입니다. 인간이 사람됨을 상실했을 때 하나님은 "사람아 어디 있느냐?" 하고 사람을 찾으신 것입니다. 육체만 있고 영은 죄로 인하여 죽어버린 비참한 인생앞에서 안타까운 심정으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부르며 탄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참 사람을 회복시키시고자 성령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님을 그의 심령속에 모실 때 하나님의 영이 회복됩니다. 살아 있는 영적인 존재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람답게 살지 못했던 우리 인생들의 모든 죄를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용서하여 주시고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 심령을 새롭게 하시고 참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과 지혜를 공급해 주십니다.
성경은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모르고 살 때는 겉으로는 살아 있으나 실제로는 죽은 존재였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숨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고 성령받으면 다시 살아납니다. 생령 즉 살아있는 영적 생명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됨의 회복은 성령충만을 받는 사람만이 가능합니다. 자기의 힘으로 변화된 사람을 결심해도 며칠 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역사하시면 진짜 변화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본래 목적대로 거룩한 삶을 사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유럽의 교회에 가보면 생명력이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국민의 대부분이 기독교신자임을 자처하는데 그들중에 교회에 주일마다 정기적으로 출석하는 사람은 1-2%입니다. 교회가 텅텅 비어 있습니다. 교회당은 결혼식이나 장례식으로나 사용됩니다. 그중에 상당수가 술집이나 극장으로 팔려 버리고 있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정직하다고 자랑해도 인권을 존중하고 축복을 받아 잘 산다해도 영성이 사라진지 오래이기 때문에 우리가 본받을 것이 없습니다. 그들이 기독교역사를 가지고 있고 종교개혁의 본산지라고 자랑한다 해도 정작 그들에게 기도가 중단되고 예배가 소홀히 여겨지는 가운데 무슨 영성이 유지되겠습니까?
영성이 회복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사용하시는 존귀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영성이 회복되려면 성령충만을 사모하고 성령충만을 간구하며 성령님을 범사에 인정하고 성령의 감동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의 호흡을 대신 하실 수 있도록 우리의 심장을 내어 드려야 합니다. 여러분 안에 성령께서 계십니까? 그분이 여러분안에서 어떤 일을 하십니까? 여러분 모두 성령충만한가운데 사람됨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3. 사람됨의 회복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1:27) '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사람이 만물보다 존귀한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외모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육체를 갖지 않으셨기 때문에 외모를 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하나님의 인격을 말합니다. 인격이란 지,정,의 세 가지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지적인 면, 정서적인 면, 의지적인 면을 갖고 계십니다. 그래서 사랑도 하시고 거룩하시며 공의롭게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의 형상에서 대표적인 면을 사랑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너무 크고 위대합니다. 원수까지도 품으시기 때문입니다. 한 두 사람에 멈추지 않고 온 인류를 다 품으시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상대를 위하여 아주 비싼 댓가를 지불하기를 주저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람됨을 회복한다는 것은 사랑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아 진실한 사랑을 하고 위대한 사랑을 실천할 때 우리는 사람됨을 회복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에 대해 수없이 많은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잘 알것 같지만 사랑을 잘 할 것 같지만 사랑에 대해 미숙할 때가 너무 많습니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서 설명합니다.
그리스도인인 어떤 분이 결혼하여 아내와 함께 10년정도 단란하게 잘 살았습니다. 그런데 10년쯤 되어 아내에게 시어머니를 모실 것을 제의했고 아내도 흔쾌히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며 문제가 생겼습니다. 고부간의 갈등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시어머니는 시어머니대로 며느리를 보지 않겠다고 하고 며느리는 며느리대로 시어머니를 더 모시지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달래보았지만 허사였습니다. 남편에게는 잘하면서도 시어머니문제만 나오면 다투고 결국 이혼이야기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문제가 무엇입니까? 왜 여기까지 오게된 것입니까?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자기 방식대로 사랑을 했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아 사랑하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먼저 사랑한다면 시어머니를 모시는 것을 의무로 강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시어미니를 모시는 것은 남편에 대한 사랑때문입니다. 따라서 따뜻한 사랑으로 아내의 마음을 녹여 주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내 어머니를 사랑할 수 밖에 없도록 충분히 사랑하고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 주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사랑한다면 울타리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남편은 아내의 울타리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때로 그리스도인 시어머니도 유교적인 관습으로 일방적으로 명령하고 억누를 수 있습니다. 며느리를 자기 부속물정도로 여기고 상전처럼 군림할 수 있습니다. 그럴때 남편은 울타리가 되어 아내를 보호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한다면 서로 종노릇해야 합니다. 갈5:13절은 사랑으로 피차 종노릇할 것을 명령합니다. 왜 그런데 공자의 교훈을 따라 여필종부를 내세웁니까? 며느리만 무조건 복종하라고 합니까? 유교는 힘있는 자들을 보호하는 제도입니다. 기독교는 힘잇는 자가 힘없는 자를 섬기는 도리입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신 사람이라면 아내가 성숙하여 사랑으로 종노릇하기 까지 힘있는 남편이나 성숙한 시어머니가 그의 수준을 이해하고 섬겨 주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사랑한다면 본인이 자기의 어머니에게 효도해 주기를 요구하는만큼 아내의 부모님에게도 효도하여야 합니다. 아내에게만 요구하고 자신의 도리를 소홀히 한다면 위선입니다.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사랑은 결코 일방적일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참 사람됨을 회복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십시오. 무엇보다도 사랑을 회복하고 실천할 수 잇기를 바랍니다. 그것도 가장 가까운 가족부터 사랑하십시오. 가장 가까운 지체부터 사랑하십시오.
여러분 무엇보다도 사람이 되십시오 그러면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사람이 되면 좋은 집사도 되고 좋은 선생님도 되고 좋은 일군도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참된 사람이 되면 여러분의 가정이 행복해집니다. 여러분의 직장이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의 교회가 은혜스러워질 것입니다. 우리 나라가 여러모로 어려운 가운데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다운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정치계에 경제계에 문화계에 교육계에 교계에 사람이 필요합니다. 아주 많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이 진실한 믿음을 갖고 참 사람이 되어 이 사회의 모든 분야에 들어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를 축원합니다.
생기와 티끌
창 2:7 / 김도완 목사
어둠 속의 빛줄기
가슴 아픈 이야기로 설교를 시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지난 월요일 미네소타 미니애폴리스에서 벌어진 지미 플로이드 사건으로 온 나라가 시끄럽습니다. 데릭 쇼빈이란 백인경관이 그를 체포하는 과정에서 8분 동안이나 무릎으로 목을 눌러 죽음에 이르게 만든 사건으로 인종차별에 대한 분노가 폭발하여 전국에서 시위가 일어나고 일부 지역에서는 폭동으로 번지고 있습니다. 이 경관은 3급 살인혐의로 기소되었지만 시위는 수그러들 줄 모릅니다. 사람의 목숨을 이렇게 빼앗는 것은 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코로나 사태와 경기침체로 그렇잖아도 고통스러운 미국 땅에 더 큰 갈등과 혼란을 일으켰습니다. 어서 속히 증오와 미움이 아닌 정의와 사랑이 실현되고 폭동이 사라지도록 기도하여야 하겠습니다.
가슴아픈 일은 지구 반대편에서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 인도에서 벌어진 사건을 하나 보시겠습니다.
<영상1-기차역에서 코로나로 엄마를 잃은 아기>
기차로 귀향하던 한 엄마가 어린 아기를 남겨놓고 차가운 역 바닥에서 목숨을 잃고 담요를 수의 삼아 누워있다는 이 소식을 할 말을 잃지 않을 이가 없을 겁니다. 그런데 인도의 수많은 노동자들은 이렇게 기차를 이용하는 최소한의 호사도 누리지 못 한 채 수백 마일을 걸어서 집으로 가야 하는 상황이고 길에서 탈진해 목숨을 잃는 이들이 부지기수라고 합니다. 이런 비극의 한 가운데서 그러나 우리의 가슴을 따뜻하게 만드는 뉴스도 없지 않습니다. 이 소식도 한 번 보시지요.
<영상2-수퍼맨이 된 배우 소누 수드>
코로나 사태 이후 이미 사재를 털어 매일 일자리를 잃은 수천 명을 먹이던 인도의 배우 소누 수드는 뉴스에서 보신 바와 같이 이제 그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놓고 있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소누 수드가 사람들을 먹이고 돌보고 돕고 있습니다.
선에 봉사하는 사람
생명을 죽이는 것이 악이고 살리는 것이 선이라면 악에 봉사하는 사람도 있고 선에 봉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진리에 도전하기를 ‘선하고 전능한 하나님이 계신다면 왜 세상이 이렇게 고난과 악으로 가득 차 있느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이 아니냐?’고 합니다. 질문이 잘못 되었습니다. ‘죄악이 이렇게 가득한데 왜 세상은 멸망하지 않는가? 세상이 멸망치 않도록 하나님께서 사랑과 능력으로 붙들고 계시는 것이 아닌가?’라고 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마치 사춘기 철부지가 ‘엄마, 아빠가 내게 해 준 게 뭐가 있어?’라고 투정하지만 사실은 매일 매순간 엄마, 아빠의 돌봄과 사랑과 기도로 자라고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마귀가 악에 봉사하는 사람들을 통해 세상을 병들게 하고 멸망으로 몰고 가려 할 때에 하나님은 선에 봉사하는 사람들을 통해 세상을 치유하고 구원하십니다. 그래서 세상이 죄와 악으로 이렇게 병들어 있는데도 여전히 멸망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하신 모든 일 중 가장 위대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 일을 기념하는 날이 바로 오늘입니다. 오늘은 교회력으로 성령강림주일입니다. 2000년 전 오늘 유대땅에서 오순절을 맞은 제자들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의 명령대로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선물을 기다리며 열흘 째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마침내 성령이 제자들 위에 충만히 임하셔서 교회가 시작되었고 복음이 예루살렘을 넘어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퍼져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건의 의미를 창세기를 통해 들여다 보겠습니다.
생기와 티끌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원리입니다. 창 2:6입니다.
(창 2:6)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티끌)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사람의 재료는 두 가지입니다. 흙과 생기. 흙으로 번역된 히브리어의 원뜻은 티끌, 먼지입니다. 한글성경에서는 식물을 자라게 하는 토양을 이루는 흙이란 단어로 번역되어 가치있는 재료인 듯 한 느낌을 주지만 원래의 의미는 바람에 날리는 티끌, 먼지로서, 아무런 가치를 갖지 못 한다는 의미가 더 강합니다. 요즘 말로 하면 미세먼지입니다. 누가 먼지를 귀하게 여기겠습니까!
반면 생기로 번역된 단어는 생명이란 단어와 호흡이란 단어의 결합입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생명의 호흡 즉 생명의 원천입니다. 사람의 생명은 사실상 이 생기의 존재에 달려 있습니다. 의사들이 사람의 생명유무를 확인할 때 맥박과 함께 코에 호흡이 있는지를 확인합니다. 생기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생명의 능력입니다.
생령이란 단어는 살아있는 영적 존재라는 뜻입니다. 살아있는 영적 존재 즉 생명의 가치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어서 예수님은 이를 온 천하와도 바꿀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창조의 원리는 무가치한 티끌에 고귀한 생기가 더해지니 천하보다 귀한 생명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이란 존재는 무가치한 티끌과 고귀한 생기의 요소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티끌의 욕망과 생기의 욕구가 함께 있습니다. 티끌의 욕망은 무가치합니다. 허영과 탐욕과 정욕이 그것입니다. 생기의 욕구는 고귀합니다. 의와 진리와 거룩에 대한 갈망이 그것입니다. 우리 안에 이 두 욕구가 모두 있습니다. 이들은 마주 보고 달리는 열차처럼 서로 충돌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갈등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롬 7: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이 갈등 앞에서 우리는 선택을 합니다. 티끌을 택하면 티끌처럼 무가치한 사람이 됩니다. 생기를 택하면 생기처럼 고귀한 사람이 됩니다. 이 역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롬 8:5)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아담의 후손들은 그 선택이 가져오는 다른 결과를 잘 보여줍니다. 몇 주 전에 가인과 셋의 후손을 비교해 설명드렸습니다. 가인은 티끌의 사람입니다. 그는 동생 아벨을 시기심으로 죽이고 티끌과 같이 무가치한 삶을 살아갑니다. 이후 그와 후손들이 얼마나 번성했든, 얼마나 문명건설에 기여했든 상관없이 그 삶은 무가치합니다. 반면 셋은 생기의 사람입니다. 그와 후손들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마치 소금처럼 세상이 썩지 않게 만들고 맛을 내고 빛처럼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고귀한 가치를 가집니다.
티끌의 욕망
그러면 인류역사에 티끌의 사람과 생기의 사람 중 누가 더 번성했을까요? 즉 티끌의 사람이 세상을 병들이가 쉬웠을까요, 생기의 사람이 세상을 치유하기가 쉬웠을까요? 이런 비유를 생각해 보면 이해가 쉽습니다. 구정물통에 생수를 여러 병을 부어넣어도 그건 여전히 구정물입니다. 반면 생수통에는 구정물을 단 한 컵만 부어도 그건 더 이상 마실 수 없는 구정물이 됩니다. 무엇이든 더럽혀지기가 깨끗하게 유지되기보다 훨씬 쉽습니다. 티끌의 욕망은 강렬해서 생기의 욕구를 압도합니다. 그래서 시간이 흐를수록 티끌의 사람들이 많아집니다. 이런 사실을 아벨과 셋의 후손들이 번성해서 온 땅에 퍼지기 시작했을 때 벌어지는 상황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창 6:1-2을 보십시오.
(창 6:1) 사람이 땅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창 6: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정체를 놓고 해석이 분분합니다. 그러나 바로 전문맥인 창세기 5장까지 아벨과 셋의 후손들의 족보와 그들의 삶을 자세하게 설명한 것을 볼 때 하나님의 아들들은 생기의 사람인 셋의 후손들이고 사람의 딸들은 티끌의 사람인 아벨의 후손들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들로 살아가야할 생기의 사람 셋의 후손들이 티끌의 욕구로 살아가는 사람의 딸들 즉 아벨의 후손들과 결혼을 하며 그 거룩한 삶을 포기해버린 것입니다. 그 결과를 5절이 이렇게 설명합니다.
(창 6: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그리고 마침내 티끌의 욕망이 아닌 생기의 거룩함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노아의 가족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 된 것입니다. 생기의 사람들 셋의 후손들은 다 어디로 갔단 말입니까?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에 빠져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거룩함을 버리고 타락했다는 말입니다.
개입하시는 하나님
이런 상황을 내버려두면 세상은 마침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병들고 썪어서 멸망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이 멸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역사에 개입하기로 하십니다. 바로 노아의 대홍수를 통해 티끌의 사람들을 심판하고 생기의 사람 노아를 새로운 시조로 삼아 생기의 사람들, 하나님을 예배하는 백성들을 재창조하신 것입니다. 이런 창조와 타락, 심판과 구원의 패턴이 역사 내내 반복됩니다.
첫 시조 아담에게서 아벨이라는 티끌의 자손이 나온 것처럼 둘째 시조인 노아에게서도 함이라는 티끌의 자손이 나옵니다. 함의 후손들은 티끌의 사람들을 모아 바벨탑을 쌓고 하나님께 도전하였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그들을 흩어버리셨습니다. 반면 생기의 사람인 셈의 후손 중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이스라엘 역시 타락합니다. 아합의 때에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에 빠져들자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은 7천 인을 남기셔서 생기의 역사를 이어가게 하셨습니다. 남북왕국이 모두 불순종으로 멸망할 상황이 되자 우상숭배에 물들지 않은 남은 자들을 통해 역시 생기의 역사를 잇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간신히 그 명맥만 끊어지지 않고 이어가던 생기의 역사를 부흥시킬 계획을 세우셨고 그 때가 되자 그 계획을 이루셨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티끌의 욕망의 노예된 자들을 구원하여 생기의 백성으로 구원하시고 그들을 통해 온 세상 모든 백성들을 생기의 사람으로 부르신 사건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순절 성령세례를 통해 교회를 세우신 이유입니다.
성령님은 이 땅에 오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 교회를 세우시고 티끌의 욕망으로 살아가던 이들을 생기의 거룩함으로 살도록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과 성령님의 교회 사역은 함께 우리들을 생기의 사람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교회에 다니고 죽어서 천국 가는 것 이상의 의미가 그러므로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티끌의 욕망을 좇아 살지 않고 거룩한 생기의 능력을 좇아 삶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순종하는 백성이 세상에 가득하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티끌의 욕망으로 병들고 부서진 세상을 생기의 능력으로 치유하고 회복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가 온 세상에 가득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세상을 멸망치 않고 구원하려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기도문에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고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성령님을 통해 이 세상 역사에 개입하십니다. 죽이고 빼앗고 차별하고 멸시하는 악의 역사가 티끌의 사람들을 통하여 세상을 망가뜨리는 동안 살리고 나누고 치유하고 사랑하는 의의 역사를 생기의 사람들을 통하여 이루셔서 세상을 구원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생기의 사람입니까, 티끌의 사람입니까? 세상이 병들고 부서졌지만 마침내 하나님의 역사로 치유되고 구원받을 것입니다. 생기의 사람이 되어 그 역사의 주인공으로 쓰임받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창 2장 4~7절 / 지용수목사
천지 창조와 모든 만물의 창조, 그리고 사람의 창조에 대한 말씀이 창세기 1장에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흙으로 지으신 것에 대해서는 2장에서 다시금 설명하십니다. 그것은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를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인식시키시기 위함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the Load God formed the man from the dust of on the ground)』(창세기 2:7)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지으셨다는 이 말씀에는 깊은 교훈이 있습니다.
개구리는 올챙이 시절을 알아야 하듯이 우리는 우리의 본질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의 본질, 우리의 근원, 우리의 체질은 흙입니다. 흙이라도 흙먼지(dust)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냥 흙도 아닌 흙먼지로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하는 일을 보십시오. 정말 대단합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자동차를 만들어 타고, 비행기를 만들어 하늘을 날고, 빌딩을 짓고 큰 도시를 만듭니다. 달과 우주를 정복하려고 연구를 합니다. 그 하는 일이 참으로 대단하고 굉장해서 사람은 다른 어떤 피조물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원숭이와 사람, 짐승과 사람의 차이는 감히 견줄 수 없습니다. 그 정도로 우리 사람은 하나님의 걸작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본질은 흙에 불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결국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9절에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흙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흙이라 스트레스를 조금만 받아도, 조그마한 병균이 들어와도 휘청거리고 죽습니다. 자동차에 부딪혀도 일그러지고 죽습니다. 그리고 죽어서 흙이 됩니다. 물론 우리의 영혼은 하늘나라에 올라가지만 우리의 육신은 일단 흙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우리가 부활할지라도 일단은 흙이 됩니다. 그러므로 내가 지금 몇 만 명의 사원을 거느린 CEO이고, 몇 억만금을 쌓아놓은 부자이고, 하늘을 찌를 만한 권세가 있다 해도 절대로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흙입니다. 오늘 밤에 집으로 가다가 자동차 사고로 죽을 수 있는, 질그릇같이 연약한 우리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을 바라보면서 겸허하게 살아야 됩니다.
그리고 너무 교만한 사람, 거만한 사람을 만나도 열 받지 마시기 바랍니다. 살다 보면 참으로 희한한 사람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한 8년 전의 일입니다. 자동차를 세워놓고 목욕탕에 갔다 왔더니 제 차 앞에 어떤 차가 더블 파킹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얼마나 바쁜 사람입니까? 그런데 40분이나 기다린 후에야 차 주인이 나타났습니다.
“남의 차 앞에 어찌 이렇게 차를 세웠습니까? 한참 동안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차 주인이 담배를 꼬나 물고 미안한 기색도 없이 “살다보면 그럴 수 있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한 대 쥐어박고 싶었지만 어떻게 그러겠습니까? 마음속으로만 ‘잘났다. 잘 먹고 잘 살아라.’ 하고 말았습니다.
살다보면 별별 사람을 다 만납니다.
따라 합시다.
“흙덩어리 주제에 …….”
이렇게 생각하고 열 받지 마시기 바랍니다. 열 받으면 병만 옵니다.
