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달 아사녀 영원의 사람
석가탑은 왜 유명한 걸까요?
석가탑이 유명한 가장 큰 이유는 축조 당시와 관련되어 내려오는 이야기 때문입니다.
당시 아사달은 백제 사비성에서 이름을 날리던 석공이었어요. 그는 아사녀를 아내로
맞이하여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죠.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신라의 김대성이
불국사를 창건하고, 당시 가장 뛰어난 석공이라 알려진 아사달을 초빙해 석탑을
만들어달라고 합니다.
그렇게 시작된 석가탑,
온 정성을 기울이던 아사달은 3년이란 시간을 탑 완성에 쏟아 부었고, 그리움에 사무치던
아사녀는 남편을 찾아 먼 길을 떠나게 되요. 힘들게 백제 땅을 건너 신라를 찾아왔지만,
탑이 완성되기까진 여성을 들일 수 없다는 금기로 인해 남편을 만나지 연못하고, 날마다
불국사 앞을 서성이기만 했죠. 잠깐이라도 남편의 얼굴을 보기 위해 잠시도 쉬지 않고
불국사 앞을 서성이는 아사녀, 이를 보다 못한 스님이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그마한 연못이 있소. 지성으로 빈다면 탑 공사가 끝나는 대로 탑의 그림자가 연못에
비칠 것이오. 그러면 당신의 남편을 볼 수 있을 겁니다.”
이튿날부터 아사녀는 온종일 연못을 들여다보며 탑의 그림자가 연못에 비치기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탑의 그림자는 나타날 줄 몰랐고, 하염없이 기다리던 아사녀는 고향으로 돌아갈
기력조차 잃어버리고 남편의 이름을 부르며 연못에 몸을 던졌다고 해요. 탑을 완성한
아사달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연못으로 달려갔지만 이미 아내는 몸을 던진 뒤, 슬픔에
빠진 아사달은 바윗돌에 아사녀의 모습을 새기기 시작하는데요. 그 모습이 점차 인자한
부처님의 모습으로 보였다고 하죠. 불상이 완성되고, 아사달 역시 연못에 몸을 던지고,
후일 사람들은 그 연못을 ‘영지’, 끝내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은 석가탑을 ‘무영탑’이라고
불렀습니다.
석가탑과 다보탑
오랜 시간 신라를 대표하는 탑으로 존재하며, 너무나도 슬프고 아름다운 사랑이야기가
전해지는 석가탑과 형제처럼 오랜 시간을 함께해 온 다보탑이지만 이 두 탑 사이에는
한가지 논란이 존재하고 있어요. 그 이유는 ‘아사달’ 때문이죠. 석가탑하면 빠질 수 없는
것이 다보탑! 백제 석공 아사달이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석가탑이 신라양식인 반면,
다보탑은 미륵사지 석탑처럼 목조 건물 양식과 계단을 가진 전형적인 백제 탑의 모습인
것이죠.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석가탑이 아닌, 다보탑을 아사달이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어요.
또한 1903년 일본의 학자 세키노가 쓴 ‘한국 건축조사보고’에는 다보탑을 무영탑이라고
표기한 것을 찾아 볼 수 있어요. 아사달과 아사녀의 사랑이야기가 전해지는 무영탑은
석가탑이라 알고 있었는데요. 단순히 기록상의 실수였을까요? 아니면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던 무영탑은 사실 다보탑이었던 걸까요? 점점 우리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데요.
전문가들은 이번 해체 수리작업으로 어느 정도 논란이 해결되기를 바라고 있다고 해요.
보수 중이기 때문에 한동안 우리 석가탑의 완전한 모습을 볼 수 없는 점은 아쉽지만,
오랜 시간 우리를 위해 모진 비바람 맞으며 버텨온 석가탑이 우리에게, 그리고 우리의
후손에게 다시 건강해진 모습으로 나타나도록 함께 응원합시다!