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과의 위치 / 조정인
그 윗가지 그 옆가지 그 아래가지에 문득문득 새처럼 날아 앉은
푸른 모과들
깃 치는 소리 낮게, 더 낮게 내려앉은 모과의 동쪽은 지금
스스로 벅차오르는 기쁨의 위치
사물이 지닌 기쁨의 흘수선을 파드득 치고 날아오르는 조무래기 천사
발뒤꿈치를 좇다가 놓치고 들어온 이후
잎사귀 사이 모과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모과 쪽으로 얼굴을 돌려
모과만을 보여주었다 풀밭에 내려앉은 까치가 호젓한 하느님에서
훌쩍, 까치 쪽으로 건너뛴 이후처럼
선반 위의 퉁명한 모과는 어느 날 불쑥 한 덩어리 의혹을 내밀며
갈색 반점으로 뒤덮인 살덩이 쪽으로 옮겨 앉는다
지층의 그늘을 표면으로 다 우려낸 지상의 마지막 얼굴 같은 모과는 지금
갈애를 품은 심장의 위치 또 어느 날의 모과는 요절한 시인의 초상처럼
외로 기울어 너머의 시간을 다 이해한다는 식인데
한 고요가 한 고요에게 건너오는 이 수평적 평온은 어디서 오나
온몸으로 서쪽인 모과와 함께 어떤 어슴푸레한 꿈속을 천천히 건너가는
매우 가볍고 황홀한 춤의 저물녘
빛이 싹트는 방향 멀리, 눈 쌓인 나목 그 윗가지 그 옆가지 아래 가지에
모과의 동쪽이 벌써 와 있다
[출처] 모과의 위치 / 조정인|작성자 동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