우리는 늘 겸손하게 살고, 희한한 사람을 만나도 ‘세상에! 참 못난 사람도 있구나. 흙덩어리 주제에 분수도 모르고…….’하고 그냥 웃어넘기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흙이라 흙으로 돌아갑니다. 저희가 어릴 때는 몸에 상처가 생겨 피가 나면 할머니들이 그 상처에 흙을 뿌려 주셨습니다. 그러면 치료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흙이라 흙과 친합니다. 그래서 땅을 좋아하여 부동산 투기를 하고, 땅을 서로 차지하려고 전쟁도 하는가 봅니다. 옛날에는 하늘인 남편이 땅인 아내에게 큰소리를 치고 살았는데 요즘에는 땅 값이 비싸서 하늘이 맥을 못 춘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습니다.
아무쪼록 우리가 흙인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죽으면 우리는 흙으로 변합니다.
그리고 흙으로 지어진 존재는 이 세상에 오래 있지 못합니다.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편 90:10)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면 없어지나니 그곳이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시편 103:15~16)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利)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야고보서 4:13~14)
아침에 안개가 가득할 때는 굉장합니다. 비행기도 뜨지 못합니다. 그러나 바람이 불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안개는 사라집니다. 우리가 살아갈 때는, 이렇게 무리를 지어 살아갈 때는 굉장해 보이지만, 그러나 시간의 바람이 불면 우리는 다 사라지고 없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지 못합니다.
찰스 다윈이 해리옷이라는 이름의 거북이 한 마리를 길렀습니다. 그 거북이는 몇 십 년을 길러도, 아무리 오래 길러도 변함없이 거북이입니다. 거북이가 억만 년이 지나면 사람이 되겠습니까? 원숭이가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지으신 그대로 살다가 가는 것입니다. 찰스 다윈은 죽었는데 그 거북이는 며칠 전에 175살 생일을 맞이했습니다. 그래서 그 거북이를 기르고 있는 호주 동물원에서 생일잔치를 해주었다고 합니다. 지금 30파운드(약 14kg)의 그 거북이가 지금까지 제일 오래 산 동물로 기네스북에 올라 있는데, 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앞으로 30년은 더 살 것이라고 합니다.
거북이는 175살까지 사는데 사람은 그만큼도 못 살고 갑니다. 그러니 우리는 언제나 그 날의 우선순위를 정해서 중요한 일부터 해야 되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컨설턴트 윈스턴은 말하기를, 특별히 최고경영자(CEO)는 우선순위를 정해서 시간 관리를 하지 않으면 큰일 난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산더미처럼 쌓이는 서류에 파묻혀 죽는다고 했습니다.
저도 어떤 면에서는 CEO입니다. 제 책상에도 언제나 서류가 산더미입니다. 어떤 것 한 가지를 결정하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지 모릅니다. 제가 얼마나 고민하고 애쓰는지를 제 아내도 다 모릅니다.
윈스턴은 이렇게 말합니다.
“보낼 것은 보내고, 처리할 것은 즉시 처리하고, 보관할 것은 보관하고, 가치 없는 것은 금방 버려야 한다.”
시간을 잘 써야 합니다. 하루 24시간을 잘 나누어 살아야 하고, 2분 안에 할 수 있는 것과 5분 안에 할 수 있는 것을 구분하여 처리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CEO들은 점심식간에 식사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그 5분 동안에도 무언가를 합니다. 그렇게 해야 맡은 일을 잘 해 나가지, 밥이 나올 때까지 그냥 무심코 시간을 보내면 뒤처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루하루도 우선순위를 정해서 계획성 있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선순위를 정할 때 예배를 최우선순위에 두어야 합니다.
저는 시간이 아무리 부족해도 기도 시간과 성경 읽는 시간은 지켰습니다. 논문을 쓸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논문은 좀 늦게 써도, 논문은 조금 못 써도 괜찮습니다. 그것이 제 인생을 좌우하지 못합니다. 저를 높이시고 낮추시고 살리시고 죽이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앞에 먼저 예배하고 기도하고, 하나님 섬기는 일을 삶의 최우선순위로 정해놓고 살 때 하나님께서 손들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섬기는 일을 일생 최우선순위로 정해서 먼저 하나님을 섬기고, 그리고 가족을 사랑하고, 할 일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 어떻게 떠날지 모릅니다.
엊그제 신문을 보니 마음 아픈 기사가 실려 있었습니다. 군에서 제대하여 집으로 온 지 20일밖에 안 된 한 아들이 몸이 좋지 않아 병원에 가서 체크하니 간암 말기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아들이 제대했다고 온 식구가 기뻐서 야단이었는데, 간암 말기라니 어떻겠습니까?
여러분 집의 자녀들은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건강한 자녀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사람이 세상에 올 때는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 이렇게 순서대로 오지만, 세상을 떠날 때는 아닙니다. 아들이 먼저 갈 수도, 손주가 먼저 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떠날 때가 언제인지 누구도 모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일생의 계획을 세우되, 오늘 죽어도 후회하지 않을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으면 반드시 하나님 앞에 섭니다. 어느 판사 앞에 서거나 대통령 앞에 서거나 어떤 사람 앞에 서지 않고 하나님 앞에 섭니다. 하나님 앞에서 결산해야 됩니다.
“나는 너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렸는데, 나는 너에게 성령을 주고 모든 것을 다 주었는데 너는 나를 위해 무엇 했느냐?”라고 물으실 그 때 “아버지, 제가 부족하지만 이것은 했습니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대구의 한 장로님이 꿈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얘야,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했느냐?”
“예. 아들도 잘 키우고 딸도 잘 키우고 예배도 잘 드렸습니다.”
“그것은 평신도도 다 한다. 너는 장로인데 장로로서 나를 위해 무엇을 했느냐?”
그리고 보니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었습니다. 특별하게 보고 드릴 것이 없었습니다. 그저 십일조 드리고, 예배 드리고, 평신도도 다하는 그런 것밖에 한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섭섭해 하시는지…….
꿈에서 깨어난 그는 헛된 삶을 살았던 자신이 부끄럽고 죄송스러워 한참 울었답니다. 그분이 그 후에 교회를 21개나 지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내가 산 것 주께서 보시고
훗날에 나를 보고 무어라 하실까」
만일 오늘 밤에 주님 앞에 우리가 서게 되어 주님께서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하고 왔느냐?”하고 물으시면 그때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마태복음 7장 16절에서 18절에 말씀하십니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15장 16절에도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사과나무에 사과가, 포도나무에 포도가 맺히지 않는다면 어디에 쓰겠습니까? 사과나무를 재목으로 쓰겠습니까? 포도나무 덩굴로 집을 짓겠습니까? 가구를 만들겠습니까? 땔감으로밖에 쓸 수가 없습니다. 과일나무의 가치는 열매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가치는 열매에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예배 열매, 전도 열매, 충성 열매를 많이 맺어야 합니다.
에베소서 1장 11절에서 12절에 말씀하십니다.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착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업입니다. 할렐루야! 기업은 이익을 기업주에게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익이, 우리의 영광이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내가 내 아들딸을 기르지만 내 아들딸이기 전에 하나님의 기업이니 잘 길러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주의 것입니다. 나의 모든 것도 주의 것입니다.’
이렇게 살 때 아버지의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의 것으로 살고 남편은 아내의 것으로 살아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예전에는 ‘아내가 나 몰래 돈을 빼돌리면 어떡할꼬? 혹 날 버리고 가면 어떡할꼬?’라는 생각을 할 때가 가끔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라고 믿고 모든 것을 아내에게 맡겼습니다. 그러니 헌금도 아내가 다 합니다. 제 지갑에 돈이 얼마나 있는지 저는 모르는데 얼마 정도 있는지 아내는 압니다. 저는 모든 것을 아내에게 맡겼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내도 모든 것을 제게 다 맡겼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다 맡기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 맡기셨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인 줄로 믿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주님의 기업이니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를 많이 맺어 드려야 합니다. 록펠러나 링컨, 에디슨, 바흐처럼 열매를 많이 맺어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흐는 하도 많은 곡들을 작곡해서 한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그의 작품을 계속 손으로 옮겨 적어도 다 옮기지 못할 정도라고 합니다. 그 명작들이, 그 대곡들이 바흐에게서는 거침없이 술술 나왔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바흐에게 그렇게 아름다운 음악을 많이 작곡할 수 있게 하셨습니까? 그는 악보 제일 상단에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고 적었습니다. 그는 인기나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작곡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줄로 믿습니다.
사업을 하거나 병원을 경영하거나 약국을 하거나 식당을 하거나 직장생활을 하거나 ‘내가 무엇을 하든지 주를 위해 한다.’라는 마음을 품고 사는 사람은 오늘 주님 앞에 가도 어엿이 그 품에 안기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흙으로 지어진 그 사람은 마네킹, 조각품에 불과합니다. 모양은 사람이지만 아무 의식도 없고 호흡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흙덩어리인데, 하나님께서 ‘후~’ 하고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되었습니다. 영혼이 들어가니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 생명은 육체에 있지 않습니다. 영혼에 있습니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도 영혼이 떠나가면 그 순간에 끝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허약한 사람도 영혼이 떠나가지 않으면 살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영혼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후~’하고 불어넣으신 생기는 생명의 기운으로 영혼을 의미합니다. 영혼이 들어와 있으니 우리가 이렇게 살아 있는 것입니다. 놀랍습니다.
요한복음 20장 19절에서 23절 말씀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덜덜 떨며 숨어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시며 손의 못 자국과 옆구리의 창 자국을 보여 주셨습니다.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제자들을 보시며 예수님께서 숨을 ‘후~ ’뿜으시고는 “성령을 받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성령은 영혼이 아닙니다.
성령이 들어가야 영생하는 존재가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교회를 몇 십 년 다녀도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은 나중에 교회를 떠날 수가 있습니다.
리차드 기어라는 미국의 유명한 배우가 크리스천이었는데 불교인이 되었습니다. 왜입니까? 성령을 받지 못하니 교회에 다녀도 만족하지 못하고 절에 가면 무엇이 있을까 하고 간 줄로 믿습니다..
따라 합시다.
“바보다. 바보다.”
성령을 받지 않으면 목사님의 아들이라도 교회에 나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성령을 받지 않으면 영생하는 존재가 되지 못합니다.
그리고 오늘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은 영적으로 보면 마네킹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 교회를 모르는 사람은 흙덩어리보다 더 불쌍합니다. 흙덩어리는 흙으로 끝날 뿐 지옥에는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혼이 있는 사람은 죽으면 다 멸망하고 지옥에 가게 됩니다.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다 지옥에 갑니다.
우리는 감사해야 됩니다. 성령은 백억을 주어도 살 수 없고 천억을 주어도 살 수 없습니다. 주님의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성령은 떠나가지도 않습니다.
한 영화감독은 어머니 때문에 교회에 다녔지만 세상에 푹 빠져 살았습니다. 주일에만 건성으로 교회에 가고 세상에 푹 빠져 사니 기쁨도 구원의 확신도 없었습니다. 하루는 어떤 집에 초대를 받아 갔는데 그 집에 들어서는 순간 온 몸이 쭈뼛했습니다. 그런데 한 부인이 나와서 말했습니다.
“당신은 예수를 믿는 사람이지요? 당신이 들어오는 순간 크게 얻어맞은 기분이 듭니다.”
알고 보니 그 부인이 무당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람이 그 집에 들어가니 무당이 얻어터지는 것같은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선데이 크리스천이라도 성령이 계시면 예수의 사람인 것입니다.
제 아내도 그런 일을 경험한 적이 있답니다. 신촌의 한 미장원에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들어와 “어~ 이 집이 운수 대통했다! 이제 운수 대통했다!”라고 하다가 제 아내를 보더니 파랗게 질려서 바들바들 떨며 생땀을 흘리더랍니다. 그래서 제 아내가 옆에 앉으라고 했더니 “이렇게 안 하면 귀신이 나를 그냥 두지 않아요.”하며 도망을 치더랍니다. 제 아내를 보고 누가 겁을 내겠습니까? 제 아내에게는 저나 겁을 내지, 겁을 낼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점쟁이가 제 아내를 보고 두려워한 것은 제 아내 안에 계신 성령님 때문입니다. 제 아내와 함께 하시는 성령님 때문에 그 점쟁이가 도망을 친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찬양해야 됩니다. 우리가 이렇게 부족해도 우리 안에 성령님께서 계십니다.
「성령이 계시네 할렐루야 함께 하시네 좁은 길을 걸으며 밤낮 기뻐하는 것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
예수님을 믿어 성령님을 받아 영생하는 종교는 우리 예수교 하나뿐입니다. 오직 예수! 오직 예수! 예수님밖에 구원이 없습니다. 구속의 피도, 성령도, 구원의 길도 오직 예수님께만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을 믿은 사람은 다 성령을 받았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예수를 주라 부를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모두 성령 받았음을 감사하십시다. 그리고 부지런히 전도합시다. 우리의 친척, 이웃 중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다 영적으로 마네킹입니다. 그리고 다 지옥에 갑니다. 틀림없이 지옥에 갑니다. 그러니 부지런히 전도해서 그들도 교회에 와서 구원을 받고 성령의 사람이 되고 영생하는 사람이 되게 해야 합니다.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구원 받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후 ~’하고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힘을 얻어서 일어섰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삼손에게 블레셋 군대 삼천 명을 쳐 죽일 힘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힘을 주십니다. 기도할 힘을 주십니다. 전도할 힘을 주십니다. 열심히 살 힘을 주십니다.
마귀는 우리에게서 힘을 쑥 뽑아갑니다. 마귀는 삼손의 머리카락을 잘라서 그의 눈이 뽑히게 하고 힘을 못 쓰게 만들었습니다. 마귀는 전도할 힘, 예배할 힘, 기도할 힘을 다 뽑아갑니다. 열심히 살고 싶은 힘도 뽑아가서 자살하게도 만듭니다.
이사야 40장 28절에서 31절에 말씀하십니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할렐루야!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는 것입니다.
다니엘서 10장에 보면, 힘이 쑥 빠져 말할 기운도 없는 다니엘에게 인자 같은 분이 오셔서 “은총을 크게 받은 자여, 두려워하지 말라. 평안하라. 강건하라. 강건하라.”라고 말씀하시니 다니엘은 힘이 솟아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에게 “강건하라. 강건하라.”라고 말씀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에게 힘이 솟아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같이 계시는 것만으로도 힘이 납니다. 어린아이는 아빠가 있으면 힘이 납니다. 아빠가 없으면 강아지도 두렵고 큰 아이도 두렵지만 아빠가 함께 있으면 힘이 나고 두렵지 않은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의 힘이 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옆에 계셔서 힘이 되시고 도와주실 뿐 아니라 친히 우리에게 힘을 주십니다. 강한 힘을 주십니다.
2차 대전 때 영국의 무하마임 장군이 사방으로 포위를 당했습니다. 사방에서 적이 공격해 오니 모두 죽게 되었습니다. 모든 군사들이 두려워서 떠는데 장군이 말했습니다.
“자! 우리가 전쟁하면서 사방을 동시에 공격할 기회는 오늘뿐이다. 한 번 힘을 다해 적들을 쳐서 쓰러뜨리자.”
그러자 군사들이 힘을 내어 나가서 싸워 이겼답니다. 죽게 된 지경에서도 힘을 얻으면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힘을 주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사업이 밑바닥에 있고 가정이 밑바닥에 있고 모든 것이 밑바닥에 있어도 하나님께서는 힘을 주시니 우리는 일어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죽은 자도 살리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교회는 하늘의 능력을 공급하고 재충전해 주는 장소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사는 사람은 자살할 수 없습니다. 망할 수 없습니다.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뚝이는 아무리 내동댕이쳐도 오뚝 서듯이, 우리는 아무리 휘청거려도 하나님께서 힘을 주시니 다시 서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우리는 흙이지만 우리 안에, 이 질그릇 안에 보배이신 우리 주님께서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가치는 한이 없습니다. 우리만 있으면 흙덩어리지만 우리 안에 주님께서 계십니다. 질그릇은 별 것이 아니지만 그 안에 금덩어리가 있으면 얼마나 귀하게 되는지 모릅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예수님의 성령께서 계십니다. 우리는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모신 귀한 질그릇임을 기억하고 언제나 귀하게 품위를 지키면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천당으로 이사갈 때까지 하나님 앞에서 귀한 모습을 지니고 살아가는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생 기
창 2장 4~7절 / 장경동목사
지금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7절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이때까지의 사람은 한줌의 흙 이였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창18:27 ‘아브라함이 말하여 가로되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 에서 자신을 티끌이라고 했습니다. 이때 한줌의 흙이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한줌의 흙속에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습니다.
생기는 (날 생(生), 기운 기(氣)) “활발하고 생생한 기운, 만물의 발육 생장하게 하는 기운”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한줌의 흙 같은 보잘 것 없는 우리 인간 속에 영혼과 생기를 불어 넣으셨고 인간의 그 영혼 속에 성령님까지 보내주셨으니,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두고 보기에도 아까운 존재입니까? 그러므로 생각도 마음도 말도 행동도 하나님 보시기에 두고 보기에도 아까운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금 본문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상황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1. 인간은 그 속에 생기(生氣)가 들어와야 살 수 있습니다.
그 생기는 하나님이 공급하십니다. 내속에 생기를 하나님이 공급하심을 믿는 사람을 “신자”라고 합니다. 마6: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 하냐’ 마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눅12:20 ‘하나님이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사람의 육신의 고향은 흙이고, 영혼의 고향은 하늘나라입니다.
2. 생기가 있다면 사기(死氣, 죽는 기운)도 있습니다.
생기는 하나님께서 공급하지만 사기는 마귀가 주는 것입니다. 약4: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 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이것은 “하나님의 생기를 받아 들여라 그러나 마귀의 사기는 받아들이지 말라”는 뜻입니다. 창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이것은 생기의 말씀입니다. 창3:4-5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이것은 사기의 말입니다.
요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이것은 우리를 살리는 마음, 즉 생각(生覺)입니다. 요13: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이것은 우리를 죽이는 마음, 즉 사각(死覺)입니다. 하나님의 영과 악한 영이 교대로 역사하는 사울왕은 생기와 사기가 번갈아 나타납니다. 삼상16:14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한지라’ 저는 우리 교회 가운데, 우리 가정 가운데, 이 민족 가운데에 생기가 넘쳐 나기를 바랍니다.
3. 근본의 생기는 하나님께서 공급하지만 2차적 생기는 자연이 공급합니다.
사람은 숨을 쉴 때, 산소를 들이 마시고 이산화탄소를 내품습니다. 한편, 나무는 이산화탄소를 들이 마시고 산소를 내놓아 조화를 이룹니다. 그러므로 새와 물고기가 살수 없는 환경은 결국 사람도 살 수 없는 환경이 되고 맙니다.
4. 사람이 사람에게 생기를 공급합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남편이 아내에게 생기를 공급합니다. ‘당신을 믿어요, 당신은 잘 할 수 있어요’ 라고 말하면 생기가 공급되는 것입니다. 한편, 스승은 제자에게 생기를 공급합니다. 또한, 친구가 생기를 공급합니다. 목사님이 생기를 공급합니다. 설교는 “성도들에게 생기를 공급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에스겔 37:5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마른 뼈들에게 생기가 공급되니 군대가 됩니다. 생기는 생명의 자신감이요, 생명의 기운이요, 열정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공급받아야 할 생기의 가장 큰 원동력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중요한 원동력은 자연이고, 친구이고, 남편이고 아내입니다. 또한, 무엇보다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주의 종의 말씀, 설교”입니다.
저는 한국교회와 여러분의 삶속에 생기가 넘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한편, 인간관계는 생기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통해서 생기가 공급되기 때문입니다. 마16: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하나님은 사랑이시지만 그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아 구원받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지 않아 지옥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원리로, 목사님과의 관계가 좋아 은혜 받고 축복받는 사람도 많지만, 목사님과의 관계가 좋지 않아 시험 들고 잘 안되는 사람도 많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으로부터 자연으로부터 사람으로부터 생기만 팍팍 넘치게 받는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안식의 축복
창 2장 1~3절 / 하용조목사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과정을 창세기 1장을 통해 배웠습니다. 하나님은 6일동안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창조를 하신후에 언제나 ‘참 좋다’고 감탄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는 ‘정말 좋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1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어 이는 여섯째 날이더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창조물을 보시고 참으로 좋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는 말속에는 세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우주만물을 재창조하고 회복시키시는 안식의 원리
첫째, 하나님의 창조는 부족함이나 모자람이 없다는 것이며 두번째, 하나님의 창조는 미숙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처음에 완전하게 만들지 않았다가 진화시켜서 오늘의 인류를 만든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아담과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코끼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족함없이 완전하게 만드셨습니다.
세번째는 완전한 균형과 조화입니다. 창조물 상호간에 부조화가 없게 만드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입니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그것은 창조를 불완전하게 했기 때문이 아니라 죄로 말미암아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지구에 재앙이 있고 기후변화와 지진과 화산이 터지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부족함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죄 때문에 땅이 저주를 받았고 환경관리를 잘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완벽했습니다.
창조의 절정과 완성은 ‘안식’입니다. 6일동안의 창조를 마치신 후에 7일인 마지막날 가장 위대한 창조를 하셨습니다. 그것이 안식입니다.
하나님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지만 그것이 가장 위대한 창조였습니다. 하나님은 일과 휴식이라는 두개의 리듬을 가지고 계십니다. 창조와 안식이라고 하는 두 리듬을 통해서 우주를 운행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인간은 일도 열심히 해야 하지만 쉬어야 합니다. 땅도 쉬어야 하고 인간도 쉬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우주 만물을 안식의 원리를 통해서 재창조하시고 회복시키시고 운행하신다는 사실을 창세기 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2장 1절부터 2절을 보십시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이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때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 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6일 동안의 창조를 하신후에 일곱째날도 창조를 하셨는데 이것이 창조의 결론이며 완성입니다. 그것은 무엇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즐기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을 즐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실과 그 위대하신 능력을 감상하고 기뻐하고 즐기는 것이 바로 안식일이었습니다. 따라서 모든 창조에는 안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때 축복과 회복이 일어납니다.
일이라는 것은 끝이 있습니다. 끝이 있을 때 시작이 있습니다. 일을 쉬지 않고 하는 분들을 ‘일중독자’라고 말합니다. 끊임없이 쉬지 않고 일을 하면 몸도 땅도 고장이 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에는 쉼이 있습니다. 안식이 바로 이것입니다.
일만 계속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을 우리는 ‘노예’라고 부릅니다. 노예가 하는 일은 가치가 없습니다. 노예는 그저 일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끝없이 계속해서 일해야 합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애굽에서 끊임없이 아무런 목적도 없이 4백년동안 노예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창조의 절정인 안식 예배로 영적회복되어야
하나님은 노예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안식일을 지키는 백성으로 만들기 위하여 애굽에서 나오게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나온 것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안식을 위한 탈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도 이 안식의 축복이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다람쥐 체바퀴 돌 듯 매일 똑같은 생활을 하며 돈벌기 위해 사는 사람들, 쾌락을 위해 사는 사람들, 인생의 성공과 명예를 위해 사는 수 많은 사람들은 노예와 같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아무리 멋진 시민이고, 돈이 많고, 지위가 높다 하더라도 그 사람의 삶은 노예와 같은 삶입니다. 이 노예의 삶으로부터의 해방이 바로 안식의 삶입니다.
휴식없이 일만 하는 사람들은 마치 서커스단에서 음식을 위해 재주를 넘는 불쌍한 곰과 같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반복적인 삶을 의미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북한 주민들에게 ‘수령님과 당을 위하여’라는 말은 그들 인생의 전부입니다. 북한 뿐만 아니라 이땅에 많은 사람들이 모두 자기 쾌락을 위해서 인생과 시간을 낭비하며 명예와 성공을 위하여 살아가지만 죽음앞에 왔을 때는 절망하고 좌절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의 절정에 안식의 축복을 준 사실은 참으로 놀랍고 감동적인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사람입니다. 노예의 삶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은 자유인입니다. 일주일동안 세상에서 살다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교회에 왔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세상과의 관계를 잊고 교회에 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 영적으로 살아나고 회복되는 일입니다. 그리고 다시 세상에 나가서 승리하는 비결은 바로 주일날 교회에 와서 주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며 그 이름을 높여드릴 때 창조의 축복으로 다시 회복될 줄 믿습니다.
1절을 보면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졌다’고 말씀하고 있듯이 예수님도 십자가에 못박혀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창조가 완벽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도 완벽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완벽합니다. 그분에게는 부족함이 없고 미숙함이나 부조화가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삶에도 안식을 통하여 부족함이 없고 미흡함이 없고 균형있는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날에 안식하셨음이라
일곱번째 창조인 안식이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이 일곱째날을 축복하시고 거룩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일곱째 날을 복 주시며 '거룩하게 안식일 지킬것' 명령
첫째날부터 여섯째날까지 창조하신후 ‘참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이날을 복을 주었다는 말은 없습니다. 일곱째날만 복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이 복받는 비결은 하나님이 복내려준 날을 열심히 지키면 됩다. 주일날 엉뚱한 곳에 가지 마십시오. 복받은 날에 헌신하시면 복받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복받기 원하면서도 주일은 무시합니다.
지위가 높아지고 돈이 많아지면, 혹은국회의원이 되고 장관이 되면 바쁘다는 핑계로 교회에 오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리 돈이 많아지고 지위가 높아지더라도 주일을 기억하십시오. 이것이 복받는 비결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일곱번째 날에 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민족과 백성은 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교회에 나오는 일은 단순한 사건이 아닙니다. 장사하기 위해 교회에 오는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하기위해 오는 것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만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제 칠일에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안식일을 사랑하시고 정성을 들이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가족과 건강과 삶의 모든 것에 부어 주시는 복이 있을 줄 믿습니다.
일곱째날에 복을 주시면서 특별명령을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십계명입니다. 십계명은 꼭 지켜야 합니다. 이것은 구약의 계명이 아니고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이 지켜야 할 원칙입니다. 그 십계명중에서도 하나님은 네번째 명령을 지키시길 원하십니다.
출애굽기 20장 8절을 보면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제 칠일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동안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라고 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쉬셨기 때문에 우리도 쉬고, 하나님이 일하시니 우리도 일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창세기에서와 같이 출애굽기에서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을 복을 줄 것이고 안식일을 기억하는 사람, 안식일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 복을 줄 것이며 그날을 하나님이 특별히 거룩하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환난이 오나 고난이 오나 역경이 오나 하나님을 기쁘게 하십시오. 안식일의 복을 놓치지 않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주일은 하나님경외하고 약한자 돕는 아름다운 날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한 사람만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이 아니라 가족도 지키게 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만 예수믿으면 되는 줄 압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가족 전체가 예수믿고 복받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족이나 가축까지 복을 받아야 합니다. 동물까지도 복받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집에서 기숙하는 손님까지도 여러분때문에 복받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과 가족과 가축까지 복받기를 축원합니다. 그 비밀이 안식에 있습니다.
현대의 모든 사상은 안식을 지킬수 없게 합니다. 모든 관공소의 시험이나 학교의 시험까지 주일날에 치뤄집니다. 재미있는 오락도 모두 주일날 행해집니다. 주일날은 모두 하나님을 경외하고 가난한 자를 돕고 병든자를 돕는 복되고 아름다운 날이 되어야 합니다. 쾌락을 누리는 날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주일날에 사람들은 모두 쉬어야 합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는 사람은 평안이 없습니다. 쾌락을 즐긴 사람의 마음은 가볍지 않습니다. 좋지 않고 오히려 더 힘이 듭니다. 우리가 탈진하고 피곤한 이유는 우리의 육체를 위해 살기 때문입니다. 영혼을 위해, 남을 위해 도와주고 사는 사람은 몸은 조금 피곤할 지라도 항상 마음이 천국같습니다. 그러나 육체의 유익을 위해 사는 사람은 계속해서 갈등만 증폭합니다.
일주일에 하루를 하나님을 기억하는 특별한 날로 만들라는 것은 놀라운 축복의 말씀입니다. 안식일은 ‘거룩하게 하겠다’는 말은 구별하겠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월요일부터 토요일과는 다른 날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일날만 주일입니까? 월요일이나 화요일도 항상 주일입니다.’라고 믿음이 아주 좋은 것 같이 말합니다. 모든 날이 중요하다는 말은 반대로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말과 같습니다.
주일을 확실이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월요일도 확실히 지키지 못합니다. 주일을 잘 지키면 일주일이 복을 받습니다. 주일을 엉망으로 보낸 사람은 일주일이 엉망인 것입니다. 주일은 우리의 날이 아니라 하나님의 날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 주일은 공휴일입니다. 자기의 날이고 쉬는 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십일조가 경제의 축복에 비밀이듯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세상의 생활과 육체의 생활의 축복의 비밀입니다. 안식일을 경홀히 여기지 마십시오. 안식일의 위기는 안식일을 24시간으로 여기지 않고 2시간으로 여기는데 있습니다. 예배드리는 이 시간만 안식일이고 예배가 마치면 ‘이날은 내 날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안식일은 하루종일 주님의 날입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날입니다.
안식일은 가족끼리 모여서 가족을 섬기는 날입니다. 주일날 원근각처에 있던 가족들이 모여 점심도 먹고 축복하는 날로 삼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안식일은 하나님께 경배하고 찬양하는 날입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전히 주님의 집에서 예배하고 찬양하고 섬기는 축복이 여러분에게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안식일을 잘 지키는 비결은 예수님을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날 병을 고치셨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주일날 심방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병든자를 심방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이 병을 고쳐주신 것과 같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병고친 예수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밀밭사이를 걸어가게 되었는데 배고픈 제자들이 밀을 따먹었습니다. 그것을 본 바리새인들은 ‘당신의 제자들은 엉터리다. 안식일을 범했다’고 공격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구약의 다윗을 예를 들어 ‘배고픈 다윗이 제사장만 먹는 성전의 떡을 먹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안식일에 배고픈 사람은 밥을 먹어야 합니다. 가난한 자에게 먹을 것을 주어야 하고 병든자를 고쳐주어야 합니다.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진정한 안식입니다. 자신의 쾌락과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고 내가 안식일의 주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18년동안 귀신들린 딸의 귀신을 쫓아주기를 원했을 때 안식일날 고쳐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많은 사람들이 하는 말이 안식일날 고치지 말고 월요일날 고치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18년동안 귀신들려 고생했던 이 딸도 아브라함의 딸이거늘 너희가 너희집에 나귀도 물을 먹이는데 이 딸을 왜 그렇게 못살게 구느냐’라며 고쳐주셨습니다.
손마른자를 고쳐주시고 귀신들린자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인자는 안식일에 주인이라고 말했습니다. 안식일을 어떻게 지켜야 할지 잘 생각해 보십시오.
안식일을 지키는 자는 복을 받을 것입니다. 그날을 귀히 여기는 자는 하나님이 그도 귀히 여길 것입니다. 안식일날 배고픈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병든자를 고쳐주고, 실망한 자를 도와주고, 하나님을 섬기고 찬양하고 경배하면 그 영혼이 축복받을 뿐 만아니라 그의 가정도 그의 삶도 하나님께서 기름부어 주실줄 믿습니다.
안식일에는 영원한 안식이 있습니다. 우리의 성전은 완전한 성전이 아닙니다. 하늘나라에 새하늘과 새 땅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곳에 가게 될 것입니다. 온누리교회라는 장소에 와서 안식을 지키고 예배를 드리지만 진짜 영원한 안식이 있습니다. 그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온전한 예배를 드릴 날이 올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죽음과 절망이 있고 죄가 있는 온갖 잡다한 것이 많은 세상에서 여러분이 신앙이 자라는 비결은 오늘의 말씀대로 ‘내가 이날에 복을 주었고 거룩하게 했다’는 안식을 잘 지킬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능력을 회복시켜 주시고 창조의 축복을 회복시켜 주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삶을 살수 있도록 역사해 주실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에게 안식일의 축복과 거룩함이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복 받는 날
창 2장 1~3절 / 정필도목사
구약 창세기에 보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어마어마한 우주와 만물을 엿새 동안 창조하셨는데 날마다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씀입니다. 마지막 날에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하나님께서 너무너무 흡족하게 생각하시는, 만족하게 생각하시는 의미가 있고, 또 하나님께서 너무 기뻐하시는 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이 보실 때에 너무 아름다웠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장차 가서 살 천국과는 비교가 안 될 것입니다. 세상에서 금값이 굉장하지만, 천국에 가면 바닥이 전부 금이라 금을 밟고 살 것입니다. 천국에 가면 얼마나 좋을까요. 천국과는 비교가 되 지 않지만 창조하신 이 세상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엔 참 아름다웠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엿새 동안 천지와 만물을 다 창조하신 후 일곱째 날에는 안식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본문 3절에 보니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거룩하게 하셨다.’에서 ‘거룩’이라는 말의 뜻은 ‘구별하셨다.’라는 것인데 바로 ‘하나님께서 구별하셨다.’라는 말입니다. 무엇이든지 하나님을 위해서 구별된 것은 거룩하다는 뜻의 거룩할 ‘성(聖)’자를 붙입니다. 이 건물은 사람이 지었지만, 이 건물은 하나님께 예배하고, 섬기고, 하나님을 위해서 구별한 집이기에 성전(聖傳)이라고 합니다. 날도 다 똑같은 날이지만 하나님을 위해서 구별한 날을 성일(聖日), 거룩한 날이라고 합니다. 직분도 있지만 집사, 장로, 권사, 목사, 전도사와 같은 직분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의 직분이기에 성직(聖職)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앉은 의자도 사람이 만든 평범한 의자이지만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기 위해 지어진 것이기에 성구라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을 위해 구별된 것입니다. 그러니 일곱째 날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하나님의 날로 구별하신 것입니다.
출애굽기 20장 8절에서 11절의 말씀을 보면 「8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9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0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11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엿새 동안은 우리를 위해서 일하는 우리의 날이지만 일곱째 날은 하나님을 위해서 구별된 하나님의 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엿새 동안은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다 할 수 있습니다. 놀러다니거나 돈을 벌거나 공부를 하는 등 우리를 위해 엿새 동안은 마음껏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7일에는 그렇게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일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에게 안식일을 주시고 거룩하게 구별하라고 하신 데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 목적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귀찮게 하거나 괴롭히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목적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 안식일을 정하시고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신 것입니다.
안식일은 첫째로 우리의 육신이 복을 받는 날입니다. 하나님과 피조물 된 우리 인간은 큰 차이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기에 피곤한 것도 없으십니다. 그러나 피조물 된 우리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조금만 힘들게 일하면 땀이 뻘뻘 흐르고, 힘들면 좀 쉬어줘야지 그렇지 않으면 뻗어 버립니다. 그래서 피조물인 우리 인간은 회복이 필요한 것입니다. 아무리 일이 많고 아무리 급하다고 할지라도 일주일에 하루는 꼭 쉬도록 하나님께서 정하시고, 그날을 안식일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우리가 쉬어야 우리의 몸이 건강하게 유지되고, 장수하여 모든 일을 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시고 복주시기 위해! 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입니다. 출애굽기 20장 10절에 보면 우리의 개인만 그렇게 안식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아들과 딸, 남종도, 여종도, 심지어는 가축까지, 잠시 들러 와있는 손님까지라도 안식일에는 절대로 일하지 말고 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시지만, 이 말씀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제멋대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대로 살지 않고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할 것 다하고 사는 사람이 있는데 미안하지만 이분들은 손해를 많이 보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서부에 금광이 나왔다는 소문이 났을 때 미국의 동부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마차를 타고 전속력으로 서부로 달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주인이 없는 땅이라 먼저 가는 사람이 울타리만 치면 자기의 땅이 되니까 금광을 차지하여 자기 땅이 되게 하려고 정신없이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들은 주일이 되면 아무리 금이 좋고 땅이 좋아도 절대로 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지키라고 한 이 거룩한 날을 무시할 수가 없어 말도 쉬고, 사람도 쉬고, 성경도 읽고, 예배드리고, 찬양도 드리며 한 주간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남은 일정도 하나님께서 함께해 주시길 기도하며, 온종일 온 가족이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푹 쉬고 그 다음 날 달려갔습니다. 생각해보면 하루도 쉬지 않고 달려간 팀과 하루를 쉬고 달려간 팀은 게임도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막상 서부에 가보니 아무도 온 사람이 없었습니다. 쉬지 않고 달려간 사람들은 중간에 마차도 부서지고, 말도 지쳐서 뻗고, 사람도 병들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대로 하루를 쉬면서 하나님께 예배와 찬양하며 회복했던 팀들은 제일 먼저 도착하! 여 땅과 금광을 차지하며 하나님께 축복을 받았습니다.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께서 복 주시기 위해서 정하신 날인데 그 말씀대로 살면 복을 받는 것입니다. 제가 안식년 1년 동안 미국에 있을 때 보니까 한국 사람들이 커다란 마켓을 가지고 있는데 돈 버느라고 얼마나 열심인지 모릅니다. 새벽같이 일찍 일어나 좋은 물건을 가져다가 장사하고, 밤 12시가 되면 마켓의 문을 닫고, 그 후엔 그날 번 돈을 다 센 후 목욕하고 잠자리에 들면 고작 2~3시간 정도만 잘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새벽에 일어나 장사를 하는 것입니다. 주일도 없습니다. 심지어는 아이들까지 학교를 보내지 않고 가게에서 일하게 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돈 버는 것에 열심을 냈는데 결국엔 암에 걸려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켓의 주인이 바뀝니다. 제일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돈, 돈, 돈’하면서 하나님 말씀을 저버리고 복 받을 그날을 저버리고 살다가 결국엔 건강 잃어버리고,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는 사람들을 볼 때 얼마나 불쌍한지 모릅니다. 프랑스 무신론자들이 혁명을 일으켰을 당시 예수쟁이들이 주일 지키는 것을 막기 위해 일주일을 10일로 바꾼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모든 산업의 생산량이 40%나 감소해버렸습니다. 러시아에 공산 혁명이 일어났을 때 레닌이 일주일을 8일로 늘려 어떻게 해서든 예수 믿는 사람들이 주일을 지키지 못하게 하려고 했더니 생산량의 30%가 감소하여 버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주일을 다시 6일로 만들었더니 생산량이 30%가 감소하였다고 합니다. 아무리 독재자 스탈린 같은 사람이라도 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은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바꾸니 오히려 손해니 지금까지도 공산주의자나 독재자들도 우리와 똑같이 7일을 한 주간으로 해서 하루씩 쉬는 것으로 지키 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복을 받습니다.
둘째, 안식일은 영적으로 복 받는 날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기 위해 구별하신 날입니다. 저와 여러분과의 시간을 갖기 위해 하나님께서 특별히 이날을 구별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우리와의 만남을 원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와의 만남을 갖기 위해서 이 하루를 구별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날은 온 가족이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드리고, 하나님 말씀 듣고,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믿음이 아주 윤택해지고, 하나님과 우리와 좋은 관계가 이루어지며 그런 가운데 한 주간을 살면 축복을 받는 삶을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지 않고 세상일에만 몰두하다 자연히 하나님과 멀어지기 시작하고,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되고, 믿음도 다 잃어버리게 되고, 그러다 보면 사신우상을 섬기게 되고 죄 가운데 살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 결국에는 멸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출애굽기 31장 12절 이하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을 더럽히지 말고, 안식일에 일하는 사람, 안식일은 더럽히는 사람은 다 죽여 버리라고 아주 무섭게 말씀하십니다.(출 31:12~17) 그 이유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세상일만 하다 보면 결국에는 망하고, 결국에는 하나님을 떠나게 되고, 멸망하게 되니까 이렇게 엄하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와의 만남을 원하시고 우리에게 복 주시기를 기뻐하시! 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이 안식일을 만들어 주신 것은 우리에게 복 주시고, 우리의 행복을 위해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안식일을 아예 하나님의 날로 구별하여 거룩하게 살아야 되겠습니다. 온종일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하고, 하나님 말씀 묵상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적으로 회복하는 시간을 가지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찾아서 해 드림으로 온종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면서 사는 하나님의 날로 구별해야 되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나아와 예배하고 나서 하루 종일 잠만 자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교회에 오는데 30분, 집으로 돌아가는데 30분, 예배시간 1시간 포함해서 2시간만 안식일로 보내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24시간이지 2시간이 아닙니다. 예배 한 번 드리고 가면 다 되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날은 하나님의 날, 하나님을 위해서 구별된 날이니 온종일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될 줄 믿습니다.
이사야 58장 13~14절을 보면 「13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14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이 되면 너무나 기쁘고 즐겁고, 안식일을 존귀한 날이라 생각하고 이날을 하나님 앞에서 보내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좋아하시겠습니까? 그런 사람에게는 그 마음에 즐거움을 주시고 아주 높이 세워주시며, 약속한 모든 축복, 기업을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요일은 공휴일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을 위해 공휴일을 보내지만, 예수 믿는 사람에겐 일요일이 주의 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락을 행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위해서 이날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니까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는 무조건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이라고 해서 가만히 계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회당에 가서 성전에 들어가 말씀도 전하셨지만, 병자들이 있으면 병도 고쳐주셨습니다. 누가복음 13장 14절에 보면 18년 동안 귀신들려 고생하던 여자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러자 회당장이 분을 내며 “안식일에 왜 병을 고치느냐? 엿새 동안에 하지 왜 안식일에 병을 고쳤냐”라고 야단을 쳤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15절에서 「…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16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마가복음 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을 때 손마른 사람을 보고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4절 이하에서 보면 「4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5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안식일에 잠이나 자고 쉬기나 하는 날이 아닙니다. 나 자신을 위한 일은 쉬고, 하지 않지만, 하나님을 위한 일은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 악을 행하는 것 어떤 것이 옳으냐? 생명을 구원하는 것, 죽이는 것 어떤 것이 더 옳으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중요한 말씀인지 모릅니다. 우리 교회에 많은 의사들이 있는데 주일마다 예배 드리고 피곤하시겠지만 쉬지 않고 의료봉사하시는 것, 예수님처럼 하시는 것입니다. 주의 날에 주님 기뻐하시는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2장 23절에 보면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밀밭 사이를 가실 때 뒤따라오던 제자들이 너무 배가 고파 밀 이삭을 따서 비벼서 먹는 것을 바리새인들이 보고 “왜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냐?”라며 비난했습니다! . 그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책망하거나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26…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27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28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만드신 이유는 우리에게 복 주시기 위해서, 사람을 위해서 만드신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 안식일의 규례_! 제정하신 것입니다. 안식일의 제도를 정하신 우리 예수님이 하신 말씀대로 하는 것이 가장 옳은 줄 믿습니다. 바리새인의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안식일을 어떻게 지키면 좋으냐 하면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을 잘 성수하려고 하면 우선 교회에 나와야 합니다. 그래서 예배를 잘 드려야 합니다. 예배드릴 때에는 사람 의식하지 말고 말씀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어떤 교훈을 주시는지,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말씀을 듣는 가운데 그것을 깨달을 수 있도록 말씀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에는 내 사정만 다 아뢰지 말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찬양은 사람을 즐겁게 하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찬양은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많은 사람이 예배드리려면 봉사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안내위원, 수금위원, 계수위원, 차량안내, 찬양대원, 주일학교 교사들, 성전 청소하는 사람들, 식당봉사, 의료봉사, 심방위원, 새가족 접대하는 일, 주일에 찾아온 손님을 대접하는 일 등의 봉사도 필요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안식일이 아닙니다. 자기를 위해서 자기 돈벌이를 위해서는 하지 않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얼마든지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일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은혜 충만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은혜 충만한 예배를 드리면 그 사람은 성공한 것입니다. 받은 은혜로 일주일 동안 믿음으로 살며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지만 주일 예배시간에 졸거나 딴생각 하고 앉아있거나, 예배를 형식적으로 드리는 사람은 일주일 동안 제대로 바르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주일에 꼭 은혜 받고, 은혜 충만한 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렇게 주일을 잘 지키면 개인이 복을 받고, 가정이 복을 받고, 교회가 잘되고, 나라가 잘될 것입니다.
안식의 축제
창 2장 1~3절 / 김영수목사(늘찬양교회)
지난 시간에 광고한대로 오늘은 창조의 기적 두 번째로 안식의 축제에 대하여 말씀을 증거 하고자 합니다.
제가 150여편 이상의 신구약 기적 강해를 설교해오면서 이번처럼 무릎을 치면서 까지 기쁜 마음으로 설교를 준비한 적은 그리 많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많은 흥분과 기대감속에서 말씀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안식일에 담긴 뜻이 너무도 크고 놀라웁기 때문입니다.
Ⅰ. 안식의 의미
창세기 2장1-3절 본문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창조주 하나님께서 창조를 다 마치시고 일곱째 되는 날 안식(安息)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안식은 하나님께서 피곤하시므로 혼자 그냥 쉬신 날이 아니시고 사람을 위시하여 모든 피조물들을 한 자리에 초청하여 "안식의 기쁨을 누리자, 축제를 즐기자, 평화를 즐기자" 그리고 평화를 누리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천지창조를 함께 찬양하자며 안식의 축제를 벌린 날입니다.
이 안식의 축제날을 위해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만드셨습니다. 춤추는 별들도 창조했습니다. 풍랑 이는 바다와 파도도 만드셨습니다. 아름다운 숲과 꽃 그리고 씨 맺는 나무들 그리고 각종 나는 새들과 동물들을 만드셨습니다. 음식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래 놓고서 모든 피조물들을 이레 째 되는 안식 축제에 초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제 칠일을 하나님과 함께 찬양하며 기뻐하며 평화를 누리는 안식의 날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마치 대학축제 마지막 날 피날레를 장식하기 위하여 가장 큰 행사를 기획하듯 하나님께서 제 칠일을 창조의 축제의 날로 만드사 모든 피조물과 함께 안식의 축제 행사를 거창하게 벌인 최고의 기쁜 날이자 복된 날이며 거룩한 날인 것입니다.
더욱이 이 귀한 안식의 축제에 하나님은 창조주와 피조물을 똑같이 취급하셔서 축제의 장에 함께 동참하여 기쁨을 함께 나누고 계신 것입니다. "보아라 내가 창조한 모든 것이 너무나도 좋고 아름답도다. 내 맘이 기쁘다. 내가 창조한 피조물과 함께 있으니 이 기쁨을 무엇으로 표현하리요!......"하면서 기뻐하신 던 날이 바로 안식의 축제일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의 축제에 하나님이 빠지면 진정한 안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안식의 주인공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기쁨을 나누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떠나서 내 마음대로 세상과 연락하여 즐거움을 나누고 행복을 나누며 쉰다는 것은 참 쉼과 참 평강을 얻지 못 할 뿐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섭리와 축복을 배반하는 교만한 행동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쉼은 진정한 안식이 될 수가 없습니다. 진정한 쉼과 기쁨과 평안은 주님이 함께 하실 때에 누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은 이날을 하나님을 배제한 자기들만의 율법적인 날로 지키면서 안식일의 본질을 훼손시켰습니다. 안식일에 담긴 하나님의 본 뜻을 떠나 딱딱하고 무의미하며 생명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날로 만들었습니다. 그저 회당에 모여 예배하는 날로 아무것도 안하며 쉬는 날로만 삼았습니다.
그러나 안식은 쉬는 날이 아닙니다. 만일 안식일이 쉬는 날이었으면 성경이 창세기 2장 3절로 끝나야 합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도 수많은 말씀들이 주어졌고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되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은 그저 주일날 교회에 모여 하루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로 지켜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일주일의 모두가 다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며 예배하는 날이며 특별히 주일날은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들을 초청하여 함께 잔치의 축제를 벌린 것처럼 하나님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며 그 은혜와 감격과 기쁨을 나누는 거룩한 날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안식일이 쉬는 날로만 인식되어서는 안 됩니다. 미래를 준비하며 함께 은혜를 나누는 복되고 거룩한 날이 되어야 합니다. 주안에서 안식을 통하여 미래를 계획하는 영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안식의 또 하나의 의미요 축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같은 일을 목회자는 잘 해야 합니다. 예배에서 영광의 축제 안식의 축제 거룩함의 축제 미래에 대한 기대감과 행복감이 성도들 안에서 일어날 수 있도록 예배를 잘 계획하고 준비하여야 합니다. 이미 우리나라에서도 주5일제 근무가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안식을 쉼으로 잘못 아는 사람들은 자기 편리를 좇아 예배를 드리고 산으로 들로 나갈 것입니다. 더 심한 경우는 금요일 밤부터 시작하여 주일 밤까지 여행으로 온 시간들을 다 소비할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지면 한국도 미국이나 유럽처럼 교회가 텅텅 비고 말 것입니다. 이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주일날을 안식일이나 쉼의 의미로 잘못 착각하여 주일날 가계 문을 닫고 쉬는 정도로만 교육시켜서는 안되고 주님과 함께 동거하며 함께 은혜와 기쁨을 나누는 날임을 실감하도록 예배를 개혁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배하는 날이 천국에서 하나님의 천국잔치에 초청되어 아버지의 우편에서 영광과 기쁨을 나누는 행복감을 맛보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아울러 한 주간 동안 삶을 사는 동안 그릇을 닦고 청소를 하고 직장에서 일하는 속에서도 하나님과 예배하는 기쁨의 삶을 살도록 마음훈련, 영성훈련, 찬양훈련, 공감훈련을 해야합니다. 하나님은 세상 어느 곳이나 계십니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영원까지, 삶의 순간 순간마다. 평상시에도 존재하십니다. 이렇듯 안식일은 평일이 지향해야 할 목표이자 모델입니다. 결국 기독교 신앙은 세상의 모든 장소를 성전으로 만들고 세상의 모든 날들을 거룩한 날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날을 평일과 똑같이 여겨서는 안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장소 적으로는 성전을 통해서, 시간적으로는 안식일을 통해서 하늘의 은총과 축복을 내려 주시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Ⅱ.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
1) 유대교에서 안식일은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저녁까지입니다. 기독교는 일요일을 거룩한 날로 지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서입니다. 본래 안식일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피조물과 함께 안식하신 것이라면, 주일은 죄와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성도들과 함께 부활의 주로 참여하셔서 우리에게 새 생명의 기쁨을 나누며 함께 하신 두 번째 창조의 날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을 지키셨습니다. 초대 교회 교인들도 모두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그들은 토요일 오후부터 예배를 드리고 저녁에는 함께 식사하고, 그 다음 주일 날에는 침(세)례를 베푸는 식으로 해서 사실은 안식일과 주일을 함께 지켰습니다. 오늘 우리도 토요일 오후부터는 주일을 지키는 마음으로 편히 쉬면서, 또는 교회 일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면서 부픈 가슴으로 주일을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2) 이사야 선지자는 이 날은 즐겁고 존귀한 날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욕심과 쾌락을 위해 주의 날을 팔지 말고, 기쁨으로 참여한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야곱처럼 먹여 살리신다고 합니다. 이것을 믿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태초에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위대한 잔치를 베푸시고 땅위의 짐승들과 하늘의 새와 동물과 식물, 그리고 인간까지 성대한 잔치에 초대하신 것이 안식일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이날에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먼저 안식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과 축복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문제가 형통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로 이스라엘 백성을 먹이신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책임지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책임진다는데 도대체 왜 믿지 못하는 것입니까?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고 하셨습니다. 이 자유와 해방의 은총이 안식일의 잔치 즉, 주일이라는 시간과 예배라는 형식을 매개로 해서 인간에게 전달된다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은총이 없어도 내가 열심히 성실하게 일하고 살면 행복하고 풍요롭고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렇게 사십시오. 그러나, 인생의 철이 들어, 내 인생을 내가 계획하고 만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느끼는 사람은 주님의 날을 통해 주시는 하늘의 은총과 축복을 믿고 기대하십시오. 그것이 삶의 지혜입니다. 영원과 구원에 이르는 지혜입니다.
4). 주일을 주님의 날로 맞이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피조물들에게 창조의 영과 생기를 일정하게 불어넣어 주시는 잔치 날 - 날마다 우리의 생명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날 - 은혜와 축복이 하나님의 시간을 타고 우리에게 전달되는 날. 이 거룩하고 존귀한 날을 즐겁고 감사한 마음으로 맞이하고 고대하는 신앙인 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Ⅲ. 안식의 축복
본문 3절에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 말은 안식을 누리면 복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일까요?
첫째: 건강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인간의 쉼을 위해 먼저 쉬고 일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아셔야 합니다. 잘 못 쉬면 반드시 고장이 납니다. 병원 가보신 분들은 아마도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쉬세요. 쉬셔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병원에 갔더니 쉬라고 하더랍니다. 그러면서 "쉬는 것도 목회입니다. 일하는 것이 능력이 아닙니다. 일은 누구든지 합니다. 그러나 쉼을 갖기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쉼의 능력을 가져야 합니다."라고 하더랍니다. 그 말에 목사님은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쉼을 갖는 것이 건강 회복의 비결이자 하나님의 손길과 능력을 맛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우리는 한 주간에 적어도 하루는 주안에서 푹 쉬면서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맛보는 귀한 영적 재 충만의 삶을 살 때 반드시 축복된 삶 승리하는 삶을 살게될 것입니다.
미국 서부개척 시대에, 많은 사람이 금을 캐기 위하여 캘리포니아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들은 더 많은 금을 빨리 캐기 위해서 휴식도 없이 서부로 달렸습니다. 하루도 쉬지 않고 달렸기 때문에 말들이 지쳐 쓰러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도 점차 병이 들어 전진속도가 줄어들면서 결국은 목적지에 이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후 청교도들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들의 뒤를 따라가는데 주일이 되면 푹 쉬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쉬면서 나아갔기에 끝내 개척자로서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주일도 없이 일만 하면 되는 줄로 알지만 그렇게 하면 결국은 쓰러지고 맙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와 거룩한 聖日을 지킬 줄 알아야 하며, 진리에 순종할 때 우리는 참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학자는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제도 중 가장 완벽한 것은 안식일 제도이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둘째: 주님을 닮아 가는 복을 누립니다.
주일을 잘 쉬면 주님을 닮아 가는 복을 누립니다. 안식을 통해 우리를 예배를 드립니다. 그 예배를 통해 주님을 만나고 말씀을 통해 만나므로 영적 교제를 나누게 됩니다. 결국은 자연스레 주님을 닮게 되는 것입니다.
부부가 닮는다는 소리를 합니다. 매일 같이 생각하고 매일 같이 바라보며 대화하면 자연스레 닮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듯이 주님을 만나면 만날수록 우리는 주님을 닮게 되어 결국 신령한 은혜 속에서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가정이 건강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선물이 가정과 교회입니다. 가정과 교회는 우리가 안식 할 수 있는 최상의 처소입니다. 그런데 그 가정이 안식이 없는 가정이라면 건강치 못한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안식을 통해 사랑을 나누고 안식을 통해 대화를 나누면서 가정은 행복의 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을 보세요. 이 중요한 안식을 잃어버렸습니다. 결국 가정도 점차 파괴되어 가고있고 행복이 파괴되어 가는 것입니다.
가정을 그저 잠자는 곳으로만 생각지 마시기 바랍니다. 안식은 여러분의 가정을 새롭게 만들고 새 힘을 얻게 하는 활력소요 쉼의 터전입니다.
독일 사람들은 저녁 7시가 지나면 길거리에서 사람을 만나기가 어렵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가계가 저녁 7시가 넘으면 다 문을 닫습니다. 왜냐하면 가정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함께 쉬는 것을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중요한 안식을 왜 누리지 못하고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번뇌와 분주함 속에 고통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
이유는 3가지입니다.
첫째는 영적 무지 때문입니다. 안식의 의미를 단순한 쉼으로만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쉰다고 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기쁨과 평안 화목을 얻는 것이 참된 행복이요 안식이라는 것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됩니다.
둘째는, 우리 속에 가득한 탐심이 우리를 쉬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더 많이 소유하려는 욕심, 탐심이 우리를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탐심을 물리쳐야 합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했습니다. 물질욕, 명예욕, 권력욕 등이 우리를 죽음의 그늘 아래로 몰아가고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셋째는, 교만입니다. 나는 쉬지 않고도 얼마든지 일할 수 있다는 교만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그 교만이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하게 만들고 결국 우리는 안식의 복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인 안식의 중요성을 모르면 우리 인간은 불행해 집니다. 각종 병이 생깁니다. 심령의 평안을 얻을 수 없습니다. 가족관계가 파괴됩니다. 삶의 여유가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의욕이 없어져 죽고 싶어집니다. 죽으면 안식이라는 생각이 자신도 모르게 우리 심령 속에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의 안식이 참 안식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옥에서는 절대로 안식을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마지막 날 하나님 우편 보좌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며 영광의 잔치자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주님과 함께 왕노릇 할 그 날을 바라보며 날마다 주님과 동행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다 이루었다
창 2:1, 요 19:30 / 조용기목사
<서론>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다 이루었다” 이 말씀으로 오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절대주권자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지으실 때나 인류 구원의 제물이 되실 때도 사람보고 도와달란 말 안했었습니다. 일은 하나님이 주인이시고 하나님이 하시지 인간과 일을 나누지 아니하신 것입니다.
<본론>
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우리가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었다 하는 과정을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지으실 때 엿새 동안 지으셨습니다. 첫째 날에 빛을 지으시고 둘째 날에 궁창을 셋째 날에 바다, 땅, 식물 넷째 날에 해, 달, 별 다섯째 날에 새와 물고기 여섯째 날에 동물과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창세기 1장 31절에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저는 이 성경을 좋아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나쁜 하나님이 좋은 것을 만들 수가 없습니다. 좋은 하나님이 나쁜 것을 만들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하나님이 보시니 심히 좋았더라. 그러므로 우리 생애 속에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을 섬기면 좋은 일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좋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어떻게 좋은 일이 안 일어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항상 우리는 마음속에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을 기대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마음속에 바라보고 기대하고 꿈꾸는 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바로보고 꿈꾸고 기대해야 되는데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면 안돼요.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을 마음속에 늘 기대하고 있으면 성령께서 그 능력대로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은 보기에 아름답고 좋았다고 말했습니다.
런던대학의 우주 물리학자인 보이드 박사는 우리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별의 수가 약 10만개 이며 최신 전자 망원경을 가지고 한 은하 안에서 볼 수 있는 별의 수는 2000억 개가 된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 굉장히 자세하시지 않습니까? 전자 망원경으로 보면 2000억 개인데 최신 망원경으로 볼 수 있는 전체 우주속의 별들은 2000억개 곱하기 1000억개라는 천문학적인 숫자인 것입니다. 헤아릴 수도 없어요. 저는 저의 수학적 머리로써는 숫자가 뭐라고 하는지 생각도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지 못한 별의 수는 얼마나 더 많겠습니까? 또한 지금 반짝거리는 별빛은 10만 광년 전에 반짝였던 빛이 오늘 밤 우리 눈에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빛이 1년 동안 달려간 것을 1광년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밖에 나가서 반짝반짝 작은 별 참 좋구나. 그럴 때 그 별이 자기 모체에서 출발한 시간이 10만년 전에 출발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지금 보는 별빛은 지금 비치는 빛이 아닙니다. 10만년 전에 출발한 별이 지금 우리 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오늘 저녁 별빛이 유난히 반짝이지?”하는 말은 엄청나게 오래 전 빛나던 별빛을 바라 본 결과인 것입니다. 이런 것을 공부하는 우주 물리학자인 보이드 박사는 전공을 통하여 하나님을 더 깊이 깨닫고 찬송가 79장을 자기 신앙의 간증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한번 불러 보십시다. 찬송가 79장.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 속에 그리어 볼 때 / 하늘의 별 울려 퍼지는 뇌성 주님의 권능 우주에 찼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하나님께서는 이미 오늘날 살고 있는 우리를 위해서 만세 전에 이 우주와 만물을 다 지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지금 갑자기 급하기 일을 하신 것이 아니라 벌써 만세전에 우리가 필요한 것을 다 준비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을 보면 마지막 날 마지막에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일을 쉬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도와줄 기회가 없었어요. 마지막 날에 최후 마지막에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어놓고 난 다음 끝 하고 상점 문 닫아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일하는 것을 못 보았습니다.
창세기 2장 1절로 3절에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여섯째 날에 일을 다 마치시고 이레째 날은 하나님의 안식일, 하나님이 쉬는 날인데 그 날이 아담이 세상에서 처음 누리는 날입니다. 아담은 태어날 때부터 일은 못 보았어요. 일은 하나님이 다 해놓으신 것이고 태어난 첫날에 하나님 아버지께 나오니까 하나님이 할 일 다 했다. 그럼 난 뭐할까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고 순종하고 즐겨라. 근본적으로 사람을 하나님이 지으실 때 사람은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고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서 살도록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2. 아담의 반역과 형벌, 또 다른 일
피땀을 흘리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아담이 이 좋은 세상, 하나님이 만드신 아름다운 세상에 쓸데없는 일을 저질러 놓았습니다. 또 일을 저질러 놓았어요. 그 일이 뭐냐면 하나님이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따먹고 마귀하고 손을 잡고 하나님처럼 되려고 오만을 부렸습니다. 아담이 저지른 반역의 일이지만 일은 일이고 우주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일을 하나님 아버지가 책임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장가가고 시집가지 않은 아들, 딸들이 집에 있을 때 그들이 잘못 저지른 일이 있으면 부모가 능력이 있으면 그것을 대신 갚아주는 것입니다. 부모가 능력이 없으면 할 수 없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능력이 계시고 일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담이 저지른 잘못된 일들을 다 맡아서 또 청산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주의 주인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3장 16절로 21절에 보면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그들이 죄를 짓고 난 다음 그 대가가 이렇게 무섭습니다. 하와는 잉태하는 수고를 크게 더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정의 남편을 순종하고 남편을 받들라고 남편은 아내를 다스리라고 남편은 집안의 식생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머리에 땀을 흘리고 일을 해야 되고 결국 둘이 다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내게 와서 성경 말씀하고는 틀리는데요. 무슨 어떤 것이 틀리느냐. 아니 여기에 보면 남편은 아내의 모든 일을 다스리라고 했는데 나는 우리 집에 우리 마누라가 나를 다스리지 내가 아내를 못 다스립니다. 성경말씀대로 다스려보라고... 너무 강해서 다스릴 수가 없어요. 강한 이유가 있다. 뭡니까? 남자는 하나님이 흙으로 지으셨으나 여자는 남자를 잠들게 한 다음 옆구리 뼈를 취해가지고 지었기 때문에 뼈는 흙보다 강하다. 그러므로 맞부딪히면 박살난다. 그러므로 아내에게 맞부딪히지 말고 살살 달래라. 그러면 말씀대로 순종할 것이다. 그런 농담을 제가 했습니다만 오늘날 이 세상에 가정문제, 개인문제, 사회문제, 생활문제 이 모든 것이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반역한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값으로 쓸데없는 일을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흙으로 돌아갈 때 여러분 그냥 돌아갑니까? 병들잖아요. 늙고 병들어서 몸이 와해되고 흙으로 돌아가니 인간의 여러 가지 고통과 괴로움을 당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일들을 우리가 어떻게 처리하는 것입니까? 오늘날 사람들이 자기들이 처한 짐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일, 문제를 해결할 도리가 없지 않습니까?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낳으시고 기르신 주인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 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에 보내주신 것입니다. 이사야는 예수님이 태어나기 6백년에서 7백년 전에 예수님이 보내셔서 어떤 일을 할 것을 소소난간으로 예언해 놓은 것입니다.
저주의 형벌들의 일을 하나님은 청산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은 우리는 우리 힘으로 청산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아담의 후예로서 전부 아담의 DNA를 받아 가지고서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요, 저주를 받았고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살고 병들어 죽고 처참한 절망에 처한 존재로 유전을 받아 대대로 살아오기 때문에 우리 문제를 우리가 해결하지 못해요. 저주받지 아니한 새인류 조상이 와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담과 같은 존재가 아닙니다. 그는 아버지 없이 성령으로 태어나서 새로운 인류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죄 없이 태어났습니다. 저주받지 않고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은 축복받은 인간으로써 태어나서 우리의 새로운 인류 조상이 된 것입니다. 새로운 인류조상이 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걸머지고 옛 인생인 우리를 청산해 주신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1절로 11절 자세히 들어 보세요.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야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 다음 이사야의 예언이 참 정확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야훼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부자무덤에 들어갔거든요. “야훼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야훼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지금 주님께서 여러분을 보시고 굉장히 흐뭇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태어나기 6백년에서 7백년 전에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해 놓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올라가셔서 여러분 우리의 죄와 슬픔 저주와 절망, 죽음을 걸머지시고 고통을 당하시고 난 다음에 마지막에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 내가 목마르다. 그러니까 로마 군인들이 신 포도주를 먹음은 면을 입에 갖다 대주었습니다. 그것을 한번 맛보고 난 다음에 내가 다 이루었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께 맡기겠나이다 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창세기에도 보면 하나님이 만물을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일은 하나님이 다 했지요. 인간이 타락한 형상을 다 청산한 것도 예수님께서 33년 동안 지상에 계시면서 고난당하시고 마지막 십자가에서 몸찢고 피흘려서 운명하시기 전에 내가 다 이루었다.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조상들이 이루어 놓은 쓸데없는 일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나도 없이 다 청산해 주신 것입니다. 다 갚아 주었어요. 우리가 예를 들어 말하면 빚쟁이가 되어서 빚을 잔뜩 짊어지고 있는데 우리 부모님이 빚을 마지막으로 다 청산해 주었을 때 내가 다 갚았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우리가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께서 내가 다 이루었다 했을 때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정말 우리가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될 일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요 19:30)
인간이 저지른 반역의 일도 주님께서 다 청산하셨습니다.
골로새서 2장 14절로 15절에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십계명을 다 못박아서 폐기해 버렸습니다. 왜냐하면 영원히 우리 죄를 갚았기 때문에 이제는 죄를 지적할 법이 필요가 없어요. 예수님은 영원한 하나님이 여러분과 나의 죄를 청산할 때 어제 지은 죄, 오늘 지은 죄만 청산한 것이 아니라 영원히 지을 죄를 청산해 버린 것입니다. 우리를 붙잡을 법이 없어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하셨을 때 십계명을 십자가에 못박아서 청산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우리 죄 때문에 우리를 잡고 있던 마귀의 정사와 권세를 해체해 버리고 완전 정복해 버린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마귀는 더 이상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킬 권세가 없습니다. 전에는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우리가 마귀에 코가 꿰어서 끌려다녔지만 예수님께서 죄를 영원히 청산해 버렸기 때문에 우리를 붙잡을 죄의 고리가 없어졌습니다.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보혈로 씻으면 마귀는 더 이상 잡을 수가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마귀가 오면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가라! 그렇게 하면 마귀는 한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쳐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내가 뱀과 전갈과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고 말씀하셨고 내가 너에게 사자와 독사를 밟으며 젊은 사자와 뱀을 발로 누르리로다. 그러므로 원수 마귀와 귀신들은 우리가 능히 제압할 수 있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악으로 말미암아 가져온 일을 다 이루었으므로 이제는 창조의 일도 하나님이 혼자 했고 타락한 것도 구속하는 일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혼자서 다 이루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뭡니까?
3. 신본주의와 인본주의
여러분 오늘날 우리 인간들이 사는데 두 가지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신본주의와 인본주의인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신앙과 인간중심으로 사는 생활인 것입니다. 신본주의는 일의 주인이 하나님인 것을 확실히 인정하는 것입니다.
“일을 행하시는 야훼,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야훼, 그의 이름을 야훼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렘 33:2)
일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맡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의 주인이시다. 그러므로 일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인정하면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창세기 때 엿새 동안도 하나님이 혼자서 일하셨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일도 예수님 혼자서 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고통당하니 올라와서 날 좀 도와달라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만민 앞에서 예수님 혼자서 우리 일을 맡아서 다 고난을 통해서 청산하고 만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본주의는 일의 주인이 하나님인 것을 인정하고 일하시는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일을 행하시는 야훼,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야훼”(렘 33:2)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행 17:24)가 되시고
“주께서 큰 능력과 펴신 팔로 천지를 지으셨사오니 주에게는 할 수 없는 일이 없으시니이다”(렘 32:1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요 5:17)
하나님과 예수님은 인간이 저지른 모든 일을 청산하기 위해서 마지막 십자가에서 일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 성령님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다 이루셨습니다. 모든 물질세계에도 다 이루셨고 타락해서 가져온 쓸데없는 저주의 일도 다 청산해 놓았고 일은 하나님이 다 이루셨습니다.
시편 115편 3절에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느헤미야 9장 6절에 “오직 주는 야훼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 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
만물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모든 일을 책임지시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4장 11절에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만물의 주인인 것을 시인하는 것이 바로 신본주의인 것입니다. 사탄이 주인이 아닙니다. 사람도 주인이 아닙니다. 만물의 주인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은 주인이 하시는 것이지 주인 아닌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인본주의는 뭐냐하면 인간이 일의 주인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주인이다. 하나님 안 계신다. 모든 일은 우리가 짊어져야 되고 짐은 우리가 맡아야 되고 모든 문제는 우리가 해결해야 된다. 인간이 주인노릇 하려는 것입니다. 인간이 주인 노릇해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시편 14편 1절에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하나님 없이 인간이 우주의 주인이다. 하늘과 땅과 세계와 그 가운데 인간이 제일이다. 그래서 노아 홍수 이후로 노아의 후손들이 시날 광야에서 바벨탑을 세우면서 하나님 없이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세상에 흩어짐을 면하자. 우리의 바벨탑이 하늘에 닿게 해서 인본주의를 주장했습니다만 하나님이 바벨탑을 무너뜨렸었습니다.
토인비 박사는 말하기를 20세기 동안 인간이 지은 문명의 20개가 무너졌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세우는 인간의 모든 일은 다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본주의자들은 일의 주인이 인간이고 인간이 삶에 필요한 모든 일을 하고 짐도 자기가 짊어지고 문제도 자기가 다 해결한다고 했기 때문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고생을 하지요. 오늘날 모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사실은 여러분이 짊어질 것이 아닌데 여러분이 인본주의로 인간을 하나님과 동등됨으로 여기고 세우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교만 때문에요. 교만은 패방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인 것입니다.
시편 127편 1절로 2절을 우리가 보면 “야훼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야훼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야훼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하나님 없이 집을 지어도 그 집에 오래 살지도 못하고 하나님 없이 성을 지켜도 성이 지켜지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같이 계시면 하나님이 일을 다 맡아 주시기 때문에 다 맡기고 믿고 편안한 잠을 잘 수 있다는 것입니다.
4. 무엇이 다른가?
그러므로 여러분, 인본주의와 신본주의가 무엇이 다른지 우리가 확실히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신본주의 하에서는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므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일과 짐과 문제를 기도로써 하나님께 맡겨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짊어지면 안 됩니다. 일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가 짊어지면 건방지게 하나님의 일을 빼앗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위에 일어나는 모든 문제,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 이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는데 어떻게 맡기느냐. 예수 이름으로 기도해서 맡기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가 되신다고 말했고 내 짐을 야훼께 맡기라고 말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맡아서 십자가에서 내가 다 이루었다고 외치지 않습니까? 오늘날도 주님께서 여러분 일을 맡겼으면 주님께서 여러분 마음속에 성령으로 말합니다. 오냐, 내게 맡겼으니 내가 다 이루었다. 걱정하지 말아라. 하나님이 무슨 능력이 없어서 일을 못하겠습니까? 안 맡기기 때문에 안하시지요. 하나님께 맡겨 놓으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합니까? 일을 다 맡겨 놓으면 여러분 할 일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예? 하나님께 일을 다 맡겨 놓으면 여러분 할 일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할 일이 없으면 뭐 합니까? 쉬는 거지요. 하나님께 일 다 맡겨 놓고 믿고 할렐루야 쉬는 것이 우리가 신본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인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하나님의 아들을 우리가 믿으면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십자가에서 다 청산해 버리고 할 일이 없습니다. 정말로 잘 믿는 사람은 건방지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할 일이 없어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이것도 하나님께 맡겨놓고 하나님이 할 일이지 여러분이 할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염려하는 것이니 너희 천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 아시느니라. 그 나라의 그 의를 먼저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에게 더하시리라. 너희 자식이 떡을 달라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면 뱀을 줄 자가 있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 줄줄 알거든 하물며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 주지 않겠느냐. 주님께서 다 맡겠다고 했으니 맡기라고... 맡겨놓으니까 할 일이 없으니까 뭐합니까? 찬송이나 부르고 믿고 할렐루야 하고 쉬라는 것이지. 인생은 피땀을 흘리고 살게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닙니다. 평안을 가지고 살도록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너무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기 때문에 인간의 수명이 점점 짧아져서 우리 어릴 때는 동리에 환갑을 지낸 사람이 별로 없었어요. 60 먹은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환갑이 다가오면 큰 잔치를 베풀고 하는데 요사이 환갑 대수롭지 않습니다. 60을 누가 못살아요? 누구도 다 60을 사는 것입니다. 요사이는 100살을 살면 아 살만큼 살았구나. 120살을 살면 모세와 같이 살았다고 말할 수 있고 170을 살아야 아브라함처럼 산 것입니다. 앞으로 그럴 날이 다가올 것입니다. 왜냐하면 앞으로는 스트레스가 없어지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건강하고 오래 사는 것은 모든 만병이 스트레스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스트레스는 왜냐, 인본주의가 되서 자기가 일을 책임지기 때문에 일에 짓눌려서 스트레스를 받는데 우리는 하나님이 일의 주인이기 때문에 다 맡겨버리면 스트레스가 있을 수가 없어요. 다 맡겨야 돼요. 말은 이렇게 하지만 저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요. 그러므로 매일 하나님께 일을 맡기는데 맡기는 것이 참 좋은 법이 있어요. 말로써만 맡기면 잘 안돼요. 하나님께 편지를 쓰는 것입니다. 저는 매일같이 편지를 수십통 써요. 하나님 아버지 안녕하십니까? 내가 이런 이런 고통스러운 일이 있는데 하나님 아버지께 고하오니 하나님 아버지가 다 맡아 주장하여 주시옵소서. 편지를 하나님 꼭 받아 읽어 주시고 하나님께서 이 일을 해결해 주시옵소서. 나는 이 편지를 쓰고 난 다음에 하나님이 책임져 줄 줄 알고 믿고 평안을 가집니다. 편지를 써서 하나님께 드리면 마음이 굉장히 평안해져요. 말로 하는 것보다도. 그래서 스트레스에서 놓여날려고 노력을 많이 하는데 지금까지는 하나님께서 스트레스에서 놓여나게 축복해 주셨습니다. 여러분이 스트레스만 안 받으면 굉장히 행복해지고 병들지 않고 건강하게 살고 장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의도순복음교회에 나오는 여러분은 일을 행하시는 야훼 그 일을 지어 성취하시는 야훼 하나님을 앎으로 더 이상 스트레스 받지 않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인본주의는 모든 일은 내가 한다. 내가 하나님과 동등하기에 내 인생의 주인이다. 내 인생의 주인은 나다. 그러므로 일은 내 것이다. 모든 일은 자기가 책임지고 모든 짐은 자기가 걸머지고 피땀을 흘리는 것입니다.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피땀 흘리고 스트레스를 받고 고통을 당하고 절망에서 발버둥치는 것이 인간의 현실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고와 고통의 삶이 끊이지 않는 것은 인본주의이기 때문에 자기가 주인노릇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인이고 우리는 그를 섬기는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인정하면 해방되지만 내가 주인이고 내가 모든 것을 해야 된다면 모든 책임을 내가 다 짊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여러분 짐을 여러분이 책임지고 걸머지고 있지요? 일도 여러분이 해결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문제도 여러분이 책임져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게 인본주의입니다. 내가 내가 내가 없으면 안된다. 내가 내가... 그러니까 내 힘으로는 안되지요.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얼마 안되니까 머리털보다 많은 문제에 짓눌려서 스트레스를 받고 고통을 당하지요. 인본주의를 벗어나는 것이 우리가 큰 거듭나는 체험을 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2장 19절에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반역이 너를 책망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야훼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야훼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자기가 주인노릇 하면 그것이 악이요 그것이 고통을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되겠습니까?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한번은 예수님께 군중들이 와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됩니까? 주님께서 가만히 보시고 난 다음에 여러분들이 할 일이 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것이 여러분의 할 일이다.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까.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께 일을 맡기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우리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일은 다른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 믿고 맡기는 것이 여러분 일인 것입니다. 믿으면 하겠네. 주 예수만 믿어서 하신 일을 힘입어 오직 주께 나가면 영원 삶을 얻네. 믿는 것이 우리가 하는 일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로 30절처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보십시오. 주님이 우리에게 주문하는 것은 쉬는 것입니다. 주일날이 무슨 날입니까? 주님이 일을 다 하시고 난 다음 쉬는 날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온유한 것은 마음이 따뜻하고 의롭고 순종하는 마음이고 겸손하다는 것은 자기를 낮춰서 주님의 멍에 밑으로 들어오라. 십자가 밑으로 들어오라. 예수 십자가 내 십자가로 받아들이고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로 받아들이고 예수께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예수님이 다 짊어진 멍에 밑으로 들어가니까 우리는 형식만 멍에 밑으로 들어간 것이지 짐은 하나도 안 짊어진 것입니다. 짐은 주님이 다 짊어지고 그 밑에 따라간 것이니까 쉽고 가볍게 인생을 살아요.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문하는 것은 쉽고 가볍게 휴식을 가지고 안식에 참여하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 3절에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일을 다 맡겼으니까 안식에 들어간다. 안식이라는 것은 쉬는 것입니다. 마음에 쉼을 가지고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쉬라고 한다고 밥도 안 먹고서 이것도 쉬어야지. 씹지도 아니하고 밥도 안떠먹고 그렇게 하는 것이 쉬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 쉬는 것이 쉬는 것입니다. 마음에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에서 해방되고 마음에서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꿈과 믿음과 환상을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히 받아 행복과 기쁨 속에서 사는 것이 이것이 쉬는 것이지 옷도 안 갈아 입고 목욕도 안하고 빨래도 안하고 집안 소재도 안하고 쉬라고 했으니까 안한다. 그런 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마음으로 주님께 휴식하면 주님께서 일을 해주시기 때문에 내가 맡은 일들이 술술 잘 풀립니다. 잘되는 일은 재미가 있지 수고롭지 않습니다 여러분, 목회를 해도 그래요. 교회 예배보러 왔으면 교회에 자리가 없이 교인들이 꽉 들어차 예배를 즐겁게 보면 너무 신바람이 나서 설교하는데 시간 가는줄 몰라요. 그런데 교인들 한 서너명 와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목에 핏대를 세우고 고함을 치고 들으라고 해도 자꾸 졸고 듣지 아니하면 아휴 못해 먹겠다. 어떻게 이 어려운 일을 어떻게 해먹겠노. 그러는 것입니다. 미안한 말이지만 요사이 교역자들이 와서 아휴 목회하는 것이 이렇게 힘들어서 이렇게 괴로워서 어떻게 했노. 그러면 저의 마음속에 교만한 말같지만 나는 괴롭지 않은데... 가는 곳마다 교인들이 입추의 여지없이 와 계시고 귀를 기울여 말씀을 듣고 하나님 은혜를 받으시고 귀신이 쫓겨 나가고 병이 낫고 하나님 기적이 다가오고 조금도 일이 아니고 쉬는 것이고 재미다. 집에 아무것도 안하고 앉아있으라고 하면 죽을 지경입니다. 아무것도 안하는 것이 쉬는 것인지 압니까? 아무것도 안하는 것 정말 힘든 것입니다. 짐을 안 짊어지고 손발을 움직이고 일하는 것은 정말로 즐거운 일인 것입니다. 평생토록 일이 있어야 돼요. 축복받은 일이 있으면 수고롭지 않습니다. 주님이 쉬라는 것은 고통은 내가 맡아 줄테니까 재미있고 즐겁게 수족을 움직이면서 인생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재미있게 인생을 사는 삶을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다.
<결론>
하나님께서 우주 창조와 보존의 일을 다 이루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에서 완전 해방되고, 허물에서 완전 성결하고, 성령의 전이 되고, 병에서 완전 치료받고, 저주에서 완전 해방되고, 죽음에서 완전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이것을 우리는 깨달아 알기 위해서 깊이 생각하고 이렇게 해방된 것을 우리는 바라보고 마음속에 느끼며 이렇게 된 것을 믿고 나는 수고와 고통에서 해방되었다고 자백하면서 주님의 안식을 누리며 살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일 여러분께 부탁하고 싶은 말씀은 여러분 주님이 여러분 위해서 이루어 놓으신 것을 늘 꿈꾸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바라봄의 법칙, 바라보아야 돼요. 사람은 언제나 바라보고 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밖으로 나가 보십시오. 모든 일에 간판이 다 붙어 있습니다. 바라보라고. 바라보는 것이 마음을 점령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 바라보는 것을 믿고 입술로 시인하면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야곱이 얼룩덜룩이 새끼 낳은 것은 모두 자기 것이 되겠다고 약속을 하고 난 다음에 색깔이 얼룩덜룩이인 새끼들은 사흘길로 외삼촌이 옮겨가 버리고 순수한 색깔의 양과 염소를 먹일 때 순수한 색깔의 양과 염소가 얼룩덜룩이를 낳을 확률이 적잖아요. 산에 올라가서 얼룩덜룩, 얼룩덜룩하게 만든 단풍나무, 신풍나무,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서 가지를 벗겨가지고서 물 구유에 펼쳐 놓고 양이나 염소가 먹이를 먹으러 올 때 그곳에서 새끼를 가지는데 팔짱 끼고서 얼룩덜룩한 나뭇가지를 보고 새끼는 다 얼룩덜룩이다 그렇게 했는데 새끼가 낳을 때마다 얼룩덜룩이를 낳았거든요. 사람들은 그 성경을 읽고 난 다음에 거짓말도 새빨간 거짓말을 한다. 심리학적인 조작이다. 그렇지 않아요. 야곱이 꿈을 꾸니까 꿈에 보니까 순수한 양떼를 통해서 새끼를 가진 새끼가 모두다 얼룩덜룩이에요. 왜냐, 바라봄의 법칙을 하나님께 배후에 받아서 그대로 이루어주시는 것을 꿈에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 눈으로 보기에는 얼룩덜룩이가 아닌 흰 순수한 색깔의 양과 염소인데 꿈에 보니까 수컷이 전부 얼룩덜룩이입니다. 야곱이 본대로 하나님이 역사한 것처럼 여러분이 마음에 꿈을 바라보면 하나님이 그것을 받아서 배후에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역사해 주세요. 성령이 가만히 있는데 역사하지 않습니다. 꿈을 가지면 꿈을 이루기 위해서 배후에서 성령이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한 것을 십자가를 통하여 바라보고 예수님 십자가에서 나의 저주를 짊어지시고 병을 짊어지시고 죄를 짊어지셨으니 나는 완전히 구원을 받았다.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다. 그것을 바라보고 꿈꾸고 있으면 하나님의 성령이 뒤에서 네 믿음대로 되라. 죄를 없애고 질병을 없애고 저주를 없애고 여러분의 그것이 이루어지게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다 꿈을 꾸어서 보면 좋겠는데 하나님이 다 보여주려면 바뻐서 안되기 때문에 안보여 주는 것 같은데 성경이 보여주는 것은 우리에게 깨달으라고 보여주는 것이므로 여러분이 꿈을 꾸면 그 배후에서 하나님이 꿈을 따라 역사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꿈을 꾸고 믿고 입술로 자랑하자. 그것 세 가지만 하면 여러분 생애 속에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이 다 술술술 여러분 생애 속에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한번 기도하십시다.
우리를 웃게 하시는 하나님
창세기 21:1-7 / 송기성목사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는 “하나님이 인간에게만 주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웃음이라는 축복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웃음이라는 축복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만 주신 특별한 선물입니다. 이 웃음의 축복을 받은 사람은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는 행복을 누리게 돕니다. 그런 웃음의 축복을 크게 받은 사람 중에 빼놓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아들을 낳았을 때 그 이름을 ‘이삭’이라고 했습니다. ‘이삭’이라는 이름은 ‘웃음’ 또는 ‘웃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 이름은 일찍이 하나님께서 이삭이 탄생하기 전에 지어주신 이름입니다(창17:19). 이삭을 낳은 후에 사라는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창21:6)라며 기뻐하였습니다. 맞습니다. 사라와 아브라함을 웃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이야기를 듣는 우리들도 웃게 하시는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1. 우리를 웃게 하시는 하나님은 언약하신 것을 필히 성취케 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오늘의 본문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았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여호와’는 ‘언약의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대로’란 ‘언약하신 대로’라는 뜻이며, ‘사라를 돌보셨고’란 ‘사라를 방문하셨고’라는 뜻입니다. 이는 호의를 베풀기 위해 가까이 다가오셔서 ‘사라를 축복하셨다’(The Lord blessed Sarah, as he had promised.)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기간(창17:21)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이 75세 때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라고 명령하시면서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12:1,2)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당장에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오래 전에 주어졌지만 아브라함과 사라는 그 소망이 지연됨으로 인한 실망과 슬픔을 참고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언약의 하나님이신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셔서 이삭을 낳게 하셨습니다.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말씀하신 대로 돌보시고 말씀하신 대로 행하시는 하나님은 언약하신 것을 필히 성취케 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시기가 될 때까지 참고 견디며 인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100세 때에 비로소 아들 이삭을 얻기까지 장장 25년 동안이나 소망 중에 인내하였습니다. 그 결과 마침내 그들 부부는 그들을 웃게 하시는 하나님 곧 언약하신 것을 필히 성취케 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체험하게 된 줄 믿습니다.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전 세계를 돌며 강연하는 복음전도자 닉 부이치치(Nick Vujicic)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신실한 목회자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팔다리가 없는 장애로 인해 8세 이후 세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닉은 아름답다. 하나님이 우릴 도울 거다.’라며 아들로 하여금 희망과 용기를 갖게 해주었습니다. 부모의 전폭적인 지원과 사랑을 받으며 성장한 그는 대학에서 회계와 경영을 전공했으며,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서핑을 하며, 골프공을 치고, 드럼을 치며, 컴퓨터도 합니다. 15세에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고, 19세 때 첫 강연을 시작한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전 세계에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세운 <사지 없는 삶>(Without Limbs) 대표로 섬기고 있습니다. 일본계 미국인 아내와 결혼을 하고 건강한 아들을 낳아 아주 행복하게 살고 있는 그는 ‘어떻게 팔다리가 없는 내가 행복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해 화를 내지 않고,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하기 때문이지요.’라며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언제나 얻을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하지만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언제나 얻을 수 있습니다. 내게도 즐거운 날이 있는가 하면 슬픈 날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없이 연약해지는 순간, 그때가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할 때임을 저는 압니다. 그때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신뢰할 때임을 나는 압니다. 이 땅의 중력을 거스를 수 없을 때, 나는 시선을 하나님께 맞춥니다. 그러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믿음의 날개가 솟습니다. 믿음을 행동으로 옮기는 순간 나는 하나님의 권능을 경험합니다. 인생의 소중한 것들은 절대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계속 시도하고 절대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실패할 때마다 무언가를 배울 수 있으니 절대 포기하지 마세요.” 아멘!
시편117:1~2에 시인은 “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할지어다.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시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라며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영원하신 진실하심 곧 영원하신 신실하심을 찬양했습니다(His love for us is strong, and his faithfulness is eternal). 그렇습니다.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은 크고,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신실하심 또한 영원한 줄 믿습니다.
우리를 웃게 하시는 하나님은 언약하신 것을 필히 성취케 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말씀하신 시기에 말씀하신 대로 돌보시고, 말씀하신 대로 행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언약하신 것을 필히 성취케 하심으로 우리를 웃게 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우리를 웃게 하시는 하나님은 불가능한 것을 능히 가능케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았을 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백 세였으며, 사라의 나이도 구십 세였습니다. 그 나이에 그들이 아들을 낳았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생리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어 사라로 하여금 아들을 낳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엎드리어 웃었습니다. 그는 마음속으로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으며, 사라는 구십 세이니 어찌 출산하리요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창17:18)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솔직한 고백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창17:1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떠나 올라가셨습니다. 바로 그 날에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대로 순종하여 열 세살이 된 그 아들 이스마엘과 아브라함의 집에 있는 모든 남자에게 할례를 행하였습니다. 아브라함 자신도 구십 구 세에 할례를 행하였습니다.(창17:23, 24). 그리고 그는 이삭이 난 지 팔 일만에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할례를 행하였습니다. 그는 물론 아들의 이름도 하나님께서 미리 지어주신 대로 이삭이라(창17:19) 하였습니다. 이는 전적으로 불가능한 것을 능히 가능케 하신 전능하신 하나님께 대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여주는 순종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해서 로마서4:18~21에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며,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였으며,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으며, 약속하신 것을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다고 했습니다. 그 결과 마침내 그들 부부는 그들을 웃게 하시는 하나님 곧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체험하게 된 줄 믿습니다.
서광교회 김준영(64, 이레마트 대표) 장로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모태신앙인 아내를 만나 1982년 처음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1984년 생후 27개월 된 아들 성주가 옥상에서 떨어져 머리를 크게 다쳤습니다. 그는 완고한 가족들로부터 “네가 예수쟁이가 돼서 집안에 액운이 끼었다”는 소리를 들어야만 했습니다. 수술실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그는 아이를 둘러싸고 먼저 기도를 드리는 수술팀의 모습을 보고 마치 엄청난 전류가 몸을 훑고 지나가는 듯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6시간의 수술 결과는 불행하게도 ‘가망 없음’이었고, 혹 살아나더라도 언어장애가 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냥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던 그는 마침 열리고 있는 교회 새벽부흥회에 참석해 전교인과 더불어 통성으로 기도드렸습니다. 그 순간 3일 후에나 깨어난다던 아이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놀라웁게도 아이는 살아났으며 청년이 된 지금까지 언어장애도 없이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큰 사고를 겪고 난 후에 김장로님은 더 이상 세상과 교회에 양다리를 걸치지 않게 되었노라며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저는 이 일로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고 하나님 앞에 온전히 붙들리게 되었습니다.이후 날마다, 또는 어려움이 닥칠 때는 더욱 하나님께 매달리고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저의 믿음, 저의 작업장을 통해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누는 데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아멘!
예레미야 32:27에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할 수 없는 일이 있겠느냐”라며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확신케 해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육체의 하나님은 불가능한 일이 없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우리를 웃게 하시는 하나님은 불가능한 것을 능히 가능케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좌절과 절망 속에서도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불가능한 것을 능히 가능케 하심으로 우리를 웃게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체험하고 하나님께 온전히 붙들리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인 오든은 “한 개인이든 공동체든, 만족스런 인생이란 일과 웃음과 기도, 이 셋 모두에 적절한 관심을 기울일 때에 비로소 성취될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만족스런 인생은 일과 웃음과 기도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것을 경험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를 일하게 하시고, 웃게 하시며, 기도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만족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우리를 웃게 하시는 하나님은 언약하신 것을 필히 성취케 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웃게 하시는 하나님은 불가능한 것을 능히 가능케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고난과 시련, 좌절과 절망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인내하며,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함으로써 우리를 웃게 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전능하심을 체험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인생의 만족을 누리며 감사와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쉼표
인명진목사 / 창 2:1-3
아름다운 노래에는 반드시 쉼표가 있습니다. 쉼표가 없는 노래는 노래가 아니라 자신을 지치게 만들고, 다른 사람에게 소음 공해로 들릴 뿐입니다. 아름다운 시에도 운율과 보이지 않는 쉼표가 있습니다. 여운을 두고 시를 낭송해야 시의 맛이 살아납니다. 끝없이 흘러가는 강물도 외롭게 솟아 있는 바위를 보면 얼싸안고 잠시 쉬었다 갑니다.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바람도 나뭇잎을 만나면 도란도란 이야기 하며 찰나를 쉬고 갑니다.
그런데 우리네 인생은 무엇이 그리 바쁜지 일상에 매여 인생의 쉼표를 찍을 줄 모릅니다. 노래를 부르면서 쉼표를 읽을 줄 알고, 시를 낭송하면서 여운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 인생의 쉼표를 찍을 줄 모릅니다. 무엇에 쫓기는지 허겁지겁 달려가고 있습니다. 우리네 인생에서 불행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까. 쉬어야 할 때에 쉬지 않고, 멈추어야 할 때에 추지 않고, 중단해야 할 때에 중단할 줄을 모릅니다.
자동차 운전을 잘 하는 사람은 달려야 할 때 달릴 줄 알고, 멈추어야 할 때 멈출 줄 아는 사람입니다. 빨리 달린다고 능사가 아닙니다. 멈추어야 할 곳에 멈추지 않으면 사고가 납니다. 멈추라는 빨간 신호등이 켜져 있는데 신호를 무시하는 사람은 생명을 잃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인생의 쉼표는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의 인생의 쉼표는 과연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고단한 인생들에게 네 개의 쉼표를 주셨습니다. 인간을 고단한 노동에서 해방되게 하는 밤을 주셨습니다. 밤을 통해 쉼을 허락하셨습니다. 일주일에 하루는 쉬는 안식일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일정에 맞추어서 사람을 시간의 사슬에서 해방되게 만드셨습니다. 욕심에 의해 자신의 몸뿐만 아니라 땅까지 학대하는 인간에게 안식년을 통해 욕심에서 해방되게 하셨습니다. 사회적인 쉼인 희년을 선포하여 빚을 탕감하고, 땅을 원주인에게 돌려주어 원점으로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밤, 안식일, 안식년, 희년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쉼표입니다. 이 네 가지의 핵심은 일하지 말고 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계명이 아니라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엄청난 축복입니다. 저는 신앙생활하면서 요 근래에 깨달은 바가 있습니다. 하지 말라, 하라는 하나님의 계명 뒤에는 반드시 사랑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표면적으로 명령인데, 그 속을 찬찬하게 들여다보면 깊은 사랑이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가 명령하면 본능적으로 거부합니다. 명령을 내리시는 분이 하나님일지라도 기쁜 마음으로 따라가기 보다는 마지못해서 따라가거나 때로는 매 맞을까봐 겁이 나서 따라갑니다.
대표적으로 쉼에 대한 명령이 그러합니다. 그런데 한번 뒤집어 생각해보십시오. 일하지 말고 쉬라는데 이것보다 더 좋은 일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놀고 싶어 하고, 쉬고 싶어 하는데 하나님께서 잘 쉬어라 잘 놀아라 말씀합니다. 이때 우리는 얼씨구 좋구나 하면서 감사함으로 받아야 마땅한 것 아닙니까? 그러나 사람들은 감사함으로 인생의 쉼표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계명을 명령으로만 생각하여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여 밤에도 일하고, 안식일에도 일하고, 안식년에도 파종하고, 희년에도 돌려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에게 벌을 내리셨습니다. 또한 안식년 지키지 않자 약속의 땅을 빼앗아 바벨론 사람에게 70년 동안 넘겨주었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어떤 종교가 강제로 놀라는 종교와 가르침이 어디에 있습니까? 놀지 않고 일하면 벌준다. 쉬지 않으면 벌금 물린다. 이런 가르침이 세상에 어디에 있습니까? 저는 일하지 않고 놀면 벌주는 것 보았어도 쉬지 않는다고 벌주는 것은 처음 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계명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저녁에 해가 지지 않으면 일에서 해방되지 않을 것 같으니 태양 불을 꺼서 잠자고 쉬라고 하셨습니다.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에서 우리를 불러내어 이 안식일에 새로운 생각을 가지게 하고 영혼이 회복시키십니다.
땅도 인간의 욕심에 의해 착취당했으니 안식년을 통해 땅과 인간이 함께 쉬라고 하십니다. 나만 잘 쉬는 것이 아니라 내 집에 있는 종들을 자유하게 풀어주고 빚을 탕감하여 모두 다 잘 놀고 잘 쉬어라 이것은 명령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아니면 쉬지 못할 것 같으니 명령으로 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네 가지 쉼표를 차례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 쉼표는 밤입니다. 현대인들은 밤이 쉼표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어쩌면 현대인이 피곤하고 스트레스를 받는 이유 중에 하나도 밤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천지창조 이야기를 기록한 사람들은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사람이었고, 바벨론에서 전쟁 포로로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들에게 밤은 쉼표였습니다. 한날의 노동에서 해방되어 육체와 마음의 쉼을 얻을 수 있는 쉼표가 바로 밤이었습니다. 그러니 저들이 해가 지기를 얼마나 기다렸을까요? 그래서 저들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밤은 히브리 노예와 바벨론 전쟁포로에게만이 허락하신 쉼표가 아니라 모든 인생들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쉼표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쉼을 거부하고 끊임없이 밤을 낮처럼 만들었습니다. 문명화가 된다는 말은 결국 인간에게서 밤을 빼앗는다는 말과 동의어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옛 어른들이 도시를 표현할 때 두 가지 말을 사용했습니다. 하나는 넓은 곳이라는 의미로 대처라 불렀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살고 상공업이 발달한 지역이라는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밤이 없다는 표현으로 불야성으로 불렀습니다. 등불이 휘황찬란하게 켜 있어서 밤에도 대낮같이 밝은 곳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가 살고 이 도시는 밤이 없는 불야성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사는 서울은 세계에서 밤이 가장 밝은 도시 중에 하나닐 것입니다. 도시의 상점거리는 불을 켜놓고서 집 안에서 쉬는 사람을 불러냅니다. 먹고 놀고 마시고 돈 쓰라고 말입니다. 또한 집에 들어가면 텔레비전이 거실 중앙에 떡하니 자리를 잡아 잠자지 말고 자기 쳐다보라고 붙들어 놓습니다.
작년에 인공위성에서 찍은 남한 북한의 밤을 비교한 사진이 뉴스에 나온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보셨을 것입니다. 북한은 평양을 중심으로 불빛이 조금 보이고 나머지 지역은 칠흑 같은 밤이었습니다. 반면에 남한은 서울 경기지역은 대낮처럼 환하고, 다른 대도시들도 평양보다는 환하게 밝았습니다. 이 뉴스는 북한의 전력 사정이 형편없다는 것을 말하려는 의도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뉴스를 보면서 밤을 빼앗기고 쉼을 잃어버린 현대인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문명이 발달하면서 인간은 많은 편리를 누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문명으로 인해 하나님이 주신 태초의 리듬을 잃어버린 부분도 없지 않습니다. 그래서 쉼도 사라졌고, 인간은 점점 거칠고 폭력적으로 변해만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시 한번 선언해야 합니다. 밤은 노동에 지친 인간에게 주신 쉼표라고 말입니다.
문제는 사람에게만 밤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동물과 식물에게도 반드시 밤이라는 쉼표가 필요합니다. 문경에서 목회할 때 일입니다. 가로등을 밤에 켜야 한다는 주민과 가로등을 꺼야한다는 밭주인 사이에 말다툼이 있었습니다. 어두컴컴한 길모퉁이에 가로등을 켜야 사고도 나지 않고 행인이 안전하게 다니기 때문에 대다수 주민들은 가로등을 켜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길모퉁이의 밭주인은 한사코 가로등을 껐습니다. 밭주인이 항변하는데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습니다. 밤에 가로등을 계속 켜놓으면 농작물이 잠을 자지 못해서 작황이 형편없다는 것입니다. 꽃 피고 열매 맺어야 할 때 스트레스를 받아서 제대로 열매를 맺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식물도 잠을 자야하는데 잠을 자지 못하니 작황이 시원찮은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것이 식물만도 그런 것이 아닙니다. 동물도 밤에 잠을 자야 합니다. 그런데 양계장에 가면 밤새도록 불이 켜져 있습니다. 몸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좁은 닭장에 갇힌 닭은 빨갛게 충혈 된 눈으로 먹는 것 이외에는 할 일이 없습니다. 이렇게 먹어서 살도 스트레스 살이 찌고, 알도 열 받아서 낳습니다.
우리의 식탁에는 밤잠을 자지 못한 채소가 잔뜩 독이 오른 채로 차려지고, 고기도 스트레스를 잔뜩 품고서 차려집니다. 밤을 잃어버린 인간은 채소의 밤, 동물의 밤까지 빼앗아 버렸습니다. 아무리 잘 먹어도 쉼을 누리기가 요원합니다. 우리는 성서에서 말하는 밤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인간이 쉼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성서는 밤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에게 도전합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두 번째 쉼표는 안식일입니다.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 않는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쉬셨습니다. 하나님이 쉬셨기 때문에 사람도 쉬어야 합니다. 출애굽기는 안식일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들이나 네 남종이나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서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안식일에는 집주인뿐만 아니라 그 집의 아들도 딸도 쉬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집에서 일하는 종들도 쉬어야 합니다. 가축도 쉬어야 합니다. 그 집에 머무는 객이라도 쉬어야 합니다.
안식일은 단순히 노동만 쉬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도 마음도 욕심도 함께 쉬는 것입니다. 안식일이라는 말 자체가 “샤바트”라는 동사에서 온 말인데 이 말은 중단하다. 끊다. 그만 두다는 뜻입니다. 안식일은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합니다. “그만해라! 멈추어라! 여유를 가져라! 쉬어라! 속도를 늦추어라! 식혀라! 무뎌진 연장을 갈아라!” 더 넓은 의미로 본다면 “하나님의 창조의 리듬에 맞추어라. 하나님의 속도에 맞추어 걸어가라.”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안식일을 하나님을 위한 날로 착각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안식일을 잘 지킬까를 궁리하다가 613 가지 단서조항을 달았습니다. 안식일에는 밀이삭도 먹지 못한다. 짐승은 구덩이에 빠지면 건질 수 있지만 사람은 고칠 수 없다. 결국은 잘 지키겠다는 안식일법이 사람을 얽어매는 악법이 되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과 안식일 논쟁을 벌인 이유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사람을 위해서 만든 안식일 법이 안식일을 위해서 사람이 있는 꼴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명한 선언을 하십니다.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 주인이니라.”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에게 안식일 법을 명령하셨습니까? 430년 동안 내 땅 한 평 가져보지 못하고, 자기 가축 한 마리 가져보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소유욕에 얼마나 불타올랐겠습니까? 하나님이 이 날을 정해놓지 않았다면 사람은 일하는 기계요, 소유욕의 종이 되어 미쳤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날이고 쉼은 온데간데없고 오직 소유에 대한 욕망만이 가득 찼을 것입니다.
그래서 법으로 정하여 쉬라는 것입니다. 일도 중단하고, 내 욕심도 끊고, 자기 생각도 그만두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쉼이 있으리라.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 된 징표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이 주신 안식과 평화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적어도 안식일 한날만이라도 소유욕에서 해방되어 생명의 근원되시는 하나님 앞에 서라는 것입니다. 결국 안식일은 하나님을 위해 있는 날이 아니라 소유욕과 욕심의 종이 될 수밖에 없는 인간 해방을 선언하는 날입니다. 소유와 물질과 자기 생각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는 날입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 사람을 위해서 있는 날입니다. 성서는 안식일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에게 도전합니다.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세 번째 쉼표는 안식년입니다. 안식년 제도의 핵심은 여섯 해 동안은 농사를 짓되, 일곱 번째 해에는 땅을 놀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만 쉬는 것이 아니라 땅도 쉬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서는 우리에게 선언합니다.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땅은 우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가 오해하는 것 중에 하나가 땅이 저주를 받아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었다는 것입니다. 땅은 죄짓지 않았습니다. 인간이 죄었기 때문에 땅을 토대로 살아가는 인간을 징계하기 위해 땅이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성서 기자의 직관은 아주 정확합니다. 땅 때문에 인간이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라 인간 때문에 땅은 억울한 일을 당했습니다. 타락한 인간 때문에 땅이 착취당하고 있습니다. 만약 인간이 없었다면 땅이 저주받을 일이 없었다는 말이 됩니다. 욕심이 중단된 자리에 인간도 쉴 수 있고, 땅도 쉴 수 있기 때문에 법으로 안식년을 정하여 경작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이 말씀은 한 해에 이모작, 삼모작이라도 농사를 지어 성공하고 부자가 되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의욕과 성공에 대한 의욕의 허리를 끊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민족과 나라보다 더 노력해도 종애굽에서 종살이 했던 430년간의 공백을 메울까 말까인데, 7년째 되는 해는 안식년으로 정하고 땅도 쉬고, 사람도 쉬고, 짐승도 쉬라고 말씀합니다. 안식년에는 파종하는 것도, 경작하는 것도, 수확하는 것도 일절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농사도 하지 않으면 무엇을 먹을까? 일 년을 통째로 굶는 것 아닌가? 이런 생각이 앞서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라.” 광야에서 40년 동안 농사하지 않았는데 굶어 죽은 사람 없지 않았느냐? 길쌈하지 않았는데 벌거벗어 얼어 죽은 사람 없지 않느냐? 하물며 한 해 농사 쉰다고 해서 너희가 가난해지겠느냐? 오히려 소유욕에 종이 되어 물질 따라서 끌려 다니는 종이 되지 말고 재물을 부릴 줄 아는 자유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성서는 안식년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에게 도전합니다. “일곱째 해에는 그 땅이 쉬어 안식하게 할지니라.”
네 번째 쉼표는 희년입니다. 희년은 안식년보다 더 큰 충격이고 혁명적입니다. 희년은 일곱 번의 안식년을 지낸 그 다음 해, 즉 오십 년째를 말합니다. 히브리말로 צבר입니다. 양각나팔을 의미합니다. 양각 나팔을 불어 해방을 선포하고 종 되었던 자들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원래의 상태로 돌려놓는 해를 말합니다. 이것은 사회적 쉼을 말합니다. 이것은 자신만 쉬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와 더불어 쉬는 쉼을 말합니다.
희년이 되면 모든 것이 원주인에게로 돌아가게 되어 있었습니다. 땅은 원래의 소유자에게로 돌아가며, 종 되었던 자는 가족에게로 돌아간다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개인차가 있게 마련입니다. 똑같이 땅을 분배받아도 어떤 사람은 열심히 하고, 어떤 사람은 게으릅니다. 어떤 사람은 농사짓는 솜씨가 뛰어나고 어떤 사람은 재주가 없습니다. 세월이 흐르다 보니 어떤 사람은 부자가 되고, 어떤 사람은 가난해집니다. 결국 가난한 사람은 땅을 팔게 되고, 나중에는 땅을 많이 가진 사람과 가졌던 땅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생기게 됩니다.
그런데 희년이 되면 그 땅이 원래 주인에게로 아무 조건이나 대가없이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가난해서 땅을 잃었던 사람은 땅을 찾아 재기할 수 있게 됩니다. 또 “가족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은 어떤 사람이 너무 가난해서 빚 때문에 자신을 종이나 머슴처럼 팔았더라도 희년이 되면 아무 대가나 조건 없이 해방되어 가족에게로 돌아가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희년이 되면 빚 때문에 헤어졌던 가족들이 모두 다 다시 만나 새롭게 출발하게 됩니다. 성서는 희년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에게 도전합니다. “너희는 오십 년 째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러한 하나님의 쉼표는 세상의 어떤 종교나 사상에서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제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건강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행복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한날의 노동에서 해방시키위해 밤의 쉼을 주셨고, 안식일 통해 하나님의 창조의 리듬에 들어가게 만드셨고, 안식년을 통해 인간도 땅도 쉬게 만드셨고, 희년을 통해 사회적 약자와 더불어 쉬게 만드셨습니다. 이것은 욕심으로 얼룩진 인간에게 한편으로는 브레이크요, 또 다른 한편으로는 쉼표였습니다. 하나님의 리듬에 맞추어서 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이런 질문 하실 분이 계실 것 같습니다. 요즘은 주 5일 근무제가 되어 사람이 더 많이 쉬는데 왜 사람은 더 거칠어지고, 피곤해하고, 세상은 자꾸만 살기가 어려워집니까? 일리 있는 질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하나님 없는 사람의 정체성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여기서는 배는 바다에 떠나는 배가 아니라 육체의 배를 말합니다. 이 배가 신이라는 것입니다.
사는 것도 육체의 소욕대로 살고, 쉬는 것도 육체의 욕구에 따라 쉽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돈의 리듬을 따라 쉽니다. 그러면 쉬어도 피곤합니다. 놀아도 만족함이 없습니다. 욕심이 중단되지 않는 쉼은 가짜 쉼입니다. 사람들은 옛날보다 더 많이 가지고, 더 잘 먹고, 더 많이 쉬는데 안식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서가 우리에게 말씀하는 쉼은 하나님의 창조의 리듬에 맞추어서 쉬어라 그리하면 쉼을 얻으리라고 말씀합니다. 밤이 되면 일손을 놓고 쉬어라. 안식일이면 하나님의 재창조를 기대하면서 하나님의 리듬에 들어가서 쉬어라. 안식년이면 집 안에 있는 종도, 짐승도, 땅도 쉬어라. 희년에는 양각나팔을 불어 사회적 약자와 함께 쉬어라예수님은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쉼을 강조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사랑하는 갈릴리 가족 여러분!
잘 쉬고 잘 노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욕심을 중단하고 하나님 앞으로 나오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리듬에 맞추어서 쉼표를 만드십시오. 밤이 주는 노동의 해방, 안식일이 주는 시간의 해방, 안식년이 주는 땅의 해방, 희년이 주는 사회적 약자와 더불어 쉼을 즐기십시오. 그리하여 하나님 안에서 재창조의 기쁨을 누리는 갈릴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누려야 할 안식
창 2장 1~3절 / 이규현목사(수영로교회)
창세기 1장, 천지창조의 마지막은 안식이다. 2:1-3절은 1장의 연속이고 결론이다.
하나님은 6일동안의 창조 사역 후 제7일째 안식하셨다.
안식은 창조의 절정이다. 창조사역에서 안식의 중요성을 깨우쳐 준다.
하나님이 쉬셨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하나님에게 휴식이 필요한 것인가? 하나님도 일을 하다지치시는가?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다. 쉼이 필요한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일하고 계신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멈추신다면 대혼란이 찾아올 것이다. 지금도 하나님은 온 땅을 통치하시고 운행하시고 섭리하고 계신다. 그런데 왜 쉬셨을까? 우리에게 쉼을 알려주시기 위해서다. “나도 쉬었다 너희도 쉬어라”고 말씀하신다. 창조와 안식이 같이 붙어있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
*하나님은 일하시는 분이다. 창조의 첫 장면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모습이다.
“2절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의 하신 일은 규모나 수준에 있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열심히 일하시는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예수도 일하시는 성실하게 일하시는 분이다.
요5:17절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하나님은 성실하신 분이고 열정적인 분이다.
안식이전에 하나님의 일하심에 주목해야 한다. 창조의 하나님에게서 배우는 첫번째 렛슨은 성실함, 부지런함이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일과 연관되어 살아간다. 일은 삶에 중요한 부분이다. 가정주부가 집에서 가사의 일을 하든, 가장이 직장에서 일을 하든 일로부터 분리되어 있지 않다. 일은 우리에게 보람과 즐거움을 준다. 일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동참한다. 일을 통해서 영적 성장을 경험하고, 일을 통해서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일을 해야 한다.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습득해야 하는 것이 있다. 쉼이다.
*창조의 완성은 안식이다.
일곱째날은 하나님이 축복하신 날이다. 성경에서 안식은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3절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구원은 안식을 의미한다. 우리가 주일마다 안식을 경험한다. 안식은 마지못해 받아들이는 날이 아니라 감사함으로 기쁨으로 맞이해야 한다. 일곱째 날은 구별된 날이다. 6일과는 전혀 다른 날이다. 하나님의 정하신 특별한 날로 지켜져야 한다. 다른 것이 끼어들게 하면 안된다.
2절에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일을 그치고”
쉼이라는 말은 “무엇으로부터 중단하다”는 뜻이 있다. 안식의 첫출발은 멈춤이다.
6일까지는 일을 하고 7일째는 일을 멈추어야 한다. 그런데 일을 하다 보면 멈추는 일이 쉽지 않다. 일이란 아무리 해도 끝이 없다. 항상 시간에 쫓긴다. 일은 생존과 직결되고 성공과도 연결되어 있다.
일을 그치지 못하고 “조금만 더”를 외친다. 일의 노예가 되기 쉽다. 일을 하는 만큼 돈이 주어질 때 쉬기 어렵다.
좀 더 벌고자 하는 욕망은 쉴 수 없게 만든다. 실제적으로 단 하루도 마음대로 쉴 수 없는 현대인들이 많다. 생각보다 일을 멈추는 것이 쉽지 않다.
오늘날 문화의 특징은 스피드다. 수치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실적에 목을 매다 보면 속도를 는출수 없다.
잘 쉬려면 하루를 구별해야 한다. 일과 일 사이에 칸막이를 쳐야 한다. 어떤 사람은 쉬는 시간에도 일거리를 들고 다닌다. 휴가를 갈 때도 서류철을 한 보따리 들고 간다. 일과 쉼이 구별되지 않으면 안된다. 종종 일과 일 사이에 매듭을 짓는 결단이 필요하다.
마6: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내일의 일을 오늘의 시간에 끌고 들어오지 말라는 뜻이다. 오늘과 내일의 시간의 경계선을 정확히 긋고 살아야 한다. 출근과 퇴근이 정확하지 않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 집이 회사이고 회사가 집인 경우는 경계선이 모호하다. 편리할지는 모르지만 별로 좋은 환경은 아니다. 잠시 하던 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는 시간이 필요하다.
육체적인 활동을 주로 하는 분들은 육체적 쉼을 가져야 한다.
정신적 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잠시 멈추고 육체적인 활동을 하는 것도 쉼이 된다.
영적인 활동을 많이 하는 사람들은 영적인 일로부터 종종 물러서는 일들이 필요하다.
안식은 일단 하던 일을 일시적으로 멈추는 용기를 가지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멈추는 결단을 하는 것이 안식의 시작이다.
*안식을 무시하면 어떻게 되는가? 창조의 법칙을 깨뜨리게 된다
일년에 52번의 휴식을 정하셨다. 하나님은 7일간의 주기를 정해 놓으셨다
본문2,3절을 보라. “일곱째 날”이 세 번이나 나온다. 특별한 강조다.
왜 7일인가?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법칙도 함께 만드셨다.
일과 쉼의 주기는 창조의 매뉴얼이다. 매뉴얼대로 해야 정상적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일에만 집중하고 쉼을 무시한다. 무한경쟁이다.
문화적 특징이다. 사람들을 지칠 정도로 몰아세운다. 세상을 보라. 분주함이 특징이다.
쉼을 모르는 문화는 자칫하면 난폭해진다. 쉼 없이 돌아가는 공장은 폭력성이 있다.
실제로 과로사가 얼마나 많은가? 쉼 없는 곳에는 여유가 없다. 여유가 없으면 타인에 대한 무심함이 생긴다. 염려와 근심 속에 살아간다. 분노가 잦아진다. 기쁨이 없다.
나도 모르게 불평을 하게 된다. 불평과 짜증을 늘어난다면 안식이 필요하다는 사인이다
결국 쉬지 않고 일만 하면 어떻게 될까? 서서히 마모되고 소진된다.
생산과 소비의 톱니바퀴에서 희생양이 된다. 창조의 법칙을 깨면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애굽에서 종 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출애굽의 역사는 안식으로의 여정이다.
안식이 없는 노예로 살았다. 바로 왕은 히브리인들에게 끊임없이 생산을 강요했다. 인간이 노예로 전락한다는 것처럼 불행한 일은 없다. 노예는 일을 하다가 죽으면 끝이다. 죽음에 대한 애도가 없다. 그냥 노동가치가 끝난 것으로 본다.
애굽의 바로는 오늘날 세상의 신을 상징한다. 끝없는 생산을 강요하는 바로는 오늘도 살아있다.
세상에서 인간은 노예로 전락되어 살아간다. 노예가 끊임없이 일하게 하려고 하면 감독관도 쉴 수 없다. 일을 시키는 사람이나 일을 하는 사람이나 모두 쉼이 없다.
오늘날 세상은 구조적으로 인간을 노예로 만들고 있다. 최근 우리 시대를 교육제도를 픙자한 드라마가 인기를 끌었다. 인간을 어떤 틀에 집어 넣어 학대와 폭력이 넘치는 세상이라는 것에 공감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따라가야 하는 시스템의 비애를 모두가 느낀다.
치열한 취업 관문을 뚫는 것도 쉽지 않다. 기업에 입사하여 임원에 오르기까지도 어렵지만 오른다고 해도 살인적인 업무를 소화해 내야 한다.
시드니에 있을 때 유명한 대기업의 현지법인 대표로 있는 교인, 그가 근무한 2-3년동안 시드니에서 유명한 비치가 있는데 가족들과 한번 가본 적이 없었다는 고백을 들었다. 개인의 삶을 포기하지 않으면 자리를 지켜낼 수가 없다. 겉으로는 고상해 보이지만 사실은 안식을 잃어버린 노예적 삶이다.
현대인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노예적 삶을 산다. 누가 노예인가? 노예란 내가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한다. 하루라도 내 마음대로 시간을 낼 수 없다.
일의 목적은 실종되고 일 자체가 목적이 되어 버린 삶은 비극적이다.
안식을 놓친 순간, 삶은 매우 위험해진다.
*안식은 감사와 축제의 의미가 있다.
하나님은 안식을 통해서 당신이 이루신 것에 대한 만족을 나타내신다.
성경적 안식은 그냥 쉬는 것이 아니라 일을 끝낸 다음 이어지는 일종의 축제다.
하나님이 이루신 창조세계를 바라보며 기뻐하는 것이 안식의 시간이다.
우리가 주일을 지키는 것도 부활을 기뻐하는 축제다. 부활 역시 새창조다.
안식의 순간,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에 집중하고 찬양하게 된다.
쉼의 질이 중요하다. 그냥 집에서 쉬는 것이나 휴가를 떠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일을 하는 동안에는 경험하지 못하는 것을 안식하는 동안에 경험한다
일을 하는 동안에는 긴장도가 높다. 생산성을 따지는 평가사회다.
주변의 과도한 기대에 부응하려고 애를 쓰다 보면 정신 없다. 일에 집중하다 보면 결과에 몰두하기 쉽다. 결과주의는 잔인하다. 일속에서 인간은 하나의 도구가 된다.
결과도 중요하지만 과정이 더 중요하다. 일을 하고 난 다음 쉬는 시간에 자기가 한 일을 바라볼 여유가 생긴다. 어린 자녀를 돌볼 때는 정신 없다. 피곤할 때는 밉기도 하고 짜증도 낸다.
그러나 저녁 시간 아이들이 잠이 들고 안식이 찾아 온 후 아이를 바라보면 사랑스럽기 그지 없다. 짜증 낸 것이 미안해진다. 바쁘면 의미를 놓친다. 일에만 빠져 있으면 주변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다. 일만 하는 사람은 인생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살아갈 가능성이 높다.
안식은 의미를 찾게 해준다. 일 속에 파묻혔을 때는 결코 볼 수 없는 경이로움을 발견할 수 있다.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일은 중요하다. 중요한 것인데도 가치를 모르고 지날 때가 많다.
기도와 묵상, 예배는 일로부터 물러난 시간에서 가능한 일이다. 쫓기는 기도, 쫒기듯이 해치우는 묵상, 분주한 가운데 의무적으로 참여하는 예배에서 무슨 영적인 유익이나 기쁨을 맛볼 수 있겠는가? 삶의 관조, 깊은 성찰은 안식의 시간을 통해서만 일어나는 일이다.
안식이 없으면 일은 의미를 잃게 되고 인간은 일 벌레로 전락된다.
일이 중요하지만 일이 전부가 되면 안된다. 일만 하면 일은 곧 저주로 바뀐다.
일에서 안식을 얻어내어야 비로소 일이 즐거워진다. 안식의 시간, 여유를 가지고 주변을 주의 깊게 돌아보면 다가오는 느낌이 다르다. 주목하고 묵상을 할 때 모든 것은 새롭게 다가온다.
작은 사물에도 감탄이 터지고 감사가 넘치게 된다. 우리에게 주어진 일과 상황을 누릴 줄 알고 즐길 줄 아는 것이 바로 쉼이 주는 축복이다.
하나님을 더 많이 묵상하기 위해 안식이 필요하다. 일에 빠진 사람은 하나님을 놓친다.
현대인들이 쉼, 휴가에 관심이 많아졌다. 현대인들에게 레저 문화는 급상승하고 있는 산업이다. 그러나 조심해야 할 것은 쉬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면 세속적인 HOLIDAY 문화는 쾌락으로 발전될 가능성이 높다. 무조건 쉬려고만 하면 위험하다. 더 쉬고 싶은 욕망에 시달리게 된다. 쉼은 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다. 성경적 안식은 그냥 놀고 쉬는 것만 것 아니다. 더 열심히 일을 하기 위해서 하루 힘을 비축하는 것도 아니다.
성경적 안식은 쉬는 것을 넘어 하나님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초대에 응하는 일이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기쁨 보다 더 큰 것은 없다. 그것이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 안에서만 진정한 안식이 주어진다는 것을 잊지 말라.
*진정한 안식은 어떻게 가능한가?
우선, 안식을 하지 못하는 원인은 과도한 욕망 때문이다.
내려놓는 훈련을 하라. 우리도 모르게 움켜 쥐고 있는 것들이 늘어난다.
살다 보면 계속 짐이 무거워진다. 사람들은 모두 과중한 짐을 지고 살아간다.
만성적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지나치게 붙들고 있는 것이 있다면 내려놓으라.
경계해야 하는 것은 성취욕이고 교만이다.
물질중심의 세상에서 인간은 물질의 지배를 받고 산다.
실제로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성경책 한 권도 돈이 없으면 살 수 없다.
돈을 더 많이 벌면 좀 더 편리해진다. 편리를 추구하는 세상에서 돈은 유혹이다.
더 많이 쓰려고 하면 더 많이 벌어야 한다. 초과근무수당을 좋아한다.
소비욕구가 문제다. 소비욕구를 다루지 않는 한 아무리 벌어도 수입이 소비를 따라갈 수 없다.
우리가 잘 알듯이 인간의 욕구는 끝이 없다. 세상의 기업들은 돈을 벌려고 하는 일이지만 인간의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서 끝없이 노력한다. 새로운 것을 날마다 만들어낸다. 사람들이 쉴 수 없는 이유다. 더 많이 소유하지 않으면 불안해진다. 사람들에게 뒤쳐진다는 강박증에 시달린다.
피로사회다. 활동과잉 시대를 살고 있다.
세상을 정신 없이 따라가면 조용이 병들고 죽어간다. 특히 도시의 삶은 더욱 더 그렇다. 잔인하다.
생산과 소비의 시스템에서 돌고 돌아야 한다. 더 좋은 것을 소유하려는 욕망은 우리를 노예로 만든다. 우리는 과시문화에 젖어 산다. 무엇을 하든지 주변을 의식하는 문화가 강하다. 으스대고 싶다. 그러나 세상에서 추구하려는 그 모든 것이 헛된 것들임을 명심하라.
세상은 인간을 돌리고 돌려 마침내 지쳐 쓰러지게 만든다. 그런데 자세히 드려다 보면 누가 우리를 지치게 하는가? 왜 쉬지 못하는가?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몰아가는 면이 있지만 주범은 우리 자신들이다.
욕구로 가득 찬 자아를 다루지 않으면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에 올라탄 것과 마찬가지다.
진정한 쉼을 가지려고 하면 집착하는 것, 탐욕, 우상들을 제거하는 과감한 시도를 해야한다.
조금씩 포기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포기하려고 하면 자족의 원리를 익혀야 한다. “내가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지금 주어진 것이 하나님이 내게 허락하신 최상임을 받아들이는 태도다.
“지금 이대로 좋습니다”는 고백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이 은혜다. 그때 안식은 찾아온다.
*안식은 믿음으로 가능하다.
일을 멈춘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일을 하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사람이 있다. 당장 먹고 살기도 힘들 때 안식은 먼 이야기로 들려질 지 모른다. 특별히 경제적 상황이 어려울 때 일을 멈춘다는 것은 믿음이 필요하다.
내가 모든 것을 책임지려고 하면 안식은 불가능하다. 염려는 내가 하나님이 되어 있을 때 생긴다.
나 홀로 모든 것을 책임지려고 하면 쉴 수 없다. 우리가 할 있는 한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 다음에는 주님에게 위탁해야 한다. 주님이 일 하실 공간을 내어 드려야 한다.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주님에게 내어 맡겨야 한다.
벧전5:7절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경험한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공급이다
하나님이 매일 아침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신 것을 통한 렛슨은 무엇이었는가?
만나와 메추라기를 쌓아 두지 못하게 하셨다. 내일 또 주실 것에 대한 믿음을 가지도록 훈련시키셨다. 내가 너희들을 책임진다. 하나님에 대한 절대 신뢰를 요구하셨다.
미래가 불안한가? 우리의 미래는 알 수 없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의 미래는 하나님의 손에 있다.
지금까지 내가 공급을 책임져 왔는가 아니면 하나님이 책임을 져주셨는가?
하나님은 모든 공급의 원천이시다. 지금도 하나님이 역사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굶어 죽는다.
겉으로 보면 우리의 수고로 열매를 거두는 것같이 보이지만 아니다. 우리가 땅을 고르고 씨를 뿌려도 거두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시다. 의사가 환자를 수술해도 낫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이다. 99% 우리가 노력을 해도 1%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영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 지 알 수 없다.
하나님의 손에 모든 것을 맡겨라. 창조주 하나님을 신뢰하라. 우리는 6일만 일을 해도 7일동안 죽도록 일한 사람보다 훨씬 더 나은 삶을 살게 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라.
하루 쉰다고 굶어 죽게 하시지 않는다. 손해 보지 않게 하실 것이다. 짧게 보면 손해 보는 것 같을지 모른다. 그러나 길게 보라. 법칙을 지킨 사람이 이긴다.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이긴다.
세상은 죽도록 일하고 먹고 살지만 우리는 쉬면서 일을 해도 먹고 살도록 하셨다. 그것이 복이다. 우리의 인생에는 설명이 안되는 플러스 알파가 있다.
창세기의 하나님은 누구이신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분이다.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서도 상상을 초월하는 일들이 벌어지고도 남는다. 오늘도 내가 열심히 일을 해서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먹게 하셔야 먹는다. 먹는 문제만이 아니다. 건강도, 자녀의 문제도, 직장과 사업도, 우리의 미래 모든 계획도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겨라.
우리의 삶의 중심에 하나님을 모셔라. 우리의 삶의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쉼을 통해서 영혼이 새로워지는 것을 경험하라.
업적, 성과, 평가, 사람들의 시선에서 잠시 비켜나 하나님에게 시선을 집중시켜보라.
안식은 하나님의 품 안에 안기는 경험이다. 안식의 핵심은 예배다.
신약에서 안식 후 첫날,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로 안식의 날이 바뀌었다.
진정한 쉼은 안식의 주인이신 그리스도에게 집중할 때 찾아온다. 하나님을 떠난 안식은 없다
주님을 놓치면 안식에서 멀어진다. 그때부터 삶은 허둥댄다. 무질서하다. 바쁘긴 한데 손에 잡히는 것은 없다. 의욕이 떨어진다. 모든 것이 지루해진다. 일을 쳐내기 바쁘다. 공허해진다.
주님안에서 참된 안식을 경험해보라. 늘 피곤해 지친 사람과는 비교가 안된다.
안식을 통해 강력한 화력이 생긴다. 창의력이 극대화된다. 안식이 축복이다.
혹시 지금 지쳐 있지 않는가? 창조의 리듬이 깨어져 있을 가능성이 높다.
하나님이 안식의 모본을 보이셨다는 것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나님은 일하는 기쁨과 일하지 않는 기쁨을 동시에 소개시켜주신다.
안식은 결코 잊어서는 안될 중요한 창조의 법칙이면서 생명을 위한 리듬이다.
일곱째 날 마다 안식을 해보라. 신기한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
안식의 리듬을 붙들면 이전보다 훨씬 더 파워풀하고 풍성한 삶이 일어날 것이다.
안식에서 샬롬이 임한다. 샬롬이 충만한 곳이 곧 천국이다.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 매일 안식을 경험함으로 천국이 점점 더 커져가는 복을 누리라.
지치고 상하고 망가져 가는 것이 아니라 갈수록 보시기에 아름다운 삶으로 변해 가는 은혜가 있기 바란다.
첫 번째 안식일
창 2장 2~3절 / 피영민목사
서론
기독교를 왕성하게 해주는 두 가지 버팀목이 있는데 이것이 무너지면 기독교는 무너지고 제대로 서 있으면 기독교는 왕성해집니다. 두 가지 버팀목 중 하나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고 또 다른 하나는 성도들이 주일성수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탄은 성경과 주일 성수를 공격합니다.
주일에 관한 진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70세까지 교회를 다녔다면 인생의 7분의 1인 10년 동안 주일성수를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간적으로도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진리입니다. 주일을 ‘Sunday’라고 부르는 것은 태양신을 경배하는 이방 종교에서 기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일을 ‘Sunday’ 혹은 ‘일요일’로 불러서는 안 됩니다. 주일을 ‘Sunday’라고 부르고 온갖 오락, 스포츠, 쾌락으로 보내는 것이 그 사회가 타락했다는 증거입니다. 공무원이 타락하면 주일에 국가고시를 치르고 대학교수가 타락하면 주일에 대학입시를 치르는 것입니다. 주일에는 그런 것을 하면 안 됩니다. 주일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창세기 2장 2~3절의 말씀에서 주일의 참된 의미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먼저 주일은 우리 인간에게 복된 날입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이 6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복을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어떤 복을 주셨는지가 창세기 2장에 나옵니다. 창세기 2장을 보면 하나님이 아담에게 에덴동산을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리고 보기에도 좋고 맛있는 각종 과실을 아담에게 다 공짜로 먹게 하셨습니다.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또 아담이 홀로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하시며 아담을 잠재우시고 갈비뼈를 하나 꺼내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이 에덴동산이라는 환경적인 복도 주시고 가정을 이루어 사는 복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환경과 가정의 복보다 먼저 나오는 복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안식일의 복입니다. 창세기 2장 3절에 보면 하나님이 일곱째 날에 복을 주사 거룩하게 하셨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2000년 동안의 경험을 통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안식일을 잘 지키면 6일 동안 능력(strength)이 오고, 안식일을 범하면 6일 동안 슬픔(sorrow)이 온다.” 이것이 성경에 있는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2000년 동안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하면서 만들어낸 말인 것입니다. 주일은 성도들의 안식일입니다.
Ⅰ. 안식일은 언제 시작되었나?
안식일이라는 제도가 언제 생겼는지는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주의적인 교회에서도 소위 근본주의, 세대주의를 취하는 사람들은 안식일 제도가 시내산에서 모세가 율법을 받을 때 시작되었고 율법시대가 끝나면서 안식일은 지킬 필요가 없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개혁주의에서 안식일 제도는 창조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안식일 제도가 창조 때 시작되었다는 의견과 시내산에서 시작되었다는 의견이 대립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창세기 2장 2~3절을 보면 안식일에 관한 논쟁은 불필요합니다. 하나님이 6일 동안 창조하시던 일을 쉬시고 안식하셨다는데 무슨 논쟁이 필요합니까? 안식일 제도는 창조규례(creation ordinance)인 것입니다. 그리고 창조규례이기 때문에 안식일 제도는 유대인에게만 적용되다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모든 시대에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모세는 출애굽기 20장에서 십계명을 받았습니다. 십계명 중 네 번째 계명에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내용이 있는데 출애굽기 20장보다 4장이 앞서는 16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홍해를 가르는 기적을 경험하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광야를 지나가게 되었는데 마라, 엘림, 신 광야를 거쳐서 시내산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신 광야에 있을 때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제육일에는 그들이 그 거둔 것을 예비할지니 날마다 거두던 것의 갑절이 되리라” (출 16:4~5).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을 것이 없으니까 하나님이 하늘에서 먹을 것을 내려주십니다. 그런데 이것을 한 오멜씩 거두되 여섯째 날에는 두 오멜을 거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제칠일에는 안식일이니 거두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출애굽기 20장에 모세가 십계명을 받았는데 그보다 더 앞선 16장에 벌써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일이 무엇이냐고 묻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 제도는 창조 때부터 있었던 제도였고 출애굽기 20장에 와서 모세를 통해 기록된 것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그것이 죄인 줄 알았습니다.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그전에 살인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법이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또, 애굽 왕 바로도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범하려고 하다가 이것이 죄인 줄 알고 돌이켰습니다. 애굽 왕 바로가 간음이 죄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하나님이 창조 때부터 하나님의 거룩한 법을 인간의 마음속에 심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도덕법은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문서로 만들어졌지만 그때부터 존재하고 시작된 법은 아닙니다. 창조 때부터 하나님이 아담의 마음속에 심어주셔서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십계명이 하나님의 거룩한 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네 번째 계명인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도 창조 때부터 모든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거룩한 도덕법입니다. 안식일 제도가 유대인의 제도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신약시대에 와서는 안식일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안식일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십계명 중 4계명이 폐지되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그들은 안식일 대신에 주일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야 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안식일과 주일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주일은 성도들의 안식일입니다. 마틴 루터와 존 칼빈도 이런 면에서는 잘못 이해했습니다. 안식일과 주일이 다르다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후대의 청교도 학자들이 안식일과 주일이 같다고 주장했고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네 번째 계명은 영원토록 타당한 하나님의 도덕법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저는 이 문제에 관해서는 청교도들의 사상이 옳다고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신약성경 어디에도 십계명 가운데 한두 가지는 폐지되었다고 말씀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십계명 가운데 두 번째 계명이 폐지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두 번째 계명을 빼버리면 아홉 개밖에 안 남으니까 열 번째 계명을 둘로 나눠서 ‘네 이웃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를 9계명으로 ‘네 이웃의 집을 탐하지 말라’를 10계명으로 만들었습니다. 자기들 마음대로 변경한 것입니다. 하지만 십계명은 변경되지도 않았고 폐지되지도 않은, 우리 모두에게 타당한 하나님의 법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마 5:19). 2계명이든 4계명이든 없어졌다고 가르치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긴 하지만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마 5:17). 신약성경 어디에도 네 번째 계명인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가 폐지되었다고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식일을 지켜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 안식일 제도가 유대인만을 위한 제도라고 주장하는 세대주의자들은 이렇게 공격합니다. 구약시대에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돌로 쳐서 죽였는데 신약시대에는 안식일을 범한다고 해서 죽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 제도도 없어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언뜻 들으면 그럴듯합니다. 하지만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율법에 세 종류가 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첫째, 도덕법입니다. 십계명과 같이 변하지 않고 영원토록 타당한 하나님의 법입니다. 둘째,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교를 위한 의식법입니다. 제사 지내는 것과 제사장에 관한 법, 절기에 관한 법 등이 있는데 이런 것들은 예수님이 다 완성하셔서 폐지되었습니다. 셋째, 시민법입니다. 시민법은 신정국가로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갖고 있는 민법과 형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A.D. 70년 로마에 의해서 멸망했기 때문에 대상이 없는 시민법은 더 이상 효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율법은 도덕법이고 안식일을 어긴 자는 돌로 쳐서 죽이라는 율법은 신정국가인 이스라엘의 시민법입니다. 시민법은 사라졌고 의식법은 폐지되었지만 거룩한 도덕법인 하나님의 십계명은 창조 때부터 인간의 마음에 심겨져서 시내산에서 모세가 문서로 만들었고 지금도 믿는 자나 안 믿는 자 모두에게 해당되는 법인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들은 십계명을 안 지켜도 됩니까? 아닙니다. 십계명을 지켜서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만 십계명은 성화의 표준으로서 우리에게 영원토록 타당한 법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도적질하면 됩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안식일을 어기면 됩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십계명은 오늘날 성도들에게도 타당한 법입니다.
Ⅱ. 그리스도인들은 왜 토요일 안식일을 주일 안식일로 바꾸었는가?
바울은 안식일을 지키되 안식일을 토요일에서 주일로 바꿔서 지켰습니다.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 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행 20:7). 바울은 주일에 설교를 하는데 30분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아침부터 시작해서 밤중까지 했습니다.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고전 16:2). 그리고 매주 첫 주일에 그동안 얻은 이익으로 헌금하게 했습니다. 바울은 주일에 설교도 하고 헌금도 하게 한 것입니다. 토요일에 지키던 안식일을 왜 주일로 바꿨느냐? 누구의 권위를 따라 바꿨느냐?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안식일을 누가 바꿀 수 있습니까? 안식일의 주인만이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안식일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또 가라사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더라” (눅 6:5). 안식일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이니라” (사 58:13~14).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안식일을 나의 성일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의 요일을 바꿀 수 있는 권세는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성만찬을 바울은 주의 만찬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권세를 가지고 제정하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주의 날은 예수님이 권세를 가지고 제정하신 날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켰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주일을 안식일로 지켰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성도들은 왜 주일을 안식일이라고 부르지 않았느냐?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사람들이 혼돈할 수 있기 때문에 A.D. 70년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나서부터 주일을 안식일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안식일의 요일을 바꾸셨느냐? 구약시대에는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이 창조를 마치고 쉬신 날이 토요일이기 때문에 창조를 기념해서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킨 것이고, 신약시대에는 창조(creation)보다 더 큰 구원사역(recreation)을 마치시고 쉬신 날이 주일이기 때문에 주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왜 날짜를 바꾸셨냐고 말할 권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안식일의 주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시므로 구약시대에 하나님이 창조를 마치고 토요일에 안식하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을 마치고 부활하셔서 주일에 안식하셨기 때문에 주일이 우리의 안식일이 된 것입니다.
Ⅲ. ‘안식’이라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첫째, 하나님이 안식하셨다는 말은 하나님이 피곤해서 쉬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피곤을 모르는 분입니다. “땅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사 40:28). 우리 인간은 피곤을 느끼지만 하나님은 피곤치 아니하십니다. 둘째, 하나님이 안식하셨다는 말은 하나님이 아무 일도 안 하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안식일에 아무 일도 안 하시면 피조물이 어떻게 보존되겠습니까? 하나님은 일분일초도 쉬지 않으시고 만드신 피조물을 유지하고 보존하며 통치하시는 섭리의 일을 계속하십니다.
예수님이 베데스다라 하는 못에서 삼십팔 년 된 병자를 고치자 유대인들이 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냐며 예수님을 공격합니다. 삼십팔 년 된 병자를 고친 것에 놀라거나 감격하는 대신 안식일에 병을 고쳤다며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요 5:16~17). 아버지께서도 안식일에 일하시니까 예수님도 일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이라는 것은 아무 일도 안 한다는 의미가 아니고 지난 6일간 행하던 일상적인 일을 쉬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6일 동안 장사하던 사람은 안식일 날 장사를 쉬어야 합니다. 수입이 줄어든다고 해도 쉬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일에 장사를 하면 그것이 슬픔이 되기 때문입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벌면 됐지 많이 벌지도 못하면서 주일까지 돈을 벌려고 하십니까? 돈을 많이 못 버니까 주일도 장사해야 된다고 하는데 그게 아니라 주일도 일을 하니까 돈을 못 버는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어떤 사람을 전도했는데 그 사람은 프리마켓(벼룩시장)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프리마켓은 주말에만 장사를 합니다. 옆에 있는 사람을 전도하다가 이분이 듣고 믿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교회를 나오려고 하니까 주일에 장사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주말에만 장사하니 장사를 안 할 수는 없고 일꾼을 고용해서 맡겨놓고 예배에 나오게 되었는데 이분이 예배를 드리는 사이 흑인 몇 사람이 와서 물건을 다 사버린 것입니다. 그 후로는 이분이 예배를 빠지지 않고 나오셨습니다.
안식일은 6일 동안 하던 일상적인 일을 쉬고 영적인 일을 하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일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 예배하며 하나님을 생각하고 기도하는 날로 지켜야 됩니다. 영적인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어차피 주일을 안식일로 지켜 예배를 드리는데 맨 뒷자리에 앉아 있다가 축도도 끝나기 전에 나가버리지 마시고 이왕이면 적극적으로 영적인 일을 하시기 바랍니다. 교회에 와서 성가대도 하시고 봉사도 하시고 교사도 하시고 여전도회도 하십시오.
우리 성도들이 주일을 구별해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천국의 안식을 미리 맛보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에게는 들어갈 안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천국입니다.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히 4:9).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었느니라” (히 4:3).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자는 현세에서도 안식일을 지키며 천국의 안식을 미리 맛보다가 내세에도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결론
현세에서 주일성수를 생각도 하지 않는 불신자들은 영원한 안식에도 들어가지 못합니다. 등산 가느라 골프 치느라 장사 하느라 결혼식에 가느라 주일성수를 하지 않는 것은 슬픔을 초래하는 일이고 죄입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6일을 주셨는데 6일 동안 직장에 휴가내고 등산 가지 왜 하나님에게 드려야 할 주일에 가냐는 것입니다. 6일 동안 무엇을 하든지 그것은 자유입니다. 하지만 주일은 하나님에게 드려야 됩니다.
성도들은 주일성수가 이렇게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을 알고 주일성수를 목숨처럼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주일성수는 하나님의 도덕법인 십계명 중 4계명을 지키는 것임을 알고 자신뿐만 아니라 자녀들에게도 주일성수를 가르쳐야 되겠습니다. 주일에 놀러다니지 마시고 주일성수를 해야 기독교가 우리 사회 속에서 계속 뿌리를 내리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일성수를 제대로 하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모든 복을 주실 것입니다. 왜 우리 성도들이 물질, 자녀, 건강의 복을 누리지 못하는지 아십니까? 주일성수를 엉터리로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모두 주일성수를 목숨처럼 여기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